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20/28)

4.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횃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한 건 다만 황궁뿐만이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다는 듯이 몇 보 앞선 휼레는 교묘히 어둠 속을 누볐다. 그가 향하는 곳은 라테시나 외곽의 어느 허름한 곡창이었다.

녹이 슬고 이끼가 낀 석조 곡창 앞에는 등이 굽은 노인이 희미한 등을 들고 있었다. 여느 이국의 할머니와 달리 흰 머리를 올리는 대신 곱게 땋아 내린 그의 손목에는 가는 민무늬 팔찌가 여럿 걸려 있었다. 고된 노동으로 인해 마디가 굵어진 손이 창고 문을 가리켰다.

휼레는 노인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말을 탄 채로 창고 안으로 향했다.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으나, 도움을 받기에 여운과 채운도 똑같이 인사를 하고 휼레의 뒤를 따랐다.

창고 안은 반쯤 채운 곡식과 짚더미로 엉망이었다. 농기구도 있었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물레와 망태기 같은 것이 수북했다. 말에서 내린 휼레는 창고 안쪽으로 갔다. 바닥을 더듬다가 이내 힘을 썼다.

그르릉.

묵직한 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바닥 일부가 옆으로 밀려났다. 아래로 뻐끔 벌어진 입구 속으로 돌계단이 이어졌다. 입구는 상당히 컸다. 휼레는 혼자 내려가지 않고 말을 끌고 아래로 내려갔다.

[비밀 통로인가 보다.]

여운이 먼저 휼레를 따랐다. 점순이는 처음에는 겁을 먹고 버티다가 채운이 다독여서 아래로 내려오게 했다. 계단 아래는 돌로 지은 길이 있었다. 석빙고처럼 서늘하고 축축한 동굴은 은은한 바람이 불었다. 피부로 느끼기보다는 곁에 걸린 횃불의 불꽃이 때때로 흔들려서 눈치챘다.

그르릉.

다 내려온 것을 확인한 휼레는 다시 계단을 올라가 문을 닫았다. 후에 횃대를 빼 든 그는 말고삐를 쥐고 걸었다. 세 명과 말 두 필이 걷는 기척이 석조 동굴 구석구석을 일깨웠다.

침묵 속에서 걷는 동안 횃불이 흔들리는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채운 또한 얼굴을 때리는 축축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물비린내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 끝에 다다랐다. 걷던 동굴은 다른 동굴의 옆구리로 이어졌는데 새로 나온 동굴은 동굴이라 이르기에는 너무나도 웅장하고 컸다. 거기다가 바닥은 돌이 아니라 물이었다.

“휼레.”

또 모르는 사람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커다란 나룻배를 가지고 있어서 말 두 필까지 넉넉하게 태웠다. 기다리던 사람이 긴 봉으로 나룻배를 미는 동안 채운은 불편한 기색인 점순이를 도닥였다.

[지하에 수로가 있을 줄은 몰랐어.]

여운이 다가와 말을 붙였다. 불안을 덜어 주려는 배려였다. 불안도 불안이지만, 그보다는 휼레라는 자의 정체가 궁금하였다.

[라테시나 지하에 수로가 있다는 얘기는 전혀 못 들었습니다. 거기다가 황궁 정원사가 사용하는 낡은 문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리고 누가 열어 주었을까요? 열쇠가 필요할 텐데. 무얼 하는 사람입니까?]

채운은 뱃사공 둘과 무언가 낮게 의논하는 휼레의 뒷모습을 슬쩍 보았다.

[휼레 말이냐?]

여운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여운은 간략하게 설명했다.

[여기에 올 때 용이 어느 산속에 사는 사람들의 집에 떨어졌다. 파사 일족이라고 하는데 휼레는 그들의 족장이다.]

[예?]

순간 채운은 기겁하고 말았다. 파사 일족이라니!

[파사 일족이라면…… 카론과…… 라테시온 황제와 철천지원수인데.]

[알고 있다. 그래서 날 도와주었지.]

[어째서요? 저는…… 그의 황후입니다.]

[이젠 아니다. 그리고 휼레는 이미 알고 있다. 저자의 얘기를 듣고 알았다. 네가 황궁에서 잘 산다고…….]

그 이후로 말이 끊겼다. 여운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를 아득 물었다. 듣지 않아도 알았다. 황제와 혼인하여 온을 낳은 것을 말하리라.

파사 일족이 황궁의 동태를 잘 아는 건 어찌 생각하면 당연했다. 동시에 채운이 카론과 온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비록 오갈 데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자신을 속이고 개종자 놈에게 의탁한 것이 아니냐는 누님의 일갈에 답을 하지 못하고 따라나서긴 했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게 쉽게 석둑 베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서궁에서 눈물로 정을 의탁한 이후로 카론의 온기에 너무 기댄 나머지 이미 흠뻑 젖어버렸다.

밉고 또 미운 사람이긴 해도 무사하길 바랐다. 그가 무사하여야 온이 무사하다. 온이 무사해야 채운도 무사하다.

[설마…… 황제나 황자를 해하진 않겠지요?]

걱정이 절로 입 밖으로 나왔다. 그에 여운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모진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중무장한 병사를 보지 않았느냐? 그 후레자식 놈이 칼 한 자루 들고 황위에 올랐다면서. 그런 놈이 쉽게 뒈지겠느냐?]

[그렇지요.]

[앞으로 네 걱정이나 해라. 그 개만도 못한 오랑캐 놈이 필시 우리를 쫓을 터. 잡히면 너는 평생 여기서 살아야 하는 게야. 부모 형제도 없이. 홀로.]

누님이 옳았다. 채운은 카론과 온을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분개한 황제가 곧 군사를 일으키고 뒤를 쫓을 것이다. 막상 그를 마주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보지 않아도 자명했다.

카론은 다정한 간수가 되어 금은보화로 두른 감옥에 채운을 가둘 것이다. 온을 보여 달라면 보여 주기는 하겠지만. 전과 같이 황궁 밖으로 오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다. 그나마 채운의 사정은 나았다.

파사 일족이 연관한 이상, 여운은…… 머나먼 세상까지 저를 찾아온 누님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

어떻게든 황궁에서 버티며 누님과 카론 사이를 무마할 것을. 그랬다면 사정이 조금 나을지도 모르겠지만, 채운은 이미 황궁 밖이었다. 휼레의 등장으로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당장은 휼레라는 자와 함께 있으니… 일단 상황을 봐서 누님을 설득하자. 다른 일은 후에 걱정해도 늦지 않아.’

지하 강물은 계속 흐르고 흘렀다. 풍요롭고 호화로운 라테시나 거리 아래 이런 어둡고 음산한 강물이 흐를 줄 누가 알겠는가.

이는 마치 태평한 제국의 깃발과 검 아래 엎드려 어느 때고 이빨을 드러낼 기회를 엿보는 반발 세력 같았다. 동시에 깊은 곳에 고인 고통과 상처를 얼기설기 꿰매고 알량한 사과를 핑계로 거짓된 행복을 꿈꾸던 저와도 다르지 않았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검은 강물이 어디까지 흐를지 채운은 알지 못했다. 그저 흐르는 대로 따라갈 뿐.

얼마나 지났을까. 습한 바람에 물비린내가 가시고 신선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치익.

휼레가 들고 있던 횃불을 물에 담가서 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룻배는 길고 긴 지하 수로를 빠져나왔다.

아직 어두운 밤이었다. 맑은 하늘엔 물먹은 별이 반짝였다. 급히 고개를 빼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뒤편 저어 멀리에 황궁이 보였다. 라테시나 거리도 한참 멀었다.

나룻배가 수풀이 울창한 수로 변에 잠시 섰다. 거기서 내리는 줄 알았는데 내리는 사람은 뱃사공 둘이었다. 그들은 내내 덮고 있던 긴 장포를 벗자, 여느 귀공자들이 입을 듯한 재킷과 바지 차림이었다. 그러면서 점순이와 다른 말의 고삐를 잡으려 했다.

“아.”

채운이 점순이의 고삐를 놓지 못하자, 뱃사공 하나가 험악한 눈길로 쏘아봤다. 다른 자와 휼레, 그리고 여운까지 동시에 채운을 보았다. 점순이가 점순이임을 아는 사람은 채운뿐이었다. 카론이, 황제가 특별히 하사한 말이라는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고삐를 놓는 대신에 채운은 점순이의 콧등에 이마를 대었다. 순하디순한 말의 얼굴을 쓸며 작별을 고했다.

“무사하여라.”

점순이를 데려간 뱃사공은 나룻배에서 내렸다. 나룻배의 긴 장대는 휼레가 쥐었다. 말을 탄 두 사람이 빠르게 사라짐과 동시에 그는 장대로 나룻배를 다시 강 복판으로 밀었다.

“이대로 배를 타고 강 하구까지 간다.”

[양동 작전이로군. 저자들이 미끼가 되려는가 보다. 우리는 이대로 계속 배를 타고 간다고 하지?]

설명하지 않아도 여운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점순이가 없어지자 복작복작하던 나룻배가 갑자기 휑했다. 직후 추위가 엄습했다.

[집에 돌아가면 다 괜찮아질 거다.]

실상 신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자신보다 여운의 목숨이 더욱 위급했다. 그런데도 아우를 먼저 걱정하며 도닥이는 누님에게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았다. 어지러운 마음을 잘 갈무리하고 당장은 누님을 살릴 궁리부터 해야 했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휼레는 나룻배 뒤에서 뭔가 꺼냈다. 커다란 주머니였는데 그 안을 확인하고는 나룻배 바닥에 있는지도 모르는 뚜껑을 열어 속에 든 물건을 부었다.

