소설리스트

외전 2 ~side story No.2~ (17/18)

외전 2 ~side story No.2~

빠아앙-.

신경질적인 자동차 경적소리에 깜짝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부웅 소리를 내며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앞을 스쳐가는 자동차 바람의 공기가 매캐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눈을 끔벅이던 그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 신호등을 쳐다봤다. 빨갛거나 깜빡이기는커녕 갓 켜진 새파란 신호등 색을 확인하자마자 이제는 저 멀리 사라져가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자동차에 손가락질을 하며 욕을 내뱉었다.

야, 이-.

몇 마디 내뱉지도 않았는데 파란불이 깜빡이기 시작한다. 서둘러 길을 건너며 저쪽을 보니 지랄맞은 자동차는 신호에 걸려 정차해 있다. 어차피 신호에 걸릴 건데 운전 그딴 식으로 할 거냐! 저 운전자가 볼 리도 없는 데다 남들 보기에는 허공에 삿대질밖에 되지 않겠지만 오갈 데 없는 분노는 제때 표출하지 않으면 탈이 난다는 것을 온몸으로 겪었으니 욕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신호등 아래 깜빡이는 숫자가 한 자릿수가 되자 화들짝 놀라 길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닐봉투의 내용물이 유난히 무겁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다소 어두운 집이 자신을 맞이한다. 현관 등을 켜자 고요한 집에서 나는 잡음이 거슬린다. 조금 뒤에는 알아서 꺼질 것이고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을 알기에 신발을 대충 벗어던지고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비닐봉투를 던져놓고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부터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장마가 오네마네 하면서도 비가 제대로 내린 적이 없는 날씨는 습하기만 엄청나게 습해서 등은 이미 땀으로 축축해져있다. 생수통을 반이나 비우고 나서야 에어컨을 켤 만큼의 정신도 돌아왔다. 에어컨 아래에 서서 찬바람을 한참 맞는다. 집은 금세 시원한 바람에 감싸인다.

비닐봉지를 뒤적이며 장을 봐온 것들을 하나씩 꺼내는데 익숙한 벨소리가 들린다. 아니, 사실 아직도 낯설다. 벨소리는 익숙한 음악이었지만 네모반듯한 데다 유난히 큰 기기 자체에는 그다지 익숙해지지 않아 어색하게 폰을 쥐고 귀에 댔다. 볼에서는 약간 떨어뜨린 채였다. 통화를 하다 볼로 몇 번이나 중간에 끊어먹었는지 모르겠다.

“여보세요.”

[정운아~ 밥 먹었니?]

익숙한 목소리에 잠시 멈췄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누가 전화했는지는 전화가 걸릴 때부터 알려주지만 왠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확인하게 된다. 글자와 숫자로만 보이는 존재감은 영 익숙하지 않다.

“아, 엄마. 안 그래도 지금 하려던 참이야.”

[뭐 해 먹을 건데?]

“엄마 반찬이랑 김치랑 계란찜이랑 스팸? 어어…… 김치찌개도.”

[어휴……그렇게만 먹고 사람이 살겠니. 엄마가 반찬 좀 해서 보내줄게.]

“이거 반은 엄마가 해준 반찬이거든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괜찮아. 이 정도면 혼자 살면서 수준급으로 해 먹는 거다?”

[내가 맘이 안 편해서 그래. 장아찌도 담갔고 아빠가 너 먹으라고 홍삼이랑 산삼배양액도 사놨으니까 같이 보낼게. 택배 잘 받아.]

“불러주는 게 다 노인네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나보단 엄마랑 아빠가 더 가깝지 않아?”

[세상에~ 부모가 자식 생각해서 이것저것 챙겨준다는데 말본새 좀 봐, 어머어머!]

“알았어, 알았어요. 택배 보내고 전화해. 근데 그거 알아야 해. 나 요즘 살찌고 있다고. 엄마 반찬 때문에!”

[반찬 핑계 대지 말고 운동해! 건강한 밥은 살 안 쪄. 요즘 아이돌들이 무슨 단백질 챙겨 먹는다는데 그것도 사줄까? 우리 아들 몸짱 돼야지.]

“그것도 쓸데 있는 사람이나 먹는 거지. 날 근육덩어리로 만들려고 하지 말고. 그런 거 안 먹어도 엄마 아들 잘생겼으니까 이만 끊어요. 뱃가죽이 등짝에 들러붙어!”

[걱정해줘도 이런다! 자식새끼 키워봤자 다 헛거라더니!]

“몰라, 몰라. 끊어!”

이대로 두면 몇 시간이고 전화를 끊지 않을 기세였기에 결국 전화를 먼저 끊은 것은 그였다. 따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걱정하는 것을 이해했고 미안한 마음에 끝까지 받아줬지만 통화시간이 평균 두 시간을 찍고 아빠며 동생이며 적당히 끊어도 된다는 조언을 해준 이후에는 통화는 짧게 끊고 있었다-정작 본인들도 끊임없이 문자를 한다-. 대신 지겹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먼저 하고 있으니 서운하지 않기만을 바라야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봉지를 뒤적여 쪽파부터 꺼냈다. 싱크대 문을 열어 칼을 꺼내려던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문을 닫고 가위를 집어 쪽파를 썩둑썩둑 자르기 시작했다. 못나게 잘린 쪽파가 뚝배기 안으로 떨어졌다. 그 위로 계란 세알을 투척하고 거품기……는 왠지 멀어서 젓가락을 집어 살짝 벌리고 신나게 계란을 젓기 시작했다. 어차피 배 속으로 들어오면 다 섞일 건데 격식 따질 필요 있나. 싱크대 옆의 요리책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다.

뚝배기를 올리고 밥통을 열어 밥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후 찌개도 덥히기 시작했다. 봉투에 아직 정리되지 못한 것들을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하다 보면 아직도 먼 현실감에 잠시 멍해지곤 한다.

가끔 저쪽 세계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환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곳과 이곳은 너무 다르다. 이곳에도 전쟁은 존재했지만 자신과는 아주 먼 곳에 있었고 예상하기 힘든 죽음이라는 것을 직접 볼 일은 거의 없었다. 치열하고 바쁘게 살아야 했던 그곳과는 다르게 이곳의 자신은 갑자기 주어진 많은 시간에 당황하고 있었다. 정말로 꿈을 꾼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엔 남겨진 흔적들이 너무나 선명하다.

다시 돌아왔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아직 잊지 못했다. 채 일 년도 되지 않은 일이었다.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절벽의 아찔한 높이를 알고 있는 상태로 그곳으로 몸을 던진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그만큼 지쳐있기도 했었다. 뛰어내리지 않으면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망설임은 사라졌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후 이제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운에 맡긴 순간…… 뚝 떨어진 곳은 인도 한복판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광경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아주 한참 후에야 그때 떨어진 곳이 도로 한복판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그런 것 따위 생각나지 않고 현대의 옷 사이에서 굉장히 고풍스러운 판타지 복식 그 자체인 자신의 옷이 부끄러워서 콱 뒈져버리고 싶었거든. 그 순간 든 생각은 차라리 근처에 카메라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별의별 드라마가 다 있으니 차라리 무슨 촬영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심지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은 진검이었다. 불법 무기소지죄로 붙잡혀 가지는 않을까 생각한 순간 그는 순식간에 본래의 세계로 섞여 들어왔다. 그 순간 쪽팔림도 배가 되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해. 생각했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전에는 곳곳에 있었던 공중전화가 전혀 눈에 띄지 않아 어두운 골목을 타고 큰길을 기웃거려야 했다. 용케도 공중전화를 찾아 광고를 보고 콜렉트콜을 시도했다. 그리고 큰 문제를 발견했다. 집 전화번호를 까먹었다. 맙소사. 세상에…… 가족에 대한 것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번호를 기억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이었다. 

결국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찾아간 곳은 파출소였다. 파출소에 들어간 순간 자신을 향한 시선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정신병자를 보는 듯한 눈은 잊기 쉬운 것이 아니지. 그러나 정말로 그 옷을 입고 돌아다닐 자신이 없었다고.

가물거리는 자신의 이름 석 자와 주민등록번호를 부르고 지문을 찍은 후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파출소 한구석에 앉아 망토를 벗고 얌전히 앉아있으면서 든 생각은 ‘진작 망토 벗을걸.’이었다. 망토를 벗고 난 옷은 위아래로 검은 평범한 옷이었고 그렇게까지 튀지 않았다. 망토가 문제였던 것이다. 진짜 가죽바지는 눈에 좀 띄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들킬까 봐 슬그머니 망토로 잘 감싸두자 친절한 경찰관이 핫초코를 타서 가져다 줬다. 작은 친절에 새삼 눈물이 핑 돌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행히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사라지고 나서 가족들은 실종신고를 해놓은 상태였는지 경찰관이 키보드를 타닥타닥 거리고 얼마 있지 않아 이리저리에 전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멍하니 자리에 앉아 파출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관이 가족을 찾았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몇 시간 후에 파출소 문이 열리며 아빠가 뛰어 들어왔고 잠시 후에는 엄마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생까지 들어오자 훌륭한 가족상봉의 시간이 이루어졌다. 그때가 돼서야 정말로 실감했다. 아, 돌아왔구나.

그 이후에는 별다른 것들은 없었다. 저쪽 세계에서 6년을 지내고 왔다 한들 이곳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오랜만에 돌아왔다고 해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심받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했고 그 결과 대충 기억상실이라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물론 병리학적인 것이 아닌 가족 자체 내의 진단이었다. 병원에 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는데 그는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니 심리적인 충격으로 일시적인 기억상실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애매한 답을 내줄 수밖에. 궁여지책으로 나온 결론이었지만 가족들은 이미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라엘은 한정운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과정은 큰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큰 문제는 돌아오고 난 이후의 모든 것들이었다. 스무 살에 사라진 그는 스물여섯에야 다시 돌아왔고 그동안에 했어야 하는 것들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판타지 세계에서는 왕자의 그림자라는 역할이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학생도 사회인의 어떤 역할도 가지지 못했다. 실종기간이 오래되다 보니 당연한 수순으로 학교는 퇴학처리가 됐다. 억울하다. 저 학교를 들어가려고 고등학교 내내 무슨 고생을 했는데! 하지만 역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쿨하게 포기했다.

