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15/28)

6.

밤새 고민하던 분홍이는 아침이 밝자마자 마그네의 방으로 찾아갔다. 아직 누워 있던 마그네는 분홍이가 들어오자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 무슨 일입니까?”

“황제 폐하를 보는 내 눈, 어떠하지?”

“예?”

잠에서 덜 깬 마그네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급하게 넘기다가 굳었다.

“그게 무슨?”

“카론 폐하 앞에서 내 표정, 어때요?”

“그…… 어.”

마그네가 말을 잇지 못한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하였나 싶어 시간을 주어 기다렸다. 카론이 분명 그리 말했다. ‘평생 혐오스러운 눈길을 받겠지만.’이라고. 때때로 그러긴 하지만…… 아니, 자주 그러긴 했지만. 속내를 감추고 평범하게 보았다. 조금 불쾌하지만 참을 수 있다는 정도로 보았는데. 설마 아니었던 걸까 싶어 거울까지 들여다보았으나 스스로 보아서는 분간이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마그네에게 물었는데.

꽤 기다려 주었음에도 마그네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마그네는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덧옷을 입었다. 그러고 나서도 잠시 망설였다.

“얼른 말해요.”

채근에 못 이긴 그는 아주 작은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그…… 다른 사람을 볼 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어떻게? 차갑게?”

마그네를 볼 때와 개종자를 볼 때는 마음가짐부터 다르니 차갑긴 할 터.

“차갑기도 하고…… 좋은 쪽은 분명히 아닙니다.”

“폐하도 나를 차갑게 본다.”

“그렇긴 하지요. 하지만 황제 폐하의 차가움과 황후 폐하의 차가움은 좀…… 종류가 다릅니다.”

“더 자세하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음…… 으음.”

한참 말을 고르던 마그네는 멀리서 온이 우는 소리가 들리자 침대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황자님이 저를 부르십니다. 폐하, 이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어도 될까요?”

온에 대한 근심도 분명 있지만, 그보다는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눈치였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장이라는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으나 마그네는 태생적으로 귀족이 아니었다. 비록 분홍이를 편들고 때로는 카론의 명령을 어기기도 하지만, 황제에 관한 나쁜 말을 직접적으로 하진 못했다. 오찬을 하면서 여러 번 물었으나 끝끝내 표현을 삼갔다.

답답하여 올리아를 불렀다. 차를 대접하며 똑같이 묻자 그는 시원하게 답했다.

“그야 썩은 오물 보듯이 하지요.”

한사코 답을 거부하는 마그네의 태도로 미루어 악랄한 짐승을 보는 눈빛 정도로 예상했다. 다짜고짜 썩은 오물이 나올 줄이야.

“그것도 개똥, 소똥, 말똥에 구더기와 쥐가 들끓는 아주 역겨운 냄새가 나는 오물이요.”

“그렇게 자세하지 않아도 됩니다.”

차를 휘휘 젓던 올리아는 오물 광경을 떠올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구역질을 참는 분홍이를 향해 덧붙였다.

“지금 그 표정, 그 표정입니다.”

아침 내내 표정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손거울을 곁에 두었다. 올리아는 그걸 냉큼 들어 분홍이에게 보여 주었다.

혐오감과 역겨움이 가득한 얼굴을 보자 질겁했다. 눈살에는 미움이 뚝뚝 떨어지고 입매는 금방이라도 욕설이 튀어나올 것처럼 뒤틀렸다. 씰룩대는 뺨에는 심술보가 뚝뚝 떨어졌다. 아주 온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얼음장이었다. 이렇게 싫은 표정이 다 있구나 싶을 정도였다. 만약 다른 사람이 제게 이런 표정을 지으면 밤새 잠자리를 뒤척일 것 같았다.

“정말로 이런 표정?”

그 말에 옆에 있던 마그네가 조심스럽게 덧붙었다.

“어떨 때는 더 무서워요.”

“맞아요. 폐하에게 화를 낼 때는 저 표정에 더불어 당장 칼로 찌를 것 같은 격렬한 노여움까지 더해지니까요.”

올리아가 맞장구쳤다. 솔직히 내심 당황했다.

“화를 내지 않을 때도?”

“예. 정도의 차이는 있긴 하지만요. 대부분 그렇게 보시지요.”

“그런…….”

제 속내가 그렇게 낱낱이 표정으로 드러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속내를 감춘다고 감추었는데 정도로 적나라하게 혐오감을 표출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다 드러내고는 속내를 잘 감춘다고 의기양양했다니. 민망하여 괜히 귓바퀴와 목덜미가 뜨거웠다. 생각보다 훨씬 창피했다. 화르륵 타오르는 낯짝의 열이 한숨 식을 때까지 잠시 딴청을 피웠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지금껏 전혀 신경 쓰지 않으셨잖아요.”

“아니 갑자기 궁금해서.”

“어제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과연 올리아였다. 그는 카론과 얽힌 부분에 있어서 눈치가 매우 빨랐다. 낌새를 알아차렸다면 차라리 탁 터놓고 말하는 편이 나았다.

“어제 숲에서 뱀을 만났어. 폐하가 구해 주셨는데. 고맙단 말을 하지 못했어.”

“아하. 그래서 폐하께서 어제 그렇게 풀이 죽어 있었군요.”

“풀이 죽어?”

그 양반이 풀이 죽을 위인인가?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풀이 죽기보다는 술을 진탕 마신 후에 제게 거슬린 자의 목을 뎅겅뎅겅 쓸어버리는 쪽이 어울릴 텐데.

“훈련을 핑계로 근위 기사단을 아예 초죽음으로 만드셨지요. 오죽하면 아서 엘런 경이 저를 찾아와서 폐하 좀 말리라고 부탁했거든요. 계속 그렇게 두었다가 근위 기사단 때려죽이겠다고요.”

역시나. 검을 들긴 든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친 마그네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자는 사이에 일어난 일인 모양이었다.

“그야 훈련장에서 일어난 일이니, 관심이 없으면 모르시지요. 폐하께 두들겨 맞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하지만 노련한 기사들처럼 고통에 익숙한 자들이 죽겠다고 저를 찾을 정도면, 어제 심경이 매우 불편했다는 뜻입니다. 폐하를 그렇게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온 세상에 오로지 황후 폐하 단 한 분뿐입니다. 그래서 산책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했지요. 마그네가 근육통을 완화하는 연고와 약초를 받아 가기도 했고요.”

의원이라 그런지 머리 회전이 빨랐다. 하지만 표현 방식이 좀 이상했다. 속을 읽은 듯 마그네가 정확하게 같은 얘기를 꺼냈다.

“그런 건 화가 난 겁니다. 풀이 죽은 것과 달라요.”

“그렇게 기사단을 팬 다음에 윌로우를 세 병이나 연거푸 비웠어요. 그렌이 가서 말리라고 하더군요. 어제 두 번이나 폐하께 잔소리를 했어요. 다행히 아무리 술을 잘 마시는 분이라도 윌로우 세 병은 버거웠는지 곯아떨어져서 아침까지 별일은 없었습니다.”

아침까지? 하지만 새벽에 침전까지 찾아왔다. 술 냄새는 나지 않았고 몸가짐도, 정신도 또렷해 보였다. 손이 아주 찼는데 술기운을 지우려 냉수욕을 한 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너무 멀쩡해 보여서 그렇게 괴로워한 줄도 몰랐다. 단상이 거기에 미치자 별안간 놀라고 말았다.

‘괴로워했나?’

얄밉게 담담하고 냉랭해서 괴로움을 아는 줄도 몰랐다. 생각해 보니 밤에 보인 모습이 좀 힘겨워 보이긴 했다. 숲에서 그랬던 것도 갑작스러운 변덕이 아니라 정말로 괴로워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그 차가운 사람도 힘들 때가 있구나.”

너무나도 놀라운 일이라 저도 모르게 속내를 입 밖으로 내었다.

“풋.”

막 차를 마시던 올리아가 사레들려 쿨럭쿨럭 기침했다. 찻잔을 급히 내려놓자마자 깔깔 웃어젖혔다.

“당연하지요. 카론 폐하도 사람입니다. 아픔, 슬픔, 괴로움, 즐거움. 다 알아요. 물론 섬세함은 증발했지만 말이에요.”

한참을 웃던 그는 머쓱한 분홍이와 어리둥절한 마그네를 보며 설명을 이었다.

카론은 너무 어린 시절부터 끔찍함과 고통을 겪으며 자랐다. 그래서 웬만한 고통과 끔찍함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괴로워서 몸부림칠 아픔도 신음 한 번 내지 않는데,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사실 인내심은 태부족이었다. 다만 고통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되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 고통에 대한 기준치가 너무 높았다.

차를 더 따르려는 마그네를 말리면서 올리아는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는 아주 섬세한 영혼을 가지고 계시지요. 그래서 황후 폐하는 카론 폐하에게 온통 수수께끼입니다. 더불어 가까워지고 싶다든가 혹은 웃은 얼굴을 보고 싶다든가 하는, 아주 귀엽지만 한 번도 겪어 본 일이 없는 낯선 욕구를 불러일으키지요.”

지금에 와서 하는 얘기라고는 하지만 올리아의 말에 따르면 카론은 원래 성욕도 적은 편이었다. 남녀 상관없이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해서 자식을 반쯤 포기했고 그 때문에 유사시에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지정해 놓았다.

