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황제 카론 유스키아는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자였다. 분홍이보다 그를 더 잘 아는 마그네는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새 옷을 가져왔다.
얇은 셔츠에, 긴 바지, 조끼. 겉에 입는 웃옷은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마그네가 입은 드레스가 아닌 카론이 입는 복식에 가까웠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인 줄 알았는데.
의문을 감지한 마그네가 싱긋 웃었다.
“이것도 라테시온 복식입니다. 겉으로는 일단 남성이시니까요.”
드레스를 입히라고 한 적은 없다는 소리였다. 꾀가 많은 시녀장의 깜찍한 솜씨에 분홍이는 그만 풋 웃고 말았다.
“네가 아니라면 이 궁전에서 어떻게 버틸까.”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라테시온식이라면 남성은 짧게 자릅니다.”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상상은 아예 해 본 일이 없다. 고국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머리를 길렀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머리를 땋거나 올리는 방식이 다를 뿐. 어찌 부모님이 주신 귀한 몸의 일부를 없앨 수 있을까.
“꼭 잘라야 하나?”
“……기르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이만큼 긴 사람은 없어, 그렇지?”
마그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 안에 있으면서 비슷한 복식을 한 궁인들만 접했다. 그들은 눈 색과 머리색이 각양각색이었다. 대신에 복식은 색깔과 장식이 조금 차이가 날 뿐 비슷했고 머리 모양도 조금씩 다르긴 해도 길이가 등을 넘는 사람이 드물었다.
어린 날에는 엄마가 곱게 빗어 한 가닥으로 묶고 빠진 귀밑머리를 귀 뒤로 곱게 넘겨주었다. 어깨가 넘도록 기른 시절에는 큰엄마가 고운 꽃 기름을 사서 곱게 발라 땋아 주었다. 그 끝에는 형님과 누님이 앞다투어 사 오는 댕기를 달았다. 아버지는 단장한 머리를 예쁘다고 크고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으셨다.
혈육의 사랑이 깃든 소중한 머리카락이었다. 이것을 잘라야 하는가. 긴 머리채를 부여잡고 망설였다.
잠시 침묵하던 채운은 머리채를 잡았던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자르겠다.”
“진심이세요?”
“그래.”
라테시온 식으로 살라고 했으니. 그에 따라야지. 돌아갈 날이 요원한 고향을 마냥 그리워만 해서야 험한 이계(異界)에서 꿋꿋이 살아남기 힘들다. 사소한 일은 순순히 넘겨야 큰일을 도모한다. 부모님이 그리 가르치셨다. 소중한 머리지만, 부모님이 여기에 계셨다면 필경 자르라고 하셨을 거다. 그러니 얼마든지 잘라도 좋다.
곧 마그네가 금색 가위와 흰 천을 가져왔다.
“남자처럼 바싹 자르기는 너무 아까워요. 어깨 길이로 기르는 사람도 꽤 있으니 그 정도만 자르는 건 어떨까요?”
“네게 맡길게.”
흰 천을 어깨에 두르고 거울 앞에 앉았다. 무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래도 금색 가위가 머리카락을 석둑석둑 잘라 내는 걸 차마 볼 수 없었다.
“우리 분홍이 까만 머리카락이 어찌 이렇게 곱누.”
머릿기름을 발라 가며 고운 빗으로 늘 빗던 큰엄마의 음성이 귓전에 울렸다. 꾹 쥔 두 주먹이 무릎 위에서 부들부들 떨었다.
“엄마처럼, 큰엄마처럼 기를 거예요. 예쁘게.”
큰엄마가 빗은 후엔 엄마가 꼭꼭 땋아 진홍색 댕기를 달아 주었다. 다른 아이처럼 머리끝에 달 때도 있고 가끔은 멋을 부려 머리 중간에 달 때도 있었다.
서걱. 서걱.
눈을 감아도 머리카락이 잘리는 기척은 생생했다. 가위가 움직일 때마다 머리가 가벼워졌다. 고향을 향한 깊은 애착이 강제로 잘려 나가는 순간이었다.
“다 되었습니다.”
한참 이어지던 가위질이 멈췄다. 눈을 천천히 뜨자 어깨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이 먼저 들어왔다. 이렇게 짧은 머리를 한 적은, 아주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낯설고 이상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양옆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너무 가벼워서 심부가 선득선득했다.
마그네는 흰 천과 함께 머리카락을 모았다.
“자른 머리는 어떻게 할 거야?”
“모을까요?”
“으…… 으응.”
“모아서 상자에 넣어 드릴게요.”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그녀는 곧 흩어진 머리카락을 꼼꼼히 모아 흰 천에 담았다.
옷은 막상 입고 나자 카론이 즐겨 입는 복식과도 좀 달랐다. 전에 황후 책봉을 알리는 연회에서 사람들이 입었던 복식에 가까웠다.
카론이 평소에 입는 옷은 소매에 금줄 장식이 화려하고 어깨에 큰 술 장식이 달렸으나마 광택이 없는 두꺼운 천이어서 무게감이 있었다. 자로 잰 듯 사지에 딱딱 맞아떨어지는 웃옷은 우람한 체격을 돋보이게 했다.
분홍이가 입은 옷은 진줏빛 광택이 도는 여린 비단으로 지었을뿐더러 조끼와 웃옷은 금색 단추에 진주와 금사(金絲)가 없는 면이 더 적을 만큼 무척 화려했다. 게다가 자락도 허리까지 내려왔고 웃옷도 여미지 않고 살짝 벌어진 형태였다.
굽이 달린 구두라는 신발도 신었다. 바닥이 딱딱하고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걸으니 뚜벅뚜벅 울렸다. 바닥에 깐 카펫이 아니라면 요란했으리라.
품이 큰 옷으로 몸의 윤곽을 가리고 또 가리는 고국의 복식과 달리 사지가 훤히 드러났다. 조끼가 허리에서 딱 끊기는 바람에 가랑이가 썰렁했다. 속곳과 바지를 입었으나 영 마뜩잖았다.
“처음에는 어색하셔도 활동하기엔 이쪽이 더 편하실 겁니다.”
“그래.”
구두와 옷에 적응하느라 방을 돌아다니는 사이 마그네가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자른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잘 모아 묶은 것을 보고 분홍이는 언뜻 그게 생각났다.
침실로 들어가 침대 아래 고이 넣어 두었던 상자를 꺼냈다. 일전에 리자가 수선한 연홍색 옷을 오랜만에 꺼내 보았다. 잘라낸 밑단으로 만든 고운 띠도.
그 리본으로 잘라낸 머리카락을 묶었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모발을 한참 보다가 뚜껑을 탁 닫고 침대 아래에 도로 넣어 두었다. 지금 카론이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머리카락이 앞으로 자꾸 넘어오는데.”
“리본을 드릴까요?”
땋는 대신에 진주색과 금색으로 지은 옷에 어울리는 흰 비단 리본으로 묶었다. 거울을 휙휙 돌려보니 영락없는 이국인이었다.
잠에서 깬 온을 마그네가 돌보는 사이 분홍이는 미뤄 두었던 황후로서의 소임에 몰두했다. 그렌에게 받아 온 장부를 끝까지 다 살피고 의문점을 노트에 적고 나니 벌써 오찬을 들 시간이었다.
이곳은 조찬과 오찬보다 석찬을 대단히 중시했다. 따라서 오찬은 가벼운 참으로 허기를 물리는 정도에 가까웠다. 가벼운 빵과 과일, 이곳 방식으로 만든 과자와 차가 나왔다.
처음에는 도무지 입에 맞지 않았던 음식이었다. 젖비린내가 너무 심하고 달았다. 차는 너무 썼다. 이제는 그것이 고소하고 입안이 개운했다. 입맛이 천천히 변했다.
“까만 과자는 탄 건가?”
“코코아 가루가 들어간 것입니다. 원래 그런 색입니다.”
“흐음. [흑임자] 같은 건가.”
“으깅자가 뭔지 모르겠지만 코코아는 아주 맛있어요. 드셔 보세요.”
검정보다는 흙빛에 가까웠다. 과자를 하나 들고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마그네가 안고 있는 온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또렷하게 시선을 가눌 줄 아는 아기의 눈은 전보다 더 파랬다. 검어지라고 빌었더니. 이 청개구리 같은 놈. 네 아비랑 똑같다니. 젖만 떼면 검은 과자를 잔뜩 먹일 줄 알아라.
오독오독.
막상 먹어 보니 처음 느껴 보는 오묘한 풍미가 있었다. 고소하고 달콤해서 참으로 맛났다.
“맛있어.”
“그렇지요? 코코아 가루는 무척 귀한 재료랍니다. 황궁이나 부유한 영주님이 아니면 마음껏 먹지 못해요.”
“같이 먹자.”
서성이는 마그네를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처음에는 사양하던 마그네도 막상 입에 직접 넣어 주자 못 이기는 척 받아먹었다. 과자와 차를 함께 마시면서 마그네에게서 무궁무진한 과자 얘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앤지에게 얘기하여 다양한 과자를 먹어 보자.”
“좋아요.”
