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26/28)

9.

라테시온으로 돌아왔다. 황제와 황후의 무사 귀환에 황궁 전체가 기뻐했다. 온을 안은 마그네는 거의 오열했다. 돌아온 기쁨을 나눌 사이도 없이 온이 안녕함을 확인하자마자 채운은 긴장과 피로에 못 이겨 쓰러지듯 잠들고 말았다. 잠결에 그를 한 번에 안은 커다란 품이 느껴졌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일어나셨나요? 폐하?”

아침이 되자 마그네가 명랑한 음성으로 인사를 건넸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러나 채운은 그렇지 못했다.

온, 마그네와 함께 도란도란 시간을 보내고 올리아를 비롯한 그렌도 안부를 물으러 잠시 들를 동안 카론은 침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였다.

귀환한 후 카론은 도통 채운을 보려 하지 않았다. 밤마다 레온만 잠시 보고 휭하니 가 버릴 뿐이었다.

수시로 마그네를 보내어 카론에게 기별을 넣도록 했다. 큰 소동을 벌였으니 그에 관해 보고 들은, 또는 생각한 바를 카론과 의논하고 싶었다. 특히 태자에 관해서 꼭 할 말이 있었다.

“폐하는?”

“지금 정무가 급하시다고 합니다.”

난처한 기색으로 돌아온 마그네의 답은 오전 내내 들었던 것과 같았다.

카론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절을 함께하는 동안 지겹도록 싸웠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매서운 손찌검도 당했다. 말이 통한 뒤로는 매번 속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 멋대로 미루어 짐작한 덕분에 모진 마음고생도 많았다.

카론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열과 성을 다하여 가르쳤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달려들어 울분을 터트리기도 했다. 함부로 재고 판단하지 말라고 그렇게 일러 놓고서.

“마그네. 폐하께 갑니다. 옷을.”

채운이 직접 물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지금껏 카론이 저지른 짓이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너도 그리했으니 나도 그리하련다는 식으로 이이제이로 대하면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도 있는 법이다. 특히나 섬세한 감정을 잘 모르는 카론을 상대로는 더더욱. 분명히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데 그 감정의 정체를 몰라 골몰하고 있을 터였다. 바보처럼. 그냥 물어보면 되는데.

홀로 찾아간 황제의 집무실엔 이미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아서였다.

“황후 폐하.”

오랜만에 본 아서는 늘 그랬듯이 보니 참 반갑게 채운을 맞이했다. 평소에 그가 몰고 오는 나쁜 소식 탓에 밝은 표정으로 대하지 못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덩달아 넉넉한 웃음으로 인사하고 시선을 안으로 던졌다.

“여기까지 웬일이지?”

서운한 인사를 먼저 건네는 사내의 낯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그 곁에는 기세가 당당한 기사가 하나 있었는데 유려한 몸에 얼굴이 몹시 고왔다. 긴 머리를 잘 말아 올려 그렇지 않아도 큰 키가 더 커 보였다.

“이쪽은 베로니카다. 베로니카, 인사해.”

“황후 폐하. 만나서 반갑습니다.”

카론의 소개에 베로니카가 고개를 숙였다.

“일전에 뵌 적이 있습니다만.”

“결혼식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손을 얌전히 등허리에 돌리고 선 그는 어쩐지 카론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안구색과 모발은 전혀 다르고 생김새도 단정하고 잘생겼다는 것 외에는 그다지 흡사하지 않은데 날카로운 기운이 묘하게 겹쳤다.

“저희는 잠시 후 다시 오겠습니다.”

아서가 베로니카 옆에 섰다. 그러고 보니 둘이 부부라고 했다. 아이도 둘이 있다고 들었는데. 막상 같이 선 걸 보니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멋진 늑대 곁에 복슬강아지가 붙은 형국이었다. 하지만 붉은 털을 가진 복슬강아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베로니카에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곤 밖으로 나갔다.

다른 둘이 떠난 후에야 카론이 가까이 다가왔다.

“더 쉬지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언뜻 듣기엔 걱정이었으나 낮으로 내내 얼굴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그러니 타박 같았다.

“그럼 돌아갈까요?”

빈정거림이 아니라 그냥 물음이었다. 뭔가 중한 얘기를 하는 중인데 크게 방해한 걸 수도 있다. 직접 집무실에 찾아온 것으로 충분했다. 이따가 할 말이 있으니 늦더라도 꼭 침전으로 오라고만 하고 돌아서도 되었다.

단순한 물음에 불과했는데, 막상 카론은 크게 당황했다. 집무실이 무척 넓었으며 또 천천히 다가오느라 서너 걸음 거리에 있던 그는 단숨에 거리를 좁히고는 채운의 손목에 제 손을 걸었다.

“아니, 그런 의미는 절대로 아니었어.”

“방해하여 미안합니다.”

“미안할 것 없어. 전혀 방해가 아니야.”

손목을 쥔 아귀에 힘이 꾹 들어갔다. 흰자를 비롯하여 눈가가 내내 붉어서 청금색 홍채와 더욱 대비되었다.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시리고 아팠다. 어쩐지 목도 메었다.

카론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래서 속내를 더욱 가늠하기 힘들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채운 앞에서는 곧잘 감정을 드러내곤 했던 사람이 이러니 더욱 신경이 쓰였다.

“왜 나를 보지 않아요?”

“……할 일이 많아서 그랬다.”

“거짓말.”

할 일이 많기는 할 터다. 하지만 채운이 아는 한 카론은 그럴 마음이 있다면 없는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해내는 사람이었다. 몇 번이나 넣은 기별을 무시한 건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혹여 신국에서 카론을 밀어낸 일과 관련하여 아직도 서운한 걸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로. 내 진심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화나지 않았어. 정말이야.”

말과 달리 눈빛은 여전히 깊고 어두웠다.

혹시 몸이라도 겹쳐야 할까? 그러면 나아질까? 그런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채운은 어정쩡하게 선 카론을 두 팔로 꽉 껴안았다. 몸을 밀착하고 교태를 부렸다.

“안아 줘요.”

“몸도 안 좋은데 무리하지 마.”

평소처럼 숨 막히게 꽉 안는 대신에 카론은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일부러 덜 닿으려고 애쓰는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툭하면 성을 내곤 했던 부근이 오늘따라 너무 잠잠했다. 막말을 던지며 갖은 화를 낼 때도 눈치 없이 벌떡벌떡하던 놈이 그러니 덜컥 겁이 났다.

화가 났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사내의 곁에 서 있었던 일이 뒤늦게 싫어졌을지도 모른다.

시선을 들어 상대를 보았다. 깊은 청금안을 아무리 쳐다보아도 기쁨이나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더욱 흐려질 뿐.

“나, 싫어졌어요?”

“뭐?”

“당신을 버리고 가서…… 싫어졌어요?”

불안에 서러움이 울컥 밀려왔다. 혹여 밀어낼까 봐서 채운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카론의 허리에 매달렸다.

“당신을 말려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을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태자 전하와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서 싫었어요?”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 타이손과의 관계도 전혀 의심하지 않아.”

한층 당황한 카론은 역시나 채운의 양팔을 잡고 살짝 밀어내려고 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거짓말. 나를 귀찮아하면서. 안 보려고 하면서.”