다행인 것은 차원이동까지 한차례 겪은 후였기 때문인지 적응하는 속도는 빨랐다. 처음에는 적어도 일이 년은 가족들과 같이 지내면서 적응부터 하려던 계획은 반년 만에 혼자 자취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가족들에게는 계획이 있었고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옛말은 정말로 옛말이었다. 십 년이 뭐야. 이미 강산이 네댓 번은 바뀐 것 같은데. 그래도 그럭저럭 적응했다고 생각했을 때 든 생각은 학교였다. 졸업장이라도 따려면 다시 학교에 들어가야 하니 재수를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고 부모님이 권유한 것이다. 

현역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재수인데 이 나이를 먹고 하려니 학원에 가는 것이 부끄러웠다. 결국 학원은 한 달 다닌 후 그만뒀다. 첫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자마자 내린 결정이라 부모님도 흔쾌히 허락해줬다. 시선이 모이는 것이 아직 불편한 자신을 배려한 것이리라. 

모의고사 성적이 잘 나왔는데도 괜스레 시무룩해졌다. 그쪽에서 얼마나 굴렀으면 머리가 옛날보다 똑똑해진 것 같지?

학원에 나가지 않게 되면서 외출은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꼭 필요한 생필품을 살 때를 제외하고는 바깥에 잘 나가지 않게 되자 재수생이라는 것을 빼면 딱 히키코모리이다. 차원이동 전에도 사회적 문제였던 이것은 여전히 사회적 문제네? 그런데 이게 꼭 내 이야기다. 덤으로 캥거루족이라는 단어까지. 아니야, 나는 공부를 하고 있어. 아직 학생이지! 그러나 딱히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저쪽 세상에서는 몹시 바빴었다. 이쪽 세상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바빴다.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오로지 저만 느릿느릿 물속을 걷는 것 같았다. 걸음걸음이 느리고 무거운 것이 답답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답답함에 숨이 막힐 때면 문득 저쪽에 남겨두고 온 것들이 생각나기에…….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자신은 한정운, 정운일 뿐 라엘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그림자인 라엘은 다니엘이 사라졌을 때부터 이미 함께 흐트러졌다. 그리고…….

“으……. 집중 안 되게.”

결국 그대로 상 위에 엎드렸다. 코끝에 인쇄된 종이 냄새가 훅 올라온다. 이곳이 현실인데 어째서 나는 저쪽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신 차리자. 벌써 여름이다. 몇 달 남지 않은 수능만 생각해도 시간은 촉박하다. 그러나 시원한 바람이 등짝에 닿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진다. 이럴 때 생각나는 명언이 하나 있지.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하지 말지어니.

오늘은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자 다리에 힘이 벌떡 들어간다. 그러나 쉬기로 결정한 이상 문제집을 다시 돌아보지는 않는다. 당당하게 냉장고로 걸어가 아이스크림을 고르는데,

털썩.

등 뒤로 웬 쌀가마니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뭐가 넘어진 거지, 하는 생각에 뒤를 돌아봤던 그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좋아, 침착하자. 하나, 둘, 셋.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역시 지금 뭔가 잘못 본 것 같다.

고개운동을 다섯 번 정도 한 후에야 마음을 다잡고 몸을 돌릴 수 있었다. 눈을 비볐지만 역시 환상이 아닌 것 같다. 정말로 내가 미쳐버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정말로 미친놈이 떨어졌거나.

익숙하고 고풍스러운 자수가 수놓인 망토가 가장 먼저 보인다. 눈부시게 희게 빛나는 은발이 바닥에 펼쳐져있다. 하지만 괜찮아. 진정해. 얼굴을 아직 확인하지 않았잖아? 그냥 은색 머리통을 가진 어떤 사람이 어쩌다 보니 여기 떨어졌을 수도 있지. 세상은 아직 신비로운 일로 가득하단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사실을 중얼거리며 꿈쩍도 하지 않는 남자의 몸을 발로 굴렸다. 정신을 잃은 것이 확실한 듯 어떤 저항도 없이 데굴데굴 굴러가는 몸에서 얼굴을 확인한 이후 남은 것은 절망이었다.

정말 아주 잠깐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이러깁니까? 저쪽 세계의 신을 실컷 욕했었으니 이번에는 이쪽 세계의 신을 욕할 차례였다.

참으로 당연하게도 남자는 황제, 레온이었다.

한동안 말을 잃었다. 어째서 저 인간이 이곳에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 정신을 잃은 것이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뒤에 떨어질 수가 있는 거지, 라는 생각까지. 그의 등장에 굉장히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레온이 깨어나기 전에 잘 가져다 버릴 수 있는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그가 눈을 뜬 것은.

여전히 보석같이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레온은 말했다.

“보고 싶었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그의 마음처럼 자신의 답도 정말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누구세요?”

이건 이해해줘야 한다. 척추반사에 가까운 반응이어서 사실 스스로도 당황했으니. 당연히 레온도 당황했다. 쌍수 들고 환영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런 반응은 생각 외의 것이었다. 자신을 보자마자 검이라도 겨누고 찌를 줄 알았는데…….

“라엘?”

“저기, 누구를 찾으시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라엘……. 많이 화가 났겠지만…….”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 거라면 사람 잘못 찾으신 것 같습니다. 한정운이라고 합니다만?”

“이쪽의 이름이야? 어울려.”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네요.”

“라엘…… 왜……. 아아, 마지막에 내게 많이 화가 나서 지금 나를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전 당신 처음 봐요.”

“어……?”

“지금 제 집에 무단침입하신 거거든요?”

레온은 더 크게 당황했다. 사라진 라엘을 찾아 헤매다 결국 그의 흔적을 따라 차원을 넘어왔다. 그러나 눈앞의 라엘은 자신을 완전히 기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라엘이 아닐 가능성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외모뿐 아니라 그는 라엘 그 자체였다. 자신의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레온은 지금까지 그 본능 하나로 라엘을 쫓아온 이였고 지금 그를 앞에 두었다. 제삼자 입장에서야 세상 무엇보다 정확한 본능이었지만 정작 당사자가 아니라고 이렇게 부정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혹시 차원이동을 하면서 충격으로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닐까? 문득 떠오른 가정에 레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오로지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차원을 건넜건만 당사자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라엘이 자신을 보자마자 욕을 하며 죽이려 한다고 했다면 마음이 더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을 조금 놀란 눈으로 봤을 뿐, 그 뒤로는 매우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이야기가 도돌이를 찍는 것에 피곤함을 느낀 듯 한숨을 쉬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따라 일어나려고 하는데 앉아있으라 손짓한다. 그대로 앉아 그가 하는 양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얇은 옷을 가지고 왔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옷 갈아입으세요. 경찰에 데려다드릴게요.”

“경……찰?”

“예. 집을 찾아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그 옷을 입고 가면 집을 찾아주는 것보다 정신병원에 가는 게 더 빠를 것 같으니까요.”

“아니, 난…….”

경찰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라엘은 자신을 내보내려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라엘은 따뜻했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말했다. 그것은 정말로 타인을 대하는 태도인지라 레온의 심장이 옥죄어온다.

한참을 머뭇거리며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자 그가 한숨을 내쉰다. 그야말로 땅이 무너지는 기분이라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를 강제로 데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만약에 정말로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그를 지금처럼 대하고 싶지 않다. 처음부터 제대로 관계를 쌓고 싶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도록……. 

망설임은 길었지만 그것을 끝까지 기다려 줄 정도로 상대방은 자신을 존중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지.”

“…….”

“바로 경찰에 가는 것은 힘들어 보이니까 며칠 정도는 있어도 괜찮아요. 찾고 있는 사람이 있겠지.”

차갑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에게 레온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그는 자신을 잊어버린 걸까? 그렇지 않다면 다시는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아 이러는 걸까. 

오직 그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정작 다시 만난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그가 자신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제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고 아니, 정말로 다른 사람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중하고 싸늘했다. 

손에 억지로 건네진 얇은 옷을 만지작거리며 레온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옷은…….

“속옷은 입고 있는데…….”

“옷인데요?”

그는 기막혀했고 레온은 진심으로 놀랐다.

“어…… 어떻게 이런 홑옷을 입고 다닐 수가……!”

“…….”

그리고 눈앞의 사랑스러운 이를 자세히 보면 그 홑옷만 걸치고 있다. 볼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더 이상 말을 섞는 것도 귀찮다는 듯 그는 손을 휘저으며 방을 가리켰다. 방 안의 공기는 서늘했고 굳이 이런 얇은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는가 싶었지만 그래도 라엘이 준 옷이니 군소리 없이 갈아입기로 했다. 방 안에 들어가서 망토를 떼어내고 몸에 걸치고 있던 무거운 것들이 툭툭 바닥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온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라엘은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어째서 저 인간이 지금 여기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되돌려 보내야 했다. 어떻게 되돌아갈 수 있는지는 레온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을 데리고 저편으로 돌아가려고 온 것일 테니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왔을 리가 없다. 그가 돌아가기 전까지 자신은 절대로 라엘이 아니어야 했다. 자신이 라엘인 것을 아는 순간 그가 돌아갈 리는 없었고……

그 순간 방 안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레온이 방 밖으로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라엘! 라엘 맞잖아!”

“무슨 소리……!”

그리고 레온의 손에 들린 왕가의 보검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망할.”

한정운은 라엘이다. 그것이 들킨 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은 각자의 생각으로 번뜩였고 그것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가 예상한 행동으로 옮겨졌다.

