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1) (12/28)

3. (1)

마그네와 올리아가 요정과 아이를 돌보면서 잠깐 자리를 동시에 비울 때면 아이를 지켜볼 사람이 카론뿐이었다. 그 때문에 잠깐 바람을 쐬는 시간도 없애고 정무 또한 대폭 줄였다. 아주 급한 것만 아이를 보면서 방에서 처리했다.

“사람을 더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렌의 건의에 카론은 고개를 저었다.

“요정은 100일간 황궁을 봉하기로 하고 아기는 나와, 마그네, 올리아만 허락한다고 했다. 요정이 아프다고 해서 그의 결정을 번복하진 않는다. 당장 반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괜찮아.”

드나드는 사람이 항상 많은 황궁이다. 그들 모두를 금할 수는 없으니 내궁의 출입은 엄격히 제한하고 대신들을 만날 일이 있으면 카론이 직접 외궁으로 향했다. 일반 정무는 침전 응접실에 마련한 간이 책상에서 보았다. 아기가 있는 침실과의 연결문이 열어두기 때문에, 응접실에도 시종을 들일 수 없었다. 대신 확인한 문서는 카론이 직접 문 앞의 시종에게 넘겼다.

하루에 한 번, 요정의 건강 상태도 그가 직접 확인했다. 카론이 나타나면 요정은 다소 무리하게 수프를 마시기도 하고 일부러 굳센 척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체하고, 바로 지쳐 버렸다. 때로는 침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지려고 해서 카론이 안아서 침대에 앉히기도 했다.

“무리하면 몸만 더 상한다.”

며칠만이라도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더 나을 것을, 아무리 경고해도 요정은 그러질 못했다. 그래도 건강이 더욱 나빠지는 일은 없었다. 마그네의 헌신적인 간호와 올리아의 약이 제 몫을 했다. 그러나 카론은 두 장이나 먹인 꽃잎의 효과로 여겼다.

미리 준비한 산양 젖을 배부르게 먹고 기저귀도 간 아이는 황제가 손수 흔드는 요람에 얌전히 누워 있었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작은 옷을 입은 아기의 작은 몸은 무슨 번데기처럼 천으로 둘둘 말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도톰한 아기 이불도 덮었다. 포근한지 작은 입으로 연신 하품을 하더니 이내 잠에 빠졌다.

“태평스러운 성미는 요정을 닮았군.”

하루가 다르게 붉은 낯빛이 사라지고 하얀 뺨이 오동통해지는 아기를 보고 있자면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심장과 폐가 만나는 언저리에 거품이 이는 느낌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혼자서 웃고 있기도 했다. 혼자서 바쁜 요정을 느긋이 지켜볼 때와 비슷했다. 아무래도 요정의 아이기 때문이리라.

한 가지 다른 점은 요정은 거리낌 없이 만질 수 있는데 아기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생명체에 제 손이 닿았다가 이상한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마녀의 피가 이상한 방식으로 더 짙어지지 않을까? 혹여 제가 곁에 있는 자체가 황자에게 불미스러운 기운을 끼칠지도 모른다.

첫날에는 너무 경황이 없어서 깜빡했던 이후로 소금 목욕을 수시로 하는데도 손가락 하나 아이에게 대기 어려웠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곤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명확한 근거가 없지만 그래도 상당히 그럴싸한 우려가 깊어졌다. 카론은 결국 요정의 황금꽃을 가져와 황자의 곁에 두었다. 아픈 요정을 대신해 황자의 곁을 지키는 꽃은 비록 꽃잎 두 장이 없어도 여전히 풍성하고 밝았다.

요람 주변에는 아기용품이 가득 찬 수레가 있었다. 기저귀, 젖병, 손수건, 전용 수건, 옷, 전용 베개와 이불 등등 물품이 많았다. 게다가 하나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아기용품은 하루에도 몇 개씩 새로 써야 해서 여러 개를 쌓아 두었다.

아이가 생기고 태어나는 것만 알았지 많은 준비가 필요한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올리아는 요정식 육아가 라테시온식과 달리 유달리 세심하다고 평했다.

산양 젖만 해도 그렇다. 요정이 직접 우유나 염소젖, 그 외에 다양한 짐승의 젖을 여러모로 살핀 후에 특정 산양의 젖이 가장 알맞다 하여 그것으로 정했다. 얼마나 아이를 고대했는지 엿보였다. 태어나지도 않은 시절부터 아이를 얼마나 아끼는지도.

“요정은 이런 식으로 길러지는 건가.”

순진무구한 흰 이불 속에서 새근새근 자는 아기를 보자니, 요정과 자신의 근본적 차이가 새삼 와닿았다.

요정은 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제 손톱으로도 상처 입히지 못하게 하찮은 장갑을 끼울 만큼 소중히 길러졌다. 자라면서는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을 터.

“네 요정 모친이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레온.”

아직은 어색한 아들의 이름을 속삭였다. 비록 요정만큼 잘 돌보진 못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레온에게 상처를 입히면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 죽일 의사와 능력은 충분하다. 함부로 만지기도 무서운 여린 피부에 작은 생채기만 내도 혈족은 물론, 그 일대를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많이 닮았어.”

갓 태어난 주제에 은근히 요정을 닮았다. 까만 머리카락부터 동그랗게 솟아오른 이마며, 앙증맞은 코와 입, 순진하게 그려진 눈썹까지.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요정도 저렇게 무구했다. 분명히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도 모를 터다. 그런 요정이 아이의 항문을 건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을 게 분명하다. 신경 쇠약을 더욱 가중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요정에게 몸이 나으면 아이들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카론은 그게 맞는 처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고민이 점점 깊어갈 무렵, 요정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영양제를 복용하며 식욕도 늘었고 몸에 활기도 생겼다. 혈색도 거의 원래대로 돌아왔다. 찬바람이 도는 바깥으로 외출은 무리여도 궁내를 가볍게 걸어 다니는 정도는 거뜬했다.

“침실에 갇혀 요양을 계속한다고 해서 건강해지지 않습니다. 특별하게 무리만 하지 않는다면 평소처럼 생활하는 편이 건강 회복엔 더 좋아요.”

올리아가 먼저 카론에게 황후의 회복을 알렸다.

“벌써?”

약속한 지 겨우 닷새 지났다.

“아기를 직접 보시겠다는 의지가 강합니다. 제 소견으로는 아기님을 가까이하는 편이 황후 폐하의 완전한 회복에 좋다고 봅니다.”

다 나으면 아이를 보게 해 주겠다는 약속은 올리아도 이미 아는 눈치였다. 아니 매번 진찰할 때마다 꼼꼼히 결과를 물어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을 테니 모르는 쪽이 이상했다.

“알았다.”

카론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그네가 들어왔다. 처음부터 레온을 데려갈 생각으로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마그네가 서둘러 레온에게 손을 뻗을 무렵, 카론이 끼어들어 저지했다.

“내가 직접 데려가겠다.”

황후에게 충실한 시녀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지난번과 같은 갑작스러운 상황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자신이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카론은 두툼한 아기 이불로 둘둘 말아 놓은 레온을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약간 불편한지 작은 이목구비가 움찔움찔 움직였다.

“괜찮다.”

전에 황후가 찡그리는 아기를 달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카론은 손으로 아기를 가볍게 토닥였다. 황제의 오른쪽 팔뚝 하나를 요람으로 삼은 황자는 잠에 빠지는 대신 실눈을 떴다.

아직 황자의 눈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눈을 맞추는 즐거움은 아무래도 요정과 함께 나누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초조한 듯 흐렸던 안색이 해바라기처럼 화사하게 만개했다.

“온.”

서둘러 다가온 요정은 카론에게는 아는 척도 없이 우선 아이부터 받아 들었다. 아니 반쯤 빼앗아 갔다. 실랑이할 생각이 없으므로 일단 순순히 넘겨주었다. 대신에 카론은 얼른 뒤돌아서서 침실로 향하는 요정의 뒤를 바짝 쫓았다. 카론의 뒤로 마그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지만 막아서고 문을 닫아 잠금쇠까지 걸어 버렸다.

아이에게 정신이 팔린 요정이 문이 닫힌 줄도 모르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가를 움찔거리는 아기의 이마에 뺨을 대고 살살 문지르면서 함박웃음을 지었다.

전염성이 강한 미소였다. 아직도 이 상황이 옳은 건지 아닌지 확신하지 못해 다소 굳어 있던 카론의 입매도 슬그머니 풀어졌다.

