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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관 1부
그림자 왕관 1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디로 돌아가고 싶어?”
“오…. 제게 선택권이 있나요?”
“물론, 상상일 뿐이니까.”
“그럼 전 이쪽 세계로 오기 전으로 돌리고 싶네요.”
“음…. 일단 그건 빼면?”
“그럼 왕자님을 만나기 전으로요.”
“왜!”
“지금 앞에 쌓여 있는 서류부터 보고 말씀하시죠?”
“….”
1. 왕자와 그림자 ~The Prince and shadow~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었다.
“혹시 죽었어?”
“아직요.”
비에 푹 젖어 거적때기처럼 늘어진 남자에게 다니엘이 물었다. 답은 의외로 금세 돌아왔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이미 죽은 것은 아닌가 싶어 예의상 물어본 것이었는데…….
시체라도 치워 줄 요량의 친절이 다른 종류의 것으로 바뀌었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답이 돌아오는 순간 다니엘은 잠시 고민했다.
“구해 주길 바라?”
“무척이요.”
간결하고 명료하기까지 한 답이었다.
꼬박꼬박 돌아오는 답이 어쩐지 즐거워져서 다니엘은 남자를 거두기로 마음먹었다. 남자는 자신의 마음에 꼭 들었고 본인도 제게 구해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를 거두기로 결심한 것은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다니엘은 무척 무료했다. 한 몸뚱이로 두 군데나 적을 두고 있는데도 무료하다는 것은 얼마나 부조리한 일인가.
“내가 반쯤은 널 구해 주기로 마음먹긴 했는데 말이야.”
“구해 주기로 한 거면 한 거고, 아니면 아니지 ‘하긴 했는데’는 또 뭐래요?”
“그래, 이 말대답이 정말로 즐거워서 마음은 먹었는데 사실 내가 보통 사람은 아니야.”
“그런 식으로 치면 저도 만만찮게 보통 사람은 아니에요.”
“너 말대답 꼬박꼬박 한다?”
“거둬 주신다면 말대답을 줄일게요.”
“아니 굉장히 마음에 든다고.”
다니엘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지저분한 골목에 울려 퍼졌다. 빗소리에 곧 지워졌지만 굉장히 듣기 좋았다.
“그래서 절 살려주실 건가요?”
“네가 널 살렸지.”
“역시 제가 좀 쓸 만하네요.”
“앞으로 더 쓸 만해져야 할 거야.”
다니엘은 남자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힘주어 단단하게 붙잡았지만 남자는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한다. 빗속에 푹 젖은 채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지저분한 남자를 부축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걸레 조각을 집는 기분이라 다니엘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일단 그 걸레 같은 로브를 좀 벗어. 설마 안에 아무것도 안 입고 있는 건 아니지?”
“다행히도 옷은 입고 있어요. 그런데 상태가 별로 다르진 않을걸요.”
“그럼 벗어.”
비가 철철 내리는 와중에 유일한 비 막이가 돼 주고 있는 로브를 벗으라는 다니엘도 다니엘이었지만 남자도 서슴없이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지금까지 이불 겸 비 막이 겸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로브를 벗어던진 남자는 생각보다 말끔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그리고 도가 지나친 말끔함에 다니엘의 눈이 커졌다.
“……너…….”
“……어, 어라…….”
다니엘과 남자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시끄러울 정도로 끊이지 않던 대화가 끊기고, 두 사람 사이로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요란했다. 한참의 침묵이 지나고 간신히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와우, 진짜로 보통 사람은 아니었네?”
“이, 이야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리되는 상황에 남자도 감탄사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다니엘과 남자는 쌍둥이처럼 꼭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정말 닮았네요.”
“닮은 정도가 아니라 의심이 될 정도야. 나한테 쌍둥이 형제가 있던 건 아닐까? 출생의 비밀이라던가.”
“아니, 그건 절대로 아니라고 봐요.”
“일단 저 대책 없이 자신감 넘치는 대답까지 단장을 꼭 닮았습니다.”
부단장의 감탄인지 탄식인지 헷갈리는 대답에 다니엘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재빠르게 다른 쪽을 보고 딴청을 피우는 것이 한두 번 딴죽을 걸어 본 솜씨는 또 아니다.
남자는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다니엘이 그를 데리고 온 곳은 용병단이었다. 평범하게 용병단이라고 칭하기에는 미안할 정도로 큰 곳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뒷골목을 전전하며 비렁뱅이 생활까지 한 남자마저 몇 번을 들은 적 있는 굉장히 잘나가는 용병단이었다.
