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세월이었다. 노환으로 황상이 승하하고 태자가 황제가 되었다. 아울러 어리숙한 태손은 태자가 되었다. 변화는 황위의 계승뿐만이 아니었다. 황가에 버금가는 명문 재상가가 번영의 빛을 잃어버리고 초상집으로 변한 지도 오래되었다.
귀하게 기르던 아이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 명가는 손님을 마다하고 바깥출입도 거의 삼갔다. 관직으로 인해 입궁, 퇴궁을 반복하는 명판승과 그 맏아들만 간간이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24살에 이른 태자 승원은 때때로 명가를 찾았다. 졸지에 잃은 혼약자의 흔적을 찾고 눈물이라도 흘리고 싶어 찾아간 것인데, 대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명가 안주인의 냉랭한 박대에 망연자실했다.
“정작 잃어버린 사람이 누군데, 왜 여기 와서 없는 사람을 찾으시는 겝니까?”
그런 냉혹한 호통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자애로우신 어마마마는 물론이거니와 엄하신 아바마마께서도 승원을 그렇게 꾸짖은 적이 없었다. 너무 놀라 굳은 태자 앞에서 안주인은 먼저 몸을 홱 돌린 것도 모자라 대문을 쾅 닫기까지 했다.
멍하게 서서 굳건히 닫힌 문을 하염없이 바라볼 때였다. 안에서 옅은 음성이 들려왔다.
“저희는 잊은 아이입니다. 태자 전하께서도 그만 잊으시지요.”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어찌…….”
“잊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어디로 갔든…… 불귀의 객입니다.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영영 떠났으니…… 봉분도 남기지 못하고 떠난 그 아이를…… 이 어미도 가슴에 묻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더는 찾지 마십시오.”
문 저쪽에 있는 사람은 채운의 생모였다. 무덤도 없이 떠난 자식을 가슴에 묻었으니 이제 잊으라는 말에 승원은 더는 명가를 찾지 않았다.
“다 내 잘못이다.”
그날 채운을 본 순간 가슴에 확 이는 거대한 불길을 막지 못한…… 전부 제가 못나서 벌어진 참사였다.
황위를 이을 태자가 성년이 훌쩍 지나도 가례를 올리지 않은 것이 신경이 쓰였을까. 명판승이 직접 승원을 찾았다.
“장차 천자가 되실 태자 전하께서 심신이 이다지도 미약하셔서 앞으로 어쩌시려고 합니까. 승하하신 선황 폐하께서 그리도 아끼던 조손의 허황된 행실을 보고 하늘에서 통곡하실 겁니다. 없는 사람은 잊고 장래를 보십시오.”
명판승은 태자비 간택을 주청했다. 그에 승원은 할 말을 잊었다.
“재상마저 그러시면 어찌합니까? 그 불쌍한 사람을 어찌…… 당신 혈육입니다. 재상.”
“혈육이기에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깊은 정으로 키운 아이가 남긴 빈자리를 계속 떠올리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벌써 옆자리를 채우고 자손을 보아도 모자랄 나이의 태자가 아직 홀몸이었다. 그 때문에 온 나라에서 명가의 사라진 자식을 떠올리고 또 떠올렸다. 근자에 훌쩍 늙은 재상이 어떤 심정으로 태자비 간택을 입에 올렸을지. 이제는 정말로 흘려보낼 때였다.
품에서 금은화 문양의 손잡이를 가진 열쇠를 하나 꺼냈다. 비서고의 열쇠로 할바마마가 승하하기 직전, 승원을 불러 직접 하사하셨다.
할바마마는 유일한 이해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채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불길이 일어 눈이 돌아가 버렸다는 승원의 진술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한 이가 할바마마뿐이기 때문이었다.
“한눈에 각인하였구나. 네 양기가 보통이 아니라고는 이미 짐작했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각인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천상배필을 만나 눈알이 돌아 버리고 그를 품지 않으면 양기가 폭주하여 종국에는 미쳐 버리는 광증이었다.
“각인에는 만약(萬’藥)이 무용(無用)하다. 각인은 천명(天命)으로 지어진 짝이 없이는 살 수 없어. 네 양기가 날로 강해질 것이고 결국엔 피를 말려 죽을 터. 아니 피가 마르기 전에 광기(狂氣)에 매몰되어 흉인(凶人)으로 변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비참한 길이니라. 그러니 네가 살려면 그 아이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서 열쇠와 금은화 씨앗이 든 작은 함을 주셨다.
“금은화를 키워라. 금은화는 천상의 꽃이라. 음양의 기를 조화시키며 그윽한 향을 피워 하늘의 용을 불러들인다. 햇빛을 가리고 달빛만 먹이고, 샘물을 주지 말고 아침이슬만 모아 주어라. 싹이 트면 다 자라 꽃을 피우는 데 5년이 걸릴 것이다.”
그러면서 할바마마는 한탄했다.
“금은화의 작용을 자세히 알리지 않고 네게 황제의 꽃이라고만 알린 내 잘못이 크다.”
하지만 기실 할바마마도 정말로 전설처럼 금은화 향을 맡은 천룡이 나타날 줄은 모르셨다. 재미 삼아 금은화를 키우신 세월이 수십 년인데 그동안 그런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었다.
“선조께서 외궁의 비원을 봉인했는지 나도 몰랐다. 때가 되거든 황궁 서고 아래 있는 비서고를 열거라. 금은화 씨앗도 거기서 가지고 온 것이니라. 비서 중에 금은화와 비원의 작용을 설명한 책도 있겠지만, 전부 고어(古語)로 적혀 있다. 제때 연구를 했다면 화를 면했을 것을.”
철컥.
5년간 금은화를 할바마마가 같이 물려주신 화분에 키웠다. 승원이 금은화를 애지중지 기르는 것을, 다른 이들은 장손을 특별히 귀여워한 선황에 대한 애도의 뜻으로 이해했다. 그런 의미가 영 없지는 않았다.
각인이라든지 금은화와 비원의 관계라든지. 할바마마가 알려 주시고 물려주신 사안은 모조리 비밀에 부쳤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고, 해결책은 금은화로 천룡을 불러 그 등을 타고 채운이 간 곳으로 날아가 그를 다시 데리고 돌아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계책이었다.
결국은 승원이 사라진 정혼자를 따라 불귀의 객이 되든, 아니면 광인으로서 황가에 오점으로 남든, 둘 중 하나이기에 굳이 알려 부모님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채운을 잃은 명가에 웃음이 사라지고 음울함이 감도는 것을 안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5년간 금은화를 키우면서 마음을 많이 다스렸다. 결심이 흐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제가 떠난 후에 황국과 황가는 어찌 될 것인가 생각이 아니 들 순 없었다.
직계 자손이 끊기더라도 또래 황족 중에 뛰어난 양인도 있고, 평인이지만 성품이 올곧고 영민한 자도 있었다. 황위가 직계로만 이어진 건 아니니 뛰어난 이을 양자로 들여 황위를 물려줘도 될 일이었다.
하나뿐인 자식을 잃고 슬퍼할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으나, 이젠 그 걱정도 덜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우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어느 틈에 금은화도 봉오리가 올라왔다. 달빛을 머금은 봉오리 끝에 반딧불 같은 빛이 비쳤다.
“가서 꼭 채운을 데리고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열쇠를 철문에 꽂았다. 뻑뻑한 열쇠를 힘껏 돌리자 오랜 먼지와 거미줄이 뒤엉킨 문이 철컥 열렸다.
막연하나마 거사 시기를 정하고 나서는 비서고와 황실 서고 앞마당에서만 머물렀다. 비서고에 있는 서책을 뒤지며 천룡을 부르는 방법과 금은화의 작용을 연구했다. 문예가 깊으신 할바마마도 오랜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던 고어 때문에 번번이 막혔다.
“그림은 알아보겠는데.”
금은화 문양이 새겨진 동그란 판과 금은화, 그리고 하늘로 뻗은 큰 기운을 묘사한 그림은 그날 보았던 광경과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기운을 탄 사람이 침착해 보인다는 것 정도.
“분명히 사람이 만들어서 사용한 것 같은데. 도술인가?”
전 같았으면 도술이 따위가 어디에 있느냐? 하겠지만. 눈으로 뻔히 본 걸 부정할 수 없으니 도술의 존재를 인정한 지도 오래였다. 다만 도술에 관한 기존 서책은 모조리 허무맹랑했고, 금은화의 작용과 비원에 관한 기록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비서고를 꼼꼼히 뒤져서 고어를 설명한 언해(諺解)라도 있지 않나 찾았다. 하지만 언해는커녕, 그림책도 몇 권 없었다.
“되는대로 부딪힐 수밖에 없나?”
금은화가 다 피기 전에 비원도 자세히 살펴야 했다. 그날 명채운을 잃고는 외궁은 단단히 잠겼다. 혹여 다른 사람이 또 휩쓸려 사라질까 걱정해서라곤 했지만, 사실은 명채운을 잊지 못한 태자가 비원에 드나들다가 혹여 나쁜 마음이라도 먹을 것 같아 내린 조처였다.
외궁은 드나드는 건 거기에 기거하는 할바마마의 이복아우이자 유일한 황숙인 은현왕의 가솔뿐이었다. 은현왕 또한 조카이자 현 황상의 조처에 깊이 공감하고 있기에, 태자 승원이 외궁에 드나들기는 힘들었다.
“어쩐다.”
몰래 잠입할 만큼 무예를 쌓았으나, 아예 안 들키고 가기에는 비원을 지켜보는 왕부군(王府軍)이 너무 많았다. 변장하고 드나드는 방법도 있으나, 그러기엔 제 몸집이 너무 커서 들키기 쉬웠다.
고민하다가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겠다 싶을 무렵 비서고를 나왔다. 숙직실에 식사와 갈아입을 옷가지가 있을 터였다. 잠시 쉬고 난 후에는 금은화 화분에 달빛과 이슬을 먹여야 했다.
숙직실 앞, 서고를 관리하는 문관이 볕을 쬐고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내어놓은 걸상과 차탁에 누군가 있었다. 키가 큰 그는 어깨가 좀 처지고 등이 슬쩍 굽었다. 무엇보다 머리가 희었다. 승원을 발견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대신 손을 들어 반겼다.
“태자 승원이 은현왕 전하를 뵙사옵니다.”
“인사는 됐다.”
무릎을 꿇으려 하자 종조부이자 황가에서 가장 높은 어른인 은현왕이 손사래를 치며 그만두라고 말렸다. 대신에 맞은 자리를 권했다. 송구하여 공손하게 앉았다.
“네가 그 아이에게 묶였다지? 탕약이나 침술도 전혀 소용이 없느냐?”
“예.”
할바마마가 살아 계실 적에 몰래 각종 약과 침술을 다 써 보았다. 달포 간격으로 불쑥불쑥 치솟는 양기를 독한 탕약으로 다스릴 뿐이었다. 그마저도 이젠 슬슬 소용이 없어지는 찰나였다.
