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23/28)

6.

베로니카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을 부르는 것은 황제의 신변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만으로 합의했다. 벌레 몇 마리가 황궁에 드나들고 그 덕에 황후가 무단 출궁 좀 했다고 냉큼 자신을 부르다니. 무엇보다 자신이 집을 비울 때마다 서로 머리채를 뜯어 가며 싸우기 일쑤인 아들과 딸이 얼마나 말썽을 피울까 걱정스러워 더욱 짜증 났다.

“카론 새끼. 요정한테 홀딱 빠지더니 물러 터졌어.”

황제를 카론 새끼라고 부르는 것보다 물러 터졌다 욕하는 시점에서 뒤따르는 수하들의 분위기가 묘해졌다.

사실 베로니카는 카론만큼 무른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죄를 저질러도 조그만 참작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든 형벌을 감해 주는 놈을 ‘악마’라고 부르는 놈들이 오히려 어둠에 숨어 있는 빌어먹을 악마 새끼들을 모를 뿐이었다.

세상엔 악마도 울고 갈 쓰레기가 차고 넘쳤다. 그에 비하면 카론은 선량한 지배자였다. 베로니카가 카론과 같은 어린 시절을 겪었다면 세상의 반을 불사르고 다른 반은 피로 물들였을 거다. 특히나 카론의 생부인 전 왕의 악마 같은 기행을 알면서도 묵인하거나 부추긴 귀족 놈들은 전부 산 채로 껍질을 벗겨 내어 옷을 지어 입었을 터.

저주받을 마녀와 악녀를 동시에 배출한 파사 일족에 대해서는 원한이 깊은가 했더니 결국에는 이 꼴이다. 겉으로는 냉혈한 흉내를 내면서도 제 몸에 흐르는 피 반쪽을 나눈 일족이라 그런지 카론은 종결을 위한 명령을 좀처럼 내리지 못했다.

간악한 파사 출신 여자가 카론과 테퍼의 뒤통수를 쌍으로 내갈겼을 때도 그 여자를 즉시 목을 쳐서 고통 없이 죽였다.

‘문제는 사사건건 카론 성미를 건드리는 멍청이 테퍼 놈인데.’

동정과 연민을 뼈에 새기고 태어난 듯한 이복 오빠는 불쌍한 사람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베로니카가 제게 더러운 짓거리를 하려던 생부를 죽였을 때 유일하게 옹호했고, 파사의 마녀의 저주로 죽어 가던 카론을 진실로 따랐고, 그다음은 황궁에서 외롭게 버티던 파사 출신의 여자, 휼리에게 관심을 가졌다.

주제를 모른 파사 출신 여자가 황제와 황제의 가장 신임하는 부관 기사 사이에 위험한 저울질을 하지만 않았더라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한 테퍼가 카론에게 휼리와의 관계를 스스로 폭로하지 않았어도. 카론은 여전히 테퍼를 신임했겠으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빌어처먹을 테퍼 놈은 휼리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파사 놈에게 또 넘어갔다. 한번 용서받고도 다시 배신한 걸 보면, 파사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이쯤 되면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에 대한 변태적인 성애라도 가진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카론이 요정에게 미친 만큼이나 테퍼 놈도 구제불능이었다.

“하여간 미친놈들의 뒤치다꺼리는 내 몫이군.”

툴툴대면서 사르프 인근 평원길을 질주하던 베로니카는 전방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인물을 발견하고 빠르게 멈췄다.

히힝!

급격한 정지에 말이 앞발을 치들었다가 내렸다. 베로니카가 말하지 않아도 전방의 이변을 알아챈 흑기사 둘이 검을 들고 속보로 전진했다. 뒤이어 석궁을 장전한 자 셋이 따랐다. 베로니카도 석궁을 든 자와 속도를 맞추었다.

어두운 밤이어도 길에 선 자는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아주 이국적 용모 정도는 분간할 수 있었다. 복면을 쓰지 않은 안면은 윤곽부터 라테시온인과 현격히 달랐다.

“요정인가?”

“예, 각하.”

베로니카와 엇비슷한 체구를 가진 요정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상태였다. 중무장한 흑기사단을 마주하고도 겁먹은 태도도 아니었다. 도리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누군가를 찾는 기색이었다.

[황제 카론을 찾는다. 거기에 카론이 있나?]

“쫓기는 주제에 황제의 이름을 당당하게 외치다니. 배짱이 좋군.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에 구멍이나 내줘.”

베로니카가 손짓하자 흑기사가 석궁을 쏘았다. 요정은 대단히 빠른 몸놀림으로 석궁을 피했을뿐더러 가볍게 땅을 박차고 올라 흑기사 하나를 말 위에서 떨어뜨렸다. 그러는 동시에 흑기사가 쥐고 있던 검을 빼앗았다.

철컥. 철컥.

뒤에 있던 흑기사들이 일제히 석궁을 겨냥하고 쏘려는 찰나 베로니카가 손을 들어서 막았다. 들었던 손은 그대로 박수로 이어졌다. 철제 건틀릿이 부딪히는 소리가 육중하게 울렸다.

“대단한 몸놀림이로군. 그 속도면 그 망할 자식도 감당하기 어렵겠어.”

[네가 우두머리인가? 나는 황제 카론을 만나고 싶다. 염치없는 짓인 줄 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동생을 구해야 해. 내 동생이 바로 황후다. 그러니 황제를 만나게 해 다오.]

“요정 말은 몰라.”

[카론, 카론이라는 말을 모르나? 발음이 이상한가? 카아로온, 크아로온? 라아테시이오온?]

“카론 라테시온?”

[그래! 그거다. 카론 라테시온. 나는 카론 라테시온을 만나고 싶다.]

“황제 이름을 꺼내는 걸 보니 뭔가 요구할 셈인가 본데. 황후를 빼돌리기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어렵겠는걸.”

베로니카가 검을 빼자 흑기사들이 빠르게 산개하여 주변을 에워쌌다. 요정의 지척에 있는 건 베로니카뿐이었다.

“뒈지기 싫으면 황후가 어디 있는지 말해…… 아, 어차피 해 봤자 못 알아듣지. 귀찮게. 직접 찾아봐야겠군.”

요정에게 사감은 없다. 다만 심하게 귀찮을 뿐. 빨리 정리하고 집에 들어가서 말썽꾸러기 두 녀석을 감시해야 했다. 더불어 다 커서 말썽 피우는 다른 멍청이도 함께 정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검을 바투 든 베로키나의 기세를 알아챈 요정의 표정이 굳었다. 별로 맞부딪히기 싫은 의향을 엿보았지만 무시했다. 석궁을 일제히 쏴서 요정을 단번에 벌집 내는, 편한 방법을 두고 굳이 검을 든 이유는 요정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카론 놈이 요정에게 홀리지만 않았어도 내가 나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말을 달렸다. 빠른 질주로 속도를 좁히면서 정확하게 목을 겨냥하고 검을 그었다.

부웅.

딱딱한 목뼈가 잘리는 대신에 바람만 갈랐다. 요정은 놀랍게도 허리를 뒤로 완전히 젖혀 검을 피했다.

‘보통은 앞으로 숙이거나 옆으로 떨어지는데.’

하체와 허리를 대단하게 단련했는지 오뚝이처럼 반동을 이용해 몸을 일으킨 요정은 내내 베로니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만약 요정이 석궁도 다루었다면 베로니카는 기수를 돌리는 사이 등이나 옆구리를 당할 확률이 높았다.

“대단하군.”

갑옷을 사용하지 않는 만큼 자유로운 몸놀림을 극대화한 요정과 지상에서 맞붙으면 어떨까. 명령을 받은 일은 귀찮지만, 강한 상대와 붙는 건 무척 즐겁다. 베로니카의 입술이 긴 호를 그렸다.

캉! 챙! 카캉!

공방이 이어졌다. 요정의 몸놀림은 아주 유연했으며 때때로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럴 때마다 베로니카는 특유의 속도를 이용하여 막았다. 유연성은 저쪽이 한 수 위지만, 검의 속도와 그로 인한 타격력은 베로니카가 위였다. 그렇다고 해서 요정의 속도와 힘이 별로라는 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베로니카에 미치지 못하단 뜻이지 웬만한 기사는 그 자리에서 목이 따이기 십상이었다.

‘테퍼로서도 만만치 않았겠는데.’

현 라테시온 제국에 테퍼보다 상위 실력자는 베로니카뿐이었다. 이런 실력자가 요정 세계에 얼마나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런 놈 열 명만 앞세워 라테시온으로 쳐들어온다면 황제를 비롯한 제국 요인이 암살당하고 제국은 순식간에 해체되고 만다.

‘죽이면 놈이 귀환하지 못할 터. 더 강한 놈을 보내면 어떻게 하지?’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카론에게 볼일이 있다고 하니 그 부분을 적극적으로 참조해 볼까 하는 찰나였다.

삐이이이익-!

하늘 높이 나는 매가 길게 울었다. 매를 담당하는 기사가 팔을 들어 올리자 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려왔다. 거리를 벌리고 공방을 잠시 멈췄다.

매를 의식한 건 베로니카뿐이 아니었다. 일정 이상 거리를 벌린 요정도 매를 의식했다.

“각하,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약 ‘요어은’ 이라는 요정을 만나면 상처 없이 황도로 이송하고, 다른 관련인도 전부 생포를 최우선으로 하고 자살 시도도 일단 막으라고 합니다.”

역시 등장의 때를 아는 주인공답다. 이래서 욕이 나오다가도 카론에게 휘말리기 일쑤였다.

“그래? 그런데 요어은이 두 요정 중 어느 쪽이지?”

[여운? 여운!]

질문은 부하에게 했는데 대답은 요정이 했다. 자신을 가리키며 ‘요어은’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는군.”

베로니카가 검을 도로 집어넣었다. 수신호를 보내 석궁도 내리게 했다. 그러자 요정은 강탈한 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것도 모자라 말에서 내려와 두 손도 들었다. 어딜 봐도 투항이었다.

“라테시온어를 못 하는 게 맞나. 눈치가 대단히 빠르군.”

[카론을 만나고 싶다. 카론을 만나게 해라. 내 동생 채운이 위험하다.]

“그렇지 않아도 카론에게 데려갈 거다.”

베로니카의 명령에 따라 이송대가 꾸려졌다. 요정은 내내 협조적이었다.

황후의 남매인 요정은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혼자 있는 것으로 보아 어디선가 황후를 잃어버린 눈치였다. 관련한 파사 놈들에게 속은 것일까. 간악하고 기괴한 술수를 많이 쓰는 놈들이니 순진한 요정 따위 속이기야 쉬웠을 터.

“황후의 행방에 대해 알고 싶은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내 동생. 내 동생이 저기에 있다.]

“네도오새?”

[내 동생. 채운. 분홍이]

“황후를 말하는 건가. 채운?”

