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하루 두 번 카론과 황궁을 돌아보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오전에 몸을 단장하고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긴 후, 출산으로 인해 잠시 미루어 두었던 장부를 다시 꼼꼼히 확인하노라면 어느새 카론이 찾아왔다.
햇빛이 밝아 바깥은 뙤약볕이었으나, 궁 안은 시원했다. 돌로 지은 이유를 그때 알았다. 벽 그림을 보고 바뀐 장식에 관해 잠시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 틈에 황제의 침전에 가까웠다.
“그러고 보니 여긴 요정식 장식이 없군.”
“황제의 방 앞입니다.”
카론과 대화를 하면서 말이 또 배웠다. 꼬박꼬박 존대하는 마그네나 다른 사람에게는 배울 수 없는 평어가 특히 많이 늘었다. 발음은 아직 어설퍼도 의사소통은 이전보다 훨씬 원활했다.
“나는 요정식도 나쁘지 않은데.”
“기사와 시종이 드는 자리입니다. 우선 황제의 위엄을 살립니다.”
“그래서 이런 그림을 걸었나?”
카론은 집무실 바로 앞에 새로 내건 그림을 가리켰다.
그렌이 귀한 물품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찾은 그림으로, 크기가 대단하여 위아래로는 장신인 카론보다 더 컸다. 커다란 면적을 대체로 어두운 색채가 도배되어 언뜻 보기에도 위압감이 넘쳤다.
중앙엔 날개 달린 천사가 금발을 휘날리며 창과 검을 내려찍고, 그 아래 악마가 피를 철철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고국의 사원에는 밝은 머리를 가진 비사문천이라는 신장(神將)이 있어 악귀를 짓밟은 석상을 문 앞에 세웠다.
이국에도 비슷한 신장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필치가 힘차고 내용이 훌륭하여 황제의 거처 앞에 걸기에 딱 알맞기도 했다.
“사악한 자를 쫓는 그림입니다. 폐하께 어울립니다.”
“좀 더 평화로운 그림이 좋지 않을까.”
“평화는…….”
평화가 네놈에게 어울릴쏘냐? 하는 말은 목구멍 깊숙이 쑤셔 넣었다.
“강한 힘이 있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군.”
강한 힘. 분홍이가 황후 자리를 받아들인 목적도 또한 힘이었다. 언젠가 새파란 도깨비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걸 볼 것을 기대했는데. 또 완전히 몰락하면 분홍이와 아이도 위험해지니. 이래저래 골치가 아팠다. 놈에게 고통을 듬뿍 선사하고 싶은데 적정선을 지켜야 하니. 이게 무슨 머리 아픈 처지란 말인가.
‘내 고충을 알기나 할까?’
곁눈으로 카론의 안색을 살폈다. 황제의 용안을 흘깃 보는 일은 큰 무례였다. 그러나 분홍이를 꾸짖을 사람은 없었다. 배운 바 없는 이국의 황제는 오히려 예의를 내려놓는 편을 좋아했다. 그래서 황제 부처가 걷는 중에도 뒤따르는 시종도 없었다. 그 덕분에 황제 놈에게 은근히 성질을 부릴 땐 부릴 수 있어서 편했다. 한편으로 아무리 개종자라도 황제인데 이래도 되나? 하는, 신국에서 배운 예를 거스르는 불편함도 약간 있었다.
“평화는 힘 있는 자를 좋아하긴 하지. 하지만 힘으로만 눌러서 굴복시키기 어려울 땐 어떻게 하지?”
설마 저를 빗대는 것인가. 힘으로는 안 되는 걸 알았으니 이젠 다른 술수를 쓰려고?
순순히 정론(正論)을 펼쳐야 하는지, 아니면 냉랭하게 비꼬아야 할지 잠시 골몰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힘으로 다 눌러 버리고 황제는 그런 것이라며 태손마마와 신국 폐하를 조롱하였으면서.
“파사 일족 말이다. 일전에 네가 했던 말이 맞아. 무력만으로는 지지부진해지고 있어.”
파사 일족.
최근 자주 거론되었다. 카론의 비정한 모친이 그 일족이라고 했다. 기이한 사술을 쓰며 사람을 현혹하는 사이비 종교로서, 카론이 상식에 벗어나는 일을 지극히 혐오하게 된 계기였으며, 금은화를 들고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세상에 뚝 떨어진 요정에게 혹독하게 대우한 근본 연유기도 했다. 카론을 천하의 개놈으로 길러낸 마녀의 일족이기도 했다.
‘그래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계속 듣다 보니 은근히 궁금하긴 했다. ‘기이한 사술’을 사용하는 일족이다. 금은화와 비원에서 뻗어 나온 백룡의 기운 또한 이곳에선 사술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졌다. 누가 뭐래도 백룡을 직접 목도한 카론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금은화와 백룡에 관해서 파사 일족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금은화를 알고 신국을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고.
나아가 백룡을 다시 소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갑자기 가슴이 부풀었다. 만에 하나 돌아갈 길이 있고 그것을 파사 일족이 안다면? 당장 온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도망치리라.
성급한 희망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주먹을 꾹 쥐었다. 들뜬 표정을 감추고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이었다.
“파사 일족의 어떤 부분을 고심합니까?”
“북부 산맥으로 숨어들어서 찾아내기 힘들어. 네가 발견된 황무지에서 이틀 꼬박 올라가면 나오는 아주 험준한 산맥이지. 토벌을 위해 정예군을 보냈지만 크게 기대하진 않는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해.”
탄압을 피해 험한 산으로 숨어들었다. 당장 황궁도 못 벗어나는데 북부 산맥까지 갈 방도가 요원했다. 칼로 마구 쑤셔 봐야 더 숨어들 터. 그들을 살살 꾀어내 하산을 시켜야 분홍이도 그들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
“[유인책]을 쓰시지요.”
“유니체?”
“그러니까 다정한 척하며 불러들입니다. 위선입니다.”
“함정을 파란 건가. 함정은 이미 너무 써먹어서 효과가 없어. 내가 그들을 증오하는 만큼 그들도 나를 증오한다. 이젠 함정에 쉽게 걸리지 않아.”
그래. 그 잔인한 습속이 어딜 가겠나. 그렇게 되기까지 카론이 무수한 파사 일족을 죽였으리라. 분홍이를 발견한 당시에도 장포에 피가 흥건했다. 카론 유스키아의 악명이 혈향과 함께 북부 산맥에 진동하겠지. 하여간 사사건건 도움이 안 되는 작자였다.
“그러면 폐하가 아니면 되지 않습니까.”
“뭐?”
머리를 재빨리 굴렸다. 사술을 쓰는 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존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술을 쓰는 자들이니 요정에는 관심이 있겠지요.”
평온하던 카론의 기색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었다.
“안 돼.”
“왜요?”
“그들은 어디로 튈지 몰라. 위험한 작자들이다. 죽은 왕과 함께 마녀를 미치게 만든 다른 장본인이기도 하지. 중요한 황후를 미끼로 쓸 수 없다. 네가 노출되면 덩달아 레온도 드러난다. 그러니 절대로 안 돼.”
소름이 돋을 만큼 냉정한 태도로 선을 그었다.
“이건 황후의 권한에 해당하지 않아. 두 번 다시 거론하지 마라.”
차후에 함구까지 명하는 바람에 분홍이는 파사 일족을 알아볼 기회를 놓쳤다. 괜히 궁금함만 더했다.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아 냉랭한 표정으로 복도를 걷자니, 놈이 또 말을 붙였다.
“함정을 파서 유인하긴 해야겠지. 어떤 함정이냐가 문제야. 요정국에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지?”
“불을 피워 고기를 굽지요.”
어쩔 수 없이 정론을 펼쳤다.
“갑자기 고기를 왜?”
“진짜 고기 얘기가 아니에요. 험한 산으로 숨었으니 배가 고프고 추울 겁니다.”
“식량을 이용한 함정은 이미 써 봤다. 소용없었어.”
카론은 다소 성급하게 실망감을 내비쳤다. 분홍이는 그를 보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식량만 이용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피가 이어진 사람이 아니라 종교라고 했지요?”
“그렇다만.”
“신은 배고프고 힘든 사람이 기대는 곳입니다. 배고프지 않고 힘들지 않게 만들면 종교의 힘은 자연히 줄어듭니다.”
분홍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카론을 똑바로 응시했다.
“황무지가 있지요? 거긴 풀이 자라 가축을 키울 수 있습니다. 거기에 마을을 세우고 가축을 많이 기르도록 하세요. 산의 나무를 베어 숯을 제작하고 목재를 팔아 부를 쌓게 하세요. 폐하의 도움 아래 풍요롭게 잘사는 모습을 보면 자연히 파사 안에서 배신자가 생깁니다. 배신자는 다른 배신자를 낳고. 이런 식으로 종교는 약해집니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군. 거기다가 황무지 개간은 이미 하고 있다.”
“땅을 나눠주고 있습니까?”
“땅을? 놈들에게?”
카론이 코웃음 쳤다.
“기껏 개간한 땅을 왜 그놈들에게 주나?”
“그러니 폐하의 방법으로는 계속 제자리입니다. 땅이 있으면 일하고 배를 채웁니다. 가족도 생깁니다. 종교보다는 일이 즐거워집니다.”
맞는 말이라 여겼는지 카론은 입을 다물었다.
“굶주림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숨고 자식에서 자식으로 나쁜 마음이 이어집니다. 오래도록 씨앗이 됩니다. 느린 것이 소용없는 것보다는 나아요.”
“정론이군.”
수긍했는지 카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다른 이유로도 대단위 개간을 계획 중이었으니. 땅의 일부를 빈민 위주로 넘겨보도록 하지. 마을도 짓고 말이야. 개간하여 새로 만든 영지엔 요정식 이름이 좋겠어. 추천할 이름이 있나?”
별안간 기묘한 발상이 떠올랐다. 혹여 먼 장래에라도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 사람이 있다면 알아보게 하는 훌륭한 계책이.
[분홍.]
“푸논? 무슨 뜻이지?”
아명이라고 곧이곧대로 말할 멍청이가 아니었다.
“연한 빨간색을 칭하는 말이에요. 어머니가 그 색으로 옷을 지어 주었습니다.”
“푸논이라. 괜찮군.”
슬슬 온이 깨어날 때였다. 늘 그렇듯이 카론은 분홍이를 방 앞까지 배웅했는데, 마침 문과 마주 보는 복도에 걸린 그림을 바꾼 참이었다. 그는 눈썰미 좋게 그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예전 그렌이 준 그림책에서도 그렇고, 마그네와 말 공부를 하면서 읽은 아이용 이야기책에서도 그렇고 검은 무사 얘기가 많았다. 드래곤이라 부르는 거대한 토룡을 때려잡곤 했다.
처음 그 얘기를 접했을 때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전에 그렌이 알려 준 대로 화가를 시켜 원하는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이 오늘 오전에 도착했다. 아이용 그림책보다 훨씬 생생하고 웅장했다. 그림책과 다른 부분은 검은 무사가 검이나 창이 아닌 활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분홍이가 일부러 그렇게 주문했다.
“활로 황금용을 때려잡는 흑기사라. 보통은 창인데 말이지.”
그림을 곰곰이 보던 카론이 문득 물었다.
“혹시 활을 쏠 줄 알아?”
희한하게 눈치가 빨랐다. 아니라고 할 일도 아니라 긍정하자, 파란 눈이 가늘어졌다. 가만히 있으면 냉랭한 입매가 슬그머니 호를 그렸다.
“황금용을 보통 악한 군주에 비교하는데.”
“그런가요?”
시치미를 뚝 뗐다. 뭐라고 캐물어도 분홍이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저 활이 좋아서 활을 그리라고 했을 뿐. 제멋대로 넘겨짚고 화를 내면 올바른 부군의 자세가 이런 거냐고 역으로 따질 셈이었다.
“재미있군. 마음에 들어.”
예상과 달리 카론은 흥미롭게 그림을 한참 보다가 별말 없이 갔다. 일부러 성질을 돋우려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참견하면 당당히 맞서리라 먹은 마음이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이게 아닌데.’
달려들어 악을 쓰며 싸울 것까진 없어도 이렇게 무탈하게 넘어가는 것도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놈 때문에 심중이 매우 어지러웠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온이 장성할 때까지 겉으로나마 곱게 받아들여야 하건만. 뒤틀린 속이 도무지 진정하질 않았다. 차라리 겉으로며 냉랭한 편이 도리어 속은 더 편하리라.
하여간 카론이라는 작자는 여러모로 밉살스러웠다.
* * *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 아기다운 오밀조밀한 눈코입. 온은 분명히 요정의 자식이었다. 카론을 닮지 않아서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만약 닮은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쓰렸다. 설마 닮은 구석이 없어서 개종자를 닮을까.
홀로 낳은 듯 이국인의 특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더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황궁에 저와 같은 신국 사람이 하나 늘었다. 얼른 자라서 신국 말을 배우고 신국에 대해 가르치고 싶었다.
기대에 찬 분홍이를 본 마그네가 한마디 거들었다.
“황후 폐하를 쏙 닮았습니다.”
“그래?”
마그네의 말에 분홍이는 빙긋이 웃었다. 처음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절망에 찬 자신이 그렇게 바라고 또 바라던 대로 온은 명가의 특색을 고스란히 지녔다.
볼록한 이마 위로 조금 내려온 까만 머리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귀가 쫑긋 솟고 귓불은 도톰하고 입술은 통통했다. 대신 눈은 옆으로 길었다. 흔히 봉목(鳳目)이라 일컫는 귀한 상이었다.
제 눈도 꼬리가 길게 빠지는 봉목이었다. 눈매가 다소 둥글고 서글서글한 어머니와 달리 길게 이어지는 눈매는 아버지가 물려주었다.
“내가 보기엔 아버지를 닮았어.”
“네? 머리카락도, 이마도, 앙증맞은 코도 황후 폐하와 꼭…….”
“황제 폐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 아버지 말이야.”
“아.”
부모님을 비롯한 혈육 얘기를 입 밖으로 낸 적은 처음이었다. 마그네는 실수라고 여겼는지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아니야. 가족 얘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어서 자연히 그렇게 생각하였겠지.”
배부르게 먹고 잠시 옹알이를 하던 온이 분홍이의 검지를 꼭 잡았다. 저절로 함박웃음이 나왔다.
“내 아버지는 훌륭한 재상이자 존경받는 학자이다. 형님과 누님에게는 엄하셔도 내게는 항상 자애로우셔서 늘 업어 주셨어.”
“인자한 분이셨군요.”
“그래. 아주 훌륭한 분이셨지. 온이 내 아버지를 닮은 만큼 성품도 닮으면 좋겠는데.”
“그러실 겁니다.”
따사로운 햇볕을 쬐도록 낮에는 아기 침대를 창가로 옮겼다. 아직 눈이 약하여 직광을 가리는 옅은 커튼을 달아 놓았다. 잠시 환기를 하느라 창문을 여는 사이, 바람이 살랑 불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환한 빛이 언뜻 온의 얼굴을 비췄다.
“저런.”
