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숨바꼭질 ~Hide and Seek~
레스토랑 리넷은 수도에서 꽤나 이름을 떨친다는 유명 레스토랑 중 하나이다. 그 유명세에 큰 몫을 한 것은 가게의 입지일 것이다. 황궁부터 성문까지 곧게 뻗은 대로를 내려다볼 수 있는 창가는 황제의 행렬이 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자리 예약이 꽉 차고 웃돈을 얹어 거래가 되기도 한다.
물론 입지만이 유명세에 보탬이 된 것은 아니다. 레스토랑 리넷의 주방장이라고 하면 의심 없이 훌륭했다. 게다가 요즘에는 실리에 밝은 매니저의 제안으로 점심시간에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여 런치메뉴를 만들기도 했다. 저렴하다고는 해도 보통의 가격대보다는 상당해서 정작 학생들이 오기는 할까 하고 내놓은 메뉴였는데 의외의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별다른 행사가 없는 평일임에도 레스토랑 안에는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굉장히 눈이 가는 손님으로 흰 피부에 검은 머리가 인상적인 잘생긴 남자였다. 점심시간이 지나고 꽤 한적해진 레스토랑 안에 작게 소란이 일었다. 소란 속의 승리자인 여종업원이 밝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창가로, 4인 이상이 앉을 수 있는 자리로 부탁드려요.”
목소리도 감미롭다. 최고다! 종업원은 작게 주먹을 쥐어 승리의 포즈를 취했다. 패배자들은 부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가장 전망 좋은 창가로 안내하고 남자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며 감탄했다. 뿌듯함을 느끼며 메뉴판을 건네려 하자 그는 손을 저었다.
“런치메뉴가 유명하다고 해서 왔어요. 그걸로 해주세요.”
“네, 손님.”
“아, 가격은 상관없으니 스테이크 종류로 서너 가지 정도 더 가져다주세요.”
보통 상황이라면 메뉴 이름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고 적당한 주문을 하는 것이 짜증을 치밀어 오르게 했을 테지만, 아직 종업원은 남자의 얼굴을 보며 행복에 겨워있는 상태였다. 양이 중요하니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것, 이라는 더욱 애매한 주문이 추가되었지만 그녀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어쩜! 저 얼굴을 보고 화를 낼 수 있겠어? 최고로 맛있는 것들을 드려야지!
“일행분이 도착하는 시간을 알려주시면 맞춰서 내어드리겠습니다.”
“없습니다.”
“……네?”
“혼자입니다.”
“주문은…….”
“다 제 겁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스테이크 이외에도 이것저것을 더 주문한 그였다. 성인남성을 기준으로 둔다고 해도 족히 5인분은 넘어 보이는 주문량에 그녀는 잠시 멈칫했고 남자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 미소에 그녀는 다시 행복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 좀 잘 먹어요.”
그럼요. 잘 드셔야죠! 암요! 잘 드시고 그 얼굴만 쭉 영원히 유지해주세요! 마음속으로 외치며 그녀는 주문서를 받아 주방으로 향했다. 주문서를 받은 주방장이 고개를 쑥 내밀어 인원수를 확인하고 이게 제대로 된 주문이 맞는 건지 확인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요리사는 남자가 가끔 귀족적인 취미를 발휘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한 후 한 조각씩만 덜어먹는 사람으로 납득했다. 생각보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레스토랑은 꽤 한가했고 음식은 빠르게 만들어져서 테이블로 옮겨졌다. 기왕이면 한꺼번에 내줬으면 좋겠다는 남자의 요청에 다른 종업원까지 합세하여 음식을 바로바로 날랐고 곧 테이블에는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음식접시로 가득해졌다. 행복한 표정으로 음식을 바라보는 남자를 역시 행복한 표정으로 지켜보며 자리로 돌아온 종업원들은 그의 우아한 식사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보기 드물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외모의 손님이라고 말하며.
남자는 정말 우아하게 식사를 했다. 조금 특별한 부분이 있다면 그 속도가 다소 빠르다는 정도? ……사실 다소라기보다는 엄청나게 빠르다는 쪽에 가까운 것이었다. 주문했던 양의 반절을 순식간에 해치우는 속도에 다들 입을 쩍 벌렸고 어느새 주방장까지 그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남자의 식사 속도를 구경하고 있었다. 한입씩만 먹고 버릴 것처럼 생겨서는 먹는 양도 속도도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잠시 굳어있던 종업원이 용기내서 테이블로 향했다.
“빈 접시를 치워드릴까요?”
“번거로울 테니 한꺼번에 해주세요. 빈 접시를 보는 것도 참 행복하거든요.”
“아, 네.”
당황한 것을 제대로 감췄는지는 모르겠지만 가까이서 보면 역시 행복해지는 얼굴이었다. 남자의 식사는 쭉 이어졌고 정말로 메인메뉴들을 전부 먹어치웠을 때는 종업원 일동이 소리 없이 박수를 쳤다. 정말 드문 광경이었다.
그때였다. 땅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십의 말이 달리는 소리에 종업원들은 깜짝 놀라 창가로 붙었고 곧 기사들이 말을 타고 대로를 질주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저 정도의 기사들이 동원되는 일이라면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난데없는 기사들의 질주에 레스토랑 안은 수군수군하며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남자의 식사가 모두 끝났다.
“바깥이 시끄러운데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불안은 불안이고 일은 일이다. 접시를 치우던 종업원들에게 -너무 많아 혼자 치울 수 없었다- 남자가 질문했다. 종업원들이라고 딱히 이유를 알 방법이 없었기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지만.
“잘 모르겠지만 큰일이 생기긴 생긴 것 같습니다.”
“저만큼 많은 기사들이 저렇게 급히 달리는 건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의 표정이 난처함에 물들었다. 왠지 함께 난처해져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슬픈 표정을 짓는 종업원들에게 남자가 물었다.
“혹시 성문도 폐쇄될까요.”
“아마도……. 아, 혹시 외국인이십니까?”
“업무 차 들렀었거든요. 식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요.”
“난처하시겠습니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메뉴판을 넘겼다. 디저트 페이지였다.
“어쩔 수 없죠. 이참에 맛있는 음식이나 더 먹고 가죠.”
걱정을 떨치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남자는 메뉴판을 가리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행복한 남자의 표정에 종업원들도 함께 행복해진다. 역시 비슷한 속도로 디저트까지 쓸어 담은 남자는 디저트의 훌륭함에 대해서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날 주방장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조금 전까지 창밖으로 보이던 기사들의 질주는 역시 장관이었다. 전망이 좋다고 유명하더니 말 그대로다. 기사들의 질주를 다섯 번째까지 세어보던 남자-라엘은 그것에 별다른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 디저트를 끝장냈다. 왠지 주방장의 감사인사를 받게 되었는데 참 묘하다. 그냥 먹기만 했는데?
“혹시 근처에 괜찮은 여관이 있을까요?”
“묵고 가시려는 겁니까?”
“성문이 닫혔다면 더 묵어야 할 텐데 이미 체크아웃을 했거든요.”
“유명한 곳이 있습니다. 손님께서 원하신다면 괜찮은 방을 비워달라고 연락을 해 두겠습니다.”
“정말로 친절하시군요. 부탁드립니다.”
화사한 미소에 매니저의 표정이 덩달아 밝아진다. 오늘 하루 라엘은 적어도 이 레스토랑에서 행복사절단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서비스정신이 투철한 친절한 레스토랑 리넷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늦은 오후가 돼서야 계산을 했다. 생각보다 적게 나온 금액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좋은 거라면 좋은 거니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라엘은 바보가 아니었다.
황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레온이 모든 물량과 노력을 퍼부어 자신을 추격할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고민 지점은 자신이 향할 모든 곳을 레온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정도? 로윈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라엘에게 따라붙었던 추적자들의 존재는 이미 그 행적이 레온에게 모두 파악당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그도 자신이 제국으로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제국행을 택한 후로는 헛다리만 짚었지만.
결국 바보같이 그의 손바닥 안에 놀아났었다. 모든 정보는 레온의 손 안에 있었다. 빌어먹을 황제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비하면 자신은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했고, 사실 지금 상황에서는 어떤 것이 가장 좋을지 완벽한 계획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어떠십니까. 경치가 참 좋죠?”
“정말이네요. 리넷에서 추천하기에 어떤 곳인가 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새로 지어진 여관은 시설 전반이 깨끗하고 깔끔했다. 3층으로 안내받아 이동하는 동안 복도며 계단에서는 삐거덕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잘 지어진 건물이었다. 하루 이틀만 묵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까 고민했는데 실제로 안내를 받아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창밖 정경이었다.
“좋네요.”
“마음에 드십니까? 황궁이 이렇게 제대로 보이는 곳은 이 근방에서는 여기뿐입니다.”
“정말로 마음에 드네요.”
일단 일주일을 머무르기로 하고 선금을 치렀다. 계산하는 동안 성문이 열리는 소리와 기사들이 말을 달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정말로 딱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좋은 기회가 생기자 냅다 나오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 대한 생각을 따로 한 것은 아니었다. 다니엘이 보았다면 날 엿 먹이는 거냐며 뒤통수를 후려갈겼겠지만 인간적으로 그라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하지는 못했을 거다. 솔직히 막막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도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할지는 차분히 생각해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뿐. 일단 추적자들을 멀리 보내야 그 뒤에서 엿이라도 날려줄 것 아닌가.
여관은 꼭 마음에 들도록 편안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귀찮으니 필요한 물건은 카운터에 부탁했다. 금세 양질의 물건을 구해다주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있는 게 돈뿐이니 팁을 종이처럼 날렸다. 사실 이쪽 세계에 오자마자 비렁뱅이가 됐다가 그다음은 왕자로 신분상승한 라엘은 직접 돈을 주고 물품을 구입해 본 적이 전혀 없었다. 물건을 구분하는 눈이 어두운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그는 가장 잘하는 방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는 것은 사람을 부리는 방법뿐이었다.
참 곱게도 지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몇 달 정도 뒷골목에서 고생한 것을 제외하고는 라엔은 왕궁에서 왕자로 곱게 지내왔다. 용병이기도 했지만 단장이라는 것은 일상의 잡다한 일을 스스로 할 필요가 이미 없어졌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황궁에 구금이 되었을 때도 그는 직접 손 하나 까닥할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저 손가락으로……. 우와. 생각보다 꽤 편한 삶을 살고 있었잖아, 나?!
어딜 가도 이렇게 잘 살았으니 뭐라도 하면 잘되겠지, 하는 긍정적인 기분이 들어 라엘은 폭신한 침대 위를 굴렀다. 잘한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역시 가장 잘한 것은 황궁에서 금붙이와 보석과 돈을 있는 대로 싹싹 긁어온 것이었다. 세상은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진리는 차원이동을 해도 유효했다.
그렇게 라엘은 황궁 바로 맞은편 대로변에 있는 여관에서 꿀 같은 단잠을 청했다.
라엘은 일주일 정도를 느긋하게 푹 쉬었다. 그동안 성문은 다시 개방되었고 기사들은 더 이상 황궁에서 쏟아져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딱히 움직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여관의 종업원들은 정체불명의 잘생긴 손님의 정체에 대해 수군거리다 느긋하게 유랑 중인 돈 많은 귀족이라고 결론 낸 것 같았다. 솔직히 다를 것은 하나 없는 것 같다.
추가로 기간을 연장하고 며칠이 지나자 종업원이 곤란한 표정으로 라엘을 찾았다.
“저, 저어……. 손님을 만나 뵙고 싶다는 분이 계시는데…… 그…….”
“말을 마저 이어 하세요. 잡아먹지 않아요.”
손님이라면 잡아먹혀도 좋을 것 같아요, 하고 넋을 놓고 대답할 뻔한 종업원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분께서 손님의 성함과 외모를 분명히 이야기하긴 하셨습니다만…….”
“다만?”
“내……냄새가…….”
