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녹아내리는 달빛 속에서 ~Melting in the moonlight~
이제는 왕자가 나인지 내가 왕자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왕자와 거지에서는 왕자가 개고생하고 돌아와서 반성하고 결국 어찌어찌 둘 다 잘되는 해피엔딩이 나더니 역시 동화는 동화일 뿐이다.
아니, 다 거짓말이었다. 이쪽의 왕자는 그 거지를 아주 뼛속까지 발라먹고 있었다.
도저히 혼자 처리할 수 없는 일이 닥치면 라엘은 다니엘에게 연락할 수 있는 수정구를 사용했다. 어진간한 일이라면 수정구를 내던져버릴 그였기에 정말로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기도 했다.
왜 이렇게 강조를 하냐면 정말로 중요한 일이 닥쳤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내가 왕자인지 아닌지가 헷갈리는 그라도 결정을 다니엘에게 맡겨야 할 상황이라는 것은 존재했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 말이다.
“황제 폐하께서 이번에 방문을 하신다고 합니다. 교대해주셨으면 합니다만…….”
하필이면 라엘이 왕자인 기간에 황제가 로윈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황당했다.
“왜?”
이 인간이 미쳤나. 라엘은 침착하게 답했다.
“왜긴 왜예요. 황제를 제가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냥 네가 해.”
“미쳤어요?”
“어차피 딴 동네 가려다 들르는 건데 덤으로 들르는 우리나라에서 내가 굳이 맞이할 필요는 없잖아. 방문 목적이 덤이니까 왕자도 덤으로 온 왕자면 돼.”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 인간이 진짜!”
“앗, 부른다. 잘해!”
수정구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다니엘의 목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통신 내내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이 어딘가의 펍 안에서 노닥거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오냐, 그래. 다 맡기고 너 혼자 잘 먹고 잘 놀겠다 이거지!
라엘은 수정구를 힘차게 침대 위로 던졌다. 작은 수정구는 팍하고 튀어 올랐지만 너른 침대 한가운데 곱게 안착했다. 라엘은 한숨을 쉬며 수정구를 다시 품 안에 갈무리했다. 수정구는 매우 비싸다.
어쩌겠어. 힘없는 사람은 까라면 까야지. 결국 라엘은-여전히 제 아들과 그를 구분하지 못하는 영 믿음직스럽지 못한-왕과 함께 황제를 맞이해야 했다.
황제를 맞이하는 일이다 보니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목적이 어찌 되었건 덤으로 들르건 정식으로 방문하건 간에 제국의 황제를 소홀히 대접할 수는 없었다.
로윈에서는 그를 위해 3일 밤낮 계속되는 무도회를 준비했다. 먼 곳에서 방문한 황제의 여독을 풀기 위함이라는 명목이었다. 여독을 풀기 위해서는 무도회고 뭐고 그냥 방에서 한숨 디비져 자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지만, 지금의 라엘은 다니엘이었으니 방도가 있나. 입도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준비하는 수밖에.
귀한 손님일수록 더 크고 웅장하고 오랜 기간 무도회를 여는 것이 이 세계의 상식이었고 -라엘로서는 전혀 납득가지 않지만- 이번 손님은 무려 황제였다. 본래라면 열흘은 열어도 과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황제 본인이 간략하게 준비했으면 하는 의사를 전달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열흘 동안 돈이 줄줄 새는 무도회를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라엘은 쯧, 하고 혀를 차며 무도회를 준비해야 했다. 결코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안 한다며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 말이다.
무도회를 준비하느라 바쁜 라엘이었지만 더 바쁜 이들도 있었다. 황제에 대한 불만에 죽어가는 것은 라엘의 사정일 뿐이었다. 새로 바빠진 그룹인 귀족들은 기대의 환호성을 지르며 스스로를 바쁨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제국의 황제 레온하르트는 젊고 잘생긴데다 무려 미혼(!)이었다. 황제가 왕국의 귀족영애를 비로 맞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가 언감생심 말이 되지는 않았지만, 인생은 도전이 아니던가. 결혼적령기의 과년한 딸자식을 가진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제 딸들에게 보석을 둘러 주기 바빴다.
도전정신 넘치는 귀족들 덕분에 호황기를 맞은 것은 수도의 옷가게들이었다. “남작님 댁에 보낼 연분홍 코사지가 보이지 않아!”
“멍청아, 네 어깨에 있잖아!”
본의 아니게 여러 사람을 바쁘게 만드는 황제였다.
라엘이 황제의 얼굴을 처음으로 본 것은 무도회 당일이었다.
황제 일행은 며칠 전에 왕국에 도착했었지만 과중한 업무로 몸이 두 개라도-이미 두 개였지만- 모자란 라엘은 도저히 황제를 맞이하러 갈 수가 없었다. 왕이 그를 맞이했지만 로윈의 후계자라면 응당 얼굴을 내미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걱정했지만 다행히 황제는 기분 상해하지 않았고 라엘은 마음 놓고 업무에 집중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도회 당일인 오늘이 돼서야 그는 황제의 얼굴을 보게 됐다.
일순 해가 떠올랐다고 생각했다.
흐르는 듯 굽이쳐 내려오며 어깨를 덮는 은발이 화려한 조명을 받아 갖가지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쩌면 차가워 보일지도 모르는 밝은 벽안은 상냥한 미소와 함께 보석같이 영롱하다. 오뚝한 코며 도자기같이 매끄러운 피부며 날렵한 턱 선까지 흠잡을 곳이 전혀 없었다.
천천히 눈을 껌뻑이며 저와 눈을 마주치는 황제의 눈 위로 은실 같은 속눈썹이 드리워진다. 지금까지 자신의 외모에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라엘조차도 잠시 넋이 나갔다.
같은 남자도 정신을 빼놓을 정도로 더할 나위 없이 잘생긴 황제인데 여자들은 오죽할까. 등 뒤에서 단체로 기절이라도 할 기세인 영애들을 걱정하며 라엘은 황제에게 고개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들게.”
목소리마저 참 심장 떨리게 잘생겼다는 생각을 하며 라엘은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키는 왜 이렇게 큰 거며 쓸데없이 얼굴에서 광도 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조명이 필요 없겠다 싶었다.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빙긋 웃었다. 썩 마음에 들었는지 황제도 마주 웃는다. 등 뒤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인사를 올리는 불충을 용서해주십시오.”
“국사를 돌보는데 그리되는 경우도 있지. 비록 황제라는 존재가 어딜 가든 사람을 바쁘게 하는 못된 존재라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네. 이런 훌륭한 무도회를 마련하느라 그대가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충분히 알고 있네.”