강한 빛은 갓난쟁이에게 좋지 못했다. 창문을 닫는 대신 침대 쪽 커튼을 잡으려고 했다. 그때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밝은 해가 얼굴을 비추자 온은 아직 흐릿한 눈을 껌뻑였다. 윤기 흐르는 작은 두 눈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새파란 도깨비 빛으로.
제가 잘못 본 줄 알았다. 황급히 잡았던 커튼을 홱 젖혔다. 강한 빛이 내리쬐자 온은 눈이 부신지 젖살이 올라 도톰한 눈꺼풀을 꼭 감았다.
[온아. 눈을 떠 보렴.]
침대에서 아이를 안아 올렸다. 창가로 데려가 아이를 어르듯 조금 흔들었다. 눈을 뜨라고 그랬는데 도리어 칭얼거림이 커지면서 눈은 더 꼭 잠겼다. 통통한 눈살이 접힌 사이로 눈물이 슬며시 배어났다.
[온아. 괜찮아. 괜찮아. 그러니 눈을 떠 보렴. 네 예쁜 눈을 좀 보자꾸나.]
다급함에 팔이 저절로 크게 움직였다. 작은 아기가 창틀을 넘나들었다.
“폐하?”
어느새 다가온 마그네가 기이한 눈으로 분홍이를 바라보았다. 갓난아기를 들고 창가에 몸을 기울이는 걸 보고 얼른 다가와 창을 닫아 버렸다.
“위험합니다.”
충실한 시녀장의 낯빛은 가벼운 충격과 함께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무엇을 염려하는지 분홍이는 금방 알아챘다. 바로 해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소동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아주 불쾌한 소동이.
“온의 눈이 이상해.”
“예?”
분홍이가 온을 들어 보이자, 마그네는 다가와 눈을 자세히 살폈다. 금방 진정한 온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눈을 깜빡였다. 젖은 속눈썹 아래 조금 드러난 눈을 유심히 본 마그네는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자세히 봐. 눈 색깔이 어떤지.”
“색깔이요?”
온을 대신 받아 든 마그네는 창가로 갔다. 분홍이처럼 창틀 위로 들어 올리는 대신 옅은 빛에 얼굴을 조심스럽게 비췄다.
눈물 때문에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분홍이는 얼른 면포를 가져와 온의 눈가를 닦았다. 신경질이 난 아기는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고개를 틀면서 입을 벌리고 크게 울려고 했다.
“쉬이…… 괜찮아요…… 쉬이.”
마그네가 몸을 좌우로 부드럽게 돌리면서 아기를 얼렀다. 그 바람에 분홍이는 눈 색깔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당혹감에 물든 분홍이를 보면서 마그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자 전하의 눈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원래 검은색이잖아. 달 없는 밤처럼 까만색. 그런데 빛이 비치니…….”
“혹시 파란색이던가요?”
“그래! 어떻게 알았지?”
어르고 달랜 온을 아기 침대에 다시 조심스럽게 눕힌 마그네는 커튼을 꼼꼼히 쳤다. 자연스럽게 새 기저귀를 꺼내 간 후 흐느낌이 멎은 온의 볼록한 배를 토닥이며 분홍이처럼 아기 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보니 짙은 푸른색이군요.”
“역시. 갑자기 바뀌다니…… 병일까? 올리아를 불러야.”
“제가 보기엔 괜찮으신 것 같아요.”
“아니야. 온이는 분명히 까만색이었어.”
“눈을 뜨신지 얼마 안 되셔서. 갓난아기의 눈 색은 흔히 파란색이에요. 아주 짙거나, 연하거나. 다른 나라 사람은 몰라도 라테시온에서는 아기 눈 색이 검은색인 경우가 더 드물어요. 대부분 파란색으로 태어난답니다. 오히려 정상이에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안심을 시키는 말에 도리어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절로 힘이 빠졌다.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분홍이는 실망과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속을 모르는 마그네는 쐐기를 박았다.
“아주 짙은 남색이라 검정으로 잘못 알았을 거예요.”
“말도 안 돼. 어떻게 멀쩡한 사람 눈이 파란색이야?”
“카론 폐하도 파란색이잖아요. 그것도 아주 새파란 색이지요.”
“그러니까 그는 멀쩡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마녀의 사생아라는 뒷말은 입속에만 머물렀다. 카론의 비참한 과거를 측은히 여겨서가 아니었다. 그를 마녀의 사생아로 부르면, 온 또한 마녀의 핏줄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외 이유가 있다면 황후로서 황제를 공공연하게 깎아내리지 않을 의무를 다함이었다.
“혹시 파란색 눈이 싫으신가요?”
“검은색이 좋아. 그편이 내 아버지와 더 비슷해.”
“훌륭한 분을 닮으면 좋지요.”
온을 통하여 명가의 핏줄을 잇겠다는 부푼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가슴을 쥐어뜯고 애간장을 녹이며 피눈물을 흘리면서 낳은 아이가 하필이면 겁간을 저지른 악한의 눈을 가지다니. 차라리 코가 높고 광대가 튀어나왔으면 좌절감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눈이…… 하고 많은 곳 중에 하필 눈이.”
눈은 혼백의 정수를 비춘다. 머리털이 노랗고 코가 비쭉 솟아도 눈만은 까만색인 편이 나았으리라.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어깨에 바윗덩이가 매달리고 가슴에 바람구멍이 휑 뚫렸다. 분홍이는 엉거주춤 일어서서 목적 없이 잠시 서성이다가 이내 침대로 가서 누웠다. 의관을 정제한 후에 다시 눕는 일이 없었기에 마그네가 걱정했다.
“아프신가요? 올리아를 부를까요?”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 좀 놀랐더니 피곤해서…… 잠시 쉬겠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오후에 이런저런 할 일이 많았다. 장부를 보면서 궁금한 점을 그렌을 불러 물어볼 심산이었다. 아직 라테시온 풍습이 익숙하지 않기에 그에 관한 서책을 마그네와 함께 읽어 보려고도 했다.
놀라서 피곤한 게 아니었다. 속에 들어찬 고름 같은 절망을 단단히 틀어막던 작은 제방이 무너지면서 희망을 모조리 휩쓸어 버렸을 뿐.
모로 누워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붉은 비단을 바른 벽이 마치 연옥의 불처럼 일렁거렸다. 눈물이 흐르지도 않는데 희한한 일이었다.
“그저…… 명가 자손으로 태어나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큰 소원이었나? 희망을 주었다가 빼앗을 정도로 가당찮은 바람이었나. 살면서 한 번도 바란 적이 없는 일은 턱턱 잘도 벌이는 천지신명이 어떻게 실바람 같은 작은 원을 이다지도 쉽게 앗아 가나.
위장에 벌건 숯덩이가 들어찼다. 조용히 살을 지지는 뜨거움에 분홍이는 시커먼 연기만 토했다.
“아아앙.”
곤히 자던 온은 배가 고픈지 금방 깨서 칭얼거렸다. 일어나서 달래고 젖병을 물려야 하는데. 온몸이 천근만근이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아아아앙.”
갓난쟁이일 때 계속 울게 두면 성질이 나빠진다는 가르침을 떠올리고 억지로 두 팔로 상체를 억지로 지탱했다.
“폐하?”
마그네가 가까이 있었는지 침실로 들어왔다. 간신히 반쯤 일어선 분홍이를 보더니 마그네는 눈인사만 하고 얼른 온에게 달려갔다.
“황자님. 쉬이쉬이. 마그네가 왔어요. 울지 마세요.”
아이를 한 번 길러 본 적이 없으면서도 성심을 다해서 그런지 마그네는 분홍이보다 보살피는 솜씨가 좋았다. 따뜻하게 덥힌 산양 젖을 가득 채운 젖병을 문 온은 깊은 파란 눈으로 제 보모를 올려다보았다.
“아유, 착하고 예쁜 우리 황자님.”
귀엽다는 듯이 볼을 살짝 쓰다듬으면서 먹인 후 마그네는 온을 바로 안아 트림을 시켰다. 보모의 어깨에 얹어진 작은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그때 분홍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헉!’
제 행동에 제가 먼저 기겁했다. 아직 어린 온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실제로는 시력이 약해 멀리 보이지도 않을 터. 하지만 짙은 충격은 가슴 깊은 속에서 동심원이 되어 전신으로 퍼졌다.
아이를 다시 침대에 눕힌 마그네는 도톰한 이불을 꼼꼼히 덮은 후에 온의 얼굴을 다시 자세히 봤다.
“역시 파란색이네요.”
창문을 꼼꼼히 점검하고 다 쓴 젖병과 늘 비치된 화로용 물 주전자를 들고 나서면서 그는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분홍이에게 말했다.
눈 색 때문에 속상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폐하. 라테시온의 아기는 자라면서 눈 색이 변해요. 저도 원래는 옅은 파란색이었다가 지금은 밝은 갈색이 되었어요. 아마 황자님의 눈 색도 변할 거예요.”
“그래?”
고개를 들었다. 상냥한 마그네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정말로 괜찮으세요? 안색이 창백하세요.”
“아니 아프지 않아. 정말로 기운이 없어서. 쉬면 나을 거야.”
“그럼 다행이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따가 올리아 님을 부를게요.”
그럴 필요까진 없다고 하려다 말았다. 올리아에게 아기 눈 색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고 싶었다. 마그네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원의 설명을 구체적으로 듣고 싶었다.
오후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가 온의 눈을 다시 보고 다시 침대에 눕기를 반복했다. 몇 번을 거듭 보아도 눈은 여전히 남색이었다.
“레온님은 특이하게도 눈이 남색에 가깝군요. 아기치고는 드문 색입니다. 검정으로 착각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오후 늦게 나타난 올리아는 커다란 돋보기로 온의 눈동자를 살폈다.
“보통 아기 눈 색은 자라면 자랄수록 짙어집니다. 파란색이 갈색이나 고동색으로 바뀌어요. 갈색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마그네는 맑은 갈색이지요. 저는 개암색입니다. 고동색의 일종이지요.
곁에 선 마그네가 기운을 돋우었다.
“제 말이 맞지요? 황자님 눈은 멀쩡해요.”
걱정하지 말라는 말에 되레 근심이 커졌다. 아무런 이상이 없어서 다행이어야 하는데…… 그보다는 변화 여부가 더 궁금했다. 아이의 건강보다 다른 것을 걱정하는 제 비정함을 돌이켜 볼 새도 없이 분홍이는 올리아에게 다그쳐 물었다.
“그럼 온의 눈 색은 앞으로 어떻게 되지?”
“보통은 짙어지니 이대로 두면 아주 짙은 고동색이 될 겁니다. 검정색에 가까워지겠네요. 파란색으로 남을 수도 있지만. 황후 폐하의 검은색을 생각하면 그럴 일은 지극히 희박합니다. 아, 매우 드물다는 뜻입니다.”
“그래?”
아직 아기라 그런 것이라는 의원의 진단에 희미한 희망이 생겼다.
“생김새와 머리카락 색이 황후 폐하를 쏙 닮아 요정 같으니 눈 색도 아마 그렇게 변할 겁니다.”
“파란색이 될까 봐 걱정했어.”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속내를 뱉고 말았다. 슬며시 웃다가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미소를 지웠다. 돋보기를 늘 들고 다니는 왕진 가방에 넣으면서 올리아는 씩 웃었다.
“카론 폐하의 눈은 유달리 파래서 냉정하게 보이지요.”
“그런 뜻이 아니라.”
혹여나 그가 카론에게 괜한 소리를 할까 봐서 걱정했다. 함구하라고 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올리아라면 아마 함구하라고 했다는 말까지 전할 수도 있었다. 누가 뭐래도 카론의 양모 아닌가.
“시에나의 눈은 아주 예쁜 금색이었어요.”
“시에나?”
“카론 폐하의 생모입니다. 유스키아의 마녀라고 불렸지요.”
급작스러운 얘기에 분홍이는 깜짝 놀랐다. 마녀라고 부르던 친모에 관한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폐하의 생모를 알아?”
“제 친구였으니까요. 시에나는.”
둥글고 활달한 의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카론에게 들은 바 대로 지독하고 끔찍한 사람을 회상하는 표정치고는 서글픈 안타까움이 물씬 드러났다. 뭔가 남모를 사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얘기를 한 걸 알면 카론 폐하가 엄청나게 화를 낼 테니. 부디 못 들은 것으로 해 주세요.”
금방 그림자를 지워낸 올리아는 갑자기 활달한 음성으로 한쪽 눈을 찡끗했다. 농을 칠 때 이국인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그림책에서 본 적이 있었다. 농을 던질 만한 표정이 전혀 아니었는데. 굳이 캐물을 이유는 없었다. 사연을 제가 안들 또 어쩌겠는가.
“어쨌든 카론 폐하의 라피스라줄리 눈은 마녀가 물려준 것이 아닙니다. 생부의 눈도 평범한 갈색이었으니. 아마 이름도 모를 먼 조상에게서 물려받았거나 혹은 돌연변이겠지요. 우연한 변화 말입니다. 만에 하나 황자님의 눈이 파란색이 되더라도 그쪽으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뜻은 아니었어. 그냥 검은색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서 놀란 거라.”
무거운 가죽 가방을 기운 좋게 든 올리아는 방을 나서면서 덧붙였다.
“카론 폐하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오늘은 피로 누적으로 쉬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올리아.”
“별말씀을요.”
올리아가 나간 후에 분홍이는 온을 다시 안았다. 빠졌던 기운이 삼 할은 돌아온 듯했다. 눈을 유심히 보느라 저절로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까매져라. 까매져라.”
온을 안고 주문을 외웠다. 마그네나 다른 사람이 보면 우습게 여길지 몰라도 분홍이는 무척 심각했다. 더 자라면 까만 콩을 많이 먹이려고 마음먹었다. 팥도 괜찮으리라.
‘라테시온에도 흑임자가 있나’
아니 흑임자가 아니어도 좋다. 검은 음식은 모조리 모아 먹이자.
몸이 피곤하여 쉰다고 전달받은 카론은 도리어 평소보다 일찍 나타났다. 온이 눈에 신경을 쓰느라 고단한데 보기 싫은 낯짝까지 마주해야 한다니. 자상한 부군 흉내가 여러모로 짜증 났다.
“몸이 아프다고?”
“괜찮아요. 그저 피곤했을 뿐입니다.”
“무리하지 마. 레온 때문이라면 마그네에게 당분간 맡기지 그래.”
아직도 한참 어린 아기인데 아무리 믿음직스럽고 실력이 좋은 보모라도 남에게 턱턱 맡기라는 소리가 나오는지. 그것도 음양 확인 좀 했다고 말도 없이 아이를 빼앗아 간 작자가 할 소린가.
제 새끼의 안녕보다는 그저 보기에 나쁜 짓을 했다는 점이 더 중한 걸지도 몰랐다. 생긴 대로 무정한 놈이었다.
눈을 들어 도깨비 눈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사람처럼 보이지 않은 파란 눈에 금색 빛이 콕콕 박혔다. 모래알처럼 드문드문 빛나는 금빛이 시에나라는 마녀의 흔적이었다.
“왜 그렇게 유심히 보지?”
“별일 아닙니다.”
“왜? 너무 잘생겨서?”
