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늦은 밤 셰이드는 사르프의 축축한 밤거리를 걸었다. 밀랍을 덧씌운 듯 무표정한 안면과 달리 걷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각종 단상으로 어지러웠다. 단상은 대부분 셰이드의 막중한 의무와 관련이 있으며, 시작은 대게 의무와 권리는 부여한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었다.
카론 유스키아 라테시온.
강력한 정복 황제 카론 유스키아는 본인만큼이나 유능한 심복을 거느렸다.
마녀의 사생아에 불과한 그가 정복자로 성장하도록 가르친 그렌과 올리아. 지독한 저주를 스스로 끊어 내며 우뚝 선 황제의 강한 매력에 푹 빠져 운명과 목숨을 내맡긴 블라드 자작 남매. 카론 유스키아의 첫 친구이자 그와 타인 간의 가교를 놓은 아서 엘러 백작.
‘테퍼 블라드는 제 손으로 신세를 망쳤으니 이젠 남매가 아니라 베로니카뿐인가.’
그렌과 올리아가 카론의 양부모라면 베로니카가 카론의 채찍. 아서 엘러는 카론의 광대였다. 어딜 봐도 당근이 부족한 차에 요정 황후가 기대를 능가하는 수완을 발휘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하지만 제국을 운영하는 데는 필요한 인물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필요할 때마다 황제가 당근과 채찍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도록 하는 다른 필수적 요소가 있다. 바로 돈. 돈이었다.
황제 개인이 거느린 영지와 각종 자산은 황궁에 소속되어 어바인 그렌이 관리했다. 지금은 황후에게 넘어갔다. 대신 제국에 귀속된 세금과 제국령 영토에서 올라오는 공물 관리는 별개였다. 그 담당자가 바로 셰이드였다.
‘황제의 창고지기’. 셰이드를 칭하는 별명이었다. 가끔 ‘황제의’와 ‘창고지기’ 사이에 빌어먹을, 수전노, 돈벌레, 말 뼈다귀 같은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셰이드 개인적으로는 ‘현명한’이라는 수식어를 선호했다.
제국을 세운 직후 황제 카론은 블라드 남매를 앞세워 불순분자를 모조리 처단하고 영지 사병을 황제 직속으로 강제로 흡수한 후, 사병이 없어진 각 영지의 치안을 황제가 대신한다는 명목으로 제국 세법(稅法)을 제정하여 귀족과 영주도 세금을 내도록 했다.
거둬들인 세금은 오랜 정복전으로 인해 황폐해진 제국 각지를 돌보는 데 쓰였다. 휘몰아친 전화(戰火)로 삶이 궁색해진 민중을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결국 제국은 금방 쪼개진다는 데에 황제 최측근의 견해가 일치했으며, 무엇보다 황제 본인이 다른 정복자들과 달리 개인적으로 재산 착복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일부 군비(軍費)를 제외하고 대부분 자금은 신생 제국민을 위해 고스란히 지출되었다.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의 강력한 지지로 제국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물론 앉은 자리에서 손발이 잘리고 나중엔 코까지 잘라 간다며 피해 의식이 강한 귀족, 영주들이 순순히 세금을 낼 리가 없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빼돌렸고 그럴 때마다 황제는 탈세를 이유로 표적 조사를 벌였다. 탈세가 걸리면 단순히 세법 위반에만 걸릴 뿐만이 아니라, 은닉한 자산 규모에 따라 반역죄까지 쓰곤 했다. 반역자도 색출하고 돈도 버는, 좋은 방법이었다.
목이 자르거나 혹은 귀족에서 천한 노예로 추락시키는 본보기를 두어 번 보이고 난 후에 뒷감당하기 무서운 자들은 순순히 황제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성실히 납세했다. 대신 반대급부로 배짱 좋다 못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자들은 더욱 은밀하게 숨기려 들었다. 그중에 주제와 분수를 모르는 놈들이 기어이 사달을 냈다.
‘어리석은 놈들. 언젠가는 다 들통이 나거늘.’
얼마 전까지 셰이드는 푸논 개발 사업에 몰두하다가 사르프까지 내려왔다. 로하스에서 일어난 혼란을 베로니카가 잠재우고 난 후에 용병을 도적 떼로 변모시킨 놈들을 추적해야 할 터. 주동자들을 추적하여 은닉 자산을 제국 국고에 보태고 감히 황제의 명을 어긴 자들에게 무거운 벌을 내려야 했다. 주동자가 있지 않고서야 그 많은 용병에 북부에 모일 리가 만무했다.
자금 추적은 전문가인 셰이드의 몫이었다. 라테시온 제국에서 돈은 두 도시를 기준으로 움직였다. 하나는 당연히 제도 라테시나, 다른 하나는 번성한 무역 도시 사르프였다. 설마 간이 크게 라테시나를 중심으로 자금 옮기진 않았을 터. 북부와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사르프에서 자금을 움직이는 편이 빠르다.
은밀하게 자금을 추적하는 일은 생각보다 멋지지 않았다. 몸을 쓰는 기사들이 압수해 온 장부를 내내 들여다보는, 무척 지루하고 고된 일이었다. 그러다가 골이 빠개질 순간이 오면 셰이드는 잠시 항구를 거닐며 머리를 식히곤 했다.
찝찌름한 짠내가 진동하는 밤의 항구를 거닐던 중 목격한 광경은 언뜻 보기에 평범하지만, 일상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음? 지금?’
밤에 허겁지겁 배로 올라가는 선원이야 늘 있었다. 선원은 때때로 배에 무언가를 가지러 가거나 아니면 잘 곳이 마땅하지 않아 배에서 묵거나 혹은 당번인 걸 까먹고는 뒤늦게 배로 돌아가곤 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물건을 옮길 때는 실을 물건이 뒤늦게 도착하거나 혹은 갑작스러운 출항 결정으로 밤에 선적을 서두르기도 했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선원이 올라간 배가 출항이 불가능한 배가 아니면 말이었다.
‘저건 경매에 넘어간 배일 텐데.’
방금 선원이 올라간 배는 얼마 전 소유자의 파산으로 인해 경매로 넘어갔다. 배의 경매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긴 경매로 어렵사리 새 주인을 만난 후에는 새로 칠을 하고 곳곳에 손을 보느라 조선소로 가곤 했다.
조선소로 가기 전에는 배에 실은 물건을 최대한 뺀다. 붙박이 가구도 거의 분리하여 따로 보관한다. 수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셰이드 눈에 띈 자들은 자잘한 상자를 도로 배에 실었다. 모자라 우락부락한 선원이 아닌 호리호리한 체격의 그림자도 언뜻 보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셰이드는 산책 중에 제법 무료했고 마침 경비대의 부속 건물이 항구에서 그렇게 멀지 않았다. 한번 들러서 저 배가 누구에게 팔렸기에 밤에 드나드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급히 조사 본거지로 돌아온 셰이드는 저를 돕는 기사 둘을 호출했다. 황제 직속으로 기밀 임무를 주로 맡는 톰슨과 코넬이었다. 그리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황제의 직속 고고학자라는 루벤도 있었다.
“배를 하나 털어야겠어.”
셰이드의 말에 그들은 즉시 움직였다. 다시 항구로 나와 그 배를 찾았다. 배는 벌써 닻을 올리는 중이었다. 셰이드와 루벤이 항구에 서서 배를 지켜보는 동안 톰슨과 코넬이 말을 달려 항구 끝 초소에 가서 배가 떠나지 못하도록 조처했다.
촤르르.
배의 출입을 막는 거대한 쇠사슬은 평소에 수면 아래 잠겨 있는 상태였다. 도둑 출항을 하거나 출입 허가를 받지 못한 위험한 화물을 실은 배가 막무가내로 항구로 들어오려고 할 때 막는 용도였다. 무거운 톱니바퀴를 감는 두 기사의 괴력 덕에 쇠사슬은 빠르게 수면 위로 올라왔다.
쿵!
아무리 가벼운 쾌속선이라고 해도 배는 배였다. 쇠사슬에 걸리자마자 큰 소음과 함께 요란한 파문이 일었다.
“무슨 일이야!”
배 위에서 누군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배가 걸렸어!”
“누가 쇠사슬을!”
우왕좌왕하며 소란이 커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누군가가 일부러 쇠사슬을 끌어 올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작은 배로 갈아탈까요?”
“우리 친애하는 기사 두 분이 쇠사슬을 아주 수면 위까지 올렸으니 작은 배도 소용없을 거요. 그러니 배에서 내려 항구로 오겠지.”
“아하.”
예상대로 떠났던 배가 천천히 항구로 돌아왔다. 배에서 내리기 위해 널빤지 다리가 놓였을 때는 톰슨과 코넬이 합류한 직후였다. 둘 다 말에서 내려 언제 가져온 건지 모를 석궁을 널빤지로 겨누었다.
내린 사람은 하나였다. 머리에서부터 큰 천을 뒤집어쓴 그는 밤에 녹아들기 쉬운 가무잡잡한 피부의 소유자였다. 다리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는 셰이드 쪽으로 곧장 걸어왔다.
“쇠사슬을 올린 것이 그쪽이요?”
“그렇다.”
“무슨 권리로?”
“위대하신 카론 유스키아 폐하에게 부여받은 권한으로.”