대체 어떤 상태로 왔기에. 궁금증에 라엘은 직접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누가 왔는지는 이미 짐작하고 있긴 했다. 구금되었을 때 라엘은 탈린 남작이 함께 구금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메시지를 전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 사이에 메시지를 전하는 시종은 아마 그것이 암어인 줄도 모르고 전했겠지만. 탈출하는 날 아침에도 차를 가져온 시종에게 남작에게도 차를 가져달라고 명했고, 차의 종류를 지정해 주기까지 했으니 그걸 보고도 탈출하지 못했다면 나중에 구해놓고 주리를 틀어야 할 일이지. 황궁을 탈출한 후 여관에서 쭉 죽치고 있는 것도 그를 기다린 것이었다. 다니엘의 측근쯤이 되려면 그런 상황에서도 알아서 잘 탈출할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지적 라엘 관점을 가진 채로 그는 걸음을 옮겼다.
1층에 도착한 라엘은 도착한 것이 탈린 남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거다. 그를 측근으로 선정하는 것은 다니엘과 그가 함께 의논을 한 것이었으니 충분히 뿌듯해할 법도 하지. 라엘은 미소 지었다. 탈린 남작을 보자 뿌듯함과 함께…… 악취가 밀려들어왔다. 남작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불렀다.
“왔습니다…….”
“저, 정말로 손님께서 아시는 분이 맞나요?”
종업원들은 우아하고 부자인 특실의 손님과 난데없이 나타난 웬 거지(……)가 아는 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종업원의 반응에 슬퍼하며 남작은 그동안의 고충을 악취와 함께 뽐내고 있었고, 솔직히 모르는 척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대체 이게 무슨 냄새야? 하지만 그를 모르는 척하는 것도 여관에서 지낸 열흘이 낭비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어 라엘은 종업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아는 사람 맞아요. 원래 이렇지 않은데 난데없이 고생을 한 것 같네요. 목욕물과 옷을 좀 준비해주겠어요?”
반짝이는 동전은 순식간에 따뜻한 물과 깨끗한 옷을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유로 동전을 받아 든 종업원이 발걸음도 가볍게 조르르 달려갔다. 방으로 목욕물을 올려달라고 부탁한 라엘은 탈린 남작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 도착하자 창문 밖으로 보이는 황궁을 보고 그가 기겁했다.
“대책 없다, 대책 없다, 생각 한번 개성 있게 하신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모르는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적절한 말이군요.”
탈린 남작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옷을 훌훌 벗어던졌다. 그러나 냄새가 빠지기는커녕 추위만 더해질 뿐이었다. 이미 벗어버린 오물투성이 옷을 다시 입을 엄두는 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그를 보고 라엘이 한마디 했다.
“냄새나.”
확인사살이었다.
“저도 눈이 너무 따가워서 눈물이 막 나는군요.”
역시, 재회의 감동의 눈물일 리가 없었다. 여관은 새로 지은 좋은 곳이었지만 모든 욕실에 수도관이나 마법적인 설비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급진 곳은 아니었다. 언제나 뜨거운 물이 준비된 공동욕실이 있었지만 지금 남작이 가는 순간 엄청난 오염원이 될 것이 확실했기에 이대로 뜨거운 물을 올려주기만 기다리는 것이었다.
“대체 탈출을 어떻게 했기에 그래?”
“……이용할 데가 하수구밖에…….”
“그것만으로는 모자란 냄샌데…….”
“몸을 숨기는 것을 음식물쓰레기통 근처에서…….”
서러움이 왈칵 올라오는지 표정이 장난 아니다. 조금 안쓰러워져서 라엘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려다 움찔거리며 손을 피했다. 상처받은 눈이 자신을 노려봤지만 어쩔 것인가. 냄새난다고.
“그래……. 수고했고……. 일단 거기서 좀 서 있자.”
남작은 목욕물이 준비 될 때까지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어야 했다. 어떤 물건에도 악취를 묻히고 싶지 않았기에 굳이 명령했지만, 그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설마 서러움은 아니겠지? 감격인지 눈이 따가워서인지 서러움인지는 아마 그만이 알 것이었다.
남작은 온몸에 찌든 악취를 없애기 위해 목욕물을 다섯 번 갈아치워야 했다. 좀처럼 냄새가 잘 빠지지 않아 마지막에는 향수를 사서 욕조에 한 통을 들이부었다. 아침나절부터 쭉 씻은 보람이 있었는지 그는 저녁식사 때에는 다시 우아하고 향기까지 나는 남작으로 돌아왔다. 종업원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아는 사람 맞나 봐!
간단하게 요기 정도만 하고 하루 종일 벅벅 씻었더니 저녁때 즈음이 되자 장난 아니게 배가 고팠다. 식당으로 내려와 주린 배를 채우려 메뉴판을 훑는데 라엘이 익숙하게 손을 들어 주문했다. 남작은 그가 시키는 저녁식사 메뉴들을 듣고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 들어갑니까?”
“물론. 스트레스에서 해방된 기념이야.”
음. 그건 왠지 엄청 납득되는 이유인데.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놈이 보통 심각하게 미친 것이 아니었지. 라엘을 이해한 남작은 손을 들어 자신의 저녁식사 메뉴를 주문했다. 왠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종업원들의 표정이 왠지 평범한 식사량에 실망한 것 같다는 것은 착각이겠지.
“그나저나 이젠 어쩐답니까?”
“뭘 어쩌긴 어째. 아난으로 가야지. 오, 감사합니다.”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서비스로 내준 크로켓에 라엘의 표정이 밝아졌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고 그 엄청난 양에도 놀라지 않고 주문을 받고 더해서 서비스까지 내주는 것을 보며, 남작은 라엘이 자신을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놀라운 식사량을 뽐냈는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할 일이 많거나 스트레스를 극도로 받으면 식사량이 늘어나는 것을 몇 번 본 적 있으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아난으로 갈 것은 그분이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 개새끼라고 해도 돼. 그렇겠지, 아마.”
“그런데도 그쪽으로 가겠다고요?”
“응. 그래서 열흘 전에 먼저 기사들이 출발했잖아. 열흘 뒤에 출발한 나를 무슨 수로 찾을 건데?”
“그도 그러네요.”
라엘은 황제의 기사들이 가장 먼저 보내질 곳이 아난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들이 길을 샅샅이 뒤지는 동안 뒤에서 여유롭게 이동하는 것을 택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아난까지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이제 페르카나 다른 왕국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지도 모르겠다. 덤덤하게 예상을 말하는데 남작이 되물었다.
“계획은 있습니까?”
“오늘따라 잡소리가 많다, 너.”
넌 부하고 난 주군이야. 닥치고 따라오라며 말하는 라엘에게 남작은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라엘의 이마에 내천 자가 딱 새겨졌다. 이놈이 내가 황궁에서 내숭떠느라 얌전히 있었더니 이제 아예 물로 보네?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남작의 뒤통수의 한 지점을 아프지 않게, 다만 집요하게 계속 때렸다. 정말로 한 지점만을 정확하고 집요하게, 미묘한 강도로 무표정함을 유지하며 계속 두드리자 결국 남작이 먼저 입을 다물었다. 온갖 고생을 했는데 푸대접하자 좀 삐친 것 같았지만 잠시 후 가져오는 저녁식사에 표정이 해맑아진다. 여관 식당의 요리는 맛있었고 그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것이 오랜만이었을 것이다.
라엘이 음식을 주문하는 것을 마치 짐승 보듯 쳐다보던 남작도 결국 2인분의 음식을 더 시켰다. 종업원들은 아주 안심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일행 맞네. 왠지 기분이 나쁜데?
“그런데 그분께서는 왜 그러셨답니까?”
“내 매력이 너무 넘친대.”
“……헐.”
탈린 남작의 반응에 바로 주먹이 날아간다. 매를 번다, 정말로.
같은 시간, 레온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제 손에 잡혔다 생각했던 사랑스러운 이가 자신의 손을 벗어나 날아간 것이 그렇게 화가 났다. 그리 달아날 것이라면 어째서 사랑한다는 말을 하였는지 원망스러웠다. 겨우 잠재웠다 생각한 마음속에 풍랑이 일며 하루에도 수십 번 울분이 치솟아 오른다.
정말로 사랑하기는 했을까? 의문이 솟아올라 가라앉기도 수백 번. 열흘 동안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누르며 고민하던 레온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답은 어렵지 않았다.
라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뢰할 수 있는 명제였으며 그의 성향은 정치가보다 훌륭한 외교가 쪽에 가까웠다. 그는 침묵하거나 돌려 말하더라도 절대로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그러했다. 얄밉게도 상황을 잘 이용하는 사람일지언정 제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라엘의 말대로 정말로 우연찮게 자신은 그의 고백에 기절하듯 잠들었고 그 기회를 그가 놓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가 제 손에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커다란 전제가 하나 있었다. 라엘은 레온하르트를 사랑하더라도 로윈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그대로 했다.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그렇게 완성되는 전제는 ‘라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라엘은 레온을, 레온하르트를 사랑한다!
심장이 쿵쿵 뛰며 얼굴에 피가 몰려 붉어진다. 심장이 환희에 차오르며 혈관 하나하나까지 빛으로 들어찬 것 같다. 등에 날개가 돋아 당장에라도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누군가가 제 심장을 검으로 꿰뚫는다 하여도 기쁨에 퍼덕이는 심장은 피를 철철 흘리더라도 기쁨에 바르작거릴 것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레온의 주변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시립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더욱 당황했다. 그의 표정은 어떻게 보면 기쁨보다는 분노로 보일 수도 있었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입꼬리를 올리는 것은 딱 그쪽에 더 가까웠다. 표정 관리를 따로 해 줄 정도의 여력이 레온에게는 없었다. 그저 기쁨에 몸부림치며 미소를-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분노를- 감출 수 없었을 뿐이었다. 진심으로 기쁘고, 기뻤다.
라엘이 나를 사랑하고 있어!
게다가 그날,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이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첫 번째의 관계에서 둘은 어느 정도 마음이 통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의 감정의 크기가 자신의 것만큼 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그 시점에서 호감 이상의 감정이었을지는 지금으로써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가슴앓이가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환희마저 느껴진다. 레온은 가장 행복한 문장을 다시 외쳤다.
그가 나를 사랑해! 라엘이 나를!
속마음이 어쨌거나 눈으로 보이는 레온은 우아하게 분노하며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짓고 있었다. 아마 그 마음속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순식간에 그 환희에 휩쓸려 사라져버렸을 텐데!
“소식은?”
“황공합니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왕자님의 존재를 비밀로 하고 추적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터라…….”
“그래, 그렇군.”
레온은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역시 나의 라엘이었다. 유능하고 똑똑한 그는 아마도 제 꼬리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가볍게 추적을 피했을 것이다.
그가 달아났을 때 처음에는 확실히 분노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음이 통한 것을 확인했으니 이제 다시 데려와서 제 곁에 두면 될 일이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일단 데려다 놓으면 체념하고 제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달아난다면 잡으면 된다. 어떻게 보면 술래잡기와도 같은 상황이었다.
이미 레온의 머릿속에서는 ‘라엘이 나 잡아봐라~ 하하하’를 외치며 앙증맞게 해변을 뛰어다니는 중이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그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라, 라엘 님……. 그만 드세요! 체해요!!”
벌써 10인분을 돌파한 주문에 탈린 남작이 라엘을 말렸다. 그러나 오늘따라 퀭한 눈으로 라엘은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아냐, 지금 에너지를 많이 충전해둬야 한다는 위기감이 들어. 왜일까?”
왜라고 묻는다면 대답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라엘은 소화 잘되는 고기를 한 접시 더 시키면서도 자꾸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애써 무시했다. 일단 먹는 동안은 생각이 안 나니 먹기는 먹는데…… 이상하다, 정말로 이상해. 이렇게 소름이 돋는 것을 보니 레온이 또 미치도록 느끼한 생각을 하는 거 아냐?
그것은 정답이었고 라엘은 여전히 오한이 드는 등짝을 비비며 식사에 집중했다.
새파란 하늘 위로 흰 구름이 평화롭게 둥둥 흘러간다. 아직은 코끝이 쨍하니 시린 날씨지만 미친 듯이 퍼붓던 눈이 그친 지는 오래였다. 제대로 단단히 굳은 땅을 밟고 구르는 마차는 깔끔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제법 따뜻하여 모포로 차가운 겨울바람을 막으면 제법 견딜 만 한 날씨였다.
