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채운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카론이 움직이는 즉시 금위군의 칼날이 그를 갈기갈기 찢을 것이다. 더불어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여운의 죄가 커진다. 황제는 태자의 안위를 위협하는 모든 자를 철저히 짓밟을 터.
“태자 전하.”
채운은 간절히 승원을 바라보았다. 막상 손을 잡은 태자의 눈은 채운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카론을 노려봤다. 똑같이 불빛을 받은 검은 눈은 두려움과 동시에 적개심으로 빛났다.
“저자는 안 된다.”
승원은 카론을 노려보는 채로 냉혹하게 선을 그었다.
“살려만, 살려만 주세요. 평생 태자 전하를 성심으로 모시며 따르겠습니다. 소경으로 살라면, 소경으로, 벙어리로 살라면 벙어리로 살겠습니다. 제발, 제발 살려만 주세요.”
채운이 애끓는 심정으로 애원하였으나 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저자가 나를 향해 검을 든 것을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금위군이 벌써 아바마마께 고했을 거다.”
그러고 보니 금위군 중 일부가 벌써 사라졌다. 환관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황상이 이곳에 나타난다면 카론은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채운은 다급히 몸을 낮추었다. 무릎을 꿇고도 모자라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머리를 땅에 박았다.
“태자 전하…… 제발…….”
[채운! 뭐 하는 거야!]
카론이 외쳤으나 채운은 거듭 고개를 숙였다. 태자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피가 바짝바짝 탔다.
카론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이깟 절쯤 백 번, 천 번 더 할 수 있다. 채운은 애타게 저를 부르는 외침을 외면하면서 차가운 바닥에 거듭 이마를 박았다.
“내가 청할 것이 아니다. 아바마마가 오기 전까지 저자를 곱게 보내는 쪽이 더 나을 거다.”
태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냉혹하게 대했다. 채운은 창백한 낯을 들어 다시 태자를 응시했다. 그는 시선을 멀리 돌렸다. 황상이 나타나면 카론은 죽은 목숨이다. 태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돌려보낸다면 막지 않겠다 했다.
채운은 식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곤 무수한 창끝을 달고 선 카론을 보았다. 보고 싶었노라고, 이리라도 얼굴을 한번 봐서 다행이라는 말 대신 숨을 죽이고 혼백을 쥐어뜯으며 입을 열었다.
[돌아가세요.]
[채운?]
[나는 앞으로 신국에서 살 겁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날뛰던 카론의 기척이 갑자기 사라졌다. 대신에 무겁게 가라앉은 기운이 어느덧 채운의 발치까지 엄습했다. 그가 어떤 시선으로, 어떤 심경으로 저를 보고 있을지. 채운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거짓말이다. 날 보고 말해.]
고요한 물음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이미 피가 흐르는 가슴에 날 선 얼음이 푹푹 꽂혔다. 손끝부터 싸늘하게 얼어 갔다. 온몸의 피가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손발이 꽝꽝 얼어붙었다. 입술도 달달 떨렸다. 시야는 흐리고 귀도 먹먹했다. 들리는 것이라곤 카론의 가라앉은 음성뿐이었다.
[날 봐, 채운.]
카론이 몸을 움직이자 금위군의 창이 더욱 매섭게 조여들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카론이 죽을 것 같았다. 돌아가란 말 대신에 더 모진 말이 필요했다. 마음이 약해지면 아니 된다. 그를 보아서는 아니 된다. 눈물을 흘리면 아니 된다. 둔한 손을 말아 쥐고는 채운은 고개를 돌린 채 외쳤다.
[내가! 내가 한 번이라도 라테시온에서 살고 싶다고 한 적 있어요?]
[……채운?]
[내가 한 번이라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습니까? 온을 낳고 난 이후에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보기 싫은 날이 더 많았습니다.]
시선이 등에 꽂혔다. 청금색의 눈동자가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폐부에서 끔찍한 고통이 일었다. 쥐었던 주먹은 어느새 명치를 꾹 눌렀다. 피를 토하듯 숨을 토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그가 죽으면…… 채운도 살 수 없다.
[신국에 돌아오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드디어 당신을 안 보게 되어서 후련합니다. 간절한 소원을 이루었는데 왜 쫓아와 나를 괴롭힙니까? 왜?]
[……채운.]
[온을 생각하여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신은 제 마지막 부탁마저 듣지 않았군요. 그러니 싫은 겁니다. 평생 내 말을 듣지 않아요. 제멋대로 합니다. 그래서 당신이…… 당신이 싫습니다. 그러니 나를 더는 괴롭히지 말아요. 돌아가세요.]
채운은 끝끝내 카론을 보지 않았다.
[이…… 이럴 리 없어. 네가…… 네가 이럴 리가 없다.]
믿을 수가 없다. 카론은 제가 잘못 들은 것이라 확신했다. 외롭고 괴롭고 슬플 때도, 카론을 원망하며 혐오할 때에도 저를 똑바로 노려보며 악다구니를 쓸지언정 냉혹하게 돌아서지 않았다. 저건 거짓이다. 분명히 거짓이다. 거짓이어야만 했다.
[나를 봐! 나를 보고 얘기해!]
사랑스러운 제 요정이 카론을 보지 않는다. 부르는 말도 듣기도 싫다는 듯이 발길을 돌렸다. 안타까움도 흐느낌도 없다. 그는 곁에 선 타이손과 함께 안으로 향했다.
[채운!]
이대로 그를 놓칠 수 없었다. 저를 겨누는 무수한 칼날도 보이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앞으로 향했다. 그때 가까이 있던 여운이 다시 한번 카론을 막아섰다.
[놔! 채운이 멀어진다!]
카론은 여운을 밀치며 절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냉정한 등뿐. 인형을 만들면서 그리워했던 옛 정인과 함께. 자랑스럽게 소개하던 그놈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놓치기 싫다.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랑스러운 요정이, 아무것도 모르던 제게 사랑을 가르친 요정이, 무정하게 카론을 버리려고 했다. 그를 잃고 살아갈 자신이 없다. 옷자락을 붙잡고 다리에 매달려 애원하고 싶었다.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간절히 염원한 적이 없었다. 미친 마녀가 죽이려고 들었을 때도 그대로 끝이라고만 여겼다. 삶을 혐오하되 저주하진 않았다. 버려진 채 태어났기에 버려짐이 어떤 것이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았다.
멀쩡한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이루어 왔던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것.
