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1) (21/28)

5. (1)

휼레가 기척도 없이 들이닥쳤다. 아무리 집주인이라지만 무례했다. 더군다나 그의 뒤로는 척 보기에도 인상이 나쁜 장정이 서 있었다.

“둘 다 깨어 있군요.”

“밤에 무슨 일입니까?”

붉어진 눈시울을 훔친 채운이 담담하게 물었다. 여운은 조용히 곁에 섰다. 아무리 다투어도 남매는 남매였다. 곁에 서기만 해도 무척 든든했다.

“황궁 소식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한 명만 와도 될 일입니다.”

“그런가요?”

씩 웃는 미소가 꼭 구렁이 같아 소름 돋았다.

“좋지 못한 소식이라 여기 계신 요정 기사님이 난동을 부리면 곤란하거든요.”

“무슨?”

“여운과 함께 온 사람이 황제의 손에 죽었다는군요.”

“뭐라고?”

태손이? 카론에게? 충격으로 인해 머릿속이 하얘졌다.

[기어이.]

[뭐라는 거냐?]

조용히 묻는 여운에게 채운은 더듬더듬 답했다.

[태손마마가…… 카론에게…….]

[설마 당했다고?]

황궁을 침입한 자가 바로 태손이었다. 무예가 아무리 출중해도 수적 열세를 이길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신국의 태손이 먼 객지에서 비명횡사하다니. 여운과 함께였다면 목숨을 부지했을 수도 있다. 아니 채운이 부득불 황궁에 남았다면 그런 참사는 없었을 텐데.

[황궁으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카론이 더한 피를 보기 전에.]

악독한 괴물이 되어 되돌릴 수 없게 되기 전에 돌아가야 했다. 덜덜 떠는 채운을 여운이 보듬었다.

[내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믿지 않겠다. 네가 말하지 않았느냐, 저놈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고.]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카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황제의 화를 풀어야 합니다.”

“흐음. 늦은 것 같은데요.”

휼레는 음흉한 속내를 굳이 감추려고 들지 않았다. 채운은 음성을 최대한 가다듬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뱀 굴을 빠져나갈 수 있다.

“무엇을 바랍니까? 우리를 그냥 보내 주면 폐하에게 잘 말하겠습니다.”

“그냥 보내 드리기는 조금 곤란한 데요.”

역시나 곱게 보내 줄 의향이 없었다. 문 앞을 가로막은 휼레는 이내 채운의 팔을 꽉 잡았다. 그를 곁눈으로 노려보며 팔을 잡은 손을 벌레 떨치듯 툭 떨쳐 냈다. 가무잡잡한 이국인의 낯짝이 살짝 뒤틀렸다.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무례합니다.”

“죄송합니다. 황.후.폐.하.”

뚝뚝 끊어지는 어투엔 위험한 조롱이 깃들었다. 눈에 불을 켜고 놈을 노려보는 사이 위험한 기색을 알아차린 여운이 검을 뽑아 들고 휼레를 겨누었다.

[무슨 얘기를 하든, 일단 내 동생을 보내 줘.]

“황후 폐하, 여기 계신 당신의 누나에게 말을 전해 주시죠.”

휼레가 씩 웃는 사이 나머지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이미 모습을 드러낸 자 외에도 덩치가 큰 자가 여럿이었다. 거기엔 아까 보았던 하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조리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화살촉은 모두 채운의 이마를 노렸다.

“당장 칼을 내리지 않으면 폐하가 화살로 된 왕관을 쓰게 되실 거라고.”

씩 웃는 휼레의 낯짝엔 분노와 원한이 가득했다.

[네 이놈!]

여운이 검을 꽉 쥐는 순간 놈들이 겨눈 화살촉 중 일부가 채운의 살갗을 강하게 눌렀다. 채운이 누님을 보기 위해 고개를 조금 돌렸다. 얇은 살갗을 짓누르던 화살촉 때문에 이마에 작은 생채기가 났다.

[누님, 진정하시고 검을 내리셔요.]

[아니 진정할 건 내가 아니라…… 알았다.]

이마에 생긴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고개를 살짝 젓자 검을 꾹 쥐던 여운은 초조한 듯 검을 내렸다. 휼레는 그런 여운에게서 검을 빼앗았다.

“말이 통하니 좀 낫군요.”

한시름 놓은 사람처럼 짧은 숨을 내쉰 휼레는 여운의 검을 하인에게 건넸다. 그것을 여운이 맹호의 눈으로 지켜봤다. 풀풀 풍기는 살기를 느낀 하인들의 어깨가 굳었다. 이마에 닿았던 화살촉이 살며시 뒤로 물러났다.

긴장감 속에서도 휼레는 미소만 지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누님은 당신을 좋은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정말? 요정은 강하지만 멍청한 모양이야.”

말도 뚝 끊어먹은 휼레는 하인에게 명했다.

“여운을 튼튼한 밧줄, 아니 쇠사슬로 묶어라. 목에도 쇠스랑을 채워. 맨몸으로도 사람 두엇을 때려죽일 수 있는 여자야.”

하인들은 즉시 명령에 따랐다.

철컹.

흉악한 쇠스랑이 여운의 목에 걸렸다. 긴 쇠사슬이 손목, 발목에 걸렸고 하인들이 각각 하나씩 잡았다.

[누님.]

[진정해라. 일단 죽일 생각은 아니니 이러는 게 아니겠느냐. 기회를 보자꾸나.]

방금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 그런데도 여운은 채운의 안위만을 걱정했다. 명치가 욱신욱신 쑤셨다. 자랑스러운 대장군이 이 무슨 참담한 처지란 말인가. 분노가 뒤틀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휼레를 노려봤다.

“그대는 황제를 미워합니다. 그러니 나를 미워해도 됩니다. 하지만 누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놓아주세요.”

“여운은 아무런 죄가 없지.”

고개를 끄덕인 휼레는 채운의 팔을 강하게 잡아 비틀었다. 검은 눈동자와 푸른 눈동자가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하지만 나의 휼리도 아무런 죄가 없었어.”

직후 휼레는 채운을 난폭하게 잡아 이끌었다.

“남매지간에 오붓한 시간을 좀 더 보내도 좋을 텐데. 황제의 미친개가 나섰다는 소식이 들려서 말이지. 아니 싸움을 벌인 걸 보면 차라리 이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 남매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지. 나처럼 잃고 난 후에는 싸우지도 못해.”

청하지도 않은 참견을 하면서 휼레는 넉넉한 품에서 작은 함을 꺼냈다. 함 안에는 검지 길이의 구불구불한 이상한 칼이 있었는데 그걸 들자 진득한 녹색 액이 묻어났다.

“악!”

휼레가 휘두른 칼끝이 채운의 손목 언저리를 스쳤다.

[분홍아!]

여운이 고함치면서 몸을 앞세웠다. 목과 사지에 걸린 쇠스랑이 쩔렁거렸다.

“조심해. 자칫하다가 네 동생의 예쁜 눈을 찌를지도 모르니.”

이국어를 이해하지 못했으나, 휼레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세로도 뜻을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여운은 이를 빠드득 깨물었다.

“놔.”

“아직이야.”

손을 빼려는 채운을 꽉 붙잡은 그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붉은 피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상처에 칼을 저미듯 문질렀다.

“윽.”

기어이 녹색 진액을 묻히고 난 후에야 휼레는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저 베인 상처와는 쓰라림이 전혀 달랐다. 꼭 불에 지진 듯 뜨거웠다.

“이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저주다. 아주 지독해서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요정 황후 폐하이시니까 평범한 인간의 독보다는 특별한 게 어울릴 것 같아서 준비했어.”

피가 통하지 않게 손목을 꽉 잡았다. 그러나 불같은 기운은 천천히 번지는 중이었다.

“피가 부패하면서 끔찍한 고통을 유발해. 산 채로 불타는 편이 나을 만큼 전신이 아플 거야.”

“으윽.”

벌써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손목을 꽉 잡고 부들부들 떠는 걸 보면서 휼레는 품에서 긴 끈을 하나 내어 팔꿈치 바로 위를 꽉 묶었다.