“절대로 아닙니다!”
기분 나쁜 농에 버럭 화를 내자 카론이 하하 크게 웃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온아. 너는 저 인간 같지 않은 도깨비는 닮지 말아라. 절대로.
* * *
요정과의 대화 후 카론은 전반적인 정무를 돕는 아서 엘러와 재정 담당자인 셰이드 남작과 함께 개간에 들 대략적 비용과 마련 방법을 검토했다.
셰이드는 원래 평민 출신으로 셈에 밝은 회계 전문가였다. 마른걸레까지 쥐어짜는 구두쇠로 유명했다.
“예상보다 재정이 더 넉넉하군.”
“대규모 출정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1년 전 석궁과 새로 주문한 후로 무기고도 꽉 차 있어 추가 구매가 없었고 그 외에 보급품도 넉넉합니다. 기사나 병사에게 주는 인건비도 줄었지요. 전쟁은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구두쇠는 필연적으로 평화주의자였다. 불필요한 전쟁은 귀한 돈을 물 쓰듯 쓰는 막대한 적자 행위라고 규탄했다. 일전엔 전쟁 비용을 계산하다가 카론과 아서를 낭비벽 있는 전쟁광이라며 돈을 작작 쓰라고 발작한 적도 있었다. 셰이드는 당장은 큰돈이 들어도 장기적으로 생산성이 기대되는 대규모 개발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카론의 말에 단추 구멍 같은 눈을 반짝였다.
“당장 황무지 개간을 시작해라. 땅을 원하는 자에게 헐값에 팔고 북부 산맥 기슭의 삼림 개발권도 판매해. 신분이 확실한, 신전이 인증한 모태 신도를 위주로.”
“모태 신도에게 우선 협상권을 지정할까요?”
셰이드의 물음에 카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도적으로 그럴 것까지는 없다. 그랬다가 신전이 기고만장해지면 곤란하니. 암묵적 기준을 만들어 소문을 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셰이드는 지시 사항을 빠르게 받아 적었다.
집무실을 서성이던 카론은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멀리 대신전의 꼭대기가 보였다.
“가장 먼저 임시 신전부터 세워. 신전 내에서도 명망이 있는 대신관을 선정해서 우선 보내라. 되도록 이단 심문관 출신이면 좋겠군. 너무 지독하진 않은 인물로.”
“이단을 분간하는 눈은 있되, 적당히 융통성 있는 사람이라. 생각나는 인물이 몇 있군요.”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에 생쥐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면 곤란하니까요.”
비록 카론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여도 아서가 카론의 가장 측근으로 남은 이유가 있었다. 아서는 어린 시절부터 카론과 함께 성장한 만큼 통치 사상과 정무적 차원에서의 판단기준이 카론과 가장 유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용병이 남아돌아 일반 시민에게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모아 초기 개척단에 포함하는 건 어떨까요? 힘도 세고 거칠어서 개척단에 딱 알맞습니다. 산맥 입구이니 아무래도 사나운 맹수도 있고. 기사 대신에 고용하여 마을 경비대로 활용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해. 대신 정규 기사단을 관리인으로 파견해라. 순서대로 파견해. 외곽이라고 황권이 미치지 않는다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신분이 확실한 귀족 출신과 신전기사를 적절히 섞어서 발탁하지요.”
능력만으로 황제를 독대하는 자리에까지 오른 셰이드 또한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어쨌거나 노는 땅을 개간하여 목초와 삼림 개발을 하는 건 장기적으로 좋은 투자입니다. 벌목부터 시작하지요. 목재상을 우선 만나겠습니다. 그들에게 벌채권을 팔 때 마을 기초 공사를 뜯어내지요. 길을 내는 건 목초지 사용권에 붙여서 목장주에게 떠넘기면 좋을 겁니다.”
투자도 별로 안 하고 큰돈을 벌 수단이 생각난 셰이드는 기분 좋은 듯이 히히 웃었다. 끼워 팔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아서는 그를 보며 눈만 깜빡였다.
“구두쇠는 참 대단하군.”
“엘러 경이야말로 용병에게 헛돈을 쓸 생각하지 말고 기초 공사를 마친 집을 무상으로 주는 조건으로 사냥 허가권을 파세요. 어차피 개간하면 짐승을 잡아야 하는데. 따로 고용할 필요 없이 가죽과 채집 임산물 판매로 큰돈을 잡을 수 있다고 하면 벌떼처럼 몰려들 겁니다. 모인 가죽과 임산물은 도시민들에게 웃돈을 얹어 팔 수 있게 특정 상단을 지정하여 독점 매매권을 팔면 되지요. 세금이 저절로 걷힐 겁니다.”
이번엔 카론까지 입을 떡 벌렸다. 구두쇠의 사업 수단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 상단에 네 상단도 있을 테지, 셰이드?”
“제 상단은 정직과 품질, 그리고 시간 엄수에서 최고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어떤 조건을 걸어도 협상 최우선 순위에 선정될 것입니다.”
뻔뻔하게도 저도 한몫 잡겠다는 얘기를 당당하게 했다. 아서는 “사립 엘러 용병단을 지금이라도 차릴까?”라고 고심했다.
“내 앞에서 잘들 하는 짓이군. 푸논 개발 회사를 세워. 관련 사업권은 모조리 회사에 일임한다. 물론 회사의 소유주는 나다.”
“수수료와 세금을 동시에 뜯어내신다니. 폐하께서도 물욕이 상당히 강하시군요.”
“이미 대륙 최고의 부자시면서. 부자가 더 한다더니.”
아서와 셰이드가 동시에 구시렁거렸다.
“시끄러워. 네놈들의 공공연한 야욕 때문이지 않나.”
두 놈을 쫓아낸 후에 집무실에서 잠시 숨을 돌리던 카론은 서랍을 열어 익숙한 모양의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조금 들어 올리자 황금빛이 찬란하게 쏟아졌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발달한 도시는 소유자이자 지배자인 영주가 있다. 영주는 황제에 복종하면서 경제권을 가졌을 뿐, 영지의 군사적, 외교적 권한을 황제에게 전적으로 넘겼다. 통치에 관해서도 영주보다 황제의 명령이 우선이었다. 그만큼 황제의 권한은 막강했다.
영주가 없는 지역은 더했다. 황제 직속으로 분류되며, 대표적으로 제도 라테시나와 상업 도시 사르프가 있다. 그 외에 대대로 물려받는 영주직이 아닌 황제가 임명하는 시장직 있는 지역은 황제 직영지였다.
앞으로 발달한 푸논도 황제 직영지에 속한다. 지금은 황무지에 불과하지만 몇 년 내로 빠르게 마을을 형성하고 사람과 물자가 몰려들어 시장이 필요하게 될 거였다. 시장 임명장 발행과 함께 소유주로서 권한을 명시한 문서가 제작되어 대대로 물려질 터.
‘푸논의 상징은 황금꽃이 좋겠어. 황금꽃 상징이 금색 잉크로 찍힌 시장 임명장이라. 내 서명보다는 다른 사람 서명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황금꽃을 요리조리 돌려보며 단상을 이어 갔다.
“역시 아가르타에게 선물할까.”
요정에게 좋은 선물이지 않을까. 요정이 발견되고 요정의 조언에 따라 개발되는, 요정식 이름을 가진 도시를 받으면 기뻐할지도 모른다.
레온이 태어난 지 꽤 되었다. 아이는 아픈 일 없이 잘 자랐고 이제는 제법 손발을 흔들 줄도 안다. 황궁도 무탈하게 굴러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정은 점점 우울해졌다.
그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근본적 전환을 꾀한 이래로 카론은 요정을 자극한 적이 없었다. 하고픈 대로 다 하게 두었다. 화를 내건, 짜증을 내건 다 받아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우울한 그림자가 하얀 얼굴을 뜰 줄 몰랐다. 특히 레온을 바라볼 때 인상이 굳어졌다.
“아이 양육이 힘들어서가 아닐까요?”
일전에 피로를 호소한 요정의 건강에 대해 올리아에게 자세히 물었을 때 저런 대답이 돌아왔다. 사람이 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붙여 줄 수 있다고 했더니 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육체적 힘듦이 아닙니다. 정신적 고통이에요.”
그러면서 올리아는 요정이 라테시온으로 온 이래로 황궁을 벗어난 적이 없음을 지적했다. 산책도 궁전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정원만 다녀, 실질적으로는 연금 상태와 다를 바가 없다고도 했다.
서궁에 감금한 건 카론의 뜻이었지만, 결혼 이후로는 전혀 아니었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음에도 임신과 아이 양육을 위해 요정이 스스로 택한 길이었다. 힘들면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라고 했는데도 거절한 것 또한 요정의 의지였다.
우울함은 어둠을 낳고, 어둠은 광기를 자아낸다. 라테시온의 황후인 요정은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선물이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시종을 불러 문장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화가를 불러오게 했다. 문장이 정해지면 금을 얼마든지 써서 황금꽃과 비슷한 모양의 봉인을 만들어 보석함에 넣어 선물할 생각이었다.
문장과 봉인을 만드는 일은 시일이 걸렸다. 선물을 깜짝 놀라게 해야 의미가 있다. 미리 발설하면 즐거움을 반감시킬 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당장 황후를 즐겁게 할 다른 수단이 필요했다.
황궁을 떠난 적 없는 요정과 함께 제도 구경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레온은 아직 마차를 탈 만큼 자라지 못했다. 자칫하다가는 마차 진동에 작은 뇌가 상할 수도 있다. 마그네에게 맡긴다고 해도 요정이 오랜 시간 동안 레온을 떼어놓을 리가 만무했다.
황궁 안에서 당장 시행할 수 있으며 요정이 온전히 즐길 수 있으며 더불어 마그네가 아기를 안고 동행할 수 있을 만한 무언가가.
번뜩 일전에 보았던 것이 떠올랐다.
“아, 그게 좋겠군. 그거라면.”
요정과 둘이서 멀리 가지 않고도 가볍게 즐길 수 있었다. 제가 생각해도 딱 맞아떨어졌다. 즉시 집무실을 나가 외궁으로 향했다.
“폐기하지 않고 남겨 둔 것이 분명히 있을 거야.”
황제의 막대한 부를 금과 보석으로 바꾸어 보관하는 지하 저장고만큼이나 삼엄하게 지키는 외궁 창고로 향했다. 보초를 서던 기사는 황제를 보자마자 문을 가리던 창을 거두었다.
창고관리인이 빠르게 나타나 거대한 철문을 열었다. 카론은 최근 보충한 물품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신에 한참 걸어 들어가 구석에 있는, 먼지 맞은 물건을 가리켰다.
“저것들을 정궁의 동쪽 정원에 지금 설치하라. 크기는 다양하게 준비하도록. 그리고 이것과 이것이 좋겠어.”
창고지기에게 준비를 명한 다음 카론은 골든 피오니로 향했다.
“아가르타?”
황후는 침실 창가에서 레온의 침대를 바라보며 뭐라고 꿍얼거리는 중이었다. 찌푸려진 미간엔 아직도 옅은 우울함이 남아 있었다.
“레온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또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전에 있었던 음양 확인 사건 이후로 카론이 레온에게 관심을 표할 때마다 요정의 눈초리가 다소 사납게 바뀌었다. 새끼를 빼앗길 것을 걱정하는 짐승 같았다.
양육을 돕고 싶어도 요정을 자극하기 싫어 그런 내색을 하진 않았다. 다만 올리아를 통해 이것저것 듣는 편인데, 이번에는 그도 별말을 하지 않아서 무슨 문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은 많다. 레온의 건강만큼은 올리아도 확고히 장담했으니 무슨 문제가 있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카론이 알 필요가 있다면 언젠가는 요정 스스로 말하리라.
“마그네는?”
이름을 부르자마자 마그네가 조용히 나타났다. 황제 부처를 보면서 무슨 일로 찾으셨냐고 눈빛으로 물었다.
“날이 화창해. 실내에만 있으면 기분만 가라앉아. 잠시 밖을 걷는 게 어떻겠어? 보여 줄 것도 있고 말이야.”
씩 웃는 카론을 향해 든 요정의 하얀 얼굴이 다소 굳었다. 단정하고 예쁜 입매에서 싫다는 말이 즉각적으로 나오는 대신 침묵이 이어졌다.
“보여 줄 것?”
“분명히 좋아할 거다.”
여지를 놓지 않기 위해 마그네에게 손짓했다.
“레온도 정원을 바라보는 테라스로 데려가지. 태어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으니 그늘 정도라면 밖으로 나가도 되지 않겠나.”
“그렇지만.”
우울한 황후를 위해 카론이 뭔가 준비한 것을 눈치챈 마그네가 거들었다.
“침대를 같이 가지고 가서 따뜻하게 이불을 덮어 드리면 잠깐은 괜찮을 겁니다.”
“그래. 방에만 있으면 건강을 해친다.”
약간 떠밀듯이 요정을 데리고 밖으로 향했다. 마그네가 금방 레온을 안고 따라왔다. 명을 받은 시종이 아기 침대와 금방 필요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날랐다.
“무엇을 보여 줍니까?”
“가보면 알아.”
하얀 요정의 손을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요정은 손을 빼는 일 없이 카론의 도움을 받아 아래로 향했다.
높은 하늘엔 흰 구름이 둥실둥실 흘러갔다. 햇빛은 다소 강하지만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상쾌했다. 그늘이 없는 정문 쪽이 아닌 동쪽에 있는 후원으로 나갔다. 빽빽한 나뭇잎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 정원에 들어섰다.
“햇빛이 좋군요.”
기대대로 요정은 햇빛을 반가워했다. 시종이 입구에서 이어지는 테라스에 아기 침대가 놓았다. 마그네는 레온을 그 안에 눕힌 후 곁을 지켰다. 황제와 황후를 위한 티 테이블과 의자도 금방 마련되었다.
“무엇을 보라는 겁니까.”
카론은 말없이 손짓했다.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정원 중간에 지시한 것을 세웠다.
“저것은…….”
“훈련용 과녁이다.”
물건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동시에 카론은 기사들이 내민 것을 받아 들었다. 신식 석궁을 도입하기 전 사용하던 구형 활이었다. 화살도 한 통 가져왔다.
“활을 다룰 줄 안다고 했지?”
활을 본 요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 받아.”
활을 내밀자 요정은 대단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거절하는 일 없이 받아 들었다. 놀란 듯 벌어진 입매에 경이로움이 서렸다. 하얀 얼굴에서 오랜만에 근심이 사라졌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다.
제법 그럴싸하게 활을 잡기에 화살도 하나 얹어 주었다.
“자, 이렇게 저기 과녁 보이지? 한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정은 시위를 시원하게 당겼다.
퉁.
휘익.
자세를 잡아 주느라 마주 보던 카론의 뺨에 옅은 바람이 닿았다. 황제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날아간 활은 곧장 과녁으로 날아가 박혔다.
퍽.
과녁을 지켜보던 기사가 깃발을 올렸다. 정중앙을 뜻하는 빨간색이었다.
분홍이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활이라니.
활을 만질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고국에서 쓰던 각궁은 아니었다. 위에 칠을 하여 재질은 제대로 알 수 없으나 모양은 신국의 활과 비슷했고 크기도 적당했다.
