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네가 오던 밤 ~you're coming night~
운명의 날, 수확제는 금세 찾아왔다.
오늘 신전으로 가는 것은 라엘뿐이었다. 측근들도 함께 가고 싶어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몰려서 다니면 눈에 띌 우려도 컸고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부러 한 달 가까이 시장을 홀로 다니며 위협이 없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실 한편으로는 황제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실망할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기도 하고……. 라엘은 홀로 신전을 향했다. 요 근래에는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한 생각까지 들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황제의 행렬은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제재를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거리에서 그를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는 황제에게 제 얼굴을 제대로 보여줄 방법이 없었다.
잠시라도 멈춰 군중을 둘러보는 그런 곳을 라엘은 찾았고 탐문-라고 쓰고 시장먹거리 탐방이라 읽는-을 통해 황제가 가장 긴 시간 머무는 곳을 알아냈다. 사실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그냥 신전 앞에서 죽치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신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엄청난 군중이 몰려있었다. 평소보다 조금은 더 가까이 황제를 볼 수 있는 기회다 보니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것이었다. 선택을 잘못했을까, 라고 얼굴이 허옇게 질릴 정도로 많은 군중이었다.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흥분한 시민들은 이미 기도라는 것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오직 황제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틈은 라엘이 파고들기 딱 좋은 정도였다. 사람들이 흥분하면 흥분할수록 라엘이 몸을 감추기에는 좋았다.
그런데…… 몸을 감추기가 너무 좋았던 것 같다. 차원이동 전후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는 처음 와본 라엘의 상상력이 차마 미치지 못한 영역이었다. 보통은 많은 사람을 멀리서 보며 우아하게 손을 흔드는 종류의 것을 해왔던 것이다.
라엘은 유례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이에서 쓸려 자꾸자꾸 뒤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호흡마저 곤란하다. 이대로 여관까지 돌아가는 것은 어떨까 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할 정도였다. 황제가 라엘을 알아보기는커녕 라엘이 황제 얼굴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아, 안 되겠다……. 일단 돌아…….”
돌아가야지, 하고 등을 돌린 라엘은 당황했다. 잠시 생각에 빠진 그사이에 라엘은 군중 한가운데로 쓸려 들어와 있었고…… 나갈 수가 없었다! 뒤를 돌려고 해도 어깨가 꽉 끼어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려운 데다 내가 걷지 않고 있는데 걷게 되는 기현상을 맛보게 되었다.
억지로 몸을 돌리려 하자 옆의 아저씨가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보고 라엘은 빠져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방도가 없다. 이제 그저 황제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릴 수밖에. 앞뒤좌우에서 밀려오는 사람들에게 당황하며 라엘은 정말로 앞밖에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황제의 행렬이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행렬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황제의 주변을 감싸고 있었지만 오히려 대륙 어떤 왕의 행렬보다도 조촐한 인원수였다. 익숙한 듯 황제가 지나갈 길을 스스로 터주는 백성들을 보며 라엘은 감탄했다. 백성들에게 자주 보인다고 듣기만 했지 직접 보니 얼마나 이들이 황제의 출타에 익숙한지 알 것 같았다. 이들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멀리서 올려다본 황제는 여전히 그 얼굴에 태양을 하나 매달아 둔 것처럼 잘생겼다. 아니 잘생긴 정도가 아니라 마치 신의 사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 군중 사이에 낀 채로 바라본 황제는 그러했다. 왕궁에서 마주 보던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존재하는 세계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라엘은 생각을 수정했다. 친분이라고 말하기에도 미묘한 관계로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어쩌다 보니 육체적인 관계까지 한 번 맺긴 했지만 결국 그 인연이라는 것은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것이었고 그마저도 일 년이 더 넘는 기간이 지났다. 이후로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던 것을 보면 그마저도 순간의 변덕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 변덕을 믿고 로윈의 미래를 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라엘은 깨닫고 나서 깊게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아니, 등을 돌리고 싶었다. 여전히 군중 사이에 끼어 있지만 않았다면!
황제가 지나가자 더욱 흥분한 사람들은 이제는 라엘을 종잇장처럼 눌러버릴 작정인지 사방에서 그를 눌러댔다. 라엘은 잠시 우수에 젖어있던 자신을 건져내야 했다. 울적함은 다 집어던지고 허망하게 군중들 무리에 끼어 마치 한 마리의 오징어처럼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 또한 지나갈 일이로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정말로 울적하다.
