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고향을 떠나온 아쉬움을 카론의 몸을 통해 떨치고자 한 지 열흘이 지났다. 밤마다 내내 알몸으로 뒹군 탓에 허리가 녹진녹진 녹아들었다. 아침부터 나른하고 노곤한 채로 손으로 뜨끈한 수프를 떠올리던 채운은 문득 오늘이 며칠인지 궁금했다.
“며칠이지요?”
“오늘 말씀입니까?”
차를 따라주던 그렌이 말한 날짜에 채운은 그만 수프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쨍그랑.
떨어진 숟가락을 주워 올리는 일은 당연히 팔이 긴 카론의 몫이었다. 아침부터 식욕이 왕성하신 폐하께서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고기를 씹으면서 눈빛으로 의문을 표했다.
“지났잖아!”
“네, 지났지요. 그것도 한참 전에.”
그리 답한 건 그렌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카론의 빈 잔에 술과 차를 섞은 차가운 음료를 따랐다.
“뭐가?”
“온이를 위한 연회 말입니다. 태어난 지 백 번째 되는 날에 해야 하는데!”
“난 또. 벌써 한참 전에 지난 일이잖아.”
“알았습니까? 그런데 말을 안 했지요?”
“네게 맡긴 일이니까.”
그걸 말이라고. 인상을 쓰자 카론이 포크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뻔뻔하게 씩 웃는 바람에 화도 못 내었다. 그의 말마따나 채운이 맡은 일이었고 잊은 사람도 채운이었다. 한꺼번에 황궁 내의 일에 이것저것 손을 대었고 요정학교 일도 있고 또 누님과의 재회로 깡그리 잊어버렸다. 무엇보다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저 황제 놈의 아랫도리 덕분에 한시도 몸이 편할 날이 없었던 탓도 크다.
“바로 날짜만 정해주시면 바로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적어도 열흘은 필요합니다. 그래야 제도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의 귀빈이 오실 수 있습니다.”
밥을 먹다 말고 날짜를 정했다. 이곳 관습상 불길한 징조가 없는 날, 날씨가 괜찮을 날, 다른 특별한 사유가 없는 날 등등을 따져 보름 뒤로 정했다.
“먹을 때가 아닙니다.”
“보름 뒤야. 당장 식사를 거른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달라져?”
“다릅니다.”
식욕이 없는 날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진수성찬을 즐기는 카론을 뒤로하고 채운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자와 앤지를 내 서재로 부릅니다.”
그렌에게 알린 후에 곧장 마그네를 찾았다. 막 레온을 먹이고 목욕을 시킨 마그네는 기다렸다는 듯이 보송한 아기를 채운에게 안겼다. 온은 고개를 가누며 함빡 웃었다.
“우리 온이. 기분이 좋습니까?”
사랑스러운 아이의 뺨에 입술을 맞추고 젖내나는 솜털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마그네에게 잊었던 연회에 대해 알렸다.
“하실 때가 지났지요.”
“마그네도 알고 있었어.”
정말로 채운만 몰랐다.
“이래서야 새나비 자격이 없구나.”
자책하면서도 한편으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약간 화도 났다. 그러나 역정을 낼 자격이 없다. 이런저런 일을 잔뜩 벌인 것도 채운이고, 잊은 것도 채운이었다. 오히려 소임을 다 하지 못한 것을 흰 눈으로 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 * *
일전에 연회에 사용할 새 옷과 각종 장식용 휘장을 만들라던 명령을 들은 리자는 채운이 잊은 중에도 부지런히 손을 놀려 대부분을 완성했다. 새로 지은 옷을 입어보고 손을 더 대야 하는 부분을 알아보기만 하면 되었다.
귀빈 명단은 그렌과 올리아, 그리고 아서경과 상의하여 정했다. 나중에 카론에게 명단을 주었다.
“흐음.”
“빠진 사람 없습니까?”
“없는 것 같은데. 뭐 있으면 어때. 네가 관심을 두지 않을 만큼 하찮은 존재라는 뜻이겠지.”
씩 웃으면서 명단을 돌려주는 바람에 도리어 걱정이 커졌다.
“황후가 되어 처음 여는 연회입니다. 좋게 보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조르는 데도 카론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이보십시오, 채운 아가르타 황후 폐하. 폐하의 사고방식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뭡니까?”
갑자기 태도를 지적하다니. 한 번에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대하는 태도가 얄미웠다.
“채운, 너는 황후야. 그것도 황제를 제 것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 대단한 권력자지.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저들이야. 명단에 들면 네가 관심을 줘서 뛸 듯이 기뻐할 거고, 명단에 들지 못하면 네 관심을 그리워하며 전전긍긍해야 할 사람도 저들이다. 평가는 네가 하는 거야. 그러니 네가 정한 이상 명단은 이대로 완벽한 거야.”
“아.”
황궁은 거대하였으나,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채운은 그렌과 아서, 가끔 베로니카 외에는 다른 특별한 귀족을 만난 일이 드물었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황후의 위에 올랐어도 권력과 위상을 제대로 실감하지 못했다. 카론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제국의 황후라는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막중한 자리를 어떻게 감당할지. 초대 명단에 들고 안 들고에 따라 귀족들이 머리를 싸맬지도 모른다고 하니 도리어 걱정만 커졌다. 저도 모르게 굳은 얼굴로 명단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직 발음도 어설픈, 낯선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작위와 서열을 꼼꼼히 확인했다.
“황제를 시종 취급하시는 분이 귀족 따위에게 그렇게 신경 쓰다니. 어쩐지 서운한걸.”
이럴 때마다 도움이 전혀 안 되는 부군 황제가 채운에게 엉겨 붙었다. 뒤에서부터 채운을 감싼 그는 관자놀이며 뺨이며 입술을 문지르면서 귀찮게 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에 무시하다가 이내 귓바퀴를 잘근 씹는 바람에 결국 고개를 돌려 그는 노려봤다.
눈을 흘기는 대도 카론은 기분이 좋은지 씩 웃었다.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신경이 쓰입니다.”
목에 입술을 쪽쪽 맞추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런 놈들보다는 그런 놈들의 주인인 나를 신경 써줘. 그 보답으로 놈들을 바짝 엎드리게 할 테니. 그게 더 빠르지 않을까?”
“무섭게 하기 싫어요. 존경받고 싶습니다.”
“무서워야 존경하지.”
“달라요.”
“그럼 안 무서운 놈을 존경하는 자도 있나?”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섭지 않아요. 그렇지만 존경합니다. 황제는 그러해야 해요.”
“흐음. 나는 엄마는 내 앞에서 죽고 아빠는 내 손으로 죽인 개자식이라 잘 모르겠는걸?”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온 대답에 채운은 입을 쩍 벌렸다. 맞는 말이지만 제 입으로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할 얘기가 아니지 않나. 뭐라고 꾸짖을까, 혹은 타이를까 고민했다. 하지만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벌린 입을 벙끗거리다가 차라리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요.”
채운이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어깨에 턱을 올린 카론은 정작 아무렇지도 않았다.
“네가 왜 미안하지?”
“폐하는 다른 사람과 달라요. 그걸 깜빡 잊었습니다.”
“잊어서 미안하단 건가? 그보다는 나를 심심하게 두는 쪽을 미안해했으면 좋겠는데.”
못된 손이 슬금슬금 몸을 더듬었다. 평소 같으면 대번에 찰싹 때렸겠지만, 지금은 그러기 어려웠다. 하필 부모 얘길 꺼내다니.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못된 손이 멈추었다. 명단만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어깨너머로 명단을 똑같이 보고 있던 카론이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레온을 소개하는 연회야. 내 사랑스러운 아들 말이야. 존경보다는 저들에게 경고하고 싶다.”
