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시작을 위한 끝 ~'End' for the start~
제국군은 연락을 받자마자 서둘러 용병단의 숙소로 왔지만 레온을 바로 만나지는 못했다. 황제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 기사단장에게 부단장은 고개를 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조바심을 내는 그에게 부단장은 친절하게 설명해줘야 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지금 성관계를 하고 계십니다.”
차마 떡친다고 말할 수 없어서 단어를 바꿨더니 참 이상한 문장이 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기사단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어, 언제쯤 끝나실 것 같은가?”
“……글쎄요…….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언제 들어가신 건지만 알려주시게.”
“……사흘째입니다.”
“……뭐?”
설마, 농담이겠지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기사단장에게 부단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믿어지지는 않는 사실이지만 조금 전 부단장이 직접 확인하였기에 당당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다.
부단장은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며칠째 닫힌 문 앞에서 노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식사는 그가 끼니때마다 문 앞에 가져다 두긴 했지만 그걸 가져가는 날이 있었고 가져가지 않는 날도 있었다. 지금은 두 끼째 식사를 가지고 가지 않은 상황이었다. 닫힌 문 안에서 두 사람이 대체 뭘 하는지 짐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양옆 방에 머무르던 방주인들이 울면서 뛰쳐나왔던 덕이다.
“잠자고 싶어요, 으어엉!”
“……애인 보고 싶다…….”
정력도 뛰어나신 분들이었다. 범상찮다, 범상찮다 했지만 참으로 비범한 커플이었다. 하긴, 애초에 사랑싸움으로 대륙전쟁을 일으켰으니 정말로 뭐라고 하겠느냐마는…….
노크를 했는데도 반응이 없기에 역시 걱정이 됐다. 혹시라도 쉴 새 없이 떡을 치다가 복상사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었다. 둘이 어떤 성관계를 즐기든 둘 중 하나가 죽으면 또 전쟁이 일어날 건데 걱정되지 않을 리가. 제국군이 도착했는데도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쿵떡방아만 찧는 건 너무한 것 아닌가. 결국 부단장은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용기를 냈고, 문을 열었다.
“아, 아흣! 아앙, 흐앙-.”
“흣, 라엘……. 라엘…… 예뻐, 응? 더 울어봐…….”
몹쓸 꼴을 봤다. 부단장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것이 바로 조금 전이었다.
레온과 라엘은 의도치 않게 기사단과 용병단의 화해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솔로천국, 커플지옥!’ 에 입각한 정신적인 유대와 그들이 문밖으로 나오기를 기다리며 벌린 술판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약 일주일 동안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기운이 달렸는지 더 이상 옆방 주인들이 울면서 뛰쳐나오지는 않았지만 가끔 간지럽고 닭살스러운 소리가 새어 나와 충분히 괴로웠다. 가지가지 한다. 일주일 동안 하릴없이 술을 퍼먹는 시간은 용병단과 기사단이 매우 편안한 관계가 되기에 충분했다.
드디어 방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급격하게 친해진 용병단과 제국군이 하나같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동태눈깔과도 같은 그 표정을 본 두 사람은 그것을 가뿐하게 무시해버렸다.
“즐거운 시간 보내셨습니까?”
“물론. 모태솔로는 절대로 경험할 수 없는 환상적인 시간을 보내고 왔다고 해도 이해 못하겠지?”
“모태솔로 아니거든요!”
“……거기 이끼 안 꼈어?”
라엘이 안쓰러운 눈으로 아랫도리를 쓱 훑자 알 수 없는 오한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를 가렸다. 그리고 조금 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또 말려들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게 맨날 놀림을 당하는 거지. 나한테도.”
“……일합시다.”
라엘은 씩 웃으며 부단장에게 레온과의 거래에 대해 말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래는 잘 이루어졌으며 이제 제국에 의한 전쟁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알려줬다. 레온이 지금까지 선전포고를 했던 것들을 다시 거둬들일 것이고 몇몇 왕국에는 적절한 수준의 보상금이 주어질 것이다.
