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목이 말라 죽으려 하기에 인심 한번 쓴 셈으로 쳤다. 물바가지로 목을 축여 주었더니 더 달라고 해서 물꼬를 좀 텄다. 그랬더니 이 흉악한 작자가 아주 작정하고 달려드는 게 아닌가. 밤낮으로 홍수가 났다.
넣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더니 아주 허벅지살에 불을 붙일 기세였다. 기름을 아끼지 않고 썼는데 기어이 속살이 홀랑 다 까졌다. 도깨비 놈의 방망이가 울퉁불퉁한 돌덩이 같기 때문이었다.
“이젠…… 안 합니다!”
쉬지 않고 시달린 날, 알몸을 이불로 둘둘 감고는 카론의 침대에서 냉큼 도망쳤다. 다음날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내내 잤고 석찬도 걸렀다.
숨을 좀 돌리고 드디어 쉬는가 했다. 분명히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열쇠는 제가 목에 걸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문을 두들겨 부수는 소리도 없이 밤에 침대로 오르는 거한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곁에 누워만 있겠다.”
이미 반쯤은 헐벗은 주제에 딴에는 소박맞은 개새끼 흉내를 내는 모습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어느 황궁에나 비밀 통로는 있다.”
“비…… 밀 통로…… 라니.”
이를 아득 물었다. 그래. 전부터 어쩐지 이상했다. 마그네도 모르게 들어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침대로 올라와서는 한사코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하기에 피곤한 김에 딱 한 번 더 믿어 주었다.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못된 손이 가슴팍으로 뱀처럼 기어서 들어왔다. 가만히 있어도 모자란 판에, 하도 빨려서 쓰라린 살점을 둥글리며 희롱하려 들었다.
찰싹!
못된 손등을 매섭게 후려쳤다. 눈을 흘기는 일도 피곤하여 몸을 반대로 홱 돌렸다. 우뚝 굳는 기척과 함께 잠시 얌전하던 황제 놈은 잠이 들려고 할 시점에 슬금슬금 다가와 다시 허리를 끌어안으며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빨판 같은 입술은 뒷덜미와 어깨에 척 붙었다.
[참으로 귀찮은 개놈이다.]
혼자 중얼거리는데 뒤에서 쿡쿡 웃음소리가 넘어왔다.
“네가 하는 요정 말은 새의 지저귐과 비슷해. 알고 있나?”
[네 지껄임은 미친개가 짖는 소리와 비슷하구나.]
“더 말해 봐.”
[싫다. 이만 자라, 개종자야.]
아이의 아비가 되었으니 개종자라고 부르지 않으려던 결심이 어디 갔는지 욕이 절로 나왔다. 암팡지게 쏘아붙인 분홍이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자는 척을 했다.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들어가며 커다란 몸이 바싹 붙었다.
“또 그렇게 부르는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놈은 계속 개종자, 개종자, 중얼거렸다. 상스러운 욕임을 알면 저렇게 좋아할까? 언젠가 무슨 뜻인지 알려 주어 오만상이 찌푸려지는 꼴을 볼까. 아니면 서슬 퍼런 황제가 저를 개종자라고 칭하며 웃는 등신 꼴을 남몰래 평생토록 볼까.
찬찬히 사유하는 자체가 우스운 질문이었다. 언뜻 떠올려도 답은 후자였으니.
밤새도록 지분거려서 잠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든 놈은 날이 밝자마자 냉큼 나가지 않고는, 조찬까지 느긋이 즐겼다. 그렇지 않아도 피로하여 입맛도 없는데 얄미운 낯짝을 마주하고 있으니 절로 체기가 생겼다.
달콤한 주스만 홀짝이는 사이 식욕이 왕성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아침부터 푸짐한 음식을 양껏 해치우셨다. 저렇게 먹어서 모은 힘을 어디서 발산할까? 내심 저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햇볕이 너무 강하군. 궁 안을 둘러볼까?”
역시나 발정이 나도 단단히 난 짐승 놈은 산책을 핑계 삼아 또 으슥한 구석으로 끌고 갈 태세였다. 밤새도록 그렇게 귀찮게 하고도 정신을 전혀 차린 기색이 아니었다.
한가한 얘기를 하며 계속 버티기에 눈치를 주었다.
“황제 폐하는 바쁘지 않습니까?”
“너와 시간을 보낼 여유는 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나라가 없습니다. 칼만 쓰는 사람은 산에 사는 도둑입니다. 온이는 황자가 좋습니다. 나도 황후가 좋습니다.”
네가 태만하여 나라가 망하고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면, 칼만 휘두를 줄 아는 주제에 산적과 무슨 차이가 있나, 산적 자식에 산적 배우자로 살 생각 없다. 황후, 황자 노릇은 하게 해라. 아직 말이 짧아 구구절절하게 이를 능력이 없었다. 제 어투에 익숙한 카론은 말귀를 척척 알아들었다.
“고작 이런 여유를 가진다고 제국이 무너지지 않아.”
“게으른 황제, 못났습니다. 못난 황제 싫습니다.”
직설적으로 싫다고 면전에서 던진 것도 모자라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에 곁에서 시중을 들던 마그네마저 숨을 죽이며 둘의 눈치를 보았다.
전 같으면 크게 싸우거나 냉랭한 신경전이 오갔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정말로 싫은 티를 내니 카론이 먼저 물러났다.
“알겠다. 산책 전에 모두 처리하겠다.”
겉으로 듣기엔 카론이 단순히 빠른 정무 능력을 과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자리에 일어서면서 부딪힌, 짙은 청금안을 본 분홍이는 속뜻을 바로 간파했다.
‘일만 다 하면 홀라당 벗겨지겠구나.’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았다. 카론이 나가자마자 분홍이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벗어 놓았던 재킷을 입자 마그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십니까?”
“나도 몰라.”
따라나서는 마그네를 향해서 고개를 저었다.
“너는 온을 보아라.”
“카론 폐하께서 찾으실 텐데요.”
“그래서 가는 거야.”
의도를 알아들은 마그네는 더는 잡지 않았다. 그가 온을 잘 보살펴서 얼마나 다행인지. 분홍이는 서둘러 방을 떠났다.
어디로 가야 카론이 찾아오지 못할까. 황궁 어디에도 사람이 넘쳐났다. 황제와 황후가 기거하는 층은 겉보기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사람이 없는 줄 알면 오산이었다. 주인을 방해하지 않도록 궁인들끼리 오가는 통로가 따로 있었다.