셰이드는 품에 가지고 있던 금화를 내보였다. 황제의 인장이 박힌 금화은 황제의 수족이라는 증명이었다. 금화를 확인한 자의 안색이 바뀌었다. 상대는 대단히 곤혹스러워했다. 단순히 도둑 출항이 아닌 다른 것을 염려하듯이 주변을 신중하게 살폈다.
‘역시.’
속으로 조소를 날린 셰이드는 금화를 다시 품에 넣은 후 용건을 꺼냈다.
“녹사에탄에서 일하는 자인가?”
“……그렇소. 밀레 휼스라고 하오.”
휼스는 품에서 출항 허가서를 꺼냈다. 항구를 밝히는 등불 빛 아래 드러난 허가서는 척 보기에도 진짜였다. 하지만 셰이드가 찬찬히 살피자 초조함을 드러냈다.
“흐음.”
“허가서를 확인했으면 쇠사슬을 내려 주시오.”
“그전에 배 내부를 살펴봐도 되겠소?”
“무슨 이유로?”
“장물 유통에 관한 제보가 있었소.”
그러면서 셰이드는 톰슨을 불렀다. 기사 한 명이 올라가고 다른 셋은 항구에서 기다리는 편이 가장 나았다. 톰슨이 무슨 일을 당하면 코넬이 휼스를 체포할 셈이었다. 그러자 휼스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개인 소유의 상선이오. 적확한 명령서 없이 아무나 들일 수 없어. 올라가는 건 금화를 지닌 그쪽뿐이오.”
휼스는 정확하게 셰이드를 가리켰다. 셰이드가 단신으로 배에 올라가는 순간 인질이 될 가능성이 컸다.
긴장감이 감도는 내내 고고학자 루벤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대를 응시했다.
“흐음.”
“왜 그러시오?”
셰이드가 루벤에게 연유를 물었다. 초조해진 휼스가 사소한 소동을 벌일 때까지 시간을 끌 요량이었다. 물론 난동을 피우면 당장 체포할 것이다.
“실례.”
느닷없이 손을 뻗은 그는 휼스의 두건을 홱 들어 올렸다. 그러자 화려한 금발이 나타났는데 당황한 휼스가 두건을 빼앗기도 전에 루벤이 고함을 쳤다.
“아! 역시!”
“무슨 짓이오!”
“전에 봤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
갑작스러운 소란에 긴장한 톰슨과 코넬이 바짝 다가섬과 동시에 배에서 선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한 열 명쯤 되는 선원은 저마다 흉악한 무기를 들고 있었다.
“어디서 봤다는 거요?”
“여기서요. 그러니까…….”
“상인이니 당연히 항구에 자주 드나듭니다. 얼굴이 팔린 것도 죄입니까?”
루벤의 손에서 두건을 뺏어 든 휼스는 대단히 기분 나쁜 투로 반박했다. 그는 허겁지겁 두건을 뒤집어썼다. 그러면서 눈앞에 있는 셰이드 일행이 아닌 다른 곳을 의식했다. 먼 어둠을 빠르게 훑으면서 어깨를 움츠리는 태도가 꼭 쫓기는 사람 같았다.
“노모를 보러 가는 길에 이렇게 갖은 무례와 천대를 당해야 한다니. 상단 연합회를 통해서 단단히 항의할 거요!”
그는 제 수하들에게 물러나라 손짓했다. 아무래도 충돌보다는 빨리 출항하고 싶은 기색이었다.
“그전에 제국법 위반에 대한 처벌도 받아야겠지요?”
“뭐라고? 내가 무슨 제국법을 어겨?”
루벤이 지지 않고 반박했다.
“불법 경매장. 살아 있는 마도구가 나오던 날. 불법 경매장에서 봤습니다. 그때는 갈색 머리였고 피부도 밝았지만. 틀림없어요. 제가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거든요.”
살아 있는 마도구가 나왔던 사르프의 불법 경매장. 톰슨과 코넬이 황제를 만나 북부 산맥으로 가라는 명을 들은 날이기도 했다.
“살아 있는 마도구면…… 반역자군.”
셰이드가 선언하자마자 휼스를 품에서 바로 단검을 꺼내 셰이드에게 겨누었다.
“물러서!”
휼스가 셰이드를 인질로 잡은 직후 선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들을 에워쌌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이자의 목이 떨어진다.”
“그 즉시 네놈의 머리도 뚫리는 거야.”
지척에서 석궁을 겨눈 톰슨이 휼스의 협박을 맞받아쳤다. 무기를 꺼내 든 선원들도 당장은 어쩌지 못했다. 단검이 셰이드의 피부를 눌렀다. 고개가 꺾인 셰이드의 모자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곁눈으로 휼스를 흘끔 본 셰이드는 힘없이 감탄했다.
“아, 나도 뭔가 생각나는군. 그쪽 피부가 가무잡잡하지 않고 머리가 갈색에 눈이 푸르다면. 누군가 기억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지. 이목구비가 상당히 닮았어. 휼리라고 아나? 파사 일족의 마녀였는데.”
“닥쳐!”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휼스가 검에 힘을 주는 순간 톰슨이 석궁을 쐈다.
퍽.
날아간 화살은 휼스의 손을 맞추었다.
“큭!”
쨍그랑.
검이 바닥으로 떨어지자마자 셰이드는 얼른 몸을 숙였고 뒤이어 코넬이 휼스를 쏘았으나 그것은 온몸으로 주인을 가로막은 선원의 가슴에 꽂혔다.
슈슈슉.
두 사람이 장전한 석궁에서 모두 열 발이 날아갔으나 정통으로 맞은 선원 셋만 쓰러졌을 뿐이었다. 팔다리에 맞은 자들은 그대로 무기를 들며 덤볐고 기사 두 사람은 그들을 상대했다. 개개인의 실력 차이는 엄청났으나 두 명 대 다수여서 금방 쓰러트리긴 무리였다.
그사이 휼스는 빠르게 뛰었다. 그가 향하는 방향에 톰슨과 코넬이 타고 온 말이 있었다.
“도망간다!”
“숙이게.”
손가락질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 루벤을 쓱 밀치며 셰이드가 나섰다. 그는 품에서 아주 작은 휴대용 석궁을 꺼내 겨누었다.
슉!
챙!
분명히 휼스의 등에 정확하게 꽂혔는데. 이상하게도 화살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등에 뭔가를 댔군.”
“아. 그럼 그걸지도 모르겠는데요?”
“뭐?”
“폐하가 찾아오라던 살아 있는 마도구요. 이만한 접시 크기의 동전 모양입니다.”
“그런가?”
말 위에 올라탄 휼스가 이쪽을 향해 질주했다. 기사 둘은 아직도 선원과 대치 중이었다. 선원의 숫자가 반으로 줄어들긴 했으나 이쪽을 도울 상황은 아니었다. 셰이드는 곁에 선 루벤의 뒷덜미를 덥석 잡았다.
“왜?”
잡힌 루벤이 의문을 표하는 찰나 셰이드는 그를 막 다가온 말 앞으로 밀어 버렸다.
“으아악!”
비명과 함께 팔을 휘두르던 루벤이 한 박자 늦게 몸을 웅크리면서 땅바닥을 뒹굴었다. 놀란 말이 앞발을 크게 들며 주춤하는 바람에 루벤이 온 항구가 떠나가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말 또한 뒤로 넘어졌다.
쿵!
그 바람에 말 등에 탄 사람이 떨어지면서 넘어진 말의 엉덩이에 깔리고 말았다.
“크윽!”
당황한 말이 발버둥을 치면서 일어나 달아났다. 육중한 말 아래 깔린 자의 갈빗대가 멀쩡할 리가 만무했다.
“크으으윽.”
역시나 사지를 쭉 뻗은 휼스는 지독한 고통에 휩싸여 신음했다.
“갈비뼈라도 나갔나?”
셰이드는 신음하는 휼스를 무심하게 밀쳤다. 그의 등을 더듬자 과연 딱딱하고 무거운 물체를 담은 가죽 가방을 발견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꽃문양을 새긴 거대한 황금 동전이었다.
“이건가?”
동전을 완전히 꺼내어 길거리 등불에 비쳐 본 루벤이 화색을 지었다.
“네. 이거 맞습니다. 만져 보는 건 처음이지만. 어중간한 실력으로는 폐하의 고고학자로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이 광택과 촉감, 무게까지. 진품입니다.”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군.”
가죽 가방에 도로 유물을 넣은 루벤은 희희낙락했다. 기사들도 선원을 다 정리한 참이었다.
“톰슨. 다른 놈들은 적당히 처리하고 이자는 황궁으로 압송하게.”
슉!
“큭!”
어디선가 석궁이 날아와 휼스에게 손을 대던 톰슨의 손을 맞췄다.
“그 녀석은 내 소유라서 말이야. 손 떼.”
어둠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셰이드가 아는 사람이었다.
“……테퍼 블라드.”
“셰이드. 오랜만이군.”
코넬이 검을 세웠다. 그러나 셰이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렸다. 테퍼 블라드의 실력이라면 코넬을 비롯한 일행 전부가 순식간에 죽는다.
“한 번 배신한 놈은 역시 또 배신하는군.”
“그렇더군.”
비난에 냉소 어린 웃음이 돌아왔다.