‘베로니카.’

황제 기사를 지정한 이유는 알았으나, 성욕이 적다는 건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 분이 황후 폐하를 황궁에 데려오자마자 강제로 하려 들었다는 얘길 들고 매우 놀랐습니다. 그런 일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거든요. 폐하가 갑자기 미쳤거나 혹은 운명의 상대를 만났나 했지요.”

운명의 상대 운운은 농(弄)으로 못 들은 셈 쳤다. 하지만 마그네가 카론에게 특별한 상대가 없었음을 재차 확인시켜주었다.

“제가 황궁에 들어온 이후로 폐하가 곁에 사람을 두신 걸 본 적이 없어요. 황후 폐하가 최초입니다. 정부가 없다고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믿을 수 없어도 사실인 듯했다.

차가 완전히 식었다. 빈 찻잔을 향했던 개암색 눈동자가 분홍이를 바라보았다.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눈동자엔 연민이 가득했다.

카론은 큰 잘못을 저질렀다. 올리아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카론은 얼어붙은 마음은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반쯤 미쳐 버린 짐승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을 멀쩡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다정함의 힘을 믿었다. 그런데 분홍이가 다정하게 대하지도 말라고 화를 내는 바람에 크게 좌절했으리라.

그날도 카론은 술을 마셨다. 그리고 태도를 갑자기 바꿨다.

“카론 폐하를 편들어서 죄송합니다. 기른 사람이니 어쩔 수가 없어요. 갑자기 카론 폐하 얘기를 먼저 하셨으니 이 기회에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황후 폐하께선 카론 폐하를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거지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멈칫했다. 어떻게 하다니. 모든 건 카론이 어떻게 하고 싶은데 달려 있었다. 황무지에서 잡아 온 일부터, 가두고 겁간하고 임신시키고 황후로 앉힌 것도 모두 카론의 독단이었다. 이제야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다. 그냥 평온함을 바랄 뿐이었다. 그조차도 바라지 못할 사치가 되어 가는 중이라 두렵지만.

“조용히 삽니다. 그뿐이야.”

“평화를 원하신다면 카론 폐하와 어떻게든 화해해야 합니다. 그분은 절대로 황후 폐하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요.”

어쩜 기른 자나 길러진 자나 이리도 같은 말을 할까. 올리아가 카론의 양모임은 어딜 봐도 확실했다.

“나는 지금 황궁에 있어요. 폐하가 놓지 않아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살아요. 하지만 폐하가 있어서 평화는 얻지 못해. 폐하는 나를 괴롭힙니다. 아주아주 나쁩니다.”

편파적인 양모가 제가 흉본 일을 양자에게 이르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았다.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감사하지 않는다고 황제에게 이르는 대신 제가 직접 주제넘은 충고를 할지도 모른다. 어떤 말을 하든 다 맞받아치겠노라고 각오를 다지는 중에 올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폐하를 물었고 앞으로도 물 수 있는 미친개와 계속 싸움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풋.

이번에는 분홍이가 차를 뱉었다. 마그네도 깜짝 놀라 자리에서 튀었다. 올리아가 지금 제 양자인 카론을, 황제를 미친개라고 칭했나?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분홍이는 마그네를 슬쩍 보았다. 마그네도 벌어진 입을 가리고 눈만 굴렸다.

올리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말을 이었다.

“미친개와 계속 싸우다 보면 비극적 결말을 불러올 뿐입니다. 비극적이란 건 원하지 않는 슬프고 고통스럽다는 뜻이에요. 정말 때리고 싶을 만큼 미우면 일단 달래서 내 개로 만든 후에 이를 몽땅 뽑아 버리고 실컷 때리면 됩니다. 핵심은 내 개로 만드는 겁니다. 마침 카론 폐하는 황후 폐하의 개가 되고 싶어서 환장한 상태니까요.”

이게 충고인지 욕인지 아리송했다. 카론을 미친개라고 칭하고 분홍이의 개가 되고 싶어서 환장했다고? 어찌 생각하면 아주 악랄하게 싸움을 거는 것인데, 막상 올리아의 눈빛에선 적개심을 찾을 수 없었다.

“진심입니까?”

“네.”

카론의 대단히 난폭한 방식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깨달았다. 어린 시절 학대로 인해 삐뚤어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렌이 그의 양부임을 알았을 때 우아하고 절도 있는 몸가짐을 보며 그 생각을 굳혔다. 하지만 그건 편견이었다.

바로 여기.

난폭한 해결사가 뭐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떠날 수 없고 함께 살아야 한다면 잘 길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무지막지한 충고를 남긴 올리아는 곧 자리를 떴다.

마그네가 찻잔을 치우고 온이를 들여다보는 중에도 분홍이는 계속 자리에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생각 없이 아까 언뜻 보았던 표정을 다시 지으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구역질 나는 설명을 떠올리자 저절로 오만상 찌푸린, 혐오감 그득한 표정이 되었다.

두 번 봐도 가슴이 철렁했다. 이런 낯을 하고 다녔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황제인 카론에게.

‘이건 뭐 역심(逆心)을 품었다고 만천하에 알리고 다니는 꼴이 아니냐.’

아무리 모자라고 무딘 인간이라도 내내 이런 낯을 마주하면 결국엔 불만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하물며 괴팍한 성미를 가진 황제를 상대로는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이런 어설픈 행동거지로 훗날의 큰일을 도모했다니.

‘제 뜻으로 나를 곁에 두었으니 대신 내 찌푸린 낯은 참은 게로군. 딴에는 너그러운 건가.’

아주 면을 안 보고 혼자 살게 해 주는 것이 가장 너그러운 처사였으나 개종자는 그것만은 안 된다고 펄펄 뛰었다. 그럴 거면 아주 노예로 만들어 온을 평생 못 보게 만들겠다고 치졸한 으름장도 놓았다.

대신에 면을 마주하고는 내내 신경전을 벌이다 면을 돌리면 자연스럽게 자상함이 배어 나오는 행동이 결국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 혐오감을 불러일으킨 원흉이 바로 그라는 점을 제쳐두고서라도 말이었다.

‘내 개로 만들어서 때리라고.’

언뜻 듣기에는 어처구니가 없고 황당한 얘기였으나, 어쩐지 그럴싸했다. 그러고 보니 고국에서 가르침을 받을 때, 큰일을 도모하기 위해 원수에게도 머리를 조아린 고사(古事)를 무수히 들었다.

군자의 복수는 삼십 년이 간다고 했다. 세대에 걸쳐서 하는 것. 다만 참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완전히 제 편으로 만들어야 옳았다. 입 안의 혀처럼 굴어 뼈를 녹이고 이빨을 몽땅 빼버린 후에. 바로 그때 진정한 복수가 시작되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난점이 있었다.

[그렇게 악한 마음을 품고 마음을 속이면서 삼십 년을 버틸 수 있을까?]

싫은 기색도 하나 지우지 못한 제가…… 과연. 하지만 별다른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밤마다 제 방에 몰래 숨어든 카론이 직접 말한 대로 그가 점점 미쳐서 걷잡을 수 없는 기행을 하기 전에 뭐라도 시도는 해 보아야 했다.

‘우선 표정부터 감추어 보자. 적어도 혐오감은 없도록.’

표정 하나 제대로 감추지 못하면서 복수를 꿈꾸기는 너무 턱없다. 앞으로 철저한 연습이 필요했다.

* * *

몸이 좋지 않은 점을 들어 오후 산책도 쉬었다. 카론은 별말이 없었다. 석찬 시간이 될 때까지 분홍이는 오후 내내 거울을 들고 이리저리 비쳐 보며 표정 연습에 몰두했다.

뺨과 입매에 경련이 일 정도로 표정 연습을 하는 사이 벌써 석찬 시간이 되었다.

석찬이 차려진 방에 도착하자 늘 그렇듯이 카론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독주를 세 병이나 먹은 사람 같지 않게 멀쩡했다. 밤에 와서 미친 사람처럼 구구절절한 혼잣말을 한 기색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저런 건 나도 배워야 하는데.’

표리부동함의 달인인 카론을 관찰하는 사이 자리에 앉자 수발을 드는 궁인이 찬과 음료를 날랐다. 새로운 시도를 하려니 공연히 긴장이 감돌았다.

석찬은 항상 구운 채소와 함께 두툼한 고기가 나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일전에 나이프에 서툴러 면박을 당한 일로 공연히 표정이 굳었다. 나이프를 들자마자 결연하게 고기를 쏘아봤더니 카론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

카론은 제 나이프로 고기를 쓱 흩트렸다. 한 덩어리인 줄 알았는데 살짝 미는 것만으로도 한입 크기 조각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포크는 잘 쓰니까 말이야.”

비꼼이 들려와서 저절로 인상이 일그러지려 했다. 낮에 한 연습이 도움이 되었는지 평소에는 의식하지도 못했던 표정의 변화를 금방 감지했다.

‘아차. 평정. 평정.’

짧게 숨을 뱉고 카론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찌르는 듯한 파란 눈을 향해 연습한 대로 혐오와 증오가 사라진, 그저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어투가 연습 때보단 못해도 듣기에 제법 자연스러웠다.

달그락.

