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시작의 끝 ~End of the beginning~ (4/18)

4. 시작의 끝 ~End of the beginning~

다니엘과 라엘의 생활은 평소대로 돌아왔다.

라엘이 레온에 대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다니엘과 라엘은 황제가 아니더라도 평소에도 굉장히 바빴고, 그가 약속한 대가를 지불한 후에는 더욱더 바빠졌다.

무역권을 독점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일이 어마어마하게 더 생긴다는 뜻이었다. 주변국의 항의는 덤이었다. 모처럼 주어진 것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고 위협적인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둘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다. 세금이 국고에 꽉꽉 채워지며 왕이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두 사람은 또 그만큼 더 바빠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경사가 겹쳤다고 해야 하는 건지. 슬슬 유명세를 날리고 있던 용병단이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다니엘의 스트레스 해소 겸 굴러가던 용병단이었으나 그의 성격상 운영을 허술히 할 리도 없었다. 의뢰 비용이 비싸기로 유명했지만 또 그만큼 완벽하게 일을 처리해내는 그의 용병단은 대륙에서 손꼽는 유명한 용병단이 되었고 다니엘은 대륙에서 가장 성격 나쁜 용병단장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더 어마어마하게 바빠졌다.

다니엘은 비명을 질렀다.

“왜 이렇게 바쁜 거지?!”

“제 무덤을 팠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눈 아래가 새까매지고 퀭해진 라엘이 힘없이 대답했다.

나라일도 용병일도 바빠지기 시작하자 이제 두 사람은 하늘을 보며 평소에는 돌아보지도 않던 신에게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제발 꼭 닮은 사람 하나만 더 내려주세요! 신이라도 평소에는 신전 근처에도 가지 않은 사람들이 갑자기 기도를 한다면 회개에 흐뭇해한다기보다 기막혀 할 것이다. 역시 신은 두 사람이 꼴 보기 싫어서 기도를 들어주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비 오는 날 뒷골목을 헤매도 얼굴이 꼭 같은 사람을 주울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몸 하나가 더해지기를 절실하게 바라는 것에는 또 이유가 있었다.

사실상 로윈의 실질적인 주인은 다니엘이었다. 그렇다고 왕자가 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능하다고 유명한-이렇게 표현해도 다니엘은 왕과 사이가 좋다-왕은 여전히 건재했고 다니엘도 왕자의 신분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어차피 훗날에 받을 왕관을 굳이 끌어와서 모든 일을 내 책임이요~ 라고 땅땅 못 박고 싶지 않았다. 아직 그는 젊었고 자유가 필요했다.

지금까지는 왕이 건재하므로, 라는 이유로 왕관을 적극적으로 거절하던 다니엘이었지만 그가 황제를 상대로 어마어마한 무역권과 해로이용권을 얻어내자 상황이 달라졌다. 왕은 자상하긴 하지만 몸이 약하고 능력이 출중하지 못한 왕이었다-다시 말하지만 부자는 매우 사이가 좋다-. 그런 왕 대신 이미 실질적으로 왕국을 운영한 지 십 년이 다 되어가는 다니엘에게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차근차근 넘어오고 있던 로윈의 운영권 전반이 이미 그의 손에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다니엘이 왕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문득 그것을 깨달은 라엘이 희게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왕자님…….”

“바빠, 왜?”

“왕자님께서 즉위하시면 전 그림자 왕이 되는 겁니까?”

“물론이지!”

“제길!”

“하하! 도망가면 세상 끝까지 쫓아갈 거야!”

“젠장!!”

라엘은 좌절했다. 지옥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일 지옥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는가.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차라리 즐기라고 했던가! 이전에는 좀 설렁설렁하게 해도 해결 가능하던 일들이 요즘에는 죽어라 해도 좀 쌓이기도 하고 그런 맛에 하는 거지! 바깥에서는 용병단이 어마어마하게 잘나가고 있는데 정말로 뭘 어쩌겠어! 기왕 남자로 태어났으니 왕도 한번 해 보고 용병왕도 덤으로 해 보는 거 아니겠어? 하. 하. 하.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기분 탓인가?

잘나감 이콜 바쁨이라는 수식이 성립된다는 것을 깨닫자 라엘은 처음으로 다니엘의 그림자가 된 것을 후회했다. 아니, 처음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정말로 너무 바빴다.

그렇게 딱 1년이 지났다.

참으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얼마나 평화로운지 엉덩이에 종기가 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할 정도로 외출이라는 것과 거리가 먼 왕이 사냥을 나가겠다고 설레발을 칠 정도였다. 그것도 다니엘의 앞에서. 왕 정도 되면 외출 정도야 스스로 결정할 법도 한데 그걸 꼭 다니엘에게 허락받으러 온다.

“아들, 내가 사냥을 가려고 하는데.”

“불허합니다.”

“어째서!”

“양심 정도는 가지고 계시지요!”

다니엘은 펄럭펄럭 날아다니는 서류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이 자꾸자꾸 늘어나는 중이었다. 신하들은 자꾸자꾸 유능해지고 있었지만 서류는 그것보다 더욱더 빨리 늘어나고 있었다. 하나둘 운영권을 넘기던 왕은 이제는 아예 대놓고 옥새를 다니엘의 집무실 책상 위에 놓고 도망갔다.

놀고먹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이는 왕에게 다니엘은 굉장히 분노했고 왕의 식단은 건강식으로 바뀌었다. 풀이 한가득한. 

“이러다 소가 되겠어!” 

“지금 다를 게 뭡니까!”

이런 시점에서 갑자기 사냥을 가겠다는 왕이었으니 다니엘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뜰 수밖에.

“누구 배 아파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럽니까!”

“아, 생각해보니 지금 왕은 나구나.”

“이보세요, 아바마마!”

“그러니까 다녀오마!”

“선물로 흰 사슴을 잡아 오마아아아-.” 라는 말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왕을 보며 다니엘은 옥새를 집어 던졌다. 맞은편 벽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간 옥새 때문에 벽이 쩍 하는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신하들은 당황하여 옥새를 주워 상태를 살폈지만 옥새는 모서리 하나도 닳지 않았다. 열 받을 정도로 단단한 왕의 권위라는 거지!

“미치겠네! 왕관! 차라리 왕관을 쓸까! 내가 이 시점에서 아바마마를 강제 폐위시키고 왕좌에 앉으면 어떨까! 그리고 아바마마를 궁에 유폐시키면 내 복장을 안 뒤집으실까?”

썩씨딩유파더! 자주 이야기를 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은 아주 사이가 좋았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다니엘을 보며 신하들은 고개를 저었다.

“왕이 되시면 전하를 욕도 못하십니다. 그냥 왕자님 일이 되는 거잖습니까.”

“……아, 그랬지.”

깨달음을 얻은 다니엘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다. 다니엘이 즉위를 하지 않는 것은 사실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 일이 내 일이 아니라고 하고 싶어!

일이 늘어나기 전에 다니엘은 라엘과 자리를 번갈아가며 그래도 가끔 기분전환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용병단은 기분전환의 자리가 될 수 없는 위치가 돼버렸다. 어마어마하게 커진 용병단의 의뢰자는 주로 귀족들이 되었고 덕분에 정치도 외교도 필요했다. 용병단으로 자리를 바꾼다고 해서 칼만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귀족들에게는 이미 얼굴이 알려진 다니엘이었기에 의뢰에 직접 얼굴을 내밀기도 곤란한 상황이 됐다.

결국 나가서도 칼도 휘두르지 못하고 서류나 정리하는 골방 단장 신세가 됐기 때문에 요즘의 용병단의 운영은 거의 라엘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어마어마하게 슬픈 일이었다.

“……라엘.”

“네, 왕자님.”

“피곤해.”

“저도요.”

“그런데 아바마마께서 사냥을 나가셨어.”

“선물이라도 가져오라고 하세요.”

“흰 사슴을 잡아주시겠대.”

“우와아- 좋겠다.”

두 사람의 요즘의 대화는 주로 영혼이 없었다.

평화로운 시간은 금세 끝이 났다.