“지금부터 배가 빨라질 겁니다. 몸을 낮추세요.”

휼레의 경고에 채운은 여운을 붙잡았다.

[누님. 배가 빨라지니 앉으라고 합니다.]

배를 가로지르는 널판에 채운이 앉자 그 옆에 여운이 바싹 붙어 앉았다. 든든한 팔이 어깨를 감쌌다.

휼레가 무슨 일을 벌인지 몰라도 뒤에서 뭔가 부글부글하더니 배가 점차 빨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강바람이 찬데 나중에는 얼굴로 들이닥치는 칼바람 때문에 몸을 숙여야만 했다.

[이게 무슨 조화야?]

[모르겠어요. 저도 이런 건 처음이라.]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며 뒤를 돌아보자 휼레가 다가왔다.

“물을 만나면 거품을 뿜어내는 신비한 가루가 있습니다. 거품이 뿜어져 나오는 만큼 배가 앞으로 달리지요. 이대로 강 하구까지 갑니다.”

“아주 신기하군요.”

“단순한 원리에 불과한데. 멍청이들은 마법이라 부르면서 기겁하기도 합니다.”

[뭐라는 거냐?]

채운은 들은 바를 여운에게 설명했다. 그사이 휼레는 머리를 감춘 천을 살짝 들어서 제 얼굴을 보였다. 달빛을 받은 밝은색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요정 황후를 마주하여 그렇다고 하기에는 다소 날카로웠다.

“나는 여기 있는 명여운의 동생 명채운입니다.”

“요정 황후 아가르타.”

“예. 황후 아가르타이기도 합니다.”

휼레는 당연히 이곳 말을 썼다. 여운이 시작한 관계였으나, 당장 말이 통하는 사람은 채운이었다. 제 소개와 함께 상대에 대한 궁금증도 꺼냈다.

“누님과 저를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휼레. 그녀의…… 휼리의 쌍둥이 동생입니다.”

“휼리?”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휼리는 누구지요?”

단순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휼레는 대단히 충격을 받은 듯 어두운 밤에도 눈에 띌 만큼 흠칫 굳었다. 밝은 빛 아래라면 금색으로 빛날 듯한 밝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가…… 황제가 휼리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았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휼리라는 울림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휼레는 낮게 탄식했다.

“그렇군. 아예 없는 사람이군. 하.”

엷은 한숨에는 깊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슬픔과 고통, 그리고 원망 같은. 휼레는 잠시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두 주먹을 꽉 쥐고 잠시 가쁜 숨을 고르는 동안 여운이 속닥였다.

[무슨 얘기를 했니?]

[휼리라는 사람의 동생이라고 합니다.]

카론과 무슨 관계가 있어 보인다는 얘기를 누님에게 할까 말까 망설일 때였다.

“휼리는…….”

휼레가 고개를 내리며 입을 열었다. 금색 눈동자에 서늘한 원한이 비쳤다.

“카론 유스키아의 연인이었습니다. 어느 갑자기 그를 배신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목이 잘렸지요.”

“예?”

예상치 못한 얘기에 채운은 입이 쩍 벌어졌다. 놀란 눈을 마주한 휼레는 입꼬리를 비틀며 조소했다.

“목은 성벽에 걸리고, 몸뚱이는 들판에 뿌려졌지요. 짐승의 먹이로요. 배 속에 있던 그 악마 놈의 자식과 함께.”

보이지 않는 망치가 채운의 뒤통수를 쾅 때렸다.

“그……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그 비열하고 잔인한 악마 놈이 순진한 요정에게 제 치부를 전부 드러내진 않았겠지요.”

그리 말하는 휼레는 입매를 바들바들 떨었다. 꾹 쥔 두 주먹도 미세하게 흔들렸다. 달을 등지고 섰기에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졌다. 눈시울이 붉어졌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채운은 울분과 분노로 달아오른 눈가를 본 듯했다.

채운도 혈육과 떨어지고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살아는 있었다. 품었던 아이도 무사히 태어나 볼살이 포동포동 올랐다. 고난을 뒤로 흘려보내고 흉 진 가슴을 닫아 두고 평안을 찾아 살았더니 하늘의 도우심인지 그립고 그리운 누님을 다시 만났다.

눈앞에 있는 파사 일족의 수장은 그러질 못했다. 소중한 이를 잃어버린 자의 슬픔은 얼마나 클 것이며, 원한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진 채로 얼마나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을까. 휼레의 심정을 차마 헤아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동시에 깊은 두려움이 들었다.

깊고 깊은 원한을 품은 자가 원수를 가만히 두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온몸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를 도륙 내고 말 터. 놀란 가슴이 싸늘하게 식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거냐?]

[아…….]

누님의 물음에 뭐라 운을 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도 모르게 휼레를 쳐다보았다. 난처한 채운을 보며 휼레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여운에게 전해 주세요. 카론 유스키아는 내 쌍둥이 누이를 끔찍하게 죽인 원수라고 말입니다.”

“나는 그 원수의 배우자입니다. 왜 나를 도와줍니까?”

휼레는 날 선 헛웃음을 터트렸다.

“왜 돕냐고요? 그야 당연히 놈을 괴롭히기 위해서요.”

대단히 뒤틀린 음성이었다. 원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목숨을 빼앗는 건 너무 간단해요. 저는 놈이 고통스럽길 바랍니다. 아주 아주 오랫동안. 할 수 있다면 영원히.”

얼어붙은 채운이 꼴 보기 싫다는 듯이 휼레가 휙 돌아섰다. 채운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얘, 무슨 일이니? 저놈이 뭐라고 했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누님이 재차 캐물었다.

[저놈을 따끔하게 혼내 줄까? 은인이지만 그래도 너에게 함부로 하는 걸 넘길 순 없다.]

답답한지 여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고 했다. 채운은 그를 다급하게 잡아 제 옆에 도로 앉혔다.

[아닙니다. 휼레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잘못은…….]

말끝이 저절로 흐려졌다.

[……놈이로군.]

한 박자를 쉬고 나서 여운이 뒷말을 이었다.

[휼리 어쩌고 하던데. 그게 누구라더냐? 피붙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붙이를 그놈에게 잃었군.]

이제야 알겠다는 것처럼 여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족의 원수이며 피붙이의 원수이구나. 나를 도운 건 놈에게 복수하려고 그랬을 테고. 혹여 너를 해하려 들 수도 있겠어. 조만간 저놈을 처치하고 우리끼리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장군인 누님은 나쁜 얘기를 참으로 담담하게 했다.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누님을 향해, 채운은 당장 저희를 돕는 은인을 향해 어찌 그런 몹쓸 말씀을 하시느냐고 타박을 하지 못했다. 대신 쓰린 명치를 꾹 눌렀다.

독액에 맞은 듯 시커멓게 타는 가슴은 휼레가 언제 돌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제 안위보다는 다른 사람의 안위가 더 걱정스러웠다. 곁에 있는 누님이 아닌, 저 뒤에 두고 온 두 사람의 안위가.

둘 중 하나는 악독하디 악독한 자였다. 휼레의 원한이 오해나 착각이라고 조금도 여기지 못하고 그대로 믿을 만큼. 잔인하고 사악했다. 그가 저지른 무수한 죄의 대가로 원한을 가진 자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면 그 또한 하늘의 뜻이라고 하겠으나…….

‘심부가 요동치는구나.’

차게 식은 살가죽 아래 깊은 곳. 붉은 피가 힘차게 돌아야 마땅한 곳이 빙산이 떠다니는 북해처럼 차가웠다. 수면에 부는 칼바람은 주변을 휘감은 내장에 자잘한 생채기를 냈다.

악인인 카론을 생각하여도 이럴진대, 혹여 온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아.]

갑자기 혹한 속에 던져졌다. 하얀 입김이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발끝은 이미 무감각했다. 시린 눈알을 녹이느라 눈을 빠르게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너도 그놈에게 잡혀 고초를 겪은 몸이다.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덜덜 떠는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은 여운은 채운의 속내를 완벽하게 알진 못했다.

[저자가 비록 내 은인이라고 하여도 원한을 네게 갚으려 든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잠시도 함께 있기 싫지? 조금만 더 참아라. 때가 되면…….]

[아…… 아닙니다. 저는…….]

[내 은인이라고 괜히 내 생각할 것 없다. 너를 위해서라면 그깟 명예 따위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어차피 이곳에 올 때 목숨까지 버릴 각오로 왔으니. 명예이니 은원이니. 그런 알량한 것은 네가 생각할 것이 아니다. 아우야.]

명치가 무겁고 답답했다. 죄책감이었다.

이런 중에도 카론과 온을 먼저 걱정하다니. 출세를 포기하고 고향 땅을 버리고 혈육까지 뒤로하며 채운을 찾아 이곳까지 온 여운에 대한 바른 예의가 아니었다. 당장은 누님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누님은 제 걱정만 하시는군요.]

[당연하지.]

어두운 밤에도 총기로 반짝이는 대장군의 두 눈에 한없이 애정 깊은 웃음이 걸렸다. 이런 분을 곁에 두고 자신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채운은 누이에게 몸을 기대었다.

[저도 누님 걱정만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적어도 아직 라테시온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아닌, 혈혈단신으로 오직 저만을 찾아온 누님을 우선 챙기는 것이 옳다. 채운은 요동치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놀란 동생을 감싸 안은 여운은 뒤를 의식하면서도 시선을 뱃머리로 던졌다. 대단치도 않은 작은 강은 고요히 흘렀다.