여행자는 보기 드물게 좋은 날씨에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보기 드문 따사로운 날씨에 머지않아 다가올 봄을 상상하면 절로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고 친절한 부부의 호의로 짐마차를 얻어 타고 목적지로 향하는 호사까지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은근히 오르막길이 많은 길이라 고생할 것이라 생각했던 여정은 뜻밖의 행운으로 편안해졌다.
“덕분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적적하지 않고 좋네요.”
단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지금 낡은 짐마차의 바로 곁을 어마어마한 속도로 지나가는 기사들이었다. 황제의 기사들은 길 가장자리에서 천천히 달리는 마차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기에 쌩하니 앞으로 달려갔다. 우르르릉. 땅울림 소리가 저만치 멀어졌는데도 무리가 남긴 흔적은 젊은 부부와 여행자를 퍽이나 괴롭게 했다. 드물게 좋은 날씨는 드물게 많은 먼지구름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고 흙먼지에 콜록거리며 기침을 멈추지 못했다. 도시 태생인 그들로서는 흙길에서 이만큼 올라오는 흙먼지가 낯설 것이었다.
여행자는 물통을 꺼내 곁에 앉아있는 남편에게 건넸다. 남편은 물통을 받자마자 마차 뒤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부인에게 먼저 건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을 한두 모금 마시더니 다시 남편에게 건넨다. 그제야 물을 한 모금 마신 남편은 감사인사와 함께 물통을 다시 돌려줬다. 참 보기 좋은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부부는 도시생활을 접고 한적한 시골마을로 이사를 가고 있는 도중이라고 했다. 규칙적으로 돌이 깔린 바닥이 익숙할 그들에게는 봉변이나 다름없던 흙먼지가 겨우 잠잠해진 참이었다. 내심 이래서 시골 생활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고 걱정이 된다. 젊은 부부가 온다면 알아서 잘 챙겨주겠지만 이 상태를 보면 부부에게는 시골의 모든 것들이 괴롭힘일 것이고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짐을 싸들고 다시 도시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뭐, 제 일은 아니니 신경 쓸 것은 아니긴 하다.
남편은 기사들이 지나간 길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황궁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가 싶네요. 오는 동안 기사님들을 열 번도 넘게 본 것 같군요.”
남편의 말에 부인의 어깨가 움츠러든다. 임신 중이라 그렇지 않아도 예민할 텐데 이사 갈 도시 방향으로 향하는 기사들이 불길한 상상을 자극한 것 같았다. 입 밖으로 불안을 내는 것마저도 꺼려지는지 부인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오는 길에 여러 소문들을 듣긴 했어요. 전쟁이 나는 것은 아닌지 다들 걱정인 거죠.”
“아…….”
부인의 낮은 탄식에 여행자는 아차 싶어 말을 돌렸다.
“오, 물론 나쁜 추측일 뿐이니 걱정 마세요, 부인. 사람들은 상상력을 부풀려 가장 나쁜 방향으로 이야기를 퍼뜨리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역시 그런 거겠죠? 하하.”
두 남자는 불안해하는 부인을 위해 화제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새로운 화제는 부부가 이사 가는 시골 마을에 대한 것이었다.
“좋은 마을이에요.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지요. 아마 적응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을 겁니다.”
“여행자님께서는 꼭 그곳에 가보신 것처럼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한 번 들른 적이 있지요.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했어요. 물론 가을걷이가 막 끝난 기간이라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요.”
“다행이군요. 연고가 없는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라 많이 걱정했습니다.”
“요즘 분들이라 그러신가요. 여행자인 저보다도 더 큰 모험을 찾아가시네요.”
“아무래도 아이를 도시에서만 키우는 것이 정말로 좋은 것일까 고민이 되어놔서요. 적어도 어렸을 때만이라도 흙을 만지게 해주고 싶었다고나 할지. 우리 부부는 둘 다 도시 출신이라 그런 것에 환상이 있답니다.”
“고생은 좀 하실 겁니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생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부인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남편의 멀끔한 얼굴을 보면 정말로 시골 생활을 잘 해낼지 걱정이 된다. 그래도 본인이 각오하고 있다고 말한 데다 오랜 고민 끝에 여러 가지로 알아보고 결정한 일이라고 하니 우연히 만난 자신이 말리는 것도 오지랖이라 그냥 웃고 말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왠지 이 부부라면 잘해 나갈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 이유에서이기도 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임신이라니……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종전에 지나간 기사들을 의식해서 말하자 남편이 시익 웃었다.
“아주 건강하고 강한 아이가 태어나려고 그러나 봅니다.”
낙천적인 대답을 하는 그를 보면 정말로 그렇겠구나, 하며 납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행자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싹 가시는 것 같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솔직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더랬다. 그러나 그 불안은 이미 상당히 옅어졌다.
역시 제국에 전쟁 따위가 일어날 리가 없었다. 대륙 역사상 가장 현명하고 유능한 황제가 재위 중인 이 평화로운 시기에 그런 무서운 일이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 이 젊은 부부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이 시기에? 그러기에는 이 부부는 행운의 여신의 축복을 받으며 살아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이다.
여행자는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목적지에서 젊은 부부와 헤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행자에게 부부에 대한 기억은 꽤 오랫동안 즐거운 것으로 남아있었다.
“……왜 제가 여장입니까?”
“억울하면 지금 당장 키를 키워 오시지?”
“얼굴로 합니다. 예쁜 걸로 치면 라엘 님께서 더 예쁘시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난 예쁘다기보다는 너무 잘생겨서 여장을 하면 오히려 튀어. 감춰지지 않는 미모니까 차라리 도시 남자 쪽이 더 어울리지.”
“워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라엘에게 탈린 남작은 더 이상 토를 달 수 없었다.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통하지도 않을 것이고 괜히 긁어 부스럼이라고 더한 것을 시킬지도 모르니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하다. 괜히 펑퍼짐하게 퍼지는 치마를 구깃구깃하게 쥐었을 뿐이다. 아직도 자신의 사이즈에 맞춰 여자 옷을 사달라고 할 때 여관 종업원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여자셨어요?’ 수치스럽다.
라엘은 다시 말을 몰기 시작했고 낡은 짐마차는 천천히 아난을 향해 움직였다.
라엘과 남작이 아난 왕성 앞에 도착했을 때는 땅거미가 짙게 드리우는 무렵이었다. 정갈하게 정리된 거리가 붉게 물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내들과 저녁거리를 사러 밖으로 나온 여자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난의 왕궁은 백성들이 이용하는 시장의 바로 앞에 있었고 그 거리가 멀지도 않았다. 다른 나라들과 비교하면 꽤 특이한 정경이었지만 왠지 친근감이 있었다. 시장 너머로 왕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해자가 보였지만 당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이전 마을에서 낡은 마차와 짐을 처분하고 나서야 드디어 남작도 다시 바지를 걸칠 수 있었다. 치마를 입는 내내 투덜거리던 그는 벗는 순간 굉장히 기뻐하며 다시는 치마를 입고 싶지 않다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사실 꽤 완벽한 여장이라고 생각했기에 라엘은 나중에 한 번쯤은 또 치마를 입혀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심술궂은 마음이 올라왔지만 일단은 눌러놓았다. 몇 남지 않은 우수한 측근을 잃을 수는 없었다. 그가 도망가는 것도 잃는 것에 해당될 테니까.
“바로 들어가실 겁니까?”
“저기도 밥은 먹어야지.”
자신의 등장과 함께 어떤 형태로든 난리가 날 궁을 생각한 라엘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시장 한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따로 저녁을 먹고 한숨 잔 후 폴시스란을 찾아갈 예정이었다. 남작은 라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뒤를 따라오다가 도착한 곳을 보고 기겁했다.
“무, 무너질 것 같아요! 여긴 어딥니까?”
“……식당인데.”
“히익!”
이게 왜? 라엘은 식당을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남작을 돌아보았다. 아무 문제없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한참 고민한 라엘은 그제야 아, 하고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자신은 용병으로서의 신분도 있었기에 식당의 외형이 어떻건 간에 밥만 맛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도 익숙한 일이긴 했다. 왠지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맛집일 것 같은 그것.
그러나 남작은 평범한 귀족이었고 이런 곳에는 올 일 자체가 없다 보니 그런 사고가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남작의 입장에서 보면 곧 무너질 것 같고 불결하기 그지없는 곳이었기에 그는 입을 쩍 벌리며 안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작고 허름하지만 그래도 유난히 음식이 맛있던 식당인데……. 잠시 고민하던 라엘이 말했다.
“폴이랑 같이 오던 데야.”
“……폴이라면…….”
“저기 사는 놈.”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아난의 왕국이 있었다. 남작은 희게 질린 얼굴로 제 발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두 왕국의 왕자님들이 찾는 곳이라고 하는데 일개 귀족나부랭이가 어떻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네? 근데 정말로 취향 한번 독특하시네요! 두 분 다!! 그렇게 불만이 가득하던 남작의 얼굴은 약 30분 후 활짝 펴졌다.
“훌륭하군요!”
“참. 네가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
접시에 코를 박을 기세로 음식을 흡입하던 남작이 고개를 번쩍 들고 되물었다.
“뭐라고 하셨어요?”
“네가 참 대단하다고.”
씩 웃으며 파이를 입 안으로 욱여넣는 남작을 보며 라엘도 싱긋 웃었다. 맛있게 먹으라며 파이를 입에 꾹꾹 눌러 밀어 넣어주는 친절까지 보여줬다. 욱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숨 막히는 표정도 아마도 착각일 것이다. 그래그래. 너무 맛있으면 가끔 그래.
“아난과 동맹을 맺던 중에 갑자기 종적을 감춘 상황이 됐군요.”
“그렇지.”
“과연 도와주려 할까요?”
라엘의 고민도 그것이었다. 당당하게 아난으로 향한 그였지만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동맹은 이미 몇 달 전 이야기가 나왔을 때 진행이 되었어야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라엘은 그달 내로 아난에 도착을 했어야 하는 약속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연락이라도 했어야 했지만 미친 황제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두 자작은 여전히 외부에 있었지만 라엘의 상황을 외부에 함부로 알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황궁에 머무는 것은 비공식적인 일이었으며 라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고민하던 그들은 자신들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라엘은 아무 곳에도 연락하지 못했고 다른 왕국들에게는 모든 준비를 해 놓은 그 상황에서 갑자기 잠적, 혹은 도망간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었다.
“아아아아, 그놈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셔도 그러시면, 아주 좋습니다. 더 하세요!”
“미친 사자새끼!!! 으아악!!!”
추임새까지 넣으며 박수를 치는 탈린 남작의 옆에서 라엘은 레온의 욕을 무더기로 했다. 방음이 잘되는 여관은 아니었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님 욕도 한다는데 아난에서 제국의 황제를 욕하는 게 뭐 어떻겠냐 싶었다.
치밀하게 준비해 둔 모든 기반을 와장창 무너뜨린 레온에 대한 화가 다시 격하게 치밀어 올랐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아니, 도와주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도와주는 것이 부담스럽고 미안하기까지 했는데, 그렇다고 그게 훼방을 놓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거든! 버럭 화를 내며 테이블을 던지려는 것을 남작이 말렸다. 기물 파손은 안 돼요! 남작의 말에 라엘은 간신히 정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후, 일단 부딪쳐 봐야지. 하지만 확실히 아난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예상이 잘 되지는 않아.”
“하지만 다른 방법도 없으니까요.”
“그렇지.”
아난이 자신을 환영할 것인지는 직접 확인하지 않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지금까지 추진해 온 일은 모두 신뢰로 이룬 것들이었다. 자신의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 말을 하는 것은 구질구질하기도 했고, 솔직히 곤란한 내용이기도 했다. 제국의 황제가 날 사랑해서 감금당했어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보냐! 변명도 납득이 갈만한 거짓말도 할 수 없는 짜증나는 일이었다. 다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누르며 라엘은 남작에게 말했다.
“내일 궁에는 혼자 갈 거니까, 방을 지키고 있어. 잘 풀리면 안으로 부를 테니까.”
