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 라엘 ~Rael~(3권)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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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관 3부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 있겠어요.

11. 라엘 ~Rael~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유난히도 아름답게 빛나던 밤하늘과 누군가의 비통한 비명 소리였다.

그리고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눈을 뜬 라엘은 아주 오랜만에 익숙하고도 그리운 풍경 안에 서 있었다. 네모진 건물과 투명한 유리창들. 북적대며 걸어가는 많은 사람들과 도로를 꽉 채우며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차들이 보인다. 그 사이에 선 자신은 마치 바람이라도 된 것처럼 사이를 매끄럽게 지나간다. 아주 먼 시간을 건너왔지만 전혀 낯설지 않다.

익숙한 도로, 익숙한 길을 지나 익숙한 현관 앞에 다다랐다. 정말로 바람이라도 되었나 보다. 문을 열지 않아도 그는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간은 익숙하다. 태어나 20년 넘게 살아온 내 집. 물건들은 낯선 것이었지만 가전제품이나 가구의 배치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에 슬픔이 올라온다.

- 나 왔어요.

입을 달싹여 인사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지금 자신이 바람 같은 존재여서일까. 자조하며 웃었다. 그냥 사람이 없을 뿐이잖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낮의 것이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없어도 흘러가는 현실이 허무하면서도 안심된다.

동생의 방문을 지나쳤다. 학교를 간 것일까. 방은 비어있었다. 기억을 더듬던 라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 군대를 갔을지도 모르겠다. 저 너머에서 지낸 시간은 어느덧 5년이었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던 동생이었다. 그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이미 입대를 했겠지. 면제나 공익으로 빠지기에 걔는 너무 건강하다.

다시 거실로 나와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린 가족사진 안에는 환하게 웃는 네 가족의 사진이 있다. 사진 속 자신은 아직도 교복을 입은 채로 고등학교 시절에서 멈춰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는 날이라며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사진 속의 가족은 여전히 어색하게 미소 짓는다.

여전한 미소들을 마주하자 왈칵 눈물이 솟아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사진으로 손을 뻗었다. 손을 뻗는 순간 순식간에 풍경이 사라진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처럼. 제게는 손안에 탄 성냥마저 없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저 사라진다. 그리고 도달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꼭 저와 같은 공간에서 자신은 존재했다.

- 만약 내가 죽으면 말이야.

언제 온 것일까. 어느덧 다니엘이 라엘의 옆에 서 있었다. 한없이 부유하던 라엘은 간신히 고개만을 돌려 다니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그때는 네가 내 대신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어. 너와 나는 영혼으로 이어진 형제니까. 너는 나고 나는 너이니까.

일순 다니엘이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만큼 생생한 모습이었고 선명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알고 있다. 라엘은 다니엘이 살아있는 것도, 그렇다고 영혼이 되어 자신을 만나러 온 것도 아닌 것을 너무나도 확실히 알고 있다.

- 그러니 네가 내가 되어줬으면 좋겠어.

다니엘이 눈을 접으며 웃는다. 지금 제 곁에 있는 다니엘은 제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그이다. 언젠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던 그 모습 그대로, 그때 했던 말을 그대로 외며 다니엘은 곁에 서 있었다. 그에 관한 것은 단 하나도 잊지 않았다. 빠짐없이 똑똑히 기억한다.

언젠가의 밤에 그와 이야기를 나눴었다. 강박적으로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는 그에게 화를 냈던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만약에’라는 단서를 달고 저런 말을 했었다. 만약에, 만약에……. 그것이 만약으로 그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많이 힘들고 또 괴롭겠지만. 너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어째서 그날은 평소와 다른 상냥한 답을 돌려주었을까. 왜 평소와 다르게 그런 부담스러운 말을 해서……. 당신의 말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못했기에 나는…….

아아, 다니엘.

사실 나는 지쳤어요.

너무나도 지쳐버렸어요.

그때 하지 않았던 말. 그때는 할 필요가 없었던 말을 중얼거린다. 바람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말이었건만 마치 다니엘은 화답하듯 답을 한다. 과거에 했던 말, 그저 그뿐이었지만 어째서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과 같을까.

- 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도저히 버티지 못할 때가 올 거야. 너는 진짜 내가 아니니까.

미안해요. 더 버텼어야 하는데, 그런데 나는 해내지 못했어요. 더 잘했어야 하는데 잘하지 못했어요. 내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어요. 

쓰라린 자조와 슬픔이 울컥 밀려온다. 조금 전의 풍경처럼 다니엘마저 사라질까 손조차 내밀지 못한다. 손을 내밀면 닿을 것만 같은 지척의 거리이건만 자신은 그를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 만약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든 상황이 된다면…….

다니엘은 웃었다. 그를 알고 나서 본 미소 중에서 가장 눈부신 미소였다.

- 그렇다면 네 삶을 찾아.

어두웠던 주변이 밝아지며 귓가에 쾅쾅거리는 요란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잔득 젖은 차가운 몸뚱이를 이끌어 기슭으로 간신히 기어 올라가자 온몸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이대로 잠들면 정말로 다니엘의 곁으로 가게 될 것이라 무거운 몸을 애써 이끌어 주변에 흩어져있는, 그나마 마른 나뭇가지들을 그러모았다. 불을 붙이는 과정은 힘들었고 오래 걸렸지만 끈질기게 달라붙어 결국 나뭇가지를 태울 수 있었다.

젖은 옷을 벗어 불 옆에 던져놓은 라엘은 그제야 쉴 수 있었다. 눈을 감자 그날 다니엘이 했던 마지막 말이 생각났다. 징그럽다며 밀어내는데도 그는 미리 감사인사를 하겠다며 굳이 말을 이었었다. 그것은 정말로 지금을 위한 말이었을까.

- 넌 정말 잘해줬어. 고마워, 라엘.

라엘은 웃었다.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부터 죽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더럽게 꼬인 인생사에 절망하며 죽기에는 지금까지 고생한 것이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난데없이 차원이동 한 것도 억울한데 실컷 부려먹힌 데다 이렇게 허무하게 갈 수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 죽었다면 원통해서 귀신이 되어 머리 풀고 다녔겠지.

절벽으로 뛰어내린 것은 충동적이라기보다는 ‘상황이 그렇게 되어서’라는 것이 맞는 말이 되겠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자신은 라엘로서 삶을 살아가기로 어렴풋이나마 생각하고 있었다. 그 과정 안에는 자신이 죽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도 필요했다. 시기가 이렇게 당겨질 것이라고는 라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은 그것이 가장 나은 선택이었다. 그는 언제나 기회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선택을 했고 지금 이 순간의 기로에서도 그러했을 뿐이다.

레온의 개입은 기가 막힐 정도로 상황을 꼬아놓았다. 게다가 자신 말고는 다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예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에 자신이 사라질 필요는 더욱더 커졌다. 자신이 없다면 해결될 일들이기도 했다. 제가 죽어야 로렌이 살아남는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라엘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린 행동은 무모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아무런 대책 없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살면 살고 죽으면 죽자는 무대포 정신으로 그곳에서 뛰어내리기에는 라엘이 자신의 삶을 너무나도 사랑했다.

절벽은 이전에 다니엘과 답사를 온 적이 있는 곳이다. 안전가옥으로 향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여러 가지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니 탈출로도 여러 가지로 마련해 놓았다고 했다. 물론 다니엘이 “이곳이 탈출로야.”라고 절벽 아래를 가리키자마자 가운뎃손가락을 내밀었지만 말이다.

절벽은 높지만 가파른 만큼 튀어나온 돌들이 거의 없다. 물살은 거세지만 계곡의 수위가 깊어 바닥에 그대로 부딪칠 일도 없으니 여차하면 몸을 날려 탈출할 수 있었다. 절망을 연기하며 뛰어내리면 훌륭하게 자살로 위장을 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뛰어내릴 때 두려움이 없었냐고 한다면 그것은 아니지만 원수 같은 다니엘이라도 그가 한 말대로 될 것 같았다. 차원이동 후 온갖 위기를 넘기고 여태까지 죽지도 않고 살아남은 이 목숨이 이리 허무하게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충분히 있었다.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뭐, 이 세계의 신 새끼와 대면을 해서 멱살잡이라도 한 번쯤은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 않았겠는가?

눈을 벅벅 문지르며 라엘은 로렌에 대해 생각했다. 홀로 남겨진 그가 걱정되긴 하지만 어차피 자신이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레온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협박을 위한 인질로 이용될 것이고 그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 그 또라이 놈과 로렌이 더 이상 엮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차라리 자신이 없는 것이 나았다. 

잘 도망갔는지는 걱정되긴 했지만 레온의 관심사는 빠르게 자신으로 옮겨올 것이므로 이후는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를 것이다. 자신이 엮인 것이 아니라면 제후국의 왕자를 돕기는커녕 핍박하는 상황은 레온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렌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로윈에 호의적이었던 왕국들이 제국에 반발할 가능성도 생긴다. 무엇이든 작은 계기가 중요하므로, 그리로 그것을 충분히 아는 레온이기에 로렌은 오히려 안전할 수 있다.

