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재회 ~Reunion~ (12/18)

12. 재회 ~Reunion~

아난은 결코 제국을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용병단과 거액의 계약을 체결하긴 했지만 그들의 적은 아난의 국경을 넘은 제국군일 뿐이었다. 제국군이 국경을 넘으면 응전하고 그들이 다시 국경 바깥으로 넘어가면 공격을 멈췄다. 지리멸렬한 답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고 용병들에게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소극적인 대응에 답답함을 느낀 것이다.

라엘은 아난의 판단에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어차피 제국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말로 제국을 뒤집어엎고 싶다면 대륙의 모든 왕국들과 동맹을 맺고 정당성을 내세운 후 한꺼번에 응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군사력이 아니라 명분의 문제였다. 

그러나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이 상황에서 가능한 방법은 아니었다. 특히 로윈과 같이 제후국의 입장에 있는 아난으로서는 군주에 대한 신의의 문제까지 걸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군주가 미쳐 날뛰고 있지만 그렇다고 군주에게 검을 겨눌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일까. 라엘의 용병단이 과할 정도로 전장을 쑤시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 아난은 질책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장을 쑤시는 그들에게 금일봉까지 몰래 찔러 줄 정도였으니. 돈 이외에는 어떠한 명분도 없는 용병단이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슬쩍 책임을 전가하기도 좋지 않은가. ‘어이쿠, 용병들이란 무식해서 제멋대로 움직이더군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핍박당하는 상황이 그들에게도 불편하고 답답한 것이다.

용병단이 얼마나 휘저어놓았는지 요 근래에는 제국군이 국경을 넘어오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일이 줄어들었고 이제는 왠지 식충이가 된 느낌까지 들었다. 스스로 일하는 라엘은 이제는 알아서 제국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다.

“제국군이 또 파견됐다며.”

“이번에는 그 규모가 다릅니다.”

“무슨 차이지?”

“군사의 규모도 규모지만 일정 숫자대로 쪼개 여러 군데로 보냈군요. 그리고 고위 귀족이 대거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자가 오고 있군.”

기다리던 소식에 라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이 길고도 구질구질한 상황에 마침표를 찍을 때가 된 것이다.

“로렌 왕자님은?”

“아난으로 향하는 군대 사이에 군용이 아닌 호화로운 마차 하나가 끼어 있다고 하더군요.”

그간 부산스럽게 전쟁터를 헤집고 다닌 보람이 이제야 나타났다. 레온은 자신의 소식을 어렵지 않게 전해 들었을 것이고 역시 제 이름과 외모를 그대로 보아 넘기지 못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레온은 라엘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으니 소식을 들으면 분명히 전장에 직접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맞아떨어졌다. 자신을 협박하기 위해 로렌을 동행시킨 것까지는 예상의 안에 있던 것이었다.

라엘은 무릎 위에 올려놓은 왕가의 보검을 쓰다듬었다. 다니엘의 체온이 아직도 선연했다. 이 검은 올바른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부유하였고 이를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라엘의 역할이었다. 지금까지는 예상치 못했던 벽에 막혀 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나를 찾아온 손님이니 내가 마중을 나가야겠지. 지난번에 이야기해 놓았던 준비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

라엘은 씩 웃으며 등을 돌렸다. 그러나 뚜벅뚜벅 걸어 문밖으로 나갔을 때, 이미 라엘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유난히도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었다.

혹시 앞으로의 일이 긴장돼서 그런 것일까? 왠지 웃음이 나왔다. 소풍 가기 전날의 어린애도 아니고 이게 뭐람.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고 뒤척이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밤중에 간 크게도 제 방문을 두드릴 사람은 어차피 한 명이었기에 라엘은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고 상대도 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부단장이었다. 그는 마치 라엘이 깨어있을 것을 알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부단장.”

“잠이 오지 않아서 들러봤습니다. 단장도…… 마찬가지군요.”

“소풍 전날 같지 않아?”

“적절하네요.”

부단장이 낮게 웃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조바심이 나지는 않았다. 둘 사이에는 침묵마저도 자연스러웠다. 침묵은 다음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한 시간이었기에 라엘은 천천히 다리를 까닥이며 부단장이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부단장의 입술이 열렸다.

“단장은 두렵지 않습니까?”

부단장의 질문에 라엘은 웃었다. 두렵지 않느냐니.

“당연히 무서워. 무려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하는데 나라고 무섭지 않겠어?”

패기 있게 그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지만 두려운 것은 매한 가지였다. 상대는 제국의 황제였고 자신은 그저 용병단의 단장일 뿐이었다. 로윈의 다니엘일 때도 두려웠다. 아난이 등 뒤에 있지만 그들은 결국 제국의 아래로 돌아갈 사람들이다. 자신과 용병단을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 모든 것들은 라엘이 스스로 해내야 했다.

라엘의 대답에 그는 미소 지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고 그 시간의 밀도가 깊다 보니 이미 다니엘에 대한 것만큼이나 라엘에 대한 것도 그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미 알면서도 묻는 건 또 뭐냐, 라고 싶다가도 그도 긴장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풀어진다.

부단장은 멋쩍게 웃으며 의자를 끌어당겨 라엘이 앞에 앉았다. 두려움. 라엘도 인간인데 어떻게 그런 감정이 없을 수 있을까. 어떤 상황에서든지 당당한 다니엘이나 라엘이 가끔은 정말로 다른 높이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저도 모르게 오늘 그에게 감정을 확인하려 했다. 그들이 자신들과 다른 것은 단지 하나뿐이었다. 두려움마저 인정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 결국은 해낼 수 있다는 확신까지. 딱 그것만큼이 그들과 자신들의 차이점이었다.

“웬일로 답지 않은 질문을 하는 거야?”

“뭐,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단장과 이야기를 해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죠.”

부단장의 말에 라엘이 웃었다.

“그래. 재수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묻고 싶은 거라도 있어?”

“그냥…….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알아갈 시간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정말로 독한 상사였고 그의 요구를 현실로 만들어내기 위해 라엘도 부단장도 굉장히 바빴었다. 대화는 많았지만 모두가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심정적으로는 동지에 가까워졌지만 정작 그들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라엘이 차원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단둘뿐이었다. 다니엘과 부단장. 다니엘이 자신을 주워 이야기를 하던 그 장소에 부단장은 있었고, 함께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이야기를 꺼낼 상황도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자 제가 원래 있던 세계가 현실인지조차도 헷갈려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다. 라엘은 이 세계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떤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그냥 생각나는 것부터 이야기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가…….”

정작 작정하고 생각하려 하니 굉장히 오래전의 일 같았다. 고작 몇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희미해진 기억에 라엘은 조금 당황했다. 그만큼이나 이 세계에 적응했던 것인가……. 잠시 고민하던 라엘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하면서도 솔직히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차원이동한 후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오직 다니엘뿐이었다. 이후로는 이야기를 꺼내봤자 해결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 굳이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부단장조차도 자신의 세계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들이 있는 세계는 그만큼이나 달랐고 필요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전의 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릴 필요가 있었다. 

부단장은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차원 너머의 세상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신기한 곳이군요. 말 없는 마차가 다닌다니.”

“상투적인 표현이네. 그래, 대신 기름이 필요해.”