레온은 팔을 뻗어 라엘을 붙잡으려 했고 그는 재빠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 그 팔을 피했다. 팔을 피한 순간 스산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아주 잠시 후에는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레온은 라엘에게 몸을 날렸고 아쉬운 일이지만 그것을 피할 만큼 거실은 넓지 않았다. 라엘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고 그 와중에도 아래에 깔리지 않기 위해 레온을 밀어 그 위로 올라탔다. 그리고 직후에는 레온이 그렇게 했다.

둘은 엎치락뒤치락하며 바닥을 굴렀다. 남자 둘이 거실을 구를 때마다 물건들이 밀리고 깨지고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돈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라엘은 그것에 신경 쓸 여유가 전혀 없었다. 미친 사자가 제 목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는 손바닥을 거칠게 쳐내는 김에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얼굴을 얻어맞은 레온이 충격으로 잠시 휘청거리는 사이 라엘은 몸을 빙글 돌려 그의 아래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비틀거리며 물러서자 단단한 것이 등 뒤에 닿으며 쿵 소리가 난다. 베란다의 샤시가 휘청거린다.

거친 숨을 가다듬으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철천지원수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매서운 시선들이었다.

“미쳤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라엘이었다. 아 참. 저 인간 미친 거 맞지. 그런데 아무래도 계속 미쳐있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시 만나자마자 사람 목부터 조르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레온은 매우 기뻐 보였다. 아, 진짜 미친놈.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지 뭐야, 라엘. 이렇게 앙큼한 모습도 있었네.”

“와- 징그러워요.”

“인사가 좀 늦었네. 다시 만나서 반가워, 라엘.”

“저한테는 악몽이네요.”

“그래? 난 그렇지 않은데.”

차라리 꿈이라고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은 턱 선을 따라 흐르는 땀방울이 알려주었다. 악몽보다 더한 게 현실이었다.

“모르는 척 좀 했다고 목을 조르는 건 또 뭔데요.”

“발견했으니 데려가야지.”

“그거랑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나를 모르는 척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곱게 따라올 것 같지가 않아서. 일단 기절만 시키려고 한 것뿐이었으니 걱정 마.”

“하하. 미친.”

저 미친놈한테는 따로 붙일 단어도 녹록하지 않다. 말이 오가긴 오가는데 그게 다 헛소리다 보니 이게 대화라고 명명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다른 말을 붙일 수가 없으니 그냥 대화는 대화라고 하겠는데……. 

그 빌어먹을 대화가 오가는 동안 라엘은 슬그머니 바닥을 더듬었다. 조금 전 언뜻 봤던 것이 다행히도 손에 잡혔다. 그것을 잽싸게 끌어당겨 품에 안자 레온의 눈이 낭패에 젖었다. 왕가의 보검이 저쪽 세계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딸려 이곳까지 왔지만 이 세계에서는 자신을 살릴 유일한 것이 되었다.

“날 벨 건가?”

“당신에게서 내 몸을 지킬 도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정말로 죽일 각오가 아니라면 차라리 내려놓는 것을 권할게. 네가 진심으로 그리한다면 나도 널 온전한 몸으로 데려가겠다는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으니, 부탁할게.”

곱게 말하기는 하는데 내용은 그거 아닌가? 어디 하나가 잘리거나 어떻게 되도 일단 데리고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거. 아주 살벌하시네.

“하하. 당신에게 칼을 들이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뻔한데 제가 왜요?”

라엘은 슬프게도 그런 레온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저쪽 세계에서 훈련을 받은 훌륭한 검사였다. 그러나 힘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신이 재능의 양을 잘못 조정한 것이 틀림없는 피조물인 레온에게 결국 제압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능력의 문제보다는 각오의 문제였다. 이 와중에도 라엘은 진심으로 레온을 베지 못할 것이니까.

레온이 희게 웃었다.

그렇다고 검이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웃음도 아주 잠시, 라엘이 스스로의 목에 보검을 가져다 대자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검 날에서 올라오는 한기는 제법 서늘했다.

“라엘!”

“와아- 다행이네요. 시체라도 끌고 간다고 하면 어쩔까 싶었는데.”

진심이었다. 그리고 라엘이 진심이라는 것은 레온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레온은 사색이 되어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 순간 라엘은 검 날을 목에 바짝 댔다. 힘조절을 잘못했는지 따끔한 느낌이 들며 목덜미로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렀다. 

레온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는 자신이 진심으로 마음먹으면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이미 목격했었다. 라엘은 그의 앞에서 절벽으로 몸을 날렸고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전의 끔찍했던 그날이 생각났는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레온에게 라엘이 말을 걸었다.

“일단 이야기나 해 봅시다.”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위험한 것은 치우는 건 어때? 다쳤잖아.”

“제게는 당신이 더 위험해요.”

익숙한 문장에 레온이 움찔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에 했던 말을 다시 외웠던 보람이 있다.

라엘은 스스로를 인질로 잡으며 드디어 대화라는 것을 시작할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이딴 상황이 돼서야 대화라는 것이 성립된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온다. 차원을 넘어온 미친놈이라니. 정말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다.

조금 전까지는 당장 죽여 버리겠다는 기세로-본인은 부정했지만- 제게 달려들었던 것과는 사뭇 다르게 레온은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반쯤 깨진 집기들이 굴러다니고 가구들이 넘어져있고 화분이 쏟아져 흙바닥이 되어 있었고 라엘은 아직도 제 목에 들이댄 검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를, 아니 이런 상황이기에 둘은 차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인지 알아나 두자 싶어 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었다. 긴 이야기가 끝나자 창밖은 어느새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딴 트러블에 금 같은 하루를 소비한 것이 짜증났다. 수능이 몇 달 남지도 않았는데…….

결론은 뻔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절 납치하러 온 거군요.”

“맞이하러 온 거야.”

“상호 동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이 힘으로 끌고 간다면 그게 납치지 뭐야.”

“객관적 정의는 그럴지 몰라도 심정적인 정의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그렇죠. 빼도 박도 못하는 납치네요.”

레온은 정말로 정운을 다시 저쪽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온 것이 맞았다. 사실 그 외에 어떤 이유가 더 있겠냐마는……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여기까지 쫓아올 줄이야. 

레온은 다시 정운이 라엘로서 살기를 바라고 있었고 그는 물론 동의하지 않았다. 이쪽 세계로 넘어오고 다시 가질 수 없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저쪽에 사는 사람들이 어련히 잘할까! 

무엇보다 자신이 존재함으로서 꼬여버린 상황은 자신이 사라지는 것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지금까지 지켜본 로렌은 능력이 있었고 그를 받쳐줄 인재도 많다. 그들은 분명히 잘 해낼 것이다. 레온의 개입은 자신이 사라지는 순간 명분도 의욕도 사라질 것이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도 분명히 그러했고 로윈은 역시 안전했다. 로렌이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만은 반가웠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것에 머물 수는 없었다. 시간을 뭉텅 잃어버린 자신은 이쪽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몸뚱이를 움직여야 했다.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수능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대학생활부터 다시 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졌다. 

아무리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이쪽 세계에서는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단계를 밟아야 했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6년이나 늦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한참이나 뒤처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레온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만약 가더라도 다른 그리운 사람을 보러 가는 거니 혼자 가지 쟤랑은 아니야.

“그냥 포기하고 돌아가시죠.”

“난 너와 함께 돌아가기 위해 온 거야.”

“전 안 가요.”

“어째서?”

“돌아가더라도 당신과는 아녜요.”

“사랑하잖아.”

“일생의 가장 치욕스러운 기억이군요.”

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더 치욕스럽다. 저 미친 짓을 목도했으면 이제 좀 질릴 법도 한데 다시 만난 레온은 놀랄 만큼 예뻤다! 하하, 예쁜 미친놈이야. 하하! 속마음은 태풍이 부는 것 같지만 단호하게 거절하는 데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레온은 울상을 지어 보였다. 예쁘긴 한데 참 가지가지 한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나와 돌아갈 거야?”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없는데요?”

“……그래?”

단호하게 거절하자 레온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곧 해맑게 웃었다.

“아, 그럼 내가 여기 있으면 되겠군.”

“……미쳤어요?”

라엘에게는 레온이 이쪽에 있으나 저쪽에 있으나 같은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위협이었다. 라엘은 심호흡했다. 이럴 때일수록 객관적인 눈으로 상황을…….

“괜찮아. 너를 만나러 오기 전에 대륙통일은 마쳐뒀거든.”

떠난 지 반년 좀 넘었다. 겪어본 바로는 두 세계의 시간 흐름은 같았을 텐데?

“혹시 몰라서 내가 1년 이상 아무런 소식이 없다면 황위를 이을 후계도 이미 지목해뒀지.”

“……철저하시네요. 그래도 황제는 당신이잖아요.”

“네가 없는데 내가 황제라는 것이 더 이상 무슨 의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자신의 의무를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레온은 거침이 없었다. 이전에 제국과 본인을 하나로 두고 자신에게서 앗아가려고만 했던 그가 맞는가.

어느새 슬금슬금 다가와 제 손을 잡고 맑게 웃는 레온을 보자 여지없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런 다채로운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에게 이런 미모를 주는 것은 역시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거기에 넋을 잃고 있다가 검을 빼앗기지. ……어?

“……허.”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왕가의 보검을 빼앗겼다. 레온이 검을 빼앗는 순간 라엘은 반사적으로 뒤로 파다닥 달아났지만 그렇다 한들 이미 손에 없는 보검이 다시 제 손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레온이 웃었다.

“이제 다시 함께 돌아가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해 볼까?”

바로 말을 바꾸는 거 봐라? 조금 전까지의 예쁨과 아련함 따위는 다시 구깃구깃 바닥에 처박힌다. 라엘은 허- 하고 기막혀하며 싱크대 쪽으로 등을 붙였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레온이 마치 공포영화에 나오는 귀신보다도 더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제는 라엘이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차례였다. 라엘은 싱크대 문을 열었다.