[그렇다 채운! 채운은 저기에 있다. 휼레가 독을 썼다. 해독약을 구해야 해. 카론에게 알려야 한다. 매를 날려라.]

알아듣지 못하는 베로니카도 답답했다. 요정이 갑자기 쭈그려 앉더니 버렸던 검을 들어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낮에도 알아보기 힘들 텐데 밤이라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집이 있고 지하가 있고 배도 있고. 하여간 모호한 표시일 뿐이었다.

“알았다. 배를 이용했고 사르프 어딘가에 잡혀 있었군.”

“황후 폐하의 상태도 좋지 않아 보이는데요.”

옆에서 수하가 거들었다.

“다쳤거나 볼모로 잡혀 있다가 탈출했나? 어쨌든 황후를 찾았다니 됐어. 카론을 얘기하는 걸 보니 카론에게 할 말이 있나 본데. 그놈의 가정사는 그놈에게 맡기지. 일단 황궁으로 데려가라. 우리는 따로 사르프를 수색한다. 배를 이용했다고 하니 강변부터 시작하지.”

“예.”

여운이라는 요정은 이송대와 함께 황궁으로 향했다. 그 외는 베로니카와 함께 곧장 사르프로 달렸다.

사르프에 도착하자마자 경비 기사단장이 먼저 뛰어나왔다. 뭐라 말을 떼기 전부터 그는 다급하게 베로니카를 찾았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뭔가?”

“북쪽 지역에 마족이 나타났습니다.”

“마족?”

마녀는 그렇다 쳤다. 요정도, 뭐 생눈으로 봤으니 그렇다 친다. 그런데 마족은 또 뭐란 말인가? 정말 가지가지 한다.

“그 마족이 어쨌단 말이지?”

“사르프 시 북쪽 끝에 위치한 마을이 있습니다. 그 마을을 끼고 있는 강 지류에서 갑자기 나타나서는 마을을 습격했다고 합니다. 맞서는 경비 기사를 모조리 죽이고 마을 하나를 불태웠습니다. 도망치는 자마다 잡아서 죽인다고 합니다.”

“몇 놈인가?”

“그게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상한 말을 쓴다고 합니다.

“이상한 말을 써?”

“예. 전혀 들어 본 바 없는 특이한 말이라고 합니다.”

아하.

베로니카는 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요정은 두 놈, 하나는 잡았으니 다른 하나가 남았다. 황궁을 단신으로 습격한 놈은 황후의 혈육과 달리 대단히 호전적인 듯했다. 그놈과 테퍼가 함께 있을 터. 더한 사고를 쳐서 제 손으로 죽이는 것이 차라리 나을 지경에 이르기 전에 일단 막아야 했다.

“마족 사냥을 시작하지.”

베로니카는 흑기사단을 이끌고 즉시 마족이 있는 마을로 향했다.

* * *

황후의 상태는 줄곧 나빴다. 조금 내렸나 싶으면 바로 고열이 났다. 약초를 섞은 물로 몸을 하도 닦아 전신에서는 약 냄새가 진동했다. 황궁의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늦은 저녁 무렵 베로니카의 수하 중 일부가 돌아왔다. 그들은 채운의 누나, 여운을 대동했다. 예상대로 베로니카 쪽에서 먼저 맞닥뜨린 모양이었다.

사로잡기까지 쉽지 않았는지 여운은 먼지를 뒤집어써서 수척하고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걷는 데 문제가 없었고 무엇보다 눈빛이 생생했다.

“폐하. 명령하신 대로 요정을 생포했습니다. 황제 기사께서는 이어서 파사와 다른 요정을 추척 중입니다.”

여운은 카론을 보자마자 요정 말로 외쳤다. 푸논과 채운, 그리고 카론의 이름과 함께 휼레라는 그 파사 놈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강 안다.”

손을 들어 여운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를 양옆에서 단단히 포박하고 있던 흑기사단에게 명령하여 풀어 주게 했다.

“계속 반항하다가 폐하에게 호송하는 것을 눈치를 채고 잠잠해졌습니다. 암살 가능성이 있으니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괜찮다. 요정이, 여운이 나를 공격해도 상관없다. 너희는 절대로 나서지 마라.”

흑기사가 경고했으나 카론은 상관하지 않았다. 딱히 무장한 것도 아니었다. 늘 소지하던 단검도 마침 빼놓았다.

당장 달려들 거라 예상한 흑기사들은 여운을 풀어 주면서도 손을 검에 슬그머니 댔다.

[분홍이를 찾아야 해. 채운, 명채운 말이다. 분홍이가 휼레에게 잡혀갔어. 네 수하에게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알아듣는 놈이 없다. 너를 데려가지 않으면 우리 분홍이가…… 죽어.]

채운 덕분에 누그러진 건 카론뿐만이 아니었다. 분명히 카론을 죽이려고 했던 여운은 흑기사가 물러선 뒤에도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카론은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진작에 요정 말을 배워 두었으면 좋으련만. 제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후회가 또 쌓였다.

“채운이 아프다. 할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다 동원했다. 하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아. 네가 뭔가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말을 알아듣든 말든 카론은 뜻을 전했다.

[채운? 채운을 찾아야 한다니까? 우리 분홍이, 그놈이 잡아갔다고. 이 멍청한 놈아!]

여운이 애가 탄다는 듯이 역정을 냈다. 카론과 마찬가지로 여운도 라테시온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손짓, 발짓으로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채운은 위에 있다.”

침착하게 위를 가리키며 채운이라고 반복했다. 여운의 시선이 손을 따라 위로 향하다가 별안간 잠잠해졌다. 채운이 황궁에 있음을 안 것 같았다. 아직 상태는 알지 못한 그는 안도의 한숨까지 쉬었다.

“채운이 상태가 매우 안 좋으니 더러운 꼴로 만날 수 없어. 우선 시녀를 따라가 씻고 옷을 갈아입어라. 그 후에 만나게 해 주겠다.”

난동을 부리면 제압하기 위해 잠시 대기하던 흑기사는 할 일이 없었다. 여운은 순순히 시녀를 따라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났다.

삼 일간 정신력과 체력을 굉장히 소모한 카론은 여운과 말씨름을 하는 대신 그를 곧장 골든 피오니로 데려갔다. 진한 약 냄새가 가득한 침실에 들어선 여운은 창백한 낯으로 누워 있는 채운을 보자마자 침대 곁에 허물어졌다.

[분홍아! 내 가여운 동생!]

검은 줄이 쭉쭉 난 팔을 보고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휼레가 이랬다. 휼레가. 그놈을 잡아서 해독약을 찾아야 해!]

뭔 소린지 정확하게는 몰라도 휼레를 규탄하는 내용이라고 짐작했다.

“안다. 베로니카에게 그자의 추적을 명했다. 채운은 지금 상태가 안 좋아. 시끄럽게 하면 곤란해.”

카론은 검지를 펴 입술에 댔다. 의미가 통했는지 여운은 숨을 죽이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올리아는?]

의사인 올리아 얘기를 꺼내는 걸 보자 어떻게든 대화가 통하는 느낌에 조금 우스워졌다. 하지만 입술이 약간 떨렸을 뿐, 미소 같은 건 전혀 지어지지 않았다.

“올리아는 채운이 가르쳐 줬나? 올리아가 왔다 갔다.”

고개를 끄덕이며 올리아가 오갔다고 손짓했다. 약초를 탄 물그릇을 가리켰다. 여운은 어떻게든 기를 쓰고 알아들으려고 카론에게 집중했다.

그저께만 하더라도 서로 칼을 겨누던 사이였는데. 채운의 존재는 너무나도 강력하여 두 사람 간의 반목을 일시에 지워 버렸다. 채운 앞에선 어떤 나쁜 일도 하기 싫어지는 건 카론 혼자만이 아니었다.

[네게 무턱대고 검을 겨눈 내 잘못이 이렇게 만들었다. 분홍이는 끝까지 너를 감쌌어. 사랑하는 동생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다.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다.]

여운이 잔잔하게 말을 하며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정확한 뜻은 몰라도 화해의 표시 같아서 카론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로 여운은 식은땀에 젖은 채운의 이마와 뺨을 쓰다듬었다.

꽃의 정확한 효과와 요정식 해독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잠시 여운에게 슬퍼할 여유를 준다고 해서 나쁠 건 아니었다. 채운은 여전히 저런 상태로 있을 테니.

혹은 여운의 손길이, 무력한 인간이 아니라 세상을 넘나드는 요정의 손길이 채운에게 어떤 기운을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우리 예쁜 분홍이. 누나가 잘못했다. 누나가 다아 잘못했다. 너만 좋다면 어디서 누구와 살아도 좋다. 평생 다시는 너를 못 본다고 해도 좋아. 원하는 대로 살렴. 그러니까 아프지 말고 훌훌 털고 일어나자. 나쁜 놈의 독 따위 이겨 내. 내 예쁜 동생…… 우리 분…… 홍이]

여운에게 둘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잠시 방을 나왔다. 물을 것이 많아서 펜과 노트를 준비하여 돌아오자 어느새 진정한 여운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둘은 골든 피오니의 응접실 탁자에 마주 앉았다. 채운 외에 어떤 공통점이 없는 사이에 당장 채운이 아프지 않았다면 험악하게 으르렁거려도 모자랄 전적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서로 잠잠하게 마주 앉은 자체로 이미 몹시 어색했다.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카론이 다리를 꼬며 잠시 침묵하는 동안, 여운이 먼저 탁자 위에 놓아둔 노트를 펼쳐 뭔가 그렸다.

사람 여러 명과 꽃, 우물 등등. 각종 그림을 통해서 카론과 여운은 길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채운은 아버지 한 명에 어머니 두 명이라는 독특한 가족에서 태어났다. 형이 둘, 누나가 하나. 사랑받는 막내였다.

더불어 여운은 여기에 온 방법을 설명했다. 듣고 나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꽃과 원판이 세상의 문을 여는 도구였군.”

채운이 나타난 밤에 보았던 흰 빛과 여운이 오던 날 목격되었던 빛. 마법으로밖에는 설명되지 않는 꽃. 파사 일족이 가지고 있는 원판까지.

상황을 파악한 여운이 가져온 꽃과 원판에 대해서 의문을 표했다.

[그건 이 사람이 가지고 있다.]

여운은 자신 옆에 그린 다른 사람을 가리켰다. 척 보기에도 여운보다 훨씬 컸으며 머리 위에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표식이 있었다.

설명을 기대하고 잠잠하게 기다리는데, 여운이 잠시 시선을 들어 카론을 보았다. 뭔가 망설이다가 이내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따로 큰 사람과 함께 같은 표식을 그린 여운은 그림을 가리키며 [카론.]이라 불렀다.

“음?”

자신의 머리 위에 그려진 표식이 동료 요정 위에도 있다. 그건 왕관이었다. 같이 왔다는 요정의 정체를 단박에 파악했다. 이 쉬운 퍼즐을 못 맞추었던 제가 멍청한 나머지 헛웃음이 터졌다.