“망극하옵니다.”
성격마저 좋구나. 꾸며내건 어쨌건 간에 대외적인 모습이 저리도 온건한 황제라면 잘 보여 두는 것도 좋을 터였다. 다시 고개를 깊이 숙이자 왠지 목 뒤가 따가웠다.
라엘은 당황했다. 혹시 독심술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아난으로 바로 가지 우리나라를 굳이 들러서 일거리를 늘렸다고 속으로 욕하는 것을 들켜버렸을까. 여전히 내리꽂히는 시선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자 황제는 이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 후였다. 착각이었나 싶어 목덜미를 손으로 훑었다.
황제의 시선을 따라가자 홀에서 나비처럼 나부끼는 연분홍 연노랑의 영애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의 영애들은 정말 역대 최고급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황제의 앞에서는 힘을 잃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라엘은 황비의 본국이 로윈이 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해 생각하며 조용히 자리를 떴다.
다시 시선이 목덜미에 꽂혀왔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끈적거리는 느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교대하기 전 또 다니엘이 어디서 지랄을 해놔서 적을 만들어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지웠다. 제 앞에 제대로 나타나지도 못하는 이라면 그냥 찌질한 놈이겠지, 뭐. 다니엘로도 차고 넘치는 고민에 한 스푼을 더 끼얹을 필요는 없으니까.
라엘은 곧 지쳤다. 본래 무도회를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원래 세계에서 무도회라는 것은 동화나 만화, TV에서나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으니 현실에서 이런 돈지랄하는 행사를 치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천장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굉장히 비싼 샹들리에를 바라보며 라엘은 우울해졌다. 마법적인 처리가 되어 제 몸뚱이에서 아름다운 빛을 스스로 뿜어내는 수정을 모아 만든 샹들리에는 무려 ‘일회용’이었다. 마법적 처리가 된 수정은 보기에는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그만큼이나 매우 비쌌고 반비례하여 수명은 길지 않았다. 제국에서 유행 중이라 하여 무리해서 수입을 해 온 것인데 역시 황제는 관심도 없을 저딴 곳에 그런 큰돈을 들인 것이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솔직히 내 돈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까울 수 있지 않는가?
“왕자님, 기분이 좋지 않으세요?”
“숙녀 분들을 앞에 두고 이런 실례를……. 용서해주세요. 아무래도 준비를 하는 데 신경을 너무 쓴 모양입니다.”
“어머, 이를 어째.”
“아름다우신 분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에요.”
라엘은 제 주변에 모였던 귀족영애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했다.
평소에도 주변에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오늘따라 여성들이 가득하다. 잘생긴 미혼의 황제는 난이도가 높으니 차선책으로 잘생긴 미혼의 왕자를 노리고 나비 떼처럼 달려든 그녀들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그녀들에게 잘못은 없지만 그 향수 냄새들은 잘못이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신경 쓰이게 따가운 시선을 피해 라엘은 정원으로 향했다.
화려한 홀에 맞춰 정원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본디도 화려한 정원이었지만 무도회의 주인공이 황제가 되니 꾸밈도 황제급으로 꾸며져 있었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등은 모두 마법을 걸어 제작한 것이었다. 등 위에 쓰인 갓은 유리로 만들었고 일일이 무늬를 새겨 넣은 화려한 것이었다. 등불이 지나가는 길의 활짝 핀 꽃들에는 금가루가 발려져 있었다. 우울하다.
“이딴 돈지랄을 생각한 것은 대체 어떤 놈이지?”
돈을 쓸데가 없어 주체하지 못하면 이런 미친 생각도 가능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원을 가로지르자 졸졸 흐르는 물소리마저 들리는 것이 닷새 만에 정말로 수로를 다 완성한 모양이었다. 기획서를 보자마자 이게 가능하냐고 집어던졌다가 별 방법이 없어 결국 결재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딱 닷새 전이었는데 벌써 완성된 걸 보면 역시 돈의 힘은 대단했다.
오늘따라 조용하기 그지없는 정원을 지나자 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온갖 격식과 예법을 따지는 귀족들은 본능에도 충실하였고 왕궁이건 같은 귀족의 정원이건 가리지 않고 으슥한 곳을 찾아 제 사랑들을 나누는 데 바빴다. 덕분에 무도회가 열리는 날 바람이라도 쐴 겸 정원으로 나서면 사방에서 민망한 소리가 들려오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황제라는 어마어마한 사냥감이 건재하기 때문인지 아직까지는 커플이 성립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난히도 조용한 정원이 참 마음에 들어 라엘은 콧노래까지 부르며 정원을 거닐었다.
정원은 어느 방향에서 출발하던지 가장 중앙의 분수대에 도착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평소에도 화려함에 치를 떨던 분수대는 정말로, 오늘은 상상을 저버리지 않았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분수대 동상을 바꾼 거야?
스스로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들고 있는 물병에서 달빛을 반사하여 찬란하게 빛나는 물줄기를 쏟아내는 아름다운 아가씨의 동상을 보며 라엘은 입을 쩍 벌렸다. 나 이런 건 결재한 적이 없는데? 대체 어떤 놈이 결재도 안 받은 서류로 이딴 헛돈을 썼는지 맹렬하게 고민하는데 짚이는 곳이 없었다. 나중에 탈탈 털어봐야 할 것 같다.
부스럭.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그는 미모에 눈이 먼다는 것이 어떤 표현인지 제 눈으로 느껴야 했다. 대체 왜 같은 남자에게 그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아름다운 정원이로군.”
황제였다.
홀 안에서 온 사람들의 맹렬한 시선을 받고 있어야 할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쉽게 빠져나오기 참으로 힘든 얼굴일 텐데 그의 뒤를 힐긋 넘겨보아도 따라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행원도 없이 이리 돌아다녀도 되는 것인가 생각하다가 무도회에서까지 수행원이 따라오면 참 답답하긴 하겠다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라엘은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흡족하시다니 다행입니다.”
“고개를 들게. 그런 예를 차릴 필요는 없어. 이곳의 주인은 그대가 아닌가.”
“왕국의 주인은 아직 부왕이시랍니다.”
“이런 실례를.”
정말로 실례라고 생각을 하긴 하는 건지…….
솔직히 황제가 무례하다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로윈은 제후국이었고 현 왕이 사람은 좋지만 별다른 능력이 없다는 것은 소문이 자자하다 못해 유명했으니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천만다행으로 왕은 다니엘이라는 어마어마한 왕자를 세상에 내놓았고, 덕분에 왕국은 다른 왕국들의 침탈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왕이 무능한 것을 알 때쯤에는 이미 왕국의 모든 대소사를 왕자가 책임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문이었다.
