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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황제의 그림자 ~Shadow of the Emperor~(2권)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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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관 2부

그림자 왕관 2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어요?”

“물론, 너를 만났을 때야.”

“…아, 느끼…….”

“사실이니까.”

“그, 그럼 세상에서 가장 불행했던 순간은요?”

“너를 사랑하게 됐을 때야.”

“어째서요?”

“결코 너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도 함께 깨달은 날이었으니까.”

7. 황제의 그림자 ~Shadow of the Emperor~

처음에는 그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행복해하는 그의 표정에 저도 행복해졌다.

다음은 그 행복이 나로 말미암아 생긴다면 과연 내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곁에서 웃으며 함께 걸으며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로윈에서 지낸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레온은 부단히도 제 마음을 부정하려 애썼다. 남자를, 그것도 일국의 왕자를 사랑하게 되는 일이 황제라고 해서 쉬울 리는 없었다. 아니, 황제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제 머릿속을 휘젓는 그를 애써 부정하며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에게 말했다. 단 한 번도 남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본 적이 없었기에. 그러나 그를 볼 때마다 제어되지 않고 뛰기 시작하는 심장은 당혹스러움 자체였다.

감정은 대책 없이 점점 커져만 간다. 그가 머무는 곳에는 향기가 함께 머무른다. 그 목소리는 천상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소리이고 그의 미소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가 다르게 그에게 빠져드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인식했을 때는 이미 그 감정 한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변함이 없을진대 얽혀있는 것은 오로지 저뿐이라 빠져나올 수조차 없다.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다. 떠나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그를 보고 싶다. 그가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은 저와 어울려주는 그에게 욕심껏 어리광을 부렸다. 무리해서 일정을 조정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다. 언제나 완벽하게 짜인 일정 위를 걷던 그였기에 그 결정에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놀란다. 레온에게는 굉장히 큰일이었고 변화였지만 그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더 큰일이었다.

로윈에 머무르고 한 달 즈음이 됐을 때는 자신을 다잡았다. 그에게 빠져드는 자신을 인정했다. 그러나 더 빠져들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 결심하고 다음 날 그를 만났을 때 거짓말처럼 자신을 괴롭히던 감정이 사라졌다. 그의 앞에서 가슴이 아릿하거나 심장이 귓속까지 울리는 현상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고 덕분에 그를 꽤 여유롭게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그뿐이었다. 잠이 들기 전 방에 홀로 남았을 때 분수대 앞의 그의 모습은 여전히 자신을 괴롭혔지만, 그래도 정말로 괜찮아진 줄 알았다.

떠나는 결정은 어려운 것이었다. 그 사실을 통보하면서도 사라지지 않은 감정의 여운에 허덕대어야 했다. 그를 눈앞에 두었을 때 더 이상 격한 감정에 시달리지 않으면서도 홀로 남으면 여전히 떠오르는 그의 생각에 이기적인 생각을 해버렸다. 떠나기 전 단 한 번만이라도 이기적인 감정은 뻔뻔하게 왕의 앞에서 흘러나왔고…… 사실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일국의 왕자에게 그러한 제안이라니. 어쩌면 그것은 로윈을 무시하는 처사일 수도…… 아니,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경멸하게 될까 그것만이 두려웠다.

제안을 취소하려고 했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대가를 제시했기에 그가 직접 거절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윈을 사랑하는 다니엘이라면 절대로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한 비겁한 제안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다잡고 그를 만났지만……. 제안에 응하러 온 그를 본 순간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이 결국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그를 사랑하는 것에는 처음부터 제 의지가 단 한 줌도 반영되지 않았다.

단 하루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하는 내내 레온은 생각했다. 정말로 단 하루의 추억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를 품게 되자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를 사랑했고 그를 포기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하루만이라도 그의 삶에 어떠한 흔적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제가 추억할 것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안았다. 그것으로 그를 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노력은 헛되어 그 밤은 자신을 주박처럼 단단하게 매어놓았고 다시는 풀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만에 하나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상상해보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하더라도 결단코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리라. 레온이 황제로서 제국과 하나가 되었듯 그도 곧 왕이 되어 로윈 그 자체가 될 것이었다. 그도 자신도 군주였기에 그의 생각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수없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상상 속에서도 레온의 이성은 잔혹할 정도로 사라지지 않는다. 끝없이 펼쳐지는 희망적인 환상 속에서도 레온은 그와 자신의 관계를 규정했다. 하룻밤의 거래로 이루어진 얄팍한 끈을 가진 사이. 거래가 끝났으니 그는 다시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왕국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물며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이런 상상마저도 소모적인 일이다.

그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소문으로 알고 있었고 이후에는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더없이 이상적이고 완벽한, 오로지 로윈을 위한 왕자. 그가 존재함으로 로윈은 지금의 모습을 가질 수 있었고 그가 왕이 된다면 로윈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로윈 그 자체인 그가 자신을 선택할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론은 단 하나였다.

그를 가지고자 한다면 그와 로윈을 분리시켜야 한다.

도구를 찾아야 했다. 금세 찾을 수 있었다. 추하고도 탐욕스러운 이들이었다. 주제넘게도 로윈을 향해 침을 뚝뚝 흘리는 이들이 레온의 손 안에 잡혔다. 야심 있고 큰 세력을 가진 이들, 하지만 적당히 똑똑한 이들. 너무 똑똑해도 그렇다고 너무 멍청해도 안 됐다. 자신이 모든 주도권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저를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정도로 똑똑하고도 멍청해야 했다. 완벽한 도구를 발견한 레온은 웃었다.

그들은 다른 이의 이름을 빌려 접근한 그의 손을 금세 받아들였다. 자신이 매우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정체불명의 조력자의 큰 힘에 두려워하면서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레온이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었다. 매우 흡족한 도구였고 제 손 위에서 뜻대로 움직여주었다.

충분한 야심을 가졌으나 결정적인 무언가가 결여되어있던 그들이었다. 아주 약간의 자극을 주자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레온의 손은 촉발제였다. 그들은 상상만 하던 일들을 실제로 실행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은 없었다. 그동안 레온이 한 것은 단 하나였다. 그의 시야를 가린다. 그는 그들을 경계했지만 그럼에도 그 얄팍한 판단력을 믿고 있었기에 의심 속에서도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제 손으로 눈이 가려진 그를 보는 것도 참으로 짜릿한 일이었다. 무력하고 아름다운 내 사랑.

물론 도구들이 모든 일을 흡족하게 했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그의 동생, 로렌의 마차를 습격했을 때 레온은 집무실의 서류를 죄다 집어던졌다. 얄팍한 판단력을 믿고 자신감에 가득 차서 한 행동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그의 경각심을 높여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것인가? 설상가상으로 로렌은 그 와중에 탈출까지 했고 상황은 더 꼬일 뻔했다. 뒷수습은 레온이 해야 했다. 그의 눈을 한계까지 가리기 위해 그의 동생을 가장하여 대신 꾸준히 연락을 취했다. 그것이 한계에 이르자 과감하게 포기했다. 시간은 충분히 벌었다. 멍청한 도구들은 그들의 조력자에게 굉장히 만족한 눈치였다. 그러나 레온은 도구들의 선정에 있어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생각보다 더 멍청한 이들이었다.

처음부터 레온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왕자, 다니엘을 살아있는 채로 제 앞으로 데려올 것. 절대로 그를 해하는 것은 허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얄팍한 이성이나마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걱정하지 않았지만 뒤로 갈수록 도구의 선정에 대한 실패를 인정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시험했고 멍청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그리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는 살해당했다.

도구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신들의 거대한 조력자를 제 입맛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가 유일하게 원한 것을 무시했다. 왕자가 살아있는 것은 그들에게는 눈앞에 닥친 위협이었고 두려움이었다. 천박한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그는 상처 입었고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목격된 그의 모습은 어떤 누구라도 살아있을 수 있는 상처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도 저를 상처 입힌 이들을 저승길 동무로 선택하였으니 복수마저 할 수 없었다. 아니, 복수라니 우스운 이야기였다. 그를 죽게 한 가장 큰 원인이 자신인데.

로윈에서는 손을 떼었다. 거대한 것이 사라지자 그들은 방황했지만 곧 탐욕에 몸을 맡겼다. 그가 사랑한 로윈은 탐욕스러운 이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지며 고통받았다. 아아, 이조차 자신의 죄다.

결국 단 한 순간도 제대로 품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것을 시작한 것도, 그것을 끝낸 것도 자신이었다. 서글프고 서러워 가슴을 부여잡았다. 목구멍을 긁어내며 기어 올라오는 슬픔이 자신을 진창으로 끌어내린다.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분명히 환희가 있었다.

이젠 그 누구도 그를 가질 수 없다.

미련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흔적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을 좇았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의 것을 가지고 싶었다. 그가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일행이 나타났을 때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추격대를 보냈다. 그저 왕자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 로렌을 왕으로 옹립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에 하나를 생각하여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가 죽었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그를 포기할 수 없었다. 도깨비처럼 깜빡깜빡 이 장소 저 장소에서 어렵게 발견되는 그들의 추격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일순 희망을 가졌다. 정말로 그가 그 안에 있다면 이리도 치밀하게 움직이리라. 그러나 그들마저 금세 모습을 감추었고 그제야 레온은 포기했다. 그들은 결국 그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에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그를 보았을 때. 아아, 레온은 신 앞에 무릎 꿇고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를 사랑한다. 제국의 레온하르트는 로윈의 다니엘을 사랑한다.

미쳤다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자신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그러하다. 그러나 처음 만난 순간 빼앗겨 버린 마음은 절대로 제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었다. 제게 남겨진 선택권이라는 것은 그저 그를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그에게 미안하다. 제 손으로 그의 모든 것을 빼앗고 그를 이곳까지 몰아세웠다. 쉴 새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죄책감이 뭉쳐 그를 보는 것이 괴롭지만 그러함에도 눈을 뗄 수 없는 자신의 비겁함이 역겹다.

그가 웃어주기를 바란다. 그가 원할 것이라 생각하는,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주었다.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 나르는 것이 그를 부담스럽게 한다는 것을 깨닫자 그렇다면 그가 가장 원할 로윈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왕국에 관한 정보를 가져다 줄 때마다 사실은 착잡했고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제 죄를 그가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고 그의 신경이 온통 로윈에 쏠리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의 목적이 오로지 그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기꺼워할 것들을 쉴 새 없이 조사해 날랐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제 손안에서 춤추듯 버둥거리며 움직이는 아이와 같은 사람.

차라리 이 감정이 식기를 기다렸다. 단 한 번 품었을 뿐인 사랑이라 애가 타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를 곁에 오래 두고 아껴주면 그 감정이 해소되지 않을까. 마모되지 않을까. 차라리 진실을 말하여 그가 저를 경멸하며 피한다면 상처받아 포기하지 않을까. 여전히 제가 남자를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그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는 것은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미소를 보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저를 미소로 대했고 그것만으로도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웃는 것을 보면 행복했고 그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여전히 그는 사랑스러웠다. 여전히 자신은 그를 사랑한다.

그가 흔들렸다.

그는 레온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레온은 그것을 느꼈고 한순간 기대하고 말았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라는 가정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의 감정을 휘감아 하늘로 띄었고 땅바닥으로 처박고는 했다. 감성은 그와의 희망적인 미래를 꿈꾸며 심장을 뛰게 만들었지만 이성은 늘 경고하였다.

그는 너를 선택하지 않아.

아아, 그것은 현실이었다. 제 흔들리는 마음을 인정한 그는 비로소 제 몸이라도 건네주겠다, 결심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그는 이야기한다.

