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side story No.1~ (16/18)

그림자 왕관 ~외전~

그럼에도 행복하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이어지는 것이 있기에

그리하여

이야기 속의 모든 사람들은 눈을 감는 그 날까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외전 1 ~side story No.1~

-펼쳐지지 못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이야기.

“낄낄, 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지.”

“무슨 뜻이야?”

눈썹을 치켜들며 반문하자 노인의 주름진 입술이 흉측하게 말려 올라간다.

“어차피 죽을 몸인데 그게 뭐가 궁금해?”

“죽지 않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제대로 말해주지 않을 거라면 댁의 이야기를 헛소리라 생각해도 되겠지?”

“맹랑한 꼬마군. 낄낄. 마음에 들어. 기분 좋으니 알려주지. 스물은 넘기지만 서른은 넘기지 못해, 꼬마. 그러니 무얼 가질 틈이나 있겠나.”

“언제 죽더라도 내 것은 내 것이지.”

노인의 거슬리는 웃음소리가 재차 들려온다. 정말로 재밌다는 듯 노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주름진 손가락이 다니엘을 향했다.

“네 자리에는 너를 대신할 것이 있지. 네 것도 그 녀석의 것이야.”

“용하다기에 참았는데, 이제 더는 못 듣겠군.”

불쾌해진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를 뒤져 손에 잡히는 동전을 노인에게 던져주었다. 동전이 허공을 나르고 나서야 그것이 금화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당장 자리를 떠나고 싶었기에 바로 등을 돌렸다.

“낄낄.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어. 모두 네 것이 아니게 될 거야.”

불쾌한 노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네가 하고자 했던 모든 것들. 그리고 가족도, 친구도. 왕관마저도 네 것이 아니야, 다니엘.”

노인의 마지막 말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 정체를 알아챈 노인은 대체 누구인가. 그 자리를 잠시간 배회했지만 노인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죽지는 않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건강해 보일 겁니다. 체력도 근력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입니까?”

“생명이 타들어 간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무도 당신이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병은 쭉 진행됩니다.”

오감이 점점 사라진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만족할 수 없고 어떤 향기로운 꽃을 가져온다 해도 그 향을 느낄 수 없다. 사랑하는 이를 껴안아도 감촉을 느낄 수 없다. 안쪽에서부터 타들어가는 내장 때문에 식사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여전히 건강해 보일 테지만 각혈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종국에는 심장이 멈출 것이다.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고는 오로지 고통뿐이다.

“치료법은 없습니까?”

“현재로써는…….”

“그렇다면 됐습니다.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방법이나 알려주시죠.”

다니엘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옷을 집어 걸쳤다. 상처 위에 옷이 내려앉자 조금 화끈했지만 이것도 후에는 느끼지 못한다 하니 참을 만했다. 의사는 담담한 다니엘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했다.

흔치 않은 병이었고 끔찍한 진행을 보이는 병이었다. 전장에 많이 나가는 용병들에게 아주 가끔 발병하는 것이었기에 마법사의 저주라고 여겨지기까지 하는 병이었다. 전장을 함께 다니며 주로 용병들을 치료하는 의사였기에 겨우 알 수 있는 병이기도 했다. 흔치 않은 병을 진단받은 많은 이들을 보았지만 다니엘은 그들과 달랐다.

“가장 오래 버틴 사람은 몇 년을 버텼습니까.”

“삼 년……입니다.”

“그의 최후는?”

“……고통에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습니다.”

“그럼 삼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군요. 앞으로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저와 비슷한 병을 가진 사람들을 꽤 본 것 같으니 도움을 줄 수 있겠죠?”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 있습니까?”

다니엘의 질문에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두렵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말입니다.”

다니엘은 웃었다.

“아주 예전에 아주 재수 없는 노인을 만난 적 있습니다. 그는 내가 죽을 것이라고 했고 아무것도 내 손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죠.”

다시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말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 년을 십 년처럼 살아왔습니다. 삼 년 후에 죽는다 하더라도 전 이미 남들보다 오래 산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삼 년이면 충분하군요. 죽음을 준비하기에는 아주 긴 기간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할 일이 아주 많습니다. 다니엘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환자가 기다리고 있으니 일단 일어나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죠.”

의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문밖의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다니엘의 하루는 바빴다.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다니엘은 바쁘게 하루를 살았다.