아무래도 몸이 회복되지 않아 활을 당길 힘이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아쉬움에 시위를 가늠하듯 슬쩍 당겼는데 의외로 쉽게 되었다. 생각보다 활의 세기가 약했다.
‘이 정도라면 지금도 할 수 있겠는데.’
자신감이 붙었다. 뭔가 쏴서 맞추는 것만큼 속이 시원한 것이 또 있을까. 활쏘기는 근심과 걱정을 덜어 내는 데 제격이었다. 활을 점검하기 위해 시험 삼아 하나 쏘았다. 기사가 빨간 깃발을 올렸다.
‘명중은 빨간색이로군.’
본인이 직접 넘겨 놓고도 뭐가 그렇게 걱정되었는지 곁에서 참견하던 카론이 갑자기 굳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과녁을 확인했다.
“우연인가.”
“흐음.”
우연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활이 약하고 볼품이 없어도 저렇게 가까이에 있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줄은 짐승 가죽인가요?”
“음…… 창자를 꼬아 만든 거다. 내장 말이야. 배에 든 거. 끊어지지 않도록 여러 번 꼬면서 약품 처리를 했지.”
카론이 다시 활을 넘겼다. 이번에는 팔짱을 끼고 옆으로 물러나기도 했다.
퉁.
통기는 소리가 제법 가벼웠다. 활이 가벼운 만큼 화살도 얇아서 바람에 금방 영향을 받았다. 어디 과일이나 딸 수 제대로 딸 수 있을까?
퍽.
“빗나갔…… 아니 명중입니다!”
활을 겹쳐 박았더니 과녁을 지키는 기사가 다른 깃발을 들려다가 얼른 빨간 깃발을 올렸다.
“힘이 약합니다.”
“그보다는 명중했어. 그것도 쏘았던 자리에 똑같이.”
“과녁이 가까우니까요.”
명중이 그렇게 놀랄 일인가. 분명히 활을 다룰 줄 안다고 했는데. 허풍으로 여겼나. 오랜만에 기분이 나아지는가 했더니 도로 상해 버렸다.
“더 멀리서 쏘도록 하지요.”
분홍이는 일부러 과녁과의 거리를 벌렸다. 원래는 훨씬 멀어도 되는데 정원이 작을뿐더러 활이 약해 가다가 살이 떨어질 수도 있어 적당거리에 섰다.
“거기서? 너무 멀지 않아?”
“괜찮습니다.”
다시 활을 당겼고, 결과는 보나 마나였다.
“활…… 솜씨가 대단하군. 역시 요정이라 그런가. 명사수로군. 아, 잘 쏘는 사람을 말한다.”
요정과 활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솜씨를 명사수라고 한다면 전력을 보이지 않은 분홍이는 정말로 명사수가 맞았다. 강한 활에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이백 보 거리에서 작은 콩도 맞출 수 있다.
“더 센 활이 좋아요. 이건 너무 약해요.”
“센 건 없어. 그게 활 중에 가장 강해. 병기창에서 꺼내 온 궁병용이거든. 기사들이 쓰던 거란 뜻이다.”
“이래서야 적을 쓰러트리겠습니까?”
못마땅하여 눈을 찌푸렸다. 그러자 카론이 변명하듯 덧붙였다.
“작년에 개량한 신식 석궁으로 주궁을 바꾸었다. 이것들은 이제 장난감에 불과해. 폐기하지 않은 활과 화살이 아직 많으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꺼내 써도 좋다.”
장난감. 장난감이라서 제게 준단 말인가.
아무리 약해도 활은 무기이다. 비록 라테시온식 철제 갑주를 뚫지는 못해도 이국인의 얇은 눈꺼풀은 거뜬히 뚫을 수 있다. 약하다고 금방 무시하는 얄팍한 판단에 절로 비웃음이 서렸다.
“요정국의 활은 이보다 훨씬 강합니다. 명궁도 많지요. 명궁은 명사수라는 뜻입니다.”
“그래? 흐음. 그거 대단하군.”
말끝이 묘하게 늘어졌다. 무시하는 투여서 금방 호승심이 일었다. 비록 제 무예가 뛰어나지 않아 약한 모습을 수시로 보이긴 했다. 그렇지만 고국 전체가 싸잡혀 약골로 취급하게 둘 순 없었다.
퍽. 퍽.
빠르게 시위를 당겼다. 처음부터 일점사를 노렸다. 모조리 한 점에 모이다가 마지막 활은 기어이 다른 활을 쪼개며 꽂혔다.
“요정국에서는 이 정도 쏠 줄 아는 사람은 흔하지요. 저는 명궁에 속하지도 못합니다. 진짜 명궁은 달리는 말 위에서 두 개의 활을 날려 각각 맞추기도 합니다.”
“그래 봤자 활이지. 갑옷이나 방패는 못 뚫어.”
카론이 손짓하자 기사가 어디론가 가더니 이내 기이하게 생긴 물건을 들고 왔다. 두툼한 자루 위에 작고 굵은 활을 건 물건인데 기사가 똑같이 짧고 굵은 대에 큰 촉을 단 화살을 몇 자루 내어놓자, 카론이 그중 하나를 집어 중앙에 걸었다.
한쪽 팔을 굽혀 팔등에 물건 끝을 걸고 고개를 물건을 잡은 쪽 어깨로 기울여 앞을 가늠하더니 손가락으로 작은 공이를 쳤다.
휘잉.
퍽!
순식간에 날아간 화살이 과녁 중간에 박혔다. 아니 과녁을 뚫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분홍이가 쏜 화살이 모조리 박살 났다.
“이게 석궁이라는 거다. 빠르고 강하지. 조금만 연습하면 조준하기도 쉬워. 아무리 명궁이라도 석궁에는 못 당해.”
놈의 도깨비 눈에 당장 활촉을 꽂아야 못난 자랑질을 그만두려나. 반쯤을 활을 겨눌 뻔했다.
“요정국 활은 소뿔로 만들어요. 각궁이라고 하는데, 힘이 아주 셉니다. 각궁에 애깃살을 대면 휘어 나갑니다. 방패 뒤에 숨어도 소용없지요.”
“휘어 날아가는 화살이 어디 있나?”
“흰 용을 타고 나타난 요정도 있는데 휘어서 나는 화살이 왜 없겠습니까?”
툭 쏘아붙이자 카론은 눈가를 씰룩였다. 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문 그는 겨누지 않고 팔만 들어 석궁을 쏘았다. 날아간 활은 과녁에 또 다른 구멍을 만들었다.
“보지 않고 쏠 수도 있어.”
퉁.
한 번에 살 두 개를 걸어 쐈다. 하나는 제대로 박혔으나 다른 하나는 중앙에서 멀리 비켜났다. 그래도 카론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활이 영 시원찮아 제 실력이 안 나와요. 라테시온의 활은 정말로 장난감이로군요.”
“퇴역했어도 궁병용이야. 그리고 이건 연사 장치를 걸면 순식간에 다섯 발 연사도 가능해.”
하찮은 자랑의 끝이 보이질 않기에 그만하고 싶어졌다.
“다섯 번 연사는 저라도 무리입니다.
“그렇지. 이건 특별히 개량한…….”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이라.”
막 자랑하던 얄미운 음성이 뚝 끊겼다. 저를 내려다보는 파란 눈이 살짝 흔들렸다. 활을 내리면서 남몰래 조소를 지었다.
“아이…… 힘들어. 온이는 잘 있나.”
가까이에서 마그네의 보살핌을 받으며 잘 자는 온이 핑계를 대면서 일부러 한껏 힘을 빼고 걸었다. 마련된 자리에 앉을 때는 끙 앓는 소리도 크게 내었다. 눈치 빠른 마그네가 다른 시녀를 시켜 시원한 차를 준비했다.
“활 솜씨가 대단하세요.”
“어릴 적부터 배웠어. 자랑할 실력은 아니야.”
“누구에게 배웠지?”
묵묵히 석궁과 활을 정리한 후에 돌아온 카론이 다른 의자에 앉았다.
“누나에게 배웠습니다.”
“누나가 있나?”
“예.”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론이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재차 물었다.
“왜 말하지 않았지?”
“말할 때는 듣지 않으셨고, 이후로는 묻지 않으셨으니까요.”
정확한 사실만을 전달했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분위기가 식었다. 밖이나 다름없는 곳에 차려진 차탁에, 주변에는 과녁과 활을 정리하는 기사도 몇 있는데 이상하게도 적막했다. 마그네가 숨을 죽이는 기척마저 느껴졌다.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움직여서 힘든데 어색한 침묵이 목을 더욱 마르게 했다. 제 몫의 냉차에 팔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렇지 않던 손이 벌벌 떨렸다. 덕분에 투명하고 긴 유리잔에 든 냉차가 찰랑찰랑 움직였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활을 당긴 것이 문제였다. 성치 않은 만큼 감각이 둔해져서 몰랐으나 어깨와 등의 근육이 놀란 모양이었다. 가만히 있으니 팔뚝도 화끈거렸다. 제대로 찜질을 하지 않으면 심각한 근육통이 닥칠 기미가 느껴졌다.
‘낭패다. 여기서 쉰다고 하면 또 무시하겠지?’
조금만 더 의연한 척 버티다가 들어가고자 했다. 찰랑거리는 냉차를 두 모금 홀짝거린 다음 얼른 놓았다.
“근육이 놀랐군.”
묵직한 음성과 함께 큰 손이 다가왔다. 저도 모르게 흠칫 떨며 그를 경계했다.
마그네가 내민 냉차를 물끄러미 보던 그는 떨리는 손으로 냉차를 홀짝이는 분홍이를 관찰하더니 불쑥 다른 손을 잡았다. 그가 손을 제 것인 양 만진 지는 오래되었다. 실랑이할 기운이 없어 그저 가만히 두었더니 손을 뒤집어 바닥과 손가락의 여린 살점을 더듬었다.
“여기, 살갗이 까졌어.”
엄지로 더듬는 언저리가 쓰라렸다. 미간을 찡그리며 손을 거두려 했으나 힘으로는 역시 이길 방도가 마땅찮았다. 카론은 시종에게 피부 연고를 가져오게 했다. 전에 그가 등에 발랐던, 박하 냄새가 진동하는 약이었다.
“앗!”
조금 발랐을 뿐인데도 절로 비명이 터졌다. 어찌나 쓰린지 눈물이 쏙 빠지려 했다. 이런 걸 어떻게 온몸에 발랐단 말인가. 그것도 소금으로 까져서 그냥 있어도 아픈 부위에.
“고약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좋다.”
이걸 단지 고약하다고만 할 일인가. 앙다문 이 사이로 바람을 들이마시면서 손을 팔락팔락 흔들었다.
“풋.”
심각하던 낯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조소는 아니었다. 그저 즐거워 보였다.
“이리 줘봐.”
약을 바른 손을 잡은 카론은 입김을 후후 불었다. 너무나도 무람없이 정다운 행동에 뭐라 반응할 바를 몰랐다. 뻔뻔한 짓에 화가 나야 정상인데.
주변에 있는 타인의 눈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제 아픔에만 집중하면서, 황제의 체면도 불고하고 성심껏 후후 불어 주는 행동이 이상하게 익숙하여 가슴이 철렁했다.
어디선가 이런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밝은 낮에 깍지도 끼지 않고 활을 쏘고는 손가락이 홀랑 까져 아프다고 손을 파닥거리면 이렇게 약을 바르고 후후 불어 주는 사람이.
……누…… 님.
쓰라림에 찔끔 나던 눈물이 금세 퐁퐁 솟았다. 한 방울 또르르 흐를 때까지도 제가 우는 줄 몰랐다.
“많이 아파?”
밝은 빛을 두른 손이 다가와 실룩실룩 떠는 뺨을 부드럽게 훔쳤다. 그것마저도 똑같았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그리운 누님과.
“올리아를 부를까?”
“괜…… 찮아요.”
걱정 가득한 눈초리가 파란색만 아니었다면. 저를 따라 덩달아 일어서는 당당한 무인의 터럭이 금색만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할 것만 같았다.
뒤돌아서서 남은 눈물을 마저 닦아 냈다. 약을 바른 손바닥은 꼭 말아 쥐었다.
“나들이가 길었습니다. 그만 돌아가지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고개 인사만 했다. 마그네가 온을 안아 든 사이 시종이 다가와 아기 침대를 옮겼다.
“아가르타.”
나직한 부름은 못 들은 척했다. 괜히 후들거리는 다리를 재게 놀려 얼른 제 처소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긴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다. 두툼한 등받이에 얼굴을 묻고 젖은 숨을 골랐다.
무시할 수 없는 인기척이 다가왔다. 뒷머리를 쓰다듬는 손에 눈물이 더 났다.
“내가 또 실수했나?”
실수했다. 아니 아주 큰 잘못을 했다. 왜 그런 짓을 해서…… 가슴이 이토록 미어지게 하는가.
“무엇을 저질렀는지 말하지 않으면 고치지 못해.”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르는 건 분홍이도 마찬가지였다. 잔잔하게 달래는 말이 싫었다. 그러면서도 머리를 쓰다듬는 자상한 손짓을 차마 떨쳐내지도 못했다.
“혼자 있고 싶은 건가.”
이 자는 왜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행동하지.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한 적 없었다.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카론은 멋대로 결정하고 멋대로 일어섰다.
“알겠다. 당분간 찾아오지 않겠다. 그러니 편히 쉬…….”
당분간 찾지 않겠다는 말에 분홍이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눈물이 흥건히 번진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다소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카론은 입을 달싹이다가 그냥 돌아섰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소매를 잡았다. 다소 놀란 듯 돌아보는 놈의 낯짝을 보자 입술이 절로 달달 떨렸다.
“누가…… 누가 혼자 있고…… 흑…… 싶다고 했어요?”
“뭐?”
새파란 도깨비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마그네는…… 레온을 돌봐야 하는군. 올리아나 그렌이라도 불러올까?”
“흑…… 누가 그…… 들을 찾았습니…… 흐윽…… 까? 제가 잡은 건 폐하…… 잖아요.”
울음 덕에 잠긴 목소리엔 표독스러운 어리광이 가득했다. 유치한 짜증을 부릴 처지가 아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카론이었다. 고통과 서러움에 몸부림치게 하고 사무치는 서러움과 외로움에 약해진 심신을 수시로 무너뜨리는 장본인이었다.
“아가르타.”
곁에 앉은 그는 슬며시 어깨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기댔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만 사과하겠다. 그러니 울지 마.”
이 지경이 되도록 전혀 모르는 악랄한 작자는 기어이 목소리를 내어 말을 하게 만들었다.
“왜애…….”
입술이 절로 떨렸다. 소리 없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왜…… 다음은?”
어르듯 종용한 덕에 결국 뱉고 말았다.
“왜…… 왜 다정…… 합니까……?”
“뭐?”
“왜애…… 다…… 저…… 함…… 흐으으윽.”
꾹꾹 눌렀던 오열이 기어이 터지고 말았다.
“왜 다정하냐니.”
“……워…… 원…… 마…… 앙…… 미…… 하니…… 흐윽.”