라엘은 나라 잃은 표정으로-실제로 나라를 잃었지만- 사방에서 치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허우적대며 황제를 올려다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상태라면 황제가 자신 쪽을 돌아보더라도 알아볼 수 있기나 할까 싶었다. 사람 한 명이 서 있을 공간이라는 것이 최소한도로 혹은 기본적으로 이만큼인데, 지금은 그 공간에 다섯 명 이상이 눌려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황제가 라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황제의 입술은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이쪽 편의 백성을 보았으니 다른 쪽의 백성도 둘러볼 때였다. 공평한 황제는 그 후로는 라엘 쪽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못 보고 지나친 것이었다. 라엘은 지금 자신의 신세가 마치 그릇 안의 새우젓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가. 새우젓의 눈을 일일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망스럽긴 했지만 사실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선택지를 버린 지 좀 된 일이었고 오늘은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들러본 것일 뿐이었다.
절망할 일도 아니었다. 원래 제국행 자체가 계획에 없었던 일이었고 정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거의 없었다. 황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더라도 자칫하면 그것이 온전히 황제의 힘으로 보일 수도 있는 우려가 있었다. 황제의 개입이 많으면 곤란한 것은 로윈이었다. 그럴 바에야 여전히 위험은 조금 남아있었지만 정식으로 아난 쪽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보기에도 훨씬 좋았고 확실하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면 용병단을 이용하는 방법도 생각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생전에 다니엘이 했던 것처럼 왕국의 운영과 용병단을 확실하게 구분하여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이 급하다면 굳이 그것만을 밀어붙일 생각도 없었다. 용병단을 고용하는 형태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쨌건 용병단은 대륙에서 이름을 크게 날리고 있는 유명한 용병단이었고 그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엘은 마음 놓고 화를 냈다.
“좀!! 나갑시다!!”
“황제 폐하 만세!!!”
“일단 좀 나가……게……억…….”
“폐하, 이쪽 좀 보세요!!”
흥분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배운 적이 없단 말이다!
라엘이 여관으로 돌아온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지고 난 후였다. 아침에 떠난 그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측근들은 무사히 돌아온 라엘을 보자 반색했다. 그리고 폭탄을 열댓 번은 맞은 듯한 그의 꼴을 보고 진심으로 걱정했다.
피곤에 절은 라엘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손만 휘휘 저었다. 대충 ‘별일 없지만 말을 하기에는 너무 귀찮은 상태’라고 알아들은 그들은 라엘을 식당으로 데려가 일단 앉혀 놓은 후 고기 위주의 주문을 마구 시작했다. 요즘 체력이 모자란 것인지 식사량이 늘어난 그를 위한 식단이었다. 그들의 눈물 나는 배려에 라엘은 주문한 고기요리와 맥주가 배 속으로 들어가자 곧 정신을 차렸다.
“역시 잘되지 않았군요.”
“황도의 백성들을 너무 우습게 봤어. 추격자들보다 더 무섭더군. 정말 손가락 하나도 운신하지 못한 채로 이리저리 쓸려 다니기만 했어.”
“라엘 님께서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릴 기회가 언제 있었겠습니까.”
솔직히 엄청나게 많았지만 그냥 웃었다. 탈린 남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처음부터 잘될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건 그래도. 음? 파악당했어?”
“라엘 님께서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는 저희도 생각했습니다.”
뭐……. 라엘은 슬쩍 웃었다. 측근들이 괜히 측근이라는 명칭을 단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의 곁에, 그리고 라엘의 곁에 이만큼이나 오래 있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라엘이 선택을 해야 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혼란과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바로잡는 과정에서의 고민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의 주군이 결정을 내려야 비로소 자신들도 움직일 수 있기에 그저 자신들의 왕자가 결국은 더 좋은 계획을 세울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들을 제대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신뢰로 그를 믿고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무모한 자신의 행동을 믿고 따라준 그들이 고마웠다.
“솔직히 말할게. 이건 처음부터 허술하고 끝까지 무리수를 둔 계획이었어. 상황이 이렇다 보니까 잠시 정신을 놓은 거지.”
“이제는 어떻게 하실지 결정했습니까?”
