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평생 보지 못하리라 여겼던 혈육을 놓칠세라 얼싸안았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도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구멍에 울음이 꽉 차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저 눈물이 흥건한 채로 서로의 얼굴을 보다가 픽 웃다가 다시 부둥켜안았다.
떨리는 숨을 먼저 진정한 사람은 여운이었다.
[여기 네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리저리 살펴보는 중이었는데…… 어찌 이런 차림으로 밖을. 아니다. 아니다. 그 덕에 너를 이렇게 만났네.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다.]
등을 꼭 안아 문지르는 손길에선 안도감이 묻어났다. 채운은 누이를 꼭 붙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둘이 키가 엇비슷하기에 여운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누님은……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여기까지?]
[여러모로 도와준 분이 계셨어. 덕택에 금은화로 우물 문을 열고 너처럼 용을 탔지.]
용이란 말에 울다가 다시 픽 웃음이 터졌다. 꽉 껴안았던 팔을 푼 여운은 채운을 위아래로 다시 훑었다. 그러면서도 두 손으로는 동생의 팔을 꼭 잡고 놓질 않았다.
[아니 너는…… 옷차림은 그렇다고 쳐도 머리는 왜 이러느냐? 이게 무슨. 가엽게. 부모님이 우실 거다.]
[부모님…… 형님들은 다 잘 계시지요?]
[네가 없는데 잘 있겠어? 죽지 못해 산다.]
[흐으으윽.]
설움과 미안함, 그리움에 다시 눈가에 홍수가 번졌다.
[우리 분홍이를 이제 찾았으니 괜찮다. 다…… 괜찮다.]
여운은 눈물이 그득한 아우의 얼굴을 꼭 감쌌다. 똑같이 젖은 입술로 동생의 떨리는 뺨에 입을 쪽 맞추었다.
[여긴 말도 안 통하는 곳이더구나. 머나먼 이계 땅인데. 너야말로 고생이 많지 않았니?]
[할 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무렴. 듣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산더미 같아.]
열흘 밤을 지새워도 가슴에 담은 말을 다 쏟아내지 못하리라. 그저 눈물만 흘렀다. 차마 입을 열 엄두가 나지 않아 채운은 말없이 도로 여운 꼭 안았다.
[참, 같이 온 사람이 있다. 너를 보면 반가워할 거다. 얼른 돌아가야지.]
여운이 손을 잡고 이끌었다. 돌아가자는 말에 당연히 그러고 싶었고 두어 발짝 따라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응?]
그 바람에 손을 놓친 여운이 황급히 다가와 다시 손을 꽉 잡았다.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아까 넘어지느라 손발에 묻은 흙먼지를 뒤늦게 알아차린 여운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몸을 굽혔다. 한 손으로는 동생을 꼭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무릎을 살살 털었다.
[호 해 줄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안 아픕니다. 하나도 안 아파요.]
[그래? 그럼 됐다. 얼른 집에 가자.]
집.
짧은 낱말이 가슴에 큰 동심원을 그렸다. 보고 싶은 부모님과 형님들이 계신 곳. 싱그러운 산천에 무수한 새가 지저귀는 곳. 사시사철 꽃이 피고 지는, 아름다운 고향.
하지만 집은 그뿐이 아니었다. 시선을 조금 들면 멀리 태양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궁궐이 보였다. 참혹한 기억을 묻은 자리 위에 파란 싹이 돋아나는, 그 집에는 깊은 인연으로 이어진 사람이 있다.
레온, 그리고 카론.
별안간 큰 걱정이 들었다.
‘분명히 찾고 있을 텐데.’
일전에 잠시 사라졌다고 황궁을 발칵 뒤집은 것으로 모자라 사냥터까지 사람을 풀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황궁 밖일뿐더러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갑자기 대로 속으로 사라졌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아니 걱정도 걱정이겠지만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더 우려스러웠다. 지금 이럴 게 아니었다. 일단 돌아가야 한다.
[잠시만요. 누님. 기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일단 제가 사는…… 음…… 집으로 가요.]
[네가 사는 집?]
황궁이라 이르긴 아직 쑥스러웠다.
[예. 가까이에 있어요. 먼 곳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어요? 가서 음식도 드시고 잠도 주무시고…… 그리고 저랑 같이 사는 사람도 보시고…….]
반가움에 온몸이 떨리는 중에도 새삼 그를 소개하기가 부끄러웠다. 황제라 불쑥 말을 꺼내기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와 이미 혼인을 올렸고 사이에 자식도 있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어딘가 자리에 앉아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꺼내고 싶었다.
휑한 길바닥에서 말하기엔 너무 떨리는 한편, 누님 또한 이제 고모님이 되셨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놀랄까 생각하면 아무래도 푹신한 의자가 있는 곳이 좋을 성싶었다.
[같이 사는 사람?]
[예. 그렇게 되었어요.]
역시나 여운은 같이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더욱 놀랄 텐데. 귀띔이라도 할까 싶었다.
[그……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정답게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괜히 우물쭈물하였다. 아니,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아닌가?
뒤늦게 고향 땅을 떠나던 당시 태손 마마와 성혼을 약속한 상태였음이 떠올랐다. 일부러 원하여 그런 바는 아니지만, 정절을 지키지 못하고 오랑캐 우두머리와 배를 맞추고 자식까지 보았다. 그리곤 돌아갈 생각을 깜빡하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고 있음이 어떻게 죄가 되지 않을까.
라테시온에 너무 물든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라테시온에서는 황후일지라도 신국에서는 막심한 불효를 저지른 죄인이자, 나라에 불충죄를 지었으며 지아비에 대한 정절을 저버린 변절자였다.
익히 잘 알았고 목을 매달 결심을 하고 실지로 행한 지 고작 이 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죄를 까맣게 잊고 벌써 정다운 사람이 있다는 말이 먼저 나오다니. 제가 미쳐도 한참 미쳤다.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이런 죄인을 찾아 머나먼 이역만리까지 온 누님에게 너무나도 죄송스러웠다. 미안함에 눈물이 다시 솟으려 들었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 말이냐? 라테시온이라 이른다지?]
깜짝 놀라 고개를 번뜩 들었다. 입과 눈이 휘둥그레 벌어졌다.
[누님이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쓴웃음을 지은 여운은 걸친 옷을 살짝 집었다.
[이국땅에서 낯선 남장을 하고 너를 찾기까지…… 보고 들은 바가 제법 있어.]
[아.]
당연히 그럴 터. 누님이 어떻게 이곳에 오신지도 궁금했다. 영영 오신 건지. 아니다. 집으로 가자 하였으니, 돌아갈 방도가 있다는 걸까?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얼른 제집으로 가셔요.]
[어…… 음.]
이번에는 채운이 먼저 여운을 잡아끌었다. 손을 꼭 마주 잡은 여운은 막 따라나서려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같이 온 사람이 있는데…….]
[그럼 그분도 함께 모시겠습니다. 카론에게 이르면 금방 찾아 줄 겁니다.]
[카…… 론?]
놀란 물음에 채운은 처음에 뭐가 잘못된 줄 몰랐다. 낯선 이국인을 너무 정답게 불러서 못 알아들은 줄 알았다.
[그 같이 사는 라테시온이라는 왕이, 아니 황제의 이름이 카론입니다. 저와 함께 저잣거리에 나와 있어서…… 아마 저를 찾고 있을 겁니다.]
[이름은 안다. 그런데 황제 이름을 막 불러도 돼?]
듣는 사람도 없는데 여운은 주변의 이목을 살폈다. 불경한 죄를 지은 사람의 언행이라 그제야 채운은 이국 천자의 이름을 옆집 똥개 부르듯 막 부른 것이 문제임을 깨달았다. 신국에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법도였다.
[아…… 그 사람이 그러라 하였습니다.]
[정말로 정답게 지내는구나.]
[……예. 처음엔 참 못난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제게 잘해 줍니다.]
누님의 경탄에 부끄러움이 일었다. 홧홧한 열기가 방울진 눈물을 밀어냈다. 처음에는 꺼내기 어려운 말이라 여겼는데 한번 꺼내니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는지 더 고민이었다. 이대로 시작했다가는 여기서 밤을 지새울 수도 있었다.
[길바닥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사람은 나중에 찾고.]
[그러자.]
누님의 손을 꼭 잡고 우선 찻집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누님을 연신 돌아보며 골목 어귀에 막 이르렀을 때, 갑자기 그림자가 졌다.
철커덕. 철커덕.
이국식 은색 갑옷을 걸치고 검과 창을 든 자들이 골목을 막아섰다. 동시에 여운이 손목을 잡아당겨 채운을 등 뒤로 숨겼다. 즉시 반대쪽 어귀도 확인했는데, 역시나 그쪽도 길이 가로막혔다.
철컥. 철컥.
놈들은 틈새까지 꽉 막으며 전진했다.
스릉.
여운에 목 뒤에서 검을 뽑았다. 들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등 쪽에 숨겨 지닌 것을 뒤늦게 알았다. 익숙한 신국식 검을 보자마자 채운은 반가움과 동시에 기겁했다.
[누님!]
스르릉. 철컥.
누님이 검을 뽑자마자 기사도 일제히 검을 뽑고 창을 기울였다. 자칫 큰일이 벌어질 찰나였다. 누님에게 칼과 창을 겨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라테시온의 황후 아가르타다. 검을 내려라.”
저를 뒤로 밀어내려는 여운을 뿌리치며 앞장선 채운은 기사를 향해 강한 어조로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서질 않았다. 대신 앞줄이 살짝 벌어지며 뒤에서부터 카론이 나타났다.
“아가르타.”
찾으러 나서기가 무섭게 먼저 나타나다니. 참으로 군자는 못 되는 양반이었다. 더욱이 아무리 갑자기 사라졌다지만 칼과 창을 든 기사단을 이끌고 오다니.
철커덕. 철커덕.
기사와 마찬가지로 중무장한 카론은 검을 빼 든 채였다. 담담한 표정과 달리 파란 눈에 귀기가 흘렀다. 무예를 본격적으로 갈고닦은 바가 없어 기척에 둔감한 채운조차도 피부가 따가울 만큼 거친 살기를 느꼈다. 새파란 눈은 시종일관 누님을 응시했다.