울음에 겨워 말이 뚝뚝 끊겼다. 떨리는 몸이 이따금 들썩였다.
“원망스러워? 다정하게 대하면…… 안 되는 거였나?”
“흐윽…… 흑.”
한참 울던 분홍이는 이윽고 손을 들어 축축한 눈가를 문질렀다. 젖은 손으로 입매를 문지르다가 “앗.”하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약이 묻은 손인가.”
우느라 부은 눈과 입을 문지를 만한 연고가 아니었다. 갑자기 몰려오는 지독한 따가움에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눈물을 도로 펑펑 흘렸다.
“따…… 따가워.”
“가만히 있어. 닦을 것을 가져오겠다.”
아이를 기르는 방이라 깨끗한 물과 수건이 곳곳에 있었고 카론은 직접 물수건을 적셔 왔다.
“고개를 들어 봐.”
서러움에 더불어 제 멍청함이 한심해서 저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상황에 눈이 따가워 더 울다니. 그것도 가장 원망스러운 남자 앞에서.
뻔뻔하기 짝이 없어 수치를 모르는 위선자는 방금 분홍이의 얘기를 듣고서도 또 행패 부리듯 다정함을 마구 휘둘렀다.
차가운 물수건이 따가운 눈가를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두어 번 눈물과 함께 연고를 닦아 낸 후 새 물수건으로 다른 쪽 눈을 닦았다. 부푼 입을 닦은 후에 손을 닦아 내는 동안 상대는 내내 심각했다.
“이젠 어때?”
따가움은 가셨으나 쓰라림이 남았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기된 얼굴이 화끈했다.
“쯧.”
혀 차는 소리가 나지막이 나더니 이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분홍이를 양팔로 안아 든 카론은 침실로 향했다.
“레온과 함께 잠시 나가 있어.”
“네, 폐하.”
마그네가 아기를 안고 침실 문을 닫았다.
직후 카론은 부은 눈가를 다시 닦아 주었다. 세 차례 물수건을 간 후에야 분홍이는 눈을 조심스럽게 뜰 수 있었다. 눈꺼풀이 잔뜩 붓고 눈 안에 이물감이 가득했다.
“눈이 빨개. 올리아를 불러야겠어.”
나가려는 그의 팔을 잡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장 할 말이 있었다.
눈물과 쓰라림으로 인해 안개 낀 뜻 흐린 시야에 금빛으로 빛나는 황제가 가득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분홍이를 때리고 겁간하고, 이후에는 차가운 냉궁에 가두어 사무치는 외로움에 오들오들 떨게 만든 냉혹하고 악랄한 원수. 평생 원망하고 저주해도 모자랄 미운 남자가.
가만히 그를 살펴보던 분홍이는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왜 이렇게 다정하…… 지요?”
“그야 네 기분이 나아지길 바라니까.”
헛웃음이 나왔다. 목구멍에 꽉 매운 서러움만 아니었더라도 깔깔 웃었을 터다. 소리 높여 조소하는 대신 분홍이는 닭똥 같은 물방울만 뚝뚝 떨어뜨렸다.
그의 황후가 되면서 평안은 영영 떠나간 말이 되었다. 지독했던 지난날을 계속 상기시키는 그가 곁에 있는 한, 평안은 두 번 다시 만지지 못할 신기루였다.
평생 이토록 사람을 증오해 본 일이 없다. 순진했던 몸을 갈기갈기 찢고 온전했던 혼에 흉한 칼집을 내고 멀쩡히 뛰던 염통에 서슬 퍼런 대못을 박아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실낱같은 바람도 픽 꺼졌다. 훌훌 바람이 되어 흩어지는 것도 허락받지 못한 채 산송장으로 사는 나날을 버티기 위해 원수가 남긴 씨를 고이 품었다.
‘차라리 시린 냉궁에 계속 버려두지.’
그리하면 모진 세월을 강물처럼 흘려보내고 난 곳도 없이 이름도 없이, 그저 아이 하나 기르면서, 잊힌 귀신으로 살다가 조용히 갈 텐데.
아니 황후로 살아도 데면데면 본척만척해 주면 그나마 조용히 견딜 수 있을 텐데. 이젠 아가르타로 살겠다고 결심하였는데.
깊게 묻어둔 혈육의 정을 왜 이렇게 잔인한 방식으로 되살리는가. 문득문득 다가오는 부드러운 손길에 저도 모르게 옛적 정에 익숙한 염통이 슬며시 빨간 물을 머금었다가도 새파란 도깨비 눈을 보고 도로 하얗게 얼어붙는, 참으로 시린 고통을 왜 매번 새삼스레 느껴야 하는가.
가만히 두지. 그냥 멀뚱하게, 냉랭하게 가만히 두지.
“기분 좋지 못해요…… 사실은…… 아주 나빠요.”
눈앞의 사내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곤 인간 같지 않은 파란 눈으로 눈물이 고인 눈을 똑바로 보았다. 진의를 엿보려는 듯, 혹은 온정신인지 가늠하려는 듯.
“상냥한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어째서지?”
한층 더 나아가 카론은 한쪽 무릎이 바닥에 댔다. 침대를 짚고 있던 분홍이의 두 손을 잡곤 고개를 들었다. 꼭 연정을 속삭이기라도 할 것처럼.
“그럼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자신을 알아 달라고 할 때는 모진 주먹질로 답했으면서. 이제야 이런들 고름이 꽉 찬 가슴이 별안간 나아지겠는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자, 그는 애가 타는지 재차 채근했다.
“무슨 말이든 해 봐. 뭐든 다 들어주겠다.”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그래 그럼 무슨 말이든 해 보자.
“나는…….”
몰염치한 기대를 품은 자를 향해 속에 찬 독을 한 줌 토해 냈다.
“……폐하가 싫습니다.”
새파란 도깨비 눈이 일순간 멈췄다. 훤칠한 이마에 미세한 금이 갔고 우뚝 솟은 코가 한층 딱딱해졌다. 그와 반대로 눈물을 머금은 제 입술은 서서히 옆으로 벌어졌다.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낯선 기운이 기분을 들뜨게 했다.
“죄 없는 나를 때리고 함부로 대한 카론이 싫어요.”
“……아가르타.”
“팔을 짓누르고 다리를 벌려 더러운…… 짓을 한 네가 정말로 싫어. 네를…… 카론 유스키아를…… 혐오합니다. 저주합니다.”
문장의 끝이 기이하게 올라갔다. 고조된 기분 탓이었다. 독기 가득한 속을 한 줌, 한 줌 토해 낼 때마다 얼어붙는 놈의 낯짝을 즐거이 보았다.
아…… 그래! 즐겁다! 재미있다!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 본데 없는 작자가 손찌검을 휘두른 이유가. 고작 말로 찌르는 것도 이런 희열을 가져오는데. 요 뻔뻔한 살점을 자르고 오연한 뼈를 흔들면 얼마나 재미날까.
“꼴도 보기 싫어. 그런데 왜 황후로 삼았지요? 싫다고 했잖아.”
“……아가르…… 타.”
새파란 도깨비 눈에 충격이 어렸다. 깊게 음영 진 파란 안구가 깊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못나고 흉한 눈이라니. 지금 장난감 화살이 있다면 콕콕 찔러 주었을 텐데.”
한 번 허물어진 마음의 둑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제 목을 언제든 쥐어 비틀 수 있는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분홍이는 뱀처럼 혀를 놀렸다.
“온이도 파란 눈이야. 알아요? 그 때문에 내 배로 낳은…… 목숨 걸고 낳은 내 새끼를 미워할 뻔했어. 지금도 온이 눈을 보면 가슴이 철렁해. 너 때문이야. 모두 너 때문이야.”
놈은 잡은 두 손을 으스러질 듯 압박했다. 꽉 다문 일자 입술에 냉기가 서렸다. 곧 도깨비 눈에 불똥이 튀고 철퇴 같은 주먹으로 저를 모질게 패리라.
“이제야 다정하게 하면 좋아할 줄 알았어요? 속에 잔뜩 담아 둔 아픔이 없어질 줄 알았어?”
“……그래.”
뚫린 입이라고 대답은 잘도 한다. 꼭지에 열이 펄펄 솟았다.
“한참 전에 죽은 엄마를 아직도 미워하면서…… 나는 멀쩡히 살아 있는 너를 미워하면 안 돼?”
파란 눈에 기어이 불똥이 튀었다.
“닥쳐.”
화난 맹수처럼 낮게 으르렁대는 놈이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서 저를 덮칠 것 같았다. 하지만 늦었다. 때때로 발작하듯 악을 썼던 대로 분홍이의 이성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가끔 봇물이 터지듯 울분이 터진다. 하도 사무친 기억이 너무 많아서. 참을성이 툭 끊기면 이렇게 미치광이처럼 발광하고 말았다.
“너도 손 놔! 더러워!”
팔을 떨쳐 손을 빼려고 했으나 놈이 놓아주질 않았다. 부아가 치민 나머지 발을 들어 딱딱한 허벅지를 쥐어 찼다.
퍽.
바윗덩이 같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맞는 태도가 더 얄미웠다. 그런다고 누가 기특해할 줄 알고. 오히려 더 때렸다.
[이 흉측한 놈! 징그러운 놈! 육시하여 짐승에게 던져 줘도 모자랄 놈!]
퍽. 퍽. 퍽.
발목이 시큰거리도록 놈의 허벅지를 밟고 또 밟았다. 시퍼렇게 달아오른 놈에게서 살기가 풀풀 샜다. 입술이 저절로 비꼬였다.
“착하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누가?”
카론이 일어섰다. 잡혔던 두 손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우악스러운 손으로 목을 조를 줄 알았더니 놈은 그저 몸을 돌리기만 했다.
“너무 흥분했어. 나중에 얘기하지. 올리아를 불러올 테니 얌전히 있어.”
“어딜!”
후다닥 뛰어가서 문을 가로막았다.
“누구 마음대로 가. 못 가.”
한껏 흐린 눈을 보란 듯이 쳐들었다. 그리곤 외쳤다.
“기분 안 좋지? 그럼 원래대로 해.”
“뭘?”
“상냥하게 하지 마. 어울리지 않게 다정하게 하지 말아. 전처럼 미워만 하게 해.”
놈의 손을 잡고 제 머리에 댔다. 때리라고 하는데도 놈은 뒤로 빼기만 했다.
“때려. 다리도 벌려. 원래대로 해. 하라고.”
“안 해…… 이제는.”
놀란 듯이 뒤로 빠지는 놈에게 바짝 붙어 섰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젠 왜 안 해?”
“너를…… 더는 상처 입히기 싫다.”
“거짓말! 지금도 너무너무 아프게 하면서!”
카론이 뒤로 물러서면서 만들어지는 간격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알량하게 다정한 척하여 간신히 견디는 자신을 뒤흔들어 놓고는. 썩어빠진 진심을 내보이니 이젠 꺼리다니. 멋대로 멀어지는 일도 조금도 용납할 수 없다.
두 팔로 두툼한 몸통을 바싹 끌어안았다. 바윗덩이 같은 흉곽에 머리를 바짝 붙이고 대들보 같은 다리 사이에 두 다리를 밀어 넣었다. 밀착하니 우람한 몸이 딱딱하게 굳는 과정이 생생했다. 고개를 돌리자 귓바퀴가 짓눌렸다. 쿵쿵. 거대한 맥박 소리가 빠르게 울렸다.
“내가 싫다면서…….”
“함부로 다정했잖아. 뻔뻔하고 못되게…… 상냥했잖아.”
비틀린 내장에서 끔찍한 고통이 올라왔다.
“누구 마음대로 혼자 즐거워하래. 누구 마음대로 혼자 평안하래.”
쿵…… 쿵.
귓가에 울리는 심장 소리가 점점 느려졌다. 저절로 올라간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보이지 않는 가시로 놈의 염통을 콕콕 찌르는 즐거움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꺼멓게 곪은 속을 털어 냈더니 몸이 붕 떴다. 반대로 동상처럼 우뚝 굳은 몸은 움직일 줄 몰랐다. 귓가를 울리는 맥박 소리가 아니면 산 채로 죽은 게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
속을 다 보이고 나니 후련했다. 한번 떠오른 웃음이 온 얼굴로 점점 번졌다. 이제는 바보처럼 참을 이유가 없다. 굳이 온이 자라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하고 싶은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지금 여기서 하면 그만이었다. 몰염치하게 상냥한 흉내를 내고 싶으면 제 말을 들어줄 것이고, 아니라면 저를 다시 때리고 겁간하고 서궁에 가둘 것이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죽어 버려야지. 마녀가 그렇게 싫다더니 네놈도 결국 똑같다고 원망 가득한 저주를 남기고 죽어 버려야지.
“다정한 손길을 잊으려고 한참 애썼는데. 따뜻한 품을 찾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식은땀과 눈물이 뒤엉킨 이마와 뺨을 탄탄한 가슴에 문질렀다. 너무 움직이지 않아서 선 채로 혼이라도 달아났나 싶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너 따위가, 너처럼 못된 놈이 왜 함부로 다정하게 굴어. 왜 사랑을 그립게 해.”
눈매를 곱게 접어 빙긋 웃음을 지었다. 저를 보는 놈의 꽉 다물린 입매가 움찔 떨렸다.
“멋대로 정을 고프게 했으니 책임져요.”
“…….”
“머리 쓰다듬어 줘요. 사실은 누가 쓰다듬는 거 아주 좋아해.”
새파란 눈은 태풍을 맞은 듯 거칠게 떨렸다. 광대가 꿈틀거리고 네모진 턱이 툭 불거졌다.
틀림없이 미쳤다고 여기겠지. 아무래도 좋다. 미치게 하지 않는가. 이 원망스러운 놈이…… 잔인한 다정을 꾸며내는 놈이.
“얼른.”
채근하자 툭 늘어져 있던 손이 천천히 뒤통수에 닿았다. 머리 반을 가리는 손이 느릿느릿 위로 아래로 움직였다. 혐오스러운 놈인데도 눈만 감으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이 꼭 형님 같기도 하고 누님 같기도 했다.
“하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머나먼 이국의 황후가 되었으니 머리를 쓰다듬을 이는 이제 하나뿐이었다. 비록 새파란 도깨비 눈을 가진 흉악한 개종자이긴 해도.
눈만 감으면 똑같다.
형님인 듯, 누님인 듯. 혹은 아버님인 듯.
눈만 감으면…… 똑같다.
* * *
한참을 쓰다듬게 한 후에 밖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릴 때 그를 내보냈다. 굳은 안색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분홍이는 눈물이 말라붙은 채로 한껏 웃었다.
황제가 나가자마자 마그네가 우는 온을 데리고 들어왔다.
“기저귀도 갈았고 젖도 배불리 드셨는데. 잠들지 않으시고 자꾸 우십니다.”
“내게 줘.”
팔을 뻗어 아기를 받아 들었다. 뭐가 서러운지 눈물이 흥건한 아기는 똑같이 지저분한 눈물 자국이 번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슬프니?”
“흐엥.”
작은 눈을 뻐끔뻐끔 감았다가 뜨더니 이내 울음이 잦아들었다.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고개를 어깨와 목 사이에 살포시 대었다. 히끅히끅 작은 딸꾹질을 하던 아이는 이내 눈을 꼭 감고 잠들었다.