큰 집안을 이끈 큰엄마가 이르길, 하인들은 눈치를 백번 보고 항상 근처에 있음이 당연하였다. 주인이 어디로 어떻게 오가는지 기민하게 알아야만 그들이 제 일을 잘할 수 있었다. 가끔은 보고도 못 본 척하여 그들의 숨구멍을 틔워 주는 게 좋다고 했다. 굳이 하인들의 통로를 들쑤시지 말라는 뜻이었다.
궁인들의 도움이 없이 숨을 장소는 많지 않았다. 더불어 카론은 말 한마디로 궁인 전체를 동원하여 저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아주 색다른 곳에 몸을 숨겨야 산책을 피해 편히 쉴 수 있었다.
창고? 차고 궁색하다.
침대 밑? 불편하고 궁색하다.
다락? 다락으로 가는 방도를 모른다.
이 넓은 황궁에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한 군데는 있을 텐데. 궁리하다가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서궁.
거길 나온 이후로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다. 거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부가 선덕하고 뒷덜미가 쭈뼛했다. 굳이 거기까지 가야 하나? 싶었다. 잠시 망설였다.
침전을 나와 잠시 복도를 서성이는 중이었다. 부드러운 비단으로 지은 셔츠와 바지는 고국에서 입던 복식에 비하면 신체에 잘 들러붙었다. 그 말인즉, 부은 곳이나 쓰린 곳이 있으면 걸을 때도 곧잘 건드려서 저릿저릿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특히나 허벅지 사이와 젖꼭지가 그랬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젖먹이 자식도 제대로 못 빨아 본 것을!’
귀찮다고 그만하라고 하는 데도 물고 빨고 지분거릴 거면 성노가 아니고 무엇인가. 귀애하는 마음을 알았다고 해서 다 받아 준다고 한 적도 없는데. 혼자서 동락의 만 리 길을 닦고 있으니. 성질이 아니 날 수가 없었다.
노여움이 불쑥 솟았다. 이런 기분으로는 서궁이든 어디든 못 갈 곳이 없었다.
[아니지. 반대로 생각하면 시위하기에 냉궁 만한 곳이 있더냐.]
좁은 바짓가랑이에 스쳐 쓰린 속살을 무시하며 척척 서궁으로 향했다.
서궁의 문은 열려 있었다. 늘 입구를 지키던 궁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육중한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니 돌이 훤히 드러난 휑한 복도가 먼저 보였다. 창이 없는 복도를 따라 방이 쭉 있었는데 전부 냉기가 감돌았다. 인기척은 물론이요, 쥐나 새의 기척도 없이 고요했다.
“누가 있나?”
큰소리로 외쳐보았다. 휑한 복도라서 옅은 메아리가 쳤다. 굽을 단 구두 덕분에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뚜벅뚜벅 큰 소리가 온 복도를 울렸다.
서궁 초입에서부터 존재를 알리던 걸음이 얼마나 컸던지. 그때마다 흠칫 떨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사뿐히 걷는 제 걸음도 이리 요란한데 그이의 걸음은 오죽했을까.
굳이 그 방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방으로 가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다리가 절로 거기로 향했다.
의자 하나가 닫힌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카론의 명에 따라 저를 감시하던 궁인의 자리였다. 오랜 세월이 내려앉은 경첩과 문고리에도 흰 먼지가 앉았다. 문고리에 달린 커다란 자물쇠는 슬쩍 잡아당기자 툭 빠졌다. 갑자기 장사(壯士)가 된 게 아니라면 애초에 제대로 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삐걱.
문고리를 당기자 녹이 슨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기분이 참으로 이상했다. 이젠 여기에 올 이유가 없다. 가두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 제 발로 찾아와 둘러보는 기분이 참으로 뒤숭숭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찾아온 것이라면 감회가 새로울 수도 있다. 그러나 세월이라 칭하기에도 민망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이곳에서 두들겨 맞고 겁간을 당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여 뼈가 시리고 오금이 저리고, 염통이 지끈거렸다.
조금 열린 문고리를 잡고 오래 망설였다. 어렵게 가라앉힌 울분과 고통을 다시 마주하기엔 너무 이르지 않을까.
‘돌아갈까.’
망설임 끝에 문고리를 놓았다. 몸을 반쯤 돌렸을 때였다. 몸이 멈칫하더니 영문 모를 충동이 일었다. 바늘을 들고 한참을 주저하다가 어느 순간 용기가 치솟아 고름을 툭 찔러 짜는 것처럼 별안간 돌아서서 문을 벌컥 열었다.
지금 마주하지 못하면 평생 마주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에 훌쩍 들어선 방은 기억보다 훨씬 초라했다. 그래서 더 비참하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평생 못 벗어날 철옹성인 줄 알았는데.]
벽이며 바닥이며. 모조리 냉기가 풀풀 풍기고 사방에서 어둠이 쏟아지는 아주 무섭고 혹독한 방이었는데.
문가를 따라 슬며시 스친 손끝에 닿은 돌벽은 생각보다 반질반질하고 바닥은 이제 보니까 색색 돌로 짜서 넣은 고운 무늬가 있었다. 바닥의 냉기를 막아 주는 깔개와 두툼한 이불은 사라졌으나, 흰 침상만은 여전했다. 바깥과 달리 먼지도 크게 타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를 낀 창으로는 흰빛이 들었다. 작은 덧문을 열자 마당이 나왔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 같은 벽은 그저 허연 담벼락에 지나지 않았다.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사방에서 엄습하는 매서운 기운 따위는 눈 씻고 봐도 찾기 어려웠다.
좁은 마당 한쪽엔 자그마한 나무가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한껏 웃자라 무성한 풀 사이로 걸어가자 풀벌레가 찌르륵찌르륵 울며 사방으로 튀었다.
목을 달았던 나무는 무성한 잎을 피웠다. 찢어진 가지는 여전하였다. 당시에는 노랗게 생생하던 속살이 이제는 시커멓게 변했을 뿐. 그마저도 주변에 돋아난 새 가지와 새순으로 뒤덮여 일부러 잎사귀를 들추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았다.
작은 마당은 담벼락 때문에 손바닥만 한 하늘만 들 수 있는데 아주 용케도 햇빛을 한껏 빨아들였다. 나뭇가지를 살피느라 고개를 들었더니 쏟아지는 햇빛이 그만 동공에 바로 들고 말았다. 눈이 시큰거리며 습기가 올라왔다.
[부러진 가지에도 잎은 자라는구나.]
까맣게 죽은 흉은 이 나무가 죽을 때까지 계속 거기에 남겠지만. 풍성해진 잎은 묵은 상처를 가렸다. 파릇파릇하고 싱그러운 싹이 돋아 찢어진 가지를 가리고 또 가려, 종래에는 마치 없었던 것처럼. 원래 흐드러졌던 것처럼 살아갈 것이다.
