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달콤함에 관한 노래 ~Sweet song about~
황궁에 머문 지 벌써 보름이 되었다. 달력을 제대로 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일단 레온이 지어준 옷이 오늘 아침으로 딱 열다섯 벌이 되었고 삼 일에 한 번꼴로 데려오는 털결 좋은 애완동물이 다섯 마리가 되었다. 라엘이 머무는 궁은 달큰한 이국의 과일 향으로 가득했고 오늘도 복도는 꽃으로 가득 장식됐다.
“……저, 라엘 님……. 그…… 말입니다.”
“말하지 마. 충분히 알고 있어.”
“……믿고 있습니다만……. 그…… 조심하세요……. 부디…….”
1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레온이 한 달 반 동안 궁에 머물며 라엘을 열심히 꼬시려 애를 쓰는 것을 본 것은 왕뿐만이 아니었다. 집무실에서 함께 일을 하던 측근들은 황제의 태양과도 같은 용안을 더욱더 접할 기회가 많았고 모든 과정을 실시간으로 지켜보았었다.
오히려 왕은 나중에 레온의 제안을 듣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했었지만 그들은 집무실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누르며 ‘황제는 원래 저렇게 이상해?’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전오빠가 여동생 꾀는 듯한 태도였다. 이후에 있었던 커다란 사건에 대해서야 그들이 알 방도가 없지만 적어도 레온이 1년 전에도 그에게 심혈을 기울여 대시를 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다시 떠올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홈그라운드라서 더 그런가…….”
“네?”
“혼잣말이야.”
걱정하는 탈린 남작을 다독이며 일이나 하라고 내보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다섯 마리의 때깔 좋은 애완동물의 털을 빗어주는 것뿐이었지만, 적어도 혼자 있고 싶었다. 도저히 측근들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다.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진지하게 자신이 황비라도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그들에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궁색해서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아무래도 황제가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한 것 같은데요.
“다니엘, 제국 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파티셰의 과자를 가져왔는데 좀 먹어보지 않겠소?”
생각을 하자마자 문이 열리며 레온이 들어왔다. 레온의 품에는 과자가 가득한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시종을 시키지도 않고 직접 가져온 그 과자는 갓 구운 것인지 아직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꽤 뜨거운지 황제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주자 얼굴이 새빨갛게 구워졌다. 뭘 잘못한 건데, 내가!
“흠, 요즘 날씨가 좀 덥군.”
10월이었고 바람은 이미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건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무지막지하고 어마어마한 선물공세는 부담스러울 뿐더러 제 가신들마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게 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뭐든지 적절한 수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런 것을 훌쩍 뛰어넘은 수준의 물량공세였다. 아니 물량폭탄이었다.
“폐하. 저를 위로해주시려 많은 것들을 준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것들로 그대의 슬픈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뭔들 못해주겠는가.”
더없이 아름다운 레온의 미소에 라엘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저 미소에 홀려서 이것저것 주는 대로 다 받았더니 결국 이 꼴 아닌가. 조금쯤은 독해질 필요가 있었다. 독해진다 해도 어차피 레온은 황제인 데다 본인들이 도움을 받고 있다 보니 할 수 있는 말도 없지만……. 이거 왠지 슬픈데? 어쨌든 적어도 제대로 거절이라도 해야 했다.
“황공하옵니다. 하지만 이리도 좋은 물건이며 풍족한 생활에 휘감겨 있는 것은 제 백성들에 대한 기만이 아닌가 하여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말이 독하게 나가지를 못했다. 꼬리라도 달렸다면 저를 향해 휘휘 젓고 있을 레온을 보면 왠지 마음이 약해진다. 아, 정말 이걸 어쩌면 좋냐. 다행히 레온은 이 말에서 라엘의 의도를 충분히 알아챈 것 같았다.
“아아, 그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구려. 미안하오.”
약간 기가 죽은 레온을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측근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심지어 그 측근들이 자신의 정조의 위기를 걱정해주는 상황은 정말로 부끄러운 것 아닌가.
다행히도 이후에 어마어마한 선물공세는 주춤해졌다. 하지만…….
“왕궁을 습격한 이들은 그대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구 귀족의 연합세력이라 하는군.”
레온은 그 이후에도 매일같이 라엘이 머무는 궁으로 걸음을 했다.
“그대의 남동생은 지금 성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군. 성황께서는 가련한 양의 보호자가 되겠다고 주변국들에게 선포하셨소.”
굉장히 쓸모 있는 선물이긴 했지만,
“그대의 왕국의 봉신들이 반란군에 맞서 저항군 연합을 만들었다고 하는군. 도움이 될 듯하니 전서구를 날려보는 것은 어떠한지.”
이것은 왠지…….
“아난과 페르카 왕국에서 로윈의 주인은 그대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선언하였소. 모든 수교를 끊겠다 했고 다른 왕국들도 같은 의견인 것 같군.”
이야기를 꺼낸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주변 왕국들에서는 그대를 찾아…….”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가 뭔들 못하겠는가.”
환하게 웃는 레온의 등 뒤로 마치 태양이 떠오르는 듯했다. 별로 이야기를 꺼낸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냥 거절도 못할 선물로 개선되는 것을 도왔을 뿐이다.
레온의 지대한 공으로 반역의 배후가 누군지 순식간에 알게 되었다. 솔직히 노력하면 못할 일은 아니긴 했다. 황궁에 자리 잡게 된 직후 라엘은 수족들에게 연락을 넣어 정보를 보낼 수 있도록 거처를 알렸고 수집된 정보들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토록 빠르게 확실한 정보를 알 수 있었던 것은 레온 덕분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오랜 도피 기간 동안 라엘은 제 수족들에게 제대로 연락조차 하지 못했고, 세간을 떠도는 소문 외에는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그들에게 시간은 굉장히 중요했고 레온은 그 시간을 단축시키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을 준 것이다. 얼마 후 도착할 정보와 비교하면 더욱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배후에 대해 듣게 되자 드디어 상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과였다. 반역의 주도자로 지목된 귀족들의 연합은 왕의 아래에서 큰 권력을 가지고 나랏일을 좌지우지하던 세력들이었다. 왕이 홀로 집권하고 있을 때, 왕권이 강하지 않던 시절 왕 대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권력자들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애초에 그들과 다니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다니엘의 출중함을 경계했고 다니엘은 무능한-아버지지만 항상 객관적으로 평가를 했다- 왕 아래에서 기름진 배를 채우는 그들을 평소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귀족들과 다니엘의 충돌은 일상적인 것이었고 서로가 계획하는 일을 훌륭하게 엿 먹이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인 사이였다. 그리고 다니엘이 성장해가면서 대부분 귀족연합이 엿을 먹는 횟수가 확연히 늘어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반역을 일으키는 미친 짓을 할 줄은 몰랐네요.”
“망할 놈의 늙은이들! 내가 생각보다 그 영감들을 과대평가한 것이 틀림없어. 적어도 코딱지만큼의 이성이란 것이 존재하는 줄 알았지. 뇌 용량이 적으니 우르르 몰려다니며 그런 헛생각이나 하고 있었겠지. 다 모아도 한 사람분의 뇌가 되질 않았던 거야? 쓸모라고는 없는 영감탱이들 같으니!”
“딱히 라엘 님의 판단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 영감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걸요.”
“상상을 초월한 멍청함에 저도 경악 중입니다.”
“빌어 처먹을 늙은이들의 옷을 진작 벗겼어야 했어. 이제는 벗을 게 옷이 아니라 목이 돼서 유감이군.”
잠시 그 멍청한 이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자신들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선대 왕 아래에서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라 그들의 기반이며 군사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홀로 그들을 누르던 다니엘이 더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의 세력은 컸고 아주 오랫동안 축적된 부는 그것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었다.
다니엘은 언제나 그들을 멍청하고 오만한 늙은이들이라고 표현했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라엘도 정말로 멍청한 사람들이 그만큼의 권력을 쥐고 있으면 이미 나라가 망했을 거라고 이야기하며 그들이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인정했었다. 그런데 정말로 나라가 망했다. 맙소사!
이런저런 사실들을 젖혀두고 나서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라엘이 다니엘에게 “그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과거라 있더라도, 솔직히 그 늙은이들이 무식한 것은 사실이었거든!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로렌에 대해서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도록 하자.”
“성국에 계신다고 하셨으니 그래도 안전하실 겁니다.”
“성황께서 그렇게 공언까지 하셨다니 그 늙은이들이 쉽사리 손을 대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문제를 한시름 덜어서 다행이었다. 여우같은 늙은이들은 섣부르게 성황의 보호 아래에 있는 로렌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로렌도 그 성격대로 신중하게 생각하고 충분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고.
다니엘은 마지막까지 그가 모자라고 지켜내야 할 대상이라며 걱정했지만 사실 로렌은 우수한 두뇌를 가진 인재였고 성격도 제법 형을 닮아있었다. 크게 걱정할 이는 아니었다.
“그래, 그럼 이제 다른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이번에는 다 같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어내자 다소 어두웠던 방이 환해졌다. 넓고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시종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며 흰 테이블보 위에 각종 음식들을 나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외출을 하지 못하는 라엘과 일행들을 위해 레온이 궁의 정원에서 작은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던가. 물론 참석하는 것은 레온과 그들뿐이었지만 역시 이건 좀…….
“내가 전생에 대체 뭘 잘못했을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라엘에게 탈린 남작이 말했다.
“그냥 이참에 다 받아들이시고 제국을 노리는 것은…… 악!”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한 남작의 정강이를 뻥 차줬다. 그따위 농담을 하다니 아주 매를 벌어요! 자기 일이 아니라고 막말도, 막말도!!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것을 자작들이 간신히 말렸다. 그리고 다시 한데 모여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쩌나, 정말.
황궁 안에서 레온의 보호를 받으며 라엘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자꾸 착각을 할 것만 같다는 것이다. 분명히 자신은 나라를 잃은 왕자의 입장이고 같이 온 측근들도 망국의 귀족일 터인데 레온은 자신들을 황국에 유람 온 손님처럼 대했다. 더없이 극진한 손님 대접을 받다 보니 자신들의 입장을 가끔 헷갈릴 뻔해서 중간중간에 자체적으로 정신점검까지 들어가야 했다. 우리는 제국에 관광 온 것이 아니다! 의도치 않게 정말로 관광도 가끔 하고 있었다.