“만약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죠?”
“안 도와주면 말고.”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큰 미련을 가지고 있는 일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이 그렇게 절실했다면 사실 레온의 손을 잡았으면 이미 끝났을 일이었다. 그가 덜 미쳐있을 때 제국의 도움을 순순히 받았더라면 아마 로윈을 되찾는 것은 순식간에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엘은 스스로의 힘으로 왕좌를 찾는 과정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그렇다고 오로지 홀로 진행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로렌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으므로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을 본 것이 왕국들을 연합하여 그들에게 빚을 지는 것이었다. 정당성 있는 이야기고 모양새도 보기 좋았으니 그리 결정했는데 괜히 일이 꼬여버렸다. 내일 아난의 왕자를 만난 후에 동맹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그렇다고 절망적인 상황도 아니었다. 혼자하면 시간이 더 걸릴 뿐이다. 다니엘이 가지고 있던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용병단도 정보단도 그중 하나였다. 그것을 물 위로 드러낼 때의 득과 실을 생각하고 나중을 위해 안배해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아껴서 똥 되느니 패를 꺼내야 할 때가 온다면 내미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
“솔직히 아쉽긴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정 안 되면 혼자 하지 뭐.”
라엘의 즉답에 남작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의 즉흥적인 행보에 적응이 된 것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제 주군을 신뢰하고 있었다. 큰일이 꼬이긴 했지만 그건 황제라는 예측불허의 또라이 같은 걸림돌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라엘의 책임이라고 보기에는 아니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라엘은 별다른 문제없이 일을 잘 진행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잘될 결정을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역시 패기가 대단하시네요.”
“그래서 날 못 믿어?”
“그럴 리가 있나요. 그냥 좀 길어질까 봐 그러는 거죠.”
“그건 정말로 어쩔 수 없지.”
탈린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궁에는 라엘이 혼자 들어가기로 했고 남작은 여관에서 대기하는 것으로. 아난에서 만에 하나 위험한 상황이 생긴다고 해도 차라리 제 주군이 탈출을 더 잘할 것이다. 자신은 힘없는 문관이고 체력이-최근에는 반강제로 붙었지만- 훌륭하지 못한 편이었으니 차라리 바깥에 있는 것이 나았다.
이야기가 정리되자 남작은 지저분한 방에 대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바퀴벌레 나올 것 같아요. 닥쳐. 긴장은 그들에게는 역시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오오, 다니엘!! 내 친우여!!”
“헉……!”
자신을 향해 두 팔 벌려 달려오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오자 주먹을 내지른 것은 라엘의 잘못이 아니었다. 까무잡잡하고 매끈하게 잘생긴 얼굴이 그대로 뒤로 쓰러지는 것을 보고 아차 싶었지만 바닥을 내려다보기도 전에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더 놀랐다. 어찌나 빠르게 일어났는지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까지 그가 넘어졌던 것이 ‘착각인가?’하고 눈을 비빌 정도였던 것이다. 색이 빨개진 턱은 감출 수가 없어 역시 미안하긴 했지만 다시 그 상황이 되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대신 너무 티가 나지 않게 발로 차는 정도로만. 세상에 다 큰 남자가 두 팔을 벌리며 달려오는데 누가 그대로 안기냔 말이지. 역시 폴시스란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공격성을 끌어올리는 재주가 있는 친구였다.
“하하, 다니엘은 여전한걸!”
“마찬가지야. 그런데 턱 안 아파?”
“익숙한 일이지!”
“그게 익숙한 게 문제라는 생각은 안 드는 건가?”
“세상에는 여러 형태의 삶이라는 것이 있고-.”
호쾌하게 웃으며 다시 달려드는 그를 다시 피했다. 불시의 기습이 통하지 않은 것이 아쉬운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 순간 다니엘이 조금 가여워졌다. 어쩜 주변에 이렇게 멀쩡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인지…….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할 법한 그까지 이런 상태라니 아니, 이 세계의 왕족이고 황족들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씩 빠져야 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래도 나라들이 잘 돌아가는 것을 보면 나사 하나 정도는 빠져도 괜찮은 거 아닌가 하고 고민되는 것이다. 워커홀릭처럼 일에만 빠져있던 다니엘이 다시 또 안쓰러워진다. 이렇게 날로 먹는 사람들도 있는데…….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의 말이 진심임은 충분히 알았기에 라엘은 미소 지었다. 아난의 유일한 왕자이자 후계자인 폴시스란은 끔찍한 표현을 하긴 했지만 그를 굉장히 반겨주었다.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그리하기 쉽지도 않을 텐데도 한결같은 모습이 고마웠다.
로윈과 아난은 인접에 위치한 데다 사이가 좋아 수교가 잦은 왕국이었다. 덕분에 다니엘과 폴시스란은 어렸을 때부터 친분을 쌓아왔고 그의 몇 안 되는 친구로 남을 정도의 우정은 키울 수 있었다.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특수한 위치에 있다 보니 그도 다니엘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어려움이 생기자 바로 아난을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아마 다니엘이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폴시스란은 다니엘의 몇 없는 인간다움 중 하나였으니까.
이전에 서한을 보냈을 때도 아난은 정말 당연하다는 듯 로윈의 다니엘을 지지해주었다. 그리고 지금에도 그랬다.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도 그는 정치적인 면보다는 제 친우가 사라진 것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던 것이리라. 다시 만난 지금 그 표현을 여실히 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그대로 받아주기에는 역시 어깨가 부르르 떨린다. 아니, 이건 아니야. 라엘은 다섯 번째 빈틈을 노려 자신에게 달려드는 폴시스란을 피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고마우니까 이제 그만 좀 해!”
“내 넘치는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거라고!”
“마음으로만 해, 마음으로만!”
여전히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를 보며 라엘은 기겁했다. 그가 진정한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였다. 정말로 이 동네 왕자들은 다 이상해! 다니엘은 당연히 포함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일이야?”
“사실 내가 웬 미친놈에게 쫓기고 있어.”
“오, 그래서 연락이 두절됐던 거군?”
“그래.”
“아직도 쫓기는 중이야?”
“아쉽지만 그래.”
“그렇다면 비밀스러운 것이 좋겠지.”
폴시스란은 라엘을 자신의 궁으로 데려갔다. 그의 명령에 따라 라엘의 방문은 비공식적인 것으로 바뀌었고 그를 목격한 시종들은 단단히 입단속을 명령받았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그 미친놈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 것이 영 찝찝하다. 티라도 난 것인지 폴시스란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미친놈이 아니더라도 지금 대륙에서 너를 찾는 사람만 해도 엄청나게 많아. 다 모으면 영지 두어 개쯤은 만들 수 있을걸? 특히 로윈에서는 널 찾는 사람들의 눈에서 나오는 안광 때문에 밤이 훤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
“우울하네.”
“좋게 생각해. 인기가 있는 거라고.”
“그딴 인기 별로 바라지 않아.”
요 근래에는 원치 않는 인기를 너무 많이 받고 있는 것 같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투덜거리며 대답했지만 납득 가는 답변이었다. 솔직히 지금 제 뒤를 뒤쫓고 있는 기사들만 해도 웬만한 왕국 한두 개는 수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병력이 아니었던가. 자신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로윈의 반역자들도 알 수 있을 즈음이 되었으므로 그곳에 인원을 더하면, 역시 우울하다…….
폴시스란의 안내로 도착한 궁은 여전히 취향에 맞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더 특별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전히 악취미야.”
“내 궁을 내 취향대로 꾸미겠다는데 뭐! 제국식, 얼마나 좋아!”
이걸 보고 있으면 미친놈 하나가 생각나서 그런다, 왜?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씹어 삼키며 라엘은 한숨이나마 푹 내쉬었다.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폴시스란은 라엘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게 좀 적응되면 그렇게 멋있다니까.”
위로가 아니라 자랑이었나 보다.
“난 볼 때마다 우울해지는 것 같다.”
“혹시…… 정말로 전에 황제가 방문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그 소문 자체가.”
“하하, 걱정 마! 그냥 흥밋거리일 뿐이잖아.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 되었습니다. 하지 못하는 말이 금세 쌓여가며 라엘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지난날 레온이 거의 두 달을 로윈에서 머물렀던 것은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게다가 그가 떠난 후 엄청난 경제적 이득이 약속된 여러 가지 편의를 받았으니 말이 많아지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불쾌한 소문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고 그마저도 감내할만한 대가라 생각하여 다니엘이 결정한 것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 곁에 이런 불유쾌한 소문이 따라다니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난 네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사막에서 우물 백 개는 맨손으로 팔 능력이 있는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걱정 마. 능력 없는 것들의 질투일 뿐이야.”
떠도는 소문은 믿지 않는다고 일축한 그는 웃어 보였다.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그에게 고마웠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것이 자신이 아닌 다니엘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다니엘의 흔적에 닿을 때마다 다시 올라오는 자조적인 생각은 그의 죽음 이후 생긴 못된 버릇이었다. 아무래도 무리해서 아난으로 오는 일정이 피곤하긴 했던 것 같다.
폴시스란이 안내해 준 방은 해가 잘 들고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척 보아도 아끼는 방이었기에 감사함을 느끼려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이 제국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황궁에서 자신이 갇혀있던 방을 연상시키기는 그 방은 절로 사람을 울적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 울적보다는 울컥일지도 모르겠다. 씹어 먹고 싶다. 제국식을 좋아하는 폴시스란의 취향을 생각하면 어쩔 수도 없는 일이긴 했다.
“그래, 그래서 지금까지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방에 단둘만 남게 되자 폴시스란이 라엘에게 물었다. 곤란한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더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오늘따라 한숨이 정말로 깊고 많았다. 땅이라도 패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세히 말하기는 곤란하지만 마지막 연락 직후 구금당했어.”
“하- 천하의 너를? 엄청 대단한데!”
“……감탄할 때냐…….”
그 대단한 미친놈 때문에 낭비한 시간이며 인력이며 금전은 대체 어쩌려고……. 그뿐이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와장창 깨진 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였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뢰를 다시 쌓기 위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했으며 진실이 아니더라도 모두가 납득할만한 이유도 다시 만들어내야 했다.
로윈을 되찾기 위한 왕국연합은 오직 다니엘에 대한 신뢰가 기반된 것이었다. 레온이 치즈처럼 한입 크게 베어 먹은 것은 그런 것이었다. 아, 진짜 짜증나네. 그리한다 해서 완전히 사라질 정도로 얄팍한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니엘의 이름에 조금이라도 흠이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아, 역시 미워죽겠다. 뒤통수 한 대 거하게 쳐주고 싶다. 그 예쁜 얼굴에다 뽀뽀라도 해주다가 뒤통수를 콱……. 아, 이런 미친.
자연스럽게 이어진 생각에 라엘은 머리를 감쌌다. 자신도 똑같은 수준의 미친놈이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라엘이 생각에 잠긴 사이 천천히 방 안을 걷던 폴시스란은 문을 살짝 열더니 시종을 불렀다. 잠시 후 다과가 잔뜩 담긴 접시를 받아 손수 테이블까지 옮기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웬일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지? 폴시스란은 참으로 상큼하게 웃었다.
“고민이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단것을 먹으면 좋은 방법이 생각이 날 거야. 쉬엄쉬엄 생각해. 시간은 모자라지 않으니까.”
“고마워.”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네 감사인사를 다 듣고.”
고작 스물다섯 해를 산 청년의 말치고는 늙은이 티가 났지만 라엘은 별말 없이 순순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감사인사를 하며 웃는 자신에게 내심 놀랐다. 이렇게 평범하게 웃었던 것이 대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다니엘의 죽음 이후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억눌려 있었고, 황궁에서는…… 그 젠장맞을 상황에서는 조울증이라고 걸린 것처럼 기분이 오락가락했었다. 특히 마지막에는 거의 광기를 담아 웃고 나왔으니 아무래도 정상적인 웃음으로 세기에는 어렵다.