다니엘 대신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는 말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순간은 고통스러웠지만 그의 입장을 알기에 견딜 수 있었다. 로렌은 그러한 생각을 하고 말을 할 권리가 있었으며 저를 원망해야 하는 이였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혈육이, 그것도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가.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거짓이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자신은 그를 기만한 것이다. 그런 절망적인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 자신이 엮여있으니 그 원망이 얼마나 클까.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면 어쩌면 상황은 조금 더 나아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슬퍼하는 그의 감정을 기다려줄 수 있었을 테고 로렌은 그 슬픔을 딛고 제 앞에 놓인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이 보는 그는 유약하였지만 라엘이 보는 그는 그렇지 않았다. 로렌은 생각이 깊고 신중한 청년이었다. 왕을 닮아 다정하고 상냥하지만 무능하지 않았다. 그저 상황이 혼란스러웠고 그것을 이해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정보가 너무나도 한정되었다.

그를 향한 걱정에 한숨이 나온다. 제대로 감정을 풀어내지도 못한 채로 야박한 말밖에 뱉어내지 못했던 로렌이었다. 그 직후 자신의 투신 장면을 보게 되었을 그의 상태가 염려되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제 손을 떠난 일이었다. 지금부터 자신은 죽은 이였고 앞으로의 모든 것은 로렌의 선택에 따라 결정될 것이었다. 그도 로윈의 왕자였다.

레온은 자신의 죽음을 쉽게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직접 보았으나 자신의 시체라도 건지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로렌과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신경을 쓸 여우는 없을 것이다. 

측근들은 탈출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들이니 로렌을 안전하게 탈출시킬 만한 능력이 있고 그 이후로는 미리 준비한 대로 진행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전에 자신과 연락이 되지 않았을 때 측근들이 그저 대기상태로 기다렸던 것은 그 중심이 애매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라졌으니 그 중심에 서는 것은 다니엘에서 로렌으로 바뀌는 것뿐이었다. 그들도 망설임이 없을 것이다.

더 잘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있다. 그러나 만약에, 라는 생각은 말 그대로 가정일 뿐이다. 어떤 상상을 하여도 벌어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미련을 가지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그리하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잡념만 떠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그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다.

그리고 황제, 레온은…….

“새끼, 엿이나 처먹어라.”

전에는 자신을 죽여서라도 아무에게도 주고 싶지 않다던 레온의 애정(……)이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놓을 테니 제발 살아만 달라는 것으로 바뀐 것만은 대단하긴 대단하다. 나름의 긍정적인……변화인가? 

좆같다. 역시 엿이나 처먹으라는 기분에는 변함은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그에게 얼마나 타격을 줄 것인지를 가늠해보던 라엘은 씩하고 웃었다. 점점 가학적인 성격이 되어가는 것 같은데……. 이것도 다 레온 탓이라고 엄한 곳에 화풀이를 하며 라엘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는 시간이 아주 많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은 일단 모자란 잠을 몰아서 자는 것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나쁜 상황이라도 한다면 한두 가지로 정리할 수 없는 엉망진창인 요즘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나쁜 상황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바로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배가 고프다.

상황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라엘은 말라비틀어진 그 육포마저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일단 있는 것들을 로렌에게 건네주었고 자신의 몫으로 챙긴 것은 실랑이 도중 바닥에 흩뿌려졌었다. 배가 고프니 그것이 눈물 나게 서럽다. 그냥 내가 챙길걸……. 

로렌을 만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육포는 주머니에 넣어두었지만 얼마 없었다. 그나마도 격류에 휩쓸리면서 거의 사라졌다. 몇 번이라도 씹을 수 있는 것이 남아있긴 했다는 것에 감사했어야 했지만 그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라엘은 천국에 있는 다니엘에게 사과를 하며 왕가의 보검을 꺼내 들어야 했다. 희생된 것은 마침 지나가는 토끼였고, 은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검은 정말로 빠르게 움직여서…… 토끼를 잡는…… 광경은…… 아아…… 너무나도 성스러운 사냥광경이라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가 없었다. 와, 왕가의 위엄이……! 물론 토끼고기는 맛있었다.

산을 기어올라 주린 배를 쥐고 힘겹게 도착한 곳은 화전민들이 터를 잡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곳에 도착할 즈음에 라엘은 누가 보아도 완벽한 거지꼴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의 허리에 채워진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검에 주목했다. 지금은 거지 누더기 상태지만 본래는 훌륭했을 옷도 알아보았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은 공포를 숨기지 않았다.

약한 이들은 신분이 높은 자들을 두려워하고 증오한다. 이곳은 그런 세계였다. 신분이 높은 이들이 약한 자들의 마을에 오면 좋은 일이라고는 전혀 생기지 않는다. 더러워지긴 했지만 차림새나 외모, 검의 화려함에 라엘의 신분이 보통이 아닐 것이라 확신한 마을사람들은 그를 경계했다. 그들은 약했고, 약했기에 재앙처럼 뚝 떨어진 그를 피하려고 했다.

“……저.”

“오, 오지 마십시오.”

“……전 해를 끼치려 온 건…….”

“이, 이 마을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들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마을사람들은 라엘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라엘이 꾹 누르고 있던 서러움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억울하다. 왜……. 왜 날 피해요, 왜…….

“아……. 으…….”

“……제발 가주…….”

“으…… 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엉!!!”

뭔가 더 말을 이어보려던 라엘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다 이내 바닥에 엎어져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지금까지 잘 누르고 있던 괴로움과 서러움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만난 기쁨과 그들에게 거부당한 슬픔에 한순간에 폭발했다. 어어어어엉엉! 거지같은 내 인생! 어엉어엉엉엉! 이제 사람들도 나를 피하고 으어어엉! 내가 뭘 잘못했다고오오오오어어어엉!!!

다 큰 남자가, 그것도 귀해 보이는 신분의 그가 거지꼴을 하고 바닥에 엎어져서 큰 소리로 우는 것에 마을사람들은 당황했다. 상상도 하지 못한 광경이다. 순식간에 모든 관심이 라엘에게 집중되었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 것인지 조금 전까지 그를 경계하던 마을사람들이 심지어 마음이 뭉클해질 정도였다. 을의 입장에 있는 자들의 영혼을 울리는 서글픈 울음소리였다.

“저, 저기요?”

“으어어어어엉!! 거어어어어어지 같으은 세사아아앙!! 엉엉엉엉엉엉!”

“이, 이보세요. 그만 우시고…… 뚝!”

마을 청년 하나가 다가와 라엘을 진정시키려 해 보았지만 이미 서러움이 폭발한 라엘을 말릴 수는 없었다. 그의 통곡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등장 순간에는 갑 중의 갑으로 보였던 그는 갑이 아니었다. 을의 입장에서 쌔빠지게 구르며 쌓아왔던 억울하고 서러운 감정은 마을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여럿이 달라붙어 겨우 라엘을 어르고 달래 마을 안으로 데려갔다. 정말로……. 인간적으로 불쌍해 보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라엘은 마을사람들의 친절에 힘입어 마을에서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상을 원망하며 대성통곡하던 라엘을 촌장의 집으로 데려와 겨우 달래놓았다. 그 뒤 자연스럽게 그의 사정을 물어본 마을사람들의 눈에는 연민이 더욱 깊어졌다.

큰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라엘의 상황은 마을사람의 입장에서 더욱 치가 떨리는 것이었다. 물론, 라엘은 그때쯤에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자신은 열과 성을 다해 제 군주를 위해 일했지만 추행당하고 버림받은 하위 귀족 정도로 신분이 정리된 것 같았다. 

놀라운 통곡의 효과였다. 울음을 좀처럼 멈추지 못하는 라엘에게서 대충 알아들은 부분만을 조합해서 이해한 것 같았다. 그 주체들이 각각 다르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 라엘은 그 착각을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너무 서럽고 흥분해서 많은 것들을 말했지만 함부로 알아서는 안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마을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더러운 얼굴에 눈물 콧물 범벅까지 되어 봐주기 힘든 몰골이었던 라엘이 겨우 눈물을 멈추고 씻고 나오자 마을 여자들의 눈이 번쩍였다.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젊다 하더라도 대부분 결혼한 여자들이었음에도 번쩍거리는 눈이 부담스러워서 주춤거리며 남자들 쪽으로 향했다. 

상상외의 외모에 잠시 그를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마을 남자들은 ‘아……!’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지……. 저렇게 예쁘장하게 잘생겼으니까 남자한테 추행도 당했겠지……. 가엾게도……. 친절한 마을사람들은 외모 때문에 서러운 일을 당했던 청년에게 우리까지 얼굴로 타박해서는 안 되겠다며 그에게 강제로 상냥함을 안겨주었다. 왠지 굉장히 문제없이 마을에 받아들여진 것 같은데?

시기가 적절했다는 점도 있었다. 마을에 라엘이 찾아온 시기는 일손이 한창 모자랄 때이기도 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다가오는 이 시기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였다. 얼어붙은 땅을 부수고 다져 부드럽게 만들어 두어야 씨를 뿌릴 수 있었고 그 해의 수확을 할 수 있다. 한창 작업 중이던 때에 건강하고 튼튼한 청년인 라엘이 마을을 찾아왔으니 안전한 것을 확인한 지금 부러 쫓아낼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얘, 라엘! 여기 물 좀 퍼다 주겠어?”

“네!”

마을에 들어오고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는 훌륭한 일꾼이 되어있었다. 그는 마치 십 년은 여기서 살았던 것처럼 잽싸게 물지게를 짊어지고 계곡에서 물을 퍼왔다.

