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8/28)

2.

“그가 분홍이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얼굴이 닮았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큽니다.”

“왕이 푸논이라는 도시를 아갈타라는 자에게 주었다고 했소. 푸논이 분홍이와 겹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소.”

절망한 승원을 여운은 어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찾겠다는 생각만 했지 설마 분홍이가 여기서 어떤 고초를 겪을지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았다니.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마음이 아프고 가엽고 그리움이 더욱 커지면서 동시에 아이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다. 아이는 분홍이를 닮았을까. 아이를 낳고 크게 아픈 일은 없을까. 왕은 아이를 가진 분홍이가 섭섭지 않도록 성심껏 보살폈을까. 푸논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왕이 있다는 도성으로 가고 싶었다.

금은화를 가지고 나타난, 저희와 같은 외양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내심 동생이길 바랐다. 왕과 혼인하여 아이를 보았으니, 얼마나 귀하게 잘 대우받았겠나. 퍽 안심되기도 했다.

다만 반쯤 넋을 놓은 승원 앞에서는 속내를 보이기가 영 어려웠다. 그는 말없이 볕이 드는 안마당을 한참 내다보기만 했다. 무슨 생각이 그리 깊은지, 안색은 뻣뻣하게 굳다 못해 당장 죽을 사람 같았다.

“아직 분홍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대장군께서는 정말로 아니라고 생각하시오?”

대답을 들으려고 건넨 말이 아니었는데,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돌아왔다. 거짓으로라도 아니라고 꾸며내면 좋겠으나, 이상하게도 피붙이가 맞다고…… 전신이 부르짖었다.

답하기가 궁색하여 어물거리자, 승원이 고개를 돌렸다. 입매는 옅게 웃고 있으나, 뻘건 눈가에 노기가 가득하였다. 살기는 분명히 아니겠으나, 기이하고 음산한 기운이 쏟아졌다.

장차 천자가 될 자가 가진 무궁한 기세인가. 산전수전 다 겪은 대장군의 심부가 쪼그라들 이유가 없다. 하지만 좀 전까지만 해도 그저 무른 심성의 태자였다. 심중에 어떤 것이 도사리기에 저렇게 순식간에 변하는가.

꿀꺽.

여운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나는 확인을 원하오.”

“마땅히 그래야지요.”

“왕을 만나러 갈 것이오.”

군주가 결정을 내렸다. 비록 백성이라곤 여운 하나뿐인 작은 나라일지라도 군주의 명은 지엄한 것. 여운은 포권을 하며 무릎을 꿇었다.

“장군 명여운, 주군의 명을 목숨을 다해 따르겠나이다.”

이윽고 한숨을 뱉은 승원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불길한 기운은 사라졌다. 대신 약간 피곤한 기색이 느껴졌다.

“왕도에서 먼 성을 들어가는 데도 호패를 확인하는데. 왕도는 더욱 철저히 할 것이오. 휼레에게 도움을 청해 봅시다.”

잠시 후, 휼레를 만나 다시 필담도 아닌 그림을 이용한 화담(畵談)을 주고받았다. 왕도에 가서 왕후의 신분을 확인하겠다는 둘의 뜻에 휼레는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 이곳으로 날아온 목적을 확인하였기에 응당 그러리라 예상한 듯했다.

대신에 그는 ‘라테시나’ 라는 왕도로 들어가기 위해선 특별한 호패가 필요하고,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푸논으로 먼저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거기엔 라테시나에서 온 자들이 많다고 했다.

일단 옷을 빌렸다. 덩치가 큰 승원은 파사 일족과 비슷한, 특이한 무늬가 있는 풍성한 복장을, 여운은 몸에 달라붙는 복식을 입었다. 쩍 들러붙는 바지가 어색한 건 입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후 동행하기로 한 휼레가 나타났을 때, 둘은 들러붙는 고쟁이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스언.”

부르는 음성은 분명 휼레였다. 그런데 그린 듯이 꼭 달라붙은 상체엔 있을 리 없는 봉긋한 굴곡이 두 개가 솟았고, 무슨 수를 썼는지 잘록해진 허리 아래로는 비단 치마가 풍성하게 늘어졌다.

밝은 금빛 머리는 잘 틀어 올려 끈과 보석으로 장식했고 가무잡잡한 피부엔 뭘 발랐는지 광택이 흘렀다. 목걸이 귀걸이를 하고 눈가와 입술에 옅은 연지까지 발랐다.

“휴…… 휼레?”

부름에 답한 사람은 여운이었다. 너무 놀라서 굳은 승원과 달리 여운은 휼레의 곁으로 가서 이리저리 돌아봤다. 고운 무늬를 짜 넣은 장갑까지 낀 휼레는 어딜 보아도 지체 높은 부인이었다.

손목에 걸린 이국식 가방을 톡 연 그는 작은 공책과 목필을 꺼냈다. 까만 심이 있는 목필은 먹물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공책을 편 그는 승원과 비슷한 복장을 걸친 저를 간단히 그리고 옆에는 날카로운 눈초리를 가진 군사를 그렸다.

“아아. 눈에 너무 띄는 외모라 일부러 여장했나 봅니다.”

반투명한 면포가 달린 신비한 모양새의 모자를 쓰고 부채를 들자 더욱 그럴싸했다.

푸논으로 향하는 길은 조용했다. 산에서 만난 암살자가 걸렸으나, 때때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는 큰길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숙식은 휼레를 잘 아는 집에서 해결했다.

생김새가 달라도 그들은 휼레에게 존경심을 표했고, 또 승원과 여운을 경외시했다. 파사 일족이었다. 생김새가 서로 다르면서 깊이 서로를 돌보는 자들은 대부분 고향이 같거나, 혹은…….

“종파가 같군.”

밤이 되어 또 그림을 그려 화담을 나누는 중에 승원이 그리 말했다. 여운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는 말은 라테시온 왕은 종파가 다르단 뜻이겠지요?”

“그럴 것이오. 새로 생긴 나라라고 하니, 제 뜻에 따르지 않는 종파는 토벌하여 반발 세력에게 경고하고 후대의 안정을 꾀한 것이겠지.”

“금은화를 숭상하는 일족을 토벌할 거라면 금은화로 문을 열어 들어온 자는 왜 왕비로 맞아들인 걸까요?”

여운은 의식적으로 분홍이라는 말을 삼갔다. 승원은

“아마 화합의 상징일 터.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요. 음인이어서 더욱 신비하기까지 하니 말이오.”

“귀애랑은 아주 먼 이유군요.”

여운은 오장육부가 괜히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저희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동생을 왕이 발견하여 귀하게 대접하였을까. 혹여 토벌대에 걸려서 모진 고초를 당하기라도 했으면?

표정이 심상치 않자 승원이 위로했다.

“왕비라고 하니, 아마도 별탈이 없을 거요.”

“그렇겠지요?”

“벌써 후사까지 보았다니, 아마 귀한 대접을…….”

말을 끝맺기 전에 갑자기 승원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빠르게 방을 박차고 나갔다. 여운은 물론이거니와 옆에서 집주인과 대화하던 휼레도 놀란 눈치였다.

방을 뛰어나간 승원은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마당에 들어서서 거친 숨을 골랐다. 신선한 공기를 한껏 머금어도 맥박이 쉬이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머리도 핑핑 돌아가고 손이 점점 떨렸다. 발작 조짐이었다.

“이런.”

급하게 품을 들쑤셨다. 옷 안 깊은 곳에서 금은화와 함께 단단히 챙겨온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안에는 엄지손톱 크기로 뭉친 환단이 들어 있었다.

하나를 꿀꺽 삼키고 모자라 하나 더 씹어 먹었다. 쫓아온 여운이 주머니를 들고 있는 손목을 탁 잡았다.

“뭡니까?”

“아…… 알 것 없소.”

“이곳에는 전하와 저, 둘뿐입니다. 전하가 잘못되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돌아갈 방법은 대장군도 아니, 아우를 찾아 돌아가면 되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운은 손목을 꽉 잡았다. 대장군으로서 주군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 죄를 스스로 고하려고 해도 일단 태자 이승원이 사지 멀쩡한 채로 돌아가야 한다.