“차라리 왕관을 받는 것은 어떠냐?”

“싫은데요.”

“왜!”

“이 일을 당연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바마마.”

“왕관을 쓰는 느낌은 꽤 좋단다.”

“그 좋은 느낌을 아바마마께서 오래 느끼셨으면 좋겠군요.”

쳇, 하는 소리가 들린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오늘도 다니엘에게 왕관을 넘기는 것을 실패한 왕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가 스무 살이 되던 그날부터 끊임없이 다니엘에게 왕좌를 물려주려 했던 왕의 백서른 번째 권유가 오늘도 실패로 끝나는 날이었다.

영양가 없는 대화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문이 열린다.

“형님!”

“로렌.”

“어째서 제게 영지가 주어진다는 거죠? 형님께서도 알고 있는 일이 맞아요?”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어.”

“왜요!”

잔뜩 흥분한 그의 이마에 딱밤을 놓아주었다. 로렌은 으악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쌌다. 오랜만에 이마를 맞은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마마를 봉양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몸이 힘겨워.”

“제가 잘할게요!”

“네가 굉장히 잘하고 있어서 내린 결정이야. 이대로라면 아바마마께서 네게라도 왕위를 물려주려고 할 기세거든.”

“헉! 그건 아니잖아요!”

“하고 싶으면 하실 분이란 것도 알잖아.”

“……그러네요.”

시무룩한 표정으로 로렌은 답했다. 제게 영지가 주어지고 그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화들짝 놀란 그는 어떻게든 왕성에 남고 싶어서 다니엘을 찾아온 것이었지만 태도를 보아하니 절대로 들어줄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 포기한 것은 로렌이었다. 다니엘은 현명한 사람이었고 분명히 생각이 있어서 그리 결정을 한 것일 거다.

“자주 놀러 와도 돼요?”

“물론이지. 하지만 네 영지를 돌보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주 놀러 오실 거죠?”

“적어도 아마바바께서는 자주 가실 것 같다. 그리고 난 궁 안에서 서류에 도장이나 찍고 있겠지.”

“……그래도.”

“시간이 되면 꼭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을게요.”

잔뜩 기가 죽은 로렌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애잔하여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것은 싫다고 본인이 스스로 말을 하지만 가끔 제가 머리를 들이미는 것이 썩 싫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새로이 주어진 제 영지에 다니엘의 방을 마련할 것이라며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로렌을 볼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사랑하는 아버지도 동생도 제가 곁에 남아있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저 혼자만이 안고 가야 할 짐이고 진실이었다.

자신이 가진 병은 의사의 말대로 티가 나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 그 병을 직접 몇 번이나 본 의사만이 알아본 그 병은 심지어 어의까지 속일 수 있었다. 그것은 유용하긴 하였지만 위험하기도 했다. 아무런 징후도 없이 자신이 죽는다면 혹시나 독살로 의심받지 않을까. 혹시나 곁에 있을 로렌이 배후로 의심받는 것은 아닐까. 어찌해도 의심을 피할 수는 없을 테지만 차라리 그를 멀리 보내놓는 것을 선택했다. 의심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이기적인 이들이 있어 걱정을 덜 수 없다. 제 영지에 만족하여 지내고 있는 그를 본다면 그나마 의심은 덜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그런 걱정 때문에 고작 열일곱의 어린 동생을 홀로 영지로 보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로렌을 위해 가장 신뢰하는 몇 명의 귀족들을 추려 측근으로 보내기로 했다. 생명을 걸고 그를 지키겠다고 맹세하는 이들을 보자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그 이상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해주어서도 안 됐다. 로렌은 왕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다가오는 저주스러운 미래를 준비했다.

용병단은 일종의 탈출구였다.

이전에도 외유를 즐기는 편이었지만 의사의 진단 이후로 그 의미는 달라졌다. 바깥만이 자유로웠다. 현실에서 벗어나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제 현실이 아닌 바깥에 더욱 기댔다. 왕궁 안에서의 일이 점점 늘어나며 어딘가의 전쟁에 직접 참가하는 것은 요원해졌다. 그래서 용병단을 만들었다.

“내가 없는 동안은 네가 용병단을 운영해야 해.”

“한 번 살려주셨다고 너무 열심히 부려먹는 것 아니신가요.”