아아, 이건 전부 레온의 탓이다. 보통의 평범한 남자였던 자신을 이렇게 바꾸었던 그 나쁜 놈……. 그리고 뒤이어 밀려오는 생각에 라엘은 눈을 부릅떴다. 순간 들었던 생각에 진짜로 독한 놈이라며, 아직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그에게 실컷 욕을 했다. 중얼거리며 라엘은 코를 확 찡그렸다. 당장 쫓아가서 입술로 패주고 싶다는 생각은 확실히 미친 거지. 일단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냥 아무 생각 안 해야지.
손수 다과를 세팅하고 차를 따르는 폴시스란을 잠시 등지고 라엘은 천천히 방을 둘러봤다. 역시 꽤 좋은 방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 것 같아 희미하게 미소가 떠오른다.
폴시스란은 라엘에게도 친구처럼 익숙한 사람이었다. 다니엘은 심지어 아난의 방문마저도 라엘에게 떠넘기곤 했었다. 보통 친구가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아왔던 가장 친한 친구인 아난의 왕자를 속여야 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웠었다. 그것도 햇수를 더하자 아예 자신감이 붙었지만. 폴시스란은 자신이 다니엘이 아니란 것을 알아챌 정도로 눈썰미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치면 왕도 로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건 완벽해도 너무 완벽한 것 아닌가. 자신이 완벽한 것인지 주변이 죄다 둔치인 것인지 이쯤 되면 모르겠다.
아난의 성에 익숙한 라엘이었지만 왕자 궁에 숙소가 마련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귀한 손님이 올 때 으레 사용하는 궁에 숙소가 마련되었으니 이번은 비공식적으로 방문한 라엘을 위한 그의 배려였을 것이다.
왕자 궁은 아난의 고유 양식이 돋보이는 다른 궁들과는 다르게 온전히 제국 식으로 지어진 곳이었다. 주인의 취향이 담뿍 담긴 궁은 제국의 대신들마저도 완벽하다 할 정도로 제국 식이었으며 아름다운 궁이었다. 이렇게 궁을 차분히 본 것은 처음이라 라엘도 이리저리 둘러보다 역시 황궁과 비슷한 방은 기분이 묘해져서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차라리 다니엘처럼 밖에서 몰래 만나자고 할 걸 그랬나? 두 왕자가 시장의 여관에서 만났던 것을 기억하며-둘 다 미쳤다고 욕했다- 라엘은 조금 후회했다. 테이블로 돌아온 그는 다과를 보고 인상을 썼다. 엉망진창으로 대충 놓인 것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부터 열까지 몽땅 단것들이었다.
“요즘 아난에서는 상대를 당뇨에 걸리게 하는 방식으로 암살을 시도하나 보지?”
“굉장히 세련된 방법이잖아?”
“퍽이나.”
라엘의 빈정거림에도 그는 웃으며 다과를 권했다. 위로의 시간은 지냈으니 이제는 놀리는 데만 집중하기로 한 것 같다. 친구라고는 다 이딴 식이니 다니엘도 인생을 얼마나 대충 살았는지 알 법도 하다. 잠시 하늘의 다니엘에게 투덜거린 후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어쨌거나 호의로 준비해 준 것들이라 뭐라도 하나 집어 먹으려 이것저것을 살폈지만, 뭘 보더라도 눈썹이 절로 움찔거렸다. 벌써부터 혀에 단맛이 고이고 두통이 일었다.
그러나 폴시스란 혼자만 신나게 다과를 집어 먹는 것을 보니 또 오기가 생겨 결국 가장 덜 달아 보이는 것 하나를 집어 들고 입 안으로 넣었다. 이딴 과자 때문에 무시당할 수는 없지. 그리고 순식간에 엄습하는 현기증에 라엘은 휘청거렸다.
욱, 하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는 라엘을 보며 그는 음산하게 웃었다.
“……후후, 슬슬 효과가 오는가 보군.”
“……크윽, 너…….”
“의외야. 그런 무력해 보이는 표정도 보기 좋은데, 다니엘?”
“어, 어째서…….”
라엘의 손이 테이블에서 미끄러져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간신히 몸을 일으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목을 감싸고 색색 밭은 숨을 내쉬는 라엘을 보며 폴시스란은 탁자에 팔꿈치까지 기대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원하는 것을 달성한 자의 표정. 비열하고도 저열한 그 표정에 겨우 현기증을 눌러냈다. 턱턱 막히는 숨을 겨우 수습하며 라엘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다니엘? 유언 정도는 들어주지.”
비릿한 미소까지 지으며 그는 라엘을 깔보았다. 억울하고 원통했다.
“……설탕을 포대로 부었어…….”
“우후후후후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제일 덜 달아 보이는 것을 집었는데! 절망하며 설탕덩어리를 저주하는 라엘을 보며 그는 지옥에서 갓 태어난 악마 같은 웃음소리를 만들어냈다. 라엘의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진 눈동자마저도 즐거운 듯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었어. 내가 과자들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이유를 이제 알겠지?”
“……크흑…….”
“내가 과자를 먹는다면 너도 자연스럽게 과자를 먹을 수밖에 없게 될 테고, 그럼 그중에서 가장 덜 달아 보이는 것을 고르겠지. 그리고 그것이 사실은……. 컥……!”
말을 다 잇지 못하고 폴시스란이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테이블이 크게 흔들리며 엎어진 찻잔 너머로 황금빛 차가 바닥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라엘이 웃을 차례였다.
“계획은 좋았지만, 후후…… 내 무덤을 팔 때 네 무덤도 함께 판 모양이군…….”
“……조금만. 더 있으면 되는……. 헉…….”
그가 괴롭게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이래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설탕의 단맛을 견디지 못하는 것은 두 왕자의 공통된 부분이었다. 사람을 엿 먹이겠다고 스스로 엿을 처먹는 그를 보면 역시 다니엘의 친구구나 싶다. 아주 꼭 닮았다.
얼얼하게 입 안에 단맛이 가득한 것이 좀 가시고 나서야 라엘은 눈에 보이는 차를 들이켰다. 다행히도 차는 달지 않았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건지 미처 생각을 하지 못한 건지. 장난이 과하다 생각하며 라엘은 눈앞에 엎어져 끙끙대는 그를 비웃었다. 잘 먹지도 못하는 단것을 그렇게 먹었으니 지금 두통이 장난이 아닐 것이다. 회생불능 상태로 끙끙대는 그였지만 라엘이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는 제대로 들렸는지 어깨가 움찔거렸다.
라엘은 폴시스란을 버려두고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이제는 제법 날카로움이 덜어져서인지 바람은 그저 시원하고 상쾌했다. 고개를 돌려 아직도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대화는 언제쯤 가능할 것 같아?”
“한 시간 정도는 무리이지 않을까……. 욱…….”
“그럼 나 혼자 놀아야겠네, 뭐.”
라엘은 천천히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터운 이불은 쓰기가 힘들 것 같아 아래로 치워놓고 침대를 덮어둔 시트를 벗겨 창가로 끌고 갔다. 커튼은 하늘하늘한 종류의 것으로 꽤 쓸 만한 것 같아서 떼어냈다. 테이블과 한 몸이 되어있는 폴시스란이 의뭉스럽게 그를 쳐다봤지만 어깨만 한 번 으쓱였을 뿐 그는 할 일에 집중했다. 그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비싼 비단과 레이스의 천이 부둣가 싸구려 밧줄처럼 만들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쯤 되자 도저히 그냥 볼 수는 없었는지 폴시스란이 말을 걸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잠깐만, 집중해야 할 시간이야.”
느긋하게 대답한 라엘은 테라스의 난간에 꼼꼼하게 밧줄의 한쪽을 매기 시작했다. 당겨보니 단단하고 튼튼하게 잘 묶였다. 만족한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는 라엘을 보며 테이블에 엎어진 왕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알게 해주기 위해 라엘은 묶이지 않은 끝을 정원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빙긋 웃어줬다. 테라스 너머로 뛰어들기 직전에! 주워 먹으라고 티를 다 내줬으니 우정에 답할 시간이었다.
“야- 야아!! 멈춰!!”
“하하하하!! 배신자!! 황제한테 날 팔아먹으려고!!”
“솔직히 그건 불가항력……!!”
폴시스란이 비틀거리며 테라스 난간에 매달릴 때쯤에는 라엘은 정원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렸다. 등 뒤로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널 숨겨주면 전쟁이라고 했어!! 동맹국들은 다 털었어! 미안하다, 사랑한다!”
“닥쳐!”
“페르카도 안전하지 않아아아!! 어디로 가도 같을 거야!!”
바람에 쓸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결국 한마디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엘은 유난히도 낮은 담장을 넘으며 레온을 어마어마하게 속으로 물어뜯었다.
이 인간이 진짜!!
마치 귓전에 레온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잘 해줄 테니까 돌아와」
엿이나 먹으라고 답해주고 싶었다.
황제가 아난의 궁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이미 왕자 궁에는 다니엘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을 시간이었다. 아침에 그를 보낸 폴시스란은 두통을 누르며 뒤처리를 하고 시종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했다. 이미 서로 눈을 의식하여 대화를 했기에 위험한 대화는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다. 다니엘에게 위험을 알리기 위해서라지만 엄청나게 단 과자들을 먹은 덕분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또 사용하기는 무리인 방법인 것을 단단히 깨달았다. 침대 위를 기어 다니던 폴시스란은 황제의 내방 소식을 듣고 그를 마중하기 위해 일어나야 했다.
본궁으로 그를 맞이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황제는 왕자 궁을 향하고 있었다. 흰 사자 털 망토를 두른 그는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걸음으로 궁으로 들어왔다. 여전히 천상에서 내려온 전사와도 같은 아름답고도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다니엘은 질색했지만 폴시스란은 그 이면을 볼 기회가 없었기에 순수하게 탄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지난 방문에서 황제는 무언가에 쫓기듯 볼일만 본 후 빠르게 아난을 떠났고 배웅할 때 외에 그를 이렇게 가까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제국 마니아인 그에게는 마치 우상과도 같은 황제였다.
“고귀하신 분께서 제 궁을 방문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아직도 단맛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까무잡잡한 얼굴은 약간 수척해져서 안쓰럽다. 그러나 레온에게 그것은 고려할 상황조차 아니었다. 그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다니엘 왕자는 어디에 있지?”
“어떻게 눈치 챈 것인지……. 도착하자마자 바로 달아났습니다. 잡아보려고는 했지만 워낙 발이 빠른 이라서……. 서신은 그가 도주하자마자 보낸 것입니다.”
제대로 된 인사는커녕 대뜸 다니엘을 찾는 황제에게 폴시스란은 고분고분 답했다. 그의 잘생긴 미간에 바로 주름이 잡혔다. 의심을 감추지 않고 그를 위아래로 훑는 그의 눈을 마주한 폴시스란은 조금 전 천상의 전사 같다고 했던 생각을 취소했다. 천상의 전사는 무슨, 그냥 자신을 발라먹어버릴 마왕 같았다. 그것도 지하 갱저에서 올라와 유황불과 함께 시뻘건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고 있는 마왕!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살기까지 느껴지는 시선에 그는 애써 웃으며 황제를 궁 안으로 안내했다.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차라리 보여줘 버리는 것이 편할 것 같다.
잠시 후 황제는 테라스에 아직도 펄럭이고 있는 커튼, 시트로 만들어진 밧줄을 확인하고 그대로 정원을 노려봤다. 마치 그 시선 끝에 다니엘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그 시선은 폴시스란을 향한 것과는 확실히 다른 감정을 내비치고 있는 것이었다.
“어째서 다니엘을 쫓으시는 것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황제가 기분 나빠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폴시스란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레온하르트의 추포령이 내린 후 찾아온 다니엘이었기에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상황을 제대로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없었고 보는 눈도 신경 쓰였다. 부러 티를 내며 그가 탈출할 것을 종용하였고 황제에게 그의 도착소식을 알린 그였지만 그것은 아난의 안위를 위한 것일 뿐 다니엘이 황제의 눈 밖에 날만한 큰일을 했다고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로윈을 빼앗긴 그였지만 그것은 불행한 일이었을 뿐 다니엘이 그것을 수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재능 넘치고 똑똑한 제 친우, 다니엘은 그런 평가를 받을만한 남자였다. 그는 바보 같이 황제의 심사를 거스를 일을 만들 이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째서 황제가 저런 표정으로 다니엘을 찾아다니는 것인지 예상하는 것도 힘들었다. 추포령이 은밀히, 왕족들에게만 전해진 것을 보면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치 그의 공식적인 위치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듯이.