“저주가 심장에 닿기까지 하루 정도 걸릴 거다. 그때까지 네 누나가 황제의 머리를 가져오면 해독약을 내어 주지.”

“……뭐?”

고개를 드는 채운을 무시한 채 휼레는 흉흉한 여운의 눈초리를 고스란히 받았다. 거센 살기가 아무렇지도 않은지 그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독이다. 뭔 말인지 알아듣지?”

[네놈!]

휼레는 품에서 다시 작은 병을 꺼내 보였다.

“이게 해독약이다. 가지고 싶으면 카론 유스키아의 목을 가져와. 그렇지 않으면 네 동생은 죽는다. 남매끼리 돕고 살아야지, 안 그래?”

[독이야? 저게 해독약이고?]

확인하는 여운을 향해 채운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 론. 유. 스. 키. 아.”

또박또박 말한 휼레는 손으로 목을 그어 보였다. 그리곤 병을 흔들면서 채운의 손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검지를 펼쳐 보였다.

“기한은 하루다.”

[네가 당한 독을 해독하고 싶으면 그놈의 목을 가져오라는 건가? 시간은 하루? 맞니?]

[……예.]

[미안하다 분홍아. 전부 내 잘못이다. 네 말대로 차분히 얘기를 나누면서 황궁에 머물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내가 너를 함정으로 이끌었구나.]

[아니에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뒤늦게 미안함이 가득했다. 모든 부귀영화를 뒤로하고 여기까지 오신 누님이 저를 깊게 생각하여 몸이 좀 앞섰다고 그렇게 화를 낼 일이 아니었는데. 막상 누님이 짐승처럼 다뤄지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찢어졌다. 함부로 누님을 탓한 제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겉과 속이 다른 놈의 말을 순순히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곧 너를 구하러 올 테니 조금만 참아라.]

[그를 만나거든 우선 올리아를 찾으세요. 내내 저를 봐준 의원입니다.]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지 몰라도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다.”

대화 중에 휼레가 끼어들었다. 여운이 놈을 향해 버럭 욕설을 던지려는 찰나, 하인 중 하나가 천을 머리에 씌웠다. 그리곤 사지를 결박하여 밖으로 끌고 나갔다.

[누님!]

반사적으로 따라가려던 순간, 하늘이 핑 돌았다. 시야가 까맣게 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이마에 손등을 얹자 식은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독이 다 퍼지기까지 하루가 걸린다더니. 벌써 머리가 아찔하고 전신이 무거웠다.

“몸을 움직이면 저주가 더 빨리 퍼져.”

냉랭한 음성이 귓전에 울렸다. 휼레가 이끄는 대로 휘청휘청 따라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낯선 천장이 훅 달아난다 싶더니 이번에는 달갑지 않은 카펫이 코앞까지 불쑥 치고 들어왔다.

똑바로 서라고 다그치는 상대의 음성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한참을 걸었더니 무릎에 뭐가 툭 받쳤다. 저절로 몸이 허물어졌다.

풀썩.

아까 눈을 붙이려고 했으나 심란하여 내내 잠들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던 바로 침상이었다. 힘이 없어 침상에 제대로 눕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충격에 전신의 혈관이 다시 한번 불타올랐다.

“벌써 정신이 나갔나? 저주를 너무 많이 쓴 건가. 하루를 못 버틸지도 모르겠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중에도 이상하게 휼레의 차가운 음성은 얼음송곳처럼 또렷하게 귓속을 파고들었다. 옆에서 누가 중얼거렸다. 하인인 듯했다.

“해독약? 이거? 아아, 이거 가짜야. 해독할 수 있다면 저주라고 불리지도 않아. 위험한 여자를 처리하기 위한 거짓말이었어. 황제의 목을 잘라 오면 좋고. 아니어도 그 악마의 손에 죽어 버릴 테니 앞으로 귀찮게 하지 않겠지. 그보다는 승원은?”

“으…… 으…….”

은은한 충격이 전신을 휘감았다. 감각이 무뎌진 손을 들어 휼레의 발목을 잡으려 들었다. 그는 뒤로 슬쩍 물러나며 채운을 피했다.

“아직 정신이 남아 있나, 요정이라 약효가 조금 다르긴 한가 보군. 네 요정 일족이 대단하게도 황궁에서 살아 나왔다는군. 황궁에서 죽기를 바랐는데. 뭐가 잘못된 걸까. 악마 놈이 우스꽝스럽게 요정과 새끼나 치며 사는 동안 무뎌지기라도 한 걸까. 그래도 그놈이 승원의 뒤를 쫓고 있으니 곧 죽겠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카론에 대한 원한으로 황후인 자신을 죽이려 드는 건 언뜻 이해할 법도 했다. 그러나 누님과 태손 마마는 원한 관계가 아니었다.

“도…… 도대…… 체 왜?”

“왜냐고?”

소리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힘겹게 움직였다. 기름종이를 덧바른 듯 흐려진 시야에 검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열꽃이 피어 예민한 얼굴에 숨결이 살짝 닿았다. 휼레가 몸을 숙인 탓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어? 그 악마 새끼는 우리가 마법을 숭상하는 마도 제국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무참히 도살했어. 요정도 마법을 쓰지. 누구는 도살하고 누구는 황후로 맞아 숭상하고. 그건 불공평하잖아?”

차가운 손끝이 얼굴을 툭 건드렸다.

“저주받을 그놈은 똑같이 겪어야 봐야 해. 그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끔찍하게 죽어 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그런 고통을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난 휼레는 낮게 웃었다.

“언제 죽든지 상관없지만, 속에서부터 부패한 피가 네 아름다운 몸을 끔찍한 꼴로 바꿀 만큼은 버텨 줬으면 좋겠으니 힘내. 네 시체는 놈에게 선물할 거야.”

살면서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섬뜩하고 흉악한 당부였다.

“승원과 여운에게 감사한다. 그들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 너를 빼돌리지 못했겠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내 손으로 해치우진 않았어.”

금방 카론과 목숨을 다투게 하고도 휼레는 크게 베풀었다는 투였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독에 당하지만 않았어도 당장 달려들어 입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말한 김에 한 가지 더 말해 줄까?”

신난 듯 휼레는 말이 많아졌다.

“우린 문을 열고 너희 세상으로 갈 거다. 그 전에 네 아이를 챙겨서 말이지. 여운과 승원의 옷과 검도 유품으로 내밀면 네 부모에게 잘 보일 수 있겠지. 귀중한 은인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니 벌써 기대되는군.”

킥킥 대며 조소한 휼레는 곧 사라졌다.

고통을 무시하고 정신을 모으려 애쓰는 사이 사위가 고요해졌다. 남은 건 활활 불타는 몸뚱이와 경악에 흩어지는 혼백뿐이었다.

“으윽.”

조금만 숨을 쉴 때마다 폐에서 불기운이 터져 나왔다. 폐부가 한겨울 아궁이로 변했다. 절로 솟은 눈물로 어설프게 물을 뿌려 보았으나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불길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휼레의 흉악한 계획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누님과 태손 마마를 사지로 내미는 것도 모자라 온을 납치하여 신국으로 넘어가겠다고? 그것도 제가 은인인 척 거짓 행세를 하며? 두 자식을 죽인 놈을 은인으로 대접할 부모님과 형님들, 무엇보다 그 악랄한 손이 온의 몸에 닿다니.

절대로…… 절대로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채운은 불타는 몸에 힘을 주었다. 독에 맞은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면서 뒤튼 끝에 엎드릴 수 있었다. 무감각한 사지를 놀렸다. 기어가기도 어려웠다. 그것도 움직인 거라고 독이 더 빨리 돌았는지 흐릿한 시야가 아예 꺼지려 들었다.

“카…… 카…… 론.”

들릴 리 만무했다. 그래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카…… 아…… 으.”