앞에 붙는 수식이 대단하고 거창했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용병단의 단장이 무척 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은 아주 유명했으니까. 게다가 대화를 들어보니 다니엘은 바로 그 유명한 용병단장인 것 같다. 그 성격 파탄 난 용병단장 말이다. 그 아래로 거둬진 입장에서는 역시 신경 쓰이는 사실이었다. 괜히 말이라도 함부로 했다가 저 성격 더러운 단장에게 버려지면 곤란한 것은 또 저였기에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단장님과 꼭 닮은 남자를 찾았다는 것은 알겠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왜?”
“대체 어디에서 일하게 하려는 겁니까?”
훈련을 받기는커녕 교육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뒷골목의 거지를 주워 왔으니 특기나 잘하는 일을 기대할 수도 없었고 어떻게든 교육을 시켜 써먹으려 해도 다니엘과 남자의 얼굴은 꼭 같았다.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는 듯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내 대타.”
“네?”
“네?”
부단장과 남자의 답이 동시에 돌아왔다. 대타라면 그거죠? 이 사람을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람 말입니다. 아무리 얼굴이 같고 키도 같고 목소리-부단장의 말에 따르면-도 같다지만 그렇다고 생판 첨 보는 길에서 주운 남자에게 자기의 대타를 맡긴다고요? ‘대체 뭘 믿고?’라기보다는 ‘대체 어떻게?’라는 말이 더 먼저 튀어나오는 개성 넘치는 발상이었다. 두 남자가 황당해하는 가운데 다니엘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양쪽을 오가느라 요즘 좀 많이 바빴잖아. 슬슬 저쪽에 핑계를 대는 것이 힘들었는데 이쯤 되면 신께서 나를 굽어살핀다고 생각을 해도 되지 않을까?”
“제가 단장을 만난 후 느낀 것은 신께서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합리한 사고도 가지고 계신다는 겁니다.”
“신성모독으로 잡혀간다, 너.”
“고발해 보십쇼. 그냥 아주 단장까지 깡그리 끌고 갈 테니까.”
“저기요……?”
순식간에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튀어 가자 당황한 것은 남자였다. 지금 신성모독이 문제가 아닙니다만? 그리고 남자는 서둘러 물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자연스럽게 다니엘의 대타가 되게 생겼다.
“제 뭘 믿고 당신의 대타를 시킨다고 하는 건가요?”
“그 얼굴을 믿고!”
“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그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치고 능력 없는 사람은 없거든? 지금부터 어떻게든 하면 될 거라고 믿어!”
그 얼굴이 일단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단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만……. 자신감 넘치는 다니엘의 대답에 남자는 오히려 당황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남자는 부단장을 애타게 돌아봤다. 저쪽도 별로 상태가 좋지는 않은 것 같지만 눈앞의 잘생긴 멍청이보다는 덜 상한 것 같으니 매달릴 데라곤 저기밖에 없었다. 매달려서 뭘 어쩔 수 있겠냐마는 저 말이 현실이 되는 건 아니라는 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부단장은 눈을 슬그머니 피하며 고개를 돌렸고 다니엘이 남자의 어깨를 붙잡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읊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자신은 주워진 몸이었고 다니엘은 그를 주워 준 사람이었으며 보아하니 명성까지 자자하고 돈도 힘도 있었다. 선택지라곤 본인에게 전혀 없음을 한탄하며 남자는 다니엘의 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참으로 장대한 헛소리였는데……. 듣다 보니 꽤나 이상했다. 분명히 다니엘의 신분은 용병단의 단장일 터인데……. 어째서 귀족의 무도회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유명한 용병단이란 귀족도 상대해야 하는 것인가. 혼란스러워져 결국 남자는 다니엘의 말을 막았다.
“……그래서 대체 제가 해야 할 역할이 뭔가요?”
“내가 사실 직업이 두 개라서 말이야. 너도 그 두 직업을 다 배워야 해.”
“그건 알겠습니다만……. 그래서 다른 직업은 뭔가요?”
“왕자.”
“……네???”
이건 무슨 개소리람.
“넌 이제부터 왕자 겸 용병단의 단장을 대신해야 해.”