“네 목숨 값은 비싸다며. 본인이 한 말을 부정하려는 거야?”

“그건 아닙니다. 너무 비싼 몸값을 책정해주셔서 당황했을 뿐이죠.”

유들거리며 넘어가는 남자를 보며 다니엘은 웃었다.

어느 왕국의 의뢰로 지하의 도박장을 토벌할 때 만났던 남자였다. 내려온 명령은 현장에 있는 모든 이들, 노예들까지 죽이라는 것이었지만 다니엘은 그만은 데리고 나왔다. 처음부터 이런 저질스러운 명령을 내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의 말은 구역질이 난다. 그리고 남자만은 자신에게 말했다.

“살려주세요.”

“네가 내게 뭘 해줄 수 있는데?”

어차피 살려줄 생각이었지만 그 순간에도 심술이 돋았다. 그래서 물었을 뿐인데 돌아오는 답은 명쾌했다.

“무엇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제 목숨 값은 굉장히 비쌉니다. 오늘은 저만큼이군요.”

남자의 손을 따라 위쪽을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대진표와 함께 각각의 노예에게 걸린 상금들이 적혀있었다. 그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돈이 몰린 곳은 남자의 이름 아래였다.

“쓸 만하겠네.”

“그렇죠?”

검으로 목숨을 빼앗는 일밖에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날만은 처음으로 검으로 사람을 구했다.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지려는 듯 남자는 다니엘의 곁을 지켰다. 다니엘의 정체를 안 이후에도 그는 놀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끝이었다. 정체가 어찌 되었건 다니엘은 다니엘이라 말을 해주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에게 자신의 뒤를 맡겼다.

“그런데 내가 네 아래에 소속되는 것은 싫으니 단장은 내가 하련다. 너는 부단장을 해.”

“원래 학교도 교장이 명예직이고 교감이 사실 주인이라고 하던데요.”

“학교에 발도 들이지 못한 주제에.”

“보고 듣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원래가 똑똑하니 금세 아는 법이죠.”

남자, 부단장은 웃었다.

부단장은 제 목숨 값을 차고 넘칠 정도로 잘해주었다. 부단장은 다니엘이 자리를 비울 때 완벽하게 그의 역할을 해냈다. 용병단은 점점 커졌고 일 년이 되기도 전에 어지간한 곳에서는 시비를 걸지 못할 정도였다. 용병단이 그 용적을 늘려나가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정작 문제는 다른 곳에서 생겨났다.

“……서명……. 어쩌지.”

“……음. 다니엘이라고 하면 안 됩니까? 흔하지 않은 이름은 아니잖아요.”

“필체에서 나라는 티가 나면 어떡해? 귀족 대상이면 내 서명은 차고 넘칠 정도로 봤을걸.”

귀족가의 호위 임무였다. 앞으로의 용병단의 방향을 생각하면 귀족과의 관계는 중요했기 때문에 좋은 기회였다. 그래서 애써 잡은 기회였는데 이따위 서명 때문에……!

“다른 사람 이름으로 하죠. 이참에 가명 하나 만드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래. 막 생각난 이름이 있어.”

“오, 뭡니까.”

“라엘.”

“헉!”

부단장은 놀랐지만 다니엘은 이미 사인을 마쳤다. 입을 쩍 벌리고 나라 잃은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다니엘은 웃었다. 반응이 항상 심심하지는 않은 남자였다.

“목숨도 내줬는데 이름은 못 내줘?”

“목숨도 내드렸는데 이름까지 뺏어갑니까? 치사하게.”

“그깟 이름 하나 지어주면 되잖아.”

“좀 먼저 지어서 하면 안 됩니까. 아, 계약서 이것뿐인데…….”

무르지도 못하고……. 투덜대며 부단장은 계약서를 펄럭이며 잉크를 말렸다. 목숨을 바치는 것은 원해서 했지만 이름을 기습적으로 빼앗긴 것에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어때. 어차피 아무도 네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던데. 그냥 부단장이지.”

“뭐, 그렇네요. 나중에 왕자님께서 용병단에 질리면 여긴 제거군요.”

“그렇게 해.”

“그런데 왕자님은 죽여도 안 죽을 것 같아요.”

“잘 봤어.”