“형님도 알고 계셨기에 내게 이런 걸 부탁하셨겠지. 때를 봐서 너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네가 정말로 마음을 먹었다면 알 수 있을 거라면서.”
종조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도 한참을 침묵하던 그는 스산하게 부는 밤바람이 잔잔해진 후에야 이윽고 입을 열었다.
“천하는 여럿이다.”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다른 사람이면 은현왕이 노망이라도 났나? 하겠지만 승원은 아니었다. 오히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은현왕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천인의 도래는 다만 설화가 아니었다. 금은화도 비원도. 음인도 양인도. 전부 선조인 천인이 남긴 것이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어딘가에 천인의 옛 나라가 존재했다. 제일 먼저 세워지고 가장 오래된 우리 신국에 새로운 나라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도 그 때문이었다.
두 나라를 오가는 문이 있어 옛적에는 자유롭게 왕래했다. 세상을 오가는 문은 사람이 사용하는 문과 달랐다. 동그란 동판을 꽃으로 열고 쏟아져 나오는 기운을 타고 가는 방식이다. 많은 문이 있었으나 다 소실되고 작금은 비원 바닥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 문을 여는 열쇠는 다름 아닌 금은화였다.
말없이 앉은 조손 사이에 찬 바람이 불었다.
“이것도 천명일 터. 각인증에는 어떤 약이 무용하니, 결국 네가 살려면 갈 수밖에 없다. 이대로 광인으로 죽게 할 순 없으니.”
할바마마와 똑같은 음성으로 하는 똑같은 말에 코끝이 찡했다.
“가거든 동판을 찾아라. 거기에 금은화를 대면 문이 열린다. 그쪽에 동판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쪽에 있는 동판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꼴일지 알 수 없다. 가는 길은 있어도 돌아올 길은 장담할 수 없는 이유였다.
은현왕은 때가 되면 기별을 하겠다고 약조한 후에 서고를 떠났다. 이후 승원은 묵묵히 무예만 닦았다. 몰래 각종 영약과 가벼운 무기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조용히 무예와 공부만 하면서 지내는 동안 아우가 무사히 태어났다. 건강한 양인 남아였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승원은 마음을 놓았다. 양인은 큰 사고를 당하지 않는 이상 튼튼히 자란다. 수명도 길다. 늦둥이는 별 탈 없이 자라 제 대신 황위를 이을 것이다.
마침 갓 태어난 늦둥이를 맞이한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이목이 잠자코 공부만 하는 큰아들을 떠나 있던 참이었다. 적기임을 직감하고 외궁에 몰래 기별을 보냈다.
“이달 보름에 오거라.”
달빛을 먹고 자라는 금은화는 이미 활짝 피었다. 낮에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찬란한 빛을 뿌렸다.
질긴 가죽을 곳곳에 덧댄 검은 무복과 가죽신을 신고 손에 잘 익은 검을 쥐었다. 금은화 화분을 들고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섰다. 그때 낯선 기척을 느꼈다.
스릉.
누군가가 지붕에 있었다. 승원과 똑같이 검은 무복을 입은 자객은 복면으로 얼굴을 반을 가렸다. 금은화 때문에 얼굴이 비친 승원을 발견하자마자 덤볐다.
챙! 챙!
지붕 위에서 난데없이 칼부림이 일었다. 금은화 화분 때문에 한쪽 팔이 묶인 승원은 빠르게 수세에 몰렸다. 아무리 한 손을 쓰지 못해 불리하다지만, 승원의 무예는 웬만한 무인은 검을 들지 않고도 제압할 만큼 뛰어났다. 하지만 상대의 검술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해서 양손을 다 쓰더라도 승원이 승기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챙. 챙.
뒤로 물러나다가 지붕 용마루 끝에 몰렸다.
“나는 태자 승원이다. 너는 누구냐?”
물음에 자객은 대답도 없이 다시 공격했다. 열 합을 주고받은 끝에 팔을 당하고 말았다. 하필 화분을 쥔 쪽이었다.
“어!”
떨어뜨린 화분이 아래로 추락했다. 박살 나서 금은화가 망가지면 큰일이기에 지체 없이 몸을 던졌다. 그러나 자객이 더 빨랐다. 그는 검을 이용하여 금은화 화분을 쳐올려서는 솜씨 좋게 낚아챘다.
“금은화를 노리는 거냐? 그것은 황가의 꽃이다. 이미 태자에게 검을 든 자체로 대역죄를 지었지만. 지금 놓고 가면 이 일은 어둠에 묻어 두겠다.”
당장 외궁에 가야 했다. 금은화를 빤히 보던 자객은 복면을 벗었다.
“당신은!”
“북방대장군, 명여운이라고 하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태자 전하.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채운의 누이인 여운은 극히 드문 여자 양인으로 황국제일검이자 뛰어난 명장이었다.
“어째서 나를 공격하였나? 채운의 복수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인가.”
만약 여운이 그렇다고 대답하면 승원은 순순히 목숨을 내어 줄 심산이었다. 그렇기에 들었던 검을 놓았다. 여운이 내놓은 대답은 영 예상 밖이었다.
“태자 전하께서 제 아우를 찾아 귀신 세계로 갈 만큼 실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여운이 어찌 그 사실을 알았을까.
“채운을 찾아 떠난다니.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잊었소.”
“은현왕부의 기별을 받은 이는 태자 전하뿐만이 아닙니다.”
“종조부께서?”
“전하 홀로 보내긴 우려스러우셨겠지요. 그렇다고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아무나 보낼 순 없습니다. 사리 판단과 무예 실력이 뛰어난 자여야 할 터.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했습니다.”
승원은 깜짝 놀랐다.
“그 무슨! 여운. 그대는 이 나라 북방을 책임진 대장군이오. 자리를 비우면 큰일이 날 거요.”
“제 자리를 대신할 자는 많습니다. 오히려 태자 전하야말로 황국의 태자라는 막중한 책임을 팽개치고 귀신 세계로 가실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채운은 내 정혼자요. 사실 성혼만 올리지 못했을 뿐. 부부의 연을 맺은 거나 다름없소. 그리고 채운이 그렇게 된 것은 내 책임이오. 그러니 당연히 내가 가야 하오.”
“채운은 제 아우이며 저는 그 아이의 유일한 누이입니다. 혈육의 정이 성혼도 올리지 못한 부부의 정보다는 깊겠지요. 명분을 따지면 제가 더 있지요.”
여운은 파리한 달빛 아래서 웃었다. 그의 의지는 결코 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양인이라지만 여인의 몸으로 대장군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전과 달리 외궁의 비원엔 풀 한 포기 없었다. 봉인과 금줄이 매단 을씨년스러운 우물을 보며 승원은 금은화를 화분에서 잘라 냈다.
먹물이 번진 듯 시커먼 밤하늘의 보름달이 마침 구름을 헤치고 드러났다. 금은화가 찬란하게 빛을 뿜었다. 스산한 바람이 붐과 동시에 우물 바닥에서 굉음이 울렸다.
쿠르르르릉!
자잘한 진동이 일면서 저 아래에서 큰 빛줄기가 용솟음쳤다.
“지금이오.”
승원이 신호를 하는 동시에 여운도 함께 몸을 던졌다. 두 양인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여운!”
“태자 전하!”
혹여 떨어지지 않도록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았다. 천룡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찬연한 빛의 기둥이 하늘로, 하늘로 솟았다.
“가는구나.”
외궁 가운데 있는 정자 기둥을 짚고 선 은현왕은 빛기둥 사이에 깃든 두 개의 인영을 확인하는 순간, 쓰고 있던 관모와 관복을 벗었다.
난데없는 빛기둥에 놀라서 뛰어오는 하인은 소복을 입은 주인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마?”
“황상께 죄를 고하러 가야 한다.”
새 황자가 태어난 기쁜 날인데 기뻐할 수 없는 죄인은 버선발로 황궁을 향하여 노구를 움직였다.
* * *
아침부터 하늘이 쾌청했다. 선선한 바람에 따사로운 햇살이 좋아 채운은 오전 산책을 나섰다. 당연히 카론이 함께였는데, 드물게 온도 데리고 나섰다.
보드라운 강보로 돌돌 만 온의 머리에 레이스가 달린 깜찍한 모자도 씌웠다. 덩치 큰 아비의 품에 폭 안겨 있는 모습이 하얀 고치 같기도 하고 작은 인형 같기도 했다.
“힘들지 않습니까?”
“뭐가?”
부쩍 큰 온이 이제 제법 무게가 나가기에 내내 안고 있어서 힘들지 않을까 했으나, 카론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했다. 하여간 힘 하나는 타고났다.
“모르면 되었습니다.”
온을 데리고 너무 멀리 가기는 어려워 정궁 정원을 한 바퀴 휘휘 돌았다. 싱그러운 햇살을 받아 이슬이 증발했다. 덩달아 올라오는 축축한 땅 냄새가 무척 좋았다.
산책길의 대장은 황후였고 황자를 안은 황제는 조용히 따랐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에 새로이 핀 꽃이나 싹을 요모조모 뜯어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모퉁이에 이르렀다. 정원과 정원의 경계를 긋는 키 큰 나무와 반듯하게 자른 관목이 이어지기에 뒤돌아서려는 찰나, 채운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쪽 그늘진 구석에 난데없는 바윗덩이가 있었다. 무른 석재를 자유자재로 깎아 화려하게 장식하는 라테시온 양식과는 전혀 다른, 당장 계곡이나 산에 던져놔도 어울릴 법한 자연석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아래 무성히 피어 있는 잎사귀였다. 잘생긴 잎은 일전에 채운을 무척 반갑게 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더덕이 어떻게 여기에?”
반가움 반, 놀라움 반에 카론을 바라보았다. 옹알거리는 온이 작은 손으로 검지를 잡아서 무척 기쁜지 내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카론이 이윽고 푸른 눈으로 채운을 담았다.
“좋아할 것 같아서 옮겨 왔다. 좀 더 자라면 알려 주려고 했는데…….”
기쁜 나머지 채운은 그를 와락 안고 말았다. 카론은 한 손으로는 온을 안고 다른 팔로는 채운을 감쌌다. 든든한 팔이 등을 꾹 눌렀다가 풀어졌다.
“고마워요.”
“뭘.”
감사 인사를 하자마자 냉큼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카론에게 넘겼다. 팔을 둥둥 걷은 채운은 더덕 머리채를 한껏 잡아 뽑았다. 쑥쑥 뽑혀 나오는 실한 더덕을 보자 절로 군침이 돌았다. 대여섯 뿌리만 해도 배부를 듯했다.
더덕 머리채를 잡은 채운은 카론을 보며 씩 웃었다.
“오늘 점심은 이겁니다.”
“어, 그래.”