“아가르타, 이리로 와.”
깜짝 놀라 흠칫 떠는 것과 동시에 여운이 앞으로 나왔다.
[뒤로 물러서라.]
[누님…… 잠시…….]
채운을 제 등 뒤로 밀어내는 힘은 저항할 수 없이 굳건하였다. 말리려던 말은 대장군의 두 눈에서 터져 나오는 투기에 가로막혔다.
황제의 안색이 더 싸늘해졌다.
“내 황후에게 손대지 마라.”
[감히 내 앞에 검을 들이댔으니, 목숨을 버릴 각오는 했겠지?]
여운이 한 걸음 앞섰다. 동시에 카론도 앞으로 나섰다. 기사들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 다행일까.
[누님. 잠시만요. 저 사람이 바로…….]
[두둔할 것 없다. 정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검부터 드는 놈은 혼쭐을 내어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할 터.]
말이 통하지 않았다. 누님을 설득할 수 없으면 카론을 말려야 했다.
“폐하. 검을 내립니다. 이분은 제 가족입니다. 누나입니다.”
“뭐? 누나? 어딜 봐서? 형이 아니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누나입니다. 닮았잖아요!”
“전혀 안 닮았어. 눈빛이 아주 늑대 같…… 아니 그전에 누나면 한마디 말도 없이 널 납치해도 되는 건가?”
“납치가 아니라 내가 쫓…… 힉!”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검이 번뜩였다. 카론이 달려들 줄 알았으나, 먼저 움직인 사람은 여운이었다.
[시끄러워! 내 동생에게 소리치지 마!]
가벼운 몸놀림을 이용한 쾌검으로 이름을 떨친 대장군답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여운은 곧장 카론의 머리를 노렸다.
“앗!”
쾅!
공중에서 맞부딪힌 검 두 자루에서 굉음이 일었다. 막힐 걸 예상하고 가볍게 땅을 디딘 여운은 방어할 틈을 주지 않고 빈 옆구리를 습격했다.
캉.
날카로운 여운의 공격을 막은 것은 단검이었다. 재빠른 공격과 방어에 용이했다.
[양손잡이?]
“보기보다 제법이야.”
채운을 확인하고 싶으나 카론은 눈앞에 있는 자만 응시했다. 역시 생긴 대로, 또 채운을 통한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한 대로 요정은 힘보다는 빠른 속도를 이용한 날랜 공격에 능했다.
캉. 챙! 챙! 카캉.
검이 연이어 부딪혔다. 낯선 요정은 치명적인 공격을 뿌렸다. 당장 제 목을 딸 심산이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강하게 나오진 않는다.
캉!
상대의 무위는 대단했다. 마치 날개가 달린 듯 공중으로 뛰어올랐다가 체중을 실어 내리찍는 기술은 웬만한 노련함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었다. 벌써 무릎과 팔꿈치가 시큰거렸다. 충격을 고스란히 버텼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도 남기지 않을 만큼 빠른 검도 매서웠다. 속도와 유연한 몸을 바탕으로 허를 찌르길 좋아하는 베로니카를 상대한 경험이 없었다면 순식간에 무너졌을 터였다.
“폐하.”
“나서지 말라고 이미 명령했을 텐데.”
채운의 위치를 확인한 즉시 골목을 봉쇄하면서 치안 담당자에게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황후의 가족이니 정중히 대접해야지.”
[말을 할 여유가 있다니 아직 혼이 덜 났구나.]
“요정어라고 다 듣기 좋은 건 아니었어.”
캉! 챙!
카론은 채운이 사라진 직후 즉시 제도를 봉쇄하고 수색에 들어갔다. 요정 둘이 북부 산맥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들은 이후 언제든 이런 사태가 벌어질 수 있음을 예상하고 대비했다.
사실은 토벌대를 해치운 그놈을 예상했다. 상대가 키도 제법 크고 무예도 강해 보여서 영락없이 그놈인 줄 알았다. 그래서 기사단을 동원했다. 놈을 제거하고 싶었다. 그런데 가족이라니.
그것도 채운과는 전혀 닮지 않는 사납기 짝이 없는 늑대였다. 닮은 곳이라곤 검은 머리카락과 유연한 몸뿐.
‘형이 아니라 누나라고?’
도대체가 요정의 생김새 따위는 다 왜 이 모양인지 모를 일이었다. 남자로 생각하면 여자고. 여자라고 여기면 남자고. 남자라더니 애를 낳지 않나.
생사를 가를 만한 대결이 아닌데. 상대는 정말로 카론을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막기도 급급하였다. 자칫하다가는 정말로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할 수 없지.’
이런 강자를 제압하기 위해서라면 내심 팔 하나쯤은 내줄 각오가 필요했다. 다치게 하는 쪽보다는 다치는 쪽이 채운에게 덜 미움을 받을 것이다. 무엇보다 일단 목이 붙어 있어야 채운에게 미움을 받기라도 한다.
치열한 공방이 오가는 위험한 범위 내에 인영이 뛰어들었다.
“멈춰요!”
두 팔을 벌리며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채운이었다.
“큭!”
막 내지른 검 끝이 채운의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대신 머리끈을 잘랐다. 풍성한 흑발이 차르르 흩어졌다.
“채…… 아가르타.”
놀란 카론은 검을 급하게 거두었다. 여운을 노려보며 한편으로 저를 막은 채운을 향해 놀라운 시선을 던졌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아슬아슬하게 검을 거두기에 성공한 누나라는 요정은 경악 서린 시선으로 채운의 뒤통수를 보았다.
[분홍아! 위험하게 무슨 짓이니?]
날카로운 어투는 어딜 봐도 야단치는 투였다.
[누님, 갑자기 검을 휘두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여긴 신국이 아닙니다.]
뒤를 홱 돌아본 채운 또한 요정어로 누나를 꾸짖었다. 뒤이어 그는 카론을 매섭게 쏘아봤다.
“기사까지 불렀습니다. 그렇게 누군가 찌르고 싶으면 차라리 저를 찔러요.”
“뭐?”
“누님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럽니까?”
분기가 가득한 밤하늘 빛 눈동자가 카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결연하기 짝이 없는 두 검은 보석의 빛깔은 황후가 서궁의 요정이었을 때 때때로 지었던 것과 유사했다.
분노로 끓어올랐던 피가 일시에 식었다. 검을 내린 카론은 낯선 요정의 존재를 무시하고 채운만을 바라보았다.
“너를 찌르라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나아.”
“폐하는, 급한 성격부터 고칩니다!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싸움부터 하다니!”
“미안해. 잘못했다. 널 강제로 데려가려는 줄 알았어.”
“그러면 폐하를 부르면서 살려 달라고 합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폐하와 만나지 않고 멋대로 따라가지는 않습니다.”
“아…… 그렇군.”
채운은 화가 났지만, 카론은 마음이 놓였다. 어느 순간에서도 저를 먼저 만나겠다고 한다.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단 말이었다.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안면이 풀어졌다.
“웃지 말아요!”
제가 웃는 줄은 몰랐다. 그 덕에 채운이 열통을 터트렸다. 주먹을 들어 카론의 가슴을 퍽퍽 쳤다.
쾅. 쾅.
갑옷 때문에 아프진 않았으나 소음이 요란했다.
“그만 쳐. 손 다친다.”
고운 손에 멍이 들까 봐서 말렸다. 검을 집어넣고 단도까지 품에 넣은 후에야 채운은 갑옷 때리길 그만두었다.
[분홍아?]
[누님. 누님도 검을 거두세요. 제 부군입니다. 누님과도 이제는 가족이에요.]
차분한 요정어를 들은 상대는 잠시 침묵하다 검을 거두었다. 동시에 카론이 손을 들어 기사단을 물렸다. 험한 대치는 그만두었으나 두 사람의 시선은 매섭게 서로를 향했다.
* * *
군사를 물린 라테시온 왕을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라테시온 왕은 말을 탔고, 여운은 동생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사방이 꽉 닫힌 마차를 무장한 군사가 에워쌌다. 꼭 죄인을 이송하는 모습이었다.
[누님도 검을 거두세요.]
담담하면서도 확고한 어조에 여운은 반사적으로 검을 거두었다. 동생이 위험한 짓까지 하며 싸움을 말리려 했던 진심을 알았다. 하지만 내심 놀란 가슴은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지?’
오 년.
절대로 짧다고는 할 수 없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동생의 외모는 기억과 비슷했다. 아니 탐스러운 머리는 싹둑 잘라 버리고 몸에 달라붙는 이국식 복식을 하고 있으나 맑고 깨끗한 눈빛이며 흰 얼굴이며, 다감한 목소리며. 기억하던 것과 똑같았다.
감격스러운 상봉의 시간이 지나고 갑자기 군사를 끌고 나타난 후레자식 놈과 칼부림을 하고 나자 동생의 달라진 부분을 조금씩 눈치챘다.
유순하기만 했던 눈빛엔 위엄 서린 힘이 있었다. 칼 앞에 몸을 들이대는 짓을 할 만큼 심성이 단단해졌다.
[보여 주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멀리 높은 자리에 선 왕궁으로 향했다. 얼핏 보기에도 거대한 궁은 대단히 화려하고 컸다.
[왕궁…… 아니, 황궁의 위세가 대단하구나.]
황제가 직접 검을 들고 채운을 찾아 나섰다. 거기다 수하 앞에서 채운이 황제를 향해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얼마나 총애하기에 가능한 것일까.
분홍이의 눈가에는 아직도 물기가 어른거렸다. 여리고 순한 아이가 검을 든 황제를 상대로 당당하게 호통을 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겠나.
황제와 어떻게 만나 같이 살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말을 아끼고 그저 동생의 손을 꼭 잡고는 손등을 살금살금 쓰다듬었다.
다정하게 사는 모습을 보며 우선 안심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더불어 분홍이 얘기를 듣는 만큼 여운 또한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오라버니 사정을 전하게 될 거다. 무엇보다 함께 온 사람 얘기를 꺼냈으니…….