“다시 아난으로 출발하도록 하자. 지난번에 이야기한 다른 방법은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측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로써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난의 도움을 얻는 것이었고, 그곳은 ‘분명히’라고 해도 될 정도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저 그곳으로 가는 길이 위험해서 포기했을 뿐이었다. 위험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제국으로 왔지만 이제는 위험을 감수할 때도 된 것이다. 문득 생각난 듯 페르제 자작이 물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정말로 못 알아보셨습니까?”
“그게 궁금해?”
“솔직히 라엘 님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는 게 더 신기할 정도인데.”
“그 상황에서 알아채면 그게 더 사람이 아닐 거야. 내가 서 있는 곳만 해도 삼사 백 명은 서 있었을걸? 수확제가 이렇게 큰 축제인 줄은 몰랐지.”
“그것도 그러네요. 그쪽으로 사람이 몰리면서 낮에는 이쪽 거리가 텅 비었으니까요.”
“정말로 생각이 짧았어.”
사방에서 밀치는 것을 억지로 버티며 치대느라 온몸이 근육통으로 욱신거렸다. 이럴 때는 맛 좋고 소화 잘되는 고기를 먹어야 한다. 라엘은 손을 들어 고기를 더 주문했고 일행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저러다 체하시는 거 아닌가. 걱정과 다르게 지금 라엘은 소 한 마리라도 혼자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허기를 겪고 있었다.
일행은 며칠만 더 제국에 머무른 후에 아난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수확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지쳐있는 심신을 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앞으로의 여정은 더 힘들 것이기에 충전은 필요했고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라엘은 만족했다.
말이 나온 김에 모처럼 기분 전환 삼아 밤나들이를 가보기로 했다. 수확제에 볼 수 있는 보름달은 일 년 중 가장 큰 달이었다. 달이 일 년 중 가장 크고 가깝게 다가오는 날 볼 수 있는 황도의 야경은 이즈음에야 볼 수 있는 좋은 볼거리라고 여관주인이 등을 떠민 이유도 있었다.
주인은 근 두 달가량을 체류 중인 일행을 붙임성 좋고 할 일 없는 한량 귀족들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황도의 관광지를 적극적으로 권하곤 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관광객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는 점이 다시 우울해지게 만든다.
“아, 엄마 보고 싶다.”
밤이 되자 더 청승맞은 기분이 든다. 달을 보니 더욱 마음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라 라엘은 차원 너머에 있을 엄마를 불러보았다. 불러보아도 허무하기 그지없어 우울함에 입을 다물었는데 옆에서 탈린 남작이 속을 긁었다.
“뵌 적도 없으시잖습니까. 제가 더 보고 싶습니다, 엄마…….”
엄마가 보고 싶다는 게 대체 무슨 문제인가. 얼굴 몰라도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다니엘을 낳은 왕비는 그를 낳고 곧 세상을 떠났고 로렌을 낳은 두 번째 왕비도 그러했다고 한다.
왕은 깊은 슬픔에 잠겨 그 후로는 왕비를 다시 맞지 않았고, 그래서 다니엘에게 어머니라 부를만한 이는 전혀 없었다.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동생과 자상한 왕 덕분에 슬픔은 크게 느끼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래서 다니엘에게 엄마가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저런 말을 들으니 왠지 오기가 생기지 않는가.
“엄마는 내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있거든?”
“……졸리십니까?”
이번에는 탈린 남작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헛소리가 시작되시는 것이.”
페르제 자작이 이제는 이마에 손을 대서 열을 재본다. 엉?
“얼씨구. 이제는 날 보내려고 하네? 그러지 마. 나 외로움 탄다고.”
“……진짜로 보통 상태가 아니시군요.”
이제는 듀리온 자작까지. 라엘이 슬슬 제정신을 잃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들은 서둘러 그를 내려보내려고 용을 쓴다. 어지간해서는 말이 없는 듀리온 자작까지 입을 열었으니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은 라엘이었다. 하긴 제 주군이 뒷동산에서 청승맞게 달구경하면서 엄마, 아빠를 외치는 것은 몹쓸 꼴이긴 했다. 제 곁을 지키는 측근들의 정신 건강을 위해 라엘은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적당히 있다 들어와.”
네, 하고 대답하는 그들의 표정이 묘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착각인가? 마치 부하 직원들이 담배 피우는데 눈치 없이 낀 상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계단을 내려갈 때 이렇게 쓸쓸한 기분을 느꼈을까? 가상의 상대를 동정하며 라엘은 오늘따라 유난히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왕궁 말고 차원 너머의 제 집 말이다. 가고 싶은데, 그런데 다니엘의 유언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건 완성하고 가야지. 그런데 사실 돌아갈 방법도 없잖아? 슬슬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 어깨가 무겁다. 외롭다아아아아아!
