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멓던 하늘에 흐린 푸른색이 번지기 시작했다. 조만간 동이 틀 것 같았다.
하루 꼬박 달린 군마의 몸에서 뜨거운 김이 펄펄 났다. 중간에 두어 번 쉬었으나, 피로를 완전히 해소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군마는 숨이 턱까지 찬 상황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카론은 생사가 엇갈리는 전장을 함께 누볐던 동지를 다독였다. 일전에 채운이 아이를 낳고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카론과 애마는 이 길을 쉼 없이 달린 적이 있었다. 그러니 해낼 수 있다.
사르프를 향해 내달리는 카론의 갑옷 틈 사이로 얇은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틈새로 손을 집어넣어 빛나는 물건을 꺼냈다. 가죽 싸개를 비집고 뿜어져 나오는 빛의 정체는 바로 요정의 꽃이었다.
“채운?”
꽃이 불길하게 맥동했다. 분명히 채운에게 무슨 일이 생긴 터였다. 한시가 더 급했다. 이미 숨 막히게 달리고 있는 예쁜이의 배를 걷어찼다.
“히힝!”
군마가 속도를 더 높였다. 어깨에 달린 망토가 수평으로 휘날렸다. 부하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뒤로 점점 쳐졌으나 카론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건 단 한 사람, 채운뿐이었다.
꽃의 맥동은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고 도리어 점점 커졌다. 비명처럼 발광하는 꽃 외에도 불길한 징조가 더 있었다.
이따금 달빛이 비칠 때마다 베로니카가 이끄는 흑기사단이 지나간 발굽 자국이 드러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양이 선명해졌다. 점점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히힝.
사나운 투레질과 함께 힘차게 달리던 애마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벌써 지쳤나?”
오랫동안 휴식기를 가져 체력이 떨어진 건가. 낭패감에 젖은 카론이 박차를 가하려고 할 때, 말이 갑자기 옆길로 샜다.
“엇?”
기민한 군마는 굳이 고삐를 당기지 않아도 갈 방향과 멈출 시점을 알았다. 여태껏 애마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필 접어든 길이 강 방향이었다. 처음부터 강변을 따라갔으면 몰라도 현 지점에선 훨씬 에두른 길이었다.
“이쪽이 아니야!”
고삐를 강하게 잡으며 놈을 멈추려고 했다. 앞발을 치켜든 놈은 강한 발목으로 공중을 걷어찼다. 뒤로 넘어지지 않고 용케 균형을 잡은 카론은 군마의 네 발이 땅을 굳건히 디딜 때 기수를 돌리고자 했다.
고집스러운 놈은 카론의 명령을 거부했다. 고삐를 당길 때마다 땅바닥을 딱딱 차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놈은 기어이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고 들었다.
“빌어먹을.”
한시가 급한 상황에 지금껏 잘 따르던 애마까지 말썽이었다. 순간 이성이 흔들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말을 듣지 않는 놈의 목덜미를 후려치기 위해 건틀릿을 낀 손을 꽉 쥐어 치켜들었다.
“제멋대로 짐작하지 말고 우선 물어봅니다!”
느닷없이 채운의 말이 떠올랐다. 공중으로 번쩍 든 철제 장갑이 군마의 젖은 몸을 때리는 일은 없었다.
푸르릉.
거센 숨결을 고르는 놈의 몸은 축축했다. 지금껏 쉬지 않고 달려왔다. 카론이 원해서였다. 카론을 위해서 달렸다. 카론의, 주인의 의사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아끼는 말이. 지금껏 잘 달리던 길을 포기하고 갑자기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무슨 이유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평소 안 그러던 녀석이니…… 꼭 이 길인 이유가 있겠지.”
들었던 손을 내려놓으며 긴장한 놈의 목과 어깨 언저리를 슬슬 쓸었다. 잡아당기던 고삐도 늦추었다.
히힝.
고개를 도리질 치던 놈이 방향을 잡고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강변을 따라 난 농로가 빠르게 다가왔다가 뒤로 사라졌다. 거의 저물어 가는 달빛에 의존하여 고르지 못한 길을 얼마나 달렸을까.
빠른 말발굽 소리가 났다. 제가 탄 군마가 아니었다. 저 앞에서부터 누가 말을 달려 이쪽으로 다가왔다. 깊은 새벽에 외진 강변길을 따라 말을 달리다니. 충분히 수상하지 않은가. 요정이나 혹은 파사 일족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워워.”