‘태자 전하 얘기를 아니 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있는 그대로 전하기는…… 황제 놈과 분홍이의 사이가 너무 정다웠다. 시작은 어찌 되었든 이제 살붙이로 잘 사는 중에 굳이 태자 전하 얘기를 꺼내어 분홍이를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제 혈육만 생각하는 불충한 작자라고 손가락질받을 일이라도, 여운에게는 동생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더군다나 신국에서는 이미 없는 사람 취급 아닌가. 멀쩡히 살아 있고 돌아갈 방도가 있어도 막상 돌아가면 큰 혼란이 번질 것이다.
[누님이 오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우물이 문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그랬니?]
[네. 이곳에 신국이 없는 걸 알았을 땐 정말로…….]
분홍이는 말을 다 잊지 못하고 울먹였다. 여운은 옆에 앉은 동생의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우리도 네가 죽은 줄 알았다.]
[평생…… 두 번 다시는…… 못 볼…… 흑…… 둘이…… 다투기나 하고…….]
[미안하다. 누나가 너무 마음만 앞섰다.]
여운 또한 차오르는 눈물을 떨구었다. 분홍이 또한 평생 돌아가지 못할 것을 알고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정을 붙이고 살자고 결심한 마음이 어떤 건지, 여운은 차마 헤아릴 수도 없었다.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싸움을 벌여 곤란케 하다니.
한시름 놓으며 곰곰이 따져 보니 무작정 고향으로 데려가는 일이 능사는 아니었다.
‘부군이니 가족이라 했지. 하물며 황제 놈과 사이에 아이도 있는데. 자식과 생이별을 시킬 수는…….’
자식과의 생이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세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보며 절절하게 느꼈다.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설사 아이를 데려간다고 해도 제 황후를 총애하다 못해 갖은 불경을 저질러도 좋다고 희희낙락하는 황제 놈이 순순히 놓아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황제가 이 땅을 버리고 쫓아오겠는가.
물론 쫓아와도 문제였다.
‘보통 성질을 가진 놈이 아닌데. 태자 전하와 맞부딪치면 사생결단을 내도 크게 낼 것이다.’
작은 창으로 밖을 곁눈질했다. 새파란 눈이 수시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채운을 보면서는 누그러졌던 눈빛이 여운을 향할 때면 얼음송곳을 머금은 듯 날카로웠다.
분홍이 앞에서는 등신 노릇을 하겠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일말의 정도 보이지 않을 냉혈한 같았다. 그렇기에 산속에 숨어 사는 사람들을 그리도 잔인하게 짓밟았을 터.
분홍이는 저 황제가 사실은 아주 잔인하여 무장하지 않은 무력한 사람을 칼과 활로 죽였다는 것을 알고도 따르는 걸까.
‘아니. 알아도 무슨 상관이냐. 신국에 있어서도 오랑캐 토벌은 언제든 있었거늘.’
심지어 토벌의 선봉장이 자신이었다. 우연히 산속에 떨어져 그들의 도움을 받았고 그들의 죽음을 같은 편에서 지켜보았기에 측은하면서 황제에 대한 분개심이 일었으나, 그게 분홍이보다 중요하진 않다.
이러나저러나 분홍이의 평안이 제일이었다. 사는 모습을 두루두루 보고 나서 되도록 태자 얘기는 꺼내지 않을 참이었다. 조심스럽게 분홍이가 잘 산다는 소식을 가지고 돌아가 부모님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상책이었다.
모로 돌아가도 결국은 황후가 되었으니 뭐, 된 것 아니겠나. 오는 방법은 알았으니 후에라도 기회가 닿으면 또 문을 열고 왕래를 할 수도 있을 테고.
‘태자 전하께는 분홍이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고 잘 말씀드리고 돌아가도록 해야겠지?’
태자의 장래를 위해서도, 신국을 위해서도. 분홍이는 잊고 태자가 다른 좋은 배필을 맞이하여 가정을 꾸리는 편이 나았다.
[누님. 다 왔습니다.]
눈물을 쓱쓱 닦고 씩씩하게 고개를 든 채운이 밝게 웃어 보였다. 애를 쓰는 모습에 마음이 더욱 아렸다. 마주 빙그레 웃은 뒤에 여운은 서둘러 저를 이끄는 채운에게 붙들려 마차에서 내렸다.
요란한 갑주를 걸친 황제도 뒤를 따랐다. 신국의 황궁과는 사뭇 다른 거대한 석조 건물 앞에 서자 화려하게 장식한 문이 열리고 궁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폐하.”
회색 머리를 가진 초로의 남자가 앞장섰는데, 언행이 어딜 봐도 상선이었다.
가까이 나타난 다른 여인은 휼레가 입었던 여인 복식을 갖추었는데 제법 단아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황제와 분홍이 앞에 무릎을 살짝 굽혀 머리를 조아리는 외에 큰 절 같은 건 없었다. 황제도 근엄하게 인사를 받기보다는 철로 만든 장갑을 벗어 상선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분은?”
“황후의 누나다.”
“예?”
황제와 말을 주고받던 상선이 깜짝 놀랐다. 막 채운에게 다가오던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제 누나입니다. 제 고향에서 여기까지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분홍이가 인사를 대신 했다. 여운은 이곳 말을 모르기에 눈치로만 그런 줄 알았다.
[이쪽은 황궁 상선, 그렌입니다. 이쪽은 황가를 보필하는 어의 올리아라고 합니다.]
[반갑소. 여운이라 하오.]
“안녕하십니까.”
알아듣지 못할 말로 간단하게 인사하자마자 채운이 다그쳤다.
[온이를 우선 보셔야지요.]
[그래야지. 온이라니. 사내아이야?]
[예!]
급한 채운의 손에 붙들려 뛰듯이 황궁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성채는 속도 으리으리했는데, 장엄하기보다는 따뜻하고 화사하여 보기 좋았다.
양쪽으로 문이 일렬로 난 복도에는 다복을 상징하는 그림이 가득했다. 과실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며 힘찬 물고기 그림이며 날개를 단 작은 천인이 신비한 모양새의 악기를 연주하는 그림 등이 아무리 보아도 분홍이 솜씨 같았다. 설마하니 철갑을 두른 기분 나쁜 눈초리의 황제가 저런 그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면 이상하지 않는가.
[제집이라더니, 정말로 분홍이의 집이네.]
[예?]
[아니다. 아니다.]
절로 미소가 번졌다.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 하얀색 바탕에 황금색 꽃으로 장식한 문을 활짝 열었다. 벽 하나를 전부 유리로 끼워 빛이 가득 들어오는 환한 방이 나왔다.
창을 등진 곳에 화려한 비단으로 장식한 긴 의자 둘이 있고 거기에 앉아 있던 여인이 둘을 보자마자 일어섰다. 여인의 팔에는 고운 천으로 돌돌 만 작은 아기가 안겨 있었다.
“폐하.”
“마그네. 온은 잘 있었나요?”
“예. 방금 젖을 드셨습니다.”
“온아. 이리 오세요.”
여인은 아기를 채운에게 넘겼다. 아기를 꼭 안은 채운은 안색을 살피면서 뒤돌아섰다.
[누님.]
함박웃음과 함께 다가오는 동생과 그에 안긴 아기를 보며 여운은 감격하고 말았다.
[온이야? 온아?]
두 팔을 내밀자 채운이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겨 주었다.
[우리 분홍이가 낳은 아기라니. 어쩜.]
괜히 눈가가 또 시큰하고 콧등이 찡했다. 괜히 울음이 터질 것 같아 입을 꾹 다물며 참았다. 제가 낳은 귀한 아이를 자랑하는 채운 또한 눈가가 젖었다. 뭐 하나를 보고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니.
“아웅?”
옹알이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우리 애기. 우리 애기. 우리 온이. 어쩜 이렇게 이쁘냐. 우리 분홍이가 낳아서 이쁘지.]
고개를 숙여 이마에 살그머니 입을 맞추었다. 젖 냄새가 솔솔 나는 게 꼭 분홍이 아기 시절 같았다.
[이렇게 아기일 줄은 몰랐다.]
[이제 백일 남짓 합니다.]
[백일? 백일이면…… 너는 어떻게 밖을 돌아다니…… 당장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누워라! 몸이 상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절로 야단이 튀어나왔다. 아직 백일도 안 지났는데 벌써 움직이고 그러면 나중에 몸이 안 좋아질 수 있다고 어머니가 그랬던 기억이 났다.
[내내 궁에서만 머무르다 오늘 처음 나선 것입니다. 그 덕에 누님을 만났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니 그래도. 그건 다행이지만. 얼른 바른 옷을 입거라. 그런 얇은 옷은 안 돼.]
호들갑을 떨면서 아기를 보던 궁녀를 향해 채운이 걸친 옷을 가리켰다.
[황후 폐하가 돌아왔으니 냉큼 옷을 가져오거라]
“마그네. 실내복을 부탁합니다.”
“예, 폐하.”
마그네가 옷을 가지러 간 사이 채운은 여운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일개 궁인에 불과하잖아.]
[그래도요. 여긴 신국과 법도가 다릅니다. 황제를 따르되, 머리를 바닥에 찧지도 않고 부당한 명을 속으로만 참지 않습니다. 그들을 덕으로 보살펴야 저도 경애를 받습니다.]
[뭐?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나 황후를 경애하는 일은 너무나도 지당하여 이유가 필요치 않다. 황후를 존숭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니. 무슨 오랑캐 습성이냐?]
[하하.]
웃으면서도 채운은 마음이 조금 아팠다. 신국과 풍습이 다르다고 다 오랑캐는 아니었다. 물론 오랑캐 못지않은 나쁜 관례도 있었지만, 그건 신국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어디에나 사람이 삽니다. 오랑캐라고 함부로 치부하면 안 됩니다.]
[그건 그렇다만.]
[아까 보셨지요? 황제도 불필요한 예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놀랐습니다만, 때로는 편할 때도 있어요.]
[황권이 약하면 너도 힘들 텐데.]
예전에 제가 우려하던 바를 고스란히 답습하는 여운의 말에 채운은 다시 한번 웃었다. 고모의 품이 기분 좋은지 작은 주먹을 흔드는 온보며 답했다.