“레온 님의 말대로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로윈을 택하겠죠.”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제가 그렇듯 그도 그렇다. 가정은 가정이고 희망은 희망일 뿐이다. 현실이 되지 않는 그 사실들에 더 이상 목을 매며 환상을 좇을 필요가 없었다. 확실한 대답을 듣는 순간, 자신에게는 그와 함께할 어떠한 미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레온은 깨달았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가 떠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밤새 제 아래에서 시달려 지쳐 잠든 사랑스러운 이의 발목에 입 맞췄다. 곱고 부드러운 천을 덧대고 그 위에 희게 빛나는 족쇄를 채웠다. 제 손 안의 발목은 힘주면 부러질 것만 같이 곱고 예쁘게 뻗어있다. 사랑스러운 감정을 담아 입 맞추며 레온은 웃었다.

어차피 그는 절대로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때도 그랬고, 지금은 사랑할 수 있음에도 자신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했다. 선택권이 없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 그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을 선택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삶, 그의 사랑하는 로윈을 질투한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그것이 가지고 있다.

아아, 이리된다면 그의 사랑을 얻는 것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사랑이 결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면,

그렇다면 증오라도 한껏 받아내자.

라엘은 숨을 들이켰다.

일단 미칠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흥분한다고 해결될 상황은 아니었다. 머릿속으로 욕지거리를 뇌까렸다. 시발, 마음을 좀 줄까 말까 안타까운 사랑이 될까 말까 한 그런 상황이었는데 덮쳐온 이 현실은 눈앞에 미친놈 하나를 남겨놨을 뿐이었다. 설레고 안타까운 마음들을 시궁창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어이가 없고 고민한 시간이 아까웠고 돌아버릴 것 같다.

제 입으로 제가 미친놈이라는 것을 인증한 레온은 여전히 다정한 눈으로 저를 끌어안았다. 그것이 가장 소름 끼쳤다. 제 본심을 드러냈다고 레온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자신에게 그가 했던 모든 행동들은 전부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그것이 무서웠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절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건가요?”

이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나! 나! 나!

라엘은 심장이 몇 번이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피가 싹 빠지고 미친 듯이 열이 오르다 가라앉는 상황을 경험했음에도 결국은 평정심을 되찾고 레온에게 물었다. 온몸의 피가 빠져 싸늘해진 머리는 오히려 판단력을 높여줬다.

갑자기 다니엘이 생각났다. 천국에 계시는 왕자님을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욕을 할 타이밍이다. 이 미친 왕자 놈은 대체 자신을 어떤 인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인가. 누가 보아도 지금 자신은 어마어마하게 잘 훈련된 평정심으로 레온을 대하고 있었다. 이것은 절대로 21세기를 누비던 현대 한국인의 멘탈은 아니었다. 이건 다니엘의 개조(?)가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다. 

물론 그 시점은 전지적 라엘의 시점이었고, 차원이동을 하자마자 다니엘의 대타가 되어 왕자고 용병단장이며 다 해먹으면서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가 이제는 정말로 왕자가 된 본인의 환경적응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판단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있다면 다니엘은 아마도 엄청나게 억울해할 것이다.

레온은 곱게 눈을 접으며 대답했다. 빌어 처먹게도 아름다운 눈웃음이었다. 와- 이 와중에도 이쁘네, 시발! 객관적 미라는 것은 감정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 같다.

“어떻게 하고 싶냐니. 그냥 곁에 두고 싶을 뿐이야.”

“폐하께서는 절 묶어놨고 이제부터는 가둬둘 테니 앞으로는 내키는 대로 찾아와 강간이라도 하실 작정인가요?”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리는 간밤의 정사의 흔적을 의식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엉뚱한 것이라 복장이 터졌지만.

“레온이라고 불러주기로 했잖아.”

천치인가? 지금 이 상황에서 돌아올 대답으로는 저어어얼대로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엘은 코웃음 쳤다.

“그건 둘이 친해질 마음이 있었을 때의 약속이었죠. 당신에게 일방적으로 배신당한 지금 제가 그 호칭을 계속해서 사용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배신이라니.”

“믿고 있던 사람에게 속아 이런 일을 당했으니 배신이 아닌가요?”

“믿고 있기는 했구나.”

“빌어먹게도요.”

“그래,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처연하게 물든 그의 눈에 라엘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자 아쉬운 한숨이 등 뒤에서 들린다.

“나는 널 가둬두고 묶어 둘 거야.”

“아주아주 충분하게 알고 있고 그딴 미래 정도는 누구도 알 수 있겠네요.”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관계를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난 널 존중해.”

“별로 와 닿지 않는 답이군요.”

레온이 고개를 저었다. 라엘의 빈정거림에도 그는 상처받는 표정 하나 내보이지 않았다.

“라엘,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걸 이미 알고 있어.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그래서 이런 방법을 택했어. 너는 나를 이해하지 않아도 돼. 나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네가 이해할 감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평생 이해하지 못할 개소리군요.”

생각보다 감정이 절제된 평온한 대화가 지나갔다.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고 레온은 다시 라엘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는 그 손을 쳐내며 거부했다. 레온은 손을 거두었고 라엘은 말했다.

“혼자 있고 싶어요. 나가주세요.”

“그래.”

라엘의 말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라엘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지만 라엘은 명백한 거부의 의사를 담아 고개를 돌렸다. 레온은 약간 어깨를 늘어뜨리고 방 밖으로 나갔고 라엘은 복장이 터졌다. 이 상황에서 네가 기가 죽어 어쩌자고!

라엘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그래, 눈앞에서 미친 듯이 좋다고 달려 다니는 저 털 때깔 좋은 예쁜이만 아니면 말이다.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만하라고!!!!!”

라엘이 소리를 지르며 테이블을 걷어차자 슬그머니 문이 열리며 참으로 어색한 표정의 시종이 문을 열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해맑게 웃으며 저를 대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다. 지금 표정은 마치 그린 것처럼 어색하고 딱딱하기 그지없었지만. 하긴 누가 순정 가득 담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레온이 한순간 훼까닥 돌아 또라이 같은 짓을 할 줄 알았나?

그래 그건 이해한다. 이해한다 치자. 제가 워낙 잘났으니까 저런 또라이가 꼬여서 이런 거지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일단 사랑한다고 하지 않는가. 미저리 같은 새끼지만. 그러나 이 와중에도 라엘이 외로워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레온이 슬그머니 애완동물을 들여보냈으니 열을 받아, 안 받아? 시종이 뻘쭘해, 안 뻘쭘해? 양 사이드에서는 레온의 욕을 와구 와구 하고 있었고 아마 이 상태라면 제국의 황제 폐하는 무병장수 불로장생 할 판이었다. 게다가 이런 판타지 세상이면 설득력이 더해지는군, 젠장!

“거기서 눈치 보고 있는 게 네 일이야?!”

“아, 아뇨!”

“뭐 하는 거야! 이 털 뭉치들 당장 치우고, 옷 가져와!”

“네, 넵!”

“족쇄 열쇠도 가져와!”

“그, 그건 없습니다!”

“시발!!!!”

순식간에 거칠어진 라엘의 언행에 시종이 뻘뻘 땀을 흘렸다. 털 고운 예쁜 짐승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신나게 달아났고 시종은 꽤 힘을 들여 애완동물들을 붙잡을 수 있었다. 당황한 그를 보며 라엘은 욕을 지껄였다. 응? 놀랍지 지금 상황이, 너도? 나도 개 놀람! 시발!!!!

욕을 있는 대로 내뱉으며-용병생활이 상당히 도움이 됐다- 길길이 날뛰는 라엘을 신경 쓰느라 애완동물을 붙잡는 시종의 손은 느렸고 그 손 안에서 애완동물이 버둥거리며 상처를 남겼다. 평소라면 그 손에 남을 상처를 걱정해줬겠지만 오늘의 라엘은 매우 분기탱천했다. 알 게 뭐야! 나는 시방 세상에 불만이 넘쳐흐르는 남자다! 그리고 불만이 많은 김에 시종이 가져다준 옷도 바닥에 내팽겨지며 패악질을 부렸다.

“너는 지금 내가 바지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이걸 입히고 싶으면 당장 열쇠를 가져와!”

“어, 없어요……. 정말……. 대신 상의가 긴 잠옷이라도 드,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와장창! 라엘이 발로 찬 침대가 뒤집어졌다. 조금 전 걷어찬 테이블은 이미 다리가 부러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방금 건네진 옷은 쫙쫙 찢어져 걸레가 돼버렸다. 라엘은 정말, 유례없는 깽판을 남의 집-황궁-에서 벌이는 중이었다.

“황제 이 개애애애애애새끼!!!!”

“라, 라엘 님…….”

“아냐, 이건 선량한 개에게 너무 모욕적인 언사야. 씹새끼.”

“…….”

“꼬워? 꼬우면 황제새끼를 불러오던가.”

으르렁거리며 입에서 온갖 쌍욕을 내뱉는 라엘을 보며 시종들은 당황했다. 지금 라엘은 옷을 쥐어뜯으며 알몸으로 시위를 하고 있었고 어떤 옷을 가져다주든 한순간에 걸레조각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시종들은 부적절한 수식어가 붙었지만 황제를 부르라는 라엘의 말대로 했다.

문이 열리고 레온이 들어왔다. 욕설을 들을 것을 각오하고 방 안으로 들어온 레온은 욕 대신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약 1미터 크기의 커다란 화병을 맞이해야 했다. 간신히 그것을 피하자 귓가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병이 박살이 났다. 들어있던 물이 날카로운 조각과 함께 바닥으로 쏴아-하고 쏟아졌다. 라엘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명백하게 아쉬운 표정이 깃들어있었다.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황궁 내의, 화병을 이용한 황제시해 시도였지만 레온은 경악하는 시종들을 진정시키고 오히려 라엘에게 사과했다.

“라엘, 네가 화가 난 것은 이해해.”

암살시도를 그저 화가 났다고 표현하는 레온을 보며 시종들은 또 경악했다.

“그래도 잘못하면 네 손목이 삘 뻔했잖아. 화병은 무거우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말에 시종들은 더욱 경악했고 라엘의 표정은 서릿바람이라도 불러낼 듯 싸늘해졌다.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오는 레온을 보더니 라엘은 그나마 멀쩡하게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소파 위에 걸터앉고 다리를 벌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 몸 사이로 비부가 적나라하게 보였고 그곳은 아직도 지난밤 정사의 흔적이 가득했다. 레온은 당황하며 시종들을 물렸다.

잔뜩 성이 난 짐승 같았다. 더없이 아름다운 그의 몸에 흥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그는 자신을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넋이 나가지는 않았다. 레온은 이성적이었다. 더없이 또라이 같은 선택을 할지언정 그것은 손익을 계산하고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선택이었다.

“어서 범하세요.”

“라엘…….”

“폐하, 당신께서 바라는 것은 이것 아닌가요?”

라엘이 으르렁댔다.

“마음껏 범해요! 범하고 사용하고, 폐하 당신 마음대로 해요. 그리고 최대한 빨리 질려서 버려주세요.”

“……라엘, 나는…….”

선명한 증오의 눈빛을 받아내면서 레온은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천천히 라엘에게 다가가 그에게 입 맞췄다. 라엘은 레온을 밀어내지도 그렇다고 감싸주지도 않은 채로 그저 받아들일 뿐이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키스했지만 자신의 마음이 닿을 리가 없었다. 천천히 얼굴을 들어 젖은 눈으로 라엘을 마주 봤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감기 걸릴지도 몰라. 족쇄를 풀어줄 수는 없어. 그래도 바지는 입어야 하니 입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상냥한 그의 말에 더욱 울화가 치민다.

“차라리 범하고 모욕을 주세요. 다정한 척하는 것이 더 역겨워.”

