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세계와 바꾼 사랑 ~Change the world with love~
눈을 뜨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가 반쪽이 난 것 같은 것을 보니 일단 죽지는 않은 것 같다. 눈을 뜨자마자 발목을 먼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절대로 변태적인 취미가 있거나 발목 페티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다행히도 발목에 거추장스러운 반짝거리는 것은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진짜로, 진심으로 다행이다.
낑낑대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설마 레온이 자신이 잠든 사이에 뭔가를 한 건 아니……. 히익! ……그러니까 라엘이 저도 모르게 뒤쪽에 손을 가져다 댄 것은 이해를 해야 하는 범주 안의 일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다행히도 큰 일(……)을 치른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슬퍼졌다. 생각해보면 레온이 보호해줬다 해도 마차 안에서 그렇게 굴러다녔는데 근육통이 없는 것이 더 용했다. 때마침 들어온 부단장 덕분에 라엘은 정말로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장.”
“다행이야. 네가 날 살렸어.”
부단장은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해서 놀랐습니다.”
“뭘 상상해도 그 이상이니까 그냥 들은 그대로 생각하라니까.”
“그게 맘대로 됩니까? 일단 인간이 아닌 수준이었는데.”
“그래서 감상은?”
“인간이 아니더군요.”
부르르 떨며 부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빈 옆자리를 보자 걱정되는 사람이 있었다.
“로렌 님은?”
“잠깐 깨어나셨다가 지금은 주무십니다.”
깨어나면 어마어마한 근육통에 시달릴 그를 위해 라엘은 묵념했다. 답답해서 자꾸 목에 손이 가자 부단장이 손거울을 찾아 건네줬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목은 엉망진창이었다. 흰 피부가 자랑이던 라엘의 목덜미에는 선명하게 레온의 손자국이 시퍼렇게 남아있었다.
의심이 든다. 이게 정말로 기절을 위한 목조르기였을까, 과연. 그냥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세상 사람들을 제 범주 안에서 계산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우악스럽게 목을 조르면서 뭐, 잠? 어처구니가 없었다. 살아남은 것에 천국에 있는 왕자님께 감사를……. 아차, 방금 만나고 왔었지, 참.
“황제는 어디에?”
“일단 손발을 구속하고 방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재갈이라도 물려둬야 했을지.”
황제의 몸으로 일개 용병단에게 생포됐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껴 자결이라도 하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지니까. 걱정하는 부단장에게 라엘은 쿨하게 대답했다.
“내가 가기 전에는 자결 같은 거 안 하니까 걱정 마. 하더라도 내 얼굴을 보고 할걸.”
“자신감이 넘치시네요.”
“누구한테 배우기도 했고. 그리고 미친놈 옆에 오래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다.”
“재앙이 강화되는군요.”
“어쨌거나 잘했어. 나선 보람이 있네.”
“단장 덕이죠.”
라엘을 구출한 것은 부단장과 용병들이었다.
처음 계획을 세웠을 때 모두 고개를 저었다. 절대로 황제가 홀로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무너진 토사를 헤치고, 혹은 침엽수림을 말도 타지 않고 그가 찾아오는 것 자체가 무리라고 이야기했다.
라엘만은 고개를 저었다. 레온은 분명히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의 또라이 기질을 무시하면 안 된다며 용병들에게 단단히 일러뒀고……. 그러고는 예상대로였다. 라엘은 자신을 미끼로 레온을 끌어들였고 그 덫에 그는 걸려들었다.
라엘의 목을 조르던 황제를 용병들이 제압했고 그들은 세 사람을 짊어지고 재빠르게 달아났다. 이제 전쟁을 끝낼 열쇠가 드디어 모두 모였다. 라엘은 웃었다. 생과 사를 넘나들며 개고생 한 보람이 있었다.
라엘은 웃었지만 부단장은 질렸다. 스스로를 미끼로 거리낌 없이 내던지고 정말로 죽을 뻔했음에도 실실 웃으며 좋아하는 라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제도 황제지만……. 단장, 당신도 만만치 않은 거 압니까? 이것도 황제의 영향입니까?”