검을 마주했던 놈의 생김새를 똑똑히 기억했다. 우람한 덩치에 선이 굵고 사나운 얼굴로 미루어 보아 성별이 모호한 요정이라 쳐도 분명히 남자. 왕관을 쓴 지배자이면서 채운의 누나와 함께 낯선 세상에 함께 나타날 놈이야 뻔하지 않은가.

“타이손.”

[태손을 아는가. 지금은 태자다. 태자 이승원.]

“채운의 전 약혼자. 언젠간 찾으러 오리라 짐작했었는데. 정말로 올 줄이야.”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베로니카와 흑기사단이 놈을 사살할 것이다. 모르는 척해도 된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황궁을 습격한 놈의 잘못과 베로니카의 과격한 대응 탓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이대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무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카론을, 여운은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여운은 이미 무언가를 주장할 힘을 잃었다.

비록 채운과는 좋은 인연이 되지 못했으나 태자의 심성은 어질었다. 성혼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혼약자를 찾아간 대가로 5년간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것도 모자라 머나먼 객지에서 죽는 건 너무 가혹했다.

채운이라면 황제에게 너그러운 처사를 부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채운은 여운의 그릇된 판단과 불같은 성격으로 인해 사경에서 헤매고 있었다. 태자가 죽는다면 그 죄는 여운 자신이 짊어지어야 했다. 묵묵히 처분을 기다렸다.

침묵하던 카론은 한참 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특별한 의사 표시 없이 자리를 떠난 카론은 한참 뒤에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펼쳐 두었던 노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그가 어떤 결정을 했는지 여운은 알지 못했다.

“요정의 꽃은 마력이 있다. 아무래도 약효보다는 그쪽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채운이 가져온 꽃은 약해졌어. 요정에게 다른 치료 방법이 있나?”

복잡한 물음인 데다 그림에 영 소질이 없기에 카론은 여운을 이해시키느라 한참 애먹었다. 종이를 몇 장이나 낭비하고 실제 꽃을 보여 주며 아픈 척, 먹는 척, 멀쩡해진 척까지. 광대처럼 각종 흉내를 낸 후에야 여운은 꽃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 꽃이 만병통치약이라고? 그럼 왜 채운에게 먹이지 않아? 당장 먹여야지!]

꽃을 냉큼 낚아챈 여운이 그것을 들고 침실로 가려고 했다. 카론은 황급히 쫓아가 꽃을 도로 빼앗았다. 성질이 어지간히 급한 여운이 금방 또 힘을 쓰려고 들었다.

“여운!”

꾸짖듯 이름을 부르자 여운이 막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카론을 바라보는 눈빛이 몹시 불손했다. 다른 때라면 분노를 금치 못했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소 차오른 흥분은 분노의 언저리에도 가지 못했다.

채운이 아프다. 아픈 채운 몰래 그가 아끼는 가족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비록 여운이 오만불손하고 무례하더라도. 채운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이미 먹였다. 많이 먹이면 안 좋아.”

다시 멍청한 광대놀음을 한 후에 여운은 뜻을 간신히 알아먹었다. 요정에게는 특별한 방도가 없냐는 물음까지 이해한 후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있어도 나는 모른다.]

미약한 기대가 산산이 흩어졌다. 이제 모든 건 채운에게 달려 있었다. 그가 얼마나 살고 싶은지, 그가 얼마나 돌아오고 싶은지에 따라 생사가 갈릴 터.

수시로 고기 수프를 먹이고 약초 물로 식은땀을 닦아 내면서 카론은 채운이 삶의 의지를 놓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 *

얼마나 잤을까. 문득 잠에서 깼다. 카론을 만나서 황궁으로 돌아가는 중에 기억이 끊겼다. 누님과 온은 괜찮은 걸까. 저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켰다.

휼레의 지독한 독에 당한 것치고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카론을 만나면 죽지 않는다고 시에나가 말했다. 카론이 올리아를 시켜 치료하게 한 걸까? 눈을 깜빡이며 사방을 둘러보는데 시야가 기이하게도 높았다.

천장이 이마 바로 위여서 금방이라도 머리를 부딪칠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손으로 밀어내려는데 손이 천장을 쓰윽 통과했다.

‘으억?’

놀라서 허둥대다가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침대 위에 창백한 낯을 한 채 누워 있는 자가 보였다. 저와 꼭 닮은 자를 마주 보는 느낌이 섬뜩했다.

“채운.”

곁에 앉은 카론이 보였다. 그는 저를 부르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침대 위에 누운 자의 이마와 뺨을 쓸었다.

‘카론!’

경악한 채운은 그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카론은 전혀 듣지 못했다. 시선은 여전히 침대 위에 있는 저와 닮은 자를 향했다. 아니 저와 닮은 자가 아니라, 그것은 제 몸뚱이였다. 염통이 툭 떨어졌다.

‘기…… 깃털 같다고 했더니.’

깃털 같은 게 아니라 진짜 깃털처럼 되어 버렸다. 독에 당하여 죽고 마지막 혼령으로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으어어어엉!’

저도 모르게 목 놓아 통곡했다. 깃털 같은 혼령은 서글픈 통곡 중에도 둥실둥실 방 안을 떠다녔다. 비눗방울처럼 빙글빙글 돌다가 천천히 침상 위로 가라앉았다.

“채운.”

저를 부르는 자상한 음성에 채운은 고개를 벌떡 들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은 이불에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카론! 나 여기 있어요! 카론!’

사지를 휘저으며 그를 불렀으나 카론의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했다. 카론의 안색이 몹시도 좋지 않았다. 눈 밑이 꺼지고 피부가 푸석했다. 목도 쉬었다. 지친 중에도 예기가 흐르는 모습이 꼭 며칠 밤을 꼬박 지새운 사람 같았다.

“오늘은 열이 나지 않는군.”

제 손을 입술에 대어 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마를 제 이마에 대었다. 아니 제 몸의 이마에 대었다. 저면서도 제가 아닌 대상을 향해 카론이 다정하게 대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좋은 징조인가, 아니면 나쁜 징조?”

‘카론, 나 여기 있어! 카론, 나를 봐요!’

“꼭 네가 나를 부르는 느낌이야. 이상하지. 너는 눈을 뜨지도 못하고 있는데.”

손을 휘젓고 발광해도 제 사지는 카론을 통과할 뿐이었다. 마음이 너무 급했다. 하다못해 제 몸뚱이 위에 겹쳐 누웠다. 눈을 꼭 감자 도로 둥둥 떠올랐다.

‘카론!’

“걱정하지 마라. 항상 네 곁에 있겠다.”

카론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가까이 오자 채운은 엉엉 울면서도 눈을 꼭 감았다. 따뜻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만하면 입술을 비벼도 한참 비비고도 남을 시점에 눈을 뜨니 어느새 천장이 코앞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카론은 제 빈껍데기를 조심스럽게 보듬고 있었다.

‘어어어엉’

한참 울다가 채운은 먼지 같은 몸을 일으켰다. 빙글빙글 도는 몸으로 소금쟁이처럼 사지를 휘저어 옆방으로 갔다. 응접실에서 반가운 이를 발견했다.

‘누님!’

카론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손발을 휘저어 제가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누님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오는 게 아니었어. 분홍이가 저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안 오는 건데. 내 잘못이야.]

근심과 후회가 가득한 누님은 벌겋게 달아오른 눈가를 수시로 문질렀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아니에요. 누님 잘못이 아니에요! 울지 마세요!’

자랑스러운 대장군이 우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울음을 끅끅 참으면서 잠시 물러서는 사이 저편에서 찢어지는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

“히에엥! 으앙!”

‘온아!’

허둥거리며 온이가 있을 방으로 향했다. 카론, 누님과 마찬가지로 수척한 마그네가 황급히 온을 안아 들었다.

“전하. 괜찮아요. 마그네가 있어요. 쉬이. 황제 폐하는 지금 황후 폐하를 간호하시느라 힘드세요. 그럴수록 황자 전하께서 씩씩하게 계셔야지요.”

달래는 마그네도 반쯤은 울고 있었다. 볼이 부르트도록 울어 젖히는 온을 보고 채운은 안 될 걸 알면서 두 손을 뻗었다.

‘온아, 괜찮아. 세나비는 여기 있어. 우리 온이. 괜찮아. 울지 말렴.’

“으에…… 흐으엥…… 흐응.”

꼭 알아들은 것처럼 온이 울음을 그쳤다. 눈물이 잔뜩 고인 작은 눈동자가 채운을 향했다.

‘우리 온이 옳지, 옳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빙긋 웃었다. 그러자 온도 따라서 뺨을 실룩댔다. 깜짝 놀랐다. 마그네를 지나쳐 움직이자 온의 시선도 고스란히 채운을 따라왔다.

‘내가 보이니? 우리 온이. 세나비가 보여요?’

“아웅…… 웅.”

앙증맞은 손을 뻗으며 옹알거리는 모습에 채운은 다시 한번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온이. 세나비 보여요. 우리 온이가 세나비를 봐요.’

“아웅. 웅.”

온이 곁을 한참 맴돌았다. 닿지 않아도 볼 수 있기에 작은 머리에 입을 맞추고 손을 어루만졌다. 기분이 좋은지 방싯방싯 웃는 온을 보니 가슴이 미어졌다. 비록 본다고 할지라도 혼백과 사람을 구별하지 못할 터.

그때였다.

“채운아, 명채운.”

은은한 울림이 세계를 흔들었다.

‘엄마?’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혹여 시에나일 수도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금빛 흔적은 없었다.

“우리 분홍이. 이리 오렴.”

‘큰엄…… 마?’

소리를 멀리 하늘에서 났다. 어리둥절한 사이 갑자기 몸이 당겼다. 안 보이는 손이 허리를 꽉 잡고 내동댕이치는 것 같았다.

‘앗! 온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날렸다. 춥고 덥고 차갑고 뜨겁고. 갖은 감각이 뒤섞였다. 땅과 하늘, 달과 해, 낮과 밤이 어지럽게 지나가는 사이 채운은 곧 정신을 잃었다.

* * *

따뜻한 빛이 들었다. 눈이 부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쿰쿰한 냄새도 났다. 눈을 감은 채로 푸근한 냄새의 정체를 더듬었다.

‘장 담그는 냄새인가? 아니면 술지게미? 그도 아니면…….’

가벼운 몸을 뒤척이던 채운은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장이든, 술지게미든. 라테시온에서는 맡아 본 일이 없는 냄새였다.

‘어?’

눈을 뜸과 동시에 빛이 사라지고 그늘이 졌다. 해를 등진 누군가가 채운의 바로 앞에 서서 뭔가를 휙 뿌렸다. 구정물이었다.

촤아악!