[폐하는…… 카론은 약하지 않습니다. 그는 매우 강한 황제입니다. 저래 보여도 혈혈단신으로 대륙을 일통한 시황제입니다.]
[뭐라고?]
[라테시온의 기틀을 세우는 카론을 제가 돕고 있습니다. 장차 온이 물려받을 땅이니까요. 오늘 낮에 외출한 것도 그 일환입니다. 제가 카론에게 청하여 세운 학당이 잘 되고 있는지 보고 왔지요.]
[너는 황후인데. 황후가 학당을 세워? 학당도 없단 말이냐?]
여운은 어안이 벙벙한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 신국에서는 내명부를 다스리고 자손을 보아 황가의 적통을 잇는 것만이 황후의 사명이었으나 여기선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긴 내명부가 없습니다.]
[내명부가 없어?]
[예. 황궁 살림은 제가 살피긴 하지만 보통 내명부라 이를 만한 이가 없어요. 후궁이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쩍 벌어진 입이 더 벌어졌다.
[후궁이 없어?]
[예. 몰래 외도를 하는 자는 있겠으나, 명실상부한 축첩 제도는 없습니다. 그래서 서얼은 존재를 인정치 않으며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합니다.]
[허어. 그거 정말로 대단하면서도 냉정하구나.]
눈을 껌뻑이며 감탄했다. 서얼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자손은 황후를 통해서만 볼 터이고, 누가 되었든 황후의 자식만이 차대 황제가 된다면 그만큼 황후의 입지는 공고할 것이다.
여운은 온을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초롱초롱한 것이 아기임에도 벌써부터 영특해 보였다.
[황제의 독자라니…….]
귀하기 짝이 없는 아이를 궁인 하나에게만 덜렁 맡긴 채 방을 떠나다니.
[이렇게 귀한 애를 아니 아기님을 두고 함부로 밖을 돌아다녀도 되는 거야? 없는 자리에서 누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해?]
[아비가 무람없이 무르게 보여도 실상은 아주 무서운 사람이라 괜찮습니다. 온이에게 털끝 하나라도 해를 끼칠 자는 궁에 발을 붙이지도 못합니다.]
무람없이 무르다니. 시퍼런 도깨비불 같은 눈깔을 붙이고 있는 작자를 두고 할 말이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부군 황제를 굳건히 믿는 태도에 약간 남은 우려를 모두 털어 냈다.
권세가 대단한 황제에게는 오로지 황후뿐이다. 그뿐인가. 차대 황제를 생산하였으니 사는 내내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다. 법도도 무척 자유로워서 하고픈 일은 마음껏 하며 살 수도 있다.
[우리 분홍이. 언제 이렇게 다 컸지? 누나 기억엔 아직 아기였는데.]
감격하여 아기를 안은 채로 동생까지 끌어안았다. 느닷없이 동생을 앗아 간 하늘을 원망하며 보낸 세월이 무상하였다. 하늘의 뜻이 깊어 동생을 더욱 잘 보살피려 데려간 것이라 이르던, 작은어머니의 말이 참이었다.
“아가르타.”
부둥켜안은 사이 황제가 나타났다. 철갑을 걸쳤을 때는 체구가 상당하여 태자와 엇비슷하게 보였는데, 철갑을 벗고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자 둔탁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태자가 곰이라면 이자는 범 같았다. 그것도 설산을 거니는 금빛 호랑이.
가까이 다가온 황제는 스스럼없이 제 황후의 허리에 팔을 감더니 곧 입술에 입을 쪽 맞추었다.
[헉!]
이젠 아니 놀랄 때도 되었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황후와의 애정을 과시하는 통에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아무리 법도가 다르다지만 이건 너무했다. 특히나 여운을 향한 날카로운 눈초리에 묘한 과시욕과 자신감이 섞여 있어서 더욱더 기분이 상했다.
“폐하. 누나 앞입니다.”
“뭐가 어때서 그래. 누나 앞이라고 내숭 떨 필요는 없잖아.”
이것만큼은 채운도 부끄러운지 황제를 가볍게 탓했다. 말귀는 여전히 못 알아먹겠지만 눈치가 그러했다.
[누님. 라테시온 황제이자 누님의 제부인 카론입니다.]
[나는 신국의 대장군이자 여기 있는 채운의 누이인 명여운이라 합니다.]
그래도 황제라는데 고개 정도는 숙여 주었다. 이후 황제는 내내 곁을 지켰다. 신국 말로 고향 소식을 주고받기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으면서도 마치 알아듣기라도 할 것처럼 대화에 집중했다.
[부모님은 잘 계시나요?]
[세 분 다 건강은 하시다. 하지만 시름이 깊으셔.]
채운의 안색이 흐려졌다.
[처음에는 하늘을 원망하며 많이 우시기도 했지만, 오 년이 지났으니 이젠 말씀도 잘 꺼내지 않으신다.]
[오 년이요? 이 년이 아니라?]
채운은 대경실색했다.
[이 년? 오 년이잖아.]
[여기는 이 년 남짓 지났습니다.]
[거, 이상하구나. 금은화의 조화인가? 신국에서는 벌써 오 년이 지났다.]
[아아. 오 년이라니. 막심한 불효를 어찌합니까.]
울음이 다시 번지려 했다. 여운이 손을 뻗기도 전에 황제가 먼저 채운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운은 황제의 가슴에 기대어 흐느껴 울었다.
속상하여 눈물이 흐를 때 채운이 기대어 울 사람이 이젠 따로 있었다. 안타까웠다. 그리고 서운했다.
‘이젠 우리 분홍이가 아니라 저자의 황후로구나.’
아까부터 머리로는 깨달은 바였으나, 그것이 실지로 어떤 의미인지 지금에서야 실감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르고 말았다.
* * *
여운은 채운을 따라 황궁 구경을 나섰다. 사실은 좀 더 채운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겨우 울음을 그친 채운은 자기가 사는 곳을 조금이라도 보여 주려 했다.
[여기는 큰 연회를 여는 곳입니다. 카론 폐하는 연회를 즐기는 성미가 아니라 대부분 비어 있습니다. 하지만 한번 열 때는 대단히 성대합니다. 옷도 새로 짓고 장식도 모조리 바꿉니다. 사람도 수백 명이 오지요. 높은 단상에 앉아 간단한 절을 받기만 해도 한참 걸린답니다.]
신나게 재잘거리는 동생을 보노라면 반갑고 기쁘면서도 안타깝고 서운했다. 복잡하고 묘한 속은 온을 안고 뒤를 따르는 황제를 볼 때마다 더 어지러워졌다.
“아우…… 아.”
“레온.”
마치 아무리 귀한 독자라지만 황제의 몸으로 아이를 손수 안고 채운이 가는 곳을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은 영락없는 개였다. 심지어 한두 번이 아닌지 한쪽 팔로 안은 온을 다른 쪽 손가락으로 어르고 달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황궁은 거대하여 일부만 구경하는 데도 시간이 빠르게 갔다. 황제가 대접하는 석찬 자리에서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음식이 맞지 않아 무척 고생하였는데. 그래도 지금은 나아졌습니다.]
[아니, 이건 더덕구이가 아니냐?]
[예. 여기도 산채가 있더라고요. 캐기도 하고 기르기도 하여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먹고 있습니다.]
고기와 담백한 화권, 각종 심심하게 무친 나물에 신선한 과채까지. 식탁이 이국 음식이라 색다르면서도 여운은 곧잘 먹었다. 전장에서야 말라비틀어진 육포에 희멀건 소금국만 찬하여도 배부르게 먹는 식성이었으니 어떤 음식인들 맛이 없겠느냐만. 죽은 줄 알았던 동생이 정성 들여 준비한 식탁은 그야말로 진수성찬이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주 맛있구나.]
[그러합니까? 더 드셔요. 많습니다.]
여운이 식사에 매진하는 동안 근처에 앉은 황제는 식사는 하지 않고 황자를 손수 안아서는 희한하게 생긴 통을 입에 물려 주었다. 젖병 같았다.
부군이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광경을 두고 채운은 살짝 웃었다.
[여긴 황제의 위엄보다 부정(父情)을 더 높이 치는구나.]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식에 대한 정이야 신국이나 여기나 똑같습니다. 다른 귀인들은 유모나 보모에게 맡기고 직접 기르지 않는 자도 많다고 합니다. 단지 저분이 다소 별난 어린 시절을 겪어…… 자식은 꼭 직접 키우고자 고집합니다. 저도 그편이 좋습니다.]
[정답다더니. 뭐 그렇긴 하네.]
[그렇지요?]
귀한 손님에게 찬을 밀어주는 황후의 흰 얼굴에 화사한 빛이 번졌다.
황제와 겸상하는 석찬이라 대단히 엄숙할 줄 알았더니, 이건 꼭 안채나 사랑채에서 가족 친지와 함께 조용히 식사를 즐기는 것 같았다.
[늘 이렇게 지내니? 나 때문에 일부러 조용한 자리를 꾸린 게 아니고?]
[아닙니다. 늘 이렇게 먹습니다. 아직 온도 어리고 혼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가족끼리 정을 우선 합니다.]
[그런데 둘은 어떻게 만났어?]
[그게…….]
들어 보니 하늘에서 벌판에 뚝 떨어진 걸 우연히 곁을 지나던 도둑놈이 홀라당 주워서 냉큼 잡아먹은 듯하였다.
[처음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다투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다감합니다. 제게 무척 잘해 줘요. 정말이에요.]
[자꾸 잘해 준다, 잘해 준다. 계속 입에 붙은 게 도리어 수상하구나?]
죽다 살아난 줄 알아서 한시름 놓은 누이에게 계속 부군 자랑만 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서운하여 그저 툭 던진 농이었다. 그런데 채운이 자리에서 펄떡 뛰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폐하는 저를 위해 모든 걸 다 하십니다!]
[아…… 알겠다. 농이었다. 내가 실언했다.]
이쪽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초리가 서늘했다. 순간 우려가 다시 피어올랐다.