부단장의 질문에 라엘이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답을 내지 못하고 부단장에게 되물었다.
“……넌 왕자님과 황제 중 누가 더 경악스럽다고 생각해?”
당연하게도 부단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둘 다 살아있는-아니 이제 한쪽은 죽었지만- 재앙이었으므로.
“대답하기 힘들지? 나도 그래. 내가 대체 누구 영향을 받았는지 도무지 모르겠어.”
라엘의 혼란을 공감하며 부단장은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줬다. 으드득 뼈 맞물리는 소리가 처참하게 들리고 라엘이 낑낑대며 신음했다. 미친놈에게 붙잡히면 온몸이 성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깨달으며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자마자 라엘은 레온을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중요한 할 일이 있었다. 이제 시간이 된 것이다. 레온을 약 올릴 시간이.
방 앞을 지키고 있는 용병들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어쩌면 쥐어 터져도 이렇게 쥐어터지나 싶을 정도로 그들의 얼굴은 가을 단풍처럼 울긋불긋했다. 고개를 돌려 부단장의 얼굴을 보았다. 깔끔했다. 고개를 돌려 용병들의 얼굴을 보았다. 발정 난 공작새처럼 울긋불긋한 모양새다. 기가 막혔다.
“……네 얼굴만 지켰어?”
“제 얼굴은 소중합니다.”
“안 그래도 개떡인 애들 얼굴이 아주 못쓰게 됐잖아.”
“본판에서 별로 달라지지도 않았어요.”
용병들의 표정이 구겨졌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고 앞에서 말다툼을 했다. 황당했다. 마차에서 그렇게 힘을 빼놨는데도 건장한 용병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니 레온은 역시 좀 대단……. 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충동적으로 뒤를 돌아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데 부단장의 팔이 라엘의 어깨에 닿았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세상 모든 근심걱정을 제 혼자 다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 방법이 없다. 결국 라엘은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라엘.”
열리는 문을 어마어마한 증오에 찬 표정으로 노려보던 레온은 문을 연 것이 라엘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봄날 강아지처럼 얼굴의 근육을 모두 풀었다. 순하게 휘어지는 눈을 보면 더 이상 욕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내가 뭐라고. 그리고 대체 저게 뭐라고.
한숨이 나오는 것은 이제 자동이었다.
레온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단단히 묶여있었지만 불안함 같은 것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당연하다. 레온은 황제였고 이렇게 구금해둔다 하여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괜히 그의 심기를 건드려 레온이 돌아간 이후 정말로 불바다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레온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리도 태연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나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존나 재수 없다고.
“싫어요.”
“그건 나도 싫은데.”
“왜 그렇게 저랑 같이 가는 것에 집착해요?”
“사랑하니까.”
당당하게 돌아온 레온의 말에 라엘은 역시 질려버렸다. 아, 그러세요?
뒤에서 작게 경악하는 소리가 들려와 라엘은 깜짝 놀랐다. 아차, 레온의 지랄에 너무 익숙해져서 문이 열려있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혹시 자신이 위험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며 열린 문 사이로 안쪽을 들여다보던 부하들이 저 빌어먹을 사랑타령을 들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부끄럽고 쪽팔려서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라엘은 부단장을 문 뒤로 밀어버리고 문을 닫았다. 닫히는 문 사이로 부단장의 걱정을 가득 담은 눈과 마주쳤지만……. 아, 쪽팔려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목 졸려 죽는 것이 천 배 나은 것 같았다.
방 안이 조용해지자 라엘은 한숨을 쉬었다.
“저도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죠.”
“사랑하는데 체면이 무슨 상관이지?”
“전 그게 엄청 중요하거든요?”
라엘은 의자를 끌어 거꾸로 놓고 털썩 주저앉았다. 등받이에 턱을 올려놓고 레온을 지그시 보고 있자니 왠지 꼭 있어야 할 뭔가가 모자란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
“다리에 족쇄를 채워두라고 할 걸 그랬네요.”
“너와 나의 사랑의 증표 말이지?”
“그 빌어먹을 사랑은 지금 당장 취소할게요.”