“우릴 전부 죽일 셈인가?”
“필요하다면.”
여지가 있다는 얘기였다. 셰이드는 잠자코 테퍼 블라드가 말을 잇길 기다렸다. 석궁을 한손으로 들어 겨눈 채로 그는 허리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셰이드 쪽으로 던졌다.
털썩.
가죽 문서함이었다. 그 안에서 나온 문서에는 유력한 영주와 귀족의 이름과 함께 숫자가 쓰여 있었다.
“이건?”
“비밀 거래 장부. 북부 혼란에 대한 직접적 증거는 아니긴 한데. 네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
그렇다. 이들을 중심으로 세무 조사하고 불법 은닉 자금 조사를 하면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다.
“이걸 어떻게 손이 넣었지?”
“거기 쓰러져 있는 자가 녹사에탄 상단주이면서 파사 일족 족장이거든.”
“뭐?”
녹사에탄과 관련은 있을 줄 알았으나 파사 일족일 줄은 몰랐다. 거기다가 족장이라니.
“그리고 네 추측대로 휼리의 쌍둥이 동생이기도 하지.”
“그래서 네가?”
셰이드는 테퍼가 중간에 다시 변절한 이유를 금방 깨달았다. 찡그린 채 신음하는 자는 휼리와 너무 닮았다. 테퍼는 냉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로하스에 있는 파사 일족의 중추는 내가 다 처리했다. 남은 건 용병 찌꺼기뿐이야. 그건 베로니카가 알아서 처리하겠지. 유물도 난 관심 없으니 그쪽에게 넘기겠다. 다만 휼레, 저놈은 내가 데려가겠다. 그러니 순순히 물러나.”
역시 휼스는 가명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이야?”
“글쎄? 휼리와 못 했던 걸 저놈이랑 해 볼까 했는데. 문서를 찾느라고 잠시 한눈을 팔았더니 냉큼 수하를 모아 도망치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일단 혼부터 나야겠는걸.”
테퍼 블라드의 눈빛이 광기에 물들었다. 미친 실력자는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았다. 필요한 건 다 얻었다. 파사 일족의 족장이 테퍼 블라드에게 사로잡혀 앞으로 말로 다 못 할 괴이쩍은 짓을 당할 운명인 듯하니, 셰이드로서는 조용히 빠져 주는 편이 나았다.
“알았다. 그렇게 전하지.”
“참, 오는 중에 북부에서 흰 기둥이 나타났어. 여기서는 안 보였나? 베로니카보다는 카론이 있는 지역에 가까웠다.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 유물이 필요하지 않을까?”
답지도 않게 친절한 조언까지 한 테퍼가 쓰러진 휼레를 안아 들었다. 갈비뼈가 부서진 놈을 무식하게 어깨에 턱 올리자 놈은 숨도 못 쉬고 헐떡였다. 이미 혼나는 중인 듯했다.
“그럼 앞으로 서로 얼굴 볼일 없길 바란다. 되도록 죽는 날까지.”
놈을 짊어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 멀리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휴우.”
루벤이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비록 배신하였으나 테퍼가 하는 말이 거짓은 아니라고 믿었다. 셰이드는 유물 가방을 코넬에게 넘겼다.
“당장 폐하께 전달하게.”
“예.”
남은 말을 타고 코넬이 곧장 북부로 향했다. 흰 기둥이 다시 나타났다니. 지난 두 번에 비해 나타나는 시일이 너무 빨랐다. 하필 카론 폐하가 있는 부근이라니.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느껴졌다.
“별일 없겠죠?”
루벤이 입을 열었다.
“그러길 바라야지.”
셰이드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 * *
하얀 바람의 용은 라테시온을 떠나 신국으로 왔다. 정확하게는 비원이 있는 외궁 후원이었다. 중간까지는 바람을 탔는데 비원 주변으로 웃자란 풀밭 가운데 잎사귀가 낱낱이 눈에 들어올 때 바람이 사라지고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쿵!
무성하게 자란 풀이 아니었다면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했다. 채운은 욱신욱신하는 몸을 일으켰다. 저와 동시에 떨어진 태자 이승원이 죽었나 살았나 궁금한 한편, 살았다면 미쳐서 날뛸까 걱정도 되었다.
“태자 전하?”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풀을 헤치고 가까이 가자 하늘을 보고 대자로 누운 승원이 보였다. 오른쪽 가슴에서 피가 주르륵 샜다. 안색은 창백하고 숨도 멎은 듯 보였다. 죽었나 싶어 얼른 다가가 코와 입에 귀를 대보았다.
“채…… 운.”
다 죽어 가는 음성이 들렸다. 고개를 얼른 들자 반쯤 뜬 눈이 보였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손을 들어 채운을 잡으려고 했다.
“헉.”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핏기가 감도는 눈가에 서글픔이 내려앉았다. 그는 물끄러미 채운을 봤다.
그때였다. 뺨에 붙어 있는 줄도 몰랐던 꽃잎이 아래로 떨어졌다. 워낙 가볍기에 무게를 느꼈다기보다는 발광하는 빛으로 눈치챘다. 꽃잎을 집어 들면서 채운은 문득 저도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 금은화의 꽃잎을 먹고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금은화의 꽃잎. 꽃잎은 모든 저주를 몰아낸다. 멀쩡한 사람을 저렇게 미치게 만든 각인증이 저주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혹시?”
신국의 태자 이승원은 이렇게 비참하게 죽기엔 아까운 인물이었다. 금은화의 힘으로 각인증이 사라지진 않더라도 이렇게 괴물의 몰골로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적어도 사람 형상으로 돌려주긴 할 터. 밑져야 본전이었다.
다시 가까이 다가간 채운은 생명의 빛이 거의 꺼져 가는 태손의 입에 꽃잎을 밀어 넣었다.
“태자 전하. 이걸 먹으세요. 이 꽃이 태자 전하를 도울 것입니다.”
“채…… 미…… 미안하…….”
“다른 말씀은 나중으로 미루어 두시고 우선 이것부터 드세요.”
말을 끊고 채근하자 태자는 천천히 입을 움직여 꽃잎을 씹어 삼켰다. 그와 동시에 태자의 전신이 은은한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윽!”
몹시 고통스러운지 태자는 사지를 비틀었다. 상처가 아무는 걸 확인하기 위해 채운은 그의 옷을 헤쳤다. 가슴을 적신 붉은 피는 여전했으나 있어야 할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내상도 나아지는 도중인지 몸을 뒤틀던 태자가 끈끈한 피를 울컥 토한 직후 정신을 잃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숨은 아까보다 훨씬 강하고 골랐다. 심장 언저리에 귀를 대어 보자 맥박도 힘차게 뛰었다.
“후우.”
살았으니 됐다. 마침 기절하여 무서워할 필요도 없었다. 안도하며 한숨을 쉬는 찰나였다.
쾅!
깜짝 놀라서 제자리에서 튀었다. 철컥철컥 갑주가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설마?”
설마 카론이? 카론이 기사단과 함께? 여긴 라테시온이 아닌데? 저도 모르게 기대에 차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벅찬 기대는 눈앞에 척 내민 창에 찔려 박살 났다.
“웬 놈이야!”
날아드는 고함은 분명히 신국어였다. 촘촘히 둘러싼 병사들을 헤치고 나타난 사람은 신국식 장포와 갑주를 걸쳤다. 투구도 신국식이었다. 장수의 얼굴도 신국 사람 그 자체였다. 장수는 라테시온 복장을 한 채운을 의심의 눈초리로 훑었다.
“여기는 황명으로 봉인된 비원이다. 어디서부터 나타난 놈이냐?”
상대의 호령에 채운은 어깨를 반듯하게 폈다.
“나는 신국사람 명채운이라고 하오. 재상 명판승의 막내아들이오. 태자 전하와 함께 먼 이국에서 고향으로 돌아왔소.”
“뭐라?”
상대가 깜짝 놀랐다. 채운이 뒤에 누운 이승원을 가리켰다. 가까이 다가간 장수는 승원의 얼굴을 알고 있는지 보자마자 “태자 전하!” 하고 몸을 숙였다.
“얼른 태자 전하를 모시어라!”
대장의 명령에 병사가 빠르게 움직였다.
“공자도 저를 따라오시지요.”
“알겠소.”
채운은 대장을 얌전히 따랐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황궁이었다.
신국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두 달 전 사라졌던 태자 승원이 돌아왔다. 그뿐 아니라 그와 함께 오 년 전 사라졌던 명재상의 아들도 함께였다.
태자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태자궁으로 온 황제와 황후는 어의가 병상에 누운 이승원을 꼼꼼히 진맥하는 동안 내내 곁을 지켰다. 아주 꼼꼼히 전신을 다 훑은 어의는 식은땀을 면포로 닦으면서 조용히 아뢰었다.
“태자 전하의 옥체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깊은 숙면 중이시니 곧 눈을 뜨시리라 사료되옵니다.”
“그래? 그럼 저 피는 뭐냐? 입에도 핏자국이 있지 않으냐?”
“태자 전하가 흘린 피인 듯한데…… 옥체에는 상처가 없습니다.”
“기이한 일이로고.”