황제의 추포령을 받았음에도 필사적으로 다니엘에게 신호를 준 이유는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달아났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폴시스란의 물음에 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선뜩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에서 빛이 번쩍 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끔찍할 정도로 두려운 침묵만이 테라스에 머물렀다. 잠시 그렇게 그를 바라보던 황제는 아주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나?”
고개를 저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도 없었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를 알면 안 될 것 같았다. 다니엘도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자세한 이야기를 삼간 것일 테지.
“그저 일상적인 이야기뿐이었습니다. 그가 빠르게 눈치 채고 달아났기에…….”
“그래. 굳이 그 이유를 그대가 알 필요는 없는 것이지.”
레온은 웃으며 답했다. 폴시스란은 그의 미소가 마치 이를 드러낸 짐승 같다고 생각했다.
서둘러 궁을 빠져나온 라엘은 여관을 향해 내달렸다. 레온이 지척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하다.
왕자 궁으로 안내할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폴시스란은 평소 하지 않던 행동들을 모조리 골라하며 라엘에게 위험을 알렸다.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제국 식으로 지어진 왕자 궁. 평소에는 먹지 않는 다과. 손님방에서 유난히도 오래 머무르던 그.
그는 순순히 자신을 보내줬다. 아마도 빨리 아난을 떠나라는 것일 테다. 그렇게 보낸 것을 보면 아마 자신이 도착하는 순간 레온에게 자신의 소식은 이미 닿았을 것이다. 아무리 왕자 같지 않은 주책없는 친구라지만 그도 왕자였고 개인감정으로 아난을 위험하게 만들 수는 없었을 테니.
나아아아아쁜놈! 그러나 분명히 자신의 소식을 팔았을 그를 욕할 수만은 없었다. 만약 그와 같은 상황이 되었다면 다니엘도 자신이던 똑같이, 아니 더 악랄하게 그의 소식을 팔아넘겼을 것이다. 그의 난처한 입장을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라엘은 욕을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했다. 그에게는 아난이 가장 중요했고 라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라엘 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다행히 폴이 알려줘서, 응? 언제 왔어?”
“여관에는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탈린 남작 옆에 아주 자연스럽게 있는 페르제 자작을 보고 라엘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놀랐다. 상황이 이리된 이후에 제대로 연락하지 못했던 자작들이었기에 이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도피생활 중에도 알아서 잘 지내고 있었는지 이쪽은 얼굴이며 옷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다. 냄새를 묻히고 온 누구와는 딴판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라엘 님과 소식이 끊긴 후 쭉 아난에 있었습니다.”
페르제 자작은 라엘과 소식이 끊긴 이후 바로 아난으로 향했다고 했다. 로윈 탈환 혹은 현재 발생한 어떤 일을 해결하든 그가 향할 곳은 아난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난은 가장 큰 패 중 하나였고 이곳의 왕자는 믿을만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페르제 자작은 그 길로 아난으로 와 몸을 숨기며 라엘을 기다렸다고 한다. 현명한 판단으로 안전하게 몸을 숨기고 있던 자작은 그 와중에도 정보를 수집했고, 덕분에 라엘은 왕국들에 황제의 이름으로 다니엘의 추포령이 내려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개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연통을 중간에 가로챈 것이라 완전하지는 않습니다만 라엘 님께서 손을 쓰시면 쉽게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아아……. 황제 정도가 되면 미쳐도 대륙급으로 미치는구나.”
탄식하자 두 남자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침울한 분위기가 슬프다.
“……정말로 송구스러운 질문입니다만. 저희…… 언제쯤 로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조금 시간이 길어지겠네.”
“못한다는 뜻은 아니군요.”
“못할 리가 없잖아.”
속으로 레온의 욕을 바가지로 하던 라엘은 질문에 답하며 웃었다. 다니엘의 근자감이 옮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설마 했지만 이 상황이 사실이 된 이상 왕국을 연합하는 방법은 써먹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방법은 아직 많았다. 그것을 짊어지고 있는 자신은 아직도 놀랍도록 튼튼했기에 아쉽지만 절망하지 않았다. 그저 쉬운 방법들이 실패했을 뿐, 레온과 연관되지 않은 패들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말 그대로 시간이 조금 더 오래 걸릴 뿐.
“어쨌거나 이동하자.”
“곤란하겠군요, 이곳도.”
“허를 찌르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이번에는 바로 기사들을 내달리게 하지 않고 인력을 반으로 나눠 수색과 추격을 동시에 할 레온이 예상되었다. 괜히 가운데 끼는 것보다는 안전한 곳으로 서둘러 이동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도 바쁜 하루가 시작된다.
꼬박 사흘을 말을 타고 내달린 후 도착한 마을에서 일행은 드디어 제대로 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반쯤 졸도하다시피 잠든 사이 라엘은 생각을 정리했다. 졸려서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그것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이 있다. 미루고 미뤄왔던 것, 꼬일 대로 꼬인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몸을 피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되었지만, 이렇게 해서만은 안 된다.
귀족연합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로윈을 빼앗겼을 때 속수무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바로 손을 쓸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제국으로 향하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죽음에 크게 동요한 자신의 탓이었다.
만에 하나 다니엘이 부상에 그쳤더라면 라엘은 그런 판단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 스스로도 제압이 가능하고 해결 가능한 문제였고 이렇게 오래 끌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다니엘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라엘은 다니엘이 죽음에 이르는 순간 이후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의 죽음에 동요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면 이후에는 더 많은 죽음들이 있을 것이다.
다니엘이 죽은 순간 라엘은 앞으로의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의 방향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다니엘로서 행동하는 것은 오직 다니엘이 있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죽고 사라진 이후 자신의 입장은 재정립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라엘의 일 순위는 로렌의 행방을 찾고 그가 안전할 수 있도록 시선을 끄는 일이 되었었다. 그것이 옳았다.
라엘은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존 사실을 정체 모를 자들에게 흘렸다. 시선을 충분히 끌었다 싶었을 때 완벽하게 몸을 숨기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 것이다. 그러곤 이제 로렌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제국의 추격자-정체는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들이 자신들을 쫓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그들은 유능하고 집요했다. 희생이 생기기 시작했다. 엄선하고 엄선한 이들. 로윈을 되찾고 정당한 후계가 왕좌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들이었다.
자신과 같은 입장의 그들의 죽음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 때문에 라엘은 제국으로 이동하는 것을 결정했었다. 그가 몸을 의탁할만한 어떤 접점도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자신의 행보를 파악한 추격자들을 따돌리는 데에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것이 정말로 최선의 선택인 줄로만 알았다.
판단은 나쁘지 않았으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인정한다. 후회하고 있다.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다. 어렵고 번거롭지만 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모든 상황에 대해 라엘은 그렇게 판단했었다. 가장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로렌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다니엘의 죽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 생각이 너무 오만했을까? 레온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레온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가 파괴하려 했던 것은 라엘의 것이 아닌 다니엘의 것이었다. 그것은 용서하기 힘든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이고 뭐고 감정과는 별개로 일단 멱살을 잡고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한번 패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로윈을 되찾고 나서 로렌에게 곱게 건네주고 나면 자신의 임무는 끝이었다. 그 이후는 라엘은 라엘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준비했던 모든 것을, 앞으로의 자신의 미래까지 부숴버린 것은 슬프게도 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었다.
라엘이 다니엘의 그림자라는 것을 레온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신에게 저지른 일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는 계획적으로 개새끼가 되었고 라엘은 사랑이라는 콩깍지와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마치 정년만을 앞두며 두근거리다 정년이 5년 더 연장됐다는 통보를 받은 기분이었다. 레온은 자신에게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개애새끼!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차원이동을 하게 되고, 차원이동을 했으면 몸이라도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지 한국의 노동량을 훨씬 뛰어넘는 노동으로 온몸을 혹사당해야 했을까. 심적으로 편하면 말도 안 해. 주군 잃고 나라 잃고 순결까지 잃은 자신에게 누군가는 위로의 상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상으로 레온을 건네준다면 그건 반품시키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한 것인데 나오는 것은 한숨이다. 참 거지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레온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이다.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된 것이었고 깨닫게 된 순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와는 함께할 수 없다. 그 생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전한 전제였다. 사랑과 비례하여 증오는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의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사랑하지만 증오한다. 어느 드라마에서 보았을 때는 막장이라고 코웃음 치며 욕을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감정이 있다는 것을 깨닫자 피곤해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사랑하면서 증오한다는 것은 참 피곤한 감정이었고 부정하려 할수록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고 힘이 들어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사랑한다. 그런데 그놈은 개새끼 맞다.
차라리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이런저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가 앞에 있으면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멱살을 잡는 것이었으니.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역시 힘들다. 그는 상황을 너무나도 크게 악화시켰다. 빠른 해결을 위해 추진했던 동맹이 그의 손에서 산산조각 나서 흩어졌다.
이쯤 되자 이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앞으로 계획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미 생각해 둔 것도 있고, 해야 하는 일이며, 결국에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여전히 있다. 그러나 처음의 계획보다 더 멀리 빙빙 돌아가게 될 것이고 시간은 아주 오래 걸릴 것이다.
지친다.
지금 라엘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다니엘의 유언뿐이었다. 온전히 제게 자리를 만들어주고 이후의 삶의 이유까지 만들어준 그의 마지막 유언. 그러나 그것을 짊어지는 것은 온전히 라엘이었고 지금 그는 너무나도 지쳐있었다.
짜증이 콱 치밀어 오른다. 괜히 열이 받아 이불을 발로 차자 옆에서 잠들어있던 탈린 남작이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피로에 잔뜩 부은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상태였다.
“와, 왕자님?”
“라엘이야. 잠 덜 깼네. 더 자.”
“……네.”
아, 정신 차리자.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다니엘로 알고 따라오는 저들을 어떻게 하겠어. 괜히 미안해져서 라엘은 드물게도 상냥한 말을 건넸다. 남작은 다시 기절하듯 베개 위로 머리를 푹 박았다. 저러다 호흡곤란으로 죽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려주자 이미 잠에 취한 그는 깨지 않았다. 안쓰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주인 잘못 만나서……. 물론 이건 다니엘 이야기다.
한참 동안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하던 라엘은 드디어 결심할 수 있었다. 몇 번을 생각한 후에도 그 결심이 제대로 된 판단이라는 확신이 섰을 때야 라엘은 두 사람을 깨웠다.
피로에 찌든 몸을 끙끙대며 일으키는 두 사람을 보자 가슴 한구석에 애잔함이 몰려온다. 저 둘도 전생에 나라를 몇 개를 말아먹은 것이 틀림없다. 주군을 잘못 선택해 남들은 하지 않을 고생을 몰아서 하는 것이 안쓰러웠다. 다니엘의 직속으로 들어왔을 때는 출세했다고 생각했을 텐데 사실 그것은 과로의 길이었지. 왠지 그들을 보는 눈이 아련해진다.
“너희는 성국으로 가야겠어.”
“라엘 님?”
“지금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황제의 목적은 오로지 나야. 너희가 곁에 있든 없든 신경을 쓸 위인도 아니고. 그렇다면 차라리 너희는 로렌을 지키는 것이 나아.”
미친 황제-레온이 뒤쫓는 것은 오로지 라엘뿐이었다. 두 사람은 옵션처럼 함께 쫓기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도주였다. 앞으로 아주 먼 길을 돌아 로윈을 다시 되찾기 위해서는 이 둘은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매일 무능하다며 엉덩이를 차고 있다고 해도 그들의 유능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많은 인재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제는 그들의 목숨마저 위험했다. 더 이상 로윈의 인재를 잃어서는 안 됐다. 그들은 다니엘의 힘이었고 이제는 로렌의 것이 되어야 한다. 라엘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라엘 님은…….”