남자는 당황했다. 다니엘을 만나 참 많이도 놀라고 당황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놀랄 일이 있었을 줄이야. 이건 무슨 신개념 괴롭힘이냐며 아련한 눈빛으로 부단장을 보며 입모양으로 물었다. ‘진짜 왕자 맞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모양으로 답했다. ‘다행히도 나라는 안 망했어.’ 확인 사살을 당한 남자는 더욱 당황했다.
“그런데 제 의사는 안 물어봐요?”
“물어볼 필요가 있어? 그런데 우리 통성명도 안 했네.”
“……통성명보다 중요한 걸 방금 짓밟으셨는데요.”
“그래서 네 이름은 뭔데?”
남자의 허락을 비가 내리는 땅바닥에 내던지고 꾹꾹 눌러 밟은 다니엘이 해맑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비 오는 날에 사람을 함부로 줍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비 오는 날에 사람에게 함부로 주워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또 몰랐지. 역시 세상은 살아봐야 아는 일이었다.
곧 죽어도 답을 들어야겠다는 태도는 일반적인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만들었다. 결국 남자는 답을 해야 했다.
“아쉽게도 알려 줄만한 이름은 없어요.”
어차피 남자의 이름은 제 세상에서나 부를 수 있는 발음이었다. 막 도착한 후 멋모를 때 그 이름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었다. 남자의 이름은 그 존재만큼이나 이 세상에서는 낯설었다. 그래서 남자는 제 본래의 이름이 누군가에게 불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래? 그럼 내 이름 하나 가져.”
“……네?”
“라엘이야. 어때?”
“저기요?”
“용병단장으로 있을 때 쓰는 이름이지만 사람이 이름을 두 개나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나. 그러니까 이 이름은 네가 가지면 되겠다.”
“……우와…….”
이제는 경악을 넘어서 감탄스러웠다. 당황스럽게 제 페이스를 밀어붙이는 다니엘에게 남자는 제대로 된 답변조차 하지 못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남자는 라엘이라는 이름을 강요당했고 어쩔 수 없는 권력의 힘으로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다니엘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어때, 꼭 형제 같은 이름이지?”
다시 고개를 돌려 부단장을 봤다. 전혀 쓸모없는, 도움이 되지 않는 그였지만 적어도 이 순간 크게 떠오르는 궁금증에 대한 답변 정도는 해 줄 수 있겠지.
“이분, 원래 이래요?”
부단장이 해맑게 웃었다. 그의 얼굴은 답을 담고 있었다. ‘원래 그래’, 다니엘에게 주워지기 전에는 신과 세상을 원망한 남자, 라엘이었지만 이제는 그냥 그 신의 상태가 걱정됐다. 지금 세상이 제대로 굴러가는 것 같지가 않은데 정말로 괜찮습니까?
억지로 이름과 왕자 자리를 강요당한 라엘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거절해 봤자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굶주림과 절망뿐이었고, 다니엘은 제 뜻을 강요하는 것을 제외하면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줄 사람이었다.
가장 필요했던 신분과 머물 곳. 이전에는 그것이 소중한 줄 몰랐었다. 당연히 주어져 있던 것이고 이런 식으로 갑자기 제 손에서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허나 운명은 제 삶을 어떻게든 뒤틀고 싶었던 것인지 그를 낯선 이곳으로 떨어뜨렸고 그리고 그는 난생처음 절망을 맛보았다.
지난 뒷골목에서의 생활이 생각나자 왠지 손에 땀이 차는 기분이었다. 손을 쥐었다 펴며 긴장을 푸는데 다니엘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두드렸다. 참 다른 목소리라고 생각하는데 부단장의 말로는 꼭 하나같은 목소리라고 한다. 그건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너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했잖아?”
“그랬죠.”
“혹시 너도 어느 나라의 왕자 정도 되는 건 아니지?”
그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다니엘이 말했다. 그는 앞으로 라엘을 단단히 부려먹을 생각이었고 그런 라엘이 어느 나라의 왕자라면 마음껏 부려먹기에는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빤히 보였다.
“어떤 왕자가 뒷골목에서 비렁뱅이 짓을 하는 변태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있겠어요?”
“용병단장을 하는 취미를 가진 왕자는 있지만 말이죠.”
부단장이 슥 끼어들자 다니엘의 표정이 다시 불편해졌다. 하지만 궁금했던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라엘에게 답을 재촉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믿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결국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대륙 너머 말이야?”
세계라 하니 와 닿지 않았는지 다니엘이 되물었다.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라엘 본인도 이쪽 세계로 오기 전까지는 이런 곳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아주 다른 곳이에요. 사람도, 대륙도, 신도 다른 곳…….”