“경고라니요?”
“내 아들에게 더러운 손을 대는 자, 내 아들에게 나쁜 것을 보여주는 자, 내 아들의 불운을 바라는 자, 그 외에 레온을 시기, 질투하거나 혹은 무시, 힐난하는 자에게 말이지. 내 아들에게 조그만 불행이라도 초래할 시에는….”
뒷말은 듣지 않아도 가히 상상이 갔다.
“보호 아래에서만 자란 아이는 연약합니다. 부모가 평생 아이를 지켜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강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건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얘기잖아. 지금은 아기라고. 말도 못 하고 걷지도 못해. 아기는 스스로 지킬 수 없어.”
과도하게 싸고돌아 건방지고 못되고 무능력한 자식으로 자랄까 봐서 살짝 걱정되었다. 강한 아버지의 후광만 등에 업고 심신단련을 게을리하여 암군(暗君)이 되는 자도 더러 있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카론을 돌아보았다. 걱정스러운 입술 위에 따뜻한 숨결이 포개졌다.
“내 부모는, 부모라고 부를 수 있는지 둘째치고 나를 벌레처럼 다루었어. 나는 그러지 않을 거다. 조금도 소리치지 않을 거고 매를 들지도 않을 거야. 항상 예뻐만 할 거다. 그러니 내게 무서운 아버지 역할을 바라지 마.”
“그럼 잘못을 했을 때는 어떻게 하지요?”
“네가 있잖아. 혼내는 건 네 몫이야.”
“폐하처럼 대단한 어른으로 자라 제가 혼낼 수 없게 되면요?”
“나도 수시로 네게 혼나는데 네가 레온을 혼낼 수 없게 될 리가.”
코웃음이 돌아왔다.
“소금 목욕 잊었어?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등짝이 서늘한데 말이야.”
짐짓 무섭다는 듯이 어깨를 떠는 카론을 향해 다시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그때는 혼날 만했습니다.”
“그러니까 레온도 네가 충분히 다룰 수 있을 거야.”
어쩐지 요즘 들어 대화할 때마다 카론에게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영 틀린 얘긴 아니므로 채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명단은 그대로 확정했다. 그것만으로도 귀빈이 무척 많았다.
명단을 정할 때는 유유자적하며 한가로운 척하던 카론은 막상 연회명단이 정해지자 그들이 머무를 장소에 관해서는 대단히 깐깐하게 굴었다. 충성도에 따라 방을 배치하고 또한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자인 경우, 지켜보기 쉬운 방을 배정했다. 경호를 위해 기사단도 대거 동원했는데, 말이 경호지 사실상 감시나 다름없었다.
실지로 연회장을 꾸미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은 그렌이 맡았고 채운은 그가 내미는 선택지를 고르면서 실제로 연회장을 둘러보고, 음식 맛을 보며 최종 결정을 내렸다.
보름이라고는 하나 거대한 연회를 준비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연회를 하루 앞두었을 때는 너무 지쳐서 꼼짝도 하기 싫은 지경이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전날 저녁, 채운은 완전히 지쳐서 이른 저녁부터 길고 푹신한 의자에 늘어졌다.
“백일 연회가 이렇게 힘이 들다니. 한 살 생일 연회는 어떻게 할지.”
앞으로 다가올 돌잔치를 생각하니 눈앞에 깜깜했다. 새나비의 고생은 하나도 모르는 온은 그저 마그네의 품에서 좋다고 까르르 웃었다. 작은 손을 곰실곰실 움직이던 아이는 맞은 편에 누워있는 채운을 신비로운 감청색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품에 안고 싶었다.
“이리로.”
마그네에게서 건네받은 온은 부쩍 무거워져 있었다. 예전에는 어깨에 살짝 걸치면 한쪽 팔로도 안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양팔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한쪽 팔로만 안는 건 카론이나 가능했다.
젖내가 가득 나는 아기는 제 아비가 그러듯 채운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다른 점은 아비와 달리 못된 짓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좋다고 매달리는 것이었다. 아기를 안은 채로 소파의 두툼한 등받이 위로 기댔다.
아기 이불을 덮고 나자 온도 졸린지, 눈을 깜빡였다.
“지금 자면 밤에 자지 않는데.”
조금이라도 더 늦게 재워야 하는데. 젖내 솔솔 나는 아기를 가슴에 얹자 어쩐지 채운도 졸렸다.
언제 잠들었을까. 몸이 둥실 떠오르는 감각에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단단한 팔이 채운을 안아 올리는 동시에 채운은 제 품에 안긴 아이를 꼭 껴안았다. 채운과 온을 동시에 들어 올리고도 별로 힘든 기색이 없는 상대는 곧 둘을 침대에 내려놓았다.
온기가 없어 서늘한 침대 때문에 정신이 들었다. 눈을 살며시 뜨자 등불에 비친 금발이 보였다.
“흐음. 카론?”
“깼나?”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이마에 입술이 내려앉았다. 뒤이어 옆으로 내려놓은 온을 도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침대에 잠시 걸터앉았던 카론이 몸을 일으켰다.
“가지 말아요.”
“경계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해.”
전에 태손이 급습했던 이후로 카론은 밤마다 직접 황궁을 점검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황제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과연 안전한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독 같은 것에 당하기라도 하면. 아서 경에게 맡기면 어떻겠냐고 했다가 전에 아서에게 맡겼다가 당했다고 절대로 다시 못 맡긴다고 단언했다. 쓸모없는 아서 놈이라고 어찌나 욕하던지. 두 번은 말하지 못했다.
“함께 있으면 안 돼요?”
잠결이라 그런지 물어보는 음성이 유달리 힘이 없었다.
“꼭 직접 해야 해요? 다른 사람은 없어?”
애원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보니 저런 말도 하게 되었다.
“흐음.”
침통한 목울음이 들렸다. 대단히 갈등한다는 의미였다.
“실력만 따지면 맡길 놈이 하나 있긴 한데.”
“그럼 그 사람에게 맡겨요.”
“오늘까지만 내가 하고 다음부터는 고려해 보지. 금방 끝내고 돌아오겠다.”
“빨리 와요.”
막 일어섰던 카론은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쳤다. 따뜻한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짧지만 깊은 입맞춤을 끝낸 후에 카론은 “자지 말고 기다려.”라는, 따르기 힘든 부탁을 남기고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기를 품은 남자가 침대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그가 뻗은 손에 뺨을 올렸다. 엄지가 눈썹 언저리를 훑었다. 세상모르고 곤히 자는 아기를 가운데 두고 서로를 보듬자 저절로 둥지가 만들어졌다. 따끈하고 푸근한 둥지에 누워 채운은 다시금 곤한 잠에 빠졌다.
* * *
귀빈은 이른 아침부터 도착했다. 어떤 자는 밤사이에 도착하여서 자고 일어나자마자 마그네를 통해서 도착 소식을 듣기도 했다. 이런 큰 연회에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은 자도 제법 있을 법했다. 그런데 늦기는커녕, 이른 오후가 되어서는 벌써 방이 꽉 찼다.
눈을 뜬 순간부터 카론을 보지 못했다. 이른 새벽부터 황궁에 들락이는 자들이 많아 신경이 곤두서서 황궁을 둘러보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으나, 일전에 있었던 사건이 아직도 생생하기에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먼 곳에서부터 온 지방 영주와 귀족이 많아 연회가 끝나고도 적어도 일주일은 황궁 혹은 제도에서 머무르며 서로 만나서 안부를 묻고 대화를 나눌 예정이었다. 채 연회가 열리기도 전에 황제와 황후 앞으로 들어온 개별적인 알현 신청을 다 받아준다면 일주일 내내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다 만나야 합니까?”