또 다른 문제라면 너무나도 쉽게 얻어오는 레온발 정보였다. 빠른 정보가 무엇이 나쁘겠냐마는 너무 쉽게 정보를 얻어오니 자꾸 사안의 심각함이나 상황에 대한 경각심이 무뎌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이 더욱 커지고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 이 상황도 말이다. 라엘은 저쪽에서 신나게 음식을 흡입하는 꼴 보기 싫은 남자 셋을 노려봤다. 빠져가지고, 정말!
“그대의 가신들은 다행히도 잘 즐기고 있는 것 같군.”
“폐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마음의 여유는 중요하지. 한 발 떨어져서 보면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이는 법이야.”
한 발 정도가 아니라 열 발, 스무 발 정도는 기본으로 떨어진 것 같습니다만.
이제는 시종들과 잡담을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그들을 슬쩍 흘겨봤다. 레온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대놓고 노려볼 수도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황제는 제 가신들을 못마땅하게 보는 라엘을 보며 눈썹을 팔자로 휘었다.
“이런 시기에 연회를 여는 것이 역시 그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을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기분전환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솔직히 라엘은 연회를 즐기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저 정신 빠진 측근들 안에 끼어 있었으면 바보 멍청이처럼 같이 넋을 놓고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온은 한 단 정도 높은 위치에 자신과 라엘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장소를 따로 마련했고 지금 단둘이서 식사하는 중이었다. 물론 황제 정도나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한참 아래의 귀족과 -특히나 그들은 남작과 자작일 뿐이었으니까- 노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부담스럽다, 매우.
그는 1년 전보다 더욱 열렬한 눈으로 라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당시에야 남자인 자신을 설마, 하는 생각이 더 강하여 본의 아니게 철벽을 쳤었지만 이제는 레온이 딱히 성별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 시선을 더 이상 착각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사실 조금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의 머릿속의 자신은 1년 전의 모습이었을 뿐이었고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었으니 지금의 자신과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면 좀 더 질리지 않을까. 그저 아등바등하는 제 추한 모습을 본다면 그 안타까운 마음을 접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헛된 희망이었고 레온은 하루하루 더 열렬하게 라엘의 시선을 좇았다. 기대가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난처한 티를 제대로 내지도 못하고 묵묵히 고기만 씹어 삼키는 라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레온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그대의 가신들은 그대를 다른 호칭으로 부르더군.”
“그랬습니까?”
“라엘이라고 하던가.”
“아아, 그랬지요.”
다니엘의 가명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본명이었다. 그래서인지 방금까지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궁에 온 이후로도 그들은 라엘의 신분이 드러나는 위험을 바라지 않았고 그래서 도피 중에 사용한 그 호칭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제 방을 드나드는 레온이었으니 듣지 않을 수가 없었을 터다.
“제국으로 오는 길에 사용한 가명입니다. 아마 도피 기간이 길어지면서 입에 붙은 모양입니다.”
차마 황궁 안에서도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사용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해서 그렇게 답했다. 그의 대답에 황제가 예의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명이라 하지만 그대에게 정말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야.”
“감사합니다.”
“마치 이쪽이 더 본명 같군.”
라엘은 미소로 화답했다.
천국에 계시는 왕자님. 혹시 보고 계세요? 저는 왕자님께서 천국에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지옥으로 간다고 하면 천사의 멱살을 잡으실 분이 당신이니까요. 요즘에 황제 폐하가 가끔 너무 날카로워서 무섭습니다.
라엘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황금색의 액체가 잘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이미 망한 것 같았다. 나 지금 떨고 있니? 오래된 광고카피가 스쳐 지나가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물론 그런 라엘의 모습조차 레온의 콩깍지 씐 눈에는 더없이 우아하고 우수에 젖어 보이며 한 떨기 가련한 꽃처럼 보일 뿐이었다.
주변이 어두워지자 시종들이 등을 밝히기 시작했다. 단풍이 진 나무 사이로 이국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등은 어쩐지 낯익은 형태였다. 왠지 어디서 본 듯한 낭만적인 등불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대자 레온이 그 정체를 이야기해 주었다.
“그대가 정원에 이러한 등을 장식해 두었지.”
“기억하셨군요.”
“그대에 대한 것이라면 단 한 가지도 허투루 기억하지 않아.”
이 정도쯤 되자 포기했다. 레온은 정말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1년 동안 수없이 곱씹었던 것이 틀림없다. 마법이 걸린 등의 갓은 유리로 만들어졌고 유리에 새겨진 그 무늬마저 1년 전 라엘이 특별히 주문한 그 무늬였다. 기억력 한 번 대단하십니다그려.
밤바람이 쌀쌀해지자 시종이 망토를 들고 왔다. 별생각 하지 않았는데 레온은 황송하게도 그 망토를 직접 라엘의 어깨에 둘러줬다. 저 멀리서 노닥거리던 측근들이 흠칫하는 것이 여기서도 보일 정도다.
아아, 이쯤 되니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저 아무도 이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이미 늦었지만. 시선 끝에 흰 털이 아름다운 짐승들이 노니고 있었다. 왠지 열 마리가 넘어 보이는데. 대체 언제 저렇게 늘어났지.
“크흠, 다니엘…….”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생각에 빠져…….”
레온의 헛기침에 깜짝 놀라 그를 돌아보고 사과했다. 레온은 고개를 저으며 라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거 진짜로 느끼한데 너무 잘생기다 보니까 또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조금 혼란스럽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얼굴과 말투였다.
“괜찮소. 사실 그대의 힘든 상황에서도 내 욕심에 어울려주는 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제나 폐하의 배려에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
입에 발린 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레온은 기뻐했다. 정말로 부담스럽지 않다, 라고 생각해도 곤란하지만 솔직하게 부담스러우니 제발 그만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사실 이야기를 했는데도 통하지 않았던 전례도 있었고…….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고, 해주는 사람 기분이나 좋게 해주지 뭐.
솔직하게 기뻐하는 레온에게…… 이제는 정이 든 것인지 세뇌를 당한 것인지 슬슬 그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이쿠. 막 가출하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오, 정신 차리자, 라엘. 게다가 레온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이지 절대로 귀여운 유형은 아니었으니……. 맙소사, 왕자님. 절 좀 말려주세요. 라엘의 혼란이 점점 커졌다.
눈치를 보던 레온이 조금 망설이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대에게 부탁이 있는데…….”
라엘은 등허리가 바짝 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1년 전 레온이 왕을 통해 한 부탁이 생각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에게 엄청난 도움을 받고 있는 중이니 거절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거부권이 주어지지 않은 제안이라는 것은 위험하고 비참하다.
라엘의 걱정을 어렵지 않게 알아챈 레온은 오히려 자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엘이 놀라는 모양새를 보고 레온은 꽤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날의 제 욕심이 그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었는지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중인 듯했다.
“아니, 아니. 그런 염치없는 부탁은 아니야.”
라엘도 너무 티를 냈던 것인가 싶어 조금 당황했다. 솔직히 레온이 자신에게 베푼 호의는 모두 그 호감에 기반하고 있었다. 욕심쟁이라고 해야 할까. 자신이 이렇게 이기적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건 이기적인 것과는 좀 다른 문제인 거잖아! 아, 아닌가?
서로 당황하는 와중에 레온의 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잘생기기는 참 잘생겼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정말로 궁금한 것이다.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그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렇게 매달리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전자가 아까운 일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 유전자를 후세에 길이길이 물려줘야 할 텐데 그 수혜자를 없애려 하다니.
잠시 생각을 멈춘 라엘은 아름다운 황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고 레온은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이제는 대체 무슨 일인지가 궁금해질 무렵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그대가 날 좀 더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소.”
‘겨우 그거?’ 라는 생각이 먼저, ‘어떻게?’ 라는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상식적으로 일국의 왕자, 아니 지금은 망국의 왕자일 뿐인 라엘이 그를 어려워하지 않을 방법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뭐, 사양하지 않고 실컷 이용해 먹는 중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상식은 있다. 황제를 어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이 대륙에 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심지어 이 질문마저도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할 수 있는 답은 없었다.
“제가 어찌…….”
“역시 부담스럽겠지…….”
잔뜩 기가 죽은 레온을 보며 라엘의 죄책감이 뭉클 올라왔다. 너 어디 있다가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돌아온 거니? 눈을 질끈 감았다. 하긴, 뭐……. 다시 자달라는 것도 아닌데 너무 티를 냈나 싶어 결국 고개를 젓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레온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제 말 한마디에 표정이 수시로 바뀌는 그를 보면 묘하게 가슴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대답을 하고서도 떠오른 생각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였다. 뭘 해야 편하게 대하는 티를 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레온은 생각해둔 답이 있었던 것 같다.
“일단 호칭을 바꾸는 것은 어떤가? 내가 그대를 라엘이라고 불러도 될까?”
“물론입니다.”
어렵지도 않은 문제였다.
“그렇군, 라엘…….”
레온은 라엘의 이름을 몇 번 읊조리더니 환하게 웃었다. 자발없는 가슴이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오, 진정해 심장. 잘생기긴 했지만 저건 남자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레온이 말을 좀 더 편하게 해도 되냐고 하오체를 집어치우는 것까지 넋을 놓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말에는 잠시 해롱거리던 라엘조차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이제 라엘도 나를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레온하르트는 다소 긴 호칭이니 레온이라고 하면 어떨까?”
“네?”
이 황제가 미쳤나, 진짜.
잠깐 쓰일까 말까 하며 간을 보던 콩깍지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도저히 좁혀지지 않던 호칭문제는 결국 라엘이 그를 레온 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레온은 마지막까지 자기 이름을 그냥 불러달라고 했지만 라엘은 그 순간 입을 꾹 다물며 조개 흉내를 냈고 결국 그도 자신이 너무 급하게 밀어붙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뭐, 나중에 더 친해지면 바꾸면 되지. 큰 꿈을 꾸며 레온이 먼저 포기했다. 결국 두 사람은, 호칭에 대해서 서로 완벽하게 만족하지는 못했지만 그럭저럭 합의는 해냈다.
이제 남은 불만이라면 그 후에도 계속된 레온의 물량공세였다.
라엘을 위해 여전히 이것저것 물건을 가져다 나르는 것에 대해 레온이 곤란한 기색을 보인다 싶으면 바로 유용한 정보를 가져다주는 식으로 강약이 조절되기 시작했다. 쓸데없이 머리 좋은 레온인지라 라엘은 슬슬 그가 얄미웠다. 거절하기 더 힘든 상황을 만드는 것에 도가 텄다.