“알고 있잖아. 차라리 나는 혼자 움직이는 쪽이 몸을 숨기기도 편하고 몸을 빼내기도 편해. 황제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기사들은 내게 제대로 손대지 못할 거고 난 이걸 이용해서 최대한 몸을 피할 수 있어. 하지만 로렌은 아니야.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로렌의 안전이야. 그의 위치는 이미 노출되어 있고 그 미친 황제가 왕국에 내린 추포령을 보면 성국에 압박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어.”
“설마 거기까지 할까요.”
“상식적으로 왕국들 전체에 이유도 없는 추포령을, 그것도 일국의 왕자의 추포령을 내린다는 건 말이 됐나? 그런데 황제는 그걸 했단 말이지.”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황제를 욕하는 시간을 가졌다. 미친놈. 쓸데없는 추진력을 가진 개새끼이이! 그리고 잠시 후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황제는 성국을 압박할 만큼의 힘이 있어. 그게 현실이지. 만약 그런 상황이 된다면 성황께서 정말로 로렌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겠지.”
“하지만 신의 이름으로 제 품에 의탁해온 어린양을 지키겠다 이미 공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성황께서 곤란해지는 상황과 로렌의 안전마저 위험해지는 두 가지 상황이 한꺼번에 닥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 그러니 너희는 적당히 때를 보아 로렌의 안위가 저울에 올라간다 싶으면 그를 피신시켜. 차라리 그리하는 것이 추후에 성황의 도움을 얻는 데 더 도움이 되고 보기에도 좋으니.”
“그리 판단하셨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로렌을 꼭 지켜. 지금 로렌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로윈을 되찾는 것보다도 더 우선순위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
어째서, 라고 되물으려던 탈린 남작은 입을 꾹 다물었다. 라엘은 마치 로렌을 로윈의 마지막 왕족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본인의 안위는 전혀 계산에 넣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몸을 잘 피하겠다고 하지만 역시 석연치 않은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시체라도 되는 양, 로윈을 되찾으면 사라질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도움이 될 이야기는 아닌지라 남작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페르제 자작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엘의 제안은 지금 상황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관 출신인 자신들이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기분은 이미 처음부터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주 잠깐의 휴식 후 두 사람은 바로 성국을 향해 말을 달렸다.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라엘은 기도했다. 이 세계의 신이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제발 그들을 안전히 성국까지 지켜주기를.
라엘은 피곤함과 슬픔과 분노와 애정과 증오,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쳐 휘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제 이성을 붙들고 판단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계산하는 자신이 마치 괴물 같다고 생각했다. 감정 없이 움직이는 괴물, 모든 것을 희생하여서라도 제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냉혈한. 아마 지금 자신의 혈관에는 차가운 푸른 피가 흐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자괴감마저 들어 혼자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기에 부러 그들을 성국으로 보냈다.
라엘은 다니엘을 만난 이후로 처음으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제 본명이 무엇인지도 가물가물했다. 아니, 자신이 있었다고 생각하던 세계는 정말로 실존하고 있는 것인지조차도.
다니엘이 부단히도 방법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찾아주지 못했고, 그 후로 돌아가는 것은 완전히 포기하고 있던 세계였다. 어쩌면 자신의 환상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원래부터 나는 이쪽 세계의 사람인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다니엘이 준 확신이었다. 언젠가는 본래의 세계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그는 약속했지만……. 이제 다니엘은 없다.
모든 것을 지우고 없던 일로 하고 싶다. 이렇게 괴로운 감정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이 제 손에 머물지 않았고 그저 잡을 수 없는 환상 속에서 손을 휘젓고 있었다. 손에 잡혔다 생각한 것은 그저 물그림자로 손을 내저으면 흐트러지고 사라진다. 모든 것을 망쳐버리는 것마저 자신이다.
라엘은 두 사람을 보낸 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계산하고 좌절하는 과정에 다시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제야 라엘은 제가 고작 두어 시간 잠들었을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라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다니엘이었다. 그가 남긴 유언만이 라엘을 움직이게 만들고 살아있게 했다. 정말로, 그가 살아 돌아온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푹 잠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로윈과 다니엘을 잃은 이후로 라엘이 제대로 잠이 든 것은 드물었다. 황궁 안에서조차 로윈을 되찾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하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극도로 예민해져서 몇 번이나 다니엘의 죽음의 순간을 다시 목도하며 잠에서 깼다. 레온에 의해 구금된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탈출한 이후에도 모든 것이 망가지고 꼬이고 절망하고 그 와중에 쫓기기까지 하는 와중에 꿀잠을 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로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들었다가 일어났다. 하루를 꼬박 잠든 것 같았다. 점심식사가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아침의 풍경이었다. 묵은 피로가 가시는 기분에 기지개를 켜던 라엘은 다시 눈이 퀭해지며 그 피로가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침대 곁에 의자를 가져다 둔 채로 레온은 라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맙소사!
“오랜만이야, 라엘.”
“네, 오랜만이네요.”
소름 끼치지도 않고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재해 같았다. 태풍에게 화를 내봤자 뭘 어쩌겠는가. 해일을 막으려 하면 막을 수 있는가. 차라리 자신을 향해 싱그럽게 웃는 그의 미모를 한껏 감상하기로 했다. 가공할만한 미모의 소유자이지만 그 미모를 어필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똘기에 감싸여있다는 부분은 역시 애석했다. 게다가 이쯤에서 발목에 금속성의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 것은 절대로 라엘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놀라지 않아?”
“놀랍네요, 혼자 오셨다는 점이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방 안에 있는 것은 라엘과 레온뿐이었다. 이건 정말로 무슨 상황인 것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몸의 대화요?”
비꼬았지만 레온은 기분 나쁜 티도 내지 않고 웃었다. 세상에, 이 시점에서 평화로운 대화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싶었다. 바라 마지않았지만 그가 발로 찼던 것이 그것 아니던가.
“나쁘지 않은 말이지만 오늘은 그냥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
“지금까지 하셨던 행동을 생각을 좀 해 보시죠.”
“하하, 라엘이 나를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오늘은 네게 제안을 하러 온 거야. 기왕이면 네가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이제는 레온이 대체 무슨 개 짖는 소리를 할까, 부터 생각나는 상황이 참 별로다. 게다가 이 와중에도 레온은 참 잘생겼다. 구시렁거리면서도 라엘은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결코 그의 곁에 머물 생각도, 황궁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이 미모는 국보급이고 볼 기회도 흔치 않으니 이참에 열심히 봐 둘 생각이었다.
“이야기나 해 보시던가요.”
성의 없이 대답하고 조목조목 잘생긴 얼굴을 뜯어보았다. 레온의 은발이 반짝이며 바람에 흩날리고 푸른 눈은 아침 햇살을 산산이 흩뿌리며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잘생기게 오뚝한 콧대 위로 햇빛 사이를 헤엄치던 먼지가 스쳐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저 예쁜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었다. 아차, 홀려버렸다. 마음을 다잡으며 제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멋진 중저음의 목소리가 상큼하게 울려 퍼졌다.
“황비가 돼줘.”
“네?”
시발? 뭘 생각해도 그 이상을 보여주는 개소리였다. 개소리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조금 전까지 레온의 미모에 홀렸던 라엘이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은 단 3초면 충분했다. 키스는 무슨!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아니 제대로 들은 게 맞아. 난 라엘이 내 비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네 입장에서도 손해 볼 제안은 아니지 않아?”
물론 성별이 반대라면 누가 거절을 하겠는가. 제국의 황비가 되는 제안이다. 애석하게도 라엘은 남자였고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아내가 될 것이라는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을 지적해야 할지 말을 고르지 못하는데 레온은 해맑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등골이 싸해서 다시 다리를 확인한 것은 정말로 라엘의 잘못이 아니었다. 익숙한 뭔가가 다리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라엘은 대놓고 안심을 했다. 레온은 그런 라엘을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런 귀여움은 별로 받고 싶지 않다.
“걱정 마. 정말로 내 비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하러 왔을 뿐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미친 소리라고 생각해요. 아, 근데 저 지금 살아있는 건 맞죠?”
“내가 라엘을 어떻게 할 리가 없잖아.”
손대려고 하면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에둘러 말하는 것인가. 라엘은 레온의 말을 순순히 믿을 수 없어 온몸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어디 한 군데 묶이거나 잘린 곳은 없었다. 혹시 마취제라도 놓고 다리를 부러뜨려놓지 않았을까 싶어 발가락까지 꼼지락대봤다. 다행히도 제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라엘은 울적해졌다. 아, 우리 사랑하는 거…… 맞지? 이게 정상인 건가? ……이게 정상일 리가 없잖아! 고개를 돌려 황제를 원망스럽게 노려봤지만 레온은 웃음버섯이라도 처먹은 듯 라엘을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아, 이제는 그냥 저 입을 때려주고 싶다. 레온은 지치지도 않는지 라엘을 설득했다.
“네가 내 비가 된다면 로윈을 되찾는 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게.”
“제가 왕이 되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인데요?”
“네 왕국과 네 동생이 남는 거지.”
원래부터 로렌에게 돌려주려 한 로윈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제안을 승낙하고 ‘네!’ 하고 덥석 물기에는 레온의 의중이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여기까지 찾아와서 자신을 끌고 가지도 않았고 몸을 구속하지도 상처 입히지도 않았다. 당연히 레온이 그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이 참으로 지랄맞았지만 어쨌거나 이 상황은 저 인격으로는 이루어지기 힘든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레온이 언제 돌변해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몸을 사리게 되었다.
“폐하, 당신이라면 저를 그냥 끌고 갈 수도 있었을 텐데요. 굳이 그러한 제안을 하시는 의중을 저로서는 모르겠군요.”
“난 네가 스스로 내 곁으로 오기를 바라.”
말도 안 되는 소망을 말하는 레온이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강제로 끌고 간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결국 너는 다시 내게서 달아날 테고…… 난 그것을 바라지 않아.”
레온이 바라는 바를 드디어 알 것 같았다. 스스로 제 곁에 남아있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제게는 파격적인 제안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두통이 이는 것을 느끼며 라엘은 되물었다.
“제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달아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나는 네가 돌아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사라지게 할 거야.”
레온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고 라엘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네가 돌아갈 왕국, 가족, 아는 사람, 그리고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모든 것들을 없던 걸로 만들고 오직 내 곁에만 네가 남을 자리를 만들 거야. 라엘은 레온이 예쁜 입술을 움직여 말하는 것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아, 그래서 쟤가…… 뭐라는 거야!
“그렇게 된다면 결국 너는 내게로 돌아올 수밖에 없겠지?”
“우……우와…….”
이게 말이에요, 방구에요? 상상을 뛰어넘는 미친 말에 라엘은 저도 모르게 감탄해버렸다. 이, 이 정도로 비범하게 미친 남자를 반하게 한 나를 칭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정말로 그 부분이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
내게 오지 않으면 지금까지보다 더 열심히 너를 괴롭힐 거야! 라는 선언을 당당하고 살벌하게 제 앞에서 해낸 레온 앞에서 라엘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어 그저 헛헛하게 웃고만 있자 레온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손을 엑스자로 교차해 상반신을 완전히 가린 것은 정말로 라엘의 탓이 아니었다.
“뭐, 뭐예요!”
“자자.”
“……몸의 대화는 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응, 안 해. 그러니까 자자.”
대체 뭐라는 거냐고 말을 하려는데 레온이 라엘의 허리를 팔로 감더니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라엘도 엉겁결에 딸려가 침대 위에 털썩 눕게 됐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 하는 의문에 천장만 멍하니 보고 있는데 다시 몸이 돌려졌다. 내 몸인데 어째서 내 맘대로 하지 못하는 거죠? 레온을 제 품 안에 끌어안은 꼴이 되었고 라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제 입맛대로 라엘의 품에 안긴 레온은 정말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장 대답을 하라고 하지는 않을게. 일단 한숨 자……고……나…….”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다.
“……?? 폐하?? 폐……하? ……레……온? ……야?? ……야, 이 새끼야?”