“역시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나 봅니다.”
마그네는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어머니라는 호칭이 걸렸다. 라테시온에는 음양의 구별이 없으니 어머니와 아버지뿐이었다. 당장 온에 관계된 일이 아니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서 뭐라 부르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억지로 억누른 고향의 기억을 함부로 끄집어낸 카론으로 인해 곪은 속을 털어내기 시작한 만큼 더는 고향 말을 삼갈 이유가 없었다. 일전에 우연히 나왔으나 유인책이라는 말도 가르쳤다.
얇은 아기 이불을 가져와 건네는 그를 보고 분홍이는 옳지 않은 호칭을 고쳐 주었다.
[생아비.]
“새나비?”
“황자를 직접 낳았으나 남자 음인이니 어머니라고 하지 않아. [생아비]라고 해야 해.”
“세나비.”
“세나비도 나쁘지 않구나.”
요령껏 이불로 감싼 온을 아기 침대에 내리려고 했다. 푹 잠든 줄 알았는데 조그만 녀석이 귀신같이 깨서는 다시 칭얼댔다.
“벌써 응석을 부릴 줄 아시는군요. 똑똑하십니다.”
“응석?”
“그러니까 지금처럼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기 행동 말이에요. 이유 없이 짜증 부리고 사랑해 달라고 하는 걸 응석이라고 해요.”
응석을 모를 리 없다. 이국어로 뭐라 이르는지 몰랐다.
“응석을 많이 부리는 아이를 뭐라 해?”
“응석받이라고 합니다.”
“응석받이가 되겠구나. 이 녀석.”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기를 꼭 안고 작은 머리에 뺨을 대었다. 젖 냄새가 솔솔 올라와 무척 사랑스러웠다. 들꽃이 실바람에 흔들리듯 천천히 좌우로 몸을 돌렸다.
“온아. 세나비도 응석받이였단다.”
“그러신가요? 무척 강하고 위엄이 있으셔서 몰랐습니다.”
구겨지고 축축한 등받이를 집어 든 마그네가 짐짓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방금도 폐하께 마음껏 응석을 부렸어.”
“아.”
등받이를 든 채로 분홍이를 바라보는 마그네의 눈빛에는 우려가 가득했다. 괜찮냐고 묻고 싶은데 차마 말을 못 떼는 듯했다. 아까 제법 큰 소리가 났으니 당연했다.
“활을 만졌더니 고향 생각이 나 슬펐어.”
“그러셨군요.”
“마음이 아프니 일부러 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요정국이 무척 그리우실 텐데. 제가 미처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오히려 네게 걱정을 끼쳐서 미안해.”
곤히 자는 아이의 작은 등을 토닥였다.
“온이도 있고, 너도 있어. 이젠 폐하께서도 아시니…….”
“맞아요.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무척이나 아끼십니다. 분명히 깊이 사랑하고 계세요.”
“풋.”
사랑이라는 말에 분홍이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랑이라니. 인간에서 한참 먼 개종자가 사랑이라니.
“하하하하하. 사랑이라니……!”
너무 크게 웃었는지 충직한 시녀장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주…… 주제넘은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라 조금 놀랐어.”
“하지만 폐하는 분명히 황후 폐하를…….”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려 주겠어?”
어쩐지 말투가 뻔뻔한 놈을 닮아 갔다. 패악과 눈물로 점철되나마 대화라는 걸 나누는 상대가 한정적이라 어쩔 수 없었다. 맨날 보는 얄미운 미소 또한 입가에 번졌다.
귀까지 빨개진 마그네는 등받이 껍데기만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전에 황후 폐하께서 아프셨을 때였어요. 황자님을 낳으시고 거의 죽을 뻔하였을 때…… 사실 올리아 님도 위험하다고 했어요. 그날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많이 아프긴 했으나 그만큼 심각한 줄은 몰랐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땐 온몸이 바스러지는 듯했고 기운도 없었지만 죽음의 문턱에 섰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때 폐하께서 밤새도록 황후 폐하의 곁을 지키셨어요. 저는 황자님을 돌보아야 했고. 먼 곳에서 내내 달려오셔서 지치셨을 텐데. 잠시도 쉬지 않고 황후 폐하의 이름을 부르셨죠.”
“그랬어?”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은 적이 있다. 먼 길을 말을 달리고 바로 제게 왔다는 것만 알았다. 카론이 밤새 뜬눈으로 제 곁을 지킨 줄은 알았는데. 그때는 소금으로 씻지 않고 바로 산실에 들어왔다는 것만 머리에 들어와서 곰곰이 짚어 보질 못했다.
“다음날 폐하께서 무사히 눈을 뜨셨을 때. 올리아 님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저는 황제 폐하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날 황제 폐하께서 올리아 님 몰래 폐하께 그러니까…… 그.”
“몰래 뭘?”
등받이를 놓은 마그네가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한껏 부끄러워하던 그는 이윽고 작은 음성으로 기어가듯 털어놓았다.
“키스를…… 입맞춤을 하는…… 걸 봤어요.”
순간 분홍이의 뺨도 괜히 빨개졌다. 아픈 사람의 입술을 훔치는 불한당 짓에 내심 질겁하고 하필 그걸 또 마그네에게 들키다니.
“그저 걱정이 지나치셔서 그러셨겠지. 그런 일로 아픈 몸이 나아지겠어. 올리아의 약이 잘 들었을 거야.”
저도 모르게 아무 일 아니라고 낮잡았다. 속으로는 비비 꼬인 사이라도 겉으로는 결혼하여 아이도 낳은 내외이니 접문쯤이야.
“그게 다가 아니에요. 똑똑히 봤다고요. 폐하가 자기 생명을 황후 폐하께 넘겨주는 장면을요.”
“뭐?”
이번엔 정말로 놀랐다. 생명을 넘겨?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시녀장의 빨간 얼굴엔 확신이 가득했다.
“금색이었어요. 아주 반짝반짝 빛나는 금색 뭔가를 입으로 넘겨주셨다고요. 그게 생명이 아니면 뭐겠어요. 그런 금빛은 폐하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으니까요. 자세히 보면 눈에도 금빛이 조금 있고. 황제 폐하이시니 분명 생명을 담은 영혼도 금색이 분명해요. 그러니까 저는 카론 폐하께서 황후 폐하께 생명을 전하는 키스를 하는 장면을 목격한 거죠.”
빨간 얼굴을 하면서도 마그네는 너무나도 감격스럽다는 듯이 두 손을 맞잡았다. 대단한 연정을 목격한 사람처럼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통에 덩달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그런 일이 있었다면…… 왜 말을 하지…… 미리 말을 했어야지.”
“카론 폐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셔서…… 그리고 말씀드릴 기회가 없었습니다. 직후에 두 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지.”
“네.”
데려간 온을 내놓으라며 패악을 부리는 꼴을 마그네가 고스란히 보았다. 당시에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며 내 사람 아니라고 윽박질렀다.
“그때 네게 했던 말은 진심이 아니야. 너무 화가 나는 바람에…….”
“당시에 황후 폐하께서는 아주 슬프고 괴로우셨으니까요.”
미안한 표정을 지우라며 마그네는 방긋 웃었다.
“어쨌든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를 정말로 사랑하고 계세요. 마법은 제국법상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저는 사랑의 기적이라고 믿어요.”
부끄러운 말을 줄줄 늘어놓은 후에 마그네는 걷은 등받이 껍데기를 들고 총총 나갔다. 그러자 빈방에 남은 건 고이 잠든 온과 분홍이와, 떠올릴수록 얼굴이 달아오르는 부끄러움뿐이었다.
“그가…… 그랬구나.”
쿠션이 없는 빈 의자에 천천히 앉으면서 멍하니 허공을 봤다. 한번 달아오른 얼굴이 쉬이 식을 기세가 아니었다. 온수를 뒤집어쓴 듯 온몸이 뜨거우면서 숨이 더워졌다.
“죽일 듯이 팰 때는 언제고 죽는다니 왜 또…….”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저를 귀하게 여겼단 말인가. 처음에는 온이 때문이라 여겼다. 굳이 황후로 삼은 이유도 제 어린 시절이 끔찍하였으니 장자를 적자로 삼아 비운의 대물림을 끊으려고 그러려니 했다. 실제로 사생아로 만들 수 없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나중엔 황후로 삼았으니 체면치레하는 줄 알았다. 황후를 핍박하면 보기에도 좋지 않고 또한 온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수 있으니 응당 황후를 존중해야 마땅했다.
분홍이를 힘들게 한 일은 아이와 무관한 곰살가움이었다. 활을 쏘는 일도 그랬다. 그저 저의 기분만 좋아질 뿐.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다. 그냥…….”
변덕이겠지. 그렇다. 변덕이다. 오만불손하고 오연하기 짝이 없는 흉악한 악한이 변덕을 부리는 것일 뿐이다. 그렇게 치부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데 불현듯 깨달았다.
“설마하니…… 정말로?”
때리고 겁간한 주제에 정말로 정이 깊어져서? 온 살갗의 솜털이 쭈뼛 섰다.
말도 안 된다. 그런 흉악한 놈이 설마 연정을 알 리가. 하물며 저를 좋아한다고? 스스로 떠올리고도 경악하고 말았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온을 침대에 곱게 눕히자마자 분홍이는 소금에 맞은 지렁이처럼 온몸을 비비 꼬며 호들갑을 떨었다. 까치발로 바닥을 동동 굴렀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 참을 수가 없었다.
“에비비. 에비비.”
손으로 팔뚝과 허벅지를 벅벅 문질렀다. 설익은 개복숭아를 씹은 기분이었다.
“나는 좋아한다니. 가당키나 한 말이야?”
그 개종자가 어디. 냉혹하고 피를 좋아하는 악한이 무슨 자신을 고이 여긴다고. 정이 솟는 심중 우물이 십 년 가뭄에 논바닥 쩍 갈라지듯 메마른 작자였다. 그러니 하루아침에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 다정을 뚝딱 지어내지.
“내가 죽으면 반 틈은 요정인 온을 기르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으니 그랬겠지.”
평범한 인간인 자신을 아직도 요정이라 이르면서 인간 취급 안 하는 종자가 피가 섞인 후사의 반쪽이 요정임을 잊을 리가 없다. 잘 자라서 멀쩡한 행세를 하기 전까진 분홍이가 꼭 있어야 할 터.
일전에도 요정 황후가 제게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긴요하기에 올바른 배우자가 되고 싶다며 허락을 구했다. 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저 허락을 구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혼자서 다정한 부군 흉내를 냈다. 처음부터 분홍이가 뭐라 대답하든 무관한 것이다.
그 부분이 제일 화가 났다.
정말로 올바른 배우자면, 배우자인 분홍이의 대답을 기다려야 옳지 않은가. 늦더라도 조용히 분홍이가 뜻을 정하기를 기다리며 발걸음을 삼가야 옳지 않은가. 삼가기 어려우면 차분히 잘난 ‘요정 감상’이나 하고 곱게 방을 떠야 마땅했다.
지난 과오를 깨닫고 앞으로 그렇게 하지 않겠다며 자애로운 척해도 결국엔 전과 똑같다. 똑같아. 아니 더 나빠졌지. 전에는 건드리진 않더니 지금은 수시로 건드리니.
더욱 부아가 치미는 부분은 그리도 중요한 온에게 관심이 적다는 점이었다. 음양 확인에 관해서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난리를 피울 만큼 온을 위하는 척하던 작자가.
꼭지가 돌아 버린 분홍이가 아이의 반은 요정이라고 앞으로 제가 기를 것이라 사자후를 내지르긴 했다. 그랬더니 놈은 온에 대한 참견을 일절 삼갔다.
돌이켜보면 그 또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 할 짓인가 싶었다. 아무리 반 요정이라도 아비가 되었으면 응당 제 새끼가 궁금하고 더러 보고 싶어 해야 맞지 않는가. 혈육에 대한 정이 이렇게 쉽게 흐려지는 성질의 것인가.
이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온에 관해 묻는 일이 드물었고 하루 두 번 찾아와 사소한 말을 나눌 때도 온을 안아 보려 하지 않았다. 그저 다정한 부군 짓에만 심취하여 정말로 중한 것은 챙기지 않는다.
카론 유스키아라는 자에겐 애정과 감정이란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뚝딱 생기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홀연히 사라지는…… 재미난 장난에 불과했다.
장난이라면 자신이라고 못할 것이 없다. 지어낸 다정다감을 마음껏 누리면 그만이다. 카론이 먼저 시작하였다. 혼신(渾身)을 다해 평정을 유지해 왔는데 뒤흔든 건 그쪽이었다. 그러니 눈에는 눈, 귀에는 귀라는 마음으로 철저하게 누리면 그만이다.
“사람을 가지고 노는 악독한 도깨비에게 매번 휘둘릴 순 없지.”
목숨을 각오하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다. 혹여 비운이 겹쳐 불귀의 객이 되더라도 이젠 분홍이의 원통함을 풀어 줄 수 있는 자식도 있다. 언젠가 장성한 온이 카론을 상대로 생아비를 왜 그리 핍박하고 괄시하였느냐고 따질 걸 생각하니, 없던 용기도 불쑥 솟았다.
“어디 한번 해 보자. 변덕은 나도 부릴 수 있다.”
조만간 놈에게 치받아 보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흔들린 마음을 추스르는데 분노만큼 명약이 없었다.
“조만간…….”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실컷 울고 화를 내고 뜻하지 않은 얘기까지 들어 하루가 빨리 저물었다. 얼른 잠자리에 들어야 놈이 또 득달같이 나타날 터. 피곤을 핑계로 일찍 잠자리를 준비했다.
“오늘은 빨리 쉬고 싶어.”
마그네에게 일러 붉은 노을이 지기 전에 석찬을 일찍 들었다. 먹고 싸고 목욕까지 마친 온은 세상모르고 천진하게 잠들었다. 최근 길게 자는 시간이 늘어 이렇게 재우고 나면 깊은 새벽에나 배고프다며 눈을 뜬다.
육아에 지친 건 마그네도 마찬가지라 오늘은 일찍 가서 쉬라고 일렀다. 온이 태어난 후로 골든 피오니에 딸린 다른 작은 방에서 묵기 때문에 쉬면서도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나온다. 참 고마웠다.
초저녁에 불과한데 이상하게 사위가 조용했다. 황제가 오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저녁이 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못된 말로 성질을 돋우면서 시비를 걸곤 했는데. 오늘따라 너무 조용했다.
낮에 다투었다고 골이라도 났나? 싶다가도 골이 나면 어때? 라며 콧방귀를 뀌었다. 비록 제가 유약하고 무력해도 한번 마음먹은 일은 쉽게 무르는 성미는 아니었다.
[그래서야 그 같은 작자의 황후로 살아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니.]
어차피 여기서 평생 살아야 한다. 그것도 황후로서 황제를 보필하고 장차 후사를 이으며 이 땅의 백성을 두루 긍휼히 여겨야 한다. 그들의 풍속을 마다만 하는 것도 옳지는 않으리라.