지금의 평화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극이라는 것이 바깥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들은 내부에서 시작된 비극에 대해서는 어떠한 내성도 가지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비극은 현실로 받아들이기에 너무나도 힘들었고 큰 것이었다.

왕이 죽었다.

사냥을 나가겠다며 다니엘과 투닥거리던 대화가 둘 사이의 마지막 것이 되었다. 흰 사슴을 잡아오겠다며 나선 사냥에서 돌아온 것은 왕의 싸늘한 시신뿐이었다.

사인은 낙마였다. 뻔하고 흔한 의심이 가는 사인에 등자나 안장을 점검해보았지만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왕의 시신에서는 어떤 독극물도 검출되지 않았다. 함께 사냥을 갔던 귀족들은 모두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드러난 사실은 ‘왕은 말을 달리던 중 낙마하였고 운이 나빠 목이 부러졌다.’였다. 그리고 끝이었다. 조사는 계속되었지만 타살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다. 정치적인 음모로 인한 암살이라고 하면 차라리 분노라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대비도 하지 못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다니엘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로윈은 슬픔에 빠졌다. 다른 나라에서 그를 어떻게 보았던들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상냥하고 다정한 왕이었다. 그 뒤를 유능한 왕자가 뒷받침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왕은 더욱 상냥해질 수 있었고, 백성들은 마음 놓고 왕을 사랑했다. 모든 조사가 끝나고 왕의 죽음이 그저 불행한 사고라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가 돼서야 로윈은 왕의 죽음을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니엘은 묵묵히 국장을 준비했다. 아비의 죽음을 슬퍼하되 결코 그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저희의 든든한 왕자를 보며 로윈은 안심했다. 왕의 죽음은 슬픈 일이었지만 로윈이 위태로워지는 일은 아니었다. 왕은 다니엘을 남기고 갔고, 든든한 미래의 왕을 보며 모든 사람은 어떤 불안도 없이 순수하게 왕의 죽음만을 애도할 수 있었다. 차분히 준비되는 국장 뒤에는 곧바로 왕자의 대관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시발…….”

“……왕자님, 콧물…….”

“지금 콧물이 문제야? 응? 지금 콧물이 문제냐고! 크흐흐흐흐흡!”

“더러우니까 삼키지 말고 풀라는 소리예요.”

라엘은 손수건을 건네고 다니엘의 등을 다독였다. 그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강해 보여야 하는 사람이었고, 아버지의 죽음을 온전하게 슬퍼하지 못한 가엾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곳은 라엘의 품뿐이었다. 온전히 그와 같은 라엘이었기에 가장 약한 모습까지 드러낼 수 있었다. 라엘의 입장에서는 퍽이나 지저분한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시발……. 어이가 없어서 진짜……. 쿨쩍.”

“부정하지는 못하겠네요. 확실히 그렇죠…….”

“으어어어어어엉!! 내가 그렇게, 그렇게 크흡! 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에에에!”

“전하께서 정말로 잘못하셨죠.”

“으허어엉! 으엉! 으어어엉! 화, 화가 나잖아어어엉!”

“자, 진정하세요. 숨넘어갈라.”

꽤 침착하게 다니엘을 다독이는 것 같아 보였지만 라엘도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그 후덕하니 인상 좋은 왕이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고 현실에 와 닫지 않았다. 왕 주제에 쓸데없이 가정적이고 상냥한, 아들들을 사랑하는 그 왕이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짠, 장난이었지!’라고 외치며 들어올 것만 같았다. 자꾸 문에 시선이 간다. 진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요 몇 년간 그는 라엘의 시간의 반만큼은 아버지였다.

“생뚱맞게 사냥을 가고 싶다는 건 뭐야으어엉! 왜……! 왜애애애애애애! 몸도 구지면서허어어엉!”

“……하필 왜 사슴이었을까요.”

“누, 누가 그딴 거 가지고 싶다오오어어엉! 아바마마한테 잡힐, 크흥! 사슴이면 비루먹었을 거 아니야! 흐어어엉!”

“그러게요.”

“게다가 왜 낙마로 죽은 거야, 쪽팔리게에에에! 도, 독살 정도는 어허어어어……! 아바마마아아아어어어엉!”

하늘에 먼저 간 왕이 들으면 욕하는 것인지 슬퍼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차마 알 수가 없는 애도였다.

다니엘은 굉장히 슬퍼했다. 원래 몸이 좋지 않은 왕이었다. 그래서 사냥을 말렸던 것이었는데……. 말은 퉁명스럽게 하며 사냥을 말렸지만 그가 타고 갈 말이며 장비를 모두 직접 챙겨주었었다. 사냥을 떠나는 그도 직접 배웅하며 마지막까지 걱정했었다. 걱정 말라며 웃으며, 흰 사슴을 잡아오겠다고 떠난 왕이 시신으로 돌아온 순간 몰아친 감정은 절대로 입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밖에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평생을 그와 동생을 돌보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니엘이 지킬 것이 순식간에 반밖에 남지 않았다.

다니엘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충분한 애도의 시간 후 드디어 왕을 보낼 준비가 모두 끝났다. 국장 날짜가 정해졌고 대관식 날짜도 한날이 되었다. 장례식과 함께 대관식을 치르는 것은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왕국은 선왕을 보내고 새로운 왕을 맞이하는 과정을 거칠 것이었다. 지친 다니엘이었지만 모든 과정은 꼼꼼하게 준비되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뒤에야 다니엘은 로렌을 불렀다. 로렌은 왕의 아들이자 다니엘의 동생으로서 왕궁에서 함께 슬픔을 나누고 싶어 했지만 왕의 죽음에 대한 조사가 몇 달이나 길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일단 그를 그의 영지로 돌려보냈었다. 왕의 죽음에 석연찮은 것이 있다면 다니엘과 로렌도 위험할 것이고 그럴 때 둘이 한자리에 있는 것은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다니엘은 로렌을 챙길 만한 여유가 없었고 다행히 그는 그것을 이해해 줬다. 왕을 닮아 상냥한 심성을 가진 동생이었다.

아주 잠시 헤어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가 왕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까지는 석 달이나 걸렸다. 그 기간은 결국 왕의 죽음이 불행한 사고라는 것을 다니엘이 받아들이는 데 걸린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로렌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다. 아니, 왕의 죽음 자체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로윈은 술렁이고 있었다. 커다란 변화들이 갑작스럽게 그리고 연달아 다가오고 있었다. 때로는 불안으로 때로는 희망으로. 로윈에 있어서는 굉장한 전환점이었다. 왕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일이 거의 없는-이미 국정은 다니엘이 대부분 도맡았으므로- 백성들마저도 왕궁 안의 일에 관심을 떼지 못했다. 거리의 관심사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언제 우리의 왕자님이 왕이 되시는 거지?

침울한 분위기 안에서 라엘은 용병단을 챙기기에 바빴다. 다니엘은 왕궁 내의 일을 도맡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고 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위로하는 것 외에는 많지 않았다. 용병단이 바빠지기 시작하며 둘의 대화는 그마저도 거의 수정구로만 이뤄졌다.

다가오는 왕의 국장을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보고 싶어서인지 이곳저곳에서 호위의뢰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 혹시라도 불온한 움직임은 없는지, 무언가가 섞여 들어오지는 않는지 라엘은 유심히 살폈지만 의심되는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의뢰들이 평범한 여행호위의 의뢰였다. 새삼스럽게 왕이 얼마나 사랑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백성들은 순수하게 인간적으로 자신들을 돌본 왕을 사랑했다. 그 뒤에서 죽어라 일한 다니엘이 억울한 만큼.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국장이 치러지는 날이었다. 더불어 대관식 날이기도 했다.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 했고 더없이 완벽한 날이어야 했다. 하늘은 맑았고 거리를 가득 채우는 것은 슬픔이었지만 희망과 기대도 존재하고 있었다. 많은 것이 바뀔 것이지만 불안하지는 않은 그런 날이었다. 오늘은 누구라도 마음껏 슬퍼할 수 있으며 마음껏 기뻐할 수 있는 날이었다.