‘돌아가기 위해서는 금은화와 문이 필요하다. 금은화는 태자가, 문인 원판은 휼레가 가지고 있을 터.’

태자가 살아 돌아온다면 금은화를 빼앗기란 어렵지 않다. 그를 제압할 실력은 있다. 만약 죽어서 금은화를 황제 놈에게 빼앗긴다면 황제 놈에게서 빼앗으면 된다.

원판은 지니고 다니면 반드시 태가 날 만큼 크고 무거운 판이었다. 지금 휼레는 원판을 지니고 있지 않다. 분명히 어딘가에 숨겨 놓았을 터. 그때까진 휼레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어 가며 따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단 태자가 돌아오기 전까지 휼레의 원판을 찾아야겠군.’

한배를 탄 셋은 이후로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았다. 휼레는 뒤로 흘러가는 강물에 뜬 달을, 여운은 앞을 다가오는 강물에 비친 별을, 그리고 채운은 먼 인가 창에 비치는 노란 불빛에 시선을 던지는 동안, 나룻배는 강 위를 날았다.

* * *

펄럭.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횃불 사이를 누볐다.

“저기다!”

“쏴!”

슈슉.

카론의 지시를 따라 기사단이 일제히 석궁을 발사했다. 검은 옷을 입은 괴한은 정말로 그림자라도 되는 양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빌어먹을!”

도무지 잡힐 기세가 아니었다. 직접 뛰어들고 싶었으나, 기사단이 에워싸서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키라는 명령에도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서 엘러가 불시에 요정에게 당한 순간 황제의 신변 보호가 최우선으로 바뀌었다.

슉.

“악!”

검은 그림자가 일렁일 때마다 화살은 점점 가까이 왔다. 카론을 에워싸고 있던 기사 중 하나가 치명상을 입고 쓰려졌다.

“폐하! 안으로!”

“놔!”

더는 참지 못한 카론이 제 팔을 잡아 궁 안으로 이끄는 기사를 칼 옆으로 후려패고 방어선이 끊긴 자리를 뚫고 나갔다.

“폐하!”

“폐하께서 갑옷도 없이 나오셨다! 엄호!”

사방에 흩어져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거리를 좁혔다. 등을 카론 쪽으로 향하고 검을 밖으로 겨눈 덕분에 오히려 카론의 위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멍청한 것들! 과녁을 만들어 줄 셈이냐? 놈은 신궁이다! 흩어져!”

슉.

멀리서 날아오는 화살을 기민하게 알아챈 카론은 한 발을 뒤쪽으로 빼며 몸을 돌렸다. 카론의 팔을 아슬아슬하게 스친 화살은 조금 뒤쪽 땅에 박혔다. 아까 누군가 외쳤던 바와 같이 아군의 화살이었다.

배신자가 있다.

카론은 검을 고쳐 쥐고 그림자가 일렁이는 곳으로 곧장 달렸다.

슉.

화살이 연이어 날아왔다. 이마를 스치고 허벅지 피부를 갈랐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과 팔로 머리와 목, 가슴과 같은 치명적인 부위는 방어했다. 사소한 부위의 부상쯤이야. 빌어먹을 요정 새끼와 누군지 모를 배신자 새끼를 잡는데 충분히 희생할 의사가 있었다.

카론이 달려들자 그림자가 옆으로 움직였다. 아까부터 놈이 기사단을 하나씩 사냥하며 빠르게 오가는 움직임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아까운 부하가 죽어 나자빠지는 만큼 놈의 패턴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럴 줄 알았다.’

역시나 놈은 예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혼란 없이 빠르게 따라붙어 놈의 퇴로를 차단했다. 그러자 놀란 건 상대였다. 검은 그림자를 향해 바로 검을 내리꽂았다.

캉!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전해지는 은은한 진동. 라테시온에서 사용하는 양날 검과 느낌이 달랐다. 그것은 곡선을 그리는 요정의 검이었다.

쉬익.

한 바퀴 돌며 대각선 밑에서 올라오는 검날을 받아 흘렸다. 같은 요정이라 그런가, 아까 상대했던 채운의 누나가 사용하는 기술과 비슷했다.

챙. 캉. 챙.

곧은 라테시온 검과 곡선 진 요정의 검이 맞붙었다. 몇 합을 주고받으면서 카론은 그를 불빛 아래로 유동했다.

횃불이 잘 닿는 정원 가운데로 밀려나자 놈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온통 검정 일색인 복장은 요정 방식이었다. 얼굴은 검은 천으로 완전히 가렸다. 거대한 덩치는 채운이나 여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너, 남자인가? 아니면 여자?”

지금껏 두 번이나 틀린 전적이 있기에 저런 덩치를 앞두고도 카론은 남자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저렇게 생겨서 여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검 끝을 겨누며 물었으나, 대답은 없었다.

“하긴 곧 죽을 놈이 여자든 남자든 무슨 상관인가.”

그 말과 함께 카론은 놈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검이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 번뜩이는 날이 공기를 가르면서 흘리는 바람. 성난 기사가 어금니를 아득 물며 내는 마찰음. 그리고 어둠만이 도사리는 요정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예기.

한 박자라도 놓치는 순간 서슬 퍼런 칼날이 심장을 꿰뚫고, 목을 자를 것이다. 호흡과 무호흡이 교차하는 긴장 속에서 카론은 요정 같지도 않은 상대가 저지를 찰나의 실수를 기다렸다. 그러나 놈의 집중력은 쉽게 흐트러지는 일이 없었고, 힘이 빠지지도 않았다.

공방이 계속 이어졌다. 어느새 전열은 정비한 기사단이 주변을 에워쌌다. 카론이 할 일은 놈이 쉬이 도주하지 못하게 막는 것뿐이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결국에는 이긴다.

뿌우우우!

성 밖에서 뿔피리가 울렸다.

“끝이다.”

승리를 선언한 카론이 마지막 공세를 퍼부었다. 상대는 공격을 포기하고 방어에 몰두하면서 퇴로를 만들려 애썼다. 그럴 여유를 허락지 않고 카론은 놈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갔다.

그때였다.

슉!

단도가 날아들었다. 피하는 동안 거리를 벌린 상대가 석궁이 달린 팔을 들었다.

피하기엔 너무 가까워 팔을 들어 앞을 막았다. 퍼억! 짧고 날카로운 촉이 왼팔 중앙에 박혔다. 구식이 아니라 신식이었다면 아마 왼쪽 눈도 잃었을 것이다.

“큭!”

신음성을 터트리는 찰나 무거운 말발굽이 땅을 두드리면서 진동이 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깃발을 휘날리는 검은 갑옷을 걸친 기사단이 들이닥쳤다.

놈이 훌쩍 뛰어올랐다. 보이지 않는 날개가 달린 듯이 곰 같은 거구가 공중을 갈랐다.

“쏴라!”

누군가의 외침에 석궁 활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퍽! 퍽!

“컥!”

횃불에 번뜩인 짧은 단도가 날아들 때마다 기사가 쓰러졌다. 날아오는 방향은 계속 움직여 이윽고 나는 곰과 한 점을 이루었다. 둘은 곧장 사라졌다.

으득. 어금니를 꽉 깨문 카론은 화살의 깃이 달린 쪽을 검으로 단숨에 잘랐다. 반듯하게 잘랐음을 확신하자마자 화살촉 부분을 잡고 앞으로 뽑아냈다.

“큭.”

피가 묻은 것을 바닥으로 던졌다.

검은 기사단을 이끄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수하들과 마찬가지로 온통 검은 갑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덩치는 그들에 비해 작았다. 그러나 뿜어져 나오는 예기는 누구보다도 강했다.

날카로운 미인의 푸른 눈이 카론을 고깝게 내려다봤다. 대조적으로 붉은 입술에는 조소가 걸렸다.

“전부터 내가 누누이 말했지. 요정 따위에 홀리니까 그런 꼴을 당하는 거야.”

“닥쳐. 베로니카. 네 쓸모없는 남편 새끼의 사지가 곱게 달려 있길 바란다면, 당장 네 가문의 수치부터 해결해야 할 거다.”

“뭐?”

황제의 상처를 발견한 기사가 깨끗한 천을 들고 허둥거렸다. 귀찮은 파리를 쫓듯이 놈을 거칠게 밀친 카론은, 놈이 쥐고 있던 흰 천을 빼앗아 팔에 댔다. 그러면서 말에 탄 베로니카를 노려봤다.

“전부터 나도 누누이 말했지. 한 번 배신한 새끼는 또 배신한다고. 네 부탁으로 그놈을 살려 둔 대가가 바로 이건가?”

마침 다른 기사 하나가 죽은 자의 목에서 수거한 단도를 가져왔다. 붉은 피가 흥건한 단도를 본 베로니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딱히 단도를 확인하기 전부터 테퍼 블라드의 배신을 눈치챘다. 분명히 요정의 동태를 파악하고 수시로 보고하라 명했다. 라테시나에 잠입한 것을 그놈이 모를 리가 없다.

“베로니카. 황제를 지키는 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해라. 감히 황제를 향해 검을 든 놈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황후를 찾아와. 황후의 몸에 상처 하나가 생길 때마다 네놈의 모자란 남편 살점이 떨어져 나간다는 걸 명심하길.”

“예, 폐하.”

명령이 떨어진 즉시 베로니카는 기수를 돌렸다.

