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길을 잃기 위해서 ~In order to get lost~
여관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듀리온 자작에게 연락했다. 페르제 자작을 통해 알게 된 그의 거처는 로렌의 곁이었고 각자의 판단으로 가장 적절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두 사람이 성국으로 떠난 것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았으니 다음 대기 지역에서 만날 요량이었고 듀리온 자작과 미리 연락을 한 후 중간지점에서 합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연락을 받은 것은 의외로 탈린 남작이었다.
제국은 이미 로렌의 인도를 성국에 요청하였고 성황이 그것을 거부하자 압박을 가하려는 모양새까지 보였다고 했다. 말끝이 불확실하게 끝맺음된 것은 제국이 성국을 불유쾌하게 할 요청을 더 하기 전에 로렌이 성황과 대담하여 그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로렌은 자신을 압박하는 세력이 어느 곳인지 직접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누가 되었건, 당장 성황이 자신을 지켜준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독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가 성국마저 압박하는 것을 본다면 다른 왕국들에서 오히려 로윈의 왕자들을 꺼리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자신이 움직이는 것이 옳다 생각하여 성국에서 나왔다고 한다. 듀리온 자작은 로렌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가옥의 위치를 알고 있었고 그곳으로 이동하던 중 탈린 남작과 페르제 자작과 합류할 수 있었다고 한다.
라엘은 로렌이 다니엘의 동생이라는 것을 이만큼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다니엘은 마지막까지 로렌을 걱정하여 그를 돌보라 하였지만 이미 그는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했다. 다니엘이라는 큰 빛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그였지만 처음 스스로 보여준 행동은 그도 로윈의 왕자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복잡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누르며 라엘은 말을 달렸다.
로렌과 합류한 그들은 고작 하루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연락을 받은 후 라엘과 합류하기 위해 근처의 마을에서 대기하고 있는 그들을 만난 것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로렌.”
“아, 정말로……. 형님!”
라엘을 본 순간 로렌의 눈은 그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뜨였다. 커다란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안타까워 라엘은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성국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지만 몸이며 마음고생이며 심했는지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있었다. 그나마 혈색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로렌의 성격으로 자기처럼 몸 관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 차라리 나은 상태였다.
다니엘을 닮은 얼굴을 보자 울컥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라엘도 로렌도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아니, 로렌 쪽이 더하다. 라엘에게는 로렌이 남았지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아있다, 살아있다 생각한 유일한 혈육마저도 그저 허상이고 그림자일 뿐이니……. 안타까운 기분에 그를 끌어안자 로렌은 마른 몸에서 나온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라엘을 끌어안았다.
“형님……. 아아…… 진짜 형님이 맞는 거죠, 네?”
“그래, 나야.”
“……꿈이 아니야.”
“그동안 고생이 많았지?”
어깨 부근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것을 애써 모르는 척하며 라엘은 로렌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사실 다니엘이 했어야 한다. 저도 모르는 사이 유일한 혈육마저 잃어버린 로렌이 안타깝다. 가엽고 슬프다. 그러나 그보다도 앞으로 닥칠 일들이 그에게 더욱 크고 힘든 일일 것이기에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야 했다. 결국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알리고 그가 왕으로서 설 수 있도록, 그가 로윈의 유일한 계승자임을 알려야 했다.
그러나 제 품에 안겨 형을 부르며 서럽게 울고 있는 어린 청년에게 조금의 시간을 더 줘도 괜찮지 않을까. 도저히 멈추지 않는 눈물에 라엘은 그의 등을 토닥였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든다.
라엘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던 로렌이었지만 금세 진정되었다. 긴장이 풀려 눈물을 보이긴 했지만 로렌 자체도 유약한 심성을 가진 이는 아니었다. 다니엘에게는 한없이 어리고 모자란 동생이었고 마지막까지도 그를 걱정했지만, 일찌감치 라엘은 그가 딱 다니엘의 동생이라고 생각했었다. 다니엘만큼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로렌은 능력도 마음가짐도 사고방식도 이미 평범함은 벗어났다.
“이야기는 어디까지 들었어?”
“거의 듣지 못했어요.”
라엘의 질문에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듀리온 자작은 그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으며 로렌에게 건네준 것은 제한된 정보였다고 이야기했다. 자작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니엘이 살아있다는 것과 그가 로윈을 되찾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프게 전해 듣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나았다.
머뭇거리던 로렌이 말했다.
“……사실 전 형님께서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자작이 형님이 살아계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형이었던가?”
“……그, 형님께서 큰 상처를 입으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목격한 사람도…… 있고…….”
로렌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라엘이 손을 뻗었지만 그는 한 손으로 괜찮다는 표시를 하며 다른 손으로 눈을 쓱쓱 문질렀다. 희미하게 미소 짓는 그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만이 올라올 뿐이다. 이제 막 스물하나가 된 어린 청년일 뿐이었다. 그가 홀로 남아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미 왕위계승자로서 로윈을 이끌던 다니엘과는 다르게 로렌은 그저 평화로운 제 영지에서 책을 읽으며 지내는 유순한 청년이었다. 왕을 많이 닮은 그는 왕국을 이끄는 것보다는 제 영지의 백성들을 평화롭게 다스리는 것과 학자와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다. 로렌은 그렇게 평화로운 삶을 원했고 다니엘도 그가 그리 살기를 원했다. 어린 청년은 눈물을 훔친다.
“형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사실 반쯤 믿지 못했어요.”
“몇 달 정도만 몸을 숨기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 가장 먼저 너를 생각했어야 했는데. 미안해, 로렌.”