그가 건드린 왕국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도 굳이 몇몇 왕국이라 칭해진 것은 그가 반쯤 미친 와중에도 정치적인 계산을 하며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한번쯤은 딱밤을 놔줘야 하는 왕국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할 것이고 그 왕국들에는 이미 응징이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저 아난처럼 충성을 맹세하고 봉신으로서 예우를 다하였음에도 날벼락을 맞은 왕국들이 있었기 때문에 보상금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뭐랄까, 체계적으로 미치셨군요.”
주변에 레온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말했다.
“신기하지?”
“……단장도 포함이거든요.”
주제파악이라고 모르세요?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 이야기 몰라요? 부단장은 아직도 기가 막혔다. 라엘은 부단장을 실컷 놀린 후 로렌을 찾아갔다. 그는 용병들과 어울리는 것은 어색한지 방 안에 혼자 있었다.
“왕자님을 혼자 뒀습니까?”
“부단장님이 자주 와주셨어요.”
로렌의 볼이 약간 붉어졌다. 여전히 무른 그의 태도에 라엘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이 너무 물러서는 안 됩니다, 왕자님. 앞으로 왕자님의 손발이 될 사람이니 더욱요.”
“……네? 그는 단장니……ㅁ……. 아니, 라엘, 당신의 사람이잖아요.”
호칭의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인지 대화가 전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로렌은 아직도 라엘을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고 결국 라엘은 일단 호칭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존칭은 어색하니 그냥 라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저는 다니엘 님의 사람이고 그의 모든 것을 상속받은 로렌 왕자님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라엘의 말에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전히 발간 얼굴로 머뭇거리며 말했다.
“……라엘……만 괜찮다면……. 형님처럼, 그렇게 따르고 싶어요.”
“……아.”
다니엘과 얼굴도 행동거지도 쏙 닮은 라엘에게 하대하며 부하로 부리는 것은 로렌에게 너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형으로 삼고 싶다니……. 간질거리는 기분이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로렌도 자신도 사실 가족이라 할 만한 것은 정말로 서로밖에 없었다. 기댈 곳 없이 홀로 남은 자들끼리 자위하는 것 같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라엘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잘 부탁해. 로렌!”
“네, 넵……. 라엘 형님!”
로렌은 해맑게 웃었다. 왠지 사기 치는 기분이다. 그래서 더 해맑게 웃어줬다.
라엘은 천천히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해줬다. 많은 사실들을 알고 있는 로렌이었지만 그것은 대부분이 레온에게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만을 들으면 모든 일의 주도는 레온이 했던 것이었고 가장 큰 원수도 그였다. 하지만 라엘이 아는 모든 이야기 속의 레온을 듣고 로렌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대로 부추겼군요.”
“그렇지. 그래서 앞으로 골수까지 빼먹을 계획이야.”
“그럼 용서하는 게 앞으로가 편하겠네요.”
“그렇지.”
스산한 미소들이 스쳐갔다. 방금 막 맺은 끈끈한 형제의 정이었다. 앞으로 골수까지 빼먹힐 제국에게 묵념을…….
어쩌면 로렌은 다니엘보다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의 슬픔이 여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을 새로운 가족으로 삼겠다며 먼저 손을 내미는 로렌이었지만 자신의 유일한 가족을 모두 잃은 것도 그이다. 그러나 그는 머무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슬픔은 간직하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은 글쎄…… 다니엘이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로렌이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라엘은 본론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야.”
“물론 제가 로윈을 이어받긴 해야 하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형님께서 하시는 게…….”
“그게 불가능해졌어.”
“어째서요?”
“내가 제국의 황비가 될 예정이거든.”
“아, 그렇…… 네?”
“내가 이제부터 제국의 국모가 되는 거지.”
“네에에에에에에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한데 이런 평범한 반응이 오랜만이다.