어의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기이한 일은 같이 온 자에게 물어야 마땅했다. 황제는 즉시 명채운을 들라고 시켰다. 혹여 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죄를 물을 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귀한 태자가 한낱 음인에게 눈이 멀어 기이한 행태로 사라진 분노와 슬픔이 가득했다. 당장 신체는 무사하다니 기쁘기야 하지만 그거야 멀쩡히 눈을 뜰 때 얘기였다.
“명채운을 대령하였습니다.”
병사들이 채운을 끌고 와 황제 앞에 무릎을 꿇렸다. 채운은 신국 황제 앞에 무릎을 꿇리는 행태가 무척이나 자존심 상했다. 허나 제 언행 하나하나에 부모님과 형님들을 비롯한 명가 식솔 전체가 걸려 있었다. 분한 마음을 죽이고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면서 자존심에 상처받는 자체에 내심 놀랐다.
‘신국의 백성보다 라테시온의 황후가 먼저구나.’
고작 이년 남짓 라테시온에서 살았을 뿐인데. 이 년을 제외하고 평생을 산 신국보다 더 가까이 여기다니. 이래서야 신국에서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금은화와 비원이 무슨 관계인지, 그리고 사라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고하라.”
황제가 엄하게 명하였다. 있는 그대로 낱낱이 알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꽃과 비원이 있어 문이 수시로 열리는 줄 알면 황제가 무슨 짓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 혹여 태자의 몸을 상하게 한 악독한 오랑캐들을 쳐부수겠다며 군사를 일으킬 가능성 또한, 아주 희박하게나마 있었다.
무슨 조화인지 자신도 자세히는 모른다고 하면서 저쪽에는 아주 험악하고 못난 도깨비들이 사는데 그들의 비위를 맞추어 살았다고 고했다. 그러면서 태자 전하를 모시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고도 했다. 그러자 태자의 침상 곁에 앉아 눈물을 면포로 찍던 중년의 황후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태자의 병증을 아느냐?”
“……예.”
“그런데도 네가 어찌!”
부들부들 떠는 황후를 황제가 막았다.
“그리된 후에 태자 전하를 만나 알았습니다.”
“어차피 태자비는 아니 되겠군.”
황제가 낮게 침음을 흘렸다. 이대로 혼사는 끝이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태자의 곁을 지키고 싶지 않다. 아무도 몰라주어도 자신은 라테시온의 황후였다. 다른 자에게 몸을 내어 주느니 외로움에 사무쳐도 평생 혼자 살고 싶었다.
이후에 태자가 누이와 함께 왔으나 도중에 누이를 잃어버렸고, 또한 태자가 도깨비 왕과 싸우는 중에 병증이 심해졌는데 마침 금은화에 이끌린 백룡이 노닐기에 얼른 붙잡아 타고 태자와 함께 돌아왔다고 했다. 꽃은 사실대로 저쪽에서 잃어버렸다고 고했다.
“숙부 은현왕께서 한 얘기와 완전히 맞아떨어지진 않으나. 너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리된 일이니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
황제는 당장 채운을 처단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당장 눈을 뜨지 못한 태자의 안위를 더욱 걱정했다.
“앞으로 태자가 눈을 뜰 때까지 병구완은 네가 해라.”
“예?”
놀란 건 채운뿐만이 아니었다. 황후도 놀라서 황제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태자를 모실 몸이 못 된다고 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저자가 도깨비에 홀랑 넘어가 태자를 해하고 거짓을 고하는 거면 어쩌시려고요?”
“몸은 성하나 당장 눈을 떴을 때 각인증이 있으면 어쩌오? 이미 버린 몸이긴 하나 각인증을 다스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거요.”
“몸종으로 두겠단 말씀이옵니까?”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떻게 하겠소. 특정한 약도 없는 광증인데. 잃어버렸다가 도로 찾은 아들을 다시 잃을 수 없지 않소.”
“하는 수 없지요.”
황제와 황후는 채운의 의사 같은 건 일절 헤아리지 않았다. 오로지 태자 이승원만 챙길 뿐이었다. 그런데도 채운은 입술만 사리물 뿐이었다. 황후를 토닥인 황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알기 때문이었다.
“혹여 태자에게 해를 가한 정황이 있으면 명채운, 네 목을 침과 동시에 명가도 화를 면치 못할 터. 명심해라.”
“예, 폐하.”
황제가 태자궁을 나간 후에도 황후는 한참이나 아들의 곁을 지켰다. 어의가 지어온 보약을 숟가락으로 떠서 아들의 입에 조금씩 흘려 준 후에도 한참이나 눈물을 지었다. 보다 못한 어의가 이러다가 황후마저 몸을 해치면 태자가 불효자식이 되니 그만 몸을 보존하시라고 간곡히 청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까지 채운은 다른 궁인들에게 이끌려 나가 목욕을 당한 후에 말쑥한 백의 차림으로 태자궁에 다시 들려 보내졌다.
“태자의 안위에 네 일가의 안위가 달렸음을 꼭 기억하거라.”
황후는 냉랭하게 경고하고 자리를 떴다. 황제 황후가 자리를 비워도 태자궁 곳곳에 무장한 병사가 있고 또한 검을 찬 환관이 같은 방 안에 있었다. 채운이 혹시라도 불손한 짓을 하려고 들면 즉시 칼을 꺼내어 목을 칠 것이다.
채운은 황후가 앉았던 자리에 가만히 앉았다. 태자의 몸은 비록 나았으나 각인증까지 해소되었는지는 막상 금은화 꽃잎을 먹인 자신도 모른다. 다만 고이 눈을 떠서 집안에 화가 미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만 간절하였다.
저쪽에서 이 년은 이쪽에서 오 년이었다. 생사불명으로 걱정을 끼친 것도 모자라 정신을 잃은 태자와 함께 돌아와 가문을 위기에 빠트린 막심한 불효에 대해 사죄하고 싶은데 정작 태자궁에 갇힌 신세였다.
‘내가 돌아온 걸 아실까?’
서글픈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앞으로 뭐가 어떻게 되든 당장은 태자가 눈을 떠야 했다. 몸이 천근만근이라 부서질 것 같아도 쉬이 쉴 수가 없었다. 뒤에서 서슬 퍼런 눈으로 지켜보는 환관 때문이 아니었다. 부모님과 형님, 그리고 두고 온 누님을 떠올리는 순간에도 가슴 한편에 자리 잡은 상실감이 채운을 괴롭혔다.
“채운! 가지 마!”
목이 터지라 고함치며 팔을 뻗던 카론의 모습이 생생했다. 거센 바람에 몸이 휘청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용의 비늘을 헤집으며 채운에게로 기어이 다가왔던 그의 손을 잡지 못했다.
“흑.”
서러운 울음이 뒤늦게 터졌다. 환관이 들을까 숨을 죽이며 소매로 눈가를 덮었다. 죄인을 상징하는 하얀 옷자락이 비애로 조금씩 젖어 갔다.
* * *
채운이 사라졌다. 놈을 데리고 가는 대신에 요정의 꽃을 남겼다. 카론의 뇌를 채운 건 그 사실 한가지였다.
“요정…… 의 꽃……?”
흰색 돌풍을 보고 뒤늦게 수하들이 찾아왔다. 그러나 수하보다는 그들이 찾아온 말이 더 반가웠다.
“폐하!”
영문을 모르는 부하들을 무시한 채로 카론은 곧장 라테시나를 향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도록.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꼬박 이틀을 달리는 동안 사르프 인근에서 코넬을 만났다. 남쪽으로 질주하는 카론을 보자마자 곧바로 뒤를 따라왔다. 코넬이 뭔가 외쳤으나 카론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죽도록 달린 말은 황궁 정문에 도착하는 즉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말을 모는 기수(騎手)의 전신도 그만큼 너덜너덜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카론은 절대로 쓰러질 수 없다. 거품을 물며 쓰려진 군마에 깔리기 직전 구르듯이 땅으로 뛰어내렸다. 휘청대는 하체를 가누는 즉시 황궁을 뛰어 들어갔다.
“레온!”
우렁찬 목소리에 그렌이 우선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매를 띄웠는데, 황후 폐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알고 있다. 저리 비켜!”
돌아온다는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황제에게 황후가 사라졌다고 고하는 시종장을 밀치며 카론은 이층 골든 피오니로 뛰어 들어갔다.
쾅.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마그네가 화들짝 튀었다. 그 곁에 있던 여운이 즉시 검을 빼서 들었다가 카론임을 확인하고 주춤했다. 카론은 그를 철저히 무시하고 곧장 마그네에게 걸어가 레온을 안아 들었다.
“레온.”
“흐에에엥.”
작은 아기는 카론에게 안기는 즉시 울음을 터트렸다. 작은 손이 카론의 옷자락을 꼭 쥐었다.
“후우.”
레온은 무사하다. 레온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여운도. 부탁받은 사람은 무사하다. 다만 그가 없을 뿐이다.
[채운이 없어졌어, 알아?]
“채운이 사라졌다. 요정 세계로 갔어.”
[일단 온을 지켰어. 내 동생은 어디로 간 거지?]
“그를 찾으러 갈 거다. 네 도움이 필요해.”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겠다.]