요정 둘 다 직접 검을 겨누어 봤다. 둘 다 막강한 실력이긴 해도 차이는 있었다. 채운의 누나 쪽이 훨씬 더 강했다. 하지만 베로니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베로니카에게 전적으로 맡겨 놓을 수는 없었다. 본인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베로니카는 테퍼에게 약했다. 어린 시절에 저를 감싸 준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어쨌든 결정적 순간에 테퍼가 베로니카를 방해한다면 곤란했다.

테퍼는 자신이 직접 처단할 것이다. 더불어 요정 놈들이 황후를 납치하도록 도운 파사 일족 또한 멸족의 길로 확실히 인도하리라.

* * *

‘속았다.’

탈출을 위해 황궁 담벼락을 넘자마자 승원의 머리에 떠오른 말이었다.

낮에 황도(皇都) 저잣거리에서 여운을 잃었다. 번쩍거리는 요란한 갑주를 걸친 자들이 여운을 황궁으로 압송하는 광경을 보는 즉시 휼레를 찾았다. 채운을 찾기도 전에 여운까지 잃을 순 없었다.

화담(畫談)을 통해 황궁 잠입 계획을 세웠다. 몸이 날랜 승원이 황제와 황궁을 지키는 금군(禁軍)의 이목을 끄는 사이, 휼레는 황궁 내에 있는 내통자와 함께 여운과 황후를 찾아 탈주하기로 했다.

“황제는 성정이 불과 같아 분명히 직접 나올 것입니다. 그때를 기다려 내부자가 황궁에 불을 지를 겁니다. 혼란이 퍼진 사이에 여운과 채운을 찾으면 호각(號角)을 불 테니 이쪽으로 나오십시오. 밖에서는 말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말로는 하지 않았으나 그림으로 전한 뜻은 착각할 이유가 없이 명확했다. 실제 황도 제도와 황궁 요약도를 놓고 그림을 그려 설명하는 동안 휼레의 이국어가 마치 신국어로 들릴 정도였다.

잠입까지는 순조로웠다. 휼레가 구해 온 황궁 요약도도 맞아떨어졌다. 다만 황제가 튀어나온 직후에도 황궁에는 불기운이 뻗지 않았다.

“포악한 황제는 무예가 그렇게 뛰어나지 않습니다. 짐승이지요.”

분명히 그림으로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황제는 전혀 약하지 않았다. 불 같은 성정도 아니었다. 호위를 받아야 할 황상이 대뜸 검을 들고 맞서는 면모에선 광기(狂氣)가 엿보였으나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어리숙한 짐승이 아니라 도리어 산전수전을 다 겪은 맹호에 가까웠다.

검을 부딪치는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황제의 검은 예(禮)도 의(義)도 없는 살인귀의 검이었다. 살인검을 쓰는 자가 황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곡절을 겪었겠나. 졸지에 혼약자를 잃고 각인의 저주를 받아 광인(狂人)으로 이국에서 생을 마감해야 할지도 모르는 승원의 검도 저 귀기 서린 푸른 눈의 황제만큼 처절하진 않았다.

‘이자는 절대로 제 황후를, 채운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잃어버린 혼약자의 부군이 휘두르는 검으로 직감했다. 황후를 내놓지도 않을 것이며 혹여라도 잃어버리는 순간 온 세상을 불태우고도 모자라 신국까지 쳐들어올 작자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황손으로 태어나 어린 백성을 두루 살피는 황위에 오르기 위해 심신을 갈고닦았던 승원에게는 검에 서린 목숨의 무게가 짙게 전해졌다.

패배를 직감했다. 그렇다고 쉬이 목숨을 내려놓기에는 승원의 검도 만만치 않게 무거웠다. 죽을 때 죽더라도 고향에 돌아가서 자진하여 부모에게 끝을 알리는 마지막 효라도 다 해야 했다.

차갑게 식은 머릿속과 달리 이국의 황제와 검을 부딪치는 내내 전신의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각인 탓이었다. 준비해 온 환약의 효과가 빠르게 떨어졌다. 각인증이 점점 심해지는 증거였다. 검을 휘두를수록 흥분으로 인해 약효가 더욱 약해지지만 여기서 검을 놓았다가는 바로 목이 떨어졌다.

이국의 금군이 주변을 에워싸는 중에 누군가 더 끼어들었다. 상대의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명중률은 다소 낮아도 무시무시한 속사를 자랑하는 이국의 화살이 적시에 승원을 도왔다. 처음에는 휼레가 말한 내부자인 줄 알았다.

화공(火攻) 신호가 끝끝내 오지 않고 각인증으로 인한 과도한 흥분 덕에 황제를 상대하기 버거울 무렵, 외부 군사의 도착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크게 울렸다. 물론 휼레의 신호는 전혀 없었다.

‘혹시 내부자가 발각되었나? 그렇다면 휼레는?’

마지막 믿음을 깨지 못한 승원은 얼굴도 모르는 협력자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황궁을 탈출했다. 휼레가 알려 준, 경계가 허술한 외진 방벽이 도리어 금군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부분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제가 완전히 속았음을 깨달았다.

따라가는 상대가 누군지 몰라도 일단 따라갔다. 그는 휼레가 알려 준 방향과 다른 쪽으로 향했다. 이건 또 다른 함정인가 싶었으나, 황궁 밖으로 이어진 밧줄과 그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흑마 한 쌍을 보곤 의심을 거두었다.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말에 훌쩍 탄 자는 승원이 말에 오르는 기다리면서 기수를 한 바퀴 돌렸다. 그때 승원은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너는.]

상대는 북부 산맥에서 승원과 여운을 습격하였고 그 이후로도 계속 뒤를 쫓아서 때때로 접근했다가 물러서기를 반복하던 자였다. 그때는 습격 하더니 왜 지금은 도와주는 것이지? 승원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검을 거두지 않는 걸 보면서도 태연하게 앞장섰다. 할 수만 있다면 등을 향해 검을 던지고도 남았다. 하지만 황궁 벽 위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승원은 상대를 뒤쫓았다.

‘어리석게도 완전히 속았구나.’

휼레는 처음부터 승원의 생사를 전혀 고려치 않고 오로지 제 목적만 달성하려고 했다. 이계에서 나타난 승원 일행에게 조금 잘해 주었다고 너무 믿었다. 생각해 보면 승원과 여운으로 인해 제 일족의 근거지가 발각되고 곧 몰살로 이어졌다. 그것에 대한 복수를 이렇게 한 걸지도 몰랐다.

심지어 휼레는 황제에 대해서도 속였다. 황제는 짐승이 아니었다. 살기가 너무 짙긴 해도 대담하고 날카로우며 동시에 병사를 아주 잘 지휘했다.

황제와의 대결은 겉보기엔 비겼다고 할 수 있지만, 목숨을 다해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기세에서 밀렸다. 그렇기에 승원의 패배나 마찬가지였다.

‘그자가 채운의 부군이다.’

울컥한 기분과 함께 골이 울렸다. 각인증이 한층 심해진다는 신호였다.

‘약을.’

초저녁에 이미 한 움큼 삼켰다. 하지만 당장 먹지 않으면 언제 미치광이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급하게 옷 속으로 손을 넣었다.

[어?]

가슴이 철렁함과 동시에 등골이 서늘했다. 약 주머니를 넣어 두었던 품 언저리에 휑한 바람구멍이 났다. 승원은 자신의 혼약자를 영영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제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약 주머니도 잃어버렸다.

[아뿔싸.]

황제와의 대결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있었다. 황제에게 치명타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당했다. 철저한 패배였다.

패배의 충격으로 인해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억지로 붙잡고 있던 자제력이 빠르게 사라졌다. 신체가 과민해지면서 시야가 흔들렸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달아나다가 때를 놓치고 이지(理智)를 잃고 돌아 버린 짐승이 되어 비참한 생을 이국의 객지에서 마감할지, 아니면 아직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을 때 자진(自盡)할지.

금은화는 빛이 아주 밝기에 황궁 암습에 방해가 되기에 미리 남몰래 저잣거리 돌을 하나 파내고 묻어 두었다. 생각해 보니 어차피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요량이면 그냥 몸에 지니고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할바마마께서 물려주신 금은화라도 몸에 지니고 죽어야 그 힘에 기대어 혼백이나마 고향에 계신 부황과 모후를 찾아갈 게 아닌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이국의 저잣거리에서 너무 멀리 달려와 불빛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당장 말을 타고 달아난 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고삐를 당겨 속도를 늦추었다가 이윽고 섰다. 먼저 달리던 이국의 암살자는 승원이 멈추었음을 알고 곧 되돌아왔다. 이국인이 뭐라고 말을 걸었으나, 승원은 알아들을 길이 없고 알아들었다고 한들 제 뜻을 전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곤 그를 향해 가라고 손짓했다. 창백한 낯짝을 한 이국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이국말로 뭐라고 했는데 ‘휼레, 파사’라는 단어가 드문드문 섞였다. 그러면서 앞서갔다가 돌아오길 반복했다.

“로하스. 휼레. 아가르타.”

“로하스라는 곳에 휼레와 그가 있으니 나더러 따라오라고?”

가슴을 살짝 짚었다가 상대를 가리켰다. 따라오라는 말이 맞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나타나 도와준 놈이다. 믿을 수 없다. 이러나저러나 곱게 죽긴 그른 몸, 지금에 이르러서 믿지 않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죽기 전에 채운을 만나 미안하다고 한마디라도 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좋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고삐를 잡았다. 놈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빠르게 앞서갔다. 승원은 그의 뒤를 바싹 쫓았다.