로렌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눈가는 붉지만 환한 웃음이었다.
“괜찮아요. 형님께서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이해해요.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요. 형님께서는 살아계셨어요, 정말로.”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여럿인 것을 보니 제대로 몸을 숨겼나 보구나.”
씩 웃으면서 받아치자 로렌도 마주 웃었다. 앞으로 닥쳐올 그의 미래를 상상하면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지만 이 순간에 그가 웃을 수 있게 내버려두고 싶다. 그는 앞으로의 중요한 축이며 로윈의 미래였다. 무거운 짐을 얹기 전에 지금만이라도 자유롭게 웃을 수 있도록. 긴 시간은 아니었다.
지도를 펼쳐 확인한 안전가옥은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저택은 산 중턱에 숨겨져 있는 곳이었고 다니엘이 생전 마련해 둔 안전가옥 중 하나였다. 마법적인 트랩을 가미하여 평범한 방법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다니엘과 라엘뿐이었다. 굉장히 신경을 쓴 안전가옥 중 하나인지라 당분간 그곳에서 로렌과 머무르기로 했다.
로렌이 지친 몸과 마음을 충분히 추스르면 그때 그에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할 것이다. 측근들에게 사실을 밝히는 것은 그 후 로렌의 결정에 맡겨야 할 일이었다. 머지않아 찾아올 미래의 혼란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저택에 도착하면 그에게 무겁고 괴로운 짐이 지워질 것이기에 라엘은 결국 어색해진 미소를 감추려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잠시 숨을 돌릴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너무 빠르게 깨진 평화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산 중턱에서 일행은 습격당했다. 익숙한 검술을 사용하는 습격자들은 이번에는 정체 모를 괴한이 아니었다. 옷 가운에 선명하게 수놓인 제국의 인장은 그들이 황제의 수하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고작 다섯을 상대하기 위해 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었다. 일행은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포위됐다. 이해할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라엘의 눈동자가 커졌다.
“어째서!”
“황제에게 발각된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모두 끝냈단 말이야!”
혼란이 지나가자 밀려오는 것은 분노였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음에도 끝까지 제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레온을 향한 감정이었다. 결국 말뿐인 제안이었다. 그는 결국 제 모든 팔다리를 잘라내고 그저 곁에 두기만 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레온의 의지를 목도한 라엘은 머리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오직 제 뜻대로 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모두 지워버렸다.
배신감이 치밀어 오른다. 다시 겪은 배신은 결국 그의 곁에 있더라도 이러한 일이 반복될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혼자로 만들려 하는 그의 의지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이제는 남은 사람들마저 희생시키려 하고 있었다.
라엘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로렌의 어깨를 안아 틈 없이 지켰다. 분명히 자신에게 손을 대지 말라 했을 레온이었기에 로렌이 제 품에 있는 순간에는 그를 공격하지 못하리라. 측근들이 긴장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로렌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렸다.
“혀, 형님……. 이건 대체…….”
“천천히 설명해주려고 했는데, 제길. 황제가 내 뒤를 쫓고 있어.”
이렇게 될 것이었다면 차라리 로렌을 만났을 때 모든 것을 설명했어야 했다. 가장 안전한 곳을 열 수 있는 것이 오직 자신뿐이기에 굳이 동행한 것이 악수였다. 후회가 몰려온다. 어째서 레온, 황제를 믿었는가.
로렌에게 설명할 시간이 있을지조차 불확실해진다. 그는 황제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아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로윈을 되찾아나갈 것인지에 대한 것도. 모든 계획을 전해두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로렌이 홀로 해낼 수 있도록 측근들에게도 그를 보좌할 수 있도록 일러둬야 했었다. 자신의 짧은 생각을 탓하며 라엘은 로렌을 끌어안고 말 아래로 몸을 날렸다.
히이잉-. 찢어지는 말의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로렌을 일으키며 뒤를 확인하자 안장 위에 화살이 세 발 꽂혀있었다. 놀란 말이 내달리는 것을 신호로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를 단단히 끌어안자 더 이상 화살은 날아오지 않는다. 역시. 레온이 내려둔 명령이 짐작이 간다. 아마도 자신만을 살리라 했겠지. 모든 사람을 죽이고 오로지 그만 살아남도록. 칼날들은 로렌을 향해 있었지만 라엘이 그를 끌어안으며 지키자 남자들의 손에 망설임이 깃든다.
“이쪽!”
간신히 검을 막고 있던 일행들이 제 뒤로 몸을 숨길 수 있도록 그들을 불렀다. 검술을 익히긴 했지만 결국 문관들이다. 전문적으로 훈련된 군인을 상대하기에는 모자라다. 잠시 후 라엘은 제 몸을 방패 삼아 네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용할 것은 제 몸밖에 없었다.
라엘이 온몸으로 그들의 앞을 막고 검을 휘두르자 남자들은 공격을 망설였다. 숫자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인원이었지만 떨어진 명령은 라엘을 생포하는 것이었다. 그를 강제로 제압하여 등 뒤의 일행들을 처리하기에는 라엘이 너무 강했다. 휘두르는 검에 몇 명의 남자들이 쓰러지자 그들은 뒤로 물러났다.
어색한 대치 상황이 이어졌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라엘은 이를 꽉 물었다.
“검을 내려라.”
라엘을 겨누고 있던 검들이 한꺼번에 땅을 향했다. 숨을 몰아쉬며 식은땀을 닦아냈을 뿐 여전히 정면을 향해 겨눈 검을 내리지 않았다. 기사들 사이로 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 사자 털 망토를 두른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또 무자비했다. 그를 노려보며 바닥에 침을 뱉자 쇠 맛이 혀끝을 스친다. 비릿한 웃음이 목구멍을 내달렸다.