급하게 말을 세웠다. 조금 전 고집스럽게 제 방향을 고집하던 놈이 이번만은 순순히 섰다. 길을 조금 벗어나 아주 어두운 그늘로 들어갔다. 검을 뽑고 석궁을 장전했다.
말발굽 소리는 하나였고 갑옷 부딪히는 기사단 특유의 소리가 없고 무게감이 적었다. 다가오는 자는 한 명이고 갑옷을 입지 않았다. 뒤늦게 달아난 둘 중 하나일까?
테퍼 놈일 수도 있었다. 그는 카론과 베로니카를 잘 알았다. 선발대와 본대 사이를 교란할 목적으로 일부러 옆구리 쪽으로 둘러 온 걸지도 모른다. 검을 빼고 석궁을 장전했다. 카론의 긴장 상태를 눈치챈 군마는 곧 잠잠해졌다.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는 점점 커져서 이윽고 어렴풋한 윤곽이 시야에 들어왔다. 테퍼라기에는 체격이 작았다. 어깨까지 오는 짧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사람의 얼굴은 유달리 희었다. 심장 언저리가 지끈거렸다.
“채운?”
겨누었던 석궁을 내리며 반사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빠르게 달리고 있기에 곁길에 선 카론의 읊조림을 들을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상대가 고개를 돌렸다.
아.
어둠 속에서도 생생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반짝이는 별 같은 눈과 붉게 상기된 뺨,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단정한 입매.
시키지도 않았는데 군마가 뛰어나갔다. 이미 달리고 있던 채운의 말을 금방 따라잡았다. 좁은 길이었기에 두 말이 바싹 붙었다.
“카론!”
위험하게도 채운은 고삐를 놓고 두 팔을 이쪽으로 뻗었다. 반사적으로 그의 팔을 잡아 한껏 끌어당겼다. 채운이 날아들 듯 카론에게 안겨 왔다.
별빛이 쏟아지는 밤에, 요정을 다시 만났다. 바람을 머금은 알맞은 무게감이 꿀처럼 달콤했다. 채운을 품에 안고 나서야 카론은 제 가슴이 얼마나 텅 비어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를 느끼는 동안 감은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하아, 하아.”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가려진 이마가 카론의 가슴 갑옷에 닿았다. 나긋한 팔이 딱딱한 갑옷에 들러붙었다. 똑같이 그를 으스러질 만큼 꼭 안았던 카론은 그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다친 곳은?”
“카…… 론, 하아…… 무사해…… 서…… 다행이.”
한참 말을 달린 건지 채운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얹어 맞은 두 뺨을 제외한 다른 드러난 피부는 유령처럼 창백했다.
“나야 당연히 무사하지. 그보다 네 안색이 좋지 않아.”
“그, 허억. 그거보다 더 급한, 누나를, 누나를…… 만났나요?”
“왜 혼자야? 그리고 따라오는 놈은 없나? 아니 빨리 성으로 돌아가지.”
“아니!”
철컹!
맨손이 걱정이 앞선 카론의 갑옷을 두드렸다. 채운에 대한 걱정과 함께 어떻게 밤길을 혼자서 말을 달리고 있었는지에 관한 의문이 잠시 사라졌다.
“내 얘기 들어요! 누나 만났어요? 대답하지 않으면 평생 미워할 거야. 두 번 다시 안 봐.”
평생 미워하며 두 번 다시 안 보겠다는 위협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미 요정 세상으로 돌아갈 문이 있고 그것이 온전히 작동함을 서로 알았다. 채운이 원한다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 문을 망가뜨리거나 숨겨 두었을 경우, 채운의 분노만 더 부추길 뿐이고 결과적으로 버려지는 건 똑같았다. 카론은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같이 갔잖아. 네 누나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휼레가 당신과 싸우라고 밖으로 보냈어요. 못 만났다면 괜찮아요.”
“휼레?”
“누나를 도와준 사람. 파사 일족이에요.”
파사라는 말에 카론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쩐지. 테퍼 놈만의 행각일 리가 없지. 벌레 같은 놈들. 이번에야말로 모조리 불태워 버리겠어.”
“아니, 그러지 말아요!”