라엘은 혼란스러워하는 로렌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이 시련을 잘 견디렴. 동생아……. 그래서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자, 이제부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네에……? 또 뭐가 있나요?”
“내가 이제부터 황비가 되니까 말이야.”
“으어…….”
“넌 로윈의 왕이 되는 거야.”
“……어어억…….”
“지금 당장.”
“허어억!”
새로운 형님을 얻자마자 그가 출가외인이 돼버리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로렌은 다니엘의 두뇌는 많이 닮았지만 그만큼의 담력과 과감함을 닮지는 못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로렌은 라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굉장히 혼란스러워하며, 하지만 곧 침착하게 천천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신발을 벗고 재킷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까지 꼭꼭 덮은 로렌은 그대로 잠들었다.
라엘은 당황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뭐야……. 걱정했는데 로렌은 정말로 다니엘의 동생이 맞았다. 이거 꿈 아니야! 댁이 왕이 돼야 한다니까요!
“현실도피 하지 마!”
“아…… 형님……. 아직 꿈이죠, 이거?”
“아니, 꿈 아냐.”
“그렇구나……. 꿈속의 꿈이구나…….”
눈을 감는 로렌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지만 그는 다시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이대로 잠들면 모든 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굳건히 잠을 청한 그를 보며 라엘은 기가 막혀 허-소리밖에 낼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이런 캐릭터였지?
더 이상 멱살을 흔드는 것도 소용이 없었고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마침 들어온 부단장이 로렌의 멱살을 잡고 있는 라엘을 보고 물었다.
“어, 이건 웬 폭력사태입니까?”
“이걸 봐……. 로렌이 생각보다 비범해.”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동안에도 로렌은 깨어나지 않았다. 부단장은 굉장히 실망했다.
“……아……. 이번에는 정상적인 주군일 줄 알았는데…….”
정상적인 새 주인을 모신다고 내심 기뻐했던 부단장의 표정이 라엘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잠들어있는 로렌을 보고 순식간에 슬픈 표정으로 바뀌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래, 그 핏줄이 어딜 가겠어, 내 팔자야…….
조금 뒤 부단장이 깨우자 로렌은 일어나긴 했다. 정말 내키지 않는 듯이. 그래도 바뀌지 않은 현실에 로렌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아……. 잘난 형님 덕 보며 평생을 잉여인의 삶을 살고 싶었는데…….”
“흠, 남자로 태어났다면 잉여로운 삶보다는 기왕이면 군주로서의 삶을 노리는 것은 어때?”
“그런 건 라엘 형님이 하세요…….”
“난 아주 레어하게 황비루트를 타서 말이지. 이게 난이도가 더 세거든? 아쉽게 됐네, 로렌.”
“아……. 으아아…….”
“지금이라도 실컷 괴로워하세요, 로렌 님.”
앞으로는 괴로워할 시간도 없을 테니까요. 부단장이 로렌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것은 다니엘의 마수가 돌고 돌아 로렌에게까지 뻗은 듯한 기분이었다.
하기야 다니엘이 죽은 그 순간부터 로렌이 왕이 되는 것은 예정된 일이긴 했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은 예상 밖이었다. 세상에, (새)형이 황비가 돼서 자신이 왕이 되는 거라니! 좀 상냥하게 알려주면 오죽 좋아! 다니엘을 죽어라 욕하면서도 하는 짓은 꼭 그와 같은 라엘을 부단장이 대놓고 욕했다.
라엘은 억울했다.
“대체 뭐가 문젠데?”
“이 모든 상황이요!”
“댁 말입니다!”
라엘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고, 복장아! 길길이 날뛰고 있자 라엘이 뭔가 깨달은 듯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내가 깜빡할 뻔했네.”
“……네?”
“자, 왕가의 보검이야. 하마터면 깜빡 놓고 갈 뻔했네!”
“어어억…….”