혹시 태자궁에서 했던 말을 뒤늦게 기억하고 정나미가 떨어졌나? 제가 떠올리기에도 간담이 서늘한 말을 줄줄이 뱉었다. 검을 꺼내 들고 달려들려고도 했다. 그게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다. 당장 살아서 라테시온에 왔더니 그날 일이 뒤늦게 생생하게 떠오른 게 분명했다.

용서를 빌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가벼이 생각한 제가 어리석었다. 막상 카론이 싸늘하게 화를 내며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티를 내니 어쩔 바를 몰랐다.

“나쁜 사람.”

덜덜 떨리는 손은 여전히 카론의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놓아야 하는데. 한순간의 어리석음으로 황제의 총애를 잃어버린 바보 같은 황후가 감히 옥체에 손을 대서는 안 되는데. 어쩐지 놓을 수가 없었다. 어쩐지 원망도 물씬 피어올랐다.

“채운.”

“내게는 이제 당신밖에 없는데. 당신이 나를 버리면 난…… 이제 어떻게 살지요?”

차디찬 눈물이 주룩 흘렀다.

“무슨! 나는 절대로 너를 버리지 않아.”

아연한 카론이 그제야 채운을 꽉 안으려 들었다. 옷자락을 놓지 못했으면서도 어떻게든 달래려고만 하는 태도가 싫어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넓은 그의 품을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긴 팔이 상체를 꽉 눌렀다.

“왜 그런…… 절대로 그러지 않아.”

“그런데…… 왜 차가워요? 왜 나를 보러 오지 않았지요?”

“그건…….”

입을 열던 카론은 이내 도로 침묵에 빠졌다. 그도 모자라 채운을 보기 싫다는 듯이 시선을 피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채운은 큰 울음을 터트렸다. 그렇지 않아도 앞으로 고향으로 못 갈 처지인데, 유일한 버팀목이 저를 안 보려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또…… 또! 왜, 왜 나를 안 봐?”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카론의 시선을 찾아 요리조리 얼굴을 가져다 댔다. 카론은 더욱 당황하여 멈칫 굳었다.

“말 안 듣는 요정은 필요 없어요?”

“그럴 리가.”

서럽고 초조하고 성질나서 한 손으로는 카론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로는 주먹을 쥐고 카론을 마구 때렸다가 황제를 구타하는 황후라 바로 폐후가 되면 어떡하나 싶어서 흠칫 놀라 주먹질을 멈췄다. 원망스러운데 때리지도 못하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런데 왜애…… 왜애 나를 보지 않아요.”

울먹거리며 했던 말을 또 했다. 내내 답을 회피하던 카론은 눈물에 겨운 채운을 무척이나 괴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그건…….”

잠시 뜸을 들이던 카론은 체념한 듯 힘겹게 문장을 이었다.

“……두려워서.”

“응?”

“그러니까 무서워서 그랬다.”

무슨 뜻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카론이 무서울 게 뭐가 있는가. 눈을 깜빡이자 맺혔던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눈물이 번진 축축한 얼굴을, 카론은 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혹시라도 네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할지 몰라서. 그곳에서 더욱 행복할 수 있는데.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과 같이 사는 편이 다 좋을 거니까.”

일순간 멍해졌다. 갑자기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영문을 몰라 울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론은 몹시도 괴로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채운을 못 보겠다는 듯이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높은 코 아래 자리 잡은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라 멍함이 오래갔다. 황망하여 잠시 머뭇거리다 일단 눈물부터 쓱쓱 닦았다. 제가 울 일이 아니었다.

“왜 그…… 그런 생각을?”

“그런 이별은 처음 보았다. 가족의 존재가 네게 어떤 의미인지 그전에는 전혀 몰랐어. 네가 가족과 헤어지는 내내 내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네 누나가, 여운이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온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젖은 숨을 길게 내쉰 카론은 눈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눈물 자국은 없어도 눈시울이 아까보다 훨씬 붉었다. 하는 말을 찬찬히 헤아려 보니 카론은 비원에서 가족과 작별한 모습을 보고 대단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가족이라곤 죽은 마녀와 죽인 왕밖에 없는 그가 혈육의 정을 제대로 목격한 건 처음이긴 했다. 그렌과 올리아가 있다곤 하지만 양부모이면서 군신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그렇게 끈끈한 사이는 아니었다.

“필시 돌아가고 싶을 테지. 네가 돌아가고자 한다면 난 막을 자격이 없다. 다만 레온에 관해서는 되도록 데려가지 않기를 바라지만. 물론 네가 데려가고 싶다고 한다면…… 그 또한 나는 막을 자격이 없지. 네 쪽이 더 훌륭한 부모니까 말이다.”

듣자 하니 점점 가관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 무슨 나약한 모습이란 말인가. 어린 온만 데려가도 어쩔 수 없다고? 그게 지금 할 말인가?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갖은 수단을 써서 막을 줄 알았다. 아니면 같이 가겠다고 펄펄 뛰거나.

“내가 신국에 다시 돌아간다고 했어요?”

혹여 제가 그런 소리를 했나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누님을 만난 후로도 고향에 갈 수 있다면 카론을 버리고 가 버리겠다고 한 적은 없었다. 누님을 살려 달라고 협박할 때도 평생 미워할 거라고, 다시는 안 본다고는 했지만. 고국에 영영 돌아간다고는 안 했다. 하물며 신국에서는 스스로 카론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순순하게 보내겠다니. 그것도 아이도 데려가도 된다니. 그럴 수만 있다면 채운과 온이 없어도 된다는 얘긴가? 아니 온이는 되도록 데려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으니. 즉 웬만하면 채운 혼자서 가 버리란 얘기였다.

이게 무슨 망발인지. 떠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아니 눈곱만큼은 원하긴 해도. 고국에 계신 부모 형제와 애간장 녹아내리는 작별 인사를 나누고 왔더니 버팀목이 되어야 할 부군 양반이 헛된 짐작으로 별 같지도 않은 애수와 고뇌에 빠져 허우적대는 걸 어떻게 응징해야 할까.

일단 쓸모없는 입부터 때릴까, 아니면 하라고 시킨 적도 없는 제 생각으로 두뇌를 낭비하니 머리채를 잡아 뜯을까. 아니 전혀 사내답지 못한 소심함을 탓하며 허투루 달고 있는 가랑이 물건부터 혼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곰곰이 따지는 사이 카론은 쓴웃음을 삼켰다.

“폐하는, 폐하는 내가 돌아가길 원합니까?”

“아니 내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바란다.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내 말은, 별일 없이 건강하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늙어서 죽을 때까지란 말이다.”

“그렇게 하지요.”

“네가 떠난다고 해도 나는 너를 붙잡을 자격이 전혀 없…… 잠깐.”

바보처럼 눈을 가리고 입술을 벌벌 떨던 자가 갑자기 손을 뗐다. 빨갛게 충혈된 눈을 깜빡이던 그의 미간에 깊은 주름을 생겼다.

“마른 울음은 처음 보았습니다. 눈물이 없는 대신에 눈이 아주 빨개요.”