끈질기게 이어왔던 삶의 이유가 사라지는 것.
심연의 공포로 절규하게 하는 것
채운, 너는 제 영혼의 주인이라고. 주인 없이는 살 수 없는 저를 이대로 버리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할 기회라도 주길 바랐다. 그림자에도 닿지 못한 채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붙잡고 애원을 했었다면, 그의 발등에 눈물의 키스를 할 찰나의 시간이라도 주어진다면. 이다지도 허망하고 절망스럽진 않을 텐데.
[채운! 돌아와! 채운!]
발악하는 카론을 여운이 말리려 들었으나 불물 가릴 처지가 아닌 카론에게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놔! 채운이 가잖아, 놔!]
거센 힘으로 여운을 기어이 떠밀었다. 서너 발작 앞으로 향하는 순간 금위군이 당황하여 우르르 앞으로 이동했다. 속도를 맞추지 못한 창끝 두어 개는 카론의 등과 어깨에 생채기를 냈다. 도깨비에게 상처를 입혔다가 어떤 무시무시한 원한을 살지 몰라 걱정하던 병사의 안색이 급격하게 흐려졌다. 금위군의 불안을 감지한 대장이 기어이 검을 뽑았다.
“저 무례한 도깨비에게 걸 사슬을 가져와라!”
안으로 향하던 채운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아래로 주륵 흘렀다.
[카론 유스키아 라테시온!]
남은 힘을 다 짜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황제가 된 몸으로 낯선 나라에서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로 죽길 바랍니까? 좋습니다. 그것이 소원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맡길 것도 없습니다. 바로 내가 그대의 목숨을 내가 거둬 가지요! 당신은 나를 강간한 죄인이니까요!]
채운은 승원을 뿌리치고 돌단을 내려왔다. 그리곤 가장 가까이에 선 금위군의 검을 멋대로 뽑았다. 시선은 차마 들지 못한 채 우뚝 멈춘 카론의 발치를 보았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를 향해 다가갔다. 검을 든 손이 후들거렸다. 아니 전신이 덜덜 떨렸다. 일격으로 그를 쓰러트려야 한다. 목숨에 해가 없는 대신 아무런 짓도 하지 못하게. 심장에서 조금 위에. 어깨를 찔러야 한다.
검을 가지고 다가가는 채운을 보고 여운이 경악했다.
“명채운! 지금 무슨 짓이냐? 온의, 네 아이의 아비를 죽일 셈이냐?”
동시에 여운은 카론을 향해서도 소리쳤다.
“제발 진정해라. 말은 몰라도 눈치는 빨랐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아둔한 천치같이 구는 거야? 채운이 검을 가지고 온다. 저 여린 놈이 너를 죽이겠다고 해! 저쪽에 온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도 채운과 생이별한 네 자식을 아비도 없이 크게 만들 셈이야?”
내내 숨을 죽이던 아버지와 다른 식구들이 여운의 말에 그제야 카론의 정체를 알고 기겁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병사들도 경악했다. 대장을 비롯한 전부가 막 태자궁으로 들어서던 태자 승원을 바라보았다. 채운과 함께 걷던 태자도 적잖이 당황한 듯 주춤했다.
“명채운에게 도깨비 서방이?”
병사 중 누군가가 가벼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장의 눈총에 즉시 입을 다물며 뒤로 빠졌으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명가를 빼고는 다들 비슷한 충격에 휩싸였다. 태자의 후궁으로 낙점된 귀인에게 서방이 있는 것도 모자라 둘 사이에 아이까지 낳았다고?
“저…… 저자가 우리 분홍이의?”
식구들도 깜짝 놀랐다. 큰엄마와 엄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카론을 응시했다. 주춤주춤 앞으로 나서는 두 분을 형님들이 간신히 막았다. 그런 형님들의 시선도 카론에게 고정된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 태자의 귀인은 단순히 몸을 버린 정도가 아니었다. 도깨비 신부였다. 심지어 도깨비가 여운을 앞세워 여기까지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런 불길한 자를 귀인으로? 황상께서는 알고 계신단 말인가. 모르신다면 이것은 황가를 기망한 죄로 엄벌을 면치 못한다.
“명채운!”
급전된 상황에 승원이 채운에게 다가왔다. 도깨비 신부가 신랑을 죽이는 참사가 태자궁에서 벌어지게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로 황상의 진노를 산다.
“태자 전하, 제가 거두겠습니다. 도깨비 나라의 사람입니다.”
당혹감이 태자궁을 휩쓰는 그때,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소란이냐!”
황제는 태자궁의 높은 계단 위에 서서 뜰을 내려다보았다. 대장군 여운을 보고 반색하였다가 그녀가 막아선 자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를 따르던 상선이 뭐라 속삭였다.
“도깨비?”
황제의 시선이 다시 카론에게 향했다. 황제의 출현으로 인해 더욱 긴장한 금위군이 일제히 창을 내밀어 카론의 어깨에 걸쳤다. 수십 개의 창이 일제히 날뛰는 그의 어깨를 눌러 기어이 무릎을 꿇렸다. 그러는 중에도 카론은 채운의 이름을 절절히 외쳤다.
[놔! 채운! 이리 와! 와서 날 보고 말해!]
“어찌 된 일이냐? 태자궁에서 검을 빼 들다니?”
황제의 물음은 태자를 향했다. 승원의 낯이 굳었다. 그때 채운은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살길을 터 줄 천호의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태자가 끼어들어 다른 거짓을 고하기 전에 채운은 얼른 검을 놓았다.
쨍그랑.
그와 동시에 무릎을 꿇었다.
“황상,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자는 저를 찾아 신국까지 온, 제 도깨비 서방이옵니다.”
“뭐라?”
황제가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명채운!”
기겁한 승원이 채운을 꾸짖으려 들었으나 채운의 입이 더 빨랐다.
“실은, 저는 몸을 버렸을 뿐 아니라 태자 전하를 향한 충정까지 잃어버렸습니다. 도깨비 서방과 정을 통하는 중에 결국 그에게 마음을 주었을뿐더러,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이…… 이게 참말이냐?”
황제가 승원을 향해 물었다.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사실이옵니다. 저는 이자가 제 아우의 배필이기에 함께 신국으로 온 것입니다. 돌아가라고 말로 타일러도 듣지 않기에, 아우가 직접 제 손으로…….”