살짝 떴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억지로 쳐들었던 고개도 도로 쿵 내려앉았다. 어느새 차오른 눈물이 바닥으로 점점 떨어졌다. 눈꺼풀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반복했다. 뜨고 있으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이대로 눈을 감을 순 없는데.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은데. 큰엄마, 엄마, 아빠. 큰형님. 작은형님. 누님…… 누님. 부디 카론을. 카론…… 카론 우리 온이를…… 카론.

점멸하던 세상에 완전히 꺼지기 직전 포근한 아기 내음과 함께 황금빛 물결이 일었다. 처음에는 은은하게 나중에는 잘 익은 보리밭처럼 샛노란 빛이 되어 채운을 덮쳤다.

쏴아아.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 * *

밖으로 나오자 접선을 지시했던 수하가 휼레 쪽으로 다가왔다.

“황궁에 남은 자들이 정해진 시각에 접선지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새끼 악마 확보에 실패했나. 그전에 발각되었거나.”

악마의 새끼를 유흥거리로 길러 보려 했는데. 황후를 제거했으니 그다지 아쉽지는 않았다. 잔악한 악마 놈이 요정을 얻어 평화롭게 사는 역겨운 꼴을 더는 참지 않아도 된다.

“이대로 우린 사르프를 뜬다. 배를 준비해. 전에 사들였던 가장 빠른 함선으로.”

“네.”

양측 언어를 할 줄 아는 황후는 죽었다. 승원은 황궁을 습격했고 여운은 황후를 데리고 도망쳤다. 황제의 더러운 습성으로 미루어 보아 승원과 여운 또한 어떤 식으로든 죽은 목숨이었다. 그 과정에서 휼레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증언할 자는 아무도 없다.

요정의 꽃까지 바로 손에 넣었으면 좋겠지만. 승원이 그것만은 끝까지 내놓지 않았다. 틈을 타기도 어려웠고 나중에는 어디에 숨겼는지 품에 지니고 있지도 않았다. 눈치를 보아 승원은 단순한 요정이 아니었다. 여운이 깍듯이 대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를 찾으러 오는 요정이 또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둘이 아니라 여럿일지도 몰라. 이쪽의 문을 가지고 있으면 새로운 요정을 처음으로 만나는 사람도 황제가 아닌 나다.’

세상의 문을 열려면 꽃과 유물 둘 다 필요했다. 만약 황제에게 꽃이 있더라도 유물이 없다. 저쪽 세상의 요정이 문을 열면 앞으로도 무조건 휼레를 먼저 만날 것이다. 처음과 두 번째 사이에 2년쯤 걸렸다.

‘2년쯤이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일족 대부분은 한창 개발 중인 푸논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요정의 명성을 듣고 여기저기에서 몰려든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가득한 땅. 거기에서부터 다시 차근차근 세력을 넓혀 갈 계획이었다.

“이대로 로하스로 간다!”

푸논에서 가까운 도시였다. 일전에 몸을 숨기고 잠시 쉬었던 다른 근거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거기에 모든 여력을 모아 놓았다.

야음을 틈타 몰래 작은 배를 출항시켰다. 항구를 지키는 경비 기사에게 돈과 술을 주고 미리 손을 써 놨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를 하는 연인이 띄운 배로 알고 있다.

정신을 잃은 요정 또한 배에 실었다. 아직 숨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았으니 그 죽음을 차분히 지켜볼 작정이었다. 또한, 황제가 나타나면 끔찍한 몰골의 시신을 그 앞에서 찢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침묵을 즐기는 선원 소수가 모는 배는 조용히 강 하구를 빠져나갔다.

작은 배라 선실이 하나뿐이었다. 요정을 구석에 던져 놓고 오늘 사르프의 집으로 온 비밀 서신 꾸러미를 꺼냈다. 전국 각지에서 온 것으로 대부분이 최근 부과된 세금으로 인해 황제에게 대단한 불만을 품은 자들이었다. 신분을 철저히 숨기기 위해 가명을 썼으나, 화려하고 느긋한 글씨에서 귀족 특유의 냄새가 가득했다. 심지어 향수를 뿌린 자도 있었다.

“미쳤군. 멍청한 놈.”

대부분은 휼레에 지지를 표명하지만 제대로 된 기사를 보내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용병을 사서 로하스에 보냈다. 급조한 용병대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병력이 아니었다. 일반인에게는 거칠고 무식하게 폭력을 일삼아 공포심을 심어 주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사단을 상대로는 금방 허물어질 들개 떼였다.

“열매는 먹고 문제가 되면 발뺌을 하겠다는 거군. 약아 빠진 놈들.”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파사를 따르는 자가 많아졌다. 푸논에 적극적으로 진출한 탓이었다. 어설프나마 기사 훈련을 받은 자도 있었다. 새로운 도시인 푸논을 점거하여 공성전을 펼쳐서 황제의 이목을 끌어모으는 중에 반역에 가담한 자들이 각자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휼레의 일은 황제와 그들의 군사를 유인하기 위한 좋은 먹잇감을 손에 넣는 최우선이었다. 여운과 승원이라는 의도치 않은 도움을 받아서 보기 좋게 성공했다. 승원은 단신으로 황궁에 침입하는 광기를 선보였다.

“분명히 뒈졌을 테지만. 황제의 흉악한 성미는 더욱 돋우었겠지”

읽은 서신을 촛불에 태우는 동안 의식을 잃은 요정은 때때로 괴로운 듯 신음했다.

“으…….”

“아직도 안 죽었나?”

검은 뱀은 일반인이라면 스치는 즉시 절명하는 극독이었다. 아직 숨을 쉬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요정이라서 그런 건가?”

곁눈으로 흘끔 보았다. 단도로 찌른 부근에 희미한 금빛이 났다.

“음?”

가까이 다가가 망토에 감싼 손으로 요정의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피가 진득하게 흐르는 상처 가장자리에 빛에 비춘 사금(砂金) 같은 자잘한 빛이 감돌았다.

“이게 뭐지?”

지금껏 상단 경쟁자를 상대로 검은 뱀을 여럿 사용했으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희미한 금색은 유물과 승원이 들고 있던 꽃의 빛과 비슷했다.

“금색이 마력의 상징인가?”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도 검은 뱀에 물린 자의 피는 너무 위험했다. 자칫하다가 중독될 위험이 있기에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

요정의 안색은 시시각각 창백해졌다. 간간이 나던 신음도 이제는 거의 잠잠해졌다. 숨소리는 아까부터 들리지 않았다. 마력이 있더라도 검은 뱀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이대로 두면 언젠가는 죽을 터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것 있기에 휼레는 죄를 지은 선원에게 사용하는 족쇄로 한쪽은 요정의 발에 다른 쪽은 바닥에 튼튼히 고정된 탁자 다리에 걸었다.

“이대로 곱게 죽는 편이 나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산 채로 찢길 테니까 말이야.”

딴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휼레는 요정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서신을 태운 재를 버리기 위해 밖으로 향했다.

* * *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담담하고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들리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스며들듯 고운 음성이 채운을 불렀다.

명채운. 일어나라.

아득한 청각을 뒤흔드는 음성은 곱고 차분했다. 음성에 귀를 기울이자 검은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던 의식이 천천히 떠올랐다.

‘엄…… 마? 큰…… 엄마?’

채운. 명채운. 아가르타.

부름은 한층 또렷하게 들렸다. 무딘 손끝이 바닥을 긁었다.

솨솨.

기분 좋은 바람이 불었다. 다정하고 따뜻한 바람은 식은땀에 젖은 목 구석구석을 돌았다. 잦아들었던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아궁이 같은 폐부의 온도가 조금씩 낮아졌다. 불타는 피부의 고통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어느새 마른 머리카락이 목덜미와 이마를 간지럽혔다. 옷 사이로 든 바람이 셔츠 소매를 풍선처럼 부풀렸다. 전신에 신선한 기운이 돌았다.

“하아.”

재를 머금은 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아직 흐린 시야엔 온통 황금빛이 가득했다.

분홍. 아가르타. 일어나라. 채운.