여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카론은 아직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에 여운은 마그네의 도움을 받았다. 마그네가 즉시 노트와 펜을 가져와 그림으로 카론의 말을 설명했다. 간단한 단어와 함께 손짓과 때때로 몸짓을 섞은 의사소통이 끝나자 여운은 단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온의 무사를 확인했으니 당장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여운이 사전에 알려 준 바에 따르면 꽃과 원판이 같이 있어야 문이 열렸다. 꽃은 있지만, 원판이 실종 상태였다. 파사 일족의 휼레라는 자가 가져갔음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헉헉. 폐하…… 잠시만.”
열린 골든 피오니 문 앞에 코넬이 나타났다. 그는 전신이 땀으로 젖은 상태였으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레온을 마그네에게 넘기고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네가 왜 여기 있나?”
“따…… 따라 왔…… 이틀간…… 헉…… 후우.”
심호흡을 거듭하며 숨을 억지로 고른 후에 코넬은 가죽 가방을 내밀었다.
“셰이드 경이 전하는 물건입니다. 고대 유적이라고 합니다.”
바로 낚아채 가죽 가방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전에 불법 경매장에서 보았던 원판이었다.
[그거다!]
여운도 알아봤는지 다가와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르프에서 파사 일족을 잡았습니다. 그때 압수한 물건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셰이드 님이 도착하시면…….”
멀쩡히 말을 하던 놈이 갑자기 푹 쓰러졌다. 소란에 근처에서 대기하던 그렌이 시종을 불러 코넬을 부축해서 데려갔다.
“꽃과 원판이 있군.”
놀랍게도 필요한 물건이 알아서 손에 들어왔다. 코넬이 이걸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기절했지만, 당장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떻게 작동시키지?”
카론은 여운을 바라보았다. 여운은 마그네의 노트를 가지고 그림을 휘갈겼다. 요정어와 몸짓을 섞어서 설명했다. 그리곤 꽃과 원판을 내미는 카론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창밖을 가리키기도 했다.
“지금이 아니야? 왜?”
그림을 보고 이해할 상황이 아니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했는지 여운은 그림을 마그네에게 보여 주었다.
[낮이 아니라 밤이야. 밤. 자는 밤. 그것도 이런 달이 뜬 보름날 밤이어야 해.]
“잠을 자? 지금이 아니고…… 아! 밤, 밤입니다. 큰 달? 큰? 큰 달이 뜬 밤이라고 합니다.”
평소에 요정어를 자주 접했던지라 마그네는 여운의 말귀를 빠르게 알아먹고 카론에게 설명했다.
“큰 달이 뜬 밤이면…… 보름달인가.”
보름은 삼 일 뒤였다.
“빌어먹을. 왜 오늘 밤이 아닌 거야!”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다. 여운과 함께 요정 세계로 간다고 해도 일단 체력이 있어야 어떤 경우에서든 빠르게 대처할 수 있다. 또 베로니카를 황궁까지 불러들일 필요도 있다. 레온을 혼자 둘 순 없다.
“좋아. 삼 일 뒤에.”
꽃과 원판은 서재 비밀 창고에 넣어 두고 베로니카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 급하게 휘갈겨 쓴 메모에 서명하고 돌돌 말아 매를 관리하는 기사에게 넘긴 직후 갑자기 세상이 핑 돌았다.
덜컹.
쓰러지기 직전에 책상 모서리를 잡았다. 시종이 놀란 표정으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게 카론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 * *
이틀 뒤, 태자가 눈을 떴다. 늘 들러서 태자를 들여다보는 황후가 막 떠난 직후였다. 승원이 깨어났음을 가장 먼저 안 사람은 채운이었다. 그가 제정신인지 아닌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낮은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전하.”
승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채운을 바라보았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채운.”
승원이 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자 뒤에 있던 환관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밖이 소란스러워지고 금방 어의가 들이닥쳤다. 채운은 순식간에 뒤로 밀려났다.
태자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금방 황제와 황후에게 닿았다. 그들은 체통 불구하고 태자궁으로 뛰어왔다.
“태자!”
“태자! 어미입니다. 어미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어의가 진맥하는 중에도 황후는 눈물을 금치 못했다. 승원은 눈을 껌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한참 뒤에 물러나 있는 채운을 바라보았다. 태자의 시선을 기민하게 눈치챈 어의가 채운을 가까이 불렀다.
부모를 보고서도 그저 고개만 끄덕였던 승원이 채운이 가까이 오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채운.”
“전하.”
“드디어 그대를 찾았어.”
“……예.”
황후는 기가 막힌 듯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승원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의의 부축도 마다하고는 제 발로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흰 내의를 입은 그대로 황제와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못난 소자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흐윽. 태자.”
황후가 흐느끼며 엎드린 태자의 등 위로 쓰러졌다. 황제의 눈시울도 붉어졌다.
이후로 어의의 진맥이 이어졌다. 어린 시절 승원을 가르쳤던 학자를 불러 기억을 확인하고 정신이 또렷한지 여러 가지로 확인했다. 나중에는 황도 인근 사원에 머무르는 은현왕까지 불러와 태자 이승원이 정말로 제정신인지 확인했다. 은현왕은 태자 승원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눈물로 기뻐했다. 그리곤 외궁에 오랫동안 지켜왔던 고서적을 모조리 뒤지어 태자 승원의 각인증이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어찌된 영문이냐는 은현왕의 물음에 승원은 내내 곁에 선 채운을 보며 대답했다.
“채운이 나를 살렸습니다. 정신을 잃은 중에도 그 기억만은 또렷합니다. 하늘에서 천인처럼 내려와 나를 감싸 안고 신국으로 데려와서는 금색 환약을 먹였어요. 그랬더니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것이 태자 이승원이 깨어난 직후부터 황제, 황후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한 설명이었다.
황제와 황후는 채운에 대한 진노를 지우고 그를 은인으로 대접했다. 하지만 태자비 책봉에 관해서는 아무런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제아무리 태자를 살린 은인이라 해도 정체 모를 도깨비와 정을 통한 자를 태자비로 삼을 수 없다. 대신에 후궁으로 삼아 태자비를 책봉하는 즉시 첩지를 내리겠다 했다.
“부덕한 소인이 감히 태자 전하를 모실 수 있겠습니까? 제집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 수 있게 허하여 주십시오.”
채운의 간청을 거절한 자는 황제나 황후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들은 채운의 뜻을 반가워했다. 박복하며 팔자가 센 채운을 흉으로 여겨 태자 곁에 두기 싫어했다. 뜻을 꺾지 않은 쪽은 태자 이승원이었다.
“평생 채운만을 보고 살았습니다. 저 때문에 모진 고생을 한 사람이옵니다. 어찌 제가 채운을 버리겠습니까? 절대로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차라리 버려 주면 좋겠건만. 태자는 한사코 고집을 부렸고 그의 뜻을 꺾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채운의 뜻을 깡그리 무시하고 제 배필로 삼겠다고 천명한 후 태자 이승원은 채운의 곁을 내내 지켰다. 다행스러운 일은 아직 기운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 밤으로 별침 할 수 있는 점이었다. 그에게 몸을 내어 주는 날이 된다면 채운은 그야말로 산송장이 될 터였다.
몸을 취하지 못하는 상태에도 승원은 굳이 같은 침상을 쓰자고 우겼다. 태자궁에서는 태자의 말이 곧 하늘이었다. 채운은 거부하지 못하고 침상 귀퉁이에 몸을 눕혔다. 할 수 있는 저항은 등을 돌리는 것뿐이었다. 승원은 그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시름했다. 억지로 잠을 청하고자 해도 눈을 감으면 푸른 눈이 어른거렸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도 선명했다.
참 미운 사람이었다. 누님에게는 다 용서했다 했지만 완전한 진심은 아니었다. 아마도 채운은 영원히 영혼이 파괴되는 그 아픔을 잊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시린지. 어째서 그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인지. 숨을 끊어내는 심정으로 놓고 온 피붙이보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 두고 온 누이보다, 이 년 만에 같은 하늘을 이고 있는 부모님보다 어째서 그의 얼굴이 더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를 생각하는가?”
별안간 날아든 조용한 음성에 채운은 화들짝 놀랐다. 입술을 꾹 다무는 동시에 베갯잇을 구겨 잡았다. 그라니. 혹시 카론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태자는 기억이 제대로 없다고 했다. 뭐라 답을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승원의 음성이 이어졌다.
“이제 끊어진 인연이다. 저쪽 세상의 일은 저쪽 세상에 두고 왔다. 앞으로 여기서 살 일을 생각해라.”
“그게 그리 쉬운 일입니까?”
“쉽지 않지. 너도…… 그리고 나도.”
광증에 휩싸인 승원은 라테시온 사람을 무수히 죽였다. 가장 빛나야 할 장래의 황제가 손을 무고한 피로 더럽힌 것이다. 태자 이승원은 그 기억이 생생한 게 분명했다.
“각인증이 가셔도 각인증이 남긴 것은 쉬이 사라지지 않아. 나는 혼자가 두렵다. 네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겠다. 네가 원치 않는다면 몸을 겹칠 일도 없다. 그저 곁에만 있어 다오. 그만큼 네 일가에게 잘하겠다. 명가는 대장군도 잃었으니 말이다.”
언뜻 들으면 지고지순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순정이라 말하기엔 승원의 음성은 성마르고 무미건조했다. 사소한 궁금증이 생겼다.
“아직 저를 연모하십니까?”