무릎을 꿇은 여운이 말을 잇지 못했다. 황제가 더욱 당황하였다. 단순히 불민한 몸을 넘어서서 배필과 자식이 있는 자를 후궁으로 들이는 건 법도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났다. 그것도 사람이 아닌 도깨비의 배필이라니. 거기다가 돌아가래도 듣지 않을 정도로 정이 깊어서 칼부림까지 나기 직전이었다.
금위군 대장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취하였다.
“소신이 낱낱이 본 바, 대장군과 명채운의 고함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황제의 경악 어린 시선이 태자 승원을 향했다. 승원만이 바른대로 고하지 못하고 부황의 시선을 피했다.
“도깨비 신부를 어찌 가까이 두려고 했느냐? 명채운은 처음부터 혼자 살겠다고 했다. 그런 자를 네가 굳이 우겨서 곁에 두었던 게야. 혹시 각인증이 아직도 고쳐지지 않았느냐?”
“그게…….”
승원이 주춤하는 사이 채운이 얼른 덧붙였다.
“태자 전하께서는 도깨비 세상에서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하여 도깨비 왕이 크게 역정을 내며 태자 전하를 내쫓으려 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도깨비 왕과 정을 통하고 신국을 등졌으나, 귀한 태자 전하의 목숨을 잃게 할 수 없어 온몸을 날려 구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서방과 자식을 등져야 했는데…….”
서러움과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렇지만 유약한 감정으로 천금 같은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도깨비 서방이 지은 죄는 그저 배필이자 제 자식의 생아비인 저를 찾아 이곳 신국까지 온 것뿐입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저 제 신부를 찾으려고 했을 뿐입니다. 감히 태자궁에서 검을 빼 든 죄는, 감히 불민한 몸으로 태자 전하를 모시게 된 제게 물으소서…… 흐윽.”
고할 말을 기어이 다 한 다음에야 기다렸다는 듯이 통곡이 터졌다.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는 사이 황제는 침통한 눈으로 태자를 보았다. 승원은 입을 열었으나 차마 거짓을 고하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네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니 명채운이 사실을 고하였군.”
“……아바마마.”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묻지 않겠다. 도깨비 세상의 일은 도깨비 세상의 일로 남겨 두겠다.”
황제는 그러면서 채운에게 물었다.
“명채운. 저 도깨비 왕이 원하는 것이 오로지 너뿐이냐?”
“……예.”
“그렇군.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네 누이는 대장군으로서 소임을 팽개친 대죄인일 뿐만이 아니라 도깨비를 황궁까지 데려왔다. 그 죄를 아니 물을 수 없어. 그뿐이냐, 네 아비와 그 식솔들 또한 그 죄를 같이 치러야 한다.”
그 말에 아버지가 나섰다.
“제 자식의 흉이옵니다. 제가 못 가르친 죄인이니 저에게 죄를 물으소서. 다른 식구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아니옵니다. 제 서방이 황상을 도와 나랏일을 도모하여 황국을 부국강병하게 하는 사이 집안을 다스린 건 저입니다. 두 자식을 죄인으로 기른 죄는 제게 물으십시오.”
큰엄마가 같이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엄마와 형님들도 전부 같은 식솔로 죄를 같이 지었으니, 벌도 같이 내리라고 읍소하였다.
식구들에게까지 죄를 묻겠다는 말에 채운은 분노와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억울한 눈물이 흥건한 채로 입을 열었다.
“성혼 날을 앞두고 몸을 갈고 닦는 저를 찾아와 기어이 사달을 낸 태자 전하 덕에 가족과 생이별을 하였습니다. 도깨비 세상에서 왕의 눈에 들기까지 제가 어찌 편케만 살았겠습니까. 그 고생을 일일이 고하자면 열흘 밤낮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껏 한 번도 태자 전하를 원망한 일이 없습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 줄 몰랐다. 이판사판이었다.
“태자 전하께서 저를 찾아오신 일을 감사히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낭군과 아이를 등지는, 애간장이 뚝뚝 끊어지는 고통을 머금고 태자 전하를 살리고자 했는데…… 하물며 제 서방을 제 손으로 거두려 했습니다. 전부 태자 전하를 위한 충정으로 저지른 일이온데, 어찌 황상께서는 제 불쌍한 피붙이의 죄를 묻겠다 하시옵니까?”
“…….”
“자식을 둘이나 잃었던 제 부모의 마음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상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제발…… 제게만 죄를 묻고 불쌍한 제 어미와 아비는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여운마저 가세하였다.
“제가 태자 전하를 따라 도깨비 세상으로 간 것은, 아우를 찾기 위함도 있었지만. 혹여 태자 전하의 안위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한 은현왕 전하의 안배였습니다. 북방을 지키는 막중한 소임보다 태자 위를 박차고 나간 태자 전하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더 중하다고 여겼습니다. 실지로 저쪽에서 크게 쫓길 때 저는 큰 부상을 입으며 태자 전하를 지켰나이다.”
“저것도 사실이냐?”
승원이 답하기도 전에 황제는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맞겠지. 맞을 터. 애초에 돌아가신 아바마마의 유물을 들고 은현궁으로 찾아간 놈이 너이니. 모든 시작은 네놈부터로구나. 그날 찾아가지 않았다면 섣불리 각인증에 걸리는 일도 없을 터였고 혹여 나중에 걸린다고 하들 그때는 명채운이 네 배필이니 광증으로 번지지도 않았을 일이다. 한낱 욕정을 이기지 못하다니. 자식을 잘못 키운 자는 바로 나로구나. 돌아가신 아바마마를 어찌 볼꼬.”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던 황제는 이윽고 결단을 내렸다.
“명채운, 그리고 명가에 죄를 묻지 않는다. 대신에 도깨비와 정을 통한 자를 황궁에 둘 수 없는 법. 또한 황궁에서 감히 검을 빼 든 무도함도 그냥 두고 볼 수 없느니! 여운과 도깨비, 그리고 채운은 옥에 가두고 다른 명가 식솔은 당장 내쫓아라. 그리고 태자 이승원, 너는 이후로 따로 명할 때까지 태자궁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말아라. 관련자들에 대한 처우는 날이 밝는 대로 다시 명하겠다.”
황명이 떨어졌다. 금위군은 즉시 채운과 여운을 끌고 갔다. 그사이 부모님이 울부짖었으나 금위군은 절대로 봐주는 법이 없었다.
[채운! 저들이 널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채운!]