“놓으시오.”

“전하. 무슨 약인지, 어째서 복용하시는지 알려 주지 않으시면…….”

승원이 고개를 홱 돌려 여운을 노려봄과 동시에 전에 느꼈던 불길하고 음산한 기운이 확 뻗쳤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암군(暗君)의 시대를 살아본 일이 없는데…… 인간의 생피로 묵을 만들어 반주를 드는 악귀 같은 군주의 눈빛이 어떤 것인지, 여운은 생생히 느꼈다.

“명…… 여, 운.”

귀기 어린 음성에 절로 심부가 오그라들었다. 굳은 손을 억지로 움직였다. 무공은 제 쪽이 한참 위였다. 그런데도 여운은 대호(大虎)와 마주친 토끼처럼 얼어붙었다. 대장군으로서의 당당한 위엄으로는 마비된 혀를 조금 움직이는 게 고작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 일도 아니오. 그러니 대장군은 관여치 마시오.”

딱딱한 어조로 대화를 끊은 그는 이윽고 제 방으로 가 버렸다. 그가 사라진 후에야 여운은 숨을 쉴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승원에게 이상한 병이라도 있다면 분홍이를 찾아도 문제였다. 찾아내어 돌아가면 성혼을 올릴 것이고, 황가의 일원이 된 분홍이를 승원이 핍박해도 외척인 명가는 속속들이 관여하기 어려웠다.

“일단 시간을 두고 차근히 알아내자.”

갑자기 신경 쓸 일이 더 늘어서 골치가 아팠다. 어느 쪽이든 분홍이가 행복해야 했다.

푸논으로 들어서기 전 휼레가 뭐라 화담을 전했다. 자세한 얘기는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휼레가 지체 높은 귀부인, 여운은 그의 호위 무사, 승원은 짐꾼임은 확실했다.

커다란 짐짝을 보자 기분이 묘하게 착잡했다. 여운도 눈치를 보며 “괜찮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바꿀까요?”라고 물었다.

“아니오. 휼레가 이렇게 정한 건 이유가 있을 터. 따르겠소.”

과연 틀린 예측은 아닌지, 멀리 하얀 성벽이 보이는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비슷한 행색의 일행을 만났다. 가무잡잡한 여인에, 젊은 여자, 그리고 거친 외모를 가진 남자. 남자는 말이 어눌한 천치였고 여자는 벙어리였다.

푸논에 들어가긴 어렵지 않았다. 다른 두 사람은 전혀 의심조차 받지 않았고, 승원만 덩치 큰 남자라 그런지 자세히 들여다봤는데 바보 연기를 하여 넘겼다. 후에 승원은 바보짓을 한 제가 부끄러워 짐칸에 타서 한참 동안 고개를 숙였다.

성안은 복잡했다. 사람도 많고 짐수레도 많았다. 결정적으로 관청이며, 큰 집이며, 웬만한 터는 다 무엇을 짓는 중이었다. 그래서 더 어수선했다.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다 모인 만큼, 대단히 으스대는 별 볼 일 없는 작자들도 있는데, 그중에 왕도용 호패를 가진 놈을 셋 골라야 했다. 그것도 외모와 성별에 맞는 상대로.

숙소를 잡고 적당한 대상을 물색했다. 물색은 물론 휼레의 차지였다. 적당한 상대를 발견하면 그가 유인했다.

아무래도 멀리까지 일을 하러 나온 중에는 사내가 많은지라 남자를 구하기가 더 쉬웠다. 승원도 비슷한 덩치의 무인을, 휼레는 낯짝 반반한 한량을 각각 점찍고 해치웠다.

죽인 건 아니었다. 그저 기절시키고 옷과 호패를 빼앗았다. 기절한 자들은 재갈을 물리고 숙소 침대 아래 숨겼다. 휼레가 그들의 목에 돈이 든 주머니를 걸어 주었다.

여자는 구하기가 힘들었다. 어차피 지금도 남장하고 있으니 남자로 구하자고 합의한 다음, 휼레가 다시 나갔다. 그런데 한참이 걸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전하는 눈에 많이 띄니 계시지요.”

여운은 챙이 넓은 모자를 꾹 눌러쓰고 나섰다.

사람이 오가는 복잡한 거리를 헤매다 사색이 된 채로 빠르게 움직이는 금발의 귀부인을 발견했다. 휼레였다. 그는 숙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미행이 붙었군.”

아까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고 휼레를 의식하며 따라붙는 자가 있었다. 검은 장포에 키가 큰 남자로 움직임이 빠르고 조용했다. 상당히 단련된 자였다.

“그놈이야.”

산에서 여운의 허벅지에 활을 쏜 놈. 놈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휼레는 사람이 많은 쪽으로 움직였다. 영리한 판단이었다. 복잡한 만큼 지키는 병사가 많은 성 내에서 대낮에 습격을 하진 않을 테니.

꽤 거리를 벌리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는데, 놈이 갑자기 휼레와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미행을 들켰다는 뜻이었다. 여운은 놈의 꼬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빠르게 달렸다.

넓은 길을 벗어나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뛴 끝에 놈은 짓는 중인 집터로 들어갔다. 휴식 시간인지 목수와 미장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이세계에서 온 걸 아는 마당에, 굳이 벙어리 행세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여운은 검을 빼며 소리쳤다.

“야, 너!”

놈이 멈췄다. 똑같이 검을 뺐다. 놈은 새파란 눈에 싸늘한 낯짝을 하고 있었다. 간자(間者)나 살수(殺手)라는 놈들은 왜 하나같이 관짝에서 갓 일어선 시신 형상을 하고 있는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다리도 나았겠다, 성가신 다른 자도 없겠다. 여운은 놈의 목을 여기서 따겠다고 마음먹었다. 대장군의 살기를 느꼈는지 놈도 검을 고쳐잡았다.

챙! 캉! 챙챙!

순식간에 열 합 이상을 주고받았다. 놈은 긴 팔다리를 이용한 치고 빠지게 능숙했고 군더더기 없이 힘을 잘 조절했다. 여운은 전후좌우를 넘어선 위와 아래까지 자유자재로 몸을 놀릴 수 있었는데, 그것은 무거운 검을 휘두르기 위해서 근육을 상대적으로 두껍게 쌓은 이쪽 무사들에게는 상당히 위협적인 놀림이었다. 실제로 놈은 여운이 훌쩍 뛰어오르면서 머리 쪽을 공격하자 대단히 당황하며 뒹굴었다.

검은 장포에 흙먼지가 가득한 것과 달리 여운의 옷은 여전히 깨끗했다. 상대에게 제대로 일어설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뒤에서 바로 공격했다.

캉.

막아 내긴 했지만, 약간 어설펐다. 검을 돌리면서 상체도 풍차처럼 돌려 놈의 검을 흘려버리고 빈 배를 기합을 실어 걷어찼다.

퍽!

“큭.”

뒤로 물러난 놈은 상체를 제대로 펴지 못했다. 여운이 다가가자 팔을 들어 전처럼 작은 화살을 연거푸 쏘았다.

탁. 탁.

애깃살처럼 갑자기 휘지 않는 살은 아무리 빨라도 쳐낼 수 있었다. 여운이 화살을 쳐내며 다가가자 놈은 뒤로 물러섰다.

탁.

마지막으로 쳐낸 화살이 여운의 어깨를 넘어 저 뒤편으로 날아갔다.

“헉.”

누군가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시선을 살짝 뒤로 넘어갔다. 화살에 놀라 넘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휼레였다.

“아니 도망가지 왜 여길!”

놀란 여운이 놈과 그 사이를 황급히 가로막았다. 화살이 저쪽으로 날아가면 낭패였다.

복부의 충격을 거의 극복한 놈은 몸을 똑바로 세웠고 약점이나 다름없는 휼레를 향해 활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살이 날아가는 일은 없었다.

“휼…… 리?”

시신 같은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징그러운 청안이 커다랗게 떠졌다. 뒤에서 느껴지는 낌새도 심상찮았다. 휼레는 멍청하게도 여운의 곁에 섰다.

“ḾẨᶋ?”

“……휼리?…… ỾḚẻỻầ?”