그런데도 정이란 게 어찌나 무서운지 이제는 납득까지 되기 시작했다. 사람의 외모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그럼에도 귀여워 보이는 것이지, 저 외모가 아니었다면 라엘의 경각심은 오히려 더 커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시간으로 레온이 라엘에게 작업을 거는 것을 곁에서 봐야 하는 측근들은 점점 위기감이 커졌다.
“……있잖아. 내가 눈이 어디가 안 좋아진 걸까?”
“저번에 폐하를 귀여워 보인다고 말한 것을 말씀하신다면, 확실히 안 좋아지셨는데요?”
“그날은 내가 체했던 거고.”
“천만다행이네요.”
“근데 저거 마릿수가 왜 저래?”
낙엽이 거의 떨어지고 슬슬 앙상한 가지가 보이는 정원 한구석에 털빛이 고운 동물들이 노닐고 있었다. 황궁에 들어오고 나서야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이국의 애완동물이라는 것이 분명히 희귀한 종류라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털도 곱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귀여웠다. 그저 20마리가 넘어 보이는 것이 문제였지만. 마지막으로 세어봤던 지난주에는 분명히 열 마리 안팎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새끼라도 쳤나……?”
“갓 태어난 새끼가 어떻게 저렇게 뛰어다닙니까? 그것보다 폐하의 방문횟수라도 좀 줄여주세요. 부담스러워서, 정말.”
“그건 내 능력 밖이야.”
긴 한숨이 바닥을 두들겼다.
“……저희는 라엘 님이 왕이 아닌 황비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건 나도 동감인데 말이지.”
탱크나 불도저처럼 돌진하는 레온을 막을 방법을 라엘이라고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라엘!”
게다가 양반도 못 되는지……. 아, 양반은 아니지. 황족 나으리니까.
타이밍 좋게 문이 열리고 레온이 라엘을 찾았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고운 털의 새로운 동물을 보자 정원에 점점 늘어나는 희귀동물전이 어떻게 펼쳐지기 시작했는지 어렵지 않게 원인을 유추할 수 있었다.
라엘은 레온의 황당한 물량공세며 느끼한 말에 금세 익숙해져버렸다. 상대의 성별이 어떻든 일단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었다. 자기 좋다는 사람이 대놓고 좋은 티를 내는데 그게 어지간하지 않으면 싫을 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 상대라는 것이 무려 황제다. 어떤 것이든 가지고 있고 가지고자 하는 것을 쉽게 가질 수도 있는 사람이 자기 마음 한번 얻어 보겠다고 저렇게 애를 쓰는 것이 보이는데 인간적으로 싫어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사실 또…… 그 미모라는 것이 어마어마하지 않는가. 라엘은 깨달았다. 미모가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선 정도가 아니라 상상 이상이라면 이미 남자고 여자고의 문제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고로 레온이 ‘네가 좋아!’를 온몸으로 티를 내고 있는 상황에서 그에게 호감이 쌓이는 것도 금방이었다. 라엘은 평온해졌다.
라엘이 평온해진 것과 반대로 복장이 터질 것 같은 것은 옆에서 그 상황을 쭉 지켜봐야 하는 측근들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은 이미 전쟁이었다. 자신들의 주군과 황제를 보며 복잡하고 무언가가 터질 것 같은 감정을 그들은 공유하고 있었다. 이제는 별다른 거부감도 보이지 않고 레온이 주는 것을 넙죽넙죽 받아들이고 있는 라엘이 진심으로 걱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저러다 물량공세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대체 어떡해야 하지? 저것들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라는 경각심이 이미 라엘에게는 없는 것 같다.
측근들은 절규했다. 제발 경각심을 가지세요! 물론 마음속 절규일 뿐이었고 상대가 황제이다 보니 레온에게는 당연히 제발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지 못했고, 라엘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징그러운 소리 말라며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이지만 자신들의 왕자는 일만 잘하고 이런 데에는 완전히 무지했던 것이다! 슬프게도 측근들의 걱정은 라엘에게 닿을 리가 없는 헛된 것이었다.
마치 라엘이 향락에 젖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 없이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생각들이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매일같이 레온이 쳐들어오는 와중에도 그들은 매일매일 회의를 하고 있었고 로윈을 되찾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라엘이 직접 데리고 온 이들 외에도 이런 상황이 되면 각지로 흩어지기로 약속된(다니엘의 거지같은 훈련이 동반되어 세뇌된) 측근들이 있었고, 그들은 사방에서 정보를 날라 라엘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측근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라엘은 개인적으로 다른 루트들로도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고 다니엘의 비밀정보원들도 열심히 일했고 용병단도 열심히 일했다. 레온이 준 정보도 알차게 이용하며 라엘은 매우매우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눈 밑이 시꺼멓게 물든 라엘의 쉬는 시간이 레온의 방문 때뿐이라서 측근들은 더욱 말을 하지 못하는 점도 있었다. 혹시 황제 폐하는 이거 노리고 오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항상 절묘한 타이밍이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부터가 움직이기 적당한 시기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다. 곧 닥쳐올 한파는 로윈을 점령한 군대의 발을 묶어놓을 것이고 추적자들의 걸음도 늦출 수 있을 것이다. 직접 움직여야 하는 측근들이 고생하긴 하겠지만 은밀하게 움직이기에는 아주 제격인 시기였다.
레온이 가져다준 정보는 주로 각 왕국들의 반응들이 많았고, 그것을 참고하여 동맹할 수 있는 나라들과는 이미 연락을 취했고 긍정적인 답이 돌아온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라엘의 믿을만한 수족들이 그들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직접 방문하여 동맹의 세부 조건을 합의하는 것이었다.
반역자들은 아직 라엘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고, 로렌은 그들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조바심이 나겠지만 새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미 그들 내부에서도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다니엘과 로렌을 대신할 왕족을 앞세우지 않은 귀족들만의 반역이었다.
유례가 없는 멍청한 행동이었고, 모두가 균등하게 나눠 가지기에는 왕관이 오직 하나뿐이었다. 반역의 시작에는 분명히 이야기가 되어 있었겠지만 눈앞의 달콤한 것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겠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겨울에 굳이 군대를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가 군대를 움직인다는 것은 움직이는 사람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이니, 서로 경계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불필요한 것이었다.
왕국 내에서 반역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몇몇 귀족들이 일어섰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사실 그들에 비하면 굉장히 미약한 세력일 뿐이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있는 반역자들에게는 꽤 괜찮은 핑곗거리였다. 이미 승리한-그렇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다니엘의 추적과 로렌의 신병 확보는 그렇게 급한 일이 아니었다. 틈을 노리기 아주 적당한 기회였다.
과연 반역자들은 겨울이 되자 군대를 아주 물리기 시작했다. 고착된 전황 속에서 라엘은 신속하게 자신에게 우호적인, 그리고 적대적인 세력들을 분석해냈다. 중요한 일이었다. 로윈은 자신 혼자서 되찾을 수 없다. 로윈을 되찾기 위해서는 많은 군대가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 동맹을 필수불가결이었다.
라엘이 주로 집중하고 있는 작업은 그것이었고, 다행히도 그에게 호의적인 아난과 페르카를 중심으로 한 왕국들이 동맹 직전의 형태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 중심축에 다니엘, 라엘이 들어가기만 한다면 모든 것은 완성이 된다.
탈린 남작이 아난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서신을 통해 이미 많은 계획이 이뤄졌다. 왕국들은 충분히 의사의 표현을 해주었고 이제는 라엘이 공식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드러낼 때가 되었다. 위기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곁을 지키고 있는 탈린 남작, 다니엘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그가 아난에 방문하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페르제 자작과 듀리온 자작도 곧 타민과 페르카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라엘은 출발하는 탈린 남작을 배웅했다.
“조심히 다녀와. 난 더 이상 내 사람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
“전 걱정 마세요. 그리고 제발…… 부디…… 조심하세요…….”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거라고 믿어.”
어떤 것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인지는 굳이 되묻지 않았다. 슬프게도 측근들은 어쩔 수 없는, 꼭 필요한 일 때문에 뿔뿔이 흩어지면서도 궁에 홀로 남아있을 라엘에 대한 걱정을 잠재우지 못했다. 제 주군을 생각하면 너무 걱정이 돼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고 탈모 증상마저 시작될 것 같았다. 어떤 걱정이냐고 한다면, 차마 말로 할 수가 없다.
망국의 귀족들이 나라의 존망보다 제 주군의 정조를 걱정해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슬프다. 가장 억울한 것은 그 불만마저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상대가 어마어마한 강적이라는 것이었다. 신분도 대단한데 얼굴까지 엄청나게 잘생기다니. 더러운 세상!
라엘도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습격자의 위험이 덜해졌다고는 하나 그들이 가는 곳은 사지에 지척해 있었다. 가는 길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도착해서도 어떤 변수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정치에 관한 사안이라면 마음 놓고 그들에게 맡길 수 있었지만 검이 뽑히는 상황만은 원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가서 동맹을 추진하고 싶었지만 측근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라엘 님은 황궁에 머무르시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정보가 잘못됐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혹여 라엘 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정말로 끝입니다.”
“아쉽지만 로렌 님은 라엘 님만큼의 결집력을 만들 수 있는 분은 아닙니다. 이들이 원하는 왕자는 라엘 님이십니다.”
그들의 설득에 라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라엘은 황궁에 남기로 했고 측근들은 각각 제 목적지로 향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까지 걱정을 놓지 못하는 그들이었다. 차라리 목이 제자리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의 걱정이라면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걱정이었고 이것은 라엘이 안심시켜 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을 그러안고 황궁에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라엘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정보를 모으고 수집하고 분석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앞으로의 동맹 결과에 따라 달라질 내용들이었다. 가장 믿는 그들이 없었기에 한숨이나 내 쉴 수밖에.
“이곳은 신기한 곳이군요.”
“삼백 년에 걸쳐 제국의 마법사들이 유지하고 있는 정원이지.”
“이야기만 들어보았는데, 직접 보니 더욱더 대단하군요.”
측근들의 걱정은 아주 빠르게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온은 방해하는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자 본격적으로 더욱 치근대기 시작했다. 그들이 있었을 때도 있었던 추근거림은 그들이 사라지자 더욱 완벽해졌다. 명목상으로는 기분전환에 도움이 될 만한 곳을 산책한다는 것이었지만, 누가 봐도 이것은 작업이었다. 게다가 라엘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던 측근들마저 자리에 없으니 기본적으로 이런 쪽에 눈치가 없는 라엘이 은근슬쩍 휘말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작업이라면 이전에도 계속되고 있긴 했었다. 밀고 당김의 적절하지 못함과 라엘이 측근과 보내는 시간이 길어 그 전에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이었다. 측근들과 의논하고 회의하는 시간이 대부분인 라엘을 대놓고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게 할 수는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더랬지. 그때 할 수 없었던 모든 것들을 레온은 지금 이 순간 모두 시도하고 있었다. 측근들의 부재는 레온에게는 호재가 되었고 측근들에게는 잠재된 불안이자 악재였다. 솔직히 잠재까지도 아닌 것 같긴 했다.