“아니 내 눈이 문제가 아니라 방금 뭐라고 했나?”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뭐를?”

이런 아둔한 작자를 보았나. 성질이 나는 한편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카론은 더욱 혼란스러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일 없이 건강하게 지내다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여기서 살 겁니다.”

“여기 남겠다고? 죽을 때까지?”

“네.”

멍한 눈길로 채운을 잠시 바라보던 카론은 고개 방향을 반대로 살짝 바꾸면서 한마디 했다.

“……왜?”

“왜라니요?”

“그러니까 왜지? 여긴 네 나라가 아니고 네 가족도 없고. 너는 요정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거긴 너를 아끼는 가족도 있고 아직 너를 사랑하는 약혼자도 있다. 레온은 원한다면 데려가도 나는 막지 못해. 그런데 왜?”

채운은 살짝 놀랐다. 구구절절 하는 말이 다 사실이긴 했다. 그런데 긍지 높은 황제가 직접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구차하고 가여웠다. 지금껏 자신이 너무 냉담하게 굴었나? 스스로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카론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여기도 내 나라입니다. 가족도 있지요. 폐하와 온. 온이는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아버지 없이 혼자 기르지 않아요.”

“그자가 너는 받아들여도 레온을 박대할 거란 말인가.”

카론의 상상력은 채운의 예상과는 또 다르게 흘렀다.

“친자도 학대하는 놈들이 널렸는데 의붓자식은 더하겠지.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정도 아이를 학대하나? 너를 봐서는 안 그럴 것 같은데.”

“요정이 아니라 신국 사람입니다. 신국에도 여러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나는 폐하 외에 다른 사람을 온의 아버지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레온은 두고 가겠다는 건가?”

마음이 아픈 건 아픈 거고 속이 터지는 건 터지는 거였다. 아무리 말을 해도 어떻게든 여기서 살겠다는 결론만은 아니라고 철석같이 믿는 황제 놈을 향해 기어이 큰소리가 나가고 말았다.

“이 바보야! 아까부터 여기서 살겠다고 하잖아! 왜 자꾸 온이를 데리고 가라, 데리고 가지 말라고만 해! 온이만 있으면 나는 없어도 됩니까?”

얼어붙은 상대가 주춤하는 사이 채운은 듬직한 몸통을 꽉 끌어안았다.

“폐하는 내 거야. 폐하 없이 아무 데도 안 가.”

“채운?”

“어떻게 얻은 다정한 [부군]인데. 얼마나 힘겹게 여기까지 왔는데. 아까워서 못 버려요. 절대로 안 버려. 평생 데리고 살 거야.”

꽉 껴안은 든든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혹시나 또 괜한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떼어놓으려 할까 봐서 손톱을 콕 세워서 너른 등판을 꽉 쥐어짰다.

“내 거야. 내 거라고. 미워도 옆에 두고 미워할 거야.”

“아.”

그제야 채운의 뜻을 알아들은 건지 카론이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풀어져 있던 그의 두 팔이 이내 채운의 등과 허리에 휘감겼다.

“채운.”

“태손이 나를 원해도 나는 안 좋아해요. 얼굴도 잊어버렸어. 이제 관심 없어요.”

전신을 눌러오는 조임에 따뜻한 안도감을 느꼈다.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익숙한 내음을 맡으며 심호흡을 거듭한 다음 채운은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내려다보느라 살짝 그늘이 진 카론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눈가는 시뻘겋고 안구는 물을 먹은 듯 촉촉했다. 그러나 떨림은 사라졌다. 대신에 단단함이 더해졌다.

“그렇군. 나는 네 것이로군.”

“이제 알았어요?”

“그래. 바보처럼 이제 알았다.”

엷은 웃음이 머금은 채로 카론은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눈 깜짝할 새에 제가 들은 것이 환각처럼 사라질까 두렵기라도 한 걸까. 마치 확인하는 듯하여 채운은 다시 한번 단단히 쐐기를 박았다.

“세상은 폐하의 것이고 폐하는 내 것입니다. 그러니 혼자서 엉뚱하고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으세요. 알았어요?”

“알았다. 내 야심 찬 황후께서 그렇게 명하신다면.”

벅찬 음성이 되돌아왔다.

“그럼 어디 한번 시험해 보지요.”

채운은 입술을 쭉 내밀었다.

“뽀뽀하세요.”

“분부대로.”

씩 웃은 카론은 바로 입술을 겹쳤다. 다소 까칠한 입술이 닿자마자 더운 입김이 끼쳤다. 살짝 긴장한 사이 보드라운 혀가 벌어진 입술을 더 가르며 깊게 들어왔다.

뽀뽀하라고 했지 깊은 접문을 하라곤 안 했는데. 그래도 당연한 듯이 깊어지는 입맞춤이 싫지 않았다. 당당하게 명을 했으니 부끄럽다고 빼기도 싫었다.

젖은 혀와 입술이 서로를 탐하는 동안 숨이 빠르게 가빠왔다. 아픈 바람에 한참 입맞춤을 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들러붙을 듯이 꽉 껴안고 있는 탓도 컸다. 그래도 서로에게 얽힌 팔이 느슨해지진 않았다.

“후…… 채운.”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다 긁히는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 카론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머금었다. 그러면서 채운을 한쪽으로 이끌었다.

뒤로 물러서다가 종아리에 뭐가 닿자마자 자연스럽게 뒤로 쓰러졌다. 황제의 집무실을 방문하는 사람이 사용하는 길고 큰 의자였다. 크고 넉넉하기에 채운은 쏙 들어가고도 남았다. 카론이 눕기에는 길이와 너비가 좁았는데 몸을 섞지 못한 정도는 아니었다.

뜨거운 혀가 헐떡이는 입술을 떠나 턱 모서리를 핥고 귓불까지 이어졌다. 뾰족한 끝이 귓바퀴 속을 살짝 건드렸을 때 등허리가 전율했다.

“하아…… 카론.”

불편하게 겹쳐졌던 다리를 양쪽으로 빼내어 황제의 두툼한 허리를 감았다. 아까는 잠잠하던 부위가 지금은 바위처럼 묵직해져서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도 아찔한 위치를 압박했다.

“앗…… 흐.”

이상하게도 열감이 너무 빨리 차올랐다. 제 것 또한 딱딱해지는 걸 느낀 채운은 저도 모르게 아래를 확인하며 얼굴을 붉혔다. 막 목 언저리를 핥고 깨물던 카론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황후 폐하?”

“으응…….”

얄미운 물음을 대단히 차분하게 하는 통에 채운은 알아서 하라고 답할 기회를 놓쳤다. 농담이 아닌지 아직 붉게 충혈된 카론의 눈은 굉장히 진중했다.

사경을 헤매다가 어제 일어난 상황이라 정말로 되는지는 몰랐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의원 올리아에게 넌지시 합궁 여부를 물어봐도 대답은 아마 미친놈을 보는 눈길로 대신할 터.

뽀뽀는 할 만큼 했다. 대낮이고 장소도 부적절하다. 이쯤에서 그만해도 된다. 아니 그만해야 했다. 그런데 혓바닥이라는 놈이 달큼한 입맞춤에 그만 미치고 말았다.