채운이 고개를 저으며 갑옷을 쿵쾅쿵쾅 내려쳤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리자 흥분한 그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항상 그렇게 무서운 방법만 쓰니까 이렇게 되었잖아! 자꾸 그러니까 아무 잘못 없는 우리 온이도 데려가겠다고 하잖아!”
“뭐?”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았다.
“레온을? 레온은…… 절대로 안 돼.”
“그러니까 그런…… 불태우는 나쁜 짓은 안 돼. 하지 마! 누나를 만나면 절대로 싸우지 마! 싸우면 나랑 끝이야! 그리고 당장 온이를 데리러 가.”
자기랑 끝이라는 말을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는지 몰라도, 카론에게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드디어 품에 안은 채운과 절대로 떨어지고 싶지 않으나, 이미 먼 길을 달려온 애마에게 두 사람은 부담이었다.
이젠 거의 선 말을 붙잡아 채운을 그 위로 넘겨주었다. 어깨에 걸친 망토를 벗어 가벼운 셔츠 차림인 채운을 둘둘 말아 고정한 다음 다시 군마에 올라탔다.
“따라올 수 있겠어?”
“따라갑니다.”
약간 걱정스러웠다. 채운도 여기까지 달려온 실력이 있었다. 그걸 믿기로 했다.
카론과 군마가 앞섰다. 레온을 노린다는 말에 최고 속도로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군마의 체력도 걱정되거니와 뒤따라오는 채운과의 거리가 신경 쓰였다.
이대로 평원 길로 돌아가면 뒤따르던 수하들과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역시나 초조한 마음이 끝에 달할 무렵 평원 길에 접어들었고 멀리서 다가오는 본대를 발견했다.
“폐하!”
기사단이 일제히 멈추어 섰다. 같이 있는 채운을 발견한 그들은 카론의 명령을 기다렸다.
“베로니카에게 보냈던 매가 돌아왔나?”
전서 담당 기사가 나섰다. 그가 작은 종이와 상비용 펜을 카론에게 건넸다. 카론이 급하게 명령을 적는 사이 부르는 피리 소리를 듣고 멀리서 날던 매가 삐익 울며 담당 기사의 팔에 앉았다. 상비하고 다니는 고기 조각을 신나게 받아먹는 매의 다리에 매인 작은 가죽 통에 메모를 말아 넣었다.
“네 누나는 베로니카에게 맡기겠다. 먼저 출발해서 이미 네 누나를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무조건 상처 없이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직접 만나고 싶겠지만 참아. 황궁이 비었거든. 그렌이 있어도 부족해.”
매가 날아오르자마자 카론은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레온 황자를 데리러 당장 황궁으로 간다. 말이 덜 지친 자, 빠른 말을 가진 자. 우선 달려라. 황궁에 도착하면 그렌에게 습격을 경고하고 레온을 보호해.”
“네! 페하!”
영문을 묻는 대신 자신이 빠르게 달릴 수 있다고 생각한 기사 세 명이 동시에 튀어나갔다.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 설명을 요구하다가 중요한 시점을 놓칠 걸, 잘 훈련된 그들은 익히 알았다.
“우리도 이동한다. 뒤편에 있는 자들은 황후를 보호하라.”
뒤에 있는 기사들이 빠르게 위치를 바꾸어 채운을 둘러쌌다. 자리가 잡힌 것을 확인한 카론이 먼저 출발했다. 채운을 태운 점순이를 중심으로 기사단이 빠르게 움직였다.
‘누님이 무사해야 할 텐데.’
매가 날아간 뒤를 슬쩍 돌아본 채운은 무거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너무나도 죄송스럽지만 온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부디 베로니카에게 매가 빨리 날아가 베로니카와 누님이 사생결단을 내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시퍼런 빛을 발하며 앞서 달리는 카론의 등을 보자 극에 달했던 불안감이 약간 누그러졌다. 온에 대한 걱정이 아직도 컸지만, 그래도 그가 함께 있으니 어떻게든 잘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생겼다.
긴장을 늦추며 한숨을 돌리는 찰나 고삐를 잡은 팔이 저릿저릿했다.
‘윽!’
망토 사이로 팔을 빼보았다. 어느 틈에 손이 까맣게 변했다. 저주를 머금은 독이 금은화의 마법을 빠르게 잡아먹었다. 꽃잎 하나로 부족했나? 품에서 꽃을 꺼내어 먹으려고 하는데 이미 손이 마비되어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삐를 놓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황궁에 도착하고 나서 말해도 돼.’