누구나 아는 그 소문을 황제라고 모를까. 라엘이 그를 마중 가지 못한 것에 아무런 불만도 표시하지 않은 그였다. 이미 그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됐다. 그래도 황제의 기분을 살필 수밖에 없는 라엘은 어깨만 으쓱였다. 다니엘도 부왕을 거리낌 없이 까는 마당에 황제가 한 번 더 깐다고 무슨 문제가 있나. 까도 내가 깐다는 말은 하지만 결국 결론은 깐다는 거잖아?
황제가 정원을 마음에 들어 하니 다행이었다. 어마어마한 돈지랄이 목적에 부합하는 순간이었다. 이 분수대도 마음에 들어 하니 실수한 신하를 굳이 벌 줄 필요는…… 있지! 어딘가에 있을 신하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 생각을 하며 라엘은 황제가 권하는 대로 그 곁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조금 전 본 것보다 더 잘생긴 얼굴이었다. 대낮이라도 된 것처럼 주변이 훤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 잘생기니까 솔직히 좀 재수가 없다.
다니엘은 대륙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왕자였다. 그의 우수함 자체도 유명했지만 그의 우수함이 비롯된 배경이 돋보이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나라의 왕, 아비는 무력하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왕이었다. 주제에 마음이 넉넉하고 후하여 제 이득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사람만 좋은 그 왕은, 원래대로라면 이미 로윈의 이름을 대륙에서 지웠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일생에서 가장 잘한 일을 하나 뽑으라 한다면 누구든지 아들 다니엘을 세상에 내놓은 것을 꼽을 것이다.
다니엘은 철들 무렵 이미 그 천재적인 행보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왕이 만만한 것을 제대로 깨달은 주변국들이 손을 뻗으려 할 때쯤에는 이미 왕자가 모든 국사를 도맡아 하고 있었고 주변국들의 마수를 어렵지 않게 쳐낼 수 있었다. 로윈은 무사했고 왕자는 그대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레온이 굳이 로윈을 경유지로 선택한 것은 소문이 자자한 다니엘을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다. 저도 세상에 둘도 없을 인재라며 어렸을 때부터 칭송이 자자했었는데 다니엘은 그런 자신과 간혹 비교될 정도로 우수하다 하였으니.
그리고 그를 처음 보았을 때,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참으로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그는 매우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비단처럼 윤기가 흘렀다. 조금 긴 앞머리가 눈을 가리는 것이 아쉽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은 머리카락만큼이나 매우 검었지만 반짝반짝 빛이 나서 마치 보석 같다.
조금 더 오래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이 고개를 숙인 그의 흰 목덜미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레온은 외모에 관한 부분에서는 언제나 남부럽지 않은 칭송을 들어왔다. 제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노래는 이미 기백이 넘었고 보는 누구든지 자신의 아름다움을 칭송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저를 칭송하는 이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도무지 다니엘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무도회 내내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나비처럼 팔랑이는 숙녀들 사이에서 예의 바르고 아름답게 웃는 그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설마 반하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 그것은 아니었다. 첫사랑에게 느꼈었던 충격적인 심장의 떨림도 가슴 속에서 솟아오르는 욕망도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남자이지 않는가. 그저 흔치 않은 외모를 보고 관심이 생긴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정원으로 향하는 것을 보자마자 제 발이 그곳으로 움직인 것은 왜였을까.
정원은 아름다웠다.
황제라는 위치에 있기에 그가 가는 곳은 화려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떤 나라를 방문하건 어떤 장소를 방문하건 모두 그의 방문을 환영하며 그가 머물고 즐길 곳을 최대한 아름답게 꾸몄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이곳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니 유독 아름다웠다.
먼저 밖으로 나간 다니엘의 자취는 이미 찾을 수 없었다. 복잡하게 얽힌 정원은 아름다웠지만 사람을 찾기에는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화사하게 핀 꽃들이 금가루를 휘날리며 눈앞을 어지럽혔고 색색 유리로 꾸며진 등불들이 몽환적으로 흔들리며 시선을 자꾸 빼앗았다. 다니엘은 놓쳤지만 그 사이로 천천히 걷는 기분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천천히 정원을 따라 걷자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싶더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조각상이었다. 몹시도 아름다운 조각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뿜으며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그녀는 들고 있는 물병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을 보석가루처럼 쏟아냈다. 천상의 정원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신음 소리를 낼 뻔했다.
천사가 내려앉았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이 분수대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람들이 가득한 홀을 피해 굳이 정원에 홀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도 모르게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생각에 깊게 잠겨있는 그는 인기척을 쉽사리 느끼지 못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보이는 그의 옆모습은 우수에 가득 차 있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보자 물기를 닦아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당황스럽다. 어째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다니엘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레온이었다.
“아름다운 정원이군.”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란 게 이것뿐이었다. 이런 시골뜨기 같은 말로 운을 떼다니! 어째서 평소에 술술 잘만 나오던 유려한 말이 나오지 않는 걸까.
상냥한 다니엘은 제 말에 웃으며 대답을 해준다. 꽃에 나비가 내려앉은 듯 화사한 웃음이었다.
이어지는 대화는 즐거웠다. 사실 말을 하긴 했는데 어떤 내용인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대화를 나눌 때 다니엘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인다든가 앙증맞게 움직이는 입술이라든가. 아니, 남자의 입술에 앙증맞다는 표현이 어울리기는 한가 싶다가도 그 입술을 자세히 떠올리면 확하고 얼굴에 불길이 올라와 레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콧날에 부서지는 달빛 같은 것만이 머릿속에 선연했다.
시종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째서, 라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물었지만 그 답을 찾기도 전에 다시 그를 바라본다. 제 이상함을 다니엘이 깨달을까 심장을 졸이면서도 차라리 이 기묘한 감정을 그가 알아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여러 가지로 정상이 아니라고 고개를 저을 무렵, 다니엘이 깜짝 놀랐다.
맙소사, 혹시 다니엘은 독심술을 하는 것일까? 제 부끄러운 감정을 알게 되어 이리도 놀라는 것일까. 하지만 다행히도 다니엘은 독심술을 하지는 못했다.
“이런, 벌써 새벽이군요.”
그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자 동녘 하늘 끄트머리가 파랗게 물들고 있었다.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지난건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다니엘의 날씬한 등허리를 저도 모르게 훑다가 퍼뜩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와의 이야기가 너무 즐거워 시간 가는 줄도 몰랐군.”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독을 제대로 풀지도 못하신 폐하를 너무 오래 붙잡아두었군요. 정원의 길이 복잡하니 제가 방까지 안내해드려도 되겠습니까?”