“불을 붙일 때 쓰는 기름 말입니까?”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비슷할지도 모르고. 어쨌건 난 그런 전문적인 부분까지는 몰라. 그냥 학생이었어.”

“어울리지 않는군요. 군인이라면 모를까.”

“군인. 금방 군인도 됐을지도 몰라. 제대하면 다시 공부를 했겠지?”

“무슨 놈의 줏대가 없는 세계입니까.”

공부를 하려면 공부만 하고 군인이 되려면 군인만 하지. 부단장의 추임새에 라엘은 킥킥 웃었다. 군인이 어울린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갈 때가 되면 갈 것이라 생각했고 끝나면 다른 직업을 찾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마저도 생각해 볼 기회가 없이 이쪽으로 넘어온 것이지만.

“잘 모르겠어. 나에게 어울리는 것을 찾는다기보다는 그저 살아가기 위해 공부가 당연한 곳이라.”

“어느 정도나 공부를 하셨습니까?”

“그냥 여덟 살 때부터 쭉?”

“그래서 왕자님의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들어줄 수 있었겠군요. 대단하네요. 학자라니.”

“학자까지는 아니지만…….”

이야기가 이어지자 조금씩 원래 있던 세계의 모습들이 조금씩 떠올랐다. 모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자세하게 부단장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제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다니엘과도 이 정도로 자세하게 말한 적이 없는데. 아무래도 부단장만큼이나 자신도 전투를 앞두고 중압감에 눌려있었던 것 같다.

레온이 자신을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할까? 이번에는 어떻게 할까? 상상하기 힘들다. 자신에 관한 일에서 레온은 언제나 상상 이상의 것들을 했고 그 움직임이 예상 안에 머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의 선택지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레온은 라엘이 제 손을 벗어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고, 특히 마지막 작별의 형태는 죽음이 그 둘의 사이를 갈라놓은 그런 형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죽음으로도 그가 자신을 포기하게 만들 수 없다면 정말로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려웠다. 그의 생각을 알기가 어려웠다. 레온은 자신을 속이고 벗어난 것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예상 불가능의 사고를 가지고 있는 그 때문에 라엘은 레온이 자신을 다시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다.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동녘이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을 밀어내며 푸른색으로 물드는 창밖을 보고 라엘은 오늘은 나무늘보 흉내를 내며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바로 권력자의 맛인가! 고향이야기라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것인 줄은 미처 몰랐다. 머쓱해져 어깨를 으쓱이자 부단장도 피곤한 기색 없이 미소 지었다.

“미안. 쉬어야 했을 텐데. 이야기에 너무 심취했네.”

“고향은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이죠.”

라엘은 부단장도 바다 건너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부단장이 라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만큼 라엘도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자신이 거리에서 비렁뱅이가 되어 있던 것처럼 그도 노예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들었다. 둘 모두 다니엘에게 거둬졌다. 그는 구원이었다.

“네 고향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네.”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죠. 기회는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리고 지금 제 고향은 이곳이니까요.”

“그래. 내 고향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로 결정한 순간 미련을 버린 지 오래다. 아쉽고 쓸쓸했지만 이곳에서 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고 그 인생을 살아나가기로 한 것에 대해 후회는 없다.

“저도 그렇습니다.”

늙은 여우같으니. 제 생각을 귀신같이 알아챈 부단장에게 라엘은 샐쭉하게 웃어 보였다.

“본론은 뭔데?”

“아, 들켰습니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원하는 바가 있거나, 아니면 죽을 때지. 설마 죽을 거야?”

“아뇨. 전 오래오래 살 겁니다.”

부단장은 품 안에서 편지 하나를 꺼내 라엘에게 건넸다. 편지봉투는 오래되고 낡았지만 지저분하거나 찢어진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소중하게 보관한 것이 역력한 봉투를 보며 라엘은 잠시 망설였다. 결국 부단장이 그의 손에 억지로 편지를 쥐어주어야 했다.

“좀 더 빨리 드리고 싶었지만……. 일단은 왕자님께서 당부한 부분이라서요.”

“뭔데?”

“왕자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단장에게도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며…….”

라엘의 손이 떨렸다. 어째서, 이제 와서…….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라엘의 고개가 떨궈졌다. 떨리는 입에서는 한탄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짜 지랄맞네.”

홀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단장은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혼자가 되고 나서 라엘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펼쳤다. 낡은 편지 안의 빽빽한 글씨들은 생전의 다니엘의 것이었다. 천천히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읽어내자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만 같다.

원망하는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니엘은 이 세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이었고 그의 결정은 언제나 옳았으니까. 이 편지조차 자신을 아꼈던 다니엘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고 라엘은 그의 결정을 이해했다.

다니엘은 자신이 죽은 후를 대비하여 편지를 써두었다. 제가 죽고 나서 라엘이 혼자 남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에게 넘겨주기 위한 선택지였다. 라엘이 홀로 남았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을 하나라도 더 늘리기 위한 대비였지만…… 라엘은 편지를 구겨 쥐었다.

“그렇게는……. 내가……. 너무 무책임하잖아요…….”

이런 것보다는 당신이 내 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한탄하며 라엘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다시 반듯하게 폈다. 이미 구겨진 종이는 다시 편다고 원래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숨과도 같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다니엘…….”

본인이 직접 준 것이 아니니 취급하지 않겠습니다. 중얼거리면서도 라엘은 마지막이 될 다니엘의 흔적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길지 않지만 결코 짧지도 않은 편지였다. 그 안에는 라엘이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들에 대한 모든 것들이 적혀 있었다. 굳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가 움직이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다니엘의 행동은 치밀했지만 딱 그만큼의 허점이 있었다. 

인과가 드러나지 않는 어떠한 조각. 자신을 닮았을 뿐 전혀 다른 곳에서 온 라엘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신뢰. 그리고 언제나 만약에, 내가 죽으면……을 전제로 한 다니엘의 강박증적인 준비, 대비. 그리고 허무하기까지 했던 그 죽음마저. 그 이유가 드디어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됐다.

다니엘은 언제나 자신을 잡아두고 싶어 했다. 혹시라도 라엘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 하며 언제나 불안해했다. 크게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것은 감춘다 해서 알아채지 못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라엘은 다니엘을 떠날 생각이 없었으니 모르는 척했지만 그마저도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편지가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를 예언자 같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라엘이 거쳐 왔던 과정은 우연인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경계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석연치 않을 정도로 과하게 미리 현장을 답사하고 라엘이 잊지 못할 정도로 그 모든 것들을 주입시킨 이유만은 편지 안에 모두 담겨져 있었다. 그의 불안, 그의 걱정. 그는 무엇을 두려워했는가.

다니엘은 분명히 지금 이 순간 라엘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줬다. 참 빌어먹을 타이밍이지만 이 편지가 전해져야 할 시점도 지금이 맞다. 라엘이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었다.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어떤 선택이든 결코 가볍지 않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이가 박박 갈린다. 당장에라도 저쪽으로 가서 다니엘의 멱살을 붙잡는다는 선택지가 새로 생겼다. 물론 이번 일이 잘 되지 않고 레온이 돌아버린다면 어차피 자신은 한 방에 왕자님 곁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니 그것은 마지막의 마지막 선택으로 돌리기로 했다.