갑자기 식기를 놓은 황제의 얼굴에서 냉소가 사라지고 대신 충격이 번졌다. 그는 손으로 입매를 만지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당혹감과 의문이 동시에 든 건 잘 보였다. 그런데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하는 건 또 무슨 뜻일까. 무슨 얘기를 할지. 원하는 대로 호의에 호의로 답하였으니 그 반응이 자못 궁금하였다.

이윽고 턱을 매만지던 손을 내려놓은 카론이 심각한 눈빛으로 분홍이를 응시했다. 파란 눈이 깊어졌다. 얇은 입매가 움직이며 낮은 음성을 자아냈다.

“아직 많이 아픈가?”

“예?”

“갑자기 왜 낯선 얼굴이 되었지? 이상한데.”

예상과 동떨어진 반응이었다. 호들갑까진 아니라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식이어서 절로 얼굴이 뜨끈해졌다. 그렇게 차이가 심하나? 어색한가? 평소와 같이 있을 걸 괜히 표정 연습을 했나. 갖은 생각이 뇌리에서 복잡하게 얽혔다.

카론은 대뜸 분홍이의 이마를 짚었다. 다른 손으로 제 이마를 짚더니 눈매를 찡그렸다.

“열이 살짝 있는 것 같다. 석찬이 힘들면 그만 쉬는 게 어때?”

낯빛이 변했다고 빈정대는 건가. 순간 인상이 퍽 찌그러졌다. 하여간 빈틈을 보일 수가 없는 개종자 놈이었다.

“아프지 않습니다.”

짜증 섞인 말로 손을 밀어냈다. 당혹감이 서린 푸른 눈이 이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봐도 안 아픕니다.”

“그럼 왜 그런 표정을…….”

“항상 찡그립니까?”

“지금껏 그랬잖아.”

신경질이 퍽 났다. 아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건가. 화를 내면 내는 대로 호의에 호의로 답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고, 또 소소한 배려가 고마워서 고맙다고 순순히 인사하면 인사하는 대로 왜 안 하던 짓을 하느냐고 따지니. 신경질이 날 밖에.

“됐습니다. 앞으로 안 웃습니다.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웃은 적 없잖아.”

“감사는 했지요. 그런데 나를 손가락질합니다, 폐하는.”

고기 따위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딴에는 진심을 엿본 듯하여 마음을 쓴 자체가 어리석었다. 올리아가 권한 계책이 일리가 있어도 결국은 카론을 위한 말이었다.

라테시온의 모든 사람은 분홍이를 분홍이로 보지 않는다. 황제 카론이 곁에 두고 총애하는 요정 황후로 볼 뿐. 그들이 아무리 친절해도 황제 카론이 돌아서는 순간 무용지물이었다. 처음부터 제가 얻은 사람이 아니었다.

카론의 위선적인 술수에 휘말려 진심을 드러내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했다. 시간으로는 채 나흘에 불과하였으나 그래도 심력을 너무 많이 쏟아서 굉장히 피로했다.

“평소대로 돌아와서 다행이군.”

피식 웃는 낯짝이 마주할 힘도 없었다. 사소한 일에서도 일일이 면박을 주는, 못된 심성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작자를 무슨 수로 받아 주나. 어디 신선이 와도 곤장을 치고 내쫓을 놈이었다. 아주 근본부터 글러 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적은 식욕이 뚝 떨어졌다.

“폐하 말대로 힘듭니다.”

“뭐?”

“그만 쉽니다.”

이러나저러나 면박을 주고 조소하긴 마찬가지니 멋대로 하기라도 하고 욕을 먹으리라. 자리에서 그만 일어섰다. 카론이 황당한 듯 빤히 봤다.

“아직 식사 안 끝났어.”

“이상한 표정을 짓느라 피곤합니다.”

“그건…… 내가 실수했다. 가지 마.”

뒤늦게 카론이 손을 잡았다. 황제가 쓰는 식탁치고는 참으로 작아 앉은 채로도 턱턱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이러려고 일부러 작은 식탁을 썼나? 꼬인 생각도 불쑥 들었다. 영 아니진 않으리라.

“아파서 가고 싶습니다.”

“거짓말이야. 어제 오후부터 너와 얘기하지 못했다. 어제 석찬도 오늘 산책도 걸렀어.”

“아팠습니다. 또 그건 폐하 때문입니다.”

손을 빼려 하자 카론이 일어서서 다가왔다. 거대한 체구를 마주할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또 내 탓이야?”

“아직 아파서 말을 타지 못합니다. 억지로 태웠습니다.”

뼈가 다 붙으려면 반년 이상 조심해야 했다. 현재는 말 탈 몸이 당연히 아니었다. 정말로 몰랐는지 카론은 대단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턱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는 동안에도 손목은 여전히 잡고 있었다.

“말을 선물하면…… 아니, 질주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내 잘못이군.”

인정하더니 이내 손을 놓았다. 그는 시선을 도리며 식탁에 도로 앉았다. 나이프와 포크를 가만히 보더니, 반주용 잔에 손을 뻗었다. 윌로우는 아니었다. 짙은 빛깔의 과실주였다. 그래도 충분히 독했다.

“나는 식사를 마저 하겠다. 먼저 가 봐.”

또 술을 먹고 밤에 귀신처럼 찾아와서 방을 빙글빙글 돌 셈인가. 은은한 노기가 뻗어 나오는 뒷모습이 전처럼 마냥 거리끼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오냐, 어디 한번 해 보자. 반감만 들었다.

* * *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밤에 또 귀신 같은 놈이 나타났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날마다 하던 행차였다. 총각으로 죽어서 한이 남은 몽달귀신도 아니고 사지 멀쩡히 달고 내자와 아이까지 있는 놈이 왜 이러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처럼 오늘도 기척이 서늘했다. 냉수 목욕이라도 했나. 침대에 가지런히 놓은 손등을 깔짝이는 건 아무래도 카론의 손끝 같았다. 얼음장처럼 찼다. 뒤이어 손등이 뺨을 스쳤다.

“식사는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어. 아직 한참 말랐는데.”

밥을 제대로 먹길 원하면 밥상머리 앞에서 성질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지 못하고 눈을 반짝 떴다. 막 자는 온의 침대 속을 들여다보던 카론이 낌새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을 때 분홍이는 이미 침대에서 내려온 후였다.

“아.”

몹시 당황한 그는 약간 뜸을 들리다가 냉큼 입구 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분홍이가 입구에 더 가까웠기에 얼른 앞을 가로막았다.

달아나려다가 붙잡힌 주제에 안면을 싹 몰수한 카론은 덤덤하고 뻔뻔하게 나왔다.

“잠을 깨웠군.”

“허락 없이 방을 드나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경비를 강화하도록 하지.”

“나는 보물 상자에 든 보물이 아닙니다.”

보물 상자라는 말에 도깨비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뒤이어 손이 또 잘생긴 턱에 닿았다.

“……알고 있었나?”

“네.”

뻔뻔한 낯짝이 스르륵 무너지며 홍조가 돌았다.

“능청스러운 구석이 있군.”

“능청?”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 말해.”

“그럼 폐하도 능청합니다.”

“싸우기 싫다.”

“나도 싸우기 싫습니다. 그래서 지금 알고 싶습니다.”

서궁에서 있었던 일은 잠시 미뤄 두었다. 카론을 상대로는 원론을 꺼내기보다는 당면한 작금의 일부터 해결하고 나서 거론하는 게 맞았다. 황제가 몽유병 환자처럼 밤마다 황후의 침전에 들락거리면서 광자(狂者)처럼 혼잣말하는 건 진짜 큰 문제니.

일전에 알아보려고 했다가 또 말싸움으로 번지는 바람에 물어보지 못했던 의문을 꺼내 들었다. 이것이 장차 평안을 가져오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면서.

“폐하, 내가 웃으면 좋습니까?”

“그래.”

즉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대답할 줄 알긴 했으나 정말로 순순히 그렇다 하니 기분이 괜히 이상해졌다. 약간 뜸을 들이다 다음 질문을 꺼냈다.

“나를 좋아합니까?”

“싫어하진 않는다.”

이번도 즉답이었으나 사내답지 못하게 비켜 갔다. 퍽 얄미워 심중을 바로 찔러 버렸다.

“[귀애]합니까?”

“키애가 뭔지 몰라.”

“[귀애]는 중요한? 아닙니다. 소중한 사랑입니다.”

앞선 물음에는 담담하게 답하던 카론이 이번에는 마치 화살이 심장에 박힌 사람처럼 얼어붙었다. 차분함이 싹 가시고 대신 충격이 가득했다. 당황한 티가 역력한데 손으로 턱을 만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살짝 벌어진 입술의 떨림이 그대로 보였다.

키 차이로 인해 눈을 마주하느라 살짝 숙인 고개도 꼿꼿했다. 오연하게 세웠다기보다는 석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함에 가까웠다.

닦달하는 대신에 분홍이는 상대의 손목에 손을 걸었다.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멋대로 외면하고 피하지 못하도록.

“대답해요. 귀애합니까?”

“…….”

종용하자 이윽고 금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카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황후의 물음입니다. 또 싸우기 싫습니다. 똑바로 답해요.”