신난 채운은 다소 놀란 카론을 데리고 냉큼 궁으로 돌아갔다. 그렌을 불러 더덕을 어떻게 요리해야 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한 뒤에 방망이와 화로, 석쇠를 가져오라고 했다.
주방장인 앤지가 각종 조리 도구를 가지고 나타났고 마그네와 올리아까지 합세했다. 정원으로 이어진 테라스에 다과상이 빠르게 차려졌다.
앤지가 씻어온 더덕의 머리채를 한 번에 비틀어 뽑은 다음 돌돌 까고 뒤이어 방망이를 들었다.
쾅쾅.
빵 만드는 방망이로 더덕을 신나게 패는 동안 마그네와 올리아는 옆에서 화로의 불씨를 키웠다. 앤지는 채운이 설명한 맛에 가까운 향료와 허브를 가져왔다.
온에게 젖병을 물린 카론은 차와 다과를 내오는 그렌과 함께 신난 황후 일당을 지켜보기만 했다. 채운은 너덜너덜해진 더덕을 내밀었다.
“이걸 이제 기름에 굽습니다.”
“맡겨 주세요.”
노련한 주방장 앤지는 석쇠에 더덕을 올리고 기름을 바른 다음 요리조리 뒤집어 가며 구웠다. 그동안 채운은 꿀과 매운맛이 나는 이국 양념을 섞었다.
“무슨 효능이 있는 겁니까?”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올리아를 향해 채운은 방긋 웃었다. 그는 의원답게 무슨 약초인 줄 안 모양이었다. 물론 더덕이 몸에 좋긴 하지만 채운도 어떤 약효가 있는진 잘 몰랐다.
“맛있습니다.”
“아. 식재료군요.”
낯선 재료여도 노련한 주방장답게 앤지는 더덕을 완벽하게 구웠다. 그 위에 섞은 양념을 바른 후에 채운은 제일 먼저 한입 왕 물었다.
씁쓸하고 달콤하고 알싸하면서 아삭아삭한 더덕의 맛은 고향에서 맛보던 것에 비해서는 한참 모자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향긋했다.
“맛있습니다.”
“그래? 한번 먹어 보고 싶어.”
신나서 구운 더덕에 양념을 계속 바르자 카론이 흥미를 보였다. 맨손으로 더덕 한줄기를 쭉 찢어 그의 입에 가져다 댔다. 조금 당황한 카론은 채운이 더덕을 더 가까이 대자 이윽고 받아먹었다.
용맹한 황제답게 와작와작 씹던 그는 갑자기 우뚝 굳었다.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다시 다문 다음 다급하게 일어서서 안고 있던 온을 마그네에게 넘겼다.
“…….”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그렌이 “폐하?” 라고 반문하자 카론이 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외쳤다.
“물!”
놀란 시종장이 재빨리 내민 물잔을 받아 든 황제는 그 자리에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 모습에 더덕 한 조각을 입으로 가져가던 올리아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턱.
빈 잔을 내려놓은 카론은 손으로 입을 문질렀다. 오만상을 찌푸렸다.
“매워! 혀가…… 불타는 것 같아…… 젠장.”
이번에는 직접 물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한 잔 더 마셨다.
“안 맵습니다.”
채운은 양념을 듬뿍 바른 더덕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그걸 본 카론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올리아는 집어 들었던 더덕을 놓고 손끝으로 양념만 콕 찍어서 혀에 발랐다.
“헉.”
의원은 물보다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택했다. 마그네는 채운이 더덕 접시를 내밀어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뒷걸음쳤다. 그렌은 한 점 권하기 전에 점잖게 줄행랑쳤다.
“좀 맵긴 해도 맛있는데요. 쓰지만 달고 맵지만 향기로워요.”
더덕의 맛을 이해한 사람은 역시나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앤지뿐이었다. 나중에 앤지는 고소한 버터와 꿀을 이용한 양념을 개발하여 라테시온식 더덕구이를 만들었고 그건 고기구이에 곁들이는 채소로 종종 올라왔다.
더덕 밭은 곧 텃밭으로 바뀌었다. 사냥터에 보낸 사람들이 채운이 원하는 각종 산나물을 캐 왔다. 가끔은 뭔지 몰라 아무거나 다 캐 오기도 했는데 그중에 알아보는 것을 건지고 다른 건 버렸다. 그렇게 산나물 몇 가지와 라테시온에서만 나는 머루 비슷한 열매 나무를 여러 종류로 심었다. 산책마다 텃밭을 돌보는 일은 채운의 즐거움이 되었다.
앤지와 함께 라테시온 음식으로 신국 맛을 흉내 낸 요리 몇 가지를 만들었는데 석찬마다 상에 올려 카론에게 맛이 어떤지 물어보는 것 또한 즐거움이었다.
“요정은 풀 맛을 즐기는군, 그래.”
“풀 맛이 아닙니다. 향기로운 겁니다.”
짐승 출신이라서 그런지, 카론은 채소의 향기로움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주는 걸 마다하진 않았다. 매워서 달콤한 주스와 물을 연거푸 마시면서도 한 접시를 비우곤 했다.
너무 매운 나머지 벌건 얼굴로 복숭아 주스를 홀짝이는 황제를 보며 채운은 그간 온을 생각하며 떠올렸던 사안을 꺼냈다.
“장차 온이 자라서 다닐 [학당]이 필요합니다.”
“하다?”
“학당, 배우는 곳입니다.”
“가정 교사 말인가?”
“아니오.”
이미 그렌에게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라테시온에는 다 자란 어른을 위한 큰 학교가 있었다. 대학이라고 불리며 자유롭게 토론하고 학문을 닦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글과 예절을 배우는 학당은 없었다. 아이는 전부 집에서 학습했다. 만약 집이 가난하거나 부모가 배움이 모자라 가르칠 수 없다면 어찌 되느냐고 물었더니, 공부는 귀족이나 혹은 부유한 자만 하는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가 책을 읽고 예절을 배우는 학교가 필요합니다.”
“선생이 필요하면 황궁에 부르면 된다.”
“그래서는 친구가 없습니다.”
친구의 필요성에 관해 설명해야 하나? 우려가 슬며시 고개를 들 때 카론이 말을 이었다.
“동료가 필요하다면 또래 아이를 궁으로 불러들이면 된다. 신분이 확실하고 예의 바른 놈으로 말이지. 같이 검술을 배우면서 흙바닥에서 뒹굴다 보면 친구가 되지 않겠나?”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레온은 아직 아기야. 제대로 걷지도 못 해. 지금 학교가 필요한 이유가 뭐지?”
예전 같으면 쓸데없는 일을 벌이려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추궁하려는 줄 알고 기분이 퍽 상했을 터였다. 허나, 지금의 채운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카론이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인 연유는 학당을 떠올리게 한 이가 바로 카론이기 때문이었다.
“부모가 돌보지 않는 아이를 돌보고 싶습니다.”
“고아원을 세우고 싶다는 건가?”
“고아원?”
“부모가 없는 애들을 키우는 시설이다. 전쟁통에 고아가 많이 생기긴 했지. 고아원을 세우는 건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애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결국은 굶어 죽거나 혹은 거지, 범죄자가 될 테니.”
구빈원 얘기였다. 물론 구빈원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채운이 원하는 학당의 역할은 그게 아니었다.
“부모가 있어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아이는 어떻게 합니까?”
카론은 온을 사랑한다. 그리고 온을 안을 때마다 “너는 나처럼 되지 않을 거야.”라며 속삭였다. 아들이 자신을 닮지 않아서 안심하는 사람을 보노라면 명치가 이상하게 답답했다.
“부모가 있는데 왜 돌보지 못하지?”
“세상엔 나쁜 부모도 있습니다.”
파란 눈이 채운을 향했다.
달그락.
들고 있던 식기를 놓은 황제의 손이 과실주를 향했다.
“내 얘기군.”
“네.”
빙글빙글 돌린 잔을 입가로 가져간 그는 남은 술을 모조리 비웠다. 표정이 약간 굳긴 했으나 화를 내진 않았다. 사실 카론 또한 채운이 무슨 말을 하든 화를 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학교를 세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어떻게 이용하겠단 건가.”
채운 또한 들고 있던 식기를 놓았다.
“우선 나라의 구석구석을 뒤져 아이를 다 찾아냅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상관없이 모든 아이는 찾아내서 이름과 나이, 고향, 부모 이름을 적습니다. 그리고 일곱 살이 되면 모두 학교에 보냅니다. 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책을 읽습니다. 자라면 가진 재주에 따라 다른 학교로 보냅니다.”
“강제로 모든 아이를? 귀족은 원치 않을 거다.”
“아이를 보내지 않으면 큰 세금을 내도록 합니다. 귀족은 원하지 않는다면 세금 내고 학교 빠지면 됩니다. 그 세금으로 학당을 꾸립니다.”
“무슨 명분으로?”
“이 나라는 전부 폐하의 것입니다. 폐하의 백성으로 키우겠다는 황명을 거스르는 만큼 제 몫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도 전부 이름을 적습니다. 폐하의 땅에 사니 당연히 세금을 내야 합니다. 세금은 가진 것에 따라 많이 내거나 적게 냅니다. 귀족은 많이 냅니다.”
한번 말을 꺼내자 설명이 길어졌다.
“귀족은 가진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폐하의 땅을 많이 사용하고 폐하의 나라를 두루두루 누립니다. 폐하의 사람을 멋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폐하에게 세금을 많이 내야 합니다. 귀족은 폐하의 관심을 많이 끕니다. 폐하의 관심을 많이 끌어 폐하를 더 귀찮게 하니 당연히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합니다.”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라니. 냉정한 계산법이군.”
“아니면 폐하를 귀찮게 한 만큼 황궁에 와서 요리하고 물레를 돌리고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합니다. 마구간 똥도 치웁니다. 귀족이 직접 합니까?”
“쿡.”
뭐가 우스운지 카론이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러진 않겠지. 아마 세금을 택할 거다.”
“폐하의 땅에 사는 사람은 모두 이름을 적고 누리는 만큼 세금을 냅니다. 누리는 것이 없는 사람은 거둬들인 세금을 사용하여 돌봅니다.”
“내 요정 황후 폐하가 이렇게 무서운 분인 줄 미처 몰랐어.”
“나는 요정도 아니고 무섭지도 않습니다. 옳은 일만 합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흥! 콧방귀를 뀌었다.
“네 의견은 타당해. 정착까진 약간 험난하겠지만. 불순분자를 골라내고 제국에 대한 황제의 장악력을 높인다. 더불어 귀족의 은닉 재산을 털 수 있을 거고 그 과정에서 불순한 사상을 가진 자들도 탄로 나겠지. 귀족 중 몇은 반발하겠으나…… 뭐,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반발하라지.”
송곳니를 씩 드러내면 웃는 황제에게선 투기가 흘러넘쳤다. 아무것도 없이 칼자루 하나 들고 제국을 일군 시황제였다. 그에게 덤벼서 살아남는 자가 있을까. 귀족들은 알아서 무릎을 꿇을 터였다.