라엘은 품안에서 신호하는 수정구를 불안한 표정으로 꺼내 들었다. 이런 중요하고 슬프고 경사스러운 날에 다니엘이 급히 전언을 할 이유는 없어야 했다. 그저 긴장을 풀기 위해 농담이라도 하려고 한다 생각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다니엘이 이런 일에 긴장할 성격 자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수정구 너머에서 뱉어지는 목소리는 심상치 않았다.

“라엘, 급한 일이야. 어서 왕궁으로.”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끊긴 통신에 더 이상 이유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주군의 전언에 라엘은 한달음에 왕궁으로 향했다.

“왕자님.”

미리 사람들을 물러놓은 다니엘은 방 안에 홀로 앉아있었다.

“라엘.”

다니엘의 흰 얼굴이 유독 창백해 보였다. 걸치고 있는 검은 예복 때문일까. 예복은 검지만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왕의 국장과 함께 치러질 대관식을 위해 부러 이리 제작하였다 했다. 그는 검은 예복과 함께 슬픔을 두르고 왕관을 쓸 예정이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금실과 은실로 화려하게 수놓아진 검은 예복이 마치 수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생각에 라엘은 흡, 하고 말을 삼켰다. 아마도 피곤해서일 것이다. 그도 자신도 요 근래 제대로 쉰 적이 없었다. 유난히도 창백해 보이는 얼굴 때문에 생기가 없어 그런 생각이 든 것이라며 라엘은 날 선 자신의 불길한 예감을 다독였다.

다니엘이 말했다.

“로렌이 도착하지 않았어.”

라엘은 다니엘이 자신을 불러들인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라엘이 알기로 로렌은 이미 일주일 전 자신의 영지에서 수도를 향해 출발했고 출발과 동시에 전언을 했었다. 정상적으로 이동을 했다면 이미 삼 일 전에는 왕궁에 도착했을 그는 아직도 도착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로렌은 다니엘에게 단 하나 남은 혈육이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온 것은 언제입니까?”

“사흘 전.”

“개인적으로 알아보신 겁니까?”

다니엘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마도 궁의 측근들을 이용하여 알아보았는데도 소득이 없자 라엘을 부른 것이 틀림없다. 다니엘은 왕자인 자신과 용병단장인 자신을 칼같이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아. 조금 전 바깥쪽에 의뢰를 했어.”

“어째서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혼자서 해결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다니엘답지 않은 결정이었다. 평소라면 이런 식으로 처리할 리가 없었다. 더 기민하고 은밀하게. 그가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았고 그 힘들이 다니엘이 왕자임에도 마치 왕처럼 국정을 돌볼 수 있도록 만드는 원천이기도 했다.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은 그의 가장 큰 능력이었고 평소에는 그리했었다.

하지만 수심에 가득 찬 다니엘의 얼굴을 보며 그런 부분을 차마 지적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왕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는 아들이었고 동생의 실종을 걱정하고 있는 형이었다. 성격은 더러운 주제에 제 가족을 유난히도 아끼던 다니엘이니 두 사람의 변고에 평소와 같은 판단을 하는 것은 어려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섣부른 선택을 책하기보다는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 지금 가장 큰 일이었다.

“의뢰인명은, 라엘입니까?”

“그래. 정신이 없어서 미리 의논을 하지 못했어. 미안하다. 일단 저질러 놓고 부른 게 되었네.”

“미안해하실 것까지도 없습니다. 어차피 수도의 분위기를 보아둘 겸 근처에 나와 있었어요.”

“그래.”

라엘은 다니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감쌌다. 평소에는 유난히 체온이 높았던 손이 지금은 얼음덩어리를 쥔 것처럼 매우 차다. 자신의 손을 제 손안에 감싸는 라엘을 다니엘이 힘없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은 수심에 가득 찼지만, 그 가운데 일렁이는 것은 분노였다.

라엘 역시 다니엘처럼 의구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로렌의 연락이 끊긴 것이 단순히 사고라고 말하기에는 참으로 시기가 공교롭다. 애초에 로렌은 제가 가는 곳을 형에게 꼬박꼬박 보고하는 성실한 이였고 그런 그가 갑자기 슬픔에 잠겨 연락을 끊고 잠적한다? 하필이면 이 시기에?

라엘은 왕의 사고 후 이루어진 조사 결과를 떠올렸다. 분명히 아무런 문제도 없었고 왕의 죽음이 사고사라는 것을 확신하게 만드는 결과뿐이었다. 하지만,

“우연이 두 번 겹쳤군요.”

“그래.”

“저를 부른 이유가 그거구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뒤를 지키겠습니다.”

“부탁한다.”

누군가가 뒤에서 농간을 부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 우연이라는 것이 겹친 순간 이미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의 의도 위에 자신들은 춤을 추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늘의 대관식의 향방이 순식간에 불안해진다.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

평소에는 어쩌다가 이런 세상으로 떨어져서, 그것도 얼굴이 꼭 같은 다니엘의 눈에 띄어서 이런 고생을 하게 됐냐며 투덜거리던 라엘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서 그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뒤를 지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다니엘은 제 주군일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는 대로 영혼의 반쪽이었다. 그를 지키는 것은 라엘의 운명이었고 새로이 도착한 세상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다가오는 위기 속에서 다니엘을 지켜야 한다.

로렌은 결국 시간 내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가 끝내 도착하지 못했음에도 국장은 예정된 시간에 진행되었다. 다니엘이 장례를 진행하는 동안 라엘은 미리 마련된 비밀공간에서 전언을 기다렸다. 다니엘은 궁의 측근들과 용병단 외에도 훈련된 이들을 따로 두었다. 평소라면 자국 내의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그에게 보내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궁 외부에서 라엘의 이름으로 의뢰를 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그 결과를 은밀하고 신속하게 나를 것이다.

과연 의뢰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매 한 마리가 날아왔다. 마법을 이용할 수도 있었지만 다니엘은 마법보다는 이러한 방식을 더욱 선호했다. 자신이 지정한 방법을 이용하여 지정한 암호로 정보를 보고받는 방식. 마법이라는 것은 편리하였지만 보안에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매의 다리에는 작은 통이 매달려 있었다. 통 위에 새겨진 문장이 다니엘이 지정한 것인지 확인하였고 봉인을 유심히 살폈다. 그것이 다니엘이 지정한 대로 제대로 되어 있는지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라엘은 통을 열었다. 그 안의 내용물이 암호문인 것까지 확인한 라엘은 통을 다시 매달아 매를 날려 보내고 암호를 해석했다.

[닷새 전, 습격, 행방불명]

몇 개의 단어만이 긴박하게 쓰여 있는 쪽지를 보자마자 라엘은 계단을 달려 탑에서 내려왔다. 일이 단단히 잘못됐다.

로렌이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이 사흘 전이라고 다니엘은 말했다. 그러나 마차가 습격당한 것은 닷새 전. 기간이 맞물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로렌을 습격한 후 그를 가장하여 남은 기간 동안 다니엘에게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치밀하게 계획된 일이 틀림없었다. 시작은 아마도 왕의 죽음부터.

불행 중 다행이라 할 것은 쪽지에는 사망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 관한 예상조차 없는 것을 보면 로렌은 훌륭하게 몸을 피한 것이 틀림없다. 평소에 다니엘이 얼마나 무시했건 그도 결국 다니엘의 형제였다. 그만큼 검을 다루거나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제 몸 하나 피할 정도로는 똑똑했다.

서둘러 국장이 치러지고 있는 홀로 걸음을 옮겼지만 라엘은 결국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같은 얼굴이 둘이라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홀 주변을 무장한 남자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죽은 왕에 대한 예의이자 새로운 왕에 대한 존경으로 왕궁 안에서 치러지는 장례와 대관식에 참석하는 귀족들은 누구도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무장한 남자들은 누구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무방비 상태로 홀 안에 있을 귀족들이 어찌 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엄습한다. 상황이 괴이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라엘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반대쪽으로 달아났다.