마을에는 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계곡에서 직접 물을 길어 사용하고 있었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물을 길어 오는 일은 굉장히 힘들었고 잘 먹고 잘 쉬고 체력을 회복한 라엘이 그 일을 자처했다. 곱게 자란 티가 역력한 얼굴을 본 마을사람들은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끝내 물을 길어왔고, 오…… 물 긷는 것에 엄청난 재능을 보였다. 힘세고 튼튼한 라엘은 다른 사람들이 다녀오는 시간의 반도 되지 않은 시간을 투자하여 양쪽에 하나씩 매다는 물지게에 물통을 여섯 개나 달고 다녀올 수 있었다. 딱 세 배의 효율이었다.

가끔 물을 뜨러 갔다가 보이는 토끼라든지 꿩 같은 짐승들도 잡아와 단백질을 공급해주기까지 했으니 그가 마을에 스며드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금세 라엘의 존재에 익숙해졌다.

“고마워, 라엘.”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이렇게 먹고 자고 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게 얼마나 감사한데요.”

“후후, 그 말은 오늘 저녁식사는 우리 집에서 먹겠다는 말이지?”

“감사합니다!”

“좋아! 사실 이미 일 인분을 더 만들어뒀단다!”

“비밀인데요……. 사실 아주머니 밥이 제일 맛있어요!”

“라엘. 그건 옆집 여편네에게도 비밀이었잖아.”

“좋은 비밀은 많을수록 좋죠.”

라엘은 정말로 잘 지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마을에 적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농사일이 상상했던 것보다 몸에 잘 맞는 것을 보면 역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는 것이다. 역시 백의의 민족, 농민의 핏줄이 흐르고 있는 것은 무시할 일이 아니었어. 라엘은 제멋대로 생각했다. 처음에는 많이 서툴렀지만 여러 가지로 몸을 쓰는 일에 익숙한 라엘은 농기구를 다루는 것에도 곧 익숙해졌다. 괭이로 단단하게 언 흙을 부수며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땅을 부드럽게 만드는 일에 재미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이런 마을에 떨어졌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마을사람들이 유독 자신에게 살가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어디든지 떨어졌더라도 결국 어떻게든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박한 사람들 안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면 몸은 고되더라도 그래도 천천히 적응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면 결혼했을지도 모르겠다.

차원이동 이후 자신의 적응력이 생각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차원이동을 하면서 얻은 능력일까 아니면 숨겨진 잠재능력일까.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존본능이 어떻게 나오든 지금 와서 무슨 상관일까.

정말로 그리되었다면 로윈에서 지내던 것처럼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지는 못했더라도 적어도 이렇게 마음 아픈 일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형제처럼 여기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았을 테고, 자신을 얻기 위해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며 모든 것을 불태우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모든 가운데에서 휩쓸려 휘청거리며 단 하나도 남김없이 잃어버리고 절규하는 사람을 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괴로운 이 상황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시작된 것이 마음 아프다. 목숨의 무게를 짊어지기 위해 라엘은 죽을 수조차 없었다.

다니엘이 죽은 후 라엘은 가끔 생각하곤 했다. 어쩌면 자신이 다니엘을 만난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다니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자신을 줍지 않았더라면……. 레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러면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지 않았을까.

레온은 라엘을 사랑했지만 다니엘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과 다니엘을 제대로 구분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처음 만난 것이 다니엘이었다면 이런 일을 저지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로윈은 아직도 평화로울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레온도 미친 황제가 되지 않고 여전히 상냥하고 잘생긴 황제로 남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엘은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 라엘이 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자신이 무언가의 시작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작은 계기일 뿐이다. 결국 선택은 각각의 사람들이 한 것이다. 자신이 책임질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선택을 한 것이다. 라엘은 단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었다.

왕과 다니엘이 목숨을 잃은 것은, 로윈에 혼란을 일으킨 것은, 로렌에게서 모든 것을 강탈해간 것은 제 욕심에 찌든 귀족들이었다. 그들의 욕심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라엘을 고립시켰다. 단 하나의 왕족도 남기지 않으려 했지만 로렌은 남았다. 

그들은 다니엘이 살아있을 때도 끊임없이 그를 향한 살의를 내비쳤다는 것을 라엘은 잊지 않고 있었다. 부추김이 없었다 하더라도 다니엘이 왕이 되기 전에는 분명히 일어났을 일이었다. 조금 일찍 일어났지만 결국 일어날 일이었다. 움직인 것이 누구인지, 죽음에 대한 부채를 갚아야 할 것이 누구인지 라엘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을 향한 복수는 로윈의 다니엘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지금은 때가 아닐 뿐이었다.

그리고 레온에 관한 것도……. 어차피 일어났을 일이라 하여도 그들을 부추긴 것은 분명히 레온이었다. 그를 사랑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가 저지른 일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작지만 계기를 만들었고 그 결과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컸다. 비정상적인 집착은 다니엘의 모든 것들을 산산조각 냈다. 

어떤 것이든 참아낼 수 있었다 생각했는데 다니엘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제 안에서 상상 이상으로 큰일이었다. 이후에 로윈을 되찾는 일마저도 그가 끼어들면서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아무것도 모를 때 내린 결정의 결과는 참혹했다. 

결국 로렌의 목숨까지 위험하게 되었으므로 최악 중의 최악의 수를 만든 것이었다. 레온은 로렌에 대한 속죄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라엘은 로렌을 생각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로윈이나마 돌려주고 싶어 제 발로 레온의 품으로 가겠다고 답했었다. 그러나 레온은 대답을 들은 후에도 제 주변의 모든 것을 없애려 했다.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은 라엘의 손을 떠나버렸다. 마지막으로 주어졌던 기회를 붙잡으러 그렇게 발버둥친 것이 어째서 이렇게 꼬여버린 것일까. 선택에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아쉽고 슬프고 화가 나지만 그것은 분명히 자신이 원한 것이 아니다.

로렌이 다니엘의 죽음을 알고 있는 것은……. 아아, 정말로 놀라서 생각이 멈춰버렸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이 슬펐다. 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던 세상에서 주어진 새로운 삶에서 그는 자신의 동생과도 같았다.

절벽으로 떨어져 죽음을 위장한 것은 분명히 로렌을 위한 것이다. 레온이 로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의 목숨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있어야 기회를 노릴 수 있다. 살아있어야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다.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레온이 알게 된다면 어떠할까. 어렵지 않은 예상이었다. 레온은 분명히 로렌을 살해하고 말 테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유인하고 마음대로 다루기 위한 인질로써 다루겠지.

결국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적어도 목숨만은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뿐이었다. 무책임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었다. 다니엘의 그림자로서 자신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뿐이었다. 그래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역시 혼자 남아있을 로렌이 걱정된다.

“형. 울어?”

“아니, 이건……. 너를 잡아먹으려고 방심시킨 거지!”

라엘은 고개를 한 번 젓고 까르륵 웃으며 달아나는 아이들을 뒤쫓았다.

어차피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한번 사라졌으니 마지막까지 사라지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되돌릴 수 없는 모든 일에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로,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어느 날 라엘은 더 이상 마을에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계곡을 중심으로 산을 샅샅이 뒤지던 황제의 수색대가 마을을 찾아왔다. 다행이라면 라엘이 일을 하러 나갔던 때였고 마을사람들은 경계심 높고 조심성이 많았다. 그들은 라엘이 수색대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마을에 돌아왔을 때 걱정을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마을사람들을 보며 그는 더 이상 마을에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수색대가 마을을 찾아오는 것은 레온이 자신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인일 뿐이었다. 그의 앞에서 그렇게 투신을 했지만 여전히 그는 자신을 찾고 있었다. 진심으로 살아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진행되는 수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함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실수로라도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들키면 작은 마을의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는 쉽게 상상이 된다. 라엘은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마을은 아주 잠시 휴식하기 위해 머문 곳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상냥하였지만 그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은 부평초처럼 떠도는 것이었고 그건 별로 억울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돌아간 것뿐이었다.

짧지만 정이 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을사람들과 아쉬운 이별을 마치고 라엘은 가까운 도시로 향했다. 아직도 자신을 찾고 있을 수색대가 걱정되긴 했지만 특별히 뭔가를 할 필요는 없었다.

마을에서 입고 다니던 낡고 평범한 옷을 입고 계절을 넘기며 어깨까지 긴 머리를 질끈 묶었더니 이미지가 상당히 달라졌다. 수염을 기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원래 잘 나지 않는 것을 아득바득 길렀더니 그냥 웃겼다. 딱 봐도 ‘나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억지로 수염을 길러보았소.’라는 인상이라 그냥 깔끔하게 밀어버렸다. 시무룩하게 거울을 보고 있었더니 마을사람들의 반응이 “드디어 밀었니? 속 시원하다, 얘!”라서 더욱 시무룩해졌다.

눈에 띄는 보검 정도만 천으로 둘둘 둘러놓고 짐 가방에 대충 매달았다. 왕가의 보검이 토끼잡이 검에서 평범한 짐짝이 되는 순간이었다. 음, 비장하고 성스러운 광경이었다고 하자.