“온아.”

요정은 레온을 신기한 방식으로 불렀다. 요정식 호칭은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우나, 발성만큼은 대단히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오나.’

귀여운 아기에게 딱 어울리는 애칭이었다. 속으로 요정식 발음을 연습하며 카론은 요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오랫동안 아이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요정은 아이가 얼굴을 찡그릴 때쯤 침실에 있는 사람이 카론뿐임을 눈치챘다. 밤하늘 빛 눈동자에 경계심이 언뜻 지나갔다.

“마그네를 부릅니다.”

“내 아이와 황후와 보내는 시간을 방해받기 싫어.”

“기저귀를 확인합니다. 젖도 먹여야 합니다.”

“해.”

준비물은 황후의 침실에 이미 가득했다. 카론의 침실에 있던 것과 같은 아기용품으로 가득 찬 수레가 손닿을 거리에 있었다. 구석에 있는 작은 화로 위에 올린 주전자에선 더운 김이 올라왔으며 따로 깨끗한 물이 가득한 큰 주전자와 빈 그릇도 선반에 놓여 있다. 심지어 처음 보는 아기 요람도 있었다.

미간을 찡그린 요정은 아기를 안은 채로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요람에 눕힌 뒤 꼬물거리는 아기를 감싼 천을 풀어내는 걸 보고 카론은 큰 그릇에 온수와 냉수를 적절히 섞었다.

따뜻한 물과 함께 수레에서 새 기저귀를 하나 집어 가져가자 요정이 상당히 놀란 눈치로 카론을 봤다. 마치 왜 이렇게 자연스럽고 능숙하냐고 묻는 듯했다.

“밤늦은 시간에 황제의 침실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밤 동안은 내가 레온에게 준비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았다.”

“폐하가? ……몰랐습니다.”

유달리 떨떠름한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그네, 올리아, 그리고 친부인 카론. 요정을 제외하곤 셋만 만질 수 있다고 정한 사람이 바로 요정이었다. 다른 둘이 아이를 돌보지 못할 때는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사소한 의문은 뒷전으로 미루었다. 그보다는 요정의 움직임이 신경 쓰였다.

하얀 손이 작은 발을 꼭 잡았다가 놓았다. 은은한 미소가 감도는 표정에서는 이상한 낌새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전히 제정신으로 돌아왔을까? 하지만 긴장을 늦추기엔 아직 일렀다.

끈으로 고정해 놓은 기저귀를 뺀 요정은 작은 엉덩이를 구석구석 살폈다. 금방이라도 또 무슨 짓을 할 것 같아 진정하기 어려웠다. 결정적 순간이 오면 늦지 않을까. 생전 처음 겪는 큰 초조함을 해결하지 못한 카론은 결국 마른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이후로는 내가 하지.”

방해받은 요정은 표정을 구겼다.

“내가 키웁니다. 폐하가 약속했습니다.”

“그전에 이상한 짓을 하면 황후에게 주었던 전권을 박탈하겠다는 단서도 달았지.”

카론은 정말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놈이 별안간 왜 이러는지 분홍이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이상한 짓이라니? 제가 무슨 짓을 한단 말인가. 기저귀를 갈기 전에 여린 살이 짓무르진 않았나 살폈을 뿐인데.

“이상한 짓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크게 탄성을 터트린 카론은 분홍이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앗.”

그 바람에 몸이 카론 쪽으로 크게 쏠렸고, 얼굴이 가까워졌다.

“온이 위로 쓰러지면 어쩌려고?”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자 핏발 선 도깨비 눈이 다가왔다. 뭐가 그리도 열불이 터지는지 그는 어금니를 갈면서 낮게 읊조렸다.

“이상한 짓을 안 해? 네가? 그건 요정식으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인가?”

“나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편리하게도 이것도 기억이 사라졌나 보지?”

싸늘한 음성이 비꼬았다.

“태어난 날. 네가 새끼손가락으로 네 자식의 항문을 더듬었잖아. 엉덩이에 손을 넣었어.”

항문을 더듬었다고 말하는 음성은 얼마나 억눌렸는지 거의 씹어 삼키듯 일그러졌다. 동시에 분홍이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그건…….”

“라테시온 제국법은 아이에 대한 성적 학대를 심각한 범죄로 여기고 중형에 처한다. 그런데 황후가 황자를 건드려? 그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란한 지경에 처한 줄 알아? 그런데도 또 그런 짓을 하려고 해?”

“아…….”

분홍이는 너무 황당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눈만 껌뻑거렸다.

“어디 반론을 할 거면 해 봐.”

“이런…… 미…… 친…… 놈이.”

“뭐?”

금색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분홍이는 슬그머니 옆으로 손을 뻗었다. 아무렇게나 더듬는 손에 등받이용 딱딱한 베개가 잡혔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마자 냅다 휘둘렀다.

퍽!

꽃무늬 자수가 곱게 놓인 정사각형 베개는 황제의 안면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딱딱하지만 그래도 베개라 크게 다칠 일은 없었다. 그게 안타까워 분홍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잡힌 손목을 떨쳤다. 당장 눈에 들어온 건 가죽을 덧댄 내실화뿐이었다.

쫙! 쫙!

둘 다 황제의 뺨에 정확하게 맞았다.

“아가르타, 미쳤어?”

멍하게 앉아 있던 멍청한 오랑캐 놈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국인 중에서도 유달리 큰 키에 너른 어깨를 자랑하는 거구에서 살기에 가까운 맹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으나, 이미 눈이 뒤집힌 분홍이는 아랑곳없이 잡히는 물건을 있는 대로 던졌다.

아기 젖병. 베개. 심지어 막 갈아낸 기저귀마저 날아갔다.

“더러워! 이 더러운 벌레야! 어떻게…… 나를……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아가르타!”

“아가르타 아니야.”

씩씩대며 이번엔 아기를 씻기려고 준비한 물그릇을 잡았다.

촤악!

물이 퍼지며 황제의 머리부터 시작해 상의를 홀딱 적셨다. 이런 건 생각 못 했는지 미친 벌레 놈이 놀란 듯 눈을 흡 떴다. 그를 향해서 빈 물그릇을 마저 던졌다.

퍽.

반짝이는 법랑 그릇이 바닥을 뒹굴었다. 열불이 터져도 이렇게 터질 수가 없었다. 더러운 놈이 어떤 입에 담지도 못할 상상을 한 건지. 내장이 뚝뚝 끊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낳은 아이를 어떻게 그렇게 여길 수가! 죽을 각오도 꺾은 귀한 아이를 어떻게 분홍이 자신이!

“더럽고 멍청한 놈아, 잘 듣습니다! 나는 요정입니다. 온이도 요정입니다. 음인, 양인! 확인합니다!”

“뭐? 잉인, 앵인 확인?”

“엉덩이 안! 만집니다. 음인, 양인 확인합니다. 내가 아이 낳았습니다. 내가 합니다. 너도 못 합니다!”

사납게 추궁하던 놈이 멋으로 달린 대가리에 망치라도 맞은 양 멍하니 입을 벌렸다. 파란 허깨비 눈이 흔들리더니 이내 헛바람을 내쉬었다. 뭔가 대단히 안심한 놈은 엷게 웃으며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건가? 아…… 그…… 그럴 수도 있군. 아, 착각이라 다행…… 아니 그렇다면 말을 했어야지.”

“더러운 놈은 온이 아버지가 아닙니다. 온이는 아버지 없습니다. 당장 나가! 더러운 놈은 나가!”

분이 풀리지 않아 분홍이는 아는 이국어 중에 듣기 좋지 않은 말은 다 동원했다. 그러자 출산 전에 아이의 건강을 염려하여 미리 공부해 뒀던 단어가 우르르 쏟아졌다.

“이 물똥, 된똥, 수두, 고뿔, 오줌, 토악질, 경기, 코딱지, 다 쓴 기저귀!”

더럽고 추잡한 놈이 마구간 똥통에 빠져 똥독 올라 죽으라는 저주를 퍼부어야 하는데 말이 짧아 다 표출하기 어려웠다.

“너는 냄새 나는 말이랑 더러운 화장실에서 삽니다! 나가!”

카론을 막무가내로 쫓아냈다.

“으아아앙.”

큰 소리에 놀란 온이 울음을 터트렸다. 분홍이는 앵앵 우는 아기를 달래면서 한참 씩씩거렸다. 더 때리고 찼어야 하는데! 그런 황당무계하고 더러운 생각을 하는 오랑캐 뒤통수를 아주 세게 쥐어박아야 하는데!