* * *

“카론!”

상황을 수습하는 중에 올리아와 그렌이 나타났다. 놀란 나머지 경칭도 생략한 올리아는 카론의 팔부터 살폈다. 뒤따라온 시종에게 치료를 위한 지시를 빠르게 읊었다.

“별거 아니야.”

“관통상이잖아. 근육이 찢어졌을 거다. 소독하고 꿰매야 해.”

호들갑 떠는 올리아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출정을 결심했다. 베로니카가 선발대를 섰고 자신은 후발대가 될 터. 후발대는 기동성보다 믿을 수 있는 화력이 우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수장인 자신이 온전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상처 치료가 급선무였다. 그편이 올리아라는 무시무시한 장애물을 빠르게 치우는 길이기도 했다.

궁에 들어가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그렌이 궁 안팎의 상황을 빠르게 보고했다.

“오래된 정원사의 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폐쇄하라고 전에 명령했을 텐데?”

“네. 당시 수색하는 과정에서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문이 있다는 기록이 없고 담쟁이 줄기와 관목이 빽빽하여 그 일대를 관리하는 자가 아니라면 존재를 몰랐을 겁니다.”

“그 말은, 거길 관리하는 놈이 반역자라는 거군.”

“네. 이미 조치해 두었습니다.”

상처를 다 꿰맨 올리아가 지독한 고약을 듬뿍 바르는 통에 카론은 어금니를 사리물고 낮은 신음성을 뱉었다. 올리아가 양모(養母)만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한 대 쳤을 것이다.

“나를 치고 싶다는 듯이 노려보는구나.”

“내 본심을 읽는 덴 여전히 선수야.”

시종장의 수발을 받아 더러워진 옷을 벗고 새 옷을 걸치는 사이 올리아는 따뜻한 물에 피로 더러워진 손을 씻었다. 부상을 입은 카론만큼이나 험악한 눈초리를 한 그는 시종이 내민 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물었다.

“마그네가 그러더구나. 황후가 아무런 저항 없이 따라갔다고.”

“힘이 약하니까. 요정의 누나는 테퍼 자식만큼 강해. 그리고 누나와 한바탕할 때 황후는 내 편을 들었다.”

“그야 그것이 제 혈육의 목숨을 보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화가 난 듯 올리아가 홱 돌아섰다. 상처를 치료하는 사이 둥둥 걷어붙였던 소매를 사납게 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황후는 너를 배신했어.”

그렌이 갑주를 가져왔다. 거드는 시종과 함께 빠르게 갑주 이음새를 잠그는 동안 카론은 분노에 휩싸인 올리아를 응시했다.

“아직은 아니야. 채운은, 황후는 내게 작별을 고하지 않았다.”

“카론!”

“올리아. 당신은 내게 분노와 힘을 가르쳤다. 그렌은 내게 이성과 판단을 가르쳤지.”

갑작스러운 얘기에 한창 갑주를 매만지던 그렌이 올리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이 나를 황제로 만들었어. 그에 감사한다.”

“폐하?”

그렌이 당혹감을 감추질 못했다.

“하지만 황제의 자리가 내 결핍된 영혼을 온전히 채우진 못했다. 남은 조각이 더 필요함을 그를 만난 후에 알았어.”

시종이 갑옷 장착을 마무리하고 검을 가져왔다. 전장을 함께 누빈 검의 익숙한 감각을 느끼면서 카론은 제 양부모를 향해 은은한 미소를 던졌다.

“황후는 내게 평안과 용서를 가르쳤다. 그것이 없다면 난 언제나 분노에 휩싸여 질주하겠지. 언젠가 힘이 빠져 고꾸라질 때까지 말이야.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무수한 피를 흘리면서. 결과적으로 위대한 황제는 될 거다. 황폐한 영혼을 가진 위대한 영웅 황제이자 저주받을 악마 말이야.”

“카론.”

어느새 올리아에게서 분노가 사라졌다.

사나운 짐승에서 상처 입은 소년이, 상처 입은 소년에서 분노한 기사로, 분노한 기사에서 비정한 정복자가 되기까지. 카론이 제 핏줄에 흐르는 어두운 기운을 떨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올리아가 가장 잘 알았다.

“그대들이 만든 나를 완성한 건 황후다.”

“……그렇구나.”

“그러니 황후의 입으로 직접 듣기 전까지 어떤 판단도 섣불리 하지 않겠다. 내게 평안과 용서를 가르친 자에 마땅한 대우다.”

시종이 망토를 가져왔다. 피에 물든 붉은 망토를 대신 받아 든 그렌이 펼치자 올리아가 다가와 망토를 갑주에 매었다.

“너의 황후에게 감사를 전해 주렴.”

“반드시 함께 돌아올 테니 직접 해.”

“그렇게 하지요, 폐하.”

자신만만한 태도에 올리아가 웃으며 답했다.

모든 준비를 끝낸 후 카론은 우선 서재로 향했다. 비밀 통로에 들어가 넣어 두었던 금색 꽃을 깨끗한 손수건으로 감싼 다음 다른 것은 부드러운 가죽으로 말아 품에 넣었다. 그럴 일은 없어야겠으나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있을 때 꽃잎이 큰 효용이 있을 터다.

철컥철컥.

갑옷이 부딪히며 고요한 복도에 황제의 육중한 존재감을 알렸다.

삼엄한 경계 속에 있는 골든 피오니는 정당한 주인을 잃은 채 그의 심복과 어린 아기만 자리를 지켰다.

“폐하.”

아기를 안고 있던 마그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는지 그는 아직 잠옷에 덧옷만 걸친 차림이었다.

건틀릿의 날카로운 부분을 조심하며 레온을 넘겨받았다. 한참 찡얼거렸는지 퉁퉁 부은 빨간 얼굴엔 눈물이 가득했다.

“내내 우셨습니다. 기저귀를 갈아도, 젖병을 물려 드려도 그치지 않으세요.”

“황후의 부재를 아는 것 같군.”

낮게 속삭이는 음성에 잔뜩 찡그렸던 아기의 눈매가 깜빡 떠졌다. 눈물이 흥건한 작은 눈동자가 카론을 신기한 듯이 관찰했다. 고운 강보를 비집고 나온 작은 손이 카론을 향하다가 이윽고 카론의 검지를 꼭 잡았다. 건틀릿으로 인해 부드러운 살점이 직접 닿을 리가 없는데도 뭉클한 온기가 전해졌다.

“레온,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마음 편히 요정을 찾으러 가지 못한다.”

“아우웅.”

말귀를 알아들은 듯이 레온이 눈을 깜빡였다.

“똑똑한 녀석.”

카론은 작은 이마에 입을 맞춘 후 레온을 마그네에게 도로 안겼다.

“어디에도 가지 말고 이곳에 있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레온과 보모인 너의 안전이 우선이다. 다른 놈 따위는 신경 쓰지 마라. 그렌이 항상 곁에 있을 거다.”

“네, 폐하.”

카론은 품에서 꽃을 꺼내 꽃잎 한 장을 뗐다. 그걸 마그네에게 주면서 꽃을 도로 품에 넣었다.

“요정의 꽃이다. 레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먹여라. 전에 내가 채운에게 먹이는 걸 보았으니 알겠지? 아기이니 반만 먹여도 되려나? 잘 모르겠다만 어쨌든 유사시에 도움이 될 거다.”

“왜 올리아 님이 아니라 제게?”

“나와 요정 외에 레온을 가장 우선하는 사람이 너다. 요정이 너를 선택했다. 그러니 나도 너를 믿는다. 마그네.”

깜짝 놀란 마그네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부디 황후 폐하와 함께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레온 님에게는 보모가 아니라 부모가 필요합니다.”

“그럴 생각이다.”

울음을 그치고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아들을 잠시 내려다본 후에 카론은 골든 피오니를 떠났다. 그렌과 올리아가 배웅을 위해 따라나섰다.

출정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대장인 아서 엘러가 기절했으므로, 황제 친위 기사단은 카론을 중심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기사가 끌고 나온 군마의 고삐를 막 쥐는 순간, 반역자 심문을 담당했던 기사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외궁 지하에 갇힌 반역자는 생살을 베고 인두로 속살을 지지는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았으나, 그의 가족과 형제가 줄줄이 잡혀 온 것을 보고 결국 입을 열었다.

“라테시나를 빠져나간 방법은 정말로 모른다고 합니다. 대신 사르프에서 접선하여 로하스로 향할 계획이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런가? 베로니카에게 사르프로 가라고 전해라. 비둘기보다 매가 빠르다.”

“예, 폐하. 반역자는 즉시 처형할까요?”

벌써 흥흥 콧바람을 불며 흥분한 군마의 굵은 목을 툭툭 치면서 진정시킨 카론은 갑옷을 입고도 도움 없이 말 위에 훌쩍 뛰어올랐다. 자리를 한 바퀴 돌며 서성대던 군마가 서자, 대기하던 다른 기사가 투구를 건넸다. 투구를 쓰는 대신 일단 안장 걸이에 건 카론은 명령을 기다리는 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예전이었다면 반역자는 물론이고 그의 혈육과 지인 모두를 참수하라고 명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채운이 그것을 알면 어떻게 할까? 분명히 무고한 자까지 죽였다며 끔찍하게 여길 터.

“모두 계속 수감한다. 반역자는 추후 재판에 넘길 테니 상처를 치료하도록.”

“알겠습니다.”