말을 타고 가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으니 터덜터덜 걸어갔다. 마을사람들은 도시로 장을 보거나 작물을 팔러 갈 때 사용하는 노새를 주겠다고 했지만 딱 한 마리 있는 그 노새를 타고 가면 평생 꿈자리가 사나울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그 노새보다는 자신의 다리가 더 튼튼해 보였다. 늙은 노새를 학대하고 싶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는 도시를 잠식하고 있는 불안한 분위기에 당황했다. 이야기 듣기로 작지만 꽤 활발하게 상인들이 드나드는 도시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꼭 서부극에 나오는 휑한 도시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래바람이 휘잉 하고 지나가고 웬 지푸라기 같은 것이 날리면 어울릴 것 같은 정도다. 사람들의 얼굴에 서려있는 그늘이 땅바닥에 닿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마을에 있는 동안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봤다.

“분위기가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허. 정말로 왜 이러는지 모르는 거요? 어디 산골에라도 처박혀 있다 온 거유?”

“네. 산에서 왔는데요.”

쿨한 라엘의 대답에 남자는 잠깐 당황했다. 차분히 라엘의 행색을 살핀 그는 화전민들이 이 시기에는 산 아래로 잘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라엘이 소식을 알지 못하는 것에 스스로 납득하며 민망함을 가라앉힌 남자는 친절하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났어.”

“네? 어디랑 어디에서요?”

전쟁이 일어났다면 이런 분위기도 무리가 아니다. 외진 곳의 도시이다 보니 이런 분위기에는 더욱 민감하다. 국경과 거의 맞닿아있으니 언제든지 전쟁의 화마가 들이닥칠 수 있는 것이다.

남자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자의 한숨을 보자 왠지 기시감이 든다. 아, 저거 알 것 같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겪을 때마다 자신이 쉰 한숨과 라임이 같다! 주로 다니엘과 레온이 저 한숨을 끌어냈지!

남자는 굉장히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대륙의 왕국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셨지.”

“미쳤대요?”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적어도 남자는 라엘을 황제모독죄로 집어넣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는 것이다. 어떤 이유도 개연성도 그는 발견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가까운 왕국 하나가 쑥대밭이 되었지.”

“헐……. 왜요?”

“우리 같은 무지렁이가 뭘 알겠느냐마는…… 소문에는 원하는 것도 없다고 하는데 말이야.”

남자가 알고 있는 상황은 그것이었다. 황제는 어느 날 갑자기 이유 없는 선전포고를 했고 그것이 대륙을 대상으로 하나씩 추가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 대륙이라 말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범주가 되어 있었다. 항복을 하면 대부분 받아주었지만 가끔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제국과 평소에 사이가 돈독하다 생각한 왕국들을 제하고는 살아남기 위한 전쟁준비를 은밀히 하고 있다고 한다.

“미쳤네요.”

그가 미친 것은 이전에는 라엘만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자신을 향해 엄청난 행동을 했지만 보편적으로 미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것이 자신이 아닌 대륙이 대상이 되자 진심으로 이 사람이 미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이젠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황제가 미쳤다!

적당한 마을에서 다시 터를 잡을 생각이었던 라엘은 결국 계획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상황이 이럴 때 신원조차 확실하지 않을 자신을 고용해 줄 곳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쟁 속에서 사람들은 예민해지고 새로운 사람을 경계한다. 모처럼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을 꾸몄지만 이미 외지인이라는 것 자체로 경계의 대상이 될 것이다.

전운에 휩싸인 대륙에서 레온이 신박하게 미친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역시 필요했다. 소식이 한군데로 모이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겠지. 레온이 미쳤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을 로렌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 혼자 편하게 손을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레온을 과소평가한 것인가. 설마 미쳐도 저 정도로 미쳐버릴 줄은 몰랐던 게 정말로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냐고! 라엘은 절규했다.

쥐고 있던 돈을 죄다 털어 당장 말 한 마리를 샀다. 훌륭한 말은 아니었지만 전쟁 통에 이런 말을 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했다. 말 입장에서는 날벼락이 따로 없을 것이다. 말은 짐수레나 끌며 평화로운 삶에 찌들어 억눌려있던 자신의 본능을 가감 없이 발휘해야 했다. 달려! 달려! 달려!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말은 아마 말로 태어나서 이렇게 달려본 것이 처음일 것이다. 아마 말도 모르지 않았을까? 자신이 이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는 것을!

말도 놀랐고 사람도 놀랐다. 서로의 잠재능력을 십분 발휘하며 쉼 없이 달린 덕분에 밤이 되어 더 이상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말은 달리기를 멈출 수 있었다. 말이란 것이 밤눈이 어두운 짐승이라는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밤낮 가리지 않고 계속 달렸을 테니까. 그러나 다시 아침은 밝아왔고…… 말은 말로 태어난 자신의 본능을 기저에서 끌어내야 했다.

일주일을 그렇게 서로를 괴롭게 하고 나서야 한 사람과 말 한 마리는 페르카 구석에 있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도시에 도착했다는 것이 말의 질주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훌륭한 폭주마의 마음가짐을 가진 말은 도시에 전설을 만들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용병단 건물 앞까지 내달린 후에야 라엘은 고삐를 당겼고 말은 신경질적으로 투레질하며 발을 멈췄다. 히이잉-! 알아, 나도!

온몸이 흙먼지로 뒤덮여 있는 꼴이, 다시 상거지로 돌아왔다. 씩씩 거친 숨을 내쉬며 문을 노려보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용병이 그 흉악한 기세에 놀라 주춤거리며 다가온다. 평소에는 거칠기 그지없는 용병이었지만 왠지 기백에 눌린 것이다.

“누, 누구십니까.”

“헉, 헉……. 허어어크어억! 부, 부단장…… 컥! 불러어억……!”

“단장님?”

목소리를 들은 용병은 곧 라엘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다시 놀랐다. 그리고 납득했다. 조금 전 그를 압도한 기백은 성질 더러운 단장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였던 것이다. 용병은 전시에 빛을 발하는 자신의 감을 칭찬했다. 반년 넘도록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제 단장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경악스러운 사건이었다. 게다가 그 꼬라지는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 괜히 건드렸다가는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라엘은 부단장을 불러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눈을 감고 말의 목덜미에 코를 처박았다. 기절했나! 깜짝 놀란 용병이 그를 살폈지만 그냥 잠이 든 것이었다. 드르렁! 그리고 곧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털썩. 라엘이 잠든 것을 알아챈 말이 짜증을 내며 거칠게 몸을 흔들었기 때문이었다. 

라엘은 바닥에 떨어져서도 대자로 누워 코를 골며 그대로 깨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용병은 라엘을 내버려두고 부단장을 부르러 갔다. 일단 저치한테 큰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고 당장 부단장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큰일이 생기는 것은 자신이 될 가능성이 크기에 했던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부단장은 라엘의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 나왔다. 그리고 기세 좋게 외치자마자 그대로 잠든 라엘을 기가 막혀 내려다보았다. 결국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을 그를 짊어지고 들어가 일단 침대에다 던져놓은 것이었다. 

라엘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던 부단장은 곧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숨 막혀서 죽지 않을 정도의 처치를 시작했다. 몸을 씻기고 옷을 입혀놓고 볼품없이 자란 수염까지 깎는데도 라엘은 깨지 않았다. 부단장은 혀를 차고는 대충 먹을 것을 테이블 위에 쌓아놓고는 문을 닫았다. 이 정도 해놓았으면 일어나서 안 깨웠다고 패악을 부리지는 않겠지.

라엘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딱 이틀 뒤였다. 급하게 부단장을 부른 것에 비해 참 꿀잠을 자버렸다.

부단장은 오랜만에 돌아온 단장의 꼬라지가 획기적으로 엉망진창인 것이 궁금해서 기웃대던 용병들을 일단 모두 치워놨다. 억지로 깨웠다가 만약 라엘이 일어나면 무슨 패악질을 할지 몰랐기에 용병들도 선선히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지나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 궁금해 부단장이 먼저 방문을 열었을 때 라엘은 드디어 깨어있었다. 깨어있다 뿐이었겠는가. 그는 눈앞에 있는 음식들을 공격적으로 먹어치우는 중이었다.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부단장은 좀 당황했다. 어디서 아귀라도 들려 온 건가.

“……단장.”

“우……얼어엉업업……!!”

“일단 됐으니, 상황이 될 때 인간의 말로 해주면 좋겠습니다만…….”

부단장의 침착한 목소리에 라엘은 먹을 것을 내려놓……지 않았다. 라엘은 매우 배가 고팠다, 그것도 굉장히!

라엘은 말을 달리는 일주일 내내 거의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말도 제대로 먹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는 오죽했겠는가. 말을 멈추는 것은 도시에서 최소한의 식량을 구입하는 정도였고 식사도 말 위에서 했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이틀을 잠들었던 것마저 더해서 라엘의 배는 현재 극한의 공복에 다달았고 지독한 고통을 겪는 중이었다. 그런 그가 잠에서 깨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빵과 육포가 쌓인 테이블이었다. 용병단 숙소의 작은 방이 그야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 것이다. 그다음은 보이는 대로.

아주 한참 동안 라엘은 음식들을 공격하는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부단장은 그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곧 고기가 가득 든 쟁반을 들고 왔다. 

고기! 