못난이 나무 기둥에 손을 대고 섰다. 봄비 같은 눈물이 뺨을 촉촉이 적신 후에 따뜻한 햇볕의 손짓을 받고 증발했다.
이제는 정말 매듭을 지을 때가 왔다.
방으로 돌아가 침대 위에 누웠다. 처음에는 서늘하더니 금방 포근해졌다. 전에는 전혀 느끼지 못한 따뜻함이었다. 그때는 뜨거운 죽을 먹고 두꺼운 이불을 몇 겹을 덮어도 춥기만 했는데. 어찌 이럴까? 생각하다가 깨달았다.
방과 침대는 그대로였다. 구석에 깃든 그림자도, 선선한 공기도 그대로였다. 다만 변한 것은 분홍이 자신이었다.
염통이 힘차게 뛰고 말단에 피가 돌았다. 얼음장 같은 악심은 반쯤 녹은 애수로 바뀌었다. 생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버텼던 하루하루를 편히 오수를 들 곳을 찾으며 보냈다.
어느새 사무치는 외로움이 스르륵 녹았다.
이윽고 저를 찾아올 사람이 있다.
때로는 무정한 폭풍처럼, 때로는 차가운 눈보라처럼 몰아치던 사람이. 이제는 난처한 봄바람을 한껏 안고 올 사람이.
* * *
서궁은 생각보다 훨씬 포근했다. 냉궁이 포근하다니. 이 무슨 모순인가 하겠냐만. 단출하여 다소 딱딱한 침대는 고국에서 사용하던 요와 비슷하여 잠이 솔솔 왔다.
모자란 잠을 몰아 한참 잤다. 여기서 살 때는 날마다 꾸던 악몽도 꾸지 않았다. 얼마만의 평안인가. 꿀맛 같은 단잠에 푹 젖었다.
깊은 수면으로 빠져들자 어느새 어여쁜 꽃이 피는 늦봄, 고향이 보였다. 꼿꼿하게 등을 세운 아버지가 사랑방에서 느릿느릿 책장을 넘기시고 고운 얼굴의 큰엄마와 젊은 엄마가 대청마루에 마주 앉아 곧 다가올 여름을 기다리며 모시옷에 풀을 먹이고 계셨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마당에는 군데군데 봉숭아가 작은 씨를 터트렸다. 어쩐지 관례를 올린 지 얼마 안 된 큰형님과 작은 형님 사이로 새 목검을 든 누님이 비집고 들어 봉숭아 꽃잎을 마구마구 땄다. 예쁜 꽃을 마구잡이로 뜯는다며 말리는 오라버니들을 홱 밀어 버린 누님은 환하게 웃었다.
“분홍아, 누이랑 봉숭아 꽃물 들일까?”
“응!”
신나서 대답하며 그 손을 잡으려는 순간, 따사로운 햇살을 사라지고 고향도 까마득히 물러났다. 아버지가 보이는 사랑채도, 멀리 큰엄마와 엄마가 있던 대청마루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형님들과 누이도 사라진 자리는 휑하여, 온 사방에 분홍이 혼자였다.
“헉!”
까마득한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아찔함에 눈을 번쩍 떴다. 사방이 푸르고 시렸다. 정신없이 주변을 더듬었다. 어디에도 마땅한 온기가 없었다.
“누님, 엄마…큰엄마…아버지! 형니임!”
무너지듯 침상에서 내려와 냉궁을 뛰었다. 한껏 외친 부름은 냉랭한 메아리가 되어 분홍이를 흔들었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냉궁의 밖으로 뛰었다. 어딘가엔 있으리라.
냉궁을 나가서 발이 닿는 대로 내달렸다. 문을 넘고 또 넘어도 결국 갈 곳이 없음을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숨이 차올라 가슴을 크게 헐떡였다. 냉궁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후미진 화단 앞에서 분홍이는 멈췄다.
갈 곳이 없었다. 황제를 뒤로하고 감옥 같은 황궁을 벗어나도 이 세상에 있는 한 분홍이는 어느 곳에도 갈 곳이 없었다. 왜 달린 것일까. 무슨 이유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착각이라도 한 것일까. 지금에 이르러서 무슨 바람일 것일까. 자조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터벅터벅 걸어 도로 냉궁으로 향했다.
달아난 흔적이 가득한 하얀 침상에 도로 털썩 누웠다. 눈을 감자 시린 눈물이 흘렀다.
아무도 없는 공간이 너무너무 무서웠다. 한때 혼자서도 노래하던 목소리는 이미 막혀버린 지 오래인데 귀가 뚫려도 분홍이를 부르는 이 하나 없고 입이 뚫려있어도 부를 이 하나 없는 이곳. 분홍이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공허에 짓눌려 죽을 것 같았다.
곧 커다란 기척이 나타나 침대 곁에 앉았다. 뒤이어 따뜻한 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었다. 질긴 피부로 싸인 굵은 손가락 마디가 뺨을 스침과 동시에 눈을 떴다.
밖에서 드는 빛이 반의 반절로 줄었다. 그런데도 전혀 어둡지 않았다. 곁에 앉은 이의 반짝이는 금색 머리 때문이었다.
“한참 찾았어.”
걱정의 흔적이 옅게 밴 목소리였다.
“황궁 전체를 다 뒤졌다. 창고며 하다못해 정원 구석구석까지. 사냥터에도 사람을 풀었어.”
“그랬습니까?”
분홍이는 계속 누운 채로 카론을 보았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무척 다정했다.
“여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우연히 서궁의 정문이 열린 걸 보지 못했다면 지금도 널 찾고 있었겠지. 지금이라도 찾아서 다행이야.”
대단히 안도한 듯 카론은 웃음과 한숨이 뒤섞인 숨을 길게 뱉었다.
아아. 찾았단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억센 손아귀가 있는지도 몰랐던 손목을 잡았다. 환한 태양을 진 그는 쓸쓸한 공허에 차게 식어가는 말단에 온기를 전했다. 딱딱하게 굳었던 뼈가 노곤해지고 꽉 조였던 맥이 탁 풀렸다. 덜덜 떨리는 허망함이 일시에 물러났다.
혼자가 아니었다. 사방이 막혀버린 작은 공간까지 기어코 자신을 쫓아와 부르는 존재가 있다.
“아가르타.”
고요한 부름이 모든 적막을 단숨에 쫓아 내버렸다. 그러면서 한없이 가라앉던 시린 몸을 단숨에 건져 올렸다. 있을 곳이 없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있을 곳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분홍이는 넓은 품을 향해 자신을 내던졌다.
“그래서 잘 잤나?”
“네.”