“아름답군요.”
아무리 레온이라도 이 상황에서 ‘라엘, 네가 더 아름다워.’라고 말해서는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이제는 학습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레온이 그런 말을 했더라도 라엘이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긴 했다. 라엘은 드물게도 정신이 빠져있었다.
라엘은 아난이며 각 왕국에 보낸 측근들의 걱정에 온 정신이 쏠려있었고, 그 덕분에 평소에 나비처럼 팔랑이며 항상 주변을 날아다니던 레온에 대한 인식이 꽤나 무뎌진 상황이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정원에 피어있는 꽃을 보면서도 꽃이구나, 정원이구나, 하며 아름답군요, 라는 영혼 없는 칭찬만 반사적으로 하고 있을 정도였다.
레온의 말은 조심스러워졌지만 행동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그 노골적임은 라엘의 넋 빠짐과 함께 더욱 상승작용을 일으켰고, 결국은 라엘이 머무르는 궁에서는 레온이 라엘을 꼬시기 위해 각고의 노력 중이라는 것을 모르는 시종이 없을 정도였다.
세상에, 우리 황제 폐하가 수군수군, 작업을 수군수군.
“아, 라엘. 조심…….”
산책 중 돌부리에 발이 걸린 라엘을 레온이 붙잡았다. 꽤나 크게 휘청거리는 라엘을 겨우 잡은 레온이 그의 팔을 확 잡아끌자 중심을 잃은 몸은 쉽게 그의 가슴에 안착했다. 나이스, 돌부리!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오히려 감사하다.
“괜찮아. 네 사람들이 위험한 임무를 맡고 있으니 얼마나 걱정되겠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올려다보며 피로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라엘이 가련하고 애처로워 보여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를 처음 본 이래로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은 때가 언제 있겠느냐마는 요즘의 라엘은 더욱더 청초하기 그지없었다(콩깍지). 라엘은 다시 몸의 중심을 잡다가 다리가 꼬여 이번에는 스스로 그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고 레온은 심장이 터져버릴 뻔했다. 하마터면 라엘이 황제시해범이 될 뻔했다며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몹시 기분이 좋다.
측근들이 모두 떠나고 나서 라엘은 이전보다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긴 대부분의 시간을 레온이 잽싸게 가로챘다. 그 시간만큼 나랏일은 쌓여만 갔지만 제국은 생각보다 잘 굴러가고 있었으니 그는 아예 신경을 꺼버렸다.
라엘이 오매불망 그들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불만이었다. 아무리 제 심복이라 하더라도 레온에게 있어서는 그들은 그저 다른 남자일 뿐이었고, 라엘이 다른 남자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사실은…… 정말로 불유쾌한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방금처럼 그들의 걱정을 하다 발을 헛디딘 그를 얼른 부축해서 스킨십을 시도할 수 있었으니까. 좋았어, 자연스러웠다!
요 근래 레온은 큰일을 하려면 그만큼의 여유도 필요하다며, 그래야 주변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핑계로 라엘을 데리고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라엘의 정신건강회복프로젝트라고 쓰고 데이트라고 읽는 그런 활동이었지만 그 두 호칭 모두 라엘이 알 리가 없었다. 그저 라엘은 레온이 매우 심심하며 그래서 자신을 매일같이 만나러 오는 것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는 생각보다 할 일이 없구나……. 왕자보다는 황제의 그림자 쪽이 더 나았을지도 몰라.’ 라는 얼빠진 생각을 할 정도로 그는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라엘의 정신적인 방어력이 약해지고 늘 곁에 있던 측근들이 없어진 지금이야말로 레온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참에 제국의 겨울명물 투어 데이트를 해야지!
겨우 중심을 잡은 라엘이 레온에게 기댄 어깨를 빼려는 순간 그는 슬그머니 라엘의 어깨를 감쌌다. 의문을 느낀 것도 잠시, 레온이 저쪽 호수를 가리켰다. 몇백 년 전에 인공적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호수였다. 그에 얽힌 아름다운 전설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하자 라엘이 눈을 멍하니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의 정보를 받아들이기에 그는 요즘 너무 바쁘고 여유가 없었고 그 덕분에 레온이 어깨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라엘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레온은 그 어깨가 너무 말랐다고 생각했다. 밤낮없이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제대로 하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가는 어깨에 왕국의 흥망을 얹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쓰럽다. ……는 무슨, 그냥 콩깍지일 뿐이었다.
요즘 라엘은 고기 위주로 식사를 아주 잘하고 있었으며 잠도 푹 자고 있었다. 오히려 레온이 조금 늦게 오는 날은 낮잠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었고 덕분에 자꾸 새벽에 깨서 돌아다니게 된다. 배가 고프니 야참을 좀 얻어 볼까 해서 부엌까지 갔다가 야식을 얻으러 온 기사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 덕분에 뱃살이 슬쩍 나오기까지 해서 위기감을 느낀 라엘이 긴급하게 다이어트를 시도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고 그런 이유로 레온이 권유하는 단 과일을 거부했을 뿐이었다. 음식도 잠시 샐러드 위주로 바꿨었지. 그러나 결국 운동이 최고라는 것을 깨닫고 식단은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고기 위주로.
그때 레온이 걱정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별로 상관없는 사실인 것 같다. 라엘이 뭘 어찌하든 레온의 콩깍지는 두려울 정도로 두터워지고 있었다.
레온의 연애사업(……)이 꽤 희망적으로 진행되는 만큼 라엘의 일도 잘 진행되고 있었다. 라엘이 제국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였기에 그가 받는 정보는 은밀한 루트를 이용해 몇 번의 거름망을 거쳐 건네지고 있었다. 그마저도 혹시 유출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내용은 거의 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탈린 남작에게서 도착한 암호문은 아난과의 동맹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가 됐다는 내용이었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그가 돌아오면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마 꽤 괜찮은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일은 잘 진행되고 있었으니 슬슬 뒤의 일도 생각해야 한다.
어려운 일이 될 테지만 사실 로윈을 되찾는 일은 처음부터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은 황제의 비호 아래서 일을 진행하며 오히려 안전하고 수월하기까지 했다. 수월하다 못해 레온이 군사까지 빌려준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지만……. 그 제안은 예의 바르게 거절하기로 했다. 자칫 제국을 등에 업고 그 힘에만 온전히 기댄 것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왕국들과의 연합은 라엘의 능력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제국의 군대는 아니었다. 온전히 황제의 도움으로 보일 수 있었기에 보이는 모양새도 좋지 않았고 이후 왕국을 운영하기 위한 권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여차하면 비빌 언덕이 생긴 것이니 나쁘기만 한 제안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짜 왕자가 아니라는 부분이었다. 라엘은 다니엘의 그림자였고 절대로 본인이 아니었다. 왕관이 단 한 번도 제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문제가 생긴 것은 여기 이 지점이었다.
왕관은 로렌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왕관을 받으려 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그를 왕으로 만들 수 있을지는 누구와도 의논할 수가 없다. 이것만은 오직 홀로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측근들부터 시작하여 백성들, 그리고 로렌 본인도 왕관을 아무런 이유 없이 넘겨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자연스럽게 로렌의 앞에서 사라져야 하는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 부분이 가장 힘들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라엘! 오늘은 좀 멀리 나가보지 않겠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레온의 얼굴을 라엘이 지그시 쳐다봤다. 고민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예쁘고 그래도 저건 아니야.
레온은 그런 라엘의 시선에 ‘뭔데? 뭔데?’ 하고 되물었지만, 라엘은 아직 이성적인 존재였다.
주변의 모든 조건들은 라엘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많은 왕국이 그에게 호의적이었고, 정당한 후계를 반역을 일으켜 밀어낸 반란세력들을 다들 마뜩찮게 생각하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은 명분의 문제로 그 불만을 하나로 모아 터뜨려줄 기폭제가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의 라엘은 충분히 그 기폭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반가운 소식이 하나 더 도착했다. 말수는 없지만 센스는 언제나 넘쳐흐르는 듀리온 자작이 페르카 왕국에 가는 길에 위치한 성국에 들러서 로렌의 소식을 받아온 것이었다. 그는 로렌에게 다니엘이 분명히 살아있고 건강하며 왕국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주었다. 보안 때문에 자세한 위치를 알려줄 수 없음에도 소식을 들은 로렌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가슴이 찡해졌다가 다시 괴롭게 욱신거린다. 지금만큼 자신이 정말로 진짜 다니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분명히 진짜 다니엘일 텐데…….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차가운 통로에서 백골이 되어가고 있겠지.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생각에 잠겨있자니 서늘한 손이 이마를 덮었다. 시선을 돌리니 레온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엘을 보고 있었다. 조금 미안해졌다. 요즘 레온과는 이래저래 외출을 함께 하는 일이 잦은데도 제대로 집중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레온이 쌍수 들고 환영 중이라는 것은 모른다-.
새삼스럽지만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젊고 잘생기고 유능하고 백성들에게 인망도 높다. 이런 그린 듯한 완벽한 사람이 대체 뭐가 모자라서 자기 같은 사람에게 목을 매나 싶었다.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는 사람이 같은 남자에게 목을 매는 것도 안타까웠다. 그렇다 해서 자신이 눈 딱 감고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는 다니엘의 이름으로 살고 있었고 그 이름에 자신의 의지를 덧씌울 생각은 없었다.
갑자기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레온 그가 어디든지 나가서 자신과 하룻밤을 지낼 사람을 구하고 무릎을 꿇으라 한다면, 아마도 그 앞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릎 꿇은 사람들로 가득해지겠지. 괜한 생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기분은 좀 어때?”
“황궁 안의 정원도 좋지만 역시 바깥공기는 좋네요.”
“즐거워해주니 다행이야.”
라엘은 아픈 곳은 없다고 답하며 이마에 올려져있는 레온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라엘의 손을 감싸 쥐며 ‘차다…….’하고 중얼거렸다.
“장갑을 하나 만들어줄까?”
“괜찮아요.”