소소한 즐거움을 찾았기에 킥킥 웃었다. 남은 과자를 반으로 쪼개어 하나는 제 입에 넣고 다른 하나는 바둥거리는 온을 안고 있느라 손이 모자란 마그네의 입에 가져다 댔다. 마그네가 괜찮다고 사양하는 순간이었다.
벌컥.
기척도 없이 나타난 사람은 역시나 카론이었다. 그는 굳은 마그네와 마찬가지로 과자를 건네는 중에 얼어붙은 분홍이를 냉랭한 눈초리로 번갈아 보았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요구해도 되겠지?”
고요한 음성은 꼭 매서운 눈보라 같았다. 너무나도 차가워 공기가 쩍 얼어붙었다.
“폐하.”
당황한 마그네가 먼저 일어섰다. 아기를 안은 채로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그를 분홍이가 잡았다.
“너는 온을 데리고 침실로 가라.”
“누구 마음대로.”
카론이 끼어들기에 분홍이 또한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를 막아섰다.
“여긴 제 침전입니다. 마그네는 황후의 시녀입니다. 황후로서 의무를 다하라 하셔서 따릅니다. 마그네, 온을 데리고 가.”
마그네는 카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얼른 침실 쪽으로 사라졌다.
들이닥친 황제의 안색은 더욱 냉랭하게 굳었다. 음식과 차가 벌어진 탁자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황후로서 의무를 다하라고 했더니. 못된 망아지 짓만 먼저 하려 드는군.”
못된 망아지 짓이 뭔지 몰라도 분홍이는 떳떳했다.
“잘못한 일이 없습니다.”
“없어?”
“예.”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카론을 응시했다. 새파란 눈이 저를 꿰뚫을 듯 강렬하게 빛났다. 의연함을 가장했으나, 사실은 심부가 저릿저릿하고 사지 말단이 차갑게 식었다.
어제부로 황제의 심경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다.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차리면 죽지 않는다는 옛말을 되새기며 긴장과 두려움에 흩어지려는 이성을 바싹 조였다.
‘무슨 짓을 한들, 이대로 순순히 따르지만은 않겠다.’
칼을 머금은 시선이 머리 꼭대기에서 발밑까지 훑었다가 다시 올라왔다. 잔혹한 입술을 비틀렸다. 어떤 치욕을 던질까. 어떤 말로 저를 속에서부터 무너뜨릴까. 겁이 나는 동시에 반발심도 크게 솟구쳤다. 눈에 힘을 주고 목을 꼿꼿이 세웠다.
갑자기 카론이 옅은 탄성을 뱉었다. 그러면서 손으로 턱 언저리를 매만졌다. 단단하게 굳은 남자의 턱을 만지던 손이 슬며시 다가왔다. 머리채를 잡으려나? 아니면 뺨을 치려나? 긴장감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손찌검을 하면 잘나신 라테시온 황제는 저보다 약한 황후를 수시로 때리는 것이 의무냐고 쏘아붙일 참이었다. 말 못 하는 짐승도 제 새끼를 낳은 짝을 수시로 패진 않는다고도 할 셈이었다.
긴장이 고조되는 찰나.
뺨과 귀 언저리를 배회하던 손이 이내 뒤로 넘어가더니 리본을 잡아당겼다. 머리카락이 스르륵 풀렸다. 리본을 쥔 손이 머리카락을 슬쩍 건드렸다. 석둑 잘린 머리가 어깨 언저리를 맴돌았다.
“머리…… 잘랐군.”
“예.”
“……왜?”
멍청한 물음이었다. 라테시온 사람이 되라고 제가 일방적으로 명령한 주제에.
“이게 라테시온 식이니까요.”
담담하게 대꾸했다. 무엇을 바란 건지 몰라도 새파란 도깨비 눈이 잘게 흔들렸다.
“그렇군. 그럼 이 옷도 라테시온 식이라 입은 건가.”
“그렇습니다.”
“아하. 그럼 배우자를 두고서 아무 여자와 시시덕대는 것도 라테시온 식이라 그런 건가?”
“그건…… 마그네는 아무 여자가 아닙니다. 황후와 온을 돌봅니다. 시시덕대지도 않습니다. 시시덕대는 것이 뭔지 모릅니다.”
“몰라? 거짓말쟁이로군. 내 황후는.”
카론이 팔뚝을 잡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파란 눈은 얼음처럼 식었으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활화산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자리를 나란히 하고 머리를 맞대고 둘이서만 낄낄거리면서 웃는 걸 시시덕댄다고 하지. 그것도 모자라 서로 과자도 먹여 주고 잘하는군. 앞으로 마그네는 손목이 필요 없겠어. 네가 먹여 주니 말이야.”
손목이 없어도 되겠다는 말이 허투루 들릴 리 없었다. 울화에 치밀어 오르던 열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뺨이 경련했다.
“오…… 온이 때문에 마그네는 손을 못 씁니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레온 핑계 대지 마. 생각이 있었다면 마그네가 먹을 사이에 레온을 네가 안으면 되거든.”
“그 생각은…… 들지 않아서…….”
정말로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냥 손이 모자라니 손수 먹이겠다고 생각했을 뿐. 마그네는 몇 번이고 자신에게 미음을 떠먹여 주었으니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론은 믿지 않았다. 아니 이미 심사가 틀어진 이상 사실임을 알아도 믿지 않을 터.
“라테시온 식으로 살면서 황후의 의무를 다하랬더니 가장 먼저 하는 짓이 남자 옷을 입고 시녀와 놀아나나. 너무나도 대단한 황후 폐하셔서 잠시도 가만히 둘 수가 없어.”
“나는 폐하의 명을 따릅니다. 과자를 타인과 나눠 먹지 말라고 하면 따릅니다.”
“아하. 일일이 지적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직접 옷을 대령하지 않아 보란 듯이 남자 옷을 입었다? 그래서 머리도 마음대로 잘랐어?”
“그 얘기가 아닙니다. 마그네는…… 생각이 짧았습니다. 황후는 그래선 안 됩니다.”
일견 카론의 말이 맞았다. 웃전이 아랫사람의 입에 손수 음식을 물려 주어선 아니 되었다. 그건 깊이 아끼는 혈육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음 둘 곳이 없어 마그네를 가까이 여긴 나머지 사촌지간으로 착각했다. 만약 아껴서 손수 음식을 떠먹인다고 해도 적어도 벌건 대낮에 공공연하게 하여 저 치졸한 악귀 놈에게 들키지 말았어야 했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 입습니다.”
“머리는, 머리는 어쩔 거지?”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으나 비비 꼬인 놈은 옷과 머리를 가지고 늘어졌다. 옷은 그렇다 쳐도 머리를 마음대로 자른 건 뭔가. 머리카락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며 분홍이의 것이었다. 자르든 기르든 순전히 분홍이 마음이었다.
“머리는 제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제 마음입니다.”
“아니, 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소유다. 내 황후며, 내 요정이야. 누구 마음대로 그 예쁜 머리카락을!”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카론은 진심으로 하고 있었다. 분홍이는 지척에 있는 악인의 파란 눈을 쏘아보았다.
“나는 인형이 아닙니다. 머리는 내 것입니다. 머리 긴 인형이 필요하면 만듭니다. 만들까요?”
“하!”
카론이 크게 코웃음을 쳤다.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놈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댔다.
라테시온에서 머리카락이 그렇게 중한가. 신국에 비하면 특별히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곳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여자도 머리를 기르긴 해도 그저 멋으로 기르는 분위기였다. 풍습에 따르래서 큰 결심을 하고 머리를 잘랐는데 또 성질을 내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냉기가 풀풀 날리는 청금안이 분홍이를 매섭게 노려봤다.
“네가 인형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만 바라보면서 내 뜻대로만 움직여서 이렇게 화를 낼 일도 없을 텐데. 아까운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지 못하게 했을 텐데.”
도대체 남의 머리카락을 제가 왜 아까워한단 말인가. 곱게 기른 머리를 자르는 안타까움이 분홍이만큼 클 리가 만무했다. 무엇을 위한 아쉬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 노리개가 제 뜻대로 되지 않은 안타까움인가.
머리카락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한 가지 잘라냈던 입장이기에 냉소 어린 비꼼이 튀어 나갔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 미안합니다.”
“나야말로 유감이군. 죽여서 박제로 삼으면 편리할 것을. 안타깝게도 시체 애호가와는 거리가 멀어서 말이야.”
박제나 시체 애호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으나, 뭔가 죽음과 관련한 대단히 섬뜩한 뜻임을 눈치챘다. 미친놈. 카론은 하얗게 질린 분홍이의 팔을 밀치듯 놓았다.
“오후 산책 시간이야. 나와.”
고작 정오에서 조금 지났을 뿐이어도 엄밀히 말해 오후긴 했다. 산책은 더 후에 이루어졌다. 다정한 부군을 흉내 내던 때는 카론도 오찬을 다 소화할 즈음 나타났었다.
별안간 지금이 산책 시간이라고 명하는데 거절할 명분도, 능력도 없었다. 시선을 침실 쪽으로 던졌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으나, 아마 마그네는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챘으리라. 이미 복장도 갖추었기에 어쩔 수 없이 바로 따라나섰다.