아직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으나 그래도 영영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천천히 사지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켰다. 지척에 있는 침상을 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모아 일어섰을 때는 온 방을 환하게 밝히던 빛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맞추었다. 놀랍게도 빛은 사람 형상을 만들었다.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금색 빛이 폭포처럼 흐르는 형상은 채운을 가만히 보았다. 그는 분명히 채운, 분홍, 그리고 아가르타까지. 제가 가진 이름을 모조리 물렀다.

“누…… 구으?”

혀가 얼얼하여 말이 어눌했다. 뜻은 제대로 전해졌는지 금빛 형상이 천천히 일렁였다.

시에나.

당연히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울림이 어쩐지 익숙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분명히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사악한 독 때문에 머리가 둔해져서 그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사이 금빛 인영이 다시 일렁였다.

시에나. 시에나 유스키아.

“유…… 스키…… 아?”

아는 이름이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이곳 말을 제대로 모르던 시절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아 가며 수백 번은 더 쓰면서 외운 이름이 카론 유스키아 라테시온이었다. 순간 시에나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도 떠올랐다.

“시에나는 제 친구였어요.”

언젠가 올리아가 언급한 적이 있었다. 시에나라는 사람을. 유스키아의 마녀를.

“카론의…… 어머니?”

금빛 인영이 크게 흔들렸다. 빛과 함께 바람이 확 뻗쳤다가 다시 잦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신선한 바람이 내내 불고 있었다. 여긴 사방이 닫힌 방이었다. 바람이 불 이유가 없었다. 그건 시에나로부터 불어오고 있었다.

카론이 미친 여자라고 그렇게 저주하고 원망했던 상대는 상상과 전혀 달랐다. 시에나의 빛은 차분하고 따뜻했다. 또 바람은 기분이 좋았다.

‘죽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정말로 마녀라서?’

그래. 누군가는 나를 마녀라고 부르지.

“헛!”

머릿속으로 생각했을 뿐인데. 시에나는 마치 들리는 듯 대답했다.

마녀니까. 원할 땐 생각을 읽어. 그리고 말을 하는 대신 생각을 전해.

“아.”

아까부터 말한다고 했지만, 금빛 형상에는 뚜렷한 이목구비가 없었다. 머리와 사지처럼 보이는 덩어리만 있을 뿐. 생생하게 들리는 것도 머릿속으로 바로 전하기 때문이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자 여러 가지 의문이 동시에 떠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카론과 온, 그리고 누님이 걱정이었다. 태손 마마도.

걱정하지 마. 그들은 아직 무사해.

크게 안심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별안간 불안해졌다. 아직이라고 했다. 아직. 채운의 불안을 감지한 시에나는 달래듯 부드럽게 물결쳤다.

그들의 안녕은 너에게 달렸어. 채운 아가르타. 우선 내 얘기를 들어 보렴.

그러면서 시에나는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워지는 데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도리어 포근함만 짙어졌다.

늘 기다리고 있었어. 너를. 언젠가 구원자가 나타나 저주의 고리를 끊기를.

“나를? 어떻게?”

그래. 나는 마녀로 태어났기에 점을 쳐서 미래를 봐.

“그렇다면 왜 카론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나요?”

미리 알았다면 카론은 채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여 지독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지 않았을 거였다.

구원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줄은 몰랐거든. 그저 밤하늘에 빛나는 아름다운 별을 보았어. 그 별이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것만 알았지. 만약 알았다고 하더라도 살아 있을 때는 광기에 사로잡혀서 말을 할 여력이 없었단다. 그 뒤로는 죽었지.

“죽었는데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하지요?”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아주 적은 사람뿐이야. 네게는 확실히 마도 제국의 혈통이 흐르는구나. 또 너와 네 일족이 여기로 가져온 꽃 덕분이기도 하지. 골든 피오니. 마법의 정수인 그 꽃 두 송이가 동시에 내게 힘을 빌려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저 잊힌 마녀에 불과해.

“골든 피오니? 금은화요? 마도 제국은 뭐지요?”

맞아. 너는 금은화라고 부르지. 골든 피오니는 사라진 옛 마도 제국의 유물이야. 마도 제국이 망하기 전에 많은 일족이 새 세상을 찾아 떠나갔단다. 그들의 이야기가 전혀 전해지지 않았는데. 다른 세상에서 잘 살아가고 있어서 기뻐.

마도 제국 얘기는 잘 모른다. 하지만 다른 세상으로 간 사람들이 잘살고 있어서 기쁘다는 얘기가 어쩐지 신국을 이르는 것 같았다. 양인과 음인이 수시로 태어나는 황가의 혈통이 마도 제국과 관련이 있는 걸까.

신국. 새 나라구나.

“아.”

떠나온 고향 세계에서 제일 먼저 세워진 나라가 바로 신국(新國)이었다. 가장 오래된 나라가 왜 ‘새 나라’라고 불리는지, 채운은 이제야 알았다.

“저희 요정, 아니 저희 신국 사람도 이 세상의 후손인가요?”

그래. 고대 마도 제국의 후손이야. 너희 세상에선 아직 골든 피오니를 피울 만큼 마도 제국의 혈통이 이어진 것 같지만, 이곳은 아주 오래전에 끊겼어. 흐린 핏줄이 아주 미약하게 이어졌으나 그것도 내가 마지막이야.

그때 시에나의 금빛이 조금 흐려졌다. 슬프고 괴로워 보였다.

그래. 슬퍼. 괴로워. 나를 이을 마녀는…… 아주 안타깝게 죽었거든.

빛이 점점 흐려졌다. 채운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무슨 일인지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시에나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위로하지 않아도 된단다. 다음 마녀를 죽인 사람은 결국 나니까. 내가 그 아이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면, 그런 슬픈 말로를 맞이하지 않았겠지.

시에나가 말하는 그 아이가 누군지 깨닫는 동시에 슬프게 죽은 다음 마녀가 누군지 얼핏 짐작이 갔다. 팔과 등에 엷은 소름이 돋았다.

맞아. 전부 내가 그 아이를 낳으면서 생긴 비극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는데. 죽은 왕의 삐뚤어진 심성을 고칠 수 있을 거라 자신을 과신했지. 내가 낳은 아이가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믿으면서.

씁쓸한 빛에서 짙은 후회가 묻어났다.

나는 주어진 시련을 이겨 내지 못했다. 광기에 물들었어. 그 아이를, 내가 낳기로 정했기에 태어나야만 했던 아이를 죽이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었어.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무엇이 되었든…… 시에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그 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그 아이를 괴물로 만들었어. 악마로 만들어서 내 불행한 일족을 더욱 참혹한 불행 속으로 밀어 넣었어. 나를 이어야 할 마녀가 내 아이의 손에 비참하게 죽은 것도, 그로 인해 쌍둥이 형제가 너에게 칼과 독을 들이댄 것도…… 전부…….

“하지만 방금 죽어 가던 나를 살렸잖아요.”

내 힘이 아니야. 아까 말했듯이 골든 피오니의 힘이란다. 네 안에 깃든 꽃의 힘이 검은 뱀의 저주로부터 너를 지키고 있어.

“시에나. 당신이 꽃의 힘을 빌렸잖아요. 전에도 그랬지요?”

서궁에 있을 때. 절망과 고통밖에 없는 그곳에 갇혀 있을 때. 죽어서 혼백이나마 그리운 부모님 곁으로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잠잠한 감옥의 공기를 흔들며 작은 바람이 불었다.

희망이 죽어 가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어. 마침 골든 피오니도 널 살리길 원했어.

“금은화가 뭐라고 하든, 당신이 나를 도와주었습니다. 당신 스스로.”

당시엔 실바람을 원망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정말로 죽었다면 사랑스러운 온을 만나지 못했다. 누님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말겠다는 사치스러운 고민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밉살스러우면서도 같이 있으면 재미있고 꼴 보기 싫다가도 안 보이면 보고 싶어지는, 카론을 영영 모른 채 죽었을 터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나는 죽으면서도 카론에 대한 원망을 씻어 내지 못한 채 쓸쓸한 원혼이 되었겠지요.”