장갑이 필요하다고 하면 온 제국의 털 달린 짐승들이 남아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느라 라엘은 또 황제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내는 것을 잊어버렸다. 여러 가지로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정말로 몸은 괜찮아, 라엘?”
걱정해주는 것은 정말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레온의 걱정이 라엘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신체 건강한 남자였고 훈련을 게을리한 적도 없었다. 잘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고 레온만큼은 아니지만 객관적으로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신분 고하의 문제는 있었지만 사실 신체적인 능력에서 그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사실 레온이 강한 만큼 라엘도 강했다.
요즘 레온이 자신을 대함에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곤 했다. 그는 라엘을 마치 연약한, 그것도 금세 쓰러질 기세의 폐병쟁이 시인을 대하듯 받들고 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역시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거부감에 손사래를 쳤지만 레온은 잘생긴 얼굴에 예쁜 표정을 얹어 웃었다.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워도 되나 싶었다.
“널 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난 항상 네가 걱정돼.”
“당신의 날개 아래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어요. 뭐가 그렇게 걱정되시나요?”
“그저……. 난 너와 헤어진 후로 단 한 번도 널 잊은 적이 없어.”
“음……. 갑작스러운 고백 같은 건 꽤 부담스러운데요.”
“하하. 이건 네가 내 이름을 단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으니 벌칙 같은 것이라고 하자.”
통 부담스러워서 레온이고 레온 님이고 부를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신 뱅뱅 돌리면서 아예 호칭을 부르지 않는 것을 선택한 라엘이었다. 그런 부분을 콕 집어 말하자 할 말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미안한 내색을 하면 귀신같이 잡고 늘어지는 레온이었기에 라엘은 어깨를 으쓱였다.
“절 다시 다니엘이라고 불러주시면 저도 그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게요.”
“아니, 음…….”
당장에 다니엘이라고 부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레온은 망설였다.
“굉장히 구미 돋는 제안이지만 왠지 네게는 라엘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아, 네…….”
“어쩔 수 없지. 당분간 네 입에서 내 이름을 듣는 것은 잠시 포기해야겠어.”
“뜻대로 하시지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라엘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천국에 계신 왕자님, 국왕 전하와는 요즘 어떠세요. 거기서 전하께서는 드디어 제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군요. 삶과 죽음만으로 구분할 수 있는 그런 것이 퍽이나 낭만적인 것 같기도 하지요? 그리고 아마도 전하를 구박하고 있을 것 같은데 기왕이면 잘 지내세요. 천국에는 아마 흰 사슴이 많을 거예요. 궁금하지 않으실 테지만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두렵습니다. 황제가 쓸데없이 촉이 좋은 것을 제외하고라도 지금은 참 닭이 될 것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거든요.
오늘의 일정이었던 별구경을 하며 라엘은 오랜만에 다니엘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건넸다. 제 옆에 답삭 붙어서 어깨를 감싼 레온이 손을 뻗어 별자리를 하나하나 알려주고 있었다. 춥지는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소름이 끼쳤다.
쉴 새 없이 일들이 몰아쳤던 것이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별구경을 하며 긴장이 풀어지자 정신적 압박이 수마로 뒤바뀌어 순식간에 몰려들어왔다. 결국 라엘은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들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레온의 품 안에 안긴 채였다. 맙소사!
어째서 이런 자세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잠들기 직전까지 레온은 라엘의 어깨를 감싸다 못해 아예 등 뒤에서 껴안는 수준으로 품에 안고 있었고, 라엘은 ‘그래, 마음대로 해 보시지. 어디까지 하나 보자.’하는 기분으로 그 가슴에 몸을 맡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세 그대로 잠이 들었다면, 그리고 레온이 그 자세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면 이 자세는 아주 당연하다.
자, 이제 자세에 대한 고찰을 끝냈으니 이제는 빠져나올 때다! 슬그머니 레온의 품에서 몸을 빼려 하자 자신의 등을 감싼 손에 힘이 들어온다. 그대로 레온의 가슴에 확 끌려간 라엘이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자 밤하늘 아래에서 봐도 여전히 잘생긴 레온이 아련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 홀리는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매일 봤다고 이제는 그럭저럭 면역이 좀 생긴 것 같다. 이 와중에도 주변을 살펴 혹시 누군가가 이 장면을 목격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것을 보면.
“이미 주변에는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
시선보다는 당신이 더 큰 문제입니다만. 직접 말하지 못했을 뿐 충분히 눈으로 말했는데도 레온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폐하.”
“그 호칭은 이제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레온 님.”
“그래, 그렇게. 기왕이면 경칭도 좀 없애주면 좋겠는데.”
“제게 너무 큰 것을 바라시는 겁니다.”
레온의 목울대가 울리며 청명한 웃음소리가 정수리 부근에서 울려 퍼진다. 거참 기분이 묘하다.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내게는 천상의 음악처럼 달콤하게 들린다고 하면 넌 싫어할까?”
“싫다기보다는 좀 징그럽습니다. 그러니까 팔 좀 풀어주세요.”
사춘기 청소년의 반항기도 아니고. 굳이 이 말을 했는데 자신의 몸이 레온의 가슴에 더 답삭 붙도록 끌려갈 필요가 있을까? 이걸 화를 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정수리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치겠네. 목소리까지 잘생겼다.
“평생을 불린 내 이름이야.”
“그렇겠죠.”
“어째서 네 입으로 듣는 이름은 이리도 다른 느낌이 들까?”
또 시작이시네. 라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때는 조개 흉내를 내는 것이 최고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레온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의 필터링은 엄청나게 놀라울 정도라서 어떤 말이든 하는 것이 두려웠다. 어떤 점이 그렇게 두렵냐고 물어본다면 바로 답할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 이후로 바뀔 모든 것이 무서웠다.
솔직히 말하자면 라엘도 레온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특별하다. 그것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레온의 입으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은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기름짐이 있었으니까.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워 다시 고개를 내리려는데 때맞춰 레온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피해야 하는데, 피할 수도 있을 텐데……. 라엘은 고양이 앞에서 춤추던 쥐나 뱀 앞에서 록을 하던 개구리가 상대를 발견한 것처럼 바짝 굳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얼굴이 점점 다가오더니 코끝이 마주 닿았다. 숨소리가 가깝다.
“라엘.”
이런 상황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부담스럽다. 대체 어떤 대답을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가 자신에게 바라는 모든 것들이 부담스럽고 버거웠다. 그리고 또, 슬펐다.
“키스해도 될까?”
다행이다. 이건 바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아뇨.”
“그래.”
레온의 얼굴이 다시 멀어졌다. 그는 아쉬움으로 가득하지만 언제나처럼 상냥한 미소로 라엘을 내려다보았다. 라엘은 드디어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레온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거죠?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팔을 치워주셔야 말이지.
라엘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면서 등 뒤에 식은땀이 맺히고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한꺼번에 할 수 있었다. 이러다 레온을 볼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면 어떡하나 싶었다. 외나무다리 이론이라는 것이 방금 같은 위기 상황에서 심장이 마구마구 뛰는 것을 뭐로 착각할 수도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차마 그 뭐가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일단 그렇게 되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거든!
천만다행으로 레온이 쉽게 포기해 준 덕분에 라엘은 ‘다니엘이 남자랑 사귄다.’는 소문이 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며칠 뒤 탈린 남작이 황궁으로 돌아오자 라엘은 그를 붙잡고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궁금한 것도 많았고 알아야 할 것도 많았다. 탈린 남작은 도착하여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라엘의 쏟아지는 질문공세에 파묻혀야 했다.
“지금 동맹의 상황은 어때? 아난의 반응은 어떻고? 페르제 자작과 듀리온 자작과는 개별적으로 연락을 한 적이 있나?”
“네. 모두 긍정적인 답을 내주었고 분위기도 나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한 달 이내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합니다만……. 왠지 서두르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여기 더 있으면 큰일이 날 것 같아.”
“그건 라엘 님만 모르셨던 일입니다만. 지금이라도 깨달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대는 이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쌈박하게 핵심을 꿰뚫는 탈린 남작의 말에 라엘의 눈썹이 단박에 찡그려졌다. 하필이면 먼저 돌아온 것이 탈린 남작이라 제가 하는 말에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대로 있으면 정말로 레온에게 홀리고 말 것 같다는 위기감이 있는 것이 확실했으니 혼을 내지는 못했다. 라엘은 빠르게 대륙의 판도를 점검해보았다.
준비는 완벽했다. 아난은 라엘이 온다면 바로 군대를 내주겠다는 파격적인 대답을 주었고 다른 왕국들도 동맹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그들은 부당하게 왕위를 점거하고 있는 반역자들에게 분노하고 있었으며 자신들의 욕심으로 그 후에 나라를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있는 그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좋은 상황에 원래 생각하던 시기를 조금 앞당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겨울 끝 무렵에 본격적으로 움직이기로 했지만 이 정도로 아무 문제도 없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는 일에 굳이 제동을 걸 필요는 없었다. 라엘은 자작들이 돌아오면 함께 아난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두 분 중 한 분이라도 여자였다면 그래도 괜찮은 상황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넌 또 왜 내 성별을 바꾸려는 건데?”
“솔직히 밑지는 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황비가 되는 거니까요.”
“날 팔아먹으려고 작정했구나.”
“아니면 로렌 님께서 공주님이었다면 동맹을 맺는 데 좋지 않았을까요?”
“제국이 꽤 마음에 들었나 봐?”
“아, 하지만 폐하께서는 라엘 님밖에 보지 않으시니 그건 안 되겠네요.”
“솔직히 너 지금 내 말 안 듣고 있지?”
라엘은 손을 휘휘 저어 헛소리를 하는 남작을 쫓아냈다. 평소 같았다면 정강이든 허벅지든 일단 발에 닿는 데를 그대로 차버렸겠지만 먼 길을 달려 훌륭하게 동맹을 성사시키고 온 그를 하루 정도는 봐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열 받기 전에 방 밖으로 보내는 방법이 그를 지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탈린 남작도 자신이 오늘따라 유별나게 개긴 것은 깨닫고 있는 것인지 잽싸게 방밖으로 빠져나갔다.
방에 혼자 남게 되자 다시 레온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오게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어떤 상황에서도 라엘에게는 결정권이 없었다. 라엘의 몸은 라엘의 것이되 그 자신만의 것은 아니었다. 라엘은 다니엘이었고, 다니엘의 이름을 입고 그로서 살아가고 말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리 살아있을 때 원수 같은 놈이라고 욕을 달고 다녔어도 솔직한 마음은 그는 존경받을만한 주군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죽어버린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니엘은 라엘의 유일한 주군이었고 삶의 방향이었다.