처절한 목청이 채운을 불렀다. 창에 억눌려 무릎을 꿇은 카론이 팔을 뻗으며 기어이 일어서려고 했다. 수십 자루의 창이 들썩이는 걸 본 금위군 대장이 서둘러 명했다.
“쇠사슬을 가져와, 사지에 걸어!”
채운은 금위군에게 저항하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창과 갑옷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해가 없다고 한들 눈물로 인해 그를 제대로 볼 수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채운은 한사코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위군이 뜰 밖으로 완전히 끌어내고 황궁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옥사(獄舍)까지 데려갈 때도 채운의 고개는 한 번도 앞을 향하지 못했다.
* * *
사지에 묵직한 사슬이 걸렸다. 그리고 목에 괴상한 판자도 걸쳐졌다. 날뛰면 날뛸수록 목에 힘이 들어갔다. 요정 병사들은 카론이 힘이 빠지길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다시 일어섰던 무릎이 딱딱한 돌바닥으로 다시 무너진 때. 병사들은 카론을 끌고 가서 어둑어둑한 건물에 가두었다. 사방이 단단한 돌벽이었다. 어딜 보나 감옥이었다.
목에 걸린 묵직한 판자는 눕지도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게 하는 용도였다. 차가운 감옥에 들어오자마자 힘이 빠진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작은 들창에서 들어온 달빛이 눈에 들어왔다. 서늘한 돌벽과 손톱만 한 시린 빛 조각. 익숙한 광경이었다. 다시 돌아왔다. 마녀가 있는 서궁으로. 마녀는 없지만, 마녀 대신에 거대한 판자가 제 목을 누르고 있다.
[결국…… 제자리군.]
처절하다면 처절한 가운데 태어나 지금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살아왔다. 마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 보려고 몸부림쳤다. 그 과정에서 악의에 악의로 대하며 무수한 피를 흘렸다.
그에 대한 벌을 지금 받고 있다.
허망한 시선에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별이 쏟아지던 신비로움 밤. 하얀 바람을 타고 나타난 요정. 순수하고 예쁜 눈을 반짝이며 제게 빛나는 꽃을 내밀었다. 그리고 수줍은 듯 작게 웃었다.
소유욕. 처음 느낀 건 바로 소유욕이었다. 형형색색의 보석을 보아도, 산더미 같은 황금을 보아도 천사와 같다는 미인을 보아도 느껴 본 일이 없는, 낯선 감각이었다. 혐오와 분노 외에 카론을 움직인 첫 욕구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흑발의 요정을 붙잡아 당당히 개선했다. 불길 같은 소유욕은 금방 욕정으로 변했다. 싫어하고 저항하는 그를 강간했다. 강간하면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요정을 철저히 망가뜨렸다. 순수한 미소 대신에 혐오가 깃든 허망한 눈길로 자살을 시도할 때까지. 죽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요정에게 푹 빠진 다음에야 요정에게 혐오스러운 강간범일 뿐임을 알았다. 그런 중에도 요정은 사랑스러운 레온을 제게 선물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요정은 신의 선물처럼 카론에게 다가왔다. 자상한 인내심으로 저주 받을 괴물에게 사랑과 평안을 가르쳤다. 사죄하는 법도 가르쳤다. 곁에 머물러도 좋다고도 허락했다. 무릎을 꿇고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받은 마녀의 사생아에게도 영원한 해피엔딩이 찾아온 줄 알았다. 처음으로 맛보는 달콤한 행복의 맛을 잃기 싫어 전전긍긍했다.
요정을 찾아온 이에 이를 세울 것이 아니라 요정이 보여 준 것처럼 인내와 자비로움으로 대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옹졸한 괴물은 결국 요정에게 버려졌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날뛰다가 얼음을 벼린 듯한 말의 칼날에 무수히 맞은 후에야 제 흉한 모습을 깨달았다.
[내가! 내가 한 번이라도 라테시온에서 살고 싶다고 한 적 있어요?]
[내가 한 번이라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습니까?]
[신국에 돌아오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소원을 이루었는데 왜 나를 괴롭힙니까?]
[당신은 나를 강간한 죄인이니까요.]
단 세 번의 물음과 단 한 번의 선언이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아름다운 자신의 채운은 카론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크윽.]
가슴이 지독하게 쑤셨다. 손으로 판자 아래 명치를 뜯었다.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걸 아닐까. 아니 당연히 문제가 생겼겠지. 채운이 날린 비수에 갈기갈기 찢어졌으니 말이다. 미간을 찌푸리며 격한 고통을 어금니로 간신히 씹어 삼켰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으나 닦을 여력이 없었다.
[큭.]
목이 터지라고 이름을 불러도 아랑곳없이 비정하게 돌아서던 뒷모습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의 곁에는 제가 아니라 타이손이 있었다. 채운은 저를 보지 않고 그와 함께 걸었다. 마치 원래 그래야 했던 것처럼.
아니 원래 그래야 마땅했다. 채운은 타이손의 약혼자였다. 우연히 라테시온으로 날아온 그를 겁간하고 때리고 가둔 악랄한 작자보다 다정한 고향 사람이 더 좋을 거다.
그래, 그는 단 한 번도 라테시온에서 살겠다고 한 적이 없다. 그저 돌아가는 방법을 몰라서 머물렀을 뿐이다. 실제로 여운을 따라 망설임 없이 황궁을 벗어나지 않았던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한 적이 없다. 그저 더는 미워하지 않겠다고 했다.
신국으로 찾으러 오길 바란 적도 없다. 온을 부탁했을 뿐이었다. 도리어 카론이 채운을 찾아온 덕분에 그는 바닥에 엎드려 울어야 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채운은 붙잡힌 여운과 다른 가족을 살리기 위해 머리를 바닥에 부딪쳤다.
라테시온의 황후가, 늙은 요정왕의 발치에 엎드려 흐느꼈다. 그 어떤 고통과 참담함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머리를 조아린 적이 없는 당당하고 늠름한 요정이 비참하게도 차디찬 돌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찧었다. 절규하며 애원했다.
거기서 알았다. 저 왕의 한마디가 모든 이의 목숨을 거두어 갈 수 있음을. 채운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노예처럼 바닥에 엎드렸다. 라테시온의 황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라테시온의 황제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막대한 부도, 권력도 여기서는 모두 허상이었다. 멍청하게도 자신이 그것을 체득하지 못하는 사이 채운이 온몸으로 보여 주었다.