짜고 시고 맵고, 때로는 단내가 나는 생을, 이 젊은 나이에 포기하기 싫다. 처음으로 맛본 자유를 더욱 만끽하고 싶다.

“누님과 카론이 서로를 죽이게 하기 싫어요. 온이를 빼앗기기 싫어요. 휼레가 부모님과 형님들을 기만하게 두기 싫어요.”

풀렸던 주먹을 꾹 쥐었다.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시에나의 눈이 있을 법한 곳을 당당히 바라보았다.

“카론이 누님을 죽이기 전에 말려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시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죽은 자와의 대화는 찰나의 꿈에 불과하거든. 잘 들으렴. 골든 피오니에게 빌린 힘으론 네 몸에 퍼진 저주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저 잠시 모아 둘 뿐이야.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죽기 전에 카론을 만나 상황을 전할 겁니다. 누님과 태손 마마를 다시 고국으로 보내 드리고 휼레는…….”

당장 골든 피오니가 있으면 좋을 텐데. 영원한 생명을 가진 꽃은 모든 저주를 풀거든 그리고 그 아이는…….

잠시 말을 끊은 시에나는 다시 담담하게 이었다.

너에게 마음을 열었다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 처음부터 그랬어. 그의 선택이 내가 가장 원치 않은, 일족의 종말로 이어지더라도 그 또한 운명일 뿐이니.

깊은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 아이는 스스로 변했어. 휼레 또한 변했다면 비극은 저 멀리 달아나고 평안을 얻을 텐데. 곧 그 아이를 위한 운명이 다가오고 있어. 이번만은 바른 선택을 하길 바랄 뿐이야.

금빛이 다시 흔들렸다.

말이 길었구나. 너와의 대화는 여기까지야.

“잠깐 시에나. 카론…… 카론에게 할 말이 있나요? 카론에게 전할 말이 있다면 지금…….”

사랑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러지 못한 아이에겐 죽은 마녀의 유언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아, 알지 않니?

“시에나!”

부디 행복하렴, 채운 아가르타. 너의 행복이 온 세상을 밝히는 빛이란다.

사라지는 시에나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어쩐지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관절이 다 굳어 버린 노인처럼 삐거덕거리기만 했다. 점점 멀어진 시에나는 끝끝내 카론에게 어떤 말을 남기지 않은 채 온전히 사라졌다.

별안간 차가운 기운이 엄습했다. 삐걱삐걱 널빤지가 울어대고 솨솨 물결이 스쳤다. 눈을 뜨니 휼레의 집이 아니었다. 천장에 달린 등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무래도 배 같았다.

전신이 불타듯이 아팠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누군가와 제대로 얘기할 턱이 만무했다. 분명히 혼몽이었다. 다만 너무나도 생생하여 꼭 실제 같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팔을 간신히 들어 보니 손바닥에 얇은 금환이 빛나고 있었다. 금은화의 빛깔이었다.

‘환영이 아니구나.’

그렇다면 스스로 카론의 모친 시에나라고 밝힌 인영이 말한 내용도 사실일 터. 휼레가 쓴 독에 당장 죽지 않는다. 카론에게 해독 수단이 있다. 살 수 있으면 살고 싶다. 아니 살아야 했다.

생때같은 자식을 두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 하물며 제가 죽고 난 뒤에 카론이 얼마나 흉악해지겠는가. 온과 카론에게 불운을 남기기 싫다. 몸이 부서져 죽는 한이 있어도 카론이 없는 자리에선 못 죽는다.

몸을 일으키려 바르작거렸다. 그때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본능적으로 죽은 척했다.

“죽었나?”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휼레였다. 발끝으로 옆구리를 세게 찼다. 그렇지 않아도 독에 당한 내장이 파열되나 싶을 만큼 아팠다. 참으려고 해도 옅은 신음이 새어 나가고 말았다.

“아…… 으.”

“흠. 정말 끈질기군.”

스릉.

단도를 빼어 드는 서늘한 기척이 났다. 이대로 곱게 죽을 수 없다. 하다못해 놈의 살점이라도 물어뜯어야 했다. 눈을 흡 뜨고 놈을 노려봤다. 반쯤 마비된 사지를 바르작대면서 어떻게든 놈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래. 그거야. 그런 모습이야.”

뭐가 즐거운지 놈은 히죽거렸다. 날카로운 단도가 턱 아래 들어왔다. 서늘한 칼날이 살점을 슬며시 그으려는 때, 밖에서 누가 외쳤다.

“습격이다!”

깜짝 놀란 휼레가 몸을 일으켰다.

챙! 쾅!

“으악!”

칼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뒤이어 누군가 선실 문을 쾅 차고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은 거대한 사람을 본 휼레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스…… 승원?”

승원? 방금 승원이라고 했나. 누님과 함께 왔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실제로 보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했을뿐더러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눈만 간신히 굴려 상대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상대도 채운을 내려다봤다. 경악이 서린 낯을 보는 순간 잊었던 순간이 돌아왔다.

“내가 싫으시오?”

서글피 물어보던 옛 정혼자였다. 짙은 눈썹이며 툭 불거진 광대며, 널찍한 이마며 그가 틀림없었다. 하늘이 점지해 주었다가 도로 빼앗아 간 옛 인연.

[채…… 운.]

낮고 위험하게 울리는 음성을 듣자 잊었던 기억이 완전히 되살아났다. 마른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독 탓에 목소리가 영 나오지 않았다. 절박함에 손을 뻗으려 했다. 허나 승원은 채운의 안위를 먼저 살피는 대신 휼레를 향한 적의를 먼저 드러냈다.

[감히…… 내…… 혼약자에게…….]

서늘한 읊조림과 함께 장검이 번뜩였다.

“헉!”

휼레가 단도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기세에서부터 이미 졌다. 승원의 장검이 그의 목을 내려치기 직전 누군가 바람처럼 끼어들었다.

캉!

막아선 이는 승원과 똑같이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생김새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라테시온 사람이었다. 창백한 낯인데도 이상하게 친숙했다.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독기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그럴 수도 있었다.

“잠깐. 이자를 건드리지 마라.”

새로 나타난 사람은 생생한 라테시온 어로 말했다. 놀라서 뒤로 넘어진 휼레 또한 둘의 대치를 예상치 못했는지 충격 어린 시선으로 상황을 살폈다.

“네게 황후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대신에 이자는 내게 맡겨라.”

[네놈…… 비켜라.]

말이 통하는 건지 안 통하는 건지 아리송했다. 휼레는 둘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틈을 타 선실을 나갔다. 승원이 뒤를 쫓으려 하자 상대가 막았다.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으나 둘이서 치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누님도 걱정되고 도망친 휼레가 기어이 온에게 마수를 뻗을까 두려웠다.

[태…… 태…… 소…… 마.]

사력을 다해 승원을 불렀다.

[채운.]

성난 야인의 관심이 채운에게 쏠리는 사이 들이닥쳤던 자는 휼레가 나간 방향으로 금방 나갔다. 채운보다 놈을 향한 분노가 큰지 승원은 그 뒤를 쫓았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

“어…… 흑.”

불타는 몸을 간신히 뒤집었다. 어기적어기적 기어 문으로 향하는데 다시 깊은 그림자가 졌다. 승원이 돌아온 탓이었다.

[마…… 마, 저를…….]

손을 뻗었다. 시커먼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걸 본 승원이 눈을 크게 떴다.

[독인가?]

[제…… 발…… 저를…….]

[당장 신국으로 돌아가자. 놈에게서 문을 찾아오겠다.]

그게 아니었다.

[누님…… 은?]

오는 중에 누님을 보진 못했냐고 물었는데도 승원은 채운의 말에는 신경 쓰지 않고 손만 살폈다. 오만상을 찌푸린 안면이 꼭 지옥 입구를 지키는 악귀 형리처럼 험악했다. 어찌나 사나운지 독으로 인한 열로 온몸이 활활 불타는 중에도 심부가 서늘했다.