그러면서도 슬며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죽어 가는 걸 보다 못해 목숨을 건네줬다니.’
사술을 지극히 혐오하는 작자가 정작 자신은 사술을 썼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아니 저를 좋아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그저 필요하니 살린 것일 터. 마그네가 걱정이 지나치다 못해 잠시 헛것을 보았음이 분명했다.
[아무렴. 아무리 사술을 쓴다고 해도 그놈이 토해 낸 기운이 밝은 금색일 리가 있나.]
사람의 혼백이 금색이란 얘기는 들어 본 바가 없다. 대부분 희미한 희색이라 했다. 혹여 혼백이 금색인 인물이 드물게 있다손 해도 금색은 황상(皇上)을 상징하는 고귀한 빛깔이니만큼 걸출하고 위엄 넘치는 영웅이나 가질 법했다. 황제라 해도 오만한 작자의 혼이 금색이라니. 믿기 힘들고 믿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살려놓으면 감사해야 하나? 어차피 제 놈이 멋대로 뿌린 씨를 거두느라 죽을 뻔했는데. 살릴 방도가 있으면 살려야 마땅하지.]
혼자서 절절한 척 해 봐야 하나도 고마울 일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입을 맞추다니. 혼을 넣다니. 아무리 마그네의 착각이라손 쳐도 그놈의 숨결이 제 안에 있다는 게 찝찝했다. 손을 들어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더러운 기운이 깃들었다고 여기니 왠지 속도 울렁거렸다.
여하튼 하루하루 편할 날이 없다. 악랄한 놈은 참으로 신묘한 방법으로 분홍이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좋아한다는 핑계로 성질을 돋우는 데 잠자코 있어 봐야 제 속만 더 터졌다. 치받을 거라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던 놈을 기다렸는데, 갑자기 발걸음을 뚝 끊으니 더욱 신경 쓰였다.
어쩐지 그놈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기분이 퍽 나빠졌다.
[보고 안 보고가 꼭 그놈에게 달려 있는 건 아니잖아. 안 오면 내가 가면 되지. 뭐 하는지 알아나 보자.]
황제도 제 맘대로 구니 자신도 마음대로 할 터다. 좋아하는 마음이 정말로 있는 것인지, 얼쩡대며 알아보기나 할 요량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 차비도 직접 했다. 잠잘 때 입는 얇은 잠옷 위에 안에서 입는 덧옷을 걸쳤다. 치렁치렁한 두루마기 같은 덧옷을 여미어 허리띠를 단단히 맸다. 그 위에 다시 도톰한 내실용 장포를 입었다.
신국에서 입던 의복에 비하면 꽤 허술한 차림이었다. 이런 차림새로 밖으로 드나드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이곳 라테시온의 풍습은 상당히 자유로워 몸을 제대로 가리기만 하면 크게 관여치 않았다. 황제조차도 몸의 굴곡이 보이고 두툼한 근육이 잘 드러나는 얇은 옷을 입고 다니니.
‘오랑캐 습속을 낮잡게만 여겼더니 의외로 편한 점도 있구나.’
고국에서 배운 가르침대로 흠잡을 곳 없이 따라 신국 출신의 황후로서 제대로 살겠다는 욕심도 슬슬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온만 해도 그랬다. 내심 ‘명하온’이라고 부르곤 있으나 장차 황자 레온 라테시온으로 살아갈 터다. 고집을 버리고 적당히 누릴 건 누리면서 편하게 살자. 이런들 저런들 결국은 요정 아가르타로 살아야 할 테니.
아직 불을 밝히지 않아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었다. 고운 가죽으로 만든 내실화 덕분에 폭신한 양탄자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부러 몸가짐을 해하고 턱턱 소리를 내보려 했다. 타고난 발걸음을 바꿀 순 없는지 사뿐사뿐할 뿐이다.
[카론처럼 말굽처럼 딱딱한 밑창을 대야 하나.]
딱딱하고 흉한 소 발굽 같은 걸 달면 쿵쿵 울릴 텐데. 그러면 당당히 들이치는 기척에 흠칫 놀랄 텐데.
황제의 침전에 이르자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이 벌떡 일어서 절하였다. 대신 문을 열려는 그를 손짓으로 말렸다. 남의 손을 빌리는 대신에 카론처럼 직접 문을 열었다.
익숙한 처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로 작은 내실이 나왔다. 양편에 큰 문이 있어 잠시 망설이자 시종이 눈치껏 오른쪽을 가리켰다.
이번 문도 활짝 열었다. 또 내실이 나왔는데 아까보다 작았다. 화려한 벽과 천장에 그려진 화려한 그림, 기둥을 휘감은 금빛 조각과 붉은 깔개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가구도 없었다. 참으로 삭막했다.
안으로 난 흰 바탕에 금박 장식을 단 문은 외짝이었다. 문고리를 잡고 잠시 숨을 고른 다음 활짝 열었다.
황제의 침실은 제가 쓰는 것과 크기와 모양새는 유사했다. 다른 점은 빛을 가리는 두꺼운 커튼이 내려져 있고 반쯤 어두컴컴한 공간은 휑한 점이었다. 물론 거대한 침대는 있으나 다른 장식과 가구는 보이지 않았다.
창가와 침대 사이 넓은 공간에 장식을 절제한 목제 탁자가 있고 딱딱해 보이는 나무 의자 두 개가 있었다. 한쪽엔 황제를 뜻하는 금색 줄 장식을 주렁주렁 단 커다란 덧옷이, 다른 쪽에는 그 주인이 걸쳐져 있었다.
반쯤 몸을 돌려 창가를 향한 채 긴 다리를 쭉 뻗은 그는 탁자 위에 있는 크고 두꺼운 병을 들어 투명한 잔 위로 기울였다. 졸졸 흘러나오는 액체는 그윽한 향이 풍겼다. 척 맡기에도 독주였다.
물 위를 걷는 소금쟁이처럼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어쩐지 음울함이 감돌았다. 제 앞에서는 방긋 웃기도 잘하더니 혼자 있을 때는 귀신처럼 이렇게 시간을 보냈는가. 호기심으로 괜한 말을 붙여볼 상황이 아니었다. 돌아갈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냉기 풀풀 나는 저음이 들렸다.
“혼자 있고 싶으니 얼른 불 켜고 꺼져. 아니 불도 켜지 말고 꺼지든가.”
오늘 말이 곱지 않으니 가는 말도 고울 리 없다. 나가려던 마음을 접고 톡 쏘아붙였다.
“나도 그래야 합니까?”
목소리를 들려주자마자 놈이 벌떡 일어섰다. 막 들었던 술잔을 급하게 탁자에 놓는 바람에 가득 따른 술이 찰랑이며 넘쳤다. 독한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아가르타……?”
짙은 그늘에 반쯤 잠긴 안면에 당혹감이 서렸다. 오늘따라 신기하게도 당황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었다.
“여기까지 네가 웬일이지?”
“황후가 황제의 침소를 찾는 것이 이상합니까?”
딱딱한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고국 풍습에 따르면 황제의 침전은 가장 엄숙하고 귀한 곳이라 제아무리 황후라 할지라도 허락 없이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다. 아까부터 계속 떠올리고 또 떠올리듯이 여긴 라테시온이었다.
“처음 있는 일이라. 미리 알렸으면 정중하게 맞았을 텐데.”
“정중하지 않아도 됩니다.”
천천히 다가가 맞은 자리에 섰다.
“라테시온의 술입니까.”
“보리로 만든 증류주야. 윌로우라고 하지.”
고운 빛깔이 제법 흥미가 돋았다.
“나도 마십니다.”
권하지도 않은 자리에 풀썩 앉아 한 잔 청했다. 그러자 카론이 묘한 눈빛을 했다.
“술을? 네가?”
“라테시온에서는 황후는 술을 마시면 안 됩니까?”
“……그렇진 않아.”
한쪽 벽에 잡아당겨 궁인을 부르는 줄이 있어 카론이 기척을 하자 밖에 있던 시종이 금방 들어왔다.
“잔을 하나 더 가지고 와.”
명을 받은 시종은 금방 잔을 가지고 오면서 벽에 달린 등불도 켰다. 무슨 장치를 한 지는 몰라도 동그란 못을 돌린 후 불을 붙인 심지를 가져다 대면 위가 뚫린 유리병 안에서 화촉이 밤새 타올랐다. 그 덕에 황궁은 밤에도 환했다.
“밝군요.”
밝은 밤에 익숙해진 중에도 이곳의 밝기는 남달랐다. 어림잡아도 벽면의 등불이 제 방보다 두 배는 되었다.
“밤에 어두운 걸 좋아하지 않아. 혼자 잘 때는 환하게 밝히는 편이야.”
쪼르륵.
카론은 손수 술을 따랐다. 등불 탓인지 혹은 속에 담긴 호박색 술 때문인지 복잡하게 음각된 유리잔이 금색으로 반짝였다. 황제가 친히 하사한 잔을 들어 한 번에 훌렁 털어 넣으려 했다.
“아니 잠깐!”
기겁한 상대가 얼른 잔을 잡았다. 흔들리는 바람에 술을 흘려 입가를 소매로 닦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더럽게.
눈살을 찌푸리며 무언으로 영문을 묻자 카론이 기가 찬 듯 헛숨을 뱉었다.
“이게 얼마나 독한 줄 알아?”
“그래서 한 모금만 주었잖아요.”
가득 따른 놈의 잔과 달리 분홍이의 잔은 바닥만 살짝 적실만큼 술이 적었다.
“원래 아주 조금씩 혀만 적셔 마시는 거라고.”
“그러면 폐하의 잔은 왜 가득합니까?”
“그야 나는 술에 강하니까 그렇지.”
카론은 다시 시종을 불러 찬물을 가져오게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분홍이 잔에 물을 타려 들었다. 이번엔 제가 얼른 두 손으로 잔을 막았다. 손등에 찬물이 조르륵 흘렀다.
“황제가 마시는 귀한 술에 물을 타다니요?”
“황제가 마시면 뭐가 달라지나? 독하니 희석해서 마셔.”
“싫습니다.”
콧방귀를 뀐 분홍이는 보란 듯이 홀라당 마셨다. 뜨끈하고 화한 액체가 입천장부터 목젖을 지나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흐르는 느낌이 생생했다.
“맛이 좋습니다.”
이번에는 직접 병을 잡아 잔을 반쯤 채웠다. 파란 도깨비 눈이 화등잔만 해지더니 이내 가늘어졌다. 얼굴에 바로 내리꽂히는 시선의 따가움을 씻으려 윌로우라는 술을 다시 한 모금 꿀꺽 마셨다.
“술을 좋아하나?”
“예. 고국에서 누님이 [소주]를 가르치셨지요.”
“의외로군.”
그제야 자리에 앉은 카론은 가득 찬 잔을 조금 비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누나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활을 가르쳐 주었다고.”
“예. 활도, 술도, 말 타는 법도 누님에게 배웠습니다.”
“기마도? 누나는 기사인가?”
“[대장군]. 황제 바로 아래 있는, 기사 중 기사입니다. 많은 병사와 기사가 누님을 따릅니다.”
자랑스럽게 설명을 늘어놓자 카론이 조용히 읊조렸다.
“베로니카 정도 되나 보군.”
“[대장군] 입니까?”
“그래. 기사 중의 기사. 내게 무슨 일이 발생하면 베로니카가 임시로 기사단과 군에 관한 전권을 가진다.”
황제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면 응당 온이 황위를 잇고 자신이 수렴청정하여 제국을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베로니카라는 자가 있다니. 금시초문이었다.
“그런 중요한 사람을 저는 본 일이 없습니다.”
“약혼식 때 봤잖아. 결혼 증인으로도 나섰고.”
“기억나지 않습니다. 황궁에 없으니까요.”
“평소에 함께 있다가 동시에 적에게 당하면 곤란하기에 웬만해선 한 곳에 같이 있지 않아. 네가 정궁으로 옮긴 후로 들른 적이 없긴 해.”
숨겨 둔 여인인가? 후궁이 없다고 하더니! 총애하는 자가 따로 있어? 그러고도 나를 좋아해서 살렸다고? 마그네. 네 착각이다. 이 개만도 못한 놈은 애초에 저를 사람으로도 생각지 않았다. 온이 생기지 않았다면 차가운 냉궁에서 외로움에 사무쳐 죽었겠지. 절로 치가 떨렸다.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서의 저택. 엘러 백작 부인이시거든. 그렇게 대단한 여자가 뭐하러 그런 얼간이와 결혼한 건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어.”
아서의 부인이라는 말에 더욱 놀라는 한편 고소하기도 했다.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격이니. 조소를 머금은 입술을 술잔으로 가렸다.
“베로니카가 아서와 결혼하여 실망하였군요.”
“조금. 다른 남자면 몰라도 아서 엘러?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경박해. 좀 더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쪽이 좋지 않나. 베로니카라면 더 대단한 상대를 잡을 수도 있는데 말이지.”
“폐하와 같은 사람 말입니까?”
“맞아. 전에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어. 베로니카만 한 적격자는 없으니까 말이야. 블라드 자작의 사생아라는 흠이 있지만, 나도 사생아니 그걸 꼬투리 잡을 이유가 없지.”
“베로니카 같은 훌륭한 사람을 두고 출신도 모르고 말도 안 통하는 요정을 황후로 맞아서 크게 곤란하셨겠습니다.”
저절로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둔다고 해서 그게 하필이면 수하의 부인이라고 해서 새삼 질투가 날 이유가 없다. 다만 그런 얘기를 황후 면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태도가 탐탁지 않았다. 저를 얼마나 허투루 보았으면. 할 말, 못할 말을 가리지도 않는다.
이게 올바른 부군의 행태인가? 아무리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해 급히 황후로 맞았기로서니. 이렇게 무심할 수가 있나. 아니 무심하니 이럴 수 있겠지.
‘이런 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어림도 없지. 마그네, 그건 네 착각이다. 철저한 착각이야.’
부아가 치밀어 남은 술을 홀라당 비우고 이번엔 못난 황제 놈처럼 잔을 가득 채웠다.
“천천히 마셔. 술을 즐긴다고 해도 오랜만에 마시는 거잖아. 금방 취할 거야.”
“취한다고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회복한 지 얼마 안 지났잖아.”
“오전에는 활도 당겼습니다. 후에는 폐하와 크게 다투기도 했지요. 술을 마실 힘도 있습니다.”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말리던 자는 이내 침묵했다. 따른 술을 꿀꺽꿀꺽 두 모금 마시고 입을 닦았다. 저 아래 위장에서 올라오는 화끈한 술기운이 식도와 기도를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더운 숨으로 샜다.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졌는지 모르겠군.”
“안 나쁩니다.”
부정하였으나 카론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사실 그건 제가 할 말이었다. 카론이 뭐가 성질이 돋아서 야밤에 자작(自酌)이나 하며 청승을 떠느냔 말이다. 정작 술은 수시로 괴롭힘당하고 무시당하는 분홍이가 마셔야 했다.
“아까도 그렇고 말이야.”
탁자에 바로 앉은 분홍이와 달리 그는 긴 다리를 포개 옆으로 쭉 뻗으며 삐딱하게 앉았다. 그러면서 큰 손으로 반쯤 빈 잔을 게으르게 매만졌다.