“해도 돼요.”

“……여기서?”

“으응…… 음.”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반응으로 충분했다. 카론의 손이 셔츠 자락을 빼내고 바지 단추를 풀었다. 크고 따뜻한 손바닥이 마른 배에 닿자 절로 한숨이 샜다.

허리께를 조심스럽게 타고 올라온 손은 이내 가슴에 난 유실을 더듬었다. 그러면서 입맞춤이 다시 이어졌다. 터질 듯이 부푼 황제의 욕망이 똑같이 바짝 성난 황후의 욕망 위에 얹어졌다.

아찔한 감탄을 터트리고 싶어도 입술이 맞닿아 있어 불가능했다. 대신에 뻗어 굳건한 목에 감았다. 묵직한 체중 덕에 의자 안으로 더 깊이 가라앉았다. 곧 다가올 열락을 기대하는 순간, 카론이 입맞춤을 끊으며 일어섰다.

“왜?”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한 채운이 흐트러진 셔츠를 추스르며 몸을 일으켰다. 카론이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가 놓으면서 속삭였다.

“밤에. 정식으로.”

혼인한 사이에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말인데도 이상하게 야릇하고 부끄러웠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끄덕이며 셔츠 단추를 잠갔다.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손끝이 무뎠고 작은 단추가 자꾸 미끄러졌다.

“내가 할게.”

카론이 손수 단추를 잠그는 사이 채운은 살짝 흐트러진 금발을 발견했다. 손을 들어 넘겨주자 카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채운은 고개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쪽.

대담하게 황제의 입술을 훔쳤다. 청금안이 크게 벌어졌다. 잠시 멍하게 있던 그의 눈빛에 음험한 욕망이 깃들기 전에 채운은 벌떡 일어났다.

“밤에 보아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문 쪽으로 향하는 순간에도 뜨거운 시선이 등을 지졌다.

* * *

초저녁에 온을 재우자마자 카론이 능구렁이처럼 스르륵 나타나 채운을 휘감았다.

“내 침전으로 가자.”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라서 아직 준비를 다 하지 못했다.

“먼저 가서 기다려요. 준비하고 바로 갈 테니.”

“같이 갈 거다. 중간에 어떤 놈의 훼방도 받고 싶지 않아.”

“아이처럼 보채지 말고요, 응?”

턱을 들고 살포시 웃었다. 이미 정염이 서렸던 눈빛이 순식간에 위험한 맹수처럼 변했다. 가슴을 슬쩍 떠밀며 물러서자 흐읍 들이마시는 거친 숨에 공기마저 떨렸다.

“알겠다.”

문 앞에 선 카론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오래 기다리지 못해.”

“알았어요.”

그가 나간 후에 채운은 얼른 욕실로 뛰어가 미리 준비한 더운물을 끼얹어 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고운 향이 나는 비누도 잔뜩 썼다. 무엇보다 머리를 곱게 빗어 내렸다. 싹둑 잘랐던 머리카락은 이제 어깨에 살짝 닿았다. 살랑살랑 흔들리도록 신경 써서 빗질한 후에 품이 넉넉한 흰 드레스를 입었다. 머리를 자른 이후로 내내 라테시온식 남장을 하였기에 이를 입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위에 도톰한 덧옷을 입고 허리띠를 꼭 맸다. 보드라운 가죽을 써서 발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실내화를 신고 종종거리며 카론의 침전으로 향했다.

문 앞에는 시종이 없었다. 별로 개의치 않고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실에도 사람이 없었다. 문을 꼼꼼히 닫았다. 그대로 가려다가 문고리 아래 있는 걸이를 걸었다. 오늘은 방해받을 수 없었다.

사위가 너무 조용하였다. 딴에는 서둘렀는데 혹시 카론이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떴나 싶어서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카론?”

문 뒤에서 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카론이었다.

“앗!”

달칵.

채운을 휙 잡아당겨 안으로 들인 카론은 좀 전에 채운이 그랬던 것처럼 문을 단단히 잠갔다. 그가 걸친 건 바지뿐이었다. 흉터 자국과 핏줄이 군데군데 불거진 근육질 상체가 불빛 아래서 꿈틀거렸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호처럼 담대하면서도 느긋하게 다가오는 광경에 하복부 언저리가 욱신댔다. 심부에서부터 뻗어 나온 열기가 폐부와 하부에 금방 불을 붙였다.

침대에 올라오는 내내 금색이 깃든 푸른 눈이 번뜩였다. 대들보만큼 든든한 상체를 사지로 받힌 채 카론은 채운을 잠시 노려봤다.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싫어요?”

“싫진 않은데…… 혹시 내가 또 뭘 잘못해서 혼나는 건가?”

긴 머리에 드레스를 입으면 단순히 좋아할 줄 알았다. 아래를 슬쩍 보니 흉악한 도깨비방망이가 바지춤을 뚫고 나올 기세였다. 욕정이 치솟은 중에도 섣불리 달려드는 대신에 눈치를 먼저 보았다. 채운의 변화에 민감해서 약간 기특하기도 하면서 딴에는 좋아할 줄 알고 모처럼 단장했는데 생뚱맞은 얘기를 꺼내니 민망했다.

“잘못한 거 없어요. 그냥 입고 싶어서 입은 건데. 싫다니. 잠시 기다려요. 갈아입을게요.”

“아니, 그냥 입은 거라면 이대로 있어.”

일어서려던 그대로 카론의 품에 갇혔다. 한쪽 뺨이 불룩한 대흉근에 닿았다. 단단해도 알맞게 뜨거워서 기분이 좋았다.

“넌 어떤 모습이라도 예뻐. 그러니까 갈아입지 마. 더는 못 기다려.”

후자가 본심이어도 전자가 거짓은 아니었다. 카론의 눈빛이 너무나도 위험하게 빛나고 있으니. 심부가 저릿하고 전신에 긴장이 돌았다. 숨은 더워지고 등허리는 벌써 다글다글 끓었다.

뜨거운 입술이 이마에 안착했다. 옆선을 타고 내려오다 눈가에 촉촉한 입김이 닿고 뒤이어 광대와 귀 언저리를 훑었다. 턱관절을 타고 내려오다 맨 아래 뾰족한 봉우리에 이르자 매끈한 혀가 긴장한 피부를 간지럽혔다.

입맞춤은 목을 타고 아래로 이어졌다. 동시에 크고 뜨거운 손이 발목 언저리에 닿더니 드레스 자락을 슬그머니 끌어 올렸다. 종아리를 부드럽게 스친 손은 오금을 살짝 눌렀다가 지체 없이 바로 허벅다리로 올라왔다.

“하아.”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숨은 가쁘고 머리에 열기가 오르는 것과 동시에 관절의 긴장이 풀리며 다리가 더 벌어졌다. 카론은 욕망이 응축된 은밀한 부근이 제 옥좌인 양 느긋이 자리를 잡았다.

불길은 삽시간에 두 사람을 에워쌌다.

카론은 전희에 진득하게 몰두할 수 없었다. 과거에 한 차례 좌절된 욕망이 너무나도 컸다. 그리고 자제할 수 있게 협조해야 할 채운은 도리어 부추기기만 했다. 연결은 금방 이루어졌다.