“영광이오.”
제 이런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한 번 지나간 길 정도는 우습지 않게 기억하는 자신이 굳이 길 안내를 부탁한 이유는, 그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어서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무도회는 끝났지만 황제의 마음을 얻은 여인은 없었다. 황제는 첫날 이후로는 아예 무도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황비가 될 것이라고 진지하게 기대하는 아가씨들도 사실 거의 없었기 때문에 무도회는 여전히 활기찼다. 그녀들은 매우 현명했고 구름 위의 황제보다는 땅 위에 있는 현실적인 괜찮은 남자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역대 최고로 아름다운 그녀들이었기에 이번 무도회에서는 유독 커플 달성률이 높았다는 후일담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두 만족한 무도회였다. 맺어지는 커플들은 많았고 황제는 푹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무도회가 끝나자 라엘도 쉴 수 있었다.
아니, 쉴 수 있어야 했었다.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지금 나가겠다.”
소식을 전하는 시종의 표정이 난감했다. 그래, 네가 무슨 죄가 있겠어. 라엘은 힘없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상 위로 쌓인 업무들에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자신을 보러 직접 내방했다 하는데 그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귀빈 중에서도 귀빈이었고 대륙의 어떤 곳에 방문을 하던 누구든 영접해야 마땅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귀빈이라도 열흘째 매일 방문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응접실로 천천히 걸어가자 오늘도 보는 사람 살 떨리게 아름다운 레온이 앞에 있는 사람을 녹여버릴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었다. 정말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피곤해 죽을 것 같다.
“그대는 오늘도 피곤해 보이는군.”
“그렇지 않습니다.”
“혹시 내가 머무는 것이 그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일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알면 제발! 너! 네가 문제야! 너 말이야, 너! 너 때문이야!!! 알면 제발 좀!!
본심을 외치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꾹 눌러 담았다. 레온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열흘 넘게 머무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황제는 절대로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그를 시중들 시종부터 따라오는 귀족들이며 일행을 호위하는 기사들만 해도 이미 백 단위가 넘는다. 하지만 그들이 보통의 신분이던가. 귀족이며 기사며 모두 개인 시종을 데리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인원은 우습지 않게 기백이 되는 것이다. 신나는 산수의 세계! 그리고 그 대인원이 전부 왕궁에 머물고 있지! 전부!!!
이게 전부 눈앞에서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레온이 불러온 결과였다. 제 한 몸뚱이가 정말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빤히 알 텐데도 이렇게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이고 있는 것은 나 엿 먹으라는 것인가?
더 열 받는 것은 다들 그가 왕자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하여 기뻐한다는 것이다. 물론 평범한 상황에서 황제가 이리 머무는 것은 봉신의 입장으로서는 영광된 일이다.
그래, 안다. 하지만 지금의 왕자, 다니엘은 사실 라엘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 라엘은 정말로 환장하기 직전이었다. 이런 일은 제발 다니엘이 앉아있을 때 생기란 말이야!
마음속에서 어떤 폭풍이 불어오든 라엘은 싱글벙글 웃으며 황제를 응대했고 레온은 더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그와 환담을 나눴다. 사실은 황제가 자신을 어마어마하게 싫어해서 엿 먹이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레온이 머문 지 보름째가 됐을 때 라엘은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다니엘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연하게도 거절당했다. 하지만 그의 체류기간이 장장 한 달째에 접어들자 결국 다니엘은 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시발, 당장에 굶어죽더라도 가출하겠어요!’는 라엘의 말은 현실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갑니다!”
“야, 야!!!”
지금까지 상황설명을 아주 간략하게 마친 라엘은 비밀통로로 재빠르게 달려 나갔다. 여기서 나가겠어요!
아니, 나가려고 했다. 다니엘은 온몸을 던져 라엘을 붙잡았고 둘은 쿠당탕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라엘은 다니엘의 아래에 깔려 버둥거렸다. 나, 나가고 싶어!!
“인마! 설명 제대로 하고 가란 말이야!”
“피곤에 절어 죽어버릴 것 같다 구요! 제게는 휴식이 필요해요!!”
“휴식은 무슨! 지금 용병단은 반란진압 중인 거 까먹었어? 너 나가면 바로 전쟁이야!”
“시발, 뭘 해도 지금 이거보단 나아요!”
라엘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전쟁터가 더 낫다고 외쳤다. 통로 밖으로 보이는 집무실의 책상이 서류로 엉망이 된 것을 보니 지금 상황이 장난이 아니기는 아닌 모양인데……. 이리저리 도망을 잘 다니는 다니엘과는 다르게 라엘은 그래도 서류를 그때그때 잘 정리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쌓여 있는 것을 보니 대체 얼마나 심하게 일이 밀린 거야?
“아뇨, 아뇨. 일 자체는 괜찮아요. 사람 먹이고 재우는 게 무슨 대수라고. 평소라면 처리 가능할 양이에요.”
“그런데 대체 왜?”
“황제가 매일 찾아와요.”
눈 밑이 새까매진 라엘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일 찾아와서 오후 내내 이야기를 나누고 가요.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냥 일이 쌓이는데……. 일할 시간을 안 줘요. 미쳐버릴 것 같아요. 서류가 쌓일 때마다 내 스트레스가 쌓여요. 등에 돌이 열다섯 개는 얹혀있는 것 같아요.”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우는 소리를 하는 라엘의 어깨가 이렇게 지쳐 보인 적이 없었다. 아끼는 새끼는 절벽에서 밀어 떨어뜨린다는 모토로 그를 거리낌 없이 사지에 몰아넣는 것이 일상인 다니엘이었지만 라엘의 이런 모습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로 놀라운 상황이었냐면 일 년에 두어 번 정도 머리를 내미는 미안함이 오랜만에 등장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이렇게 힘들어 하다니, 좀 빨리 교대해 줄 걸 그랬나.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마구 솟아올랐기에 다시 버둥거리는 라엘을 찍어 눌렀다.
“대체 황제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고 가는 건데?”
“아, 그걸 모르겠다고요.”
“같이 내내 대화를 해놓고 뭘 몰라.”
라엘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몸속 깊이, 마치 지옥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어마어마한 한숨이었다.
“그냥 잡담을 하고 간다구요. 잡담을……. 오후 내내……. 할 말이 다 떨어진 것 같은데도 계속 와…….”