편지를 읽은 후에 많은 복잡한 생각이 들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다니엘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엿 먹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황제의 군대는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선전포고를 받은 왕국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것과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굶주리지 않은 사자였고 이미 포박 안에서 발버둥 치는 사냥감들의 목덜미를 살짝 물기만 하면 되는 존재였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레온이 모든 왕국에 선전포고를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제국의 귀족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단호하게 그것을 명하는 그에게 반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지금까지 온화하다 생각한 황제는 처음으로 자신의 호전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결론을 냈었다. 황제가 미쳐버렸다고.

그러나 선전포고를 보낸 이후로는 오히려 귀족들이 레온의 깊은 뜻에 감탄했다. 일견 미쳐 보이는 모습 뒤에는 반짝이는 이지가 숨어 있었다. 레온은 그 말도 안 되는 이유를 핑계 삼아 지금 이 시점에서 대륙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었다.

오랜 평화였다. 그리고 그 평화가 길어지면 분명히 그림자도 짙어진다. 제후국 로윈의 일을 보아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평화롭고 현명한 치세가 이어지던 로윈은 제 욕심을 이기지 못한 귀족들의 손에 의해 함락되었고 다니엘은 비밀리에 레온에게 몸을 의탁했다.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제국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귀족들이 왕국으로 치환되었을 뿐 제국도 같은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은근히 제 욕심을 밀어 넣는 이들을 레온은 이대로 가만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고 움직일 시기는 바로 지금이었다.

레온은 곧바로 항복하는 왕국들의 대부분은 건드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가장 철저하게 밟았던 왕국은 본보기일 뿐이었다. 평화를 맹신하여 황제를 우습게 보고 불온한 계획의 중심이 된 곳이니 자비는 필요 없었다. 그 뒤에 레온은 항복의 깃발을 받아들였고 그들에게 인도적인 대우를 약속했다. 그러나 항복을 하더라도 힘을 보여줘야 하는 곳에는 가차 없이 군대를 보냈다. 제국을 위험하게 할 존재는 필요가 없었다.

황제의 군대에 대항하는 왕국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제국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당장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전고를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아난마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항하면서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몇 년 이내로 마무리될 이 전쟁이 끝나면 제국은 다시금 대륙에서 찬란한 위상을 날릴 것이었다. 제국인들은 대륙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설 황제의 백성이라는 것을 하나같이 자랑스러워했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기분이군요.”

“과정의 문제지. 군주란 자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거든. 그런 위치에 있다면 한 번 행동을 할 때 최대한의 이득을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제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겁니까.”

“그대는 앞으로 로윈의 왕이 될 것이니까.”

그것도 라엘이 나타나서 이야기가 잘돼야 가능한 부분이겠지. 로렌은 입술을 비죽였다. 어린 청년의 생각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지만 레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로윈을 돌려주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고 있었다. 비루한 변명이자 죄책감을 가리기 위한 치사한 행동이라 말해도 상관없다. 그는 로윈이라는 나라 자체에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윈의 왕이 되는 것은 다니엘입니다.”

“그대는 라엘이 다니엘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기대는군.”

“그렇게 보인다면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입술에 레온은 빙긋 웃었다. 이런 부분은 정말로 라엘과 비슷했다.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다니엘이 얼마나 라엘과 비슷했을지 상상이 됐다. 본 적이야 있었지만 그때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이라고 꼭 믿고 있었을 때라 큰 인상이 남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덜 뛰어서 잘 볼 수 있겠다는 생각 정도만 했었다. 아마 그가 다니엘이었을 것이다. 이제 생각하면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것은 하나도 잊지 않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라엘은…….”

한참 후에 로렌의 입술이 열렸다. 이제는 더 이상 떨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는 자신을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도 폐하에게는 도구인 겁니까?”

“아니, 그는 내게 유일하게 남은 인간성이야. 그가 사라졌기에 나는 마음껏 잔혹해질 수 있었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이해해야 할 입장일지도 몰라.”

“로윈은 그런 잔혹한 왕을 두지 않습니다.”

“해 봐야 아는 일이지.”

유일하게 남은 로윈의 후계자이자 왕이 되어야 하는 로렌의 약한 말에 레온은 미소 지었다. 그마저도 보기 싫어 로렌은 고개를 휙 돌렸다. 레온의 기분이 상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 어찌 생각하든 라엘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에게 어떠한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그렇게 생각하자 군주의 마음가짐에 대해 지적하는 그가 정말로 꼴 보기 싫었다.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저것은 자신이 원하는 왕이 아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형도 원했던 왕의 형태가 아니었다. 심지어 라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로윈은 제국과 달랐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나라는 좀 더 따뜻했고……. 그들이 보여주었던 왕의 모습은 이리도 차갑지 않았다.

꺼내 보아야 헛되었기에 말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당신과는 다르다. 당신의 나라와 나의 나라는 다르다. 빠르게 스쳐가는 창밖의 풍경을 주시하며 로렌은 생각했다.

로렌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레온은 마차를 세우고 말로 갈아탔다. 레온이라고 로렌과 동석하는 것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의 얼굴 한구석에 남아있는 라엘의 모습을 찾으며 그의 삶의 희망이자 삶을 끝낼 이유마저 됐던 로렌이 괴로워하는 모습만은 보기가 좋았을 뿐이다. 

어쨌거나 로렌을 계기로 라엘은 자신을 떠났고 로렌이 거부하자, 그리고 그를 살리기 위해 라엘은 망설임 없이 생을 포기했다. 이전처럼 그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를 질투한다. 책임감이나 형제애와 비슷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는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을 라엘이었기에 그러했다.

레온은 서늘하게 웃었다.

라엘이 살아있는 것이 우연이든 계획이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다니엘이 아니라는 것조차도……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분리된 존재라 생각해 본 적은 전혀 없었건만 능숙하게 감추는 것을 잘 해내지 못한 로렌 덕분에 의심하게 되었다. 자신의 형을 마치 타인처럼 말하는 것이 신경 쓰여 하나씩 되짚어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아, 그러했구나.

그런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중요한 것은 라엘이 몇 번이나 제 눈앞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잡을 수 있는 기회조차,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는 망설임 없이 떠났었다. 이제야 알게 된,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이미 제 손으로 모두 깨뜨려버린 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고통 이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다.

명백한 사실이다. 이번에도 살아있었다면 어떻게든 제 곁을 찾아올 수 있었을 것인데 라엘은 결코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다시 로렌을 선택했다. 그래, 라엘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가 어찌 생각하든 이제 무슨 상관일까.”

라엘이 결코 자신에게 올 생각이 없다면 그의 의사를 존중할 필요는 없다. 일단 잡아 놓고 나서 어찌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명령은 이미 바뀌어있었다.

그를 어떻게 잡아놓으면 좋을지 생각하다 보면 상상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굳이 온전한 몸이 아니어도 된다. 그저 곁에만 있다면. 라엘의 팔다리의 힘줄을 끊어놓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가 상처 입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제 곁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은 마음에 들었다.