“너는 너무 어려워.”
“알려 하지 않으니 어렵지요.”
“알려고 해도 알려 주지 않잖아.”
“제대로 알려고 했습니까?”
“방식이 잘못되었다면 제대로 설명을 해 줘.”
“내가 왜요?”
잔을 보던 시선이 분홍이를 향했다. 심보를 고쳐먹었기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냉혹한 눈을 똑바로 봐도 아무렇지 않았다. 도리어 입꼬리가 들썩였다.
“내 소개를 했습니다. 아버지 이름과 직위를 대고 나는 누구다 목이 터지라고 외쳤습니다. 후에 돌아온 것이 손바닥을 찌르는 칼날, 뺨을 후려치는 손찌검입니다.”
새파랗게 빛나던 눈동자가 한결 풀이 죽었다.
“그다음엔 강제로 당했습니다. 강제로 다리를 벌리고 뭉개는 것을 이곳 말로 뭐라고 하지요? 마그네가 가르쳐 주지 않아서 답답합니다. 폐하는 자주 했으니 그걸 뭐라 이르는지 알지요? 가르쳐 주세요.”
“…….”
“폐하께서 말씀하지 않으면 다른 자에게 물어보지요.”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을 부르는 줄을 당기려 했다.
“강간.”
성대가 거친 모래에 벅벅 긁힌 듯이 낮고 갈라진 음성이 울려 퍼졌다.
“가간?”
“강간. 내가 너를 강간했다.”
“강간. 아, 바른말을 알게 되니 이제 속이 시원하군요. 예, 폐하는 나를 강간했어요.”
싱긋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움직였다고 몸이 더웠다. 걸쳤던 덧옷을 벗어 바닥에 떨구었다. 얇은 침의만 남았으나 다정하고 다정하신 부군 앞이니 뭐 어떠하랴. 혹여 꾸짖더라도 오랑캐 습속을 잘 몰랐다 변명하면 그만이었다.
“강간하고 때리고 강간하고 때리고. 나는 죽으려고 목을 달고도 죽지 못한 바보입니다. 웬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를 꺾었지요. 후에도 강간을 당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벽에 머리를 박았을 텐데.”
“…….”
“그 덕에 온을 낳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말이 끝나자마자 카론은 남은 술잔을 훌렁 비웠다. 그리고 다시 가득 따랐다. 그것도 단숨에 비운 후에 그는 빈 잔을 탁 놓았다.
“누군가에게 증오받는 건 이런 기분이었어. 오랜만에 느껴 보는군. 익숙한 감각인데 왜 잊고 있었을까.”
“오랜만에 아닐 텐데요. 황제 폐하에게 짓밟힌 자들이 많습니다.”
“황제가 된 이후로 직접적으로 독설을 들은 적은 없었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입을 열기도 전에 바로 목을 베었거든.”
수시로 협박을 받았더니 이젠 이력이 났다. 두려움이 들지도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죽이든지요. 온은 마그네와 올리아가 키울 수 있을 겁니다. 반은 요정이지만 반은 인간이니까요.”
“내가 그럴 수 없는 걸 알면서 일부러 도발하는군.”
“일부러 그러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제 목을 베고 베로니카를 데려와 황후로 삼으세요.”
“베로니카 따위…… 열 명이 있다고 해도 이젠 너와는 바꾸지 않아.”
또 무슨 망발을 하려고? 방금 베로니카가 좋다고 하지 않았나. 변덕이 죽 끓듯 하였다. 그래도 연유가 궁금하긴 했다.
“왜요?”
“왜긴. 내 요정 황후를 다른 것과 바꿀 마음은 없다.”
진의가 무엇인지 선뜻 와닿지 않았다. 카론이 종종 그러하듯 분홍이도 눈을 들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냥 제가 좋다는 건가, 아니면 진귀해서 가까이 두겠다는 것인가. 진귀한 걸 좋아하나. 아니면 온을 낳았으니 함께 곁에 둔다는 뜻인가. 알쏭달쏭했다.
“쉽게 놓아줄 거였으면 이런 귀찮은 노력 따위는 안 해.”
“내가 귀찮습니까?”
“가끔은.”
이건 정말로 기대하지 못한 답이라 절로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귀찮다고 했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괜히 찾아와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이런 인간 말종을 상대로 말을 건 제가 어리석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놈은 그런 분홍이를 말리지 않았다.
“귀찮게 해서 미안합니다.”
갈라지는 음성 뒤에서부터 날아와 돌아선 발걸음을 잡았다.
“넌 날 용서할 생각이 없어, 그렇지? 만약 마녀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내게 자상하게 대한다면 역겨움만 더할 테니 말이야.”
문고리를 잡은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대한 인영이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시커멓게 가라앉은 안구에선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것을 압니까? 내가 용서를 해야 하나요?”
“그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네게 많은 것을 허락했어. 황궁이나 황후 자리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야. 물론 레온 얘기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허락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리는 동안 놈은 천천히 다가왔다.
“마녀 얘기를 내 입으로 한 건…… 네가 처음이었다. 내 손으로 찢어 죽인 그자 얘기도 말이야. 그만큼 너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원한 적 없다. 개종자의 처참한 어린 시절 이야기 따위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오히려 더러운 성미를 변명하는 투라 열불만 터졌다.
개종자의 안색이 굳었다. 제 딴에는 대단히 어려운 비밀을 털어놓은 모양이었다. 악랄한 놈이 다른 이에게 받은 핍박을 털어놓는다고 해서 동정이라도 살 줄 알았나. 하얗게 굳은 놈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곱지 않은 심부가 또 뒤틀렸나. 놈의 목소리가 한층 냉랭했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다면, 뭐 하러 나를 드러내 보이며 노력을 한 건지 알 수 없군.”
곁에 선 그는 검지로 분홍이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고개를 돌려 빼려 하자 커다란 손이 펼쳐지면서 턱 전체를 거머쥐었다. 누가 그런 노력을 하랬다고. 원치도 않은 걸 떠넘기고 감사하라는 꼴이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추구하지 않는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힘으로 쟁취하는 쪽이 성미에 더 맞거든.”
“늘 빼앗았잖아요.”
눈에 힘을 주며 반발했다. 턱을 쥔 손목을 두 손으로 잡아떼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권력과 체력. 모두 당해 낼 수 없다.
“빼앗은 만큼 누리는 것도 있지. 모르겠나? 네가 누리는 호화로운 생활은 내 너그러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 거 바라지 않아. 가져가.”
“그래? 그럼 당장 황궁에서 나가겠다는 건가.”
“그래. 당장 나가고 싶어.”
진심이었다. 호화로운 생활 따위. 전혀 원하지 않는다. 악독한 개종자 놈에 걸려서 두들겨 맞고 칼도 맞고 겁간까지 당했음에도 멀쩡히 살아 있지 않은가. 어디서든 어떻게든 이보다는 더 잘 살 자신이 있다. 온이만 있다면 어디든 무섭지 않다.
“아픈 몸으로도 반쯤 미쳐서 날뛰기에 매우 집착하는 줄 알았더니.”
냉엄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턱을 잡은 아귀힘이 너무 세서 얼굴 반절의 감각이 둔해졌다. 입술이 떨리고 숨이 잦아들었다.
“레온은 내게 속한다. 알고 있지?”
날카로운 창이 정수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전신을 꿰뚫었다.
“어…… 어떻게 그런.”
“레온 아가르타 라테시온. 내 유일한 자식이자 차기 황제를 순순히 내줄 줄 알았나? 너 따위가 뭐라고. 요정, 요정 하니 정말로 네가 요정인 줄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출신이 불분명한 이국인에 불과해. 아니 그보다 더 나쁘지. 황후 자리에 쫓아내자마자 그간 네가 쓰고 먹은 것을 회수하기 위해 노예 상인에게 팔아 버릴 셈이니.”
온을 거론하는 말에 분홍이는 그를 노려보았다.
사람이 어찌 변하나 하였더니 역시 카론은 이전과 똑같았다. 빼앗고 짓밟고 사람의 마음 한 자락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싸늘하게 대꾸하는 음성에는 절로 귀기가 서렸다.
[이 천하에 빌어먹을 나쁜 놈. 그게 뚫린 입으로 할 말이냐.]
장난으로라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은 낯을 보며 서서히 분노가 일었다. 눈빛이 검이 된다면 벌써 놈의 전신을 난도질하고도 남았다.
핏발이 선 눈을 마주하고도 놈은 싸늘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온을 원하나?”
“내 아기야…… 내가 낳은…… 내 아기.”
“원한다면 지금처럼 레온을 기르게 해 주지. 더불어 황후로서 누리던 호사와 권리를 계속 지녀도 좋다. 하지만 이 너그러움은 공짜가 아니야. 그러니 대가를 치러라.”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저를 붙잡은 작자는 원하는 바 대로 이룰 능력이 있다. 온이 하나만을 바라보며 지금까지 버텼다. 채 길러보기도 전에 유일한 희망을 잃을 순 없다.
“대가?”
“처음부터 그랬듯이, 지금도 네게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다.”
칼날과 같은 시선으로 카론은 요구했다.
“요정 황후로서 의무를 다해라.”
* * *
늦은 밤이고 황제의 침전이었다. 황후의 의무를 운운하기에 즉시 겁간을 당할 줄 예상했다. 하지만 성난 오랑캐 놈은 그러질 않았다. 오히려 벗어 두었던 덧옷을 사납게 안겼다. 후에 도로 제 자리에 가서 무너지듯 앉았다.
쪼르륵.
가득 채운 술이 놈의 목구멍으로 훌훌 넘어가는 것을 멍하니 보던 분홍이는 뭉친 옷가지를 보듬어 않았다. 정말로 기이했다.
“……강간하지 않아요?”
빈 잔을 든 손으로 입가를 슬쩍 문지르던 놈이 독주로 인해 일그러진 눈을 들었다.
“내가? 왜?”
“그야.”
“요정국에선 황후가 황제에게 강간당할 의무도 있나?”
굳이 따지자면 그랬다. 황제가 원하면 몸이 아프지 않은 이상 응해야 했다. 물론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도 아예 하지 못할 정도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자 카론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들으면 들을수록 대단하신 요정국이로군.”
깔보는 언행이 매우 불쾌했으나, 이것만큼은 고국을 비호하기 어려웠다.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원하면 못 쑤셔 줄 것도 없지.”
품은 덧옷을 확 구기며 놈을 노려봤다. 눈에 불똥이 튀었다.
“대단하신 요정 황후 폐하께 손을 대었다가 강간범이 될 뿐이거든. 그런 비난을 계속 감수할 만큼 비쩍 마른 사내놈에 대한 흥미가 대단하진 않아. 난 원래 육감적인 여자가 취향이야. 육감적이란 건 나올 곳이 나오고 들어갈 곳이 들어간 걸 말해.”
비쩍 마른 사내놈. 이런 식의 비난은 또 생소했다. 풍만한 여인에 비하면 당연히 딱딱하고 볼품은 없었다. 그래도 귀한 음인이기에, 영민하고 건강한 후대를 잉태할 가능성이 큰 음인이기에, 늘 고이 대접받았다.
음인으로 태어나서 잘못이 아니라 음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오랑캐 세상에 오게 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인데. 그마저도 제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다. 콧잔등이 괜히 시큰거렸다.
우물쭈물하자 놈이 다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때리려나 싶어서 움찔하는 사이 놈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앗!”
카론은 덧옷을 채 입지 못한 분홍이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보폭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해 반쯤 달리듯 끌려갔다.
황제의 침전을 아예 나오자 문 앞을 지키던 시종이 황급히 절을 했다.
“폐하?”
시종의 부름을 깡그리 무시한 카론은 계속 걸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 황망한 시선이 분홍이와 닿았다. 황망하긴 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짓이냐고 항의할 새도 없이, 카론이 향한 것은 황후의 침전이었다.
“폐하.”
침의 위에 내실용 덧옷을 입은 마그네가 깜짝 놀라 굳었다. 말없이 쏘아보는 카론과 그에게 끌려온 분홍이를 본 그가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였다.
“레온은?”
“방금 젖을 드시고 주무십니다.”
“그래?”
무심하게 답한 카론은 잡고 있던 분홍을 마그네 쪽으로 휙 밀었다.
“앞으로 오전은 자유 시간이야. 대신 오후 산책과 석찬은 반드시 나와 같이할 것. 그때 황궁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레온이 어떻게 크고 있는지 자세하게 보고해.”
“…….”
“다른 의무는 생각나는 대로 알려 주지. 앞으로 내 침전에 오려거든 미리 약속을 잡아. 알겠나?”
“……예, 폐하.”
대답을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의연하게 굴었으나 덧옷을 붙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그네.”
“예, 폐하.”
눈치를 보던 시녀장이 황제의 부름에 무릎을 굽혔다.
“앞으로 황후 폐하는 철저히 라테시온 사람이 되신다. 그러니 알아서 잘 모셔라. 일단 저 괴상한 옷부터 라테시온 복식으로 바꿔.”
“예? 예.”
고국의 흔적을 깡그리 지우라는 명이었다. 무엇보다 잔인한 형벌이었다. 지금껏 분홍이를 지탱한 것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이국의 괴이쩍은 풍습도 일일이 고국을 빗대어 손가락질하기도 혹은 낮잡아 보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선 라테시온에서 당한 수모로 인한 분노와 절망을 견딜 재간이 없었다.
카론에 대한 복수로 온을 어엿한 신국인으로서 기르겠다는 남모를 야망도 품었다. 그것을 어찌 간파했는지, 카론은 분홍이의 가장 큰 열망을 단숨에 꺾어 버렸다.
“어떻게 그런,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닙니다.”
“하. 너는 내가 요정으로 인정할 때만 요정이야. 그릇된 착각부터 깨.”
잔혹한 현실이 분홍이의 폐부를 푹 찔렀다.
쾅.
카론이 밀친 문이 벽에 닿으면서 크게 울렸다. 화들짝 놀란 궁인이 우르르 몰려들 법도 한데 사방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마그네는 황급히 문을 걸어 잠갔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걱정스레 물어오는 자상함에 그렇지 않아도 시큰거리던 콧등이 한층 찡해졌다.
“괜찮아. 별일 아니…….”
아아아앙.
가냘픈 아기 울음이 귀에 닿았다. 안고 있던 덧옷을 마그네에게 떠안기며 쓰러질 듯 다급히 침실로 달려갔다. 아비의 거친 행동이 부른 큰 소음에 놀랐는지 온이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놀랐구나. 이제 괜찮다. 이게 괜찮아.”
경기하듯 우는 아이에게 괜찮다고 어르고 또 얼렀다. 동시에 스스로 되뇌는 말이기도 했다.
앞으로 너그러움을 기대하지 말고, 황후로서 소임을 다하라고 명한 카론은 분홍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주 원래대로 돌아가진 않겠다는 건가?’
의중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요정이 아니면 이제 사람으로 대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뭘 어쩌겠다는 건지. 무서운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려거든 내일 산책 시간이 되어 봐야 했다.
놀라서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이 그때까지는 제 박자를 찾아가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