차를 따르는 그렌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중에 만나고 싶은 자만 특별히 몇 명 고르시면 됩니다. 또 서로 친분이 있는 자들끼리는 한 번에 만나는 방법도 있습니다.”
“연회와 알현이 아니면 그들은 무엇을 하지요?”
“황궁을 구경하고 삼삼오오 모여 인맥을 쌓습니다. 두 분 폐하를 개별적으로 알현하지 못하는 자들은 다른 귀족들을 만나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간 폐하께서 개인이 여는 연회를 금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저들도 서로 만나고 싶어 안달 났지요. 연회는 중요한 사교의 장입니다. 이렇게 많은 귀족이 한 번에 보이는 경우는 잘 없으니까요.”
개별 연회를 왜 금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끼리끼리 모여 작당을 하는 걸 경계했을 터. 따뜻한 차로 밤새 굳은 목을 풀던 채운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번을 기회로 앞으로 폐하께서 연회에 너그러워지길 기대하나요?”
“그렇습니다, 폐하.”
“그렇다면 귀족은 내 기분에 맞는 말만 하겠군요.”
“예. 폐하의 기분을 맞추며 연회 분위기를 주도하는 자가 권력을 지닙니다. 달콤한 말과 재미있는 재주를 가진 자를 경계하십시오.”
그렌이 고언을 올렸다.
제국의 황후로서 연회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어렴풋이 감이 왔다. 신하의 노고를 치하하며 성은을 베푸는 신국의 연회와 달랐다. 사제 간으로 이루어진 학파와 피를 나눈 가문을 따라 세를 형성하는 신국과 달리, 이곳은 연회에서 황제, 황후의 흥을 돋우고 눈길을 끄는 자가 힘을 가졌다.
‘얼마나 유치하고 저열한 습성이란 말인가. 군주를 즐겁게 하는 광대일수록 권력을 잡는다니.’
악심을 품고서라도 명분과 논리를 앞세우는 신국의 탐관오리와는 궤가 전혀 달랐다. 서자와 얼자 또한 취급하지 않으며 오로지 혈통만을 앞세워 막대한 재산을 대물림하면서 오만한 성정만 키운 자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습성을 가진 귀족을 상대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지 막막했다. 카론의 말대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방법이 더 빠를까?
‘아니야. 벌써 겁을 먹고 뺄 순 없지. 제국 성립 초기이니 나쁜 습관을 고쳐보는 거야.’
개망나니나 다름없는 저 카론도 어떻게든 고쳐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고작 아랫것을 무서워해서야 아무것도 이를 수 없다. 한번 눈치를 보기 시작하면 무를 수 없는 법. 장차 황위에 오를 온을 위해서라도 초장부터 나쁜 관습은 뿌리 뽑아야 한다.
굳건한 의지를 다지면서 채운은 기운을 내기 위해 조찬에 매진했다.
* * *
새벽부터 들이닥치는 귀족을 안내하고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느라 시종과 시녀가 황궁 복도를 빠르게 오갔다. 아서와 근위기사단은 그들 사이에 불순한 자가 없는지 확인하느라 덩달아 바빴다. 실제로 그들의 마차와 짐을 일일이 수색하고 명단을 대조했다. 함께 온 하인 중에 미리 입궁 신청을 하지 않은 자와 제국 신분 등록을 잊은 자는 귀족이 아무리 함께 들어가겠다고 우겨도 입궁을 거절하고 제도로 보냈다.
“엘러 백작! 당신이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며 감히 내 소유물에 대해 마음대로 월권을 행사하는 걸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오?”
어느 영주가 화가 나서 아서에게 따졌다. 같은 백작이어도 그자는 영지가 훨씬 컸고 최근 작황도 좋아 부유했다. 백작씩이나 되는데 일일이 몸수색을 당하고 짐을 들쑤셔지는 게 마음에 몹시 들지 않아 뻘건 얼굴로 항의하는 중이었다. 그의 곁에 선 백작 부인과 청소년 자녀 둘은 똑같이 불만이 가득했다. 이런 푸대접을 받는 걸 용납할 수가 없다는 듯이 바르르 떨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서는 명령받은 그대로 응대했다.
“칙령입니다. 따르지 않으면 황궁 출입은 불가합니다.”
“칙령에도 예외가 있을 수 있지 않소!”
참을성이 바닥난 백작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칙령에 예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카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침이라 실내용 셔츠에 외투처럼 긴 재킷을 대충 걸친 상태였다. 느슨한 차림에도 소리를 지른 놈과 그 아내는 황제를 알아보고 대번에 굳었다.
기세등등하던 백작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잠시 생각하던 카론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내린 칙령에도 예외가 있긴 있군.”
“있었습니까?”
아서가 놀란 듯 되물었다.
“물론. 황후의 부탁이면 무엇이든 예외로 둘 수 있지.”
“아. 그렇군요. 다음 마차가 도착했네요.”
괜히 물었다는 듯이 건성으로 응대하던 아서는 금방 가버렸다. 홀로 황제를 상대하게 된 백작은 정말이지 금방 졸도할 기세였다.
“폐, 폐하. 요…용서를….”
“황자를 위한 연회일 아침부터 피를 봤다간 황후 폐하께서 언짢아하실 테니까 이번만은 조용히 넘어가지.”
“감사합니다. 폐하.”
백작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카론이 한번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더는 소란을 피우는 자가 없었다. 황제가 직접 나와 황후의 기분을 헤아려 피를 덜 보고 싶다고 명한 일은 비밀스러운 황궁 사정에 목이 마른, 수다스러운 귀족의 입을 통해 도착하는 손님마다 빠르게 전해졌다. 문제는 입과 입으로 연결되는 사이 사실은 지워지고 대신에 과장이 덧붙었다.
“아이도 예외 없이 사형이라면서요?”
“칙령에 의문을 표했다가 그 자리에서 도륙이 났대요.”
“황후 폐하께서 기분이 좋지 않으시답니다.”
“인간을 싫어하시나 봐요.”
“저 무서운 폐하께서 황후 눈치를 보다니. 황후 폐하께서는 아마도….”
“폐하께서 우려하실 만큼 황후 폐하는 모든 걸 다 아신다고 합니다.”
“항상 입을 조심하세요. 큰일 납니다. 입궁한 이상 살아나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황제가 황후의 기분을 헤아린다는 얘기가 나중에는 황후가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대단한 요정이라 조금이라도 기분을 거스르면 그 자리에서 핏빛 강물이 흐른다고까지 부풀려졌다.
소문이 어디까지 갔는지 알게 된 아서는 즉시 전달했다.
“황후 폐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기뻐하실까요? 아니면 화를 내실까요?”
“화를 내겠지.”
카론은 내심 당황했다. 아니 일이 어그러져도 어떻게 그렇게 어그러지나. 재수에 옴이 붙은 게 분명했다.
일부러 의도한 바는 절대 아니었다. 망할 귀족 새끼들은 입이 얼마나 가볍기에 방금 일어난 일이 그렇게까지 왜곡해 퍼트린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고 정정하려 해도 그건 ‘사실을 감추기 위한’ 의도된 호도라고 믿고 더 이상한 소문이 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했다.
“망했군.”
채운은 두려움이 아닌 존경의 대상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연회가 열리기 전부터 무시무시한 위명이 먼저 퍼지고 있으니. 만약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연회가 열리는 내내 냉기를 풀풀 풍기며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할지도 모른다.
“가지 말아요.”
졸음에 겨워 곁에 있으라 속삭이는 사랑스러운 모습이 생생했다. 골든 피오니에 머무르는 걸 얼마 만에 허락했는데. 제 잘못도 딱히 아닌 일로 다시 쫓겨날 순 없다. 절대로.
