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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림자가 사라진 세계 ~The shadow was a lost world~ (10/18)

10. 그림자가 사라진 세계 ~The shadow was a lost world~

라엘의 몸이 절벽 아래로 사라지는 순간 로렌은 단말마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레온은 그대로 절벽을 향해 돌진했고, 마침 도착한 기사들이 없었더라면 분명히 그대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을지도 모른다. 흥분한 그가 뭐라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것을 기사들이 간신히 말렸다. 거친 저항에 그를 말리는 기사들의 얼굴이 피떡이 될 때 즈음에야 레온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어째서 온몸에 피가 한 방울도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데도 땅을 딛는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 그대로 몇 번이나 고꾸라졌다. 절벽으로 가기 위해 발버둥치는 레온을 더는 막을 수 없다 생각하여 기사 둘이 그의 양팔을 단단하게 붙잡고 절벽 끝까지 부축했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까마득한 아래쪽에 세차게 흐르는 계곡의 물이 달빛 아래 드러난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와 우레 같은 물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깎아내린 듯 가파르고 높은 절벽이다. 추락하며 암벽에 부딪칠 가능성은 오히려 적었지만 이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이미 의미가 없었다. 만약 계곡으로 빠졌다 하더라도 빠른 물살을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라엘의 마지막 미소가 선명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한, 환희에 휩싸인 그것. 드디어 자신에게 벗어나는 것이 기쁜 듯.

“아니, 인정 못 해.”

“……폐하.”

“이렇게 내 곁을 벗어나는 것만은 절대로!”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레온은 기사들의 손을 쳐냈다. 저도 모르게 다시 손을 뻗은 기사는 그가 제 다리로 단단하게 땅을 딛고 일어나자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는 기사들에게 레온이 명령했다.

“절벽 아래를 샅샅이 뒤져라. 다니엘 왕자를 찾아.”

레온의 명령에 기사들은 고개를 조아렸지만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들은 많은 가능성 중 가장 큰 확률을 차지하고 있는 비극적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무엇인지는 레온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시체라도 가져와.”

살아있는 그를 곁에 둘 수 없다면 시체라도 곁에 두겠다. 레온은 제 손을 영영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무기 삼은 라엘을 생각하며 이를 바득 갈았다. 저를 떠나기 위해 제 목숨마저도 하찮게 내던진 라엘을 향한 분노였다. 어째서 단 한 순간도 온전한 내 것이 되기를 거부하는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분노가 엉겨 어떤 감정을 먼저 내보여야 할지 구분되지 않는다.

기사들은 시체도 건지기 힘든 상황이라 생각하였지만 차마 그대로 고하지 못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는 저희의 황제가 절벽 아래로 뛰어들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이 지경까지 되었지만 다니엘 왕자가 제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황제의 집착에도 끝까지 발악하며 그 손을 벗어나던 남자였다. 그가 세상을 버린 것은 그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모두는 허둥지둥 헤매며 레온의 명을 받들기 위한 수색조를 급히 짜기 시작했다.

절벽 아래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레온은 드디어 몸을 돌려 안쪽으로 걸어왔다. 기사들은 내심 안심하여 고개를 숙인다. 그사이 편성이 끝난 수색대를 보며 레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신호에 거의 모든 기사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시체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급류에 더 멀리 휩쓸리기 전에 움직여야 했으니.

“폐하.”

기사단장이 레온을 불렀다. 아직은 멀리서 헤매는 정신을 다잡으며 고개를 돌리자 그가 바닥에 쓰러진 로렌을 가리켰다. 멀리 도망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형의 투신에 충격을 받은 듯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를 기사단장이 일단 한쪽으로 옮겨둔 것이었다. 처음의 명령은 사살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레온의 명령이 바뀔 수 있으므로 부러 손을 대지 않은 것이다. 황제의 명령은 그들로서도 납득하기 힘든 부분이 있었기에 했던 행동이었고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그가 달아나는 것을 라엘은 바랐을 테지만 로렌은 그리하지 못했다. 제 형이 마지막으로 준 기회를 붙잡지 못한 나약한 청년을 내려다보며 레온은 인상을 찌푸렸다. 마지막의 대화에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라엘은 그를 향한 죄책감과 회한을 감추지 못하였으며 로렌은 답하지 않았다. 심지어 망설이기까지 했다. 로렌은 망설였지만 라엘은 망설임 없이 삶을 포기했다.

라엘은 자신이 없다면 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레온에게 있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알기에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이리라. 