지방 토호나 마찬가지인 영주가 제멋대로 왕 노릇 하며 사람을 주물럭거리는 이국의 풍조는 빠르게 고치는 편이 좋았다. 더불어 부모에게 핍박받는 아이가 더는 생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카론 같은, 태어날 때부터 불운을 진 아이가 생겨나 큰 불화를 일으킬지 누가 알겠는가.
카론은 어떤 세상이 되든 온이 강하면 된다고 하지만, 강하다고 해서 평화로운 삶을 누리진 못한다. 누구보다 카론이 그 증거가 아닌가.
온이 물려받을 천하는 풍요롭고 한가해야 한다. 그 작고 고운 손에 검이 들리는 일 없이, 붓과 피리가 들리는 아름답고 평온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채운은 카론과 함께할 일이 많았다.
* * *
전 대륙에 황제의 칙명을 받은 조사관이 파견되었다. 그들은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모든 아이를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가정의 불화가 드러났다. 아동 학대에는 엄격한 처벌이 따르기에 많은 부모는 무거운 세금이나 노역을 져야 했다. 라테시온 방식 호패법의 시작이었다.
부모로서 자격이 미달하는 경우, 아이는 황실 직영 보육원에 맡겨졌다.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다. 그 과정에 많은 세금이 들었으나, 카론의 명을 받은 아서 엘러가 대륙을 쑤시고 다니는 동안 어디선가 금화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일명 ‘요정 학교’가 세워졌다. 막대한 교육세를 지불하고 가정 학습을 택한 귀족 외에, 7살이 넘은 아이는 남녀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요정 학교에서 글과 예의범절, 그리고 각종 기술을 배웠다.
14세 이상 아이를 위한 기술 학교도 세웠다. 그중에는 의학교와 군사학교도 있었다. 요정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에는 채운은 관여하지 않았다. 라테시온 세상을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이 필요하고 어떤 기술을 키워야 하는지 몰랐다.
“건축 학교와 도예 학교는 곧 세워진다. 인쇄 학교와 농업 학교도. 학교를 하도 세웠더니 각종 직업을 가진 자들이 저마다 학교를 세우겠다고 달려드는군.”
카론은 산더미 같은 문서를 살피는 사이, 채운은 온을 안고 딸랑이 장난감을 흔들었다. 호패법을 비롯하여, 학교 설립과 민간 재산 조사 등등. 카론이 할 일이 너무 많았기에 산책을 하는 대신 집무실에서 간단히 간식을 나눠 먹는 일이 잦아졌다.
똑똑.
기척과 함께 아서 엘러가 들어왔다. 그는 황제보다 황후를 향해 먼저 고개를 숙였다.
“폐하.”
붉은 머리카락의 기사를 보는 순간 채운은 미소를 거두었다. 아서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가져오는 소식은 대부분 누가 죽었거나 도망갔거나 그래서 군사를 풀었다는 얘기였다. 카론에게 반발하는 세력이 많은 건 알지만, 그래도 피가 튀는 얘기를 마냥 즐겁게 들을 순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아서가 나타나면 채운은 자리를 피하곤 했다.
“제 침전에 있지요.”
“음. 끝나면 거기로 갈게.”
카론과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에 채운은 나왔다. 아서 엘러는 빙긋이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딸랑딸랑.
레온이 휘두르는 장난감 소리가 멀어졌다. 아서는 기척이 완전히 죽은 뒤에 용건을 꺼냈다. 가죽으로 만든 편지함이었다. 북부로 보낸 첩자가 보내온 보고서를 꺼내어 빠르게 훑었다. 카론의 시선이 아래까지 닿는 걸 보자마자 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푸논에서 일하는 자 중에도 목격자가 있습니다.”
보고서에는 북부 산맥 중턱에 갑자기 내리꽂힌 흰 빛기둥을 묘사하고 있었다. 왜 거기에 빛의 기둥이 생겼는지 몰라도 거기가 파사 놈들과 관련이 크다는 건 직감적으로 알았다.
“토벌대를 파견해. 거기가 파사의 본거지다.”
“네. 이미 조처했습니다.”
아서는 명령을 짐작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를 칭찬하는 대신 카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 그 자식은 뭐 하고 있지?”
“누구 말씀입니까?”
“제스 테퍼 블라드.”
이름을 듣는 순간 아서는 흠칫 굳었다. 늘 머금었던 장난스러운 웃음기마저 싹 사라졌다.
“수련 기사단 교관으로 있습니다.”
“북부 토벌대에 합류시켜.”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아서가 우물쭈물했다. 개인적인 원한이 아직도 남은 줄 착각한 놈이 “이제 슬슬 용서하심이…….”라고 주제넘은 말을 꺼냈다. 시퍼런 황제의 시선을 마주한 놈은 입을 얼른 닫았다.
“빛기둥이 다시 나타났다. 또 다른 요정이 나타날 수도 있단 얘기지. 황후처럼 유하고 무른 자라면 모르지만, 모든 요정이 그렇단 보장은 없다.”
“아.”
뒤늦게 의도를 알아챈 아서가 의미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 여린 황후조차 명궁이다. 기사가 아닌데도 말이지. 그리고 거기도 대단한 검사나 궁사가 있을 거고. 그런 자가 넘어와서 파사와 우선 접촉했다. 파사 놈들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고 아니면 적대 세력에 동화되었을 가능성도 있지. 무슨 얘긴지 알겠나?”
“그래서…… 알겠습니다.”
“그놈에게 전해. 일단 넘어온 자가 있다면 생존 확인 후에 의사소통을 우선한다. 우연한 사고로 넘어온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도로 왔는지 알아내라고 해.”
“예.”
명을 받은 붉은 머리기사가 나간 후에 카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채운이 그랬듯이 우연히 넘어온 것일까. 아니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온 것일까. 만약 의도가 있다면 채운과 관계가 있을까. 명확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이상하게도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이것을 당장 채운에게 전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우연히 넘어온 영 엉뚱한 사람일 수도 있다. 거기다가 괜히 말을 꺼냈다가 파사 놈들에게 살해당한 후라면 알리지 않은 것만도 못했다.
두 사람 사이가 간신히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괜한 소식으로 다시 황후를 흔들고 싶진 않았다. 뭐든 확실히 밝혀진 후에 알리는 편이 좋다고, 카론은 그렇게 여겼다.
* * *
세상을 오가는 백룡은 난폭하기 그지없어 데려갈 때도 홱 낚아채더니, 내려놓을 때도 내동댕이쳤다. 심지어 맨땅도 아니고 웬 산속 오두막 위였다. 무예를 익혔기에 태자 이승원과 대장군 명여운은 몸이 상하는 일 없이 착지하였으나 오두막 지붕을 부수고 말았다.
오두막에는 사람이 있었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사람 둘이 뚝 떨어진 덕에 그들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문양으로 짠 긴 천을 어깨와 머리에 두른 그들은 어딜 봐도 이국인이었다. 피부색도 다양하고 생김새도 저마다 달랐으나, 신국인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중에 한 사람이 움직였다. 여운은 검 끝을 조용히 내렸다. 싸움의 여지를 거둔다는 뜻은 아니었다.
움직인 상대는 젊은 남자였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무척이나 밝은 머리카락을 지닌, 대단한 미남자였다. 그는 승원과 여운을 향해 말을 걸었다.
“∀ẞỻ∐?”
당연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우린 신국인이요. 나는 승원, 이쪽은 여운이라고 하오.”
태자이니 대장군이니 하는 말은 뺐다. 어차피 알아봤자 이곳에서는 소용없는 지위였다.
“내 동생을 찾으러 왔다. 이름은 명채운, 분홍이라고도 부른다. 생김새는 검은 머리에 검은 눈, 예쁘고 귀엽다. 본 일이 있느냐?”
덩달아 외치는 여운의 말에 승원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대장군이 제 무예 실력을 확인한 만큼, 자신도 대장군의 판단력을 확인해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여운, 그래서 알아듣겠소? 여기에도 검은 머리, 검은 눈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있는데.”
“그냥 말해 본 겁니다. 어차피 말이 안 통하니까요.”
여운이 머쓱함을 감추려는지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동안 젊은 남자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의미를 알기 전에 함부로 접촉할 수 없기에 승원이 뒤로 물러났다. 상대는 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했다.
짤랑짤랑.
사내답지 않게 각종 팔찌를 주렁주렁 단 손끝이 승원이 쥐고 있는 금은화를 가리켰다.
“∀ẞỻ∐?”
“혹시 금은화를 아나?”
승원이 금은화를 들어 보이자, 그 남자는 다른 자에게 뭐라고 외쳤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다.
다른 자가 들고 온 물건을 젊은 남자가 들어 보였다. 제법 큰 둥근 원판 위에는 큰 꽃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꽃 주변을 따라 화려한 광배도 새겨졌는데, 그 모양이 어딜 보아도 금은화였다.
“이건가?”
손에 쥔 금은화를 들어 보이자 젊은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히 웃으면서 조용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ẞỻ∐.”
뭐라 말하는지 전혀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공격할 의도는 없어 보입니다.”
여운이 검을 거두며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 벽면에 촘촘한 무늬를 짜 넣은 걸개가 있었다. 온통 검은 옷을 걸친 사람의 형상이었는데 머리에는 화려한 광배가, 손에는 젊은 남자가 든 판을 다른 손에는 빛나는 꽃을 들고 있었다.
“전하를 알고 기다린 건 아니겠지요?”
“설마.”
검은 옷에 금은화를 들고 나타난 승원을 향해 모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말을 배우고 이계의 동태를 파악하는 동안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갑자기 정신을 차린 여운이 대장군으로 변모했다. 검을 완전히 거둔 그는 다른 자들에게 보란 듯이 승원을 향해 한쪽 무릎을 척 꿇어 부복하고 포권을 지었다.
모든 이들의 숭배가 오로지 승원에게만 쏠리는 순간이었다.
젊은 남자는 마을을 이끄는 자로 이름은 휼레였다. 눈치를 총동원하여 이것저것 알아본 결과, 여기는 세상의 중심부에서 동떨어진 깊은 산중으로 이들은 무슨 이유에선지 몰래 숨어 살아가는 소수민족이었다.
나무와 천막을 사용하여 지은 집과 집 안에 피운 모닥불을 기준으로 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풍습은 꼭 유목민 같았다. 하지만 유목민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가축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닭과 돼지 몇 마리 정도였다.
거기다가 승원과 여운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즉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유목민처럼 때가 되어 느긋하게 이동을 준비하는 것과는 다른 아주 다급한 모습이었다. 세간살이 중 당장 사는데 필요한 식량과 아이만 챙겨서 서둘러 마을을 떠났다.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늙은이와 어린아이, 여자를 중심으로 먼저 마을을 떠났고 후에 젊은 장정들이 수레에 여러 물건을 실었다.