아니, 그래도 손은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라엘이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는 것은 보기가 좋았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거부할 테지만 바르작대는 모습이라도 보기 위해서는 역시 팔은 자유롭게 쓰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제는 굳이 그에게서 사랑을 갈구할 마음이 없었다. 라엘은 결코 자신을 가장 우선으로 할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몸뚱이라도 절대로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 외에는 자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일까. 자신을 저주하고 원망하면서도 제 곁을 떠나지 못할 라엘을 상상하며 레온은 미소 지었다. 그것이 진정 기쁨인지는 글쎄…… 잘 모르겠다.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야 한다. 아아, 한없이 미쳐가는 자신이 라엘에게 상처 입힐까 두렵다. 그가 상처 입는 것,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를 갈구하는 자신에게 어떠한 것도 주어지지 않자 결국은 갈증에 메말라 미쳐가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제발 자신이 그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라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의외의 사건이었다. 만약 살아있다 하더라도 조금 더 은밀하게 로렌을 구해내려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오히려 보란 듯이 모든 곳에 제 존재를 과시하며 레온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지금쯤이면 대륙의 모든 왕국에서는 라엘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레온이 보낸 선전포고문와 함께 보낸 은밀한 요구사항에서는 다니엘에 관한 언급이 빠지지 않았고 그와 꼭 닮은 라엘이 가장 최전선을 누비고 다니는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라엘은 아무런 계산도 없이 움직이는 남자가 아니다.

“도발인가.”

알면서도 넘어갈 수밖에 없는 도전장이었다. 그래서 그의 뜻대로 굳이 로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형태를 지닌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이 라엘이 주는 것임에 의미가 있었다. 설령 그것이 둘의 사이에 종국을 알리는 것이라도 그러했다.

지독하고도 지독한 서로의 운명은 어떤 방식으로 마감을 지을까. 둘 중 하나는 모든 것을 잃어야 끝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엘에게는 자신을 추락시킬 힘이 없었다. 지금까지 제 손을 용케도 피하고 달아나며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을 놀랬지만 거기까지였다. 놀랍다 하더라도 이제는 일개 용병단의 단장일 뿐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아아,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차가운 머리로 생각을 하지만 곧 가슴이 뜨거워졌다.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레온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가 돌아왔다.

그를 볼 수 있다.

그때였다.

우르릉. 우레와도 같은 굉음이 들리며 산비탈을 따라 흙과 바위가 쏟아졌다. 공교롭게도 제국군이 지나던 곳은 숲을 끼고 산을 돌아가는 곳이었고 갑자기 일어난 산사태에 순식간에 열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쏟아지는 바위와 흙더미는 순식간에 동산만큼 쌓였고 흙먼지가 날려 시야를 가렸다.

유난히도 큰 소리를 듣고 피한 이들이 대부분이라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뒤 열과 앞 열은 완전히 분리됐다. 한쪽은 절벽이었고 한쪽은 숲이었다. 빽빽한 수림을 지나 뒤로 넘어갈 수는 있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나 모를 기습에 대비하여 서둘러 진영을 정리했지만 추가 공격은 없었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이런 잔머리를…….”

레온은 옷에 쏟아진 흙을 털어내며 짜증을 감추지 않았다. 얄팍한 수였다. 이런 시기에 산사태라니 말이 되지 않았다. 척 봐도 누군가의 잔꾀였다. 그러나 제국의 군사들이 이쪽 길로 지나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에 사용할 수 있는 잔꾀이기도 했다.

레온이 군사와 함께 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은 극비였다. 그를 위해 같은 시기에 비슷한 규모의 군사들은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이동하고 있었고 어떤 곳에 레온이 함께하고 있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철저하게 준비된 멍청이의 계획인 것인가. 레온은 조소했다. 이렇게 허리를 끊어 내봤자 정작 제가 있는 앞 열에는 군사들이 가득했다. 기습을 하더라도 어진간한 수로는 제압할 수 없을 것인데……. 자신이 지나가고 나서야 쏟아진 토사. 그리고 이어지지 않는 공격. 그 순간 레온은 깨달았다.

“왕자는?”

“뒤, 뒤쪽에 아직 있는 것 같습니다.”

쏟아진 토사와 바위로 작은 언덕이 만들어진 그 너머에 마차는 고립되었다. 아니, 자신으로부터 탈출한 것이었다. 열의 가장 뒤쪽에서 따라오던 마차였으니 저 너머에 있는 군사의 수는 극소수였다. 처음부터 이것을 노린 것이었다.

“라엘!”

레온은 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것인가. 다만 그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러나 아직도 간헐적으로 쏟아지는 흙과 바위의 소리에 묻혀 레온의 목소리는 건너편까지 닿지 않았다.

“아악!”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얽혀 바깥은 아비규환이었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놀란 말들을 진정시키지 못해 마차는 미친 듯이 흔들렸고 어떻게 된 것인지 마차는 잠시 후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그리고 마차가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로렌은 몸을 웅크리며 그 시간을 견뎠고 몇 바퀴 구른 후에는 마차가 오히려 단단하게 고정되었는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반쯤 기울어 있는 마차의 아래쪽에 위치한 창은 깜깜할 뿐이었고 위쪽에 살짝 열린 문 너머로는 먼지가 뿌옇게 낀 하늘만이 보였다.

바깥에서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로렌은 잽싸게 바닥에 엎드린 채로 상황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마차는 폭이 넓고 컸다. 위쪽으로 탈출을 하려다 아슬아슬하게 어딘가에 걸려있는 마차가 움직이면 오히려 시선을 끌 것이라고 생각했다.

- 넌 전투에는 완전히 무능! 무능! 무능 그 자체니까 위기 상황이 오면 일단 엎드려! 거기가 어디가 됐든 엎드려! 그렇게 있으면 이 형님이 반드시 구해줄 테니까.

이 다급한 상황에서 다니엘의 말이 문득 생각나서 로렌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우수한 든든한 형이었다. 로렌은 다니엘이 왕이 될 것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의 통치 아래에 평화로운 왕국에서 책을 읽으며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하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읽으며 지내고 싶었다. 그가 후원하는 사람들은 다니엘을 찬양할 것이고 그것을 바랐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형을 추억하는 것은 어쩌면 죽음이 가까워져서일까.

황궁 안에 갇혀있을 때는 사실 다니엘보다 라엘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다. 그에게 했던 가시 돋친 말과 하필이면 그 상황에서 그러했던 자신을 탓했지만 후회는 그래봤자 후회였다. 자신에게 형밖에 남지 않았던 것처럼 라엘에게도 다니엘밖에 없었다. 다니엘은 본인의 유산으로 로렌 자신을 남겼다. 하지만 자신은 라엘을 거부했고, 이제는 죽더라도 그에게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절벽에서 떨어진 라엘이 살아있다고 믿고 있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황제가 그리 단단히 믿으니 자신도 조금 믿게 된 것뿐. 그를 다시 만나는 것도 두려웠다. 그러나 반항조차 하지 않고 레온을 따라온 것은 한편으로는 라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라엘이 살아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사과를 하고 싶었다. 

아니, 그것만은 아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제 삶을 잘라 형의 자리를 지켜준 것에. 그리고 자신을 지키려 했다는 것에. 하지만…….

“에취!”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눈이 따끔거리며 눈물이 흘렀다. 크게 기침을 하자 문 앞에 서 있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림자가 말했다.

“아, 죄송…….”

생소한 듯 익숙한 목소리에 로렌의 눈이 커졌다. 입이 절로 목소리의 주인의 이름을 외었다.

“……라엘?”

“늦었죠, 왕자님? 세상에 얼마나 사람들이 많은지 길이 막히더라구요.”

마치 산책 나온 자신을 마중 나온 양 너무나도 가벼운 말투에 그만 얼떨떨해졌다.