유달리 긴 다리 때문에 보폭도 넓고 단련한 무인이라 몸짓인 힘찬 만큼 카론은 걸음도 대단히 빨랐다. 익숙하지 않은 구두 때문이 아니라 편안한 내실화를 신고 있더라도 쫓아가기 어려울 속도였다. 복도가 끝나자마자 긴 계단이 나왔다. 두어 차례 넘어질 뻔했다. 냉랭한 작자는 뒤를 돌아보는 일도 없었다.
정원에 이르기도 전에 숨이 찼다. 잠시 멈추면 금방 카론을 놓칠 것 같았다. 안간힘을 쓰면서 옹졸하기 짝이 없는 심술을 욕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고생시키나. 치졸하고 사내답지 못한, 소인배 같으니.’
씩씩대며 쫓는데도 대 여섯 발짝이 도무지 좁혀지질 않았다. 자기처럼 다리에 힘을 주고 빠르게 걷는 것도 아니었다. 카론은 학처럼 느긋했다. 속도가 빠름에도 흐트러짐이 없고 자연스러웠다. 언뜻 보기에는 전과 다른 점이 크지 않았다.
‘이번에는 왜 이렇게 빠르지? 전에는 어떻게 나란히 걸은 거야?’
의문이 들었다. 사소한 의문에 골몰하기보다는 얼른 놈을 쫓아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니면 게으름을 피운다고 또 트집을 잡을 수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팔을 휘둘러 힘을 더했다.
쿵!
너무 앞을 보지 않고 걷는 바람에 놈이 멈춘 줄 몰랐다. 숙인 정수리로 딱딱한 등허리를 들이받았다. 보통 사람이면 휘청거리기라도 하는데, 대단하신 황제 폐하는 보통 놈이 아니라 도리어 분홍이의 정신이 아찔했다.
“앗.”
세게 들이받은 만큼 반동도 셌다. 뒤로 휘청거리는 바람에 팔로 허공을 휘었다. 당연히 잡아 줄 줄 알았다.
털썩.
치졸하게도 카론은 잡아 주는 대신 멀뚱히 서서 넘어지는 걸 보고 있었다. 딱딱한 정원 바닥에 하필 꼬리뼈를 잘못 찧어 고통이 상당했다. 풍성한 고국 복식을 하고 있었다면 넘어져도 크게 다치진 않았을 텐데. 옷이 얇은 만큼 넘어진 충격도 컸다.
“으윽.”
오만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흰옷에 흙이 잔뜩 묻었다. 저도 모르게 카론을 올려다봤다. 카론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멋대로 걸어가서 그것을 쫓아가느라 이렇게 되었다. 무슨 딴생각을 하는지 손도 잡아 주지 않았다. 비난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제 꼴을 보라고 말없이 비난을 던졌다.
“픽픽 잘도 넘어지는군.”
조소 가득한 평가만 돌아왔다. 아니 그렇게 서서 보기만 하면 어쩌란 말인가. 화가 나지만 분홍이는 제 상태를 알렸다. 아직 다 낫지 않은 하부가 제대로 부딪혀 고통이 매우 컸다.
“흙이 묻었습니다. 엉덩이와 무릎이 아픕니다.”
흙이 묻은 다리와 엉덩이를 내보이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자연스럽게 상체를 숙이며 팔을 뻗던 카론이 별안간 몸을 똑바로 세웠다. 두 손은 바지 주머니에 단단히 찔러 넣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의문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설마 황제인 나더러 흙을 털고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란 말인가.”
보이지 않는 망치가 뒤통수를 쾅 쳤다. 입이 쩍 벌어졌다.
“황후가 아픈데 그렇게 말합니까?”
“황후이긴 하지. 하지만 동시에 남자기도 하지. 라테시온에서는 남자끼리 서로 잡아 주고 털어 주고 그러지 않아. 하물며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라니. 미친 소리지.”
“폐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인형이 아니라고도 했지. 머리도 남자처럼 잘랐으면 사내답게 구는 게 어때?”
외통수였다. 분홍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옷 정도는 혼자서 털어. 그리고 내가 네 응석을 받아 줄 거란 착각도 버려.”
제 손으로 털고 일어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분홍이는 바보 천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넘어져 있는 이가 있다면 응당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이 도리 아닌가. 측은지심이나 인지상정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놈다웠다.
이렇게 치졸하게 나올 줄은 또 몰랐다. 그깟 머리 때문에 아직도 속이 꼬여 있다니.
“빨리 털어. 산책해야 하니.”
산책을 강행하겠다는 말에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손을 내밀어 주고 흙 좀 털어 주는 것이 그리 대수인가. 못난 놈. 못난 놈.
입술을 깨물고 무릎과 허벅지, 엉덩이를 털었다. 일어서느라 더러워진 무릎과 허벅지는 몰라도 엉덩이는 살살 터는데도 무척 아팠다. 분명 피멍이 들었으리라.
대충 털고 나자 카론이 다시 앞장섰다. 꼬리뼈가 너무 아파 쩔뚝거리며 쫓았다. 분명히 아까보다 걸음이 불안한데, 이상하게 훨씬 따라가기 수월했다.
카론의 걸음은 겉보기에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보폭이 한결 좁았다. 걷는 박자도 오묘하게 느렸다. 절뚝대는 걸음으로도 한 발짝 뒤를 유지했다.
넓은 중앙 정원 깊이 들어왔다. 궁인은 없었다. 그렇다고 조용하진 않았다. 새와 풀벌레가 가득하여 곳곳에서 제 존재를 알렸다. 커다란 나무 사이로 허리께까지 반듯하게 자른 관목이 쭉 이어졌다.
“곧 백일이다.”
카론이 침묵을 깼다.
“네가 요구한 백 일간의 봉쇄가 끝난다.”
“아.”
백 일간 황궁의 문을 걸어 잠그고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그렌에게 명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곧 끝난다는 얘기였다.
“백일이 되는 날, 레온의 탄생을 축하는 성대한 연회를 열 것이다.”
황제의 의지는 곧 법도였다.
“황후로서 맞이하는 첫 공식 행사다. 잘 준비해.”
“제가 준비합니까?”
“황후로서 황궁 운영을 하고 싶다며? 그 약속 또한 유효하다.”
황자의 탄생을 알리는 연회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할지 감도 전혀 잡히지 않는다. 그렌과 올리아, 마그네에게 상의하고 앤지와 리자도 불러야 했다.
“전처럼 모든 이가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고집을 부려서 내 성미를 돋우는 일은 없길 바란다.”
황후를 소개하는 연회에서, 그리고 결혼식에서. 분홍이는 카론을 곤경에 빠트렸다. 그때 카론은 결정은 강압적이나마 사소한 일에서 크게 너그러웠다. 다소간의 소동이나 실수는 그냥 넘겼다.
앞으로는 다를 터였다. 약간의 실수도 용납할 태세가 아니었다.
“내 남자 황후가 어디까지 하는지 어디 두고 보지.”
파란 눈이 사악하게 빛났다. 바락바락 들이대는 쥐새끼를 에워싼 후에 잠시라도 허점을 보이면 금방 독니를 찔러 넣으려고 마음먹은 구렁이처럼.
* * *
산책이 끝나자마자 그렌을 불러 카론의 의중을 알렸다.
“이미 준비하던 중이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고마워. 그렌.”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렌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라테시온의 연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배워야 했다. 초대할 사람을 추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실내장식과 식순까지, 할 일이 많았다. 앤지는 마그네와 함께 음식을 정하고, 리자는 그날 입을 황제 가족의 옷을 새로 짓기로 했다.
갑자기 일거리가 떨어져 바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석찬 시간이 되었다. 카론과 함께였다.
은은하게 빛나는 불빛과 화사한 화병이 무색하게도 공기는 마르고 냉랭했다.
달그락. 달그락.
포크와 나이크, 혹은 때때로 나타나 음식을 바꾸거나 덜어 주는 시종의 움직임 외에는 모든 것이 그림처럼 고요했다. 식사는 조용히 하는 게 맞으나 침묵이 지나쳐 두툼한 고기가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카론의 손에 들린 커다란 나이프는 꼭 태도(太刀) 같았고, 포크는 삼지창 같았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고깃덩이를 그는 잘도 잘라먹었다. 사실 피가 아니라 육즙이며 붉은 액체는 빨간 야생 딸기를 포도로 만든 과실주에 졸여 만든 양념이었다. 그런데 길고 곧은 송곳니가 고깃덩이에 푹 박힐 때는 그저 핏물로만 보였다. 입을 다물고 속으로만 씹으면서 때때로 흰 천으로 입가를 닦는데도 무섭고 끔찍했다.
‘싱싱한 육고기를 즐기는 늑대가 따로 없구나.’
입맛이 뚝 떨어져 옅은 민트 향이 나는 물로 입을 헹궜다.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술잔을 든 카론이 시선을 던졌다. 날카로운 눈빛이 꼭 제 목을 뜯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했다.
“온은 눈이 폐하를 닮았습니다.”
“그렇군.”
아이 얘기를 꺼내면 분위기가 누그러지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눈 외에 다른 건 전부 너를 닮았어. 머리카락도, 생김새도. 체형은 어떻게 될지 자라 봐야 알겠지만. 작은 체구로 봐서는 키도 너와 비슷하겠지. 검을 제대로 들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카론은 온이 꼭 어디 모자란 것처럼 말했다. 순간 성질이 치밀었다.