급히 걸음을 옮기던 중 익숙한 얼굴과 마주칠 수 있었다. 다니엘이 아끼는 측근 중 한 명인 탈린 남작이었다. 그는 라엘을 발견하자 화색을 띄며 다가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경계하는 것이 확실히 엄청난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왕자님, 무사하였군요!”

“어찌어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예. 괴한들의 습격 후 저희는 왕자님께서 장내에 계시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바로 빠져나왔습니다만…….”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나 보군.”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홀 안의 대다수 귀족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사람도 있지만 지금은 인질이 된 상황입니다.”

현기증이 날 것 같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나는 할 일이 있어. 이전에 일러둔 대로 준비하고 약속한 장소로.”

“명대로 하겠습니다.”

빠르게 사라지는 남작의 등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라엘은 방향을 틀어 복도를 달렸다.

다행이다. 다니엘은 무사히 몸을 숨긴 것이 틀림없다. 그는 분명히 라엘을 찾고 있을 것이고 이런 위기 상황이 닥쳤을 경우 두 사람이 다시 만나기로 약속된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다니엘은 쓸데없이 세심하고 계획적인 남자였다. 평소 라엘은 그를 ‘빌어먹을 강박증 환자’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그는 라엘이 생각하기에는 앞으로도 쭉 없을 위기 상황에 대한 매뉴얼을 만들어두고 그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도록 쉴 새 없이 연습을 시키곤 했다. 

연습하던 당시에는 이 인간이 자신을 괴롭힐 새로운 방법을 찾은 것이 틀림없다고 쉴 새 없이 욕을 외웠지만 상황이 되니 생각이 180도 바뀌었다. 99퍼센트는 분명히 자신을 괴롭히기 위한 훈련이었지만 1퍼센트의 의도는 정말로 위기를 대비한 것이 틀림없었다! 일단 그 빌어먹을 훈련이 정말로 유용하다고 생각하게 될 날이 정말로 올 줄이야!

라엘은 어서 이 변태 강박증환자 같은 다니엘을 찾아 안전한 곳으로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궁은 완전히 장악되지 않았다. 국장이 치러지는 홀을 중심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병력들이 배치된 까닭으로 오래 버틸 수는 없겠지만 라엘이 이동하는 것에는 큰 도움을 주었다. 왕궁 내의 혼란은 말할 것도 없었다. 라엘은 지나가던 길에 마주친 얼굴이 익숙한 시종장을 붙잡아 시종들을 데리고 어서 왕궁 밖으로 몸을 피하라 명령하고 궁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홀에 모여 있었기에 궁 안에는 귀족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살해당하거나 인질이 되었다는 조금 전의 보고가 생각났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치밀하게 준비된 계획임이 틀림없었다. 사랑받는 왕의 죽음을 미끼로 다른 죽음을 몰아오는 지독한 종류의 것임에 화가 난다. 하지만 지금은 화를 내는 것보다는 어서 다니엘을 찾아 탈출해야 했다.

조심스럽게 궁 깊은 곳으로 향한 라엘은 주변을 살핀 후 아무도 없는 것을 몇 차례나 확인하고 장식품을 조작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장식되어있을 뿐 특징 없던 것을 건드리자 장식대가 밀리며 아래쪽으로 통로가 드러났다. 왕족만이 알고 있는 비밀통로였다.

쓴웃음이 새어 나온다. 정말로 사용할 날이 올 줄이야.

통로 안으로 발을 밀어 넣자 길을 외우느라 몇 번이나 아사할 뻔했던 아픈 기억이 잠시 떠올랐다. 이런 급한 상황에 감상에 젖을 여유는 없어 몸을 완전히 안쪽으로 밀어놓고 다시 입구를 막았다. 혹시나 뒤따라온 사람이 있더라도 이 문은 적어도 하루는 열리지 않도록 조작되어 있는 비밀스러운 장치였다. 발치를 더듬자 종이에 싸인 야광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종이를 찢어 봉인을 풀자 주변이 환해졌다.

라엘은 야광구의 빛을 의지하여 복잡한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내부의 제대로 된 길을 아는 것은 왕족뿐이었다. 왕과 다니엘과 로렌, 그리고 그곳에 라엘이 추가되었다. 제대로 된 왕족이 아닌 주제에 왕가의 모든 비밀을 공유하고 있으니 이건 출세했다고 해야 하는 건지 팔자가 사납다고 해야 할지 참 난감한 것이 알기가 힘들다.

발에 채인 정체 모를 이의 해골에 히익- 하고 기겁하며 라엘은 드디어 약속된 장소에 도착했다.

“늦었어.”

역시 다니엘은 라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라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그의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제가 너무 늦었군요.”

다니엘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아니, 현실을 제대로 봐야겠지. 다니엘은 죽어가고 있었다.

상체가 피투성이가 되어 붉게 물든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검은 옷이라 금세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가까이에서 본 그의 옷은 화려하게 금실이며 은실로 수놓아진 무늬들이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상처를 간신히 붙잡고 있었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상처는 육안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온몸의 피가 다 쏟아져 나온 듯 창백한 얼굴색에 라엘의 안색도 대번에 어두워졌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미 내려앉아 뚝 떨어진 심장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는 것 같다. 누가 제 심장으로 축구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쿵쿵 뛰던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인지 이제는 들리지도 않는다. 귀가 멎은 듯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은데도 이 와중에도 머리는 맑다. 심장이 뚝 떨어지면서 온몸의 온기가 바닥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머리만은 차가워진 것일 테지.

“놀랐어?”

“별로요.”

“실망인데.”

“아쉽네요. 심장이 떨어진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거든요, 전.”

“정말이네.”

“그래서 누굽니까?”

“시체.”

창백한 얼굴의 다니엘이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비싼 값을 치렀지.”

다니엘을 찌른 사람은 혹은 사람들은 그에게 검을 겨눈 대가로 이미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그의 말대로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다. 누구도 그런 대가를 치를 줄은 몰랐을 것이다.

다니엘의 말에 의하면 홀에서 달아나는 그의 뒤를 몇 명의 괴한이 뒤쫓아 왔다고 한다. 그는 차근차근 처리하며 몸을 피했지만 괴한들의 실력은 심상치 않았다. 불행히도 홀로 상대하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았다. 하나씩 그들을 떨구고 검을 쑤셔 박으며 상대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운명의 신은 다니엘에게서 등을 돌렸다. 큰 상처를 입은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라엘과 약속된 이 장소로 오는 것뿐이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이야기를 모두 들은 라엘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치겠네요. 복수할 기회도 주지 않다니.”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는 주의라.”

“잘나셨습니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다니엘은 이곳까지 온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간신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가 왔을 길을 보자 뚝뚝 떨어진 핏자국이 그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치명적인 것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평온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희미하게 웃는 그의 얼굴에 죽음이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부탁이 있어. 들어줄 거지?”

“무엇이든지요.”

죽음을 앞둬서일까. 다니엘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선명하다. 그는 숨을 헐떡이거나 말을 더듬지도 않았다. 목소리에 기운은 없었지만, 어쩌면 그냥 졸린 것 같은 목소리이기도 했다. 죽음이 가까운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 목소리가 더욱더 라엘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언젠가 쳤던 장난처럼 어디서 닭 피를 묻히고 와서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 이런 장난을 좋아했으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쪽이 훤히 보이는 상처며 그곳에서 꿀렁이며 새어 나오고 있는 피는 지금의 것이 현실이며 거짓이 아니라는 잔혹한 진실만을 들이밀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 하나 견디기 수월한 것이 없었다.

고개를 저었다. 회피할 때가 아니었다. 라엘은 다니엘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겨우 인정했다. 그는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다니엘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네가 로윈을 구해줬으면 좋겠어.”

라엘은 웃었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는 주의라고 방금 말하셨는데요.”

“사정이 조금 바뀌어서 말이야. 나는 유연한 사고를 할 줄 아는 사람이거든.”

“죽는다고 대충 말하고 그러시는 건 아닙니다.”

평소와 같은 라엘의 태도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다니엘은 이 순간에도 웃었다. 그러나 더 이상 버틸 기운은 없었고 기대고 있던 벽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라엘은 잽싸게 다니엘을 안아 부축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그 표정은 뭡니까?