“모시러 왔습니다.”

수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내밀어진 라엘의 손을 로렌은 망설임 없이 붙잡았다. 단 한 순간도 다니엘과 라엘이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라엘의 미소에 유난히도 다니엘이 겹쳐 보였다.

“……라엘……. 라엘……?”

“네, 그런 이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렇게 살기로 했으니 잘 부탁드립니다.”

“……라엘, 그러니까 난…….”

“일단은 여기까지만 하죠. 우리 작은 왕자님께서 하고 싶은 말은 많으시겠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시간이 별로 없답니다.”

어째서 호칭에 ‘작은’이 들어가는 것인지 울컥 뭔가가 올라오며 항의를 하고 싶었다.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말투에 발끈했지만 항의하기에는 라엘이 너무나도 다니엘과 닮아있었다. 한마디라도 더 하면 정수리를 딱 소리 나게 맞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반복학습의 효과이자 결과에 결국 로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딱 다물어버렸다.

로렌의 손을 잡은 라엘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어라……?”

“……?”

“……살찌셨나요?”

“……!”

로렌을 천천히 마차 위로 끌어올리려던 라엘은 조금 당황했다. 분명히 이 무게가 아니었을 텐데? 하는 생각과 함께 위태롭게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손을 놓았다. 

마차는 거의 직각으로 기울어진 상태였고 아래쪽 반쯤은 토사에 묻혀 있었다. 불안정하게 자리하고 있는 마차는 라엘이 로렌을 끌어올리려 하는 순간 휘청거렸고 정말로 살이 많이 찐 것인가 싶어 로렌은 민망해했다.

라엘도 농담으로 꺼낸 말이 진짜로 사실인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이전과는 다르게 상당히 묵직해진 무게감에 라엘이 자신이 황궁에 갇혔을 때를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황궁에서 분명히 레온은…….

“……혹시 황제가 이국의 과일을 가져다주던가요?”

“…….”

로렌은 침묵으로 답했다. 그리고 지금의 침묵은 긍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로렌이 입고 있는 옷은 레온이 라엘에게 선물한 적 있는 색의 옷이었다.

라엘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쌌다. 이야, 사람 안 가리고 그런 똘기 넘치는 짓을……. 가둬놓고서는 잘해준답시고 잘 먹이고 잘 입힌다는 선택지는 대체 어디에서 배워온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에 라엘은 흠칫했다. 서, 설마…….

“로……로렌 님…… 뒤……는…… 무사하십…….”

“아무 일도 안 당했어!!”

말이 없던 로렌이 거세게 항의했다. 다행히도 뒤는 무사한 것 같았……. 아니 대체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인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었다. 레온의 똘기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된 것이 틀림없었다. 이건 다 레온의 탓이었다. 자신의 사고도 정말로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맙소사…….

로렌은 생각보다 건강했다. 정말 잘 먹이기는 잘 먹여놓은 것 같다. 마음고생이 심해서인지 어두운 표정은 다소 남아있었지만 그마저도 라엘을 보자 그새 걷혔다. 다니엘을 닮은 흰 얼굴은 그래도 건강했고 매끈거린다. 오히려 마지막에 보았던 비쩍 말라있던 몸보다는 다소 살이 오른 지금이 더 보기 좋았다. 예상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좋은 것이 좋은 것 아닌가.

라엘은 로렌의 손을 놓은 후 자세를 바로잡았다. 토사 가운데 위태롭게 박혀있는 마차 위에서 성인 남자 두 명의 몸무게를 버틸 수 있는 자리를 찾아야 했다. 일단 급한 대로 문부터 열고 봤지만 바로 로렌을 끌어올리기에는 위험했던지라 라엘은 마차의 위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중심을 잡고 발에 단단히 힘을 주고 자세를 잡았다. 발을 살짝 굴려보니 다행히도 마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자 얼마 남지 않았던 제국군들도 거의 제압을 당했다. 시간은 넉넉했다. 역시 잘난 나는 완벽한 뒤처리까지 한단 말이지. 뿌듯해하던 라엘은 고개를 숙여 로렌을 보았다. 일렁이는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왠지 정말로 제 동생 같은 기분이 들어 라엘은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로렌 님.”

“아…… 네…….”

“편하게 반말을 하시면 됩니다.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럽니다만.”

라엘의 말에 로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이국의 과일은 맛있었…….”

“닥쳐!”

마차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라엘은 웃었다. 로렌이 얼굴이 새빨개진 채 씩씩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역시 다니엘의 동생은 동생이었다. 불같은 성격은 꼭 같았고 어떤 상황이 되던 정신력 하나로 버티는 것도 같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너무 큰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닌지 내심 걱정했었는데 저리도 팔팔하니 걱정은 잠시 접어둬도 될 것 같았다. 앞으로 다니엘을 대신하여 로윈을 이끌어가야 하니 저 정도가 딱 좋았다.

씩씩거리던 로렌은 곧 진정했다. 숨을 고른 뒤 그는 라엘의 위치에 맞춰 조심스럽게 자리를 옮겼다. 다행히 마차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라엘은 다시 손을 내밀어 로렌의 손을 맞잡았다.

왠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두 눈만 끔뻑거렸다. 정말로 형이 구하러 왔다. 다니엘이 직접 올 수는 없었지만, 그의 안배로 그와 꼭 닮은 라엘이 자신을 구하러 왔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못된 말을 사과하고 싶었다. 맞잡은 손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라엘, 난…….”

“고백이라면 접어두세요, 작은 왕자님. 아무리 형님이 좋더라도 그런 뜨거운 눈길은 좀……. 이런 상황이 됐지만 저도 취향이라는 것이 있고…….”

어이가 없어 로렌이 눈을 치켜떴다. 울컥하고 솟아오르던 따뜻한 뭔가가 쑥 들어갔다. 이런 성격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애잔한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를 그런 성격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느물거리고 건들거리는 말에는 뭐라고 답을 할지 모르겠다. 고민하던 로렌의 눈이 커졌다.

“라엘!”

“이크, 농담이에요.”

생긋 웃으며 답하던 라엘은, 그리고 아주 잠시 후에 로렌의 눈에 맺힌 경악을 알아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등 뒤에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라엘은 고개를 돌렸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귓전에는 쿠당탕탕 하고 구르는 소리가 고막을 두들겼다. 소리와 함께 사위는 정신없이 빙빙 돌았고 바닥에 그대로 부딪힌 몸이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마차 안으로 내동댕이쳐진 라엘을 굉장히 익숙한 인영이 덮쳐왔다. 로렌의 비명 소리가 왠지 멀리 들렸다. 두 눈 가득 보는 사람이 살 떨릴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 담겼다. 너무 예상대로의 상황이라 어이가 없어서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오랜만이야, 라엘.”

“그러게요.”

레온이 웃었다. 그의 손이 당장에 라엘의 목덜미를 쥐어 잡았다.

레온의 손에 힘이 들어갔고 라엘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말할 틈은 줘야 할 것 아니야! 물론 레온의 입장에서야 라엘이 그를 엄청나게 약 올렸을지는 몰라도 객관적인 입장에서는 분명히 레온이 더 심한 것이 맞았다. 심하다 뿐인가. 쌍욕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데 당당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기가 막힌다는 말을 물리적인 관점에서 겪고 있는 라엘은 할 말이 분명히 많은데도 단 한마디도 목구멍 밖으로 뱉어내지 못했다. 숨구멍이 틀어막혔는데 말이 무슨 문젠가 싶었다. 그렇지만 말을 못하니까 죽을 것 같기도 했다.