라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쟁반 위의 고기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사라졌다. 5인분은 거뜬히 넘는 음식을 한순간에 죄다 먹어치우는 것을 보니 역시 라엘이 맞다고 생각했다. 덤으로 그가 스트레스를 제대로 받아왔다는 것도 자동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이러면 나중이 꼭 골치 아파지던데. 

그제야 정신이 든 라엘은 멋쩍게 부단장을 마주 봤다.

“내가 며칠을 굶었더니…….”

“네네. 고기 안 가져왔으면 저를 씹어 드실 기세였죠. 그래서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일이야 많이 있었잖아. 나 죽기도 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 전에 실종되었던 상황이 더 궁금합니다만. 참, 그리고 죽었다더니 이 꼴로 돌아오신 이유도 궁금하네요.”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한 거야?”

“연락망은 건재했지만 유지하던 몇 안 되는 인원들이 황제에게 끌려갔잖습니까. 소식이 끊긴 지는 시일이 꽤 됐죠.”

끌려갔다는 것을 보면 남작들은 역시 무사한 모양이다. 대우가 좋지는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역시 용병단을 찾아온 것이 정답이었다.

다니엘과 라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부단장은 그만큼이나 특별한 위치의 사람이다. 그는 로윈과 용병단 사이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제국으로 간 이후에도 직접 개입하지는 않더라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다니엘이 용병단을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측근들은 꾸준히 그와 연락을 하며 후에 필요한 준비를 요청했기에 부단장은 그간의 상황도 알고 있었다. 다니엘의 죽음도. 부단장은 그의 복수를 위해 라엘이 움직이는 것도 도울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쳐 놓았다.

라엘이 부단장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연락은 <곧 용병단을 움직여 로윈을 탈환할 계획이니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아난에서 벗어난 직후에 왕국들과 연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라엘이 보낸 소식이었다. 

그런데 그 후로 갑자기 연락이 뚝 끊기더니 들려오는 소식에 라엘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썩 믿을만한 소식은 아닌지라-부단장은 다니엘과 라엘은 지옥에서라도 기어 올라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시했지만 몇 달간 그가 실종된 것은 사실이었다. 

슬슬 사람을 풀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이 시점에서 라엘은 거지꼴이 되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면 타이밍이었지만 도착하자마자 마당 앞에서 푹 곯아떨어진 것은 어이없는 게 맞고.

“내가 먼저 묻는 게 순서에 맞을 것 같아. 대륙 꼴 지금 왜 이 모양이야?”

“듣지 못했습니까? 황제가 전 대륙의 왕국을 대상으로 선전포고를 날리고 있다는 소식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요.”

“당연히 들었지. 그런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설마 대륙통일이라도 하겠대?”

부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말이죠. 하나는 평범한데 하나는 좀 이상합니다.”

“뭔데.”

“제후국 중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왕국들이 있었습니다. 평화가 오래됐었죠.”

“제국에 대항한다고? 멍청이들만 모였어? 돌았대?”

“로윈의 일이 나름의 자극이 된 모양입니다.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죠.”

“헐.”

분수를 모르는 좆같은 새끼들이 참 많다. 아무리 평화로운 시대라 제국이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그걸 만만함으로 생각하다니. 레온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선전포고를 할 만도 하다. 가장 처음 아무 말 없이 밟아버렸다던 왕국은 그 주축쯤 되었겠지. 그 후에 종잇장처럼 마구 날린 선전포고는 음…… 이참에 싹도 보이지 않게 기강을 잡겠다는 의지일까? 항복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보면 나름의 선택 기준이 있는 것도 같다. 아아, 생각보다 덜 미쳤구나.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단장도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어깨를 으쓱인다. 평화가 길면 그것은 고이기 시작하고, 고이기 시작한 평화는 결국에는 썩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연달아 이런 일이 일어나겠지.

“아까 다른 이유도 있다고 하지 않았어?”

“네. 이건 좀……. 일단 꽤 비밀스러운 정보라는 걸 먼저 말씀드리죠. 왕자님의 정보원들이 가져다준 정보입니다.”

“서론이 왜 이렇게 길어. 불안하게…….”

“왕자님에 대한 이야기도 끼어 있습니다.”

“다니엘 님? 나?”

“높은 확률로 단장이죠. 황제가 지랄을 시작한 게 왕자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이잖습니까.”

“내 이야기가 나올 필요가 뭐가 있지? 나 죽었는데?”

“네. 그래서 환장할 노릇이라는 거죠. 다니엘 왕자를 숨기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내놓으라는 땡깡이 있습니다, 지금. 다행이라면 왕에게만 직접 비밀문서로 보내는 것 같다는 정도…….”

“……나 죽은 거 몰라? 눈앞에서 날았는데?”

진심으로 당황해서 말을 잇자 부단장이 고개를 젓는다. 그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눈 밑이 시커먼 것이 그동안 정보를 모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런데 들려오는 정보까지 이따위니 더 피곤해졌겠다.

“당연히 알겠죠. 그걸 알면서도 요구하는 겁니다. 시체라도 내놓으라고. 그러니 다들 황제가 미쳤다고 하고 있는 거죠. 트집을 잡으려고 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네가 보기에는 어때. 내가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애매합니다. 수색은 계속되고 있지만 적극적이진 않거든요. 반반,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라엘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게 웬 상또라이 같은 소리야!

“아……. 진짜 이해가 안 된다.”

“뭐가 말입니까?”

“내가 존나 잘생기고 능력도 좋고 그게 왕자급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거든?”

“……아, 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온 대륙에 불을 싸지를 정도로 두려운 것이었어, 내 미모가? 너도 내 매력에 빠질 것 같아?”

“……끔찍한 소리를……. 그리고 매력이고 뭐고, 같은 거 달린 남자끼리 무슨 소립니까.”

“그렇지! 그게 정상이라고! 아오, 미친 새끼!!”

라엘은 레온에게 막말을 하며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사실 좋게 말해 발버둥이고, 부단장의 눈에서는 침대 위에서 지랄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아주 주변을 초토화시킨다.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죽었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이리저리 시비를 걸면서 전쟁을 일으킬 필요가 있나? 뇌구조를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뭐? 숨어있는 것을 다 안다는 건 뭔데! 내가 시발! 수로왕도 아니고! 시발! 거북아 시발! 거북아 시발! 머리를 내놓아라 시바아알!! 머리를 내놓지 않으면 시발! 구워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바아알!! 욕을 외치며 발버둥을 친다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아, 안다. 하지 마아아아안!!!

부단장은 라엘의 발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세상에 어쩌면……. 다니엘이고 라엘이고 저렇게 성격 지랄맞은 것만 똑같다, 완전히. 정말로 완벽한 한 쌍이었다고 생각을 하며 부단장은 라엘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한숨만 깊어졌다.

있는 힘껏 발광을 마치고 분이 좀 풀리고 나서야 라엘은 씩씩 숨을 몰아쉬며 똑바로 앉았다. 드디어 대화를 할 자세가 갖춰진 것이다. 분에 못 이겨 온갖 짜증부터 냈지만 결국 움직여야 했다.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것도 필요했다. 가장 걱정되는 일은 역시 하나였다.

“로렌 왕자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황제의 보호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그 보호가 시발……. 진짜 보호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엘은 미쳐있는 그가 로렌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온 대륙에 전쟁을 벌여놓은 것을 보니 시간도 없을 것 같긴 했지만 정말로 짬짬이 로렌에게 해코지를 하면 어떡해……. 걱정으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멍하니 저를 보고 있는 부단장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지금 자신이 제대로 된 설명도 거의 하지 않은 채로 앞에서 난리만 피웠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라엘이 부단장과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것은 황궁에 갇히기 전, 그리고 아난에서 탈출한 직후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어?”

“제국에서 단장에게 연락이 끊기고 나서는 다른 이들에게도 연락은 거의 없었죠. 그 뒤는 말할 것도 없고.”

“아, 그럼 처음부터.”

이야기는 길었다. 그에게는 골라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야기를 했다. 현재 이 세계에서 자신이 어디서 온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부단장뿐이었다. 그에게는 어째서 레온이 제게 집착을 보이는 것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부단장은 앞으로 이 거칠고 더럽고 치사한 세계의 풍파를 함께 이겨내며 라엘과 함께 로렌을 구출해 내야 했다. 다니엘에게 부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레온이 저를 사랑한다 말하며 했던 모든 일에 대해 듣고 나자 부단장의 눈이 누그러졌다. 그가 라엘의 어깨를 두드리며 상냥하게 말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니 뭐……. 왕자님의 눈에 딱 띈 것도 그렇고……. 내 팔자가 이런가 보지, 뭐.”

라엘의 대답에 부단장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어렸을 때 신전에 불이라도 지르셨습니까?”

“……내가 살던 곳에는 신전이 없긴 하지만……. 굿이라면 받고 싶다. 아, 여긴 그게 없지?”

신전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것들이 있긴 하다. 불을 지른 것까진 아니었지만 엄청 치사한 짓을 하긴 했다. 크리스마스 때만 교회에 나갔던 것이 기억이 난다. 어디 암자에서 비빔밥을 몰래 세 그릇 더 먹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역시 그 얍삽한 짓이 지금의 거대한 빅엿이 되어 돌아올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니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굿이 정말로 아쉬웠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마을사람들은 이런 심도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제외하고.