‘으악!’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더러운 물에 홀라당 젖을 줄 알았는데. 혼백이라 다행이었다.

‘헤헤.’

하나도 젖은 곳이 없는 걸 확인하고 괜히 멋쩍게 웃었다. 여긴 또 어딘가 하고 시선을 들었다. 그리곤 제게 구정물을 뿌린 사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늠름하고 당당하며, 사람을 두루 살필 줄 아는 너그러운 마음씨와 현명한 지혜를 갖춘, 장원급제로 빛나는 맏아들과 약간은 말썽을 피우지만 재기 넘치는 둘째 아들, 그리고 용맹하고 씩씩한 딸을 모조리 양인으로 낳아 뭇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명 가문의 안주인이자 채운의…….

‘큰엄마?’

방금 채운을 깨운, 쿰쿰하면서도 익숙한 냄새는 알뜰한 큰엄마가 고이 삭히는 두엄 냄새였다. 그 말인즉, 여긴 고향이었다. 그것도 명가 집안, 안채에서 멀지 않은 곳.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뜨악 벌렸다. 목이 콱 막혔다. 온갖 감회가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와 단전을 지날 무렵, 커다란 함지가 요란하게 박살이 났다. 큰엄마가 들고 있던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선이 반사적으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큰엄마로 향했다.

저와 같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쩍 벌린 큰엄마는 잠시 움찔거리더니 소리를 질렀다.

“얘, 분홍아!”

‘어?’

놀라서 얼어붙는 것도 잠시 큰엄마가 두 팔을 펼쳐 와락 달려들었다. 하지만 혼백에 불과하였기에 채운을 붙잡지 못한 큰엄마는 제풀에 바닥에 넘어졌다.

‘큰엄마!’

“아니, 이게 무슨? 아니! 분홍아! 네가? 네가 어찌?”

어리둥절한 큰엄마는 얼른 상체를 일으키고 채운을 잡으려고 했다. 힘찬 안주인의 손은 채운의 몸을 통과하기만 했다.

“네…… 가…… 우리 아기가…….”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을 알게 된 큰엄마는 금방 울먹거렸다. 덩달아 채운도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눈물이 줄줄 샜다.

“이게 무슨 변고냐. 분홍아아.”

‘큰엄마!’

붙잡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채운은 큰엄마의 품에 달려들었다. 서로를 더듬으면서 온기를 찾았다. 손이 닿지 않아 허공을 헤집어 가며 보듬었다.

“마님?”

“형님?”

함지가 깨지는 소란이 일자 집안일을 돕는 어멈과 함께 엄마가 나타났다.

“아이고, 형님!”

놀란 엄마는 황급히 다가와 큰엄마를 부축했다.

‘엄마?’

곱던 얼굴이 반쪽이 된 엄마는 큰엄마와 달리 저를 알아보지 못했다. 채운은 큰엄마를 부축하는 엄마에게 매달려 서글프게 울었다.

‘엄마, 나 왔어요. 채운이에요. 엄마, 나를 보세요.’

“자네, 여기 분홍이가 왔네. 안 보이나? 분홍이가 왔어!”

“형님, 무슨 말씀이세요? 분홍이라니요. 죽은 아이가 어떻게 옵니까?”

‘안 죽었어! 엄마, 나 안 죽었어!’

“죽다니. 안 죽었다잖아.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는데! 멀쩡한 자식을 왜 죽이나? 우리 분홍이 여기 있는데, 안 보여? 여기 있잖아!”

큰엄마가 발을 동동 구르며 엄마를 다그쳤다. 엄마의 표정이 한층 흐려졌다. 뒤에서 상황을 보던 어멈이 몹시도 슬픈 낯빛으로 “대감마님에 여쭙겠습니다.” 하고 돌아섰다.

“그래, 그 양반이라면 우리 분홍이를 알아보겠지.”

엄마에게 외면당해 설피 우는 채운의 곁에 선 큰엄마가 닿지 않은 손으로 등을 쓰다듬었다.

“아버지는 알아보실 거다. 아버지는.”

‘큰엄마아.’

“우리 애기. 얼마나 고생이 많았누. 우리 불쌍한 애기.”

큰엄마의 품에 안기듯 기댄 채운은 분홍이로 돌아가 아기처럼 목 놓아 울었다.

잠시 후 나타난 아버지도 채운을 알아보지 못했다.

“부인, 헛것을 보았소?”

“아니 제가 왜 헛것을 봅니다. 여기 우리 분홍이가 있는데! 눈 뜬 소경도 아니고 어찌 안 보이십니까?”

큰엄마가 하도 역정을 내자 아버지와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엄마아!’

“자네 피붙이가 품에 안겨 있네. 여기, 여기.”

“정말입니까, 형님? 우리 채운이가 있어요?

슬퍼하는 채운을 보다 못한 큰엄마가 눈물을 삼키며 엄마의 손을 들어 채운의 뺨에 대어 주었다. 그러자 엄마가 갑자기 눈물을 주룩 흘렸다.

“채운아?”

채운은 엄마와 눈을 마주치려 애를 썼다.

“우리 채운이, 우리 채운이 다친 곳 없이 건강합니까? 낯빛은 어떠합니까? 홀로 아이를 낳고 몸이 상하진 않았는지.”

‘나 괜찮아요. 건강해요. 잘 지내고 있어요.’

큰엄마가 울먹이며 말을 전했다.

“고생했다고 따뜻한 밥 한술 못 먹였는데.”

또다시 눈물바다가 되어 버렸다. 아버님과 큰형님이 소리 없이 뺨을 축축하게 적실 때 작은형님은 쓰러져 흐느꼈다. 큰엄마와 엄마의 품에서 채운도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눈물을 닦으며 엄마를 바라볼 때 갑자기 몸이 쑥 당겼다.

‘어…… 엄마?’

“채운이. 우리 예쁜 분홍이.”

‘엄마? 엄마?!’

“아이고! 우리 분홍이! 우리 분홍이 날아간다!”

이변을 먼저 알아챈 큰엄마는 놀라서 손을 뻗어 잡으려 했다. 내내 그러했듯이 큰엄마의 야무진 손은 허공을 긁을 뿐이었다. 큰엄마의 다급함에 상황을 눈치챈 엄마와 다른 이들이 벌떡 일어섰다. 큰형님도 거들었지만, 몸은 점점 둥실 떠오를 뿐이었다.

불현듯 날아갈 것을 직감했다. 다급함을 억누르고 작별 인사를 외쳤다.

‘엄마, 아버지, 큰엄마. 큰형님. 작은형님! 모두 모두 건강하시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랑받으며 지냅니다. 행복합니다. 그러니 모두 부디 제 걱정은 마시고 평안히 지내셔요!’

“오냐! 분홍아, 우리 걱정은 하지 마라. 네가 잘 있는 걸 알았으니 되었다. 언제 또 기별할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기다리마!”

큰형님 말에 채운은 알겠다고 외쳤다. 아버지는 그저 채운이 있을 법한 방향을 더듬어 손을 저었다. 부쩍 주름살이 는 얼굴에 서글픈 미소가 걸렸다.

“분홍아! 우리 어여쁜 아가! 엄마는 네가 늘 자랑스럽다. 항상 너를 위해 기…….”

‘엄마.’

큰엄마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나서던 엄마가 결심한 듯 외치는 순간 세상이 또 휘리릭 돌아갔다. 폭풍이 휘몰아치고 천지가 수시로 뒤집혔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분홍아. 우리 어여쁜 아가. 엄마는 네가 늘 자랑스럽다.”

평생 칭찬을 아끼던 분이었다. 다른 가족에게 너무 사랑받은 나머지 기고만장할까 봐서 늘 엄하게 대하셨다. 분홍이라 부른 적도 전무했다.

그런 엄마가 분홍이, 어여쁜 아가로 일렀다. 늘 자랑스럽다 했다. 채운은 엄마의 얼굴을 보고 어설프게나마 따뜻한 품을 느꼈지만, 엄마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엄마아.]

절로 통곡이 나왔다.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닦으며 서러움과 미안함을 털어내는 사이, 누군가 눈물에 젖은 손을 덥석 잡았다.

“채운?”

고작 반나절 정도 귀신 상태였을 뿐인데. 타인과의 접촉이 너무나도 낯설어서 정선이 번쩍 들었다. 침전의 천장이 멀리 보였다. 심장이 뛰고 피가 흐르는 육신의 무게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카…… 론?”

제 육성이 낯설었다. 곁에 서 있는 카론의 굳은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등진 그는 바싹 마른 입술을 떨었다. 마른 손마디가 채운의 눈가를 살짝 쓸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겹친 후에야 카론과 제가 눈을 마주치고 있음을 알았다. 떨리는 온기가 전해졌다. 라테시온 세상으로, 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드디어 깨어났군.”

“카론…… 나.”

두 팔을 들었다. 카론은 자연스럽게 채운을 안아 일으켰다. 단단한 품에 꼭 안기자 고인 서러움이 고름처럼 툭 삐져나왔다.

“흑.”

이젠 울 기운도 없건만. 차디찬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부모님에게 미처 다 부리지 못한 남은 응석을 모조리 쏟아 냈다. 든든한 가슴에 매달려 서럽게 흐느꼈다. 다시는 보지 못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녹여내는 동안, 카론은 내내 등을 다정하게 도닥였다.

“엄마를 봤어요. 아빠, 다른 엄마, 형들.”

“그래?”

고개를 조금 들어 시선을 높였다. 어린 온을 달래듯 채운을 달래는 카론의 안색은 평소와 달리 유달리 희었다. 그늘이 진 애달픔은 멀리 두고 온 가족의 마지막 표정과 비슷했다. 심부 언저리가 쿡쿡 쑤셨다.

“유령이라 만지지 못했어요. 가족이 안아 보고 싶어요. 엄마와 아빠가, 큰엄마를 안고 싶어요.”

천이 비벼지며 쓱싹댔다. 처음에는 뭔가 했으나 이내 제 등을 감싼 손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챘다.

“카론?”

“음?”

“추워요?”

“아니.”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고개를 젓는 그의 뺨에 손바닥을 댔다. 창백한 낯은 놀라울 만큼 찼다. 맺힌 눈물을 쓱쓱 닦아 낸 후에 상대를 면밀히 뜯어보았다.

눈 밑은 푹 꺼지고 콧대는 더 날카로워졌다. 얼굴이 말라 광대가 사납게 불거졌다. 입술은 온통 일어서서 거칠었고 피부도 버석거렸다. 제멋대로 넘긴 머리카락은 군데군데 엉켰다.

깨어나자마자 우느라 몰랐는데 유심히 보니 손만 떠는 것이 아니라 전신을 떨고 있었다. 목울대가 전보다 훨씬 두드러졌다. 어깨도 마른 듯했다.

“왜 이래요?”

“음? 뭐가?”

“왜 아파요?”

“아프지 않아.”

“아파 보여요.”