놈이 물러간 후에 마그네와 올리아가 들어왔다. 고성이 오간 걸 아는 터라 둘은 분홍이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내가 자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게.”

아이를 낳은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들은 분홍이는 못난 오랑캐 놈이 시킨 대로 소금 목욕도 하지 않고 들이닥쳐 저와 아기를 만져댔다는 걸 알고 진노했다.

[이런 쳐 죽일. 더러운 놈이.]

모국어로 한참 욕을 퍼붓다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그렌을 불러오라 명했다.

“소금 아주 많이 [개종자 놈에게]…… 황제에게 전하세요.”

“예?”

황후의 명령을 받은 그렌은 영문을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면 압니다. 솔도 같이 줍니다. 더러운 바닥 벅벅 하는 솔 좋습니다.”

묵직한 소금 한 자루와 바닥 청소용 솔 한 자루가 황제의 방으로 배달되었다. 그렌으로서는 의미를 전혀 알 수 없지만, 황제는 금방 눈치챈 듯 다소 떨떠름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아가르타에게 알았다고 전해.”

“예, 폐하.”

나중에 그렌은 소금 자루와 솔이 황제 전용 욕실에 비치되었음을, 그리고 소금이 점점 줄어 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저 소금 자루가 다 비워져야 황제에게만 유독 차가운 바람이 쌩쌩 부는 골든 피오니에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건가. 감에 지나지 않지만, 어쩐지 확신이 들었다.

<3권에서 계속됩니다.>

금은화 2

골든 피오니가 가까워지는 동안 카론은 시시각각 늙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건 입구를 지키는 시종도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황제의 도착을 알렸다.

벌컥.

문을 연 건 마그네가 아니라 요정이었다.

“더러운 사람은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인사도 하기 전에 말을 우다다다 쏟아 낸 요정이 문을 바로 후려 닫았다.

쾅!

“큭!”

급하게 끼워 넣은 발이 묵직한 문 사이에 끼었다. 실내에서 신는 양가죽 실내화는 평소 밖에서 신는 부츠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그 덕에 고통은 배가 되었다.

뼈가 시큰거렸다. 금 갔을 확률을 따지기 전에 표정부터 관리했다. 요정은 문에 끼인 카론의 발끝을 밀어내려고 세게 걷어찼다. 시키는 대로 다 했으니 그만 들어가게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물으려던 계획은 발의 고통으로 인해 획기적으로 짧아졌다.

“소금을 다 썼다.”

“그렇습니까?”

문을 도로 휙 연 요정은 문 앞을 지키는 시종을 향해 냉랭하게 명했다.

“소금 두 자루, 폐하께 줍니다.”

“예, 황후 폐하.”

“한 자루면 충분하지 않아? 소금에 절여지겠어. 절인다는 것은 소금에 푹 담가서 물기를 빼서 그러니까 인간에게 직접 가하기엔 상당히 고통스러운…….”

“그러면 머릿속을 파내서 씻습니까?”

“아니. 그건 좀.”

뇌를 파내어 씻으라니. 요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발상이었다.

“그럼 절입니다.”

기어이 발을 밀어낸 요정은 사납게 문을 닫았다. 잠그지는 않았다. 열고 들어가 봤자 젖은 기저귀나 날아올 거라 굳이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한순간의 실수가 감당하기 힘든 골을 형성했다. 다소 피곤하고 난처할 뿐, 요정을 향한 분노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론은 요정을 아예 배제하려고 했었다. 어쩌면 평생을. 카론의 일방적인 오해로 빚어진 사태로 판명 났으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오랜 가르침에 따라 마땅히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 경우는 요정과 아이로부터의 배제였다.

평소에도 요정은 카론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래도 임신 후로 조금 발전했다고 여겼는데.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서궁 시절, 아니 그보다 더 안 좋았다. 적어도 서궁 시절엔 요정은 자신에게 젖은 기저귀 따위를 던지지는 않았다. 소금 자루를 떠넘기지도 않았다.

가장 참담한 것은 자루 위에 놓인 솔이었다. 목욕용 솔도 아니고 청소용 솔이라니. 이걸로 소금 목욕을 하라는 건 숫제 고문이었다. 차라리 예전 뒈진 왕이 그랬듯이 물 먹인 채찍에 등짝을 때리는 편이 나았다. 피부가 찢기고 흉터가 남겠지만 적어도 한번 때리고 나면 일주일은 해방이었다.

피부가 쓰린 수준에 불과해도 연이어지는 요정식 응징은 상당히 곤혹스러웠고 앞으로는 이런 사태를 만들지 말 것을 뼈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요정의 화가 풀릴 때까지 뜻대로 따르는 중이긴 한데.

‘그런데 화가 풀리긴 하나?’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마녀를 떠올리며 혐오감과 증오를 되새기는 자신의 경우를 따져 보았을 때, 요정 또한 꾹꾹 눌러 왔을 분노를 다 풀어내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릴 가능성이 컸다.

“하는 수 없지.”

앞으로 카론이 할 행동은 단순했다. 지은 잘못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보상한다. 요정이 원하는 방식대로. 사실 요정식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요정은 언어와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성장 배경과 생리현상, 그리고 사고방식도 전혀 달랐다. 그에 비해 카론은 라테시온의 인간 남자이자 마녀의 사생아였다. 그렇기에 겉으로만 보고 요정을 판단하는 건 옳지 않다. 음양 확인 방법을 두고 벌어진 이번 사건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다.

“일일이 물어보고 확인하는 수밖에.”

어떤 일이든 즉각적 판단은 유보하고 의도를 물어봐야 한다.

한마디로 줄이자면 대화가 필요했다.

전략 변경이라고 하면 거창할지 몰라도 황후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큰 변화를 결정한 이후로 카론은 즉각적인 행동에 돌입했다. 물론 소금 세 자루를 꾸역꾸역 다 쓴 후에.

“오래된 채찍 흉터까지 벌겋게 일어나다니.”

셔츠를 들어 올려 등 상태를 확인한 올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소금 목욕.”

소금 목욕이라는 말에 올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황후가 된 요정은 유순한 태도를 버리고 카론과 강하게 부딪혔다. 언쟁을 벌이기도 일쑤였고 때로는 폭력도 사용했다.

대부분 카론이 자초한 결과기에 올리아는 굳이 카론을 두둔하거나 말을 보태진 않았다. 오히려 요정이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싸워서 양보와 반성을 끌어내는 점에 감탄했다.

“연고를 드리지요.”

왕진 가방에서 연고 통을 꺼낸 올리아는 카론에게 뚜껑을 열어 보였다.

“하필.”

연고의 정체를 익히 알기에 저절로 미간이 일그러졌다. 망할 ‘지옥의 갈고리’였다. 올리아는 왕진 가방을 닫아 손에 들었다. 나가려는 모습을 보며 카론은 황당한 듯 물었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바르라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두지요.”

“누구?”

“폐하의 배우자요.”

황당한 얘기였다. 소금 목욕을 시켜 피부를 걸레짝으로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요정이었다. 그런데 요정에게 약을 바르게 시킨다고? 소금 열 자루를 더 던져 주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을까.

차라리 혼자 바르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아서 엘러 경이 뵙기를 청합니다.”

시종의 알림과 함께 아서가 들어왔다. 집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빨간 머리 수다쟁이가 표정을 구겼다. 손을 코 아래 대는 행동에서 올리아의 고약한 연고 냄새 때문임을 눈치챘다.

연고를 바를 생각에 기분이 몹시 저조했는데, 마침 좋은 분풀이 상대가 나타났다.

“급한 일이겠지?”

카론은 덩달아 히죽 웃었다. 가져온 문건이 급한 내용이 아니라면 검술 대련을 핑계로 좀 굴리고 패도 괜찮으리라.

요리조리 요령 피우기를 좋아하는 아서는 애석하게도 카론이 기다리던 소식을 가져왔다.

“톰슨의 보고서가 도착했습니다만. 급한 일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도요. 그럼…….”

북부로 급파되었던 톰슨의 보고서는 원래 아서를 거치지 않고 황제 앞에 바로 도착해야 했다. 함께 가져온 사르프 시 경비대 보고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요정 황후라는 지극히 중요하고 중대하며, 라테시온 황제의 안녕한 생활과 직결된 핵심 인물과의 마찰이 아니었다면 모두 카론이 직접 받아 처리할 문제들이었다.