“당신은 결국 제 모든 것을 잘라내 버려야 속이 시원한 건가요?”
“너는 단 하나의 무언가라도 곁에 남아있다면 내게 머무르지 않을 남자라는 것을 깨달은 것뿐이야.”
“그래요.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요.”
이를 갈며 대답을 했다. 그를 향한 사랑과 신뢰의 대가가 이것이었다. 속내를 알지 못하고 그를 믿어버렸고 소중한 이들을 제 스스로 죽음 지척으로 끌고 왔다. 잔인하다. 달콤한 제안을 건네고 그 뒤에서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없앨 생각이었던 것이다. 종국에는 레온 그 자신만이 제 곁에 남을 수 있도록.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싸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한 이야기였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놀란 로렌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가 작게 무어라 말했지만 대답해 줄 틈이 없었다. 잘게 떨리는 차가운 손을 꽉 쥐자 레온이 라엘에게 손을 뻗었다. 손을 마주 잡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 손을 더없이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이건 배신이었다.
둥둥 떠다니던 그에 대한 사랑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 조각이 저를 고통스럽게 찔러댄다.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감정들은 늪 아래로 가라앉고 드디어 현실 속에서 라엘은 레온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황제 레온하르트, 자신은 로윈의 왕자 다니엘. 다니엘에게서 부여받은 그 이름을, 그 역할을 제대로 마치기 위해서는 황제와 함께할 꿈조차 꾸어서도 안 되었다. 환상에 젖어 하마터면 현실을 잃어버릴 뻔했다.
레온의 작은 손끝으로 다니엘은 모든 것을 잃었다. 다니엘의 목숨마저 빼앗은 계기를 마련한 것은 다름 아닌 그였다. 그는 아주 작은 손짓을 한 것이지만 로윈에 닿은 것은 태풍이었다. 화마에 휩싸여 로윈은 약탈자들의 손아래에 떨어졌고 다니엘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홀로 백골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 품안에 잔뜩 긴장한 로렌은, 이 어린 청년은 제 손에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아아. 미안해요, 왕자님. 라엘은 자신이 다니엘의 대역이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렸음을 인정했다. 달콤한 속삭임에 속아 그를 사랑하고 말았다. 그와의 평화로운 미래가 있을 것이라 착각하고 말았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제 섣부름은 감정은 죄 그 자체였다. 라엘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역시 당신과 저는 같은 하늘에 있어서는 안 됐습니다.”
“아니, 너는 내 곁에 있어야 했어. 그게 가장 좋은 선택이고 옳은 일이었지.”
화사하게 웃는 레온의 미소가 소름 끼쳤다. 겉돌기 시작하는 그와의 대화에서, 이 어지러운 감정에 종말을 고해야 함을 깨달았다. 달콤함이 사라진 목소리는 사신의 것과 다름없다. 로렌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다니엘의 유일한 유산인 그만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
“왕자님!”
듀리온 자작의 목소리에 라엘은 몸을 날렸다. 눈치 빠른 측근들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잠시나마 기사들의 경계가 느슨해진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대열의 한쪽을 공격했고 변변찮은 실력이라도 기사들을 당황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라엘의 눈에 아주 잠시 퇴로가 보였다. 라엘은 망설이지 않고 로렌을 끌어안고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포위를 벗어난 라엘은 침엽수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으로 내달렸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라엘!”
등 뒤로 레온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라엘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덤불을 헤치며 산을 올랐다. 절대로 말이 올라올 수 없는 길만을 골라 로렌을 끌고 달려갔다. 로렌은 그저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가 이끄는 좁고 풀이 우거진 짐승 길을 내달렸다. 갑주까지 걸친 그들은 자신만큼이나 빠르게 산길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시간은 남작과 자작들이 벌어줄 것이다. 목숨을 건 그들의 충심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은 절대로 안전해야 했다.
등 뒤에서 들리는 헐떡거리는 숨소리에 라엘은 목구멍까지 답답함이 올라오는 듯해 괴로웠다. 아아, 설명해 줄 시간이 있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과연 진실을 이야기할 시간이나마 있을까. 어떤 신에게 자비를 빌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로렌의 손목을 잡고 달리는 것뿐이었다.
짐승 길만을 골라 이동했다. 정신없이 내달린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한순간이라도 쉴 수 없었다.
“형님, 형님! 이게 대체 무슨……. 어째서 제국이……!”
로렌의 질문에 대답해 줄 시간은 없었다. 그는 성황이 어느 세력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국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그 정체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로렌은 황제가 다니엘의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지만 그 이유를 짐작할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아아, 설명을 해 줄 시간이 필요하다.
쉼 없이 산길을 내달리는 동안 주변은 삽시간에 어두워졌고 로렌은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그를 거의 들쳐 업으며 쉬지 않고 이동하는 라엘은 빠르게 찾아온 산의 밤에 감사했다. 어둠 속에서도 라엘은 어렵지 않게 두 사람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이곳을 찾은 그였기에 올 수 있는 곳이었다.
풀들이 기묘하게 자라나 입구를 가리고 있는 동굴이었다. 예전에 다니엘과 방문하여 위치를 확인한 곳으로, 절벽 지척에 위치한 그곳은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뒤엉켜 두 사람의 소리를 지워주었다. 지친 로렌을 동굴 안쪽 바닥에 내려놓자 적잖게 지쳤는지 그는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색색 가쁜 숨을 내쉬었다. 라엘은 그를 쉬게 두고 동굴 안쪽의 부드러운 흙을 파헤쳤다. 오래전 묻어둔 상자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로렌.”