말은 그러해도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는지 부단장은 낄낄 웃으며 품 안에 계약서를 갈무리했다. 후에 계약서를 펼쳐보면 그때는 알게 될 것이다. 서명은 부러 부단장의 필체로 했다. 제가 죽은 후 용병단을 그에게 자연스럽게 맡길 수 있도록. 물론 제가 자리에 없는 동안 대신 일을 시키기 위한 목적도 분명히 있었다. 사람이란 것은 쓸 수 있을 때 써야 한다.

삼 년이 지났다. 의사가 말한 가장 오래 버텼다는 기간이었다. 열아홉에 사형선고를 받았건만 아직 죽음의 신은 저를 데려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삼 년을 버티고 나니 다가올 죽음이 두려워진다. 살아가는 기간만큼 소중한 것들은 늘어만 가고 기억들은 쌓여간다. 세상을 등지는 것이 두렵다. 죽음을 선고받은 그날에는 느끼지 못했던 공포와 두려움이 이제야 몰려온다.

살고 싶다.

일생을 오감이 사라진 상태라 하여도 그래도 살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이 제 곁에 있다는 것을 알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제 사람들이 살아가고 행복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남은 삶은 충분할 텐데.

가장 먼저 희미해진 것은 미각이었다. 의사가 건네준 약으로 충분히 진행을 느리게 할 수 있었는데 두려움이 저를 잠식하자 운명은 마치 비웃듯 그의 목을 잡아 죄었다. 달아날 수 없는 족쇄에 붙잡혀 그저 죽어갈 뿐이었다.

그를 만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죽음이 두렵고 삶이 슬펐다. 왕궁의 일도 용병단의 일도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은 제가 그 기둥이 되어 있기에 의무적으로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버티는 것이 힘들어 뒷골목을 헤매었다.

평소라면 좋은 옷을 입은 다니엘에게 시비를 거는 멍청한 불량배들이 있었을 텐데 오늘은 비가 와서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필요할 때는 보이지 않는 쓸모없는 놈들이라 생각하며 다니엘은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불량배 대신 거적때기를 하나 주웠다. 말하는 거적때기였다.

“구해주길 바라?”

몇 번인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허나 뒷골목에 이런 상태로 버려진 이들은 대부분 차라리 죽기를 바랐고 그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른 대답을 들려주었다.

“무척이요.”

지저분한 천 아래에 언뜻 비치는 그의 눈에는 아직도 삶에 대한 열망이 머물러 있었다. 저는 가지려야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진 것이 부럽고 슬퍼져 다니엘은 그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와우.”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자신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목소리도 똑같네요. 재앙이 둘로 늘어났어.”

“그래?”

제 목소리를 들어볼 수는 없었기에 부단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도 나이도 목소리도 같았다. 제게 숨겨진 쌍둥이가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마 도플갱어인가 싶어 성수도 슬그머니 뿌려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인간이었다. 그에게 성수를 뿌린 것을 눈치챈 부단장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지만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자신과 꼭 같은 얼굴을 가진 그를 본 순간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불쾌한 노인이 생각났다. 제 죽음을 비웃으며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울 것이라 말했던 노인. 기분 나쁘기는 했지만 그저 그뿐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던 사실들이 하나씩 제 앞에 형태를 드러낸다. 다니엘은 죽어가고 있고 그 앞에는 꼭 닮은 다른 사람이 있었다.

운명은 어찌 이리도 잔혹하며 흥미로운 것인지. 노인이 말한 제 모든 것을 가져갈 이가 눈앞에 나타난 것일까. 불안하고 지친 표정의 그를 보며 박탈감에 화가 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즐겁고 유쾌했다.

“대체 어디에서 일하게 하려는 겁니까?”

이미 답은 정해져있었다.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내 대타.”

“네?”

“네?”

당황한 두 사람의 답을 들으며 다니엘은 웃었다.

이미 제 목숨은 죽음의 아래에 놓였으니 신도 저를 가엾어 한다면 이 정도의 유희는 즐길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다니엘은 결심했다. 남자를 자신으로 만들겠다. 완벽하게 그를 자신으로 만들어 제가 죽더라도 다니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제 것이 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라 하였지만 마지막까지 제 이름 아래에 모든 것이 놓이게 만들겠다. 운명이 저를 쥐고 놓아주지 않으려 하니 그렇다면 그 아래에서 그것이 원하는 대로 춤을 추면 그만이다. 허나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주는 것이다. 제 손으로 스스로 그에게 모든 것을 내어 줄 것이다.