“응! 앗! 카론…… 잠시…… 아.”

“젠장.”

도대체 이 혼내듯 야한 차림은 무엇인가. 머리카락도 제법 길었다. 서궁 시절을 일부러 상기시키면서도 거절치 않고 유혹하는 통에 이성이 날아갈 지경이었다.

거친 행위가 지나쳐 폭력 수준에 이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하반신의 난폭함을 다스리긴 힘들었다.

“아앗!”

등에서 뻗은 열기가 뒷덜미에 모여 활활 타올랐다. 폐에 더운 기운이 가득 차서 명치가 욱신댔다.

“빌어먹을…….”

닿아 오는 눈을 흘기면서 아랫입술을 쪽쪽 빠는 덕에 정염이 꺼질 새가 없었다.

“아앗! 앙! 흐윽!”

거칠게 쳐올리자 채운이 울상을 지었다. 야무진 손으로 카론의 어깨를 밀어내려고 애를 썼다.

“처…… 천천히…… 아윽.”

찡그린 눈가에 맺힌 건 고통이 아니라 지독한 쾌락이었다. 금은화의 효능은 실로 탁월하여서 현재 독의 흔적도 싹 사라지고 출산으로 인한 여파도 아예 지워 버렸다. 경쾌한 몸이 얼마나 반갑던지.

“아윽!”

“아파?”

“……으응…… 아프진 않은데…… 너무…… 깊어요.”

파르르 덜리는 눈가에 카론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따뜻한 입맞춤에 속눈썹이 절로 팔랑거리면서 카론의 입술을 간지럽혔다.

“으아…… 하응…… ♬♩…… ♫.”

가냘픈 숨을 내쉬던 채운은 쾌락을 참지 못하고 결국 요정말을 하기 시작했다. 새의 지저귐처럼 높고 낮은 음률은 평소에도 귀에 달가웠는데…… 정사 중 쾌락에 깃든 목소리는 비할 데 없는, 단연코 선율의 절정이었다. 혀끝을 적시는 달콤한 눈물은 환희의 정수였다.

“천천히…… 제발…… 카론.”

“이 이상은 무리야.”

귓가에 들려오는 낮고 거친 음성에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었다.

“큭! 이것 봐…… 또 나를 부추기잖아. 내 것을 잘라먹을 기세인데.”

“나빠…… ♬♩♪♬♬…… 나빠요…… 앗! 으응…….”

탓하는 손목을 쥔 카론이 이를 세워 손목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럴 때마다 품에 안긴 채운이 새처럼 아름답게 울었다. 강하게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아찔한 조임이 이어졌다.

빨라서 힘들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붉은 입구는 카론이 물러서는 걸 전혀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움직일 때마다 기둥에 들러붙었다. 순수하고 우아한 황후에게 이렇게 야한 기관이 있음은 오로지 카론만이 아는 사실이었다.

“앗…… 하윽.”

“크윽.”

거센 몸짓에 견디길 버거워하는 하얀 몸을 끌어안은 카론은 깊은 곳에 제 흔적을 새겼다.

두 번째였다. 입으로는 싫다면서도 카론의 허리에 단단히 감긴 채운의 다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카론을 더 깊은 곳으로 초대하려 들었다.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카론은 제게 들러붙는 채운에게 입을 맞추었다. 혀를 맞대고 숨결을 마시는 동안 몸의 안과 밖이 모두 채운으로 채워졌다.

“널 사랑해.”

오늘따라 듣기에 참으로 기분이 좋았다. 채운은 살포시 웃으며 카론의 손바닥 쪽으로 얼굴을 기울였다. 이 손을 두려워하던 때가 아득했다.

달큼하게 열이 오른 작은 따귀가 카론의 손안에 쏙 들어왔다. 교태와 아양을 떠는 채운은 영락없이 발정이 난 고양이였다. 정염에 젖은 야한 눈빛으로 카론을 응시하던 그는 이내 배시시 웃었다.

“아직…… 조금 밉지만…… 그래도 당신하고만 하고 싶어.”

“뭐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카론은 깜짝 놀라 잠시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더불어 제가 짐작한 목적어가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이런 부끄러운 짓 말이에요.”

“미치겠군.”

깜찍한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는 제 하반신이 참 놀라웠다. 요 사랑스러운 정령에 완전히 홀려 버린 탓이었다.

“하…….”

어처구니없는 한숨이 일었다.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지 놈이 배시시 웃으면서 카론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숙이자 촉촉한 팔이 목에 나긋하게 감겼다.

“내가 폐하를 사랑하지 않아도 폐하는 평생 나만 사랑해야 해요. 이런 야한 짓은 나랑만 해야 해요. 폐하는 내 거니까요. 알았지요?”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바다 마녀 세이렌의 노래와 같았다. 슬슬 위험한 지경에 끌려간다는 경고와 함께 강렬한 음욕이 치솟아 후두부를 강타했다. 턱관절에 힘이 들어갔다.

뿌드득.

어금니가 갈렸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네가…… 자초한 거야.”

흉악한 속삭임에 채운은 눈꺼풀을 살포시 접었다 폈다. 풍성한 속눈썹으로 카론의 욕망을 살랑살랑 부채질했다. 마치 그것을 바라는 것처럼.

뒤이은 행위는 정사라 부르기도 어려울 만큼 난폭하고 거칠었다. 그렇게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주겠다는 비틀린 성미에 무시무시한 음욕이 뒤섞인 결과였다.

“아아앙! 아앗! 읏!”

비음 섞인 교성이 한껏 고조되었다. 정작 도발한 사람이 팔다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카론을 밀쳐내려 애썼다.

퍽퍽!

“앗! 으응!”

연이은 몸짓에 고개를 세차게 도리질 치던 채운은 손톱을 세워 카론의 어깨와 팔을 긁었다.

“아으……!”

“큭.”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눈가를 일그러뜨린 카론은 채찍을 맞은 숫말처럼 더 강하게 몰아붙이기 위해 몸을 들었다. 허리를 바로 잡으려고 잠시 뜸을 들인 순간, 채운이 온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츄륵.

붉게 벌어진 구멍에서 성난 성기가 빠졌다. 빠끔 벌어진 안쪽에서 축축한 액과 희멀건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으…… 아윽…… 으윽.”

마치 악마를 본 듯 경악한 채운이 황급히 기어 달아나려고 했다. 실제로 숨을 돌리는 중에 침대 가장자리까지 도달했다.

“바…… 바보야…… 이건 너무…….”

“안 돼. 아직 멀었어.”

허리가 잘린 귀뚜라미처럼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다리는 여전히 카론이 쉽게 잡을 범위에 있었다. 발목을 꽉 잡아 쭉 당겼다.

“흑.”

옅은 흐느낌과 함께 풍성한 흑발이 흔들렸다. 드레스는 이미 가슴까지 올라가 팔을 제외한 전신이 훤히 드러났다.

“아……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눈물이 그렁한 채운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이내 한숨을 뱉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잠시 다른 쪽을 봤다가 옆 눈으로 카론을 슬쩍 보며 속삭였다.

“이렇게…… 화내지 말고…… 예뻐만 해 주세요.”