한편으로는 왕궁을 탈출한 직후의 혼란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평화로운 상황을 맞이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 맞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제 주군을 지키지 못한 자신은 좀 더 괴로워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생각이 자꾸 어두운 쪽으로만 흘러가자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라엘 자신은 다니엘이 죽은 뒤로 어마어마하게 바빴으니까, 이제는 충분히 평화를 맛봐도 된다. 그리고 측근들이라고 하면, 언제 또 이런 평화를 맛보겠는가. 맛만 보고 더 괴로워했으면 좋겠네! 이후의 고난 속에서 울부짖을 그들을 상상하며 라엘은 웃었다. 핫, 핫, 핫!
“나중에는 평화를 곱씹으며 울부짖을 때까지 울려주지!”
달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부하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진다.
“안녕하세요. 달이 참 보기 좋군요.”
“네, 안녕하세요.”
쓸데없이 붙임성 좋은 행인의 인사에 라엘의 등에 소름이 끼쳤다. 쪽팔렸다.
“이 시기의 황도에서 보는 달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 있지요. 여행자님께도 그렇게 보이기를 바랍니다.”
“머물고 있는 곳의 주인이 추천을 해주었답니다. 소문대로 아름답군요.”
악마 같은 속내를 외쳤을 때 만난 사람이라 참으로 민망했다. 그러나 조금 전의 이야기를 모르는 척해 주는 그를 그냥 뿌리치고 가기에도 애매해서 잠시 서서 말상대를 해주기로 했다. 친근하게 말을 거는 사람일 뿐인데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잠시 긴장했던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괜히 멋쩍어져서 뒤통수를 긁었다. 그렇더라도 상대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였다. 오밤중에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온 남자는 사실 수상하기 그지없는 외관을 하고 있었다.
“현명한 이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을 추천해주었군요. 사실 이곳은 알려지지 않는 명소 중 하나랍니다.”
“돌아가면 주인에게 감사인사를 해야겠군요.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여행자님께서 만족하셨다니 황도의 백성으로서 기쁘군요.”
인사라고 하기에는 조금 긴 대화를 마치고 둘은 고개인사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남자는 다시 언덕을 올랐고 라엘은 아래로 걸음을 향했다. 내딛는 걸음이 무거웠다. 저도 모르게 등을 돌렸을 때는 남자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애써 외면하던 상황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후드 아래로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짓는 남자의 입가가 보였다.
“저 달은 신께서 인간들에게 풍요를 약속한 증표입니다. 저는 저 달을 보며 신께서 저희를 굽어살피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남자의 후드가 뒤로 젖혀졌다. 후드 아래 드러난 얼굴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약간 젖은 눈이 라엘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다시 만난 사실에 더 큰 기쁨을 느끼고 있습니다. 천벌을 받을 일일까요?”
“……폐하…….”
“오랜만이오, 다니엘.”
황제, 레온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레온은 라엘을 한눈에 알아봤다. 라엘은 자신을 새우젓 안의 새우 한 마리라고 생각했지만 레온에게 있어서 라엘은 새우젓 사이에 끼어 있는 랍스타와 같은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빛나는 얼굴을 어찌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 누구도 구분하지 못했던 다니엘과 라엘을 구분한 그가 기백의 사람들 속에서 라엘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라엘이 정식으로 황궁의 문을 두드리지 않은 사실을 생각했고 그래서 그 자리에서 모르는 척했을 뿐이었다.
라엘을 발견한 레온은 당장에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애써야 했다. 태연을 가장하여 고개를 돌린 그 순간에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때문에 사실 그 이후의 기도회며 축복이며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로윈의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반역이 일어난 것도, 그리고 그가 후에 행방불명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어찌할 수 없음에 발만 동동 굴렸을 뿐이다. 그런데 그가 황도에, 자신의 앞에 나타나다니.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한 레온은 대범하게도 홀로 황궁 밖으로 나와 라엘을 찾아온 것이다.
“소식은 들었소.”
“……부끄럽군요.”