그것은 다니엘이 운명에게 거역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것이었다.

“네 이름은 뭔데?”

다니엘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에 황망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남자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사연은 있었고 그것이 남들에게 이야기하기가 힘든 것인 사람 또한 있는 것이다. 당장에 옆에 있는 부단장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알려줄만한 이름은 없어요.”

남자는 대답하며 마치 울 것 같은 표정을 만들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굳이 캐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마침 그에게 줄 만한 적절한 이름이 여기에 있었다.

“그래? 그럼 내 이름 하나 가져.”

“……네?”

“라엘이야. 어때? 꼭 형제 같은 이름이지?”

“저기요?”

남자가 당황했다. 그리고 부단장도 옆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다니엘을 쳐다봤다. 이봐요, 남의 걸 뺏더니 마음대로 남 줍니까? 이미 뺏긴 이름에 미련을 두는 부단장을 사뿐히 무시하고 다니엘은 남자에게 말을 붙였다.

어차피 그가 가질 이름은 모두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그 반쪽을 나눠 가지는 것이 뭐 어떻겠는가. 다니엘의 반쪽과 라엘의 반쪽을 남자는 가질 텐데. 온전한 이름을 가지지 못할 반쪽씩의 이름을 건네주어 하나를 만드는 것은 어떠할지.

남자는 결국 다니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그날부터 라엘이 되었다.

훗날 그에게 본명을 듣게 된 다니엘은 웃었다.

“별로 어렵지도 않은걸.”

“발음해보시죠.”

“원래 높은 사람들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아. 야, 너. 이런 거면 충분하거든.”

“퍽이나요.”

라엘이 코웃음 쳤다. 사람도 신도 다른 곳에서 왔다는 그의 이름은 이질적이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정말로 그가 다른 곳에서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제 이름이 원래는 부단장의 이름이었다는 것을 들었어요.”

“입이 싼 사람이네. 중고긴 하지만 쓸 만하니까 넣어둬.”

라엘이 킥킥대며 웃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적응한 그는 이제 용병단의 일에 대해서는 다니엘의 대리를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왕궁으로 데려가도 될 정도였다. 제가 결정한 일이었지만 라엘의 적응력에는 가끔 감탄 했다.

“부단장은 목숨도 이름도 왕자님께 바쳤다고 했어요.”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지, 내가.”

“그래요. 그래서 저도 그러려고요.”

라엘이 미소 지었다.

“저를 구해주고 삶을 준 왕자님께 제 목숨과 이름을 드릴게요.”

“넣어둬도 되는데.”

“제게 인생을 강제로 줬으니 이 정도는 받아두시죠. 그리고 잊지 말아주세요, 제 이름을.”

“잊지 못할 이름이라 잊기도 힘들겠는데.”

“이곳에서 제 본명을 아는 것은 왕자님뿐이에요.”

“……음.”

“제 모든 것을 드릴게요. 그게 삶을 나눠 줄 당신에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요.”

“부담스럽게.”

“고마워요, 다니엘.”

내게 삶을 주어서. 라엘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다니엘도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슬프고 헛되고 그 무엇보다도 빛나는 선물이었다.

지루하게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 제 손으로 직접 살린 두 사람은 다니엘을 즐겁게 했다. 소중한 것이 생기는 것이 슬플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즐거웠다. 그들이 곁에 있는 것에 감사했다. 제 죽음을 슬퍼할 사람이 더 생긴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여전히 운명은 제 편이 아니었다.

“단장, 어……. 어디 다쳤어요?”

“코피가 좀.”

“놀랐잖아요. 단장에게 원한을 가진 누가 칼이라도 품고 온 줄 알았네.”

더러운 성격으로 사방에 원한을 쌓고 다니는 저희네 단장을 걱정하며 용병이 들고 온 아침식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나갔다. 성인 남자 네다섯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아무리 먹어도 기운이 나지 않고 맛조차 느껴지지 않았기에 그저 힘이 날만한 음식들을 씹어 삼켰다. 점점 늘어나는 식사량에 라엘이 투덜거렸지만 죽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이렇게라도 에너지를 보충해야 했다.

식사를 하던 중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시체가 걸어 다니는 것과 다름이 없는 몸이었다.

“벌써 5년째군요.”