간신히 손을 뻗어 목을 틀어쥔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미친놈은 힘이 장사라던 속설이 생각난다. 이런 식으로 그 속설의 진실을 깨닫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컥컥대는 소리 외에는 제대로 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아, 억울하고 원통하다. 차원이동을 하고 나서 원하는 대로 산 기억 자체가 없는데 억울해서 죽을 것 같……. 아차, 이것도 죽는 것인가. 시야가 점점 흐려지며 그 사이로 시발스럽게도 다정하게 웃는 레온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저, 저 미친놈!

이 손에 죽는 것이 정말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 선명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 돼!”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목소리와 함께 레온의 몸이 휘청거렸고 라엘의 목에서 손이 떨어져나갔다. 폐로 밀려들어오는 공기에 라엘은 컥, 하는 소리를 내며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쿵 하고 등이 벽에 부딪혔다. 거칠게 밀려들어오는 산소가 폐를 두들겨 패는 기분이 들었다. 공기를 들이켤 때마다 목구멍이며 폐가 쾅쾅 거칠게 공격당하는 느낌이 든다. 숨을 쉬는 일이 이렇게 공격적인 일이라는 것은 살아생전 처음 알았다.

시야가 흐릿하고 초점이 맞지 않아 눈을 끔뻑이는데 레온의 노호성과 함께 다른 쪽으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덜컹이며 촤르르 흙이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겨우 중심을 잡자 그제야 눈에 초점이 돌아왔고 그것은 모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간신히 구석에 몸을 피한 라엘의 눈에 짜증 가득한 레온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라엘을 향하자 한껏 물오른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미친 것 같았다. 로렌은 그 곁에 쓰러져있었다. 아마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로렌이 레온을 밀쳐냈지만 그대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았다. 그 이상 레온을 몰아붙이기에는 로렌은 너무나도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제압당하여 기절한 것 같았다. 쓰러진 그를 본 순간 덜컥 가슴이 내려앉긴 했었지만 분명히 가슴이 달싹이고 있었으니 정말로 기절이어야 했다.

로렌의 안전을 확인한 라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폐하, 너 말입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 모르지요?”

존경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말이었지만 레온은 그냥 웃었다. 아주 좋아 죽는구먼?

“참 태평한 말이긴 하군.”

“폭력으로밖에 해결할 줄 모르는 야만인!”

“합리적인 거지. 난 생각보다 문화적인 사람이거든.”

“어디의 문화가 만나자마자 목부터 조릅니까?”

“아, 이것은 실리 쪽. 일단 기절을 시켜놔야 네가 도망 못 갈 것 아냐?”

“기절 이전에 죽을 뻔했거든요?”

“괜찮아. 힘 조절 정도는 하고 있었어.”

뻔뻔하게 답하는 레온의 말에 오랜만에 벽을 느꼈다. 익숙한 감정이 가슴을 때렸다. 화, 화가 난다, 정말로!!

벽을 보며 말하는 것이 더 시원할 것 같은 답답한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여전히 미동이 없는 로렌이 신경 쓰였다. 그러나 쓸데없이 큼직한 마차는 레온과 라엘에게 충분한 거리를 줄 정도로 넓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로렌은 레온의 옆에 쓰러져있었다. 기절한 사람보고 이쪽으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걸 어떡하나 고민하던 중 라엘의 시선이 자꾸 로렌 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레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안 죽었어.”

“제 눈이 병신도 아니고 다 보입니다만?”

괜히 반항하고 싶어지는 목소리라 툭 쏘아붙였다. 그래도 로렌의 안전이 확인되자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하. 로렌 왕자도 네 얼굴이 남아있으니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야.”

“저랑 똑같이 대했다면 죽여 버릴 겁니다.”

“질투하는 거야?”

“……미쳤어요?”

기가 막혀서 입을 쩍 벌렸지만 레온은 시종 당당했다. 목이 졸리고 있지도 않는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대체 무슨 자신감을 사발로 퍼먹었기에 저러나 싶을 정도였다.

“아, 넌 역시 욕을 해도 사랑스러워.”

“난 폐하 너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어요.”

“네가 하는 것이라면 애정 어린 스킨십이겠지.”

“벽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네요.”

“네가 이야기할 수 있는 벽이 되다니 기뻐.”

“미친.”

미친 대화라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가쁘게 움직이던 가슴이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곧 두통이 일었다. 어떻게 저 미친 자의 곁에서 로렌을 빼올 수 있을지 답답했다. 어렵지 않게 그의 생각을 읽은 레온이 생긋 웃었다.

“그가 그렇게 소중해?”

“당연한 걸 왜 굳이 묻고 그러세요?”

“나보다 더?”

“비교가 불가능한 대상이거든요?”

레온이 활짝 웃었다.

“역시 죽여 버려야겠어.”

실수다. 라엘은 당황했다.

“……지금 취소 받아주시나요?”

“그는 네게 소중한 존재이니 그가 있다면 넌 나를 또 떠나겠지.”

받아줄 턱이 있나.

“말 좀 들어요! 취소한다고, 취소! 아, 거기서 손 떼!”

로렌을 향해 뻗어지는 레온의 손을 보자마자 라엘은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어디선가 ‘가라, 피카츄!’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라엘은 온몸을 날려 레온에게 몸통박치기를 시전 했고 그리고 그 결과는 엄청났다.

쏟아진 토사 안에 애매한 각도로 처박혀 있던 마차는 성인 남성들의 무게까지는 간신히 버텼지만 그들이 벽에 쾅쾅 부딪히는 충격은 버티지 못했다. 아마도 마차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도 지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옜다, 더러워서 뱉는다!

마차는 순식간에 흙더미에서 빠져나와 비탈을 굴렀다. 지금까지 받았던 충격을 열 배로 갚아주겠다는 마차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기분이 들었다. 점점 미쳐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라엘은 바닥을 구르는 마차 안에서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진짜로 마차가 화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악! 이렇게, 악! 경사가, 악악! 심했나아아악!!

그때였다. 이리저리 마차 안을 튕겨나가던 라엘의 몸을 끌어당기는 손이 있었다. 레온은 라엘의 등을 껴안아 제 품안으로 끌어당겨 단단하게 안았다. 이후로 라엘은 직접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러가는 마차 안에서 세 사람은 이리저리 부딪히고 굴렀지만 라엘은 멀쩡했다. 다만 정신만은 혼란스러웠다. 어처구니도 없었다. 제발 하나만 하면 안 되나?

머리가 어질어질하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산사태처럼 흙과 바위를 산비탈 아래로 쏟아붓자는 계획 세운 거 누구야, 응? 근데 그게 나잖아!

마차가 간신히 멈춘 후 정말로 라엘은 빨리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빨리 정신을 차려서 레온을 제압하고 로렌을 구출하고자 했다. 분명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레온이 먼저 정신을 차리고 또 라엘을 깔아뭉갠 채로 목에 손을 감은 것은 절대로 라엘의 탓이 아니었다. 라엘은 정말로 노력했다, 아주 많이. 하지만 미친놈을 이기지 못했을 뿐이었다. 다행인 것인지 불행인 것인지 이번에는 목을 감아 살짝 눌러 위협을 하고 있을 뿐, 손에 힘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를 일이었다.