조금만 더 붙잡으면 이젠 아예 울 기세였기 때문에 다니엘은 순순히 라엘의 위에서 내려왔다. 조금 진정됐는지 라엘은 다시 통로 안쪽으로 튀어나가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지옥의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듯한 한숨 소리가 땅바닥을 녹일 기세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말보다 더 큰 한숨 소리에 다니엘은 라엘을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기록한 것을 서랍 안에 넣어뒀다며 이젠 정말로 가보겠다며 밖으로 향하는 라엘의 등이 유례없이 지쳐 보였다. 곧 그는 통로 저쪽으로 사라졌고, 그 와중에도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며 다니엘은 의자에 앉았다. 서랍의 안쪽을 뒤져 꽤나 두터운 종이뭉치를 꺼내든 다니엘은 내용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당황했다.
“대체 뭐야, 이건…….”
황제와의 대화는 정말로 영양가가 없는…… 라엘의 말 그대로 잡담뿐이었다. 이딴 잡담을 하려고 한 달을 머물렀단 말이야? 은사자라 불리는 황제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괴벽이라는 것의 존재는 도시전설처럼 내려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납득하기로 했다. 멀쩡한 성격의 황제라는 것이 사실 더 어색하지 않는가? 아마 황제는 순수하게 라엘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다. 라엘은 본인에게 엿 먹이기 위해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지만 굳이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괴롭힐 정도로 잘못할 리가 없잖은가. 당연한 거 아닌가, 내 그림자인데!
라엘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황제를 대했을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다니엘은 집무실 구석에 놓인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일이란 것은 내일부터 하라고 해서 일이지!
그는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를 보고도 숙면을 취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곧 집무실에는 작은 숨소리만 고롱고롱 들려왔다. 꼭 닮은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특징 중 하나였다.
“왕자님?”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고개를 들어 창밖을 슬쩍 보니 햇살이 아래로 사정없이 내리꽂히고 있는 게 이미 대낮인 듯했다. 바깥에서 불규칙한 생활을 오래했더니 잠시 왕궁의 생활을 깜빡 잊고 늘어지게 잠을 잔 것이다.
다니엘이 답이 없자 바깥쪽에서 그를 부르던 목소리는 잠시 멈췄다. 그리고 곧 다시 똑똑 하며 문을 두드린다.
“들어와.”
대답이 떨어지자 시종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침대 위에서 제대로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옷을 그대로 입은 채로 일어난 다니엘을 본 시종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연민과 동정이 가득한 그런 표정을 마주하자 조금 당황했다. 대체 요즘 라엘의 상태는 어떠했던 거야? 자신의 게으름이 용서받을 정도의 피로 수준이라면 굉장히 심각한 걸 텐데. 순간 잘못 돌아온 것은 아닌지 고민이 됐다. 지금이라도 다시 부를까…….
“저기……. 왕자님?”
“아, 조금 피곤해서 그래. 말해도 괜찮아.”
“황제 폐하께서 오찬을 함께 하고 싶다 청하셨습니다만…….”
평소에는 오후의 티타임이라더니 오늘은 생각보다 강했다. 라엘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오늘 점심을 함께 하고 십중팔구 체했겠지. 눈앞에 떡하니 그려지는 상황에 그를 다시 부르는 것은 포기했다. 그 정도의 아량은 있는 고용주라고.
지금 시간을 물으니 아직 11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씻고 나올 시간 정도는 남아 있었기에 다행이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목욕물과 옷을 준비하겠다는 시종의 눈이 아래로 더욱 처지는 것 같았다. 적당히 가엾어 해!
준비를 모두 마치자 딱 맞는 시간이 되었다. 거울 속의 여전히 잘생긴 자신에게 씩 웃어 준 후 다니엘은 식당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황제와 마주친 다니엘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그는 눈을 크게 뜨더니 웃었다. 듣던 대로 어마어마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걸 약간 수정해야 할 것 같았다. 세상에서 두 번째로 잘생긴 것으로.
잘생긴 황제의 미소에 배시시 웃으며 답하자 황제가 잠시 멈칫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린 문으로 먼저 들어가자 곧 뒤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거의 사용하는 일이 없는 식당이었다. 황제를 일반 손님을 접대하는 식당으로 모실 수 없었기에 다니엘은 가장 좋은 식당- 왕과 자신이 사용하는 공간에 오찬을 마련하도록 명령했고 그곳은 정말로 오랜만에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었다.
뒤로 빠지는 의자에 자연스럽게 걸터앉았다. 그리고 맞은편에 있을 황제를 찾던 다니엘은 깜짝 놀랐다. 황제가 어디로 사라진 거지? 그를 찾기 위해 무심코 고개를 돌린 다니엘은 심장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어째서 황제 폐하께서 제 등 뒤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고 계시는 겁니까?
방금 의자를 빼 준 것이 레온이라는 것을 깨달은 다니엘이 당황하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여기서 더 당황하는 것도 바보 같고 실례인 것 같아 다니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대륙에서 폐하께서 빼 준 의자에 앉는 경험을 한 남자는 제가 처음일 겁니다.”
분위기를 어떻게든 풀어보기 위해 농담으로 말을 건네자…….
“아니, 남자든 여자든 의자를 손수 빼 준 것은 그대가 처음이고 유일하지.”
무지막지하게 살벌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더 썰렁해졌다.
참으로 대답할 말을 찾기 힘들게 만드는 황제 폐하일세, 하고 생각하며 싱글거리며 대화를 나눴다. 라엘은 이미 물릴 만큼 물려 저만치로 도망갈 정도로 겪은 평범하고 소소한 잡담이었다. 황제의 잡담으로는 굉장히 소소한 이야기들뿐이었지만 딱히 어색하지도 않았다. 제국의 황제가 소소하게 잡담을 하는 것을 듣는 것도 색다른 일이었다.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레온은 달콤한 목소리로 유려하게 말을 이어나갔고 잘생긴 그의 얼굴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심한-이라는 것이 가라앉을 틈이 없었다. 그의 말에 대꾸를 하고 있자니 조용히 문이 열리며 음식을 들고 있는 시종들이 차례대로 들어왔다. 음식들이 들어온 순서대로 식탁 위에 놓이기 시작하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을 본 다니엘의 표정은 기대보다는 의문에 가득 찼다.
요리는 이전에 조사한 황제의 취향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었다.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줄줄이 늘어져있는 바닷가재 요리나 훈제 연어나 버섯요리 같은 것은 오히려 자신과 라엘이 즐겨 먹는 것이었다. 사이사이에 황제가 즐겨먹는다는 양다리 램생크나 칠면조 요리 같은 육류들이 끼어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밸런스를 보자면 확실히 자신의 취향이었다. 이놈의 주방장이……! 다니엘이 당황하여 주방장을 부르려 하자 레온이 제지했다.