어수선한 마을을 지켜보는 동안 휼레가 나타났다. 말 두 필을 끌어온 그는 각각을 승원과 여운에게 넘겼다. 낯선 방식의 안장을 얹은 것을 보니 타고 가라는 뜻이었다.
“걸어서 이동하는 다른 사람에게 주시오. 우린 걸어가면 되오.”
정중하게 거절했다. 여운도 마다하였다.
한사코 거절하자 휼레는 이윽고 말을 다른 이에게 넘겼다. 역시나 꼭 필요한 말을 양보했던 듯했다. 그들은 말 등에 큰 짐짝이 올렸다. 말을 끌고 가는 이들의 안색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떠나가면서 승원을 마주한 자들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뭐라고 빌었다. 그 행태가 마치 신령에게 가호를 비는 듯했다.
“구세의 천인이 되셨네요.”
여운이 툭 던졌다. 그저 정혼자를 찾으러 온 것뿐인데.
“곤란해지기 전에 빨리 뜨는 게 좋겠소.”
“원판은 제가 챙기지요.”
원판. 신국으로 돌아갈 문이었다.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해악을 끼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도둑질하고 싶진 않았다. 휼레에게 양해를 구하고 원판을 빌리면 어떨까 싶은 찰나였다.
뿌우우우.
멀리서 낮은 소리가 울렸다. 꼭 전장에서 사용하는 뿔피리 같았다.
푸르르륵.
멀리 새 떼가 날아올랐다. 동시에 마을을 둘러싼 숲이 수런거렸다.
“뭐가 빠르게 다가옵니다.”
여운이 검을 고쳐 쥐었다. 휼레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고함쳤다. 짐짝을 옮기던 자들이 짐을 팽개치고 숲으로 달아났다. 그러면서 휼레는 승원과 여운에게도 신호를 보냈다.
“일단 피하고 보시지요.”
여운의 판단에 따라 승원도 휼레가 달려가는 쪽으로 몸을 던졌다.
으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스릉.
대장군의 검이 뽑혔다. 그는 일부러 승원의 뒤를 점했다. 승원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휼레가 뒤처졌다.
분명 마을 사람의 것으로 들리는 단말마가 이어졌다. 짐승인가? 싶은 찰나 히잉! 하고 말 울부짖음이 들렸다.
쿠구구궁.
땅이 울리면서 갑자기 숲에서 거대한 군마가 불쑥 튀어 올랐다. 그 위에는 빛나는 갑주를 걸친 자들이 탔는데 저마다 가시 박힌 철퇴를 들고 거침없이 휘둘렀다.
악!
넘어진 자는 군마에 짓밟히고 선 자는 철퇴에 얻어맞았다. 그도 아닌 자는 거대한 검에 꿰뚫렸다.
“⋂ẨỾ∐!”
여섯에 불과한 기마병은 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농기구도 쥐지 않은 사람들이 혼비백산한 방향으로 쫓아왔다.
“무예를 익힌 군사입니다. 같은 문양이 새겨진 포를 둘렀습니다. 아무래도 토벌대 같습니다.”
“깊은 산중에 사는 이유와 도망간 이유를 알겠군.”
“아무래도 우리가 여기에 오면서 저들을 불러들인 모양입니다.”
죽어 나가는 마을 사람을 보자 죄책감이 물씬 들었다. 조용히 숨어 살던 자들이, 두 사람의 출현으로 인해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다. 마을을 짓밟고도 모자라 군사들은 무너진 천막에 불을 질렀다.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어딘가에 있을 저들 본대에 마을 위치를 알리는 봉화였다.
“으억!”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자 옷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린 휼레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를 발견한 자는 승원과 여운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군마 두 마리가 이쪽을 향했다.
두꺼운 말발굽이 휼레를 짓밟으려는 찰나, 승원은 몸을 던졌다. 그가 말을 탄 자를 기습하여 떨어트리는 동안, 여운은 넘어진 휼레를 일으켜 세웠다.
“⋂ẨỾ∐!”
“해치울까요?”
“어쩔 수 없지.”
승원 또한 검을 빼 들었다. 이계에 온 이유는 정혼자와 동생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목숨을 잃은 자들을 외면할 순 없었다.
군사들은 무거운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힘은 셀지언정 움직임은 둔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화살을 연거푸 쏘아댔다. 멀리서는 살을 쳐낼 수 있으나 근접하긴 어려웠다.
퍽!
대장군을 돕기 위해 승원이 바닥에서 쳐올린 돌을 찼다. 매섭게 날아간 돌은 군사의 말을 때렸고, 놀란 말이 펄쩍 뛰는 동안 등에 탄 놈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여운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갑주 사이 빈 공간을 찔린 자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다른 자도 달려드는 것도 비슷한 수법으로 해치웠다. 승원이 균형을 무너뜨리고 여운이 기회를 틈타 숨을 끊었다.
마지막 두 놈은 기습 방식을 깨닫고 한 놈은 뒤에서 승원이 움직이지 못하게 활을 쏘고 다른 놈은 앞에서 여운을 막는 식으로 방어했다. 제법 효과적이었으나, 한 사람을 잊고 말았다.
화르르르륵.
네 명이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 옆으로 돌아간 휼레가 불이 붙은 천막 지지대를 들어 말을 놀랜 것이었다. 놈들이 허를 찔린 사이 승원과 여운이 각각 한 놈씩 끝장내었다.
죽은 놈들의 말을 한 마리씩 차지했다. 휼레를 위한 말을 끌어오는 찰나, 휼레가 불타는 천막을 헤집고 뭔가를 가져왔다. 치렁한 겉옷을 벗어 둘둘 만 그것은 금은화가 새겨진 원판이었다.
휼레는 말에 오르자마자 먼저 앞장을 섰다. 숲길은 아무래도 그가 잘 알 터였다.
뒤를 돌아보자 검은 연기가 하늘 끝까지 치솟는 것이 빽빽한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 보였다. 동시에 먼 곳에서부터 뿔피리 소리가 계속 났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토벌대 본진이 움직이고 있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군사들이니 두 사람이 남긴 검흔이 저들의 무기와는 확연히 다름을 분명 분간할 터였다.
원하든 원치 않든, 승원과 여운은 이미 이계에 깊이 관여하고 말았다. 그것도 분명히 대단한 세력을 일군 지배자에게 크게 미움받는 소수민족의 일파로.
* * *
파사 일족의 본거지를 찾아내었고 대부분은 사살했으며, 흩어진 잔당을 쫓고 있다는 보고서가 도착했다. 요정이나 원판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기사 여섯 명을 순식간에 해치운, 대단한 검술을 가진 자가 나타났다. 모습을 본 자는 다 죽었지만, 남은 흔적을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적어도 둘 이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말도 세 필이 없어졌다.
높은 확률로 파사 일족과 결탁한 것으로 보인다는 말로 끝나는 보고서를 두 차례 정독한 후 카론은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 넘어왔고, 그것도 둘 이상. 그리고 파사와 접촉한 건 기정사실로 봐야겠군.”
“정말로 요정일까요?”
“아직 모르지.”
부관의 물음에 확답하지 않으면서도, 카론은 내심 그럴 것이라고 확신했다.
“만약 요정 일족이라면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파사 일족과 너무 동화되기 전에 우리 쪽으로 넘어오게 해야 한다.”
“이미 기사 여섯을 죽였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공격하니 반사적으로 맞선 걸 수도 있다. 황후조차도 처음부터 보통 성질머리가 아니었어.”
힘도, 체격도 현저히 딸리고 궁술 외에는 특별한 무기를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카론을 죽이겠다고 도자기 파편을 들고 덤볐다. 검술을 제대로 익힌 자라면 더할 터.
“절대로 정면으로 부딪치지 마라. 그들의 무력을 만만히 봐서는 안 돼. 산에 보낸 토벌대도 복귀시켜. 대신에 마을이 파괴되었으니 아마 살려고 곧 산 아래로 내려올 것이다.”
“산 밑에서 기다렸다가 잡을까요?”
“아니. 인명부에 등록하고 먹을 것과 그 외 필요한 생필품을 나눠 줘. 일이 필요하다면 일을 주고 말이야. 채찍만 휘두를 필요는 없으니.”
“네.”
“둘 혹은 셋일지도 모르는 자에 대한 추적은 테퍼 블라드에게 맡겨. 실력상 그게 맞으니까.”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카론이 싸늘하게 덧붙였다.
“이번에는 알량한 충성심이라도 보이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제스 테퍼 블라드.
한때 카론의 가장 신임하는 부관으로 배신의 쓴맛을 보여 준 자이기도 했다. 인간관계에 대해 심각한 불신을 심어 준 장본인을, 위험한 사지에 밀어 넣은 이유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 위함이었다.
“카론.”
골든 피오니로 돌아오자 채운이 반갑게 맞았다. 라테시온 식 재킷과 바지를 입은 그의 모습이 익숙한 만큼 황제를 맞이하는 그와 가볍게 입을 맞추는 일도 익숙했다.
입을 맞춘 후에도 카론이 허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자 채운은 왜 그러느냐는 듯이 시선을 맞추었다.
“왜 그러지요?”
“너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나여서 다행이야.”
“왜 그런 말을 합니까?”
“아니었다면 다른 놈이 너를 이렇게 안고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카론은 채운의 정수리에 코를 얹었다. 황후의 은은한 내음은 자신이 맡아 본 중 가장 훌륭한 향수였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미 폐하를 만났습니다.”
채운은 순수한 눈으로 카론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불안해. 누군가 널 훔칠까 봐 겁이 나는군.”
요정의 세계에서 넘어온 자들이 채운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채운처럼 그저 우연히 또 넘어온, 전혀 무관한 자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불안이 엄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채운을 잃어버린다면, 카론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찾으러 갈 것이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요정의 마성에 빠진 자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를 정작 당사자만 몰랐다.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훔친다고 훔쳐지지 않습니다.”
찌푸린 눈매가 미칠 만큼 예뻤다.
“폐하는 보물 상자에 든 보물을 지킨다고 했습니다.”
허를 찌르는 반박에 카론은 그만 웃고 말았다.
“맞아. 그랬지. 내가 너를 지킬 것이다.”
뺨을 겹치자 채운은 카론을 마주 안았다. 나긋한 손이 너른 등을 꼭 눌렀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채운을 데려가고자 한다면 그때는…….
* * *
화창한 빛이 내리쬐는 라테시온 황궁. 그중에서도 외궁에 위치한 기사수련장에서 하얀 검날 한 쌍이 번쩍였다.
챙!
날과 날이 부딪혔다. 불꽃이 튀는 공방이 이어졌다.
챙! 캉! 카캉!