“……연모라.”
이번에는 승원이 길고 긴 한숨을 지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그가 말을 하다가 잠들었나 싶을 무렵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그것이 연모였나? 잘 모르겠다. 각인증이 사라지고 나니 그저 모든 것이 피로할 뿐이다. 연모를 바라느냐?”
“아닙니다.”
“연모는 아니라도 너를 평생 아끼겠다.”
“…….”
고맙다고 할 일도 아니라 그저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승원이 물었다.
“너는 나를 조금이라도 연모했느냐?”
연모했느냐고? 전혀 아니었다. 태자를 생각하며 가슴이 두근거린 일이 있었으나, 그것은 얼굴을 모르는 장래 배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었지 이승원을 향한 감정이 아니었다. 배에서 미쳐 날뛰는 태자에게 당한 이후로는 같은 신국 사람으로서 품은 옅은 호의마저 깡그리 사라졌다.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모는 아닙니다.”
“……그래.”
그 후로 야심한 새벽의 대화가 끝났다.
해가 떠오르고 태자 이승원은 다시 채운을 은인으로 여기며 다정하게 대했다. 채운은 가문을 생각해서 그의 뜻을 따랐다. 단지 그뿐이었다.
* * *
기절한 카론은 하루 꼬박 죽은 듯이 잤다. 그런 후에 일어나서 목욕하고 레온을 안아 손수 젖병을 물린 후에 또 잤다. 이틀을 내리 휴식하며 체력 회복에 힘썼다. 그사이 베로니카가 귀환했다. 북부 사정은 어느 정도 수습된 후였다.
“꼭 네가 직접 가야 해? 제국을 이렇게 두고?”
베로니카의 물음에 카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지난 이틀간 요정 방식으로 급하게 지은 검은 옷을 걸쳤다. 부러진 검을 대신할 검을 들었다. 석궁은 여운과 상의 끝에 하지 않기로 했다. 너무 눈에 띄었다. 대신에 단도를 넉넉하게 챙겼다.
온통 검은 머리를 가진 요정 세계에서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머리도 두건으로 단단히 감아 가렸다. 그걸 보며 베로니카는 혀를 찼다.
“미쳤군. 그깟 사랑이 뭐라고. 테퍼나 너나.”
“뒤를 부탁한다.”
“제국은 네가 만든 거다. 그러니 나한테 떠넘길 생각하지 마.”
베로니카 방식으로 죽지 말고 돌아오란 뜻이었다. 카론은 입꼬리를 올렸다. 직후 서재의 비밀 금고로 가서 꽃과 원판을 가져왔다.
보름달이 차오르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 카론은 골든 피오니로 갔다. 여운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마그네는 조용히 레온을 카론에게 넘겨주었다. 아기는 잘 먹이고 잘 씻긴 후였다.
“레온.”
이마에 입을 맞추며 힘껏 안았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를 한껏 채우는 젖 냄새를 머릿속에 단단히 넣어 두었다. 마지막으로 통통한 뺨에 키스했다. 마그네에게 넘겨진 후 여운이 레온의 뺨을 쓰다듬었다. 안타까운 미소를 지으며 요정어로 무어라 속삭인 다음 작은 손에 입을 맞추고 난 후 근처에 두었던 검을 들었다.
“가자.”
카론의 말에 여운이 따라나섰다. 그 또한 무릎까지 자락이 내려오고 넉넉한 소매를 손목 어귀에서 넓은 천으로 조인 요정 방식의 옷을 걸쳤다.
입구는 황궁 마당에서 열기로 했다. 기사들이 모조리 사열한 삼엄한 정원 가운데 원판을 일단 놓고 뒤로 물러났다. 보름달이 서서히 하늘 가운데로 다가왔다. 카론의 손에 들린 꽃이 스스로 흔들리며 강렬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원판에서 돌풍과 함께 빛기둥이 뿜어져 나왔다.
[지금이다!]
여운이 먼저 빛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의 몸이 바람을 타고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카론은 꽃을 품에 넣고 즉시 뒤를 따랐다. 거센 바람은 카론을 위로 밀어 올렸다.
“폐하!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렌이 외쳤다.
“꼭 살아와…….”
올리아가 말을 끝맺기 전에 카론은 하늘 꼭대기까지 날아갔다. 무시무시한 돌풍이 전신을 때렸다. 그때 하늘을 날았던 채운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너를 찾을 거다.’
카론은 이를 악물고 바람에 몸을 맡겼다.
* * *
태자가 깨어난 지 닷새가 되던 날. 그의 정신이 아주 또렷하고 각인증의 기미가 전혀 없어 황제는 적잖이 안심했다. 혹시나 하고 반나절 간 채운과 따로 있었다. 그래도 승원은 멀쩡했다.
“채운이 도깨비 나라에서 구한 영약으로 소자를 살렸습니다.”
승원이 반복하여 고하였기에 처음에는 채운을 몹시 싫어하던 황후마저 나중에는 채운을 기특하게 여겼다. 태자를 모시는 몸으로 남았다가 나중에 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황후 바로 아래인 황귀비에 책봉하고자는 황상의 의지가 이미 궁내에 알려졌다. 채운을 대하는 궁인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아직 어떤 봉작이나 첩지를 받은 일이 없는 데도 귀인이라 칭하며 정중히 대했다.
“청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출궁하겠다는 얘기 말고는 얼마든지 들어주마.”
온전한 아들을 찾은 황제가 기뻐 먼저 하문했다. 채운의 소원은 하나였다.
“황상께서 윤허하신다면 부모와 형제를 보고 싶습니다.”
“아니, 아직도 만나지 못했단 말이야? 부모를? 당장 명가에 기별을 넣어 일가를 입궁하라 일러라.”
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걸 우려하여 채운을 태자궁에 가둔 당사자인 황제가 상선을 향해 손짓했다. 그 이후 채운은 태자궁 뜰에 나와 내내 서성였다.
“안에서 기다리지.”
어느 틈에 승원이 다가왔다.
“마음이 급해 그러질 못하겠습니다.”
“오 년 만인가?”
“저쪽에서는 이 년이었습니다.”
승원과 담소를 나누는 일은 별로 기쁘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긴장에 차가워진 손을 요리조리 주무르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인기척이 났다. 정식 입궁이 아니라 작은 문을 사용하였는지, 발소리는 태자궁 구석에서부터 커졌다.
“아.”
마음이 급하여 채운이 그쪽을 향해 발을 재게 놀리는 중에 달린 전각 귀퉁이에서 궁인이 들고 이는 등불 빛이 반짝였다. 뒤이어 낯익은 얼굴이 드러났다.
“어머니! 아버지!”
반가움을 듬뿍 담아 외친 직후 채운은 힘껏 달렸다.
“아…… 아! 분홍아!”
“아이고 우리 애기! 우리 분홍!!”
“채운아아아.”
너무 놀라 엉거주춤한 세 분에게 채운이 먼저 안겼다. 엄마는 말도 없이 채운을 한껏 안았고 뒤이어 큰엄마와 아버지가 둘을 감쌌다.
“흐윽…… 흐으으윽.”
참고 참았던 서러움과 그리움이 큰 울음이 되어 터져 버렸다. 엄마도 큰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울고 계셨는지 눈시울이 빨갰다. 심지어 아버지조차 눈물을 흘리셨다. 두 분 형님은 울음을 그치려고 애를 쓰며 휘청거리는 세 부모님을 부축했다.
“우리 분홍이, 어디 보자.”
제 자리에서 한참 울고 난 후에 큰엄마가 두 손으로 채운의 얼굴을 감쌌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어디 상한 곳은 없는지 찬찬히 뜯어보는 큰엄마의 손은 부쩍 마르고 거칠었다. 손만이 아니었다. 실질 연세보다 훨씬 곱고 젊었던 얼굴이 많이 상했다. 눈가에 주름도 늘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따뜻했던 손이 정기가 쇠한 사람처럼 몹시도 찼다.
“부…… 분홍아.”
“아버지.”
애간장이 끓듯이 아명을 부르는 아버지 얼굴에 보지 못한 검버섯이 피었다. 안색도 검었다. 단순히 오 년이란 세월을 탓하기엔 양인 셋을 낳은 대감의 기골이 너무 처져 있었다. 가슴이 미어졌다. 눈을 녹일 듯이 설피 울었다.
“저 때문에…….”
“그게 어디 네 탓이냐? 무심한 하늘의 탓이지. 이리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그런데 여운이는 만나지 못했느냐?”
큰엄마의 물음에 채운은 심장이 덜컹 떨어졌다. 두고 온 누님 얘기를 어찌할지 막막했다. 입을 열었으나 울음이 꽉 막힌 목이 말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안에 자리를 마련하였으니 들어가서 회포를 푸시오. 이러다 누가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이오.”
보다 못한 태자가 말렸다. 태자의 명을 받은 궁인들이 다가와 쓰러진 부모님과 채운을 부축하여 안으로 모시었다. 형님들도 그 뒤를 따랐다.
채운이 사용하는 방에 들어서자 태자는 주변에 사람을 모두 물렸다.
“밖은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얘기하시오. 나도 자리를 피하리다.”
“고맙습니다.”