“그를 혼낼 필요는 없네.”
“하지만, 폐하.”
“내가 이렇게 준비하라 명했네.”
“네?”
“그동안 내 취향에 맞는 식단을 준비해줬으니 오늘의 오찬은 그대가 좋아하는 것 위주로 해달라고 미리 이야기했다네.”
다니엘이 머릿속에 주방장의 고뇌가 공유되는 듯했다. 아마 그도 같은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아니 대체 왜요?
하마터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억지로 꾹꾹 눌러 담으며 다니엘은 더없이 상냥하고 부드럽게 웃는 황제에게 마주 웃었다. 웃긴 웃는데 제 웃음이 어색해 보일까 걱정한 것은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정말로 기묘한 상황이었고 기분이 묘했다. 정말……. 뭐지, 이 상황은?
당황한 다니엘만큼 레온도 기묘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오늘의 왕자, 다니엘은 평소와는 왠지 달랐다. 태도나 말투의 문제는 아니었다. 행동에 위화감을 느끼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근 한 달간 그를 볼 때마다 정신없이 뛰던 심장이 오늘은 잠잠했을 뿐이다. 마주치자마자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미소를 맞이했는데 심장이 요동치지 않다니. 그를 만난 이후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좋은 현상이었다. 그를 볼 때마다 쿵쿵대는 심장 때문에 대화를 나눌 때 적잖은 방해를 받고 있었다. 귓속까지 쿵쿵대며 울리는 심장소리 대문에 자꾸 헛소리만 늘어놓았는데 오늘은 그래도 다른 사람을 대하듯 이야기를 잘 나눌 수 있었다. 그를 대할 때마다 자꾸 올라오던 알 수 없는 발열과 안면홍조와 심장의 통증이 오늘은 진행되지 않아 좀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달까.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생각에 잠겨 음식을 잘 먹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다니엘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였다.
“그럴 리가 있겠나. 그대와 함께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네.”
황제가 웃으며 답했고 다니엘도 마주 미소 지었다.
검은 머리와 같은 색의 짙은 눈동자는 오늘도 아름다웠다. 잘 타지 않는 피부는 오늘도 유난히도 희었다. 요즘에 이런저런 핑계로 함께 자주 산책을 나가는데도 그랬다.
정신없이 그를 훔쳐보며 식사를 마치자 다니엘이 먼저 차를 권한다. 평소에는 언제나 자신이 티타임을 권했는데,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저 식사를 마쳤으니 당연히 차를 권한 것일 뿐이지만, 사실 레온은 그런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다니엘이 제게 먼저 차를 권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인 것이다.
다니엘이 레온을 안내한 곳은 정원이 잘 보이는 테라스였다. 궁의 아름다운 곳이라면 대부분 본 그였지만 이곳만큼은 처음이었다. 이곳은 아주 가끔 사용하는 곳이었고 손님이 들어오는 경우는 더욱 드문 궁이었다.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 자체도 적기도 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 레온은 기쁜 듯 화사하게 웃었다.
저 미소로 몇 명을 심장마비로 보냈을까. 적어도 한 명은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레온의 미소를 목전에서 마주한 시종의 손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러다 차를 따르다 큰일을 내도 내겠다 싶어 다니엘은 그를 보내고 직접 주전자를 들었다. 레온의 찻잔을 채우고 제 찻잔을 채우자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혹시 기분이 나빠진 것은 아닌가 싶어 서둘러 변명을 했다.
“송구스럽습니다. 폐하의 훌륭하신 용안에 시종이 퍽 놀란 것 같습니다. 혹여 실수를 할까 걱정되어 먼저 물린 것을 용서해주십시오.”
“아니, 그대가 직접 따라주는 차라서 그런지 더 향이 좋은 것 같아.”
“감사합니다.”
느끼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니 그게 어디인가. 을의 입장이여……. 다니엘이 입꼬리를 올리자 레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결국 말했다.
“오늘 그대는 참 기묘한 느낌이 드는군.”
“아……. 혹시 제가 폐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겠나. 전혀 그런 것은 아니라네.”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레온을 다니엘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주 봤다. 레온의 보석 같은 푸른 눈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다만…….”
“폐하?”
“오늘은 왠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다니엘은 작게 미소 지었고, 레온은 민망한 듯 웃었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첨언하며 정말로 부끄러워했고 다니엘은 그런 이유였냐며 웃었다. 사실은 뒤로 뒤집어질 뻔했지만. 어머나, 깜짝아!
“감기 기운이 조금 있습니다. 목이 약간 잠겨서 그런가 봅니다.”
“이런, 요즘 무리하는 것 같더니.”
그 무리가 당신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만.
이미 다니엘의 등 뒤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레온은 세상에 다니엘과 꼭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해서 자신의 착각이라고 치부했지만……. 사실 두 사람을 느낌으로라도 구분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전혀 없었다. 심지어 왕이며 동생이며 모두 저와 라엘을 구분하지 못했는데 생판 남인 황제가 둘을 구분한 것이었다. 세상에, 위화감이라니. 두 사람이 완벽하게 하나처럼 행동하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훈련을 거쳤는데! 역시 제국의 황제가 되려면 이 정도로 민감해야 하는 것인가? 다니엘은 감탄했다.
“꽃이 진다라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지만 저는 언제나 그 순간이 서운하더랍니다.”
“나도 그대와 생각이 같다네.”
“의외로군요. 폐하께서 지는 꽃을 아쉬워하시다니.”
“난 생각보다 감상적인 사람이라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줄도 아는. 그래서 황궁에는 겨울에도 꽃이 피는 정원이 있지.”
“소문이 자자한 그 유리정원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사실 저도 예전에 소문을 듣고 마법사를 고용해 작게나마 그러한 유리정원을 만들어 보려 한 적이 있었답니다.”
“오호라.”
“하지만 실패했지요. 역시 제국의 마법사처럼 수준 높은 이를 찾기는 힘든 일이니까요.”
“그대가 원한다면 유리정원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를 보내주지.”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평범한 말투의 대화였다. 유리정원을 만든 사람이 제국의 수석마법사라는 사실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는 어디론가 보내질 정도로 지위가 낮은 사람도 아니었고 마구 부려 먹힐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막노동꾼 보내듯이 막 보내주겠다고 말하는 황제라니. 아마도 다니엘이 예의상 하는 말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레온은 당장에라도 서신을 날리지 않았을까. 마법사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으로 다니엘은 빈말로 받아들였고 더 이상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흔쾌히 수석마법사를 보내주겠다는 말을 꺼낼 정도로 레온의 기분은 매우 좋았다. 요 근래 계속되었던 심장 이상이 멈추자 그만큼 마음이 굉장히 편해졌다. 익숙해져서일까. 함께 있을 때마다 설레고 기쁜 것을 감추지 못해 언제나 그것을 들킬까 전전긍긍했는데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그를 대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 기뻤다. 좀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심장이 떨리든 떨리지 않든 여전히 뇌가 제대로 일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레온은 지금 다니엘도 같은 남자이며, 남자의 좋은 모습 따위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단단히 상한 것 같다.