거친 숨을 고르며 채운은 저린 팔을 망토 속으로 숨겼다. 세찬 맞바람이 식은땀을 말렸다. 머리가 무겁고 전신이 덜덜 떨려도 찬바람 덕에 아직은 견딜 만했다.
‘황궁까지만 버티자. 황궁까지만.’
흔들리는 시선을 카론의 등에 맞추었다. 돌아가는 길은 느릿한 나룻배를 타고 오던 길보다 훨씬 빨랐다. 이대로라면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가 꺼덕거리며 힘이 빠지려 들 때마다 채운은 정신을 바짝 차리려 노력했다. 여기서 고꾸라지면 따라 달리는 기사의 말발굽에 밟혀 중상을 면치 못했다. 자유롭게, 제 뜻대로 살겠다고 외치며 누님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런 허망한 사고로 죽을 순 없었다.
고삐를 손목과 팔에 휘휘 감아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하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이마를 흔들리는 말갈기에 댔다. 진동이 심해졌으나 기대지 않고 달릴 때보다 나았다.
카론과 함께였다. 이름은 잘 몰라도 믿음직스러운 병사들도 함께였다. 거칠게 달리는 말 위에서도 기이하게 잠이 솔솔 쏟아졌다. 내내 말을 달린 데다가 여러 가지 일로 피로가 쌓인 덕분이었다. 저주의 탓도 있을 터다.
‘조금만 자도 되겠지. 아마 될 거야…… 카론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어느새 정신이 느슨해졌다. 걱정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말발굽에서 돌이 튈 때마다 깜짝 깨던 채운은 이제 튀는 돌에도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 * *
황궁에 도착한 카론은 지체 없이 바로 뛰어내렸다. 먼저 도착한 기사의 말을 지나 쏜살처럼 달리며 소리쳤다.
“그렌! 어디에 있나? 마그네!”
고함이 조용한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골든 피오니로 향하는 길목에 먼저 보냈던 기사 셋이 나타났다.
“폐하.”
침착하게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하는 그들을 보자마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레온이 무사하기에 안도하며 무릎을 꿇은 걸까, 아니면 이미 모든 것이 끝났기에 책망하며 무릎을 무너뜨린 걸까. 지체 없이 골든 피오니로 달려갈 때였다.
“으아아앙!”
날카로운 아기 울음이 터졌다. 너무 안도한 나머지 카론은 심장이 멎을 뻔했다.
“폐하!”
느닷없이 뛰어든 사람을 경계하여 아이를 뒤로 숨기듯이 감추었던 마그네가 뒤늦게 카론을 알아보았다. 창백한 낯을 한 보모가 살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레온은, 레온은 무사한가?”
“예.”
보드라운 강보에 싸인 아들을 카론은 거의 빼앗듯이 받아 들었다. 작은 아기의 눈가가 퉁퉁 부었다. 한참 운 듯 보였다. 사지가 멀쩡하고 잘 우는, 그러니까 건강한 상태임을 확인한 후에야 카론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면서 곁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렌과 올리아였다.
“내가 없는 사이 아무 일 없었나?”
“다소 걱정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걱정스러운 일?”
매서운 눈빛으로 그렌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그렌은 얇은 검을 패용 중이었다. 누군가의 습격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뒤통수가 뻣뻣해지면서 관자놀이가 징 울렸다. 어금니가 바득바득 부딪혔다. 레온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황궁에서 근무하는 자 중 내통자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골든 피오니가 있는 층에는 얼씬하지 못하는 하급 시종인데. 오늘 밤 일어난 혼란을 틈타 황자님에게 접근을 시도했습니다만.”
“했습니다만?”
“그 뒤는 목격자에게 들으십시오.”
그렌이 마그네를 가리켰다. 이제 보니 마그네의 목에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안색도 창백하고 식은땀도 흘렸다. 교살 지전에 살아난 덕에 목소리가 쉬다 못해 겨울바람 같았다.
“놈들이 저를 쓰러뜨리고 레온 님을 빼앗아 갔는데. 그때 레온 님이 우셨어요. 그냥 우신 게 아니라 뭐랄까 창이 흔들리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크게 우셨습니다. 목이 졸려서 정신을 잃었던 저는 잠깐 들었을 뿐이지만 납치범들은 맨정신에 바로 들었던 것 같아요.”