머릿속에 꽃밭이 대륙 크기로 펼쳐진 것이 틀림없었다. 거래를 하러 왔다는 것을 깜빡 잊고 결국 라엘은 레온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레온이 잡혀도 위험을 느끼지 않는 것만큼 라엘도 그를 쥐어 패도 처벌받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쟤는 안 그럴 거거든.
팔다리가 묶인 레온은 반항하지 못했다. 머리를 얻어맞았는데도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는다. 묶여있지 않았어도 반항하지 않고 실실 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까 좀 무섭다. 거래를 위한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했는데 다 망했다.
“역시 넌 사랑스러워.”
“네 목의 손자국이 마음에 들어. 네게 내 흔적을 남길 수 있어서 행복해.”
“오랜만에 보니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아.”
“키스해도 돼?”
……등등의 말을 하며 라엘의 정신집중을 방해하기 시작한 레온은 그 뒤로 몇 대 더 쥐어 박혔다. 뭔가 싶었다. 정말로 이 정도의 뇌청순은 뭐에 쓰라고 있는 것인가. 온 오프 스위치라도 달려서 스위치가 켜지면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하는 것인가. 그 스위치 좀 오프로 돌려놓고 영영 아무도 손 못 대게 발로 차서 망가뜨리고 싶다. 아니, 일단 헛소리를 지껄이는 저 입부터 콱 막아버리고 싶었다. 점점 강도가 세지는 주먹이었지만 레온은 정말로 해맑게 웃었다.
아…… 진짜……. 저, 미친……. 예쁜 놈……. 얼굴 하나는 끝내준다, 정말.
잠시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레온은 아마 마약덩어리나 그 가운데의 무언가쯤이 되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앞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시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타격이 참 크다. 잠시 정신을 다잡는 라엘의 귓전으로 빌어먹게 감미로운 레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엘, 너는 용서해 줄 수 있어.”
“저만 용서하고 다 박살내버리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맞아.”
“전 그 꼴 못 봐요.”
“나도 네 곁에 못생긴 애들이 딱 달라붙어 있는 꼴 못 보겠어.”
설마 바깥의 용병들을 말하는 건가 싶어 그를 마주 보자 그게 맞단다. 기가 막혔다. 자기가 쥐어 패서 못생기게 만들어 놓……. 아, 원래 외모는 좀 달린다지만 그래도 애인을 만들어 잘 지내던 애들이다. 제 주먹질 아래에 울긋불긋 멍이든 용병들에게 당당하게 못생겼다고 하다니, 역시 황제급으로 뻔뻔했다. 황제라서 황제급인가 황제급이라서 황제가 된 것인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라엘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이런 헛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잡담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라엘. 너와 나누는 이야기는 잡다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내게는 언제나 가장 중요해.”
“아, 네. 감사하네요.”
레온도 라엘이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자 더 이상 복장을 뒤집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표정을 보아하니 라엘이 무슨 말을 해도 가뿐하게 씹어 드실 생각인 듯했다.
레온의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지금은 이렇게 구금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엘이나 다른 용병들이 그의 목숨을 위험하게 할 수는 없었다. 레온이 죽는 순간 진정으로 대륙전쟁은 시작될 것이고 상황은 더없이 악화될 것이다. 그를 핍박하는 것은 절대로 해결방법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레온을 순순히 다시 보내줄 수도 없다. 그렇게 한다 해도 상황이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는 부분이 참 빌어먹을 부분이었다. 이미 수치를 겪은 그가 열 받아서 말 한마디만 하면 대륙급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라엘의 용병단은 이 대륙에서 발붙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날 것이었다.
어떤 상황이던 결국 레온은 무사히 구출될 것이고 그 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그의 기분에 달렸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리도 태평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엘이 레온을 납치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레온, 거래를 하지 않을래요?”
라엘이 말에 레온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거래라니, 재밌군.”
빈정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순수하게 그것이 흥미롭다는 표현이었다. 제 몸을 겁박한 것 외에 아무런 우선권이 없는 라엘이 거는 제안이 귀엽기까지 했다. 자신을 낮잡아 보는 것이 빤히 보여 라엘은 기분이 구렸다.