말 위에 올라타니 부상자를 치료하는 자들과 사망자를 수습하는 자들이 보였다. 인명 피해는 열둘 남짓이었다.

곰 같은 놈과 테퍼에 당한 자들을 보자 카론은 그들이 무능력해서 뒈졌다는 짜증과 분노 대신 다른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더 발전할 수도 있는데 벌써 사망하여 꽤 아까웠다. 수하의 죽음에 이런 기분을 느끼긴 처음이었다.

“사망자의 장례는 정중히 치르고, 그 가족이 있으면 넉넉하게 보상하라. 황제의 이름으로 위로 편지를 보내도록. 멍청한 아서가 깨어나면 내 명을 전해.”

“예? 예.”

그렌이 반문했다가 얼른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죽은 자들에 관심을 보인 적은 처음이라 여러모로 당황한 눈치였다.

“가자.”

“당신께 신의 가호를, 폐하.”

올리아가 무운을 빔과 동시에 카론은 군마의 살찐 옆구리를 찼다.

히힝!

앞발을 치켜들며 크게 운 군마는 쏜살같이 밤을 갈랐다. 그 뒤를 따라 친위 기사단이 깃발을 세우고 따라왔다. 목적지는 사르프. 거기에 요정이, 채운이 있다.

* * *

어제 낮부터 내내 정신이 없었다. 누님을 만나 눈물 바람으로 기뻐하기도 잠시, 황궁을 무단으로 나와 반역 세력의 도움을 받아 도망치는 바람에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으니 졸음이 솔솔 쏟아졌다.

‘졸면 안 돼. 이런 상황에 어찌 잔단 말이냐. 이 곤란한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모색해야 해.’

두 사람을 말리는 것으로도 진이 쏙 빠졌다. 거기서 버티면 누님이 카론을 기어이 죽일지도 몰랐다. 아니 제가 사정사정하여 죽이지는 않더라도 어디 한 군데 불구로 만들었을 것은 분명했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는 일단 성난 누님부터 진정하도록 해야 했다. 버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 일단 누님이 하자는 대로 따라나섰다. 일단 둘의 거리가 벌어진 후에 누님을 설득시켜 보려 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 일을 어쩌면 좋지.’

깊은 걱정이 졸음을 몰아냈다.

누님과 함께 왔다는 자가 황궁을 습격하고 살수를 썼다. 얼핏 보기에 죽은 자도 있었다. 가슴이 써늘했다. 누님의 수하가 그리했으니, 결국 누님은 라테시온에 큰 죄를 저질렀다. 황후의 혈육이라 쉽게 넘어갈 사안이 아니게 되었다.

‘카론은 너그럽지만, 황제는 그렇지 못한데.’

두 사람이 황제의 침실에서 벌인 일이야 얼마든지 없는 것으로 할 수 있으나 황궁 습격은 공개적이며 동시에 피해자도 있었다. 제국과 황제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카론은 누님을 잡아 크게 벌해야 했다.

아우를 찾겠다는, 또 아우가 받은 핍박에 대한 울분 같은 도의적인 명분이 있다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누님과 그 수하가 더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했다.

‘거기까지면 어떻게든 빌어서 가벼운 처벌을 청할 수도 있지만.’

누님의 은인이 파사 일족이라니. 처음부터 황제가 멸족을 결심한 자들과 결탁하였으니, 가벼운 처벌을 설득한 명분을 얻기는 어려움이 더욱 커졌다.

더불어 휼레는 제 정체를 드러냈다. 사생결단을 낼 각오가 아니면 채운 앞에서 제가 황제를 철천지원수라고 이를 까닭이 없었다.

라테시온 세상에서 카론과 누님이 양립할 수가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채운이 가장 원치 않은 방향이었다.

‘왜 하필 상자를 꺼내 놓았담. 내 잘못이야. 그것을 누님이 보게 해서는 안 되는데. 아니 카론을 용서한 날에 불태웠어야 하는데.’

후회하고 자책해도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이젠 그 수밖에 없다.’

누님을 곱게 따라 누님과 수하가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수밖에.

두 사람이 고향으로 떠난다면 더는 다치는 사람 없이 무마시킬 수 있다. 파사 일족에 관해서는 다른 처분이 기다리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후의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카론이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자신은 카론을 용서하고 그를 품기로 마음을 먹었다. 타인의 고통을 모르쇠 하는, 부덕하고 악독한 황후라 손가락질하더라도 상관없었다.

‘핍박당한 자의 피맺힌 원한보다 악한의 안위가 더욱 염려스러우니…….’

악한 황제에게 딱 어울리는 황후가 아닌가.

파사 일족보다 시급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채운은 고향에 가고 싶었다. 아버님, 어머님들, 형님들이 보고 싶었다. 너무나도 그립고 그리웠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아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님이 고향으로 가는 문을 열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고향으로 갈 것인가? 그랬다가 다시 영영 못 오면 어떻게 하고.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길 앞에서 돌아설 용기가 있는가? 그립고 그리운 부모 형제를 이젠 영영 떠나보낼 수 있을까.

한번 포기했다가 기적처럼 희망이 생기니 두 번 포기하기는 어려웠다. 누님을 따라 어영부영 온 이유도 못내 떨치지 못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큰 몫을 했다.

온이를 두고 갈 수 있는가. 죽으려던 결심을 되돌리게 한 그 작고 귀한 아이를 영영 안 볼 수가 있는가.

‘어찌…… 어찌 그런 모진 결심을 할 수 있어. 나는 못 해. 못한다고.’

그에 생각이 이르자 절로 눈물이 흘렀다. 더러운 짐승의 혈육 따윈 잊으라고 호통하던 누님이 떠올랐다. 지금도 저를 소중히 감싸고 있는 누님이 너무나도 원망스럽던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누님을 실망하게 해서 죄책감이 들었다.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누가 대신 용단을 내려 주면 얼마나 좋을까.

이윽고 다정해진 카론과 사랑스러운 온, 그리고 다시 만난 누님과 행복한 한때를 꿈꾸었을 뿐인데. 그것이 저에게는 정녕 감히 품지도 못할 죄였던가.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사르프라는 항구에 있는 낡은 주막이었다. 정문 대신에 퀴퀴한 술 냄새와 토사물 냄새가 짙게 밴 옆 골목으로 들어서서 작은 덧문을 지나자 토굴 같은 지하 통로가 나왔다.

죽은 날벌레가 덕지덕지 붙은 거미줄을 피해서 통로 끝에 닿자 다시 낡은 문이 나왔다. 그 안은 주점과는 영 판 다른, 깨끗한 창고였다. 옷감이 가득한 창고의 문이 마침 열려서 밖에 보였다.

“새로 들어온 옷감이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매대 이쪽에서 손님을 응대하던 포목점 주인장은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 창고 문가에 있는 옷감을 하나 집어 들고는 자연스럽게 창고 문을 꽉 닫았다. 세 사람의 기척을 분명히 알았을 텐데. 휼레와 말이 통한 자 같았다.

창고 끝에는 옷감이 잔뜩 쌓인 상자 더미가 있었는데 그것을 당기자 놀랍게도 스르륵 움직였다. 사다리가 이어진 구덩이가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 이번에는 한 치 앞도 안 보여 돌벽을 짚고 더듬더듬 앞으로 나갔다. 얼마나 긴 굴인지 위로 이어지는 기척이 달랐다. 집 여러 채를 지난 듯했다.

막다른 곳까지 갈 줄 알았는데, 휼레는 이상하게도 도중에 멈췄다. 뒤따르던 채운과 여운이 잇달아 서로 부딪쳤다.

쿵쿵.

벽을 두드리자 놀랍게도 벽이 안으로 열렸다. 그 안은 식료품 창고였다. 세 사람이 들어서자 안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열린 돌벽을 밀어 닫고 떼어놓았던 나무 벽을 도로 끼웠다. 그랬더니 아주 감쪽같았다.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제복은 입은 남자였는데, 생김새는 달라도 풍기는 분위기가 어쩐지 그렌 같았다. 그는 모른 척하던 다른 자들과 달리 휼레에게 고개를 숙였다.

“특별한 문제는 없나?”

“네, 없습니다. 주인님.”

휼레와 남자를 따라 식료품 창고를 나와 비좁은 계단을 오르자 밝은 공간이 나왔다. 흰 돌로 장식한 아름다운 공간은 꼭 작은 궁전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는 채운과 여운을 향해 휼레가 말했다.

“여긴 내 집입니다. 여기서 일행을 기다립니다.”

직후 그는 제복을 입은 하인에게 명했다.

“이쪽은 먼 곳에서 오신 내 비밀 손님이다. 정중히 잘 모셔라.”

“네, 주인님. 쉬실 방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휼레가 다른 쪽으로 사라진 후에 하인은 채운과 여운을 다른 쪽으로 이끌었다.

[뭐라는 거냐?]

[여긴 사르프라는 항구에 있는 휼레의 집이라고 합니다. 이 남자는 하인이고, 저희에게 방을 안내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를 뭐라고 하든?]

[먼 곳에서 온 비밀 손님이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누구인지 전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휼레의 원한을 안 이후로 여운은 영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의 소굴이 아늑한 도피처일지, 혹은 짐승의 아가리일지. 아직은 판단할 수 없었다.

‘저놈이 채운과 나를 곱게 놓아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이 과연 있을까.’

다른 방을 준다기에 여운은 일단 채운과 한방으로 들어섰다. 깨끗한 물과 갈아입을 옷, 그리고 음식을 받았다. 씻고 먹고 난 후 지친 채운에게 먼저 눈을 좀 붙이라고 권하면서 여운은 내내 방 안팎을 살폈다.