“꼭 검을 들어야 합니까?”
문무 둘 다 소홀히 할 과목은 아니었다. 허나 황제의 재목을 두고 검을 먼저 거론하는 건 옳지 않았다. 무예가 조금 모자라도 지성이 뛰어나고 예를 알며, 덕을 쌓으면 훌륭한 군왕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무예가 뛰어난들, 덕과 예를 모르면 나쁜 왕이 된다.
“또 바른 황제 얘긴가.”
속으로 한 생각을 카론은 금방 간파했다.
“나는 검으로 제국을 세웠다. 당장은 내게 패배하여 복종해도 내 힘이 약해지면 언제든지 등에 칼을 꽂을 놈이 즐비하지. 내 자식의 처지도 크게 다르진 않다.”
“그러니 더욱 검을 놓아야 합니다. 검으로만 다스리면 결국은 검에 의해 쓰러집니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나? 빵을 통한 회유책도 쓰고 다양한 거래도 한다. 하지만 그건 부차적 수단이다. 힘을 갖추지 않으면 다른 수단은 비웃음을 살 뿐이다.”
모든 군주가 검의 달인일 필요는 없었다. 왕의 힘은 일신의 무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무예가 가장 중요했다면 괴력을 가진 검술의 달인만이 왕을 할 수 있겠으나 고금으로부터 만인지상의 자리에 도달하는 이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차례 말해도 카론은 인정하지 않을 기세였다. 분홍이는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폐하는 늘 검만 휘두르십니다.”
“정말 그런가? 나는 네게 검만 휘둘렀나?”
청금석 두 개가 분홍이를 직시했다. 가까운 나머지 푸른 유리알 안에 비친 제 모습마저 보였다. 이국적인 복장에 이국적인 머리 모양을 한, 창백한 낯선 사람이.
저렇게 작고 볼품이 없었나? 맹수에겐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유약한 서생이 아닌가.
“대답해 봐, 황후. 내가 정말로 검만을, 휘둘렀나.”
재차 묻는 말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검만을 휘둘렀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손을 잡아 주지 않은 카론은 제 어리광을 꾸짖은 대신에 걸음을 늦추었다.
불쑥 침전을 찾아가 크게 다투기 전에는 상당히 너그러웠다. 화를 내는 대로 다 참았고, 요구한 일은 할 수 있는 선에서 했으며, 무엇보다 황후인 자신에게 다정했다. 기분이 울적하면 무슨 말이든 걸려고 애썼으며, 제가 고집하는 고국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존중했다.
“아…… 니…….”
“황제 앞이다. 말끝을 흐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박정한 꾸지람이 떨어졌다.
“아닙니다. 폐하는 검만 휘두르지 않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예.”
진심이었다. 생각해 보니 너무 무람없고 본데없다고 여긴 오랑캐 황제의 태도는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그래서 더욱 악랄했다. 강간범이 친절해 보아야 뭐가 얼마나 반갑다고. 위선적인 선함에 욕지기가 치밀어 갖은 욕을 퍼부은 일이 고작 어제였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알량하고 얄궂은가. 차라리 저주라도 실컷 하게 해 달라고 악다구니를 썼는데. 막상 야멸차리만큼 무심한 그를 앞두니 괜히 속이 시렸다.
붉은 술을 한 모금 마신 카론은 잔을 내리면서 픽 웃었다.
“내 황후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야.”
이젠 참말도 믿지 않는다. 믿지 않을 거면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을 때가 더 나았다. 불통이 매정한 무시보다 훨씬 나으니.
달각. 달각.
시큼하게 뒤틀리는 속을 내색하지 않으려 일부러 관심도 없는 고기에 집중했다. 뭐가 이리 질긴지. 카론은 석둑석둑 잘도 잘라 내는데 고기가 제대로 썰리질 않았다. 같은 나이프인데 왜 이리도 안 드는가. 힘을 너무 주었더니 나이프가 미끄러졌다.
쨍!
은색 칼날이 접시 끝을 요란하게 후려쳤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카론의 눈치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쪽물에 비상(砒霜)을 섞어 빚은 매몰찬 시선이 저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나이프 질이 서투르군.”
또 무슨 질책이 떨어질까. 나이프 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아둔한 머리를 탓할까. 아니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면 마그네를 문책할까. 씰룩거리는 얇은 입술에서 뚝뚝 떨어지는 짜증을 보아 둘 다 할 수도.
침을 꿀꺽 삼키며 나이프를 바로 쥐었다. 포크로 꽉 찍어 어떻게든 찢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손에 힘을 너무 주었는지 질긴 고기는 썰릴 기미가 없었다.
“머리도 자른 남자 놈이 힘이 그렇게 없어서는. 이리 내.”
보다 못한 카론이 나이프를 휙 빼앗아 갔다.
“혼자서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할 수야 있겠지. 그런데 고기를 그렇게 마구 헤집으면 내 입맛이 떨어져.”
카론은 다른 손에 쥔 포크도 마저 빼앗았다. 예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먹지도 말란 소린가.
만약 신국의 황궁이었다면 어떠한가. 구접스럽게 먹으려 들면 분명 꾸지람이 떨어지긴 할 터. 그러나 사용하기 편한 숟가락과 젓가락이 나오고 또 부드럽게 다진 고기 산적이 나올 터였다. 시중을 드는 궁인이 옆에서 고기와 생선을 다 잘라 수저에 올려 주며, 다른 찬도 먹기 좋게 잘라 애초에 고기를 스스로 잘라야 하는 일 자체가 없었다.
“라테시온에서 산 지 일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고기도 제대로 못 썰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고향에서는 나이프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익숙하지 않습니다.”
“변명하지 마. 평생 식기를 쥐어 본 일이 없을 때도 나는 하루 만에 식사 예절을 완벽하게 익혔다. 정치학과 제왕학을 배울 만큼 똑똑한 네가 이따위 간단한 예절도 못 익힐 리가 있나. 그저 익힐 마음이 없었겠지”
정곡이었다. 수저와 같이 우아한 식기 대신에 작은 칼과 창에 지나지 않는 흉악한 식기가 아무래도 천박했다. 그래서 지금껏 스푼만을 이용해서 식사했다. 마그네는 그것을 굳이 막지 않았다.
“반대로 내가 요정국에 가서 일 년째 식사 예법을 익히지 못하면 무슨 취급을 했을까. 아마 못 배운 개새끼? 흉악한 야만인?”
그 또한 맞는 얘기였다. 두고두고 천하다며 손가락질과 욕을 했을 터다. 크게 꾸지람하며 젓가락을 제대로 쓰기 전에는 밥을 한 톨도 주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을 터. 그러나 그것은 예법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카론이 싫기 때문이다. 속으로 한소리 하는 찰나 그가 덧붙였다.
“네 나라 얘기는 하면 할수록 정이 떨어지는군. 황후가 황제의 명을 어기는 즉시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다투면서 다소 상처가 생겼다고 바로 목을 자른다니. 그건 황제가 나약한 놈이라서 그런 거다.”
“아닙니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약하다니. 그럴 리가 없다. 늘 백성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공부하고 덕을 쌓고 선정을 고민하는 천자께서 나약하다니.
“강한 것, 약한 것은 몸만이 아닙니다. 여기, 여기.”
분홍이는 머리와 가슴을 가리켰다.
“여기가 더욱 중요합니다. 고향의 폐하는 여기가 강합니다.”
“아하. 그래? 대단하신 분이군. 그래서 약혼자인 너를 찾지 않고 이대로 버려두는 건가? 여기가 강해서?”
“그건!”
비겁한 공격이었다. 절로 두 눈에 힘이 들어가고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기에 온 이유를 모릅니다. 고향의 폐하도 모를 겁니다.”
“남들이 모르는 대단한 일을 알지 못한다면 무슨 차이가 있지? 여기가 강하다고 추앙할 이유가 있나?”
카론은 검지로 제 머리를 가볍게 톡톡 쳤다.
“지능도 나와 별 차이가 없어. 그런데 무력은 더 약해. 사소한 일로 사람의 목을 치는 치졸함까지.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하군.”
비아냥대는 그를 향해 뭐라도 쏘아붙이려는 찰나, 그가 뭔가 분홍이 앞에 놓았다. 밑접시 위에 올려진 건 다름 아닌 고기 접시였다. 처음엔 본인 접시를 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카론이 반쯤 먹은 고기는 여전히 카론 앞에 있었다. 제 고기 접시를 언제 가져간 건지. 전혀 몰랐다.
“포크 질 정도는 제대로 할 수 있겠지.”
그 말에 분홍이는 다시 제 접시를 바라보았다. 뭉개졌던 고기가 먹기 좋게 작은 조각으로 썰려 있었다.
“먹어.”
“……고맙습니다.”
“고마워할 것 없어. 먹지 못해 살이 빠지면 내 탓을 할 테니.”
매몰찬 대꾸가 돌아왔다. 묵묵히 식사가 이어졌다. 먼저 식사를 마친 카론은 남은 술잔을 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식기를 놓고 일어서는 분홍이를 저지했다.
“다 먹어.”
“다 먹었습니다.”
“남은 음식까지 다 먹으란 얘기다.”