레온이 웃었다. 살벌하게도 아름다운 미소였다.

“사랑해, 라엘.”

라엘은 평화로운 해결방법을 제안했다.

“일단 이 손을 좀 놓고 이야기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장렬하게 무시당했다.

“어떻게 해야 널 내 곁에 둘 수 있는지 생각해봤어.”

“우리 대화로 풀죠. 당신이 말을 했으니, 이번엔 제가 말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넌 스스로 내 곁에 머물 남자가 아니란 것을 다시 깨달을 뿐이었지.”

역시 장렬하게 무시당했다. 헛된 시도는 계속됐지만 말 그대로 헛된 시도일 뿐이었다.

“일단 이야기는 정말로 이번에 제 차례로 하면 안 될까요? 아, 그래. 그럼 순서 말고 일단 문화인답게 손부터 어떻게…….”

“그렇다면 방법이 없지. 네 몸이라도 강제로 곁에 두는 수밖에.”

“……혼잣말하는 버릇은 안 좋…… 컥……!”

“괜찮아. 기절만 시킬 거니까. 한숨 잔다고 생각해.”

폐하 너 새끼는 한숨 잘 때 너보다 덩치 큰 남자가 목을 졸라주기라도 합니까? 거 참 특이한 수면방법을 보유하고 계시는군요! 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 정말로!

라엘은 발버둥 치며 레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몸은 점점 축 늘어질 뿐이었다. 정말 이대로 잘못하다가는 눈을 떴을 때 빌어먹게 반가운 족쇄와 재회하게 될 것 같아서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다. 사고방식이 이상한 남자에게 찍힌 덕분에 별일을 다 겪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노력했지만……. 미친놈을 힘으로 이길 수가 없었다. 세상의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인들만 손해 보는 더러운 구조라 욕하며 라엘은 신을 욕했다. 진짜 레온의 능력치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 놓은 것이냐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라엘은 제 능력치도 만만치 않게 사기스럽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레온에게는 역부족인 능력치일 뿐이었지만.

점점 시야가 흐려지며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생각하는 것마저 힘들어지며 손이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라엘은 정말로 정신을 잃었다.

시발…….

경계에서 ~In the border~

“저기요, 왕자님.”

“왜.”

“저 지금 죽었습니까?”

“아니, 그냥 죽기 직전이야.”

바람이 시원한 그늘이었다. 라엘이 앉아있는 곳은 커다란 나무 아래였다. 품 안에 안을 수 없을 만큼 넓은 둥치의 나무는 짙은 그늘을 만들어내었고 그것은 두 사람에게 햇볕을 막아줄 정도로 컸다.

사방은 그저 푸른 초원이었다. 바람이 한 번 쓰다듬고 지나가면 그 흔적이 선연했다. 낯익은 듯 낯선 그 광경에 라엘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풋내 나는 풀 냄새가 폐부 가득 들어찼다.

아, 집에 가기 싫다. 라엘은 생각했다. 정말로 그냥 여기서 놀고 싶었다. 다니엘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니 그 빌어 처먹을 레온이 기절만 시킨다고 해놓고서는 아주 생사의 기로까지 목을 조른 것이 틀림없었다. 그냥 뒈져버렸다고 생각하기에는 억울하니까 그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낫겠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아도 그저 넓게 펼쳐진 녹색 초원일 뿐이었다. 그 흔한 새 한 마리도 없었다. 무슨 강이라든가 검은 옷 입고 갓 쓴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다니엘의 말대로 일단 자신은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음이 놓이자 라엘은 편하게 나무에 등을 기댔다. 묵은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산림욕이라고 하는 걸까. 나무는 한 그루뿐이지만. 어쨌건 이 정도의 휴식은 제게 허락되어 마땅했다. 솔직히 너무 고생하지 않았나.

“왕자님.”

“왜.”

“세상이 빌어 처먹게 힘들어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지 않냐. 이승에 있는 네가 참아.”

“전 그거 동감 안 하는……. 어? 그거 한국 속담…….”

“여기 있으면 자연스럽게 글로벌해져.”

“……차원을 뛰어넘는 글로벌이네요.”

“내가 좀 잘났거든.”

“아, 네…….”

이상하다. 왜 생사의 기로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생긴다는 아련함…… 뭐 이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라엘은 멍하니 초원의 저편을 바라봤다. 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심지어 저승(추정)마저 잘못된 것 같다.

“라엘.”

“왜요.”

라엘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냥 세상에 대한 불만을 곱씹을 시간을 좀 줬으면 좋겠다. 다니엘이 웃었다.

“지켜보고 있었어.”

“유행어도 합니까?”

“응?”

“아, 거기까진 글로벌해지지 않으셨군요.”

저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다니엘이 자신을 한심하게 내려다보는 상황을 참 오랜만에 겪으니 오랜만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익숙함을 느끼고 싶지는 않았는데.

낯설고 포근한 이 공간에서 벗어나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곁에 서 있는 다니엘을 생각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거울을 보면 볼 수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다니엘을 보는 것은 그 기분이 달랐다. 밀랍인형같이 굳어가던 그의 얼굴을 기억하는 라엘로서는 생기 있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 좋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함께 있고 싶었다. 사실 돌아가 봤자 제대로 미친 예쁜 놈 얼굴밖에 더 보겠는가.

손을 잡고 그와 함께 저 너머로 함께 돌아가고 싶었다. 다니엘을 기다리는 사람은 수없이 많았고 라엘로서는 그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라엘이었고 다니엘이 아니었다. 너무 버겁다.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편지 봤어?”

“네.”

“감상은?”

“시발.”

“여전히 솔직하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존나 엿 같아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도 품에 곱게 품고 있었거든요? 요즘 욕이 늘고 있다고 생각하며 라엘은 이를 바득 갈았다. 짜증을 있는 대로 내며 바닥을 퍽 소리가 나게 차자 풀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위로 확 솟구친 풀이 바람을 타고 그대로 라엘의 얼굴을 덮쳤다. 푸푸 소리를 내며 입 안으로 들어온 풀을 내뱉자 ‘한심’이라고 써진 다니엘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풀까지도 내 말을 안 듣는 거냐! 아, 원래 풀이 사람 말을 안 듣는 건 알고 있지만, 아오. 식물에게 화를 내는 쓸데없는 짓을 하며 라엘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애꿎은 바닥만 퍽퍽 차대는 라엘을 보며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다니엘이었다.

“그렇게 보이게 만들어서 미안해.”

장례식이자 대관식이었던 그 날, 그리고 다니엘의 죽음이 도래했던 날이었다. 그는 충분히 피할 수 있음에도 죽음을 택했다. 부러 라엘의 눈에 띄도록, 그리고 그가 로윈과 로렌을 버리지 못하도록. 지독하게 슬픈 연극이었다. 자신을 휘감고 있는 시계의 바늘이 멈추기 전에 결심한 일이었다. 연출도, 감독도 모두 다니엘이었다. 유일한 관객이었던 라엘은 그가 짜놓은 새로운 연출로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다. 라엘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무대였다.

“미안하기는 한가 봅니다?”

“그래도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런 선택을 내린 것은 너를 아끼는 이유도 있었다는 것을.”