“기다려.”

내민 문서를 받아 들자 아서는 살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보고서 봉인을 뜯어 빠르게 훑었다. 이미 구겨진 미간이 시시각각 일그러졌다.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문제였다.

북부 산맥으로 침투시킨 첩자의 흔적이 어느 순간 끊겼고 그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공식적으로는 실종이지만 사실상 살해 및 시신 은폐라고 추정했다.

사르프 시 경비대의 보고서는 더욱 불쾌했다. 수도원 뒤편으로 이어진 도주로를 따라 기사단과 경비대가 경매사를 뒤쫓았다. 밤이었고 인적이 드문 빽빽한 숲이라 추적이 어려웠다. 더욱이 말이 아니라 달려서 도망간 놈이라 몸을 숨기기 도리어 유리한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숨어드는 바람에 개별 수색을 포기하고 포위망을 구성하여 숲으로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경매사를 발견하긴 했다. 다만 등에 칼을 맞았고 황금판은 없었다.

「경매사 시신에 검은 핏줄이 남은 것으로 미루어, 파사 일족의 소행으로 여깁니다.」

핏줄이 검게 변하며 속에서부터 썩어 가는 독은 파사 놈들이 만든 것으로 제조법도 파사 일족만 알았다. 피해자에게 산 채로 썩어 가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줄뿐더러 끔찍한 몰골의 시신이 꼭 뱀에 휩싸인 것 같아서 ‘검은 뱀’이라고 불렀다.

“빌어먹을.”

보고서를 확 구겼다가 아서에게 떠넘겼다. 아서가 빠르게 훑는 사이 카론은 강력 대응을 지시했다.

“토벌부대를 보내 파사 일족을 수색한다. 파사 일족을 숨기는 놈 또한 엄하게 처벌하도록.”

“알겠습니다.”

“북부산맥 전체를 불태워버려도 좋아.”

북부산맥은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이었다. 지세가 험하고 삼림이 빽빽하여 아직 전인미답의 지역도 넓었다. 거기에 숨어든 파사 일족을 찾기 힘든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기름통을 가져가야겠군요.”

“얼마든지.”

아서가 물러간 후 카론은 요정에게 향했다. 연고 통을 들고는 있지만 올리아 얘기 때문은 아니었다. 카론은 요정이 기분이 풀렸는지 아닌지 확인차 평소에 수시로 들렀다. 운이 좋으면 마그네가 안고 있는 레온을 잠시 볼 수도 있었다. 요정에게 들키면 바로 문이 쾅 닫히지만.

황궁의 복도는 나날이 바뀌었다. 복도 곳곳에 내걸었던 오래된 검과 석궁, 그리고 사냥을 기념하는 짐승 박제는 싹 사라지고 대신에 꽃과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접시가 자리를 대신했다. 탁자 위에는 하얀 도기로 빚은 화병에 싱그러운 나뭇가지와 꽃이 가득했다. 유리로 만든 물고기 장식과 도자기로 만든 귀여운 천사 인형도 보였다.

라테시나의 정남쪽에 위치한 라테시온 제국의 정궁은 위대한 제국의 위상을 그대로 상징하는 만큼 엄숙했다. 벽은 황금색과 초록색, 진한 붉은 색을 기반으로 묵직한 실크 벽지를 발라 화려하게 꾸몄고 천장에는 악을 멸하는 신의 사자를 주제로 한 벽화를 꼼꼼히 그려 넣었다. 어디 하나 여유가 없어 기가 약한 자들은 저절로 숨을 죽이곤 했다. 물론 예전 얘기였다.

‘전엔 그랬지.’

현재도 건축물 자체가 자아내는 위압감은 여전했다. 다만 묵직하고 어두운 빛깔의 벽지는 화사한 색감을 뽐내는 과일과 동물 그림으로 인해 그 무게가 상당히 가벼워졌다.

천장에서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피의 기둥처럼 붉었던 커튼이 사라진 자리는 은은한 물결무늬와 부드러운 구름무늬가 가득한 연한 레이스 커튼이 살랑거렸다. 거대한 기둥이 이어지는 복도는 전보다 훨씬 밝고 화사했다. 모두 요정의 솜씨였다.

골든 피오니 근처는 더욱 화사했다. 같은 색이라도 위압감보다는 포근한 느낌을 주는 색을 썼고 장식물도 아기자기한 도자기 인형이나 밝은 크리스털 그릇으로 바뀌었다. 화려한 꽃도 많으나 꽃 없이 싱그러운 나뭇가지만 꽂은 화병도 많았다.

처음에는 볼모로 시작한 요정은 어느 틈에 점령군이 되어 황궁을 장악하고 결국 카론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년 전만 하더라도 요정에게 어떻게 화해를 청할까 고민하고 있을 줄 과연 누가 예상이라도 했겠는가.

골든 피오니의 문은 조금 열려 있었다. 앞을 지키는 시종 또한 자리를 비웠다.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또 욕설과 함께 물건이 날아오지 않을까 다소 우려스러웠다.

상체만 문 안으로 슬그머니 집어넣으면서 제 도착을 알렸다.

“아가르타?”

응접실엔 아이를 안은 요정이 있었다. 마그네는 보이지 않았다.

“나다.”

뻔질나게 드나들던 골든 피오니에 발을 들이는 일이 유달리 어색했다. 그 때문에 네 배우자이자 황제인 카론 유스키아라고 괜히 자기소개할 뻔했다.

가까이 다가가는 카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서 분노를 발견할 수 없었다. 출산 직후 강제로 요양하긴 했으나 아이를 낳기 전에 비하면 퍽 야위었다.

“폐하.”

예의를 갖춰 일어서려는 요정을 손을 들어서 막았다.

“몸은 어때?”

요정의 건강은 여러모로 중요하므로 자연스럽게 나온 화제였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엉뚱했다.

“온은 건강합니다. 온이가 아프면 올리아와 바로 얘기합니다.”

빠르게 덧붙이면서 요정은 아이를 꼭 안았다. 레온이 아프면 카론이 당장 빼앗을까 봐서 걱정하는 속내가 드러났다. 그럴 생각은 전혀 없는 카론은 고개를 저었다.

“너 말이다.”

잠든 아이의 작은 엉덩이를 토닥이던 요정은 의아한 듯이 카론을 봤다.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조용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침묵이 흘렀다. 요정은 잠든 아이를 물끄러미 봤고 카론은 그런 요정에게 시선을 던졌다. 어색함이 지나쳤다. 괜히 요정과 아이의 시간을 방해하긴 싫었다.

황후의 화가 많이 가신 것 같으니 그만 자리에서 일어날까 하는 사이, 요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뜬금없는 사과였다.

“뭐가?”

“소금을…… 세 자루나 주라고 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조곤조곤 이어지는 어투는 정말로 미안한 듯 조심스러웠다.

“올리아가 왔다 갔나?”

“네.”

요정은 레온을 향해 내렸던 시선을 다시 올렸다. 조곤조곤한 어투와 달리 눈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어렸다. 소금 문제로 아이를 도로 빼앗아 갈 걸 걱정하는지 잠든 레온을 안아 은근슬쩍 카론과 반대편으로 옮겼다.

“약을 발라야 한다지요?”

“올리아 말로는.”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바르면 된다.”

“등은 혼자 바르지 못합니다.”

아무리 올리아의 언질을 들었다고 해도 순순히 약을 발라 주겠다고 할 줄이야. 죽을 만큼 심각한 부상도 아니었다. 살 껍질이 벗겨진 정도는 시간이 알아서 치료해 준다. 하지만 카론은 됐다는 말을 두 번 하진 않았다.

당장 해치울 셈인지 요정은 레온을 침실에 있는 아기 침대에 눕혔다. 그리곤 원래 둘이서 함께 사용했던 침대를 가리켰다.

“앉습니다.”

카론은 가져온 연고를 요정에게 넘겼다. 일어난 살갗 때문에 재킷 없이 셔츠 차림이어서 벗는 데는 금방이었다. 상체를 드러내자 요정의 시선이 얼른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약통을 만지작대다가 다시 한번 사과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아니. 사과할 필요 없다. 당시에 너는 그럴 만했어.”

무심한 대답이 분홍이의 마음을 조금, 아주 조금 누그러뜨렸다. 추잡한 악인이라고만 여겼는데. 의외로 제 잘못은 순순히 사과하는 배포는 있었다.