이미 두 달이 지난 일이었지만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굴욕의 순간이었다. 레온이 그 사실을 아는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그가 제후국의 이야기를 모를 수는 없다. 그의 앞에서 제 나라도 지키지 못한 왕자로서 서게 되자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했고 레온은 라엘의 어깨를 잡았다. 위로의 의미가 담긴, 왠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든다. 고개를 들자 레온은 저를 내려다보며 더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나겠지.”
“어째서…….”
“사실 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가 나를 찾아온 것에 큰 기쁨을 느끼고 있어.”
“……폐하.”
“이 사실에 그대가 불편해하지를 않기를. 그대의 불행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게는…….”
여전히 제 감정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슬쩍 내비치는 레온의 말에 라엘은 복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가 혹여 다시 자신의 몸을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황제를 등에 업고 싶은 생각과 그의 감정을 이용하려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라엘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레온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서 손을 떼었다.
“그대의 육체를 탐하려 한 것은 아니니 그렇게 겁먹지는 말아주었으면 하오.”
“……송구하옵니다.”
속마음이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다. 귀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그를 내려다보며 레온은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진짜로 귀엽다는 듯이. 그게 더 부끄럽다.
“그대에게 어떤 도움이든 주고 싶은 마음을 이미 가지고 있어. 면목 없지만 지난 내 잘못을 용서해준다 생각하고 기꺼이 받아줬으면 좋겠네.”
그와의 밤에 대한 대가는 이미 넘치고 과하게 받았다. 약속대로 레온은 다시는 다니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라엘 앞에서 마치 죄인인 양 자신을 낮춘다. 라엘은 자신이 오히려 더 작아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사람의 감정을 가지고 흥정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이용당할 수 없는 사람이지. 하지만 그것이 그대라면 나는 축복처럼 받아들일 것이야.”
레온의 따뜻한 손이 라엘의 손을 들어 올려 잠시 포개졌다. 손이 스쳐간 곳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보석 안쪽에 새겨진 것은 제국의 문장이었다.
“언제고 기다리고 있겠네.”
“……폐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라엘의 어깨를 레온의 손가락이 잠시 스쳤다. 아쉬운 표정으로 언덕을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은 마치 달 사이를 걷는 것 같았다.
여관으로 돌아온 라엘은 달구경은 제대로 했냐는 주인의 물음에 성의 없이 답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위에 털썩 누워있으려니 창밖으로 커다란 달이 딱 맞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전히 저를 비추는 달에서 조금 전 만났던 레온이 연상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가장 먼저, 가장 크게 든 생각은 ‘어째서?’였다.
레온이 로윈에 머문 두 달이 채 못 되는 기간에, 저에게 지난한 관심을 보인 사실은 여러 가지로 잊지 못할 경험이긴 했다. 그 후 황제급의 실행력으로 실제로 단 한 번 관계를 맺은 적이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던 것일까? 왠지 귀까지 열이 올라오는 기분이 든다.
레온이 건네준 브로치를 괜히 만지작거렸다. 섬세한 금세공이 손 안을 구르며 그의 눈 색과 같은 새파란 보석이 달빛을 받아 빛을 내뿜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면…….
생각하던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미친 생각이지, 암.
마침 계단을 올라오는 발걸음 소리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세 남자가 돌아왔다. 꽤나 즐거웠는지 얼굴까지 상기된 것이 왠지 얄미웠다. 제 주군이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데 지들끼리만 즐거웠어, 어? 왕년에 내가 주군을 뫼실 때는 말이야~!
“나 보내고 나서 진짜 재밌었겠다, 그치?”
“물론입, 아야!”
뻔뻔스럽게 즉답하는 탈린 남작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대부분 작위를 이어받지 않은 젊은 귀족들 중에서 그나마 제 작위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주 말대답이 제대로야! 이번 참에 화풀이나 제대로 할 생각으로 다시 발을 들자 남은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라엘을 말렸다.
“참으세요, 라엘 님!”
“남작이 눈치 없긴 해도 목숨을 걸고 같이 탈출한 동지니까 정을 봐서라도 살려주세요!”
결국 들었던 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안심한 그들이 라엘의 팔을 놓아줬다. 탈린 남작이 웅크린 몸을 펴며 투덜거렸다.
“진심으로 몰라서 하는 말씀은 아니시죠?”
“더 맞고 싶어?”
“라엘 님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신 군주이십니다.”
허어. 나오는 것은 헛웃음뿐이다.