‘아니, 아무리 정다운 성미라 해도 저렇게까지 저자세면 좀 이상하지 않나? 황제를 무려 마치 똥개 부리듯 하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태도는 꼭 무슨 죄를 지은 놈이 깨갱 하는 것 같단 말이야.’
생각이 한번 그리로 튀니 정답고 잘 지낸다고 내내 자랑하던 채운의 태도도 영 마뜩잖았다. 사사건건 붙어 다니면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황제의 태도도 다정다감한 보살핌보다는 한 치 여유도 주지 않는 감시 같았다.
‘뭔가 좀 이상한데.’
속으로 그리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채운의 말마따나 이국 풍습을 잘 모르기에 함부로 재단하는 걸지도 모른다.
재잘거리는 동생을 요모조모 샅샅이 살폈다. 어디 한군데 상한 곳도 보이지 않고 눈빛도 생생하였다. 언행은 건강하고 밝다.
‘흐음. 그늘이 보이진 않는데.’
따져 보면 여운 자신도 썰렁한 집안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낱낱이 전하지 않았다. 어둡다며 대충 얘기하고 넘겼다. 그것뿐인가. 채운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한 태자가 라테시온에 함께 온 사실도 일부러 숨겼다. 그렇지 않아도 혈육과 생이별하고 낯선 세상에 뚝 떨어져 사느라 갖은 고생을 했을 동생의 평온은 괜히 흔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마찬가지로 좋은 얘기만 하고 싶은 건 채운도 마찬가지일 터. 영영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누이를 만났기에 채운 또한 자연히 잘 사는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마음이 커서 잘해 준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 거다.
성질 더러운 황제의 눈에 들어서 황후가 되기까지 좋은 일만 있었겠나. 분명히 많은 고생이 있었을 테지만. 그래도 채운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다.
‘기우겠지.’
기꺼이 이국 음식을 즐기는 여운에게 채운이 물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아까 언뜻 듣기로는 우물을 이용하셨다고 했잖아요.]
[그래. 알고 보니 외궁 비원의 우물 밑에 문이 있고 보름달이 뜬 밤에 금은화가 문을 연다고 해. 황숙이신 은현왕께서 알려 주셨다.]
[아. 그랬군요. 그래서 그날…….]
[그러고 보니 너는 그날 어쩌다가 변을 당한 거야?]
[그게…….]
우물쭈물하며 늘어놓는 자초지종을 듣다가 여운은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쳤다.
쾅!
덜커덩!
[아니! 고작 며칠을 참지 못하고 발정 나서는 너를 덮치려고 그랬다고! 이런 쳐 죽일! 그런 것도 모르고 나는 동정을 하였다니! 분통이 터지는구나!]
[아니…… 그게 태손 마마도 금은화와 우물의 작용은 모르셨을 거고, 제가 또 도망을 하필 그쪽으로 가는 바람에…….]
[듣기 싫다! 어디서 그런 천하에 막돼먹은 못난 놈의 편을 들어! 덜렁거리는 가랑이 간수 하나 제대로 못 하여 우리 귀한 동생을, 소식도 모르고 하물며 생사도 모르게 만들다니! 당장 이놈을 족쳐야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뒤에 앉아 있던 황제가 나섰다.
[누님. 진정하세요. 지난 일입니다.]
[지나긴! 그놈의 못난 가랑이 때문에 너와 생이별을 하고 온 집안이 무덤 같은데! 지나긴!]
큰소리에 놀라 찡얼거리는 아기를 채운에게 안긴 황제는 채운을 제 뒤로 쓱 밀어냈다. 하는 꼴이 배알이 뒤틀리면서도 한편으로 그 짐승 놈보다는 낫다 싶었다.
[누님.]
“무슨 일이지?”
이국 말을 이해하고 답할 사람은 채운뿐인데도 황제는 시퍼런 눈을 여운에게 고정하며 경계하였다. 작은 몸을 뒤트는 온을 어르던 채운이 걱정스러운 투로 답했다.
“저에게 화를 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듣고 화를 내십니다.”
“이유가 어떻기에?”
“아…… 그게.”
태손 마마 얘기를 꺼내면 카론 또한 크게 화를 낼 터였다. 채운은 당혹스러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물거리며 누님과 카론을 번갈아 봤다. 갑작스럽게 생긴 긴장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무척 난처했다.
[당장 그놈부터 혼쭐을 내야겠다. 태자면 태자지, 아니 여기서는 태자도 아니니라!]
[누님. 그분도 의도한 바가 아니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그리고 당장 신국에 계신 분을 당장 어찌하시려고 그럽니까.]
[신국이라니! 그놈은 지금…….]
여운은 입을 벙끗 연 그대로 우뚝 멈췄다. 시선이 채운을 향하다가 곧이어 심상찮은 기를 발산하는 황제에게 꽂혔다. 태자가 이곳에 함께 왔고 또 황궁 근처에 있다는 걸 알면 당장 군사를 풀어서 잡아들일 거다. 더불어 태자 놈이 손쉽게 당할 자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큰 소동이 일터.
황후가 잠시 사라졌다고 도성 한가운데에 중무장한 군사를 이끌고 나타난 저 황제 놈의 더러운 성정으로 미루어 보아 피를 볼 게 당연지사. 그러면 아직도 옛 혼약자의 편을 들어주는 채운이 크게 상심할 테고 혹여 그 과정에서 채운이 믿고 따르는 부군과 다투기라도 하면?
“으아웅…… 에엥.”
백일 남짓한 아기가 기어이 여린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조차 아직 미욱한 아기를 고이 기르는 부모 사이에 불화를 일으킬 필요는 없다.
[그래. 신국에 있긴 하지. 지금 네 앞에서 화를 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
여운은 끓어오르는 분기를 꾹꾹 누르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신 다음 빈 잔을 툭 내려놓은 다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잠시 흐렸던 채운의 낯빛이 밝아졌다.
[이미 태손 마마에게 불충을 저질렀습니다. 재상이신 아버님의 체면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이해해 주셔요.]
[네가 말리니 참는다. 여기 계신 황제께는 내가 고개 숙여 사과하겠다.]
다시 일어난 여운은 정황을 자세히 모르는 황제를 향해 두 손 모아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채운에게 그 의미를 물었고 채운은 “폐하 앞에서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는 사과의 뜻입니다.”라고 답했다.
“별일 아니면 됐다. 사과는 받아들인다고 전해 줘.”
꼬치꼬치 캐물을 만도 한데 카론은 찡얼거리는 온을 도로 데려갔다. 분명 채운과 아이를 향해 지극하건만 무언가 마뜩잖음을, 여운은 떨쳐 낼 수 없었다.
* * *
식사를 마치고 접객실에서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황제는 여기까지도 부득부득 따라왔는데 옆에 유모가 있는데도 굳이 온을 손수 안고 채운의 곁을 지키는 모습이 다소 유별났다. 제 보물을 빼앗길까 봐서 꼭 쥐고 있는 눈치였다.
‘하긴. 갑자기 처가 형님이 나타났으니. 네 부인 안 빼앗아 간다, 이놈아.’
비록 고향으로 데려가고자 온 게 맞긴 해도 이렇게 잘살고 있으니 멋대로 데려갈 마음은 다 지웠다. 그걸 모르고 잔뜩 경계하는 황제를 보니 절로 픽 웃음이 났다.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자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해가 진 밤이었으나 이야기는 계속 도란도란 이어졌다.
[참, 같이 온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오늘 낮에 함께 있던 분이에요?]
[으…… 으응?]
막 차를 마시던 여운은 입에 든 걸 뿜을 뻔했다. 그것도 모르고 채운은 미안하다며 호들갑이었다.
[아까 찾는다고 하셨는데. 반가움에 고향 소식부터 묻다 보니 벌써 밤입니다. 이제야 떠올리다니! 죄송합니다.]
[아…… 아니. 얘, 분홍아.]
말을 듣지 않고 채운은 제 곁에 앉은 황제에게 조잘거렸다.
“같이 오신 분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직 라테시나에 계실 거예요. 모셔야 합니다.”
“그래? 당연히 찾아내어 융숭히 대접해야지.”
황제의 눈이 곧장 여운을 향했다. 서슬 퍼런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슬그머니 이어진 웃음은 뱀처럼 음흉했다.
깊은 산 속을 습격한 군사도 훈련을 잘 받은 기마병이자 궁사였다. 출중한 군사이니만큼 체계도 탄탄하여 수시로 파발을 띄우고 보고를 올릴 터.
‘아차.’
정말로 다급히 찾은 거라면 맨몸으로 바로 쫓아와도 모자랄 판에 황제는 굳이 시간을 들여 갑주를 갖추고 병사를 대동하여 골목을 에워쌌다. 이미 저와 태자의 존재를 알았다는 뜻이다.
채운은 그저 황제가 하도 걱정이 많아 그렇다 하였으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황제의 세가 가장 큰 황도에서 크게 걱정을 한 이유가 무엇이겠나. 처음부터 저나 태자가 나타날 것을 알았고, 무예 수준도 짐작하였기에 그렇게 대처했음이 분명했다. 그것을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아우를 만난 기쁨과 놀라움이 너무 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생김새를 알아야 찾지.”
[아, 누님. 폐하가 어떤 분이신지 묻습니다. 인상착의를 알아야 얼른 찾아 모시지요.]
[아…… 괜찮다. 그…… 말도 안 통하는 사람 찾는 게 어디 쉬운 일이냐? 말해도 모른다. 내일 해 뜨면 내가 직접 찾겠다.]
[아닙니다. 카론의 병사는 아주 훌륭하여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오셨는데 밖에서 주무시게 하다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저놈의 병사가 훌륭한 걸 여운이 더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사양했다. 됐다고 사양해도 채운이 고집을 피웠다. 누군지 몰라도 고향 사람을 어찌 홀대하느냐고 나섰다. 여운이 자꾸 말을 돌리자 못내 섭섭해했다.
[아, 너무 제 뜻만 세웠습니다. 황궁에 모셔서 그렇게 조촐한 찬이라니. 산해진미를 대접했어야 하는데. 제 차림도 반듯하지 못하고 가벼워서…… 죄송합니다. 당장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아…… 아니다. 아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네게 폐가 될까 그런 거지.]