상자 안에 들어있던 오래된 건량과 여행용 로브를 로렌에게 건넸다. 건량에 걸린 마법이 여전함을 확인했으니 적어도 굶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간편한 복장이었지만 고급스러운 옷 대신 거친 소재의 옷으로 갈아입혔다. 삽시간에 싸늘해진 바람을 막기 위해 로브를 덮어주자 불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형님……. 저는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요.”
“미안해. 내가 안일했어. 이야기를 먼저 했어야 해.”
로렌은 고개를 저으며 로브를 여몄다. 형님은요? 되묻는 그에게 이번에는 라엘이 고개를 저었다. 망설이던 로렌은 라엘의 옆에 답삭 붙어 함께 로브를 덮었다.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주제에 그래도 형이라고 챙기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려온다. 역시 다니엘이 있어야 했다. 라엘은 창백하게 질린 입술을 열었다.
“로렌, 잘 들어. 하나도 잊지 않도록.”
“……네.”
“거점은 페르카, 아난, 이오닌에 있어. 연락망이 점조직이라 네가 접촉할 수 있는 곳은 저 세 곳뿐이야. 내 집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어?”
“네, 하지만…….”
“그들은 네 얼굴을 기억하고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거야. 장소와 암호는…….”
종이나 펜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중요한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확인하며 말했다. 로렌은 당황하면서도 그의 말을 하나씩 곱씹으며 한마디라도 잊지 않도록 입으로 외며 확인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가 로윈을 되찾을 수 있도록, 적어도 도구들을 연결받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본래라면 탈린 남작 외 제 곁에 있던 측근들이 그를 안내해야 했지만 상황이 이리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돈주머니를 단단히 허리에 채워주며 만약의 상황에는 혼자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단단히 주지시켰다.
“방해가 있다면 연락망들과 접선은 포기해도 좋아. 그때는 탑의 아스바사, 다이덱의 라엘을 찾아. 어떤 상황에서든 네 안전을 가장 우선으로 해야 해.”
“형님은……?”
“네가 홀로 움직일 상황이 된다면 나는 포기해도 괜찮아. 그때는 네가 로윈의 마지막 왕족이라는 것을 기억해. 알겠어?”
“예.”
“기억하겠어?”
“탑의 아스바사, 다이덱의 라엘.”
“그래.”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린다. 파랗게 질린 어린 청년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토닥였다.
가끔 라엘은 허무한 상상을 했다. 만약 그날 살해당한 것이 다니엘이 아닌 라엘이었다면 모든 것은 빠르게 해결되었을지도 모른다고. 그 상상이 현실처럼 크게 존재하는 날은 제 사람들이 곁에서 힘든 모습을 보일 때였다. 다니엘이라면 더 능숙하게 그들을 이끌지 않았을까? 그라면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을 거야. 나와 그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삶 속에 치명적인 가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있다면……. 그가 살아남았다면……. 적어도 로렌은 진짜 제 형에게 안겨 위로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헛된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가정은 가정이었으며 그가 살아남았다 해도 이보다 더 잘해냈을 것이라는 확증은 전혀 없다. 라엘이 고뇌하는 것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선망일 뿐 현실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가장 나은 선택을 해왔다. 자신이 아닌 ‘다니엘이 살아남았다면…….’으로 시작된 가정은 ‘만약에’로 시작되는 도피일 뿐이다. 이미 다니엘은 죽었다. 살아남아 그들을 지켜야 하는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로렌에게 다니엘의 측근들이 거점을 두는 곳과 만약을 위해 용병단과 정보단과 접선할 수 있는 길을 알렸다. 최선을 다해 레온에게서 벗어날 생각이지만 여의치 않다면 로렌만을 탈출시킬 작정이었다. 제가 눈을 가리는 동안 로렌이 그들을 이끌 수 있도록. 미리 연락을 해 두었으니 그들은 자신과 연락이 끊기면 로렌과 접촉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만약의 상황에는 충분히 대비했다. 그저 로렌이 제 어깨에 얹힌 짐을 버거워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잠시 숨을 고르며 지금의 상황을 로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난감하다. 어떤 것을 설명하던 레온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자신에게 보이는 집착에 관해서는 설명하기가 정말로 민망했는데, 사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 빼놓을 수도 없다. 그 부분을 빼자면 레온은 그냥 미친놈이 될 뿐인데……. 어라, 다르지 않잖아? 어쨌든 상황의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은 오히려 로렌에게 혼란을 줄 뿐이며 앞으로의 대응 방향을 예상하는 데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다니엘에 대한 것을 지금 이야기해도 될 것인가. 다니엘의 죽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다. 자신과 부단장. 그나마 부단장은 그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외의 자세한 상황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며 그의 유언을 들은 것은 자신뿐이다.
허리에 매달린 왕가의 보검이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만약 자신이 잘못된다면 그에게 진실을 알려줄 사람은 없다. 그저 다니엘이 죽었으며 그가 만난 이가 그림자라는 것 외에 다른 사실은 알 수 없다. 다니엘이 죽음을 맞이하며 얼마나 그를 걱정했는지, 그에게 어떤 소망을 품고 있었는지……. 그것을 전해줄 사람은 오직 자신뿐인 것이다.
쉽게 이야기 꺼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자연스럽게 침묵했다. 생각에 잠긴 라엘에게 결국 로렌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무엇이?”