“징그러워.”

“마찬가지거든요?”

타박하면서도 라엘은 다니엘을 밀쳐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서늘해진 다니엘의 몸에서 더 이상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바마마도 구분 못하는 너였으니까……. 아, 아바마마라서 구분 못했을까?”

“그냥 제가 너무 완벽해서 아무도 구분 못한 거거든요?”

“너는 딱 나 같아서 엄청 잘났지.”

“객관적인 사실은 이런 급한 상황에서는 대충 넘어가죠.”

“그래. 그런 너니까 괜찮을 거야.”

“뭐가요.”

“어차피 얼굴 팔려서 평범하게 살긴 글렀는데 기왕이면 비범하게 나라를 구해보지 않을래?”

“선택지가 협소하잖아요. 그렇게 할게요.”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 나는 전혀 괜찮지 않은데. 이야기를 이어가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진다. 너무나도 작아진 목소리에 그의 말을 단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아 라엘은 다니엘의 얼굴에 귀를 바짝 붙였다.

“그리고 다른 건요?”

조바심이 나서 다니엘을 채근했다. 그의 말 한마디도 허투루 놓쳐서는 안 됐다. 다니엘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그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그가 안심하고 갈 수 있도록, 제 삶의 이유가 이어질 수 있도록.

“……로렌을……. 로렌을 부탁해. 알다시피 모자라서…….”

“그건 왕자님 생각에나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할게요.”

제 동생까지 라엘에게 부탁한 다니엘은 드디어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라엘을 올려다보며 다니엘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지만, 아니 못했지만 라엘은 그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말아요.’ 의미를 담아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는 라엘의 눈에는 물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역시 마음에 들었는지 다니엘은 크게 미소 짓더니 눈을 감았다. 너무나 홀가분한 표정이라 얄미울 정도다.

완벽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멍하니 다니엘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평온하게 눈을 감은 그는 마치 잠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그를 흔들었다.

“왕자님?”

몇 번이나 몸을 흔들어도 다니엘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 후에야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대답 없는 다니엘이 금세라도 깨어날 것 같아서 라엘은 쉽사리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역시 장난하는 거죠? 장단 다 맞춰줬으니까 이제 일어나세요.”

돌아올 리 없는 대답에 라엘의 입술이 벙긋거렸다. 무슨 말을 해도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그리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다니엘.”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난생처음 제대로 불러보는 다니엘의 이름이었지만 정작 이름의 주인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그를 보며 이번에는 라엘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아아, 그렇지. 다니엘이 지금은 내 이름이었지.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잖아. 나는 라엘이고, 다니엘이다. 이제 그는 아무런 이름도 없는 그저 시체일 뿐인 것을.

같은 얼굴을 한 시체는 마치 자신과 같아서 마음 한쪽이 완전히 부서져 내린다. 그는 너무나도 편안히 눈을 감았는데 살아남아 있는 자신이 산 채로 죽은 것 같다. 가슴부터 끓어올라 온몸을 휘감는 고통을 누르며 피투성이가 된 시체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이름도 없는 시체는 차가운 가슴으로 라엘을 받아들인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아도 그의 숨은 돌아오지 않는다.

참으로 얄궂네요. 이 세계에 오면서 저는 제 이름을 버렸는데 이름이 두 개나 생겨버렸어요. 그런데 그것을 준 사람이 모두 당신이에요.

라엘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맺은 유일하고 커다란 인연을 이런 식으로 잃어버린 것이 너무 억울하고 슬펐다.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통로 안을 비통한 비명 소리만이 가득 채운다.

애도의 시간은 최대한 짧게 가졌다.

이제부터는 시간싸움이었다. 더 이상 지체하면 왕궁에서 탈출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라엘은 지금부터 다니엘의 유언대로 그림자가 아닌 온전한 그가 되어 로윈을 구해야 했고 그의 동생 로렌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이 다니엘이 마지막으로 원했던 일이었으니 곧 라엘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라엘의 삶의 이유는 그의 유언으로 다시 세워졌다.

라엘은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고 그 위에 다니엘의 시체를 눕혔다. 마음 같아서는 그를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자신과 같은 얼굴의 시체는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이 상황에 혼란만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었다. 당장 그를 데리고 나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그를 눕힌 곳의 벽에 표식을 남겼다.

다니엘.

그의 이름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그를 발견한다면 제대로 흙으로 돌려보내주기를. 차가운 돌바닥 위에 다니엘을 홀로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마음이 무겁다. 도피 중에 잃어버린 것인지 다니엘의 망토는 이미 사라졌기에 라엘은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를 휘감았다. 

제대로 된 관조차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던 중 그의 허리에 매달린 왕가의 보검을 발견했다. 대관식 중에 그에게 내려질 것으로, 왕족 외의 사람에게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에 그 와중에도 그것을 챙겨온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이제는 로렌의 것이 되어야 했다.

다니엘이 죽은 이상 다음의 왕위계승자는 로렌이다. 보검은 그가 마땅히 가져야 할 물건이었으므로 라엘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벗겨내어 제 허리에 찼다. 묵직한 무게가 허리를 꽉 누른다.

서둘러 비밀통로를 빠져나왔다. 대책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죽은 사람에게 하기엔 미안한 말이지만, 아니 죽었으니까 들을 귀가 없으니 그래서 말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라엘은 마음 놓고 생각하기로 했다.

저 망할 강박증이 있는 왕자는 모든 국가재난 상황에 자신이 대응할 수 있는 매뉴얼을 진즉 만들어놨고 그 희생자는 라엘뿐만이 아니었다. 라엘이 비밀통로의 길을 외우기 위해 아사 직전까지 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들들 볶이고 있었다. 통로의 끝에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바깥을 살피자 역시나 반가운 목소리들이 그를 반긴다.

“왕자님, 무사하셨군요!”

“아까 왕자님을 뵈었다고 했는데도 믿질 않아서.”

조금 전 왕궁을 헤맸을 때 만났던 탈린 남작을 포함하여 약속된 장소에 약속된 인원의 측근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왕자,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장소에 도착한 것이 다니엘이 아닌 자신임에 라엘은 큰 슬픔을 느꼈다.

아니야. 라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다니엘이다. 그리 생각하며 라엘은 문밖으로 빠져나왔다.

“빠짐없이 왔군.”

얼마나 질리도록 훈련을 시켜놨는지 그 위기 상황에서도 챙길 것은 다 챙겨 나온 측근들이 참으로 용하다.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어 미소가 절로 떠오른다. 다니엘이 저를 위해 준비해준 것만 같았다. 하기야 그들도 물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면서도 당황했을 것이다. 이곳, 이 장소는 더 이상 왕궁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되는 순간 왕궁을 버리고 피신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였으니까.

라엘은 착잡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희 왕자의 안부를 확인하고 기뻐하던 이들도 순식간에 숙연해진다. 앞으로의 고난이 예정되어서였을까, 아니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은 그들의 왕자를 배려해서였을까.

“면목이 없군.”

“아닙니다. 왕자님만 계신다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라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전에는 다니엘과 나누었던 이 모든 기대를 이제는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다.

눈을 뜨자 젊은 귀족들의 시선이 저에게 내리꽂힌다. 다니엘이 직접 엄선한 젊고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허락하였다면 그들은 왕이 된 다니엘의 곁에서 가장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그와 함께했을 측근 중의 측근들이었다. 오직 다니엘만을 위한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제 것이 된 사람들이었다. 다니엘의 유산인 그들을 둘러보며 하마터면 눈물이 흐를 뻔했다. 그냥, 이 자리에는 다니엘이 있어야 했다.

감상은 잠시다.

크게 심호흡을 한 라엘은 약 30분 전에 목숨을 거둔 다니엘을 욕하기 시작했다. 그냥 욕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욕이었다. 앞으로의 바쁨이 예상된다. 마음고생은 옵션으로 주어질 텐데 이걸 그냥 떨궈놓고 혼자서 편하게 가버렸다 이거지?