“경솔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로렌 왕자님을 계속 성국에 머물도록 단단히 일러둬야 했어. 그렇다면 성황이 지켜주는 척이라도 했을 테니까. 정말로 조금만 참았더라면 황제가 이렇게 미친 짓을 하는 것을 봤을 테니 지켜줬을 거고.”

“그때 알 수 없는 일이었잖습니까. 예언자도 아니고.”

“잘 안 되면 용병단에 숨겨놓을 생각이었지. 생활이 익숙하진 않겠지만…….”

“누구도 황제가 그렇게 돌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부단장의 위로에 라엘은 고개를 숙였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어째서 레온은 자신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음에도 그러한 행동을 했던 것일까. 

갇혀있는 내내 라엘은 있는 그대로의 성격을 가감 없이 보여줬었다. 건드리면 용수철처럼 더 튀어나오는 그를 다루를 방법을 사실 레온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라엘을 자극했고 결국 상황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어째서 황제는 로렌 왕자님을 데려갔을까요?”

“그 미친 자의 생각을 어떻게 짐작하겠냐마는 짐작이 어느 정도 된다는 건 나도 미친놈이 된 걸까?”

“혼란스러운 의문형으로 받지 마시고 짐작되는 걸 이야기해 보시죠.”

“내가 뛰어내릴 때 황제랑 로렌 왕자님 앞에서 뛰어내렸는데 말이…….”

“네? 왕자님이 거기 계셨어요?”

“그 뛰어내리기 전에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 아마 내가 뛰어내린 이유가 궁금하지 않았…….”

“미쳤어요!? 그분 앞에서 뛰어내리면 곱게 자란 분이 어떤 충격을 받을 줄 알고!”

다니엘과 라엘은 거칠게 자란 분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이었지만 항의를 할 수가 없었다. 사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두 분 같은 줄 압니까? 보통 사람들은 못 버틴다고요! 생각해보세요.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 형이 죽은 것을 알았는데 형과 같은 얼굴이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지면 무슨 기분이겠냐고요!”

“그, 그땐 황제로부터 그분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는 없…….”

“황제를 찔렀어야죠!”

당당하게 황제시해를 이야기하는 부단장의 말을 들으며 라엘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 뒷감당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그 이후에 로렌이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이야기를 해 봤자 소용없을 타이밍이다. 이럴 때는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다. 부단장이 드, 드물게 화가 났다! 비상이다!

다니엘을 진심으로 모신 부단장이었기에 그의 분노도 이해한다. 라엘처럼 부단장도 다니엘에게 생명에 대해 채무를 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지리도 욕을 하면서도 다니엘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그의 모든 것을 이루어주고 싶어 했다. 다니엘이 죽은 지금은 그 대상이 자연스럽게 로렌으로 이어진다. 다니엘의 마지막 혈육이자 어떤 준비도 없이 괴로움에 내던져진 청년이 스스로 서는 것을 보는 것만이 마음의 채무를 버릴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들의 삶의 중심은 이제 로렌이 되었다. 그리하여 후회하는 것이다. 다니엘의 유일한 혈육인 그를 지켰어야 했는데……. 라엘은 자신의 경솔한 행동을 반성했지만 그때는 너무 지쳤었다. 솔직히 더 이상의 방법도 전혀 보이지 않았었……지만 적어도 부단장 앞에서는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자신만큼이나 격렬한 분노를 느끼는 그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부단장이 라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도대체 생각이 있어, 없어!? 충격받으실 거 아니야! 그분의 가녀린 정신에 그렇게 상처를 줬어야 해, 어!? 형님이 죽은 걸 그제야 알았는데! 그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당신이 눈앞에서 투신을 하면! 그분이 제정신을 차리겠냐고! 생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마디 한마디가 옳은 소리인지라 라엘은 정말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머리를 붙잡고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모든 것을 레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화, 황제 때문…… 어억……! 토할 것 같……!!”

“이젠 우기는 것도 황제처럼 또라이 같이 할 겁니까?! 정신 차려요!!”

“자, 잘못했…… 우욱…….”

미친 듯이 라엘의 멱살을 잡고 흔들던 부단장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엄청나게 흔들린 탓에 결국 라엘은 조금 전까지 먹었던 것을 거하게 토해냈다. 먹은 양이 어마어마한 만큼 뱉어내는 양도 어마어마했다. 속을 모두 게워내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부단장이 그의 등을 두드려주다가 라엘이 충격으로 미친것은 아닐까 잠시 고민해야 했다.

아니, 반대다. 오히려 속이 시원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로렌을 구출해 내고 그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은 다니엘이 아니므로 그의 방식대로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증오하고 원망한다면 그것을 모두 감내할 것이다. 로렌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다시 상기하며 라엘은 다시 일어났다.

“후후…… 일단……. 레온 후후……. 나중에 보자, 후……욱……!”

지금은 마저 토하는 것이 급했다.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부단장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한참 후에 모든 수습을 마친 라엘은 다시 로렌의 걱정을 시작해야 했다. 혹시 로렌이 자신과 같은 일을 겪는다면……. 정말 다시는 그 끔찍한 것을 휘두르지 못하게 잘라버릴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로윈을 생각하며 황제를 해칠 수 없어서 휘둘렸을 뿐이었지만, 그의 손에 로렌이 있다면 달랐다. 로윈이 어찌 되든 일단 로렌의 무사가 더 우선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냈다면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용병이라는 것은 전쟁 중에 가장 움직이기가 편하지.”

“그렇죠.”

라엘은 부단장에게 참전 의사를 알렸고 그는 조용히 최근에 받은 계약 요청들을 가져왔다. 그중에서 가장 최근 선전포고를 받은 왕국을 골라보았다. 그 독한 다니엘은 용병단을 대륙에서 손꼽는 잘나가는 곳으로 만들어 두었고-스스로 수렁에 빠지는 길이었다- 덕분에 적당한 곳을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들의 비싼 의뢰비를 소화해낼 수 있을 만한 곳, 다니엘에게 호의적이며 황제에게 충분한 적개심이 있는 곳. 아니, 이 시점에서 제국에 적개심이 없는 동네를 찾는 것이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을 골라내던 중 라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다니엘 왕자님은 돌아가신 거야.”

“돌아가신 지 벌써 반년입니다.”

“왕자님께서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그림자가 혼자 돌아다니겠어. 그림자는 그와 함께하지.”

“그렇다면?”

“난 이제부터 다니엘의 그림자 라엘이 아닌, 그냥 라엘이야.”

라엘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돌아올 때부터 뭔가를 결심했다고는 생각을 했지만 이런 결정이라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다. 아니,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라엘은 눈을 들어 부단장을 마주 봤다.

“다니엘이 아닌 나라도……. 함께 가 줄 거야?”

“뭐, 나쁘지는 않네요.”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할 일을 마저 했고, 라엘은 웃었다. 이제부터는 정말로 다니엘이 아닌……. 단지 라엘이다.

용병단이 몸을 의탁할 곳은 아난으로 결정했다.

의뢰자 명단 안에 아난이 있었을 때 이미 결정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만큼 당연한 선택이었다. 로윈과 아난은 오래전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다니엘과 폴시스란의 관계도 그러했다. 그래서 그는 라엘을 황제의 손에서 빼돌린 적도 있다. 

그 후에 들린 소식, 친우를 뒤쫓아 간 황제와 뒤이어 들려오는 사망소식. 어렵지 않게 인과관계를 짐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폴시스란은 절대로 황제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사방에서 용병을 모으고 있었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유명한 용병단인 다이덱 용병단에도 권유가 들어온 것이었다.

아난은 이미 거의 모든 전쟁준비를 마쳐두었다. 미적지근한 대응을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던 아난은 대륙이 전운에 휩싸이자마자 준비를 시작했다. 폴시스란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두 왕국이 형제국처럼 지내온 것은 선대부터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다니엘의 복권을 위하여 연합의 중심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아난이었기에 용병단이 합류한 것은 사실 거의 마지막 준비나 다름없었다. 제안하였지만 용병단의 합류는 생각지도 않았던 큰 전력이었기에-다니엘이 까탈을 많이 부려서 소문이 났다. 성질머리 더러운 용병단으로- 폴시스란은 직접 용병단장을 마중 나왔다. 그리고 부단장은 어째서 라엘이 자신은 다니엘이 아닌 라엘이라는 점을 그렇게 강조했는지 깨달았다.

“아난의 왕자님을 뵙습니다.”

“……다, 다니엘?”

“……네?”

“???”

“???”

“다, 다니엘……이…… 아, 아닌가……?”

“……? 라엘이라고 합니다?”

라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저는 다니엘이라는 사람을 모릅니다. 저는 당신을 처음 봅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신데 저를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시는지? 라는 표정으로 폴시스란을 마주 보았다. 

라엘을 보며 부단장은 사람이 저렇게도 얼굴에 철판을 깔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참으로 뻔뻔스럽고도 리얼한 연기였다.

“……그, 그래서……. 작금의 상황에서 그대들과 계약을 하…… 여……. 어…….”

“그렇게 닮았습니까?”

“아차……. 실례했소. 친우와 너무나도 닮은지라……. 마치 꼭 그가 살아 돌아온 것 같군.”