“여기가 마음에 든다면 시종을 시켜 정리하고…….”
“좋은 곳은 아닙니다.”
품에 안긴 채 고개를 저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기도 전에 카론이 고개를 숙여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마치 온에게 하듯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귓가에 천둥 같은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잔인하고 못돼빠진 나쁜 인간이지만 유일하게 분홍이를 안아주는 살아있는 인간. 그 뜨거운 품에서 서늘한 안도감을 느꼈다.
절로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카론에게 매달렸다.
전에 이름을 물었던가. 왜 그런 것을 알려고 하냐고 원망했던가…. 아니야. 이제야 묻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물어야 하는 것이지. 이미 이 몸은 모두 당신의 것인 걸 그깟 이름 하나가 뭐가 중요하다고. 다 줘버리면 빼앗길 것도 없는걸.
따뜻한 봄날이 성큼 다가와 빗장이 걸린 제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데. 언제까지고 배척하며 찬 서리만을 맞을 텐가. 그런 삶은 너무 쓸쓸하고 공허했다. 더는, 더는 그러기 싫었다.
“괜찮아?”
카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변엔 지켜보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그는 황제였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멋대로 사라진 것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화를 내고 달려들 수 있음에도 카론의 행동은 못내 조심스러웠다. 저를 살피는 시선에서 다정한 심려를 엿보았다.
차마 이곳에서는 건드리지 못하는 것인가. 가만히 저를 보는 그는 마치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 같았다.
단단히 얽힌 매듭을 풀 때가 되었음을, 분홍이는 직감했다. 눈앞에 있는 흉악하고 잔인한 자에게 자신은 이미 너무 많은 온기를 기대고 있었다. 그걸 더는 부인할 자신이 없다.
한껏 끌어안았던 가슴을 천천히 밀치며 일어섰다. 익숙하고 낯선 방을 돌아보았다. 고작 일 년 하고 반이 넘었을 뿐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느닷없이 잡혀 와 강제로 몸을 빼앗기고 차라리 죽겠다며 악을 쓰던 제가, 서슴지 않고 주먹을 휘두르고 겁간을 일삼던 악랄한 오랑캐 우두머리와 함께 작은 냉골에 있는데 어찌 이렇게 고요하고 잔잔할까. 시림도 없이 푸근하기까지 했다.
바닥에 깔린 돌도, 곳곳에 깃드는 긴 그림자도 하나 변한 것이 없는데.
저를 바라보는 새파란 도깨비 눈과 그 안에 깃든 제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바뀐 것으로 이렇게 메마른 심부에 옅은 봄비가 내린다. 혈육의 깊은 사랑으로 가꾼 정서가 다시 갈라지고 부서지게 하긴 싫다. 이젠 고운 싹을 틔울 때다. 그러기 위해서 마지막 고름을 짜내야 했다.
“여기 있을 때. 멀리 내 나라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나.”
“그래서 살아 있습니다. 하고 어머니, 아버지에게 소식을 보냈습니다.”
“소식?”
역시 카론은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담담하게 보았다.
“새한테 부탁했습니다. 모두 죽었습니다. 화살을 맞았습니다.”
훤한 얼굴에 그림자가 깃들었다. 새파란 안광이 약간 흐려지며 옅은 침음이 흘렀다.
“당시…… 검술 훈련 중이었다. 천을 달고 다니는 새가 있어서 숨어든 첩자의 소행인 줄 알았다. 석궁으로 다 쐈어.”
“새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작은 새는 나를 좋아했습니다.”
“내 잘못이야.”
“죽은 새는 묻어 주었습니까?”
“그렌에게 주었으니…… 아마도.”
“그날 나도 화살을 맞았습니다.”
분홍이는 제 가슴을 짚었다. 전 같았으면 갇혀 있는 죄인 주제에 괜한 짓을 한 잘못 또한 있다며 탓을 했을 카론은, 지금은 그저 보고만 있었다. 새파란 눈이 일렁였다.
“제 인형은 왜 부수었지요?”
“인형?”
잠시 생각하던 상대의 낯빛은 더 어두워졌다. 일어선 그를 향해 다가갔다. 무력, 권력. 어떤 면으로도 만인지상의 황제에게 턱도 없이 모자란 이국의 요정이 가까이 갈 뿐인데도 카론은 마치 두려움에 휩싸인 듯, 뻣뻣하게 굳었다. 두어 발걸음을 앞두고는 보이지 않는 힘이 떠밀리기라도 했는지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알다시피 라테시온 제국은 마녀와 관련한 모든 사술을 엄격히 금지한다. 저주용 인형은 특히나.”
“저주? 저주 인형이라고 누가 했습니까?”
“저주용이…… 아니었군.”
그리 말하는 사내의 음성은 심하게 가라앉아 거슬거슬했다. 혹여 후회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쓰디쓴 맛을 보고 있는 걸까.
“예. 그건 장난감이었습니다. 하나는 나고, 다른 하나는…….”
“나였지?”
가라앉혔던 눈빛이 조심스럽게 저를 살폈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분홍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폐하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 분명 한 쌍으로 보…… 아, 그자였군.”
혼약자라고 새삼 떠올리기도 송구했다. 사실 얼굴도 이젠 기억이 흐렸다. 어떤 목소리였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날 기이한 술래잡기를 하다가 백룡을 타고 여기에 왔다는 사실만 선명했다.
분홍이는 다시 한번 가슴을 짚었다.
“폐하는 제 여기에 화살을 많이 쏘았습니다. 많이 아픕니다. 지금도.”
카론이 뭔가 말을 하려 했다. 왜 그랬는지 이미 알고 있기에 들을 필요가 없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청금안을 온전히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기특하게도 카론은 제 뜻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침묵을 지켰다.
“폐하는 나를 좋아합니다.”
“그래, 널 좋아해. 사랑해.”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였다. 카론은 분홍이를 좋아한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어서 품고자 했다. 놀란 분홍이의 강한 거부를 감당할 만큼 내면이 온전치 못하여 악독하게 핍박했다.
“나는 폐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카론의 안색이 약간 바뀌었다. 대단한 차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제가 젖 먹던 힘까지 실어 가슴팍을 때릴 때보다는 아파 보였다.
“알고 있습니까?”
빤히 쳐다보며 무엇이라도 말을 하길 기다렸다. 잠시 시선을 피하던 카론은 엷은 미소로 답했다.
“알고 있다.”
“그걸로 만족합니까?”
연이은 질문에 황제의 낯에는 짙은 당혹감이 번졌다. 눈빛은 흔들렸으나 입술에 걸린 미소는 더 커졌다. 순수한 즐거움과는 다른, 애써 지은 미소였다.