묵직한 금속 두 개가 번뜩일 때마다 굉장한 소음이 일었다. 라테시온의 검은 고국의 검과는 확연히 달랐다. 훨씬 두껍고 길었으며 무엇보다 검이 곧았다. 양날 가운데는 홈을 길게 내었다. 손잡이는 금속으로 만들어 가죽을 대었으며 날 받침이 크고 화려했다. 그만큼 무거웠다.
패도적인 검을 막는 방패 또한 단단한 철 방패였다. 그 때문에 검과 방패가 부딪칠 때마다 굉음이 났다.
쾅! 쾅!
검과 방패를 한 번에 들고 덤비는 쪽은 둘이었다. 철컥대는 갑주를 제대로 차려입어 움직임이 다소 둔한 편이나, 공격하는 합이 좋아 빈틈이 거의 없었다.
챙! 캉!
그들에 맞서는 이는 상대적으로 팔과 어깨 일부의 갑주만을 걸친, 가벼운 차림이었다. 방패도 없이 장검과 단검을 각각 들었다. 공방이 계속 이어질수록 수세에 몰리는 쪽은 둘 쪽이었다.
쾅! 퍽!
검을 내려치는가 하면 금방 다리를 뻗어 빈 발목을 걷어찼다. 다른 놈이 뒤를 노리고 검을 휘두르는가 싶으면 단검으로 놈의 검을 받아 흘리면서 몸을 뒤로 뺐다. 자유자재로 휘어지는 사지는 놀랍도록 유연했다. 그러면서도 파괴적인 힘을 발휘했다.
쾅!
“억!”
기어이 방패를 놓친 자가 땅에 뒹굴었다. 다른 자가 뒤에서 공격했으나 상대가 보지도 않고 뻗은 장검의 끝이 목 끝에 닿는 순간, 우뚝 멈췄다. 넘어진 자의 목에도 단검이 겨눠진 상태였다.
“졌습니다. 폐하.”
승자는 겨눴던 검을 거두었다. 장검을 들어서 날이 상하지 않았나 살피는 동안 다른 기사들이 넘어진 기사를 일으켜 세웠다. 투구를 벗은 패자의 얼굴에 땀이 줄줄 흘렀다.
스릉.
검을 넣은 승자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너무 느려.”
“폐하께서 너무 빠른 겁니다.”
아서의 지적에 카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2대 1로 상대하지 않았나?”
“앞으로 3대 1로 하지요. 그리고 폐하도 갑옷을 착용하십시오.”
“얼마든지.”
아서의 도발에 카론은 도전적으로 웃었다.
“앞으론 심심하다는 이유로 멋대로 훈련에 끼어들어 차원이 다른 실력으로 불쌍한 기사들의 사기를 꺾지 마십시오.”
“내 수하의 실력을 알아야 하지 않나.”
“정확하게는 제 수하들이고, 저들은 황제를 직접적으로 대하는 근위 기사단이 아니라 일개 제도 기사단입니다. 멀쩡한 인간이란 말입니다.”
“어째 나는 아니라는 소리같이 들리는데.”
카론이 검집에 든 검으로 제 어깨를 툭툭 치는 동안 아서는 구원자를 찾았다.
“황후 폐하!”
“네?”
근처 그늘에서 검술을 구경하던 채운은 갑자기 저를 찾기에 의아했다. 무슨 수작인지 몰라 카론이 미간을 구기는 사이, 붉은 머리를 가진 기사의 날랜 혓바닥이 먼저 움직였다.
“황후 폐하께선 궁술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검술은 어떠십니까?”
“검은 잡아 본 일이 드뭅니다.”
“라테시온에서는 검술에 재능 있는 자는 성별을 가리지 않습니다. 제 아내 또한 기사입니다. 호신과 건강을 위해서 한번 배워 보심은 어떠합니까? 여기 무척 한가하신 폐하께서 아마 잘 가르쳐 주실 겁니다.”
이제 보니 훈련을 방해하는 카론을 떠넘기려고 꺼낸 말이었다. 웃음을 머금은 채운이 대답하기 전에 카론이 끼어들었다.
“검술이라니. 황후는 안 돼. 위험해.”
딴에는 저를 위한 변명 같긴 한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라테시온에선 검술에 성별을 두지 않는데 왜 자신은 안 되는 것인가. 검술을 배우다가 당연히 다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카론이 먼저 나서서 못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였다.
처음에는 큰 관심이 없었으나 갑자기 배우고 싶어졌다.
“나도 손발이 있는 멀쩡한 사람입니다. 배울 겁니다.”
“그래도 위험해.”
“위험한 검술을 폐하도, 아서도, 베로니카도 합니다. 다른 멀쩡한 사람도 합니다. 나는 안 됩니까? 왜요?”
“네가 아니라 내가 위험하다고.”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화가 난 네가 검을 잡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지금도 감당이 안 되는데.”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폐하에게 검을 겨누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넌 화가 나면 날 자주 때리잖아. 검술을 배우면 마음이 달라질 거다. 분명 날 찌르려고 하겠지. 네가 하는 건 뭐든 다 감내하기로 했으니……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라.”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연유를 간단명료하게 정리했다.
“폐하를 찌를 거면 제 침전에서 잘 때 벌써 찔렀습니다.”
“아. 그렇군.”
말하기 전까지 전혀 깨닫지 못한 눈치였다. 적잖이 안심했는지 카론은 기사를 시켜 가벼운 검을 내오게 했다.
“들어 봐.”
카론이 사용하는 검에 비해 상당히 얇고 짧은 데도 제법 묵직했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그어.”
시범을 보이기에 채운은 그를 따라 검을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그었다.
“팔꿈치를 옆으로 빼지 말고. 이렇게.”
간단하게 위아래로 휘두르는 데도 이것저것 지켜야 할 것이 많았다. 여남은 번 움직이자 벌써 힘들었다.
“한쪽만 쓰면 한쪽 팔만 굵어진다. 다른 쪽 팔로도 해 봐.”
팔을 바꾸어 휘두르는 동안 딱딱한 손잡이에 쓸린 손바닥이 빨개졌다.
“물집이 금방 잡히겠는걸. 검술용 장갑이 필요해. 부드러운 양가죽 장갑을 끼면 물집이 덜 생긴다.”
안 생긴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만 움직이라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어깨와 위 팔뚝이 아팠기에 슬슬 그만하고 싶었으나, 카론은 대단히 엄격하게 자세를 교정했다.
“팔이 자꾸 아래로 떨어져.”
“처…… 음이라 그런…… 겁니다.”
“더 빠르게.”
붕. 붕.
얇은 검이 바람을 갈랐다. 제법 멋지게 들려서 내심 카론이 뭔가 좋은 말을 해 주길 바랐다. 옆으로 비틀어진 팔꿈치를 툭 친 후 카론은 심각하게 읊조렸다.
“검이 춤을 추는군.”
검이 춤을 춘다니. 대단히 멋진 말이 아닌가. 채운은 내심 뿌듯했다. 명가는 재상 가문이지만 대장군을 배출한 무인 가문이기도 하다. 자신도 명가의 자손이니 검술 재능이 저에게도 있을 터.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검이 술 마신 사람처럼 춤을 춰. 직선 긋기도 안 되다니. 아무래도 넌 재능이 없는 것 같아. 하던 대로 궁술을 갈고 닦는 편이 어때?”
“뭐라고요?”
술 취한 사람처럼 춤을 춘다니! 다시 검을 움직이면서 자세히 보니 정말로 검 끝이 마구 흔들렸다. 똑바로 그어 보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성질이 퍽 나서 팔에 힘을 잔뜩 주고 똑바로 그어 보려고 했다. 구불구불 움직이는 검을 죽도록 휘두른 후에는 힘이 빠진 나머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철커덩.
멀리 날아간 검에 당황한 채운의 어깨를 카론이 토닥였다.
“역시 날리는 재능이 있잖아. 궁술이 제격이야.”
“이…… 씨…….”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날붙이 휘두르는 법을 배우겠다고 우기고 우긴 끝에 카론은 일반 장검이 아닌 단검을 권했다. 그것도 휘두르는 대신에 던지는 쪽으로.
퍽! 퍽!
단검이 과녁에 박혔다. 정말로 던지는 쪽엔 재능이 있는 건지, 처음부터 과녁을 빗나가는 일 없이 가장자리에는 꽂히더니 점점 중심 가까이 맞았다.
“이번엔 중앙에 맞았습니다.”
“역시. 장검은 아니야.”
내심 기분이 좋았는데. 장검에는 재능이 없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카론이 조금 아니꼽기도 했다.
단검 던지기는 금방 요령을 알았다. 카론이 더 말할 것도 없이 대부분 중심에 꽂혔고, 나중에는 제가 보내고 싶은 곳으로 조금이나마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채운은 더워서 재킷을 벗고 머리를 높게 묶었다.
“그러고 있으니 초보 기사 같군.”
언제 준비했는지 카론이 얇은 가죽 장갑을 건넸다. 부드러운 검은 장갑은 손에 꼭 맞았다. 그걸 끼자 단검이 미끄러지는 일 없이 더 잘 던져졌다.
“고맙습니다.”
“뭘.”
오후에는 점순이를 타고 황궁을 가볍게 돌았다. 적당히 몸이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쉬다가 걷다가를 반복하였다. 쌩쌩 달릴 수 있으면서도 예쁜이와 카론은 내내 옆을 지켰다. 특히 예쁜이는 자꾸 점순이에게 정답다는 듯이 주둥이를 부딪쳤는데 그게 마치 제 주인이랑 비슷하여 신경이 쓰였다. 예쁜이가 귀찮게 하는데도 점순이도 별달리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황궁 정원에서도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자 멀리 도성이 보였다. 굽어보는 광경이 무척 좋았다.
“라테시나 시가지가 보이는군.”
시가지를 직접 본 건 황궁으로 들어올 때가 다였다. 사실 그때는 벌벌 떠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라테시나에도 요정 학교가 두 군데 생겼다. 운영이 제법 잘 된다고 하더군.”
“궁금합니다.”
“보고 싶나?”
“네. 학교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이 세상을 제대로 본 일이 없습니다. 라테시온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합니다.”
아무리 이곳은 법도가 다르다 한들 황후가 함부로 궁을 나서는 일이 있을까? 조금만 따져 보아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궁금하니 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불러들여 음식을 베풀거나, 혹은 저잣거리를 잘 아는 이야기꾼을 불러들여 얘기를 들어 볼 수는 있을 터. 그런 부탁을 하면 카론이 들어줄까 잠시 고민하는 찰나.
“그럼 보러 가지.”
“예?”
“명령대로 학교를 잘 운영하고 있는지 직접 시찰해 보는 것도 좋지.”
“나도 함께 말입니까?”
놀라서 되묻자, 카론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네가 세운 학교이니 시찰은 당연히 네 몫이다.”
“황궁을 나가도 됩니까?”
“감옥도 아닌데 못 나갈 이유가 있나? 얼마 전에 제도 전체 치안 점검도 했고 학교엔 상주 경비병도 있고 또 내가 함께 갈 거고.”