“라엘은 누구죠?”
로렌의 질문에 잠시 멍해졌다. 그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 잠시 고민하던 라엘은 조금 전 다이덱 용병단의 라엘의 이름을 스스로 꺼낸 것을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달아나는 순간 레온이 그 이름을 크게 불렀던 것도. 듀리온 자작과 내내 함께해 온 그였기에 그를 통해 이미 들었을 수도 있었다. 답은 어렵지 않았다.
“도피 중 사용한 가명이야. 황제는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고, 다이덱의 라엘에서 따온 이름이지.”
“그렇군요.”
다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요란한 바람소리와 물소리는 동굴 입구의 풀들에 걸러져 동굴 안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고요하지 않은 동굴 안에서 로렌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많은 정보들과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상황은 로렌에게 혼란이었으며 버거운 짐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라엘은 그에게 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잠시 뒤, 이번에도 로렌이 먼저 말을 걸었다.
“형님.”
“응.”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망설임이 깃든 목소리였다. 라엘은 입구를 살피던 시선을 돌려 로렌을 마주 보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는 가슴속에 불안함을 휘몰아치게 만든다. 어째서 다니엘의 동생으로 인해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제 스스로도 알 수 없어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로렌은 무언가 결심한 듯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형님.”
이어지는 질문에는 도저히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지금의 당신은 다니엘입니까, 라엘입니까?”
심장이 쿵 떨어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넘겨짚은 질문이 아닌 명백한 의문이었고 그것을 깨달은 라엘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어 대답했다. 그 순간에도 망설임은 계속된다. 지금의 나는 다니엘이어야 하는가, 라엘이어야 하는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 둘은 모두 나를 지칭하는 거야.”
“……그럼 질문을 바꿀게요.”
로렌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라엘을 곧게 직시하고 있다. 그가 되묻는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산소가 부족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다. 숨을 쉬는 방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호흡을 멈춘 폐를 간신히 움직여 숨을 들이켰다. 로렌의 말은 라엘의 숨통을 옥죈다. 그가 사형선고를 내린다.
“당신은 대체 누구기에 형님의 얼굴과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거죠?”
숨이 멎는다.
아아, 다니엘……. 정말로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했다. 그의 질문은 갑작스러웠고 인과가 성립되기에는 주어진 정보가 미약했다. 지금까지 로렌은 단 한 번도 다니엘과 자신을 구분한 적이 없었다. 재회하였을 때 그가 보인 눈물은 진실일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럽지만 정곡을 찌른 질문은 라엘이 적절한 대응을 못 찾고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어떤 이야기라도 들은 것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로렌은 답이 없는 라엘을 바라보며 점점 희게 질렸다.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놀란 듯 가슴이 가파르게 오르락내리락하던 그는 그대로 동굴 밖으로 뛰쳐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게 놀란 가운데에서도 라엘은 벌떡 일어나 그 뒤를 쫓았다. 로렌의 행동은 지금 상황에서는 굉장히 위험했다. 명백하게 자신을 벗어나려 하는 혼란스러운 청년을 막아야 했다. 그의 슬픔과 혼란을 이해하지만 그것을 충분히 표출하기에 상황은 좋지 않았다.
로렌은 동굴 지척에서 라엘에게 붙잡혔다. 멀리 달아나지도 못한 그를 보고 있자면 더욱 착잡해진다. 쾅쾅거리며 쏟아지는 물소리에 귀가 멎을 것 같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소리가 가슴을 찔러 뻥 뚫어버리고 지나간다. 라엘에게 팔을 붙잡힌 로렌은 혼란스러운, 그리고 두려움마저 깃든 눈으로 라엘을 마주 본다. 자신을 향한 시선에 라엘은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낀다.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지? 한마디를 꺼내는 것이 어렵다.
“……위험해.”
“아, 아아……. 형님……. 형님이 맞는 거죠? 그렇다고 해주세요, 응?”
이제는 애절하게 그를 올려다보는 로렌의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대체 그는 무엇을 보고 들었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 다만 발작하듯 어깨를 들썩이는 로렌의 팔목을 붙잡은 채로 그가 더 이상 돌발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순간 로렌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광기마저 깃든 몸짓이다.
“……난 봤어. 형님의 시체를…….”
둔탁한 것이 뒤통수를 가격하는 충격이 엄습해온다. 순간 휘청거릴 뻔한 몸을 겨우 다잡으며 라엘은 혼란스러워하는 로렌의 팔목을 더욱 꽉 쥐었다. 아픔에 그가 몸을 비틀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마저 쓰러질 것 같았다. 이제 로렌은 크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물소리와 바람소리가 그의 소리를 잡아먹는 것만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 통로! 난 그곳에서 봤어! 봤단 말이야!”
발작하듯 고개를 젓던 그가 다시 라엘을 붙잡고 매달린다.
“아, 아냐. 잘못 봤다고 해줘요, 응?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로렌이 다니엘의 시체를 보았다니. 아아, 하지만 납득하게 되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그 장소에 로렌이 도달하게 된 것은, 그 장소가 왕족을 위한 통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습격을 받고 탈출했던 로렌이 그곳을 이용하여 왕궁으로 돌아오려 했고 공교롭게도 그 장소에 도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생각은 어렵지 않았다. 진실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머리는 어떠한 상황이 있었는지 예상하고 가정하고 상상한다.
그러나 라엘은 다니엘의 시체를 로렌이 보았다는 사실에 그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대답 없는 라엘을 마주 보는 로렌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솟아오른다.
“……당신……. 당신은 대체 누구예요? 대체 누군데…….”