태자가 나가고 난 후에 채운은 저쪽에서 있었던 일을 낱낱이 고했다. 도깨비 세상에 커다란 제국이 있는데 거기 황제가 자신을 배필로 맞았다는 얘기에 가족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에는 도깨비와 사람의 사고방식이 맞지 않아 많이 다투고 방황하였으나 나중에는 정이 붙었고 거기서 아이를 낳았다고 하니 큰엄마가 혼절하려 들었다.
“우…… 우리 귀한 막내가…… 부모도 없는 곳에서…….”
“어머니!”
큰형님이 놀라서 큰엄마를 부축했다. 큰엄마보다 연약한 엄마는 뜰에서부터 이미 진이 쏙 빠졌다. 아버지에 기대 조용히 눈물을 삼켰다. 아버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채운의 손을 꼭 잡았다.
“고생이 많았다. 고생이 많았어.”
서러움이 다시 북받친 채운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입을 다물지 않으면 다시 통곡이 터질 것 같았다. 한참 울음을 삼키고 난 후에 여운을 먼저 만났고 도깨비 황제가 탐탁지 않아 했으나 결국은 받아들여 여운을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하자 큰엄마는 그나마 시름을 놓았다. 죽은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럼 여운이는 아직 도깨비 나라에 있는 게냐?”
“예. 누님이 저를 찾으셨습니다. 훌륭한 대장군이셨어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제가 여기로 오기 직전에 도깨비 왕궁에서 극진히 잘 대접해 드리고 있습니다.”
“거기서 좋은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다행이다만.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지. 그렇게 불쑥 가 버리면 이 어미는 어쩌라고.”
큰엄마가 가슴을 툭 쳤다. 아무리 잘 있다고 해도 어찌 걱정을 금할 수 있을까. 온을 떠올리는 채운 또한 가슴이 미어지는데. 자식을 낳은 후에야 부모의 마음을 알았다. 저를 찾으러 세상의 문을 넘어온 누님을 함께 데려오지 못한 죄송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누님에게 너무나도 미안해서…… 그만 이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전에 장독대 앞에서 너를 본 일이 있다. 낮도깨비가 보여 준 건지 내 눈에만 보였다.”
“꿈이 아니었군요!”
큰엄마의 말에 채운이 깜짝 놀라 자신도 똑같이 명가 장독대 앞에서 큰엄마를 만난 꿈을 꾸었다고 얘기했다.
“그때 정말로 네가 온 것이구나.”
아버지와 엄마가 놀랐다. 형님들도 마찬가지였다. 큰엄마만이 “그러게 전부터 내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며 채운을 얼싸안았다. 아무래도 큰엄마는 시에나나 온이처럼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았다.
한참 또 울고 운 끝에 태자가 각인증으로 날뛰는 것을 도깨비 황제가 잡으려고 하는데 그러다가 사달이 날 것 같아 걱정하던 중에 금은화의 정령의 힘을 빌려서 승원을 붙잡아 다시 신국으로 왔다고 했다. 영 거짓은 아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 고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쩍 늙은 부모님들의 애간장을 더욱 녹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도깨비 나라에 네 부군과 아이가 있다는 얘기구나. 여운이도 거기에 있고.”
잠자코 얘기를 듣던 큰 형님이 입을 열었다. 채운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도깨비 황제와 혼인을 올리고 아이를 낳은 얘기는 황제와 황후가 모른다고 덧붙였다.
“태자는 아느냐?”
“예.”
“알고 너를 곁에 두고자 한다고?”
형님의 말에 채운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 때문에 자식을 둘이나 잃었다가 간신히 하나를 도로 찾았는데 황가에 빼앗기고 싶지 않다.”
큰엄마가 큰일 날 소리를 입에 담았다. 하지만 다들 말로 못 할 뿐 심정은 같았다. 채운도 마찬가지였다. 황궁이 아니라 집에서, 부모님 곁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황상의 의지가 여전했다. 황상의 의지는 곧 태자의 뜻이었다. 태자가 채운을 곁에 두길 원하니 채운은 죽기 전까지는 태자 곁을 벗어날 수 없었다.
태자가 저를 왜 곁에 두고 싶어 하는지는 일전 새벽에 나눈 대화로 어렴풋이 짐작했다. 저쪽 세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컸다. 채운이 혹시라도 밖으로 그 일을 발설할 것이 두렵기도 하고 또 채운이 있어야만 제가 거기서 미친 살육을 벌인 것에 대한 핑계가 된다. 혹은 저쪽 세계가 생각날 때 채운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어서 일 수도 있다.
어쨌든 채운은 태자궁을 벗어나기 힘들어졌다.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태자의 실종으로 명가는 힘을 많이 잃었다. 엄밀히 채운의 탓이 아니라곤 해도 아들을 잃은 황상의 진노를 감당할 대상으로 낙점 찍히고 말았다. 아버지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지 오래였다. 그러니 채운이 잠자코 태자궁에서 사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서러운 울음이 그치고 나자 큰엄마가 작은형님 곁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만나자마자 눈물부터 쏟느라 뭘 짊어지고 온 줄도 몰랐다. 곱게 싼 보자기를 풀자 찬합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있는 것만 챙기느라 부실하지만, 그래도 집에서 한 것이다. 어서 먹어라.”
고운 전이며 나물을 보는 순간 채운은 갑자기 배가 미친 듯이 고팠다. 얼마 만에 먹는 신국 음식인지. 큰엄마가 맨손으로 집어 주는 전을 입에 꾸역꾸역 넣으면서 아버지에게 안 드시냐고 눈빛으로 여쭈었다.
“우리는 날마다 먹는 것이다. 너야말로 많이 먹거라. 얘, 밖에 기별하여 물을 좀 들여오너라.”
“예. 아버지.”
작은형님이 나갔다. 그사이 엄마는 큰엄마와 같이 손을 걷어붙이고는 아래 함에 있는 생선찜을 손으로 뜯어 채운의 입에 넣었다. 두 엄마가 번갈아 가며 입에 집어넣는 통에 목이 막혔다. 마침 작은형님이 시원한 냉수를 가져와 꿀꺽꿀꺽 마셨다. 그 뒤로도 큰엄마와 엄마는 경쟁하듯 고기며 나물이며 집어넣느라 바빴다.
“내 새끼, 이 가는 팔 좀 보아라. 뚝 부러질 것 같구나. 자네, 거기 있는 고기 좀 더 먹이게.”
아버지마저 채운의 팔을 매만지더니 엄마에게 고기부터 더 먹이라고 성화였다. 태자궁에 지내면서 푸짐한 상을 수시로 받았으나 식욕이 없어 별로 입에 대지 않았다. 밤마다 잠도 설치긴 했다. 그래도 팔이 뚝 부러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부모님은 찬합에 들어 있는 음식 전부를 채운의 배 속에 밀어 넣으려 들었다.
“찜이 한 점이 남았는데.”
엄마가 마지막으로 생선찜을 집었다.
“배…… 배가 터질 것 같아요.”
울상을 지어도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 생선찜까지 모조리 입에 집어넣고서야 소동이 끝이 났다. 부모 앞에서 버릇 나쁘게 반쯤 드러누운 데다가 허리띠까지 풀었는데도 큰엄마의 성에 차지 않았다.
“몸을 푼 지 백일 남짓인 줄 미리 알았으면 잉어를 잡아 푹 고아 오는 건데.”
“보약도 지을까요?”
“그럼. 당연할 말일세.”
큰엄마는 이미 채운을 찌울 생각이 만만했고 엄마는 보약을 거론했다. 그냥 두었다간 한 반년은 먹다가 세월 다 보낼 참이었다.
“그런데 네 아이는 어떠하냐? 너를 닮아 예쁘냐?”
작은형님이 온에 대해 말을 꺼냈다. 온을 떠올리자 가슴이 시렸다.
“예.”
부끄럽지만 뿌듯하게 대답했다. 그에 그 자리에 있는 얼굴 모두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때부터 온이 어떻게 생겼는지, 제 아비와는 어떻게 닮았는지, 얼마나 똑똑한지 쉬지 않고 얘기했다. 부모님과 형님들은 때때로 도깨비 황제라는 카론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의 흉은 감추고 잘한 일만 자랑하였다. 잠시도 떨어지길 싫어하여 애를 먹는단 얘기에 팔불출이라고 웃음이 번지다가도 곧 침묵이 찾아왔다.
온과 카론은 저쪽에 있다. 죽음을 무릅쓰고 천룡을 탄 누님도 그랬다. 언제 다시 볼지 기약할 수 없다. 시린 애수가 채운의 가슴에도, 그리고 채운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가슴에도 멍울처럼 고였다.
* * *
사전에 여운에게 들었던 대로 바람은 두 사람을 온전히 내려놓지 않았다. 위에서 뚝 끊겼고 카론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 착지를 해냈다.
솨아아.
돌풍에 웃자란 풀이 흔들렸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카론은 저를 향해 위협하는 날카로운 창을 발견했다. 삥 둘러선 자들은 가죽과 동전을 이용한 특이한 복장을 갖추고 있는데 척 보기에도 적대적이었다.
“누구냐! 신원을 밝혀라!”
검을 바로 들려는 때 여운이 나섰다.
“나는 북방 대장군 명여운이다. 먼 별세계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의 대답에 상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수군거리는 놈들 사이로 장식이 더 많은 놈이 나타났다. 대장인 듯했다.