“자, 이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그래.”

“검 내려놓으시고요.”

“응…….”

“이쪽으로 보내세요.”

“…….”

라엘은 싱크대를 열어 가지런히 꽂혀있던 식칼을 꺼내 목에 겨눴다. 보검이 아니더라도 칼로 쑤시면 죽는 건 매한가지지 뭐. 결국 레온은 라엘에게 곱게 보검을 반납했다. 한참 후 다시 반격을 시도한 레온이었지만 이번에는 필통에 들어있던 커터 칼로 위협을 했고, 레온은 더 이상 라엘에게 함께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이후에 나눈 짧은 대화로 레온은 이쪽 세계에 머물기로 완전히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 마음은 자신이 긴장을 푸는 순간 다시 변할 수 있는 것이고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문득 생각이 닿아 라엘은 레온이 벗어 둔 옷에서 소지품을 검사했다. 그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옷 사이에서 아주아주 눈에 띄는 수상한 작은 막대가 나왔다. 라엘 자신은 차원 이동한 것이 본래의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라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레온은 아마 마법을 이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매개체를 찾아본 것이었다. 

그리고 정답이었다. 세상에, 다행인 일이었지만 레온은 마법까지는 쓰지 못했다. 신이 양심이 있긴 했나 보다.

“이제는 진짜로 강제로는 널 데려가려고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제가 그 말을 무슨 수로 믿어요?”

“매개도 네가 가지고 있잖아. 어차피 그거 없으면 못 돌아가.”

잔뜩 기가 죽어 이야기하는 레온은 가련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에 속아 지난 흑역사를 만들었던 라엘에게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수였다.

“내놔요.”

“……뭘?”

“거기,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 다.”

“…….”

“어서요.”

“……쳇.”

아미를 찌푸리며 레온은 손에 차고 있던 반지 세 개를 벗어 라엘에게 건네주었다. 처음부터 레온이 눈에 띌 장소에 중요한 물건을 둘 리가 없었잖아. 기가 막힌 연기이긴 했지만 레온에 대한 불신감이 사라지지 않은 라엘에게는 통하지 않는 수였다. 

파랗고 빨갛고 노란 보석이 달린 반지 세 개를 빼앗아 손바닥에 올리자 장난감 같아 보이기도 했다. 장난감처럼 생겼지만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은 진짜 보석과 금이겠지만.

“언제든지 돌아갈 생각이 있다면 이야기하세요. 돌려드릴 테니까요.”

“……그럼 지금.”

“단, 혼자서요.”

“……칫.”

레온은 라엘의 손바닥 위에 있는 반지를 슬쩍 흘겨봤을 뿐 관심을 거둬버렸다. 그는 터덜터덜 소파에 걸어가 털썩 누워버렸다.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 그대로 엎어진 모습을 보자니 이 황제 놈이 벌써부터 이쪽 세계에 적응을 위한 태도를 습득한 것이 아닌지 고민스러울 정도였다.

레온의 반지는 부모님 집으로 보내버렸다. 도착한 택배를 보고 이게 뭐냐며 엄마가 전화했지만 잘 맡아달라는 정도만 이야기했다. 엄마는 취향이 갑자기 어린 여자애가 됐다며 딴죽을 걸었다. 택배를 받았으니 택배를 보내겠다며 기어코 반찬을 택배로 보낸 그녀였다. 반지를 택배로 보냈더니 반찬이 택배로 오네! 등가교환이라기에는 무게부터가 다르다.

레온은 라엘이 온몸을 바쳐 돌아가기를 거부하자 정말로 자신이 이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물론 방심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데다 그가 차원이동 후 한 일이라고는 라엘이 가전제품을 조작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익히는 정도뿐이었다. 

쓸데없이 머리가 좋은 그는 바로 그날 리모컨 조작을 완벽하게 해냈다. 리모컨 조작을 익힌 그는 에어컨까지 완벽하게 켜고 끌 수 있게 되었다. 쓸데없는 적응력이라 생각하며 라엘이 얇은 여름용 이불과 요를 가져다주자 거실의 소파는 그대로 레온의 침실이 되었다. 

호화로운 침대생활을 하던 그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렇다면 자신의 침대를 같이 쓰게 해달라는 말에 소파에서 지내는 것으로 확정했다. 조금만 잘해주려고 하면 기어오른다.

“재밌네.”

“뭐가요?”

“TV 안에서 멍청하게 발버둥치는 꼴이 유쾌해.”

“감상의 포인트가 다르네요. 그리고 진심으로 재수 없고요.”

화려한 색으로 화면이 휙휙 바뀌며 신데렐라 류 로맨스 이야기가 TV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저딴 말을 종알거리니 재수가 없지. 문득 궁금해져 슬쩍 묻자 그는 자신이 오기도 전에 방영됐던 앞 내용까지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었다. “어떻게?”라고 묻자 “다시보기.”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는 과하게 적응을 잘하고 있었다.

레온의 적응과는 별개로 라엘은 갑작스럽게 바뀐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차원이동을 한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거실에서 공부를 할 수 없음에. 

조용히 드라마를 보고 있는 레온을 보고 한숨만 쉬고는 책을 주섬주섬 싸들었다. TV라도 봐야 조용하지. 방에서 공부할 작정이었다. 

TV를 향해 있던 레온의 시선이 이번에는 라엘을 향한다.

“어디 가려고?”

“공부하려고요. TV 소리가 신경 쓰이네요. 방에서 할 테니까 편하게 드라마 보세요.”

“공부는 왜?”

저쪽에서 할 만큼 다 한 공부를 또 하는 것이 진심으로 궁금한 레온은 순수하게 물어봤고 라엘은 잠시 고민했다. 너무 당연하게 해왔던 것이고 돌아오면서 다시 당연하게 시작한 것은 정식으로 질문하자 오히려 답변하기 힘들었다. 공부를 하는 건 공부를 해야 하니까인데…….

“공부를 해야 취직을 하고 돈을 버니까요.”

레온은 오히려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네 능력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학자가 될 필요가 있어?”

“딱히 학자는 아닌데요.”

“그럼 왜 공부를 하는데?”

원론적인 질문에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라엘은 책을 레온에게 집어던졌다. 지척에서 빠르게 날아오는 책을 얄밉게 바로 붙잡은 레온이 물었다.

“공부를 안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있겠지만 정규직은 아니지 않나 싶은데요.”

“정규직?”

“정식으로 고용돼서 고용의 안정이 보장된 직업이요.”

“공부를 하지 않고는 그렇게 될 수 없어?”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요.”

취직하면 월급이 나오겠지, 정도의 지식뿐이었다. 아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생각하는 메커니즘은 그것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차원이동하여 왕자의 그림자로 왕궁에 처박혀서 서류결재나 하고 이후로는 나라 잃고 레온에게 쫓겨 다닌 라엘은 솔직히 황제인 레온만큼이나 사회경험이 모자랐다.

두 남자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우물거렸지만 결국 저도 답을 찾지 못한 레온은 책을 돌려줬다. 라엘은 조용히 상 앞에 앉았고 레온은 볼륨을 줄였다.

집중이 되지 않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타격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당연하게 대학을 가기 위해 별로 어렵지도 않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던 시간이 아까워서 라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갑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자 레온이 잽싸게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제야 생각해보니 레온은 이곳에 온 며칠 동안 밖에 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감춰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라엘이 밖을 나가지 않아서였다. 훌륭한 히키코모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디 가?”

“반찬만 먹고 살 순 없으니까요. 간식이랑 맥주라도 사올까 하구요.”

레온은 자연스럽게 라엘의 옆에 섰다. 이제는 기막히지도 않는다. 그저 내려다보니 역시나 맨발이라 라엘은 삼선슬리퍼를 레온에게 양보했다. 다른 신발들은 발사이즈가 자신보다 큰 레온에게 맞지 않는다. 

운동화를 꿰어 신으며 나간 김에 마트에서 신발이라도 한 켤레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옷도 사야겠다. 어떻게 동생이 남겨두고 간 옷이 있어서 사이즈가 어찌어찌 맞긴 했다. 그러나 쌀밥만 해먹는다고 그게 식사인가. 옷을 고르는 데 센스라고는 쌀밥에 물 말아먹은 듯 밍밍한 동생의 옷이기에 진짜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몸이 훌륭하니 또 볼만하기도 하고.

문을 열자 훅하고 더운 바람이 볼에 닿았다. 전기세가 모자라면 레온의 반지라도 팔아버릴 작정으로 에어컨을 쉬지 않고 켰더니 여름인데도 더운 바람이 낯설다. 레온도 그런 것 같았다.

“여름이었어?”

“에어컨 안 켜면 더워지잖아요.”

“난 방이 좁고 밀폐돼서 그냥 더워지는 줄 알았지.”

“충분히 넓거든요?”

기가 막혔다. 집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라엘은 이전에 온 가족이 살던 집을 혼자 쓰고 있는 중이었다. 자취를 하겠다는 것을 처음에는 말리던 부모님은 결국 방 문제를 해결해주겠다며 라엘은 집을 구하는 데 전혀 신경 쓰지 않게 만들었었다. 그때만 해도 실종된 아들이 안타까워 직접 괜찮은 원룸이라도 구해주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부모님이 집을 뺄 필요가 있었나.

부모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귀농했다. 이미 따로 나가 살고 있는 동생은 돌아올 생각이 없었고 농담이 아니라 라엘은 그 넓은 집에서 홀로 자취를 해야 했다. 그러니까 솔직히 아파트는 넓었다. 4인 가족이 살았던 30평대의 아파트니 혼자 사는 것치고는 굉장히 호화스러웠다. 물론 황궁보다는 좁았지만. 배부른 자식. 부러운 자식. 금수저…… 아니 플레티늄 다이아몬드 수저 정도는 되는 자식.