라엘은 그를 상처 주는 말을 수도 없이 알고 있었다. 그를 욕하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보다 그를 경멸하는 것이 그를 가장 상처 줄 수 있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참을 필요는 없었다. 마음껏 증오를 발산해냈다.

“라엘, 비록 이리됐지만…….”

레온은 머뭇대며 말을 잇지 못했다. 곧 탄식과도 같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래도 너와 아무런 사이가 아닐 바에는 차라리 증오라도 받아내고 싶다면 넌 이해할까?”

“미쳤어요?”

레온이 서글프게 웃었다.

“그래, 난 네게 미쳐있는 것이 틀림없어.”

자신을 노려보는 라엘의 이마에 레온은 입 맞추고 옷을 가져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라엘은 중얼거렸다. 시발, 존나 느끼하네. 잠시 후 옷을 챙겨온 레온은 아련한 눈으로 라엘을 바라보며 옷을 입히려고 했다. 이번에는 라엘이 거절했다.

“몸매 자신 있으니까 안 입으렵니다. 이러다 감기라도 걸려서 콱 뒈져버리고 싶은 심정이군요.”

잠시 고민하던 레온이 대답했다.

“그래. 네 뜻대로 해. 하지만 네 몸을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은 싫으니 시종들의 눈은 뽑아둘게.”

미친 새끼. 라엘은 욕을 뇌까리며 셔츠를 입고 바지에 다리를 꿰었다. 레온은 라엘이 바지를 입기 위해 잠시 족쇄를 푼 사이 시종을 제압하고 도망갈까 봐 그마저도 본인이 직접 했다. 족쇄를 풀고 바지를 잡아 입는 것을 도와줬다. 당연한 일이지만 라엘은 레온이 방심한 틈을 타 배를 걷어차고 도주를 시도했지만 그대로 발목을 잡혀 와당탕 넘어졌다.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은 아프지 않았고 그게 더욱 분통터졌다. 아오, 시발!

몇 번의 탈출 시도와 몇 번의 좌절 후 얌전히 바지가 입혀지고 다시 족쇄가 채워졌다. 우울하게 그 저주스러운 쇳덩이가 매달려 있는 다리를 내려다보는데 레온은 그 발목에 사랑스럽다는 듯이 키스를 했다. 어이가 털리고 기가 막혀서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발로 차버렸다. 다분히 진심이 담긴 것이라 잘생긴 레온의 코에서 코피가 한 줄기 주르륵 흘렀고 솔직히 라엘도 당황했다. 레온은 침착하게 시종을 불렀고 곧 적당한 응급처치를 했다. 시종들은 기겁했지만 레온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이거 진짜 또라이 새끼 아냐?

“저 정말로 궁금한데요. 대체 진심으로 원하는 게 뭐예요?”

“네가 내 곁에 있는 것.”

역시 같은 답이 돌아왔고 라엘은 다시 복장이 터지는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이게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거세요, 모르고 하는 거세요?”

“충분히 알고 있어. 이 상황이 네게 괴로움이고 분노가 된다는 것마저도. 그저 이런 행동을 할 정도로 나는 너를 사랑하고, 이 방법 외에는 너를 붙잡아둘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야.”

보통 연인이든, 아니 썸 타는 사이나 짝사랑이나 뭐 기타 등등 바람직하고 제대로 된 정신적인 교감을 하는 사이라면 붙잡음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확실히 달라졌을 텐데 말이다. 일단 마음이 통해야 하고 교감을 위한 행동을 하고 뭔가 기타 등등이 있지 않던가.

단어 그대로 심플하게 붙잡아 매어 놓는 레온을 보며 라엘은 기가 찼다. 너무 신박하게 미쳤는데, 존나 그것을 현실로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미침’게이지가 끝없이 솟아올라 하늘을 돌파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와, 전에도 느꼈지만 황제급 실행력이라는 것은…… 시발 것이네. 참으로 유익한 정보라 생각하며 아직 남은 이성을 그러모아 이성적인 대화라는 것을 해 보려 시도했다.

“그래도 우리, 이 직전까지는 분위기 좋았잖아요?”

“그렇지. 희망이 생기더군.”

“절 풀어주면 폐하를 사랑해 볼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정말로 그 직전까지 갔었으니까 많이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지금 이 미친 짓도 사랑에 돌아버린 당신의 깜찍한 애정 표현으로 받아들일지도 몰라요.”

발광을 하다 지쳐 누워 씩씩 숨을 고르던 라엘이 막 싸지른 제안이었지만 그 안에는 분명히 진심이 있었다.

레온은 웃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참으로 아름다운 미소라고 생각하는 미친 뇌를 쳐 죽이고 싶었다. 저 얼굴을 가지고 어디 시장 통에 가든 고귀한 새끼들을 모아놓고 무도회라도 열어놓든 어디든 그 한가운데서 수청을 들라! 하고 외치면 적절할 것 같았다. 그럼 그 얼굴에 홀린 새끼들이 주르륵 무릎을 꿇을 텐데, 이 멍청한 새끼! 왜 하필 나야! 바빠 뒈지겠는데 이런 미친 새끼가!!

레온은 귀까지 새빨개져 화를 내는 라엘을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우와, 환장하겠네, 진짜로. 돌았나? 아, 돌았지!

“아니, 라엘 너는 날 사랑한다 해도 나를 선택하지 않아.”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데요?”

“넌 절대로 로윈을 버릴 남자가 아니니까.”

결국 라엘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거짓을 말해도 어차피 들킬 것이었고 레온이 말한 것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레온은 빙긋 웃어 보인 후 방 밖으로 나갔다. 정말로 울고 싶었다.

라엘은 온갖 방법으로 패악질을 부리고 물건을 엎고 던지고 레온의 몸에 상처까지 냈지만 결코 자해만은 하지 않았다. 레온에게 가장 타격을 주는 것은 제가 상처받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몸을 함부로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할 일이 많았고 어떻게든 탈출해서 그 일을 마쳐야 했다. 게다가 이미 레온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실제로 다니엘이 죽은- 반역을 부추긴 것만 생각해 보아도 그에게는 사실 자신의 생사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라엘은 참 열심히 먹었다. 육식 위주로, 후식은 샐러드로, 과일도 꼭꼭 다 챙겨 먹고 생과일주스를 꿀떡꿀떡 마시면서 적당한 운동까지 했다. 멀리 갈 수는 없었지만 간단한 스트레칭 정도야 할 수 있었고 장식용 검을 뽑아 검 훈련도 잊지 않고 했다. 시종들은 칼춤을 보고 덜덜 떨었지만 알 게 뭐야!

“네가 음식을 거부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억울해 죽겠는데 밥까지 안 먹으면 더 화나거든요? 소화 안 되니까 당장 나가주세요.”

“네가 밥을 먹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아.”

“아아, 네. 그러시든가 말든가.”

눈앞의 고기를 레온의 몸뚱이로 생각하고 콱 뜯어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질기군! 역시 자신이 밥을 먹는 것을 빤히 보는 레온의 시선이 영 불편해서 라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나하나 다 불편하게 하네?

“왜 제가 밥 먹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제가 죽든 말든 곁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전에는 확실히 그랬는데, 지금은 네가 살아있는 것이 좋아. 라엘 네가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

“앞으로 절대로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소망이네요.”

“어쩔 수 없지.”

적어도 저 손에 목 졸릴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안심이기도 하고 짜증났다. 어차피 제 목숨으로는 거래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힘들어하고 아파하면 괴로워하겠지만 그렇다고 놓아줄 위인도 아니다. 레온은 라엘이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더 용납하지 못할 이였고 제게서 벗어나려 한다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이제는 솔직히 짐작도 되지 않았다. 또라이의 생각을 평범한 사람이 대체 어떻게 알 것인가.

그렇다면 어쩌겠는가. 뭐, 어쩔 수 없지! 나를 챙길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 라엘은 잘 먹고 잘 자고 깽판 치면서 ‘이게 다 다니엘 때문이다!’ 하고 외쳤다. 레온에 대한 울분과 다니엘에 대한 분노는 나날이 커졌고 그것은 발작하듯 패악질을 부릴 때마다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곧 사그라졌다. 몸이 너무 힘들다…….

난장을 부리는 것은 포기했다. 그렇다고 라엘이 다니엘의 유언을 포기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다니엘은 이 낯선 세계에서 오롯이 라엘의 세계가 되어주었고 그가 세계 속에 섞일 수 있도록 발판이 되어 준 사람이다. 그를 만나고 나서야 라엘은 이 세계에 녹아들 수 있었다. 다니엘의 성격이 얼마나 지랄맞든 라엘에게 그는 은인이고 세계에 단 하나뿐인 존재였다.

이쪽 세계에 처음부터 제 자리는 없었다. 그가 제 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종국에는 그의 자리가 제 자리가 되었다. 다니엘이 사라진 지금, 그가 남긴 유언만이 유일한 삶의 목적이었고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한 것을 고작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런 라엘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아니 알아도 별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레온은 여전히 얄밉도록 다정했다.

“라엘, 네가 잘 먹던 과일들이야. 입맛이 없을 것 같으니 이런 것이라도 꼭꼭 먹어둬.”

고기반찬 위주로 밥은 두 그릇씩 먹고 있었다. 그래도 과일이니까 먹는다. 우걱우걱!

“네게 어울리는 보석을 찾았어. 네 검은 눈에 박힌 별과 같은 보석이야.”

느끼한 말을 하며 보석목걸이를 채워주기에 목에서 확 잡아당겨 뜯어냈다. 보석이 산산이 흩어지며 과연, 카펫 위에 별이 쏟아진 것 같긴 하더라. 아주 적절하게 사용하였다. 레온이 기가 죽은 것을 보고 라엘은 팽하니 고개를 돌렸다.

“색이 참 어울리는 것 같아서 옷을 새로 만들어 봤어. 족쇄를 풀지 않아도 입을 수 있게 만들었어. 아, 찢어졌다.”

정말로 입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주 끈질긴 레온의 눈앞에서 옷을 벅벅 찢어줬다.

“요즘 정서적인 안정이 필요한 것 같아서 애완동물을 데려왔…….”

“꺼져요, 제발! 내가 그 짐승새끼를 불에 구워 먹기 전에!”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자 레온이 털 뭉치를 데리고 슬금슬금 밖으로 나간다.

집어치우라고, 좀!! 학습능력이라는 것이 결여된 것 같은 레온을 보며 라엘은 더 이상 화를 낼 기운도 나지 않아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족쇄에 매인 것 외에는 거의 대부분이 전과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아니, 레온에게 패악질하는 것도 주요한 일정 중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그것을 제외하고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레온과 잠자리를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뭐, 말 그대로 같이 잠을 자는 것뿐이었다. 육체적인 관계는 없다. 라엘은 이런 상황에서 성욕이 불끈불끈 솟는 이상 취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레온은 그런 라엘에게 굳이 관계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인형을 안고 자듯 라엘을 꼭 안고 자는 것뿐이었다.

정말로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눈이 돌아버린 자신이 자고 있는 사이에 목이라도 콱 조르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물론 최대 목표가 황궁에서 무사히 빠져나가 로윈을 구하는 것인 그가 황제시해라는 어마어마한 뒤끝 있는 행동을 할 여건은 되지 않았지만, 사실 그러고 싶다 해도 레온은 계속 이럴 것 같아서 무서웠다. 그는 정말로 비범하게 미쳤으니까.

“불편합니다.”

“네가 내 것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어.”

“실례도 아니니까 그냥 말합니다만, 전 절대로 폐하 당신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몸은 내 곁에 매여 있잖아. 그럼 내 것이지.”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네요. 아, 실수.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싫네요.”

“난 그래도 좋아.”