채운은 스스로 돌아섰다. 목이 터지라고 불러도 냉정한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그러고는 왕에게만 애원했다. 생눈으로 그 광경을 보면서도 카론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깨를 억누르는 창은 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이 아닌 괴물을 보는 듯했다. 제 처지를 철저하게 깨달았다.
여기선 황제도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한낱 괴물일 뿐. 그런 자신을 채운이 왜 기꺼워하겠는가. 오히려 그를 곤란케 할 뿐이었다.
채운이 레온을 생각하여 마지막으로 준 기회마저 저버렸다. 채운이 당연히 자신을 반가워할 줄 여겼던 오만함이 가져온 결과였다. 그렇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카론, 제 탓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할 능력도 권력도 없다. 이대로 이름 없는 괴물로 죽을밖에. 흉악한 제게 어울리는 결말이 아닌가. 모든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흘렀다. 요정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 악인은 비참하게 죽는다. 둘 사이에 태어난 보석은 황궁에서 예쁘게 잠들어 있겠지.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오로지 채운이, 제 아름다운 요정이 무사하기를.
* * *
싸늘한 옥중엔 채운뿐이었다. 누님도 카론도 없었다.
‘다들 무사하실까.’
가족을 일단 출궁시켰으니, 당장은 목숨을 보전했다. 죽을 날까지 보지 못할 줄 알았던 여운 누님을 다시 봐서 무척 기뻤다. 여운도 즉각 처형을 당하는 일만은 면했다. 가족이 모두 멀쩡한 모습으로 재회하였으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장 가문이 풍비박산할 지경에 처해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진다. 살아지면 그 이후는 행복도, 불행도 모두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그것을 누구보다 채운이 잘 알았다.
휑한 가슴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얄궂은 감정은 단지 가족이 무사하다는 안도만이 아니었다.
카론.
그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 저를 원하며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카론이 신국까지 찾으러 온 것이 이다지도 기쁠 줄이야. 그로 인해 온이 혼자 있는 데도. 그런데도 카론이 저를 찾아와서 좋았다.
‘못난 생아비를 용서해라, 온아.’
안타까운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온이는 잘 있으려나. 울지는 않을 런지. 마그네가, 그리고 그렌과 올리아도 있으니 걱정은 않겠으나 그래도 핏줄로 이어진 부모가 없는 삶이 얼마나 쓸쓸하고 힘들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카론만은 다시 라테시온으로 보내야 해. 이곳에서 허망하게 죽게 둘 수 없다.’
뺨을 적시는 눈물을 훑었다. 앞으로 황상이 무슨 명을 할지 몰라도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하지만 모진 마음을 먹었을 때 한번은 돌아보지 못한 미안함에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괜히 사지가 시려 두 다리를 접어 감싸 안았다.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무릎을 적셨다.
새벽 내내 웅크려 흐느꼈다. 물 한 대접도 먹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았다. 너무 진을 뺀 나머지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명채운, 나와라.”
금위군이 나타나 채운을 끌어냈다. 끌고 올 때와 달리 채운이 제 발로 일어서서 걷는 동안 금위군은 함부로 손을 대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펴고 옥 밖으로 나갔다.
벌써 해가 중천에 닿으려 했다. 옥에 고작 몇 시진 밖에 있지 않았는데도 벌써 빛이 낯설었다. 손으로 눈을 가리며 금위군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무시무시한 형틀이 가득한 국문장이었다.
“헉!”
두려움이 전신을 옭아맸다. 제가 당할 국문 때문이 아니었다. 국문은 곧 대역죄를 의미했다. 저뿐 아니라 여운을 비롯한 명가 일체, 그리고 카론이 위험했다. 마른 입술이 쩍 벌어지고 눈물에 젖은 무릎이 달달 떨렸다.
이윽고 황제가 나타났다. 그 곁에는 황후도 있었다. 둘 다 안색이 과히 좋지 않았다.
“폐하!”
그를 보자마자 채운은 앞으로 달려들었다.
“어딜!”
금위군의 창이 양옆에서 날아와 막았다. 가로질러진 창대에 매달려 애원했다.
“저, 저만 죽여주십시오! 다른 사람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도깨비와 정을 통한 것도 저고 태자 전하를 광증에 빠트린 것도 저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흐윽.”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해 온몸이 바짝 타는데도 어디서부터 샘솟는지 눈물은 쉼 없이 흘렀다. 짜디짠 눈물 때문에 뺨이 쓰리고 아팠다. 하지만 녹아드는 애간장과 뚝뚝 끊어지는 창자에 비하면 그건 간지러운 축에도 끼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론이 나타난 그 자리에서 차라리 자진할 것을. 카론이 포기하고 돌아갔을 텐데. 부모님과 형님, 누님에게도 흉악한 일이 미치지 않았을 텐데. 죄인인 저만 죽어 없어지면 모두가 살았을 텐데. 채운은 뒤늦게 후회했다.
황제와 황후가 자리를 잡자 관복을 입은 자가 공손히 나서서 손에 들고 있던 족자를 폈다.
“죄인 명채운 들으라. 너는 신국 태자를 모시는 몸으로 정절을 다하지 못하고 귀신과 정을 통하여 아이를 낳아, 황가의 법도를 훼손하고 장차 신국의 안위에 큰 해악을 끼쳤다. 이는 극형에 처함이 마땅하다.”
전신이 얼어붙었다. 황상이 이다지도 냉혹하고 비정하다니. 고개를 들어 감히 황상을 쳐다봤다. 황제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 황후는 그저 채운을 외면했다.
“어…… 어찌 그런?”
“조용!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족자를 읽던 자가 채운을 향해 호통쳤다. 그리곤 남은 말을 이어 갔다.
“허나, 귀신 세계로 넘어간 태자의 목숨을 구하고 다시 신국으로 데리고 온 점을 참작하여 극형 대신에 태형 40대에 처한다. 또한, 귀신 세계의 문을 스스로 열지 아니하였다는 점, 태자의 광증을 전혀 몰랐다는 점을 헤아려 태형 30대를 감한다. 마지막으로 태자 전하를 극진히 간호한 공로를 인정하여 태형 10대를 감한다.”
죄는 묻되 형은 내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멍한 채운을 향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신국에 도깨비를 끌고 들어온 점은 막중한 죄이다. 그러나 도깨비는 나라에 아무런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 또 대장군이 된 이래 혁혁한 공을 세워 짐을 기쁘게 한 명여운을 도로 데려오는 공도 세웠다. 내 그를 헤아려 아무런 죄도 묻지 않겠다.”