아무도 믿지 않았기에 결국 입을 다물게 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왠지 눈앞의 다니엘은 자신의 말을 믿어 줄 것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생겼다.
다니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기에 라엘도 그가 그것을 믿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거짓말쟁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저 제가 살던 곳이 이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다니엘이 물었다.
“그곳으로 돌아갈 거야?”
“뭐……. 방법이 없어요.”
“그렇다면 무슨 상관이지? 자, 그럼 넌 이제부터 내 그림자가 되는 거야.”
“……허…….”
뭐랄까……. 여러 가지로 라엘에게 중요한 것을 내팽개치는 다니엘이었다.
“불만 있어?”
“아니요.”
있다고 해도 들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묻기는 꼬박꼬박 묻는다.
“그럼 잘 부탁해!”
내밀어진 손을 얼떨결에 붙잡았다. 저기 제가 방금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꺼냈는데 그건 어디로……. 하지만 위아래로 흔들리는 손에 고민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내 일은 아니잖아? 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참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는 왕자님인 것 같은데 이 왕국은 괜찮은 것인가? 당황스럽긴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은 자신도 문제라면 더 문제였지만.
라엘이 다니엘의 완벽한 대역이 되는 데에는 딱 2년이 걸렸다.
본디 놀라울 만치 닮아 있던 생물학적 부분에 대한 것은 그다지 다듬을 필요는 없었다. 본래 라엘은 키가 크고 몸이 좋은 편이었다. 예정에 없던 뒷골목 생활로 몸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본바탕은 어쨌거나 훌륭했고 잘 먹고 열심히 운동을 하니 몸 상태는 금세 호전됐다. 건강해진 라엘의 체격은 그마저도 꼭 다니엘과 같았다.
“너 진짜 어렸을 때 어디서 주워 온 건…….”
“절대로 그렇지 않거든요. 세계 자체가 다른데 이젠 좀!”
“그래도 이 정도로 똑같으니까……. 이렇게 잘난 내가 또 있을 줄은 정말로 몰랐거든. 역시 신은 나 같은 존재를 하나만 두기에는 아까웠음이 분명해.”
“그 개소리를 신이 들었다면 당장 신벌이라도 내리셨을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이쪽 세계의 신은 휴업 중인 것 같네요. 하긴, 원래 세계 쪽 신도 딱히 일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신관들이 들으면 당장에 그를 붙잡아 화형대에 매달 소리를 서슴없이 내뱉었다. 하지만 이해해 줘야 한다. 라엘은 신에게 굉장히 불만이 많았다. 저를 데려온 것이 어디의 신인지 모르니 일단 둘 다 저격을 하고 보는 것이다.
라엘의 외견은 금세 다니엘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같아졌다. 문제는 내용물이었다.
얄미울 정도로 남의 복장 터뜨리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부분만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다니엘도 굉장히 흡족해하는-부단장은 매우 우울해하는- 부분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 다니엘의 대타를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병단의 단장은 어떻게든 커버를 할 수 있겠지만, 일국의 왕자로서는 아니었다.
왕자로서의 예와 지식을 익히는 과정은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고된 과정 중에 라엘은 진심으로 다니엘의 피를 보고 싶은 욕망을 억누르기 힘들어 했다. 부단장이 결사적으로 말리지 않았다면 라엘은 살인미수로 성벽 아래에 목이 매달렸을지도 모르겠다. 살인이 아닌 살인미수인 것은, 저 인간이 죽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러나저러나 라엘은 본인도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모든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그리고 꼭 2년째가 됐을 때는 왕궁 안에서 라엘과 다니엘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부왕마저도 제 아들이 바뀐지 모르고 있었으니 가히 완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었다.
제 아비도 못 알아보는데 신하들은 오죽하겠는가. 어쩌다 라엘이 실수를 했다손 쳐도 ‘아, 오늘은 왕자님께서 컨디션이 별로신가 보다.’하고 그냥 지나치는 것이었다.
이젠 다니엘의 패턴을, 원치는 않지만 생존의 본능으로 파악한 라엘은 심지어 왕자의 업무까지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뭔가를 결정할 일이 생기면 ‘왕자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하고 그에 맞춰 일을 마무리했다.
처음으로 두 달간 장기적으로 자리를 비운 다니엘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 결과를 보고 매우 흡족해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다섯 달을 성을 비웠다.
라엘은 집무실의 책상을 뒤집어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