정확하게는 살아 돌아왔다는 것보다는 다니엘은 이미 없었고, 마지막으로 봤던 그놈이 이놈이 맞다. 게다가 최소 1년은 다니엘이 아난에 직접 방문한 적은 없었으니 업무차 들렀던 것도 모두 라엘이었다. 역시 그놈이 이놈이 맞다. 

부단장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조금 답답함을 느꼈다. 폴시스란은 얼마나 놀랐는지 라엘과 계약서를 작성할 때 자꾸 넋을 놓았기 때문에 계약 자체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결국 마무리 협상은 부단장의 몫이었고 라엘은 창밖에서 멍하니 앉아 나비나 잡았다가 놓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리 와봐. 나 심심해.”

“싫어요. 단장님 또 발작하려고.”

“그 말이 봉인을 해제할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 못하는 거니, 멍청아.”

“히익!”

다니엘일 때나 라엘일 때나 용병들이 곁에 다가오지 않는 것은 매한 가지였다. 쓸쓸하다. 이건 모두 다니엘의 지랄맞은 성격 때문이라며 라엘은 다시 다니엘을 씹어댔지만, 사실 저도 그만큼이나 패악질을 부렸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차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사소한 것들은 금세 잊을 필요도 있다. 그런 라엘이었기에 인생은 고독이네 뭐네 정도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홀로 고독을 곱씹는 라엘을 폴시스란은 자꾸 힐긋힐긋 돌아보았고, 결국 부단장은 계약서를 놓았다. 이야기의 화제가 라엘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면……. 친우분께서는?”

모르는 척 묻자 그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아아……. 안타깝게도 대륙은 인재를 잃었다네.”

미친 황제 새끼 때문에! 라는 말이 생략된 것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를 악 문 대답이었다. 부단장의 눈은 그만큼이나 아련해졌다.

그때, 쿠당탕탕 소리가 들리며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눈을 뗀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엘이 걸터앉아있던 통을 어떤 남자에게 집어 던진 것이었다. 술이 꽉 찬 통이었기에 순식간에 촤아- 하는 소리와 함께 술 냄새가 확 올라왔다. 

그것보다……. 저거 맞으면 굉장히 아플 텐데……. 아니, 아프라고 저러는 거겠지. 기시감을 느끼며 부단장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라엘이 욕과 함께 하는 말을 보면 대충 저 멍청한 기사가 외모와 복장만 보고 라엘을 이렇게 저렇게 모욕한 것 같다. 

그렇구나……. 잘 밟히고 있구나……. 중요 부위는 잘 지키고 있구나……. 그렇구나……. 그러나 이미 가득 찬 술통을 맞은 순간부터 그의 내구력이 다한 것이 틀림없었기에 부단장은 순식간에 관심을 옮겼다. 고개를 돌리자 폴시스란의 아련한 표정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왕자님?”

“……아아……. 어쩌면 저렇게 같은 사람 같을까…….”

부단장이 눈을 끔뻑였다. 다니엘의 왕궁 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그였기에 설마 그가 왕궁에서도 이랬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니엘은 일관성 있게 예민하고 성격이 더러웠으며, 폴시스란은 똑 닮은 라엘의 성격 더러움에서 향수마저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독……특한 성격을 가지셨나 보군요.”

“참 불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

……미친……. 소리가 절로 나올 뻔했다. 용병단에서야 저 지랄을 해도 용병단장에게 어울리는 권장되는 성격이었지만, 그렇다고 왕자일 때도 저렇게 다니는 것은 무엇일까. 

부단장은 생각보다 비범했던 생전의 다니엘과 지금도 비범한 라엘을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게는 정말로 다행일지도 모른다. 대륙의 재앙이 둘에서 하나로 줄었……. 아, 황제가 발견되었으니 다시 둘인가. 마치 재앙보존의 법칙을 보는 듯하여 부단장의 어깨가 늘어졌다.

결국 계약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제 엉덩이에 대한 부적절한 평가를 했던 기사를 원 없이 응징해 주고 나서 들어온 라엘은 아직도 전혀 사인이 되지 않은 계약서를 보고는 황당해했다.

“설마 아난은 저희와의 계약을 원치 않는 것입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돌직구는 좀 아닌 것 같아 한마디를 하려는데 옆에서 넋이 나간 폴시스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아니……. 심지어 목소리까지…….”

이미 정신을 놓은 것 같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폴시스란을 대신해 부단장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단장님. 조금 전 왕자님께서는 이 계약사항에 동의하셨습니다. 그렇죠?”

“아……. 아, 그렇소.”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왕자님. 제가 오랜만에 출전을 하게 돼서 몸이 좀 근질거렸나 봅니다.”

그리고 친절하게 손을 끌어 첫 번째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을 도와줬다. 폴시스란은 홀린 듯이 사인을 마쳤다.

“그런데 저 계약에는 동의하셨나요?”

라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물론이지요. 그렇죠, 왕자님?”

“그래, 그랬었지……. 아마…… 도……?”

“역시 아난은 화끈하군요.”

라엘이 씩 웃자 폴시스란은 정말로 홀린 듯이 스스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참으로 신기했다. 몇 달 전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던 친구의 마지막 모습을 꼭 빼닮은 이가 용병단의 단장으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믿기 힘들었다. 어쩌면 다니엘이 살아있었다면 ‘내 대역이 되라! 나는 놀 테니 너는 일해라!’라고 강요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며, 폴시스란은 저도 모르는 사이 가장 진실에 근접했다.

이 얼마나 신비한 세상인가. 나름 적중률 높은 상상을 하던 그였지만 아마도 진실은 마지막까지 모르리라. 정신없이 사인을 마치자 부단장이 계약서를 품에 잘 갈무리했다. 다섯 장을 사인을 한 것……같기도 한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생각을 하려는 순간 내밀어진 손 때문이었다.

“좋은 계약이 돼서 기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내밀어진 라엘의 손을 그는 홀린 듯 맞잡아 악수했다. 부단장은 그런 폴시스란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아아……. 그놈이 그놈인데……. 그래도 품에 갈무리한 계약서를 다시 폴시스란에게 보여주는 수고를 감수하지는 않았다. 모처럼의 훌륭한 계약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둬야 로윈을 찾지 못하더라도 로렌이 뭐라도 할 수 있는 자금을 얻을 수 있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폴시스란의 희생을 받아들였다.

폴시스란은 눈 뜬 채로 코를 베였다.

상상도 하지 못한 조건에 용병단과 계약을 하게 된 폴시스란은 질책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정신을 놓았을 뿐인데 용병단의 계약금은 다른 유명한 용병단보다 세 배는 많았고 추가 계약사항들도 용병단에 유리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체결된 계약을 해지하면 다른 용병단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것 같아 계약을 수정하지 못했다. 급이 다른 대우는 다른 용병단에게 불만을 일으키겠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미 이루어진 계약을 강제로 해제하는 것은 다른 용병단들과의 계약에 대한 신뢰도가 달렸기에 취소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폴시스란은 질책 대신 선견지명에 대한 칭찬을 받고 대범한 결정에 대해 찬사를 받았다. 얼떨결에 이루어진 상황이긴 했지만 이 모든 것이 다이덱 용병단의 공이었다. 단장의 신조-돈값하자-대로 그들은 돈값을 제대로 했다. 앞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고 용병단이 쓸고 지나간 자리는 선명하고 깔끔하게 정리가 됐다. 용병단은 엄청난 제국군을 상대로 돈의 힘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불도저 같지 않아?”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그냥 하는 말이야.”

돈 받은 만큼은 일을 해야지 싶어 열심히 했더니 오랜만인데도 용병들은 손이 착착 맞았다. 그들을 흐뭇하게 내려다보자니 질책을 받은 것처럼 눈을 피하는 것에 라엘은 또 시무룩해졌다. 부단장은 옆에서 뿌린 만큼 돌아온다는 얄미운 소리만 해댔다.

“대단하군.”

“프로니까요.”

어느새 다가온 폴시스란이 순수하게 감탄을 했다. 다시 으쓱해진 라엘이 콧대를 세우자 그가 웃었다.

“다이덱이 왜 유명한지 알 것 같아.”

“돈을 좋아하는 용병은 많지만 값을 하는 용병이 좀 적긴 하니까요.”

상큼하게 웃으며 답하는 라엘은 계약서를 팔랑였다. 새로 추가로 작성된 계약서였다. 워낙에 엄청난 전과를 올리다보니 처음부터 어마어마한 조건으로 계약을 했음에도 아난에서는 추가로 계약을 더 진행했다. 속이 쓰린 금액이었지만 왕국의 안위와 직결된다고 생각하자 용병단의 활약을 직접 확인한 이들이 직접 제안을 하고 찬성했다.

“파격적인 서비스를 보여드리죠, 왕자님.”

왠지 왕자님 대신에 호갱님을 가져다 붙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폴시스란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더 이상의 사설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돈만큼이나 잘해주고 있었으니 어지간한 용병대의 다섯 배는 더 올려 받은 가격도 아깝지 않았다. 가격은 다섯 배지만 전공은 열 배가 넘었으니 충분한 가치가 있는 투자였다. 

새삼 라엘에게 감탄했다. 전장을 누비는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검은 머리를 휘날리며 마치…… 미친…… 으음…… 하지만 훌륭한 전공을 만들어줬으니 괜찮다며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처음엔 그대가 정말로 내 친우와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말이야…….”

“그렇습니까?”

“역시 보면 볼수록 닮았어.”