“서로 합의를 제대로 본다면 지금까지의 상황보다는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당신이 했던 것처럼요.”
라엘이 조곤조곤 말하자 레온이 웃었다.
“글쎄. 여태까지 난 너를 쫓았고 너는 내게서 달아났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달라질 것이 있을까?”
그러니까 그냥 지금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서 족쇄를 차자. 예뻐해 줄게.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레온의 뉘앙스에 라엘은 순간 올라온 빡침에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당신의 그런 형태의 사랑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요.”
“이리도 사랑하는데 넌 내게 사랑 한 조각도 주지 않는구나.”
“당신의 사랑은 강압적이고 저를 숨 막히게 해요.”
“너를 붙잡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야. 사랑의 크기 차이지.”
“제가 당신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는 없었던 건가요?”
레온이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그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라엘, 넌 그럴 수 없어. 내게는 너뿐이지만, 네게는 너무 많은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그들을 모두 없애버리려 한 건가요?”
“그래.”
당당하게 대답하고 화사하게 웃는 레온을 보며 라엘은 두통이 지끈지끈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참으로 이상했다. 어째서 대화를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지? 사고방식이며 가치관의 차이가 어마어마해서 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건 내가 차원이동자라 그래? 이 동네는 원래 그래?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지도 모르겠어! 다니엘부터가 정상이 아니었잖아! 아냐,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정상인들이 너무 많아. 이 인간들만 이래! 이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결국 라엘은 빠르게 본론을 꺼냈다. 레온도 그것을 바라는 것 같았다.
“어차피 겹칠 리 없는 마음이야. 그러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날 죽이고 싶어, 라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게.”
“아뇨. 전 아직도 당신에게 제안하려 해요.”
“꿋꿋하군. 무슨 제안인지 이야기해 봐.”
라엘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손에 조금 땀이 고인 것 같았다.
“아직도 그리 생각하신다면……. 저를 곁에 두고 싶다면 그리하세요. 제가 당신의 곁에 머무르지요.”
“……라엘……?”
“황비가 돼달라고 하셨죠? 그렇게 할게요.”
남자황비라니. 세상에 다시없을 미친 짓이지만 라엘은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라엘의 말 한마디에 레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나 여전히 더없이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웃으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 레온을 보고 라엘은 당황했다.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레온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자 레온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손발이 묶여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너무 행복해서……. 그대로 자신을 들고 튀어버리는 것이 왠지 당연하게 상상됐다. 이런 상황……. 정말로 괜찮을까?
뭐, 이미 늦었지.
모처럼 주어진 선택권에서 결국 이딴 선택을 하게 된 것이 억울하니 평생 우려먹고 등골을 뽑아먹어야지, 뭐.
레온의 눈에서 눈물이 멈춘 것은 한참 후였다. 라엘은 주변을 살펴 그나마 깨끗한 수건을 찾아 그의 얼굴을 닦아줬다. 잘생긴 사람은 울어도 콧물도 안 나온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쓱쓱 얼굴을 닦아내자 레온이 싱그럽게 웃었다. 언제 봐도 살 떨리게 잘생겨가지고 내 맘이나 설레게 하고, 봐! 또 미친 생각 하는 거! 정신 차려라, 나 새끼! 실실 쪼개는 레온에게 라엘은 일침을 가했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는데요?”
레온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네가 내 곁에 온다는 것 외에 다른 대화가 필요한가?”
“필요하거든요!”
“……그래.”
버럭 소리를 지르자 레온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레온은 요 일이년 사이에 본 얼굴 중 가장 행복한 얼굴을 하고……. 아, 아니다…… 분명히 저거 족쇄를 채웠을 때 표정인데…… 싶었다. 아, 납득했다. ……그래, 그만큼 행복하구나…….
다시 생각하면 여전히 등골은 오싹하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했던 그날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잠시 족쇄는 잊어두자. 생각할수록 자신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라엘은 처음부터 생각하도 있던 제안을 레온에게 이야기했다. 단 한 가지였지만 그만큼 중요했다.