“선생이 보기에 어떻습니까. 언제까지 살 것 같습니까.”

“……뭐라 답하기가 힘들군요. 그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았지만 그렇다고 병의 진행이 더딘 것도 아닙니다.”

“선생 말대로 미각 쪽은 완전히 사라진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청각도 시각도 괜찮네요. 뭐…… 다른 감각이 둔해진 것은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군요. 칼에 베여도 별다른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요.”

“그건 감각이 둔해져서가 아닙니다.”

의사는 한숨을 내쉬며 다니엘에게 약통을 내밀었다. 그의 말대로 다니엘이 칼에 베이거나 외부의 충격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였다. 내부의 끔찍한 고통이 더 이상의 고통을 느끼는 것조차 막고 있었다. 내장이 타들어가고 혈관을 타고 날카로운 것들이 흐르는 고통이었다. 

발작이 일어나면 폐부가 조여 들어 숨을 쉬는 것마저도 힘들었다. 이미 항시 진행되고 있는 고통 속에서 한참 후에 숨이 쉬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죽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결국 살아남는다.

“각혈은 어떻습니까?”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지난번의 약은 이제 듣지 않는 것 같네요.”

“다른 약을 드리겠습니다. 독한 약이라 몸에 좋지는 않지만……. 이미 의미는 없는 것 같군요.”

이미 약은 치료의 목적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나마도 병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하고 있던 의사 덕분에 취할 수 있는 도구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에 다다랐다. 하지만 아직은 안 된다. 아직은 준비가 끝나지 않았고 그때까지는 살아남아야 했다.

“다음번에는 괜찮은 약을 구해놓겠습니다.”

“다음번이라는 것이 있다면 말이죠. 고마워요, 선생.”

죽음은 가까이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그 운명에 굴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병에 걸린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끄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통을 이겨내면 그만이었다. 유난히도 멀게 들리는 의사의 인사를 들으며 다니엘은 병원을 나섰다.

아직 시간이 남아있다.

다니엘은 라엘을 완벽하게 다니엘 그 자체로 만들었다. 그는 어렵지 않게 다니엘이 되었고 다니엘의 목소리와 다니엘의 얼굴로 다니엘을 연기했다. 그 누구도 그가 다니엘이 아닌 다른 누군가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다니엘이 되기 위해 찾아온 것처럼, 그는 그렇게 제 자신을 지워갔다.

왕과 로렌을 위해 만들어 놓은 안전장치였다. 다니엘이 죽고 난 이후 로렌이 왕이 될 때까지는 아마도 라엘이 그들을 돌봐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제게 그만큼의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고 보답할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다니엘로서 남은 그는…….

찬 물을 확 뒤집어쓴 것 같았다. 다니엘이 아닌 라엘은…… 지금은 무엇이 될 수 있는 것이지? 나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다니엘이 라엘를 제 자리에 밀어 넣으며 존재를 지워가던 것처럼 라엘은 다니엘의 자리에서 자신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는 라엘의 의지는 전혀 없었다.

선택……. 라엘은 선택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제가 죽음 앞에서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었던 것과 같았다. 어떻게 같은 일을 겪은 제가 그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헉!”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이 가슴을 쥐어짠다. 배 안에서 괴물이 날뛰며 안쪽을 헤집는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며 몸이 절로 웅크려진다. 솜털 하나하나까지 예민해져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고통은 배가 된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통을 감내한다 하더라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진 안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요. 괜찮…….”

“……아…….”

“……찮습니까? 병원으로 모셔다 드릴까요?”

하하, 그 병원에서 방금 나왔는데요. 고통을 이기지 못한 몸뚱이는 어느새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청각이 돌아오자 주변에는 갑자기 쓰러진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낯선 사람은 걱정 어린 목소리로 자신을 병원으로 옮겨주겠다고 한다. 

다니엘은 고개를 저었다. 썩 좋은 해결방법은 되지 못할 것이었다. 일어서 몸을 대충 털어낸 다니엘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따뜻한 사회의 감사함만을 받기로 했다. 그리고 참 타이밍도 못 맞추는 라엘이 다니엘을 호출했다.

“그냥 네가 해.”