라엘은 다니엘의 이름에 그 어떤 스캔들도 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이미 궁내에서는 이미지 관리가 글러먹은 것 같긴 했지만 그것을 대륙급으로 크게 키울 필요는 전혀 없는 것 아닌가.
레온에게 끌리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더는 없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이 눈앞에서 아련하게 미소 지으며 차근차근 작업을 걸고 있는데……. 그리고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한다며 달콤한 말을 외며 그 눈이 자신만을 좇고 있는데, 이건 여자라면 진작 넘어갔고 남자도 설레는 것이 어렵지 않을 수준이었다. 정말 더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만 더 있으면 “저를 가져요!”라고 외치며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다니엘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버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진짜 힘들다. 한숨이 자연스럽게 푹푹 새어 나온다.
“엄마 보고 싶다…….”
세상 사는 것이 왜 이렇게 팍팍하냐. 차원이동부터 시작해서 인생사가 마구 꼬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정말로 요 근래만큼 집에 가고 싶은 적이 없었다.
라엘이 떠나겠다는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레온의 기분은 저조했다. 레온에게 이후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헤어짐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고, 다만 아난으로 향하는 길에 호위를 내어 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라엘은 고개를 저어야 했다. 힘이 되는 이야기였지만 너무 눈에 띄었으니 마음만 감사히 받기로 했다.
약속된 날이 다가오자 이제는 아예 땅을 파고들 기세로 우울해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감미로운 목소리로 라엘의 이름을 부르며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던 그였지만, 요즘에는 우수에 젖은 눈으로 라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기 바빴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라엘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생각이 빤히 보인다고 해서 라엘이 덜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바로 떠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네가 없는 동안 얼굴을 잊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신전 앞 그 어마어마한 인파 속에서 정확하게 라엘의 얼굴을 찾아낸 레온인지라 별로 납득 가는 답은 아니었다. 레온은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초상화를 그려도 될까?”
“아뇨.”
“……그래.”
단박에 거절하자 레온의 표정이 우수에 젖는다. 쓸데없이 잘생겼어. 하지만 초상화를 그리게 해주면 분명히 황궁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엄청난 크기로 달아놓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요 몇 달 동안 그를 겪어보며 느낀 것은 레온은 받아주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이 쭉쭉 밀고 나오는 불도저가 되기 때문에 예의고 자시고 신경 쓰지 말고 그때 거절하거나 자제시키는 편이 자신에게는 나았다.
과연 레온은 잠시 기가 죽었을 뿐 곧 라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요 근래 레온은 이야기를 할 때 자연스럽게 라엘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시작된 기억은 모호한데 상황 자체는 왠지 아주 자연스럽다.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에 이번에 라엘은 레온을 제지시킬 이유를 찾지 못했다. 고민해봤자 어차피 손을 내주는 것뿐이고 자신은 금방 황궁을 떠날 것이니 그냥 내버려두어도 되겠지, 하는 이유였는데 곁에서 보는 남작의 눈에는 절대로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탈린 남작은 자신이 돌아온 이래로 황제가 왕자에게 자연스럽고 진하게 스킨십을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어마어마한 공포에 휩싸였다. 설마 이미 일 친 것은 아니겠지! 하면서 바들바들 떠는 남작에게 누구도 답을 줄 수 없었다. 황비는 안 됩니다, 황비는! 며칠 전 자신이 적극적으로 황비에 대한 메리트를 읊었다는 것은 이미 까맣게 잊은 남작이었다.
“이번에 헤어지고 나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모든 일이 끝나는 대로 꼭 방문하겠습니다. 레온 님께서는 제 은인이시니까요.”
“그런 딱딱한 관계는 바라지 않아.”
그렇다고 애인이 되는 건 제가 더 바라지 않는데요. 현명한 라엘은 대답을 아꼈다. 레온은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끔이라도 소식을 전해줬으면 좋겠어. 예전에 네 왕국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때는 어쩔 수가 없었죠.”
“그때 내가 널 찾았다는 것은 몰랐겠지?”
“아, 절 찾으셨나요?”
“……응.”
레온이 얼마나 자신을 걱정했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찡하게 무언가가 올라온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오직 한곳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정말로 자신에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너를 찾기 위해 사람도 많이 보냈지. 네가 다치기라도 했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어. 라엘, 네가 무사하기만을 빌었지.”
“그런…….”
“얼마나 잘 숨었는지 네가 내 앞에 스스로 나타날 때까지는 찾아낼 수가 없었지. 무사해서 다행이야.”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던 네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알겠어?”
“아…….”
“너는 아마도 절대로 모를 거야.”
레온이 라엘을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세상에서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길로 자신을 대하는 그를 보면 서글픈 기분이 든다. 가슴 한구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뭉쳐있는 듯, 그런 기분이 들었다.
떠나겠다는 소식을 알린 후 일주일째, 레온은 푸석푸석 시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레온을 보는 라엘마저 괴로울 지경이었다. 어떤 결론도 내지 않고 이대로 헤어지게 된다면 그는 물론이고 자신도 영원히 풀리지 않을 매듭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은 슬픈 예감이 들었다. 아마도 레온은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라엘 자신도 과연 그를 향한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채로 앞으로의 큰일들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을까? 아니, 지금 상황만으로도 그것은 힘들 것 같았다.
라엘은 결심했다. 가장 중요한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채 주변만을 맴도는 이 대화를 마무리하기로.
“남작.”
“예.”
“산책하고 싶지 않아?”
“별로 생각 없는데요.”
“이제부터 생길 거라고 믿어.”
“그러네요. 갑자기 산책이 가고 싶어지네요.”
탈린 남작은 군말 없이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라엘은 문을 나가기 전 그의 눈빛을 읽었지만 별 쓰잘데기 없는 걱정에 이마를 확 찡그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이젠 말하지 않아도 대체 무슨 소리를 할 것인지 알 것 같다. 진짜로 쓸데없는 걱정이라서 가볍게 무시하면 되는 것이다.
남작이 나간 후 라엘은 시종마저 모두 물렸다. 정작 단둘이 남게 되자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워 라엘은 잠시 머뭇거렸다.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결국 라엘은 입을 열었다.
“폐하, 그…….”
“레온.”
“네, 레온 님.”
레온은 단호하게 자신의 이름을 정정했다. 폐하라고 불리는 것이 어지간히도 싫었던지 말을 잇기도 전에 쳐낸다. 폐하라고 부르면 둘 사이의 거리감이 더욱 넓어지는 기분이라고 하는데, 라엘은 솔직히 이미 둘 사이의 거리감은 은하수보다 드넓다고 정정해주려다 말았다. 그 말을 꺼내면 정말로 레온이 울어버릴 것 같았다. 솔직히 지금도 심리적 거리감은 은하급이다.
라엘이 모두를 내보내고 심각한 표정으로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것인지 레온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온 님께서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 것인지 여쭈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사랑하고 있어.”
단 한 순간의 고민도 없이 즉시 돌아오는 답은 감미롭기 그지없다. 꼭 독 같다고 생각했다. 서서히 중독되는 독. 중독된 것을 깨달은 순간 이미 늦어 해독조차 할 수 없는 그런 독.
“세상에 너뿐이야. 내 심장을 이리도 뛰게 한 사람은.”
“……하지만, 레온 님. 전…….”
“너를 만난 후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사랑들이 정말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난 너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고 내 심장은 오직 너를 위해서만 뛰고 있지.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너를 만난 이후로 그것들은 색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내 세상의 모든 진실이 너를 향해 있다고 말한다면 너는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해 줄까.”
조곤조곤 말하고 있지만 그 말 안에 담긴 감정은 당장에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격함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내보이는 말에 라엘은 잠시 대답을 잊었다.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이미 알고 있어. 네와 내가 놓인 위치와 입장은 그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둘 중 하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리고 네가 나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
“……그리고 네가 그것들을 포기할 정도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라엘은 신음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인간적인 호감이라고 한다면 라엘은 이미 그에게 충분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레온은 그 사실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했다. 그러나 레온, 그가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 자신에게 시작되고 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아직은 스스로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그런 감정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온은 손 안에 두었던 라엘의 손을 들어 제 입술에 가져다 댔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손등에 꾹 눌려지는 감촉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두 눈을 꼭 감자 라엘의 볼에 약간 서늘한 레온의 손이 닿았다. 그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소중한 것을 만지듯 라엘을 만진다. 부드럽게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길이 기분이 좋으면서도 서글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곁에 두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내 마음이야.”
“하지만 전…….”
“알아. 그리고 만약 네가 날 사랑하더라도 너는 나를 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까지.”
라엘은 눈을 뜨고 무어라 대답하려 했지만, 눈을 뜨자 다가오고 있는 레온의 얼굴을 발견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레온은 질문하지 않았다. 살짝 눈물이 맺힌 라엘의 눈꼬리에 그의 손이 닿는가 싶더니 입술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조금 전, 손등에 닿았던 그것은 재촉하듯 라엘의 입술을 부드럽게 꾹 눌렀다. 살짝 떨리며 조심스럽게 닿는 것이 안타까워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고 잠시 후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 아직은 그만큼 절실하지 않아.
간절하게 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밀어낼 수는 없는 키스였다.
키스가 끝난 후 이어지는 침묵은 자연스러웠다. 레온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말없이 잠잠했다. 그의 마음도 복잡하겠지만 그만큼이나 라엘의 마음에도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레온의 품에 안긴 채로 생각했다. 아직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확실하다. 애절함도 절절함도 아직은 없지만 인간적인 호감을 넘어선 것은 확실하다. 인간적으로 완벽한 모습을 가진 그는 자신에게 더없이 친절하고 상냥하다. 그 친절과 상냥은 오직 자신만을 향한 것이었고 그 특별함을 깨닫게 되었을 때 설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내가 여자라면, 으로 시작되는 상상 속에서의 레온은 오히려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저 현실이 그것과는 다르며 라엘 자신은 현실 속의 사람이라는 것이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콩콩 귓가에 울리는 레온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라엘은 결심했다.
“레온 님의 말대로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로윈을 택하겠죠.”
“그래, 알아. 나도 그러할 테니까.”
마른침을 삼켰다. 과연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을 것인지. 그래도 지금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결국 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도 저를 원하신다면…….”
“……라엘?”
“순간뿐이라도 괜찮다면…… 그렇다면 저를 가지세요.”
“아…….”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이어지는 말에 레온의 어깨가 떨린다. 차마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껴안는 그의 팔에 힘이 꽉 들어간다. 숨이 막힌다.