“ḾẨᶋ!…… ḾẨᶋ!”

갑자기 휼레가 흥분하면서 놈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여운은 너무 당황하여 그의 옷자락을 낚아챌 수밖에 없었다. 휼레는 흥분했고 놈은 당황했다. 그리고 놈은 계속 휼레를 휼리라고 불렀다. 실수인가 하였으나, 휼레가 곧 말하는 중에 휼레, 휼리라고 번갈아 뭐라고 외쳤기 때문에 분명히 다르게 부른 줄 알았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이국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휼레에게는 의리가 있어도 저놈에겐 의리가 없어 말리기도 애매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어리둥절한 사이에 놈이 뒤로 물러났다. 무예 실력도 변변찮은 휼레가 놈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쫓아가려는 것을, 여운이 강하게 붙잡았다. 승원과 달리 휼레는 여운을 떨치지 못했다.

놈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여운은 흥분한 휼레를 다독여 일단 숙소로 돌아갔다. 도중에 돈 많은 한량 같아 보이는 놈을 잡아 왕도용 호패와 옷을 빼앗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이렇게 늦었지?”

둘이 나타나자마자 승원이 의문을 표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둘을 찾으러 나올 생각이었는지, 검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놈을 만났습니다. 휼레를 쫓고 있었어요.”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여운은 덧붙였다.

“아무래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놈이 휼레를 휼리라고 부르면서 먼저 물러났습니다.”

“휼리? 다른 신분으로 만났던 자인가?”

다른 신분은 아마도 여장을 의미할 터. 사실 여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대단한 미색을 생각하면 한둘 홀린 놈이 있고 나중에 남자임을 알아서 돌아 버렸을 수도 있겠으나, 휼레가 그놈을 향해 보인 것은 단순한 오해나 툭탁거림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원한이고 증오였다. 게다가 여장으로 인해 오해했다가 이번에 다시 만난 거면 잡아 죽이려 들어도 모자랄 판에, 놈은 대단히 충격받은 눈치로 먼저 물러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벼운 사연은 아닌 듯했다.

“흐음. 원한 관계라.”

“휼레를 휼리라고 불렀는데. 아무래도 혈육과 관련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타당한 추론이오.”

왕도로 향하는 내내 휼레는 말이 없었다. 원한이 철철 흐르는 눈빛과 결연한 입매와 달리 생기 넘치던 안색이 창백하게 죽었다. 꼭 휼레를 쫓아오던 그놈 같았다.

3장

오전부터 채운은 단검 훈련에 열중했다. 칼받이 없이 일자로 만든 단검은 카론이 소년 시절 쓰던 것으로 단검 훈련을 시작한 다음 날, 그가 선물했다. 가볍고 예리하여 던지기에 적합했다.

퍽. 퍽. 퍽.

날리는 족족 단검은 중앙에 박혔다. 바람이 세차게 불지 않을 때는 원하는 곳에 날리고 맞추기도 했다.

“실력이 나날이 느는데.”

감탄과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 씩 웃으며 단도를 던지고 또 던졌다.

실컷 땀을 내고 나서 씻기 위해 궁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단검 연습에 심취한 채운은 발밑도 보지 않고 곁에선 카론의 팔을 잡고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연습한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손목을 이리저리 꺾어보았다.

달깍.

문이 닫혀서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골든 피오니의 욕실이 아니라 황제의 침전에 딸린 욕실이었다.

“이제 연습은 그만하고 내게 집중해 줬으면 좋겠는데.”

단추도 풀지 않고 땀에 젖은 셔츠를 위로 훌렁 벗어 던진 카론이 다가왔다.

“대낮입니다.”

셔츠 깃을 꼭 잡고 도리질 쳤다.

“커튼만 내리면 아무도 몰라. 애초에 내 욕실엔 아무도 들어오지 않고.”

다가온 카론은 훈련 때문에 일부러 높이 묶은 머리채를 살짝 만졌다. 아차 하는 사이에 단단히 감아 놓은 머리끈에 검지를 걸어 쓱 풀어냈다. 땀이 살짝 깃든 흑발이 흐트러졌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괜찮아. 뜨거운 물로 근육도 풀기 전에 하는, 가벼운 마무리 운동이라고 생각해.”

“그게 가볍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옷깃을 단단히 틀어잡느라 목 아래 모은 채운의 손목을 더듬은 카론은 능숙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물 흐르듯이 허리춤에서 셔츠 자락을 쓱 빼냈다. 커다란 손이 땀으로 촉촉한 허리께에 닿았다. 어찌나 뜨거운지. 땀으로 살갗이 식어서 그런지, 아니면 아침 연습으로 황제의 몸이 유달리 달아오른 건지.

“하으.”

델 것 같은 체온에 저도 모르게 낮은 탄식을 입술 사이로 흘리고 말았다. 낭패감과 함께 입술을 말아 물었다. 대낮부터 종종 방사를 벌였다. 방사 자체가 민망한 시점은 이미 지났다. 문제는 하고 나면 진이 쏙 빠져 오후 내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점이었다.

“오늘 오후엔 황궁 밖으로 외출하기로 했습니다.”

드디어 황궁을 벗어나 제도 라테시나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 때문에 더욱 신나서 일찍 일어났고 단검술 연습도 빨리 시작하여 빠르게 끝냈다. 그런 보람을 방사로 날려 버리고 싶진 않았다.

“나가면 되지.”

매번 흡혈 박쥐처럼 사람 기운을 쪽쪽 빨아먹는 작자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하면 못 나갑니다. 항상 졸리고 피곤합니다.”

퉁명스러운 항의와 함께 허리와 등을 더듬는 손을 밀어냈다.

“정말 안 돼? 벌써 삼 일째 못했다.”

풀이 죽은 척, 카론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가증스러운 짓거리에 입이 쩍 벌어졌다.

화해한 뒤로 카론은 삼 일이 뭔가. 하루도 못 참았다. 그 때문에 채운은 오전에만 사람 구실을 하지, 오후에는 괜한 병자 신세였다. 올리아를 부르기도 민망했다.

“안 됩니다.”

단호하게 거절치 않으면 또 무슨 짓을 벌이고도 남을 작자였다. 옷은 사수하였으니 얼른 제 침전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풀이 죽은 척하면서도 카론은 채운의 걸음을 요리조리 막았다.

“비킵니다.”

“네가 너무 차가워서 숨을 못 쉬겠어. 다리에 힘이 풀려.”

거짓말을 줄줄 늘어놓으면서 카론은 채운의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무슨 황제의 무릎이 이다지도 가벼우냐? 하는 의문은 바지춤에 걸린 손 때문에 달아나고 말았다.

“내 사랑하는 황후와 애정을 확인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다니. 너무 괴롭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뭐 하는 겁니까?”

한 손으로는 셔츠 깃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바지춤을 푸는 손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힘으로는 카론을 당해 낼 수 없었다. 황후 희롱하기를 밥 먹듯이 하는 황제는 얇은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발목까지 몽땅 내려 버렸다.

“앗!”

셔츠 자락을 황급히 끌어당겨 국부를 가렸다.

“너를 마음껏 사랑할 수 없어서 우울해. 아주 우울해.”

뻔뻔한 놈이 슬픈 시늉을 하면서 한쪽 발목을 번갈아 잡아 신발을 비롯하여 바지와 속옷까지 몽땅 벗겨 버리고 맨발만 욕실 바닥에 놓아주었다. 다른 쪽도 천천히, 확실하게. 낚아채 달아나지도 못하게 바지는 저 멀리 밀어 버리는 치밀함까지.

“사랑이 안 된다면…… 숭배라도 허락해 줘.”

미친놈이 무슨 그런 부끄러운 말을!

“으…… 아…… 으으.”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숨고 싶었다. 하지만 매정한 연인에게 냉대를 당한 불쌍한 황제 연기에 심취한 미친놈이 한쪽 발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뒤로 휘청 넘어지려는 찰나 본능적으로 양손으로 카론의 어깨를 잡았다.