카론은 오로지 바깥의 위험을 우려할 뿐, 황후가 감히 황궁을 들락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전혀 떠올리질 못했다. 금방 기대감이 차올라 가슴이 팔랑거렸다.
“어…… 언제 갑니까? 오늘? 내일?”
“오늘은 늦었어. 내일 미리 연락을 하고 이틀 후에 가도록 하지. 황제가 갑자기 나타나면 제도를 담당하는 치안 책임자들이 매우 싫어할 테니 말이야.”
시원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이틀 뒤라도 황궁을 나갈 수 있기에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함빡 웃고 말았다. 그러자 카론이 말에 탄 채로 상체를 기울였다.
쪽.
단단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대낮에 훤히 뚫린 장소에서 입을 쪽 맞추는 일이 아직도 부끄러웠다. 홧홧한 낯을 제대로 들 수 없었다.
“너는 웃을 때가 제일 예뻐.”
“그렇다고 이런 곳에서…… 으음.”
턱 아래 익숙한 손마디가 닿으면서 고개가 들렸다. 그러면서 다시 그늘이 졌다.
낯 뜨겁게도 혀를 얽는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제 입술을 탐하는 남자의 느낌이 생생했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입술 안으로 침범했던 그는 도톰하게 부푼 살점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면서 떨어졌다.
추웁. 촉.
어느새 귀 끝이 뜨거웠다.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면서 동시에 점순이의 기수 또한 돌렸다. 다각다각 걸어가는 동안에도 카론의 그림자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채운을 따라왔다.
오랜 산책을 끝내고 황궁으로 돌아와서도 머쓱한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검술이며 기마로 땀을 뺐기에 목욕하러 욕실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카론이 어쩐지 허리를 잡아 말렸다.
“내 침전의 욕실을 사용하지.”
황제의 침전은 그런 용도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낮부터 제 침전으로 가자는 얘기가 순수하게 들릴 리 만무했다.
“아……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았는데.”
“커튼을 치면 한밤중이야.”
역시나 그럴 생각이었는지 허리에 휘감기는 팔의 열기가 뜨거웠다.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더러울 제 이마에 닿은 채로 움직이는 입술이 “정말로 안 돼?”라고 졸랐다.
“안 되진 않은데.”
무척 곤란하여 얼버무렸다. 바로 싫다고 하지 않은 저에게 다소 놀랐다. 모호한 대답이건만, 허락으로 여긴 카론은 채운을 꼭 끼고 제 침전으로 향했다.
걸어가면서 채운의 옷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낸 못된 손은 침전에 들어서자마자 기어이 셔츠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
촉촉한 피부에 닿은 마르고 큰 손이 거침없이 누비는 자리마다 불꽃이 화르르 피어올랐다. 욕실에 들어가는 동안 신발과 바지를 벗었고 상대의 셔츠 또한 다 풀어 헤쳐졌다. 황제의 두꺼운 흉근이 오전 검술로 인해 사납게 굳어 있었다.
허리를 바짝 끌어안은 바람에 헤쳐진 상체에 두툼한 가슴이 닿았다. 땀으로 쩍쩍 달라붙는 살점을 포갰을 뿐인데도 염통이 날뛰었다.
“흐음.”
다시 이어진 입맞춤이 점점 깊어졌다. 코로 거친 숨을 뱉는 동안 카론은 채운을 아기처럼 훌쩍 안아 올렸다. 벌어진 허벅다리 사이에 딱딱한 복근이 닿았다. 엉덩이를 받치는 팔뚝에 힘이 들어가는 동시에 채운 또한 팔은 너른 어깨와 목에, 다리는 튼튼한 허리에 바싹 감았다.
“아…… 읏.”
반쯤 일어섰던 채운의 중심이 순식간에 꼿꼿해졌다. 동시에 벌어진 바지춤 사이로 사나운 기세를 머금은 것이 슬그머니 올라와 회음부를 찔렀다.
춥. 쪼옥.
카론에게 안긴 채로 욕실로 가는 동안 이미 정염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번지고 말았다.
“하면서 씻을까, 하고 씻을까.”
음탕한 질문과 함께 장난기 어린 푸른 눈이 휘어졌다. 그런 부끄러운 질문에 어찌 답을 하겠는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딱딱한 어깨에 얼굴을 묻었더니 사악한 황제가 기어이 답을 듣겠다고 맨 엉덩이를 찰싹 쳤다.
“앗!”
얼굴이 시뻘게졌다. 흔들리는 시선을 마주한 카론은 얄미운 미소와 함께 다시 입술을 쪽 맞췄다.
“대답해.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불러 둘 중 어느 쪽이 낫냐고 물어보겠어.”
진심은 아니겠거니 했는데, 카론이 보란 듯이 문 쪽으로 몸을 돌리는 바람에 기겁하고 말았다.
“하…… 하고 씻어요…… 하고.”
“현명한 선택이야.”
얄미운 미소와 함께 입술이 다가왔다. 못된 장난을 호되게 꾸짖어야 하는데. 혀의 놀림이 너무 달콤했다. 놀라서 벌어진 손가락으로 질긴 등가죽을 꾹 눌렀다. 곧 소름이 오소소 돋은 제 등에 마른 이불이 닿았다.
“하아아.”
푹신한 침대와 육중한 사내 사이에 끼인 채운은 팔랑거리는 폐부에 잔뜩 고였던 숨을 길게 뱉었다.
뜨거운 사내가 파도처럼 저를 덮쳤다.
* * *
승원과 여운은 험준한 산맥 속을 꼬박 삼 일 헤맸다. 추적자를 따돌리느라 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험지까지 들어갔기 때문인데 나중에는 늑대나 곰 같은 산짐승까지 어슬렁거려서 함부로 이동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지리에 익숙할 휼레를 따라가는 동안 태양의 위치로 보아 확실히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건 확실했다.
때로는 여운이, 때로는 승원이 자처하여 산짐승을 쫓아내고 또 수시로 다가오는 추적자를 따돌리기 위해 기습 매복을 반복하자, 놈들도 학습하였는지 흔적을 따라올 뿐 가까이 오진 않았다.
험준한 산새가 점점 낮아지고 나무 둥치가 가늘어지면서 어느새 오솔길 같은 것이 나타났다. 산맥을 거의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휼레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근처를 자꾸 가리켰다. 조금만 더 가면 뭔가 나온다는 뜻 같았다.
“쉬지 않고 바로 내려가는 것이 어떻겠소?”
“좋습니다.”
여운이 동의하였기에 승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휼레도 많이 지친 상태였다. 빨리 산을 벗어나 제대로 된 휴식이 필요했다.
셋이 모였기에 기다릴 사람이 없어 빠르게 이동했다. 추적자의 기척도 없어서 다소 서두른 감도 없지 않았다.
퍽.
“윽!”
여운이 갑자기 꼬꾸라졌다. 허벅다리에 이국식 화살이 박혔다.
“여운!”
승원이 급하게 그를 부축하며 몸을 숨겼다.
퍽!
하나가 승원의 이마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나무에 박혔다. 휼레가 금방 주저앉으며 뒤쪽 어딘가를 가리켰다. 부상을 입은 여운을 근처 굵은 나무 아래 앉혔다. 휼레가 그 곁에서 활을 들었다.
스릉.
검을 빼고 활이 날아온 방향을 주시했다. 검은 그림자가 술렁거렸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집중하지 않으면 쉽게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매복 실력이 뛰어난 누군가가 도사렸다.
‘이렇게 가까이 올 때까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쉽게 볼 대상이 아니었다. 옆을 슬쩍 살피자 여운은 옷깃을 찢어 상처 위를 동여맸다. 당장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저자를 처리하지 않고 움직였다가 크게 당할 수도 있었다.
훌쩍 뛰어놀라 검으로 자갈을 찍어 올려 발등으로 찼다. 화살보다는 못해도 상당히 빠르게 날아가는 딱딱한 돌덩이를 막아 내느라 놈의 움직임이 커졌다. 더는 매복의 의미가 없었다. 놈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습을 드러내면서 승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캉!
다른 병사들이 사용하던 것과 비슷한 검이었으나 무게가 훨씬 무거웠다. 검 자체의 무게가 무거워 보이진 않았다. 몸의 중심을 이용하는 상대의 실력이 뛰어났다. 승원은 공격을 흘리면서 반격했다. 곧은 검은 공기를 가르기 어렵기에 한 손으로 자유자재로 이용하기 매우 까다로운데도 놈은 마치 곡도처럼 유연하게 휘둘렀다.
챙! 캉! 캉!
세 합을 주고받은 후에 잠시 떨어졌다. 놈은 키가 매우 컸다.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는데 코가 높고 눈은 푸른색이었다.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꽉 다문 입술에서 냉랭한 기운이 흘렀다.
슉.
휼레가 활을 쏘았다. 쳐대는 대신 놈은 어깨를 간단히 돌려 활을 피하면서 한쪽 팔을 들었다. 휼레가 가진 이국식 활을 축소한 작은 활이 팔에 묶여 있었다.
챙!
날아가는 화살을 쳐낸 건 불편한 다리를 디디고 선 여운이었다.
상대는 연달아 활을 날렸으나 다리는 다쳤을지언정 팔과 눈은 멀쩡한 여운은 제게 날아오른 활을 연이어 칼등으로 쳐냈다.
“너, 뒈질 줄 알아.”
이를 아득 무는 대장군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다리에 활을 맞았더라도 놈을 능히 잡아 죽일 기세였다. 다리 부상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지 여운은 시시각각 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건 승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슉! 슉! 슉!
휼레가 있는 방향에서 약간 떨어진 뒤쪽에서 화살이 막 날아왔다. 짧은 활은 놈들이 쓰는 것과 비슷했으나 좀 더 컸으며, 깃의 색깔이 달랐다.
“ẞỾ∐⁋‽⁅!”
휼레가 몸을 돌리며 활이 날아온 방향 쪽으로 손짓했다. 수풀을 흔들리면서 불쑥 몸을 드러낸 자는 총 네 명이었는데, 그들은 휼레를 보호하듯 활과 검을 겨누었다.
전세가 완전히 바뀌자, 검은 습격자는 바로 몸을 돌려 풀숲으로 달아났다. 휼레를 위시한 새로 나타난 자들이 동시에 활을 쏘았다. 그러나 멀리까지 놈을 쫓진 않았다.
“‽ẨḚḾẻᶋ?”
새로 나타난 자들은 승원과 여운을 향해서도 검과 활을 세웠는데, 휼레가 급히 그 앞을 막아섰다. 직접 활 등에 손을 얹어 내리자 그들은 어리둥절하여 휼레를 보았다. 이국말이 빠르게 오갔다.
원판을 내보이며 설명하는 휼레의 말을 듣더니 금방 놈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직후 그들은 승원과 여운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손을 모으는 자도 있었다.
“이번에는 대장군도 신령이 되었는데.”