[폐라니요! 누님과 함께 오신 분인데. 전혀 폐가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언제까지고 편안하게, 제가 누리는 건 모조리 다 누리도록 모실 겁니다.]
그러면서 채운은 황제에게 빠른 속도로 이국 말을 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도 그러라 하십니다. 그러니 사양치 마세요.]
[아. 그게 아니라. 으음.]
야단났다. 당장이라도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크게 서운할 기세였다. 동시에 황제의 눈빛도 마음에 걸렸다. 아마 지금쯤 이미 찾고 있을 텐데. 아무리 태자가 미워도 제가 직접 몽둥이질을 하면 했지 황제에게 걸려서 목숨을 잃게 할 정도는 아니고.
[사실은 말이다. 우리가 이계에서 오지 않았느냐? 그래서 오는 중에 여러 가지 죄를 좀 저질렀다. 아, 이 옷도 훔친 거야. 호패도 훔쳤다. 그중에 우리를 도와준 사람이 있는데 원래부터 여기 계신 황제 폐하의 눈 밖에 단단히 난 사람이더구나. 분명히 그 사람과 함께 있을 텐데 갑자기 불쑥 찾아가면 아주 놀라지 않겠어? 도망갈지도 모른다. 그…… 내 수하를 데리고 왔거든. 약삭빠르고 무예가 아주 출중해서 도망가면 찾기 힘들다.]
해선 안 될 얘기만 빼고는 거의 있는 대로 말했다.
[죄를 지어서 민망하다. 황후의 혈육이 불쑥 나타나서는 폐하가 직접 내린 명을, 그것도 갖가지로 어기고 다녔으니…… 네게도 참으로 미안하구나. 그래도 불쑥 군사가 찾아가면 크게 오인하여 괜한 칼부림이 번질 수도 있다. 아까 보니까 보통 성정이 아니던데.]
은근히 황제 탓도 했다.
[여기 계신 분이 그렇긴 하지요.]
옳거니. 여운은 내심 무릎을 탁! 쳤다. 채운도 제 부군 황제의 성질머리를 잘 알았다. 자칫하다가 고향 사람을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 생각한 건지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아무래도 서로 체면도 있고 하니, 내일 내가 직접 찾아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게 맞다. 오늘 밤에도 아마 자잘한 좀도둑질을 해서는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다. 놀라게 하지 말고 내일 날이 밝으면 내가 찾아오겠다.]
[알겠습니다. 누님의 뜻이 정 그렇다면 저도 따르지요.]
[내 체면을 살려 주어 참으로 고맙구나.]
[아닙니다. 도리어 제때 떠올리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니다. 그놈이야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라 고생도 좀 할 필요가 있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 데서나 잘 자는 똥개 같은 놈이니.]
[내일은 푹신한 침상에서 주무시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러자꾸나.]
큰 고비를 넘긴 여운은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늦은 밤이 되었다. 신기한 이국식 목간통을 이용하여 몸을 씻고 나서는 채운이 내어 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영 이국식은 아니고 신국 방식이 교묘히 섞여서 퍽 편했다.
[편하십니까?]
[잠방이가 넉넉하여 좋구나.]
[불편하시면 제가 입던 옷을 꺼내 드리려고 했는데. 다행입니다.]
똑똑.
기척이 울리자 이래저래 시중을 돕던 마그네라는 보모가 나갔다. 문틈 사이에 선 사람은 자리가 파하고 제 침전으로 갔던 황제였다.
“폐하께서 어디서 주무실지 궁금하다 하십니다.”
그를 발견한 채운이 빠르게 문가로 갔다. 여운은 친히 여기까지 찾아온 황제를 환대하지 않고 문밖에 세워 놓는 황후의 위세에 내심 감탄하였다. 주변을 서성이는데 채운과 빠르게 뭐라 말을 나누던 황제가 사나운 눈길로 여운을 쏘아봤다. 단순한 경계를 넘어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네가 언짢으면 어쩌려고? 나는 위세 당당한 황후의 외척인데.’
속으로 낄낄거렸다. 과연 채운은 뭐라 항의하는 황제를 몰아내고 문을 닫았다.
[하루도 떨어지지 않겠다니. 이거 참.]
[그러냐? 어린애구나. 하하.]
기이한 승리감을 맛보았다.
방은 따로 쓰지 않고 채운의 이부자리를 함께 사용키로 했다. 대신에 온이는 황제의 침전으로 보내기로 했다. 밤새 얼마나 얘기를 더 나눌지 모르기에 그러라고 했다. 황자라도 제 곁에 두어야 황후가 도망가지 않겠거니 계산하는 속내가 너무 우스웠다. 얼마나 열성인지 황제는 이미 궁인을 시켜 조그마한 아기용 침상을 옮겼다.
[우리 온이. 나중에 고모랑 코야 하자.]
졸려서 눈이 껌뻑껌뻑 감기는 아기를 얼싸안고 양 뺨에 입을 쪽쪽 맞춘 후에 아쉬운 마음과 함께 채운에게 넘겨주었다.
[온이를 데려다주고 폐하께 인사드리고 오겠습니다. 피곤하실 테니 먼저 침상에 누우셔요.]
[그래그래. 알아서 하마. 얼른 다녀와.]
신국이라면 황후의 침상에 먼저 누울 수가 있을까. 감히 침전에 발을 들이기도 무섭지만. 뭐 이국이니 어떠하랴.
시키는 대로 침전에 들어가자 높고 큰 침상이 보였다. 화려한 비단을 쓴 이불이 두툼하고 포근했다. 벽에는 금박과 은박으로 꽃을 새긴 비단을 발랐고, 창가에는 화려한 무늬를 짜 넣은 흰 천을 늘어뜨렸다.
[과연 호화롭구나.]
찬찬히 구경하는 사이 침상 위에 놓인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절로 손이 갔는데 열어 보자 그 안에서 익히 아는 물건이 나왔다. 곱게 개어져 있는데도 단박에 알아봤다. 그날 분홍이가 입고 있었던 연홍색 옷이었다.
[이걸.]
명치가 찌르르 울렸다.
[불쌍하고 가여운 우리 분홍이. 어머님이 지어 주신 옷이라고 이렇게 귀하게 보관하고 있었구나. 아까 불편하면 옷을 내어 준다고 하더니 이걸 줄 셈이었나.]
곱게 보관한 옷을 어찌 함부로 걸칠까. 자락을 잘라 만든 듯한 긴 끈도 나왔다. 고운 옷감을 요리조리 만지다가 밑에 뭔가 걸렸다.
[음?]
옷을 들어내자 얇은 가죽을 바른 물건이 보였다. 휼레와 그림으로 대화를 하면서 수시로 사용하였기에, 라테시온 방식으로 만든 공책임을 금방 알아보았다.
공책을 들어 올리는데 심장이 쿵쿵 울렸다. 고향에서 입고 온 옷과 함께 상자에 넣어 둔 것이라면 필연 일지일 터.
‘함부로 펼쳐 보면 안 되겠지?’
아무리 동생이라 한들 일지를 들추는 건 큰 실례였다. 도리를 배운 자로서, 신국의 자랑스러운 대장군으로서 소인배 짓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어쩐지 손이 절로 표지로 향했다.
사위가 너무 고요했다. 마치 보라고 저를 떠미는 것 같았다.
꿀꺽.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보면 안 되는데…… 보면 안 되는데…….]
표지를 살짝 넘겼더니 정음이 보였다.
착.
도로 덮었다.
[어찌할까.]
다시 도로 열었다가 후루룩 넘겼다. 앞에 몇 장이 빼곡했다. 빠르게 넘겼을 뿐인데 이상하게 한 단어가 눈에 콕 들어왔다. 심지어 바른 낱말도 아닌 비속어였다.
[개종자?]
개종자라니. 분홍이의 일지에 등장한 개종자는 누구? 떨리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장이 밑으로 쑥 꺼지다가 올라오더니 뒷덜미가 뻣뻣하게 굳었다. 넘겨서는 안 된다는 마음과 달리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팔랑.
표지가 넘어가며 첫 장이 드러났다.
신국의 재상 명판승의 자식으로 태어나 두 어머니의 사랑을 먹고 자라 두 분 형님과 한 분 누님의 깊은 우애로 큰 명채운이 천지신명의 얄궂은 조화로 낯선 오랑캐 땅에 떨어져 보고 듣고 겪은, 냉혹하고 참담한 일을 이 자리에 기록한다.
그리 시작하는 앞머리를 읽는 순간, 여운은 숨을 멈추었다.
* * *
제일 먼저 찾은 것은 황궁에 들어오자마자 내려놓았던 검이었다. 한 손에 일지를 들고 다른 손에 검을 든 채로 황후의 침전을 나섰다.
“Ẩẻẞ∐?”
황자의 보모가 놀라서 따라왔으나, 여운은 그에게는 일체 눈길을 주지 않았다.
군데군데 등불을 걸어 둔 화려한 복도를 따라 황제의 침전으로 향했다. 아까 황후의 침전에 들기 직전 채운이 방향과 함께 가까운 곳에 있다고 언질 했다. 황제의 침전이니만큼 화려하여 눈에 바로 들어올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황궁 안에 있는 문을 모조리 열어 놈을 찾아낼 것이다. 하얗게 작렬하는 분노가 눈앞에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과연 얼마 가지 않은 곳에 황후의 침전만큼이나 화려하게 꾸민 문이 보였다. 그 앞에는 궁인으로 보이는 자가 있어 여운이 나타나자마자 안으로 기별을 넣으려고 했다.
퍽.
칼집 채로 놈의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내실이 나왔다. 양쪽에 문이 있어 어느 쪽으로 먼저 갈까 하는 사이, 마침 오른쪽 문이 열렸다.
“무슨…… 누님?”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채운이었다.
[무슨 일이십…… 헛!]
다가오던 동생은 성큼성큼 다가서는 여운이 눈앞에 내민 일지를 발견하고는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이 쳐 죽일 개종자 놈! 어디에 있느냐! 개종자 새끼야! 당장 나와!]