이제 아예 작게 코까지 도롱 도롱 골고 있는 레온의 코를 꽤 아플 정도로 잡아 비틀었지만 그는 절대로 깨지 않았다. 라엘은 허탈하게 웃었다. 이 새끼, 진짜 자네……. 깨닫자마자 바로 그의 팔을 내동댕이…… 치려 했지만 허리에 감긴 레온의 팔은 잠을 자는 와중에도 단단하게 얽혀 있어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결국 풀어내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쪽 세계의 신은 아무래도 레온에게 어마어마한 능력을 주는 대신에 배우자를 고르는 취향과 성격에 심각한 문제를 주지 않았나 싶었다. 아니, 어쩌면 직위별로 능력을 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 먼치킨 같던 다니엘의 복사본과도 같은 자신이 레온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겠지. 이대로 레온이 다시 깨어나면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냥 침대 위에 털썩 누웠다. 레온이 다시 품에 안겨왔고 저도 모르게 그를 껴안았다.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라엘은 레온의 제안에 대해서 천천히 생각해봤다. 황비가 돼달라는 제안은 누가 들어도 확연한 개소리였지만 그에 따라오는 것들은 사실 생각해볼만한 것이었다.
이미 라엘이 왕국을 되찾기 위해 세워놓았던 계획은 레온이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톡 건드는 것만으로 도미노처럼 와장창 무너져버렸다. 다시 시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너진 것들을 수습하고 다시 위치에 맞게 세우는 것은 처음보다 배로 시간이 들 것이다. 차라리 처음부터 하는 편이 더 빠를 정도로. 그리고 무너진 것은 로윈의 다니엘에 대한 신뢰였다. 그렇게 지키려고 버둥거렸는데 레온이 손톱을 한 번 세우자 그대로 흉터가 남았다. 왠지 새삼 열 받아서 잠든 레온의 볼을 꼬집었다. 미친, 피부가 너무 좋았다.
아주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어차피 라엘은 로윈을 되찾으면 그것을 로렌에게 바로 돌려줄 생각이었고 그 후에 자신은 사라질 생각이었다. 라엘이 사라져야 쓸쓸한 곳에 홀로 누워있을 다니엘의 장례가 제대로 치러질 수 있었기에 그것은 빠를수록 좋았다.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지금까지 아등바등 달려왔다. 레온의 제안은 과정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아질 수 있는, 그리고 아주 쉽게 진행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이었다.
애초에 모든 것을 휘저어놓은 것이 레온이긴 했지만 이제 와 그것을 다 물어내라고 말해봤자 절로 회복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다니엘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동맹 직전 사라진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될 것이다. 레온이 휘젓고 다닌 것도 그렇게 처리할 수 있었다. 아난에서는 자신에 대해 함구해줄 것이다. 그리고 제국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비밀로 진행을 한다면……. 구미가 돋는 제안이었다.
라엘의 사정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한 레온이 또 얄미워졌다. 이번에는 코를 비틀자 레온이 숨이 막히는지 끙끙댔다. 이대로 코를 계속 잡고 있으면 콱 죽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 정도 미모가 세상에 없는 것도 어마어마한 손해인 것 같아서 결국 손을 놨다. 아아, 내가 저 얼굴에 홀려서……. 응? 아오……. 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결국 선택은 하나였다.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는 것.
황비까지는 정말로 싫지만 황궁 내에서 삶이 그다지 힘들 것 같지는 않았다. 요 몇 년을 왕자로서 왕궁에서 지내왔었고 그 결정에는 자신의 의사라고는 전혀 없었다. 황비가 되는 것도 그 연장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신이 떠나지 않겠다는 확답을 한다면 레온은 전처럼 자신에게 족쇄를 채워두지도 않을 것이다. 레온의 제안은 라엘을 스스로 황궁에 머물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것만 보장된다면 이전과 같은 구금생활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레온이 자신에게 질리지 않을까. 그리고 그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을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정리되자 라엘은 허리에 감긴 레온의 팔을 집어던졌다. 끙끙 앓기는 했지만 레온은 깨지 않았다. 정말 피곤했던 것 같다.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는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며 라엘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집어던질걸, 하고 중얼거렸다.
라엘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문장을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왕국에서의 버릇처럼 앞뒤 수식어가 어마어마하게 붙은 휘황찬란한 문장이 튀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누르고 최대한 간단하게 적었다.
[제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습니다. 로렌을 먼저 설득하고 오겠습니다. 황궁에서 기다려주세요.]
참 정 없다 싶은 간단한 문장들이었지만 충분했다. 라엘은 종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짐을 챙겨 문을 열었다. 저 편지를 보면 아무리 저 사람이라도 제가 사라졌다고 깽판을 치고 돌아다니지 않겠지. 레온이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대재앙이었으니 일단 그걸 황궁에다 치워놓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문을 열고 바로 나가려던 라엘은 걸음을 돌려 침대 위에 잠들어있는 레온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 보면 볼수록 잘생겼다. 황비가 되면 이 남자가 공식적으로 내 남자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왠지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 미안해요, 왕자님. 제가 드디어 남자한테 코가 꿰였나 봐요. 그것도 이 모든 것의 원흉이랑요.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하면 셰익스피어가 제게 욕을 하겠죠. 무슨 소린지는 모르시겠지만 그냥 그런 게 있습니다. 원수새끼지만 이 정도 미모라면 홀리는 것도 어쩔 수 없잖아요. 이해해주세요, 일단 뒷수습도 해준다니까요. 또라이랑 결혼하게 생겼지만 로렌 왕자님은 제가 잘 챙길게요.
마음속으로 다니엘에게 사과를 하며 라엘은 레온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비볐다.
로윈의 문제를 뺀다면 그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미친놈일 뿐이었다. 그것도 나한테 미친, 핫! 핫! 핫! 남자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심란한 일이었지만 레온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것도 다 괜찮은 것 같았다. 슬슬 자신도 같이 미쳐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라엘은 경쾌하게 문을 나섰다.
살랑거리는 바람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자꾸 얼굴을 간질였다. 몹시 피곤했지만 결국 레온은 눈을 떴다. 창밖에는 붉게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 한 줄기가 반쯤 열린 창문으로 새어 들어왔다.
레온은 잠에서 깨자마자 옆자리를 살폈다. 당연한 결과로 라엘은 없었고 그 자리마저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에 방을 훑어보고 라엘을 기다렸지만 라엘은 시간이 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잘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사실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그래, 이게 네 답인가.”
레온은 빙긋 웃었다.
최대한 라엘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합리적인 제안을 했다. 하지만 역시 라엘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라엘이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했었다. 남자인 라엘이 같은 남자인 자신에게 이러한 사랑고백을 듣고 어떤 기분이 들지도 예상이 가능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었는지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함께할 수 없다 하는 말도 모두 이해했다. 그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엘을 포기할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리했었다.
라엘을 사랑하기 이전에, 로윈의 왕자로서의 다니엘을 레온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제국에는 레온하르트가 있다면 로윈에는 다니엘이 있다고 했다. 자신과 자주 이름을 나란히 하는 다니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조금 즐거웠다. 아주 우수하고 총명한 왕자라고 했었다. 로윈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해가 될지 득이 될지 계산도 해 본 적이 있었다. 다니엘은 현명하게도 황제에 대한 자신의 충심을 알릴만한 행동을 했고, 그래서 오히려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아난으로 향하는 길에 겸사겸사 로윈에 들른 것도 그 이유였다. 그저 그를 한번쯤은 보고 싶었다. 그에게 한눈에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을 하진 못했었지만.
그러한 그가, 로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그가 온전히 제 품에 안길 리는 없었다. 다니엘의 아버지인 왕은 선하지만 무능했다. 그 때문에 이미 로윈은 다니엘 그 자체였고 다니엘도 그것을 위해 살아왔다. 실상은 그가 왕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레온도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로윈을 생각하는 그와 제국을 생각하는 자신은 놀랄 만치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과 나라는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고 둘 모두 일평생을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다. 그런 라엘에게 로윈을 포기하고 제 품에 안기라고, 동생이라지만 남에게 제 나라를 넘기라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 제안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가 없잖아 있었다. 라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로윈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되찾아준다면, 그 후에는 자신에게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래서 망설이면서도 그렇게 제안을 했었다. 무리하게 밀어붙인 제안이었다. 자신과 로윈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던 것이었고, 라엘은 로윈을 택했다. 자신의 우선순위가 왕국보다 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자 역시 입맛이 썼다. 착잡한 기분이 밀려왔다.
비어있는 테이블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레온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거짓이라도 편지 한 장이라도 남겨줬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남겨줬으면 그것을 끌어안고 당분간은 버틸 수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는 더없이 차가운 라엘은 그런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라엘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긴 하였지만 그에게 자신은 아버지와 사랑하는 사람의 원수일 뿐이었다. 로윈은 되찾을 수 있겠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은 모두 자신의 손끝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라면 좋았으련만, 라엘의 입장이 너무나도 이해가 되어 그를 원망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그것을 모두 감수하고서라도 그를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저 이런 결말이 된 것이 안타까울 뿐.
아쉬움을 뒤로하고 레온은 허름한 여관의 문을 나섰다. 침대 아래쪽에 바람에 날려 굴러간 편지의 끝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레온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로렌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라엘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대체 어떤 소리를 해야 ‘형이 결혼을 합니다. 남편이 아니라 아내로 말이죠.’라는 개소리를 그가 납득할 수 있게 포장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그 남편이라는 것이 황제이니 괜찮지 않을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가도 고민이었다. 다니엘과 자신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정리를 마친 후에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각할 일도 할 일도 많은데 거기다가 혼란까지 주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다니엘의 시신을 수습하면, 그럼 그때는 정말로 라엘이 이 세계에서 할 일은 모두 끝날 것이었다.
문득 레온이 생각났다.
무도회에서 처음 봤을 때, 세상에 차원이동을 했더니 이런 어마어마한 미남을 만나기도 하는구나 하고 그 얼굴에 순수하게 감탄을 했었다. 다니엘도 미남이긴 했지만 이 부분은 자신과 너무나도 똑같은 얼굴이었기에 나르시시즘을 느끼는 기분이라 감탄하기에는 모자랐다. 차원이동을 하면서 약간의 보정을 받은 느낌의 얼굴인 다니엘이었고 라엘도 그 효과를 받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은 잘생겼다 뭐라 말을 하기에는 민망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레온은 목소리까지도 대단했다. 느끼하지 않은 듣기 좋은 중저음 보이스라니! 완벽한 사람을 만난다면 동성이라도 가슴이 뛴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갑자기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는 가슴을 팡팡 치며 자제시켰다. 아니야, 지금 아니야!
천국에 계신 왕자님, 들으세요. 제가 이제 제 인생을 찾아가려고 합니다. 왕자님께서 원하신 방향의 인생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좀 제 능력치로는 수습이 불가능하더라고요. 융통성 있게 살아오신 왕자님이시니 이해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듣고 있는지 확인조차 할 수 없는 다니엘에게 중얼거리며 라엘은 성국을 향해 말을 달렸다.
레온은 착잡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설득을 해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은 것이 역시 아쉬워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는데…….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야기한 대로 그가 돌아갈 수 있는 모든 곳을 없애는 수밖에. 그리고 지금 가장 먼저 사라져야 할 것은 로렌이었다. 라엘, 다니엘의 동생이자 유일하게 남은 혈육.
어차피 사라지지 않을 증오에 한 꼭지가 더 얹어진다 해서 대체 무엇이 달라질까. 라엘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증오하고 그 증오 때문에 곁에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증오가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라엘이 자신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증오라도 크게 하고 싶었다. 레온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그저 라엘이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제 와서 그 감정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감정이 사랑이 됐다면 좋았겠지만 이리된 이상 증오라도 감내할 수 있었다.
“폐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윈의 왕자, 로렌을 쫓는다.”
성국에 서신을 보내 그의 인도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유는 이미 성국 내에는 그가 없다는 것. 앙큼하게도 제 동생을 미리 피신시킨 라엘을 생각하면 다시 미소 지어졌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즐겁게 만든다. 아니, 어쩌면 그를 닮은 동생이 스스로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이 됐든 레온의 행동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레온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십 마리의 매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떨어지는 솜 깃털을 보며 레온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