아파서 그런 건지, 혹은 불편해서 그런 건지 여운은 온통 얼굴을 찡그렸다.
새로 나타난 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산을 내렸다. 늦은 밤에 산 어귀에 도착하자 지붕을 씌운 수레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국식 마차였다. 안에는 각종 짐이 가득 있었다. 휼레가 먼저 올라 안쪽에 몸을 숨겼다.
마차에 오른 자는 휼레를 비롯한 승원과 여운뿐이었다. 말도 없이 조용히 도착한 곳인 신비로운 양식의 석조 건물이었다. 휼레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휼레의 일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마을에서 봤던 자도 있지만 대부분 모르는 얼굴이었다. 여운과 승원의 등장에 대단히 충격을 받았는지, 그들 사이에 날카로운 이국어 몇 마디가 오갔다. 휼레가 그들을 진정시켰으나 경계 어린 눈빛이 승원과 여운을 감쌌다.
말을 주고받던 휼레는 내내 지니고 있던 원판을 꺼냈다. 분위기상 어쩐지 승원도 품에 지녔던 금은화를 내보여야 할 것 같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꽃을 보자 경탄이 터졌다. 경계심이 사라지고 오로지 충격이 가득했다. 몇몇 노인들은 무릎을 꿇고 눈물도 흘렸다. 조용히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들의 신령이 되어 버린 것 같지요?”
“나중에 문제가 될까?”
“나중은 모르겠고, 당장은 먹고 잘 수 있게 되었으니 신령 행세를 하는 것도 좋지요.”
“동감일세.”
금은화의 신비로움으로 저들의 환심을 산 후, 치료를 받고 상처를 실로 꿰맸다. 여운은 아프면서도 신령의 위엄을 잃지 않기 위해 꾹꾹 참았다. 그사이 승원은 많은 음식과 술을 대접받았다. 혹여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술은 사양했더니, 나온 술은 고통을 감내하고 계신 대장군의 입속으로 모조리 사라졌다.
머무는 집은 대단히 큰 건물로 겉을 건물로 둘러싸고 도리어 안으로는 작은 연못이 있는 돌 마당이 있었다. 자갈이 깔려 있어 누가 나타나도 소리가 났다.
마당을 빙 돌아 들어간 방은 대단히 크고 시원한 곳으로 두툼한 깔개와 등받이로 이루어진 좌식 구조였다. 거기에 풍성한 옷자락을 걸친 자들이 서넛 앉아 있었다. 그들은 승원과 여운을 보자 일어서는 대신 앉은 채로 머리를 숙였다.
화려한 비단으로 꾸민 상석이 셋이었다. 아주 중간은 약간 띄워 두고 한쪽에 두 자리, 다른 쪽에 한 자리가 있었다. 승원과 여운이 제 자리를 찾자 휼레도 앉았다.
곧 과일과 음식이 들어왔다. 고기 요리는 좀 누린내가 났으나 먹을 만했고 과일이 참 달고 시원했다. 밀가루로 구운 화권도 있었는데 고소하고 맛이 좋았다.
음식을 물린 후에 휼레는 둘러앉은 자들과 뭔가 심각하게 의논하였다. 아무래도 산속 마을이 파괴되었으니 좋게 얘기하진 못할 터였다.
이국어를 들어도 이해할 수 없으나 그래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어떻게든 눈치로라도 알아보려 노력하던 참이었다. 약간 지겨운 듯이 몰래 하품하던 여운이 별안간 고개를 번뜩 들었다.
“분홍?”
휼레를 비롯한 다른 이들이 일제히 여운을 바라보았다.
“방금 분홍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동의를 구하듯 승원을 향해 물었으나 딱히 그렇다 하기 어려웠다. 졸다가 일어난 여운의 실수로 여긴 승원이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자 그들이 다시 머리를 맞대고 뭔가 심각하게 의논했다.
“음?”
“이번에는 전하께서도 들으셨지요?”
“그렇소.”
영문을 모르는 휼레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혹시 분홍을 아시오?”
“푸논?”
“그렇소! 그거요! 분홍이 내 동생입니다. 분홍. 명채운. 분홍. 분홍이 말입니다.”
여운이 참지 못하고 빠르게 분홍을 연발하였다. 그러면서 혹여 아는 사람이 있나 싶어 앉은 자들과 두루 눈빛을 맞추었다. 승원도 마음이 급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자신을 신령으로 여긴다면 정혼자인 채운 또한 그런 귀한 대접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딘가 채운이 무사히 살고 있으며, 또한 그 존재를 이들이 알고 있지 않을까.
“푸논.”
“푸논. ḚḾẻᶋ⁋.”
이국어 사이로 분홍이라는 말이 반복되었다. 휼레 또한 분홍을 아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분홍을 찾아왔소. 분홍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시오.”
승원도 채근하자 휼레는 그들이 보던 지도를 끌어와 보였다. 그리곤 한 곳을 짚었다.
“푸논.”
부풀었던 기쁨은 휼레가 짚은 곳을 보자마자 한풀 꺾였다. 여운은 휼레의 손을 치우고 지도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곤 그가 짚었던 자리를 뚫어져라 보다가 불쑥 물었다.
“여기 왜 그놈들의 표식이 있지요?”
말 그대로였다. 휼레가 짚은 자리엔 산속에서 휼레의 일족을 죽이고 승원과 여운에게도 매서운 공격을 감행했던, 그 지배자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채운의 아명과 말소리가 우연히 일치한 것임이 분명했다. 여운과 승원은 짧은 협의 끝에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넓은 세상 어디에서부터 그를 찾을 것인가.
“푸논으로 가야겠소.”
우연의 일치라도 이름이 정겨워 아무래도 그리로 마음이 기울었다. 승원의 뜻에 여운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푸논으로 갈 것이오.”
승원이 다시 지도를 가리키며 휼레에게 전했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상관없었다. 여운의 상처가 낫는 대로 바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비록 승원과 여운 덕분에 휼레 일족이 큰 희생을 치렀으나 족장인 휼레를 보호하여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어느 정도 신세를 갚았다. 또 둘은 외모가 달라 어디서든 눈에 띌 터이고 그것이 숨어 사는 이 일족에게 더 부담될 것이다.
돈과 이곳 옷을 좀 얻으면 좋겠다 싶어 눈에 띄는 대로 일손을 거들려고 했다. 장작을 나르면 얼른 나눠 들었고 청소하면 얼른 신기한 모양의 큰 빗자루를 대신 받아 바닥을 쓸었다.
그건 여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여운은 어쩐지 여자들에게 휩싸인 경우가 많았다.
“나는 양인인데.”
어딜 봐도 양인처럼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 둘러싸자 여운은 매우 난처했다. 게다가 이국식 복장은 몸매를 한껏 드러내고 있어서 눈을 아무 데나 두기 힘들었다. 툭하면 팔짱을 끼고 재잘재잘 웃으면서 여운을 이리저리 건드려 보는 순진한 행동도 문제였다.
“전하.”
여운이 도움을 청했으나, 여인들에 관해서 만큼은 승원 또한 어쩔 도리가 없어서 고개를 젓고 도망쳤다. 그보다는 제가 무슨 일을 하려고 들면 한사코 말리면서 못 하게 하는 것이 더 문제였다.
승원과 여운이 난처한 가운데 휼레가 나타났다. 그는 역시나 알아듣지 못할 말로 뭔가를 설명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지경에 이르자 그는 지필묵을 내왔다.
뾰족한 철심에 검은 먹물을 찍어 책으로 엮은 종이에 문자를 썼는데 그걸 가리키며 “푸논.”이라고 했다.
둘이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동안 휼레는 간단한 문자와 그림을 계속 그렸다. 습격한 군사의 표식을 그리고 나서 뭐라고 썼다. 옆에 칼과 활, 빛나는 관을 그렸다.
“왕이군.”
“라테시온.”
왕의 이름은 라테시온이었다. 그 밑으로 칼을 들 자를 그리고 또 그렸다. 이윽고 동그라미로 따져서 엄청나게 채웠다.
“라테시온. 대단한 세력을 가진 왕. 알겠다.”
그림으로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었다. 그는 라테시온이 제 일족을 죽이는 그림도 그렸다. 그리곤 지도를 가져와서는 북부 산맥과 지금 그들이 있는 마을 위치, 푸논의 위치. 그리고 왕이 있는 도성을 가리켰다. 도성은 아주 멀었다.
마을에서 푸논까지 가리킨 다음 말을 그리고 해와 달을 그린 다음 작대기를 세 개 그렸다. 마을에서 푸논까지 말로 3일. 그리고 푸논에 동그라미를 치고 칼을 든 자를 그린 다음, 뭔가 작은 표시를 그렸다. 후에 휼레는 제가 가지고 있는 작은 패를 보여 주었다.
“호패군.”
승원과 여운은 호패가 없었다. 그에 승원은 휼레가 쓰던 이국식 붓을 대신 받아 훌쩍 뛰는 두 사람을 그렸다. 둘이서 크게 뛰는 모습을 그린 다음 달과 별을 그렸다. 여운이 옆에서 뛰는 동작을 취했다.
고개를 저은 휼레는 다시 붓을 가져가 푸논 옆에 병사를 많이 그렸다. 그리고 큰 담도 그렸다.
“성이군.”
숨어들기 쉽지 않을 터였다.
“ẞỾ∐⁋‽⁅!”
푸논을 가리킨 휼레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거기를 왜 가냐는 듯이 눈빛으로 물어보기도 했다.
“내 동생 분홍이를 찾아야 하오.”
말로는 전할 수 없기에, 휼레는 사람을 시켜 다른 지필묵을 가져오게 했다. 세 사람은 둘러앉아 각자 그림으로 분홍이를 찾아온 것을 설명했다.
여운이 사람을 그리고 그 아래 네 명을 그린 다음 세 번째에 동그라미를 치고 저를 가리켰다. 그리고 네 번째를 가리키며 “분홍.”이라고 불렀다. 금은화와 원판을 그렸다.
“분홍이를 찾아왔소.”
휼레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는 급하게 그림을 그렸다. 아까와 똑같이 라테시온 왕을 그린 다음 옆에 작은 사람을 그렸다.
“아가르타 라테시온.”
콕 찍어 그리 불렀다. 긴 머리를 검게 칠한 다음 얼굴 앞에 손을 휙휙 저었다. 여운과 승원, 그리고 작은 사람을 번갈아 가리키며 얼굴에 손짓 했다.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섬찟하게 했다. 휼레는 두 사람이 손을 잡은 모습까지 꼼꼼하게 그린 다음 그 아래 작은 사람을 그리고 크게 원을 둘렀다.
“카론 라테시온, 아가르타 라테시온, 레온 라테시온.”
그의 그림이 무슨 뜻인지 명백했다. 그래서 승원의 머릿속은 흐려졌다. 여운 또한 입을 떡 벌린 채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