“이번에는 제 사람들에게 손대지 말아주세요.”
결연한 라엘의 표정에 레온은 오히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음? 굳이 그런 약속을 받으려는 건 무슨 이유에서이지?”
이번에는 라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인간이 벌써 치매인가.
“……폐하 네가 로렌을 죽이려고 한 건 잊어버리셨어요?”
“그건 그때 상황이었고.”
“지금이라고 다른 게 있나요?”
레온이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내 곁에 스스로 머물겠다고 하는데 내가 네 주변의 사람들을 해칠 이유가 어디 있지?”
라엘은 당황했다.
“……지난번에는 그랬잖아요?”
레온도 당황했다.
“그땐 네가 나를 떠났잖아……?”
“……네?”
“……어?”
이번에는 둘 다 당황했다. 뭔가 잘못됐다.
“황비가 된다고 했었는데요……?”
“……? 그냥 떠났잖아……?”
응? 으응??? 으으응????????? 왠지 말이 엄청나게 엇갈리고 있었다. 라엘은 일단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 레온의 행동을 평가했다.
“전 황비가 되겠다고 했는데 폐하 네가 미쳐서 날뛰는 걸 생으로 봤습니다만?”
“……넌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허……. 편지 써놓고 갔잖아요!”
“……편지???”
으……? 으으으으???? 편지??? 으으으??? 방 안은 순식간에 물음표로 가득 찼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는 정말로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방 안에 낯선 침묵이 가라앉았다.
라엘과 레온은 차분히 대화를 나눠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뭔가 단단히 꼬였다는 것만은 알 수 있는 참으로 희한한 상황이었다. 한참 대화를 나눈 후에 두 사람은 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됐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저 종이 한 장뿐이었는데……. 존나 사라진 종이 한 장이! 존나, 나비의 날갯짓이 돼서! 존나 대륙에 전쟁의 바람을!! 아하하하! 나는 존나 잘났군!
라엘은 “이 미친 새끼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레온의 뒤통수를 빡 소리가 나게 쳤다. 레온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라엘을 올려다봤다.
“왜 때리는 건데?”
“왜 꼼꼼하게 방을 찾아보지 않은 건데요, 이 부잡스러운 사자 새끼야.”
“은근슬쩍 욕을 하는 라엘도 섹시하긴 하지만……. 그 전에 네가 한마디만 해줬어도 됐을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맞는 말이긴 했지만 라엘도 할 말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말할 시간을 줬어야죠? 그리고 다 죽이겠다고 쫓아오는데 그 말을 할 생각이 납니까? 일단 씹어 먹어버리고 싶지.”
“하하, 라엘에게 먹힌다면 그것도 황홀할…….”
“이상한 데 눈뜨지 말고 정신 차려요!”
퍽! 징그러운 말의 기세가 보이자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뺨이 아니다, 주먹이다. 순식간에 얼굴을 맞은 레온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랑스럽고 깜찍한 싸다구는 대비를 했지만 남자다운 주먹에는 정신적으로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뺨을 맞았을 레온의 코에서 주르륵 코피가 흘러내렸다. 그제야 레온은 당황했다. 마, 맞았어……!? 아빠한테도 맞은 적 없는데! 날 때린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상투적인 상황이었다.
“……아픈데 기쁘다.”
“변태세요?”
라엘이 수건으로 코를 닦아주려다 질겁하며 물러섰다.
“어쨌건……. 네가 날 떠난다고 했으니 나로서는 당연히 네가 머물 곳을 다 없애버려야…….”
“그 전제 자체가 미쳤다고요!”
“난 진작부터 너에게 미쳐있었거든!?”
저……저……. 당당한 새끼 봐라! 당황하고 빡친 라엘은 결국 저도 모르게 이번에는 정강이를 걷어찼다. 왠지 저곳에 손을 대는 것도 싫다!
레온이 아! 소리를 내며 끙끙대더니 잠시 후에 배시시 웃었다. 지, 진짜로 미쳤나 봐……. 라엘이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새 부어오른 볼과 아직도 흐르고 있는 코피로 더 이상 레온은 잘생겨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할 수 있는 조치였다. 하지만 레온은 자신의 모습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환희에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랑해, 라엘!”