뾰족한 음성으로 야단치자, 푸른 눈매가 가늘어지면서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어디 나갈 길이 없나 사방을 살피듯 시선을 던지던 카론은 분홍이가 버티자 이내 체념했다. 짧은 한숨을 쉰 후에 그는 얌전히 입을 열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라서 잘 모르겠다. 다만, 아무리 나를 혐오스럽게 바라보아도 너와 함께 있고 싶고 네가 증오로나마 나를 바라보았으면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너를 사랑한다.”

실제로 들으면 기분이 대단히 이상할 줄 알았다. 예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강간범이 좋아한다고 해 봐야 역정만 날 거라 여겼는데.

막상 듣고 나니 열불이 터지기보다는 시원함이 먼저였다. 어찌나 명쾌한 답인지, 답답한 가슴이 뻥 뚫렸다. 지금껏 그가 했던 불가해한 언행의 실마리는 귀애라는, 둘 사이에 하기에 참 어색한 한 마디로 스르륵 풀어졌다.

좋아하는데, 귀애하는데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저도 모르게 역정이 나고 토라지고 화를 냈다가 걱정을 했다가 갈팡질팡했을 거다. 들은 바대로라면 사랑을 해 본 일이 없는 양반이니. 참을성도 모자라고 덕도 없고 속도 좁다. 속내를 감추는 데 능하면서 남의 속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넘겨짚고, 그렇다고 꾸짖으며 가르치기에는 황제라 쉽지도 않다.

이런 복잡하고 귀찮으며, 성질도 나쁘고 때로는 포악하기 짝이 없는 작자가 하필 귀애하는 사람이 하필 태생부터 삶이, 하물며 살아온 세상이 다른 저라니.

배운 바로 귀애는 서로를 소중히 보듬으며 정을 나누는 일이었다.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하며 헌신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카론은 아낄 줄도, 보듬을 줄도 모른다. 헌신은 더더욱 할 줄 모른다. 그런데 귀애라 하는 섬세하며 강렬한 감정을 어찌 올바로 받아들이겠나.

과거에 입은 상처는 아직 깊지만, 적어도 영문 모를 행동 때문에 쌓은 새로운 분노는 한 겹 덜었다.

“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서 내가 모른다고 수시로 화를 냈지요?”

손목을 단단히 잡고 억울함을 토로하며 꾸짖었다.

“그야…….”

흐린 말끝을 똑바로 맺기를 침묵으로 강요했다. 눈을 똑똑히 뜨고 흔들리는 파란 눈을 보니, 뒤늦게 카론은 난처한 듯 자유로운 손으로 입매를 만졌다.

“강간범이 좋아한다고 해 봐야 네가 싫어할 테니.”

“싫어할 줄 알면서 왜 다정하게 했습니까? 싫은 다정은 나를 괴롭게 합니다.”

“네 환심을 먼저 사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리 다정하고 상냥해도 상대가 원하지 않는 일방적인 접근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한마디로 잘해 주면 당연히 좋아할 줄 알았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어리숙한 사내가 또 있나. 생긴 것은 꽝꽝 얼어붙은 동토(凍土)에 둥지를 틀고 사는 빙룡(氷龍)의 화신같이 생겨서는 어울리지 않게도 이 무슨 망측한 유치함이란 말인가.

“그 뒤에 왜 못되게 그랬습니까? 넘어지는데 손도 안 잡았습니다. 다정하지 말라고 했지 못되게 하라고는 안 했습니다.”

“차라리 미워하게 하는 편이 좋다고 했잖아. 다정의 반대는 매정이기도 하고.”

심상찮은 기운이 단전에서부터 뭉근히 올라왔다. 등골을 타고 빠르게 올라온 기운은 목덜미를 뻣뻣하게 굳히고 뒤통수마저 저릿저릿하게 했다.

“……일부러 그랬습니까?”

“그래.”

이걸 대답이라고. 뒤 꼭지에 모인 열기가 일순간 오른쪽 어깨로 쏠리더니 이내 주먹으로 확 돌진했다.

퍽!

단단히 틀어쥔 오른쪽 주먹이 카론의 옆구리를 완벽하게 가격한 후에야 분홍이는 제가 손찌검을 했음을 알았다. 평생 주먹질을 해 본 일은 극히 드물어도 뼈까지 저릿한 충격에 대단히 큰 아픔을 선사했을 알고 흡족할 때 카론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흠.”

흔히 아픈 사람이 그러듯이 맞은 자국을 문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눈가를 살짝 찌푸렸을 뿐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치고는 주먹이 매워.”

“시끄러워요. 일부러 그러다니. 아주 못됐어요.”

“싫다면 앞으로 하지 않겠다.”

“싫어요. 매정한 건 정말 싫습니다.”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카론은 약간 혼란스러운 듯이 미간을 구겼다.

“그럼 다정한 쪽이 더 낫다는 거군.”

“당연합…… 아니 폐하는 중간이 없습니까?”

“중간? 어떤 의미지?”

“다정도 아니고 매정도 아니고. 평범한 행동 말입니다. 올리아나 그렌을 대할 때처럼요.”

“그들은 네가 아니잖아. 평범하게 대하란 건 대단히 어려운 요청이야.”

“왜지요?”

“너만 보면 사타구니에 힘이 들어가는데, 어떻게 고요함과 평정을 내내 유지하나. 이렇게 대화를 할 때도 대단히 큰 인내심을 요구한다. 이 이상은 힘들어.”

“거짓말하지 말아요. 할 수 있으면…… 힉.”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카론이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분홍이를 끌어안았다. 가볍게 안긴 몸에 밀착한 단단한 허벅지로 커다란 몽둥이의 부피감이 느껴졌다.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성적인 움직임에 분홍이는 숨을 들이켰다.

“지금도 이렇다고.”

“아…… 으음.”

“흥분 상태를 억누르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지 너는 모른다. 네가 역겹다는 눈으로 볼 때도 흥분을 억누르느라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 줄 알아?”

뭐…… 뭐 이런 막돼먹은 자가 다 있나. 당사자인 제가 보고도 깜짝 놀랄 만큼 싸늘한 눈초리에 세운다니. 낯이 뜨겁다 못해 폭발하는 줄 알았다.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으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은 팔이 쉬이 풀리려고 하지 않았다. 아니 카론이 도리어 허벅지를 꾹 눌렀다. 솜털 하나하나가 바짝 서서는 고요히 아우성쳤다.

“폐…… 폐하는 근본이 썩었습니다.”

분홍이는 자유로운 손으로 카론의 머리와 가슴을 짚었다.

“여기, 여기. 상태가 아주 나쁩니다.”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좀 참아요.”

“참은 게 이거다.”

“폐하는 짐승입니까? 그리고 왜 안 놓아줍니까? 놓아주세요.”

“그래, 짐승이야. 오랜만에 닿아서 기분이 좋으니까 놓기 싫어.”

후안무치도 정도가 있다. 옆에서 온이 자고 있지만 않았으면 노성을 터트렸을 것이다. 분홍이는 끓어오르는 열불을 어금니로 꽉꽉 씹었다. 힘이 바짝 들어간 눈으로 카론을 죽을 듯이 노려봤다.

“뻔뻔합니다.”

“뻔뻔해서 지금껏 살아남았고 그래서 요정도 잡았지.”

말로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귀애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멍청이 주제에.

“난 언제든 너를 만지고 싶고 안고 싶다. 내가 저지른 잘못으로 인해 앞으로 어쩌면 영원히 품을 수 없을 너를 가까이에 두고 이성을 유지하는 게 무척 고통스럽다. 나는 고통은 잘 참는 편이야. 믿지 않겠지만,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고통에 무딘 성격인 걸 알고 들으니 진심인 줄은 알겠다. 그러나 아랫도리를 이리 밀착하면서 할 말은 아니지 않는가.

꿈틀거리며 점점 커지기만 하는 대단한 흉물의 감각이 선연했다. 영 불편하여 다리를 꿈지럭대자 카론이 낮게 목을 울렸다. 허벅다리가 더 비벼진 모양이었다. 민망하여 절로 귀 끝이 홧홧했다.

속내를 있는 대로 터놓아서 그런지 카론의 뻔뻔함은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 딴에는 중한 언쟁을 벌이고 나서 이러기도 참 민망했다. 아니 속을 터놓았으니 마음껏 탐하겠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계속…… 이럽니까?”

“조금만 더.”

욕정을 토하지 못한 사내의 심경을 영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음인이어도 남자이기에 몽정도, 수음도 할 줄 안다. 고국에선 실지로 한 적도 있었다.

이러다가 선 채로 욕정의 끝을 보는 건 아니겠지? 제대로 만지지도 않고 할 리야 없겠지만, 아무래도 상대의 낯빛이 심상찮았다. 제 손을 더럽히는 일이야 찜찜해도 뭐 씻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카론의 어깨너머로 아기 침대를 보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온이 앞입니다.”

“자고 있잖아.”

“아이 앞에선 이런 거 못 합니다.”

처음에는 인상을 구기면서 항의를 하려던 카론은 시선을 마주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속내를 눈치챈 그는 확인하듯 되물었다.

“앞이 아니면 되나?”

“…….”

“말해 봐. 그 말은 아이 앞이 아니면 가능하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망설이다 고개를 슬쩍 끄덕이자 그제야 민망한 부위가 슬며시 떨어졌다.

“침대?”

“여기나 거기나 같습니다.”

“욕실?”