황제를 맞이할 수 있는 힘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없었다. 라엘은 경악했지만 사실이 그러하여 그에게 일을 맡겼다. 고통이 엄습한 후에는 무기력해지고 간헐적으로 다시 발작이 일어난다. 그 기간은 얼마 전까지는 일주일이었지만 그 지난번에는 삼 주일이었다. 기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제는 완벽하게 제가 된 라엘이었기에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다. 수정구 너머로 욕설이 들려오는 것에 다니엘은 미소 지었다. 저리 말하지만 정말로 잘해줄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상냥해서…… 그리해줄 것이다.

라엘의 상냥함에 기대는 제가 혐오스럽다.

“황제가 나와의 하룻밤을 사고 싶다고 했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로윈을 위해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리고 라엘로서는 하나의 결론밖에 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제가 황제와 밤을 보내죠.”

괜찮겠냐고 되물었지만 라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한다. 그는 언제나 다니엘을 우선으로 했다. 제 몸을 살라 오로지 그 앞에는 저밖에 없다는 듯. 죄책감이 울컥 밀려왔지만 눈치 빠르게 알아챈 라엘이 미소 지었다.

“왕자님의 그림자인 제가 어두운 부분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눈물이 울컥 솟아오를 뻔했다. 이만치나 자신을 아껴주고 믿어주는 라엘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홀로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허나 비밀을 공유하는 순간 힘들어지는 것은 두 사람이 될 뿐이었다. 결코 해결법이 없는 문제는 차라리 묻어두는 것이 나았다.

라엘을 끌어안으며 안심했다. 아직은 끌어안은 이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라엘을 보낸 후 다니엘은 로렌의 영지로 향했다. 로렌은 오랜만에 만나는 형을 반갑게 맞이했다.

처음에는 한 달이 짧다 하고 왕궁으로 찾아오던 로렌이었다. 외로움을 버티지 못하고 수시로 수도로 걸음을 하던 로렌은 제 영지를 제대로 돌보기 시작하며 천천히 왕궁에 걸음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은 서운해하였지만 그는 그만큼이나 제 영지를 잘 다스리고 있었다. 성으로 향하는 길은 깨끗하고 정돈되었으며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웬일이세요. 얼굴을 잊어버릴 뻔했어요. 찾아와주셔서 너무 기뻐요!”

“나도 그래. 잊어버리기 전에는 찾아와야 할 것 같아서.”

“얼마나 머무르실 거예요? 기왕이면 오래 머무르셨으면 좋겠어요. 형님과 함께 보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잔뜩 들뜬 로렌에게 다니엘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억지로 떼어놓은 그가 저를 반가이 맞이하는 것을 대하기 힘들었다.

“미안, 오래는 머무르지 못해. 급한 일이 있거든.”

“하, 하루도 안 돼요?”

“……하루 정도는.”

황제와 라엘이 밤을 보낼 때 들이닥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어도 하루는 여유가 될 것이었다. 그 하루를 사랑하는 동생과 함께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저 그 앞에서 발작하지 않기를 빌 뿐…….

“대신 오늘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겁니다!”

“……애도 아니고.”

“한 달 분이니까요. 형님이 오셔서 이렇게 기쁜 동생에게 실망을 안겨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허리에 손까지 척 올리고 답하는 그는 아직 스물의 청년이었다. 앳된 티가 아직도 남아있는 얼굴을 보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로렌과 보내는 마지막 시간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그와 보내는 순간순간이 더없이 귀중했다. 단 한 순간도 로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두 눈 가득 그를 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형을 보며 신이 나 재잘거리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음……. 제가 권했지만 막상 하려니 정말로 부끄럽네요.”

“지금이라도 방을 옮길까?”

“아니, 아닙니다!”

로렌은 잽싸게 침대 위로 올라와 다니엘의 곁에 누웠다. 슬쩍 다니엘 쪽으로 몸을 옮긴 로렌은 씩 웃으며 그의 허리를 껴안았고, 그에 다니엘은 솔직히 당황했다.

“놀랐죠! 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자요. 옛날에 형님이 해줬던 것처럼 해주세요. 딱 오늘만이니까요, 네?”

“……그래.”

키득거리며 제 가슴 안에서 웃는 로렌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려주었다. 아주 어렸을 때 했던 것처럼 그렇게 그를 끌어안았다. 색색 잠든 로렌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다니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로렌이 칭얼거리는 듯 잠꼬대를 했지만 이미 깊이 잠들었는지 깨어나지는 않았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로렌.