사실 분홍이는 황제인 카론이 정말로 소금 목욕을 제대로 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정말로 미안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목욕물에 좀 풀어 몸을 담그는 시늉 정도 하리라고 안일하게 여겼다.

좀 전에 올리아가 와서 황제의 피부가 완전히 벗겨졌다고 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소금과 솔은 더러운 상상을 한 마음을 닦으라는 상징을 담은 것인데. 빤한 보복인 줄 알면서도 카론은 묵묵히 소금으로 몸을 문지르고 그것도 모자라 솔까지 썼다. 그렇게 하면 무쇠로 만든 살점이라도 삭을 수밖에. 황후가 하란다고 곧이곧대로 하는 황제라니.

‘그러고 보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기는 작자였지.’

황제의 코앞에서 문을 쾅쾅 닫아도 시종을 시켜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또 분홍이가 사전에 이른 대로 온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에 관한 규칙도 철저히 지켰다. 무려 황제가 손수 기저귀를 갈지 않았나. 더불어 100일 동안 외부인의 내궁 출입도 막았다.

‘딴에는 나를 오해한 것이 미안하여 그런 것인가.’

분명히 그럴 테지만. 갑자기 왜 이렇게 바뀐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에 대한 깊은 미움은 여전해도, 벗겨진 피부에 약을 발라줄 수는 있었다.

약 뚜껑을 여는 사이 카론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은은한 빛에 드러난 너른 등을 보는 순간 분홍이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헉.”

알몸으로 얽힌 일이 많아도 황제의 등을 제대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이런 모습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흉터는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였다. 희미한 자국에서부터 금방 생긴 듯 붉게 돋아난 자국까지. 칼자국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무엇에 맞았는지 몰라도 크게 찢어져 봉합된 상처도 많았다. 붉게 부어오른 몇몇 흉터는 붉은 벌레처럼 징그러웠다. 전쟁에서 얻은 부상의 흔적인가? 어떤 흉터는 오래되어 희미했다. 얼마나 길고 큰지, 바늘로 꿰맨 자국이 선명한 흉터도 많았다. 눈으로 보기에도 끔찍한데 거기다 거친 소금을 비볐으니. 고통은 얼마나 클까.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많이 아픕니까?”

“참을 만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고를 듬뿍 뜬 분홍이는 드러난 등짝 정중앙에 턱 얹었다. 여러 가지 약재를 혼합한 약일 텐데 다른 약재 냄새는 어디 가고 대신 박하 냄새가 강하게 났다.

“큭.”

사내의 잘 발달한 턱 근육이 강하게 수축했다. 동시에 등 근육도 꿈틀거렸다. 박하가 들어간 만큼 따가울 터. 그런데 소금을 어떻게 문지르면 이렇게까지 살이 벗겨질 수 있지? 한편으로 의아했다.

“소금 목욕을 어떻게 합니까?”

“소금보다는 솔이 문제였다.”

“솔이요?”

조심스럽게 약을 구석구석 문지르다가 멈췄다. 솔이라니. 제가 보낸 건 바닥을 닦던 솔이 아니었나.

“설마 그 솔을 정말로 쓰셨습니까?”

“쓰라고 주었잖아.”

“청소 솔인데…….”

설마 진짜로 쓸 줄은 몰랐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도로 다물고 묵묵히 약을 발랐다. 멀쩡한 살에 문질러도 아플 테지만 불룩 튀어나온 흉터가 훌렁 까졌다. 흉터가 제일 많은 등이 가장 심했고 팔과 어깨는 물론이거니와 앞쪽도 군데군데 붉게 일어났다.

어쩌다가 이런 흉터가 생긴 건지. 단순히 전쟁에서 얻었다기에는 칼자국 아래 오래된 흉터가 몹시 마음에 걸렸다. 흐릿하게 퍼진 흉터는 어린 시절에 생겼음이 분명했다. 칼자국과는 확연히 달랐다. 화상 자국 같기도 하고.

연고를 바르던 손이 희미한 흉터를 덧그렸다.

전에 모친을 마녀라 부르면서 매우 미워하던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괴롭히느니 차라리 죽이지 왜 살렸을까? 궁리하던 목소리가 선명했다. 설마 이 흉터가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물어서 좋을 것이 하등 없는데. 왠지 저절로 입이 움직였다.

“이거…… 아직도 아픈가요?”

“뭐?”

“여기.”

고개를 돌린 상대는 약을 바르던 분홍이의 손목을 잡아 어디를 가리키는지 파악하려 했다. 곁눈으로 뒤를 살피기에 분홍이는 카론의 시선이 닿을 만한 어깨 언저리에서 비슷한 흉터를 찾아냈다.

“이거.”

“아. 채찍 자국이군. 이젠 아프지 않아.”

대수롭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채찍?”

“긴 가죽끈으로 만들어서 이렇게 휘두르는 물건.”

손짓과 섞어 설명하기에 금방 알아들었다. 그런데 채찍이라니. 근본적인 의문은 가시질 않았다.

“마녀가 살아 있을 때 종종 빌어먹을 개자식이 찾아와서 휘둘렀어. 내 손으로 죽여 버린 놈 말이야.”

약을 문지르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렇게 살살 바를 필요 없어. 옛날에 생긴 흉터보단 올리아의 연고가 훨씬 고약해. 첩자 고문용으로 탁월하지 않을까. 약효보다는 너무 쓰려서 상처를 잊게 만드는 것 같아.”

“그게 아니라.”

“그럼?”

굳이 캐물을 이유가 없었다. 카론의 과거를 더 알아서 어쩌겠단 말인가. 그래 봤자 불쾌한 동정심만 들 뿐, 분홍이의 처지는 바뀌는 일이 없다.

“아닙니다.”

말을 돌리며 연고 뚜껑을 닫았다. 그사이 카론은 셔츠를 다시 입어 등을 가렸다. 단추를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잠그는 동안 그는 내내 등을 돌리고 있었다.

황후의 침궁에 있으면서도 옷을 입혀달라고 하지 않고 스스로 입는 황제의 모습은 언제 봐도 놀라웠다. 신국의 황제는 붓과 책, 검과 활만 들었다. 그 외에 모든 수발은 상선을 비롯한 내관이 거들었다. 라테시온의 풍습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어색해졌다. 분홍이는 손을 꿈지럭대다가 몸을 돌렸다. 시선을 내내 연고를 든 손에만 고정하는 바람에 카론이 가까이에 다가온 걸 몰랐다.

“엇.”

어깨를 툭 부딪쳤다. 고향에서 배운 예법에 따르면 바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러나 분홍이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에 고개를 들어 저를 보는 파란 도깨비 눈을 응시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카론이 화를 내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도 이곳 풍습에 물이 드는가.’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예상대로 카론은 몸가짐이 바르지 못한 황후를 꾸짖는 대신에 팔을 둘러 가까이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안아 보는군.”

말 그대로였다. 안긴 입장에서도 약간 낯설었다.

온을 낳은 날 연유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아이를 빼앗질 않나, 알고 보니 산부를 더러운 변태로 오인하질 않나. 두고두고 곱씹을 짓만 잔뜩 한 주제에 또 이렇게 다정한 부군 흉내를 낸다.

밀어내지 않은 이유는 살갗이 벗겨지도록 소금 목욕을 하고 박하가 잔뜩 들어가서 몹시 쓰린 연고를 바르면서도 분홍이를 향해 전혀 역정을 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손속에 자비가 없고 추잡스러운 상상을 하면서도 조금씩 사람다운 짓을 한다. 마음 깊이 새겨진 응어리가 풀어지진 않아도, 망칠 생각은 아니었다.

지긋지긋할 만큼 심신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므로, 굳이 잘잘못을 다투며 이런 알량한 행위 일랑 하지 말라고 따질 여력이 없었다. 몸이 피로하니 위선적인 다정이 매서운 진심보다 훨씬 나았다.

조용히 머물다가 조용히 나가길 바랐다.

“넌 나를 보는 게 아무렇지도 않나?”

“예?”

매번 그렇듯이 분홍이의 속내를 제대로 집어내지 못하는 못난 황제가 저 깊은 곳에 묻기로 마음먹은 얘기를 불쑥 끄집어냈다.

“내가 너였다면 나를 저주했을 텐데. 아주 비참하게 뒈지길 바랄 거야.”