“찹니다.”

“응접실?”

“마그네가 듣습니다.”

인내심이 바닥난 흉물의 주인이 폭발하기 전에, 분홍이가 얼른 덧붙였다.

“폐하의 침전으로 갑니다.”

* * *

잠자리한 지 한참 되었다. 물론 임신 때문이었다. 아기를 낳은 후에는 삼가는 게 좋을뿐더러 실지로 몸도 안 좋았다. 말을 타서 앓아누운 것만 봐도 그렇다.

비록 다른 사람을 겪어 보지 않았어도 카론이 웬만한 양인다운 풍모만큼 큰 욕정을 가지고 있음을 다방면으로 깨우쳤다. 몸이 먼저 동하면 저를 때려가며 겁간하기도 한 개종자 놈이 오래 참았으니…… 수치를 모르고 벌떡 세우기도 어쩌면 당연지사였다. 후궁도 없으니 당장은 황후인 저뿐이었다.

‘오늘은 일단 어떻게든 적당히 달래어 해소하고 다음엔 이 문제를 깊이 따져야겠다.’

황제가 정사(政事)에 몰두할 수 있도록 살피는 일이 바로 황후의 의무였다. 의무를 다하기로 약조를 일단 했으니 지키는 게 맞다. 더불어 내내 저를 괴롭히고 화나게 했던, 죽 끓듯이 변덕을 부린 연유 중 일부는 끓어오르는 열기를 감당치 못한 탓이었다.

목이 죽을 만큼 타는데 손닿을 거리에 있는 황후가 내내 뭣 씹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참을성이 조금도 없는 개종자로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반쯤 돌아갔을 터.

귀애가 진심임을 알았다고 갑자기 도깨비 눈이 예뻐지진 않았다.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어쨌든 배필이 되었고 아이도 있어 평생 낯짝을 맞대고 살 사이였다.

노예가 어땠다느니, 앞으로 평생 온을 못 보게 하겠다느니. 다 거짓부렁이었다. 하찮은 허풍이었다.

저지를 죄가 있어 미움받을까 봐서 귀애한다고 말도 못 하고 끙끙 앓았으면서. 냉대 좀 당했다고 밤마다 몽달귀신이 되어 부유하는데 어떻게 내쫓을까. 내쫓아 놓고도 허튼짓 못 하게 감시한다며 냉큼 쫓아와 옆에 누울 작자였다.

언제부터 진심이었을까. 진심이었으니 그렇게 썩은 오물을 보는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푹 빠졌을 터. 과연 언제인지 궁금했다.

침전에 들어가자마자 카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분홍이를 문짝에 밀쳤다. 떠밀리면서 문이 세게 닫혔다.

쿵.

“앗!”

불퉁하게 면박을 주려는 찰나, 귓가에 더운 입김이 스쳤다. 문 쪽을 보며 선 터라 뒤에서 쇄도하는 육중한 사내의 무게가 등을 눌렀다.

“흐…… 음.”

뾰족한 코끝이 머리카락을 헤쳤다. 자른 머리를 그렇게 안타까워하더니 지금도 코로 머리를 헤치며 내음을 맡았다. 큰 손은 팔을 쓸어내렸다가 앞으로 스르륵 넘어왔다. 가슴과 배를 단단히 끌어안은 덕에 몸이 더욱 밀착했다.

“흣.”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딱딱한 존재를 무시하기 어려웠다. 카론이 낮은 숨을 내쉴 때마다 압박이 더 깊어졌다. 멀쩡하던 아랫배가 공연히 뒤틀렸다. 과거, 배를 수시로 맞춘 덕에 몸이 당치도 않는 걸 떠올리고 말았다.

뺨과 귀에 불이 붙었다. 뜨거운 낯을 시원한 문짝에 대고 흐트러지는 숨을 골랐다. 뒤에서 꿈틀거리는 사내의 기척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태손비가 되기 위한 공부 중에는 씨를 잘 받기 위한 방중술도 있었다. 씨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를 위하여 달리 사내를 달래는 법도 배웠다.

구음은 절대로 못 한다. 거기까지 하기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저놈의 것은 웬만한 절구 떡메만큼 크고 흉악했다. 그런 걸 입에 넣었다가 내일 죽을 먹는 수가 생긴다.

수음이 응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얇은 침의를 당장 뚫고 들어올 기세였기에 분홍이는 팔꿈치를 세워 카론을 뒤로 밀어냈다. 안 밀릴 듯 다소 저항하던 그는 이내 조금 물러났다. 압박이 사라지자 숨을 쉬기가 한결 수월했다.

깊은숨을 몰아쉬며 욕정이 철철 흐르는 황제를 향해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넣지 않습니다.”

“흐음…… 만지…… 기만…… 하겠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카론은 공연히 어금니를 깨물고 문장을 끊어 씹었다.

“아니. 만지지도 않습니다.”

어른거리는 등불을 등진 놈은 미끈한 검미를 한껏 모았다. 주름진 미간 아래 새파란 도깨비 눈이 가늘어졌다. 당장 덮칠 듯 기세가 사나웠다.

“여기까지 와 놓고 만지지 말라니. 날 더러 죽으란 건가?”

“안 한다고 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을 자꾸 자르기에 분홍이는 얼른 카론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더운 입김이 손가락 사이로 샜다.

“폐하는 가만히 있습니다. 대신 내가 합니다.”

“……뭐?”

한일자로 꾹 다물렸던 입술이 다 익은 조개처럼 뻐끔 벌어졌다.

“다시 말해 봐.”

“내가…… 폐하를 만집니다.”

이미 벌어진 입이 한층 더 커졌다. 도깨비 눈도 그렇게 커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물론 분홍이의 불타는 얼굴도 누가 풀무질을 했는지 활활 타오르긴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손부채질이라고 하고 싶은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등으로 뺨을 훑으며 흩어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네가? 나를?”

뻔뻔하기가 기름통 같은 작자가 굳이 또 물어본다.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양반이.

“왜요? 폐하는 하고 싶을 때마다 싫다는 나를 강간했으면서 반대로 나는 하면 안 됩니까?”

사납게 쏘아붙였다. 자기는 되고 저는 안 된다고 하면 두 번 다시 배를 맞출 일은 없을 거라고 쏘아붙이려 했다.

“그것참 반박할 수 없는 논리군.”

큰 손이 깎아지른 얼굴을 덮었다가 아래로 미끄러졌다. 마디가 굵고 강인한 손가락에 눌렸다가 다시 뜬 청금안에서는 희미한 즐거움과 함께 짙은 욕망이 떠올랐다.

“황후 폐하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도록 하지.”

또,또! 안면이 한순간에 바뀌었다. 도깨비라고 내심 부르긴 했지만, 그래도 어찌 이렇게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는 양 뚝딱 뚝딱 변하는지.

염통 언저리가 저릿하고 모골이 선연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거구의 사내를 보며 분홍이는 깊은 고찰 없이 임기응변으로 대하다가 큰 실책을 범하였음을 직감했다.

꼭 범을 앞둔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범을 본 일은 없어도 누님과 형님이 잡아 온 식인호(虎)의 가죽은 본 적이 있다. 한입에 목덜미가 뜯기고 목뼈가 똑 부러질 만큼 대가리가 컸다.

“자…… 잠깐.”

막 허벅지에 손을 대는 카론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침대로 갑니다.”

“좋아.”

냉큼 허리에 팔을 두른 카론이 분홍이를 반쯤 떠안듯이 붙잡아 빠르게 침대로 몰아넣었다. 카론이 옷을 벗는 동안 얼른 침대 중앙으로 기어갔다.

거리가 있을 줄 알고 몸을 돌리는 순간, 시야 가득 굵은 목과 두툼한 흉곽이 들어왔다. 언제 쫓아왔는지 벌써 숨결이 닿을 거리였다.

“폐하는…… 허억…… 그러니까 폐하는 아무것도 하면 안 됩니다. 나만 움직입니다.”

“……두 번 말하지 않아도 알아.”

한 박자 늦은 대답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혔다. 육중한 몸이 올라오자 광활한 침대가 출렁였다. 뒤늦게 피가 식었다. 뭉근한 열기가 피어오르던 가랑이도 지금은 얼음물에 담근 것처럼 팍 쪼그라들었다.

‘지금이라도 무를까.’

다시 침을 꿀꺽 삼켰다. 딴에는 의연함을 가장하며 카론을 경계했다.

반라의 사내는 이불을 휙 젖히고 베개를 쌓아 비스듬히 누웠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대들보만큼 두툼한 허리께에 얹었다.

“나는 준비되었다.”

잔잔한 어투였으나 욕망을 두르고 있어 낮고 넓게 울렸다. 막상 밥상을 차려 주니 더욱 섬뜩했다. 은수저가 있다면 근육과 혈관이 울룩불룩 솟아오른 살점에 대자마자 시커멓게 탈 것 같았다.

‘명채운. 네가 기어이 사달을 내는구나.’

내지른 것이 있어 무르자는 말은 차마 뱉지 못하고 혀끝에만 걸렸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 가만히 있어.”

차분히 누워 있는 상대의 표정에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죽겠다는 티가 철철 흘렀다. 크게 실수했다 싶다가도 갑자기 또 신경질이 퍽 났다.