너를 소중히 해야지. 레온은 라엘이 제 품에 안겨있다는 것이 꿈만 같다는 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다리에 철컹대는 족쇄만 아니었다면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이긴 했어. 그 미소에는 어마어마한 독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아아아아주 최근에 알았다는 것은 참 유감이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참 환장하게도 그 미소가 밉지는 않았다.

완전히 잠든 그를 보고 있자면 참으로 착잡한 마음뿐이었다. 조금만 더 뒤를 생각하는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로윈을 되찾고 나면 그것을 로렌에게 자연스럽게 물려줄 생각을 처음부터 하고 있었다. 로렌에게 모든 진실과 다니엘의 유언과 보검을 건네주고 나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드디어 자신이 이 세계의 주민으로, 오롯이 라엘이라는 이름의 한 남자로 살아갈 여러 가지 계획을 세우며 그사이에 가끔 레온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라엘은 자신을 품에 안고 곤히 잠든 레온을 올려다봤다.

“잡니까?”

레온은 답이 없었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아름다운 눈동자를 눈꺼풀 뒤로 감춘 그는 라엘의 목소리에도 깨지 않았다.

“새끼야. 자냐?”

정말로 자나 보다.

라엘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답답했다. 이리도 광적으로 사랑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고 파괴한 그였지만……. 사실 레온은 가장 중요한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라엘은 다니엘이 아니다. 진짜 왕자가 아니다.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 너머에서 레온은 결국 가장 바보 같은 선택을 했고 그것은 둘을 도저히 함께할 수 없게 만들었다.

“멍청한 새끼.”

어긋나서 더 이상은 함께할 수 없게 된 인연이 아주 조금은 아쉬워 라엘은 눈을 감았다.

라엘은 끊임없이 레온에게 불만 많음을 어필했다.

그것은 대부분 방 안의 물건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고 뒤집어엎는 형태로 나타나며, 그 와중에 레온이 나타나면 물건이 그에게 날아가는 것은 이제는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독설은 기본 탑재였고 황제시해 시도는 보너스였다. 레온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점점 늘어났다. 화도 내봤고 울면서 애원도 해 봤고 혹할 제안을 해 보기도 했다. 어떤 방법으로 무슨 행동을 하던 레온은 라엘을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만이 더 확실해졌고 라엘은 점점 지쳐갔다.

메마른 나뭇가지 위에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것을 창 너머로 멍하니 지켜보고 있는데 레온이 자연스럽게 라엘의 곁에 앉았다. 저를 가둔 후 부쩍 곁에 앉거나 옆에 눕거나 어쨌든 가깝게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가 꼴 보기 싫어 의자란 의자를 다 부숴놓고 제가 앉을 단 하나만 남겨놓은 적도 있었다. 그러자 아예 자신이 앉은 의자 옆의 바닥에 앉는 그를 보고는 기가 막혔다. 황제의 체통 따위 없는 거다. 아니 처음부터 없었군! 이 새끼를 대체 어떤 미친놈으로 정의를 해야 할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라엘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감정적으로만 행동할 수 있는 상황이 가능했고, 그 손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쥐어진다면 아마도 레온부터 푹 찍어버렸을 것이다. 열 받으니까.

“너와 첫눈을 함께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저도 발에 족쇄를 찬 채로 이런 풍경을 맞이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했네요.”

“특별한 기분이 들어?”

“네. 개 같은 기분이요.”

라엘이 어떤 방식으로 화를 내도 레온은 웃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해.”

“빌어먹게도요.”

“하지만 놓아줄 수는 없어.”

“제길.”

같은 대답이 돌아오는 것은 마치 젠장맞을 도돌이표 같았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레온은 그런 그의 손을 쓰다듬다가 제 입술에 가져다 댄다. 기가 막혀 내려다보니 레온은 사랑스럽고 예쁜 것을 보는 눈으로 라엘을 올려다봤다. 환장할 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주먹으로 그대로 얼굴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코피 내는 것이 두 자리를 넘어가는 것은 누가 보면 뒤끝이라도 생길까 봐 꾹 참았다. 부들거리는 입술을 꽉 물며 라엘은 고개를 돌렸다.

“라엘, 무슨 생각을 해?”

이 새끼 또 치근덕댄다. 짜증나지만 대답을 안 하면 강아지처럼 옆에서 짖어대기 때문에 라엘은 짜증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이 저주스러운 쇳덩이를 박살낼 수 있을까요.”

“아쉽지만 그건 못 알려주지.”

이를 아득 갈며 창밖을 내다봤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몇이나 말아먹었기에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곰곰이 고민했다. 미친놈한테 감금당한 것부터 시작해서 과거로 더더 넘어가서 차원이동을 한 것까지도 서럽다. 세상에 제일 억울한 것이 다니엘을 만나서 개처럼 일했던 것인 줄 알았는데 그 기록이 실시간으로 갱신되고 있는 것도 놀랍다.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미친놈은 제 손을 주물럭대고 있다. 아, 짜증난다.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자신에게 휘말린 그들은 앞으로 절대로 이 눈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자신의 삶도 방향도 눈 속에 파묻혀버린 듯 차갑고 깜깜하다. 누군가는 충동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 한참을 침묵하던 라엘은 입술을 열었다.

“……생각하고 있어요.”

“무엇을?”

“당신이 뺏어간 내 모든 것들이요.”

고개를 돌려 레온을 마주 보자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올려다본다. 잠시의 침묵 후 그는 라엘에게 사과했다.

“네 아버지와 왕국을 네 손에서 빼앗은 것은 언제나 미안해.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넌 내게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겠지.”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사랑이라 말하는 집착으로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레온이 말하고 있는 것은 라엘에게 있어 진실은 아니다. 타인의 것, 타인의 삶. 자신이 걸치고 있던 것뿐이다. 레온이 빼앗은 것은 다니엘의 모든 것이었고 삶을 빼앗긴 것은 그였다. 라엘이 잃어버린 것은 다니엘 그 자체였다.

“난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잃었어요.”

“그건 뭐지?”

“내 세계.”

“세계…….”

“그는 내 전부였고, 세계였어요. 내가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이유였는데……. 당신 때문에 영원히 사라졌죠.”

굳이 ‘그’라고 지칭하며 잃어버린 것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렸다. 그렇게 레온을 상처 입히고 싶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누군가가 제 가슴속에 있음을, 그로 인해 결코 그를 사랑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었다. 레온의 얼굴은 역시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라엘은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욕심 때문에 누구도 알지 못하게, 정말로 홀로 가버린 존재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적어도 레온은 알고 있어야 했다.

“라엘.”

“뭐요.”

“별 보러 갈래?”

“미쳤죠? 아니, 폐하 당신은 이미 미쳤으니 답을 바꾸죠. 내가 미쳤어요?”

물건을 집어던지는 것도 기력이 달려 침대에 누워 책을 보던 라엘이 기가 막혀 레온을 노려봤다. 참으로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기대에 가득 찬 레온의 눈을 보면 발로 차주고 싶었……. 아, 차 버렸다. 레온은 잽싸게 그 발을 피했고 라엘은 요즘 아슬아슬하게 황제시해범이 되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는 자신을 제어할 수 있었다.

별을 보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레온과는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저랑 시시덕거리며 별을 보겠냐고! 기가 막힌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뺨이라도 한 대 더 때리지 않으면 다행일 상황인데, 아차 훌륭히 욕구를 제어한다는 것은 취소. 진짜 한 대 때리고 싶다.

라엘은 팽하니 고개를 돌리고 책에 집중했다. ……하려는데 슬금슬금 레온이 옆으로 다가왔다. 아, 거 참 성가시네!

“그 책, 재밌어?”

“재밌다고 하면 이것도 불태우시게요?”

“응? 난 그런 미친놈은 아니야.”

우와……우와……우와…… 저 입으로 대체 뭐라고 씨불이는 거냐!? 결국 들고 있는 책으로 레온의 머리를 몇 대 후려쳤다. 얇은 소설책이라는 것이 한탄스러웠다. 두꺼운 양장본이었다면 타격을 좀 줄 수 있었을 텐데! 별로 아프지 않으니까 대놓고 웃고 있는 것이 열 받는다.

라엘이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아마 레온은 백 번은 더 죽었을 것이다. 라엘이 레온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레온은 여전히 실실댄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던 왕국의 왕이며 왕자며 다 죽여 놓고 왕국을 동강내놓고 또 그 왕자들을 생이별시켜 놓고는 뭐라고 하는 거지? 게다가 이제는 자신이 만들어둔 제 상태도 잊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하, 눈이 어디로 출장 갔어요? 제 발에 채워진 이게 뭔데요. 뭡니까, 이게?”

“사랑의 증거지.”

“미친놈의 집착이겠죠.”

“난 라엘이 막말하는 것도 좋더라.”

이 와중에도 예쁘게 웃는 것이 더 열 받아서 라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책에 집중을 시작했다. 하도 부나방처럼 퍼덕퍼덕하는 레온이었던지라 라엘은 요즘 그가 있든 말든 책을 볼 수 있었다. 집중력 향상 훈련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책 제목을 유심히 보던 레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별 보러 가지 않을래?”

“싫어요. 책 볼 거야.”

레온은 아주 예쁘게 웃었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징그럽게도 계속 나타나서 눈앞에서 실실대고 있으니까 공기로 전해지는 느낌이다, 젠장.

“그거 세 번째 보는 거지? 다음 권 나왔어.”

빌어먹게도 이 책은 너무나 재밌었다.

“……갑시다.”

“나는 이런 라엘이 참 좋아.”

“난 이런 당신이 진짜 싫어요.”

라엘은 자신의 족쇄를 풀어내는 레온을 보며 중얼거렸다. 웃지 마, 정들어.

천국에 계신 왕자님, 오랜만이네요. 저는 아직도 왕자님이 천국에 계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말 안 해도 아시겠죠?

요즘 제 꼬락서니를 본다면 당신이 개같이 웃을지 심각한 표정으로 엉덩이를 차버릴지 도무지 상상을 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참 거지같은 상황이에요. 마치 제가 이 세계에 떨어져서 어리바리하니 구르고 있을 때 당신을 구원으로 착각했던 것만큼이요! 이걸 좀 보세요! 제가 오늘도 이 미친놈이랑 별 보러 왔다니까요, 하하하!! 딱히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건 아닌데 이 새끼 때문에 못하고 있는 거니까 저 대신 이 새끼 좀 욕하세요!

밤하늘에 아름답게 박힌 별을 보며 라엘은 중얼거렸다. 이 세계의 별자리는 예전의 곳과는 달랐지만 그럼에도 별을 올려다보면 고향을 떠올릴 수 있었다. 로윈에서 지낼 때도 가끔 별을 보러 갔었다. 웅크리고 앉은 라엘을 레온은 뒤에서 껴안았다. 짜증내며 뿌리치려 했지만……. 힘이…… 세다……. 미친놈은 힘이 세다더니…….

“라엘이 사랑하던 그 사람은 별이 되어 있을 거야.”

게다가 별 돼먹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인다.

“별은 개뿔. 백골이나 돼 있겠죠.”

라엘은 있는 힘껏 자신을 껴안은 그 팔을 있는 힘껏 떼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욕을 중얼거리며 몸에 힘을 빼자 그제야 레온도 팔에 힘을 뺐다.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좀 꺼져주세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누워서 별 좀 보고 싶거든요?”

라엘의 말에 순식간에 제 몸에서 팔이 풀렸다. 이제는 레온이 뭘 하든 저 할대로 하는 것이 복장이 덜 터지는 것을 깨달았기에 라엘은 그대로 풀썩 풀밭 위에 누웠다. 레온의 그림자가 제 위에 드리우더니 다시 저를 일으켰다. 뭐하자는 건데? 미간을 있는 대로 찡그려도 레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걸치고 있던 털 망토를 벗어 라엘의 아래에 깔아주었다. 뭔가 귀한 가죽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알 게 뭐람.