무슨 의도인가. 진의를 떠보는 것인가. 물론 죽든 뭐든 눈앞에서 사라지면 속이 시원하겠지만 순순히 그렇다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대답을 어찌해야 하나. 아니라고 하면 소금 목욕을 걸고넘어지고, 그렇다고 하면…… 다시 서궁에 가는 건가. 황제에 대한 불손한 마음이 있으니 황후로서 자격을 박탈하고 온을 보지 못하게 할 텐가.

“그……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곱씹으며 저주하다가 자고 있을 때 몰래 목에 칼을 쑤셔 박을지도 모르지. 아니 분명히 그랬을 거다. 그에 비하면…… 넌 너무 물러.”

그런 마음을 먹었다가 서궁에 갇혀 짐승처럼 때리고 겁간했음을, 황제는 떠올리지 못했다.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원망스러운 바람의 손길로 인해 목숨을 놓지도 못했다. 이후 씨를 뿌리는 대로 받아 온을 낳았다. 완력과 권력의 차이를 실감하였기에, 억지 황후의 알량한 권력을 놀려 훗날을 기약했다.

온이 자라 저를 낳은 생아비인 분홍이가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었는지 알게 되는 날. 제 응어리를 낱낱이 풀어 대가를 얻어 낼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카론의 예를 들어 하늘이 복수심을 꺾으라 꾸짖었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고자 각오한 몸이 무엇이 두렵겠나.

아직은 먼 얘기였다. 온은 갓난쟁이에 불과하였으며, 자신은 아직 황제에 의해 목숨이 오가는, 힘없는 요정 황후일 뿐이었다.

“왜 그런 얘기를…….”

난감한 얘기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자칫 잘못 대답하였다가 큰 화를 치를 수도 있다. 전에도 울화를 참지 못하고 광분하여 일을 그르쳤다.

고개를 돌리고 딱딱한 가슴을 슬쩍 밀었다. 그러면 카론은 모진 말을 하거나 혹은 음란한 행동을 한다. 딴에는 너그러워진 상대의 태도에 찬물을 끼얹는 건 좋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오늘은 말하는 대로, 대하는 대로 참아 주리라 마음을 먹었다.

“이번 일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군.”

막상 그는 어느 쪽도 아닌, 영 엉뚱한 면모를 보였다.

“나는 너를 내 식대로 재단하고 오해했다. 이번 일도 그렇다. 네게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면 되는데. 내 개인적인 경험에 기대어 너를 함부로 평가했다.”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갈 줄 아는가. 아니…… 아니. 그보다는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다니. 근본 없는 오랑캐가?

저절로 눈이 위로 향했다. 입도 서서히 벌어졌다. 못 볼 꼴은 본, 못 들을 말을 들은 기색이 역력했는지 저를 바라보는 뻔뻔한 낯짝에 옅은 어색함이 번졌다.

“너는 요정이고, 나는 인간인데 말이지.”

분홍이는 제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혹은 황제가 소금 목욕에 미치진 않았는지 궁금했다. 설마 정말로 골수를 꺼내서 소금물에 담그기라도 했나?

“머리…… 절였습니까?”

경악에 겨운 물음이었는데, 카론은 풋 웃었다. 소금물 덕분에 미친 게 분명했다. 구접스러운 오랑캐도 모자라 미친 오랑캐라니. 나날이 근심을 던져 주는 통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머리…… 아픕니까?”

“아니. 멀쩡하다.”

반사적으로 손이 올라갔다. 놈의 이마를 짚었다가 뺨과 목도 짚었다. 딱히 열은 없는…… 아니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살갗이 뜨끈뜨끈했다. 소금으로 생고문을 한 덕에 분명 정신이 나갔다.

“올리아 부릅니다. 살이 벗겨져서 분명히 머릿속 아픕니다. 약을 먹어야 합니다.”

“제정신이야. 정말이야.”

“그런데 왜 그런 얘기를 합니까?”

진심으로 걱정되었다. 미친 황제가 폐주(廢主)가 되면 자신과 온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본 적도 없는 역도의 무리에 붙들려 목이 대롱대롱 매달릴 것이다. 아니 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선 아니 된다. 적어도 온이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때까지는, 하등 고운 구석은 없는 악한에 추접스러운 변태 놈에 팍팍한 냉혈한이라도 멀쩡히 버텨야 했다.

뺨과 목을 더듬는 손목을 잡은 놈이 빙긋이 웃으며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내 걱정도 하는 건가?”

“그럼 걱정 안 합니까?”

놈이 뜻하는 걱정과 제가 하는 걱정이 전혀 다름을 알았다. 목적은 달라도 결과적으로 카론의 건강에 대한 우려는 통하고 있으니 아니라고 하진 않았다.

“너는…… 정말로 물러.”

“무른 건 폐하가 아닙니까? 황후가 시킨다고 다 하는 황제, 없습니다.”

“또 올바른 황제 얘긴가. 나는 올바름에서 거리가 멀다고 했잖아.”

“하지만.”

“올바른 황제로 행세하길 원하나? 정말로?”

마땅히 그렇다고 해야 하는데 뭔가 불길했다.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말았더니 카론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나는 라테시온의 황제답게 너를 대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지?”

처음 만났을 때. 카론은 다짜고짜 손을 찌르고 뺨을 때렸으며 겁간에 저항하는 자신을 짐승처럼 구타했다. 이후엔 서궁에 갇혀 무수히 겁간을 당했다. 그걸 떠올리자 저절로 뺨이 상기되고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게…… 올바른 황제입니까?”

“라테시온식이라면. 이곳의 황제는 지배자이자 소유자다. 내 땅에 있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내 소유고 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다. 당시 넌 내 땅에 있었으니 자연히 내 소유다. 그런데 주인의 뜻을 순순히 따르지 않고 나를 상처 입혔지. 네가 말하는 대로 황제로서 바르게 대응했다면 넌 그날 죽었다.”

“하…… 하지만 폐하가 먼저…… 저를…… 나는 폐하의 것이 아닌…… 지금은 황후지만…… 그때는…….”

“알아. 나는 너를 잘못 대했다.”

입이 있되 할 말이 없었다.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감동 때문이 아니었다. 억울함과 울분이 뒤섞인 격한 감정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제멋대로 지옥에 빠트렸다가 간신히 평정을 찾았더니 또 제멋대로 건져 내려는 오만한 작자의 품에 안겨 있기 버거였다. 그를 밀치고 나서 명치에 손을 대고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어떻게 그런 말은 아무렇지도 않게 뱉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수오지심이 조금도 없는 작자였다. 고통으로 점철된 일을 가벼이 언급하는 오연함만은 과히 황제다웠다.

“잊으라 하지 않겠다. 그러기엔 나도 훨씬 오래된 기억도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잠시 뜸을 들인 카론은 거리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일을 모두 기억한다. 너를 때린 것, 찌른 것, 강제로 취한 것 모두.”

분홍이는 뭐라 대답하지도 못 하고 눈을 깜빡였다. 충격으로 가볍게 열린 입에서 가쁜 숨이 새어 나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뒤늦은 인정에 뒷머리가 지르르 당겼다.

이리 인정할 수 있는 이가 어찌 그리 모질었는가.

“그래서요? 이제야…… 미안하다고 합니까?”

백번 천번 미안하다고 해 보아라. 용서하는가. 절대로 용서를 입에 담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어떤 짓에도 넘어가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주먹을 꼭 쥐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뺨이 파르르 떨렸다. 입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엷은 미소를 머금은 그는 잠시 온을 보았다. 염통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퍽 박혔다. 온을 빌미로 협박을 할 셈인가. 하기야. 비뚤어진 근본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없지.

“아니. 내가 사과를 한다면 넌 우리 아이를 위해서 억지로 받아들일 거다. 아닌가?”

명확한 지적에 분홍이는 숨을 들이켰다.

“내가 하는 사과는 위선에 지나지 않아. 위선은 실제로는 아니면서 그런 척하는 거지. 그렇다면 하지 않겠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사이엔 불필요한 장벽이 너무 많아.”

카론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에는 어떤 불만도 없어. 나를 보지 않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 그러나 너는 황후로서, 부모로서 매우 훌륭해. 어떤 면에서는 제멋대로 자란 나보다 더.”

한 걸음을 앞두고 멈춘 카론은 경악에 휩싸인 분홍이를 응시했다.

“너는 내게 너무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어. 네가 원한 바는 아니겠지만 말이야. 어쨌건 나는 네가 필요하다.”

창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 유달리 빛나는 청금색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고요했다.