한쪽 무릎을 세운 그는 채운의 발을 그 위에 올렸다. 마지막 단추 아래로 이어진 셔츠 자락이 세워진 허벅지 양편으로 갈라졌다. 크고 긴 손가락이 허벅지를 살짝 스치고 오금으로 들어갔다.

“흐…….”

팔뚝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손길을 따라 다리에 난 솜털도 시시각각 일어서는 중이었다. 맨손으로 다리를 부러뜨릴 힘을 가진 손이 마치 금(琴)을 연주하듯 종아리 살갗을 살며시 더듬으며 이윽고 발목이 이르렀다.

뒤꿈치를 손바닥으로 받친 후 엄지와 검지로 발목의 오목한 부분을 어루만지면서 천천히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금색 머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뜨거운 숨결이 발등에 내려앉았다. 황제가, 제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입이 쩍 벌어졌다.

“폐…… 폐하?”

“카론.”

발등에 닿은 입술이 움직였다.

“카론…… 이건…… 앗.”

축축하고 뜨거운 혀끝이 발등의 얇은 가죽을 살짝 핥았다. 충격과 간지러움이 기묘하게 어우러져 심부가 크게 부풀었다.

“하으.”

채운은 그만 상체를 숙여 카론에게 매달리고 말았다. 한쪽 다리로 그의 무릎을 디디고 있기에 절로 국부가 드러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발등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모자랐는지, 카론은 늘어진 옷자락을 들어 올려 배에도 입을 맞추었다. 괜스레 숨이 가빠졌다.

“여기에서 레온이 태어났어.”

“흐…… 으.”

쪽. 쪽.

뜨겁고 축축하며 간지럽고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때때로 입술을 붙인 채로 속삭였다.

“아무리 입을 맞춰도 모자라.”

입술을 모아 살점을 빨던 그는 혀를 내어 배꼽을 핥았다. 아랫배가 저릿저릿했다.

“흐…… 아.”

윗몸이 점점 앞으로 굽었다. 인두와 같이 뜨거운 손이 헐렁한 셔츠 안으로 들어와 굽은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랫입술을 깨물어 빨면서 신음을 참았다.

촉. 춥.

배 쪽을 점한 상대의 입맞춤은 점점 위로 올라왔다. 헐떡이는 명치 부근에 뜨거운 입김을 남기는 동시에, 등에서부터 갈비뼈를 더듬으며 넘어온 손가락이 빳빳하게 일어선 젖꼭지를 살짝 잡아 비틀었다.

“앗…… 으음.”

채운은 손으로 황급히 입을 막았다. 한창 궁인들이 바삐 오갈 오전이었다. 아무리 둘밖에 없는 욕실이라지만, 밖으로 소리가 전혀 새지 않는 건 아니었다.

딱딱한 어깨를 짚은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가지런히 잘 손질한 손톱으로는 무수한 흉터로 장식한 등가죽에 어떤 상처를 낼 수도 없었다. 반나절이면 사라질 붉은 흔적을 남기는 게 고작이었다.

가슴을 희롱하는 엄지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잦은 정사로 인해 통통해진 젖꼭지를 으깨 버릴 듯이 밀어 올렸다가 다시 살점을 둥글렸다. 그러나 어깨를 흠칫 떨게 만든 건 다른 쪽이었다.

“음!”

뜨거운 숨결이 예민한 젖꼭지를 자극했다. 한쪽은 얼얼할 정도로 괴롭히면서 다른 쪽은 녹여 먹으려 들었다. 간지러울 만큼 살살 핥았다가 입술을 보아 쪽 빨았다.

“아…… 흐.”

오금이 저렸다. 다리가 흔들리자 카론은 한쪽 팔을 내려 휘청거리는 허벅지를 한 번에 받쳤다. 그러는 중에도 쉬지 않고 젖꼭지를 번갈아 괴롭혔다. 카론의 이끌림에 따라 몸이 서서히 가라앉았고 이내 등에 차가운 욕실 바닥이 닿았다. 어느새 카론은 채운의 뒷머리를 아기처럼 떠받쳐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올려진 셔츠 자락을 내릴 정신이 없었다. 그보다는 전신에 엄습하는 냉기를 몰아내는 게 우선이었다.

“차가워요.”

“곧 뜨거워질 거야.”

차가운 등을 뒤트는 사이 카론은 다시 발목을 잡았다. 길고 큰 손은 발목을 빙 돌려 잡고도 남았다. 발꿈치를 어루만지면서 발끝을 세우기에 무엇을 하나 시선을 아래로 내린 찰나.

“앗.”

엄지발가락이 이 사이에 꽉 끼고 말았다. 발톱과 말랑한 살을 동시에 누르는 이가 맹수의 것처럼 위험하게 빛났다. 그와 반대로 누운 채운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은 잔잔하기 그지없었다. 묘한 간극 때문에 아랫배의 긴장이 한층 더해졌다.

“카론. 더러워요.”

“하나도 더럽지 않아.”

“그래도. 씻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좋다.”

창피한 말을 어쩜 저렇게 잘하는 것일까. 발가락을 핥으며 발목과 종아리를 애무하는 덕에 얼굴이 활활 타 올렸다.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욕실 바닥의 냉기가 뜨거운 귀를 식혔다.

오른쪽 종아리를 슬금슬금 매만지던 손이 입술과 함께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무릎을 꿇은 채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 카론은 오금 언저리를 집요하게 핥았다. 이로 살점을 잘근잘근 깨물고 손으로는 허벅다리 안쪽을 덧그렸다. 허벅다리 안쪽의 힘줄이 간헐적으로 튕겼다. 카론은 그를 전혀 모른 척했다. 간지러우면서도 은근히 애가 탔다.

쪽. 추웁. 촉.

“핫…… 읏.”

자극을 참지 못하고 왼쪽 다리를 바르작거렸다. 카론은 잊지 않고 나머지 다리를 살짝 떠서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뜨끈하고 탄탄한 허벅지에 종아리를 얹자 어쩐지 나른한 한숨이 터졌다.

“흐음.”

이로 물어뜯기를 반복하는 오른쪽 다리와 반대로 왼쪽 다리는 부드럽게 쓸어 올리면서 애를 태웠다. 바깥쪽 살결을 따라 올라온 손은 이윽고 장골에 닿았다. 엉덩이를 움켜쥐거나 혹은 국부를 건드릴 줄 알고 저도 모르게 채운은 기대감에 허리를 띄웠다. 하지만 카론은 장골과 이어진 아랫배 언저리를 만질 뿐이었다.

“너무…… 괴롭히지 말아요.”

“괴롭힌다고? 누가 누구를?”

“흐응. 폐하가 나를.”

“오해야. 나는 널 숭배할 뿐이야. 괴롭히는 게 아니야.”

“간지럽게만 합니다. 즐겁지 않아요.”

사실은 은근한 쾌락이 아랫배 부근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아까 카론이 약속했던 대로 냉기를 충분히 몰아내고도 남을 만큼의 희열이 전신을 은은하게 달구었다.

“네가 나를 기쁘게 하는 만큼 나도 너를 기쁘게 하고 싶은데.”

그 기쁨이 이 기쁨이 아닐 텐데. 경건한 감사를 음란한 행위로 탈바꿈하는 솜씨엔 이제 일일이 놀라기도 버거웠다.

“흐…… 앗!”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허벅지 안쪽 살을 스쳤다. 틀림없이 땀 냄새가 날 살점이 향기롭다는 듯, 코끝으로 문지르며 카론은 여린 살에 입술을 대었다.

뜨거운 숨결은 점점 위로 올라와 이윽고 가장 은밀한 부위에 닿았다. 설마? 불길한 예감은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곧장 현실이 되었다.

반쯤 일어선 음경을 쥔 카론은 엄지발가락을 물 때처럼 끝을 살짝 깨물었다.

“앗!”

등줄기가 저릿저릿했다. 고개를 뒤로 꺾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짓눌렀다. 질끈 감았던 눈을 간신히 떴을 때는, 음경의 반이 상대의 입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으…… 아! 앗!”

추웁. 춥.

입술과 혀, 그리고 둘을 적시는 타액이 만들어 낸 마찰음이 그렇게 외설스럽긴 처음이었다. 얼굴에서 번진 홍조는 삽시간에 전신으로 퍼졌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도리어 달뜬 몸을 식혀 주었다.