“아니.”
짧게 답한 후 카론은 담담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더는 기대해선 안 되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내 잘못이 가져온 결과다. 지금 같이 평범하게 대할 수 있는 것으로도 감사한다.”
“폐하는 욕심이 많습니다.”
불신 어린 반박에 카론이 낮게 웃었다. 웃음이 왠지 허했다.
“때로는 황제조차 욕심을 부리지 못할 것도 있거든.”
“나는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부모님. 형님. 누님. 전부 사랑을 주었습니다. 가슴에 가득 찼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사랑이 마릅니다.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정말로 이해하는 건지, 혹은 이해하는 척하는 건지 몰라도 카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넘치는 사랑은 레온의 몫이다. 그러니 나처럼 되지 않을 거다.”
“그것으로 됩니까?”
“이미 과분하다.”
살짝 누그러진 그에게선 어떤 사심도 느낄 수 없었다.
“아이에게 주는 사랑과 배우자에게 주는 사랑은 다릅니다.”
우두커니 선 카론의 뺨에 손을 얹었다. 도깨비 눈은 혼란과 당혹감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폐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참으로 냉랭하고 아픈 말이었다. 마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정에 목마른 황제에게는 더욱.
악인이며 개종자였다. 어디서 비참하게 죽어 자빠지라고 저주했다. 꼴을 보기만 해도 혐오를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서글픔이 깃든 눈빛에 가슴이 욱신거렸다.
평생 사랑을 받지 못함을 알고 각오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태어나서부터 무한히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저는 지금껏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 길이 없다.
이 냉정한 사내의 염통도 제 것처럼 찢어졌을까. 딱딱한 애간장이 독을 머금고 흐물흐물 녹아내렸을까.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내려 단단한 가슴을 짚었다. 숨이 가쁠 만큼 차가운 얼음이 여기에 생겼을까.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랑받지 못하는 괴로움은 몰라도 응어리진 고통이 어떨지는 알 것 같았다. 살짝 흐려졌으나마 강하게 빛나던 푸른 안광이 갑자기 훅 꺼져 버렸다.
폐하도 서러움을 느낍니까. 폐하도 아픕니까. 분홍이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 오만하고 냉혹한 자의 심부에 비수를 꽂았다. 기뻐 마땅한데…… 어쩐지 불쌍했다.
평생 사랑받지 못하여 사랑할 줄도 모르는, 오만하여 스스로 외롭고 서러운 줄도 몰랐던 어리석은 자. 가장 아픈 비수를 꽂았는데도 눈물도 흘릴 줄을 모른 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등신 같은 작자를 미워하기엔…… 저는 너무 물렀고 제 속에 든 사랑이 너무 많았다.
“아직은…… 아직은 아닙니다.”
한숨 쉬듯 덧붙인 말에 가라앉던 새파란 눈에 옅은 빛이 깃들었다.
“……언젠가 그럴 수 있단 얘긴가?”
“그러기엔 꼭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거면 뭐든 주겠다.”
다 죽어 가든 눈빛이 별안간 형형해졌다. 마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짐승처럼 살다가 빛나는 제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역경과 고난이 있었겠으며, 그것을 극복했던 투지는 또 얼마나 강했겠나. 천하를 호령하는 대제국을 세운 시황제가 뿜어내는 강렬한 기세에 절로 숨이 막혔다.
“뭐지? 내가 할 수만 있는 것이라면…… 아니 어떤 일이라도 해내겠다.”
“오직…… 폐하…… 만이 줄 수 있습…… 니다.”
“뭐든. 다 하겠다.”
분홍이의 팔뚝을 꽉 쥔 손아귀가 절절하고 푸르게 타오르는 안광에는 애절한 염원이 가득했다. 하늘의 별을 따오라고 하면 따올 기세였다. 무엇이든 다 하겠다고? 이대로 고국으로 가고 싶다고 말할까? 그럼 화를 낼까? 매달리며 애원할까?
어느 쪽도 아니었다. 이젠 카론을 알 듯도 했다. 그는 뱉은 말을 거두진 않는다. 원하는 대로 해 준다 했으니 필경 보내 준다. 다만 보낼 때 보내더라도 온을 짊어지고 같이 가겠다고 따라나설 터다. 뻔뻔하게. 보내준다고 했지 따라가지 않는다고 약조한 적은 없다면서.
이젠 카론을 안다. 카론도 저를 알아야 할 때다. 진정한 원이 무엇인지.
세상의 문을 연 힘이 무엇인지, 하늘님이 무엇을 안배하여 다른 세상에서 다른 모습을 살아가던 둘을 만나게 했는지, 그 해(解)를 알 날이 있을지 장담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하늘의 일은 하늘에게 맡긴다. 분홍이의 시선이 닿아야 할 자리는 무심하고 고고한 하늘이 아니라 그 아래 사는 사람이 선 자리였다.
사람의 일은 사람이 살펴야 한다. 사람이기에 능히 그럴 수 있다. 감정이 서툰 이 사내를 조금만 도와준다면. 지워지지 않는 흉을 파릇한 잎사귀로 살포시 덮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미안하다…… 고 하세요.”
“뭐?”
“나를 찌른 것…… 때린 것…… 겁간한 것.”
무서운 파도처럼 들이닥쳤던 기세가 거짓말처럼 물러났다. 그러면서 팔과 함께 몸통을 단단히 틀어잡았던 손아귀에도 힘이 빠졌다. 덕분에 숨쉬기 한결 편해졌다.
“후우…… 가둔 것, 무시한 것, 빼앗아 간 것.”
다시 한번 숨을 고르면서 분홍이는 휘청이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애원 따윈 하지 않는다. 받을 것을 당당히 받아야 한다.
말로 표현을 다 하지 못하는 황제가 온몸으로 외치는 바와 같이, 영영 돌아가는 날까지 동고동락하며 만 리 길을 정답게 걸으려면 순간의 기세에 억눌려서는 안 된다. 한쪽이라도 약하면 결국은 쓰러지고 마는 것이 동락의 인생사였다.
“모두, 모두 미안하다고 하세요.”
세상이 멈추었다. 풀벌레도, 새도, 바람조차 숨을 죽였다. 피고름 끓는 아픔과 사무치는 서러움을 머금은 작은 감옥에, 오로지 둘 뿐이었다.
긴 그림자가 일렁였다. 천둥처럼 강인하게 걷던 황제는 작은 속삭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긴 다리가 접혔다. 무릎이 돌바닥에 닿았다. 오연한 머리가 아래를 향했다. 금색 머리카락이 촘촘히 난 정수리에 옅은 빛이 감돌았다.