보이지 않는 단도가 카론의 심장에 쿡 박혔다. 화를 내는 게 전혀 아닌데. 이제는 어쩐지 화가 났다. 이 요사스러운 요정이 욕정을 다스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채운과 아예 한 몸으로 태어나지 못해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채운의 양손에 가닥가닥 끼웠다. 침대에 내리꽂힌 아름다운 요정 황후는 조금 무서운 듯 얼굴을 굳혔다. 반대로 허리에 감긴 다리에는 더욱 힘을 주었다.

“그럴 거죠…… 카론?”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데 뭐가 있어.”

“미치면 안…… 읍.”

요망한 입을 맞을 수단은 입맞춤뿐이었다. 채운과 말이 통해서 기쁜지 혹은 환장할 지경인지 분간이 어려웠다. 아니면 둘 다 일지도.

혀를 얽으면서 다시 푹 쑤셔 넣었다.

“앗.”

가녀린 교성이 터졌다. 날씬한 허리가 뒤로 휘었다.

퍽퍽퍽.

화내지 말라고 말리던 혓바닥과 달리 아래에 자리 잡은 빨간 음욕의 입구는 카론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채운의 성기가 달싹거렸다. 여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구실 외에는 대단한 기능을 숨긴 것 같지 않은 얌전한 모양새의 음경은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하얀 액을 토해 냈다. 멀건 선액을 본 적은 있어도 하얀 정액을 본 건 처음이었다.

“으…… 으읏.”

행위 중에 채운이 절정에 올랐다는 증거였다. 비록 카론의 절정과는 다르게 연결된 하부를 뒤틀며 환희하는 모습이지만.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탄탄한 근육으로 뒤덮인 하복부가 뻐근할 만큼 힘을 받은 것도 모자라 더욱더 부풀었다. 이토록 굵고 단단해진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상대의 조임도 강해졌다.

“아!”

기뻐하며 절정에 오른 모습이 무척 예뻤다. 제게 길들어 쾌락에 몸부림치며 결국은 카론에게 매달려 오는 모습이. 돌아 버릴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흐응!”

얼마 되지 않은 정액이 희멀겋게 번진 배는 카론이 제 분신을 박을 때마다 들썩였다. 장기가 밀려 올라가면서 숨이 벅찬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아무래도 서로의 체격 차였다.

“흐윽…… 아!”

채운은 보통 여자보단 키가 더 컸고 남자보다는 조금 가녀렸다. 맨 처음 그의 성별을 혼동한 이유가 붉게 물든 뺨을 움찔거리는 고운 얼굴에만 있지는 않았다. 뒤늦게 몇 번이고 몸을 겹친 후, 목을 뒤로 꺾을 때만 살짝 드러나는 완만한 목젖과 반듯한 어깨가 들어왔다.

카론이 파고드는 만큼 늘씬한 다리를 한껏 벌린 채운은 종종 허리를 뒤틀며 하체에 힘을 주었다. 그는 이젠 완전히 회복하여 웬만한 가죽 줄보다 강한 힘으로 파고든 기둥을 조였다.

“큭.”

남근이 이대로 석둑 잘릴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닐지도 몰랐다. 뒤이은 쾌감은 정도가 지나쳐 때때로 시야가 흐려졌다. 하반신에서부터 올라오는 강렬한 자극은 카론의 후두부를 강타했다. 자칫 정신을 놓을 뻔했다. 상체를 지탱하던 팔이 찌르르 떨렸다.

“으응.”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르는 줄도 모르는 채운은 정사로 인해 흠뻑 젖은 몸을 뒤틀면서 아양을 떨었다. 일부러 떨려고 떠는 것 같지도 않았다. 멍하게 흐린 눈으로 이쪽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살짝살짝 휘젓는 행동이 그저 지나치게 색정적일 뿐이었다.

“예뻐…… 그렇게 아양을 떨지 않아도 넌 너무 예뻐. 심장이 아플 만큼. 그러니까 제발 봐줘.”

“흐응.”

지나친 사랑이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카론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채운이 없다면 필경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입술을 겹치고 혀를 얽으면서 깊게 깨달았다. 정말로 채운은 제 주인이었다.

더 깊은 곳…… 더 안쪽으로. 미지의 영역을 탐색하던 귀두는 기어이 무언가를 비집고 들어갔다. 붉게 맥동하는 내벽과 다른, 뜨거우면서도 한없이 포근한 미지의 영역으로.

“아아…… 아…… 아!”

채운은 마치 백조의 마지막 울음처럼 가녀리고 길게 울었다. 직후 거센 조임이 카론을 덮쳤다. 이대로 물건을 짓이기는 것 같은 강한 압박에 몰린 카론은 더는 참지 못하고 정염을 모조리 토해 냈다.

“크윽…… 헉.”

“아…… 으.”

한계까지 들어 올려졌던 상체가 스르륵 아래로 가라앉았다. 동시에 내내 카론의 허리를 조이고 있던 다리도 풀렸다.

“허억, 허억.”

사정의 순간 잔뜩 긴장했던 카론 또한 이윽고 침상 위로, 정확하게는 이미 혼절한 듯 쓰러진 채운의 위로 무너졌다. 가슴을 태우는 열기가 제 몸에서 나는 건지, 혹은 상대에게서 나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땀에 젖은 하얀 가슴에 뺨을 대자 건강한 심장 소리가 들렸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대신 나를 떠나지 마라. 나를 버리지 마. 나는 이제 네 개에 불과해. 네가 없으면 살 수 없다.”

힘을 잃은 몸을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사랑스럽기 짝이 없는 이 요정은, 카론이 생애에 걸쳐 이룩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다. 목숨이었다.

“사랑해.”

채운이 자신을 미워해도 상관없다.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괜찮았다. 그저 제가 곁에 있는 걸 허락해 준 것으로, 벌써 잠든 그의 귓가에 사랑을 속삭일 수 있어서 벅찰 만큼 기쁘고 행복했다.

‘그렇군. 이게 행복이었어.’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카론의 입매에 엷은 호를 그려냈다. 평생토록 지워지지 않을 영원한 행복의 표식을.

* * *

늦은 아침이었다. 커튼 틈 사이에서 반짝이는 햇살이 그렇게 알려 주었다. 어둑어둑한 방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간밤에 격정적인 정사를 벌인 까닭에 채운은 온몸이 느른했다.

“흐음.”

절로 한숨이 샜다. 꿈지럭거리며 좀 더 눈을 붙이려는 찰나, 제가 깔고 있는 두툼한 것이 베개가 아님을 깨달았다.

“으응?”

고개를 살짝 들자, 청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따뜻한 베개의 정체는 상체를 비스듬하게 세운 카론이었다.

“깼나?”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음성이었다. 약간 마르고 거칠면서도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오전부터 정사를 벌인 일은 종종 있지만, 이렇게 나신을 포개고 있는 적은 처음이었다. 참으로 게으르고 부정(不淨)했다. 새삼 부끄러워졌다.

“으음.”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였다. 탄탄한 가슴이 이마에 닿았다. 채운이 괜히 자리를 잡으며 꿈틀거리는 동안 카론은 팔을 둘러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깼는데도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불끈거리면서 달려드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채운을 가만히 끌어안고 도닥였다.