다음 날 로렌에게 종이와 펜을 빌려 편지를 썼다. 긴 내용은 아니었다.

“미안하다.”

라엘의 이마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라엘에게도 로렌에게도, 자신을 알고 있는 모두에게 미안했다. 결국 사라져버릴 인생이라면 차라리 자살이라도 하여 진작 사라져버리는 것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아직도 그 인생을 버리지 못해 이리도 주변의 사람들을 힘겹게 한다.

“이게 모두 내가 겁쟁이기 때문이야.”

운명을 거부하고 죽음을 피하려 했다. 비록 고통스럽다 하더라도 삶을 택하고 싶었다. 밝은 하늘 아래 서 있고 싶었다.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고 발버둥을 치며 그렇게 다가오는 죽음을 외면하였다.

결국 운명은 언제나 곁에 있었고 남는 것은 아쉬움뿐이었다.

피곤했는지 라엘은 눈을 뜨지 못했다. 사실은 황제에게 몸을 내주는 것은 자신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죽어 사라질 몸뚱이를 그에게 바치는 것이 옳지 않는가. 황제가 사랑하는 것이 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러하다. 그는 라엘과 다니엘을 완벽하게 구분하고 있었지만 아직은 다니엘이 둘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쉬울 것 없는 제 몸을 내주어야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은 황제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체온 외에는 이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몸은 그를 기쁘게 할 수도 만족시킬 수도 없었다. 헛되이 몸만을 내주고 아무것도 얻지 못할 위험마저 있었다.

사실은 두려웠다. 황제에게 안길 때 썩어버린 제 몸을 그가 알게 될까 봐. 제가 죽어가는 것을 황제가 알고 모두가 알게 되는 것이 사실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애써 피하고 외면하였던 그 진실을 그가 직시하게 할 것 같았다.

“넌 어떤 상황이든 똑바로 보고 나아가는구나.”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죽음이라 할지라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더욱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강함에 기대어 그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 일을 해서는 안 되었다.

갑자기 잠이 쏟아졌다. 쉽게 피로해지는 몸은 언제나 휴식을 필요로 했다. 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라엘의 곁에 누웠다. 품 안의 편지가 부스럭거렸지만 결국 그대로 잠들었다. 사람의 온기를 느낀 마지막 밤이었다.

다니엘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부단장을 얻었고 그렇게 라엘을 얻었다. 적어도 그들을 얻은 것은 언제나 그 순간의 선택 덕분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었다.

“……고마워, 하하.”

제 검에 찔려 무너지는 남자의 몸을 보며 다니엘은 웃었다. 남자가 완전히 무너져 쓰러진 것을 본 그는 엄습하는 현기증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부터 배까지 안쪽이 거의 보일 정도로 심하게 상처가 나 있었다. 이 정도라면 아마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몸이었기에 충분한 상처가 아니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자신을 습격한 괴한들은 의욕이 대단했다. 누가 보아도 죽을 만큼의 상처였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다니엘은 피에 젖은 망토를 그의 위에 덮어주었다. 제게 죽음을 안겨준 그를 위한 선물이었다. 잠시 후 또 만날지도 모르겠네, 친구.

라엘의 품에 안겨 마지막으로 부탁을 했다. 정말로 하지 않으려 했는데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자신이었다. 홀로 남을 로렌이 걱정되었다. 그를 부탁할 수 있는 것이 라엘밖에 없었다. 그것을 위해 상황을 조작하고 그가 로렌을 지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자신은 이미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타인에게 죽임 당하는 것으로 가장하였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라엘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고 있다. 그것에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아쉽게도 자신을 끌어안은 그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뜨자 눈앞에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고개를 숙여 제 몸을 확인하자 피에 젖은 옷도 끔찍한 상처도 더 이상은 없었다.

다니엘은 웃었다.

아아, 이곳이 사후세계라 하는 곳인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조금만 움직이면 영원히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움직일 수 없었다. 드디어 주어진 선택권이었다. 그리하여 다니엘은 선택했다. 고민은 짧았다.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행복해질 때까지. 그때까지만 이곳에서 그들을 지켜볼 수 있도록. 그렇게 하렵니다.”

그리하여 초원 가운데 서 있는 것은 오직 다니엘뿐이었다.

그가 찾아오는 그날까지,

오로지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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