“바닥이 매우 차. 감기 걸릴지도 몰라.”

“바이러스 같은 존재가 대체 뭐라는 거야.”

“응?”

감기 걸릴지도 모른다며 웃는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는 상냥하고 잘생긴 남친의 것이 틀림없었다. 문제라면 배려를 받고 있는 자신도 남자 그도 남자, 그리고 레온은 제 원수 중의 원수였다.

“비켜요. 눕게.”

“응.”

확실히 바닥은 따뜻했으니 옆에 슬그머니 기어오는 레온을 무시하고 라엘은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제가 어떤 상황이든지 별은 영롱하게 빛나니 차라리 안심이 됐다. 이 새끼만 제외하면 아직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구나. 그냥 평범하게 이 새끼가 재앙인 거다.

“별 예쁘다.”

“네가 더 예뻐.”

“아……. 옆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대놓고 레온을 무시하는 라엘이었지만, 레온은 그런 라엘마저도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미친놈 주제에 마치 순정남처럼 라엘이 뭘 해도 좋고 뭘 해도 사랑스럽다고 한다. 하도 그런 말만 듣고 있다 보니까 이제는 진짜로 자신이 천하절색이라 그가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차원이동 전에도 얼굴이며 몸매가 완벽해 그런 자신을 이미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설마 이 미모가 남자까지 꼬실 줄을 몰랐다. 그것도 다른 세계의 남자를! 핫! 핫 ! 핫! 우와, 젠장!

라엘은 여전히 족쇄를 차고 생활하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끝에 달린 사슬의 길이가 처음보다 어마어마하게 길어졌다는 것 정도였다.

제풀에 지쳐 라엘이 물건들을 집어던지지 않게 된 시점에서 레온은 그 대단한 사슬을 준비해서 움직임에 제한을 덜어줬다. 덕분에 라엘은 스스로 욕실이며 복도의 일부까지 나갈 수 있었다. 이전처럼 레온이 욕실 안으로 따라오지 않는다는 것만이 위안이었다. 등을 돌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제가 씻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게 다 보이는데! 소름이 돋는데!

굳이 움직임에 제한을 풀어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날 뭘 믿고 이런 기회를 주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라엘은 사슬이 교체되자마자 복도로 나가서 황동 흉상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사슬을 죽어라 내려치기 시작했다. 깡! 깡! 금속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 주위로 시종들이 안절부절못하며 맴돌았지만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괜히 말렸다가 서슬 퍼런 라엘의 손에 들린 우그러진 흉상이 제 머리를 내려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흉상이 제 형태를 모두 잃어버릴 때까지 사슬은 멀쩡했는데 그 이유는 여유 있게 도착한 레온이 말해주었다.

“미스릴이야.”

“시발!”

전설의 광물을 이딴 데다 쓰지 마! 라엘은 이딴 원시적인 도구로는 사슬을 끊을 수 없음을 깨닫고 흉상을 집어던졌다. 와장창 깨지고 부서지고 구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알 게 뭐람. 레온은 그런 라엘의 행동마저 칭찬했다.

“남자다워.”

대체 어떤 행동을 해야 저 미친놈이 자신을 미워할 것인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주 원시적이고 지저분한 방법까지 진지하게 떠올린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품위를 그곳까지 떨어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쌍욕을 있는 대로 다 쏟아붓고 있는 중이라 이미 기품은 다 깨부숴진 것은 알고 있지만, 아직 행동에 품위라는 것을 아직 아슬아슬하게 지켜내고 있는 중이었다.

“진지하게 물어 보는 건데 말입니다만.”

“난 언제라도 라엘의 질문에 답을 할 준비가 되어 있어.”

“대체 내가 어디가 좋아요?”

순수한 궁금증으로 질문을 했던 라엘은 20초도 되지 않아 후회했다. 항마력 테스트를 하는 것 같았다. 5분까지 버틴 후 어떻게든 그 입을 다물게 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몇 시간을 자신에 대한 찬사라는 이름으로 말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미 주변 시종들은 전부 귀를 막더니 사라졌다. 언어폭력 수준이었다. 장미꽃 내 나는 핑크빛 말 속에서 라엘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험을 했고, 다시는 그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저주스러운 쇳덩이 끝에 매달린 것이 심지어 미스릴 사슬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 라엘은 지랄을 해도 소득이 없음을 깨달았고 다시 책상에서 책이나 읽는 생활을 이어갔다. 괜히 힘 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펼치는데 또 레온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이번엔 무슨 말을 하려고. 짜증스럽게 그를 올려다보자 레온은 왠지 처연하게 웃는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아뇨.”

“네가 사랑하던 그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야?”

“묻지 말라니까요?”

“네 사랑을 받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제 말 안 듣고 있는 거 맞죠?”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 어떤 사람이었기에 네가 사랑을 했을까?”

난 단 한 조각도 얻을 수 없는 사랑을 그는 가졌구나, 라고 레온이 말을 했을 때 라엘은 이미 어이가 승천하여 용솟음치는 중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연애고민 털어 놓을 자리입니까, 응? 아예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제 말만 싸질러대는 그가 어이가 없었다.

대체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솔직한 라엘의 마음이었다. 스스로 알아서 착각하는 그 상태가 또 어이없었다. 소중한 사람이랬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는 안 했는데? 그러나 알아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해석을 한 레온의 말을 굳이 정정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또 상태를 보아하니 말을 해 봤자 들어 처먹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세상에, 다니엘과 내가! 하필이면 다니엘과! 서로를 어떻게 해야 더 큰 빅 엿을 먹일 수 있을지를 매번 고민하며 자리를 바꿀 때마다 빅똥을 선사해놓고 서로 수습을 시키던 그런 자신과 다니엘이 사랑을……. 라엘은 잔뜩 소름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 황제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만큼이나 소름 끼치는 상상이었다. 대답을 원하는 레온에게 라엘은 대충 한마디를 던져 놨다. 귀찮게 그런 질문을.

“그냥, 저 같은 사람이에요.”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극히 사실이었다. 하지만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왜, 뭐!

“라엘 너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 세상에 더 있을 리가 없는걸.”

기가 막혔다.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드는 것으로 암살을 하려는 건가, 이건. 새로운 왕자 살해법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차원이동자 살해법. 느끼한 말투에 느끼한 단어까지 더해지자 피부를 변화시키는 마법이 일어난다. 닭살 돋아!

“……제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요?”

레온은 또 기가 죽었다. 이번에도 뭔가를 착각한 것 같다. 레온은 제 말에 자신만의 재해석을 훌륭하게 해냈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네게는 그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이었구나…….”

뭐, 뭐뭐뭐뭐!!! 라엘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마치 나르시시즘 키우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다니엘이 뭐, 사랑…… 뭐!? 원래 도플갱어라는 것은 서로 만나면 한쪽이 뒈져버리는 것이 맞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전쟁 같은 존재였다. 아련함의 콩깍지가 아직 끼어 있긴 하지만 솔직히 다니엘에게 사랑스러운 감정을 단 한 번이라도 느꼈냐고 하면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솔직히 그거였다. 형제와 같은, 시발 떨어질 수 없는 원수.

“절대로 아닙니다만?”

그러나 자신만의 해석에 빠진 레온을 건져내기에는 미약한 발버둥이었고 라엘은 그를 발로 차버리고 싶은 욕망에 발을 움찔거려야 했다. 예전에는 정말로 다니엘만 차버리고 싶었는데 그가 죽고 나니까 황제가 이제 차달라고 앞에서 알짱대는구나. 라엘은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레온이 구해다 준 소설의 다음 권은 참 재밌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사실 제일 무서운 건 이 상황에 슬슬 적응되는 자신이라는 것을. 나도 미쳐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황궁의 유리정원에는 한겨울에도 꽃이 만발해 있었다. 이전에도 보았던 광경이지만 정원의 유리벽 너머로 눈이 내리고 그 안쪽에는 꽃이 만발한 광경은 퍽 아름다운 것이었다. 저쪽 세계의 유리온실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마법이 머무르는 세상의 유리정원은 계절을 머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그곳으로 옮겨두었다. 사계가 유리정원 안에 머무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 찬사를 아끼지 못할 것이다.

레온은 여전히 라엘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었고 라엘은 뭐, 이젠 산책이겠거니…… 하고 반쯤 체념하여 따라왔다. 빌어먹게도 발에 매인 족쇄를 풀 수 있는 시간이라고는 그와의 산책시간이 유일해서 선택권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레온의 기름진 말이나 닭살 돋는 말이나, 어쨌거나 그의 말만 아니라면 사실 좋은 기분전환이 되기도 했다. 레온이 라엘을 데리고 가는 곳은 엄선된 아름다운 곳들이었으니까. 레온의 말을 한 귀로 흘려버리는 능력을 습득한 라엘에게 그런 장소들은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책이나 읽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만발한 꽃 사이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레온을 마주 봤다. 미친놈에 원수라는 필터를 내려놓고 본다면, 사실 황제는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도 어쩜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로 더없이 완벽하고 신비로운 이. 보석 같은 눈이며 매끄럽게 뻗은 콧날에 부서지는 햇살이 아름다우……. 제길! 얼굴에 또 홀릴 것 같아서 라엘은 고개를 돌렸다. 레온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짜증날 정도로 아름다운 보이스, 시발…….

“폐하.”

“언제쯤 다시 레온이라고 불러 줄 거야?”

“족쇄 풀고 로윈을 되찾을 때요.”

“아마도 영영 힘들겠구나.”

순간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한 옘병!을 꼭 잡아 눌렀다. 라엘은 잘 참았다. 진정해, 황제야. 미친놈이지만 황제야.

온갖 패악질을 다 하고 있다지만 라엘은 나름의 선을 두고 있었다. 혹시 레온의 변덕으로 풀려났을 경우를 대비하여. 어쨌거나 그는 제국의 황제였고 자신은 로윈의 왕자 입장이었다. 로윈을 되찾아도 레온의 눈 밖에 나고 왕국의 존위가 위태로워진다면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래서 라엘은 레온이 보기에는 앙……탈……(시발!!) 정도로 허용되는 수준에서, 격을 넘지 않았고 나름 절제하여 모욕적이지 않은 범위 내에서 레온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위험물을 열심히 던지긴 하지만 어차피 잘 피하니 상관은 없었다.

탈출할 방법도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 그리 탈출한다면 사실 황제가 제게 직접 핍박을 주기에는 어려웠다. 개인 대 개인으로는 그가 자신을 이리할 수 있었지만 사실 제국과 왕국의 문제가 된다면 다른 이야기였다. 이유 없이 로윈의 왕자가 핍박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주변의 왕국들도 제국의 행패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라엘은 레온이 자신을 겁박할 이유를 만들지 않았다. 하긴, 이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그가 자신을 겁박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못했다. 지금 로윈의 왕위계승자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공식적인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문득 궁금해졌다.

“폐하께서 저를 로윈으로 보내줬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네가 날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겠지.”

“제가 폐하를 사랑하게 됐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요?”

“그런 희망을 품은 적은 있어. 하지만 결국 넌 날 떠났을 거야.”

“일생을 폐하를 품고 살더라도. 제가 그렇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래도 이렇게 저를 가두려 했을까요?”

레온은 라엘이 질문하는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라엘의 검은 눈과 레온의 푸른 눈이 잠시간 마주쳤다. 라엘은 잠시 그 시선을 마주하다 결국 고개를 돌렸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레온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글쎄. 어떻게 됐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리고 네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도.”

“그런 가능성을 폐하, 당신이 모두 짓밟았기 때문이에요.”