젖꼭지를 빨 때처럼 카론은 이를 세워 잘근 깨물다가 혀로 기둥을 밑에서부터 쓱 핥아 올렸다. 눈앞에 불똥이 튀면서 정신이 흩어지려 했다.

“앗! 으!”

반사적으로 다리를 그러모았다. 무릎 안쪽에 짧게 자른 금색 머리카락이 닿았다. 그가 서슴지 않는 음탕한 구음을 참을 수 없어 손으로 반듯한 이마를 밀어내기도 했다. 허벅지 반을 덮은 손이 들어와 다리를 천천히 옆으로 벌리는 바람에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춥. 추웁.

뜨거운 혀가 뭉툭한 끝을 입천장으로 밀어 올렸다.

“아읏! 핫!”

뒤로 빼야 하는데, 멍청이처럼 허리를 들고 말았다. 축축하게 젖은 음경은 카론의 입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뿌리는 그러잡은 손아귀에 강한 압박이 전해졌다.

[그…… 그만!]

시야가 까맣게 흐려졌다.

[더는…… 나와! 안 돼! 으앗!]

저도 모르게 고향 말로 외치고 있었다. 카론은 물러서는 법 없이 음경 뿌리에서 중간까지 빠르게 훑었고, 끝에 갈라진 틈을 혀끝으로 파고들었다.

[아으……!]

공중으로 뜬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집채 같은 쾌락의 파도가 몰아닥쳐 채운을 휩쓸어 갔다. 새하얀 절정이 터졌다.

“아…… 아.”

억겁 같은 절정이 몰아가고, 무한한 만족감과 탈력감이 다시 들이닥쳤다. 잔뜩 힘을 주고 바들바들 떨던 몸은 이제 힘을 잃고 푹 꺼졌다. 그러나 엉덩이를 딱딱한 바닥에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카론이 어느새 허리를 떠받쳤다.

시야엔 온통 오색 물감이 번졌다. 이제 끝인가 싶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선을 카론에게 던지는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주륵.

벌어진 황제의 입 안에 자리 잡은 혀 위에 허연 점액질이 흥건했다. 타액과 섞인 그것은 곧 밑에 펼친 큰 손 위로 뚝뚝 떨어졌다.

“으악!”

너무 수치스럽고 면구하여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파란 눈동자가 제게 향하는 순간, 채운은 늘어진 팔다리를 억지로 놀렸다. 몸을 뒤집고 기어서라도 달아나려 했는데. 어느새 발목에 족쇄와 같은 손아귀가 감겼다.

발목을 잡은 카론은 채운을 주르륵 끌어당겼다. 셔츠가 겨드랑이 아래까지 올라갔다.

“아직 기쁨을 다 주지 못했는데.”

[아앗! 말하지…… 마…… 말하…… 지마! 안 들을래!]

목 아래 구겨진 셔츠 자락을 들어 얼굴을 감싸면서 몸부림을 쳤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하고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버둥거리는 발끝에 탄탄한 흉근과 어깨가 닿았다. 뒤이어 뾰족한 것이 발바닥 중간을 찌르면서 뒤꿈치에 축축한 숨결도 닿았다.

“가만.”

얼굴을 얻어맞은 카론은 화를 내기는커녕 쿡쿡 웃었다. 그러면서 모지리처럼 셔츠로 얼굴만 돌돌 말고 있는 채운을 엎드리게 했다. 얼굴을 확실히 가릴 수 있고 여차하면 기어갈 수 있는 자세라 그나마 낫다고 생각할 무렵, 엉덩이가 갈라지고 평생 입김이 닿으리라 상상도 못 한 부위에 숨결이 느껴졌다.

“히이익!”

눈을 부릅뜨고 몸을 돌리려 했으나, 카론이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안 돼! 거긴! 거기는…… 정말로 안 돼…… 제발…… 그러지 마…… 아…… 으…….]

흐느낌이 섞인 애원이 꽉 깨문 이 사이로 샜다.

“요정어는 모르는데.”

카론은 천연덕스럽게 혀로 주변을 핥으며 읊조렸다.

“하…… 하지 말아요…… 거기…… 안…… 아.”

기어이 울음이 터지려고 했다.

“괴롭히지…… 말아요.”

“괴롭히지 않아.”

“거…… 짓말.”

미끌미끌한 손가락이 꽉 다물린 구멍 주변을 덧그렸다. 그럴 때마다 고조된 파동이 온몸을 뒤흔들었다. 미끈거리는 이유는 아무래도 아까 절정이 남긴 흔적 때문인 듯했다.

“흐음. 여긴 다른 얘길 하는데.”

굵고 긴 손가락이 동심원을 그리면서 점점 구멍 가까이 다가왔다. 긴장한 구멍이 움찔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아주 작은 틈을 파고들었다.

“흐읏.”

바닥에 댄 뺨이 씰룩거렸다. 손가락만으로 희롱이 끝나면 좋으련만. 악랄한 황제 놈이 거기서 멈추지 않을 걸 채운은 알고 있었다.

곧 온의 백일이었다. 백일 가까이, 아니 임신 기간을 생각하면 일 년 이상 관계를 하지 않았다. 너무 거칠지만 않으면 해도 되지 않을까. 어쩐지 마음이 약해졌다. 구음까지 하며 조르는 그를 모질게 내치기엔…… 바른 교접이 영 싫은 건 또 아니었다. 대고 문지르기만 하는 헛교접을 거듭하는 동안 채운도 못내 아쉬운 적이 더러 있었다.

이렇게 된 김에 딱 한 번만 눈감고 모른 척해도 괜찮지 않을까. 열락기가 아니니 바로 또 애가 들어설 것 같지도 않고. 살짝만 넣었다 빼면 크게 아프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사이 손가락이 구멍 입구를 반쯤 비틀어 열다가 쑥 빠졌다.

“흐응.”

기왕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다 싶었다. 이러다가 다시 아프면 전부 카론의 탓이니. 실컷 욕하고 앙갚음하면 될 일. 눈을 꼭 감은 채운은 뒤이어 굵고 거센 남근을 예상하며 숨을 골랐다.

할짝.

“응?”

제가 잘못 듣고, 혹은 잘못 느낀 줄 알았다. 기대에 부풀어 오므라졌다가 풀렸다가 하는 구멍에 뜨겁고 축축한 것이 닿긴 했는데. 딱딱하고 굵고 숨이 턱턱 막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도리어 매끈하고 뾰족하고 말랑거리면서도 음탕하게 움직이는 것은……!

“으…… 아…… 아…….”

이번에는 비명도 제대로 터지지 않았다. 기겁하다 못해 혼백이 흩어지려 했다.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질끈 감았다. 차마 눈을 뜨고 견딜 수가 없었다.

“으…… 으응.”

셔츠를 구겨 입에 집어넣었다. 울음과 애원과 신음이 어우러진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오려 했다. 어깨를 움츠렸다. 움츠리고 싶은데, 구멍을 드나드는 외설스럽기 짝이 없는 혀의 존재가 너무나도 뚜렷하여 그럴 수 없었다.

추웁.

입술을 그러모아 앙다문 주름살을 빨다가 혀끝으로 틈을 헤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엉덩잇살을 단단히 틀어잡은 손아귀 때문에 잔뜩 벌어진 구멍 안쪽으로 파고들었던 혀가 빠져나갈 때마다 미끈한 액이 회음으로 흘렀고, 빠끔거리는 느낌이 생생한 구멍에는 휑한 기운이 찼다.

“흐으으.”

“싫어?”

“아으.”

“그럼 좋아?”

묻는 게 싫었다. 저 못된 입을 진작에 꿰매 버렸어야 하는데. 얼굴을 가린 채로 황급히 도리질 쳤다.

“이런 곳은 더럽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너는 전혀 그렇지 않아.”

신기한 장난감을 구경하듯 손가락 두 개를 넣어 구멍을 벌려 내장을 핥는 작자가 뚫린 입으로 아무 말이나 뱉었다. 너무 부끄러워 당장 콱 죽어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좁은데 내 성기를 머금다니. 흐음.”