고함을 지르자 안에서 과연 기척이 들렸다. 열린 문 사이로 시퍼런 안광을 뿜는 놈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본 채운이 당장 문을 닫았다.
철컥. 철컥.
문고리가 돌아갔다. 거름으로도 쓰지 못할 오물덩어리가 안에서 뭐라고 소리쳤다.
“폐하, 일단 누님과 대화부터 할 테니 기다려요.”
이국 말로 이른 후에야 채운은 뒤를 돌았다. 이런 순간에도 저보다는 곧 죽어 나자빠질 개종자 새끼를 먼저 챙기는 꼴에 절로 울분이 터졌다.
[저…… 누님.]
[들을 말 없다.]
단칼에 잘랐다. 문 반대편에 있는 오랑캐 잡놈의 멱살 잡아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가랑이를 밟아 터트린 다음에 칼집을 어찌 내어 줄까 곰곰이 따져 보려 했다.
덜렁거리는 양물은 당장 끊어 내어 날짐승에게 먹이고 손가락을 마디마디 자른 후에 양산 채로 양 무릎뼈를 파내서 아주 병신을 만들어 줄까. 거기다 황제랍시고 얼굴 들지 못하게 이마에 ‘개종자’라고 칼로 직접 새기면 더욱 통쾌할 터!
비키라고 해도 채운은 한사코 버텼다. 이걸 때릴 수도 없고. 여운은 천불이 나서 죽을 것만 같았다. 금방 썩어 가는 속내도 모르고 채운은 도리어 개잡놈 편을 들고 나섰다.
[지난 일입니다. 제가 넘긴 일입니다.]
[지난 일이라고? 넘긴 일이라고?]
제 동생이 무슨 소릴 하는지. 기가 막히다 못해 오장육부가 요동을 쳤다. 눈에선 그야말로 불똥이 튀었다.
이런 아둔한 녀석! 네가 뭐가 모자라서 그러고 있느냐! 부모 형제 눈깔에 피눈물이 흐르는데!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간신히 삼켰다.
[정말로 하늘에 맹세코,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내내 피눈물을 삼키시는…… 아버님, 어머님을 앞두고도 정녕 그리 말할 수 있느냐?]
어금니가 절로 벅벅 갈렸다. 채운의 잘못이 아님을 알지만, 분노로 전신이 화르르 타오르는 중이라 조곤조곤한 대화가 불가능했다.
[오래전 일이라…….]
채운은 입을 열었으되 말을 잇지 못했다.
[오래전? 하! 고작 이 년도 되지 않았다! 겁간으로 자식이 생기지 않았으면 너는 벌써 저 짐승 손에 송장이 되었을 테지! 살점이 터지고 온몸에 피멍이 들 정도로 맞아서 몸이 상하다 못해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면 황후가 되었겠느냐? 다정한 부군 행세나 했겠느냔 말이다!]
[…….]
[비켜라! 저 새끼를 요절을 낼 테니.]
뭐라 대꾸를 하지 못하는 채운을 옆으로 밀쳐냈다. 발로 문을 차 버리자 놈이 보였다.
검을 들어 황제 아니, 개만도 못한 짐승 새끼를 가리켰다. 놈은 여운처럼 검을 들고 있었다. 침전에 검을 두는 놈이라니.
[네놈, 이 명여운의 동생을 핍박하고 고문하고 겁간한 죄를 갚을 각오는 되어 있겠지?]
“으아아앙!”
여운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던 놈이 중간에 멈추어 아기 침상을 들여다봤다. 작은 아기가 전에 없이 큰 울음을 터트리며 자지러졌다.
[온아.]
우는 놈에게 다가가려는 채운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 사랑스럽던 아기가 이제는 겁간의 산물로만 보였다. 여린 울음에 가슴이 저릿저릿하였다. 한나절 보았을 뿐이지만 저 아이를 깊이 사랑했다. 그래서 더 끔찍했다.
오랑캐 종자의 악행이 빚어낸 결실은 분홍이의 혼백을 갉아먹으며 태어났다. 동시에 지옥에서나마 웃으며 살아 보겠다고 부스러진 마음을 다잡은 이유기도 했다. 사랑스럽고 미웠다.
[누님. 온이가 웁니다.]
[더러운 짐승의 종자 따위. 울도록 내버려 둬라.]
갈라지는 마음 때문에 일부러 더 모진 말을 해댔다. 채운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어찌 그런 차가운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낳은 아이이고 누님의 혈육입니다.]
[너야말로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저런 개종자 놈에게 휘둘려서 이게 무슨 꼴이냐? 넌 죽으려 했다…… 목을 맸다고…… 분홍아!]
격분한 누이에게 붙들려서도 채운은 싸늘한 부군의 안색을 먼저 살폈다. 하얗게 질린 낯으로 어떻게든 누님을 설득해 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게 살아 있지 않습니까? 살면 어떻게든 살아집니다. 넘겨집니다. 예쁜 아기도 있고.]
[예뻐? 저게 예뻐? 네가 정신을 놓아도 한참 놓았구나!]
[아기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태어난 자체가 죄다.]
[어찌 그런 말씀을!]
채운은 저를 잡은 누이의 손을 떨쳐 냈다.
[목숨을 걸고 낳은 아이입니다. 제가 죽는 대신 살고자 마음먹은 이유입니다.]
속에선 이미 천불이 화르르 번졌고 눈가에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여운은 어떤 참담한 처지에 놓였는지도 모르고 답답하게 구는 아우를 매섭게 다그쳤다.
[영 돌아갈 길이 없을 줄 알고 지레 포기하고 여기서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살려고 일부러 모른 척한 게 아니고? 겁간으로 낳은 아이라도 네 혈육이라 여기고 의지하며 살려고 너 자신을 속인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느냐!]
[어…… 어떻게…… 그런.]
더는 할 말을 잊은 채운이 허옇게 질려 얼어붙었다. 벌벌 떨리는 입술을 움찔거리면서도 한마디도 반발하지 못했다. 할 말이 없을 거다. 익히 그렇게 여기면서도 여운은 채운이 뭐라 한마디라도 해 주길 바랐다.
귀신이 입는 소복보다 더 파리하게 질린 채운은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
사는 게 지옥 같아 스스로 행복하다 속이고 사는 불쌍하고 서러운 아우를 보니 더욱 치가 떨렸다. 핏발이 선 대장군의 눈가에 기어이 이슬이 맺혔다.
[가자.]
홱 잡아 이끄는 여운에게 채운은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
턱.
순순히 따라올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여운의 팔이 뒤로 당겼다. 모진 말을 퍼부었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싶었다. 말로 안 되면 강제로라도 데려가려고 몸을 돌렸다.
여운을 잡은 건, 아니 엄밀히는 채운을 못 데려가게 붙든 건 개종자 놈이었다.
“그 손 놔.”
[손모가지가 아깝지 않은 모양이구나.]
검을 검집째 공중으로 휙 들었다가 손잡이만 잡아챘다.
스릉.
검날이 드러남과 동시에 검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중간에 잡힌 채운이 양쪽을 번갈아 불렀다. 여운도, 그리고 놈도 꿈쩍하지 않았다.
공중에서 맞부딪친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채운이 부들부들 떨다가 무릎이 푹 꺾였을 때, 여운은 동생을 옆으로 밀며 움직였다.
“앗!”
우습게도 검이 닿는, 위험한 거리에서 채운을 밀어내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다만 여운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밀어낸 덕에 채운은 서너 걸음 뒷걸음치다가 바닥에 넘어졌다.
꽈당.
챙!
거의 비슷한 시점에 이형의 검이 맞부딪쳤다.
챙! 캉!
놈에게는 갑주도, 기이한 궁도 없다. 하물며 쫓아오는 수하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운과 똑같이 오로지 얇은 실내복과 검 한 자루를 걸쳤을 뿐이다. 동등한 조건이었다.
캉!
“큭!”
두 손을 쥐고 검을 세웠음에도 놈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힘에서 밀린 것이다.
미간을 구긴 놈이 다시 달려들었다.
캉! 챙! 챙! 퍽!
검을 날리면서 긴 다리로 아래를 공격해 왔다. 양손잡이라 사지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도 알리라고 벌써 짐작한 바가 있기에 여운은 여유롭게 피했다. 제법 빠르고 힘찬 공격이었으나, 군더더기가 많고 힘을 과하게 쓰는 걸 보아서는 보법을 제대로 익힌 것 같진 않았다.
[네놈들은 힘으로만 아무렇게나 휘두르면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지?]
챙…… 채챙!
바로 반격하며 한발을 성큼 밀어 넣자 놈이 뒤늦게 아래를 방어하려 들었고 그 틈을 타 여운은 축을 돌려 발차기로 놈의 상체를 가격했다.
퍽!
놈이 옆을 방어하기 위해 팔을 움츠림과 동시에 내렸던 여운은 검으로 놈의 얼굴을 위협했다.
“웃!”
놈이 반사적으로 팔을 위로 들었고 순간 가슴이 비었다.
퍽!
발이 정확하게 명치에 들어갔다.
“큭!”
급소를 얻어맞은 놈은 상체를 숙이면서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비록 육신의 힘은 개만도 못한 버러지 새끼가 더 우위일지라도 그것을 효과적으로 잘 배분하여 강약을 조절하는 능력이 모자란다면, 우위가 크게 빛을 발하기 어려웠다.
“빌어…… 먹을…… 후우.”
놈의 눈빛이 한층 흉흉해졌다. 황제씩이나 되는 놈이…… 눈깔이 꼭 황무지를 헤매는 승냥이였다. 여기서 처리하지 않으면 뒤끝이 몹시 더러울 것 같았다.
침전에서 일어난 소란을 밖에서 알고 병사가 몰려들기까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벌써 낌새를 알아차리고 귀찮은 갑주에 묘한 화살을 챙겨 올 수도 있었다. 화살 한두 대면 몰라도 수십 대가 동시에 날아든다면 아무리 여운이라도 당해 낼 도리가 없었다.
빨리 처리하고 뜰 생각으로 검을 고쳐 쥐는 찰나. 아직도 빽빽 울어대는 아기를 부르는 애통한 음성이 여운을 붙잡았다.