“……나는…….”
“어째서 당신은 형님의 얼굴을 하고 같은 목소리로 나를 지키려 하는 거죠? 왜……. 꼭, 형님처럼…….”
“……아아…….”
목구멍을 긁는 애잔한 탄식만이 간신히 기어 올라온다.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죽은 것은 자신의 대역이며 내가 진실한 다니엘이라며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당장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로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렇게 거짓을 진실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같은 얼굴이며 같은 목소리이다. 다니엘이 사람들과 공유한 모든 추억을 자신은 알고 있다. 로렌이 태어나고 살아오고 지금까지 다니엘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자신은 해 줄 수도 있다. 내가 다니엘이며 네 형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그림자가 아닌 온전한 왕자가 될 수도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럴 순 없었다. 그 시체는 분명히 다니엘이었다. 더 이상 그의 존재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혈육에게까지 그의 존재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데, 그가 없어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데…….
라엘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여전히 침묵하자 로렌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다, 당신이 누군지는 상관없어요……. 형님은 현명하신 분이니까 분명히…….”
“…….”
“아니……. 정말로 차라리 당신이 내 형님이라고 이야기해 주세요. 내가 잘못 알았다고 이야기해주세요.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네?”
애달프게 라엘에게 제 이름을 불러달라는 그에게 원하는 답을 내줄 수 없었다. 아아, 기만이라 하더라도 그에게 진실을 말할 시간은 지금밖에 없다.
“……왕자님…….”
“……아…….”
결국 로렌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를 수 없었다. 그 한마디가 답이 되어 로렌의 눈이 절망으로 커진다.
“……왜…….”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어째서…….”
“진정하세요, 왕자님. 당신은 다니엘 왕자님의 마지막 유언을 들어야 하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아아아…….”
로렌의 몸이 그대로 무너진다. 라엘에게 붙잡힌 팔만이 허공에 뜬 채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로렌이 한참을 흐느끼는 동안 라엘은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을 라엘은 이미 겪었기에, 그래서 로렌이 겪고 있을 혼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로렌의 흐느낌이 사라졌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만이 그가 아직 정신을 잃지 않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잠시 후 로렌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시뻘겋게 물든 눈가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이 안타까워 그 얼굴을 닦아주려 손을 내밀었지만 로렌은 라엘의 손을 쳐냈다. 그의 눈에 원망이 차올랐다.
“왜 형님이 아닌 당신이 살아있어?”
형제를 잃은 어린 청년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비수가 되어 라엘의 가슴을 찌른다. 찔린 자리에서 검은 피가 콸콸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라엘은 옅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아, 왕자님. 이제 남은 나의 유일한 작은 왕자님. 차라리 저를 원망하세요. 당신의 형이자 내 유일한 군주를 지키지 못했던 나를 당신은 원망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지금 내 삶의 유일한 이유는 오로지 당신입니다. 그가 당신을 내게 부탁했어요.
하지만 이 순간 로렌의 모든 혈육이 사라졌음을 알기에 라엘은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팔목을 붙잡고 있는 손에서 어느새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로렌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뒤쪽으로 물러났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에 떠오른 것은 원망이다. 그 눈을 보는 것이 괴로워 시선을 떨구자 시뻘겋게 손자국이 난 손목에 다시 가슴이 쓰라리다.
로렌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변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진정 그를 생각했다면, 어쩌면 처음부터 다니엘의 죽음을 알리고 그를 지키지 못한 값을 치러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니엘의 유언에 따라…….’라는 핑계로 로윈을 되찾은 후 모든 것을 로렌에게 떠넘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 선택에 로렌의 의지는 전혀 없었다.
그래, 어쩌면 처음부터. 라엘은 다니엘로서 살아갈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로렌에게 그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다니엘의 유언을 지켰다는 핑계로 저 혼자만 홀가분해지려 했음이 틀림없다. 이후를 지탱해야 하는 것은 로렌이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을 의무와 책임에 편승하여 쉽게 건네 버리려 한 것이다. 심지어 그 의무와 책임이란 것 자체가 자신이 지고 있던 것이며 로렌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멋대로 그에게 부여한 환상이었다.
아아, 정말로 못된 놈이었네.
라엘은 어지럼증을 느꼈지만 손을 내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쪽은 위험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제발요.”
로렌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입술을 열지 않았다. 조금 전 내뱉은 말은 충동적이었고 그것에는 저도 놀랐는지 죄책감이 젖은 얼굴 위로 떠올랐다. 상냥하고 남에게 모진 소리 한마디 하지 못하는 그였기에 당연하다. 다니엘은 그가 정치를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그 상냥한 성품을 꼽았지만 그것이 인간적인 것 아니던가. 그러나 여전히 원망은 깃들어있는 것조차 그러하다. 그것은 로렌이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였다.
하지만 아직은 위험하다. 아직 로렌은 라엘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지금의 모든 상황은 다니엘, 라엘을 중심으로 이뤄져있었다. 라엘이 사라진다면 로렌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를 위해 일러둔 방법조차 그저 파편일 뿐 아직 충분히 모든 것을 알려주지 못했다. 그가 안전히 로윈을 되찾을 수 있도록 라엘은 그의 곁에 있어야 했다. 주군을 지키지 못하고 그를 기만한 죄는 그 이후에 받아야 한다.
어쩌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숨 쉴 틈 없이 내달렸건만 정작 그 중심이 되어야 할 로렌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안전한 곳에 몸을 의탁하고 있으니 진실을 알리는 시간을 차일피일 미뤄온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에게 다니엘의 죽음을 알려야 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그 시기를 미뤄왔던 것이리라.