“……왜 아직도…… 있어요?”

“있으면 안 되나?”

“그건…… 아니지만.”

내내 교성을 지르느라 잔뜩 쉬어 버린 목소리가 부끄러워 말을 길게 하지 못했다. 카론은 다 하지 못한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가끔은 너와 함께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

고개를 기울인 그는 채운의 머리에 코를 박았다. 카론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쉴 때마다 두툼한 가슴이 오르내렸고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도 살랑살랑 흔들렸다.

정말로 느긋한 아침이었다. 딱 붙어 있어서 살의 온도가 똑같았다. 그래서 감각의 경계가 흐려졌다. 움직이지만 않으면 꼭 한 몸이 된 느낌이었다. 뜨끈뜨끈한 연결이 썩 마음이 들어서 채운은 가만가만 눈을 감았다.

힘찬 고동 소리가 두꺼운 흉근에 붙인 채운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때때로 카론이 목을 고르는 울림도 났다. 노곤해서 한숨 더 자고 싶은 채운과 달리 카론은 쉬이 잠들 기세가 아니었다.

“무슨 생각…… 합니까?”

“듣고 싶어?”

“으음.”

콧김으로 답했다. 낮게 갈라진 카론의 목소리를 귀에 딱 붙은 흉통을 통해 들으니 기분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느긋하게 풀어지던 기분은 생각지 못한 대답과 함께 살짝 얼어붙었다.

“네가 다른 자를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야. 요정 세계에서 한번 겪어 봤더니 기분이 아주 더러웠거든. 그러니 대책을 세워야겠어. 상대를 사고로 위장하여 몰래 죽이고 시치미를 뗄지, 아니면 …….”

“좋은 아침부터 왜 그런 생각을 합니까?”

채운이 고개를 벌떡 세웠다.

아침부터 불길한 얘기가 떠올랐다. 카론의 옛 정인인 휼리는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려서 끔찍한 말로를 맞았다. 사지가 토막 나는 능지처참에 처했을 뿐 아니라 그 시신을 들판에 뿌렸다. 그 안엔 태어나지 못한 어린 사체도 있으리라.

등뼈가 오싹했다. 느긋함이고 따뜻함이고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나도 그렇게 합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그만인데 익히 들은 바가 있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라니?”

“휼리 얘기를 들었습니다.”

휼리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카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몸을 단단하게 감던 팔도 떨어졌다. 대신에 그는 몸을 바로 세워 앉았다. 동시에 채운도 조금 물려서 앉았다. 기분 좋던 온기가 사라지고 대신에 휑한 바람이 침대 속으로 들어왔다.

“누구에게 들었지?”

“휼레에게 들었습니다.”

“아, 휼리 동생이라고 했지. 그래서 그자가 뭐라고 했나?”

상대의 눈빛이 냉랭하고 목소리도 딱딱했다. 하지만 여전히 침대였고 둘은 나신이었다. 황제의 우람한 체구에는 긴장이나 흥분의 기색을 찾기 어려웠다. 카론을 제 것이라 천명하고 그도 동의하였어도 황후 채운이 다른 자에게 눈을 돌린다면 진노를 면하기 어려웠다.

하필 혼이 달아날 것 같이 황홀한 밤을 보내고 나서 이런 생각에 잠겼을까. 잔악한 천성 탓인가.

채운은 들은 대로 들려주었다. 카론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약간 굳었다가 조금 놀랐다가 이내엔 진노를 억누르는, 험악한 표정이 되었다.

“내 아이?”

“예.”

언젠가 아이 문제는 꼭 짚고 넘어가려고 했다. 채운이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일은 없을 터. 하지만 사는 동안 혹시라도 오해를 사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불화가 온이에게까지 미쳐 그 아이의 심신이 상하는 일이 있다면 절대로 눈앞의 사내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럴 기미가 있는 놈이면 지금부터 확실히 따져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거나 아니면 아예 다른 아이를 낳지 않는 강수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식이 하나뿐이면 후계를 위해서라도 안 건드릴 테니.

“휼리가 임신했다고? 거기다가 내 아이라고 했어?”

“예. 그렇게 들었어요.”

흉악한 눈빛을 한 카론은 분을 참지 못하고 침대를 박차고 나갔다. 나신으로 방 중앙까지 터벅터벅 걸어간 그는 바닥에 떨어진 바지를 집어 다리를 꿰었다. 뒤이어 셔츠를 대강 걸치는 품세가 꼭 나갈 기세였다.

“어디 갑니까?”

“그 개자식의 혓바닥을 잘라 내러.”

바지춤을 사납게 정리한 그는 셔츠 단추도 대강 잠근 다음 신을 찾았다. 한 짝은 찾았으나 다른 짝이 보이지 않았다. 욕설을 내뱉던 카론은 찾은 신짝을 거칠게 던져 버린 다음 재킷을 집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요.”

“찾아야지.”

채운은 침대 발치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이불이 얇았으면 휘감고 일어났을 텐데. 하필 두툼하여 끌어내기 쉽지 않았다. 침대 기둥을 붙잡은 채로 국부만 간신히 가렸다.

“거짓말…… 입니까?”

“당연히 거짓말이지!”

카론이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채운은 두꺼워도 사람을 가리기엔 한참 모자란 침대 기둥을 붙잡고 움찔했다.

“화내지 말아요.”

“고함쳐서 미안해. 네게 화난 게 아니야.”

“알아요.”

사과를 받아들이자 카론은 긴 숨을 뱉더니 다시 침대로 다가왔다. 뺨을 어루만지는 그의 손에 고개를 실어 주자 이내 이마에 입술이 닿았다. 그가 가까워진 기회를 틈타 채운은 두 팔을 단단한 어깨에 감았다. 약한 힘도 그를 다시 침대에 끌어들이기엔 충분했다.

뒤로 쓰러지는 채운의 나신 위에 카론이 겹쳐졌다. 화가 난 카론은 채운의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을 뱉었다.

“내가 휼리를 죽였다. 그건 사실이야. 직접 목을 쳤어. 믿었던 부하와 놀아났거든.”

황제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정을 통하는 건 큰 죄였다. 그러나 아이는 달랐다. 카론의 자식이라면 모친의 외도만으로 죽이기엔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온만 해도 냉궁에 갇힌 죄인이 품은 자식 아닌가. 온의 존재를 아는 순간부터 무척 다정해졌던지라 휼리를 그렇게 잔인하게 죽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휼리가 임신한 줄 몰랐다. 그게 누구의 자식이든 절대로 내 자식은 아니야.”

“어째서지요? 낳기 전에는 모릅니다.”

카론이 고개를 벌떡 들었다.

“어째서라니? 잔 적이 없으니 당연히 내 자식이 아니지. 내가 아무리 유능한 황제라도 관계없이 자식을 만들 재주는 없어.”

“예? 하지만 휼리는 폐하와 그런 사이라고.”