승강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와 햇빛 아래로 나선 레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선글라스만 끼워두면 화보를 촬영한다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그가 바깥으로 나오자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아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잘난 외모도 외모였지만 그의 은발은 엄청나게 눈에 띄었다. 결국 라엘은 아파트 출입문 앞에서 다시 그를 끌고 집으로 올라가야 했다.

다시 내려온 레온의 머리에는 모자가, 얼굴에는 선글라스가 자리 잡아 있었다. 옷은 여전히 멋없었지만 몸이 멋있어서 이딴 식으로 입혀놔도 화보 촬영을 하는 것 같다. 미모봉인 좀 하려고 했더니 무리였나. 팔자려니 받아들이고 그대로 마트로 향했다. 

주변의 시선에 신경이 따끔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실종됐다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는 바람에 아파트 내에서 불필요한 주목을 받고 있는 라엘이었는데 오늘은 더했다. 그리고 그 원흉은 옆에서 아주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여유 넘치시네요?”

“별로?”

“처음 본 광경들인데 신기하지 않으세요? 전 처음 그쪽으로 갔을 때 너무 신기해서 정신을 놨는데.”

“난 TV에서 봤는걸.”

아차. 레온은 요 5일 동안 이쪽 세계에 대한 훌륭한 간접 체험으로 예습을 했다고 말했다. 라엘은 진지하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파란불이 되자마자 길을 건너는 그를 보면 확실히 그랬다. 이상하다. 다시 돌아온 자신보다 레온이 더 적응이 빠른 것 같다.

“드라마라는 것이 참 대단하네요.”

“사회의 축소판이랄까.”

레온은 어깨를 으쓱이며 잘난 척했고 라엘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카트에 동전을 넣고 마트를 가르는 레온은 이미 차원이동 한 외지인이 아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라엘은 힘으로 카트를 뽑았다가 보안요원을 소환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역시 차원이동자에게 저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기는 묘하다.

“솔직히 말해요. 드라마 몇 편 봤어요?”

“드라마만 본 건 아닌데. 그냥 하루 종일 TV 봤으니까. 프로그램이 다양하던걸. 아, 이거 먹어보고 싶었어.”

오후 10시만 지나면 시원하게 캔 따는 소리와 함께 광고를 하는 브랜드의 맥주를 카트에 집어넣는 것을 보니 이젠 할 말이 없다. 정말로 어디다가 내놓아도 잘 살 인물이었다. 납득이 되자 화도 나지 않는다. 저쪽 신이 뿌려놓은 과도한 능력치가 이쪽에서도 적용되다니 그것만은 억울했다.

별다를 것도 없는 장보기는 왠지 허무했다. 살짝 클리셰를 바란 것도 있었다. 차원이동을 막 한 차원이동자가 새로운 문물에 놀라며 우와- 우와-를 연발하는 것 말이다. 레온이 그러면 좀 귀엽…… 미쳤나, 한정운!

어떤 것이든 레온에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귀염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자는 TV의 간접경험을 통해 이쪽 세계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그에게 느껴지는 이질감이라고는 큰 키와 훌륭한 비율이었다. 선글라스와 모자와 후진 옷으로도 감춰지지 않는 잘남은 덤이었다. 얄밉다, 정말로.

“아까 옷 산다고 안 했어?”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유난히 긴 기럭지는 보통의 사이즈로는 맞추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리길이를 맞추면 허리가 너무 크고 허리에 맞추면 다리가 너무 짧다. 그렇다고 반바지는 별로다.

“사이즈 맞을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집에 가서 하죠.”

“그래.”

그의 다리길이에 맞는 옷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타협하여 반바지를 사기에는 왠지 레온은 반바지가 이미지상 안 어울린단 말이지. 바로 지금처럼. 동생의 반바지를 입은 레온은 끔찍할 정도로 옷과 어울리지 않았다.

카트에 이것저것 담았던 간식들을 계산하고 박스에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서 테이프로 봉하고 손잡이를 만들었다. 레온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짊어진다.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배려를 발로 차버릴 생각도 없어서 머쓱해진 손을 뒤로 치웠다. 황궁에서의 저돌적인 대시 외에는 그가 정상적으로 배려를 하는 것은 전혀 본 적이 없었기에 낯설었다.

“왠지 달라 보이네요.”

“어때? 내가 좀 좋아지는 것 같아?”

“그건 잘 모르겠네요.”

“이런 작은 배려에 여자들은 설렘을 느낀다고 하던데.”

“자꾸 까먹는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제가 남자라서요.”

“여러 가지를 봐야겠어.”

애초에 그것이 문제는 아닌 것 같았지만 라엘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정말로 자신의 말에 힌트라도 얻으면 거절하기 힘든 대시를 할까 봐 그것이 진심으로 무서웠다. 예전에 이미 겪어본 적이 있지 않는가. 아무리 아직도 좋아한다지만 남자에게 코가 꿰이는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 저기요……!”

마트의 자동문을 나서며 더운 공기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 두 사람에게 누가 보아도 피서지 복장의 남자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건 또 뭐람.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간신히 말을 잇는 그를 보자 왠지 애잔하여 잠깐 시간을 내주게 되었다. 

남자가 가까이 오자 레온의 어깨가 라엘보다 반걸음 앞선다. 별걸 다 한다.

“헉…… 헉……. 호, 혹시 어디 기획사 같은데 계약되어 있어요?”

“……네?”

“두 사람 마스크가 너무 좋아서, 혹시 모델 해 볼 생각 없어요?”

이건 웬 개소리야. 기획사 직원이라며 접근하는 사기꾼들을 워낙에 많이 만난 덕분에 라엘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애초에 그런 것에 관심이 없기도 하고. 라엘은 레온의 팔을 붙잡고 가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고 남자는 당황하며 쫓아왔다. 

거 참 끈질기네. 화를 내려는 찰나 남자가 품에서 허겁지겁 꺼낸 명함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건네주었다. 왜 저렇게 불쌍한 표정을 짓는 것인가. 그가 제발 생각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해서 차마 명함도 버리지 못했다.

명함에 적힌 회사 이름을 확인해보니 검색할 필요도 없었다. 어쩐지 당연하게도 국내에서 손꼽는 유명기획사였다. 

엎어져도 돈다발 주울 놈. 땅을 파면 기름이 쏟아질 놈. 라엘은 괜히 레온을 노려봤다. 명함에 전혀 관심 없는 레온은 드라마에서 배웠던 여자 꼬시는 법이 잘 먹히지 않았나 싶어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레온은 딱히 일을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라엘도 모델이든 연예인이든 관심이 없었다. 평소처럼 집에서 노닥거리며 칩거 혹은 히키 생활을 하다 간식이 떨어져 일주일 만에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나올 때마다 햇빛이 너무 눈부시다. 

밥과 반찬만으로 끼니를 때울 수는 없어 인스턴트를 채우러 다시 마트에 갔을 때 두 사람은 명함을 준 남자와 마주쳤다. 이번에는 하와이안 셔츠가 아니었다. 명함을 준 뒤로 연락을 기다리며 쭉 마트 부근에서 잠복했다고 한다.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도 없어서 결국 세 사람은 근처의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권유를 아예 받은 적은 없다는 이야긴가요? 믿기 힘드네요!”

“저는 몇 번……. 하지만 이쪽은 처음일 거예요…….”

감히 누가 황제에게 다른 직업을 권하겠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꾹 참으며 라엘은 웃었다. 전직이 너무 화려하다 보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참 어렵다.

라엘은 처음부터 여전히 관심이 없었고 관심이 없다는 티를 냈기에 남자는 레온에게 집중적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라엘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내용이었다. 일견 화려해 보이지만 누군가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라엘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온은 남자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궁금한 것들을 묻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하자 남자는 신이 나서 더 자세히 설명했다. 

인터넷 쇼핑의 힘으로 드디어 제대로 된 옷을 차려입고 외출한 레온은 참으로 화려하게 잘생겼다. 그것을 보아서인지 남자는 절대로 놓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레온이 관심을 보이자 바로 계약서까지 보여줬다. 계약서의 조항은 점점 레온에게 유리하도록 수정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면서도 라엘은 반신반의했다. 에이, 설마 정말로 하려고? 아니 그 이전에 이 사람이 계약이 가능한 상태가 아닐 텐데……? 그것은 레온도 생각한 부분인지 이야기를 꺼냈다. 수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남자의 표정도 수심이 가득해졌다.

“사실 저는 계약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 어째서지요!?”

화들짝 놀라서 반문한다. 조금 전까지 꽤 희망적인 반응을 보이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이 억울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레온은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표정이 다시 슬퍼진다.

“사실 제가 한국인이 아닙니다.”

“아, 하긴……. 혼혈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아예 국적이 한국이 아니었군요. 그래도 외국인이라고 계약이 안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러나 레온은 정말로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쯤 되자 뭐하자는 건지 궁금할 지경이라 라엘은 그냥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전 제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말들은 어딘가의 드라마에서 들어봤을 법한 상황들이었다. 저걸 진짜로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러나 남자는 믿는 것 같았다.

결국 오글거림을 이기지 못하고 라엘은 잠시 양해를 구한 후 자리를 피했다. 남자는 이미 레온의 이야기에 푹 빠져 라엘이 자리를 떠나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받은 표정으로 남자는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수습되는 것은 한참 걸릴 것 같다. 

라엘은 카페를 나와 마트로 들어가서 천천히 장을 봤다. 타임세일을 하기에 과일도 몇 가지 샀다. 맥주도 던져놓고 안주도 넣었다. 과자들도 마구마구 집어넣고 인스턴트식품들로 꽉 찬 카트를 보자 뿌듯해졌다. 그리고 그제야 이 짐들을 들 레온이 아직 카페에서 이야기 중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레온이 막 던진 상황이 어떻게 수습됐는지 궁금했기에 지난번보다 더 짧게 장을 보고 다시 카페로 돌아갔다. 돌아간 카페에서는 이미 남자가 눈물을 글썽이며 결연한 표정으로 레온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해드리겠습니다!”