잘못된 선택으로 꼬이고 꼬인 실타래는 영 풀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모든 상황을 만든 것이 오로지 자신이라 라엘은 슬픔까지 느꼈다. 아아, 난 어째서 그 순간 제국으로 향하는 길을 선택했을까. 어째서 그를 믿은 것인가.
아니, 어째서 그날 정원에서 레온을 만난 것인가.
손을 내밀었지만 로렌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명백한 거부의 의사였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에 망설임이 깃든다. 그에게 다가가도 될 것인가. 한 걸음 내디디면 한 걸음 뒷걸음친다. 고개를 저으며 슬픈 눈으로 손을 내밀지만 고개를 저으며 슬픈 눈으로 손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 순간.
로렌의 약한 비명 소리와 함께 뒤편의 풀숲에서 단단한 팔이 그를 붙들었다. 막을 겨를조차 없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찾았다, 라엘.”
참으로 공교롭다. 로렌의 뒤편에서 나타난 것은 역시 레온이었다. 그 익숙한 목소리에 어마어마한 피로가 몰려왔다. 이쯤 되자 달관할 지경이 되었다.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정신적 충격은 피로감과 꼭 닮아있었다.
로렌은 레온의 품 안에서 발버둥 쳤지만 단단하게 그를 감싼 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마도 수풀을 헤치고 나오다 로렌의 등을 본 레온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이리라. 그가 어떻게 이곳을 찾았는지보다 그가 로렌을 위협적으로 제압했다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그의 품 안에 갇힌 로렌은 마치 육식동물에게 모가지를 물린 작고 약한 짐승과도 같아 보였다.
라엘은 웃어버렸다. 이쯤 되면 자신이 전생에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이런 일들을 겪나 싶었다.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레온을 마주 보며 라엘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로렌이 희게 질린 얼굴로 레온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는 없었다. 그는 레온의 손아귀에서 스스로 벗어나기에 너무나도 약했고 레온이 손에 힘을 주는 순간 목이 꺾일지도 모르는 가련한 이였다.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남기려 하지 않는 그에게 붙잡힌 로렌은 어쩌면 작은 새와도 같았다. 너무나도 상처 입어 스스로 날아갈 수조차 없는 정말로 작고 작은 새. 그를 상처 입힌 것은 자신이었다. 그를 괴로움에서 구해내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라엘은 미소 지었다. 그러나 여리고 가엾은 작은 새를 얽매는 새장을 깨뜨리는 것만은 자신이 할 수 있지 않은가.
천천히 뒷걸음치던 발을 멈췄다. 등가에 닿는 바람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니 머지않은 곳에 절벽의 끄트머리가 있었다. 몇 걸음만 뒤로 걸어가면 추락하여 세찬 물에 휘감길 곳이었다. 피할 곳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다. 더 이상은 피하기 힘든 상황이 닥쳤다. 마지막의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몰려오는 피로감에 라엘은 급격하게 지쳐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잊지 않았다. 라엘은 경고했다.
“거기서 멈춰요.”
“라엘.”
레온이 그의 이름을 부른다. 여전히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지만 지친 귀에는 더 이상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다. 바짝 마른 입술이 간신히 목소리를 낸다.
“로렌을 놓아줘요.”
“그건 할 수 없어.”
“그와 나는 한 몸과도 같아요. 로렌이 죽는 순간이 바로 제가 죽는 순간이 될 거예요.”
오후 티타임에 차 한 잔을 하며 나누는 듯한 어조의 평온한 대화였다. 점점 당황하는 레온과는 다르게 라엘의 표정은 점점 평온해진다. 대화 안에 담긴 내용들은 침착한 어조와 다르게 평범하지 않았고, 결국 로렌을 붙잡은 레온의 팔에 힘이 빠진다.
“라엘.”
그의 이름을 부르며 한 걸음 내딛자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머뭇거리다 다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면 다시 뒤로 한 걸음. 더 이상 라엘이 물러설 수 없는 끄트머리까지 와서야 레온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더 뒤로 물러날 곳이 없음에도 자신이 한 걸음 더 내디디려 하자 망설임 없이 뒤로 몸을 이동한다. 레온은 결국 라엘에게 다가가는 것을 포기했다. 우습게도 그는 절벽 끄트머리에 서 있는 라엘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레온이 급히 라엘의 이름을 불렀다.
“그곳은 위험해.”
“제게는 당신이 더욱 위험해요.”
진심이, 진실이 담긴 한마디였다. 어떤 부정도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레온은 라엘의 얼굴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위험하다. 제가 아닌 라엘이 위험하다.
“미안해. 그러니…….”
“로렌을 놓아줘요.”
선택권은 없었다. 레온은 순순히 로렌을 놓아주었다. 서둘러 그 품을 벗어난 로렌은, 그러나 더 이상 멀리 가지도 못하고 눈을 홉뜬 채 라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마저 제 예상을 벗어나 지친 미소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가엾은 로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모든 것을 잃었다. 한 조각이라도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한 희망은 그림자였을 뿐이며 진실의 빛이 그것을 비추자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 진실이라 생각한 것이 모두 거짓이었고 그것은 가장 최악의 상황에서 드러났다. 조금의 시간도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으며 혼란 속에서 그는 자책하며 원망한다. 진실을 깨달았으나 이제는 슬퍼할 틈마저도 없다.
차라리 달아나기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자신을 속인 그림자가 어찌 될까 걱정되어 떠나지도 못하는 상냥한 새.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선택에 더욱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할 그이기도 했다. 가엾은 로렌.