벌려진 구멍을 따라 혀를 덧그리다가 이를 살짝 세워 주름을 깨물었다.

“아윽! 으…… 으읏!”

자극적인 행위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질끈 감은 눈꺼풀을 비집고 기어이 눈물이 새어 나왔다.

“하긴. 레온도 나온 구멍이니. 내 성기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겠군.”

자식까지 끌어들여 희롱하는 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온의 얼굴을 어떻게 보란 말인가. 얼굴을 덮은 셔츠를 더욱 꽉 구겨 잡았다. 이대로 숨이 막혀 콱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으어…… 흐윽…… 하지…… 하지 마.]

“요정 말은 모른다니까.”

주름을 낱낱이 핥은 카론은 손가락으로 안을 더듬고 만졌다. 뭔지 몰라도 흥건한 액이 마찰음을 더욱 크게 했다. 젖은 회음을 더듬던 손은 긴장으로 찰싹 올라붙은 음낭을 주물렀다. 다시 반쯤 일어선 음경 뿌리에 손가락이 감겼고, 다시 진득한 애무가 시작되었다.

“하읏. 윽.”

엉덩이를 깨물고 구멍을 핥으며 카론은 음낭과 음경을 동시에 괴롭혔다. 두 번째 절정은 순식간이었다.

후둑. 툭.

아까보다 한층 묽은 액이 바닥에 떨어졌다. 손끝까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숨을 헐떡이는 사이 카론이 제 물건을 꺼내서 만지는 기척이 났다.

“헉!”

심장이 뚝 떨어졌다. 이대로 꿰뚫릴 것 같았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전신을 뒤덮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더는 못했다.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할 심산으로 고개를 간신히 들었다.

“큭.”

흉악한 성기를 그러쥔 카론은 녹진하게 풀어진 여린 구멍에 처박는 대신 스스로 쥐고 흔들었다. 금색 눈썹 사이가 일그러졌다. 푸른 불꽃을 품은 청금안 만으로 채운을 엉망진창으로 범하면서.

열띤 숨소리와 함께 이어진 황제의 수음은 짙은 정액을 채운의 허벅다리와 바닥에 터트리며 끝났다. 우람한 남근의 성난 기세가 완전히 가라앉은 건 아니어도 더는 할 생각이 없는지, 그는 몸의 긴장을 풀었다.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채운 또한 맥이 탁 풀렸다.

“흐흑. 으으흑.”

셔츠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채운?”

저를 다정하게 부르는 상대가 너무 미웠다.

“하…… 하지…… 마…… 아라고…… 해…… 는데에.”

수치심이 눈물이 펑펑 솟았다.

“아, 그런 뜻이었나? 요정 말이라서 몰랐어. 미안해. 알았다면 안 했을 거다.”

낯짝 두꺼운 작자는 알면서도 몰랐다는 듯이 사과했다. 그래서 훨씬 더 미웠다. 발을 들어 저 얄미운 입을 차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내내 시달리면서 부끄러워하느라 너무 많은 기력을 소진했다.

“욕실이 더러워졌군.”

“누…… 누구 때문…… 인데.”

세 번이나 괴롭힐 생각은 없었는지 카론은 채운을 안아 올렸다. 그가 욕조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다음 알몸으로 욕조에 들어왔다.

쏴아.

넘친 물이 아래로 흘렀다. 욕조에 자리 잡은 그는 오도카니 앉은 채운을 끌어다 품에 앉혔다. 그때까지도 채운은 얼굴을 내내 셔츠에 묻고 있었다.

“숨 막히지 않아?”

셔츠가 흥건히 젖은 덕분에 숨쉬기 어렵긴 했다. 카론은 다 젖은 셔츠를 살그머니 벗겨 냈다. 머리와 어깨가 빠져나가고 부끄러움에 붉게 물든 상체를 드러내고도 채운은 셔츠를 꼭 잡고 얼굴을 가렸다.

“채운?”

“흐윽.”

계속 흐느끼자 난처해졌는지 카론이 젖은 손으로 채운의 이마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사과했다.

“괴롭혀서 미안해.”

“더…… 더러워…… 입으로…… 어떻게…… 거길.”

“내 걸 넣으면 아프잖아. 오후에 외출하기로 했으니 아프면 안 돼. 하지만 뭔가 넣고는 싶으니 손가락과 혀를 썼다. 너는 아프지 않고, 나는 만족스럽고. 좋은 해결 방법 아닌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통에 그만 머리가 펑 터져 버렸다. 고개를 번쩍 든 채운은 눈물이 흥건한 눈으로 상대를 노려봤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빽 고함을 치면서 젖은 셔츠를 그의 얼굴에 내동댕이쳤다.

철썩.

황제의 안면을 강타한 셔츠는 곧 밑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카론은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더욱 열 받았다.

“입! 입 좀 다물어요! 이…… 이…… 음탕한 바보야!”

“알았다.”

아프진 않아도 기력이 쭉 빠졌기에 목욕 시중은 온전히 카론의 몫이었다. 목욕하는 내내 채운은 불만이 가득했고 카론은 그런 그가 귀엽다는 듯이 때때로 물장난을 걸었다. 싫다고 진저리를 치면서 황제를 욕조용 의자 삼아 온욕을 마친 후에 카론에게 안겨 침실로 갔다.

서늘한 황제의 침전은 온욕 후 오수를 즐기기에 딱 좋았다. 카론은 곁에 눕는 대신 제복을 차려입고 나설 준비를 했다. 음란한 작자는 어디로 사라지고 훤칠하고 젊은 황제로 변모한 그는 노곤하여 눈을 깜빡깜빡 감는 채운의 이마에 입맞춤했다.

“낮잠을 잔 후에 차를 마시고 외출하도록 하지. 이따가 데리러 오겠다. 레온은 내가 확인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라.”

“으응.”

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듯 대답하고 채운은 곧장 잠에 빠졌다. 이곳 침대에선 카론의 향내가 났다. 쌉싸름하고 포근한 향내가.

* * *

약속대로 오후에 깨우러 온 카론과 함께 간단한 차와 간식을 먹었다. 후엔 장식이 거의 없는 수수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변복부터 약간 의외라 싶더니, 궁 앞엔 마차가 아니라 점순이와 예쁜이가 보였다.

적당한 속도긴 해도 말을 타고서도 황궁을 벗어나기까지 오래 걸렸다. 그만큼 황궁이 크고 또 제도는 그 황궁보다 열 배는 더 컸다. 라테시온이 얼마나 융성한 대제국인지 실감했다.

라테시나 시가 어귀에 들어서자 가슴이 떨렸다. 숨도 살짝 가빴다.

“이쪽으로 가면 중앙 대로로 들어선다. 그전에 치안 담당자를 만나 말을 맡기고 대신 치안 부대가 사용하는 마차로 학교 근처까지 갈 거다. 우리가 온 건 치안 책임자와 일부 외엔 모르고 있다. 평소 모습을 보기 위해 학교에 견학이라고만 알렸다.”

“네.”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떨렸다. 눈을 마주한 카론의 미간이 살짝 굳었다.

“안색이 안 좋군. 혹시 벌써 피곤한가? 견학은 다음으로 미루고 돌아갈까?”

“아…… 아니오! 떨려서 그럽니다. 하나도 안 아파요.”

황급하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낮게 묶은 짧은 머리채가 등을 살랑살랑 간지럽혔다.

“혹시 피곤하면 말해라. 꼭 오늘이 아니라도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다. 무리하다가 건강을 해치면 외출을 자주 못 하니까 말이야.”

“압니다.”

언제든 나올 수 있음을 약속하는 그에게 빙그레 웃었다. 미소를 본 다음에야 딱딱하게 굳은 상대의 미간이 누그러졌다.

들은 대로 대로에 들어가기 전 제국의 문양을 새긴 기사복을 입은 자와 창을 든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절도 있는 자세로 카론에게 인사했다. 동행한 채운에 관해서는 눈빛으로만 인사할 뿐, 특별히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일상복을 입은 병사가 모는 소형 마차는 지붕이 없어 제도(帝都)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마차가 달리는 중앙 대로는 마차와 사람이 무수히 많았는데, 중심 쪽에는 마차가 양편을 갈라 각각 반대 방향으로 줄을 지어 움직였고, 가장자리 쪽은 행인들이 가득했다.