라엘이 질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 맙소사. 진짜 미쳤어.
“……그리고 나도 미쳤죠.”
라엘은 레온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뭉개진 얼굴 중에서는 그나마 입술만이 예뻤기 때문에 그는 망설임 없이 레온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레온의 눈이 다시 젖어들며 뜨거운 눈물이 라엘의 볼을 적셨다. 아아…… 왠지 그의 기분을 알 것 같아서 라엘은 눈을 감았다.
아쉬운 부분이 하나 있다면, 서로의 마음이 통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었을 텐데 레온의 얼굴이 그의 삶을 통틀어서 가장 못생겼다는 점이었다.
잠시간의 감미로운 시간이 끝난 것은 갑자기 조용해진 안이 걱정되어 문을 연 용병들 때문이었다. 라엘의 입술이 떨어지자 레온은 눈에 띄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고, 그리고 용병들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다, 단장…….”
“뭐.”
“……그런 취향…….”
“음……? 어! 아냐, 이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용병들을 보자 기가 막혔다. 뭐, 왜, 뭐! 물론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자세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키스에 좀 열중하다 보면 황제를 침대에 눕힐 수도 있고 내가 그 위에 올라탈 수도 있는 거지! 이걸 섹슈얼한 무언가로 해석하는 네 녀석들의 뇌가 썩어버린 것이지 나는 문제가 없다! 라는 의사를 욕과 함께 쏟아부었지만 마치 성추행범을 보는 듯한 용병들의 표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결국 라엘은 제 아래에서 실실 웃고 있는 레온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해 보라며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나 레온은 이미 너무 기뻐서 뇌가 흐늘거리는지 그저 웃느라 바빴다. 그리고 여전히 못생긴 얼굴이었다.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했다. 아, 진짜 못생김과 안 어울리는 사람이네. 그의 멱살을 붙잡고 있는 라엘을 보는 용병들의 시선은 또 달랐다.
“포, 폭력은 안 돼요!”
“폭력은 무슨! 난 평화주의자거든!?”
“거기서부터 개뻥이야! 강간은 좋지 않다구요!”
“미쳤어!?”
용병들은 말을 마치자마자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발소리만 남긴 채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의를 보았는데 그 범죄자를 이겨볼 수 없을 것 같으니 아주 재빠르게 달아나는 것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강간을 한다는 건 아니잖아! 키스 좀 한 것 가지고 무슨 강…….
라엘은 깨달았다. 레온이 묶여 있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그의 멱살은 붙잡은 라엘은 그를 침대 위에 넘어뜨리고 그 위를 덮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맙소사……. 레온의 얼굴은 멍과 코피로 엉망진창이었다.
제길! 라엘은 당장 용병들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라엘은 분명히 제국의 황제를 폭력을 써서 제압한 후 강간을 하려 했다는 오명을……. 오, 맙소사! 벌떡 일어나 달아난 그들을 쫓아가려는데 레온이 라엘을 불렀다.
“라엘.”
“왜요, 바빠요!”
“강간해 줄 거야?”
“……미친…….”
어이와 함께 힘이 빠졌다. 실실 웃는 그가 어이없어 용병들을 쫓아갈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했다고 해라. 했다고……. 침대 위에 털썩 앉자 기운이 다 빠졌다. 엉망진창이 된 레온의 얼굴을 수건으로 문질러 닦아줬다. 정말로 엉망이다.
“……너무 못생겨서 서지도 않을 것 같네요.”
무심코 내뱉은 말에 레온이 빙긋 웃었다. 이가 희다.
“그래? 나는 섰는데.”
철퍽. 라엘이 레온의 얼굴에 수건을 집어던졌다.
“내가 좀 잘생겼어야죠. 하지만 생각 없으니 가라앉혀요.”
“그래.”
라엘은 벌써 후회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안 돼.”
그의 눈빛을 용케도 알아본 레온이 대답했다. 배시시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니 더 이상 화도 낼 수가 없었다. 이젠 저 모습까지도 예뻐 보이는 걸 보니 뭔가가 눈에 단단하게 씐 것 같았다.