퀘스트를 주더라도 +10 강화 LTE급 시련 퀘스트를 떨궈주고 가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귓전으로 이전 세계의 통신사 광고들이 울려 퍼지는 것만 같다. 광대역 LTE~ 망할!

일행은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접선했던 장소 자체가 이미 왕궁 밖이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는가. 왕궁을 급습한 반역자들은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왕자가 저희의 손을 빠져나갈 리 없다고 확신이라도 한 것인지 감시의 눈길을 바깥까지 펼쳐놓지는 않았다. 홀 주변에만 무장한 병사들을 집중시켜놓은 것도 그렇고 치밀한 계획에 비해서는 뒷심이 허술한 자들이었다. 어쨌거나 그것이 탈출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이용해주는 것이 예의다.

시가지로 나오자 아직 궁내의 난리는 바깥까지 전해지지 않았는지 백성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으니 그들은 선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새로운 왕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는 그들이 바라는 왕이 이미 없음에도, 무지하고 사랑스러운 그들은 여전히 희망에 가득하다.

고개를 돌려 왕궁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그 모습에 눈물이 날 뻔했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저 아름다운 왕궁은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닐 것이다. 반역자들에 의해 충신들의 목이 성 앞에 매달릴 것이고 숙청의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제2의 고향이라 생각했던 로윈이 앞으로 겪을 혼란을 상상하자 이가 꽉 물린다.

성문을 빠져나가는 것은 매우 쉬웠다. 용병들로 위장한 라엘의 일행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왕국은 가장 큰 행사를 앞두고 있었고 각지에서 여행객이 몰려오며 그들을 호위하는 용병들이 쉼 없이 성문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정식으로 발급된 신분증과 준비된 옷차림은 일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는 용병으로 그들을 위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기왕 오신 김에 행렬까지 보고 가시지 그러오.”

“아쉽지만 갈 길이 바빠서.”

살갑게 이야기를 건네는 병사는 아마도 한참 동안 볼 일이 없을 국왕의 행렬을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언젠가는 정말로 왕의 행렬을 보여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다니엘은 병사에게 인사했다.

성문을 빠져나간 일행은 그것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성문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의 속도는 늦춰지지 않았고 며칠을 쉼 없이 말을 달려 안전한 마을에 도착했다. 추적의 손길이 뻗쳐오더라도 이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일행은 안심하지 않고 미리 준비된 물품을 이용해 다른 위장을 한 후 마을을 떠났다. 마을을 떠나는 일행은 작은 상단 소속의 상인과 그를 호위하는 용병이 되어 있었다.

신분을 바꾸는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미리 준비된 것들은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고 추격자들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몇 차례나 신분을 바꾼 그들을 찾기 위해서는 대륙 제일의 정보길드를 붙이더라도 모자랄 것이다. 일행은 안심했고 라엘도 드디어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다니엘은 많은 것을 준비해두었다. 그것은 비단 탈출 루트뿐만 아니라 앞으로 라엘의 삶, 그 자체를 결정할 것들이었다. 라엘은 그가 남겨둔 것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다시 로윈을 탈환할 생각이었다.

일단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잘되어가고 있었다. 준비된 것들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의 행보가 고달프지만은 않겠다는 희망이기도 했다. 그러나 방심해서는 안 된다. 방심하는 순간 적의 칼날이 제 가슴을 꿰뚫을 것이라는 다니엘의 말을 되뇌며 라엘은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 칼날이 누군가의 가슴을 이미 꿰뚫어버렸으니.

“이제 어디로 갈까요?”

“계획대로 아난으로 향한다.”

라엘의 말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고 움직일 준비를 했다.

아난은 로윈과 오랫동안 친선을 유지한 왕국이었고 그만큼 교류가 잦았다. 아난의 왕족들과 다니엘은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라엘도 안면이 있었다. 몇 차례 다니엘 대신 그 자리를 대신했던 라엘과는 다르게 그들은 라엘을 영락없이 다니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왕도 알아보지 못한 그를 가끔 한 번씩 보는 외국인들이 어떻게 알아보겠느냐마는 타국의 왕족 앞에서까지 연기를 해야 하는 것에 굉장히 긴장했었던 기억이 있다.

아난의 왕자 폴시스란은 특히 다니엘과 각별한 사이였다. 또래의 왕족이라는 것이 드물기도 한데다 자연스럽게 교류가 이어졌기에 제법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특히 그가 다니엘을 좋게 본 것도 있기도 해서-눈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둘은 친구라고 해도 손색없을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난의 왕자가 일방적으로 호감도가 더 높은 것 같았고 다니엘은 그의 성격이 영 취향에 맞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호불호가 확실한 다니엘이 그걸 또 다 받아주는 것을 보면…… 역시 사이가 좋은 것 같다. 친구라고는 없는 성격 더러운 왕자의 유일한 친구가 어쩌면 그일지도 모른다.

성격 나쁜 제 주군의 친우라고 부를만한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하나가 아난의 왕자 폴시스란이었다, 라는 이유만으로 아난행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폴시스란은 정의 신봉자로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이 상황에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 친우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정도로 다혈질이기도 했고. 이런저런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몸을 의탁할 것은 그가 가장 적당하다. 라엘은 망설임 없이 아난행을 결정했다.

천국에 계시는 왕자님. 아직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난데없이 불러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요즘 몹시 바쁩니다. 혹시 이게 왕자님의 안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화를 내실 건가요? 그런데 제가 너무 바빠서 너무 힘이 드네요. 왕자님의 유언 퀘스트를 진행하는데, 아마 저는 지금 평생 먹을 욕을 다 처먹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욕을 왕자님한테 반사해도 되겠습니까? 빌어 처먹게 억울하네요.

“왕자님!”

“뒤, 조심!”

라엘은 탈린 남작을 향하는 칼날을 힘껏 쳐냈다.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는지 괴한이 휘청댔고 그것은 그의 생에 마지막 움직임이었다. 괴한의 숨통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한 라엘은 몸을 돌려 다른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벌써 몇 차례나 이어진 습격이었다. 출발할 때는 일곱이었던 일행의 수가 넷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개개인의 능력이 출중한 이들이었지만 기본적으로는 귀족이고 문관들이었다. 한 사람당 네댓씩 달려드는 괴한들을 상대로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가장 먼저 목숨을 잃은 것은 검을 다루지 못하는 이들이었고, 일행은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도 제대로 가지지 못하고 뻗어 나오는 칼날을 막기에 급급했다.

치밀하고 비밀스러운 라엘 일행의 행적을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괴한들은 아난으로 향하는 일행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은밀하고 집요했으며 일행이 잠시라도 숨을 돌릴라치면 곧바로 습격을 해왔다. 몇 가지 루트를 번갈아 사용해보았지만 여지없이 습격해오는 그들을 보며 라엘은 불길한 상상까지 해 보았었다.

혹시 일행들 중 첩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곧 그 생각은 접어두게 되었다. 지금 라엘의 곁에 남은 이들은 다니엘의 최측근이자 그가 살아생전 가장 신뢰하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다니엘을 배신하는 수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차라리 배를 째라고 엎어지고, 칼을 들이대면서 휴가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말지.

라엘의 머릿속에 이 괴한들을 보냈을 법한 이들의 목록이 주르륵 떠올랐다. 로윈을 배신한 반역자들. 그들의 은밀하고 치밀한 활동을 본다면 이 괴한들의 뒤편에는 반역자들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이만큼 훈련된 암살자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들 테지. 머릿속에 순식간에 몇 개의 이름들이 떠오른다. 무엇이든 미리 확신하지 않은 버릇이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것은 상황이 너무 명백하다. 분노가 올라온다.

라엘은 혀를 한 번 차고 크게 소리쳤다.

“퇴각!”

라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일행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도주하기 시작했다.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즉시 장소를 이탈하는 그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괴한들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들을 보며 멈칫하던 그들은 어디를 먼저 쫓아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곧 라엘의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역시 가장 맛있는 소시지라는 건가? 몇몇 괴한들이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달아나는 실력 하나만은 출중한 이들이니 알아서 잘 살아남아 합류지점으로 돌아올 것이다.