[내 사람에게 손을 대다니…… 다 도륙을 낼 것이다. 몸은 돌아가서 고치자.]

돌아가서 고칠 독이 아닌데. 도무지 듣질 않는다. 아니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온과 그리고 카론을 두고 갈 수 없다.

[마마…….]

[걱정하지 마라. 내 이번에는 필시 널 데리고 돌아갈 테니.]

틀렸다. 절망감에 눈물이 나려 했다.

[가지…… 마세…….]

가지 말고 제 얘기를 들으라고 막 검을 쥐고 나서던 승원을 마지막으로 불렀다. 그걸 어찌 받아들였는지 승원은 그날 달이 뜬 우물가에서 보였던, 귀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흐린 시야에도 광기가 생생하게 보였다.

[아니 간다. 아니 가. 내가 너를 두고 어디에 가겠느냐. 그저 내 내자에게 손을 댄 나쁜 놈들 몇 놈만 죽이고 오겠다.]

흰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섬뜩했다. 그에게는 채운은 여전히 제 사람이었다. 더 무서운 점은 당장 죽어 가는 제 사람의 안위보다 그를 건드린 자에 대한 분노가 더욱 큰 것이었다.

‘그때와 똑같다. 제정신이 아니다.’

뻗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는 중에 승원이 갑자기 손을 덥석 잡았다. 검은 피가 흐르는 손바닥을 아랑곳하지 않고 쓰다듬었다. 긴 손가락이 상처 언저리를 덧그리더니 이내 쿡 찔렀다.

“악!”

비명을 지르는 데도 승원은 손가락으로 상처 안을 헤집었다.

[아프지? 네가 나를 버리고 가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피가 썩은 게다.]

고통을 싹 잊을 소리였다. 승원이 이런 자였나? 아버님과 형님들은 그가 점잖고 예의를 안다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자라면 여운 누님이 함께 행동하지도 않았을 텐데.

[각인증에 쓸 약을 잃어버리고 흉악한 오랑캐 놈에게 쫓겨났다. 어찌나 분하고 억울하든지. 하마터면 너를 포기해 버릴 뻔했지 뭐냐. 신국의 태자인 내가 그런 꼴을 당해야 하는지. 억울했지. 많이 억울했다.]

살을 헤집는 고통에 채운은 다른 손을 들어 놈의 뺨을 후려쳤다.

툭.

딴에는 후려친 것이었는데. 힘이 완전히 빠졌을뿐더러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자세도 좋지 않아 간신히 손끝만 놈의 턱 언저리에 닿았다. 그래도 승원에게 충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쾅!

“컥.”

막강한 힘에 밀려 바닥에 자빠지면서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덩달아 부딪힌 입술이 터져 피가 찝찌름하게 흘렀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머리채를 잡았다.

[어디 감히 태자의 얼굴에 손을 대?]

완전히 미쳐 버린 승원은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채운을 밀쳤다. 그 바람에 벽에 크게 부딪혔다.

[윽!]

[미…… 미안하오. 내가 저…… 정신이 나갔소. 아니 내가 미쳤…… 각인증이…… 미…… 미안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덜덜 떨면서 사과를 한 승원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주변을 둘러보다가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이러려던 건 아닌데. 내 어찌 그대에게…… 미안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경악 서린 낯 위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피를 뱉던 채운은 그저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각인증이라니. 그게 무슨 소린지도 모르겠고 설사 어떤 지랄병이라고 해도 무서웠다. 몸은 아픔으로 활활 타되, 승원을 보는 눈길만은 아연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의미 없는 사죄를 하던 승원은 이내 뭔가 생각난 듯이 품을 더듬었다. 가죽에 곱게 싸인 그것은 금은화였다. 생생한 금빛을 뿌리는 꽃을 내밀었다. 받기 싫어 손을 천천히 거두자 승원의 눈빛이 대번에 흉악하게 바뀌었다. 그것도 모자라 꽃줄기를 채운의 손에 기어이 끼웠다.

더러우니 몸에 손대지 말라고 외치고 싶으나 그럴 기운도 없었다. 손을 떨치지도 못했다.

[미안하니 이걸 네게 주겠다. 세상의 문을 여는 귀한 꽃이야. 전에도 주었는데 나를 버리고 갔어. 그것도 모자라 다른 놈과 정분이 났지? 이번에는 그러지 마라. 알겠지? 이번에도 나를 버리고 가면 네 가문 전체를 도륙 낼 거야.]

눈물이 흥건한 채로 귀기 어린 복수를 다짐한 후에야 승원은 검을 들고 나섰다.

[딱 세 놈만 죽이고 오겠다. 나를 속인 놈, 나를 막아선 놈, 그리고 감히 내 비에게 손을 댄 놈. 이렇게. 딱 셋만 죽이고 오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어디에도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라. 알겠지?]

광기에 물든 그는 어린아이처럼 싱글싱글 웃으면서 나갔다.

뒤이어 아무런 기척도 나지 않았다. 바깥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으나 휼레와 아까 그자가 가까이 있을 리 만무하니 승원도 그들을 쫓아 근처를 벗어난 듯했다.

정신이 회까닥 돈 놈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카론과 누님을 찾아야 했다. 승원에게 얻어맞은 덕분이 독이 더 빨리 돌았다. 간신히 돌아왔던 시야가 금방 꺼지려고 했다. 점점 어두워지는 중에 유독 금은화만 번쩍였다.

네 안에 있는 골든 피오니의 힘이야.

불현듯 시에나의 음성이 들렸다.

[내…… 안에…… 든…….]

금은화가 제 안에 들었다. 힘을 낸다. 힘을 내려면 금은화를 제 안에 넣어야 한다. 마지막 힘을 짜내 꽃을 들었다. 화사한 꽃잎이 핏기 어린 입술에 닿았다. 입술을 어물거리는 데도 금방 너무 힘들었다. 흩어지는 정신을 사력을 다해 붙잡으며, 채운은 꽃잎을 물어뜯었다.

활활 불타는 목구멍 아래로 꽃잎이 넘어갔다. 그와 동시에 채운의 시야가 온통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어디선가 향긋하고 보드라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시원하고 포근한 바람은 전신을 집어삼킨 독을 씻어 내기 시작했다.

전신을 어루만지는 바람이 손길이 꼭 두 어머니의 고운 손길이 같았다.

“우리 분홍이. 어디서 이렇게 지지를 묻혀 왔니.”

“얼른 씻자.”

따뜻한 물을 끼얹으며 손발을 문질러 주던 때를 왜 잊고 있었는지. 금은화가 불러온 추억에 잠겼다. 피가 엉겨 붙은 입술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 * *

선실을 나온 휼레는 갑판 위에 쓰러진 시신을 넘어 달아났다. 하지만 배에서 내리기 전에 곧 뒤따라온 놈에게 붙잡혔다.

“놔!”

“닥치고 따라와.”

냉랭한 표정의 암살자, 테퍼 블라드는 항의를 무시하고 그를 배 밖으로 끌어내자마자 낯선 말에 태웠다. 물론 두 손은 묶인 상태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휼리의 동생을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테퍼 블라드는 황제의 개 주제에 휼리를 너무 자주, 무신경하게 들먹였다. 휼레는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테퍼 블라드는 일전에 휼레가 휼리 동생임을 확인하자마자 태도를 바꾸었다. 자신이 휼리의 친구였으며 휼리의 죽음에 일말의 미안함이 있기에 휼레마저 그런 식으로 죽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휼레는 믿지 않았다.

휼리의 친구라는 말이 사실이라고 쳐도, 그가 휼레에게 조언을 할 자격이 있나? 심지어 그는 황제의 졸개였다. 더불어 황제에게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잠적해서 개인의 삶을 사는 편이 낫다는 개소리도 늘어놓았다. 그가 승원을 도운 것도 휼레의 계획을 망치기 위한 일환이었다.

“네가 휼리의 친구이든 뭐든 내 알 바가 뭐야? 너는 휼리를 전혀 돕지 못했어.”

“그래 돕지 않았지.”