“오늘 옷 색이 굉장히 어울리는군.”
다니엘이 입고 나온 감색 슈트를 레온이 칭찬했다. 그것은 다니엘의 흰 피부에 퍽이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잘 단련되었지만 유난히도 날씬한 그의 허리를 드러내는, 레온의 입장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옷이었다. 그러니 레온이 옷 아래 다니엘의 피부색을 상상하며 저도 모르게 그의 온몸을 눈으로 훑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로…….
“폐하, 이쪽에서 정원을 내려다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황궁만큼은 아니더라도 굉장히 신경을 써서 가꾼 정원이랍니다.”
“그렇군. 아름답군.”
그렇죠? 그런데 왜 그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답니까.
느끼한 시선을 피하려 말을 꺼냈다가 기름진 말을 통째로 뒤집어쓴 기분이라 다니엘이 어색하게 웃었다. 누가 봐도 어색하다고 생각할 그 웃음을 레온만은 미려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 큰일이었다.
“아, 잠시만.”
“네?”
레온의 손이 다니엘의 볼과 목덜미를 쓸어 올렸다. 그 순간 등짝에 소름이 오도도 돋으며 다니엘은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하지만 레온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해다.
“꽃잎이 붙었어. 그대와 퍽 어울리지만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다니엘은 최대한 먼 산을 바라봤다. 자연스럽게 그 곁에 붙은 레온이 정원을 보며 감탄했다. 정말로 정원에 대한 감탄을 하는 것인지는 이젠 잘 모르겠다. 그저 바로 곁에 답삭 붙은 그의 어깨가 어마어마하게 신경 쓰였다.
레온은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굉장히 흡족해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 그를 배웅하고 다니엘도 조용히 제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갔다. 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낸 그는 라엘을 불렀다.
“왜요.”
“야, 야!!!!”
“아이쿠, 깜짝이야. 왜 다짜고짜 소리 지르고 난리예요!”
“야, 야. 너……! 아오……. 진짜!!!!”
“뭐요! 왜요! 뭐!!”
“황제가 너한테 작업 걸고 있는 것 정도는 알려줘야지!!!”
하루 종일 황제의 느끼한 말이며 시선에 흠뻑 젖어야 했던 다니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무슨 헛소리예요. 황제가 뭐요.”
“너한테 작업 걸고 있었잖아!”
“미쳤어요? 난 남자잖아!”
“헐……. 설마…….”
……몰랐냐? 다니엘은 기가 막혔다.
물론 라엘이 눈치 없는 새끼라는 것은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설마, 정말로 그 노골적인 시선을 전혀 몰랐다고? 식당에서 마주칠 때부터 아주 잡아먹을 것처럼 느끼한 시선으로 온몸을 훑었는데 그걸 한 달이나 받아내면서도 전혀 몰랐단 말이야? 시종일관 하는 말이며 행동이 신전 여동생 꼬시는 신전 오빠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걸 몰랐다고? 허어어어어어- 눈치 없음의 한계를 본 듯한 상황에 다니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 진짜 바빠 죽겠는데 그딴 헛소리 할래요? 하기 싫으면 그냥 하기 싫다고 말해요.”
“하기 싫어. 교대해.”
“싫어요. 두 달 후에 봐요.”
“야, 너!!”
수정구에 반응이 사라졌다. 라엘이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은 것이다. 이, 이……! 상황의 심각성도 모르는 눈치 없는 새끼!! 이미 다니엘의 머릿속에는 지난 한 달간 라엘이 제발 와달라고 울부짖던 것을 무시한 자신은 없었다. 통신이 꺼진 수정구에 대고 왁왁거리며 소리쳤지만 허무할 뿐이었다.
다니엘은 차분히 생각해보려 노력했다. 그래, 물론 라엘은 한 달 동안 천천히 그와 친해졌을 테고 설마 아무리 황제라도 처음부터 저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겠지-처음부터 그랬다-. 눈치가 매우 없는 라엘은 못 느꼈을 수도 있겠다고 애써 생각했다.
설마 남색에 취미가 있는 것인가? 황제라는 것이 어디 한 군데 나사가 빠진다고는 하지만 그쪽이었다니. 뭐, 예전에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그 대상이 제가 된 이상 소름이 끼칠 뿐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미모가 범인은 넘보지 못할 정도로 우월하다 해도 남자에게 이러한 관심을 받은 적은 사실 없었다. 관심을 드러낼 이가 없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대놓고 관심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게 하필이면 황제라 대놓고 싫다고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참으로 애석하다.
다 내가 잘난 탓이지. 다니엘은 침대에 몸을 뉘였다. 한숨 자면 어떻게든 해결이 됐으면 좋다고 생각하며 유난히도 피곤한 하루를 마감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저를 찾아오는 레온을 보며 다니엘은 정말로 질려버렸다. 라엘이 수정구에 비명을 지르며 제 멱살을 당장에라도 잡아 흔들듯 어서 오라고 채근하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워어, 소름 돋아…….
멈추지 않는 레온의 방문 횟수를 줄이기 위해 다니엘도 나름대로 궁리했다. 물론 황제라는 신분을 가진 -더러운 권력구조라지, 제길!- 그에게 대놓고 말을 할 수 없었으니 어떻게든 그 자리에 자신이 나가지 않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했다.
밀린 업무를 핑계로 오찬 초대에 왕을 대신 보냈더니 그날은 식사가 끝난 후 30분 만에 헤어졌다고 한다. 제법 쓸 만한 방법이었지만 그래도 제 아버지이자 한 나라의 왕을 매번 이용할 수는 없어서 그냥 그 한 번으로 만족했다- 이래 봬도 왕과 다니엘은 아주 사이가 좋다-.
며칠 전에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침대에서 뒹굴며 쉬기도 했다. 하지만 문이 벌컥 열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오는 레온을 보며 다니엘은 이 방법은 절대로 다시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문병을 온 레온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자신을 내려다봤을 때의 그 눈은 아마 평생을 잊지 못할 것이다. 소름이 오도도 돋는 팔을 애써 쓸어내리며 다니엘의 경각심을 더 높였을 뿐이었다.