검을 쥐고 사람을 베던 손이 다가와 툭 떨어진 흰 손을 잡았다. 굵은 손가락 사이로 고운 손가락이 끼어들었다.
굵고 낮은 목소리는 큰 파문과 같이 울렸다.
“네게 한 모든 잘못을 깊이 후회한다. 너를 찌른 것, 때린 것, 강간한 것, 가둔 것, 무시한 것, 빼앗아 간 것 모두. 사죄한다. 내가 잘못했다.”
자유로운 손을 뻗어 카론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일렁이는 푸른 눈은, 사냥터에서 보았던 것과 흡사했다.
“정말입니까?”
“맹세코 진심이다.”
분홍이는 허리를 숙여 카론과 뺨을 겹쳤다. 아직 스스로 입을 맞출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에 그를 껴안았다.
“이제 나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절대로……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
한참 전에 받았던 청의 대답을 지금에야 할 수 있었다. 응당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답을 하고 싶었다.
“이제 줍니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이 올라와 등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드디어, 드디어 답을 들었군.”
“무슨 말인 줄 압니까? 사랑을 준다는 말은 아닙니다.”
천천히 일어선 카론은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분홍이가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숙여 뺨을 겹쳤다. 잔잔한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젠 다정한 배우자가 되어도 좋다는 허락이잖아.”
“……기억 못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설마. 허락 없이 다정하게 굴었던 일로 네가 크게 화를 냈으니 당연히 기억해.”
푸른 눈엔 순수한 즐거움과 기쁨이 서렸다. 자연스럽게 입술을 겹치려는 그를 손을 들어서 막았다. 마치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손바닥에 다시 입을 맞추는, 능청스럽기 짝이 없는 작자의 청금안이 저를 향했다.
“앞으로 다정하게 지냅니다. 그뿐입니다.”
“알고 있다.”
“조금 덜 미워합니다. 안 미워하는 거 아닙니다.”
“그것도 알아.”
“사랑 아닙니…… 흣.”
어느새 입술 사이로 나온 혀가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욕정과 열망이 깃든 눈빛과 뒤얽힌 뜨거움 때문에 기분이 영 이상했다.
“다 알고 있어. 모자란 게 있으면 앞으로 언제든 말해라. 시간은 많으니.”
“그럽니다.”
“급한 용건이 끝났으면 이제 키스해도 되나?”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방금 손가락을 핥았던 혀가 바로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고개와 함께 등이 뒤로 젖혀지고 숨을 앗아 가듯 격정적인 입맞춤이 이어졌다.
뜨거운 입김과 타액이 입 안을 돌아 전신으로 퍼졌다. 그에서 비롯한 따뜻한 열기가 심부 깊은 곳에 든 응어리에 닿는 순간, 딱딱하고 차가운 표면에 자그마한 실금이 갔다.
은은한 울림이 전신으로 퍼졌다. 말단의 감각이 무뎌지고 정신이 아찔했다.
아주 작은 시작이었다.
* * *
서궁에서 나와 정궁으로 들어서는 길에 하얗게 질린 올리아와 마주쳤다.
“폐하!”
한달음에 달려온 올리아는 옆에 카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홍이를 와락 끌어안았다.
“올리아?”
“어디 계셨습니까?”
개암색 눈동자가 분홍이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살피듯 손발까지 멀쩡한 걸 확인한 후에 올리아는 다시 한번 분홍이를 으스러질 듯 안았다가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폐하.”
올리아는 황제를 무시한 무례에 대해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뒷짐을 쥔 카론은 별로 화난 눈치는 아니었다.
분홍이는 미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 걱정하는 줄 몰랐어.”
“사라지신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아주…….”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몰라도 올리아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짝 웃었다.
“온은?”
“방에 마그네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지 않아도 황자 전하께서 황후 폐하를 찾으세요.”
한나절 아이를 보지 못해 약간 걱정이 되었다. 눈길이 마주친 카론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너를 찾았다고 알려야지. 사냥터 보낸 자들도 있으니.”
고작 반나절 숨어 있었을 뿐인데.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치고 괜한 고생을 하게 만들었다. 분홍이는 미안함을 담아 카론을 살짝 안았다.
“이따가 봅니다.”
“그래.”
마주 안은 황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어졌다. 손을 들어 배웅하는 그를 향해 엷은 미소를 지은 후, 분홍이는 올리아와 함께 빠르게 침전으로 향했다.
카론은 바로 기사단이 대기하고 있는 외궁으로 향했다. 중무장하고 언제든 바로 출발할 수 있게 말에 탄 채로 대기하던 중이었다.
“폐하.”
투구를 옆구리에 낀 아서가 다가왔다.
“요정을 찾았다. 서궁에서 자고 있더군.”
“아. 다행입니다.”
“출정은 없던 것으로 한다.”
“예. 제도 봉쇄령도 해제할까요?”
“음. 기왕 내린 명이니 이참에 치안 점검이라도 하지. 후에 해제해도 좋다.”
“알겠습니다.”
아서는 대기 중이던 기사 중 일부만 제도에 치안 점검을 보내고 나머지는 다시 복귀시켰다.
황후가 사라진 직후, 황궁을 뒤졌다. 갈 만한 장소에서도 그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순간, 카론은 납치 혹은 주술을 우려했다. 최정예를 중무장시킨 후 마지막 황궁 수색에서도 황후를 발견하지 못하면, 바로 파사 일족을 완전히 섬멸하고 전 대륙을 불태워서라도 사르프에서 놓친 황금판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것이 어떤 소용이 있는지 몰라도 요정의 꽃과 흡사한 무늬가 있는 이상 연관성을 무시할 수 없다.
정궁으로 향하는 길에 그렌이 나타났다.
“황후 폐하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서궁에서 자고 있더군.”
“설마…… 거기일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동감이야. 시종과 시녀에 대한 검문은 중단하고. 대신 수색 방식을 바꿔. 앞으로 사용하지 않을 공간은 모조리 잠그고 봉인해. 하인들이 사용하는 개구멍도 다 막아.”
“서궁도 잠글까요?”
그럴까 하다가 카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숨을 장소를 모조리 제거하면 도리어 찾기 힘들어진다. 숨구멍을 틔울 공간을 두는 게 좋다. 대신 요정 모르게 정기적으로 청소하고 당번을 둬.”
“예.”
“사냥터 쪽 수색꾼에게 내린 명령은 계속 유지한다.”
시종과 시녀 외에도 황궁에 봉사하는 일꾼은 무수했다. 그들 중 정원과 숲에 익숙한 자를 위주로 수십 명을 풀었다. 혹여 황후가 또 더더를 찾으러 갔다가 참변을 당했을 경우를 떠올렸다. 독뱀을 비롯한 해수(害獸)를 제거하라고 명했다.