결론을 내린 카론은 매섭게 내뱉었다.
“황후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하게 막아. 또 당사자 놈에게 연회 전에 수습하라고 전해.”
“그런 조치가 소문을 더 나쁘게 하지 않을까요? 어차피 연회에서 황후 폐하를 뵙게 되면 다들 뜬소문이라고 생각할 텐데요.”
“그전에 황후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란 말이다. 이 멍청한 자식아.”
“왜 욕을 하시고 그럽니까. 사고는 제가 아니라 폐하가 치셨….”
부관의 투덜거림은 냉랭한 눈빛 한 번으로 즉시 사라졌다. 약삭빠른 놈은 냉큼 줄행랑을 쳤다.
“채운이 모르는 채로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카론은 뭐 씹은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채운이 내내 잘 치르고 싶다고 강조에 강조한 연회가 시작부터 살짝 엇나갔다. 제발 조용히 넘어가길. 채운이 화를 내는 일이 없길. 카론은 진심으로 바랐다.
* * *
연회 전에 목욕하고 단장하느라 시간이 금방 갔다. 새로 지은 옷을 차려입는 중에도 명단을 들고 귀족 이름을 연습했다. 어눌한 발음으로 우스워지기 싫었다.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냐?”
카론이 물었다.
“존경받으려면 바보처럼 보이면 안 돼요.”
“…존경을 굳이 받아야 하나?”
물음이 뭔가 떨떠름했다. 채운이 시선을 던지자 카론은 “아니, 뭐. 그냥.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는 거지.”라고 얼버무렸다.
“폐하는 무서운 황제가 되세요. 나는 존경받을 테니까요.”
가볍게 콧방귀를 뀌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카론은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부산스러운 중에도 온은 평온했다. 새로 지은 아기 옷은 치렁치렁한 흰색이었는데 어린 아기의 탄생을 천지 신령에게 알리는 ‘세례’라는 의식에서 입는 옷이라고 했다.
“왜 세례를 하지 않았지요?”
함께 복장을 점검하고 있던 카론에게 물어보았다. 황제가 금사로 자수를 놓은 흰색 제복의 단추를 직접 채우는 사이 카론을 돕던 올리아가 황제의 상징하는 금색 장식과 긴 금줄을 어깨와 가슴에 달았다. 원래는 그렌의 역할인데, 그는 지금 연회장에서 귀족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두 세상의 핏줄을 다 이어받았잖아. 만약 신을 따르고 싶으면 요정 세계 신과도 합의해야지. 일방적으로 정하면 안 돼.”
“그래도 이곳의 황제가 될 텐데.”
“자라서 레온이 스스로 원할 때 해도 돼.”
황제란 모든 이들의 모범이 되는 만큼 가장 라테시온다운 풍습은 거스르지 않고 따르게 하고 싶었는데. 막상 설명을 듣고 나니 그 또한 자신의 욕심이었다.
마그네가 어깨에 달 망토를 가져왔다. 두꺼운 붉은 천으로 만든 망토는 당연히 카론이 걸쳤다. 금사로 만든 줄과 금 단추로 솜씨 좋게 고정하자 그렇지 않아도 크고 너른 어깨가 더욱 커 보였다. 빛나는 건 금장식뿐이 아니었다. 잘 빗어넘긴 금발마저 밝은 해처럼 반짝이니 눈이 부셨다.
조각처럼 잘생긴 젊은 황제가 진지한 표정으로 장갑을 끼는 모습을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반짝이는 청금안이 채운을 돌아봤다.
“왜? 뭐가 이상하나?”
“아니요. 그냥 봤습니다.”
고개를 얼른 돌렸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새로 지은 옷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해야 하나 갈등하는 순간, 올리아가 감탄을 터트렸다.
“어머, 아름다워요.”
그는 마그네가 펼쳐서 든 흰색 망토를 가리켰다. 두꺼운 카론의 것과 달리 레이스를 겹쳐서 만든 망토는 투명한 보석과 진주를 촘촘히 달아 대단히 화려했다.
“이런 건 만들라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주문한 거야. 그럭저럭 괜찮군.”
별 가루를 뿌린 듯 아름다운 망토를, 카론은 매우 박하게 평가했다. 자수 장인이 혼을 갈아 넣은 물건에 그럭저럭 괜찮다니.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선물이야. 보석은 별로라고 해서 실용적인 걸 준비했다.”
이게 어디가 어떻게 실용적인지 전혀 모를 일이었다.
“고마워요.”
마그네가 망토를 어깨에 다는 사이 카론은 채운의 검은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렸다.
“머리가 길었으면 화려한 보석을 더 달 수 있을 텐데.”
카론은 머리를 짧아 성혼에서처럼 머리에 각종 장식을 올리지 못한 걸 안타까워했다.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건 전부 터 알았으나 여태 섭섭해하는 줄은 몰랐다.
“무겁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형이 아니에요.”
“인형 놀이를 하자는 게 아니야. 내 황후가 누구보다 빛나길 원하는 거지.”
“보석을 단다고 빛나는 사람이 되지 않아요. 마음이 빛나야 하는 겁니다.”
“영혼의 빛으로는 넌 이미 태양을 능가했어. 때때로 눈이 멀 것 같다니까. 요즘 내 얼굴빛이 좀 짙어지지 않았어? 다 네 영혼의 빛에 타서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뱉는 말 하나하나가 다 팔불출이었다. 기가 찼다. 다른 사람이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나? 채운은 차마 그들을 보지 못하고 괜히 카론을 툭 쳤다.
“입이 있다고 아무 말이나 하지 말아요.”
“아무 말이 아니라 사실인데. 네 영혼의 빛을 볼 줄 모르는 무지몽매한 놈들에게 보석 나부랭이로라도 네 찬란한 빛을 자랑하고 싶은 내 마음을 몰라주다니. 차가운 요정 같으니.”
뻔뻔한 작자는 요사스러운 혓바닥을 아무렇게나 마구 놀리더니 이내 채운의 턱을 들어 쪽 입을 맞추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멀리서 화려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연회가 시작했군.”
옷 입기 전에 든든하게 먹여 재웠던 온이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전에 알려준 거 잊지 않았지? 나쁜 놈은 이렇게, 좋은 놈은 이렇게.”
나쁜 놈이라고 할 때는 카론이 얼굴을 찡그리고, 좋은 놈이라고 할 때는 씩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작태에 어이가 없었다.
“어린 아기한테 뭘 가르치는 거예요?”
채운이 야단쳤다. 어이없게도 카론은 진지했다.
“레온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 습격을 먼저 예상하고 울었다고.”
“우연이에요.”
“우연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겠지.”
카론이 안아 올리면서 뺨에 입을 맞추자 온이 까르르 웃었다. 부쩍 자란 아이를 한쪽 팔로 척 안은 카론은 자유로운 손을 채운에게 내밀었다.
“자, 갈까.”
내민 손 위에 자연스럽게 손을 얹었다. 강한 아귀가 꾹 다물렸다가 살짝 풀렸다. 늠름한 황제를 따라 채운은 사뿐사뿐 발을 옮겼다.
* * *
연회는 예전에 열렸던 성혼 발표 때와 비슷했다. 차이점은 카론은 온을 안고 있고 채운은 그때보다 더 확신에 차 있다는 점이었다.
“카론 유스키아 황제 폐하와 채운 아가르타 명 황후 폐하이십니다.”
채운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긴 처음이었다. 명이라는 성도 붙였다. 카론의 말로는 레온에게 명과 라테시온 두 성을 동시에 물려주고 자손 중에 명가를 이를 자가 태어나면 따로 나누어도 좋다고 했다. 그대로 명 라테시온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나중에 다시 고려키로 했다.