“폐…… 폐하!”
“더 들어라. 하지만 명채운 너는 이미 신국 사람이 아니니라. 도깨비 왕과 혼인하였으니 도깨비 세상에서 사는 것이 이치에 맞는 법. 하늘이 안배한 것을 천자인 내가 어찌 거스르겠느냐. 그러니 너는 도깨비와 함께 이곳을 떠나거라. 알겠느냐?”
황제의 어조는 내내 잔잔했다. 노여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뒤이어 황후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너를 원망했느니라. 하지만 간밤에 소동을 통해 연유를 낱낱이 알고 나니, 너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크다. 듣자 하니 보름이 되어야 세상의 문이 열린다고 하던데. 그때까지 사가에 머물며 부모에게 남은 효도를 다 해라.”
“화…… 황후 폐하.”
차가운 눈물이 이제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바뀌었다. 너무나도 너그러운 결정에 터져 나오는 오열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운 얼굴이 망가지겠구나.”
생각지도 못 한 판결이었다. 채운은 멍한 얼굴을 들어 감히 황제와 황후를 바라보았다. 관료가 헛기침을 하여 눈치를 주었을 때야 제 무례를 깨닫고 도로 고개를 숙였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흐으윽. 크나큰 성은을, 죽는 날까지 잊지 않겠사옵니다.”
황후가 안타까워하며 궁인을 시켜 채운을 부축하도록 했다. 금위군이 물러가고 고운 손을 가진 궁녀들이 채운을 에워쌌다. 그와 함께 황제와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국문장 밖으로 나오자 황후가 내준 가마가 있었다. 궁인의 도움을 받아 가마에 몸을 싣자 가마꾼은 알아서 궁 밖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가마는 죄인이 아닌, 명가의 막내 도령을 태우고 그를 손꼽아 기다리는 집으로 데려갔다.
“분홍아!”
집에 도착하자 이미 소식을 들었는지 식구들이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태자궁 뜰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모두 부둥켜안고 한참 울었다. 그러다가 나중엔 집 안으로 옮겨서 서로 얼굴을 살피고 손발을 살피면서 다행을 입에 올렸다.
가마를 호위한 금위군 대장이 말하기를 대장군 명여운은 소임을 팽개친 죄가 크기에 대장군 직을 박탈하고 당분간 일개 졸개가 되어 북방을 누비라는 명이 떨어졌고, 또 같이 온 도깨비 왕은 당분간 은현궁에 구금할 거라고 전했다.
“만나러 가도 됩니까?”
“그에 관해서는 아무런 하명이 없었습니다.”
금위군은 그렇게만 알리고 곧 황궁으로 돌아갔다.
가족이 무사한 기쁨이 가시고 나자 카론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때문에 웃음을 수가 없었다. 물도 음식도 넘어가지 않았다. 은현궁이 있는 쪽만 내내 바라보았다.
“황상께서는 한 입으로 두 말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니 네 낭군도 무사할 것이다. 크게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가 채운의 어깨를 도닥이며 위로하였다.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지진 않았다. 특히나 그를 향해서 모진 말을 뱉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연유가 있다고 설명도 하지 못했다. 하물며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돌아섰다.
속앓이를 크게 하지는 않을까. 아니, 뻔뻔하고 오연한 성격이니 성질을 내며 난동을 피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디 자중하여 지레 몸이 상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채운은 먼 곳을 바라보며 카론이 무사하길 빌었다.
* * *
벌써 열흘이 지났다. 중간에 팔다리에 걸렸던 쇠사슬이 풀리고 목에 걸었던 기이한 판자도 사라졌다. 장소도 감옥이 아니라 어딘지 모를 방 안이었다. 그런데도 카론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열흘간 마시지도 먹지도 않았다. 잠도 자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숨을 쉬는 외에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질긴 숨은 끊어지지 않고 기어이 이어졌다.
[내가 한 번이라도 당신을 좋아한다고 했습니까?]
눈을 감으면 무정한 뒷모습이 계속 어른거렸다. 눈을 뜨면 냉랭한 물음이 계속해서 카론을 괴롭혔다. 귀를 막으며 몸부림치면서 바닥을 뒹굴었다.
때때로 물과 음식을 가져오는 자들이 카론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보지만, 삶을 포기한 채 시신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를 되살릴 방도가 없었다.
“이러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큰일 날 텐데. 우리 탓이라고 할지도 몰라.”
“황궁에 알리기 전에 일단 명가에 알려 보자.”
“그래, 그러자. 명가와 만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은 없었으니 말이야.”
요정어로 뭐라고 속닥거린 자들이 금방 나갔다. 이후로 내내 고요했다.
반쯤 풀린 눈은 바닥과 바닥을 디디고 있는 나무 의자를 비췄다. 찬 기운이 올라왔으나 카론은 전혀 찬지도 몰랐다. 사실 감각이 멀어진 지 오래였다. 들리지 않는 채운을 듣고, 보이지 않는 채운을 보는 외에 둔한 머리가 때때로 떠올리는 건 두고 온 아들뿐이었다.
‘레온…… 레온을 혼자 두지 말아야 하는데…… 채운이 레온을 내게 부탁했는데.’
때때로 레온이 생각날 때면 일어서 보려고 했다. 채운이 남긴 아이를 훌륭한 황제로 기를 의무가 제게 있었다. 그런데 이미 힘을 잃어버린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도 손가락을 조금 꿈지럭대는 정도가 다였다.
대륙을 누비며 무수한 적을 쓰러뜨리고 온갖 저주에 맞서며 당당히 전진했던 라테시온의 정복 황제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사랑이 이렇게 무섭고 아픈 것인 줄 알았다면 하지 말 것을. 내내 모르는 채로 살 것을. 잔인할 만큼 사랑스러운 요정에게 심장과 영혼을 모조리 주지 말걸.
파랗게 식어 가는 눈가에 배어 나오는 물기는 지독한 고통과 함께 진한 회한으로 번져 있었다.
* * *
늦은 밤에 은현궁에서 사람이 도착했다. 그렇지 않아도 걱정으로 내내 시름하던 채운은 카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이 정신이 아찔했다.
“분홍아!”
“내…… 내가 가겠습니다. 당장 그를 만나야 합니다.”