“잠을 설쳐서 조금 피곤할 뿐이야.”

피로라기엔 지나치게 수척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입술이 마르다 못해 군데군데 갈라져 핏기가 비쳤다.

“내가 많이 잤나요?”

“아니.”

“정말?”

카론은 대답하는 대신 채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채운은 스르륵 뒤로 쓰러졌다. 가슴과 가슴이 포개졌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카론은 천천히 낮은 숨을 토했다. 목덜미에 끼치는 숨결은 습기가 많아서 꼭 우는 것 같았다. 심장과 폐가 동시에 찌그러졌다. 눈가가 다시 시큰거렸다.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아니. 전혀.”

“걱정하느라 못 잤어요?”

“조금.”

대답은 짧고 뚝뚝 끊어졌다. 카론은 얼굴을 계속 묻은 채 숨을 골랐다. 떨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아서 채운은 한참 그를 안고 있어야 했다.

어깨와 등이 조금 저릴 무렵, 카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보다 한층 창백해진 낯과는 반대로 눈시울이 붉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눈물 자국은 없었다.

“네가 깨어난 걸 밖에 알리고 오겠다.”

꺼끌꺼끌한 목소리엔 습기가 가득했다. 짙은 피로 위로 안도의 미소를 짓고 있으나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카론?”

부르는 걸 못 들었는지, 아니면 듣고도 안 들리는 척하는 건지 카론은 곧장 돌아서서 침실 밖으로 갔다.

‘어?’

기분이 이상했다. 제가 돌아온 것이 기쁘지 않은 걸까? 아니. 안도감은 진실했다. 무엇이 문제인 걸까.

“카론?”

고향을 영영 떠나왔는데. 이제 앞으로 영영 기대며 보듬고 살아야 할 상대가 갑자기 기이하게 거리를 두니 불안감이 커졌다.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앗!”

많이 기다린 건 아니라고 했는데. 두 다리는 땅을 딛자마자 꺾였고 채운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두툼한 카펫 덕분에 소리도 적었고 그만큼 아프지도 않았다.

“왜 이러지?”

바닥을 짚는 손목이 전보다 가늘어졌다. 무릎도 뼈마디가 툭툭 불거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제 몸을 살폈다. 살이 많이 빠졌다. 얇은 침의를 걸친 몸을 더듬는 손가락도 꼭 젓가락 같았다. 이렇게 살이 빠질 때까지 정신없이 잠을 잤다니. 카론이 걱정할 만도 했다.

카론의 안색도 퍽 좋지 않았다. 얼굴이 마르고 눈 밑이 꺼질 만큼 몸이 많이 상했을 텐데 워낙 강골이라 티가 덜 나는 것뿐이었다.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그 위로 연한 회색 핏줄이 마른 고목의 가지처럼 군데군데 뻗어 있었다.

“이건.”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서야 제가 누님과 함께 황궁을 나가는 바람에 각종 소동이 일었음이 떠올랐다. 카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가출한 것도 모자라 하필 카론과 적대 관계에 있는 파사 일족에 의탁했다.

걱정하여 쫓아온 그를 만나자마자 경위를 설명하지도 않고 누님만 우선 구해 달라고 윽박질렀다. 안 구해 주면 두 번 다시 안 볼 거라고도 했다. 그러고 나서는 정신이 끊겼다.

“아.”

아들의 무사를 확인하자마자 제가 쓰러졌으니 얼마나 놀라고 걱정했겠는가. 무슨 독에 어떻게 당한 건지도 말하지 않아서 치료하느라 애를 먹었을 터다.

제멋대로 군 저를 살리면서 카론은 온이도 잘 돌보았다. 혼백으로 둥둥 떠다니던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도 온이 무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더불어 누님도.

황제에게 검을 들고 달려든 대역 죄인을. 카론은 단지 제 부탁으로 살려 주었다. 대역 죄인과 함께 도망친 황후는 폐위하고 냉궁으로 내쫓아도 할 말이 없는데. 큰 죄를 지은 외친을 살려 주는 너그러운 아량을 베풀고도 모자라 친히 저를 간호하였다.

‘카론.’

다정하고 따뜻한 대접에 고맙다고 인사도 하지 않고 깨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며 응석을 피웠으니. 허무하고 속이 상할 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카론을 찾아 멋대로 출궁한 데 대해 사과하고 제 부탁을 들어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해야 했다. 넘어진 몸을 추스르는 찰나, 밖에서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분홍아!]

문을 벌컥 열리며 누님이 제일 먼저 뛰어 들어왔다. 카론과 비슷하게 낯이 흰 누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엉거주춤한 채운을 덥석 안았다.

[이대로 네가 죽는 줄로만 알았다. 이 누님의 잘못으로 귀한 내 동생을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고…… 흐흑.]

[누님.]

눈물을 쏟는 누님 곁으로 올리아가 다가왔다.

“진정하세요. 황후 폐하는 방금 일어났습니다. 침대에 도로 누워야 합니다.”

올리아가 채근하자 누님은 천천히 몸을 뗐다. 의사인 올리아가 비틀거리는 채운을 부축하며 침대로 이끌자 눈치 빠른 누님은 얼른 거들었다.

침대에 도로 눕자마자 올리아가 곁에 앉아 왕진 가방을 열었다. 청진기를 꺼내어 전신을 진단하고 눈 밑도 살폈다. 심장과 폐가 정상이며 체온도 정상이라 했다.

“이레나 누워 계셨습니다. 그동안 연한 고기 수프밖에 안 드셔서 마르신 거예요. 음식을 충분히 섭취하고 푹 쉬면 금방 나아지십니다.”

“이레?”

깜짝 놀랐다. 꽤 오래 잔 것 같기는 해서 길어도 한 사흘 정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레라니.

“저를 돌보느라 고생했어요.”

“저는 하루에 세 번 진찰한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요. 자지 않고 폐하를 돌본 건 카론 폐하였습니다.”

“카론이?”

이레나 잠을 설치며 간호하다니. 그러니 얼굴이 푸석하고 초췌한 게 당연했다. 눈길이 절로 카론을 찾았다. 그때 마그네가 온을 안고 감격한 듯 제 곁을 지키는 누님 곁으로 다가왔다.

“폐하.”

약간 지친 듯한 마그네가 통통한 아기를 건네주었다.

“온아.”

아이를 잃어버리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온은 채운을 보며 청남색 예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살이 오른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입을 쪽 맞추었다. 온이 눈을 접으며 채운의 뺨을 슬쩍 건드렸다.

“한동안 계속 우시다가 며칠 전부터는 진정하셨어요. 이후로 얼마나 얌전하시던지. 착한 아기님이세요.”

“그랬어? 우리 온이. 예쁘다.”

이마에 입술을 대고 보슬보슬한 머릿결에 코를 묻었다. 젖 냄새가 나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세상의 시름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감격에 겨운 누님은 채운이 혼백으로 고향에 다녀온 일을 고하자 금방 웃음을 잃었다. 돌아오면 혼쭐이 날 거라는 큰엄마의 전언을 듣고서는 더욱 침통해졌다.

[나도 여기서 살면 안 되겠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우연히 이곳에 온 저는 그렇다 치고 누님은 어째 부모님께 기별도 없이 오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정정하시던 아버님이 얼마나 늙으셨는지 보면 그런 말씀은 하지 못하십니다.]

시큰거리는 콧등을 실룩거리며 타박하자 누님은 금방 시무룩해졌다. 다소 충동적이긴 하지만 믿음직스러운 대장군인만큼 앞으로 잘 생각하여 처신하리라 믿었다.

대화 중에도 카론은 계속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침실을 오갈 때마다 절로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으나 번번이 실망했다.

“폐하는?”

진한 고기 수프를 먹은 이후에 소화제와 영양제를 전해 주러 온 올리아를 향해 슬쩍 물어보았다.

“그동안 미뤄 둔 일을 처리하고 계십니다. 황궁에 몰래 숨어들었던 첩자들을 심문해야 하고 또 북쪽에 큰 이변이 생겼습니다. 지금 제국이 어수선합니다.”

북쪽에 이변이란 말을 듣자마자 태자 이승원이 떠올랐다. 이레나 지났다. 사람을 죽이고 돌아오겠다고 광기 어린 웃음 짓던 그가 채운이 사라졌음을 안다면 무슨 짓을 할지. 간담이 서늘했다.

“무슨 일인지 자세하게 설명해요.”

“북쪽에 마족이 나타났습니다. 마족은 인간이 아닌 미친 괴물로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있어요. 체구가 곰 같고 이상한 말을 쓰며 이성도 없어서 제압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북쪽에 로하스라는 지역이 있는데 반란의 조짐까지 있습니다. 곧 기사단 일부가 출정합니다.”

“아.”

태자가 기어이 사달을 냈다. 저도 모르게 탄식하자 여운이 왜 그런지 연유를 물었다. 빠르게 설명하니 여운도 참담함을 감추지 못했다.

[큰일이구나.]

[태자를 막아야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여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그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으니, 내가 태자를 잡겠다.]

[누님이요?]

채운이 황급히 여운의 손을 잡았다. 간신히 만난 누님을 다시 사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걱정이 가득한 동생을 보며 여운은 고개를 저었다.

[자고로 결자해지라고 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해결한단 말이야.]

[하지만…… 위험합니다.]

애가 끓어 이미 잡은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여운은 채운의 손을 도닥였다.

[네 나라의 죄 없는 백성이 죽어 나가고 있잖아.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백성들의 원망이 네게로 향할 것이다. 이미 너와 황제에게 큰 누를 끼쳤다.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야. 악독한 외척이라고 손가락질받을 테고. 장차 나라의 귀틀을 세우는 중에 걸림돌이 될 거야. 네가 말했잖니. 시황제 폐하시니 많은 걸 함께하고 싶다고.]

의연한 결심과 함께 대장군은 아우의 손을 슬그머니 밀어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입술이 떨렸다. 누님을 또 먼 곳으로 보내려 하니 서글프고 애통했다. 그래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

실망스럽게도 여운의 말에 공감하고 말았다. 혈육인 누이를 아끼는 마음보다 당장 카론과 장차 나라를 물려받을 온에 대한 걱정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제가 언제 이렇게 라테시온에 정을 붙였는지, 언제 그리운 신국에 대한 마음을 더 뒤로 두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애수가 차올랐다.

[무사히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라. 이래 봬도 신국 제일가는 대장군이야.]

늠름하신 대장군은 그리 말하며 아직 병상을 벗어나지 못한 아우를 꾹 안았다.

[너는 귀애 받으려고 태어났으니, 귀애 받으며 살아야 마땅하다. 모든 근심은 누님이 다 해결하마.]

낯간지러운 장난이 아닌 진심임이 절절하게 전해졌다. 채운은 여운을 마주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아에게 여운의 결심을 전하고 폐하께 전하길 부탁했다. 간신히 만난 누님의 무사 안녕을 빌며 차마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젖은 눈가를 소매에 찍을 무렵이었다.