“난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인간이야. 마법처럼 과거를 지우지는 못하지. 그러나 다가올 미래를 바꿀 의지가 있고 네가 조금만 도와준다면 그럴 능력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분홍이의 손목에 걸렸다. 거칠게 붙잡고 무참하게 때리던 손이. 연고 냄새가 나는 손을 잡아 올린 카론은 마치 꽃향기를 맡듯 코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니 부디 내게 기회를 주었으면 해.”

“……기…… 회?”

“지금부터라도 올바른 배우자가 될 기회를 말이야.”

예상을 조금도 하지 못한 터라 당혹감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 무슨 망발인가. 올바른 배우자라니. 그런 말을 감히 입에 올릴 수 있는가.

뜨거운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뒷덜미로 뻗쳤다. 이내 정수리가 뜨거워지며 순간 어질했다. 헐떡이던 분홍이는 겨우 입을 열었다. 무슨 수작인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왜…….”

왜 그러냐 물으려던 분홍이를 팔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연유가 무엇이든, 황제가 무엇을 답하든 지금은 아니었다.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피곤하니…… 쉬겠습니다.”

“그러도록 해.”

심지어 카론은 분홍이를 침대에 눕혀 주었다. 정신을 잃고 앓을 때 그가 직접 물수건으로 분홍이 이마를 닦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변화의 조짐이 그때부터였을까. 사경을 헤매니 뒤늦게 황자를 기를 훌륭한 황후를 잃을지도 몰라 걱정되어서?

“자는 동안 레온은 내가 볼 테니 안심해.”

“자지 않습니다. 잠시만 눕습니다.”

두툼한 베개에 몸을 모로 기대었다. 카론은 의자를 하나 끌어와 곁에 앉았다. 정말로 자리를 지킬 태세였다.

“폐하는 늘 바쁩니다. 일하지 않습니까?”

“잠시 네 곁에 머무를 여유는 있어.”

놈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생각해서였다. 곁에 있어서 더욱 피곤한데…… 그걸 어찌 말할까. 그저 입을 닫고 물끄러미 봤다.

창을 등지고 있는 터라 빛이 금색 머리에 부딪혔다. 눈이 부신만큼 얼굴은 음영이 짙게 졌다. 코가 높고 안와가 깊게 파인 이국인 중에서도 유달리 파란 눈동자는 늘 스며 있던 섬뜩한 기운이 가시고, 대신 부드러운 쪽빛으로 물들었다.

‘이런 눈빛을 할 줄을 아나.’

부드럽고 자상했다. 악랄한 오랑캐 놈에게 붙이긴 참으로 무색한 표현이지만. 천지가 개벽한 듯 사람이 바뀐 연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그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뭔가 떠오르기라도 할까 싶어서 하염없이 봤다.

잠시 후 마그네가 돌아왔다. 하얀 천 가방을 들고 침실로 들어선 그는 황제를 보고 잠시 놀란 듯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기저귀와 소독한 젖병을 가져왔습니다.”

“마그네.”

누웠던 몸을 일으켜 그가 아기용품을 제자리에 정리하는 것을 거들었다. 그사이 카론은 의자를 치웠다.

“이제 가 봐야겠군.”

벌써?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살짝 웃었다가 돌아서는 뒷모습에 어쩐 일인지 발길이 끌렸다. 응접실을 지나 바깥으로 통하는 문 앞까지 배웅했다.

“저녁에 다시 오겠다.”

일방적으로 선언한 그는 곧바로 “그래도 되나?”라고 덧붙였다.

“황제 폐하는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갑니다.”

“하지만 여긴 네 공간이니까. 기왕이면 네 허락을 받고 싶다.”

정말로 아연실색의 연속이었다. 곱게 허락을 구하는 개종자라니. 허락을 구하는 자체는 잘한 일이므로 장단을 맞추겠으나 너무 당황하여 혀가 굳어 버렸다. 그저 눈만 껌뻑거리면서 고개를 약간 주억였다.

“그럼 저녁에 보지.”

허락을 구하는 일로도 충분히 당황했는데, 그것도 모자라 카론은 몸을 굽혀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질겁한 나머지 흠칫 떨었다. 얼굴이 대번에 시뻘게졌다.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기는. 애까지 만들었으면서.”

버릇처럼 턱을 잠시 매만진 카론은 씩 웃으면서 나갔다.

‘미친 게야. 정말로 미친 게야. 보낸 소금에 괴이쩍은 약이라도 들어간 게 아닐까.’

손을 마주 잡고 잠시 서성이다가 번뜩 그렌과 올리아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소금 목욕을 어찌해서 저렇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폐하께서 아프신 것 같다고요?”

“그렇습니다. 특히 머리가 아픕니다. 분명합니다.”

두 사람은 카론의 변화를 익히 감지했는지 에둘러 한 설명으로도 제대로 알아들었다.

“생각이 바뀌었다든가 혹은 뭔가 결정하셨다는…… 그런 말씀은 전혀 안 하셨습니까?”

그걸 그렌이 어떻게 알았을까. 뭔가 집히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했습니다. 나와 폐하는 다릅니다. 요정이고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했습니다.”

올리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렌도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답답한 분홍이를 향해 두 사람이 설명을 덧붙였다.

“폐하께서는 모든 사람을 쓸모와 쓸모없음으로 우선 판단하십니다. 쓸모 있으면 곁에 두고 관찰하시지요. 쓸모없다고 여겼다가 쓸모를 깨달은 후에 대하는 태도가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도 흔하지요. 물론 카론 폐하의 기준에서 말입니다. 그분은 나름대로 신중하게 관찰하고 행동하십니다. 다만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 문제지만 말이에요.”

이해하기 힘든 설명이 이어졌다. 별안간 사람이 바뀌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거야 위선과 변덕이 심해도 그렇게 심하면 병이다. 하지만 올리아는 카론이 지극히 정상임을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황후 폐하는 매우 이질적이에요. 이질적이란 말은 혼자 특별하다는 뜻이에요. 폐하는 요정인 황후 폐하를 어찌 대해야 하는지 모르셨고…… 그래서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한 파사 일족과 연관해서 취급하셨지요. 특이한 꽃을 들고 계셨으니까요.”

파사 일족. 카론이 종종 언급했는데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무척 싫어했다. 파사 일족은 기이한 술수를 쓰는 일족이라 들었는데. 금은화가 빛을 발하는 꽃이라 파사 일족과 비슷한 힘을 쓴다고 여겨서 악랄하게 굴었다는 얘기였다. 어처구니없고 열불이 터지지만, 억지로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전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신 겁니다.”

아무리 제가 파사 일족과 관련 없다고 한들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는가.

“한 번에 바뀌었습니다. 이상합니다.”

“카론 폐하는 잘못이라 판단하면 빠르게 고칩니다.”

올리아는 미친 게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렌 또한 이런 일은 종종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카론을 키웠다는 두 사람이 그러니 정말로 정신이 나간 건 아닐 터. 그래도 예상치도 못한 기이한 일을 벌이니 근심이 영 없을 순 없었다. 어찌 그런 기이한 성미가 다 있나 싶어 내내 궁리하다 문득 깨달았다.

[잘못이라 판단하면 고친다고? 그럼 옳음과 잘못을 세심하게 가르치면 멀쩡한 사람 행세도 할 수 있다는 소린가?]

깨달으면 그 즉시 행동을 바꾼다니. 보통은 고집을 부릴 때까지 부리게 마련인데. 아니 저런 막돼먹은 자가 제 언행을 돌아보며 궁리하는 것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오만과 아집에 빠져야 마땅한 최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찌 그런 성찰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치면 고쳐지나?]

사람이라면 마땅히 부모로부터 배워야 할 근본적인 인간성을 배우지 못한 작자인데 배우면 배우는 대로 실천은 하는, 참 오묘한 성질이 있으니 인내심을 가지고 아주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식으로 하나하나 일러 주면……

[아니다. 아니다. 그놈에게 무슨 기대를 하느냐. 바뀐다고 한들, 내가 가르쳐야 할 연유도 없다. 오만한 놈이 혼자 북을 치고, 장구도 치다가 제풀에 자빠져 개똥밭에 뒹굴든지 말든지.]

절로 고개를 도리질 치며 콧방귀를 팽팽 뿜다가 다시 슬그머니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저렇게 두다가 정말로 똥통에 빠져서 폐주(廢主)가 되면 어떻게 하지? 그럼 나도, 갓 태어난 아기도 완전히 신세를 버리는 것인데.]