시선이 저절로 식탁으로 향했다. 아직 고기가 반절 이상 남았다. 제 몫의 빵과 수프도 있다.
“내일 산책은 꽤 멀고 험할 테니. 든든히 먹어 둬.”
“어디로 갑니까?”
“내일 되면 알아.”
그걸 끝으로 카론은 나가 버렸다.
* * *
“산책인 줄 알았습니다.”
거대한 군마를 발견하자마자 분홍이가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이었다.
“산책이야.”
카론은 애마의 콧등을 툭툭 쳤다.
멀고 험한 산책이라 하여 일부러 실크가 아닌 면직으로 만든 편안하고 가벼운 옷을 입었다. 말을 탈 줄 알았으면 좀 도톰한 옷으로 입을 것을.
푸릉.
말이 콧김을 뿜었다. 사나운 기세와 다르게 새까만 눈이 깊고 맑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긴 속눈썹이 작은 부채처럼 펄럭였다. 이상하지만 말에게서 장난기가 느꼈다.
마구(馬具)를 관리하는 궁인이 굴레와 인장을 가져왔다. 궁인이 준비하는 동안 기다릴 줄 알았는데, 카론은 거대한 수말에 맞춘 커다란 굴레를 직접 걸었다.
“직접 합니까?”
황제가 직접 굴레를 걸고 안장을 얹다니. 애마라지만 대단한 호사를 누리는 놈이었다. 얇은 모포를 얹고 그 위에 안장을 건 카론이 이리저리 가죽끈을 당길 때마다 놈은 발굽을 툭툭 치면서 조금씩 앞으로 다가왔다. 손만 내밀면 콧등이 닿을 거리였다.
축축한 코가 무척 따뜻했다. 윤기 흐르는 머리를 쓰다듬자 놈이 푸릉푸릉 콧김을 내뿜었다. 커다란 입을 우물거리며 분홍이의 뺨과 머리를 살폈다. 분홍이를 기억한다는 증거였다.
‘포악하게 생겼어도 영리하구나.’
얼굴을 쓱쓱 쓸어 주자 기분 좋게 푸릉푸릉 했다. 거대한 짐승의 이쪽, 저쪽을 오가며 안장을 동여맨 카론은 두툼하고 살찐 말 엉덩이를 툭툭 치면서 앞으로 다가왔다.
“이놈은 나밖에 못 만져. 다른 자가 가까이 다가가면 짓밟힌…….”
연신 코를 분홍이에게 들이밀며 애교를 피우는 애마를 본 황제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눈은 가늘어지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생겼다.
“……줄 알았는데 아니로군.”
“순하고 예쁜 아이입니다.”
까만 눈망울을 보며 칭찬하자 꾹 다물린 황제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표정이 영 마뜩잖았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예쁘다는 얘기는 또 처음이군. 멋지다는 소리는 들어 봤지만. 보통은 사나워서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황제의 훌륭한 준마를 망아지 다루듯 귀여워해서 내심 심사가 꼬인 건가.
“무척 멋집니다.”
“아니. 네 눈에 예쁘면 예쁜 거지.”
고삐를 쥔 카론은 애마의 굵직한 목덜미를 툭툭 쳤는데 그 힘이 좀 셌다. 애마도 놀랐는지 옆으로 슬슬 자리를 옮겼다.
그사이 궁인이 다른 말 하나를 데려왔다. 밝은 적갈색에 코와 이마에 흰 털이 난 말은 척 보기에도 순한 암말이었다. 무릎 아래도 흰 털이 드문드문 있었다. 제 말임을 알아보고 다가가자 그 아이는 약간 경계하듯 서성였다.
“괜찮아.”
천천히 다가가 손을 내밀자, 암말은 금방 안심하고 응석을 피웠다. 안장과 굴레도 다 썼다. 카론의 군마와 달리 높이도 적당하여 도움 없이 올라타기 수월했다.
“네 이름은 뭐니?”
“앞으로 네 말이니 네가 지어.”
궁인에게 슬쩍 운을 떠보는 혼잣말이었는데 괜히 끼어든 카론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말을 하사한 데 대한 고마움보다는 심술보 뚝뚝 떨어지는 태도가 더 고까웠다.
이러나저러나 갑자기 제 말이 생기다니. 내심 반갑고 기뻤다. 고국에서는 말이 귀했다. 기마술을 배울 때도 대장군인 누님의 말을 얻어 타며 배웠다. 착한 아이니 순박하고 귀여운 이름이 주고 싶었다.
“네 이름은 음…… [점순]이다.”
“즌숭? 즌슨?”
“점순. 얼룩이 있는 암말입니다.”
“존슨.”
점순이는 그렇게 존슨이 되었다. 점순이라고 우기면 또 요정국 운운하며 미운 말을 줄줄 늘어놓을 테니 싫어도 참았다.
분홍이 준비가 끝나자 카론 또한 말에 훌쩍 올랐다. 그는 고삐를 당겨 기수를 틀며 발로 우람한 배를 살짝 쳤다.
“가자, 예쁜아.”
“으음?”
분홍이를 향한 지칭인지 아니면 멋진 말을 예쁘다고 이름을 또 비꼬는지 모호했다. 저는 귀 뒤가 훤히 보이는 짧은 머리를 한 주제에 어깨 길이로 머리 좀 잘랐기로서니 어제 내내 머리 타령을 한 옹졸한 심사로 봐서는 아무래도 후자 쪽이 신빙성 있었다.
예쁜이의 우락부락한 꽁무니를 보며 분홍이도 점순이와 함께 출발했다. 순한 점순이는 달리는 방법도 무척이나 안정감 있었다.
따각. 따각.
아직 매끄러운 돌길이 이어지는 황궁 언저리였다. 카론은 속도를 크게 높이지 않았다. 서궁 살이 막바지에 종종 목격했던 대로 낮은 관목 벽을 훌쩍 뛰어넘지도 않았다. 지름길 택하는 대신에 좀 돌아가도 안전하고 평평한 길로 갔다.
얼굴을 맞대면 별 희한한 발상으로 가슴을 후벼 파고 야멸차게 굴면서 등을 돌리면 그만큼 매정하거나 무심하진 않다. 다정하게 굴지 말라고 악을 써서 저런 거라면 너무 단순하지 않는가.
만약 분홍이가 그의 입장이라면 약 올리듯 일부러 더 보란 듯이 다정하게 대하여 완전히 무너뜨린 다음에 머리를 기르게 하든 뭘 하든 제멋대로…… 아니다. 아니다. 이런 악독한 상상을 하다니!
‘미쳤구나. 명채운.’
고개를 부르르 떨었다. 악랄한 놈과 살다 보니 이런 당치도 않는 것에도 생각이 미친다. 정신이 흐트러져서 이런 것일 터.
‘머리를 비우자. 그저 지금만 생각하는 거야.’
정신을 딴 데 쏟는 중에도 똑똑한 점순이는 예쁜이의 뒤를 잘 따라갔다. 어느새 정원이 끝났다. 황궁의 지도를 익혔기에 여기가 어딘 줄은 알았다.
라테시온에 방위나 배산임수를 염두에 두진 않았다. 이곳 사람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는 대신에 필요하면 스스로 만들기를 즐겼다. 겨울로 차가운 북풍을 막기 위해 방풍용 숲을 조성했다. 여긴 바로 그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이었다.
넓은 풀밭 끝에 하늘로 쭉쭉 뻗은 아름드리가 그득했다. 얼마나 넓고 빽빽한지 거대한 둥치 사이엔 온통 검은 그림자였다.
“사냥터다. 아, 사냥은 짐승을 잡는 거다.”
멈춘 카론은 고삐를 잡아당겨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먼저 가겠다.”
직후 그는 박차를 크게 찼다. 예쁜이가 앞발을 쳐들기 무섭게 폭풍처럼 질주했다. 거대한 군마의 강철 같은 다리가 땅을 디딜 때마다 파란 풀밭이 푹푹 파이고 검은 흙이 튀어 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카론과 예쁜이가 사라졌다.
“우리도 가자꾸나.”
카론처럼 질주하는 대신 적당한 속도로 달렸다.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있는 속도는 나지 않았다. 그래도 딴에는 달리는 것이라 등과 허리에 오는 충격이 컸다.
“읏.”
천천히 걸을 때는 몰랐는데 확실히 허리와 등이 아팠다. 어제 찧은 엉덩이도 몹시 욱신댔다. 급히 점순이를 달래어 속도를 늦추었다.
[천천히 가자. 천천히.]
뻣뻣한 허리를 툭툭 치면서 걷는 속도로 숲에 들었다.
두어 나무를 지나지 않아서 서늘한 기운이 들이닥쳤다. 드문드문 울창한 나무를 간신히 뚫은 햇살 덕분에 밖에서 보던 것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습기가 가득했다.
[지력이 좋구나.]
예쁜이가 파고 지나간 자리마다 검은 흙이 드러났다. 아주 비옥한 땅이었다. 맨땅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각종 풀과 나무가 채우지 못한 공간은 이끼와 버섯이 피어올랐다. 죽어 쓰러진 나무 둥치에도 푸른 이끼와 색색 버섯이 그득했다.
[저건 독버섯이겠지?]