이야기를 듣고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무성의함에 부단장은 다시 한 번 라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고, 그는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볼만 빵빵하게 부풀릴 뿐이었다. 부단장의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은 라엘의 가장 큰 특기였다. 이전에는 분위기가 그래서 오랜만에 말을 들었을 뿐이지. 복장이 터지는 것은 부단장뿐으로 결정했다.
왕좌를 로렌에게 강제로 선물한 라엘은 바로 다음 날 레온과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남은 두 사람은 환장할 상황이었다. 인수인계는 해줘야지! 하고 외쳐보았자 그는 로렌이 타고 왔던 격투의 흔적이 어마어마했던 바로 그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참으로 튼튼한 마차였다.
말을 타고 가겠다는 라엘을 굳이 마차에 태운 레온은 저도 마차 위에 올라탔다. 곧 죽어도 말을 고집하던 양반이 왜 이러나 싶었는데…….
“라엘과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럼 밖에서 말을 나란히 달리면 되잖아요.”
“다른 놈들이 너를 보잖아.”
“아무도 안 봐요. 그리고 좀 보면 어때요. 닳는 것도 아닌데.”
“닳을지도 몰라.”
“물건입니까?”
라엘이 기분이 상한 것 같아 레온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나가고 싶다면 나가자. 말을 준비할게.”
왠지 불안한 기분에 라엘이 되물었다.
“……웬일로 순순히요?”
“괜찮은 방법이 생각났거든.”
거 참 그게 제일 불안했다.
“뭔데요?”
“라엘을 본 놈들의 눈을 다 뽑아버리면 되니까.”
“그냥 여기 있을게요.”
라엘은 드디어 깨달았다. 레온은 선택지를 잘못 선택하면 미친놈으로 돌아가는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국 그 때문에 라엘은 심심하기는커녕 스릴 넘치는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주변의 사람들을 다 쓸어버리려 하는 레온 때문에 그들을 지키기 위해 어마어마하게 노력을 해야 했거든! 그리고 마차 밖으로 나올 수도 없었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여행이었다.
레온은 로윈을 되찾는 것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로렌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 제국군은 용병의 옷을 입고 로렌의 사병 형태로 그의 복권을 도왔다. 그것은 라엘이 로윈을 되찾는 데 제국이 뒷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었고 레온의 사죄이기도 했다. 제후국이 아닌 속국이 되는 상황을 그는 지양했다.
로윈을 되찾으며 라엘이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이 로윈을 어마어마하게 잘 다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로윈을 되찾으러 갔는데 백성들이 너무 잘 살고 있으면……. 그렇다고 못 사는 것을 바라지는 않지만……. 왜 왔어요? 라는 답을 듣는 것만은 무안할 것 같았다.
다행히도(?) 귀족들은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 후 거의 1년 동안 조금이라도 더 기득권을 차지하기 위해 민생을 돌보는 것에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라엘이 발버둥친 그 긴 기간 동안 왕마저 정해지지 않았다면 할 말을 다 한 것이다. 덕분에 로렌은 큰 저항 없이 다시 왕국을 되찾을 수 있었다.
로윈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던 날 라엘은 뒷목을 붙잡았다. 이렇게 쉬운 일을! 그날 레온은 라엘의 방 안에 발도 들일 수 없었다.
다니엘은 드디어 죽을 수 있었다. 로렌은 라엘이 다니엘로서 남아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니엘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주고 싶은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이름으로 황비가 된다면 죽은 다니엘이 벌떡 일어날지도 몰랐다. 다니엘 좀비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다니엘은 반란 후 로윈을 되찾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난으로 향하던 중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이야기가 정리되었다. 시기가 다를 뿐 모든 것은 진실이었다. 레온이 그를 집요하게 찾았던 것은 그의 보호 아래 있던 다니엘의 안위를 알 수 없게 되어 그리한 것으로 정리되었다. 자신의 보호를 요청한 봉신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책임감으로 제국은 내란이 끝난 후 물자가 부족한 로윈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등골을 좀 뽑았다.