“나 역시 그가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어, 로렌.”
“……아…….”
자신에게 건네지는 말에 로렌의 눈동자가 떨린다. 레온의 앞이기에 라엘은 말을 아껴야 했다. 자신이 다니엘의 그림자임을 아는 것은 로렌으로 족했다. 앞으로 로윈을 이끌어나갈 로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미래가 있었다. 그 미래를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모르게 죽어간, 마지막까지도 그를 걱정한 형의 이야기를 전할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었다. 잔인한 타이밍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는 너를 걱정했고 마지막 순간에 내게 너를 부탁했어. 내가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사실만은 알아줬으면 해. 아니, 알아야 해.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널 사랑했어.”
로렌의 입술이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그도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알 수 없겠지. 그도 아니라면 요란스러운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그의 목소리를 먹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저 슬픔으로 가득한, 지친 라엘의 눈을 마주한 로렌은 주먹을 꽉 쥔 채 망설이고 있었다. 혼란과 원망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제 형을 닮은 그를 향한 기대와 그리고 형을 대신해 자신을 지키려는 라엘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의 젖은 볼을 닦아주고 싶었지만 이미 자신은 다니엘이 아니다. 진실을 알게 된 로렌에게 자신은 그저 타인이었을 뿐이다. 로렌의 눈에서 라엘은 그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깨달은 순간 자신을 지탱해오던 모든 것이 우르르 무너져 높은 곳에서부터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지금 이 순간 명백하게도 자신은 로렌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라엘은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작은 새를 얽매는 새장을 깨부술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 레온을 마주 보았다. 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듯 그는 라엘을 향해 다가가려 했지만 라엘이 망설임 없이 뒤로 한 걸음 물러섰기에 결국 다시 걸음을 멈췄다. 이제는 정말로 발뒤꿈치에 절벽의 끝이 걸쳐져있다. 결국 다가가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지만 라엘은 다가오지 않는다. 레온은 애달프게 라엘의 이름을 불렀다.
“위험해, 라엘.”
“당신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엘.”
“우습지만 이 순간에도 당신을 사랑해요, 레온. 이건 진심이에요.”
라엘의 입에 제 이름이 사랑과 함께 담겼음에도 레온은 기뻐할 수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라엘의 눈은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과도 같았다.
“라엘…… 제발……. 이쪽으로…….”
우습게도 라엘은 레온의 모습에서 조금 전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로렌을 향해 애달프게 손을 뻗었지만 결코 거두어지지 않은 손. 가장 소중한 것을 향해 내뻗었던 자신의 손이 레온의 손과 겹친다. 그 손이 저를 향하는 것에 미소 지었다. 이것은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참으로 우습다. 이곳은 자신의 세계가 아니었고 자신은 그저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런 자신을 온전히 받아주는 것은 오직 다니엘뿐이었다. 그 자신으로서 관계를 맺은 것은 오직 다니엘이었으므로 그래서 그를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제 자신을 온전히 받아준 것은 우습게도 레온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사랑하게 된 이유에는 그가 자신을 다니엘의 그림자가 아닌, 온전히 그 자체로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로윈의 왕자 다니엘이 아닌 인간 라엘을 향한 애정을 호소했고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이 닥칠 때까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사랑과 증오와 연민과 분노가 뒤섞여 가장 큰 감정이 어떤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수없이 많은 감정들이 커졌다가 줄어들었다가 기울었다가 평형을 이루며 그에 대한 어떠한 결정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복잡한 감정의 추가 드디어 한쪽으로 기울었다. 라엘은 웃었다.
“하지만 그보다 당신을 더 증오해요. 내 모든 것을 앗아가고 아무것도 남기려 하지 않는 당신이 미워요.”
뒤로 조금 물러서자 발바닥 가운데 절벽의 끝이 걸쳐진다. 레온이 라엘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지만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제가 발을 내딛는 순간 라엘은 망설임 없이 뒤로 물러설 것이고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레온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 걸음에 이리도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면 신기했다. 자신의 어떤 것이 그를 이렇게까지 만들었을까. 그를 이렇게까지 몰아갔을까.
“다, 다 해줄게! 미안해, 라엘. 다시는 너를 원한다고 하지 않을게.”
“내가 당신의 무엇을 믿을 수 있죠?”
“라엘, 제발……. 원한다면 내 목숨이라도 내어 줄 테니…….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테니 제발 이쪽으로……. 아, 제발……. 라엘…….”
레온의 애원에 라엘은 미소 지었다. 그의 한 걸음 뒤에서 로렌이 시종 불안한 표정으로 라엘을 보고 있었다. 레온이 정신없는 이때 차라리 달아나기를 바랐건만, 이미 이렇게 되어버린 것은 되돌릴 수 없다. 앞으로의 제 선택에 그가 아주 많은 충격을 받지 않기만을 바란다.
이제는 오롯이 레온만을 바라본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당신이 날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아요, 레온.”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레온의 표정이 울 것같이 변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제발……. 제발……. 그곳은 위험하니…….”
“당신이 저를 사랑해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환하게 웃으며 라엘이 말했다. 이것은 아마도 레온이 볼 수 있는 마지막이자 가장 밝은 미소가 될 것이다.
“저는 당신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안녕, 레온.”
이어지는 움직임은 아주 작았다. 아주 조금, 그저 반걸음을 뒤로 내디뎠을 뿐이었다. 고작 그만큼의 움직임으로도 라엘의 몸은 어두운 계곡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기 전 레온의 비명 소리를 들은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정말로 상관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