새빨간 버섯이 신기했다. 버섯 옆엔 꼬불꼬불 굽은 순이 두어 가닥 삐죽하게 솟았는데 아무리 봐도 고사리 같았다. 저쪽에 나무를 타고 오르는 덩굴은 칡 같았다.
[고사리에 칡이라니. 그럼 더덕도 있을까?]
순간 빨갛게 양념하여 구운 더덕구이 맛이 떠올랐다. 새콤달콤하며 쌉싸름한 맛을 상상하기만 해도 절로 침이 고였다.
자세히 찾아보고 싶어 냉큼 말에서 뛰어내렸다. 무릎 관절이 풀렸는지 바닥을 디딜 때 휘청했다.
“아이쿠.”
이번엔 점순이 고삐를 잡고 있어 자빠지는 불상사는 피했다.
[네가 부군보다 낫다.]
윤기 나는 털을 쓰다듬으며 칭찬한 후에 냉큼 고사리부터 살폈다. 향도 생김새도 영락없이 고사리였다. 황궁의 조리를 도맡고 있는 앤지에게 보여 주려고 두 줄기 끊었다.
칡도 살폈다. 무성한 잎 모양이 딱 칡 같긴 한데. 저도 캐낸 뿌리만 보았지 줄기를 본 일이 없어 모호했다. 그보다는 더덕을 찾고 싶었다.
더덕은 저 아니라 명가 식구 전부가 좋아하는지라 때가 되면 계곡에서 더위도 피할 겸 하인을 모아 산으로 가서 더덕을 캤다. 숯불도 가져와 그 자리에서 구워 먹는 맛이 일품이었다. 형님과 누님은 누가 더 굵은 더덕을 캐는지 내기도 했다. 그래서 더덕은 쉽게 분간했다.
풀숲을 정신없이 헤치다가 익숙한 잎사귀를 찾았다. 삼처럼 생겼으되 삼이 아닌, 잘생긴 풀이 군락을 이루었다.
[찾았다!]
신나서 저도 모르게 방방 뛰었다. 오랜만에 고향 음식을 먹을 생각을 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고사리도 팽개치고 더덕을 캤다. 땅이 부드러워 손으로 파도 되지만 마음이 급해 옆에 있던 돌을 가지고 연신 찍었다.
히힝.
지척에 있던 점순이가 별안간 투레질했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것이 이상했다. 멧돼지라도 나왔나 싶어 고개를 번쩍 들고 사방을 살폈다. 산짐승 기척은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 대신에 풀벌레가 포르륵 날아갔다.
[벌레 때문에 놀란 모양이구나.]
도로 더덕에만 정신을 쏟았다. 굵은 놈 하나를 뽑아낸 후에 흙을 탈탈 털고 옆에 두었다. 하나 더 캤다. 마음이 뿌듯했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훔치며 연신 더덕에 집중하는 사이 뭔가 스르륵 스르륵 움직였다. 또 벌레겠거니 했다.
더덕은 근처에 있는 바위틈에 더 무성하게 피었다. 척 보기에도 줄기부터 아주 실한 놈이 있기에 냉큼 거기로 달려가 돌을 찍었다. 제 머리보다 큰 바위 위에 잔뜩 낀 이끼를 헤집고 뭔가 기어 오는 걸 전혀 몰랐다.
[와!]
제 손목 굵기만 한 더덕을 기어이 캤다. 이 정도면 삼이 아니라도 심 봤다고 외쳐야 하나 짐짓 고민스러웠다. 점순이에게라도 자랑하기 위해 더덕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척 드는 순간.
작고 까만 눈과 마주쳤다. 까마중처럼 톡 튀어나온 눈 사이에는 붉은 비늘이 가득했고 그 아래 쭉 찢어진 입에서는 끝이 갈라진 혓바닥이 수시로 들락였다. 바위 위에 자리 잡은 거대한 구렁이의 머리는 뾰족한 세모로, 척 보기에도 맹독을 품은 독사였다.
“…….”
숨도 못 쉬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너무 가까이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저놈의 날카로운 독니가 살을 파고들리라. 머리털이 쭈뼛 치솟고 등줄기가 뻣뻣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 눈가로 흐르는데 깜빡일 수도 없었다.
쉿쉿.
놈이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대가리를 몸통과 일직선으로 가누면서 몸을 매듭처럼 구불구불 웅크리는 동작은 이만 가 보겠다는 뜻이 아니라 곧 튀어 올라 물어뜯겠다는 신호였다.
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 놈이 벼락처럼 튀어 올랐다.
“으악!”
비명을 지르며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더덕의 머리채를 한껏 휘둘렀다.
퍽!
두꺼운 더덕에 뭔가 맞았다. 어디 물리는 아픔은 없었다. 대신 뒤로 넘어진 바람에 엉덩이에 곤장을 맞은 듯 아팠고 충격이 정수리로 치솟았다. 눈앞에 별똥이 튀었다.
쉿쉿쉿.
쇳소리가 더 커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건 저뿐이 아니었다. 바위 뿌리 언저리에서 무성한 더덕 잎사귀가 흔들렸다. 붉고 검은 비늘이 스르륵 나타났다 사라졌다. 멀리 도망가면 좋으련만. 더덕에 얻어맞은 덕분에 화가 잔뜩 난 독사는 뾰족한 머리를 치켜들곤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눈을 질끈 감고 당장 떠오르는 이름을 외쳤다.
“카론!”
쉬익! 퍽!
“아가르타!”
저를 부르는 소리에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퍼덕퍼덕.
땅에는 제법 큰 단도가 박혀 있었다. 단도 이쪽에는 머리가, 저쪽에는 머리를 잃은 굵은 몸뚱이가 미친 듯이 퍼덕거렸다. 그러면서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더덕 이파리엔 온통 뱀 피였다. 끔찍했다.
“으악!”
벌떡 일어서 전신을 떨었다. 예쁜이를 타고 바로 곁까지 온 카론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끔찍한 광경에 전신이 오들오들 떨렸다.
“어…… 어디 갔었어요?”
“근처에 있었다. 넌 뭘 했길래 뱀을 맞닥뜨린 거지? 보통은 말을 피하는데 왜 땅에 있는 거야.”
“더덕을 뽑느라…… 더덕.”
너무 놀라서 전신이 오들거렸다. 팔로 카론의 허리를 꽉 잡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처음에는 팔을 잡았던 상대의 손이 천천히 풀어졌다. 이어서 굵고 단단한 팔이 등을 휘감고 힘을 꽉 주었다. 압박을 받자 떨림이 좀 덜했다.
“더더가 뭐지.”
한쪽 팔로 등을 꽉 붙잡은 그는 다른 손으로 분홍이의 손목을 잡아들었다. 흙이 묻은 손톱과 뱀 곁에 떨어져 있는 굵은 뿌리를 보고는 혀를 찼다. 구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려는 순간 카론이 먼저 말을 꺼냈다.
“고…….”
“멋대로 수풀을 헤집으니 이런 꼴을 당하는 거다.”
고맙단 말도 채 듣지 않고 버럭 꾸지람하는 통에 서러움이 솟았다. 아니, 뱀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지금 꾸짖을 때인가. 가슴에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놀란 나머지 눈물이 글썽거리려고 했다.
“폐하가 혼자 가서 그럽니다.”
“내 탓인가.”
“예. 나는 사냥터 처음입니다. 뱀 있는지 모릅니다.”
“숲에는 당연히 뱀이 있다.”
재차 주의만 주는 그를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구해 줘서 고마웠던 마음이 빠르게 사그라졌다. 떨림도 진정되었기에 그만 떨어지려고 했다. 그런데 꽉 안은 팔이 놓아주질 않았다.
“놓아주세요.”
“필요할 때만 이용하는군.”
비아냥거림에 분홍이도 똑같이 톡 쏘아 주었다.
“당연합니다. 폐하도 내가 필요할 때만 이용하니까요.”
“그래도 목숨을 구해 준 것에 감사 정도는 표해도 되잖아. 저 뱀은 맹독성이라고. 한 번 물리면 바로 죽어.”
“그런 뱀이 있는 숲에 나를 혼자 두었습니다.”
“너야말로 곧장 나를 쫓아오지 않고 한눈을 팔았잖아.”
따라가지도 못하게 달려간 사람이 누군데. 유치한 싸움이 끝날 기미가 없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많이 미안합니다. 그러니 놓아주세요.”
냉랭하게 돌아서려 했으나 카론은 오히려 분홍이를 단단히 틀어잡았다. 흉살을 가진 도깨비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턱을 꽉 깨문 덕에 그렇지 않아도 딱딱한 얼굴이 더욱 딱딱해졌다.
파란 안구에 비친 분홍이 제 모습 또한 별다르진 않았다. 하얗게 질린 낯에는 혐오감이 그득했다. 저렇게 못난 것을 보는 기색이 적나라할 줄이야. 알면서도 딱딱하게 굳은 낯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당장 목을 조를 것 같던 놈의 메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어떤 독설을 하든지 똑같이 받아치리라고 독기를 끌어모았다.
“한 번은, 한 번쯤은 순순히 감사하면 안 되나?”
“네?”