힘없이 웃으며 대답한 라엘을 레온은 잡지 못했다. 라엘은 그를 버려두고 정원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고, 레온은 이번에는 그 뒤를 쫓지 않았다.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창틀을 까득까득 긁는 소리에 라엘은 눈을 떴다. 잔뜩 예민해져 있는 그는 이젠 별것이 다 가지가지로 속을 긁는다며 짜증을 냈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떠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눈보라가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두드린다기보다는 ‘두들기다’ 수준이라 조금만 더 있으면 창문을 깨부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엄청나게 강하게 부딪치는 눈발에 라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날씨 한번 내 마음같이 구리네.

몸을 일으키려던 라엘은 뭔가에 가슴이 딱 걸려 침대로 고꾸라졌다. 고개만 들어 가슴께를 보니 레온의 팔이 제 가슴팍 위에 턱하니 올려져있다. 잠을 자면서도 죽을힘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자는 통에 없던 불면증이 생길 지경이다. 몸 관리며 컨디션 조절에 열심히 신경 쓰는 라엘로서는 참 짜증나는 일이었다. 아니, 사람이 잠을 자려면 숨이라도 쉬어야 할 것 아닌가.

“이보세요, 폐하. 팔 좀 어떻게 해주고 주무시던가요.”

“……아. 라엘…….”

피곤하기라도 했는지 레온은 라엘이 팔을 퍽퍽 치는데도 잠꼬대만 할 뿐 통 잠에서 깨지 못했다. 오히려 잠결에 라엘의 이름을 부르며 더 달라붙었을 뿐이다. 오징어빨판인 양 철썩철썩 감기는 팔다리에 짜증을 내며 레온을 밀어내던 라엘은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허벅지에 닿는 제 것이 아닌 단단한 이물감은 참으로 익숙한 것이 아닌가. 아아, 그렇다. 날이 구려도 일단 아침은 아침인 것이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인 것이고……. 으아악! 짜증나!

정말로 잠결인지는 의심스럽지만 레온은 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라엘의 허벅지에 자신의 것을 비비기 시작했다. 얼마나 단단하게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지 벗어나는 것조차 요원하여 라엘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뇌까리며 뻣뻣하게 몸을 굳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눈을 뜨면 수치사라도 당해버려라, 저주를 하며 눈을 꼭 감았을 뿐이다. 그러다 갑자기 레온의 움직임이 멈추더니 작게 헉 하는 경악이 들렸다. 화들짝 떨어지는 몸을 보며 라엘은 외던 불경을 멈췄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보다.

“……라, 라엘……. 이건…….”

때맞춰 라엘이 눈을 뜨고 지그시 그를 응시하자 레온은 더욱 당황했다. 뭐라고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잠에서 막 깬 사람이 당황하기까지 하자 그건 횡설수설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레온을 보며 라엘은 쯧 하고 혀를 찼다. 뭘 또 설명하려 하시나. 모닝 발기에 저에게 욕정을 일으켜서 비벼댄 거지. 황제에게 혀를 차는 무례한 행동을 대놓고 했지만 역시 레온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변명만 주섬주섬 주워 담고 있었다.

솔직히 같은 남자로서 그런 생리현상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잠결인 것은 둘째 치고, 사실 레온은 자신을 붙잡아 놓은 뒤 거의 두 달 동안 강제로 고자 비슷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으니까. 라엘은 그와의 잠자리를 단호하게 거부해왔고 레온도 그가 거부하는데 억지로 품으려 하지 않았다. 워낙 손을 대지 않기에 다른 데서 욕정을 풀고 오지는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본 적도 있는데 역시 고개를 저었다. 남는 시간마다 제 곁에 답삭 붙어 있는 그를 생각하면 그럴 시간조차 요원하다. 게다가 경험상 그는 절대로 조루가 아니었으므로 비는 시간에 뭘 하기도 모자란다.

당황한 레온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아침부터 그에게 욕정을 일으키는 제 모습을 보인 것이 부끄러운 것이리라.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쪽을 흘긋거리는 눈은 욕망에 이글거리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한 가지 반응만 보여줬으면 좋겠지만 그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대놓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여전히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라엘이 그것을 빤히 바라보자 레온도 부끄럽기는 했는지 손으로 재빠르게 가렸다. 수줍은 처녀처럼 행동하는 그의 눈이 이미 자신을 잡아먹을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지만 않았더라면 꽤 볼만했을 거다. 가만있으면 강제로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이 드는 순간 레온은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라엘에게서 등을 돌린 그는 아마도 혼자서 그것을 처리할 것이다. 여기서든, 다른 데서든.

“……미안.”

잔뜩 기가 죽은 데다 부끄러움이 묻어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참 웃긴 사람이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은 그야말로 또라이에 미친놈인데 하는 말만 들어보면 순정남이고 순애보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이 아주 따로 춤을 추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부조리와 불합리의 산물을 너무 오래 접해서였을까,

“저를 원해요?”

라엘이 말했다. 어째서 이 말을 꺼냈는지는 솔직히 그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확실한 것은 그것은 매우 충동적이었으며 말을 꺼내자마자 레온이 움찔거리며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는 것이다. 그는 조금 움츠러든 등을 돌려 라엘을 마주 보았다. 눈 밑이 붉게 물들어 금세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젖어있는 그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던 라엘은 옷 단추를 하나씩 끌러내기 시작했다. 레온은 홀린 듯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마지막 단추를 풀었을 때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그는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가지세요.”

의외의 말에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욕망을 이만큼이나 눌러온 사람이었다. 그가 가지고 싶은 것은 라엘의 몸뿐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라엘은 그를 거부할 수 있었고, 레온의 불필요한 스킨십이 늘어났을지언정 억지로 덮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처음 레온의 배신을 알았을 때 라엘이 한 말, 범하고 사용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형태가 전혀 아니었으니. 라엘은 분노에 제 몸을 자신의 품에 내던지려 했지만 그것은 원치 않았다. 이성을 부여잡고 레온은 대답했다.

“……라엘, 난…….”

“망설일 필요 없어요.”

상의가 침대 위로 툭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희게 드러난 어깨며 목덜미를 저도 모르게 눈으로 훑던 레온은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두 눈을 꼭 감은 채였다.

“네가 원하지 않는 것을 알아. 난…….”

“지금은 내가 원해요.”

라엘의 대답에 레온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떴다. 눈을 뜨고 올려다본 그는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결코 행복이 아닌 처연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웃고 있었다.

“이제 제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졌어요.”

라엘이 남은 옷들을 마저 벗어던졌다. 완연히 희게 빛나는 몸을 보며 레온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참 우습게도……. 정말로 당신밖에 없네요.”

스스로 자신의 품에 안겨드는 라엘을 레온은 결국 끌어안고 말았다. 지독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의 선택이 온전히 스스로의 것이 아님을, 자신이 조각조각 부수어 엉망으로 만든 것 안에서 결국 선택할 수 있던 것이 그뿐임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기뻤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안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가 소중하지 않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럼에도 라엘을 안을 때 자신은 자제할 수 없었다. 상냥하게 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그를 안을 때는 언제나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가 있었다. 절박함과 함께 그를 안았다. 그리하지 않으면 자신이 곧 죽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이런 것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라엘은 모든 것을 체념했을 뿐이다. 자신에게 안겨드는 라엘은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이전처럼 그를 안을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충격을 받으면 산산조각 날 것 같은 연약한 유리인형을 안듯이, 레온은 그렇게 라엘을 끌어안았다. 처음부터 그를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 따위는 없었다.

입술을 가져다 대자 어떤 거부도 없이 라엘의 입술이 열렸다. 날숨이 뒤섞이는 것이 등골을 짜릿하게 만든다. 안을 헤집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며 조심스럽게 혀를 집어넣자 뜨겁고 젖은 것이 호응해온다. 달콤한 것을 정신없이 맛보며 옷을 벗어던졌다. 투둑거리며 단추가 떨어져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맨살이 맞닿는 감각에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정신없이 입술을 맛보고 부드러운 살을 손가락으로 손바닥으로 훑었다. 온몸을 틈 없이 밀착시키자 눌러오는 체중이 버거운지 라엘이 밭은 숨을 내쉬었다. 급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팔을 단단히 고정시켜 라엘을 아래에 가두고 내려다보았다. 뺨이 붉게 물든 그가 숨을 헐떡이며 자신을 올려다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허벅지를 벌리자 그마저도 어떤 저항도 없이 레온의 움직임에 따라 벌려진다. 레온은 눈을 끔뻑였다.

지치고 힘든 나머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적선처럼 내어주는 몸이라 하여도 그것마저도 자신에게는 절박하였다. 그가 비참함을 느끼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그렇게라도 무엇 하나라도 얻고 싶은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라엘을 향한 마음은 온통 모순덩어리다. 이리 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해서라도 가지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뿐이다.

고개를 숙여 들썩이는 가슴을 입 안에 담았다. 강하게 빨아들이자 작은 신음과 함께 라엘의 상체가 들썩인다. 가쁜 숨을 내쉬는 것을 진정시키며 단단하게 선 작은 돌기를 혀로 굴리며 맛보자 목소리가 천천히 젖어 들어간다. 등을 주무르다 엉덩이를 감싸 안는 손에 라엘은 긴장한 듯 했지만 역시 피하지는 않았다.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오른 욕망을 간신히 누르며 레온은 라엘의 다리를 벌려 허벅지 사이에 감추어진 여린 속살을 지분거렸다. 인내심 있게 손가락의 개수를 천천히 늘려가며 안쪽을 벌렸다.

“……으, 흐읏……!”

안쪽을 자극할 때마다 라엘의 허벅지가 떨렸다. 시트를 꽉 쥐던 손이 레온의 어깨를 밀어내다 다시 그것을 꽉 쥐었다. 긴장하며 벌벌 떨리는 손마저 사랑스럽다. 어깨에서 손을 떼어 손바닥에 입 맞췄다. 긴장하여 뜨겁게 달아올라 땀에 젖은 것은 입술이 닿을 때마다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가슴을 달싹거리며 몽롱하게 달아오른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라엘을 보자 이제는 정말로 한계에 다다라 레온은 부풀어 오른 것을 그의 아래에 꽉 대었다. 라엘의 입술이 작게 열리며 헐떡였다.

“라엘, 라엘…….”

“아, 아앗……”

삽입의 고통은 이전만큼 크지 않았다. 레온은 놀랄 만큼 부드럽게 라엘을 안았다. 지금까지처럼 거칠고 숨 막히는 관계를 상상했던 라엘이 오히려 놀랄 정도였다. 천천히 안쪽을 파고드는 감각에 끙끙대며 몸을 뒤틀자 다정한 손길이 등을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준다. 아주 천천히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반복하는 것에 안쪽이 자극되어 무릎이 움츠러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부드러움이 불러온 것은 낯선 감각이었다. 그것은 라엘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흐…… 앗!”

어, 어……? 라고 생각한 순간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목구멍을 뛰어넘는 소리는 쾌락에 젖은 신음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진득한 감각에 허리를 들썩이자 레온이 환희에 젖어 입술을 겹쳤다. 천천히 안쪽을 드나드는 것이 어느 지점을 자극할 때마다 발가락이 움츠러들며 허벅지가 벌벌 떨린다. 앗, 아……. 젖은 살 부딪히는 소리와 짧고 길게 목구멍을 넘나드는 신음소리가 레온의 것과 섞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색색 가쁜 숨을 들이켜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지만 낯선 쾌락은 정신을 몽롱하게 한다. 레온이 라엘을 꽉 끌어안았다. 빈틈없이 자신을 완전히 끌어안은 레온이었지만 허리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젖은 살이 마찰하며 아플 정도로 세게 부딪혀왔지만 안쪽에서부터 열기에 점령된 몸은 아픔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시……, 아, 아……. 흐앗……!”

“라엘, 라엘……!”