분명히 똑같이 겁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도 카론은 두려워하기는커녕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무슨 짓을 당할 줄 알고? 심부가 짜르르 떨리는 긴장감과 별개로 한 점 거리낌 없는 태도가 무척 얄미웠다.

손을 내어 가까운 팔뚝을 꼬집었다. 무슨 사람 가죽이 이다지도 튼튼하고 두꺼운지 제대로 비틀리지도 않았다.

“음?”

금색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딴에는 세게 꼬집었는데 별로 아프다는 기색이 아니었다.

찰싹.

대흉근 언저리를 매섭게 때렸다. 이어진 근육이 꿈틀거리긴 했으나 여전히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대신에 저를 바라보는 도깨비 눈에 호기심만 짙어졌다.

성질이 퍽 나서 주먹을 쥐고 거대한 빨래판 같은 가슴이며 배를 마구 때렸다. 철퍽철퍽.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일자로 꾹 다문 카론의 입술 양 끝이 꿈틀거렸다. 광대와 턱 언저리도 실룩했다.

‘아프지?’

그간 말도 제대로 안 하고 괜한 심술만 부려 저를 괴롭힌 데 대한 보복의 기회였다. 신나서 북 치듯이 마구 두들겼다. 옆에서 때리기도 버거워 허리를 말 타듯 냉큼 올라탔다. 두툼한 대흉근을 신명 나게 두들겨 패자 드디어 놈이 뭐라 혀를 놀렸다. 아프니 그만하라고 해도 절대로 멈추지 않을 테다. 결심을 다졌으나 막상 들려온 말은 예상과 영 달랐다.

“이런 취향인 줄 미처 몰랐는데.”

“응?”

두꺼운 허리를 감싼 허벅지 위에 사내의 굵고 긴 손가락이 슬그머니 올라왔다.

“가학 성향이었나.”

“으응?”

알아듣지 못한 생소한 단어였다. 카론은 엄지손가락으로 팽팽하게 당겨진 허벅다리 살갗을 쓸었다.

“때리면서 욕정을 느끼는 사람.”

머릿속에서 폭죽이 연이어 터지면서 얼굴이 아니 전신이 화르르륵 타올랐다.

이 망할 놈의 세 치 혓바닥부터 때려 줬어야 하는데!

“이익!”

분노에 가득 차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역시.”

놈은 픽 콧방귀를 뀌었다. 직후 눈을 감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는데 마치 뺨을 내주는 형세였다.

때리면 놈의 말대로 변태가 되고 만다. 그렇다고 안 때리자니 복장이 터지려고 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너…… 너도 때렸잖아…….”

“때리고 강간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때리면서 성욕을 느끼진 않아.”

얼굴만 마주해도 벌떡 서서 곤란하다고 했던 작자가 뻔뻔하게도 자신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나…… 나도 때리면서 좋지 않습니다.!”

버럭 고함치자 놈의 고개가 다시 삐딱해졌다.

“그럼 왜 때리는 거지?”

“가만히 누워 있는 모습이 밉습니다.”

“흐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해서 가만히 있는 건데.”

“내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도, 무서워하지도 않고.”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으니 무서울 게 없지.”

가만히 생각하던 카론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팔다리를 자르거나 목숨을 빼앗는 일은 곤란해. 일단 레온이 황위를 이을 만큼 클 때까진 너와 잘 지내면서 멀쩡히 살아야 하고 팔다리가 없으면 앞으로 사는 데 매우 불편할 테니. 그 외엔 뭘 해도 좋다.”

담담해서 더욱 소름 끼치는 당부에 기가 차고 말았다.

“내가 폐하인 줄 압니까.”

“다른 사람인 걸 알고 있다. 혹시나 해서.”

언쟁을 이어 봐야 열불만 터질 터. 더는 낯짝을 마주하기 싫었다. 냉랭하게 돌아서려고 했는데 망할 놈의 허리가 어찌나 두꺼운지 무릎으로 일어서기 벅찼다. 엉덩이를 중심 삼아 한쪽 다리를 들어 반대편으로 옮기려 했다. 자연히 엉덩이로 놈의 하복부를 쿡 찔러 비틀게 되었다. 금방이니 괜찮을 줄 알았다.

“큭.”

여유만만하던 낯짝이 별안간 팍 일그러졌다. 쭉 뻗은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문 어금니 사이로 낮은 울음이 번졌다. 연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하필 성난 그것이 둔부 골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워낙 크고 두꺼워 마치 통나무처럼 든든한 바람에 끼인 줄도 몰랐다. 얇은 면포로 만든 속곳이 옆으로 벗겨지며 핏발 선 몽둥이가 맨 궁둥이를 툭 쳤다.

“힉.”

화들짝 놀라면서 균형을 잃어버렸다. 그 바람에 뒤로 휘청했다. 아무거나 짚는다는 것이 넓적다리를 잡고 말았다. 놀란 손끝이 딱딱한 살점을 한껏 긁었다.

“아…… 가…… 르타.”

점점이 이어지는 부름에서 위험을 느꼈다. 분홍이는 얼른 몸을 뒤집고 엉금엉금 기어서 달아나고자 했다. 그러나 카론의 긴 다리에서 채 몸을 떼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히고 말았다.

털썩.

카론이 반쯤 가물거리는 눈을 번뜩이며 사지를 속박했다. 입 벌린 식인호의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지듯 도깨비 눈에서 음험한 욕정이 뚝뚝 떨어졌다.

“안 할 거예요. 안 할 겁니다. 놔줘요.”

“빌어먹을…… 아가르…… 타.”

영 이성을 잃진 않았는지 카론은 상체를 무너뜨리며 분홍이를 감쌌다.

“차라리 때려. 네 화가 풀릴 때까지. 이런 식으로 괴롭히기보다는 그쪽이 훨씬 낫겠어.”

거친 음성이 절절 끓었다.

조금 미안했다. 아니 이쪽이 미안할 게 뭐람.

“괴롭히지 않았어요.”

“안 믿어. 이건 분명히 고의다.”

“아닌데.”

“아니라고 하지 마. 이건 복수야. 그렇지 않고서 이럴 순 없어.”

아니라니까. 반쯤 먹은 말은 무시당했다. 상대는 심호흡을 거듭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를 썼다. 한참을 달린 수말처럼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가슴 언저리를 살살 달래 보려고 손을 들었다.

“움직이지 마.”

고개를 살짝 든 카론은 홍조가 번진 낯으로 속삭였다.

“네가 손대면 더 나빠져.”

곤란함이 가득해서 측은했다. 아니 측은할 게 따로 있지. 이런 개종자가 측은할 리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머리를 감싸는 손길이 애처로웠다. 너무 괴로워하기에 뭐가 어찌 되었기에 이러나 싶어 시선을 아래로 슬쩍 내렸다.

도깨비방망이가 크게 성이 나서는, 아까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음인이어도 남자는 남자다. 음인으로서 열락기를 겪기 전에 음경의 발기와 몽정을 먼저 깨우쳤다. 그렇기에 저렇게 부푼 상태가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잘 알았다.

내심 카론과 같은 양인은 한번 욕정이 생기면 대단히 흥분하기에 웬만한 사람보다 더 예민했다. 저렇게 된 상태에서 제대로 풀지 못하면 대단히 큰 고통이 따를 터.

정말로 카론을 괴롭히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면? 제가 당했던 일에 준하는 고통은 아니라도 그에 반분은 될 만큼 아플 수 있다.

또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겠는가. 흥분한 저를 두고 냉랭하게 돌아서는 배우자라니. 그만큼 미움을 표현하기 좋은 방법이 없다.

머리는 카론을 버리고 나가라고 시키는데 몸과 마음이 영 말을 듣지 않았다. 심부는 통쾌함과 더불어 아주 약간이지만 동정심이 깃들었다.

몸은 그보다 더했다. 아직 마음을 확고히 정하지도 않았는데 무릎이 절로 움직이더니 딱딱하게 부푼 부위를 슬슬 문지르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제 것에도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들끓는 욕정에 휘말렸나? 양인의 기운이 음기를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큭.”

다급한 신음과 함께 새파란 눈이 내리꽂혔다. 지붕같이 드리워진 거구가 부들부들 떨렸다.

“정말…… 이러기야?”

“쉿.”

손을 들어 놈의 입술을 막았다. 그리곤 세운 무릎을 뭉근히 돌리며 압박을 가했다. 손바닥에 닿은 입술이 일그러지며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더운 숨이 샜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도깨비 눈을 보며 속삭였다.

“잘 만져 줄 테니 얌전히 기다립니다.”

상체를 일으키며 다른 손으로 가슴께를 슬쩍 밀었다. 실바람보다 가벼운 힘에 거대한 인영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다시 그의 위를 점한 분홍이는 무릎 대신 엉덩이로 깔아뭉갰다. 서로가 걸친 얇은 속곳만이 은밀한 살점을 가렸다.

할짝.

뜨거운 혀가 분홍이의 손가락 사이를 핥았다. 둘 사이를 적실 축축함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후.”

꿈지럭댈 때마다 파란 눈에 붉은 핏대가 한 줄 한 줄 늘어났다. 양옆으로 길게 뻗은 사내의 두 팔 또한 굵은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갈퀴처럼 분홍이의 접힌 오금을 파고들었다.

“잠시 손 좀…….”

“안…… 돼!”