선택은 옳았다. 라엘이 사라지는 순간 레온의 삶의 빛은 사라졌고 지금까지 온몸을 감싸던 그의 주변에 대한 질투마저도 사그라졌다. 지금 이 순간 제 눈앞에 로렌이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의 존재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던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라엘의 수색 외에는 어떤 것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라엘은 그것을 위해 제 목숨을 내던진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것도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의 의도대로 되는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정말로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을.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마지막 라엘의 눈빛을 기억한다. 마치 삶의 의미가 로렌에게만 있다는 듯. 그의 의미가 자신에게 머물지 못함이 화가 나고 슬프다. 이리도 잔혹하게 자신을 떠난 그의 의도대로 이후 모든 것들은 어떠한 의미도 없었건만, 쓰러진 로렌의 얼굴을 보자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게 내버려두는 것은 싫었다.

“……닮았군.”

이복동생이라 들었는데 그래도 형제는 형제였다. 정신을 잃은 로렌의 얼굴에서는 확연히 라엘의 얼굴이 머물러 있었다. 그렇다 한들 그의 사랑스러움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어떠한 흥미도 관심도 생기지 않는 그저 고운 얼굴을 보는 것에 의미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레온은 로렌을 황궁으로 옮길 것을 명했다. 어째서 라엘이 죽음을 선택하게 되었는가. 그 의미에 자신 이외의 의미가 있다면, 자신은 그것을 알아야 한다. 정말로 라엘이 죽어버렸다면 그마저도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레온은 절대로 라엘에게 죽음이 내려앉을 리는 없다 생각했다. 그저 다시 만나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 뿐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 한 달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도 결국 라엘의 시체는 찾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높이에서, 그 격류에 휘말렸다면 그가 누구라 해도 다시 찾을 가능성은 불가능에 수렴하였다. 그러나 레온은 그 사실을 아직 라엘이 살아있음으로 해석했다.

레온은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라엘에 관하여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 황제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희의 황제가 남자를 사랑하는 것도, 그를 얻기 위해 미쳤다고 보일 수밖에 없는 선택을 했던 것들도 모두 이해했다. 그렇지만 이미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만은 다들 고개를 내저었다. 허나 그런 말을 레온에게 직접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레온은 라엘을 생각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처음 품에 안았을 때,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결국 그의 몸을 구속해 제 곁에 두엇을 때까지도. 그 모든 것은 저에게 오로지 기쁨뿐이었다.

라엘이 자신을 증오한다 말해도 그 한구석에는 자신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만 증오가 그것보다 더 크다고 말했다. 증오가 더욱 커졌을 뿐, 여전히 사랑은 남아있을 것이다. 커다래진 증오의 감정마저도 더해서 라엘이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했던 말처럼 레온은 라엘에게 심장이라도 내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정말로 그가 제 목숨을 원했다면 절벽 너머로 몸을 날리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엘은 그런 기쁨을 제게 주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망설임 없고 선택하고 나아간다. 그는 기회를 발견하자 언제나처럼 망설임 없이 가장 잔인하게 제게 복수했다.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증오해요.

-당신을 사랑해도 곁에 있는 것을 선택하지 않아요.

제가 했던 말 그대로 라엘은 행동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레온을 여전히 사랑한다 말했고, 그럼에도 증오하기에 잔인한 복수를 했다. 라엘의 죽음이 레온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되는지 알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코 죽음을 선택할 수 없음을 알기에 할 수 있는 복수였다. 

레온은 자신이 제국 그 자체였고 그러하기에 절대로 죽지 못한 채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라엘을 위해 목숨을 끊는다는 선택지는 그가 살아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라엘이 사라지자 그에게는 어떠한 선택지도 남지 않는다. 아아, 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최고의 복수였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라엘은 레온에게 터럭 한 가닥, 흔적 한 조각조차 남기지 않았다.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는 라엘을 생각하며 레온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어떤 형태로든 끝까지 제 곁에 남지 않겠다는 라엘의 의지인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어떠한가. 처음 그가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은 분명히 그 누구도 그를 가질 수 없음에 환희마저 느꼈다. 지금이야말로 확실히 누구도 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시선에 담긴 것은 분명히 자신이었고 그의 마지막을 공유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래서 만족하였는가? 누구도 그를 가질 수 없음을, 마지막을 온전히 제 것으로 하였음에 기쁜가?

아니, 그렇지 않아.