일전과 마찬가지로 옥좌에서 가장 먼 입구를 통해 등장하자 삼삼오오 모인 귀족이 동시에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때는 그렇게 무섭던 길이었는데. 지금은 긴장을 조금 하긴 했으나 두려움은 없었다. 높은 학식을 뚜렷하게 내세우지 못하면서 혈통만 믿고 으스대는 자가 곳곳에 섞여 있다고 생각하니 도리어 우스워 보였다. 저들 중에 옥석을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리라.
황좌에 앉기 전에 카론은 귀족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황자의 탄생을 늦게 알려서 미안하오. 보시다시피 황자는 인간과 요정의 사이에 태어났소. 그래서 공개에 민감한 부분이 있었으니 이해하리라 알겠소. 그대들이 나, 카론 유스키아에 충성하는 만큼 모든 것을 받아 태어난 레온 명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주길 바라오.”
“카론 유스키아 황제 폐하와 채운 아가르타 명 황후 폐하의 사랑과 축복 속에 태어난 레온 명 황자 전하께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누군가 화답을 선창했다. 아마 대공인 듯싶었다. 뒤이어 귀족들이 후렴을 따라 외치면서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개별 인사는 가장 지위가 높은 대공부터 나설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대신 의외로 아는 얼굴이 먼저였다.
“황제 기사이자 총사령관 베로니카 블라드 엘러와 그 부군 아서 엘러가 영광스러운 라테시온 황제 폐하께, 그리고 나란히 하시는 황후 폐하께 인사를 올립니다.”
아서의 서열로 따르면 대공보다 인사가 뒤였으나 이번엔 베로니카가 있어서 맨 처음이었다. 황제 기사는 황제의 그림자로 유사시에 황제의 전권을 위임받는다. 어쩌면 황후인 채운과 필연적 정적이 될 수도 있는 지위였다.
“황자 전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
아서가 뒤이어 머리를 조아리며 곱게 포장한 상자를 내밀었다. 그것은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받아 곁에 두었다.
“와주어서 고맙군, 황제 기사. 솔직히 그대가 직접 올 줄은 몰랐는데.”
“당연한 일입니다. 품에 안겨 계신 황자께서 제 다른 주인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다른 주인이 아니라 될지 모른다니. 차기 황제라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인가. 채운은 그의 심중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역시 경계해야 하나?
카론에게 인사한 베로니카는 곧 채운에게 향했다. 무릎을 꿇었어도 고개를 들지도 숙이지도 않은 자세였다.
“베로니카.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습니다. 좋은 자리에서 얼굴을 보니 반갑군요.”
원래 대공을 위해 준비한 인사였다.
“저야말로 황후 폐하께서 환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차후에 더 편안한 자리로 뵐 수 있길 기대합니다.”
더 편안한 자리가 뭔지 언뜻 감이 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만나길 원하는 건가? 아니면 그저 의례적으로 하는 답변인가. 귀족이 할 답변에 대해 그렌에게 미리 물어보긴 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공개석상이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하다, 황제와 황후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한다, 황자 전하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이렇게 무난한 답변을 할 거라고 들었다.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카론을 슬쩍 봤다. 그도 의외라는 표정으로 베로니카를 내려다보았다. 아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카론의 품에 안긴 온만이 까르륵거리며 베로니카를 향해 작은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본 베로니카가 슬며시 눈을 접어 웃었다. 부드러운 미소여서 채운은 내심 놀랐다.
‘두 아이의 어머니라고 했지.’
무서운 베로니카와 경쾌한 아서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어떨지 궁금하였다. 어쩌면 베로니카가 따로 만나자는 얘기도 그저 친분을 쌓자는 뜻일 수도 있다.
막 답을 하려고 할 때 베로니카가 먼저 일어섰다. 시간을 너무 지체한 탓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이쪽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카론이 자연스럽게 여지를 준 후 다른 자의 인사가 이어졌다. 대공으로 시작하여 귀족의 인사를 받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인사가 끝나고 일단 베로니카와 사소한 담소라도 나누자 마음먹었다. 그와는 무턱대고 척질 게 아니라 되도록 친하게 지내는 편이 현명했다. 카론은 온을 데리고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그의 곁을 지켜도 되나 그보다는 스스로 사람을 대하고 싶었다. 베로니카도 찾을 겸 연회장을 가득 채운 귀족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안녕하세요.”
“헉, 황후 폐하. 죄…죄송합니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대단히 황송해하면서 얼른 물러섰다. 다들 카론에게는 아는 척도 하고 말을 걸기도 했으나 채운을 향해서는 한 마디를 제대로 붙이지 않았다.
‘배척하는 건가.’
내심 충격을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대공비?”
하다못해 중년에 후덕한 대공비에게 말을 붙였다. 방금 다른 사람과 담소를 나누던 대공비는 새하얗게 질리더니 얼른 물러섰다.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대공비가 넘어질 뻔하였다.
“괜찮습니까?”
“황후 폐하. 저, 저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발.”
부들부들 떠는 표정에서 공포심이 물씬 풍겼다. 지금 보니 배척하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자마다 두려움에 차서는 어쩔 줄을 모르는 거였다. 아니 그것도 배척이 맞긴 맞는데.
무슨 영문인가 싶어서 일단 카론을 찾았다. 마침 그는 먼 곳에서 온 영주 내외에게 온을 소개하던 중이었다. 온은 좋지도 싫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뒤이은 귀족에게는 방긋 웃었다가 다른 귀족을 보고서는 고개를 홱 돌렸다. 두루두루 인사를 시킨 카론은 온의 정수리에 입을 쪽 맞추었다.
“내 판단과 거의 겹친다. 아주 훌륭해. 내 아들.”
정말로 온에게 사람을 가리게 하는 줄은 몰랐다. 영문도 모른 채 타인에게 꺼려져서 무척 서운한 중에 저런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까지 없어졌다.
“카론.”
화를 낼 때는 늘 이름을 불렀다. 주변에 사람이 많기에 버럭 고함을 친 건 아니어도 다소 엄하고 냉랭했다. 카론은 즉시 뒤돌아보았다.
“어린 아기니, 그거 하지 말라고 했지요?”
“들어봐. 레온이 정말로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어. 요정의 혈통이어서 그런 거야. 틀림없다.”
“아직 모른다고 몇 번이나….”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가까이 있는 귀족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대단히 놀란 듯이 눈과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곁에 선 자들은 무척이나 두렵다는 듯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들으셨어요? 황자님이 사람을 꿰뚫어 보신답니다.”
-“마력이야. 마력이 있는 거야.”
-“혼혈인 황자께서 저 정도이니 순수한 요정인 황후 폐하께서는 눈빛 한 번으로 거짓과 위선을 모조리 알아내실 겁니다.”
-“나…나는 아무런 잘못 없어. 그저 얄미운 놈을 곯려주려고 작은 거짓말한 것뿐인데.”
-“부인 몰래 외도한 것도 알아보실까?”
아니 그렇게 들리도록 속삭이면 누구라도 다 알아듣지 않을까? 싶은 중에도 그들과의 거리는 점점 넓어져 나중에는 카론과 채운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이 생겼다. 당혹감이 커지다 못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카론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어떻게 할 거예요?”
은밀하게 속삭이자 카론 또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를?”
“존경받고 싶었는데. 왜 그런 말을 해요?”
미간을 확 구기자 카론이 움찔했다.
“존경이 두려움에서 나올 수도 있지.”
“됐습니다.”
카론에게서 온을 빼앗아 들었다.
“황자가 졸린 듯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함께 가도록 하지.”
“아닙니다. 손님이 이렇게 많은데. 폐하가 계셔야지요.”