정말로 다행인 것은 그의 체류는 더 이상 길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레온만으로 본다면 그는 평생이라도 왕궁에 붙어 있을 기세였지만, 다행히 그의 주변에는 현실 감각이 남아있는 사람이 있었으며 일정을 걱정하여 원래 목적지였던 아난에 약속된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황제에게 고할만한 사람도 있었다. 레온은 어떻게든 기일을 늘려보려 했지만 이미 그 시간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로윈은 그저 머무는 곳이었을 뿐이었고 목적지는 바로 곁에 위치한 아난이었다. 게다가 황제가 직접 내방할 정도로 중요한 일로 방문을 하는 것이었다. 그 기일을 지키는 일이 사실은 더 중요했다. 정신이 팔린 레온에게 주변 사람들이 조바심을 내며 채근하기 시작했다. 원래 일정을 넉넉하게 계획하긴 했지만, 일주일을 머무르기로 했던 로윈에서 이미 한 달 반을 머무른 시점에서 일정은 완전히 꼬여 있었다.
“한 달 정도만 더 늘려봐.”
다니엘이 들었으면 피를 토했을지도 모를 말을 레온은 서슴없이 내뱉었다.
“정말로 무리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내키지 않아.”
“정 그러시다면 차라리 돌아오시는 길에 다시 들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신하의 권유에 레온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나사가 몇 개 빠진 듯한 행동을 하고 있었어도 레온은 황제였다. 마지못해 결국 그러마, 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당연하다는 듯 다니엘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도착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에 곧 다니엘이 나왔다. 다소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오늘도 아름다웠다. 자리를 옮겨 응접실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황제가 말했다.
“며칠 내로 궁을 떠나야 할 것 같다는군.”
“이런 아쉬울 데가…….”
전혀 아쉽지 않았다. 그런 말로 내가 좋아할 줄로 알았다면 그건 크나큰 오예입니다! 해방이다! 만세!! 속으로는 신이 나서 춤을 추는 와중에도 다니엘은 퍽이나 섭섭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레온은 눈에 띌 정도로 잔뜩 기가 죽어있었고 그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괜찮다면 돌아오시는 길에 다시 들러주십시오.”
“내 방문이 그대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의 방문은 언제나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우아하게 미소 짓는 다니엘에게 애써 마주 웃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전처럼 그의 미소에 심장이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가슴이 조이고 온몸의 피가 얼굴에 쏠리는 일도 드물어졌다. 이 정도라면 궁을 떠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아직도 그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는 처음 만났던 분수 앞의 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어쩔 수 있겠는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로윈에 들른다 하더라도 그가 평생을 이곳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헤어짐을 목전에 두면 그만큼 괴로워질 것이다. 다니엘을 제국으로 불러들일 수도 없다. 그는 로윈의 왕자였고 후계자였다. 제 나라를 가지고 다스릴 군주였다. 결국 이런 식으로 영영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당연한 사실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 괴로운 것인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니엘의 한마디에 시야가 갑자기 환해진 것 같았다. 세계가 잠시 멈춘 듯한 착각마저 들며 그는 깨달았다. 심장은 여전히 평온했다. 하지만 진실은 자신이 쥐고 있었다.
그는 다니엘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다시 세계가 움직였다.
레온이 다니엘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레온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의 황제가 로윈의 왕자에게 기묘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도를 넘어선 지나친 수준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레온은 오직 다니엘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한 이유만으로 한 달 반을 투자하였고 그 오랜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만나러 갔는데 그걸 눈치를 못 채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바보 중에서도 가장 바보인 레온은 제 방에서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을 하고 있었다. 다니엘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고, 그가 미소 지을 때는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행복감을 느꼈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순간은 만족감으로 가득했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천상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레온은 웃었다. 어쩜 이리도 바보 같을까.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에 눈이 가려 이렇게 확연한 감정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니. 아니, 이미 상대가 남자라는 사실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태도로 자신은 그를 대하고 있지 않았는가. 매일같이 그를 찾아가고 그의 앞에서는 아름다운 말만을 골라서 했고 헤어지기 싫어 제 마음속에 수없는 핑계를 담았다. 그렇게 그를 대하고서는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닫다니!
레온은 한숨 쉬었다. 그렇다 한들 어찌하겠는가. 자신은 결코 그를 얻을 수 없다. 그는 남자였고 한 왕국의 왕자였으며 앞으로 왕이 되어 제 나라를 통치할 것이다. 군주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는 제 곁에 있을 남자가 아니었다. 다니엘은 절대로 제 나라를 버리지 않는다.
아니, 그런 상황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다니엘이 가진 것 하나 없는 평민이라 하더라도 그는 제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다니엘이 제게 상냥한 태도를 취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는 전혀 아니었다. 그는 황제인 자신을 접대하는 것일 뿐, 그 미소에는 어떠한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았다. 아무리 반쯤 눈이 먼 채로 그를 대했다지만 그런 것을 깨닫지 못할 만큼의 바보도 아니었다.
괴롭게 조여 드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다니엘의 미소가 떠올랐다. 처음 만났던 순간 유난히도 까맣게 빛나던 그 눈이 생각났고, 보석처럼 떨어지던 물줄기 앞에서 그보다 더 눈부셨던 그의 실루엣이 떠올랐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희게 빛나는 그의 볼이 떠오르고 시원하게 웃는 그의 흰 이가 생각난다. 다시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뜨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슴을 부여잡자 괴로운 신음 소리만이 뱉어진다.
레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 근래 그의 앞에서 바보같이 뛰던 심장이 잠잠해져서 정말로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를 향한 마음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더 커져있었다. 오갈 데 없는 그 마음을 어떻게든 진정을 시켜야 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재빠르게 시종이 다가왔다.
“왕자님께 뫼실까요?”
당연하다는 듯 묻는 시종에게 레온은 피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낱 시종도 알고 있는 것을, 나는…….
“아니, 오늘은 왕께 가보겠다. 안내해다오.”
당연히 다니엘에게 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다른 답이 나온 것이 의외였는지 시종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하지만 곧 왕의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그저 황제가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드디어 왕에게 인사라도 하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왕에게 안내를 하고 황제의 방문을 알리자 곧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보이는 왕은 의외의 손님의 방문에 놀란 표정이었다. 혈육이라 그런지 그 얼굴에서 다니엘이 연상되었다. 참으로 중증이라 생각하면서도 그는 문을 닫고 웃어 보였다.
그를 통째로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단 한 순간의 추억이라도 가지고 싶었다. 이런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알게 된다면 다니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