뒤는 올리아가 이었다.
“놈들은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되었고 대부분 고막이 터졌습니다.”
“밖에 있던 자들은 전혀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제 귀는 멀쩡합니다.”
마그네는 흐트러진 머리를 들어 귀를 보여 주었다.
“마그네의 증언과 합쳐 보면 믿기 힘들어도 위협을 느끼신 레온 님이 무슨 신비한 힘을 발휘하신 게 아닌가 합니다. 세이렌의 전설을 아시나요?”
황당하지만 믿지 않을 이유도 없다. 꺾인 꽃이 내내 생생하고 요정이 하늘에 뚝뚝 떨어지는 판국에 요정이 낳은 아기에게 그런 힘이 있어도 그러려니 하게 된다.
“놈들은 전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신원을 보증 받은 소수 외에 시종과 시녀를 모두 외궁으로 모았고, 아서 경이 그들을 심문 중입니다.”
올리아가 다가와 카론의 팔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 이젠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혼자 오셨습니까?”
“아, 채운이…… 황후가 함께 왔다. 말을 달리느라 지쳤을 거야. 올리아가 먼저 봐 줬으면 좋겠군.”
설명이 떨어지자마자 그렌과 올리아가 급하게 밖으로 뛰어갔다. 레온을 품에 안은 카론 또한 그들을 따랐다. 마그네도 바싹 따라붙었다.
벌써 궁으로 들어올 줄 알았는데 채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안도했던 심장이 다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빽빽 우는 레온이 불안을 더욱 부채질했다. 돌아온 길을 되짚어 나가자 다행히 정문에 도착해서 말에 앉은 채운이 보였다. 그러나 기사들이 주변을 에워싸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황후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십니다.”
“뭐?”
올리아와 그렌이 한달음에 뛰어갔다. 황후의 상태를 자세히 살핀 그렌이 팔에 감긴 고삐를 황급히 풀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황후의 몸이 옆으로 스르륵 기울었다.
“채운!”
레온을 안은 채로 카론이 달려가 그렌을 밀치고 채운을 향해 팔을 뻗었다. 정신을 잃은 듯 완전히 툭 떨어진 고개가 어깨에 먼저 닿았다.
“폐하, 황자님을 제게.”
마그네가 곁에서 손을 뻗었다. 넘겨주고 싶지 않지만 채운에게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 것도 끔찍하게 싫었다.
“레온을 안고 반드시 내 곁에, 내 시야 안에 있어라.”
“네, 폐하.”
마그네는 레온을 조심스럽게 안아 카론이 볼 수 있게 옆에 바싹 붙어 섰다. 레온을 넘겨준 카론은 채운의 무너지는 몸을 받아 들었다. 온몸이 시체처럼 차가웠다. 재빨리 안으로 옮겨 침대에 눕혔다.
올리아가 청진기로 채운의 가슴을 더듬었다. 황금의 꽃이 그의 품에서 나왔다. 품에 있던 꽃은 일그러져 있었으나 꺼내는 순간 신비롭게도 꽃잎을 싱싱하게 폈다.
“요정의 꽃이군.”
올리아는 발견한 꽃을 카론에게 건넸다.
“다른 요정이 가져온 걸 채운이 얻은 건가?”
출처가 궁금해도 당장 꽃에 신경을 팔 때가 아니었다.
“쉿.”
올리아가 진찰하기 위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거짓말처럼 레온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마그네는 시킨 대로 카론이 볼 수 있는 쪽에 서서 레온을 다독였다. 그러면서 눈은 쓰러진 채운에게 향했다.
“맥박이 너무 약하고 느려요.”
청진기를 내린 올리아가 불길한 얘기를 하며 채운의 옷깃을 풀어 다시 청진기를 댔다.
“으…… 응.”
정신을 완전히 잃었던 채운이 낮은 신음을 하며 손을 움직였다.
“카…….”
“여기 있다. 정신 차려.”
건틀릿을 낀 채로 손을 잡았던 카론은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닫고 건틀릿을 사납게 벗어 던졌다. 내내 말을 달리느라 땀이 나 축축한 손은 무척 뜨겁기도 했다. 똑같이 젖은 채운의 손은 반대로 너무 차가웠다.