“아……, 네…….”

“그런데도 다른 사람 같아서 참으로 신기해.”

폴시스란은 이제 거의 혼을 놓은 것 같았다. 그에게 있어 라엘은 마치 다니엘을 거울로 비춰둔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한편 불안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난에 도착한 선전포고에는 분명히 다니엘을 내놓으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 친우를 보낸 날, 황제의 광기와도 같은 집착을 그는 분명히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 전장에 다니엘과 꼭 닮은 라엘이 있었고, 예상되는 전개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라엘의 용병단은 가장 최전방에서 어마어마한 전공을 올리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라엘이 소위 ‘미친놈’처럼 전장을 쏘다니고 있었다.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를 한 번에 풀고 싶었을까. 뭔가의 각오마저 보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라엘은 전장을 휩쓸고 다녔으며 그런 그가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개중에는 분명히 라엘의 얼굴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다니엘은 처음부터 이미 유명한 왕자였고, 어디서 보아도 눈에 띄는 왕자의 얼굴을 알아볼만한 귀족들도 전장에 있었다. 

용병단의 단장이라 하여 신분상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얼굴이 너무나도 같았기에 라엘도 자신을 아무도 몰라볼 것이라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에 대한 보고는 레온에게 직접 들어갈 것이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것을 위해 일부러 보란 듯이 휘젓고 다닌 것이었다.

“어때!?”

“훌륭한 미친놈 같습니다.”

“우와, 이 정도면 그의 똘기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뿌듯한걸?”

“황제가 어느 정도로 미쳤는지는 감이 잡히지는 않지만…… 단장을 기준으로 잡으면 어마어마하게 미친 사람이군요.”

“아냐,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좀 모자라긴 해.”

라엘의 고민 어린 대답에 부단장의 말이 막혔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하기는 한다는 것인가. 부단장도 여러 가지로 상상은 했었다. 다니엘이든지 라엘이든지 둘 다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을 감당할 상대가 대체 어디의 누구이며, 어떤 귀족 아가씨가 희생될 것인지 걱정을 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참 특출한 그들은 결국 어디서 황제를 끌고 와서……. 겸사겸사 라엘을 잡겠다고 대륙 전체에 전쟁을 일으킨 황제도 황제였지만 대놓고 보라며 그 앞에서 휘젓고 다니는 라엘도 정말로 라엘이었다. 아주 환상적으로 잘 어울린다!

참 대단한 행동력이라고 생각했다. 도망치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철저하게 도망쳐 부단장마저도 그 소식을 좇기가 벅찰 정도였었다. 이제 그 반대의 상황이 되자 아예 대놓고 휘젓고 다니는 것은 대체 어디의 뇌구조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아, 단장.”

“왜?”

고기를 열심히 씹어 삼키던 라엘이 고개를 들었다. 전쟁이 시작되고 몸을 움직이자 이전처럼 폭식은 아니지만 꽤 많은 양을 먹기 시작하는 라엘이었다. 식비가 더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부단장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식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단장을 사랑하고, 또 단장을 내놓으라고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맞죠?”

“정말로 징그럽지만 그것도 있지. 왜?”

“아뇨, 드시기나 하십쇼.”

별 흰소리를 다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엘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부단장은 한숨이 푹푹 나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어이없었다. 세상에 어떤 사랑이 사랑싸움으로 전쟁을 하는 것인가. 말로야 전쟁이지만 결국은 보통 다툼으로 끝나지 않는가. 아무리 전쟁 같은 사랑이라지만 진짜 전쟁은…… 아니지 않는가.

이제 자신이 잘못된 것인지 세상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저 두 인간만 잘못된 것이 맞는지 구분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 라엘이란 말이지.”

주변은 조용했다. 회의실에는 분명히 자리가 꽉꽉 차 있음에도 아무도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요즘 미친 황제라고 불리고 있는 레온하르트였지만 처음부터 정신을 놓은 적도 없었다. 이미 이전부터 전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이 라엘의 실종-죽음이 계기가 되어 적절한 때가 되었을 뿐이었다.

고인 평화가 독이 되어 제국을 향했던 것은 오래된 일이었다. 선대보다 조금 더 유한 성격을 가졌다 해서 우습게 보였던 것일까? 제 잘못을 이미 잊어버린 왕들은 황제가 미쳤다며 그를 탓하기에 바쁘다.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물자를 끌어 모으고 군사를 모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을. 

항복을 받아들일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충의를 보인 왕국들이 오히려 제 백성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끌어오고 있었다. 물론 제국군을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다. 아마 적절한 때를 보아 항복하거나 화친을 요청하겠지. 독에 물든 자들은 그만큼도 제대로 움직이고 있지 않았으니 얼마나 한심한가. 레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살폈다.

그러니까 정말로 우연이었다. 보고서 안에서 라엘의 이름을 발견한 것은.

보고서의 내용은 아난으로 보냈던 군사들이 전장에서 연이어 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몇 차례의 전투가 기록되어 있었고 항상 언급되는 용병단이 있었다. 용병단의 이름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워낙에 유명하기도 했고 전쟁 전에 이미 고용하려 했지만 거절당한 곳이기도 했다. 간 크게도 황제의 요청을 거절한 그들은 아난에 고용되어 그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 점은 조금 괘씸하지만 어차피 그들은 돈에 의해 움직이는 종족들이 아닌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곳의 단장이라는 자, 라엘. 라엘의 이름을 가진 이가 지금의 황제의 흥밋거리다. 게다가 그 외모까지 로윈의 다니엘과 꼭 닮았다는 보고가 이미 여러 장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도 그가 라엘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레온은 보고서 안에 보이는 익숙한 이름을 불러봤다. 라엘. 입 안을 구르는 달콤한 이름에 웃었다.

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안도의 한숨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지만 모르는 척했다. 군사들은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일도 아니었다. 저항은 짧을 것이고 결국은 재정립될 관계들이었다.

기분이 상쾌하다. 역시 죽지 않았어, 살아있었어! 자신마저 믿지 못했던 그의 생존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를 다시 만나는 것을 생각하면 기쁘지만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리 라엘에 관하여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가득한 레온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라엘이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 그럴 수 있을까. 자신은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고 그에게 그것을 바라지 않겠다 다짐하며 행동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옭아매겠다고 결심하였으니 그것은 오로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이다.

불안함이 웅크린 마음이 온몸을 잠식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제 제 앞에 당당하게 나타난 그는, 이제는 자신을 향한 증오마저 벗어던져버린 것이리라. 그 사이에는 어떠한 감정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원치 않았기에 레온은 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자신이 어떤 마음인지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됐군.”

“……폐하?”

도착한 곳은 익숙한 방이었다. 문을 열자 로렌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완전히 벗어난 라엘의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이 되는 것은 이제 그밖에 남지 않았다.

“그가 드디어 나타났어.”

레온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황제는 라엘을 붙잡기 위한 인질로 자신을 잡아두었지만 로렌은 자신이 그 역할을 하게 될 날이 실제로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라엘이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자신의 말에 상처 입고 손을 작게 떨며 내밀던 그가 생각났다. 

황궁에서 몇 달 동안 지내며 알게 된 라엘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았고 누구도 탈출하지 못한 그런 상황에서 탈출을 했었다. 그러나 결국 제 말 한마디에 죽음을 선택하기도 했다. 자신을 지키러 곁에 왔다가 제 말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그는 지쳐있었고 지친 그를 절벽으로 밀어버린 것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라엘이 자신을 구하러 온다고?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째서? 그가 그대를 구하러 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라엘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는 황제가 환각이라도 본 것은 아닌가 싶었다. 자신은 그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가져서는 안 되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로렌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저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겁니다. 그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요.”

“아니, 충분하지. 그대의 존재만으로 라엘은 나를 찾아올 거야.”

미미하게 감도는 질투를 감지하며 로렌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조금 망설인 후 결국 진실을 이야기했다. 차라리 자신에게 이용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낫지 않을까. 혹여 황제의 분노로 목숨을 잃어 로윈을 되찾는 것마저도 요원해질까 침묵했던 비밀이 입술을 넘어버렸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제 형이 아니니까요.”

담담하게 말하긴 했지만 울컥 눈물이 올라올 뻔했다.

“그는 내 형이 아니고 꼭 닮은 대역입니다. 그런 그가 나를 구하러 올 리는…… 없습니다.”

눈물을 꾹 참고 마지막 문장까지 외자 레온이 자신을 보며 웃는다.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미소가 더욱 불안하다. 눈앞에서 철컹 소리를 내며 벗겨지는 족쇄는 두려움마저 느껴다.

혹시, 설마……. 아아, 자신이 라엘의 동생이 아니며 인질로서의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황제는 자신을 어떻게 할까?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로렌은 애써 표정을 정리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레온의 말에 그마저도 쏙 들어가 버렸다.

고개를 들어 레온을 올려다보자 그는 짙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진실에 놀라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들은 사람의 표정은 어디에도 찾지 못했다.

“단 한 번이라도 그대가 그의 동생인 적이 있었나?”

“……폐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대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 목숨까지 내던졌지. 그대의 역할은 그의 주군의 동생. 유일한 혈육인데 당연히 그가 찾아올 것 아닌가?”

어떻게……. 말을 잇지 못하는 로렌의 팔을 잡아 이끌며 레온은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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