“길이 무척 큽니다.”

“가장 번화한 곳이거든.”

대로를 따라 석재 건물이 많았고, 대부분은 삼 층을 넘었다. 벽은 작은 석상으로 장식하여 겉보기에도 화려했다. 건물의 용도를 알리는 깃발도 곳곳에 나부꼈다. 옷 그림도 있고, 신발 그림도 있다. 어떤 곳은 식기 그림도 있었다. 분명히 음식을 파는 곳이었다.

“저긴 무엇을 하는 곳이지요?”

알아보지 못할 깃발과 현판(懸板)이 붙은 곳을 가리켰다.

“악기 상점이군. 그 옆은 보석 상점.”

“그럼 저긴?”

“과자 상점이다. 쿠키나 사탕, 갖가지 색깔의 젤리를 팔지.”

과자점은 밖에 알록달록한 과일 그림이 잔뜩 붙어 있었다. 지나가는데 달콤한 냄새도 났다. 눈길이 과자점에 머무르는 걸 본 카론이 피식 웃었다.

“학교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도록 하지.”

왠지 아이를 보는 듯한 눈길이라 부끄러웠다. 괜히 변명이 나왔다.

“본 적이 없는 것이라 궁금했습니다.”

조금은 점잔을 떨어 보려 노렸다. 반쯤 떴던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마차 벽을 붙잡았던 손을 무릎에 가지런히 놓았으나, 고개와 눈은 연신 이리저리 돌아갔다.

마치 강물처럼 흘러가는 무수한 행인을 바라볼 때였다.

쿵.

갑자기 염통이 내려앉았다. 왜 그런지 뭐라고 콕 찍어 설명하기 어려웠다. 깜짝 놀라 보던 자리를 시선으로 더듬었다.

아.

무심하게 지나가는 누군가가 그리운 사람을 닮았다. 얼굴도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보는 순간 정신이 들기도 전에 신체가 먼저 반응하여 화들짝 놀랄 만큼 그립고 그리운 사람의 뒷모습과 겹쳤다.

“누님?”

급하게 몸을 뒤로 빼고 돌아보았다. 흔한 라테시온식 복장을 갖춘 그 인영은 무수한 행인 사이로 사라졌다.

신국의 가장 큰 저잣거리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크고 훨씬 복잡한 길이었다. 그만큼 마차도, 사람도 눈이 돌아갈 만큼 많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다양한 행인은 차림도 저마다 각양각색이었다. 금발과 갈발만큼 흑발도 흔했다. 당장도 흑발에 남자용 일상복을 입은 사람을 열 명 이상이었다.

그 속에 섞인 사람을 놓치긴 너무 쉬웠고 도로 찾기는 무척 어려웠다. 이러는 중에도 마차는 그 인영과는 반대로 달렸다.

“아…….”

안타까움에 몸을 너무 뺐는지 바람에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카론이 허리를 잡았다.

“왜 그러지?”

“저기에…… 분명…….”

더듬거리며 카론을 보았다. 당장 마차를 세우고 사람 하나 찾자고 외치려다가 그만 굳고 말았다.

“채운?”

고향에 계실 누님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 머나먼 이국에 아니 전혀 다른 세상인데. 게다가 그 사람은 일행이 있었다. 누님이 이국인을 동무 삼아서 라테시온의 중앙 대로를 걸을 일은…….

더욱이 얼굴을 똑바로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먼 곳에서 설핏 본 뒷모습에 이상하게 심장이 뛰고, 다부진 걸음걸이가 친숙할 뿐. 아마도 우연히 비슷한 사람을 보는 바람에 크게 착각했음이 분명했다. 아니면 쌓인 그리움이 만들어 낸 환영이거나.

“저기에 뭐?”

푸른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저와 달리 카론은 호신용 검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치 않은 일로 소동을 벌이고 싶진 않았다. 모처럼 기분 좋게 나선 외출이 아닌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실망감이 적잖았다. 괜히 벌렁거리는 심장 위를 손으로 꾹 누르며 바르게 앉았다.

“무엇 때문에 그러지?”

“잘못 보았습니다.”

“뭘 잘못 보았는데?”

걱정스러운 물음에 괜히 울컥했다. 채운의 옆엔 카론이 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가볍게 찧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시큰거리는 콧등을 억지로 꾹꾹 눌러 참았다.

“이런.”

기분을 눈치챈 카론은 말을 시키는 대신 어깨를 감싸 안았다.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부여잡은 팔을 위아래로 다정하게 문질렀다. 조용히 위로해 준 덕에 울음을 터트리는 일은 없었다.

학교에 도착하였을 땐 다시 기운이 났다. 앞으로 아이가 다닐 학교를 미리 둘러보고 싶다는 설명에, 학교를 관리하는 사람이 친절하게도 앞장서 안내했다.

학교는 잘 운영되었으나 생각지도 않은 문제점도 많았다. 세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아이를 가려 받으려 들었다. 귀족과 부자 아이를 선호하고 또 불성실하거니 모자라면 가르치려 들지 않고 바로 내쫓았다. 내쫓긴 아이는 주로 가난한 아이였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학교에 가지 못하고 먼 곳에 있는 학교로 가는데, 그러다 보니 특정 학교에 가난한 집 아이가 모이고 있었다.

돌아갈 때는 구경하며 걷기로 했으므로 마차는 먼저 보냈다.

“정기적으로 운영 점검을 할 감사 기관을 설치해야겠군.”

“둘러보길 잘했습니다.”

학교를 나선 후 올바르게 운영하기 위한 방안을 여러 가지 얘기하다 보니 벌써 중앙 대로에 이르렀다.

아까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부딪치기 쉬웠다. 너무 들뜬 나머지 학교 문제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가까이에 있는 과자 상점에 들러 사탕과 젤리라는 걸 구경하고 그 자리에서 맛을 보았다. 사탕은 딱딱한 것이 달달했다. 젤리는 새콤달콤한 것이 과일 정과 같았다. 사탕을 그득 담은 종이봉투를 든 채운이 쫀득한 젤리를 우물우물 씹는 사이 카론이 값을 치렀다.

“폐하는…… 어떻게…… 그렇게 잘…….”

“다 먹고 말해.”

한껏 씹은 젤리를 꿀꺽 삼켰다.

“폐하는 상점을 자주 다닙니까?”

“아니. 평소엔 너와 함께 황궁에 있잖아.”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지요? 황제 같지 않았습니다.”

본디 지위가 있는 이들은 저자를 다니지 않는다. 상인을 대할 때도 직접 나가기보다는 심처로 불러들이게 마련이었다. 카론이 무람없는 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평민과도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 신기하여 물었더니 그가 조금 으쓱거렸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존경스럽게 보는 건가.”

과자 상점을 나선 카론은 핏 웃었다.

“상인을 상대하는 정도에 감탄하면 곤란하다. 물건을 고르고 값을 치르면 되는데.”

그러면서 상체를 숙이며 입을 ‘아’ 벌렸다. 존경스럽게 보지는 않았는데. 채운은 사탕 봉투를 열어 가장 맛이 없어 보이는 걸로 하나 골라 입에 넣어 주었다. 냄새부터가 아주 시큼했는데 과연 맛도 그런지 카론의 미간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뱉으면 안 됩니다.”

“……알았다.”

키득거리면서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채운은 연신 어딘가를 가리키며 이것저것 물었고 카론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제국의 주인이라 그런지 과연 아는 것이 많았다.

“저기서 차를 마시면서 쉬도록 하지. 케이크도 팔 거다.”

카론이 먼 땅에서 온 각양각색의 약초와 배합한 특이한 차를 파는 찻집을 가리켰다. 시큼한 사탕에 대한 보답으로 잡초로 끓인 쓴 차와 케이크를 대접하려는 생각에 입꼬리를 쓱 올리려는 찰나, 누군가 카론을 불렀다.

“음?”

돌아보니 중앙 대로에 들어오기 전에 만났던 치안 담당자였다. 그는 좀 전에 카론이 과자 상점에서 쓴 금화를 들어 보였다.