로렌은 로윈을 수복하자마자 바로 다니엘의 시체를 찾아 국장을 치렀다. 국장을 치르는 날은 하늘도 우는 듯 비가 오……지 않았다. 해가 쨍쨍 찌는 날이었지만 백성들은 하나같이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다니엘은 사랑받는 왕자였고 그들을 생각해주는 아름답고 상냥한 이였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어떤 왕자보다 다니엘은 백성들을 직접 두루 살폈고 그래서 다들 다니엘이 왕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란으로 인해 다니엘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들을 그리 만든 귀족들에게 모든 분노가 돌아갔다. 로렌은 반란으로 아버지와 형을 잃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왕좌를 되찾은 인물이 되었다.
그렇게 거부했음에도 로렌은 현명한 왕이 되었다. 그는 상냥했고 백성들의 말에 귀 기울일 줄 알았던 이였다. 그리고 귀족들의 헛소리를 쿨하게 잘라먹는 것이 특기였다. ‘그래, 방금 뭐라고 했소? 헛소리를 듣는 귀가 없다 보니.’
아주 멀리 돌고 돌았지만 결국 라엘은 로렌에게 왕위를 돌려줬다. 또 그가 그 자리에서 잘해나가는 것을 보며 만족했다. 내심 걱정했지만 그는 생각보다 잘해냈고 그것은 사실 다니엘이 왕이 되었다 하더라도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보다 나았다.
어쩌면 로렌이라서 가능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라엘은 드디어 안심했다.
14대 로윈의 로렌이 즉위했을 때의 반응은 걱정과 염려가 대부분이었다.
스스로 반란을 진압하고 즉위했음에도 그러한 반응이 돌아온 것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로렌 왕은 세기의 비극적인 천재로 회자되는 다니엘 왕자의 유일한 형제이다. 로렌 왕은 즉위 이전까지는 그 능력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다니엘 왕자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왕은 평화로운 어느 영지의 영주로 머물지 않았을까?
[중략]
로렌 왕은 즉위 직후부터 비범한 행보를 보인다. 이전의 행보로는 상상하기 힘든 사건들이 일어나는데 그중, 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가장 유명한 일화를 소개한다.
즉위 직후 첫 궁정회의에서 로렌 왕은 모욕적인 사건을 겪었다. 자리에 모인 귀족원의 원로들이 전쟁의 처리에 대해 논의하는 가운데 왕을 제외한 것이었다. 심지어 상석에 왕이 앉아있음에도 그의 의사를 묻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자 귀족원의 원로들은 저들끼리 의논하여 결론까지 냈고 그것은 귀족들에게 매우 유리한 내용이었다. 심지어 반란을 일으켰던 주동자 중 그들과 친분이 있던 자들을 무죄방면 시키는 내용까지 끼어 있었다. 로렌 왕에게는 굉장히 모욕적인 처사였지만 오만한 그들은 그마저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하면서도 단호한 대처를 택했다. 로렌 왕을 대표하는 유명한 문장은 이날 태어난다.
“책임을 지지 않을 자는 결정도 하지 마시오.”
그리고 귀족원의 원로들이 무엇이라고 대답했는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로렌 왕의 기세에 밀린 것만은 틀림없다. 왕은 제 형인 다니엘 왕자의 죽음에 관여한 반역도들을 처형하여 그의 넋을 기렸다. 이후에도 그는 귀족들의 잘못을 엄히 다스렸다.
[중략]
이후의 로렌 왕이 선정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별난 결단력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중신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만 들을 가치가 없다 판단하는 내용에는 가차 없이 대하였다. 백성들에게 온화하기로 유명한 왕이지만 그 성정이 조금이라도 강했다면 세기의 독재자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조심스럽게 기록한다.
[중략]
……그 후 왕의 행보는 이후로도 보기 힘든 방향을 향하는데 그중 하나는 평민 출신의 인재를 등용한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파격적인 인사로써…….
- 역사를 바꾼 대륙의 왕들 5, 로윈의 로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