“이렇게 차갑다니.”
소매를 더듬다가 카론은 뒤늦게 상처를 발견했다. 심장이 철렁하여 소매를 찢어 내자 시커멓게 엉겨 붙은 핏덩이가 드러났다. 꺼멓게 죽은 살점. 그것은 핏줄기를 따라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독입니다.”
“빌어먹을. 파사 놈의 짓이군.”
보자마자 카론은 꽃잎을 뜯어냈다.
“독에 당한 줄 알았다면 미리 먹였을 텐데.”
깊게 자책하면서 카론은 꽃잎을 입에 넣어 질겅질겅 씹은 다음 채운에게 먹였다. 입에 뭔가가 들어오자 채운이 반사적으로 밀어냈다.
“먹어. 약이다. 먹어야 해.”
카론은 채운의 턱을 잡아 벌리고 입을 깊게 맞추었다. 채운의 혀를 빨아 당겨 목구멍을 열었다.
“쿨럭! 쿨럭!”
애매하게 정신이 든 사람에게 약을 먹이기란 쉽지 않았다. 목에 걸렸는지 크게 기침하며 꽃잎을 반쯤 뿜었다. 다시 한 장을 떼어 씹었다.
“채운, 이걸 먹어야 해. 먹어야 살아. 그래야 레온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카…… 로…….”
실눈을 뜬 채운이 가늘게 이름을 불렀다.
“이걸 먹어. 알겠지? 뱉지 말고 먹는 거다.”
다시 한번 입을 맞추어 꽃잎을 넘겼다.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고 삼킨 채운은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축 처진 몸이 발작하듯 덜덜 떨었다. 손목을 중심으로 뻗은 검은 혈관이 울룩불룩 튀어나왔다.
“아…… 아.”
덜덜 떨던 몸이 뻣뻣해졌다. 그와 동시에 채운이 고개를 꺾으며 신음했다. 부릅뜬 눈가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아…… 파…… 아파…… 요. 너무…… 아파.”
고통을 호소하는 채운을 끌어안은 카론은 그의 젖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히에엥. 힝잉.”
레온이 채운의 상태를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갑자기 칭얼거렸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마그네는 아기를 꼭 끌어안고 몸을 천천히 흔들었다.
“아파…… 너무 아파…….”
채운은 손톱을 세워 갑옷을 긁었다.
끼이기긱.
소름 끼치는 소리가 연이었다. 카론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안으면서 심장이 일그러지는 격통을 느꼈다. 차라리 정신을 잃었으면 좋으련만. 이를 꽉 깨물고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일그러뜨렸다.
“진통제가 있나?”
“방금 먹인 요정의 꽃이 어떤 효과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강력한 약이라면 제가 만든 진통제는 아마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있나?”
“우선 땀을 닦아야 해요.”
카론은 갑옷과 땀에 젖은 옷을 벗어 던진 후 물수건으로 전신을 빠르게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황후의 곁으로 갔다.
“내가 하겠다.”
시녀에게서 물수건을 받아 들었다.
“연하게 끓인 고기 수프를 가져와라. 뜨겁지 않고 미지근하게.”
“네, 올리아 님.”
시녀가 명령을 받고 빠르게 움직였다. 올리아는 약초를 탄 물로 물수건을 적셔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카론은 묵묵히 채운의 몸을 닦았다. 때때로 손과 발을 주무르고 보송보송한 이불로 둘둘 만 그를 꼭 안아 고기 수프를 먹이면서 깨어나기를 기원했다.
해가 떠오를 때까지 채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차가운 손발과 달리 이마와 목덜미는 뜨거웠다. 내내 놀라고 울었던 레온마저 미열이 났다.
현명한 채운이 미리 아기용 물약을 만들어 둔 덕분에 큰 걱정은 덜었으나 아파서 짜증을 부리는 레온은 마그네도 마다하고 칭얼거렸다. 하는 수 없이 채운을 돌보는 틈틈이 레온을 안아 먹이고 재워야 했다.
“괜찮다. 레온. 괜찮아. 쉬이, 쉬.”
다행히 해가 중천에 뜰 무렵 레온의 상태는 양호해졌다. 카론이 한 번씩 들여다보기만 하면 마그네의 품에서도 젖을 곧잘 먹을 정도로 진정되었다.