방은 3층이었다. 지하만큼은 아니라도 높은 층은 밖으로 오가기 대단히 불편하여 사람을 가두는 데 용이했다. 일부러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손님 방이 위에 있어서 그런 것일까. 주인 방이 2층에 있고 거기에도 분명히 방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전자에 무게가 실렸다.

한쪽 벽에만 난 창문은 잘 열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황궁과 달리 넓은 정원 대신에 손바닥만 한 작은 화단이 전부였고 밖으로 사람이 오가는 훤한 대로가 바로 나왔다. 사람이 없을 늦은 새벽을 노려 천을 엮어 탈출을 감행해도 아래로 창문이 줄줄이 이어져 들키기 쉬운 구조였다.

방 밖은 긴 복도였다. 황궁 복도와 유사했는데 규모와 장식은 당연히 황궁에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히 간소하였다.

긴 복도식이 이곳 저택의 기본 형태라면, 아마 중앙으로 가면 정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고 거긴 분명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을 터.

식료품 창고에서 올라올 때 이용한 통로는 허름하고 좁은 것으로 보아 하인들이 사용하는 것이고, 그것은 분명 어딘가 뒷문으로 이어질 터. 그러나 주인의 비밀스러운 손님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응대하는 하인의 태도로 보아 그들은 휼레의 충성스러운 심복이 분명했다. 가벼운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상대가 아닐 터.

‘2층이나 1층 어딘가를 구경하는 척하면서 그쪽 창문으로 탈출해야 하나? 채운은 2층이 쉽지 않을 테니. 1층이어야 할 텐데.’

사람이 닿지 않는 탈출로를 알아보며 동시에 휼레가 가진 원판을 확보해야 했다. 그리고 금은화도. 금은화는 태자 승원이 지니고 있다. 승원을 만난다면야 빼앗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문제는 채운에게 승원이 함께 이곳에 있음을 들키지 않고 그러기란 매우 힘들었다.

‘언젠가는 알 일인데.’

황궁을 습격한 자는 분명히 승원이었다. 성동격서 전법으로, 승원이 황궁을 들쑤셔서 황제와 군사의 이목을 끄는 사이 휼레가 몰래 여운과 채운을 찾으려고 했을 터.

삼엄한 경계를 겹겹이 두른 황궁에 몰래 잠입한 건 휼레가 진작에 황궁에 사람을 심어 놓았다는 뜻이다. 지금쯤 황제도 그것을 분명히 파악하고 뒤를 쫓고 있을 테고. 강을 따라 나룻배를 타고 왔으니 어쩌면 말을 달린 황제가 더 빠를 수도 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나룻배를 탈 때 휼레는 두 사람의 대역을 준비했다. 하나는 본인일 테고 다른 하나는 여운이 황궁에 갑자기 들어갈지 몰랐다고 치고 그것이 채운을 위함이라 하면?

[그럼 태자 전하는?]

휼레는 처음부터 승원을 버릴 셈이었나? 아니면 다른 탈출로를 생각해 두었나? 각개로 흩어지는 방법이 가장 좋은 계책이긴 한데. 중무장한 군사가 즐비한 제도(帝都)를 빠져나갈 방법이 둘이나 있다고?

[아니. 같은 길을 택했지만, 중간에 분홍이만 따로 빼돌릴 생각이었나?]

휼레가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여운과 채운보다는 일족의 안녕과 황제에 대한 복수가 우선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태자와도 척을 지는 일은 옳지 않다. 일단은 같이 힘을 합쳐 휼레의 원판을 확보한 뒤에 이 세상을 뜨는 편이 좋다.

[누님?]

방을 서성이며 골몰하는 사이 채운이 일어났다.

[더 자거라.]

[아닙니다. 이제 누님도 쉬셔야지요.]

[나는 괜찮다. 전장에서야 삼 일간 잠을 못 자도 대수도 아니었다.]

잠시 덜 깨 아직 뺨이 불그스름한 동생을 보고 여운은 예전에 그랬듯이 자연스레 품에 안고 얼렀다. 그러자 채운은 민망한 듯이 몸을 슬쩍 돌려 품에서 벗어났다. 못내 서운한 여운을 보며 채운은 멋쩍게 웃었다.

[부군을 맞아 아이까지 생겼는데, 누님께 어리광을 부릴 수야 없지요.]

누님이 서운한 기운을 더 하기 전에 채운은 빠르게 덧붙였다.

[잊으라 하셨지만……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아니, 아니하려고 합니다.]

시울이 붉은 눈을 똑바로 뜨고 여운을 바라보는 이는 이제 아기가 아니었다.

[분홍아.]

[언제고 어린 분홍이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자못 꾸며낸 듯 과하게 방긋한 웃음엔 애수가 가득했다. 시작은 참혹하여도 결국은 스스로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불귀의 객이 되고도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셈이냐?]

여운은 낯선 표정을 지은 동생을 붙잡았다.

[어머님들과 아버지가 기다리신다. 오라버니들도 너를 기다려.]

[압니다. 알아요. 저도 고향이 그립습니다. 부모님들이 보고 싶어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니?]

꼭 다그침 같았다. 채운은 팔을 꼭 붙잡은 누이의 손을 슬며시 잡아 내렸다.

[꼭 양자택일해야 합니까?]

[뭐?]

[이곳으로 오는 길을 아시지요? 그리고 다시 돌아갈 길도 있지요? 그런데 왜 한번 돌아가면 다시는 오지 못하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하세요?]

[영영 잃어버렸던 동생이 끝에 돌아왔는데 도로 머나먼 오랑캐 나라에 보내라고? 혈육의, 살붙이의 정이 있는 곳에서 같이 살아야지, 분홍아.]

[저는 여기에도 살붙이와 혈육이 있습니다.]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냐? 귀하디귀한 너를 짐승처럼 때리고 겁간했다. 그런 놈을 어찌 살붙이라 이르느냐?]

카론이 저지른 죄는 누구보다 채운이 더 잘 알았다. 서슬 퍼런 눈을 마주할 때면 가끔 이유 없이 철렁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살붙이가 아닌 건 아니지 않나. 지난 일을 봉합하고 잘 살아 보겠노라고, 스스로 마음을 먹었으니.

[제가 그리 정했습니다.]

[전에 말하지 않았니, 그건 아무런 도리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야. 고향에 가면 마음이 바뀔 거다.]

[고향에 가면요?]

[그래. 틀림없이 여기 일은 다 잊을 수 있어.]

굳건한 약속에 채운은 그만 웃고 말았다. 눈을 접어 고이 웃는 낯을 마주한 대장군은 반대로 낯을 찌푸렸다. 웃는 연유를 모르는 탓이었다.

[고향에 가면, 참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살 수 있습니까?]

[물론이다.]

[이런 몸으로?]

[네 몸이 어디가 어때서?]

고개를 들어 누이의 시선을 마주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무찌르며 나아가는 대장군의 맹렬한 눈빛이 참으로 순수했다. 저도 한때는 저런…… 어떤 어려움을 모르는 무구한 눈빛을 한 적이 있었는데.

[태손 마마는, 그분은 아직도 홀몸이십니까?]

[뭐?]

채운의 어조는 내내 조용했다. 그런데도 여운은 꽁지에 불이 붙은 고양이처럼 제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눈이 크게 벌어지고 동자를 잠시 떨다가 갑자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흠흠 음성을 골랐다.

[태손…… 아니 이제는 태자지. 어, 태자 전하가 되셨다. 아직…….]

잠시 뜸을 들이던 여운은 고개를 번뜩 들고 눈에 힘을 주었다.

[태자는 아직 너를 잊지 않았어. 너를 기다리고 있다. 비록 과거사가 있다고 해도…… 너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크니, 크게 문제없을 것이야. 아무렴 보통 마음가짐이면 예까지…….]

말을 하다가 만 여운은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순간 채운은 누이가 뭔가 숨기는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떨림이 등줄기를 스쳤다.

[누님, 같이 온 분이 있다고 하셨지요. 누구입니까?]

[아? 그…… 그게.]

관자놀이가 뻣뻣해지고 뒤통수가 징 울렸다. 벌어진 입으로 들어온 바람이 입 안을 삽시간에 말렸다. 방금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던 목구멍 언저리에 거친 모래가 낀 것 같았다.

[설마…… 그분은…… 태손 마마는 아니겠지요?]

시선을 여운은 차마 말로는 답하지 못하고 대신 고개를 끄떡였다.

[누님…… 그걸…… 왜 이제 말…… 씀하십…… 니까?]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가 간신히 목청을 억눌렀다. 여운의 안색이 급격히 흐려졌다.

[네…… 네가 곤란할까 봐서…… 그, 오랑캐 놈이랑 다정하게 지내는 줄 알고 제때 말하지 못했다.]

[아니, 그래도 어찌 그런 것을 숨기다니요. 그리고 오랑캐 놈과 다정하게 지내는 줄 알고 태손 마마가 함께 오신 걸 숨기셨으면서 왜 또 살붙이와 피붙이를 버리라고 그러시다니.]

억누른 목청으로 우다다 쏟아붓는 중에도 어금니가 맷돌처럼 빠득빠득 갈렸다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불길 어린 한숨을 연거푸 토했다.

채운의 진노에 기가 눌린 대장군이 찔끔했다.

[그놈이 너를 그렇게 한 줄 몰라서 그랬지. 그런 개종자 놈임을 알았으면 널 보자마자 바로 태자를 만나러 갔을 거야.]