“아무리 내가 용서 못 할 강간범에 지독한 악당에 혐오스러운 작자라도. 그래도 한 번쯤은 호의에 호의로 답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딱딱하게 이어지는 어투의 끝이 습기를 머금은 종이처럼 뒤틀렸다. 새파란 청금안은 이상하리만큼 윤기가 넘쳤다. 금색 속눈썹을 단 눈꺼풀이 아주 가늘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
다친 이를 보듬어 주기는커녕 나무라기부터 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이 나오겠냐고 하려는 찰나 번뜩이는 깨달음과 함께 가슴이 철렁했다.
핏줄마다 따뜻한 피 대신에 새파란 냉기가 도는 얼어붙은 작자인 줄로만 알았다. 평범한 인간의 마음은 조금도 헤아릴 줄 모르는, 악랄한 개종자로만 알았는데. 영 없는 줄 알았던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한 조각 정도는 지니고 있었다.
한 번쯤은 호의에 호의로 답하라고, 카론은 눈물 없는 울음으로 애원했다. 애달픈 절망과 괴로움을 목도 하며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저 딴에는 사람이구나.’
이런 아연함이 다였다. 그 외에는 잘 알면서 왜 이런 호소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당혹감이 다였다.
앞으로 평생 얼굴을 맞대면서 자식을 같이 기를 사인데 나름대로 사람 행세를 하려는 의지는 높게 사, 위선이나마 위로해 평안한 장래를 도모해야 마땅했다. 득이 되게끔 사리 분별이 척척 되는 대로 마음도 그리 척척 따라 주면 좋으련만.
혀가 굳어 버렸다. 호의에 호의로 답을 해 주면 안 되느냐는 청에 끝끝내 답을 하지 못했다.
습한 숲의 바람은 죽은 뱀이 뿌린 피 냄새와 함께 씁쓸한 기운을 더욱 퍼트렸다. 몸통을 붙잡은 손이 얼마나 강하고 뜨거운지와 별개로 두 사람 간에 찬 공기가 점점 차가워졌다.
이윽고 카론이 팔을 풀어 놓아주었다.
“추태를 보였군.”
습기를 머금어 굵고 둔탁했던 목소리는 어느새 평소와 같이 마른 냉기가 가득했다. 멀뚱히 서서 지켜보는 분홍이를 외면한 그는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긴 몸을 숙여 바닥에 박힌 단도를 빼낸 다음 죽은 뱀과 그 옆에 떨어진 더덕을 보았다.
“오늘은 아무래도 재수가 좋지 않으니 그만 돌아갈까.”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그가 더덕을 집어 들어 내밀었다. 뱀피가 군데군데 묻은 걸 보자 토악질이 일었다. 얼굴을 찌푸리면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버려요.”
“흠.”
애써 캔 더덕이 바닥을 뒹굴었다. 식욕이 싹 달아나서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엔 카론을 태운 예쁜이도 천천히 걸었다. 당연히 점순이도 느릿느릿 걸었다. 그런데도 분홍이는 아파서 저절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다리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좀 띄우려고 해도 허리가 둔하여 그러지 못했다.
‘윽.’
어제 찧은 엉덩이를 또 찧었다. 그도 모자라 갑자기 기마도 했으니. 이제 겨우 해산한 지 백 일이다. 승마는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황궁에 도착하였을 때는 말에서 내려가는 것도 무서울 만큼 전신이 비명을 질렀다.
카론이 훌쩍 뛰어내리는 사이 분홍이는 곱게 다리부터 한쪽으로 모으고 상체는 안장에 매달린 채 발끝을 살금살금 내렸다. 발이 영 닿지 않아 뛰어야 할 텐데. 그랬다가 뼈마디가 다 어긋날까 두려웠다.
“누가 좀.”
아무나 도와주라고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또 카론을 보고 말았다.
‘쯧. 무슨 짓이야.’
애초에 순순히 감사할 마음이 들지 않는 호의는 바라지 않는 게 맞다.
‘아파도 죽기야 하겠느냐.’
눈을 질끈 감고 안장에 매달렸던 팔에서 힘을 뺐다. 푹신한 숲에서도 땅을 디딜 때는 벼락을 맞은 듯 온 뼈마디가 저릿저릿했다. 딱딱한 황궁 앞마당은 더 아프리라 예상했는데.
“응?”
어느새 다가온 카론이 뒤에서부터 분홍이를 단단히 붙들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특특한 가죽 장화를 신은 황제의 발목 언저리에 대롱대롱 흔들리는 두 발을 보았다.
“도움이 필요하면 망설이지 말고 제때 불러.”
혀를 차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 주었다. 몸이 아픈 걸 아나? 싶어 고개를 홱 돌렸다. 카론이 빨리 돌아섰기에 무슨 표정을 지은 지 보진 못했다.
“고…… 고맙…….”
아까 끝까지 하지 못한 감사 인사를 시도해 보았다. 카론이 돌아선 채로 대꾸했다.
“하기 싫은 말을 굳이 안 해도 돼.”
아까 좀 하면 안 되느냐고 화를 낼 때는 언제고. 이젠 또 하지 말라니.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숲에서는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표정을 지으면서 고맙다고 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옆으로 돌아선 그는 곁눈으로 분홍이를 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이내 외면했다.
“이따가 석찬에서 보지.”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온 산책인 줄 모를 것을 일방적으로 시작하고 일방적으로 끝낸 다음 그는 그림자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분홍이에게 있어 카론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 * *
예상대로 뼈마디는 급격하게 삐걱거렸다. 뜨거운 목욕물이 절실했다. 직접 보진 못했으나 알몸으로 조심스럽게 욕조에 들어가는 동안 제 엉덩이에 올라온 피멍을 봤는지 마그네가 올리아를 찾아 연고와 함께 목욕물에 풀 약초를 받아왔다.
“근육통에 좋은 허브라고 합니다.”
물에 담근 약초 냄새가 무척 향긋했다. 저절로 한숨이 샜다. 눈을 감고 뜨거운 물을 즐기는 사이 온도가 좀 식자 마그네가 궁인을 시켜 뜨거운 물을 더 끼얹었다. 더해지는 열기가 참 반가웠다.
‘이제 나도 어른인가.’
온욕의 즐거움을 알다니. 온욕이라 하니 저절로 온천이 떠올랐다.
‘온천에 며칠 몸을 담그면 딱 좋으련만.’
약초를 우린 뜨거운 목욕물도 충분히 사치였으나, 아무래도 온천보단 부족했다.
세 부모님은 몸이 으슬으슬하고 뼈마디가 쑤실 때 온천을 찾아 몸을 담그곤 했다. 어린 저는 뜨거운 물이 싫어 근처 온천과 계곡이 어우러지는 곳에서 형님, 누님과 물장구를 쳤다.
‘여기도 온천이 있으려나.’
칡, 고사리, 더덕이 있으니. 온천도 있을지 모른다. 나중에 그렌을 불러 한번 물어보자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물 온도를 살피러 온 마그네가 욕조에서 잠든 저를 깨웠다. 비몽사몽간에 수건으로 몸을 대충 닦고 부드러운 침의로 갈아입었다. 침대까지는 무슨 정신으로 간지 몰랐다. 눕자마자 바로 혼절하듯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마침 마그네가 온을 살피고 나가는 기척이 들어 잠에서 깼다. 눈을 살며시 뜨자 작은 등 하나만 켜진 방이 보였다. 사위도 고요했다. 깊은 밤이었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자서 그런지 뼈를 우리는 아픔이 한결 가셨다. 몸을 일으켜 온을 한번 살펴보고 싶은데, 제가 자는 사이에 침대에 아교가 발렸는지 쩍 달라붙은 몸이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지가 나른했다. 머리는 아프진 않으나 둔했다. 온은 조용했다. 별 탈이 없이 자는 중일 터. 분홍이 또한 다시 잠에 빠지려는 찰나였다.
철컥.
문고리가 조용히 돌아갔다. 마그네인가 했으나 기척이 달랐다.
‘……카론?’
평소 천둥처럼 울리는 발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아 오는 줄도 몰랐다. 이상한 일이지만 눈을 감고도, 소리나 냄새가 없어도 카론만은 확실히 분간했다. 공기가 서늘해진다고 해야 하나. 혹은 긴장이 감돈다고 해야 하나. 기척을 줄여도 존재감이 항상 요란했다.
침대 가까이 온 그는 손을 뻗었다. 방이 이미 어두운데도 그림자가 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카론이 종종 그러듯이 별안간 눈을 부릅뜨고 뻗은 손목을 홱 낚아채서는, 이 늦은 밤에 어쩐 일이냐고 물어야 했다. 황제를 만나기에는 황후조차 선약해야 한다면서 왜 황후의 침전에는 선약은커녕 기척도 내지 않고 도둑처럼 살금살금 들어오느냐고 따져야 했다.
한밤에 역정을 내기에는 너무 피곤하고 귀찮았다. 전에 카론이 저를 귀찮다고 했던가. 지금만큼은 분홍이도 카론이 귀찮았다. 자는 척하면 원하는 바를 취하고 사라지겠거니 했다. 강간범이라는 비난을 새삼 듣기 싫다고 제 입으로 그랬으니 설마 자는 사람을 겁간하지는 않을 테고.
손이 이마에 닿았다. 한 손으로도 이마 전체를 가릴 만큼 큰 손은 무척 뜨끈했다.