“쫓아!”

열댓 명의 괴한이 라엘의 뒤를 쫓아왔다. 그 수를 확인하고 라엘은 코웃음 쳤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 괴한들에게 가장 맛있는 부위는 바로 자신이었고 그것을 증명하듯이 대부분의 괴한은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 라엘은 쓰게 웃으며 말을 재촉했다.

일행이 다시 합류한 것은 며칠 후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약속된 펍에 도착하자 그들은 이미 도착해 라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색하며 자리를 내주는 그들은 이제 딱 셋뿐이었다. 본디 많지도 않았던 인원이 이렇게 반으로 줄어든다면……. 다니엘의 측근 중에서도 출중한 이들이었지만 이 인원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손에 쥐어진 맥주잔을 들어 차가운 액체를 벌컥벌컥 삼키고 라엘은 숨을 내뱉었다. 다시 생각해야 했다. 지금까지처럼 진행할 수는 없었다.

“내 행보가 이미 읽히고 있어.”

라엘은 인정했다. 다니엘이 마련해둔 계획이 적에게 읽힌 것이 틀림없었다. 어렴풋이 깨달았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기도 했다. 다니엘이 만든 계획은 완벽했지만 적들은 더 치밀하고 집요했다. 석연찮았지만 증거가 없어 우연이라 치부했던 왕의 죽음부터도, 아마 모든 계획의 시작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적은 모든 예상과 상상을 뛰어넘어 간교하기까지 했고 뒤를 쫓는 이들의 능력은 출중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에 비하면 좀 덜떨어진 적들을 가정하고 만든 계획은 어쩔 수 없이 파기 감이었다. 그 한편으로는 원망의 마음이 울컥 솟아올랐다. 이런 능력이 있다면 반역보다는 제대로 로윈에 봉사하란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루트는 모두 파악당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행의 눈에 처음으로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는 제 동료가 목숨을 잃어도 일말의 의심조차 품지 않고 의연하게 라엘의 뒤를 따르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추격과 바꾸는 모든 계획들마다 파악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그들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계획이 필요하다.

참으로 난처하다. 아무리 그림자 왕자로 지내며 다니엘의 모든 것을 흉내 내고 대신했다 하더라도 그 강박적인 꼼꼼한 성격만은 배울 수 없었고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스스로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그런 성격 따위는 필요 없다. 누구도 구분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가진 가장 큰 차이는 그것이었고 라엘은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다니엘의 성격에 질렸었다. 물론 그 감당을 제가 모두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지만.

일단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라엘은 결국 찝찝한 기분을 눌러 담으며 툭 내뱉었다.

“계획을 수정해야지 뭘 어쩌겠어.”

“어떻게 말입니까?”

“제국으로 가자.”

유감스럽게도 당장 떠오르는 것이 유난히도 자신에게 친절했던 황제였다. 비록 정조의 위험이 뒤따라올지도 모르지만 역시 목숨의 위험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아무리 그 황제라 하더라도 양심이 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당장 엉덩이를 까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고 적어도 지난 정을 생각해서 몸을 숨기는 것 정도는 도와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대책 없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긍정적이고 무책임한 계획을 세우는 라엘을 다니엘이 보았다면 단박에 뒷골을 잡았을 것이다. 뭐, 어찌할 텐가. 둘은 누가 자기인지 헷갈릴 정도로 닮았고, 누가 누가 더 멍청한 계획을 세워 서로를 엿 먹일까 고민을 하던 바람직한 사이였다. 그것은 다니엘이 죽은 이후에도 유효한 것이었고 라엘은 다니엘의 모든 계획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다니엘이 살아있었다면 단박에 ‘멍청하고 실행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계획’이라고 말했겠지만 다행히도 이런 쓰레기 같은 계획이 효과가 있었다. 그 누구도 다니엘이 이런 즉흥적이고 대책 없는 행보를 보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를 곁에서 지키는 측근들마저 “네?”하고 반문을 했을 정도니 평소의 다니엘을 아는 이라면 절대로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다니엘이 왕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둔 것을 라엘을 위한 부분도 있었다. 두 사람이 교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일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보장이 있었어야 했고, 덕분에 죽어나가는 것은 아랫사람들이었다. 

다니엘은 원래 성격도 계획에서 어긋나는 것을 참지 못했는데 라엘을 거둔 이후로는 더욱더 그 부분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가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인 무언가를 싫어한다는 것은 결국 왕궁의 모든 사람들이 알 정도가 되었다. 순전히 자기가 놀러 가기 편하기 위해 만들어 둔 이미지가 이런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 줄은 솔직히 몰랐다.

제국으로 향하는 길에는 전혀 습격이 없었다. 훌륭한 변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의 계획을, 실체를 알지 못하는 적들이 모두 파악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행이 완벽하게 변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신처럼 나타나 습격하던 이들이었는데 이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제국으로 가는 길은 익숙하지 않게 평화로웠고 그 덕분에 몇 남지 않은 측근들을 다행히도 더 이상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라엘의 결정에 반신반의하던 그들은 제국의 수도에 도착하자 “오오, 역시 왕자님!”이라며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역시 저희가 뫼실 주군은 왕자님뿐이랍니다!” 

“왕자님만 계시면 어떤 역경도 고난도 순간의 일일 뿐이죠!”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우러러보는 측근들을 보자 왠지 부담…… 스럽기는 무슨. 콧대가 높아지는 기분이었다. 이 맛에 왕자를 하는구나!

제국의 수도는 번화하고 평화로웠다. 저 멀리 있는 왕국에서 일어난 반역은 이곳의 풍요에 빗방울 하나만큼의 파문도 남기지 못했다. 일행은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자신들의 왕국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씁쓸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어느 왕국의 존망이 달린 일이 이곳에서는 그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일 뿐이었다.

라엘은 여관에 짐을 풀자마자 죽은 듯이 잠들었다. 며칠을 알아서 잠을 자고 일어나고 식사하고 다시 자는 것을 반복한 일행은 그제야 기운을 차렸다. 이제는 슬슬 다음 행동을 시작할 때였다. 측근들은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라엘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분은 언제 만나러 가시는 겁니까?”

“아?”

눈앞에 놓여 있는 먹음직스러운 고기를 썰어서 입 안으로 옮기려던 라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헤죽 웃었다. 

‘거 참 궁금한 것도 않네, 페르제 자작.’

입 안에 고기를 집어넣느라 말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딱 그런 표정이었다. 쓱 웃으며 입 안의 고기를 꼭꼭 씹어 꿀꺽 삼킨 후에야 라엘이 대답했다.

“일단 만날 방법부터 찾아보는 게 순서겠지?”

“……라엘 님?”

“지금부터 생각하면 되지 뭐.”

다시 고기조각을 입에 집어넣는 라엘과 다르게 일행의 눈은 튀어나올 것 같이 커졌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라엘이라는 이름만큼이나 어색한 행동일 것이다. 그래도 대놓고 왕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내버려둘 수도 없고 다니엘이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차마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기에 가명이라고 내놓은 것이 사실은 저에게는 본명이었다. 

가명인지 본명인지 헷갈릴 이름이었고 이름이 옮겨가는 것이 복잡하긴 했지만 어쨌든 일행이 쉽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되었다. 뭐, 무슨 생각을 하던 저들의 관심사는 아닐 것이다.

라엘이 순진함을 가장하여 배시시 웃자 측근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무리 대책 없이 갑작스럽게 제국으로 향하겠다고 말했어도 최소한의 계획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황제를 만날 계획도 결정하지 않았다니! 그들은 순간 눈앞의 왕자가 왕자의 거죽을 쓴 다른 사람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했다-그런데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저 생김새며 목소리며 말투며 더러운 성격까지 따라 할 수 있는 대역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말이 안 되고 신의 실수라는 생각에 한숨만 폭 내쉴 뿐이었다-신의 실수다-. 아마도 충격 때문에 제2의 인격이라도 튀어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막가파적 기질이 다분한 대책 없는 성격이!