일방적으로 선언한 후에 채운은 연회장을 떠났다.
* * *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차후 개별 알현에서 오해를 풀려고 했다. 폐하께서 아들에게 너무 기대하신 나머지 그냥 장난삼아 그러신 거라고 설명하면서 혹여 그 때문에 꺼리는 점이 있다면 너무 개의치 말라고 다독일 참이었다.
문제는 채운의 예상보다 심각했다. 알현을 신청한 자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음에 더 영광스러운 자리로 찾아뵙겠다고 줄줄이 죄송하다는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럽니까?”
“폐하께서 모든 거짓과 위선을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렌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당당하지 못한 자들이기에 폐하를 무척 두려워합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일평생 배움을 추구하여 경지에 이른 대학자도 쉽게 장담하지 못한다. 비록 황후로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으나 채운은 아직 치기 어린 청년에 불과하였다.
“그럴 수 있으면 [점집]을 차리지 이러고 있습니까?”
“‘처어짐’이요?”
“신국식 마녀의 집입니다. 사람 얼굴만 보고 과거를 다 알아내지요.”
채운의 설명에 그렌이 피식 웃었다. 요즘 들어 마녀라는 단어가 조금 가벼워졌다. 황궁 한가운데서 백룡을 소환하여 세상을 넘나드는 광경을 본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요정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마녀 또한 뚜렷한 실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도리어 막연한 두려움과 불쾌감이 사라진 것이다. 어떤 자는 마녀는 이쪽에서 사는 요정이라고 하는 자도 더러 있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요정의 존재는 신비롭지요. 그래서 때때로 두려움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폐하가 무서운데 나까지 무서울 필요는 없습니다.”
속이 퍽 상했다. 알현 취소가 전부는 아니었다.
산책 중에도 멀리서 채운이 보이기만 하면 귀족들이 얼른 인사하고 부리나케 흩어졌다. 괄시도 아니고 그저 무서워서 피하는 건데도 속이 너무 상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배척은 배척이니.
우습게 보일까 봐서 걱정했지 이렇게 경외하다 못해 무서워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우연히 말을 걸기라도 하면 사색이 되어서 우르르 달아나는 게 꼭 맹수를 피해 도망가는 토끼 같아 차마 잡지도 못했다.
카론은 지은 죄가 있어서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다. 채운을 따라다니며 세심하게 챙기는 일이 도리어 황제가 황후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한 모습으로 호도되었다. 차라리 같이 따로 다니는 편이 더 나았다.
“휴우.”
가까운 친구라도 하나 사귀고 싶었는데. 이래서야 고립될 뿐이었다. 허탈한 채 아무도 없는 정원 의자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부스럭.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채운을 발견한 자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 놓는 꼴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얼른 자리를 피하려는 찰나, 뒤에서 누가 저를 불렀다.
“황후 폐하.”
충격과 두려움이 전혀 없는 담담한 음성의 주인은 황제 기사 베로니카였다. 그는 기사답게 단정한 검은색 제복을 입고 어깨에 약식 망토를 걸쳤다. 입궁 때에 모든 무기류를 압수당한 다른 귀족들과 달리, 그는 경호와 경계를 겸하고 있기에 실전용 장검도 지녔다.
“황제 기사.”
“베로니카라고 불러주십시오.”
늘 냉랭한 그의 입매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평범한 표정을 지울 수 있는지 몰랐다. 인사를 하고 자리를 피하는 것도 우스워 자연스레 도로 앉았다. 베로니카는 긴 의자 반대편에 앉았다.
“혼자 계십니까?”
“네. 어쩌다 보니.”
“저쪽에 사람들이 많은데요.”
“다들 나를 피합니다.”
베로니카를 상대로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지 확신은 없었다. 황제 기사인 그는 카론의 그림자와 같으니 입을 가볍게 놀릴 사람은 아니라고 믿었다.
“괴상한 소문이 났더군요. 폐하께서 모든 걸 다 알아보는 신의 눈을 가졌다고요.”
“아, 신의 눈이라니. 베로니카도 그 말을 믿습니까?”
“아니요. 제가 보기에는 폐하는 그저 평범한 사람입니다. 물론 평범과는 거리가 먼 요정이긴 하지만요.”
“신국에서는, 신국은 내 고향입니다. 신국에서는 나는 평범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아요.”
“카론 폐하와 얽히면 누구나 그렇게 되죠. 저만 해도 칼 좀 휘두르는 평범한 여자애였을 뿐인데요. 정신 차리고 보니 황제의 미친개가 되어있더군요.”
베로니카가 마음에 쏙 드는 위로를 건넸다. 울분이 찬 김에 볼멘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렇지요? 무서운 힘을 가진 요정이 된 것도 다 폐하 탓입니다.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어요. 오해를 풀려고 해도 오히려 더 나빠집니다.”
“아, 황후 폐하의 곤란함을 저보다 잘 아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사실 저는 이런저런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성격인데 폐하께서 차가운 냉혈 인간으로 만드는 바람에 다른 데서는 함부로 웃지도 못합니다. 웃으면 그날 피바람이 분다나요?”
“베로니카도요?”
“그럼요. 생각해보십시오. 제가 그렇게 차갑고 냉정한 미친개라면 덜렁이 아서와 결혼해서 아이 둘을 낳았겠습니까? 어림도 없지요. 저는 아서의 한심한 농담을 사랑하는 평범한 여자입니다.”
순간 베로니카에 대한 경계심이 스르르 사라졌다. 베로니카에 대한 채운의 경계심은 다른 자들이 채운에게 가지는 두려움과 비슷했다. 실제로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소문과는 전혀 다른 진실을 알게 된다.
“나도 황제 기사께서 대단히 무서운 분인 줄 알았습니다.”
“설마요. 필요한 시점에 냉정하고 엄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망나니 같은 아이 둘을 키우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한심한 행동을 귀엽게 여기게 되죠.”
“망나니라니.”
“빨강머리 말썽꾸러기들. 아서를 너무 닮았어요. 힘이 넘치는 수다쟁이 남매를 기르기보다는 토벌전을 10번 벌이는 편이 더 나아요. 요즘에는 매번 정원에 내보내서 힘껏 뛰어놀게 합니다. 그래야 밥 먹을 때만큼은 입을 다물거든요.”
질렸다는 듯이 자식을 흉보는 베로니카를 보며 채운은 쿡쿡 웃었다. 꼭 두 형님과 누님 흉을 보는 큰엄마와 비슷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뛰어놀며 자라게 하는 부모만이 저런 한숨을 쉴 수 있다. 베로니카는 분명히 훌륭한 어머니이다.
“가족이 화목하니 다행입니다.”
“별로 화목하진 못합니다. 가족 중에 반역자가 있어서요.”
반역자라는 말에 채운은 의아했다.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그림자의 가족에 반역자가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의아함을 알아챈 베로니카는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테퍼 블라드라고 아십니까?”
특이한 이름이라 들은 적 있으면 어감이라도 익숙할 텐데 낯선 걸 보니 알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들은 적 있어도 완전히 잊어버렸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베로니카는 좀 더 어두운 낯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휼리는?”
“압니다. 예전에 카론과 잘 지내다가 배신하여 좋지 않게 죽었지요.”
“그 휼리의 남자가 바로 테퍼 블라드입니다.”
“그렇습니까?”
“결혼하기 전 저는 베로니카 블라드였습니다. 테퍼 블라드는 제 이복 오빠입니다.”
전혀 몰랐다. 표정으로 알아본 베로니카는 세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들려주었다.