레온의 손에 다시 명함을 꼭 쥐어주고는 라엘의 연락처를 받아갔다. 레온이 휴대폰이 없다 보니 자신의 연락처를 받은 것이다. 엉겁결에 번호를 주긴 줬는데 역시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회사에 가봐야겠다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가 다시 돌아왔다.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되냐고 허락을 받은 뒤 폰으로 사진을 찍더니 다시 순식간에 사라진 남자는 라엘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제야 라엘은 자리에 앉았다.

“기억 없다는 말을 정말로 믿어요?”

“믿게 만들면 되지.”

“……어떻게요?”

“그냥 말로.”

아, 그렇지. 화술의 황제였지, 참. 아니 그냥 황젠가.

“아, 네. 그래서 어떻게 하겠대요?”

“국적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해줄 테니까 꼭 계약을 해 달라기에 그렇게 한다고 했어.”

“……와아, 사기꾼.”

“사기꾼이라니.”

“사람을 속이는 게 사기지 뭐예요.”

“제멋대로 속은 것뿐인걸. 내가 네게 그랬던 것처럼.”

싱긋 웃으며 웃는 레온의 눈을 라엘이 애써 피했다. 이건 조금 찔린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 뭐 어떻게든 알았겠지. 로렌도 옆에 있었고. 찔리긴 했지만 그뿐이다. 그뿐이야. 채 30초도 지나지 않아서 궁금한 것을 묻기 위해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설마, 기억을 잃었다는 그거요…….”

“응, 드라마에서 봤어.”

드라마에는 참 많은 인생이 있구나. 왠지 감탄하며 라엘은 음료에 꽂힌 빨대를 씹었다. 지금이라도 드라마를 볼까.

고민하다 보니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라엘의 고민을 뒤로하고 레온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며칠 뒤 연락을 받고 휴대폰을 빌려 혼자 밖에 다녀온 레온은 돌아올 때 본인의 폰을 들고 있었다. 

거울을 보고 여러 가지 표정을, 특히 아프거나 슬픈 표정을 연습하던 레온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가을쯤에는 신분증을 만들어오더니 몇 주 지나지 않아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라엘이 공무원시험 준비를 위해 책을 고르고 주문하고 배송이 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뭐죠? 그 엄청난 속도는.”

“날 놓치기 아까운 거지.”

거만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라엘은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는 목표를 제대로 잡았다. 수능은 일단 볼 거지만 역시 공무원이지! 대기업이고 뭐고 상관없다. 그냥 철밥통이 최고다! 

드디어 목표를 잡으니 공부도 술술 잘된다. 다니엘의 지옥훈련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누구에게 잘 보이는 것도 관심이 없고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매력이 넘친다. 이제는 진짜로 공부가 답이었다.

레온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함께 돌아가자며 지속적으로 꼬시던 작업을 드디어 멈췄다. 속이 시원해서 공부가 더 잘됐다. 그래도 자꾸 자신이 실린 잡지라며 잡지 뭉텅이를 가져오는 것은 귀찮았다.

“잡지 가져와도 안 보니까 주지 마세요.”

“왜? 내가 일하는 게 궁금하지 않아?”

“가서 보면 모를까. 어차피 잡지에 실린 거라면 당신이 잘생긴 거 외에 뭐가 있겠어요?”

“그렇긴 하지. 그럼 와서 볼래?”

“제가 가면 저도 데뷔하라고 할 것 같아서 싫어요.”

“그건 그렇지.”

누가 들으면 열 받을 이야기를 태연히 하는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도 레온은 잡지를 가져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잡지가 쌓이는 속도가 가속도를 점점 더하더니 금세 방 한쪽에 잡지 무더기가 생겼다. 결국 라엘은 책장을 주문했고 하는 김에 일자별로 순서대로 정리도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것을 본 레온이 진심으로 기뻐했다.

팬들도 이제는 꽤 많이 생겼는지 가끔 선물들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가 집으로 가져오는 선물들은 거의 작은 가전제품류나 생필품류였고, 그것을 빠르게 캐치한 팬들은 그의 선물을 죄다 생필품으로 바꾸었다. 생활비가 줄어들어 확실히 도움이 됐다.

그해 겨울 라엘은 전혀 긴장감 없이 수능시험을 봤고 레온은 신분증 문제가 드디어 완전히 해결됐다고 한다. 이제는 해외로 화보촬영을 나간다고 하기에 라엘은 그가 없는 동안 시골의 부모님 댁에 다녀오기로 했다. 

레온은 같이 출국하자고 끝없이 꼬셨지만 촬영하는 동안 미녀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어서 좋겠다고 했더니 바로 취소했다. 

아파트에 혼자 남아있으면 레온과 있을 때는 제대로 말을 걸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자꾸 이것저것 그에 대해 물어봐서 귀찮아졌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팬들의 시선이 왠지 따갑기도 하다. 진지하게 이사를 생각하게 된다. 잠시 피신이 필요할 때기도 했다.

“연락할게.”

아직도 그의 입에서 나오는 첨단의 단어들이 어색하게 느껴진다. 라엘이 답이 없자 레온은 그의 이마에 입 맞추고는 그가 채 화내기도 전에 재빨리 도망쳤다. 역시 레온의 입술이 닿는 곳은 열이 화끈화끈 올랐다. 라엘도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로 향했다.

부모님 집으로 내려간 일주일. 

라엘은 딱 차원이동 초반의 레온과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아아, 드라마가 이렇게 재밌을 줄이야. 행복하게 잉여롭다. 이런 삶을 원한다. 

여자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훔쳐 부잣집 딸이 된 악역에게 된통 당하는 것을 보고 욕을 퍼붓는다. 왜 저렇게 답답해! 저 여자는 천벌을 받고 말 것이다! 종료를 알리는 세피아톤 화면이 속이 터진다. 일일드라마라 다행이야! 내일 또 봐야지.

아빠가 TV 앞에 밥상을 내려놓자 엄마가 합류한다. 엄마가 채널을 돌리며 다른 드라마를 고르는 동안 라엘은 부엌으로 걸어가 허리를 펴고 물을 마셨다. 너무 누워있었더니 허리가 부서질 것 같다. 그때 엄마가 꺅꺅하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저 사람 정말 잘생겼네! 정운아, 저것 좀 봐~ 외국인이 말을 저렇게 잘하네. 신기하네.”

“아들보다 더 잘생겼어?”

“너보다 쬐끔 더 잘생겼어, 어머어머. 또 나온다.”

밥을 먹으면서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TV 안의 남자에게 감탄했다. 아빠가 흘겨보는데도 배우에 대한 찬사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니 보통은 아닌 것 같다. 아들에 대한 콩깍지가 두터운 엄마는 대부분의 배우를 보아도 “우리 아들보다 못생겼네.” “어휴, 저건 우리 아들이 낫네.”라며 평가하기 일쑤였으니까.

라엘이 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화면에서 외국인은 사라져있었다. 금방 또 나오겠지 싶어 화면에 집중하며 밥을 먹는데 의외로 드라마가 재밌다. 새로 하는 드라마인가? 체크해야지.

“그런 콘셉트의 외국인은 자주 나오잖…….”

그리고 화면에 다시 나타난 배우를 보고 라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에 넣은 밥을 거하게 뿜었다. 엄마는 더럽게 먹던 것을 뿜었다고 화를 냈고 아빠는 조용히 바닥을 닦았다. 

라엘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엄마가 물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니?”

라엘은 입을 쩍 벌렸다. 확실히 화면 안쪽에 있는 저 잘생긴 얼굴은…….

“아니, 아는 또라이야.”

역시 레온이었다.

결국 정신이 없어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다 수저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겨우 두 그릇밖에 밥을 먹지 않은 라엘을 보며 엄마는 경악했고 아빠는 조금 덜 놀랐고 “그럴 때도 있겠지.”라고 말하며 곁의 에너지바를 집어주었다. 슬슬 자신의 이미지를 걱정할 때라는 것을 느끼며 라엘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폰을 집어 들고 녹색창에 레온을 검색했다. 간략한 정보들 사이로 검색결과가 쏟아진다. 최근 작품 활동을 보자 당당하게 조금 전의 드라마가 있었다. 역할을 보아하니 서툴게 한국말을 사용하는 외국인으로 여주인공을 일순 설레게 하는 잘생기고 매너 좋은 조연이었다. 

그런데 그 설렘이 너무 도가 지나친 건 아닌가? 게다가 레온은 분명히 한국말이 유창한데……. 혀 짧은 소리를 내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그 얼굴은 왜 주인공급인 것인가. 미모가 깡패라 느끼며 라엘은 손가락으로 슬슬 화면을 올렸다. 그동안 시험 준비들 때문에 인터넷을 멀리했더니 그동안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레온의 이름을 여러 가지로 검색하니 월등하게 사진들이 많았다. 어떤 각도에서도 사진 너머 잘생김이 당당하게 묻어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자료의 양에 라엘은 조금 놀랐다. 이제 활동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그인데 검색되는 활동양은 장난이 아니다. 잡지를 어마어마하게 가져다주긴 했기에 일을 많이 하긴 하나 보다, 사진을 많이 찍나 보다 했는데……. 이건 무슨, 예능도 찍고 토크쇼에도 나갔다. 

대체 차원이동을 한 황제가 토크쇼에서 이야기를 하면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해서 동영상을 재생시켜보다가 풉- 하고 뿜어버렸다. 영상 속의 레온은 유창하긴 하지만 외국의 억양을 버리지 못한 외국인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감쪽같았지만 사실을 아는 라엘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시기를 보니 드라마를 찍기 전이다. 천생 연기자다 정말! 그래. 날 엿 먹였던 그 연기로 다 엿먹여버려라. 이제 드디어 외롭지 않다.