라엘을 곁에 두는 시간만큼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은 다르다. 그를 소유하지 못하여 안타까움에 안달하던 과거의 자신과 그의 발끝에라도, 아주 잠시라도 그에게 닿았던 자신은 다르다. 과거의 자신은 그의 죽음에 슬픔과 환희를 느꼈지만 지금의 자신이 느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목으로 울었다.

아니, 아니야. 그는 아직 살아있어.

헛되고 부질없는 기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음에도 레온은 끝없이 그 말만을 중얼거렸다. 그것은 믿음보다는 다짐에 가까운 것이었다.

레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엘을 잃어버린 후 단 하루도 두통은 멈춘 적이 없었다.

그의 시체라도 끌어안고 있으면 나을까. 레온은 피식 웃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무섭고 우스운 생각이다. 걸음을 재촉하여 복도를 지나 익숙한 방문에 다다랐다. 지난 몇 달간은 쉴 틈 없이 드나들었던 방이었고 주인을 잃어버린 방이기도 했다.

라엘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은 놓지 않고 있었지만 회의감은 몰려온다.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지……. 다시 만난다 하더라도 그가 이 방으로 돌아오는 것은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음으로서 자신을 벗어나려 했는데, 그것을 붙들어 매어놓으면 그다음에는 대체 무엇일까. 상상도 되지 않는다. 문고리를 돌리며 레온은 쓰게 웃었다.

“오늘 기분은 어떠한지.”

“……별다를 것은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레온은 웃는 표정을 만드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은 채 로렌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로렌은 조용히 찻잔을 내렸다. 유약해 보이기만 하던 그였지만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 성깔이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당신이 오자마자 차 맛이 정말로 구려졌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태도는 마치 라엘과도 같아서 레온은 드디어 웃었다.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되었다.

“얼굴 외에는 통 닮은 것이 없다 생각했었는데 말이지.”

“…….”

“이럴 때 보면 확실히 라엘과 닮았어.”

“……라엘……. 형님과 제가 닮았습니까?”

“아주 조금이지만.”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대답하고 있지만 로렌은 찻잔에서 눈을 단 한 번도 떼지 않았다. 그래, 어쩌면 자신도 다니엘과 닮은 구석이 하나쯤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라엘은 다니엘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복사해 놓은 것과 같이 완벽했으므로……. 그래, 어쩌면 라엘과 자신도 닮았을지도,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로렌은 생각했다.

황궁으로 끌려왔지만 황제는 로렌을 추궁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잘 지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 하면 또 그런 상황이었다. 레온은 로렌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사실을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구금당하고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귀빈의 대접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다니엘의 측근들은 살아있었지만 로렌과 격리되어 갇혀 있었고 그의 다리에는 거슬리는 것이 채워져 있었다. 유난히도 햇살에 희게 빛나는 족쇄였다. 처음에 족쇄가 채워졌을 때는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의 취향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족쇄를 벗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그대를 인질로 삼아 데려왔지.”

자신이 누군가에게 인질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로렌은 셈해 보았다. 답은 ‘아니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자신에게 가치를 매기겠는가. 로윈은 빼앗겼고 다니엘은 죽었다. 그를 대신하던 라엘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황제는 그가 살아있을 것이라며 희망을 잃지 않고 있었지만 로렌은 솔직히 그가 살아남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모두 떠났는데 누가 자신을 되찾으려 할까.

“……족쇄를 채우지 않아도 제가 달아날 방법은 없습니다.”

“그대의 형이 그 족쇄를 풀고 달아났지. 선례가 있으니 그대가 참을 수밖에.”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것이 덜 수치스러울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족쇄가 채워진 것을 발견했던 순간 로렌은 황제의 취향을 심각하게 의심했다. 아니, 굴러가는 이 모든 상황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 처음에는 순진하게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았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필요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라엘이 족쇄를 끊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로렌은 자신을 그것에 대입시킬 수 없었다. 라엘은 할 수 있었지만 자신은 할 수 없다. 라엘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은 로렌이 아주 힘들게 노력해도 할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다. 후에 들은 족쇄와 사슬의 재질에 로렌은 기함해야 했다.

“미스릴 사슬을 달아놓았으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좋아. 개인적인 유감은 없지만 나는 그대가 달아나는 것을 원치 않거든.”

그러니까 이런 곳에 미스릴을 사용하다니. 더욱 당황했다. 이 족쇄와 사슬에 라엘은 몇 달을 구금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다시 상기되며 기분이 가라앉는다.