[온아.]
검을 부딪치는 두 사람에게 가로막혀 온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운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겁간으로 낳은 아이일지언정, 채운이 애태우며 보듬은 아이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놈을 도륙 내고 싶지만, 차마 그렇기까지 하기엔 채운이 걸렸다.
[네놈은 날 이길 수 없다. 그만 포기해라. 그렇다면 저 얄궂은 피붙이의 장래를 위하여 목숨만은 보전해 주마.]
“뭐라고 지껄이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개소리겠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다. 물러서라.]
적당히 물러서라는 뜻을 전하고 싶어 애써서 차분히 말했다. 채운이 말을 전달해 주면 좋으련만, 그럴 상태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뿌우우.
멀리서 뿔피리가 울렸다. 북부의 산속에서 익히 듣던, 제국 병사들의 나팔 소리였다. 여운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살짝 굳는 동시에 개놈의 낯짝에 미소가 번졌다.
“설마 내가 아무런 조치 없이 널 초대했을 거라 여겼나? 제도(帝都)는 처음부터 봉쇄되었어. 너는 덫에 걸린 쥐야.”
뭐라고 지껄이면서 놈은 몸을 천천히 폈다. 비록 검술로는 여운을 당해 내지 못했지만, 결국은 승자는 자신이라는 듯이 여유 만만했다.
“채운을 생각해서 사형은 참아 주마. 대신에 영구 추방이다. 두 번 다시 채운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라. 잊어.”
놈은 검을 든 채로 천천히 다가왔다. 이번엔 여운이 뒤로 물러섰다. 칼질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채운이 다급하게 일어나 아이에게 가려고 했다.
여운은 아우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가자!]
[누님!]
뒤를 연신 돌아보면서도 채운은 여운의 손목을 떨치지 못했다. 카론과 누님은 하나는 차갑고 하나는 뜨거웠으나, 둘 다 불이라는 점에서 똑같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끼리 맞붙었다가는 거대한 황궁이라고 한들 무사할 리가 없다.
‘일단은 떨어뜨려 놔야 해. 누님의 화부터 식힌 후에 차근히 말을 붙여 보는 편이 더 나아.’
누님만 보내는 건 어려웠다. 누님은 무력을 써서라도 자신을 데려갈 터. 그 광경을 카론이 보았다가는 카론을 말리기도 어려워진다. 순순히 제 발로 따라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또 온이도 걱정스러웠다. 카론은 응당 황궁에 남아야 했다.
복도는 이미 소란스러웠다. 멀리서 문단속을 지휘하는 그렌의 기척이 느껴졌다. 마그네와 올리아가 잠옷 바람으로 나왔다. 그들은 빠르게 뛰어가는 여운과 그의 손에 붙들려 따라가는 채운을 보고 놀랐다.
“폐하?”
“마그네, 온이를…….”
스쳐 지나가면서 채운이 전한 말에, 마그네는 화들짝 놀라 황제의 침전으로 향했다. 올리아도 보모의 뒤를 따랐다.
“아아아앙.”
아이 울음소리가 복도에 크게 울려 퍼졌다. 아이를 안고 나온 카론이 급히 달려오는 마그네를 보자마자 아이를 넘겨주고는 빠르게 채운을 쫓아왔다.
마치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누이의 손에 이끌린 채운은 금세 황궁 밖으로 나왔다.
밤인데도 불구하고 정원은 대낮처럼 밝았다. 곳곳에 거대한 횃대가 활활 타올랐다. 빛나는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우르르 사열하다가 한 줄씩 빠르게 흩어졌다.
기이하게도 그들은 여운과 채운이 아닌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붉은 머리의 아서 엘러가 저와 비슷한 모습의 횃대 곁에서 수하를 지휘했다.
“너희는 북문으로. 너희는 정궁 동쪽 문으로.”
“저쪽이다!”
“저기!”
슈슈슉.
수십 대의 화살이 밤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펄렁.
검은 밤을 배경으로 큰 그림자가 날아다녔다.
퍽!
이번엔 강한 힘을 가진 화살이 날아들었다. 갑주를 뚫으며 기사에게 치명상을 입힌 그것은 황제가 자랑하던 개량 석궁의 활이었다.
“저기도 있습니다!”
“아군의 석궁을 쏩니다!”
“둘일 리가 있나? 하나는 황후 폐하의 누이인데. 우리 석궁은 또 누가 쏘는 거야?”
수하의 보고에 아서 엘러는 막 정궁에서 빠져나온 여운과 채운을 보았다.
“황후 폐하. 황궁에 무단 침입한 자가 있습니다. 얼른 피하십시오. 지금 혼선이 빚어져서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 모릅니다. 이렇게 밖에 나오셨다가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크게 경을 치를…… 아.”
뒤이어 정문에서 뛰어나오는 카론을 발견한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황제는 흐트러진 차림새에 검을 들고 있었다.
“아가르타!”
입을 벌린 채로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아서 엘러가 여운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저, 죄송합니다만 일단 돌아가 주시…….”
퍽!
여운은 칼등으로 아서 엘러의 관자놀이를 쳤다. 황제의 부관이 쓰러지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여운에게 시선을 던졌다.
[누님!]
“요정을 잡아. 황후에게 상처 입히지 말고.”
뒤에서 날아든 명령에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일부 궁사는 여운을 향해 팔을 들어 올리기도 했다. 그때였다.
“컥.”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어느 기사의 목에 맞았다.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은 자를 보며 채운이 비명을 질렀다.
“아악!”
슉. 슉.
갑주를 두르고 있기에 화살로 노릴 수 있는 틈이 아주 적음에도 불구하고 화살이 어둠을 뚫고 날아올 때마다 기사가 하나씩 죽어 나자빠졌다.
“저쪽이다! 석궁을 일제히 쏴라!”
카론이 검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가리키기 무섭게 화살이 또 날아왔다.
“폐하!”
“피하십시오!”
기사 둘이 급하게 몸을 날려 방패를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활은 카론의 목을 꿰뚫을 터였다.
무시무시한 화살의 위협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군사를 헤치고 여운은 채운을 이끌고 정원 깊은 곳으로 달렸다. 문은 어차피 지키고 선 놈들이 있을 테니 담벼락을 살펴 뛰어넘을 곳을 찾으려고 했다.
깊은 밤 그림자 속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쏴아아. 느닷없이 바람이 한차례 물었다. 그와 함께 커다란 그림자가 다가왔다. 깜짝 놀라기도 잠시, 커다란 그림자는 곧 익숙한 기척과 함께 울었다.
히힝.
어둠 속에서 말이 나타났다. 마치 누군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등에는 안장도 얹었다. 함정인가 싶어 경계하는 중에, 말이 곧장 채운을 향했다.
[점순아.]
[네 말이냐?]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다행이구나.]
채운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여운은 말 위에 올라탔다. 멍하니 말 콧등만 쓰다듬는 채운을 채근하다가 허리를 숙여 동생의 상체를 잡고 끌어올렸다.
밝은 쪽에서는 군사와 화살을 쏘는 정체 모를 놈의 공방이 이어졌으므로 당연히 어둠이 깊은 곳으로 향했다. 소란이 멀어지자 누군가 여운을 불렀다.
“여운.”
휼레였다.
* * *
[누구?]
[휼레라고. 우리…… 나를 도와준 사람이다.]
흠칫 놀라는 채운의 물음을 뒤로하고 여운은 휼레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운, 이쪽으로.”
이국어가 돌아왔다.
[누님. 따라오라고 합니다.]
[네가 이국어를 할 줄 아니 편하구나.]
빠르게 움직이는 그를 따라 말을 몰았다. 점순이는 내내 얌전했다. 어둑어둑한 어둠이 가득한 정원 가장자리를 따라 조금 더 가자, 높은 나무와 관목 사이로 녹슨 외짝 철문이 열려 있었다.
“여기에 이런 문이?”
“정원사가 사용하는 문이다.”
정원사가 사용하는 문이야 어디에서 불쑥 튀어나와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만 휼레라는 자는, 어딜 보아도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정원사의 문을 잘 알고 있을까. 그리고 이 밤에 어떻게 여운과 채운이 이곳으로 올 것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을까.
많은 의문이 들었으나 당장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가자.]
단단한 대장군의 명에 점순이가 얌전하게 따랐다. 문 앞에 이르러서는 말에서 내려 한 사람씩 지나갔다. 폭이 대단히 넓진 않아도 점순이가 고개를 숙여 빠져나올 정도는 되었다.
나오자 말 두 필이 보였다. 그중 하나에 올라탄 휼레는 기수를 돌렸다. 다른 말을 남겨 둔 것으로 보아 분명히 다른 사람이 있었다.
황궁을 지키던 기사단은 무단 침입한 괴인을 막는 중이었다. 분기탱천한 누님의 손에 정신없이 끌려 나오는 중에도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같이 온 사람은…… 두고 가도 괜찮습니까?]
[무예가 뛰어나니 괜찮다.]
돌아온 대답은 일말의 여지도 없이 똑 떨어지는 확답이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경비가 삼엄한 황궁에 당당히 침입하여 잘 훈련된 기사단을 농락할 실력이면, 혹여 카론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해서 고향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고마운 사람이 카론의 손에 유명을 달리하길 바라지도 않는다.
누님이 말을 달리는 사이 채운은 뒤를 돌아보았다.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함께 흩날리는 어둠 속에서 황궁은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무수히 피워 올린 횃대 때문임이 분명한데도, 어쩐지 불타는 것만 같았다.
“아가르타!”
“채운!”
저를 부르는 카론의 외침이 지금도 귀에 웅웅 울렸다. 숨이 넘어가는 아기 울음도.
찢어진 가슴에 다시 대바늘이 꽂혔다. 푹푹 찌르는 아픔은 황궁에서 멀어질수록 더 깊어졌다. 그러나 채운은 꼭 붙잡은 여운의 허리께를 차마 놓지 못했다. 사랑하는 누이를 두 번 다시 놓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점점 멀어지는 만큼 남겨 둔 사람에 대한 걱정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