큭큭거리며 발을 동동 굴리고 있자니 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왔다. 밥을 덜 먹은 것이 역시 걱정되었는지 간식을 가지고 왔다. 식욕이 다시 왕성해져서 해맑게 웃으며 간식을 집어 먹었다. 엄마의 표정이 다시 좋아진다.

“뭐 재밌는 거라도 봤어?”

“아는 또라이 검색 중이야.”

“아까 그 잘생긴 외국인 말이야?”

“응.”

“어머, 내 아들이 어떻게 연예인을 알게 됐을까?”

“어쩌다 보니 같이 살게 된 그 룸메가 그 사람이야.”

“어머, 어머 그랬어? 진작 알려주지 그랬어!”

“잘생긴 외국인이랑 같이 산다고 맨날 전화 받았다며!”

“저 정도인 줄은 몰랐지!”

늦게 안 것이 아쉽다는 듯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미리 알았어야 자랑도 실컷 했을 텐데. 이제부터 해야겠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는지 라엘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혹시 걔가 프러포즈하려는 여자가 누군지 너도 알아?”

“……어?”

프러포즈……. 여자……? 뭐? 어떤 년인데!! 이 인간이 그새 바람을!? 차원이동하더니 별걸 다 하네! 라엘은 분노를 꽉 씹으며 눈만 끔뻑거리고 대답을 잇지 못했고 엄마는 ‘그러면 그렇지.’ 하며 약간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케이블에서 나오더라고. 트위터에 반지 사진 떴다고.”

“……어……??”

“하긴 그런 걸 일일이 알려주진 않겠지. 엄마는 검색 좀 해봐야겠어. 궁금해 죽겠네!”

엄마는 쟁반을 내려놓고 폰을 매만지며 방을 나갔다. 멍하니 앉아있던 라엘은 홈 버튼을 눌러 다시 메인화면으로 돌아갔다. 실시간 검색어에 레온의 이름이 참 여러 개도 올라오고 있었다. 레온 트위터, 레온 프러포즈, 패완얼 외국인 여친, 기타 등등등……

라엘은 잠시 고민했다. 나는 대체 무엇에 놀란 것인가. 레온이 프러포즈를 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인가, 아니면 그가 트위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인가……. 아니면 그가 딴 여자에게 눈을 돌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아니 이건 확신이 드니까 아니고, 일단 앞의 둘 다인 것 같다.

공격적인 기세로 상승 중인 실시간 검색어 중에서 ‘레온 트위터’라는 검색어를 클릭하자 어렵지 않게 그의 트위터 주소를 알아낼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위쪽에 떠 있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는 반지를 보며 순간 울컥했다. 진짜 뭐야. 딱 여자 링이잖아. 하지만 트윗 내용을 보고 순간…….

[사랑하는 R에게]

당황했다. 어, 나냐? 당연한 결과였나? 안도와 당황은 한 번에 찾아왔다. 좀 순서대로 찾아오던가. 정신없게.

라엘은 잠시 고민했다. 이건 보라고 올려놓은 건가, 아니면 정말로 모르고 올려놓은 건가.

사실 라엘은 애초에 레온의 활동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긴 했다. 레온이 퍽 서운해하긴 했지만 활동 자체가 바쁘기도 바빴고, 라엘이 바로 앞에서 보는 잘생긴 얼굴을 뭐 하러 액정 너머로 보냐며 필요성이 전형 없다고 말했기에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공부도 겹쳤기 때문에 라엘은 레온의 활동내역도 내역이지만 당연히 트위터도 몰랐다. 레온은 그런 부분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정말로 라엘이 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그래도 이 정도면 소문이 다 나잖아…….”

제 파급력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이렇게 트위터에 당당히 반지사진을 올린 것은 나 보라는 친절인가? 쓸데없는 곳에 머리를 굴리니 더 배가 고파지는 것 같아 옆에 있던 곡물 바를 하나 집어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한참 검색하는데 타이밍도 좋게 명쾌한 메신저의 알림음이 들렸다. 레온이었다.

[뭐해?]

[니생각요]

[헐♡](이모티콘)

무심한 표정으로 타이핑하면서 역시 레온의 메신저 말투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말투뿐만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에서 온 레온이 스마트폰을 하고 이모티콘을 사용하며 특수문자를 남발한다. 트위터를 하고 TV 속에서 연기를 하는 것 자체도 어색했다. 출신이 판타지란 말이다. 

그리고 그 어색함을 느끼는 것이 자신뿐이라는 것이 슬펐다. 저쪽 세계에서나 이쪽 세계에서나 레온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아는 것도 역시 라엘뿐이었다. 외롭다. 이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비행기 아니에요?]

[공항 도착했지! 지금 어디야?]

[엄마집]

[아 장모님댁]

[누구 맘대로 장모님 ㅇㅅㅇㅗ]

[ㅠㅠㅠㅠㅠㅠ]

놀라운 속도로 현대에 적응하는 레온이 두려울 정도였다. 수능도 끝났고 공무원시험은 아직 일정이 넉넉하다. 이제 드디어 뭔가 생각을 할 수 있는 틈이 생긴 라엘은 결론을 냈다.

이건 왠지 아닌 것 같다. 제국의 황제가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최첨단의 물품에 찌들어 메신저 알림이나 듣고 있어도 과연 되는 것인가. 혀 오그라드는 소리를 내며 연기를 하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제국의 귀족들이 볼까 두려웠다.

[언제 와?]

[준비한 거 있는데]

[보고 싶어 (이모티콘)]

[미친]

[ㅠㅠㅠㅠㅠ 언제 와 ㅠㅠㅠㅠㅠㅠ]

준비한 게 그거냐? 이미 뭔지 알 것 같다. 레온은 정말로 라엘이 트위터를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한 것이 틀림없다. 현대문명을 멀리하며 여전히 검색이나 간신히 하는 라엘을 보고 레온은 비웃듯이 완벽하게 스마트폰 사용을 했으니. 그래. 자신이 트위터를 봤을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 자존심이 굉장히 상한다. 나도, 나도 쓸 수 있는데! 네가 할 수 있는데 내가 왜 못해!

프러포즈라니……. 밀당은커녕 끊임없이 당기는 레온을 보며 라엘은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험악한 상황에서 헤어지긴 했지만 이쪽 세상으로 넘어와 홀로 생각을 정리하고 그 뒤를 이어 레온이 오면서 지지고 볶고 어떻게든 지냈다. 분노의 감정은 많이 사그라진 상태였다. 

저쪽 세계가 좀 더 멀리 느껴지는 것도 있었고 이곳에서 레온은 능력은 있되 권력은 없었고 그런 그는 그저 귀여운 또라이였을 뿐이었다. 둘의 사이는 꽤 괜찮아져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레온이 꼬시면 가끔 라엘이 못이기는 척 넘어가주기도 할 정도로 상당히 진전돼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결혼이라니.

퍼뜩 정신이 들었다. 역시 돌려보내야겠다! 역시 그가 제일 위험하다!

생각하자마자 라엘은 문을 박차고 나가 엄마를 불렀다.

“엄마아!” 

엄마는 폰으로 검색을 하다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나온 라엘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돌아온 것은 등짝 스매싱이었다.

“애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동생은 하나로 됐어!”

“얘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엄마, 엄마! 그거 말고, 급해 지금!!”

“얘가 정말 왜 이래?”

“전에 내가 보낸 반지 어디 있어?”

“반지?”

“빨갛고 노랗고 파란 반지 있잖아, 택배 보낸 거.”

“아, 그 장난감? 추석 때 느이 조카 줬는데?”

“헉!”

눈알이 빠지는 줄 알았다. 라엘이 놀라자 엄마도 덩달아 놀랐다.

“왜!”

“그거 진짜 보석이야!!”

“어머!!”

엄마는 라엘이 더 이상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이모에게 전화를 하더니 반지의 행방을 추궁했다. 다행히 반지는 아직 이모의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숨을 고른 엄마는 그대로 차키를 들더니 그대로 현관문으로 달려 나갔다. 라엘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라엘이 말릴 새는 없었다.

그리고 약 한 시간 후, 엄마는 당당하게 귀환했다. 다시 라엘의 등짝에서 불이 났다.

“이번에 왜!”

“비싼 거면 비싼 거라고 말을 해줬어야지!”

“아들이 보낸 거면 당연히 소중히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좀 비싸 보이는 걸로 보내던지! 애들 장난감같이 생겨가지고.”

“아, 일단 줘봐!”

빼앗듯이 엄마의 품에서 상자를 가져와 열어본 라엘은 당황했다.

“이거 왜 이래!”

“애가 가지고 놀다가 떨어졌대. 어휴, 힘도 좋지. 금방 가서 붙여달라고 하면 될…… 아들?”

라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반지는 모두 보석과 반지가 분리되어 상자 안에서 따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마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라엘이지만 마법의 매개체가 이런 식으로 파손되는 일은 아주 큰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부…… 붙이면 괜찮지 않을까? 분리된 보석과 반지를 대봤지만, 애초에 마나를 느끼는 것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던 라엘이었기에 이게 작동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조차 모르겠다.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 어쩌지?

라엘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엄마도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했다.

“아들, 왜 그래 응?”

“엄마…….”

“응?”

“나 아까 걔가 프러포즈하려는 애가 누군지 알고 있어 사실…….”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튀어나와?”

라엘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어쩌지…… 책임져줘야 하나…… 정말로……? 여기까지 와서……? 물론 저 미모가 이쪽이나 저쪽이나 어마어마하게 드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여기까지 와서…… 저 미친놈이랑…….

“엄마…….”

“왜에…….”

이제 엄마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성 결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응?”

횡설수설하는 그를 보며 엄마의 안색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손이 이마에 닿았다.

“열은 없는데……. 얘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나.” 

그래, 과도한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편한 것 같다. 때마침 메신저 알림음이 울렸다. 라엘은 조용히 폰을 들어 손가락을 움직였다.

[자니?]

[언제 올 거야?]