레온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있어 이 방에 들르는 일은 그저 하루의 일과일 뿐이었다. 차 한 잔 마시기에도 모자란 시간은 로렌이 방에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로렌은 그 행동이 마치 누군가를 잊지 않기 위해서,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방을 나서는 레온을 로렌이 드물게 붙잡았다. 그동안 용기가 없어 알려 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로렌은 드디어 용기를 내서 물어봤다. 자신은 라엘이 이곳에서 어떤 일을 당한 것인지 알아두어야 했다. 그것은 자신 때문에 세상을 떠난 라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로렌이 머뭇대며 묻자 레온은 웃으며 답했다.

“나와 사랑을 나눴지.”

“……네?”

“그의 몸과 마음은 한동안 오롯이 내 것이었지. 그대만 없었더라면 말이야.”

화사하게 피어나는 미소였지만 기저에 가라앉아있는 것은 질투였다. 여전히 가려지지 않는 감정에 로렌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도 황제가 제정신이기를 바랐는데…….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그는 미쳤다. 그 황제에게서 끝까지 달아난 라엘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 어쩌면 그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망일 뿐이었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황제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찻잔에 차를 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렌은 라엘이 이 방에서 겪었던 일들을 알 수 있었다. 황제를 믿고 찾아왔던 그가 로윈을 되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모든 것을 이루기 직전 황제가 어떠한 배신으로 그를 옭아맸는지. 그 후로 겪은 일들……. 몸도 마음도 황제에게 속해 유린당한 시간들까지 모두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은 모두 레온이 저에게 직접 이야기해 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듣자 저도 모르게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키기 위해 팔을 꼭 쥐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떨림만은 멈출 수 없었다.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자신이 성황의 아래에서 보호받고 있는 동안 라엘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다. 누구도 그를 지켜주지 않았으며 그의 어깨에 얹힌 것은 그가 얽매일 필요 없는 책임감이었다. 모르는 척 도망쳐도 아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터인데 그는 아득바득 다니엘이 되어 로윈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로렌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온이 웃었다.

“그대는 참 재밌어.”

“……?”

“그대의 형을 마치 타인을 대하듯 호칭하곤 해.”

레온이 눈치챘기에 로렌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진실을 알지 못함에도 그는 제 혼란을 깨달은 것이다. 아직도 로렌의 안에서 라엘의 존재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라엘을 다니엘, 형이라 칭할 수 있을까. 뻔뻔스러운 일이다. 자신이 그에게 준 상처와 좌절과 슬픔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리다. 그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레온은 그것을 꼬집는다.

로렌이 입을 다물자 레온은 곧 관심을 거뒀다. 로렌이 라엘을 어찌 호칭하든 그에게는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라엘뿐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했다. 의식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로렌이 라엘을 멀리 호칭하는 것은 오히려 현명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딱 한 잔의 차를 마시고 나서 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일과가 끝난 것이다. 그는 오늘도 로렌에게서 라엘의 흔적을 찾았다. 투자하는 시간은 차를 마시는 시간이면 족하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레온에게 로렌은 물었다.

“저도 그처럼 대할 건가요?”

레온은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대는 라엘을 닮긴 했지만…… 그만큼 아름답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아.”

당연하다는 듯 무심하게 답한 레온이 방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로렌은 드디어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나는 어째서 그날 망설였던 것일까.

그날, 형의 대역이자 그림자였던 남자가 제 눈앞에서 스스로 몸을 던지는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간신히 잠이 들면 통로 안에서 발견되었던 새하얀 다니엘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라엘의 것으로 바뀌었다. 제 날카로운 말에 상처받은 그의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때 자신의 말에는 분명히 진심이 담겨있었고 그래서 라엘의 가슴을 더욱더 후벼 팠을 것이다.

그래. 분명히 자신은 생각하고 있었다. 어째서 형이 죽고 그림자만 살아 배회하는지. 분명히 원망하고 있었다. 그에게 책임을 지우고 싶었다.

성국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로렌은 언제나 불안했었다. 제 아버지가 죽고 로윈을 빼앗겼다. 습격당하여 간신히 몸을 피했는데 돌아오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다니엘마저 세상을 떠났다. 분명히 제 눈으로 확인했다. 다니엘은 죽었다. 그러할진대 그의 흔적은 남아 움직이고 있었다.

두려웠다. 형의 시체를 본 것은 환상이 아니었는데, 싸늘한 그의 몸을 분명히 끌어안았는데……. 그런데 다니엘의 사람이 다가와 그가 살아있다고 말했다.