어금니를 꽉 깨문 카론은 짧은 단어도 쉬이 뱉지 못했다. 잠시 좀 놓아 달라 했다가 그야말로 발광을 할 것 같았다.

큼지막한 돌덩이 여섯 개가 갑옷처럼 붙은 복부에 두 손을 짚었다. 곳곳에 난 흉터가 꿈틀거렸다. 직후 카론의 한쪽 손은 무릎을 높고 손목을 잡았다.

“얌전히…… 후…… 있습니다.”

호흡을 가다듬은 후에 조심스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엉덩이를 둥글리며 흥분한 사내를 달래는 자세는 아직 온전치 않은 뼈마디에 좋지 않지만, 이리 애달파하는데 천천히 한다면 한 번쯤은 괜찮을 듯했다.

‘이게 맞나.’

머리로는 알아도 실제로 한 건 처음이었다. 딱딱한 기둥을 깔아뭉개는 느낌은 생생한데 이래서 정말로 욕정이 풀리긴 하나 싶었다.

풍성한 침의 자락 때문에 맞닿은 부위가 가려졌다. 구겨진 옷자락을 한 손에 뭉쳐 들고 휙 들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숙여 아래를 관찰했다.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흐응.”

위로 불뚝 솟은 봉우리는 내의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어찌나 딱딱하고 커다란지 마치 작은 목마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찡그린 얼굴을 풀면서 혀끝으로 입술을 슬쩍 핥았다.

별안간 질겁한 신음성이 들렸다. 그리곤 어쩐지 목마 크기가 좀 변했다. 더 커졌다.

[이게 왜 이렇게 커지지? 이러다가 터지는 거 아냐?]

저도 모르게 고향 말을 하며 다시 아래를 들췄다. 아까보다 더 성난 놈은 위에서 내리누르는 엉덩이 때문에 앞으로 쭉 뻗었다. 부피가 분명히 커졌는데 느낌도 그러거니와,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성난 놈의 머리가 내의 허리춤으로 삐죽이 나왔다.

“큭.”

다시 거친 신음이 울려 퍼졌다. 움직이는 아래만 신경 쓰느라 정작 목마 놈을 잊었다. 옷자락을 놓으면서 시선을 앞으로 던졌다.

핏발 빨갛게 선 눈을 크게 뜬 카론이 숨조차 멈춘 채로 굳어 있었다. 벌어진 입매에서 경악을 읽을 수 있었다.

“미…… 쳤어?”

“응?”

뭐가 또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가. 미간을 찡그리자 손목과 오금을 쥔 손아귀가 강하게 수축했다.

“읏. 아파요.”

“뭐가 아파?”

열심히 만져 주는데도 뭐가 모자란 건지. 카론은 숫제 으르렁댔다.

“덜 익은 호박 같은 엉덩이로 사람을 사지에 몰아넣는 것도 모자라서 보는 것만으로도 돌아 버리게 하려고 그런 짓을 하는 건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거짓말을 너무 잘해.”

가늘게 뜬 눈매에 은근한 원망이 실렸다. 아니 뭘 어쨌다고. 면박을 주고 아무거나 마구 탓을 하는 일은 익숙하지만, 그래도 딴에는 카론을 위해서 고생을 하는 중에 저러니 심통이 불쑥 솟아올랐다. 곁눈으로 흘기며 하던 일이나 했다.

엉덩이를 둥글리고 또 둥글렸다. 손을 짚은 배가 한층 딱딱해지고 덩달아 접은 종아리에 붙은 허벅지가 움찔 떨었다. 움직이는 만큼 분홍이 또한 흥분이 커졌고, 절로 더운 숨이 샜다.

“후웃.”

옅은 땀을 흘리며 열심히 둔한 허리를 돌리고 또 돌렸다. 카론은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일그러뜨리고는 주먹으로 제 입을 꾹 눌렀다. 움직일 때마다 황제의 광대와 턱이 한층 굳었다.

허리에 힘이 빠지고 가랑이가 압박으로 인해 슬며시 아팠다. 이젠 그만 끝나길 바랐다. 무릎을 앞으로 모았다. 엉덩이에 더 많은 체중이 실렸고 움직임이 더 크고 강해졌다.

“흣.”

크게 세 번 정도 움직였을 때. 아래에 깔린 사내의 몸이 급격히 딱딱해짐과 동시에 내의가 축축하게 젖었다. 확인을 위해 다시 옷자락을 들고 가랑이를 살폈다.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훨씬 잘 보였다.

목표한 고비를 넘은 흔적을 확인하자 절로 큰 한숨이 나왔다. 드디어 끝났다.

“후우.”

무리한 동작을 하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말(馬)처럼 우람한 몸을 타느라 허리도, 다리도, 몸을 지탱하던 팔도 무척 고되었다. 카론의 옆으로 쓰러졌다. 아직 뭉근한 열기가 남아 있어 숨이 거칠었지만, 그래도 딴에는 흡족했다.

두툼한 가슴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근에 머리를 놓았다. 노곤한 팔은 아직도 크게 오르내리는 가슴에 올렸다.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도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카론은 이를 꽉 깨문 채였다. 흥분이 쉬이 가라앉지 않을 걸 보니, 제가 잘하긴 잘한 모양이었다.

“좋았습니까?”

듣지 않아도 답은 뻔했다. 요사스러운 요정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다. 너무 좋아서 지금도 떨림이 가라앉질 않는다. 앞으로도 이렇게 해라. 이러다가 자식을 줄줄이 보는 게 아닐까. 무슨 말부터 할지 자못 궁금한 찰나, 도깨비 눈을 부여잡았던 손이 이윽고 아래로 내려갔다.

“정말로 날 죽일 작정인가.”

“그렇게 좋습니까? 죽을 만큼?”

놈의 고개가 휙 돌았다. 새파란 도깨비 눈에서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욕정과 분노, 아니 원망이 절절 끌었다. 내심 만족하며 풀어졌던 몸이 대번에 굳었다.

“좋냐고?”

“아…… 폐하?”

“좋냐고 물었어, 지금?”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거구에서 위험한 기운이 뻗쳤다. 큰일 났다. 뭘 잘못된 건지 몰라도 어쨌든 단단히 틀어졌다. 얼른 뒤로 굴렀다. 그리곤 침대 밖으로 달아나려는데 발목에 쇠고랑 같은 손아귀가 척 걸렸다.

“히익.”

손으로 침대보를 구겨 잡는데도 뒤로 질질 끌려갔다. 그러는 동시에 침의는 위로 돌돌 말렸다. 배에서부터 발끝까지 훤히 드러났다. 비단으로 만든 얇은 내의는 우악스러운 손이 걸리는 동시에 찌익 하고 찢어졌다.

“좋냐고? 그런 짓을 해놓고 좋냐고 묻는 악의는 도대체 뭐지? 차라리 징을 밖은 채찍에 얻어맞는 편이 더 낫겠어.”

잡은 다리를 휙 돌리는 바람에 하체가 반쯤 빙글 돌았다.

그러면서 다리 사이에 휑한 기운이 닿았다. 아까 엉덩이를 놀릴 때 모였던 열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안 됩니다. 안 된다고요.”

다급하게 옷을 내리면서 손을 내저었다. 육중한 사내는 화난 호랑이처럼 느릿느릿 사지로 기어 왔다. 날카로운 안광에 절로 숨이 멈췄다.

눈을 홉뜨고 숨을 죽이자니, 놈이 허연 송곳니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댔다.

“넣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맞나?”

“네?…… 예에…… 으응…….”

안 넣을 분위기가 아니라서 말끝을 흐렸다.

“황제 앞이다, 똑바로 말해.”

“넣는 건 싫습니다. 넣지 말아요.”

두려움과 긴장에 날뛰는 심부를 애써 진정시키면서 또박또박 말을 맺었다. 그러자 카론이 침대에서 벗어나 근처에 있는 문갑에 손을 대었다.

빈틈을 타서 슬며시 도망가려는 찰나, 낮고 거친 음성이 뒤통수에 퍽 꽂혔다.

“여기서 달아나면 너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

조용히 원래대로 누웠다. 어린 온을 고아로 만들 순 없지 않나.

카론은 작은 약병을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서궁에서 쓰던 것이었다. 미끄러운 내용물을 손에 부은 다음 그걸 분홍이 허벅지 안쪽에 발랐다.

“안 됩니다. 정말 아파요.”

울상을 짓자 음험한 욕정으로 맹렬히 타오르는 눈가가 잘게 떨렸다.

“넣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미쳐 버리기 전에 도움이 안 되는 그 입 좀 다물어.”

매서운 경고와 함께 그는 옆으로 누운 분홍이의 두 오금을 한쪽 팔로 모아 잡았다.

“흐앗.”

딱딱한 방망이가 딱 붙은 허벅지 사이로 불쑥 들어왔다. 분명히 넣진 않았다. 그렇다고 안 넣은 것도 아니었다. 당혹감도 잠시 카론이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앗!”

꽉 다문 다리 사이를 누비는 흉악한 두께와 강도의 방망이 덕에 정신이 없었다. 아까 스스로 움직일 때 옅은 불씨가 순식간에 하체 전체로 번졌다.

“으앗…… 아.”