문제는 채운이었다. 얼마나 지독한 독을 쓴 건지. 팔에 뻗은 검은 혈관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세가 아니었다.
“한 번 더 먹여야 하나.”
내내 지니고 있던 꽃을 다시 꺼내 들었다. 벌써 여러 번 떼어 냈기 때문인지 꽃잎의 빛이 눈에 띄게 줄었다. 더 떼어 내 먹여서 소용이 있을지 몰랐으며 무엇보다 올리아가 반대했다.
“열이란 강한 약효를 견디는 몸이 발하는 비명입니다. 독과 이미 섭취한 꽃을 황후 폐하의 몸은 힘겹게 버티고 있어요. 더 먹였다가는 오히려 심장이 멈출 수도 있습니다.”
“그럼 어쩌란 말이야! 이대로 채운이 견디기만을 기다리라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카론을 향해 올리아는 단호하게 긍정했다.
“네. 견디십시오.”
쾅!
초조와 불안을 견디지 못한 카론이 벽을 세게 내려쳤다. 손마디 피부가 짓이겨져 피가 터졌으나 심장을 죄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채운의 침대 곁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카론은 떨리는 손끝을 모아 창백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올리아가 나가고 침실엔 채운과 카론뿐이었다. 안정된 레온은 마그네와 함께 골든 피오니의 다른 방에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무엇 때문에 황제가 되었는가? 세상을 손에 넣었는데 채운이 자신을 떠나려고 할 때마다 자신은 너무 무력했다. 카론은 이를 악물었다.
“모두…… 모두 나가 있어라.”
카론은 올리아와 마그네는 물론이고 레온도 물렸다.
처음 꽃을 먹였을 때는 거친 숨결이 금방 좋아지는 차도가 있었다. 그래서 꽃만 먹이면 될 줄 알았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번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징후가 없었다.
팔을 물들인 검은 핏줄은 여전히 진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짙어지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낮에 보면 너무 까매서 마치 죽음이 채운을 끌어당기는 저주 같았다.
‘죽지 않는다. 요정은, 채운은 죽지 않는다.’
초조함이 극에 달했다. 손끝과 입술이 떨린 지는 오래되었다. 눈가가 뜨거워지며 때때로 콧등이 찡했다. 핏발이 선 눈동자에 물기가 급격하게 차올랐다가 심호흡에 가라앉길 반복했다.
“제발. 누가 있다면…… 신이 있다면. 채운을 살려 주길 바란다. 제발.”
차도 없이 이어지는 상태에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전처럼 채운의 꽃이 금빛 인영이라도 불러 주길 바랐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찾아오지 않았다.
“흐윽.”
처음으로 목울음이 터졌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렇게 간절하게 뭔가를 바란 적도, 무력한 적도, 절망감에 찬 적도 처음이었다.
삶의 의미가 단순히 생존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소중한 존재가 제 손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자신은 무엇을 하든 채운에게 상처만 입힌다.
채운의 누나를 경계하지 않았다면. 그가 검을 들고 들이닥쳐도 채운을 빼앗길 걱정만 하지 않고 순순히 죄를 고했다면. 그래서 채운이 누나의 손을 잡고 황궁을 제 발로 나가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모든 것에 제 탓이었다. 레온을 데리고 있으면 절대로 떠나지 않겠지 하는 막연한 자신감으로 채운을 가벼이 봤다. 무엇보다 과거의 죄악이 후회스러웠다.
누나가 가져온 채운의 노트에 뭐가 적혀 있는지 몰라도 그의 누나가 화낼 일이 분명했다. 서궁에 있었던 일일지도. 채운은 그것을 잊지 않고 기록했다.
그런 걸 왜 적어 두었고, 왜 누나에게 보여 주었느냐는 원망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저 채운을 아프게 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이 컸다.
사랑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다정한 사람이 되어도 좋다는 허락이 다였다.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르면서 얼마나 기고만장했던가. 드디어 채운을 얻었다고 자신에 차서는. 그가 내내 그리워했을 누나를 적으로 취급하며 검을 겨누었다. 채운을 다시 괴롭게 했다.
기회를 다시 갈구하는 제가 멍청하고 한심했다. 그러나 아무런 도리가 없었다.
황제임에도 채운 앞에서는 너무나도 무력한 멍청이일 뿐이라서.
그저 사랑하는 이가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리는 한낱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