“그런데 왜 이제서야 친구랍시고 날 방해하는 거지? 돕지 못했으면 복수에 훼방이라도 놓지 말아야 하지 않나?”

테퍼는 휼레를 태운 말에 올랐다. 레이디처럼 안겨서 타게 된지라 휼레의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더러웠다.

“다른 말을 타.”

“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카론은 악운에 매우 강해. 그에게 복수하려면 휼리처럼 허망하게 죽지는 말아야지.”

휼리, 휼리. 냉소적으로 거론하는 방식에 뚜껑이 열렸다.

“개자식…… 흡!”

장갑 낀 손이 휼레의 입을 막았다. 욕설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대신에 이를 세워 놈의 손을 꽉 깨물었다. 장갑을 끼고 있어도 상당히 아플 터였다. 그러나 놈은 작게 혀를 찰 뿐 신음은 조금도 내지 않았다.

“불같은 성질머리는 휼리와 똑같군. 얼마든지 물어도 좋아. 대신에 큰 소리는 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이를 몽땅 뽑아 버리겠다.”

물린 채로 턱을 꽉 쥐는 놈의 음성은 진지했다. 분노에 휩싸여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휼레는 잠자코 그의 말을 따랐다.

“……네가 뭘 알아.”

“이 뽑아 버린다고 했지?”

“큰 소리만 내지 말라고 했지 작은 소리도 내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이 쓰레기 같은 놈아.”

“하,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쌍둥이답군.”

테퍼는 다시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입을 두들겨 패진 않았다.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해도 좋다는 의미였다.

“어디로 가는 거야?”

“로하스. 거기에 네 본거지가 있잖아.”

무슨 의도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승원을 데리고 와 휼레의 수하를 모조리 죽였고 요정도 그에게 넘겼다. 그리곤 휼레를 데리고 다시 본거지로 간다?

“무슨 속셈이야?”

“속셈은 따로 없어. 그냥 네 목숨을 붙여 놓기에 유리한 쪽을 선택할 뿐.”

“내 목숨에 네가 무슨 상관이야?”

“쌍둥이 둘 다 내 손으로 죽이는 건 좀 찝찝해서 말이야.”

“뭐?”

휼레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말을 달리던 놈이 눈을 흘끔 내려 휼례를 보더니 냉소했다.

“황궁에 첩자를 그렇게 심어 놓고도 휼리가 죽은 사건의 전말은 제대로 모르나 보지?”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단도가 있다면 지금 놈을 당장 찔러 버렸을 텐데. 단도는 아까 선실에 떨어뜨렸다.

“황제 놈이 갑자기 휼리를 죽였어. 반역자라고. 휼리는 내게 편지를 보내 임신을 알렸다. 조만간 황제와 결혼할 생각이라고 했어. 분명히 황제 놈의 아이야. 그런데 어떻게!”

“전혀 알지 못하는군.”

“뭐라고?”

몸을 틀면서 놈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신장이 아주 큰 놈은 요령 좋게 손을 피했다. 그것도 모자라 고삐로 고리를 만들어 휼레의 양손을 감싸고는 안장 머리에 걸어 버렸다. 훈련이 잘 받은 말은 위에서 주인이 무슨 짓을 하든 갈 길을 갔다.

“얌전히 있어. 아니면 말을 타는 게 아니라 끌리게 될 거야.”

“어디 해 보시지! 말만 앞선 주제…… 으악!”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놈은 휼레를 옆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손목이 안장 머리에 걸려 있어 아주 바닥에 끌리지 않았으나 자칫하다가는 거센 말발굽에 치여 크게 다칠 판이었다. 더군다나 발이 땅에 질질 끌리기도 했다. 벌써 신이 벗겨지고 양말도 끌렸다. 이러다가 조만간 발이 완전히 상할지도 몰랐다.

“얌전히 굴어.”

“알았어…… 알았다고!”

테퍼는 휼레의 목덜미를 덥석 잡아 도로 말에 태웠다. 팔 근육이 대단해 보이지 않는 데도 힘이 엄청났다. 도로 자리에 앉은 휼레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친 새끼.”

“너만 하려고. 그렇게 그만두라고 경고했는데. 기어이 반역을 꾀할 줄이야. 너 때문에 결국 파사 일족 전체가 멸망할 거다. 그리고 휼리는 임신하지 않았어. 만에 하나 임신했어도 그건 카론의 아이가 아니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아니면 누가 알지? 휼리의 진짜 상대는 카론이 아니라 바로 나였는데.”

순간 휼레는 말을 잊었다. 이 개자식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고개를 있는 대로 비틀어 놈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 안에 거짓의 흔적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냉소 어린 차가운 눈동자는 너무나도 의연했다. 그건 거짓이라기보다는 진실 쪽에 가까웠다.

“거…… 짓말이지? 네놈이? 네가 휼리의 상대였다면…… 너도 황제 놈을 배신한 건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제국에 대한 그간의 충성심을 참작하고 또 내 동생의 노력이 합쳐진 결과지. 베로니카 블라드. 지금은 베로니카 엘러. 황제의 기사지.”

황제의 기사와 남매라니! 전혀 알지 못했다. 황제의 측근은 유명세와 달리 개인사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렇게 중요한 사실조차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다.

테퍼는 휼리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지나쳤다고 주장했다. 본인이 휼리를 직접 고발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황궁에 피바람이 몰아닥쳤을 거라고도 했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는 일방적 주장이었다. 그래도 휼레는 그를 향한 증오심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니까 네놈의 말을 정리하면…… 내 원수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거군.”

“따지고 보면 그렇지. 하지만 카론은 동시에 피해자기도 하다. 애초에 파사 일족이 만들어 낸 괴물이니 말이야.”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지 모르겠는데. 그 망할 악마 새끼가 그렇게 태어난 데는 우리 파사 일족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어린애군. 성숙했던 휼리와는 완전 딴판이야.”

테퍼는 코웃음을 쳤다.

“원수로만 따지면 너희 파사 일족도 카론의 원수 아닌가? 카론의 친모를 직접 변태 자식에게 진상한 자가 전 파사 족장이었다.”

“거짓말이다!”

“믿든지 말든지 내 알 바 아니지만. 한 가지는 기억해라. 카론은 너처럼 어리숙한 애송이는 상상도 못 할 지옥에서 살아남은 괴물이야. 그 지옥은 너희 파사 일족과 변태 왕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그가 가진 원한은 네놈의 알량한 복수심을 능가해. 그러니 더는 날뛰지 말고 복수를 포기해.”

“내가 왜?”

“말했잖아. 네 복수 대상은 카론이 아니라 나라고. 지금까지 뭘 들었나?”

“네가 말한 전부가 거짓은 아니겠지. 그래. 휼리와 관계가 있다고 치자. 황제를 위해서 휼리를 고발했다고? 아니야. 넌 그저 휼리를 황제에게 빼앗기기 싫었던 것뿐이야. 휼리가 너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황제를 포기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차라리 같이 죽겠다고 생각한 거지.”

등이 맞붙은 놈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말은 어느덧 강가를 멀리 벗어나 로하스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북부를 향해 달리는 동안 멀리 시커먼 산맥이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한참을 침묵하던 테퍼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내 목숨을 네게 주지.”

“뭐라고?”

“내게 복수해라. 네가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잔인하게.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사지를 찢어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 로하스의 네 본거지로 가는 거다. 반역 행위를 무위로 돌린다면 나를 주겠다.”

“하, 네게 무슨 가치가 있다고? 휼리를 망치고 이제는 나까지 망치려고 들 뿐이잖아. 반역 행위 따위 사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 아니 오히려 성공하길 내심 바라는 것 같은데. 그러니 황제가 그렇게 총애한다는 요정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는데도 그냥 버리고 나왔지.”

어처구니가 없어 휼레도 코웃음을 쳤다.

“어린애는 바로 너야, 테퍼 블라드. 넌 그저 황제를 괴롭히고 싶은 것뿐이야. 나와 별반 다를 것도 없지. 황제의 요정을 원하는 자를 굳이 황궁에서 여기까지 데려오진 않았을 테니. 안 그래?”