혼란 속에서도 그를 기다렸다. 어쩌면 자신이 너무나도 두렵고 급박한 상황에 몰려 환상을 봤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환상이라는 놈은 원래 사람이 가장 힘들 때 찾아와 가장 아프고 두려운 현실을 만들고는 하니까, 아마 그것은 환상일 것이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아직 살아있는 제 형, 다니엘이 금세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형은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다. 그에게 소식을 전하고 떠났던 자작은 위험한 상황이 되었다며 다시 돌아와 자신을 지키겠다고 했다. 신기루 같았다. 어째서 다니엘의 흔적도 사람도 모두 남아있는데 그 자체는 볼 수가 없을까.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인 것인지, 살아있다는 형이 진실인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이 입을 한데 모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를 만나던 날 기쁨의 눈물이 절로 흘렀다. 정말로 형이 살아있다는 것이 기뻤다. 수개월의 지옥 같은 환상이 산산이 부서지며 오롯이 제 형이 눈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미소 지으며 자신을 품에 안고 다독여주는 것은 분명히 자신의 형이었다. 그의 얼굴이었고 그의 목소리였다. 그런 줄 알았는데…….

로렌은 테이블에 이마를 댔다. 지금에 와서 그를 생각한들 어떻게 하겠는가. 분명히 자신은 그 순간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를 원망하는 순간이 그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바로잡기에는 너무나 늦은 일이었다.

절그럭. 걸을 때마다 따라오는 사슬소리가 거슬려서 로렌은 움직이는 것을 포기했다.

주변에 산처럼 쌓여 있는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자 의외로 계속 읽게 된다. 결국 마지막장까지 읽어 다음 권을 찾아 손을 뻗는데 마침 레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황제가 무서웠다. 족쇄를 제외하고는 레온은 다른 물리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옭아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두려웠다. 라엘을 향한 그의 비정상적인 집착이 그러했고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순식간에 해내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타인의 인생을 깨부수는 것이라 하더라도 망설임이 없다는 점이 무서웠다.

책을 읽는 것조차 레온의 마음을 거스르게 했을까 걱정됐다. 레온은 라엘이 다니엘의 그림자라는 것을 알지 못하며 라엘이 마지막 보인 것이 형제간의 애정이라 생각함에도 로렌을 질투했다. 그런 그의 앞에서 그의 흔적에 손을 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함부로 방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던 로렌이었지만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 순간에 방문한 레온 때문에 몹시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레온은 의외로 웃었다.

“라엘이 좋아하던 책이지.”

“……그렇습니까.”

“참 놀라워. 그대를 보고 있자면 의외의 부분에서 라엘과 닮은 모습을 발견해. 그것이 즐겁군.”

그리 말하는 레온의 눈에서는 사랑스럽다는 감정도, 그렇다고 육욕이 이는 것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제 형, 대역이었던 라엘을 유린한 것까지 상세하게 말해주며 피가 싹 빠지도록 만들었는데, 오늘의 레온은 또 소년처럼 웃는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 태도에 로렌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차라리 눈에 띄게 뭔가 위해를 가한다면 몸은 괴롭지만 마음은 편할 텐데. 레온은 자신과 라엘이 닮은 부분을 찾는 것 외에는 그를 괴롭히는 데에는 아무런 노력도 쏟지 않았다. 그 자체가 괴롭힘이라 생각한다면 이미 훌륭한 괴롭힘이었지만.

“그래, 그대는 그렇게 있으면 돼.”

“…….”

“기다리면 모든 것을 돌려주지.”

이제야 쓸모를 찾았다는 듯 레온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부분이 그를 만족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로렌은 두려움에 움츠러들었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넘겼다. 그리고 또 내일은 어떻게 그의 앞에서 살아남아야 할까.

바로 다음 날, 로렌은 갑작스럽고 새로운 상황에 질겁했다.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라엘 님께서 좋아하시던 남국의 과실입니다.”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라엘 님께서 입으시던 옷과 같은 옷감으로 지은 옷입니다.”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라엘 님께서 키우시던 이국의 애완동물입니다.”

“폐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라엘 님께서…….”

온갖 산해진미와 귀한 물건과 발랄하게 뛰어다니는 털이 하얀 예쁜 짐승들 사이에서 로렌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것은 신종 괴롭힘인가. 그런데 대체 어떤 점에서? 로렌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제정신을 유지하며 탈출했던 라엘이 다시 한 번 존경스러워졌다. 정말……. 뭐야, 지금 이 상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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