[누…… 님]

이렇게 노여운 적은 오랜만이었다. 아니, 평생을 함께 보낼 반려를 이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휙휙 바꿀 수가 있는가. 아니 그전에 제 의사는 어디에 있는가.

카론이 개종자면 어떻고 태자가 아직 저를 잊지 않았으면 또 어쩌라고. 이러면 이러고 저러면 저런 것이 언뜻 사리에 맞아 보이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채운의 의사는 요만큼도 따지지 않고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혈육이면 그리해도 되나? 경애로 맺어진 사이면 의사를 함부로 무시해도 되냔 말이다.

라테시온 세상에 오기 전이라면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숙하여 부모님이 정해 주신 혼사에 따라 태손비가 되어 잘 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 터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세상에 누가 정해진 길이란 없다. 그저 내가 원하는 길만 있을 뿐. 그걸 누구도 아닌 카론이 알려 주었다. 못나고 흉악한 오랑캐 종자가, 제게 살아감이 어떤 건지를 가르쳤다.

카론이 제멋대로 굴 때와 같았다. 찬찬히 물어보는 일 없이 제멋대로 넘겨짚는 행동에 신물이 났다. 절대로 묵과할 수 없다. 사랑해 마지않는 누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누님 마음대로 누가 그렇게 여기라고 했습니까? 제 인생입니다. 제 삶입니다. 누님이 그립고 그리운 혈육이고 보고 싶어 눈물을 지을 만큼 깊이 사랑하지만.]

열불이 치솟으며 눈가가 뻘겋게 타올랐다. 가슴이 가마솥처럼 펄펄 끓었다. 굴뚝처럼 이어진 기도에서 뜨거운 입김이 연신 샜다. 찔끔한 여운은 그런 채운의 눈치를 보며 주춤했다. 벌어진 간격보다 더 바싹 다가간 채운은 얼어붙은 대장군을 매섭게 꾸짖었다.

[누구도 제 의사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식으로 살아갈 겁니다. 카론도, 온도, 누님도. 하물며 부모님도. 제게 이러쿵저러쿵하지 못합니다. 이는 깊은 경애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시겠어요?]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가족을 걱정시키는 건 좀…….]

[누님도 후방의 장수가 되라는 부모님의 뜻을 꺾고 북방 대장군이 되지 않았습니까? 친어머니신 큰엄마, 제 조카처럼 누님을 아끼는 엄마, 하물며 재상이신 아버님마저 누님이 불귀의 객이 될까 봐서 날마다 밤잠을 설치는 걸 알면서도 그리하셨지요?]

[나…… 나는 양인이고 또 무예가 성미에 맞아서…….]

[그럼 음인인 저는 날 때부터 황가에 시집가 애나 낳으라고 태어난 겁니까?]

신국에 있을 때 평생토록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 더는 당연하지 않았다. 카론과 화해를 하기 전, 새끼치기에만 몰두하는 개종자라고 여겼을 때 채운은 온전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다.

[그런 뜻은 아니다.]

[참으로 아니겠습니다. 여기 황제가 오랑캐 놈인 걸 알자마자 태자비로 팔아치우려고 했으면서.]

여운이 황급히 도리질 쳤다.

[팔아치우다니? 아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이 누이는 너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저…….]

[듣기 싫습니다. 또 큰형님은 어떠하십니까? 집안 어르신들이 그렇게 후사를 원하시는데 아직 마음이 가는 정인이 없다고 차일피일 미루셔서 결국 제 혼사가 먼저 이뤄질 참이었지요. 어르신들이 봐주신 혼처에 장가드셨답니까? 장손은 보셨답니까?]

[그게…… 아직…… 큰오라비는 영 숙맥인 걸 너도 알잖니.]

[작은형님은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들은 척도 않고 온 도성을 들쑤시며 한량 노릇을 하신다는 큰엄마의 한탄을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어졌는데. 지금쯤 정신 차리시고 말석 관직이라도 얻으셨습니까?]

[어…… 음…… 작은 오라비는 알다시피 공부 머리가 영 꽝이라.]

왜 음인인 채운만 혼처를 그렇게 따지는가. 지금 따져 보니 여러 가지가 불합리했다. 음인이 양인과 뭐가 그리 다르기에. 그냥 애를 낳을 능력이 있다는 외에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데. 사람으로서 응당 지녀야 한다고 가르치는 입신양명의 소망을 음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처음부터 거세하는가.

[다들 제 하고픈 대로 살고 제 뜻을 관철하는데, 왜 저는 부모님 뜻을 따르고 누님의 뜻을 우선해야 합니까? 음인이라 그런 겁니까? 음인은 그저 정해 준 대로만 살아야 합니까? 누가 부군이 될지 제 뜻 하나 펴지 못하고 아무에게나 다리 벌리고 애나 낳으면서?]

꼭지가 돌자 막말이 마구 튀어나왔다. 여운의 낯짝이 허옇게 질렸다가 도로 붉어졌다. 대장군도 열이 올랐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 그게 어떻게 다른 세상에 불쑥 떨어져 개만도 못한 악독한 오랑캐 종자 놈에게 핍박을 당한 일과 비교된단 말이냐? 아무에게나 그…… 그러다니! 황손이야. 장차 황제가 될 몸이란 말이다. 그보다 나은 혼처가 어디 있느냐?]

[혼처. 혼처. 망할 놈의 혼처.]

채운은 저도 모르게 카론처럼 으르렁거리고 말았다. 보고 들었더니 어느새 물든 모양이었다. 순하디순한 아기 동생에게서 이렇게 거친 언행을 보리라 기대치 못한 대장군의 낯이 도로 질리기 시작했다. 입도 쩍 벌어졌다.

[그리고 장차요? 카론은 벌써 황제입니다. 그것도 탯줄 잘 타고나서 거저 받은 황위가 아니라 직접 대륙을 일통(一統)한 시황제란 말입니다.]

[그놈은 인간이 아니잖아.]

[뭐 태손 저하는 인간이 되셔서 성혼을 얼마 앞둔 날에 저를 겁탈하려 들었단 말입니까?]

아픈 핵심을 찔렀다. 여운은 입을 벙끗하였으나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막돼먹은 오랑캐 놈이 제게 무슨 짓을 했든, 제가 이제 괜찮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 뜻이 그러합니다, 제 뜻이. 다들 제 뜻대로 제 삶을 살면서 왜 저는 정해진 대로 가라고 강요하십니까? 왜?]

주먹을 꽉 쥐었다. 상대가 카론이면 달려들어 마구 주먹질을 하거나 하다못해 낯짝에 작은 생채기라도 냈을 텐데. 누님이라 그러지도 못하니 속만 더욱 터졌다.

[저도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의사 없는 인형처럼 다른 이의 뜻에 따르지 않을 거라고요!]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 생각했다. 흥분을 낮추거라. 여긴 위험해.]

종국에 여운이 뜻을 꺾었다. 채운은 심호흡을 거듭 내쉬었다.

[당장 긴 말을 하긴 상황이 어려우니 나중에 따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 그게 좋겠다.]

채운은 제가 알고 있는 바를 여운에게 털어놓았다.

[휼레라는 자는 황제의 원수 됩니다. 아까 듣기로 누이가 황제 손에 죽었는데, 그 누이가 마침 황제의 아이를 가진 상태라고 합니다.]

[그 황제가 그놈이냐?]

[예.]

담담하게 답하자 여운이 다시 입을 쩍 벌렸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런 흉악한 놈에게 어찌 너를!]

[누님. 휼레는 카론의 원수입니다. 그가 한 말을 전부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놈의 흉악한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너도 마음 한편으로 의심이 드니 표정이 그런 게지. 아니냐?]

역시나 여운은 채운의 속내를 쉬이 파악했다.

[예. 흉악합니다. 개종자입니다. 길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으라고 수도 없이 빌고 또 빌었습니다. 달려들어 때리기도 했습니다. 개종자 놈에게 욕을 보이느니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겼습니다.]

담담하게 이어 가자 여운이 입을 다물었다.

[대범하지 못하고 비겁한 탓인지, 아니면 천운이 그런지 죽는 일도 줄줄이 실패했습니다. 어쩌다가 보니 살아지더군요. 미웠던 아기도 막상 낳고 보니 예쁘고 아기가 예쁘니 그럭저럭 살아지더이다. 살다 보니 허한 마음을 기댈 곳이 필요했습니다. 점점 변하는 개종자가 오랑캐 황제가 되고 오랑캐 황제가 미운 부군이 되고 미운 부군이 이제 다정한 정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분홍아.]

[저를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이제 누님의 분홍이가 될 수 없습니다.]

눈가가 뜨거웠다. 그렁그렁한 시야 사이로 멍하게 선 누님이 흔들렸다.

[분홍이가 아니면…… 채운으로 살기도 싫으냐? 고향으로…… 명가로 돌아가기 싫어?]

[그리 잔인한 질문을 하셔야 합니까?]

채운은 서글프게 되물었다. 여운은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여운의 물음은 언젠가 맞닥뜨려야 했다. 그때가 되어서 어떤 결정을 할지 지금은 전혀 모른다. 고향도, 그리고 카론과 온도 놓칠 수 없다. 어느 한쪽을 놓아도 평생을 회한에 차서 눈물과 고통으로 밤을 지새울 터.

상상만으로 심장이 얼어붙는 슬픈 일은 할 수 있는 한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다. 이 망설임과 욕심이 나중에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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