레온이 다른 말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저 몸, 하룻밤을 사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만은 할 수 없다. 그를 선택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버려야 하는 일이고, 다니엘의 유언뿐이 아니더라도 이미 많은 것이 얹어진 어깨에서 어떤 것도 내려놓을 수 없다.
그는 절대로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밖에 그의 감정에 보답할 수 없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레온의 마음을 받아줄 수도 함께할 수도 없으면서 그저 몸만을 내주는 그런 거래. 이것은 더없이 무책임하고 레온의 감정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저 제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후회하지 않도록 내건 제안일 뿐이다. 그것에 레온의 감정은 가장 마지막에 고려된 것이다.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은 분명히 그와 함께하기를 원한다.
레온이 돌아간 후 라엘은 탈린 남작을 불렀다. 지난번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솔직히 그와 밤을 지낸 후에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1년 전의 경험은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앓아눕지 않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다시 입을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나중에 눈치챈 남작이 말을 꺼내기 전에 차라리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매는 맞기 싫지만 꼭 맞아야 한다면 먼저 맞는 것이 조금 나은 것 같다는 그런 기분이다.
“다 이해합니다.”
말을 꺼내자마자 돌아온 반응이 생각 외의 것이라 라엘은 당황했다.
“잠깐만, 나 지금 폐하와 자야 하는 101가지 이유를 생각하고 있는데……?”
“괜찮습니다. 정말로.”
남작이 아련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거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수준이 되었다. 얘, 뭐라도 잘못 먹었나? 당황스럽다. 진짜로 쟤 이상해.
이미 탈린 남작의 마음속에서 이 둘은 ‘가장 높으신 분들의 이룰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의 주인공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고 그 주제로 소설까지 나올 수 있는 상태로 휘몰아치고 있었다는 것을 라엘이라고 알 리는 없었다.
레온이 지난 몇 달 동안 끊임없이 라엘에게 대시한 것은 헛되지 않았고, 그 결과로 레온은 라엘의 대답과 측근들의 안타까운 호감을 얻을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완벽하고 모자랄 것 하나 없는 황제가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망국의 왕자에게 빠져드는 것은 드라마틱한 상황이긴 했다. 암, 그렇지. 게다가 황제와 왕국 중에서 당연히 왕국을 선택하는……. 크흡……! 주군!!! 남작의 마음속에는 이미 감동의 쓰나미가 몰아치고 있었다. 시종들과 꽤 친하게 지내더니 이상한 것이 옮겨왔다며 라엘은 진저리를 쳤다.
“너 진짜 기분 나쁘거든?”
“사랑이라는 것이 그런 거죠. 마음이 생각한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이니까요.”
“……저기, 난 거기까지 말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랑과 현실 속에서 폭풍처럼 휩쓸리는 두 분이라니……. 단 한 번의 추억으로 사그라질……. 크흡……!”
“저기? 내 말 안 듣고 있지, 너?”
아, 찝찝하다. 대체 쟤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엘은 그 찝찝한 마음을 밤까지도 접을 수가 없었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였다. 오늘따라 목욕시중을 드는 시종들이 아련한 눈으로 그를 씻기는데, 망설이면서 어느 부분을 씻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을 보자 민망하고 기가 막혀서 결국 그들을 모두 내보내야 했다. 뭐지, 이거? 황궁에 다 소문난 거 아니야? 물론 황제랑 이렇게 저렇게 하는 그런 상황에서 시종들이 그 사실을 모를 수는 없겠지만……. 정말로 쪽팔렸다.
비빈들처럼 아름답게 단장할 필요는 없었기에 단정하게 머리를 빗고 정돈하는 것 정도로 끝내기로 했다. 라엘이 알아서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시종들은 뭐라도 더 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솔직히 그들도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그것보다도 라엘은 정말로 혼자 있고 싶었다. 제발 나가줬으면 좋겠다. 아련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워 미칠 것 같으니 그냥 나가주면 안 되나? 어차피 혼자 씻고 뭘 하는 것이 익숙하니 쟤들 다 필요 없다.
라엘은 레온과 자신에 대한 소문이 대체 어떻게 나 있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많이 궁금했다. 조금 전 탈린 남작의 반응도 그러했고 지금 시종들의 반응도 그렇다.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가고 있기에 남자 간의 관계에 이런 호의적인 반응이 돌아오는 것이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소설 같은 소문이 났기에!
물론 진실은 알 길이 없고 라엘은 지친 목소리로 그들을 물려야 했다. 나가는 길에 뭔가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긴 한 것 같은데 이젠 정말로 모르겠다.
“……아름답다고 말하면 화낼 건가?”
“하지 말라고 해서 들어주신 적이 있어요?”
“그래. 정말 아름다워, 라엘.”
깊은 밤, 라엘의 방을 찾은 레온은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차림이 무엇이 그리 특별히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레온의 품에 안기자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단단하게 긴장한 어깨는 떨리고 있었고 쿵쾅거리는 심장은 그 품에 안긴 라엘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긴장한 주제에 레온은 딱딱하게 굳은 라엘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 손길에 오히려 허리가 바짝 서며 긴장하게 됐지만. 의도란 것은 그렇다는 것이다.
굳이 청하여 천천히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는 레온의 섬세한 손을 내려다보던 라엘의 입술이 열렸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할 말이라도 다 해야지 않겠냐.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만.”
“무엇을?”
“지난번처럼은 하실 것은 아니겠죠?”
“지난번?”
“……삼 일.”
“아…….”
타이밍 좋게 셔츠가 어깨에서 미끄러지며 유난히도 흰 라엘의 어깨가 드러난다. 탐하듯 제 몸을 훑는 레온의 눈빛이 위기감을 절로 불러일으킨다. 제대로 답을 듣지 않으면 또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온다. 허리는 소중하다, 허리는!
“제가 머무는 동안에는 언제든 오셔도 좋으니……. 지난번처럼은……. 제발, 살려주세요.”
“쿡, 그래.”
절박한 라엘이었지만 레온은 장난이라고 생각한 듯 웃어버렸다. 어차피 결국은 자게 될 것인데 조금이라도 몸 편하게 나눠서 하는 게 낫지 않겠냐며 막가자며 제안한 것이지만 레온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랑스러운 이가 스스로 제 품에 안기겠다는 것인데 그의 입장에서도 손해 볼 것은 없는 것이다. 대답을 듣고 아주 조금 안심한 라엘은 걸치고 있는 나머지 옷들을 스스로 벗고 그의 품에 안겼다.
다정하게 자신의 몸을 애무하며 사랑스럽다 말하는, 끝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가 안타까웠다. 다정하게 제 몸을 애무하며 사랑스럽다 끊임없이 제 이름을 부르는 그가 안타까웠다. 어째서일까? 어째서 하필이면 나일까? 내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어째서 나인 건가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올 대답에 혹시 스스로 상처받을까 봐 입술을 다물어버리는 비겁자다, 자신은.
겹친 입술이 떨어지자 이마와 뺨에 가볍게 닿는 것이 뜨거웠다. 입술이 목선을 따라 잘게 키스하며 쇄골을 훑으며 가슴 위에서 멈췄다. 라엘은 몸을 비틀었다. 닿은 부분이 뜨겁고 몸이 달아올랐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성적인 의도로 만지는 것 자체가 어색하였다. 바짝 선 유두를 아프지 않게 물고 빨아올리는 감각에 낯선 신음이 목을 타고 올라온다. 아름다운 얼굴이 자신을 올려다보며 웃었을 때는 조금 부끄러웠다.
“……아, 좀…….”
몸을 뒤틀며 레온의 머리를 밀어내자 그는 그저 웃기만 했다. 입술은 떨어졌지만 손이 배를 쓰다듬는다. 확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감각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세웠다. 헉, 하며 밭은 숨소리가 새어 나오자 레온의 손이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라엘의 몸 위에 자신의 몸을 겹친 레온은 이제는 숫제 대놓고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애무하기 시작했다. 쪽쪽 빠는 소리가 나는 것도, 빨아올려지며 타인에게 희롱당하는 감각도 이상하다. 흐으…….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조금 있으면 더 대단한 것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 이것에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상해서 결국 밀어내려던 손을 아래로 내려 시트를 꽉 쥐었다. 손이 움직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레온은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 시트를 쥔 손이 레온의 손에 감싸여 위로 떨어진다. 라엘의 손바닥에 입 맞춘 레온은 그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게 했다. 부끄러운 자세라고 생각하면서도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레온이 미소 지었다.
“사랑해, 라엘.”
“으, 하아…….”
뭐라 답하고 싶었지만 입술보다 성급한 레온의 손이 아랫배를 더듬고 있었다. 열이 뭉치는 기분이 들어 몸을 뒤틀자 위를 덮치고 있던 몸이 이번에는 허벅지를 벌려 그 안에 자리 잡았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상되는 자세에 라엘은 뻣뻣하게 긴장하고 말았다. 목덜미에 닿는 날숨에 피부가 타오를 것 같다. 긴장한 등을 레온의 손이 천천히 쓸어내렸지만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랫배를 맴돌던 손이 더욱 아래로 내려간다. 다리 사이를 파고 든 손가락이 이제는 무어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곳을 더듬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깨에 둘렀던 손이 다시 아래로 내려가 시트를 꽉 쥐었다가 이제는 얼굴로 올라가 입을 꽉 막았다. 새어 나오는 신음마저 부끄러워 어찌 해야 할지를 정말로 모르겠다.
“거기……는 그만…….”
“미안, 아름다워서.”
아래쪽을 더듬는 손가락보다 집요하게 가슴을 애무하는 것이 더 부끄럽다고 하면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것을 어떡해. 그저 이 상황 자체가 부끄럽고 어색하다. 몸을 뒤틀자 그것이 오히려 몸을 밀착하게 되는 것이 되어 점점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다. 열 때문인지 정신이 혼미해진다.
아아, 앓는 소리만을 내고 있자 체중이 몸 위로 실린다. 달아오른, 땀에 젖은 피부가 밀착되자 심장소리가 가슴에 바로 닿는다.
“너를 알고 난 이후로…….”
“아, 거긴…….”
단단하게 발기한 것이 입구에 닿자 눈이 크게 뜨여진다. 레온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입술을 살짝 마주 대었다. 날숨이 섞이자 조금 긴장이 가라앉았다.
“내 세상은 빛을 잃었어, 라엘.”
“흐읏……!”