낯설고 당황스러운 감각에 라엘은 결국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듯한 감각이 두렵다. 레온과 몸을 섞을 때는 언제나 눈물을 흘렸음에도 이번에는 이전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명백한 쾌락이 섞여 흐르는 눈물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달콤한 무지의 각성이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라엘은 생각했다. 이런 와중에도 절절하게 자신을 끌어안는 레온이 안타까웠다. 그런 그에게 안겨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자신이 역시 또 바보같이 느껴져서 라엘은 도무지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라엘이 스스로 자신에게 안긴 후 레온은 그가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물론 라엘은 레온을 보는 순간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고, 가끔 유난히 화가 치밀어오를 때에는 장식용 도검이나 집기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긴 했지만. 사랑고백은 여전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는 있지만……! 어쨌든 미묘하게 뭔가가 달라진 것이다. 그러니까 뉘앙스 같은 그런 부분이! 확신이 서지는 않지만……! 어쨌든 변화가 있는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드는 것이다.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엘을 제 곁에 두기 위해 레온은 그와의 있을 수 있는 모든 미래를 포기하고 그저 그 몸만을 얻은 것이었다. 그에게 사랑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것을 갈구할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었다. 그러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제가 그를 사랑하는 일방적인 관계였으므로 감정의 방향마저도 일방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아주 잠시라도 기대라는 것을 품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라엘, 그런데…….”

“뭘 묻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입 닥쳐주실래요?”

“어째서 갑자기 내게 몸을 허락한 거야?”

“죽어라 말도 안 듣네.”

세상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라엘은 우울해졌다. 갑자기 다니엘이 그리워진다. 시도 때도 없이 회상되는 다니엘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나마 자기 말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준 것이 그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니엘 잃고 나라 잃고 이제는 자유마저 잃고 이딴 식으로 갇혀있는 것이 서러운데 주변에는 말을 들어주는 사람 하나 없다. 자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벽이었다, 벽. 서러움이 폭발하는 기분이 든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냥,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무엇을?”

“그냥 그것뿐이에요.”

친절하게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아닌데 굳이 제가 친절하게 설명해 줄 필요가 있을까. 라엘은 입을 다물었고 레온은 끈질기지 않은 척 끈질기게 되물었다. 얼마나 끈질기게 물었는지 라엘이 그날 제 몸에 손끝 하나도 대지 못하게 했고, 그 후에야 레온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 납득했다. 원인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지.

하지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희망을 어찌해야 할까. 기대하지 말라 다짐하는데도 자꾸 생각나는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 번 몸을 섞기 시작하자 그다음은 금방이었다. 막힌 둑이 무너지자 고여 있던 물이 쏟아져 내리듯 레온은 라엘에게 욕정을 일으켰고 그를 원했다. 지금까지 참아온 것이 거짓말처럼 그는 거의 매일같이 달려들었고 라엘은 질색했다. 그렇다고 강제로 관계를 가지는 것은 또 아니었다. 어쨌거나 레온은 언제나 라엘의 의사를 물어보긴 했다. 요즘에는 허락에 별다른 의미가 없긴 했다. 하지 않겠다고 말해도 할 때까지 집적대는 그였고, 결국 라엘은 반쯤 포기한 채로 허락을 하고 마는…… 그런 요즘이었다. 한 번 쾌락에 적응된 몸은 다시 그것을 갈구했고 둘의 속궁합은 라엘의 표현에 따르면 ‘지랄맞게’ 잘 맞았다.

“있잖아, 라엘.”

“왜요.”

“이러다보면 네가 나한테 몸 정 들어서 날 좀 좋아해주지 않을까?”

“닥쳐요.”

대화의 궁합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라엘은 미친 미스릴 사슬이 끊기기를 간절히 원했고 여전히 황궁을 뛰쳐나가고 싶어 했다. 온 방의 장식용 검이며 금속제 흉상들은 빠른 속도로 고철덩어리가 되었고, 사슬을 끊는 것이 잘되지 않자 테라스 유리문을 박살낸 것은 벌써 스무 번째였다.

그중에도 라엘의 스트레스 지수가 급격하게 상승했던 것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얼마 전에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던 애먼 귀족 하나를 인질로 붙잡아 인질극을 벌인 것이다. 불운한 그 청년은 참으로 우연히도 권력 있는 귀족의 아들이었고 라엘은 아주 잘됐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희멀건 얼굴 아래 목덜미에 검을 가져다 댔다. 사슬을 하도 내리쳐서 이가 다 나간 장식용 검이었지만 라엘의 손에 들려있는 이상 훌륭한 흉기였으며 그것은 라엘에게 엄청나게 얻어맞은 레온이 가장 잘 알았다. 그는 서슬 퍼런 눈으로 칼을 노려보았다.

“팔을 잘라버릴 거야.”

“제 팔요?”

“아니 쟤 팔.”

라엘에게 포박당하여 칼로 위협당한 죄밖에 없는 젊은 귀족은 제 황제 앞에서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라엘은 기가 막혔다. 분명히 잘나가는 세력가의 자식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딴 취급을 해도 되는 것인지. 잠시 고민하고 해야 할 말을 골랐지만 결국 나오는 말은 익숙한 의문형이었다.

“왜요?”

“너한테 닿았잖아.”

“미쳤네.”

그 미친 대화에 젊은 귀족은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인질로서 가치는커녕 예비 시체로서의 가치만을 재발견한 그의 팔을 라엘은 놓아주었다. 그러나 잔뜩 겁에 질린 젊은 귀족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며 그가 그리 겁에 질린 가장 큰 문제는 당장 죽여 버릴 것처럼 그를 노려보는 레온의 시선 때문일 것이다. 우습게도 조금 전까지 그의 목숨으로 흥정을 해 보려고 인질극을 벌였던 라엘이 그를 도와줘야 했다.

“해 보기만 해 보세요. 시체 한 구 볼 거예요.”

“지금 내 눈앞에 보여.”

“그 시체 말고 미스릴 사슬에 목매인 시체요.”

위협적으로 레온을 보며 으르렁거리자 그제야 혀를 차며 레온은 턱짓으로 젊은 귀족을 내보냈다. 잔뜩 굳어있던 그는 화들짝 놀라 거의 기다시피 하여 방 밖으로 달아났다. 사람 목이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대화에 잔뜩 긴장하여 돌아가는 추이를 보던 시종들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라엘이 뒤집어놓은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주 익숙한 노동이었다.

“이러다가 내 눈에 닿는 남자들은 다 잡아 죽이겠다고 하시겠네요?”

라엘이 웃는 낯으로 빈정거리자,

“여자라고 다를 것은 없는데.”

소름 끼치는 말을 하며 레온이 환하게 웃는다. 아름답고 티 없는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면 생각나는 단어는 꼭 하나밖에 없다. 이제는 지긋지긋하게 내뱉었던 말이기도 하다.

“신개념으로 미쳤네요.”

“너에게 미쳤지.”

라엘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미친놈의 그릇을 가늠해보려던 내가 멍청이지!

요즘 들어 라엘이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전에는 레온이 나타나면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씹어 먹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분노로 가득 찼던 눈이 근래에는 꽤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약간 넋을 놓은 듯,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가만히 생각에 잠기고는 하는 것이 낯설었다. 낯선 모습까지 너무 예쁘다고 생각해서 방심한 사이에 슬그머니 다가가서 볼에 뽀뽀를 하고 뺨을 얻어맞을 준비를 하는데……, 라엘이 가만히 레온을 한 번 보더니 그냥 자리를 피했다.

레온은 당황했다. 평소라면 욕을 쏟아부으며 뺨을 때리고 정강이를 발로 차고 주변의 물건을 던지며 자신을 매도할 라엘이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 ……! 미안! 잘못했어!”

레온의 무릎이 굉장한 속도로 바닥에 닿았다. 라엘이 이제는 대꾸도 하지 않는 쪽으로 대응노선을 바꾼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로 자신에게 괴로운 일이 될 것이었다. 차라리 욕을 듣고 얻어맞는 쪽이 백배 더 나았다. 라엘은 무릎 꿇은 그를 보며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그것을 보고…… 좀 안심했다.

“차라리 때려, 응?”

“……변태세요? 우와, 미친 줄로만 알았는데 변태도 이런 상변태가 없으니 제국의 앞날이 심히 걱정이 됩니다?”

“그래. 무시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네 독설을 듣는 것이 나아.”

“변태다. 진짜 변태다. 싫다……. 엄마 보고 싶다…….”

라엘은 조금 전 레온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벅벅 문지르며 엄마를 외쳤다. 몹시 우울해진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신음을 꾹 눌러 참는 라엘을 보며 레온은 꾹 감은 그의 눈꺼풀에 입 맞췄다. 제 아래에서 천천히 흔들리는 흰 몸이 참으로 아름답다. 옅은 색으로 예쁘게 솟아오른 것을 핥고 여린 살들을 쓸어내리며 찬사를 아끼지 않자 라엘이 끙끙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 닥쳐요.”

“목소리가 잠겨서 섹시해…….”

“……미친.”

정신없는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는 라엘이 그렇게도 사랑스럽다. 이제는 관계 중에 제법 느끼며 근사한 신음 소리까지 내기 시작한 그가 요즘 레온의 즐거움이었다. 사랑한다, 속삭이며 그를 안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더 이상 안달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라엘도 빠르게 관계에 적응했고, 처음에는 끝나자마자 지쳐서 곯아떨어지던 그가 이제는 조금 지친 기색을 보일 뿐 제 품안에서 눈을 끔뻑이며 숨을 고르는 것이었다. 젖은 이마며 볼을 쓸어내리며 땀을 닦아주자 라엘이 고개를 돌렸다. 관계 후에 이런 식으로 수줍어하는 것도 귀여웠다(콩깍지).

“사랑해, 라엘.”

“그 말 좀 안 할 수 없어요? 지겨워 죽겠네.”

“난 내가 널 사랑한다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네 험한 말도 사랑해.”

이마에 키스하며 ?라엘의 입장에서는 개소리를-속삭이자 라엘이 한숨을 쉬었다. 성질부터 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이었다.

“미친 소리 그만하세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짜증내는 라엘의 말에 레온은 눈을 끔뻑였다. 근래 자주 느끼는 미묘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무언가 변화가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되는, 자신 외에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아주 미묘한 변화.

짜증을 내며 몸을 돌리려다 앓는 소리를 내며 결국 제 품에 안겨 잠든 라엘을 끌어안았다. 레온은 그의 정수리에 코를 묻고 눈을 감았다. 향기롭고 사랑스럽다.

라엘의 몸이 비쩍 말라가기 시작했기에 레온의 걱정은 멈추지 않았다. 자신과 드잡이를 하면서도 몸 관리만은 철저하게 하던 그였기에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통 잘 먹지 못하는 라엘을 위해 영양가 있는 특별식들을 매일 만들어 날랐지만 그는 몇 입 넘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음식을 물렸다. 라엘이 음식을 거부하는 것을 본 레온의 심장이 쿵하고 떨어졌다. 혹시 병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가 하여 의사를 불렀지만 병명은 딱히 없었다. 스트레스성이라는 답뿐이었고, 지금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오면서도 밥만 잘 먹던 라엘이 갑자기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저주라도 걸린 것인가 해서 마법사를 불렀지만 역시 아무 이상 없었다.

“저한테 걸린 저주라고 한다면 그건 폐하, 당신의 존재 그 자첸데요?”

라엘의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호들갑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때때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는 라엘을 보며 레온은 안절부절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정신이 산만하다며 타박하면 그마저도 좋다고 웃는 그를 보고 라엘의 콧잔등이 찡그러졌다. 무슨 똥 싼 개처럼 저러는 거야. 이미 개새끼 이상의 존재가 아니었기에 라엘은 거리낌 없이 불경스러운 생각을 해냈다.