라엘은 다시 한 번 레온에게 입술을 겹쳤다.
더 이상 결박해 둘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라엘은 부단장을 불러 손칼을 빌렸고 망설임 없이 레온의 손과 발을 풀어줬다. 레온의 손발의 포박을 잘라낼 때 부단장은 불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라엘은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입모양으로만 답했다. 괜찮아.
“폐하를 마중 나올 수 있도록 제국에 연락을 넣어.”
“네, 단장.”
부단장은 여전히 찝찝함이 통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문은 닫히고 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됐다.
“자고 싶어.”
라엘이 기겁했다.
“말 그대로 의미예요, 중의적 의미예요?”
“중의적 의미지만 오늘은 그냥 정말로 잠만 자는 걸로도 괜찮아.”
“선심 쓰는 척하지 말아요. 파혼해버릴 테니까.”
“잘못했어.”
라엘은 히죽 웃으며 레온의 곁에 누웠다.
눈물과 코피로 범벅이 되어있던 얼굴은 씻겨놓고 보니 조금 부은 것 외에는 더 이상 상처 난 곳은 없었다. 다시 잘생겨진 레온을 보며 라엘은 마음껏 그 품에 안겼다. 이런 자신이 웃기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레온이 라엘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힌다고 타박을 주자 팔에 조금 힘을 빼긴 했지만 딱 그뿐이었다. 라엘은 레온의 품 안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로 그의 가슴에 기댔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요란했다. 왠지 웃음이 났다. 어째서 이 사람은 자신에게 이렇게 심장의 에너지를 낭비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폐하.”
“레온이라고 불러, 이제는 정말로.”
“그래요, 레온.”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맑게 울리는 것이 좋았다.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이 달싹이는 것이 왠지 기분이 좋았다.
“레온, 당신은 대체 내가 어디가 좋아요?”
간질거리다 못해 오글거리는 질문이었지만 레온은 라엘의 정수리에 입 맞췄다.
“이유가 있어? 그저 네가 너이기에 사랑해.”
“말만 거창하지 정말로 아무 이유 없네요.”
“문제 있어?”
“지금까지 많았죠, 아주…….”
진심으로 너무 많았다.
“있잖아.”
“말이 많네요. 또 왜요.”
“미안해.”
“뭐가 미안한 줄은 알아요?”
“……그냥 다.”
“됐어요. 이제부터 평생 등골까지 다 뽑아 먹을 테니까.”
“고마워.”
“등골 뽑겠다는데 고맙다는 건 또 뭐야.”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기에는 이 미친놈을 자신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에너지가 모자라진다. 일단 잘 쉬어두어야 한다. 해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가 꼬아놓은 것, 자신이 꼬아놓은 것. 그 모든 것을 정리하려면 앞으로도 매우 바쁠 것이다.
라엘은 말없이 레온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갑자기 피곤함이 몰려왔다. 기절하듯 순식간에 잠에 빠지는 라엘의 이마에 레온의 입술이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적어도 일어나면 족쇄를 차고 있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고, 그리고 정신을 잃듯 잠들었다.
경계의 끝 ~End of the boundary~
“……얼레리 꼴레리.”
“……최근 자주 뵙네요…….”
다니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라엘은 수치스러움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고개를 푹 숙이며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열심히 일하는 개미를 세기 시작했다. 그런다고 귀가 막히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네가 선택한 사람이 남자라는 문제가……. 아니 성별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신 상태에 문제가……. 더 심각하지만…….”
“오, 제발 입 닥쳐요.”
“여튼 축하…….”
“적어도 왕자님이 날 놀려서는 안 돼요……. 왕자님만은…….”
황제급으로 맛이 간 것도 당신이거든요?! 지금 내가 양쪽으로 황제, 왕자급으로 미친 사람들 사이에서 이 개고생을 한 거거든요!? 개미를 세던 라엘이 으아아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자 다니엘은 탈모관리는 젊을 때부터 해야 해, 하고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털썩, 라엘은 개미를 세는 것도 머리를 쥐어뜯는 것도 그만두고 풀밭에 누웠다. 하하하, 하늘은 파랗고 개미가 내 몸을 기어 다니는구나, 가려워! 꿈인데 가려워!