“얼굴을 보여라.”
여운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놈이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대장군!”
다른 자들이 일제히 창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긴장을 약간 푼 카론은 여운을 다시 봤다. 채운의 가문이 공작 정도 된다고 했던가. 여운은 저만 믿으라는 듯이 카론을 쓱 돌아봤다.
“이자는?”
“별세계에서 내 목숨을 살려 준 자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는 태자 전하와 내 아우가 돌아왔는가?”
“예! 두 분 다 태자궁에 계십니다. 장군의 무사 귀환을 알리면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빠르게 전갈을 보내려는 걸 여운이 황급히 막았다. 태자궁은 필경 경계가 삼엄할 것이다. 이대로 거기로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금의군에게 금방 포위되어 목숨을 잃을 확률이 높다.
“아니, 일단 부모님을 뵙고 싶다. 말도 없이 떠난지라. 부모님을 뵙고 인사를 드린 후에 의관을 정제하고 태자궁으로 정식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침 명가의 사람들 또한 전부 태자궁에 태자 전하와 명채운을 만나러 입궁하였습니다.”
하필 이런 때에. 여운은 카론을 곁눈으로 흘끔 봤다. 카론은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으나, 일단 채운의 이름만은 확실히 분간했다. 여운의 표정과 태도 또한 날카롭게 주시했다. 당장 여운에게서 살기를 느낄 수 없으므로 잠자코 있었다.
“알았다. 바로 태자궁으로 가자.”
대장이 앞장서고 기이한 복장의 기사들이 우르르 따랐다. 뒤를 따르는 여운의 눈치를 보고 카론도 뒤를 따랐다.
요정 세계의 건물은 검정색 비늘 같은 돌로 만든 각진 우산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바깥과 구별하는 문 또한 작은 우산을 썼다. 우산 아래는 대단히 화려한 나무 문양을 짜 넣어 발이 걸리지 않게 조심해서 넘나들어야 했다. 벽은 거대한 벽돌을 솜씨 좋게 쌓아 연결하고 중간 중간 돌로 문양을 그렸고 긴 우산을 쓰고 있었다. 담을 넘기에 상당히 어렵다는 얘기였다.
대부분 별개의 건물로 이루어졌고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낮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같은 밤에는 미로나 다름없었다. 분명히 자신이 나타난 곳에 원판이 숨겨져 있다. 돌아갈 때도 거기로 가야 한단 뜻이었다. 카론은 발걸음 수와 방향을 집중해서 외웠다.
‘일단 채운을 만날 때까진 잠자코 따라야 해.’
궁수가 많을 줄 알았는데. 창병은 예상하지 못했다. 검으로는 다수의 창을 이기기 힘들었다. 대단히 불리한 정황이었다. 되도록 좋은 방향으로 풀어야 목적을 이루기 쉬우리라.
* * *
늦은 밤이었다. 채운은 이 년, 가족은 오 년 만의 만남이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누구 하나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 대화가 도란도란 이어지는 중에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들어온 자는 태자 이승원이었다.
“방금 은현궁에 비원을 지키고 있던 자가 왔소. 여운 대장군이 돌아왔다고 하오.”
“예?”
깜짝 놀라 채운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예법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황급히 몸을 낮추었다.
“부모님을 먼저 뵙고 싶다기에 야심한 밤이라도 일단 이리로 오라고 했소. 곧 당도할 거요.”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아버지가 일가족을 대신하여 고하였다. 태자는 허심탄회하게 웃으며 얼른 일어나 나가자고 했다. 두 분 형님이 세 부모님을 모시고 밖으로 나가는 사이 승원이 채운을 붙잡았다. 누님을 만날 기대에 다시금 눈시울을 붉히는 채운을 향해 그가 낮게 읊조렸다.
“여운이 저쪽에서 누굴 데려왔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누…… 누굴 말입니까?”
설마 온이? 피붙이 조카이니. 그러면 카론은…….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키가 큰 장정이라더군.”
덜컥 내려앉은 심장이 이번엔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멍하게 승원을 바라보았다.
“너와 내가 생각하는 그자가 맞으면…….”
돌아오는 음성이 무척 메마르고 차가웠다. 채운을 노려보는 눈동자엔 두려움과 함께 옅은 광기가 비쳤다.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카론은 태자 이승원이 무슨 짓을 했는지 분명히 보았을 터. 심장이 사라진 텅 빈 가슴에 스며드는 송곳 같은 차가움을 억누르며 채운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는 신국 말을 모르니 괜찮을 겁니다. 염려하지 마시옵소서.”
“그래, 그렇겠지.”
태자와 함께 뒤늦게 뜰로 나갔다. 평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금위군이 뜰 귀퉁이마다 커다란 횃불을 지폈다. 불빛이 얼마나 많은지 뜰은 흡사 낮이었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대문이 열리고 병사를 이끄는 대장이 나타났다. 일전에 비원에서 본 적이 있는 자였다.
대장의 뒤로 여운이 바로 따라 들어왔다. 뜰에 서 계신 부모님을 보자마자 여운이 달려왔다.
“어머니! 아버지!”
“네, 이놈! 명여운!”
채운을 보고서는 눈시울부터 붉혔던 아버지가 대뜸 호통쳤다. 기분 좋게 달려오던 여운은 우뚝 굳었다.
“이 불충하고 불효한 놈! 신국의 대장군이라는 놈이 감히 막중한 소임을 팽개치고 멋대로 사라져? 그러고도 네가 뭘 잘했다고 멀쩡히 서 있는 게냐? 당장 꿇어라, 이노옴!”
불호령에 여운은 검을 바닥에 놓으며 무릎을 꿇었다. 큰엄마와 엄마도 아버지를 차마 말리지 못했다. 아버지는 누님을 등지고 흙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못난 자식을 대신하여 이 명판승, 태자 전하께 불충의 죄를 고하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높은 돌단 위에 선 태자 이승원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대장군을 억지로 끌고 간 것이오. 전부 내 잘못이니 고개를 드시오. 그리고 사죄를 하더라도 내가 아니라 아바마마께 해야 하지 않겠소. 날이 밝으면 나도 함께 죄를 고하러 가야겠소.”
심각한 아버지와 달리 태자는 엷은 미소까지 지었다. 죄를 자청한다면 황상이 크게 죄를 묻지 않을 거라 확신한 탓이었다. 채운은 그보다는 불똥이 아버지와 누님에게, 나아가 두 분 어머니와 형님들의 앞길에 튀지 않을 것을 걱정했다.
“일어나시도록 해라. 여운도 일어나시오.”
태자가 대장을 시켜 아버지를 부축하도록 했다. 누님까지 일어서라고 해서 채운은 대단히 안심했다. 아버지와 누님도 태자가 방패가 되어 주리라.
일단 안도하고 나자 시선이 절로 다른 쪽으로 향했다. 병사들 사이에 유달리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사람이 있었다. 병사들이 들고 이는 창의 긴 그림자가 져서 꼭 감옥에 갇힌 듯 보이는 그는 아까부터 내내 채운 쪽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분명히 카론 같은데…… 그런데 햇살 같은 머리카락이 오간 데 없었다.
여운이 일어서자 대장이 그를 앞으로 내밀었다.
“여운 대장군과 함께 도깨비 세상에서 온 자입니다.”
불꽃이 일렁이면서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머리엔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다. 노랗고 빨간빛을 받은 푸른 눈이 선명하게 빛났다. 날렵한 콧대며 꽉 다문 입술이며, 고집스러운 턱이며. 모조리 저쪽 세상에 두고 온 카론임을 주장했다.
아.
입술이 떨어졌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허물어지듯 그를 향해 몸을 던지고 싶었다. 이대로 두 번 다시 영영 보지 못할 줄 알았다고 울면서 품에 안기고 싶었다. 온이는 어쩌고 여기까지 왔냐며 화를 내고 싶었다. 눈은 뜨겁고 뺨은 차가우며 내장은 석둑석둑 잘리고 발밑이 울렁거렸다.
사방에 비친 빛이 물을 먹은 듯 번지며 어둠은 일제히 물러났다. 병사들이 사라졌다. 아버지도, 누님도, 눈물을 삼키는 어머니들과 형님들도 모조리 어둠 속으로 지워졌다. 오롯이 보이는 이는 한 사람뿐이었다. 달도, 별도 숨이 멎고, 바람도 멈추었다.
저기에 님이 있다. 먼 세상에 두고 온 님이.
채운.
그가 불렀다. 그리고 오라고 손을 내밀었다.
[카…….]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카론과 채운이 동시에 막 한 걸음 떼었을 때였다.
“명채운.”
태자가 나서서 채운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와 동시에 카론을 향해 붕 뜬 혼백도 차가운 빙판 위로 도로 내려앉았다. 냉엄한 바람이 폐부를 얼렸다.
스릉.
홀로 선 황제의 날카로운 검이 뽑혔다.
스르릉.
“아, 안 돼.”
검을 뽑는 그의 모습에 절망이 밀어닥쳤다. 그와 동시에 금위군의 검도 모조리 뽑혔다. 카론의 뒤로 빙 둘러서 있던 병사들의 또한 너른 등을 겨냥했다. 그런데도 카론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도리어 당당하게 외쳤다.
[내 황후를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