그렌과 헤어진 후 카론은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는 올리아가 있었다.
“베로니카에게 황후 폐하를 찾았다고 연락했습니다.”
“음. 알았다. 잠시 혼자 쉬고 싶군.”
홀로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카론은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가까이에 있는 소파까지 걸어가는 몇 걸음 동안 무릎이 수시로 꺾였다. 바닥에 거의 나뒹굴기 직전, 간신히 소파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자잘한 전율이 아니었다. 크게 흔들려서 벌어진 손가락 끝이 서로 부딪혔다. 발도 마찬가지였다. 무거운 구두에 눌려 있지 않았다면 지진 난 듯 흔들렸을 터다. 전쟁 중에 큰 상처를 입고 죽음을 각오했던 순간에도 이처럼 떨진 않았다.
덜덜 떨리는 손에 맞잡았다. 피가 어디로 다 빠져 버렸는지, 손이 너무 차가워서 동상에 걸릴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입김을 불면서 손을 비볐다.
“비…… 빌어먹을.”
숨도 모자랐다. 시야가 점멸하며 속이 뒤틀렸다. 구토감이 일었다.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반복했다. 뒷덜미가 저릿저릿하고 머리가 쿵쿵 울렸다. 거울을 보지 않았으나 낯짝이 피 말라 뒈진 시체 같으리라.
맥박도 정상이 아니었다. 질주할 때처럼 심하게 뛰다가 갑자기 쿵 주저앉길 반복했다. 뒤이어 내장이 쑥 꺼지면서 추락하는 느낌이 이어졌다.
“큭.”
몸을 뒤틀지 않을 수 없었다.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시각과 촉각을 무시한 채 반쯤 돌아 버린 신경이 끝없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세상이 빙빙 돌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볼썽사납게 토할 것 같았다.
“하아…… 후우…… 후우…….”
눈을 감자 검붉은 세상이 덮쳤고 뒤이어 아찔한 폭죽이 연이어 터졌다. 쉽게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후우.”
떨리는 손을 억지로 놀려 재킷을 벗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자꾸 손끝이 미끄러지는 덕에 구두를 벗는 데도 힘이 들었다. 발을 들어 탁자에 올렸다. 다리를 쭉 뻗자 그나마 숨쉬기가 조금 나았다.
“빌어먹…… 을.”
말단이 저릿저릿했다. 혀도 아렸다. 창문을 열고 싶었으나 일어설 기운이 없었다. 시종을 부를 만큼 큰소리를 낼 자신도 물론 없었다.
처음에는 술래잡기라고 생각했다. 한참 찾아도 정궁 어디에서도 요정을 발견할 수 없었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직후 납치를 떠올렸다. 황궁 수색을 시작하고 정예 기사단을 대기시킨 건 이후였다.
“요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요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속으로 되뇌던 문장이 입 밖으로 샜다. 아까보단 덜해도 여전히 가늘게 떨리는 양손으로 머리를 세게 부여잡았다. 관자놀이 아래 날뛰는 맥박이 생생했다.
요정이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다. 요정은 이유 없이 나타났다. 그렇기에 이유 없이 사라질 수 있다. 이성으로는 진작 알았으나, 절절히 실감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심장이 멎을 뻔했다. 아니 아예 멈췄다. 서궁에서 그를 발견하고서야 심장이 멎고 숨이 끊어진 채로 돌아다녔음을 깨달았다.
어두운 방에서도 요정은 신성한 태양처럼 빛나 카론의 각막을 불태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현실감이 없었다. 껍질만 남기고 떠나 버린 줄 알았다.
피에 물든 제 손으로 만졌다가 아름다운 흔적마저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까. 두려움에 휩싸인 채 망설이다가 손이 떨린 나머지 손마디가 어여쁜 뺨을 스치지 않았다면, 그래서 요정이 별이 박힌 밤하늘색 눈을 떠서 자신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지 않았다면. 오늘로 생을 마감하고 그 방이 제 무덤이 되었을 터.
눈가가 경련했다. 둔한 손으로 눈 밑을 문질렀다. 충격은 아주 천천히, 천천히 잦아들었다.
“잃을 수 없다. 절대로.”
감각이 반쯤 돌아왔을 때, 카론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책상 서랍에 든 꽃과 옷을 꺼냈다. 원래는 곧 요정에게 돌려줄 생각이었다. 화해에 대한 보답이자 신뢰의 뜻으로.
이젠 그럴 마음이 사라졌다. 요정이 사라진다면 그를 찾을 단서는 꽃과 옷뿐이었다. 특히 황금색 꽃이 세상을 넘나드는 방법과 크게 관련 있음을 직감했다.
“없애 버려야 하나.”
없애 버리고 싶었다. 황금색 꽃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약이기도 했다. 혹여 요정이 다시 아프거나 레온이 불치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이 꽃이 필요했다. 꽃을 남길 거라면 옷 또한 굳이 없앨 이유도 없다. 다만 지금처럼 책상 서랍에 보관하는 것은 더는 적합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거기 넣어 둬야겠군.’
꽃잎이 두 장 잘린 꽃과 옷을 점검한 후에 도로 상자 뚜껑을 덮었다. 상자를 들고 책장으로 갔다. 특정 책등을 잡아당겼다가 다른 책 두 권을 도로 밀어 넣었다.
달깍.
숨은 잠금이 풀렸다. 책장을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옆으로 밀쳤다. 비밀 통로가 나왔다. 황제의 침전, 황후의 침전, 집무실, 그리고 황궁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였다. 유사시 대피를 위해 만든 통로였고 비밀 통로를 설계한 자와 만든 자는 각종 사고로 이미 죽었다. 그렌도 비밀 통로의 존재만 알 뿐 정확한 입구와 들어가는 방법은 오로지 카론만 알았다. 물론 베로니카는 밖으로 통하는 출구의 위치를 알고 있다.
비밀 통로 안에서도 가장 은밀한 장소에 숨겨 둔 금고로 향했다. 설계자가 만들어 두긴 했으나 지금까지 사용한 적은 없는 금고였다.
열쇠가 꽂힌 두꺼운 철제 금고를 열고 꽃과 옷이 든 상자를 넣었다. 열쇠를 돌리자 잠금장치가 철컥철컥 걸렸다. 금고의 열쇠는 지금까지 보았던 어떤 열쇠보다 복잡한 구조였다.
다시 집무실로 나왔다. 비밀 통로를 닫자 움직였던 책이 제자리를 찾았다. 열쇠는 튼튼한 줄을 달아 목에 걸었다.