뜨거운 것이 안쪽으로 밀려들어오는 느낌에 크게 숨을 들이켰다. 닿은 곳곳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겁다. 헐떡이며 그를 받아들이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레온은 기꺼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라엘의 몸에 도장을 찍 듯 입술로 목덜미며 가슴에 키스했다. 아 정말로 정신이 흐려지는 것 같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이 너뿐이라서…….”
말 때문에 정신을 놓겠습니다. 느끼해서.
다정한 밀어를 속삭이고 있지만 허리 아래는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입술과 허리 아래의 괴리에 서글퍼 질 정도였다.
라엘은 생각했다. 만약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자신과 꼭 닮은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레온은 어쩌면 그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대체품으로 살아온 것, 그 인생이 처음으로 서러워졌다. 자신의 인생이 그리 삿되고 가벼운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레온에게 다른 선택이 있었다는 것이 안타깝다. 레온은 진심으로, 진실로 자신을 대하였지만 자신은 거짓 그 자체였기에 그의 진실마저 거짓으로 만들고 말았다. 그가 사랑했던 다니엘은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없는 사람이었다.
“아아…….”
가장 깊은 곳에 그가 닿았다. 빈틈없이 맞물린 몸이 지금까지의 어떤 거리보다 가까워, 라엘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라엘……? 마, 많이 아파……?”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몸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거칠지만 다정한 레온의 움직임은 오로지 자신에게 닿고 싶은 절박함이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결코 마음 한 조각도 주어서는 안 된다. 사랑한다는 말은 금어가 되어 목구멍 아래쪽을 맴돌다 사라지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를 사랑할 수 있는 미래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다니엘의 삶이 아니다. 더 이상 마음이 자라지 않도록 꾹꾹 눌러오는 것이 그가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물을 주는 것 같아 슬퍼서 죽어버릴 것 같다.
절정을 맞이하며 제 이름을 부르는 레온의 목을 끌어안았다. 조금의 틈도 없이 그를 꽉 끌어안고 그의 귀에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은 온전한 이름을 불렀다. 귓속으로 들려오는 달콤한 제 이름에 레온의 눈이 커진다. 산 위의 보석 같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든다. 마치 바다 속에 잠기는 보석 같다고 생각하며 라엘은 레온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었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하늘이 참 노랗다는 말이었다. 창문 너머의 하늘이 노란데…… 아, 커튼이다. 핑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라엘은 어제 자신이 술을 먹었던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딴 것을 했는데 무슨 숙취를 겪는 것 같은 느낌이 드나.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키자 레온이 다정하게 웃으며 라엘의 허리를 받쳐줬다. 맨 살이 닿자 지난밤이 생각나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바짝 마른 목을 축이는 것이 더 급해서 그의 품에 기댄 채로 물을 마셨다. 건조한 목구멍이 따끔거렸지만 곧 젖어들어 진정되었다.
물을 마신 뒤 지금 몸을 움직이는 것은 굉장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란 것을 깨달았다. 이 정도로 몰아붙이다니 거짓말쟁이도 이런 거짓말쟁이가 없다. 그렇다고 기분이 좋지 않았냐고 하면 또 아니라서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기운이 쭉 빠졌기 때문에 라엘은 레온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레온이 목울대를 울리며 낮게 웃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억울하네요. 이게 꿈이 아닌 몸 상태는 저뿐인 게요. 절대로 꿈이 아닌 거 같은데요.”
“다행이야.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지는 환상은 아니었는지…… 정말로 두려웠어.”
라엘의 젖은 이마를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땀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떼어주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은 역시 부끄러웠다.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자 귀가 화끈해지면서 당장 녹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스스로 앉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몸을 움직이려 하자 레온이 라엘을 끌어안았다. 뭔가 불편한 것이 엉덩이 옆에 닿는 기분이 들어 히익, 하고 쇳소리를 내자 레온은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안심시켰다.
“네가 약속해줬으니 무리시키지 않아.”
“아, 약속…….”
거짓말쟁이가 뭐라는 거야. 이미 충분히 무리시킨 것은 생각하지 않은 뻔뻔한 말에 기가 막혔지만 잘 생각해보면 더 이상 무리하는 것도 중요했다. 약속한 나 새끼, 잘했다!
“대신 궁에 있는 동안 너를 내게 허락해주기로 한 약속도 지켜주는 거겠지?”
“……네에.”
아니, 나 새끼 덜 잘했다. 참 패기 있게 부끄러운 약속을 한 것 같아 라엘은 고개를 떨궜다. 이제 바라는 것은 앞으로 레온의 이성이 열심히 일하는 것뿐이었다. 그렇다고 그 느낌이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그냥…… 좀 부끄럽다. 밤을 함께 보낸 후 맞이하는 아침이라는 것은 이런 기분이구나, 생각하며 라엘은 레온의 품안에서 몸을 꿈지럭댔다. 너무 달콤해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철컹.
그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낯선, 하지만 들어본 적 있는 소리에 라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쪽을 향했다. 온몸이 욱신거려 거의 의식하지 못했던 다리였다. 시선이 닿은 왼쪽 다리 끝에는 창밖에서부터 쏟아지는 햇살에 희게 반짝이고 있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아아. 차가운 것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온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드는데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 든다. 고장 난 태엽인형이 된 것 같은 몸뚱이를 움직여 레온을 올려다보자 그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건 뭔가요? 어째서죠? 왜? 수없는 질문이 입 안을 굴러다녔지만 차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라엘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을 보며 레온은 라엘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네가 내게 약속을 해 준 것이 너무 기뻐, 라엘.”
“……레온……님?”
따사로운 오전의 햇살이 방 안을 천천히 부유한다. 창 너머의 계절과 유리된 공간의 온기가 침대까지 가득 채우고 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 하나 빛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화사한 것은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드디어 온전한 너를 곁에 둘 수 있겠구나.”
레온은 다정하게 라엘을 끌어안았다.
“지금 이 순간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너는 아마도 평생 모를 테지.”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장르는 무엇이지? 희극? 비극? 그렇지 않으면 더없이 지독한 블랙코미디.
조금 전 물을 마셨는데도 순식간에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새어 나오는 바람이 지독하게 쉬어있다. 목소리마저도 메말라버렸다.
“이런 장난은 달갑지 않아요.”
“내가 네게 단 한 순간이라도 진지하지 않을 때가 있었어?”
레온의 눈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아름답게 휘어진다.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듯 라엘의 등을 쓰다듬는 그 손은 분명히 지난밤의 온기와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히 온기를 품고 있는 손이 지나는 곳마다 이제는 소름이 돋는다.
설마, 설마 장난이겠지. 자신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레온은 가지 말라고, 헤어지지 말자고 하는 그런 말을 하고 싶어 이런 짓궂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라엘은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간밤의 관계로 삐거덕거리는 다리를 애써 끌어당겨 손으로 단단한 것을 더듬었다. 희게 빛나는 족쇄를 잡고 비틀어 열어보려고 했지만 단단한 쇳덩어리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릴 기미조차 없었다. 잔뜩 힘을 준 손이 그새 빨갛게 부어올랐다. 우습게도, 정작 족쇄가 채워진 발목은 부드러운 천이 덧대져 있어 아프지 않았다.
아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혼란스러운 정신을 부여잡고 족쇄를 더듬고 있는 손을 약간 서늘한 손이 붙잡는다.
“안 돼. 다치잖아.”
여전히 상냥한 목소리였다. 레온은 라엘의 손을 잡아 제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더없이 귀하고 사랑스러운 것에 입 맞추는 그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지금까지 자신을 대하며 전혀 변하지 않은 그 미소를……. 우습게도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서서히 머리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굳어있던 머리가 서서히 움직이며 생각하기 시작했고 진실을 아는 순간 등골에 싸한 것이 내려앉았다.
지난밤의 꿈같던 시간은 순식간에 가라앉아 산산이 부서진다. 그 흔적을 더듬어 보려 하여도 조각조각 난 꿈들은 이미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서늘한 현실이 손끝에 닿자 덜덜 떨리던 입술이 진정되고 뜨겁게 달아올랐던 머리는 싸늘하게 식었다.
고개를 들었다. 레온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다.
고개를 숙였다. 희게 빛나는 족쇄가 자신의 왼쪽 다리에 자리 잡고 있다.
아아, 그렇구나.
아아, 그랬구나.
처음부터 궁금한 것들이 있었다.
첫째, 어째서 귀족연합은 움직였는가.
그들은 힘 있고 영악하고 탐욕스러운 이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큰일을 벌일 정도로 대담하지도 않았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하였지만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할 존재들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화산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확신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그들이 갑자기 움직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수 있도록 시발점이 된 것은 대체 누구인가?
둘째, 아난으로 향하던 일행을 쫓던 추격자들은 누구인가.
귀족들은 분명히 다니엘이 죽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다니엘이 큰 상처를 입은 것은 그들이 모를 수는 없었다. 검에 관통되어 온몸의 피를 쏟아낸 그가 굳이 망토를 궁에 버려두고 온 것은 그것을 위한 것이다. 그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대상들이 시체가 되었다 하더라도 다니엘의 것이 분명한 엄청난 핏자국을 보고도 그들은 다니엘이 살아있다고 믿었을까? 다니엘은 분명히 제 죽음으로 라엘을 탈출시켰다. 흰 담비 털가죽의 망토는 라엘을 탈출시키기 위한 다니엘의 의지였다. 그들은 궁 어딘가에 버려져있을 다니엘의 망토를 정말로 발견하지 못했을까? 누구라도 죽음에 이르게 될 정도로 붉게 핏자국으로 물들어있을 그 제물을?
커다랗게 어긋나 있던 조각들이 드디어 제자리를 되찾았다. 아주 조금씩 비틀려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던 모든 상황이 드디어 올바르게 맞물려 삐걱대며 움직인다. 모든 것은 무대 위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주아주 커다란 무대. 그 위에서 춤추던 자신. 관객은 단 한 명. 그는 자신을 보며 웃었을까, 울었을까? 그가 만들고 연출한 극이 희극인지 비극인지 아니면 코미디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단 한 사람이었다.
진실은 눈앞에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확인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폐하, 당신이었군요.”
“레온이야.”
상냥하게 휘어지는 눈매를 보며 라엘은 확신했다.
“당신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군요.”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지만 그것이 진실이다. 라엘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레온은 더없이 다정한 손길로 그의 목 뒤를 끌어 입술을 마주 댔다. 분명히 어제까지와 같은 사람이었지만, 입맞춤은 더 이상 달콤하지 않았다.
판권
그림자 왕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