갑옷 부딪히는 기척과 함께 문이 열리고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카론에게 제 뜻을 전하러 갔던 여운이었다. 중무장한 기사단은 여운을 침전까지 호송한 다음 문을 닫고 나갔다. 마침 침실 문이 열려 있기에 그 광경을 똑똑히 보았다.

[응? 누님? 왜?]

[나도 모르겠다. 황제에게 의원이 뭐라고 고했는지 갑자기 병사들이 나를 붙잡아 여기까지 데려왔다. 혹시 내가 여기 감금된 거냐?]

무슨 일이 또 있는 걸까. 올리아에게 전한 말이 혹여 카론에게 잘못 받아들여진 걸까. 여운의 결심이 순수한 의도임을 채운 제가 직접 설명하는 편이 나을 듯하였다.

[누님, 저를 좀 도와주세요.]

후들거리는 다리를 침대 밖으로 내밀면서 도움을 청했다. 여운이 얼른 다가와 부축할 무렵, 카론이 나타났다. 여운에 기대어 간신히 선 채운을 본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청금안에는 우려가 가득했다.

“일주일이나 정신을 잃었다. 아직 침대에서 나오긴 일러. 그러다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말로 그렇게 하면서 여운에게 채운을 다시 침대로 데려가라 손짓했다. 평소 카론이라면 여운을 밀어내고 직접 침대로 데려갈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이상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뭐가 또 틀어진 걸까. 혹여 여운의 말대로 나라에 갖은 우환이 생겨 화가 난 걸까?

“누나가 폐하를 도우려 해요. 북쪽의 일은 우리 신국 사람이 저지른 일이니 당연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론의 안색이 더욱 굳었다.

“요정 일은 요정이 해결하고 싶은가. 평소라면 그렇게 하겠지만 이번만은 안 돼. 너무 위험하고 또 네가 아프잖아.”

“이제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니라 누나가…….”

“네 누나는 네가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쭉 네 곁에 있을 거다. 잠과 식사를 여기서 해결해도 좋다. 네 누나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니 너와 레온을 지킬 수 있겠지. 그래야 내가 편히 궁을 비울 수 있으니까.”

“예?”

“대신 내가 북으로 간다.”

순간 염통이 뚝 떨어졌다. 여운이 가겠다고 했을 때 들었던 충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채운은 여운을 밀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채 닿기도 전에 쓰러지려는 채운을 카론이 떠안았다.

“거봐, 쓰러진다고 했잖아.”

“안 돼요. 가면 안 돼요.”

사색이 되어 카론에게 매달렸다. 도리질 치는 중에 차오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카론은 양손으로 채운의 얼굴을 감싸고 엄지로 눈가를 천천히 문질렀다.

“나는 검으로 일어선 황제다. 이런 순간에 뒤로 도망친다면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의 근간이 흔들려. 또 말이 통하지 않는 네 누나보단 내가 낫다.”

“안 돼요. 그래도 안 돼요. 폐하가 어떻게 된다면 나와 온은 어쩌지요? 멋대로 출궁하였다고 이렇게 벌을 주는 건가요?”

카론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었다.

“벌을 주다니. 네가 아끼는 사람을 나도 아끼기로 했다. 목숨을 걸 만큼 누나가 소중하잖아. 앞으로는 네가 목숨을 거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내 유일한 바람이다. 또 내게는 베로니카와 기사단이 있다. 황제는 직접 검을 휘두를 기회가 없어. 지휘관으로 후방에 있을 거거든. 설마 나를 못 믿는 건가?”

“하지만…….”

코끝이 찡하고 입술이 달달 떨렸다. 카론을 믿는다. 그의 강함을 믿는다. 믿는 데도 그가 어떻게 될까 봐서 너무 무서웠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카론은 빙긋이 웃었다.

“네가 나를 걱정해 주니 너무 기쁜데.”

“지금 그런 말을 할 때가…….”

절로 화가 나서 없는 기운을 모아 역정을 내려는데 얄미운 입술이 슬그머니 다가와 포개졌다. 눈물과 뒤섞인 입맞춤이기에 짜고 씁쓸했으나, 닿은 입술의 감촉만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입술로 항의를 막아 버린 후 카론은 채운을 두 팔로 안아 들어 침대까지 데려다주었다.

“사고뭉치 요정 둘을 두고 가려니 좀 걱정스럽긴 한데. 황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좋지만. 황궁을 불태우진 말길. 돌아오자마자 노숙하긴 싫으니 말이야.”

짓궂은 농담을 건넨 카론은 입술을 비틀면서 울음을 참는 채운의 뾰족한 입술에 또 뽀뽀를 쪽 하고 돌아섰다.

그는 여운을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채운과 레온을 부탁한다.”

여운이 화답하여 고개를 끄덕이자 카론은 아쉬움도 없는 발길로 성큼성큼 나갔다. 기어이 혼자 가겠다는 사람이 미워 몸을 홱 돌리고 싶어도 눈에 안 보이는 건 더 싫어서 어쩌지 못하고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달칵.

문을 열고 잠시 섰다. 채운은 혹여 눈빛이라도 마주칠까 기대하며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러나 매정한 황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카론이 사라지자마자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렀다. 여운이 곁에 앉아 위로하였으나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황제가 이끄는 기사단이 출정했다. 창가에 의자를 두고 앉았다. 온을 무릎에 앉히고는 멀리 휘날리는 깃발을 가리켰다.

“온아, 아바마마예요. 아바마마가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세나비와 같이 기다려요.”

“아웅. 우웅.”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온은 작은 주먹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간신히 그친 울음이 또 나올 것 같았다. 아기의 다른 손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꽃이 들려 있었다.

채운이 가져온 꽃은 이미 다 썼다. 나머지 하나를 가져가라고 했는데도 카론은 거절했다. 요정이 아닌 인간에게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보다는 채운이 다시 아플까, 혹은 어린 온이 자칫 열이 날까 더 걱정했다. 꽃은 결국 온이 가졌다.

꽃 빛에 비친 온의 눈동자는 선명한 남청색이었다. 신비로운 눈동자에 꽃의 금색이 촘촘히 박힐 때면 제 아버지의 청금안과 똑같았다. 한때 그렇게 싫었던 눈 색이 이제는 그와 같은 색이라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온을 낳은 일은 채운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 온을 가지고 낳음으로써 지옥이 천상으로 변했다. 요 앙증맞은 복덩이가 세상을 얼마나 더 풍요롭게 만들지 기대가 되었다.

‘우리 같이 지켜보아요. 그러니 꼭 무사히 돌아와요.’

먼 곳으로 떠난 님의 무사 귀환을 바라면서, 채운은 님의 눈을 가진 아기의 솜털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 * *

북부는 카론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 광기 어린 마족이 날뛸 뿐만 아니라 로하스에서부터 용병 집단이 집단 반란을 일으켰다. 경비 기사단이 마족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들은 로하스 일대에서부터 사방으로 번졌다.

제대로 된 조직은 아니었다. 뚜렷한 목표도 없는지 소규모 무리를 이룬 놈들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강도질을 일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살인도 서슴지 않았다.

몇을 잡아 왜 로하스를 근거지로 움직이냐고 심문했는데 정작 로하스로 모인 자들도 이유를 몰랐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모였는데 갑자기 모집책이 사라졌다고 했다. 물론 약속된 돈도 사라졌다. 화가 난 놈들은 금방 도적 떼로 돌변했다.

“일부러 이런 걸까?”

베로니카의 물음에 카론은 인상을 썼다.

“모르지. 하지만 당장 들개 놈들을 잡아들이지 않으면 북부가 흔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북부는 파사 일족 놈들이 날뛰는 산맥과 인접하여 타 지역에 비해 제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래도 로하스와 새로 지은 푸논을 중심으로 조직을 탄탄히 다졌다고 여겼건만. 잠시 다른데 정신을 판 틈에 이 꼴이 났다. 신생 제국을 운영하는 건 정말로 귀찮고 짜증스러웠다.

짜증은 곧장 베로니카로 향했다. 황제 기사라는 놈이 최정예 기사단과 함께 출정하고도 열흘이 넘도록 사태를 수습하지 못한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무능력한 놈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황제 기사에 봉하지 않았을 텐데.

“넌 이때까지 뭘 한 거야?”

“마족을 쫓아다녔지. 마족이 요정인 걸 아나? 요정 일을 최우선이라고 했잖아. 사살하지 않고 살리려고 얼마나 애를 쓴 줄 알아? 아니 괴물처럼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데 생포하라니. 그런 명령을 내린 놈이 누구더라.”

베로니카는 모든 건 카론의 탓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황궁에서 마주친

“마족이 그자가 확실한가? 다른 미친놈은 아니고?”

“생김새는 그럭저럭 그쪽이야. 그놈의 얼굴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너니 네가 직접 확인하는 게 어때?”

“알았다. 내가 마족을 맡을 테니 너는 당장 들개 떼를 소탕해라. 반항하는 놈들은 싹 다 죽여 버려.”

“드디어 명령다운 명령을 하시는군. 살리는 건 어려워도 죽이는 건 뭐. 참, 괜히 영웅 심리에 불타거나 질투에 혼자서 놈을 상대하진 마십시오. 뒈질 테니까.”

악랄하게 웃은 베로니카는 곧장 흑기사단을 이끌고 로하스로 향했다.

마족은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는데 그의 활동 범위를 지도상에 놓고 분석했을 때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놈에게 말이 있습니다만 맨 처음 나타난 마을을 중심으로 멀리 벗어나지 않습니다.”

동태를 주시하던 수하가 놈의 움직임에 관해 자세히 보고했다.

“집에 들어가서 헤집어 놓는데 가끔 음식이나 물을 먹긴 해도 다른 물건에는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방해하는 자는 바로 죽입니다. 그러나 알려진 바와 같이 독을 뿜거나 달아나는 자를 뒤쫓는 편은 아닙니다. 가끔 쫓아가는 경우가 있긴 한데 피해자는 전부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자거나 키는 제법 커도 청년이라고 하긴 어려운 나이대의 소년으로 전부 호리호리하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누굴 찾는지 알겠군.”

듣자마자 카론은 놈이 채운을 찾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 정찰을 보냈던 기사가 막 돌아왔다. 인근에 그놈이 나타났다는 보고에 곧장 놈을 찾아갔다.

인근 마을 곳곳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경비 기사가 죽은 후에 마을 사람들이 달아나는 도중에 마족을 막기 위해 불을 쓰다가 실화로 이어진 까닭이었다. 불 때문에 제때 피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 피해는 더욱 커졌다.

“살려 줘!”

“으악!”

곳곳에서 비명이 울렸다. 집안에서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버티다가 습격을 당했든지, 아니면 불이 번져서 죽을 지경에 이른 건지도 모른다.