느닷없이 말이 멈췄다. 앞으로 쏠렸다가 간신히 몸을 가눈 휼레는 제가 적나라한 선을 넘어 버린 걸 깨달았다. 미친놈의 심기를 건드린 바람에 자칫하다가 여기서 당장 죽을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야. 사실은 다를 수 있지. 일단 로하스까지는…….”

빠르게 거짓말을 쏟아 내는 휼레의 입가에 가죽 장갑을 낀 손이 닿았다.

“아주 아니라고는 못 하겠는데.”

음산한 대꾸와 함께 테퍼는 휼레의 고개를 뒤로 천천히 돌렸다. 짙은 긴장감이 흘렀다.

“나를 봐, 휼레.”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놈의 말대로 시선을 들었다. 시야 가득히 냉랭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러기 싫어도 자연스럽게 뜯어보게 되었다. 일전에 봤을 때부터 알았지만 놈은 암살자치고 상당히 눈에 띄는 얼굴을 가졌다. 섬세한 콧날과 대비되는 남성적인 눈매와 입술 덕에 냉혹하면서도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가진 지독한 미남이었다.

딱딱한 눈매가 서서히 풀어졌다. 동시에 내내 조소만 머물렀던 입술에 순수한 미소가 번졌다. 충격적일 만큼 잘생겨서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 동생과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공통점이라고는 전혀 없지. 하지만 쌍둥이는 다르다더군. 여러 가지를 공유한다고 들었다. 용모, 성격, 취향…… 때로는 운명까지도 말이야.”

“그…… 그래서 뭐?”

갑자기 이상한 말을 늘어놓는데 화가 나기는커녕 이상하게 맥박이 빨라졌다. 당장 죽을지도 모른다는 긴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당혹감과 함께 얼굴이 달아오를 일이 없을 테니.

테퍼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이러다가 입술이 닿을지도 몰랐다. 숨결까지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휼리는 내 얼굴을 아주 좋아했어. 카론의 눈을 피해 위험한 불장난을 제안할 만큼. 너도 그러리라 생각하는데, 어때? 아닌가?”

순간 입술이 닿는 줄 알았다. 휼레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테퍼는 즉시 물러났고 찬 바람이 휑 불었다.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놈은 답을 들었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코웃음 쳤다.

말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내내 입을 가만히 두지 않았던 휼레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미…… 미친 자식.’

괜히 입술을 우물거렸다.

“로하스까지는 한참 더 달려야 하니 그때까지 마음을 정해라. 나를 얻고 반역을 포기할 건지. 아니면 나도 못 얻고 반역도 실패할 건지. 후자의 경우 내가 최대한 방해할 거니까 그런 줄 알고. 황제에게 대들어 봐야 네 목만 떨어질 뿐이야.”

“알량한 충성심인가.”

“살려 준 데 대한 지극한 감사지. 살려 주었기에 너를 만나게 되었으니 말이야.”

대단히 꼬인 작자였다.

“어차피 죽을 각오를 했으니. 죽기 전에 즐겨도 괜찮을 거야. 마침 산맥이 가까워 당분간 몸을 숨기기도 좋고. 이렇게 된 거 로하스로 가지 말로 곧장 산맥으로 달아나서 실컷 즐기다가 같이 죽을까?”

뭐를 어떻게 즐기다가 죽자는 건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지배한 건 그저 기이하게 미친놈에게 단단히 걸렸다는 낭패뿐이었다. 그리고 그 미친놈이 정말로 미친 것처럼 잘생겼다는 사실도.

* *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채운은 통증이 없어졌음을 알았다. 절절 끓던 열도 사라졌다. 아직 손바닥 언저리가 욱신대긴 해도 움직이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중에 꽃을 발견했다. 상냥한 빛을 가진 꽃이 참으로 고마웠다.

“금은화야. 살려 줘서 고마워.”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꽃이 맥동했다. 뜻을 가진 꽃이라니. 너무나도 신비했다. 금은화를 소중히 거두어 품에 넣었다.

철컹.

발을 움직이자 쇠사슬이 따라왔다. 얇아도 당겨 보니 무척이나 튼튼했다. 연결된 고리도 쇠고 달린 탁자의 발은 바닥에 철판을 대어 단단히 고정했다.

“뭐가 사슬을 끊을 만한 것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단도를 발견했다. 휼레의 것으로 떠나기 전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얼른 단도를 주워와 잠금 고리 부분을 겨냥하고 내리찍었다. 좋은 단검이라 그런지 서너 번 찍자 얇은 잠금 고리가 끊어졌다.

“됐다.”

쇠사슬을 벗고 얼른 선실을 나왔다. 밖은 이미 늦은 오후였다. 배 위에는 뱃사람으로 보이는 시신이 널려 있었다.

“흑.”

시신을 외면하며 얼른 배에서 내렸다. 강변이라 발목을 적시면서 올라오자 멀리 건물이 보였다. 마을이었다.

‘마을로 가서 정식 기사를 찾아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 분명히 황제에게 연락하는 방법이 있을 터. 상황을 알리고 온과 누님을 지켜야 해.’

미친 태손이 어디서 뭘 할지도 두려웠다. 당장 나타나 저를 끌고 갈 수도 있었다. 갑자기 섬뜩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노력하며 채운은 얼른 도시로 향했다.

마을로 들어가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에게 여러 가질 물었다. 여기는 라테시나 기준으로 상당히 북쪽에 있는 마을이었다. 사르프에서 북쪽 어디라고는 하는데 사르프는 말만 들어 봤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또 라테시나에 알릴 소식이 있다면 경비 기사단을 찾으란 조언을 들었다. 물어물어 경비 기사단을 찾아갔다.

기사단이 있는 곳은 마을 중앙에 있는 작은 벽돌 건물이었다. 조촐한 건물의 박공 중앙에 떡 박힌 동판에 익숙한 문양이 있었다. 카론이 정복을 차려입을 때 가슴에 다는 금장식과 같았다. 혼인을 올릴 때 휘날리던 휘장에 있는 문양도 저와 같았다. 황제의 문장이었다.

“카론.”

그의 문장을 보았을 뿐인데도 어쩐지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카론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크게 걱정할 텐데.’

제대로 설명도 않고 황궁을 나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 외에도 하고픈 얘기가 너무 많았다. 카론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들어도 상관없이 제 얘기를 들어줄 터다. 카론만은 제 뜻에 귀를 기울일 거다. 틀림없이 그럴 거다.

안으로 들어간 채운은 라테시온의 황후답게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로 신분을 밝히고 황제 폐하에 연락하게 해 달라 청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건 경비 기사의 싸한 눈초리였다.

“네가 황후라는 증거가 있나?”

“뭐라고?”

“신분증 말이다.”

무례하게도 말을 잘라먹으면서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신분증을 요구받을 줄은 몰라서 당황했다. 그러자 기사는 귀찮다는 듯이 나가라고 손짓했다.

“감히 어디서 황후 폐하를 사칭해?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넌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불구덩이에 던져질 거다. 다행히 나만 들었으니 모른 척 넘어가 주지. 흠씬 두들겨 패기 전에 얼른 나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쪽으로 넘어온 이래 이런 치욕을 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카론이 곁에 없으니 너무 무력했다. 신분증도 없는 신세라니.

밖으로 입술을 꼭 깨물고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하는 사이, 건물 곁에 곱게 매어진 말을 발견했다. 주변엔 주인이 보이지 않았다. 슬그머니 다가가 고삐를 잡았다. 말은 순하여 별다른 반항이 없었다.

“착하지.”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이랴.”

말을 달리자 뒤늦게 경비 기사가 뛰어나왔다.

“말 도둑놈!”

쫓아오거나 말거나 박차를 가했다.

‘라테시나는 남쪽이다. 남쪽으로 가야 한다.’

뉘엿뉘엿 지는 태양으로 방향을 가늠하면서 채운은 남쪽을 향해 힘껏 달렸다.

<5권에서 계속됩니다.>

금은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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