[내일요]

[헉 정말?]

[나 보고 싶었구나]

[선물 사왔어 >< 기대해!]

[깜짝 놀랄 거야!]

[와아- 기대된다]

라엘의 표정에서 점점 영혼이 사라지고 있었다.

지은 죄가 있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불안했다. 엄마는 더 있다 가라고 라엘을 붙잡았지만 전혀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저 부서진 보석 반지들만 만지작거렸다.

지금 상황에서는 레온이 다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긴 했지만 나중에라도 돌아간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반지는 금은방에서 고쳐뒀지만 외관이 돌아왔다고 마법적인 효과가 돌아왔는지는 아직도 불확실한 일이었다. 마법사라도 되면 좋았을 텐데 그런 재능 따위는 없으니 제대로 작동되는지도 모르겠다. 

이러다 정말로 레온이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가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고민이 자꾸 발목을 잡는다. 느릿느릿 기차에서 내려 한숨을 푹푹 쉬는데 밝은 목소리가 들었다.

“라엘!”

레온이었다.

청바지에 흰 티를 입어도 저렇게 잘생겼다. 선글라스를 걸치고 모자로 머리도 가리긴 했지만 그 정도로 가려질 미모가 아닌지라 주변에서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시선을 눈치챈 듯 레온이 웃으며 라엘의 손을 잡아끌었다. 시선에 민감한 라엘을 배려하여 레온은 밖에서는 과한 스킨십을 하지는 않았다.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주차장 쪽으로 손을 잡아끄는 레온을 따라가며 라엘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차는 언제 샀대?

“면허도 땄어요?”

“있으면 좋대서. 확실히 눈에 덜 띄고 좋네.”

차가 너무 눈에 띕니다만. 딱 봐도 외제차잖아.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레온을 보고는 납득했다. 외국인처럼 보이니 외제차를 타는 게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넋을 놓는 사이에 레온은 조수석의 문을 열어줬고 넋을 놓고 차에 오르자 이번엔 벨트까지 매줬다. 이건 신종 오글거림이라…… 아니,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도 라엘은 생각을 멈췄다.

“밥은 먹었어?”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환하게 웃으며 맛있는 곳을 예약해놨다는 레온을 보며 차마 밥 생각이 없다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설마, 설마 하던 것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 트위터를 보았지만, 오늘 레온을 만날 때까지만 해도 설마, 설마 그냥 반지 사진 올려놓은 거겠지. 그냥 반지만 주고 싶었겠지…….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레온과 시간을 보낼수록 더욱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외제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전망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거 참 드라마 같네. 드라마 마니아답다고 생각하며 야경을 보며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후에 레온은 뜬금없이 드라이브가 하고 싶다며 해안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차를 샀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그러나 정석대로 흘러가는 무언가에 점점 조바심이 난다. 이 정도라면 트위터를 미리 보지 않았더라도 예상이 가능한 범주가 아닌 것인가. 고릿적 드라마에 나온 듯한 상황이 누구도 아닌 자신의 앞에 펼쳐진다는 것에 현기증이 난다. 그리고 현기증은 해안도로의 끄트머리에 있는 아주 훌륭한 외관의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극에 달했다. 

이쯤 되자 예약된 것은 아주 당연하게도 스위트룸이었다.

“레온.”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연기력은 다 어디다 집어던지고 왔는지 기대에 잔뜩 부풀어 오른 레온의 표정을 보면 돌아가겠다는 말을 죽어도 하지 못하겠다. 

라엘은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대망의 스위트룸의 문이 열렸다. 미치겠다. 촛불이 켜져 있다. 장미꽃도 있는 것 같다. 어두워서 모르겠다.

레온은 라엘의 손을 잡아끌어 은은한 촛불의 길 사이를 걸었다. 마지막에 도착한 곳은 장미 꽃잎이 흐드러지게 예쁜 하트를 그리고 있는…… 바다가 보이는 커다란 창 앞이었다.

“……아.”

이제, 제발…… 제발 그냥 취향이니 존중해주시죠? 오글거려서 뒈져버릴 것 같다. 제발 농이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레온은 하트의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꿇고 품에서 반지를 꺼냈다. 잘생긴 데다 저쪽 세상 출신이라 그런지 무릎 꿇는 것까지 멋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말한다.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지만 이미 레온은 멈추지 않는다.

“라엘…… 아니, 정운. 나와 결혼해줘.”

레온의 손 위에서 익숙한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장미와 초로 꾸며진 은은한 조명의 스위트룸과 창밖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파도소리, 그리고 눈앞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가 있었다. 더없이 아름답고 더없이 완벽한 상황이었다. 상대가 자신만 아니었다면.

오글거림에 그를 뒤집어 엎어버릴 뻔한 라엘은 솔직히 그 순간 깨어졌던 반지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레온에 대한 죄책감이 확 올라온다. 이제 그의 곁에 남아있는 본래 세계의 흔적은 오로지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책임져야 하는 건가!? 진짜로? 어쩌지……! 이렇게 코가 꿰이는 건가……! 고시준비를 시작할까……. 그 핑계로 뒷바라지를……. 그리고 뻥 차면 납득하지 않을까……. 드라마적인 상황을 좋아하니 이렇…….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치열하게 생각하는 뇌와는 다르게 손은 마음대로 움직여서 반지 앞에 손을 내밀었다. 자발없는 목은 제멋대로 고개를 끄덕인다. 레온이 더없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에 반지를 끼운다. 

잠시 벅찬 표정으로 반지를 낀 라엘의 손을 내려다보던 레온은 반지 위에 키스를 했다. 그리고 뭐라 할 새도 없이 일어나 라엘의 입술을 덮친다. 피하려 했지만 그 순간 따뜻하고도 짭짤한 액체가 라엘의 볼에 닿았기에 그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쓸데없이 잘 우는 남자다.

깊고 긴 키스가 끝난 후 레온은 라엘을 껴안았다. 그리고 끝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퍼붓는다. 부끄러워서 제발 그만하라고 해도 멈추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그의 곁에 눕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아아. 그 순간 조금 전까지 고민하던 것이 다 쓸데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찌 됐던 그는 자신의 곁에서 가장 행복할 것이고, 아무래도 같이 미친 것이 틀림없다. 자신도 그럴 것 같았다.

“반지를 받아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사랑해.”

“……저도요.”

레온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곧 예쁘게 휘었다. 예쁜 얼굴을 붙잡아 입술을 빼앗으며 라엘은 생각했다. 그래, 돌아가지 못하면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주면 되지 않겠는가! 당당하게 생각하며 라엘은 눈을 감고 레온의 체온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 이후에는 아주 잠깐 큰일이 있었다. 남자에게 청혼을 받았다고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자 뒤로 넘어갈 뻔했던 엄마는 레온의 얼굴을 보자 바로 벌떡 일어났다. 어머, 레온이라고 진작 이야기하지! 호호 웃으며 말하는 엄마는 이미 성별의 벽 따위를 벗어난 것 같았다. 아빠만 옆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역시 얼굴에 압도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얼굴로 다 해먹은 새끼.

프러포즈를 받고 나서 얼마 후에 결국 라엘은 레온에게 고백했다. 비밀을 오래 간직하기에는 양심이 너무 찔렸다.

“레온, 사실…….”

“응?”

“그…… 저, 그 반지 망가뜨렸어요.”

“반지?”

라엘은 주섬주섬 이전에 수선해둔 빨갛고 노랗고 파란 반지를 꺼냈다. 반지를 보자 레온은 ‘이 반지가 왜?’라는 표정으로 라엘을 보았고 결국 그 처음부터 끝까지 이실직고해야 했다. 그러나 레온은 별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라엘은 아직도 돌아가고 싶지 않잖아.”

“……그렇죠.”

“그럼 나도 돌아가지 않아. 내가 있을 곳은 라엘의 곁으로 이미 정해져있는걸. 그렇게 결정된 거야.”

아, 조금 감동했다. 왠지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라엘은 생각했다. 반지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둔 것이 틀림없다. 왼손 약지에 반지를 낀 이후로는 뭘 해도 레온이 멋있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갑자기 돌아가고 싶으면 어떡해요.”

라엘의 걱정 어린 말에 레온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그럼 돌아가면 되거든.”

“어떻게요?”

“이걸로.”

레온이 꺼낸 것은 이전에 보았던, 대놓고 마법 도구처럼 보였던 바로 그 작은 지팡이였다.

“……?”

“이것도 진짜거든.”

레온은 환하게 웃었다.

“라엘이라면 순순히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고민을 좀 했어. 그러니까 반지도 그것도 둘 다 매개 맞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라엘이 돌아가고 싶다고만 하면…… 라엘?”

“…….”

“라엘?”

“……시발.”

왠지 사기당한 기분이 든다. 혼자 착각한 거지만.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반지를 뺄까? 던질까? 이전에 느꼈던 죄책감과 책임감이 휴지조각이 되어 날아갔다.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대는 레온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게 그 후에 일어났던 모든 일과 생각은 오로지 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착각이었다.

맙소사 정말……. 어쩌지……? 이건 속은 것도 아니고 안 속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에 휩쓸려 프러포즈까지 승낙하고……. 부모님한테 허락도 받고……. 돌이킬 수가 없다.

“……레온.”

“……왜, 왜?”

심각한 라엘의 표정을 보고 혹시라도 물러버릴까 걱정되었는지 레온이 말을 더듬었다. 크게 심호흡한 라엘이 말했다.

“키스해줘요. 진하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험악한 표정에 내심 쪼그라들어 있던 레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허리를 팔로 감고 그대로 키스했다. 레온의 등에 팔을 두르며 라엘은 정말로 체념했다. 뭐,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살면 되지 뭐, 하하!

얼마 뒤 레온은 라엘의 도촬사진(모자이크 처리함)와 함께 [내 자기♡]라는 메시지를 트위터에 올렸고 그것은 첫 부부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경종이었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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