“너너, 그리고 너희. 나를 따라온다. 나머지는 마을 사람을 대피시켜.”

“예.”

근위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소수를 데리고 카론은 가장 소란스러운 쪽으로 향했다.

“꺄아악!”

쾅! 우지끈!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람들의 공포에 찬 비명 사이로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좁은 골목 일대로 접어들자 나무 문이 박살 나는 광경이 들어왔다. 거대한 곰 같은 놈이 어느 가정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참이었다.

“으아악!”

안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카론은 즉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나마 몸을 피한 자가 팔에 검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되어 빠져나왔다.

[채우운! 채운! 어디 있어? 채운!]

짐승 울음처럼 찢어지고 갈라졌으나 요정어가 분명했다. 그리고 채운이라는 이름도 선명하게 들렸다. 역시 놈이었다.

[채운, 어디 갔어? 채운!]

씩씩거리던 놈이 나오면서 카론을 발견했다. 틈을 주지 않고 즉시 거대한 군마의 앞발로 짓밟아 버리려고 했다. 광기에 물든 놈은 이지를 아주 잃어버린 건 아닌지 즉시 몸을 굴려 피했다. 그것도 모자라 날렵하게 벽을 차고 올라 위에서부터 검을 내려쳤다.

쾅!

카론은 말에 탄 채로 검을 들어서 막았다. 강대한 힘에 체중까지 실린 놈의 공격은 너무나도 무거워서 단 한 차례 막았을 뿐인데 어깨와 팔이 저렸다.

쿵.

칼이 막히자 놈은 물러서 착지했다. 놈의 눈은 전과 달리 새빨갰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도 유령처럼 흘러내렸다. 옷은 군데군데 찢어지고 사방에 피투성이였다. 원래부터 거칠고 사나웠던 얼굴은 광기와 어우러져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니 이국적인 요정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은 정말로 마족이라고 부를 만했다.

[네놈. 또 만났구나. 네놈이 채운을 데려갔지?]

요정어로 뭐라고 말하며 검으로 카론을 가리켰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카론을 알아보고 살의를 불태웠다.

“좁은 골목은 말을 탄 쪽이 불리합니다. 후퇴하십시오.”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

기수를 돌려 골목 밖으로 벗어났다. 놈은 즉시 카론의 뒤를 쫓아왔다. 놀랍게도 놈은 카론의 군마와 엇비슷한 속도로 쫓아왔다. 열흘 동안 무엇이 어떻게 돌아 버렸는지 몰라도 신체 능력도 미쳐 버린 듯했다.

[크아아아!]

괴물처럼 울부짖으며 쫓아오는 꼴은 정말로 마족 그 자체였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 넓은 길로 나서자마자 기수를 돌려 놈을 향해 검을 날렸다. 상위를 점한 기사 상태였으므로 아까 놈과 마찬가지로 내려치는 힘과 속도에 힘이 붙었다.

쾅!

놈 또한 카론처럼 검을 막아 냈다. 반동으로 카론조차 손목이 시큰거리는데 놈은 그런 충격을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처럼 바로 반격했다.

검날이 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놀란 말이 앞발을 휘저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는다. 카론은 즉시 말에서 뛰어내렸다. 등이 가벼워진 군마는 알아서 주변을 벗어났다.

“폐하!”

[크아아아!]

수하들이 다가오기 전에 놈이 달려들었다. 카론은 양손으로 검을 잡고 놈의 공격을 잡아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파는 순간 바로 죽음이었다. 그렇기에 수하들에게 어떤 명령을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수하도 마찬가지였다.

쾅! 챙! 카캉!

그림자도 따라가지 못할 속도로 공방전을 주고받는 사이 카론은 점점 골목 쪽으로 몰렸다. 평지라면 몰라도 골목은 위험했다. 카론은 벽을 뛰어다닐 재주가 없는 한편, 놈은 날개 달린 곰처럼 날아다녔다.

수하 둘이 석궁을 꺼내 들었다.

“폐하! 숙이십시오!”

뒤에서 소리를 치는 순간 카론은 즉시 상체를 숙였다.

슉! 슉!

석궁이 날아들었다. 하나는 놈의 검에 박살이 났고 다른 하나는 놀랍게도 놈의 손에 잡혔다. 화살을 몰라도 석궁을 손으로 잡는 놈은 처음이었다. 힘만 괴물이 아니라 동체 시력 또한 괴물 수준이었다.

[크으으으으. 네놈드을.]

한 손으로 굵은 석궁 화살을 부러뜨린 놈이 갑자기 사라졌다. 카론이 그가 저를 스쳐 뒤로 달리는 것을 보았으나 막을 방도는 없었다.

“으악!”

“큭!”

따라왔던 수하들이 순식간에 도륙이 났다. 주인을 잃은 말이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사이 카론은 즉시 복잡한 골목 안으로 달렸다.

‘미쳤군. 저게 마족이 아니면 뭐야.’

황궁에서 부딪힐 때만 해도 저 정도는 절대로 아니었다. 실력이 뛰어났으나 카론과 엇비슷하거나 혹은 카론이 좀 더 유리했다. 현재는 정반대였다. 놈은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은 감각과 속도, 힘을 가졌다. 혼자서 상대하지 말라던 말의 진의를 이제야 제대로 알아먹었다. 저런 강한 미치광이는 압도적 숫자로 포위하여 제압해야 했다.

‘알려 주려면 제대로 알려 주지. 빌어먹을 베로니카 새끼.’

[크아아아!]

쾅! 쾅!

놈이 검으로 벽이라도 치는지 굉음이 연달아 났다. 압도적인 차이를 보완하기 위해선 기습이 유리했다. 카론은 라테시온 지형에 익숙하다. 그것을 십분 활용하여 놈의 허점을 노리려고 마음먹었다.

마침 근처에 문이 열린 빈집이 있었다. 급하게 피난을 간 듯 세간살이가 고스란히 남은 집안에 들어서서 창문 커튼을 닫고 숨을 죽였다. 현재 가지고 있는 건 단도와 장검뿐. 석궁은 군마에 있었다.

시야를 돌린 후에 뒤에서 기습하기로 했다. 놈이 한눈을 판 틈을 타 최대한 접근하여 첫 일격을 막는 즉시 다른 손으로 단검으로 놈의 폐를 비틀어 찌른다. 마침 놈은 갑옷을 입고 있지 않고 카론은 양손잡이다.

‘몸을 가볍게 해야 해.’

숨을 죽이며 단도로 갑옷 이음매를 끊었다. 망토 끈도 잘랐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망토 위에 벗은 갑옷을 차곡차곡 쌓았다. 걸친 건 방패 대용으로 쓸 한쪽 어깨 갑주뿐이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단도를 사용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실패하는 순간 놈의 검에 목이 잘린다. 평생 저를 살려온 악운이 이번에도 작용하길 비는 수밖에 없다.

“후우.”

단도와 장검을 각각 손에 쥐고 숨을 고르며 놈의 동태에 귀를 기울였다.

* * *

카론을 떠나보내고 나서는 누님, 마그네, 온과 함께 내내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올리아가 찾아와 몸을 진찰했다.

그렌을 만나 북쪽 얘기를 물어보았다. 그는 잘 모른다고 했다. 황궁을 경비하는 아서를 찾아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떠난 지 오늘로 나흘입니다. 어제 낮쯤에 북부 언저리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무슨 일이 발생하기에는 너무 일러요. 혹시라도 폐하께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카론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기긴 할까요? 갖은 저주 속에서도 꾸역꾸역 살아남은 분이?”

아서는 걱정하지 말라며 채운을 안심시켰다.

[아무 일 없을 거다. 아무렴. 그놈이 너 같은 부인과 생때같은 자식을 두고 어떻게 되기야 하겠느냐? 그놈 성질머리로 미루어 보아 생지옥에서도 펄펄 살아올 놈이야. ]

카론이 탐탁지 않은 누님마저도 욕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로 채운을 안심시켰다.

[네, 이제 걱정하지 않습니다. 온을 재우고 오겠습니다.]

마그네를 대신하여 온을 내내 직접 안고 있었다. 팔이 저려도 온의 무게가 사라지면 더욱 불안하고 어지러웠다. 포근하고 몽실한 몸을 꼭 안고 있어야 그나마 숨이라도 쉬어졌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걱정하지 않을 텐데 이상한 불안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온은 내내 꽃을 꼭 쥐고 있었다. 잠이 들었나 싶어 꽃을 살짝 빼기라도 하면 눈을 번쩍 뜨고는 짜증을 부렸다. 목욕하거나 옷을 갈아입히는 중에도 꽃을 놓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온아, 아바마마는 잘 있겠지?”

졸린 듯 눈 깜빡이는 아기를 침대에 눕히고 배를 토닥였다. 불안에 밤잠을 푹 자지 못한 채운도 피곤했다. 온이 잠들면 채운도 곁에서 한숨 붙일 생각으로 창가로 가서 커튼을 닫았다. 마지막 커튼을 막 닫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감돌았다.

“응?”

금은화가 갑자기 번쩍거렸다. 잠이 깬 온이 뭐에 놀란 듯 딸꾹질을 하더니 갑자기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아아앙!”

“온아!”

놀라서 아기를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금은화의 빛이 폭발했다. 이러다가 작은 온의 몸이 타 버릴 것 같았다.

“안 돼!”

채운은 본능적으로 온의 손에서 금은화를 빼앗았다. 순간 태양이 터지듯 사방이 하얗게 작렬했다.

산 채로 눈알이 타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순간 아기의 울음이 멀어지고 채운은 밑도 끝도 없는 금색의 공간에 버려졌다.

여긴?

분명히 목소리를 냈는데 이상하게도 귀에 들리진 않았다. 먹먹한 공간은 온을 낳고 정신을 잃었던 그때와 비슷했다. 다만 다른 점은 그때는 사방이 온통 검었는데 여긴 은은한 금빛이 감돈다는 차이뿐이었다.

채운 아가르타.

익히 아는 음성이 들렸다.

시에나?

사방으로 위로 아래로 고개를 돌렸으나 시에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온은 무사한가요?

골든 피오니의 축복을 받은 네 아기는 무사해.

온이 무사하다는 말에 무척 안도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네 아기가 내 아이를 구하고 싶대.

시에나의 아이는 카론이다. 카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불행히도 죽음의 그림자가 그 아이를 거의 따라잡았어. 네 아기는 그걸 알아채고 골든 피오니의 힘을 빌렸단다.

구해야 해요! 당장! 당장 구해야 해요!

꽃의 힘에는 한계가 있단다. 꽃잎은 저주를 풀고 달빛과 함께 금색의 작은 문을 열지만. 다른 일은 하지 못하지. 다만 네 축복 받은 아기가 꽃의 힘을 끝까지 끌어냈어. 금색 문이 없이 세상의 문이 아주 잠깐 열릴 거야.

금색 문이 없이 세상의 문이 열린다고요? 그게 정확하게 무슨 의미죠?