상황이 정리되고 잠시 후 듀리온 자작이 밤참을 부탁해서 들고 올라왔다. 라엘의 방에 모두 모여 밤참을 나눠 먹으며 남작과 자작이 입을 열었다.
“라엘 님. 생각해봤는데 역시 아난보다는 페르카 쪽이 더 낫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째서?”
“저희끼리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아무래도 아난 쪽은 저희가 어떻게 위장을 하더라도 곧 들켜서 행적이 드러나는 위험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그쪽의 왕께서도 라엘 님을 퍽 아끼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열 살이 되기 이전까지 말이야.”
다니엘이 페르카의 국왕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아홉 살 때의 이야기였다. 지금 그는 침대에서 제대로 몸도 보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다. 써먹기는 어려운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자신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열심히 의논했다는 것 자체가 고마웠다. 그런데 정말로 쓸모는 없었다.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 머리를 굴린 것은 칭찬해줄게.”
“칭찬이라기보다는 그거, 욕입니다.”
“그런데 내 가신들이 쓸모없는 머리를 애써 굴리며 고생할 필요가 없게 됐다.”
“욕이죠, 정말로?”
투덜거리던 그들은 라엘이 손을 내밀어 보여준 것을 처음에는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보석브로치일 뿐인데, 하고 유심히 보석을 살피던 중 듀리온 자작이 ‘헉!’하고 숨을 삼켰고 그 후로 연달아 줄줄이 존경심 어린 눈으로 라엘을 올려다봤다.
“라, 라엘 님……?”
“황제 폐하의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됐어.”
“허, 허어어어……!”
측근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헤어진 지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사이 대체 어떤 일을 하신 거죠!? 사실 왕자님은 마법사가 아닐까요? 잠깐 나사가 빠진 줄 알았었는데! 역시 우리 왕자님은 대단합니다!
그들은 굉장히 기뻐했다. 역시 저희의 왕자는 이 상황에서도 평소만큼만 이상했고 할 일은 다 했다는 것에 안심이 된 것이다. 이미 왕자가 이상하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측근들의 생각을 다이렉트로 듣게 된 라엘은 대체 어디서부터 왕자의 권위가 무너지기 시작했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모든 것은 준비가 되었으니 필요한 것은 이제 뻔뻔함뿐이다. 결국 레온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찝찝함과 미안함을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지금 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니엘의 유언이었고, 로윈을 탈환하고 로렌을 지켜내야 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다. 반역자들이 누군지 찾아야 하고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이제는 제대로 알아내야 했다. 보안을 위해 연락을 삼가고 있던 수족들에게도 제 안전을 알려야 했다. 사라진 로렌의 행방은 더욱더 중요한 일이었다. 그의 안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홀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일이 걸리고 지체하는 사이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다니엘이 자신을 믿고 맡긴 일이니 훌륭하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로윈을 되찾아야 했고 로렌의 머리 위에 왕관을 씌어줘야 했다. 라엘은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의 손잡이를 쓰다듬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레온의 마음쯤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다.
정말로,
“그대가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가장 비밀스럽고 안전한 궁을 준비했소.”
이용할 수 있었다.
“다니엘, 이걸 좀 먹어보시오. 남국의 과실이라 하는데 굉장히 달콤하다오.”
레온이 바구니 가득 난생처음 보는 과일들을 챙겨 왔다. 엉겁결에 집어 한입 깨물어보았더니 어마어마하게 달았다. 개중에 몇 가지 입에 맞는 것만 골라 먹었더니 다음 날 아침부터는 골라 먹었던 그 과일들이 디저트로 준비됐다.
“진상 받은 비단 중에서 그대에게 참으로 어울리는 색을 발견하여 옷을 지어 보라 했는데, 역시 잘 어울리는군.”
‘진상 받은 비단’ 뿐은 아닌 것 같은데. 하늘하늘한 천으로 만들어진 블라우스에 굳이 금실로 수를 놓고 보석으로 마감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대의 마음이 퍽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준비했소.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는 가끔 작은 동물의 위로도 필요하다오.”
레온의 품에 안긴 털이 고운 흰 짐승이 빽-하고 울었다. 작고 앙증맞은 예쁜 짐승을 엉겁결에 받아 껴안고 저도 모르게 쓰다듬자 다음 날부터 왠지 한 마리씩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다니엘의 유언을 위해 황제라도 이용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