허둥지둥하던 채운은 저를 부축하던 작은 형님을 밀치고 맨발로 집을 뛰어나왔다. 흙이 묻든 말든, 작은 돌멩이가 발바닥을 콕콕 찍든 말든. 당장 카론을 향해 달려갔다.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뛰어나간 후에는 다른 사람들이 기이한 눈으로 보든지 말든지 옷자락을 휘날리며 죽도록 달렸다. 은현궁에서 온 사람은 당황한 채로 채운의 뒤를 따랐다.
숨이 턱까지 찼다. 다리가 풀린 덕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손바닥이 온통 쓸리고 무릎을 크게 찧었다.
“이보시오, 공자!”
은현궁 사람이 부축하는 것도 팽개치고 채운은 다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아픈 무릎을 무시하고 쩔뚝거리며 은현궁을 향해 한걸음이라도 더 빨리 옮기려고 애를 썼다.
“분홍아!”
뒤에서 작은형님이 저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튼튼하게 살찐 말이 보였다. 작은형님은 바람같이 말에서 뛰어내리며 고삐를 채운에게 넘겼다.
“얼른 타라. 타고 가!”
형님은 채운이 말에 수월히 오를 수 있게 두 손을 모았다. 흙발로 형님의 손을 디디고 말에 뛰어올랐다.
“고맙습니다. 형님.”
“인사할 때가 아니다. 얼른 가라. 나중에 뒤따르마.”
형님이 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와 함께 말은 쏜살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흘린 눈물이 어느새 바람을 타고 뒤로 흩어졌다.
은현궁까지 말은 한달음에 달려 도착했다. 궁의 정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렸다. 성명을 밝히고 도깨비를 보게 해 달라고 하자 그들이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하라고 일렀다. 미리 전해 들었다면서 채운을 카론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비원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외딴 전각에 그가 있었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자마자 채운은 바닥에 쓰러진 채 간신히 숨만 쉬는 그를 발견하고 경악했다.
[카론!]
숫제 몸을 던졌다. 차디찬 얼굴에 손을 대며 동시에 팔과 어깨를 더듬었다. 몸이 너무 찼다.
[내가, 내가 왔습니다. 채운 아가르타입니다. 일어나 보아요. 얼른!]
소리치며 그를 흔들었다. 반쯤 뜬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
[……채…… 운?]
[예. 나예요. 나입니다. 카론! 일어나요!]
멍하니 채운을 바라보던 카론은 눈을 깜빡였다.
[미안…… 레온을…… 혼자 두었어. 네가…… 부탁했는데…… 끝까지 나는 좋은 배우자가…… 되지 못…….]
[아닙니다. 아니에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정신을 차려요.]
흐느끼면서 그를 흔들었다. 하지만 카론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당장 의원을 불러야 하는데.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카론을 부여잡고 그저 눈물을 흘렸다.
[……왜…… 울어?]
[당신이 아프니까.]
카론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곧…… 괜찮아질 거다…… 너는 이곳에서 행복…….]
[아니야! 아니야. 그건 전부 거짓말이에요! 여기서 행복하지 않아요!]
그를 끌어안으며 울부짖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건데.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채, 절망에 빠져 죽어갈 줄 알았다면 입이 찢어져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건데. 채운은 제 악독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너를 만나 기쁘다…… 비록 환영일……지라도. 너를 만나 기뻐.]
[나도, 나도 당신을 만나서 기뻐요. 나를 찾아 여기까지 와서 너무너무 기뻐요. 그러니 정신을 차려요.]
버석하게 마른 입술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푸른 눈의 빛이 급격히 흐려졌다. 벌써 열흘이나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기에 벌써 숨이 끊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안 돼! 죽으면 안 돼애!]
금은화가 있다면. 꽃잎 딱 한 개만 있다면 그를 살릴 텐데.
[제발. 제발 죽지 말아요. 나를 두고 죽으면 안 돼.]
그때였다.
카론의 가슴에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익숙한 빛이었다. 순간 채운은 제가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러나 카론을 가슴을 헤쳐 금은화를 찾은 다음에야 그게 진짜임을 알았다. 비원의 문을 연 꽃을 지금껏 카론이 품에 간직하고 있었다.
찌그러졌던 꽃은 꺼내는 즉시 다시 화려하게 피었다. 꽃잎을 즉시 떼어 내어 카론의 입에 넣었다.
[먹어요. 먹어야 살아. 살아서 온을 만나러 가야지요.]
시퍼렇게 죽어 가는 눈동자는 이미 눈꺼풀 속으로 사라졌다. 다급하게 흔들며 깨우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커다란 몸은 힘없이 흔들릴 뿐 눈꺼풀은 쉬이 올라가지 않았다. 입속에 넣었던 꽃잎을 도로 꺼내어 채운이 직접 씹었다. 그리곤 카론의 입을 벌려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꽃잎이 힘을 잃은 혀에 막혔다.
[흡!]
다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마른 혀를 옭아매어 빨았다. 혀와 입술이 얼얼하도록 빨고 또 빨았다. 씁쓸한 꽃잎이 천천히 카론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시체처럼 늘어진 몸에 서서히 황금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채운은 그의 혀를 목숨처럼 빨았다.
[크윽.]
갑자기 카론이 경련하며 몸을 떨었다. 깜짝 놀란 채운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아.]
꽃이 힘을 발했다. 백지 같은 안면에 화색이 돌고 잠잠하던 가슴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쿨럭. 쿨럭.]
목에 뭐가 걸린 듯 카론이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열흘 전에 비해 한참 말랐던 몸에 갑자기 생기가 돌면서 근육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물처럼 흐렸던 청색 눈에 금빛 총기가 돌아왔다. 두건이 풀린 머리가 아름다운 금색으로 반짝였다.
한참 기침하던 카론은 이윽고 경이로운 감격에 휩싸인 채운을 발견했다.
[……채운?]
[카론!]
그가 저를 보자마자 채운은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에 매달렸다. 그 바람에 카론은 다시 뒤로 넘어질 뻔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네가 여기에? 그놈들이 데려가지 않았나?]
[당신이…… 당신이 나를 두고 죽으려고 했잖아요. 나쁜 사람.]
채운은 카론의 가슴에 매달린 채로 기쁜 원망을 터트렸다. 든든한 팔이 채운의 몸통을 죄였다.
[너를 잃는 줄 알았어. 내가 전부 미안하다.]
채운은 고개를 들고 카론을 바라보았다. 요모조모 뜯어보며 덜덜 떨리는 입을 열었다.