“그런 사이가 될 뻔했지. 정치적으로 나쁘지 않은 상대였다. 적극적으로 유혹하기도 했고. 어떤 자인가 두고 보려고 황궁을 멋대로 돌아다니게도 했지만 한 적 없어. 낯선 놈과 어떻게 단번에 침대로 들어가나? 천천히 관찰했지. 슬슬 마음을 정하려는 시기에 다른 놈과 엉겨 붙은 꼴을 목격했어. 뒤로는 그런 의도로 접근하는 놈은 다 역겨워져서 결과적으로 한 적 없다.”

오해받아서 몹시도 억울한지 카론은 재차 강조했다.

“내 물건을 집어넣은 구멍은 오로지 네 가랑이 사이에 있는 구멍뿐이야. 다른 어떤 인간도, 짐승도, 하물며 물건에도 내 걸 집어넣은 적이 없어.”

“그…… 그렇게 부끄러운 말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분노로 얼굴을 붉힌 카론과 다르게 채운은 민망함과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귀 끝까지 홧홧하여 차마 눈길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하복부와 허벅다리 사이가 오글거려 다리를 꼼지락댔다. 숫총각임을 어쩜 저렇게 부끄러운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

‘아니 그전에 숫총각이라고?’

물론 채운도 숫총각이었다. 입궁 준비 중에 이런저런 방중술을 배우는 중에도 어디까지나 말과 글, 그림으로 배웠을 뿐, 몸은 고이 보존했다. 그래도 배운 건 배운 건데. 그런 채운이 차마 따라가기 어려운 방중술과 각종 낯 뜨거운 애무를 구사하는 카론이 숫총각일 리가. 얼마나 음탕하고 정력적인지 처음에는 머리가 가랑이에 달린 오랑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째서지요?”

“뭐가?”

“왜 나뿐이지요? 이렇게 훌륭한데.”

그러면서 아래를 슬쩍 봤다. 바지로 다 가리지 못한 실한 방망이가 허벅지를 꾹 눌렀다.

“내가 다른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해? 너도 다른 사람이 없잖아. 아니 있었나? 타이손이랑 잤어?”

뒤에 붙은 물음이 위험하게 들렸다. 채운은 금방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나도 폐하뿐입니다.”

“그러리라 믿는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카론이 몸에서 힘을 뺐다. 묵직한 체중이 채운에게 온전히 쏟아졌다. 피부가 다시 들러붙고 체온이 천천히 합쳐지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다른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여태껏 다른 사람은 없다. 휼리와도 당장 한 것이 아니라 하려고 마음을 먹는 과정이 필요했다. 다른 남자와 달리 배를 맞추는 데 대단히 신중한 성미라는 얘기였다. 심지어 그런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을 역겨워하는 사람이 왜 자신은 보자마자 잡아 와서는 그날 저녁 바로 다리를 벌렸을까?

휼리처럼 그럴 마음이 들 때까지 저를 황궁에서 지내게 하고 두고 보았으면 저도 천천히 이국을 배우고 훌륭한 용모의 카론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연히 몸을 열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악을 쓰고 피를 흘리며 발악하고 죽으려고 들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런데 나는 왜 데려온 그날 하려고 했습니까?”

“뭐?”

“다른 사람은 길게 두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장 하려고 했지요. 그 때문에 폐하를 아주 아주 미워하게 되었어요. 왜 그랬어요?”

별로 따지는 투는 아니었다. 카론의 허물까지 다 감내하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였다. 그저 뭐가 그를 그리 하도록 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잘 대했더니 배신으로 돌아와서 다른 자에게는 잘 대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저 몸만 취하려고 했다.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채운의 예상은 엉뚱한 반응과 함께 빗나갔다.

“어…… 어?”

허를 찔린 사람처럼 카론은 당황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 푸른 시선이 흔들렸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카론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손으로 입과 턱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왜 그랬지?”

때리고 겁탈한 일을 반성하는 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미안해했을 테니. 대신에 카론은 정말로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을 깨달은 사람처럼 곤혹스러워했다. 잠자코 있자 카론은 혼잣말과 함께 그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은 맑았고 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귀환하던 중에 숨을 돌리려고 말을 달리는 중에 빛기둥을 보았어. 기이한 일이라고 생각했지. 파사 일족이 활동하는 지역이라 사술이라 여겼다. 확인은 해야 했으니. 검을 들고 갔는데 네가 있었어.”

듣는 동안 채운도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거대한 이국의 사내가 달빛에도 태양처럼 빛나는 금발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모습은 잊기 쉬운 광경이 아니었다.

“너는 나를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처음에는 미친 여잔가 했지. 그런데 네가 반짝이는 꽃을 내게 내밀면서 웃을 때…….”

말을 멈춘 카론은 조용히 듣는 채운을 응시했다. 그날의 흔적을 찾듯 시선을 맞춘 후에 카론은 말을 이었다.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다. 넌 순수하고 아름다웠어. 사람이 아닌 듯했어. 그때 가슴이 저릿했던 것 같아. 지금처럼 말이지.”

그는 채운의 손을 잡아 제 명치에 가져다 댔다. 뜨거운 가슴 아래 심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너를 내 것으로 삼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 맞아. 그랬어. 이제 기억이 났어.”

혼란함이 사라진 자리에 단단한 자신감이 자리했다. 그날처럼 빛나는 금발은 한 이국의 사내는 천천히 입술을 겹쳤다.

“분명히 첫눈에 반했던 거야…… 네게.”

부드러운 입맞춤이 점점 깊어졌다. 거짓말쟁이의 혓바닥을 자르러 가겠다던 카론은 어느새 셔츠를 벗는 중이었다.

쪽. 츄웁.

입술이 맞붙었다가 떨어지고 혀가 혀를 희롱하다가 살짝 떨어졌을 때 채운은 옅은 홍조가 든 뺨을 손등으로 식혔다. 그사이 카론은 온전한 나체가 되어 다시 몸을 겹쳐 왔다.

“처음부터 나를 좋아했으면서 왜 아프게 했어요?”

“그때는 한심한 멍청이였거든.”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과 달리 입술엔 뻔뻔한 미소가 걸렸다.

“사랑에 빠진 줄도 모르는 멍청한 바보였어.”

사랑에 빠진 줄도 몰랐던 멍청한 바보 황제가 다시 입술을 겹쳤다. 얄밉고 못됐고 여전히 밉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싫지 않았다. 카론의 체온과 무게가 미움을 조금씩 녹여냈다. 언젠가는 가슴에 응어리진 얼음덩이가 사라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사실은 참혹하고 냉랭했던 시작이 지워지고 이제는 그와 쌓았던 작은 추억이 곳곳에 쌓였다. 신국을 제 발로 등지고 그의 손을 잡을 만큼 충분히.

당당하게 걷다가도 문득 돌아보며 내밀던 손.

위험에 처하면 누구보다 빨리 달려와 자신을 품에 안고 안도하던 품 안.

열망에 흐려져 제 이름을 속삭이던 목소리.

밤에 문득 깨면 작게 들리는 숨결.

그리고 찬란한 햇빛을 망토처럼 두르고 자신을 응시하는 젊은 황제의 청금안.

제가 없으면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못하면서 늠름한 척하는 그에 대한 미운 마음보다 좋은 마음이 컸다. 조만간 속삭일 수 있으리라. 온전한 웃음으로.

나는 당신을 몹시도 귀애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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