이후 온전히 골든 피오니에서 하루를 보냈다. 레온을 안은 황후는 카론을 따뜻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폐하.”
“카론으로 충분해.”
“카론.”
올바른 황제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대신 그는 순순히 카론이라고 불렀다. 제 이름이 그렇게 다감하게 들리는지 처음 알았다. 요정을 거치면 어떤 것도 다 아름답게 변한다. 화려하고 강렬했던 골든 피오니가 부드럽고 화사한 꽃의 방으로 바뀌면서, 머금은 공기마저 싱그러워졌다.
“웃으니 보기 좋군.”
카론은 제 배우자와 아이를 한꺼번에 품에 넣었다. 까만 머리카락을 가진 둘에게 번갈아 입을 맞추었다.
요정은 큰 소동이 벌어진 걸 모르는 눈치였다. 마그네가 알아서 잘 처신한 덕분이었다.
“마그네는?”
“내내 레온을 보느라 피곤합니다. 아파 보여서 쉬라고 했습니다.”
“그렇군.”
아마 창백하게 질려서 내내 떨다가 요정이 나타나자 맥이 풀렸을 터다. 카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석찬 또한 골든 피오니에 차려졌다. 간이침대에 누워 옹알거리는 아이를 보면서 요정은 곧 치를 축하연 얘기를 꺼냈다.
“많은 사람이 온다고 합니다.”
“그래. 제도에 있는 귀족은 다 모일 테니. 참 베로니카도 참석할 거다.”
그에 요정이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황가를 수호하는 기사이니 당연히 황자의 얼굴을 알아야지. 결혼식에도 참석했지만, 당시엔 둘이 인사를 나눌 경황이 없었으니 이참에 서로 인사하면 되겠군.”
“기다려집니다.”
많은 경우의 수를 대비하여 베로니카도 요정과 아이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러는 편이 더 안전했다.
“연회 준비는 어려움이 없나?”
“그렌이 도와줍니다. 어려운 일은 올리아에게 묻습니다.”
처음부터 라테시온 관습에 맞추어 준비 중이었다. 카론이 먼저 온의 반은 요정이니 요정의 관습상 아이에게 중요한 의식이 있다면 추가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지금은 라테시온 식으로 합니다. 대신에 신국 방식은 첫 생일 때 크게 합니다.”
“시쿡?”
“신국. 제 나라 이름입니다.”
“싱쿡. 싱쿡.”
거듭 말할수록 특이하게 울렸다.
“아니 신이 이름이고 국은 나라라는 뜻입니다.”
“싱이라. 신비롭게 들려. 그러고 보니 레온도 온이고. 요정은 이름을 짧게 짓는군, 그래.”
아무런 의도 없이 가볍게 응수했다.
“이름은 원래 두 글자로 짓습니다. 그래서 내 이름도 채운입니다.”
막 자른 고기를 입에 넣으려다가 우뚝 굳었다.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은 요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옹알이하는 레온을 잠시 보다가 카론과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밤하늘같이 눈동자는 고요했다. 어디에도 장난기는 없었다. 방금 말한 요정어가 진짜로 그의 이름이었다.
“다시 말해 봐.”
“채운, 명채운.”
특이하고 맑은 울림은 요정에게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채운은 카론이고 명은 라테시온 같습니다.”
“성이 앞에 붙는군. 묘언체애웅. 묜체응.”
들은 대로 따라 했는데 발음이 영 시원찮았다.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두어 번 반복하자 살짝 찡그린 그가 고쳐 주었다.
“채운.”
“체웅. 체응? 체우은. 체운. 채운.”
발음 연습을 하느라 음식이 식는 줄도 몰랐다. 황후 또한 식사를 멈추고 연습을 도왔다. 이래저래 따라 하다가 기어이 옳은 소리를 찾아냈다.
“그겁니다. 채운.”
“채운.”
발음법을 잘 기억하기 위해 반복해 불렀을 뿐인데, 요정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네.”
간결한 응답이었다. 하지만 저 한마디가 가져온 파장은 카론을 뒤흔들었다. 이름을 부르고 그에 답했다. 처음 만난 순간에 반드시 건넸어야 하는 인사였다. 이토록 간단한 호의의 표시를 무시한 덕에 요정을 괴롭게 했다. 그가 제게 마음을 여는 건 영영 불가능할 일일 줄 알았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외모와 달리 눈앞에 있는 요정은 누구보다 강했다. 깊은 상처를 받고서도 기어이 악독한 가해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고요한 밤하늘 눈을 바라보며 카론은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채운.”
“카론.”
엷은 미소와 함께 제 이름이 돌아왔다. 순간 일어서서 그에게 입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커다란 감정의 폭풍이 전신을 휘감았다. 입맞춤은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여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었다.
달그락.
채운이 식기를 놓았다. 하얗고 나긋한 손이 올라와 카론의 뺨을 덮었다. 향긋한 과일 향이 물씬 풍겼다. 그의 입술은 혀가 아릴 만큼 달콤했다. 머뭇거리다가 슬며시 응답하는 매끄러운 혀는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이대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평생 배가 부를 듯했다.
카론의 가슴을 짚은 나긋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쉽지만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다. 타액에 젖어 반질거리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아주었다. 그때서야 방금 맛본 입술의 향을 분간할 수 있었다.
“복숭아?”
입술을 떼면서 묻자 숨을 헐떡이던 채운의 얼굴이 한층 붉어졌다.
“주스입니다.”
“복숭아 주스로군.”
“모…… 모릅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귀여워서 심장 언저리가 욱신거렸다. 어릿한 고통은 어떤 술보다 감미로웠다. 어떻게 저런 생물이 다 있지? 저런 게 어떻게 제게로 왔단 말인가. 할 수만 있다면 평생 안고 다니고 싶었다.
입맞춤으로 인해 붉어진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달콤한 빵을 먹는 모습이 꼭 새 같았다.
“채운.”
“왜요?”
“그냥 불러 봤어.”
간신히 얻어 낸 보물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카론도 이름을 수시로 꺼냈다. 고운 얼굴이 찡그려졌다. 불퉁한 다람쥐 같아 저도 모르게 풋 웃고 말았다.
“그냥 부르지 마세요.”
“왜? 부르라고 있는 이름인데.”
“닳아요.”
“풋.”
심술궂게 실룩이는 뺨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아껴 부르도록 하지.”
몸을 기울인 김에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침대에서만 부르면 될까? 이렇게? 채운.”
“힉!”
기겁한 채운이 손으로 귀를 막으며 진저리를 쳤다. 그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까만 머리카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셔츠 아래 있는 차가운 열쇠의 존재마저 잊어버릴 만큼.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4권에서 계속됩니다.>
금은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