헛교접인데도 이렇게 격렬하고 뜨거울 수가 있는 건지. 카론에게 떠밀린 남성은 덩달아 성을 내며 꼿꼿해졌다. 허리가 뒤틀리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골이 푹 팼다.

허리 아래는 옆으로 가지런히 포개진 자세로 단단히 붙들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체는 얘기가 달랐다. 옆으로 고이 누워 있지 못했다. 등뼈가 틀리고 고개가 꺾였다.

철퍽철퍽.

희고 늘씬한 허벅지와 열십자를 이룬 짙고 우람한 허벅다리가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넉넉히 바른 기름과 함께 비벼지는 살 소리도 음란했다.

“후…….”

금색 검미가 사납게 치솟았다. 찌푸린 미간엔 지독한 열망이 고였다. 못된 말과 함께 냉담하던 작자가 저를 향한 욕정에 물들어 흐트러진 모습을 보자 아랫배가 절로 뒤틀렸다.

“흐윽.”

심부가 철렁했다. 폐부도 훌렁훌렁했다. 고개를 이리 꺾었다가 저리 돌렸다. 입술을 꽉 깨무는 사이 아래에만 몰두하던 작자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나를…… 봐.”

축축한 아래와는 영 다르게 저를 부르는 음성은 메마르고 거슬거슬했다. 부르는 대로 눈을 맞추었다. 새파란 눈은 갓 짜낸 쪽물처럼 짙었다. 그 안에 제가 있었다.

솜털 머리가 붙은 젖은 이마, 옆으로 처연히 누운 눈썹, 움찔거리는 콧등, 홍조가 들어 발그레한 뺨. 맨살을 부딪쳐 오는 사내를 담고 한껏 흐려진 눈.

손을 들어 깎아지른 듯 반듯한 턱에 대었다. 새파란 거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제가 어떻게 비추어지는지. 카론이 저를 어떻게 보기에 이렇게 살을 대고 있으면서도 저렇게 목말라 하는지.

천천히 이끄는 대로 고개가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난폭한 움직임에 떠밀려 몸이 들썩거렸다. 거세게 들이닥치는 딱딱한 머리에 살 뿌리가 정통으로 맞았다.

“흐읏.”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터트렸다. 다급한 숨을 뱉기가 무섭게 카론이 먹어 버렸다. 더운 숨을 살라 먹으며 다가온 그는 이윽고 입술을 포갰다.

아래만큼이나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여린 살점을 더듬는 혀의 놀림이 음탕하고…… 달았다.

추웁. 춥. 초옥.

두 입술이 자세를 바꾸어 가며 흡착을 반복하는 사이 혀로 서로의 혀를 탐했다. 타액이 섞이고 숨이 섞였다. 뜨겁고 강렬한 헛교접으로 인해 달뜬 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또 적셨다.

연거푸 두 번의 끝을 본 후에야 카론의 흥분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사이 분홍이도 똑같이 두 번 침대와 침의를 더럽혔다.

허벅지 사이가 얼얼했다. 회음부에 은은한 둔통이 일었다. 혹사당한 허리가 나른하여 꿈쩍도 못 하는 사이 카론이 물수건으로 몸을 구석구석 닦아 주었다.

제 몸까지 닦은 후 카론은 분홍이 곁에 누웠다. 여운이 길어서 그런지 별다른 헛수작 없이 뒤에서 끌어안는 데도 나른한 한숨이 번졌다.

“이제 됐습니까?”

“약간은. 한참 부족하지만.”

뒤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눈을 흘겼다. 허튼 말은 아닌지 닿은 흉물은 아직도 열감이 뚜렷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더는 상대할 힘이 없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동안 카론은 어깨며 귓바퀴며 뺨 따위를 입술로 지분거렸다.

“너무 흥분했나. 잠이 오지 않아.”

“나는…… 졸립니…….”

의식이 가물거렸다. 뒤통수에 닿은 입김과 손가락을 가닥가닥 엮는 감각을 마지막으로 깊은 밤에 빠졌다.

* * *

몸을 한번 겹쳤을 뿐이었다. 그것도 올바른 교합이 아니라 헛교접이었다. 그런데도 카론이 내비치던 냉랭함이 봄날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겉으로는 여전히 무심했으나 날카로운 기운은 사라지고, 분홍이에게 괜한 시비를 거는 일도 일절 없었다. 초조함이 없어진 자리에는 여유로움이 들어찼다.

“전에 말했던 북부 개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이름을 네가 푸논이라 이름 붙인 도시 말이야. 황후 직할령으로 만들까 하는데. 황후 직할령은 황후가 소유한 도시라는 거다. 봉작은 백작이 괜찮겠군. 곧 푸논 백작을 위한 봉인이 완성될 거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해 주지.”

산책 시간 전에 불쑥 찾아온 카론은 사람이 저렇게 반짝거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빛을 뿌리면서 할 말만 빠르게 마치고 멍하게 앉아 있는 분홍이의 이마에 입을 쪽 맞추고는 휑 나가 버렸다.

“어제…… 많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얼이 빠져 있던 분홍이는 마그네의 말을 듣고서야 뒤늦게 뺨을 붉혔다.

“화해하셨나요?

“화해는 아니고…… 어쩌다 보니.”

“좋은 일입니다.”

마그네가 순수하게 기뻐했다.

둘 사이에 단단히 끼어 있던 얼음벽이 어느 정도 녹은 건 맞았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하는 것이 옳으니. 항상 자기만 옳은 일을 해서 카론만 좋아진 것이 좀 억울하긴 했다.

“직할령이 생겼으니, 앞으로 황후 폐하께서 개인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토지와 자금이 생기겠네요.”

“그렇구나.”

좋은 일이긴 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카론이 분홍이라 부르는 걸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것이 제 이름인 걸 지금이라도 알려야 하나? 잠시 골몰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둘 사이가 괜찮더라도 과거에 대한 속죄를 미뤄 두었다. 거기까진 아직 아니었다.

아침부터 이상하더니 오후 산책도 산책이 아니게 되었다. 산책을 따라나섰더니 어느새 으슥한 구석에 닿았다. 카론이 짐승으로 변한 건 순식간이었다.

“아니…… 앗!”

멀쩡한 방을 두고 왜 하필 밖에서 이러느냐고 따지고 싶어도 이미 덫이 갇힌 짐승 꼴이었다.

단출한 옷은 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라테시온의 옷은 자락이 길지 않아 윗옷만 벗으면 바지 외엔 엉덩이를 가리는 자락이 없었다. 아무리 두꺼운 천을 써도 하체에 찰싹 달라붙은 바지 위로 못된 손이 슬금슬금 기어가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열기가 엉덩이를 달구는 동시에, 딱딱한 몽둥이가 다리 안쪽을 눌렀다. 시선을 슬쩍 아래로 내려다보니 허벅지 중간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굵고 긴 방망이가 우람한 위용을 드러냈다. 꼭 수말 같은 허벅다리에 밀려 팽팽한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자…… 잠깐…… 윽.”

“잠깐은 무슨. 누가 이런 엉덩이를 함부로 내보이랬나.”

“더우니 윗옷을 벗으라고 한 사람이…… 앗.”

어쩐지 아까부터 걷는 속도가 빠르더라더니. 일부러 덥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윗옷을 벗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파고는 다리를 밀어내자 카론은 양손으로 분홍이 엉덩이를 우악스레 덥석 잡더니 살짝 굽힌 제 허벅다리 위로 끌어올렸다.

“앗!”

바지를 왜 입은 건지 모를 만큼 뻔뻔하게 물건을 세우고 비벼대는 카론과 달리 분홍이는 예와 범절을 아는 신국인으로서 음경은 안쪽으로 곱게 갈무리를 해 두었다. 그런데 딱딱한 허벅다리에 앉게 되자 그것이 도리어 더 큰 자극을 불러왔다.

“자꾸 마음대로…… 흣.”

징 울리는 하복부의 떨림을 참지 못하고 엉덩이를 뒤틀 때마다 10년 묵은 칡덩굴 같은 물건이 저절로 문질러졌다.

“흐음…… 후.”

기분이 좋은지 카론은 더운 숨을 몰아쉬면서 분홍이의 입술을 탐했다. 말캉한 혀가 입 안을 더듬자 머릿속도 금방 엉망이 되었다. 외진 곳이긴 하나 대낮에 음탕한 짓거리를 하는 게 너무나도 수치스러웠고, 그래서 더 야릇했다. 집요한 애무가 기어이 불길을 피워 올렸다.

“하윽…… 아…… 싫으…… 읏.”

“싫어? 정말? 여기서 그만둘까?”

애처로움을 꾸며내면서 귀를 잘끈 깨무는 작자가 정말로 얄미웠다. 그러나 불길은 이미 번졌고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나쁜…… 아앗…… 윽.”

“말을 끝까지 해야지, 황후 폐하.”

“침…… 전으로…… 가요. 여기서…… 싫어.”

“분부대로 하지.”

얄밉게 씩 웃은 카론은 분홍이를 그대로 아기처럼 안아 올렸다. 깜짝 놀라 어깨에 매달리는 중에도 카론은 성큼성큼 가까운 입구를 향해 걸었다. 아마 침전까지는 가지 못할 듯했다.

곁눈에 태양을 머금은 금색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어찌나 빛이 나는지 눈이 멀 것 같았다. 몹시도 뜨겁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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