베로니카의 부친은 광신도였다. 겉으로는 너그럽고 은혜를 많이 베푸는 성자 행세를 했으나 실상은 옹졸하고 이기적이며 무엇보다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억압하길 좋아했다. 신실한 신자 행세를 하면서도 많은 여자를 건드렸고 그 때문에 부인과 사이가 대단히 나빴다. 아들 하나라도 태어난 것이 다행이었다.
신전에 들러서 기도를 마친 부친은 마침 새로이 수녀가 된 젊은 여자에게 한눈에 반했고 그녀를 강제로 취했다.
“저는 강간의 산물이지요.”
베로니카는 그렇게 말했다. 채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임신한 수녀가 악녀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자식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베로니카는 수녀원장에 의해 성자 행세하던 부친에게 넘겨졌다. 그가 강간범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로.
친딸을 양녀로 받아들인 부친은 평생토록 성자 행세를 했지만 본디 추악한 성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친딸을 양녀라고 우기다가 정말로 피가 섞이지 않는 걸로 착각했는지 열 살 남짓한 베로니카를 건드리려고 했다. 그때 이미 출중한 검술 실력을 자랑하던 베로니카는 제 친부이자 양부인 작자를 죽였다.
“그때 테퍼가 도와줬어요. 사고사라고 증언했지요.”
차대 자작의 증언은 큰 힘을 발휘했고 베로니카는 살아났다. 심지어 테퍼는 사생아인 베로니카를 진심으로 동생으로 받아들였다. 그 때문에 친모와 크게 적을 지기도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까지 테퍼는 저에게 일절 신경 쓰지 않았거든요. 갑자기 잘해준 이유가 뭐냐고 한번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그러더군요. 자기도 편이 필요하다고.”
“편?”
“예. 알고 보니 아서 엘러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서의 부친은 그렌 경과 친분이 있었죠. 아서는 그렌 경의 부탁으로 매우 이상한 아이와 함께 다녔습니다. 말도 안 하고 눈빛은 사납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뜸 덤벼들고 보는. 꼭 들개 같은 애였습니다. 그것도 상처 입은 들개 같은. 저도 나름대로는 사나운 편이었는데 저도 발끝에 못 미쳤죠.”
“설마 그게?”
채운의 물음에 베로니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의 친애하는 폐하, 카론 유스키아였습니다. 원래 아서에게 이겨 먹던 테퍼가 순식간에 불리해진 이유이기도 하지요. 그게 저를 옹호한 진정한 이유는 아니겠지만. 당시엔 그 핑계를 댔습니다. 이후로 둘씩 편을 먹고 지독하게 싸워댔지요. 날마다 피가 터지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베로니카는 쿡쿡 웃었다.
어려서는 이유도 없이 치고받던 사이가 커서는 자연스럽게 친구로 변했다. 더불어 붙어 다니는 단짝도 바뀌었다. 명랑한 아서는 한심한 농담을 받아주는 베로니카와 더 가까워졌고, 인간미가 한참 부족했던 카론은 때때로 한없이 잔인해졌고 그럴 때마다 냉랭한 논조로 행동에 제동을 거는 테퍼와 더 자주 어울렸다.
“둘이서 어울리게 두지 말았어야 했어요. 성격이 애매하게 바뀌어서 둘 다 정신이 나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채운은 얼른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덧붙였다. 베로니카가 하는 옛날얘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들은 얘기를 종합하여 보니, 카론이 그나마 사람답게 된 것에 다른 셋의 영향이 컸고 대신에 다른 셋 또한 카론의 영향을 받아 다소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것이 제국을 세우는 데 더욱 유리하게 작용했다.
“네 친구가 나라를 세웠군요.”
“나라를 세운 건 맞지만 친구라. 친구라기보다는 지긋지긋한 관계 같네요. 이젠 각자 살길 찾아 살자는.”
너스레를 떨면서도 베로니카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폐하께서 카론을 거둬주셔서 참 다행입니다. 약간 멍청해진 게 아닌가 싶긴 해도 여유롭고 너그러운 편이 훨씬 나으니까요. 덕분에 테퍼도 어딘가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거고요.”
베로니카는 카론이 테퍼에 대한 추적 명령을 내리지 않은 걸 순전히 채운의 영향이라고 여겼다. 처음 만났을 때 비해 카론이 좀 유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판단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관여할 생각도 없었다. 그렇기에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무서운 카론 유스키아 폐하께서는 누군가에게 다른 기회를 주어도 나쁘지 않다는 걸 배웠어요. 사소한 실수 한 번 정도는 너그럽게 봐주더군요. 놀랍게도.”
“다른 기회?”
“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아마 본인이 또 다른 기회를 얻어서 좋은 결과를 얻은 게 아닐까요? 카론에게 기회를 줄 사람은 제가 알기로 한 분뿐이거든요.”
베로니카는 확신에 차 있었다. 기회에 관한 설명을 듣고 보니 채운이 영 상관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반역 같은 걸 사소한 실수라고 할 수 있나? 죽마고우라 칭할 네 명의 사고방식을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너그러워졌고 여유로워졌다니 다행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폐하께서 너그럽게 넘어가 주셔서 아서가 기뻐합니다.”
“이번에도…라니요?”
이번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건지, 채운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베로니카는 다소 의외라는 듯이 되물었다.
“이번에 귀족들 사이에 돈 폐하에 관한 소문의 근원지 말입니다. 카론 폐하 아닙니까?”
“무슨 소문이요?”
“아.”
베로니카는 실수했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넘어가선 안 되는 문제임을 감지한 채운은 그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채근하는 티가 나지 않도록 은은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카론 폐하 때문에 무슨 소문이 어떻게 돌았다는 거지요?”
다소 난처한 듯 눈을 굴리던 베로니카는 이내 알고 있는 걸 모조리 털어놓았다. 채운이 지은 은은한 미소는 시시각각 딱딱하게 굳어갔다. 베로니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채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이…이 나쁜 오랑캐 놈이! 내 원대한 꿈에 초를 쳐도 유분수지!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한 줄 뻔히 알면서! 거기다 망쳐놓고 모르쇠를 해!]
채운은 멍한 베로니카를 버려두고 부리나케 궁으로 뛰었다.
* * *
카론은 오랜만에 여러 고위 귀족과 함께 지루한 사담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배불뚝이에 욕심쟁이, 쭈글쭈글한 겁쟁이, 요사스러운 거짓말쟁이 등등.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상대로 억지로 면상을 펴면서 너그러움, 참을성, 인내력 등등. 채운에게 배운 많은 가르침의 한계를 시험하는, 나름대로는 꽤 도전적인 시간이었다.
한 놈이 듣기 싫은 찬양을 이어가다가 침을 튀겼을 때는 정말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박살 낼 뻔했다. 간신히 펴고 있던 안색에 금이 갔는지, 놈들이 동시에 얼음 동상이 되었고 뒤이어 근처에 있던 자들도 순식간에 입을 닥치던 무렵이었다.
“폐하!”
꼭지가 돌아 버리기 직전 들려오는 싱그러운 음성이라니. 카론은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활짝 웃었다.
“채운.”
단정한 미간에 귀여운 주름을 새기고 다소 상기된 광대를 실룩이며 빠르게 걸어오는 그를 보자마자 카론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대로 강력한 마취제 같은 몸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행복감에 젖길 희망했다.
바람대로 채운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카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선물한 보석 망토가 빛 가루를 머금은 요정 날개처럼 흔들리는 덕분에 정말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그 자체였다.
“오, 나의 요정, 나의 황후. 그대가 그리웠어.”
사랑에 빠지면 시인이 된다더니. 카론도 모르게 노랫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요정이 아니라고 했… 아니, 할 말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흐뭇한 미소가 만연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폭 안겨 놓고는 밀어내려고 꿈지럭대는 것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휘어잡으며 입을 맞추었다.