눈앞에서 그것이 맞다, 틀리다 소란스러워진 일행을 내버려두고 라엘은 고기를 꼭꼭 씹었다. 역시 제국산이라 그런지 육즙이 제법이다. 일개 여관에서 이런 고기 맛을 볼 수 있다니 역시 제국! 눈앞의 고기에 만족하며 라엘은 슬슬 생각을 시작했다.

일행을 놀려먹으려고 농담한 것이 아니라 지금 상황을 솔직히 말한 것이었다. 일단 어떻게 해야 황제를 만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당시에는 상황이 급박하였고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일단 제국으로 가자고 말을 꺼내긴 했지만, 사실 황제를 만날 방법은 지금 상황에서는 없다시피 했다. 정식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하는 방법이 정석이겠지만 어떤 미친놈이 아무 증표도 없는 사람을 타국의 왕자라고 믿고 황제의 앞까지 데리고 가준다는 것인가.

만약 알현요청이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자신을 쫓는 추격자들이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리는 없지 않는가. 목을 빼놓고 ‘나 여기 있소.’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 것일까. 단순하게 생각해보더라도 정문을 이용하는 방법은 무리수가 있다. 암살자에게 등을 푹 찍히고 싶다면야 권장할 방법이기도 했고. 생각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저들을 다독이기는 해야겠지. 라엘은 ‘다 어떻게든 할 생각이 있느니라-’라는 표정으로 일행을 슥 훑었다. 마지못해 ‘우리의 왕자님이 다 생각이 있다고 합니다.’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의 눈에는 괘씸하게도 아직도 불신의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라엘은 일단 잘 기억해두기로 했다. 굴리는 것도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해야지, 지금 굴리면 삐져서 도망갈라. 그냥 조용히 예약명단에 올릴 뿐이었다.

“폐하께서요?”

닭꼬치를 우걱우걱 씹으며 라엘이 물었다. 시장 언저리 노점에서 군것질을 하던 라엘이 주인에게 되묻자 그는 굉장히 신나라 하며 대답했다. 외국인이 자신의 황제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을 기꺼워하며 즐거운 눈치였다.

“그래. 아마 이번 수확제 때도 신의 축복을 받으러 나오실 거야.”

“자주 나오시나 보네요?”

“자주라기보다 매년마다이지! 수확제 때는 폐하의 행렬이 지나가니까 말이야. 그런데 총각, 어디서 왔어?”

“아난이요.”

“먼 데서도 왔구먼!”

자신의 국적을 휙 바꿔버리는 라엘을 측근들이 보았다면 땅을 치고 눈물을 흘릴 것이 틀림없었지만 그는 아주 태연했다.

황제를 만날 방법이 필요했다. 되도록 은밀할수록 좋았다. 그러나 현재 상황으로써는 별다른 계획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처음부터 제국으로 온다는 것 자체가 어떤 계획에도 없는 일이었다. 제국의 수도로 오기는 왔지만 그 후의 일이 미리 정해져 있을 리도 없었고 수가 바로 생각날 리도 없었다.

그런 라엘을 보는 측근들의 눈이 점점 뭔가 기분 나쁜 형태로 진화하고 있었다. 저거, 저 표정을 알고 있다. 왠지 가엾게 보는 듯한…….

이미 다니엘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익히 알고 있는 그들은 라엘이 막가파식으로 움직이는 것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책 없긴 하지만 결국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라는 믿음이야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 사이에 아련함과 측은함이 끼기 시작하면 문제가 시작된다.

측근들은 마치 라엘이 굉장한 충격을 받아 인격이 바뀐 것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충격을 겪은 후 그가 평소대로 행동하지 못해서 이런 결과가 되었고, 그것을 잘 보필해야 한다는……. 매우 짜증나는 일이었다. 확 뒤집어버리고 싶긴 했으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긴 했기에 착각을 그대로 내버려뒀을 뿐이다.

“우리 황제 폐하께 관심이 참 많네?”

“유명하시잖아요.”

“그렇지! 이렇게 대단하신 분도 더 없다니까?”

‘우리 황제 폐하’라는 단어에 라엘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요 근래 시장을 돌아다니며 들은 이야기의 절반은 황제에 대한 자랑뿐이었다. 수확제가 가까워지고 있었기에 소재가 그것이 되기도 했지만 그들은 황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받들고 있었다. 상인들은 황제가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낯선 여행객인 라엘에게도 자랑을 했고, 그가 황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굉장히 친절해졌다. 

역시 우리 황제 폐하는 외국에서도 유명하시지! 자랑스러운 자신들의 황제를 알리기 위해 좋은 점을 열심히 전파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그들의 입으로 듣는 황제의 모습은 왠지 궁에서 봤던 모습과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었다.

“폐하를 뵙고 싶다면 알현을 요청해도 될 텐데.”

“족히 한 달은 걸린다고 해서요. 그냥 먼발치서만 뵈도 되는 일이고.”

측근들의 눈에는 자포자기해서 놀러 다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라엘은 황제의 눈에 띌 방법을 여전히 찾고 있었다. 정보가 필요했다. 일단 황궁에 정식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너무 위험했다. 지금 상황에서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은 황제가 자신을 보면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정면 돌파보다는 다른 틈새를 노려야 했다.

결론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것마저 녹록하지 않다면 알아볼 수 있는 곳으로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정보를 얻기 위해 백성들 사이로 직접 파고드는 것이었다! 라엘은 이번에는 양꼬치를 씹으며 생각했다.

“역시 그렇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뵙고 가 봐.”

“넵.”

“어쩜 잘생긴 총각이 먹기도 잘 먹네! 아이고, 예뻐.”

“이 여편네가! 우리 총각 살 쪄! 총각 이것 좀 마셔봐. 피부에 그렇게 좋다는데.”

“우리 총각은 그런 거 안 마셔도 피부가 곱거든? 총각, 이건 어때? 지난번에 보니 고기를 좋아하던데 오늘 남는 양꼬치 좀 챙겨줄까?”

근 일주일을 출퇴근했더니 왠지 시장의 아이돌이 된 기분이었다. 별로 상관은 없겠지?

“그래서 방법이라는 것이 그건가요?”

“일단 눈에 띄어봐야지.”

“그건 조금…….”

“대책 없어 보이지?”

씩 웃는 라엘에게 측근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네.”라고 말하기에는 그들은 이미 몸으로 그 후유증을 체득한 이들이었다.

우리 왕자님이 요즘 많이 힘드셔서 판단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진 것 같다. 우리가 잘 보필해야겠단 생각뿐이었다. 오랜 기간 왕자를 모시며 그가 컨디션이 극도로 좋지 않으면 평소와는 다르게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생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충격 때문에 이쪽인가 보다, 하며 기다릴 뿐.

“그런데 과연 그분이 정말로 라엘 님을 알아보실까요?”

“못 알아본다면 어쩔 수 없지. 알아보고도 모르는 척하면 도와줄 용의가 없는 것으로 보고 제국을 뜨면 그만이고. 이제는 추적자들도 꽤 떨어져 있을 거니까 원래 계획대로 아난으로 가도 괜찮겠지. 다른 방법도 따로 생각해 본 것이 있고.”

“라엘 님만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휴가라고 생각해.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말은 가볍지만 식당은 우중충한 먹구름이라도 내려앉은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가 계획이라고 내놓은 것은 순전히 운과 황제의 눈썰미에 기대는 것이니 그럴 법도 하다. 

라엘은 황제의 행렬이 지나가는 길에 최대한 얼굴이 잘 보이는 자리에서 그에게 어필을 할 계획이었다. 그 후로는 전적으로 라엘의 대처에 따랐다. 혹시 황제가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알아보고서라도 그냥 지나친다면 이제부터 생각이 난 다른 방법들을 보완해서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측근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대책 없는 왕자님을 본 적이 있……구나! 생각해보면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계획 하나를 통째로 사장시켜버린 후 뜬금없는 해결방법을 낸 적이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런데 이게 왜 하필 이 시점에 재발하는 것인가.

역시 왕자님이 많이 힘드신가 보다. 측근들의 어깨가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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