“여기 정말로 꿈 맞아요?”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정말로 당신인가요?”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
“선문답이에요?”
“네가 믿는 대로.”
“그럼 진짜라 쳐요.”
“그래.”
살랑거리는 바람이 다시 제 몸을 휘감았다. 얼굴이 역광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음에도 다니엘이 웃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는 네 세계와 사랑을 맞바꿨구나.”
“무슨 표현이 그렇게 거창해요?”
다니엘은 싱그럽게 웃으며 제 등 뒤를 가리켰다. 고개만 돌려 확인하자 그 자리에 있었을 문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어쩐지 전혀 아쉽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황제, 레온을 가졌으니 원래의 세계는 당연히 포기해야 했다. 손해 보는 기분이 들었지만 우습게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커버되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등골 뽑을 일이 하나 더 생겼네. 세계급으로 뽑아보자.
히죽히죽 웃고 있자 다니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이만 가볼게.”
“나중에 또 봐요”
다니엘이 희게 웃었다. 유난히도 투명해 보이는 미소였다.
“아니, 우리 다시는 보지 말자.”
무어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가 미소 지으며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입을 다물었다. 이번만은 말려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라엘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자님! 고마웠어요, 정말! 당신의 삶을 내게 나눠 줘서!”
천천히 걷던 다니엘이 그때만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그가 웃는 얼굴이 마치 햇살 같았다.
“내 삶이 아니야, 라엘. 넌 처음부터 너의 삶을 살고 있었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니엘…….”
“네 삶을 소중히 여기고, 네 곁의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리고 쓸데없는 것은 놓아버리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
다니엘이 웃었다.
“하지만 정말로 가끔씩은 나를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욕심쟁이지?”
당신을 영영 버릴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가 놓아버리라 하는 것을 자신은 놓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해줘.”
“…….”
“넌 행복해져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다니엘이 천천히 멀어졌다. 그를 따라가지도 잡지도 못했지만, 다니엘은 이제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거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라엘, 왜 울어?”
“저 울었어요?”
눈을 뜨자 레온이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레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보니 눈물범벅이 된 볼이 만져졌다. 거칠게 눈을 비비자 레온이 상냥한 손길로 제 손을 떼어내고 라엘의 눈가에 입 맞췄다.
“오글거려요.”
“이제 네가 우는 일은 다시는 만들지 않을 거야.”
“……어떻게 보면 당신 때문에 운 건데요?”
“네가 눈물 흘리는 것은 오직 나 때문이어야 해.”
순식간에 말을 바꾸는 것도 재주라며 어이가 없어서 혀를 쯧 하고 찼다. 레온은 그래도 좋다며 웃었다. 웃게 만드는 증상의 전염병이라도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 이렇게 웃음이 나지? 라엘도 저도 모르게 웃었다.
레온의 가슴에 이마를 기대자 더없이 안정감이 느껴졌다. 진작 이렇게 될 수 있었는데 어째서 이리도 멀리 돌아왔을까. 세계 최강의 전쟁급 삽질을 펼친 것이 부끄러웠다. 누가 들으면 황당해서 차마 웃지도 못할 일이었다.
“레온.”
“응.”
“내가 세계와 당신을 맞바꿨대요.”
“그렇다면 난 내 모든 세계를 네게 줄게.”
무슨 이야기인지 묻지도 않으며 그저 모든 것을 주겠다는 레온의 목소리에 왠지 안심이 된다. 웃음이 나온다.
“그딴 거 필요 없어요.”
필요 없으니 거절한다. 레온이 난색을 표시했다.
“그럼 뭘 줄까?”
라엘이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봤다.
“당신을 줘요.”
레온이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라엘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정말로 처음 보는 편안한 미소에 라엘은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더없이 따스한 것이 마주하자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고, 앞으로는 더 많은 일이 있겠지만……. 그러나 그와 함께라면 미친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 허리에 감기는 레온의 팔을 느끼며 라엘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