“어울리지 않게 다정하게 회유하지 말아주세요. 제 얼굴이라 소름 끼치니까요.”

“내 얼굴이 먼저야. 틈타서 기어오르지 말자.”

라엘의 입이 꾹 다물렸다. 어차피 죽은 다니엘인데도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무는 것은 반복학습의 결과물인가. 왠지 슬퍼졌다.

다니엘도 조용해졌다. 조용한 가운데 라엘은 왠지 울컥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죽어서도 사람 기죽이는 것만큼은 똑같았다. 누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이긴다고 했나? 아, 그 반댄가? 뭐가 됐든 정말로 억울했다.

“네게도 선택할 권리가 있어.”

다니엘의 손가락 끝이 저편 너머를 가리켰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만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다니엘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문이 하나 서 있었다. 앞뒤로 아무것도 없이 문만 덜렁 서 있었지만 저 문이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라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니엘의 편지가 아니더라도……. 직감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아아, 저 문을 열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구나.

다니엘이 남긴 편지에는 라엘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적혀있었다. 그저 그것이 일반적으로 시도할 수 없는 방법이 아니었으며 불명확하였기에 다니엘은 굳이 그 방법을 라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라엘이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감춰진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다니엘이 죽으며 영영 알려지지 않을 뻔했다. 그러나 편지를 읽기 전, 라엘은 우연히도 그 방법을 시도할 수 있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그때.

“제가 절벽에서 떨어지며 본 것은 역시 환상이 아니었군요.”

“생과 사의 경계에서 차원의 경계는 이지러지고 네 몸은 가장 친숙한 곳으로 이끌려가.”

“하지만 돌아왔어요.”

“내가 남긴 유언이 너를 그렇게 이 세계에 얽매어 놓을 줄은 미처 몰랐어. 미안해.”

다니엘이 웃었다.

“그런데 정말 그것뿐이었어?”

라엘이 웃었다.

“처음엔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너의 삶이 내 삶이 아니고 내 유언이 네 인생의 전부가 아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세계에 남은 이유가 있다는 거군요.”

“그건 너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 같네요. 살아있을 때나 죽고 나서나 모르는 것이 없네요! 아주, 얄미워! 하지만 그만큼 안타깝고 그만큼 애처롭다.

라엘은 바닥을 발로 찰 뿐 쉽사리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지는 않았다.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봐.”

“우와, 여전히 거만하시네요.”

“거만할 만큼 잘났으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는 아니, 그가 평생에 한 번이라도 진 적이 있을까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제 세상에서는 사라진 인물이었다. 이렇게 경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슬픈 이. 아아, 이곳은 아름답지만 그만큼 외롭고 쓸쓸하다.

“어째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으신 거예요?”

이 쓸쓸한 세계에 홀로 남는 것을 택한 것을. 우습게도 다니엘은 되물었다.

“어떤 것을?”

“왕자님께서 병에 걸린 거요.”

다니엘이 희게 웃었다.

“굳이 말할 필요 있어?”

아, 예. 그러시겠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늬예늬예 알겠쯤돠.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죽어버릴 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후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혈육, 믿을만한 사람. 친구. 누구에게도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홀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있지. 너를 발견했을 때 난 네가 신이 내게 내려준 선물이라고 생각했어.”

“와, 끔찍하네요.”

다니엘이 라엘의 정수리를 쥐어박았다. 아팠다. 꿈은 아닌 것 같다, 정말로.

“앞으로의 내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서, 사라져버릴 나라는 조각을 위해 신께서 꼭 같은 새로운 조각을 내려주셨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 자리에 제 의사는 없네요. 전 결국 왕자님이 되지 못했어요.”

“그래.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후회했어. 너는 내가 아니고 나를 대신하여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닐 텐데 말이야. 마지막에서야 깨달아서 그런 형식으로밖에 이야기하지 못했지.”

“뭐, 괜찮아요. 그 부분은 이제 그럭저럭 용서했어요.”

사실을 알고 나니 제게 버거운 짐을 얹어주고 간 다니엘을 도저히 탓할 수가 없었다. 라엘을 왕궁에 남겨놓고 외유를 나간다는 핑계로 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고통스러워했을 그를 생각하면 어떻게 화를 낼 수 있을까. 자신의 로윈과 아버지와 동생을 위해 모든 것을 홀로 감당했던 그는 로렌이 제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라엘이라는 대체품을 준비해두었다. 그리고 라엘이 제대로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그것을 위해 다니엘은 자신의 존재마저 서서히 지워갔다.

라엘은 정말로 완벽하게 다니엘을 연기했다.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온 것처럼 모든 것을 빠르게 흡수하고 누가 보더라도 완전한 다니엘이 된 라엘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삶을 빼앗긴 기분은 들지 않았을까.

“머저리 같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요?”

“네게 감정으로 호소해보려고 했지.”

“……퍽이나.”

폭력과 강요로 이루어진 협박이겠지! 경악하며 쳐다보자 다니엘은 어깨만 으쓱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미 죽었는데 어떻게 할 거야. 어휴, 과거의 일로 쪼잔하게 구는 거 봐라. 라는 말을 분명이 등으로 하고 있었다, 등으로!

죽어서도 뻔뻔스러운 다니엘을 채근해봤자 속이 터지는 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라엘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이놈의 잔디는 무슨 미련이 있기에 자꾸 치덕치덕 붙는 건지 모르겠다. 꼭 누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걸음을 옮기자 다니엘이 라엘을 불렀다.

“돌아가지 않아?”

“돌아가고 있어요.”

“문은 저쪽이야.”

“제 문은 이쪽에 있어요.”

어느새 라엘의 앞에는 다니엘의 뒤편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문이 서 있었다. 이 문을 열면 어디로 갈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은 자주 찾아오지 않아.”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인가요?”

“내게는 처음부터 선택권이 없었으니까.”

다니엘은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서 자신의 선택권에 대해 집착한 것일까. 눈물이 날 것 같아 라엘은 마주 웃었다.

“당분간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아마도…….”

“네가 머무를 이유가 그라면……. 그래, 그 나름대로 좋겠지.”

멋쩍어져서 라엘은 괜히 툴툴댔다.

“굳이 상기시켜주실 필요는 없어요. 이미 지긋지긋하거든요.”

“그럼에도 그를 향해 가는 거잖아.”

“하하. 저도 좀 미친 것 같죠?”

“세상이란 건 조금 제정신이 아닌 편이 더 재밌어.”

재미가 좀 덜해도 될 것 같았다. 목숨까지 걸 재미라니…… 그건 차라리 재앙이다.

다니엘이 다시 웃었다. 밝은 미소였다. 드디어 마음을 놓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가볼게요.”

“그래, 잘 가.”

“반가웠지만, 우리 한동안은 만나지 말아요.”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해야지.”

“그럼 제가 서운할 것 같아요.”

등을 돌려 문을 열자 확하고 바람이 불어왔다. 유난히도 상쾌하고 청량한 바람에 몸을 맡기는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아련하게 라엘의 등을 쫓아오다 바람에 휘감겨 그대로 하늘을 날았다. 기쁜 듯, 슬픈 듯. 아니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한데 모아진 목소리였다.

“라엘, 정말로 고마웠어.”

고개를 돌려 다니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었지만 이미 바람에 쓸려 날아가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라엘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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