“하지만 라엘…….”

“폐하.”

“으, 응?”

그를 부르면서도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곧 그에게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 살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었다. 뭘 이제 와서 새삼.

“만약 제가 폐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라엘?”

이전보다 말랐지만 여전히 보기 좋은 몸을 끌어안고 있던 레온은 멍청하게 대답했다. 귀가 잘못된 건가? 라엘이 아니라 자신에게 저주가 걸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믿기 힘든 환청인지라 라엘을 멍하니 쳐다보자 그는 별 멍청한 표정을 다 본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곰곰이 생각을 해 봤어요. 제가 좀 돌아버린 것 같았거든요.”

“라엘?”

“응, 그런데 역시 제가 미친 것 같아요.”

“……저……기……?”

“역시 제가 당신을 사랑하네요. 시발, 별 미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라엘의 이름만 반복하는 레온은 마치 고장 난 장난감 같아서 말이 영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건 또 무슨 병신 같은 상황이냐며 중얼거리던 라엘이 그의 뒤통수를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맞닿는 입술이 현실임을 깨닫는 순간 레온의 눈앞에 번개가 번쩍 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그에게 어떤 심경 변화가 생긴 것인지…….

지금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드디어 깨달은 레온은 입술을 끌어올려 그를 꽉 끌어안았다. 숨이 막힌다고 짜증을 내는 그를 껴안자 지금까지 제대로 잠들지 못해 온몸을 휘감고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크게 뜨였던 눈이 천천히 감기며 곧 시야가 어두워졌다. 점점 아득해져가는 정신 너머로 사랑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헐, 기절했어요? 이봐요, 폐하!”

그리고 정말로 기절하듯 잠들어버렸다. 아니, 그냥 기절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다며 종알거리는 새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근래 창을 두들기던 바람 사이에 조금씩 훈기가 섞였으니 환청이 아닌 진짜일지도 모른다. 잠시 멍청하게 누워있던 레온은 눈을 뜨자마자 당황했다. 라엘을 곁에 둔 이후 제대로 잠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거의 기절 수준으로 잠이 들었으니 기절이라고 봐도 무방한가.

눈을 끔뻑이자 쏟아지는 아침 햇살 사이로 빛을 받은 먼지들이 반짝반짝 빛나며 떠다닌다. 웬일로 이렇게 날씨가 좋담. 정말로 봄이 오는 것인가. 멍하니 먼지를 쳐다보던 레온은 자연스럽게 손을 더듬었지만 옆자리는 비어있었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자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저쪽이었다.

“깼어요?”

“라엘?”

“제대로 잠든 모습을 본 건 처음인 것 같네요.”

쏟아지는 햇살을 등진 라엘의 윤곽을 따라 빛무리가 진다. 유난히도 빛나는 그의 등에 날개가 달리면 딱 완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상에 내려앉은 천사가 천천히 자신을 향해 걸어온다.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광경이다. 아하. 의문이 풀렸다. 그렇구나. 현실이 아니구나.

“……꿈을…… 꿈인가……?”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레온을 향해 라엘이 웃었다. 맙소사, 라엘이 웃었어! 이건 꿈이 맞구나!

“아마 아닐걸요?”

상큼하게 부정하며 라엘이 성큼성큼 걸어 아직 침대 위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레온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는 아직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두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에서 말 한마디라도 하면 행복한 꿈이 깨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그는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라엘을 바라보았다.

라엘은 웃었다. 저돌적이고 멍청할 정도로 자신만을 바라보며 러브어택을 시도하던 레온은 어디로 가고 그냥 멍청이 레온만 남았나 싶었다. 잠에서 막 깬 레온은 가만히 보고 있자면 예쁘고 섹시하긴 했다. 음, 역시 세상은 아직도 미쳐 돌아가고 있군!

“진짜 꿈이 아닌 거 맞아? 그렇다면 어제 일도…….”

“제가 키스를 하니 당신이 기절하더군요.”

“아…….”

꿈이 아니구나. 웅얼거리며 상황을 되뇌던 레온의 눈꼬리가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레온을 보며 라엘이 환하게 웃었다.

“폐하, 당신 말이에요. 정말로 재수 없고 싫어요.”

막말이 시작되자 레온은 웃었다. 아하, 현실이 맞나 보다. 방금까지 꿈을 꾸고 드디어 잠에서 깼나 보다.

“그런데 보다 보니 귀엽고 사랑스러운 거예요.”

“어, 어……?”

역시 꿈인 것 같다. 아니, 이건 꿈이라고 해도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어이없죠? 제가 그렇거든요.”

“……으응?”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이가 없었는데, 이제는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네요.”

“……라엘?”

“사랑해요.”

라엘의 입술이 레온의 입술 위에 닿았다. 고백 후의 키스는 달콤했고, 레온은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닿아있던 입술이 떨어지자 그는 제 뺨 위로 눈물이 한 방울 굴러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스스로의 손으로 끊어냈다. 오직 그를 곁에 두기 위하여 구속하고 날개를 꺾어버렸는데 그 사랑이 제 곁에 파드득 내려앉을 줄이야. 마치 꿈만 같은 사실에 이것이 현실이 맞는지 자꾸 확인하게 된다. 라엘의 얼굴을 쓰다듬고 몸을 끌어안자 그는 약간 짜증을 내면서도 그 품에 스스럼없이 안겨온다. 살갗을 통해 전해오는 그의 온기에 레온은 안심했다. 아, 정말로 현실이구나.

“……꿈인 줄 알았어.”

“그렇게 못 믿겠다면 꿈이라고 할까요? 방금 했던 말을 취소해도 괜찮아요.”

“아, 아니야!”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젓자 라엘이 웃었다. 그를 곁에 둔 후로 처음 듣는 맑은 웃음소리에 레온은 또 놀랐다. 왼쪽 다리에 족쇄를 채운 뒤 그가 이런 식으로 즐겁게 웃는 것은 처음이었다. 정말로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시끄럽게 귀를 울리는 심장소리와 함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그의 얼굴뿐이었다. 다시없이 사랑하는 그를 껴안고 입 맞추자 자연스럽게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스럽다.

“숨 막혀 죽을 것 같아요.”

한참 후에 입술을 떼어내자 라엘이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빨갛고 촉촉하게 젖은 입술에 다시 눈이 가서 쪽 소리를 부러 내며 뽀뽀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사랑을 확인했다고 동반 타살은 하지 말아요, 우리.”

제 심장도 터질 것 같다는 말을 참으로 개성적으로 표현한 라엘이었다. 하지만 레온이 주목하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 라엘의 입에서 나온 우리라는 단어가 참으로 듣기 좋다. 그는 배시시 웃으며 레온의 품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낫다. 파드득 날아가는 새와 같은 가벼운 움직임에 레온은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켜 뒤를 쫓았다.

아니, 쫓으려 했다.

철컹, 하는 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굉장히 낯익은 소리에 레온의 시선이 다리를 향했다. 달콤함에 젖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은 한쪽 다리에 채워져 있는, 아침 햇살을 받아 희게 빛나는 족쇄였다. 고장 난 기계가 된 것처럼 삐걱거리는 목을 들어 라엘을 바라봤다.

“……라엘?”

“레온, 사랑해요.”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온전히 부른 라엘이 그를 향해 배시시 웃는다. 사랑스럽지만 목구멍까지 꽉 막히는 기분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라엘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우리 사랑의 증표를 당신에게 채워드렸어요.”

말갛게 웃는 그의 말에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라엘…… 장난……이지?”

“참 낯익은 말이네요. 역시 사랑하면 닮나 보네요.”

어깨를 으쓱인 라엘이 겉옷을 주워 입었다. 레온은 당황해서 그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분명히 방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었을 사슬은 굉장히 짧아져 있었다. 마치 라엘을 처음 묶어두었을 때의 길이만큼, 꼭 그만큼 짧았다. 발을 세게 움직여 묶인 것을 떨쳐내려 했지만 절그럭거리는 사슬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움직이지 말아요. 다쳐요.”

상냥한 라엘의 목소리에 레온은 눈을 홉떴다. 드디어 이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며 무어라 말하기 힘든 감정이 몰려온다.

“……어떻게……!”

“뭘 ‘어떻게’예요? 당신은 언제나 열쇠를 품고 있었고, 어제는 제 품에서 잠들었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크게 노렸던 기회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제 눈앞에 굴러다닌 우연한 기회를 발로 차버릴 라엘도 아니었다. 황궁을 탈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두었지만 이렇게도 쉬운 방법이 생겼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족쇄는 쉽게 풀렸고 그냥 두기에는 섭섭하여 레온의 다리에 족쇄를 채웠다. 아쉬울까 봐 족쇄를 채우기 전에 침대 다리에 사슬을 돌돌 묶어서 길이도 처음처럼 줄여뒀다. 어이쿠, 딱 맞네. 그의 다리에 채워진 족쇄를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본 라엘은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진심으로 레온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너무나도 두근거린다. 그도 이런 기분을 느꼈으려나. 이거 참 째지는 기분이로세.

그리고 짠!

“어째서!”

“어째서라뇨.”

“왜 날 떠나려 하는 건데!”

“전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이곳에 머물려고 한 적이 없어요. 기억 안나 요?”

“그래서 날 속인 건가?”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서 거짓으로 사랑을 속삭인 건가? 그렇다면 정말로 좋은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정신은 혼미해졌고 그가 떠날까 늘 품고 있던 경계가 흐려졌으니. 혼란스러운 레온의 눈을 보며 라엘은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정말로 전 단단히 미쳤지 뭐예요.”

“그런데 왜…….”

외출준비를 마친 라엘이 레온 쪽으로 조금 다가갔다. 가깝지만, 손끝을 뻗어도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거리에서 라엘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괜히 가까이 다가갔다가 붙잡힐 생각은 절대 없었고, 이 거리가 딱 약 올리기에 적당하다. 그리고 이만큼이 레온과 자신의 거리이기도 했다.

“처음엔 미친 소리라고 생각해서 당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어요. 하지만 레온, 당신의 말이 옳아요.”

“…….”

“전 당신을 사랑해도 곁에 있는 것을 선택하지 않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당연한 사실이기에 레온은 대답할 수 없었다. 오롯이 둘만의 시간을 위해 라엘이 머무르는 궁에는 사람을 거의 두지 않은 것이 레온의 가장 큰 실수였다. 라엘은 덕분에 침대에 묶인 레온이 발견될 시간이 아직도 한참 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여유를 부릴 수도 있었다.

“……가지 마.”

“다시 만날 일이 없으니…… 아니, 다시 만나더라도 그때는 우리의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겠죠. 하지 못한 말이 남지 않도록 지금 말해둘게요.”

“……라엘.”

“모든 걸 다 아는 당신이었지만 이것만을 몰랐을 거예요.”

“제발…….”

“전 처음부터 당신이 싫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좋아했을지도 몰라요.”

“……!”

“그 분수대 앞에서 말이에요.”

눈웃음을 지으며 고백했다. 레온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온의 입이 열렸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은 없었다. 물속에서 입을 연 듯 벙긋거리기만 할 뿐 문장이 되지 못하는 것들을 들으며 라엘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제 말을 제대로 듣지 않은 레온에게 돌려준 복수였다. 당신이 놓쳐버린 기회, 스스로 망쳐버린 미래, 존재했던 가능성을 짓밟은 것은 오직 자신이라는 것을. 그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지금 라엘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이었다.

“아, 시원하다. 그러니까, 안녕! 우리 다시 보지 말아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기에 라엘은 테라스로 향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라엘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레온이 등 뒤에서 뭐라고 외쳤지만 별난 사랑고백은 끝났으므로 테라스를 뛰어내렸다. 정원을 가로질러 달리는 그의 등 뒤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처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무서워라. 라엘은 발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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