[절대로…… 절대로 나를 두고 죽을 생각은 두 번 다시 하지 말아요. 당신이 없으면 나도 살지 못해.]
원망을 늘어놓는 데도 카론은 희미하게 웃었다. 죽을 걸 걱정한 건 채운뿐이었다. 미운데도 살아나서 밉지가 않았다. 아니 얄미운 웃음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에게 안긴 채로 주먹을 쥐어 어깨를 때리다가 이윽고 멈추었다. 덜덜 떨리는 손이 그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나…… 나쁜…… 나쁜…….]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나를 두고…… 죽으려고…….]
원망을 늘어놓자 카론이 손으로 턱을 잡았다. 손길을 따라 순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미움과 원망, 그리고 깊은 안도의 눈물로 흉한 얼굴을, 카론은 누구보다도 어여쁘다는 듯이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사랑해. 사랑해. 무엇보다도 너를 사랑해.]
[흑.]
다정히 속삭이는 귀애에 다시 시야가 흐려졌다. 달달 떨리는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부드럽고 달콤한 입맞춤이 놀란 가슴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뜨거운 혀가 눈물로 젖은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채운의 고개가 살짝 더 뒤로 젖혀졌다. 매끈한 혀가 입 안을 더듬는 사이 시퍼렇게 멍이 든 속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숨을 고르는 사이 잠시 떨어졌던 카론의 입술은 젖은 눈가로 이어졌고 이윽고 다시 입술로 찾아왔다. 숨을 합치며 그가 생생히 살아 있음을 오래오래 확인한 후에야 맞붙었던 입술이 떨어졌다.
[두 번 다시 죽으려 하지 말아요. 살아야 해요 살아서 평생 내 미움을 받아야 해.]
[알았어. 절대로 그런 짓은 하지 않을게.]
약속을 받아 낸 후에야 채운은 놀랐던 가슴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그러다가 퍼뜩 온을 떠올렸다.
[그리고 온을 부탁했는데! 또 온을 혼자 두었지요?]
[아, 레온.]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렸던 카론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채운의 손에 꽃이 들려 있었다. 마침 밖은 아직 밤이었다. 어느 틈에 환한 달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돌아가자.]
카론이 손을 내밀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온이 기다리는 따뜻한 보금자리 돌아가자는 그 손을, 채운은 망설임 없이 꼭 잡았다.
[네.]
즉시 문을 박차고 나왔다. 밖을 지키던 병사들이 당황하여 뒤를 쫓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채운은 카론에게 비원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금은화는 두 사람의 마음을 읽은 듯이 벌써 환한 빛을 뿌렸다.
비원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도깨비와 손을 잡고 달려오는 채운을 보며 병사들은 우왕좌왕하였다. 꽃을 앞으로 쑥 내밀자 도깨비의 저주를 두려워한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흩어졌다.
풀이 무성한 비원 가운데서 은은한 빛이 솟았다. 달은 벌써 중천에 떴다. 꽃을 막 들어 올리려는 찰나 뒤에서 누가 불렀다.
“얘, 분홍아!”
누님이었다.
“분홍아!”
큰형님, 작은형님도 곧 모습을 드러냈다.
“누님, 형님!”
세 사람의 시선은 카론과 꽃을 쥔 채운의 손으로 향했다.
“갈 거냐?”
큰형님의 덤덤한 물음에 채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남매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큰형님과 작은 형님은 그저 말이 없었다. 누님도 채운을 보며 입을 벙긋하였으나, 카론의 손을 단단히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침통한 한숨만 내쉬었다.
“아이고, 내 새끼!”
뒤늦게 부모님이 나타났다. 병사의 부축을 받으며 헐떡이던 큰엄마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벌써 눈물 바람인 엄마도, 한층 늙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큰엄마는 다리가 풀린 듯 무너지며 큰형님에게 안겼다.
“마음을 정했느냐?”
“네, 아버지.”
“그래. 네 인연이 거기에 있다면 가야지.”
아버지는 서글프게 웃었다. 자식들에게 붙잡혀 멀찍이 선 아버지와 큰엄마와 달리 엄마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왔다. 벌써 흰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작은 어머니! 가까이 갔다가 휘말리십니다.”
여운이 다가가서 말렸으나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어이 다가와 채운을 덥석 끌어안았다.
“내 새끼, 어디에 있든 너를 기르신 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은혜를 잊지 말아라. 그리고 우애 깊은 두 분 형과 누이도. 절대로 잊지 마라.”
“네. 엄마. 엄마도 건강하세요. 저는 행복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그래. 네 서방이 오죽 잘하겠느냐.”
채운을 놓아준 엄마는 카론의 손을 두 손을 꼬옥 잡았다.
“귀여워만 하면서 기른 부족한 자식입니다. 철없이 굴더라도 노여워 마시고 사랑으로 감싸 주십시오. 품에서 기른 자식을 머나먼 이국으로 영영 떠나보내는 어미의 부탁입니다.”
그러면서 엄마는 카론에게 큰절을 올렸다.
“엄마!”
“우리 채운이를 잘 부탁합니다.”
뒤에선 아버지도 큰엄마도 절을 올렸다. 형님도 누님도 마찬가지였다. 채운은 눈물을 금치 못하여 엄마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동시에 당황한 카론에게 엄마의 부탁을 전했다. 그러자 카론 또한 무릎을 꿇어 채운과 함께 엄마를 부축해 일으켰다.
[걱정하지 마시오. 채운은…… 내 목숨과 같으니. 우리 라테시온 제국이 존재하는 한, 내가 살아 있는 한, 채운은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낼 것을 맹세하오.]
카론의 말을 전해 들은 후에야 엄마는 미소를 지었다. 카론은 손을 놓고 채운의 등을 떠밀었다. 엄마를 부둥켜안고 뒤이어 달려든 식구들과 애타는 작별을 나눈 후에 다시 카론의 곁으로 왔다. 그때까지 카론은 묵묵히 기다렸다.
흰빛과 함께 돌풍이 몰아쳤다. 식구들이 뒤로 물러나는 동시에 카론과 채운은 서로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빛을 향해 몸을 던졌다.
명가의 식구들은 하늘 높이 치솟는 백룡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룡 한가운데는 두 사람의 인영이 서로를 꼭 안고 있었다.
“분홍이가 갑니다.”
늙은 아버지와 두 어머니는 그저 말없이 백룡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못 볼 사랑스러운 자식의 행복을 빌면서. 백룡이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