“열은 없군. 석찬도 거를 만큼 피곤하면 미리 얘기하지.”
잠결이라면 전혀 듣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속삭인 그는 잠시 뒤에 손이 뗐다. 후에 베개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만지더니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아까워. 기른 쪽이 훨씬 아름다운데.”
아직도 머리카락 따위에 연연하다니. 제 소유라고 철석같이 믿는 것도 적당히 했으면. 아니 그렇게 긴 머리가 좋으면 본인이 기르든가. 아니면 라테시온 식을 강요하지 말든가. 하여간 치졸하고 유치했다.
내일 아침 일어나면 카론만큼 삭둑 잘라 볼까. 청개구리 같은 성미가 치밀려는 찰나, 카론은 천천히 몸을 굽혔다. 짙은 어둠이 얼굴 가득 지더니 이내 입술에 따뜻한 살점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당혹감에 폐부가 펄럭댔다. 제 황후의 입술을 몰래 훔치다니. 그렇게 하고 싶으면 당장 수청을 명하든가. 물론 그러면 강간범이라 손가락질을 할 셈이었다.
긴장이 스며 절로 숨이 흐트러졌다. 잠에서 깬 걸 눈치채지 못하게 일부러 숨을 죽였다. 몰래 들어와 못된 짓을 하는 쪽은 카론이니 제가 삼갈 게 하나도 없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언쟁을 벌이면 결국 이쪽 기분도 상하고 만다. 노곤할 때는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것이 나았다.
“평생 도둑 키스만 하고 살아야겠군. 내게 친절할 때는 잠들었을 때뿐이니.”
악다구니를 종종 쓰긴 했으나, 전부 카론이 시시비비를 따지면서 괜한 일로 역정을 내니 맞받아쳤을 뿐. 황제답게, 어른답게, 사내답게 행동했으면 화를 낼 리가 있나…… 아.
아니었다. 다감한 부군 흉내를 내던 그에게 제대로 미워하게라도 하라고 화를 내었다. 직후에 그는 언제 다정하고 상냥했느냐는 듯이 싹 돌변했다. 지어낸 감정이라 가볍기 짝이 없어 하는 것도, 아니 하는 것도 손바닥 뒤집듯이 쉽다고 도리어 혐오감이 크게 일었다.
숲에서도 비슷했다. 매몰차게 알아서 처신하라더니 급할 땐 또 어느 틈에 달려오고. 울 듯 애원하더니 이내 차갑게 돌변했다. 도대체 뭘 어쩌란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제가 어렵다고 했으나, 분홍이는 그 말을 카론에게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싶었다. 심중을 가장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은 황제 카론이 아닌가.
“간호로 밤을 새운 부작용인가. 자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습관이 생겨서 곤란하군. 미친놈도 아니고. 아니 미쳐 가는 건가. 이 일을 어쩐다.”
“히잉. 힝.”
카론의 중얼거림을 느꼈는지 잠결의 아기가 칭얼거렸다. 낮은 울음이라 마그네가 깰 정도는 아니었다. 뭔가 불편한 걸까. 아니면 그저 잠에서 깬 걸까. 안아서 토닥이고 싶은데 카론과 얼굴을 맞대기 껄끄러웠다.
자는 척하다가 갑자기 일어나 아이에게 척척 다가가면 얼마나 숙연하겠는가. 또 괜히 심술을 부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더 기다려 온이 크게 울면 뒤늦게 깬 척하는 편이 나았다.
“으앙.”
울음이 커졌다. 마음이 아팠으나 그래도 아직 깨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이런.”
카론이 그쪽으로 다가갔다. 실눈을 뜨고 뭘 하나 살폈다.
커다란 남자는 아기 침대 난간에 걸쳐진 면포를 어깨에 툭 얹더니 우는 아기를 능숙하게 안아 면포를 걸친 어깨에 툭 얹었다. 한쪽 팔로 기저귀 낀 엉덩이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기저귀를 만졌다.
“젖지는 않았는데.”
아비의 광활한 어깨에 통통한 뺨을 댄 온의 칭얼거림이 급격히 잦아들었다. 그저 잠투정이었다. 아기의 등짝 전체를 아우르는 큰 손이 작은 뒤통수에서부터 통통한 엉덩이까지 부드럽게 오갔다.
“많이 컸구나. 손발에도 제법 힘이 있어. 목도 가눌 줄 알고.”
같은 황궁에서 살면서 마치 오랜만에 본 듯 아이의 손과 발을 만져 가며 구석구석 살폈다.
“눈 외엔 요정을 닮았어. 요 응석받이 같은 성격도 요정에게서 물려받은 건가. 귀여운 녀석. 넌 내게 귀여움이 무엇인지 가르친 두 번째 사람이다. 아주 귀엽다. 정말 귀여워.”
아주 다정하게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서질세라 조심스럽게 손발을 매만지는 모습만 보아도 온을 아끼는 마음은 분명히 진심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 아비의 정까지 꾸며낼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왜 제 앞에서는 온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는 일도 없고 또 제가 애써 꺼내더라도 시큰둥하게 대꾸했을까. 혈육에 대한 정을 감출 만큼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아…… 우…… 응.”
“쉬. 쉬. 요정이 잔다.”
배냇짓과 함께 옹알이하는 온을 달래면서 카론은 조용히 웃었다. 조소도 아니고 냉소도 아니었다. 옅은 불빛에 비친 얼굴에선 차가움을 찾을 수 없으며 온통 즐거움이 가득했다. 눈을 접고 입술로 길게 미소 짓는 표정은 다정한 부군 흉내를 낼 때 짓던 것과 똑같았다.
요 며칠 바뀐 건 분홍이를 대하는 태도뿐이었다.
‘설마 또……?’
일전에 마그네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는 반신반의하다가 행동을 싹 바꾼 카론을 보고 말도 안 되는 착각이라 치부했다. 이번에도 둘이 주고받은 말 때문에 행동이 바뀐 것일까? 잠시 되짚어보았으나 그렇게 행동을 바꿀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도리어 서로 성질만 돋우었을 뿐인데.
“요정은 너를 보며 많이 웃느냐? 그렇겠지. 네가 태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레온.”
다시 아기 머리에 입을 맞춘 카론은 보송보송한 솜털 머리에 뺨을 대었다.
“레온, 너는 내가 태어나 행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야. 비록 그 때문에 요정에게는 평생 혐오스러운 눈길만 받겠지만. 그래도 너는 요정에게 사랑을 듬뿍 받으니 다행이야. 네 양육을 방해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몰래 찾아오는 걸 용서해라.”
조곤조곤 속삭인 카론은 얌전해진 아기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골든 피오니는 나의 보물 창고다. 낮과 밤, 늘 지키고 있다. 어떤 놈도 너와 요정에게 손을 못 대니 안심하고 자라.”
알아들은 것처럼 온은 옹알이를 하더니 이내 기척이 잦아들었다. 잠시 아기 침대를 바라보던 카론이 다시 이쪽으로 왔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더 가까이 다가와 분홍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을 뜨면 또 신경전이겠지. 그래도 네가 눈을 뜨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욕인지 혹은 걱정인지 모를 것을 남긴 후 그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사라졌다.
잠시 뒤에 몸을 일으켰다. 기척을 어떻게 죽인 건지 모르겠으나, 아마 우연히 잠에서 깨지 않았으면 그가 오고 간 줄 전혀 몰랐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언제부터 저렇게 드나들었지?”
생각해 보니 한창 배가 불러오는 시절부터 밤에 인기척을 느낀 일이 종종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이마에 뽀뽀를 남겼다. 잠결이라 엄마나 큰엄마, 혹은 아버지 꿈을 꾸어 지레 느낌이 생생한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괜히 생생한 게 아니었다. 실제 사람이 들어와 만졌으니.
“설마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가 입을 맞춘 이마에 절로 손이 갔다. 잠이 싹 달아났다. 분홍이는 침대에 앉은 채 방금 있었던 일을 곱씹었다.
몰래 엿들은 카론의 말이 계속 귀를 맴돌았다. 온에 대한 깊은 정을 일부러 숨긴 것이나 저를 향한, 어쩐지 거짓말 같은 진심을 엿본 기분이었다.
방금 목격한 광경과 들은 말을 합쳐서 따져 보면 겉으로는 냉랭하고 차가운 척해도 본심은 그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너그럽고 자상하게 대할 수 있고 딴에는 그렇게 대하고 싶은 것 같은데 왜 태도가 싹 바뀌었을까.
참으로 불가해했다. 술을 마시던 날, 카론이 먼저 역정을 내고 분홍이를 쫓아냈다. 그 후로 놈의 태도는 내내 살얼음 같아서 오히려 분홍이가 지레 눈치를 봤다. 그런데 방금 들은 얘기론 카론, 저는 사실 그렇고 싶지 않은데 꼭 분홍이가 뭐라고 해서 어쩔 수 없다는 투가 아닌가.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런 밉살스러운 놈 같으니.]
부아가 치밀어 베개를 부러 팡팡 내려쳤다. 한번 달아난 잠은 쉬이 다시 오지 않았다. 아직도 아침이 되려면 한참 남았다. 어지러운 심중을 안은 밤이 굽이굽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