“흡!”
채운의 입술을 머금은 순간, 짜증 나던 소음이 가라앉았다. 역시나 화가 날 땐 요정 섭취가 제일이다. 미소가 감도는 제 입술을 핥던 카론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빨갛게 익는 채운을 보고 눈을 접었다.
“그런데 무슨 할 말이 있어서 날 찾았지?”
“아…아니… 다들 보는 곳에서… 이 무슨.”
손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가 이내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운이 뒤돌아섰다.
“왜 그러지?”
“일…일단… 나…나중에 두고 봅시다.”
“지금 한가한데.”
“아니요! 절대로 따라오지 마세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입맞춤이 그렇게 당혹스러웠는지 채운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다시 후다닥 뛰어나갔다. 도망치듯 재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마다 팔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찌나 예쁜지. 카론은 들고 있던 술잔을 다른 자에게 넘긴 후에 성큼성큼 그를 쫓아갔다.
방에서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쪽으로 꺾어지는 복도 어귀에 선 채운의 등이 보였다. 그는 카론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두 손으로 뺨을 잡고는 도리질을 치고 있었다.
“따지러 간 건데 바보같이 또 넘어가 버리다니. 입맞춤에 이렇게 약해서야. 황후로서 위엄이 살지 않잖아. 멍청이. 멍청이.”
너무나도 귀여운 얘기를 들었다. 야무진 주먹으로 귀여운 머리를 콩콩 찧으려기에 얼른 손을 내밀어 막았다. 자갈 같은 손이 어찌나 매운지. 손등이 찍히자마자 카론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야.”
“헉.”
채운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밤하늘 같은 까만 눈동자에 제가 비치는 걸 보자마자 손등의 아픔도 금방 사라졌다. 채운이 얼른 제 머리에 닿은 카론의 손을 끄집어내려 손등을 살폈다. 보드라운 손이 인이 박인 손마디를 살살 쓸었다.
“방금 화를 내러 온 거였어?”
“…그래요.”
“그랬군. 네 얼굴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그만 입술이 먼저 나갔다. 미안해.”
이젠 아프지 않음을 알면서도 채운은 계속 손을 조물조물 만졌다.
“화가 난 이유가 뭐지?”
“이젠 괜찮아요. 다 풀려버렸어요.”
“정말인가?”
“네.”
정말이었다. 채운은 위엄 넘치는 황후로 존경받을 기회를 빼앗아 간 카론에게 화가 잔뜩 나긴 했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낯짝으로 입술부터 비비고 나면 화는 오간 데 없고 그저 가슴만 두근거렸다. 얼굴을 구기면 지옥에서 올라온 사천왕처럼 무서운 작자가 막상 덩치 큰 복슬개처럼 살살 엉겨 붙으면 그만 사르르 녹고 만다. 참 큰일이었다.
“그럼 나 좀 예뻐해 주지?”
언젠가 예뻐해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걸 언제 또 배워서는 냉큼 써먹는지. 맹렬한 인상에다 거구를 가진 황제는 채운의 앞에서만 어울리지 않게 유순한 개 흉내를 냈다. 아니 개보다는 범이나 늑대에 더 가깝지만.
“뭐, 뭐가 예쁘다고 예뻐해 줍니까?”
“그냥 예뻐해 주면 안 되나?”
“예쁜 짓을 해야 예뻐하지요.”
갑자기 교태를 떠는 이유를 모르겠기에 툭 받아쳤더니 산군(山君)도 기가 눌려 꼬리 말고 도망갈 면상의 작자가 갑자기 눈꼬리와 함께 어깨가 축 늘어뜨렸다. 입술을 꾹 다물고는 괜히 채운의 손만 만지작대는 꼴이 비 맞은 개 같기도 하고 혹은 삐진 애 같기도 했다.
“왜 예쁨 받고 싶은가요?”
“그냥. 아부만 하는 멍청이를 상대하다 보니, 그저 이유 없이 순수하게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필요해.”
“다른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렌이나, 올리아나.”
“그렌과 올리아는 내가 마녀의 아들이라 신경 쓰는 거야. 마녀의 친구였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따지면 제게도 이유가 있잖아요. 온이라든가.”
“아, 그렇군.”
카론의 어깨가 한층 더 처졌다. 살짝 깃들었던 장난기가 온전히 사라졌다. 괜한 말을 했나. 그냥 순순히 뽀뽀해 줄 것을.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카론이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다. 신경 쓰지 마라.”
“…정말입니까?”
“정말이야.”
가면을 바꿔 쓴 사람처럼 카론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채운이 어디로 가는 물었고 거기까지 동행하겠다고 했다. 정원에 있었다고 하려다 다른 사람을 만날까 봐서 그냥 침소로 가던 중이라고 했다.
조용히 걸어가는 내내 카론은 채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힘을 주지 않아도 채운도 마주 잡고 있기에 놓칠 일이 없는데. 그는 때때로 시선을 내려 손을 잘 잡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러다가 채운과 눈이 마주치면 씩 웃었다. 그럴 때마다 명치가 징 울렸다.
“벌써 도착했군.”
침전 앞에서 카론은 채운의 손을 놓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커다란 손이 채운의 뺨을 살짝 스치면서 떨어졌다.
“그럼. 나중에 보지.”
돌아선 그의 어깨는 평소처럼 반듯했고 등도 꼿꼿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흩뿌리는데도 오늘따라 쓸쓸했다. 막 침전으로 들어가려던 채운은 그만 참지 못하고 돌아서서 뛰었다.
와락.
뒤에서부터 카론을 끌어안았다. 조금 놀란 그는 뒤를 돌아보며 채운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왜?”
“카론.”
“음?”
자연스러운 미소인데도 채운은 어쩐지 울컥했다. 두 손을 확 들어 카론의 목과 어깨를 잡아당겼다.
쪽.
한번 입을 맞추었다가 다시 고개를 꺾어 다시 입을 맞추었다. 살짝 굳은 상대의 입술을 혀로 가르고 들어가 혀를 살짝 건드리곤 입술을 뗐다. 그것만으로도 카론은 당황하여 손으로 제 입매를 어루만졌다. 크게 벌어진 청금안이 채운의 상기된 뺨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화가 났다가도 당신 얼굴만 보면 이유 없이 화가 풀려요.”
“뭐?”
“가끔은 이유 없이 때리고 싶지만 가끔은 이유 없이 안기고 싶어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카론을 채운은 다시 덥석 안았다.
“채운.”
“이유를 모르겠어. 왜 당신만 보면 이리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지.”
“그건 아마도 내가 저지른 짓에 아직 화가 덜 풀려서….”
스스로를 가장 하찮게 여기는 황제가 눈치 없이 또 제값을 깎아내렸다. 채운은 카론의 입에 손가락을 덧댔다.
“내가 이유를 모르겠다잖아요. 그러니까 이유가 없는 거야.”
“…알았다.”
“이유 없이 입을 맞추고 싶어요.”
채운은 고개를 젖히며 턱을 세우고 눈을 깔았다. 황제의 든든한 두 팔이 어느새 채운을 꽉 안고 있었다.
“어서.”
“누구의 명인데 감히 제가 어기겠나이까.”
싱긋 웃은 카론은 고개를 숙여 입술을 포갰다.
어찌 이곳에 왔는가. 어찌 그를 만났는가. 이유 따윈 이제 중요하지 않다.
따사로운 날에 연인이 만나 입술을 겹치는 일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그저 함께 있을 뿐이다. 뛰는 심장도, 붉게 달아오르는 뺨도, 점점 뜨거워지는 숨결도. 단지 서로가 있기 때문인 것을.
이것이 바로 귀애인 것을.
<금은화 외전, 끝.>
금은화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