“폐하, 황제 인장이 찍힌 금화는 사탕 한 봉지가 아니라 두 수레 값입니다. 미친놈이라고 생각한 상점 주인이 신고했습니다.”

“……그런가?”

“여기 동전과 시중 유통 은화를 준비했습니다. 일반 상점에서는 동화를, 고급 상점에서는 은화를 쓰시면 됩니다. 그리고 값을 치르기 전에 주인에게 가격을 물어보시고 거스름돈이 생기면 받으십시오. 금화만 덜렁 던지고 나가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는 두둑한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당황한 카론과 채운에게 인사를 꾸벅 한 후 치안 담당자는 다시 사라졌다.

“풋.”

채운은 숨을 죽여 쿡쿡 웃었다. 역시나.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 저잣거리 사정을 그리 잘 알 턱이 없었다. 당당하게 금화를 내밀고 나오면서 상점 따위야 식은 죽 먹기라던 모습이 새삼 너무 우스웠다.

찻집에선 주인장이 권하는 차와 케이크를 주문했다. 차에서는 쑥 냄새가 났고 다소 푸석거리는 케이크는 밍밍하고 연한 단맛이나 꼭 다식(茶食) 같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푸근한 음식이었기에 차에 곁들여 맛나게 먹었다. 그러나 카론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내내 떨떠름했다. 치안 담당자가 오간 후로 조금 창피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맛있나?”

“네.”

“그럼 됐다.”

차도 케이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채운의 사탕 봉지에서 젤리 두 개를 몰래 훔쳐 먹은 그가 이번에는 찻집 주인장에게 정확한 값을 물어보고 치르는 사이 채운은 문 앞에 섰다.

다음엔 어느 상점을 가 볼까. 재미있다는 악기 상점? 아니면 내내 레온을 돌보느라 고생하는 마그네에게 줄 선물을 사러 다른 상점에?

문을 열고 막 나가려고 할 때였다. 수없는 행인 중에 갑자기 한 사람이 도드라졌다. 아까 마차에서 보았던 그 사람이었다.

아.

이번에는 혼자였다. 순간 세상의 흐름이 느려졌다. 카론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늘어지고 대로를 지나는 마차가 거북이걸음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저쪽에 있는 그 사람을 제외하곤 모든 사람이 흐려졌다. 보이고 들리는 건 오로지 그 사람뿐.

사탕 봉투가 천천히 떨어졌다. 딱딱한 돌을 깐 길바닥에 부딪힌 봉투 안에서 오색 사탕이 느릿느릿 튀어 올랐다. 달콤한 구슬이 흘러나와 바닥에 흩어지며 사람들 발에 밟혔다. 그러는 중에도 채운은 시선은 오로지 상대에게만 고정되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반듯한 어깨와 쭉 뻗은 목이 조금씩 움직이며 얼굴을 보여 주었다. 서릿발 휘날리는 북방을 호령하는 위대한 대장군의 아름답고 늠름한 모습을.

“!”

부를 틈도 없었다. 그저 몸을 날렸다. 사람을 밀치고 헤치며 그쪽으로 쓰러질 듯 달렸다. 누군가는 욕을 하고 누군가는 고함을 치고 누군가는 놀란 듯 비명을 질렀다. 놀란 카론이 저를 부르는 소리도 났다. 하지만 귓구멍이 콱 막혀 먹먹하게만 들렸다.

‘누님…… 누님!’

팔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그쪽으로 나아갔다. 귓구멍과 함께 목구멍도 콱 막히는 바람에 아무리 입을 벙긋거려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타까움과 절실함이 더욱 커졌다. 이대로 누님을 놓칠 수 없었다. 쌓인 그리움이 만들어 낸 착각이라도 상관없었다.

혹은 누님을 닮은 낯선 이라도 좋았다. 한 번만 껴안아 보고 싶었다. 머나먼 고향에 계신 누님과 꼭 같은 기운을 가졌으니 앞으로 정다운 동무로 지내자며,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터질 것 같은 심부의 맥박을 느끼며 다리를 놀렸다. 바보 같은 다리가 오늘따라 너무 느렸다. 사람이 어지러이 시야를 가렸다. 색색 옷감과 기괴하게 늘어지는 목소리와 고함들.

비켜! 비켜! 저리 비키란 말이야! 누님이 멀어져!

다급한 외침은 답답하게도 입속으로만 맴돌았다. 터지는 건 가쁜 숨뿐이고, 새어 나오는 건 안타까운 눈물뿐이었다.

“누…… 우…….”

목구멍을 쥐어짜고 또 짜도 간신히 첫 글자를 뱉는 게 다였다. 넘어질 듯 휘청거리며 얼른 그를 쫓았다. 멀리 보이는 그이는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가 그늘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의 모습을 놓치는 찰나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기다려! 안 돼! 가지 마!

무수히 외쳐도 그에게는 닿지 않았다. 꺾이려는 다리를 추스르며 흐려지는 눈가를 훔쳤다. 거칠게 헤치는 동안 부딪친 사람들이 욕하고 손가락질했다. 누군가는 옷자락을 잡기도 했다.

“놔!”

옷이 찢어지든 말든 거세게 몸부림쳤다. 차라리 잡힌 웃옷을 벗어 버리는 쪽이 나았다. 훌렁 벗어 버리면서 골목을 향해 달렸다. 중간에 균형을 잃어 넘어져 손바닥과 무릎이 아팠으나 그건 가슴을 후비는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납게 잡아당기는 손을 떨치며 골목으로 몸을 던졌다. 번잡하기 짝이 없는 중앙 대로와 달리 그늘진 골목은 조용했다. 반대편 쪽 환한 빛이 가득한 다른 대로로 이어진 곳까지 뛰어갔다. 아무도, 아무도 없었다.

어디? 어디에 있어?

고개를 홱홱 돌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혹여 자신이 뭔가 놓쳤는지 다시 살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흐…… 어?”

울음 때문에 잔뜩 뭉그러진 목소리로 뒤늦게 누님을 물렀다. 아무도 없는 골목 속에서 홀로 이리저리 헤매는 사이,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흐윽.”

꾹 다문 입술이 덜덜 떨렸다. 아무래도 환영인 모양이었다. 누님이 라테시온에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허무맹랑한 바람을 가졌던 것일까. 바보같이 서러운 마음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그때였다.

[……너?]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고개를 번쩍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상대가 강한 빛을 등진 덕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니 눈을 가득 채운 눈물 때문인가. 소매로 눈을 벅벅 문질렸다.

자박. 자박.

가벼우면서도 절도 있는 걸음걸이는 분명 명가의 자랑스러운 대장군의 그것이었다.

“누…… 우.”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뻗었다. 경악이 서려 크게 뜬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람은, 꿈에서도 잊지 못한 바로 그…….

“우…… 야.”

누님이라고 부르는 대신 어린 아기였던 시절에 쓰던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분…… 홍아.]

똑같이 떨리는 음성은 분명 누님이었다. 똑같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저분은, 채운이 사랑하고 사랑하는 그 누야가 분명했다.

“누…… 야.”

세상이 까맣게 멀어졌다. 보이는 건 오로지 누님뿐이고 들리는 건 오로지 누님이 저를 부르는 다정한 음성뿐이었다. 무감각한 다리가 거짓말처럼 저절로 움직였다.

멈춘 세상을 헤치고 달렸다. 고개를 들고 있음에도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뒤로 흘러 머리카락을 적셨다.

누야. 사랑하는 누이야.

“누야!”

억겁 같은 찰나가 지나고 누님에게 닿았다.

와락.

달려든 저를 온몸으로 받아 든 누님은 그 자리에서 한번 빙글 돌았다. 놓치지 않도록 꽉 붙잡은 채로 감격에 찬 눈물을 흘렸다.

환영이 아니었다. 환각도 환청도 아니었다. 비록 낯선 차림을 하고 있어도 심장이 뛰고 더운 숨을 쉬며 따뜻하게 저를 안아 주는, 살아 있는 실체였다.

[내…… 동생…… 내 분홍이…… 드디어.]

찾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