누군가 죽음을 붙잡아 찰나 열린 문 안으로 집어넣어야 해. 네 아기는 대단한 힘을 가졌으나 아직 아기야. 문이 내 아이까지 데려갈 수 있다는 걸 모르는구나.

문이 열리고 죽음을 안으로 집어넣는다.

설마?

그래. 새 나라에서 온 네 동족이야.

아. 태자와 카론이 맞붙었다. 그리고 카론이 위급해진 것이다. 신비한 힘으로 낌새를 눈치챈 온이 꽃의 힘을 끌어내 문을 열었으나, 그 문은 실로 위험하여 카론과 태자를 한꺼번에 신국으로 보낼 수 있다.

미친 태자와 사투를 벌이는 자가 나타난다면 이후 벌어질 일은 뻔했다. 카론은 신국 병사에 사로잡혀 산 채로 포가 떠질 것이다. 그렇게 둘 수 없다. 카론은…… 카론은 거기로 보낼 수 없다. 제가 겪은 일을…… 그에게 똑같이 겪게 할 수 없다.

마음을 읽은 듯 시에나가 말을 이었다.

내 남은 영혼의 힘을 전부 쏟아부으면 너를 내 아이가 있는 곳까지 보내 줄 수 있어. 하지만 그런다면 네 아이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거야.

가슴이 미어졌다. 두 번 다시 보지 못해도, 비록 자신이 없어도 온은 카론 곁에서 건강하고 예쁘게 자랄 것이다. 결심을 굳혔다.

네가 그러길 바란다면. 너의 행복이 곧 세상의 평안이니.

멀리서부터 금색 공간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어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채운 아가르타. 너는 높은 하늘에서 아래로 떨어질 거야. 죽음을 꼭 움켜쥐고 늦지 않게 빛 안으로 뛰어들어야 해.

시에나의 마지막 당부에 각오를 단단히 다지는 순간 혼백으로 고향에 갔을 때처럼 전신이 붕 떠올랐다. 세찬 바람이 불어 손에 쥔 꽃을 놓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리는 순간 갑자기 금색 공간이 팍 터지더니 이번에는 얼어붙는 칼바람이 전신을 두들겼다.

“헉!”

눈을 번쩍 뜨자 까마득한 하늘이었다. 저 아래 깨알만큼 작은 마을이 보였다. 꽃은 여전히 번쩍번쩍 빛났다. 둥실둥실 떠오른 몸을 채 가누기도 전에 채운은 아래를 향해 낙하했다.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시린 바람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깨알 같던 마을이 콩만 해지고 콩만 한 마을이 조약돌만큼 커졌다. 순식간에 건물이 나뉘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채운은 마을 중간 작은 골목을 향해 쏜살처럼 떨어졌다. 골목 안에 뭔가 움직인다 싶은 순간 작은 금빛을 발견했다.

“카론!”

채운은 그의 이름을 힘껏 불렀다.

* * *

이지를 잃은 놈답지 않게 신중한 놈을 오랫동안 기다렸다. 놈은 기어이 카론이 숨은 골목까지 들어왔으며 시시각각 거리를 좁혔다.

[채운을 내놔.]

미친놈이 아주 신중하게 문 하나하나를 박살 내면서 가까이 왔다. 쾅. 쾅. 문을 부수고 안에 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나와 다른 집으로 향했다. 카론은 놈이 숨은 집 안으로 들이닥치는 순간을 노렸다.

바로 옆집을 턴 놈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나무판자로 만든 허술한 문 저쪽에서 놈의 거친 숨소리가 생생하게 났다.

쾅!

문을 부수며 거대한 인영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문 바로 옆에서 매복하고 있던 카론은 숨을 멈추는 동시에 온 힘을 다해 검을 날렸다. 무시무시한 동체 시력을 가진 놈은 예상대로 첫 일격을 막아 냈다.

쾅!

검이 부딪히는 순간 놈의 옆구리가 비었다.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단도를 힘껏 내찔렀다.

푹.

지척에 있는 놈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 카론은 이를 악물며 단도를 끝까지 비틀어 쑤셨다. 단도가 반 바퀴 돌면서 놈의 갈비뼈를 스치며 살점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크윽.]

고통 어린 신음과 함께 놈이 주춤댔다. 카론의 검을 밀어내던 힘이 약해졌다. 단도를 놓고 즉시 뒤로 물러섰다.

“허억. 허억.”

간격을 벌린 후에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놈의 폐를 찔렀다. 보통이라면 즉사다. 그런데도 놈은 컥컥댈 뿐 좀처럼 쓰러지지 않았다. 핏발 선 눈이 카론을 응시했다. 놈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네…… 이노놈…….]

“빌어먹을 괴물 같으니.”

치명상을 입혔는데도 죽지 않다니. 정말로 마족인가. 빌어먹을. 욕이 치밀어 올랐다. 놈의 입술에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당장 죽지는 않아도 치명상을 입은 이상 반드시 힘이 빠질 거다. 그렇다면 좁은 집안보다는 밖이 더 나았다.

와장창.

문 쪽은 놈이 점령하고 있기에 카론은 창문을 부수고 몸을 날렸다. 뒤이어 놈도 바로 창틀을 부수며 따라왔다.

다시금 공방이 시작되었다. 상처를 입어 더욱 흥분한 놈은 쉬지 않고 카론을 공격했다. 놈의 힘은 아까보다는 견딜 만했으며 속도 또한 인간의 영역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빠르고 강했다. 카론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면서 놈의 공격을 막아 냈다.

쾅!

놈이 두 손으로 날린 검을 카론 또한 양손으로 검자루를 들어 정통으로 막았다.

쨍그랑.

검이 부러졌다. 세력을 일으키고 제국을 세우기까지 단 한 번도 부러져본 일이 없는 검이.

쾅!

쨍그랑.

뒤이은 일격에 남은 칼날마저 부러졌다. 남은 건 손가락 한 마디도 안 되는 검의 흔적과 손잡이뿐이었다.

[크으히힉.]

놈이 피가 흥건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놈을 죽이고 채운을 데려갈 거야. 네가 없으면 채운은 내 거야.]

뭐라고 하는지 몰라도 채운의 이름을 놈에게서 듣는 자체가 기분 나빴다.

“더러운 입에 내 황후의 이름을 올리지 마라. 빌어먹을 괴물 자식아.”

숨을 몰아쉬며 놈의 허점을 노려 몸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탈출로가 없었다.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몸싸움? 성공확률은 희박했다.

[크흐흐.]

승리를 확신한 놈이 웃으며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놈의 가슴에 꽂은 단도가 보였다. 저걸 잡아 뽑아야 한다. 비틀어 꽂은 단도가 뽑히는 순간 뚫린 폐에서 피가 뿜어져 나올 거다. 놈이 움직이는 건 아직 단도를 뽑지 않아 실혈이 적었고 폐의 구멍으로 숨이 새지 않아서다. 괴물 같은 속도가 현격히 느려진 만큼 희박하나마 승산 가능성이 있었다. 비록 팔이 하나 날아가겠지만. 이를 아득 물었다.

놈의 검이 꼭대기에 이르려는 순간이었다.

“카론!”

느닷없이 들릴 리 없는 채운의 음성이 들렸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일전 사르프에서 불법 경매장을 습격했을 때와 같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멈추었다.

[어?]

놀랍게도 놈도 채운의 음성을 들었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순간 놈의 위로 찬란한 황금빛이 내리꽂혔다. 너무 강한 빛이라 카론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동시에 굉장한 돌풍이 들이닥쳤다.

“카론!”

금빛 돌풍 안에 채운이 있었다. 그를 발견한 순간 카론은 망막이 빛에 타든지 말든지 손을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그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어마어마한 돌풍 때문에 쉽지 않았다.

“채운! 네가 여기를 어떻게!”

간신히 거리를 좁히는 순간 괴물 놈이 카론을 막았다. 괴물은 돌풍에 둥둥 떠다니는 채운에게 손을 뻗었다.

[채운! 채운! 어디 갔었어? 찾았어.]

놈이 채운을 잡게 둘 수 없었다. 돌풍에 맞서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 카론은 놈이 채운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단도를 잡아 뽑았다.

[컥!]

놈이 피를 토하며 전신을 떨었다. 벌어진 입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돌풍을 타고 위로 치솟았다. 동시에 사지가 풀린 놈도 하늘로 둥실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채운도 마찬가지였다.

“채운! 내 손을 잡아!”

카론이 외치며 손을 뻗었다. 채운 또한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는 금색 꽃이 팔랑였다. 조금만 더 뻗으면 될 것 같은데. 채운과 놈을 삼키는 바람은 어쩐지 카론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멀리서 찢어지는 듯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카론을 향해 간절하게 몸을 뻗던 채운의 안색이 흐려졌다.

“카론. 안 돼요. 나를 붙잡지 말아요.”

“무슨 소리야! 네가 없으면 안 돼! 돌아와! 포기하지 마! 내 손을 잡아! 채운!”

공중을 할퀴는 카론의 손에 기어이 꽃이 걸렸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카론의 손에 잡힌 꽃에서 꽃잎이 한 장 떨어져 채운의 뺨에 들러붙었다. 그의 뺨에 키스했을 때처럼 채운은 뻗었던 손을 거두어 뺨을 감쌌다. 창백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안 돼! 안 돼! 채운! 아가르타! 미안해! 돌아와! 네가 없으면! 나는!”

“미안해요. 온과 누나를 부탁해요.”

“채우우운!”

목이 터지라 그를 부르면서 두 팔을 휘어 저었다. 야속하게도 채운은 카론이 아닌 놈을 붙잡았다. 멀어지는 그를 이대로 놓칠 수 없어 몸을 돌풍 속으로 날렸다. 하지만 채운과 놈을 집어삼킨 돌풍은 카론만은 지독히도 거부했다. 금빛 회오리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더니 이내 흰 기둥이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채운!”

카론의 처절한 외침은 하늘로 향하지 못했다. 괴물도, 빛도, 바람도 없는 차가운 골목에 남겨진 채로 사라진 채운의 흔적을 찾으려 들었다. 하지만 하늘은 언제 빛기둥이 있었냐는 듯이 냉혹한 푸른빛이었다.

털썩.

두 무릎이 꺾였다. 반대로 고개는 하늘로 젖혀졌다. 카론은 시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날 사랑스러운 요정을 그에게 선사했던 하늘은, 예고도 없이 다시 그를 제게서 빼앗아 갔다. 별이 총총 빛나는 은밀하고 아름다운 밤에 제게 왔던 채운은 잔인하도록 찬란한 햇살이 드리운 날에 자신을 떠나갔다.

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심장을 잃은 황제의 뺨을 적셨다. 평생 젖어 본 일이 청금안에서 폭포수처럼 흐르는 눈물은 요정이 남기고 간 한 송이 꽃을 향해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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