자리에서 일어나 곤히 자는 갓난쟁이를 들여다보았다. 태열이 군데군데 남은 조그마한 아이는 젖살이 곰살맞게 부풀렸다. 저것도 눈이라고 부드러운 눈썹에 촘촘한 속눈썹까지 야무지게 단 녀석은 앵두 같은 코나 입술 때때로 실룩였다. 아무래도 새까만 머리카락에 이국인과 다른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탓인지, 막상 낳고 보니 오랑캐의 씨앗이라는 미움보다는 제 피를 물려받은 새끼라는 정이 더 빠르게 쌓였다.

원하든 원치 않든, 황후가 된 이상 제 운명과 함께 요 작은 놈 또한 흉악한 도깨비 놈과 같은 배를 탔다. 원한은 원한을 낳고 저주는 저주로 이어진다. 원한과 저주를 가득 품은 채로 살아가다가 저 또한 비참하게 죽은 마녀와 마찬가지로 미쳐 버리면 어떻게 될까.

머리로는 불행의 고리를 끊음이 옳다고 하지만 아직은 심정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아니 되었다. 이러저러한 고민으로 무거운 머리를 짚으며 매캐한 연기 같은 날숨을 거듭 뱉었다.

[폐주만 아니 되면 되겠지. 폐주만. 더는 관여할 필요가 없다. 그저 폐주만 면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말도 하려고 배웠으니, 기왕 뚫린 입으로 제 뜻을 알려 보는 것도 나쁠 리가 없다. 더러 화를 누르며 한 번씩 공부했던 신국 선현의 가르침을 여기서 펼쳐 보아도 괜찮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하고 화가 나는지.

분홍이는 한참 동안 아기를 들여다보며 끓는 속을 가라앉히려 애써야 했다.

* * *

어느새 해가 기울었다. 붉은 노을이 퍼질 무렵 카론이 나타났다.

“아직 식사 시간은 멀었고. 괜찮으면 산책은 어때? 둘이서.”

다짜고짜 산책을 청했다. 그것도 단둘이서라니. 그렇게 다정한 사이였던가? 시시각각 점입가경이었다.

“아이 낳았습니다. 100일 동안 몸을 따뜻하게 합니다. 아니면 아픕니다.”

“안뜰까지면 괜찮을 거다. 방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방에만 있어 답답하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온이 핑계를 대고 거절할 수도 있었다. 전에 황후인 저를 물끄러미 보는 일이 가장 좋은 휴식이라고 했던가. 기왕 좋은 뜻으로 권한 것 같으니 한 번은 받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이러나저러나 면을 맞대고 살아야 하니 조금씩 놈의 미운 낯짝을 마주하면서 적응도 좀 하고.

가벼운 덧옷을 걸치고 따라나섰다. 복도를 묵묵히 걷는 동안 이런저런 말을 시킬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상대는 조용했다. 침묵이 달가울 만큼 편한 사이가 아니다. 이렇게 조용히 걷는 자체가 몹시 거북했다. 그러다 보니 분홍이가 먼저 입을 열게 되었다.

“온이가 산양 젖을 잘 먹습니다. 아프지 않습니다. 얌전하고 착합니다.”

어쨌거나 친부이니 아이가 무럭무럭 잘 크고 있는 정도는 알아야 했다.

“너를 닮아서 그런가 보군. 역시 네가 키우는 게 맞아.”

얼마 전에 아이를 강제로 빼앗아 갔던 작자가 할 말인가? 어처구니가 저 멀리 달아났다. 기억을 깡그리 잊은 건지, 아니면 얼굴에 장어 기름이라도 발랐는지 놈은 올바른 판단을 내린 사람이 그러하듯 뿌듯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뻔뻔하구나.’

죽을 동, 살 동 달려들어 아이를 빼앗고 산고로 온몸이 아픈 중에도 다리를 벌릴 참담한 생각까지 하며 찾아온 아이였다. 그런데 마치 은혜를 베푼 양 구니. 저절로 열불이 터졌다.

‘참자, 참아. 여기서 화를 내면 될 일도 아니 된다.’

궁극적으로 놈은 바른대로 행동하고 있긴 했다. 다만 분홍이의 억울함만 갈 곳이 없어 속을 태울 뿐이었다.

악귀 주제에 갑자기 성인군자 흉내를 내면 옳다구나 하고 받아 주어야 하나? 받아 주는 것이 아이와 저의 안전을 위해 바람직하기에 입은 어떻게든 다물었으나 심사가 배배 뒤틀렸다. 이런 놈과 말을 섞겠다고 굳이 침묵을 깬 제가 어리석었다.

침묵을 고맙게 여기면서 복도를 묵묵히 걸었다. 조용히 산책을 끝내고 돌아가길 원했는데, 이번에는 놈이 불쑥 말을 꺼냈다.

“요정식 이름은 참 특이하군.”

“예?”

뜬금없는 소리라 저도 모르게 반응하고 말았다. 시선을 내린 카론은 개구쟁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레온의 요정 이름이 온인 줄은 알겠어. 그런데 왜 ‘오니’ ‘오나’ 라고 부르는지는 잘 모르겠군. 애칭인가 싶으면 수시로 바뀌니.”

신국 말로 하는 걸 또 어떻게 들었는지. 모른 척하고 싶은데 눈을 마주친 바람에 할 수 없이 답했다.

“친한 사람 이름에 아를 붙입니다. 바로 부르지 않을 땐 이를 붙입니다.”

“흐음.”

잠시 생각하던 카론이 “아가르타아?” 라고 불렀다. 코웃음이 터졌다. 대놓고 조롱하면 또 역정을 낼 수도 있으니 얼른 헛기침을 붙여 비웃음을 지웠다.

“요정 이름이 아니면 아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럼 난 카로나라고 불리지 못하겠군. 마음에 들었는데.”

분홍이는 곁눈질로 카론을 쏘아봤다. 분명히 ‘친한’ 사람이라고 얘기했는데. 멋대로 잘라먹고 멋대로 생각하기 대장이었다. 올바른 배우자가 되겠다고 하면서 무엇을 올바르게 한단 말인가. 말귀 하나 귀담아듣지 않는 주제에.

‘평생을 악한으로 살아온 놈이 갑자기 바뀐다고 한들, 사람 구실이라도 제대로 하겠…….’

몰아치던 속내는 카론이 별안간 발을 멈추면서 함께 멈추었다. 또 무슨 엉뚱한 말을 할까 싶어 곱지 않은 시선을 들었다.

“그렇다면 네 요정 이름은 뭐지?”

쿵.

눈이 저절로 천장으로 향했다. 분명히 벽돌 하나가 떨어져 제 정수리를 세게 두들겼는데. 이상하게도 천장은 실금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럴 리가 없다. 천장에서 벽돌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제 정수리가 쾅 울리고 등뼈마저 욱신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가르타?”

“뭐…… 라고?”

뭐라 했는지 다시 물어야만 했다. 제 귀가 멀쩡한지, 아니면 제 머리가 멀쩡한지.

“네 요정 이름 말이다. 너도 요정이니 있을 거 아닌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분홍이는 저도 모르게 휘청했다. 놈이 부축하려 들기에 얼른 손을 뿌리치며 벽을 짚었다.

“괜찮나?”

괜찮냐고? 그게 뚫린 입으로 할 말인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숨이 턱턱 막혔다. 멀쩡히 뜬 눈앞에 각양 색색의 불똥도 튀었다. 이 빌어 처먹을 놈이 어처구니를 몽땅 내다버려서 세상 맷돌이 다 멈추리라.

[허, 네놈이 정녕 내 피를 말려 죽이려 드는구나.]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바른 부군이 되겠다는 것이 이런 뜻인가. 그리 알아 달라고 목 놓아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놓고서. 과거를 잊지 않겠다면서. 가증스럽게 몽땅 뒤로 미뤄 두고 아주 새로 시작하겠다는 건가. 그러면 저는 알아서 장단을 맞춰야 하나? 북을 치면 피리 불고 멍석을 깔면 알아서 춤을 추라고? 그렇게는 못 한다.

꾹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반질반질한 낯짝에 뻘건 손자국을 내어야 하는데. 변덕이나마 간신히 찾아온 평안을 해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는 자신이 처량했다. 그렇기에 놈의 위선적인 다정이 몹시도 역겨웠다.

“아가르타?”

이미 아가르타라고 부르면서 왜 이름을 물어보는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과 굳은 혀를 억지로 움직였다.

“……없습니다.”

“그럴 리가.”

“저는 아가르타입니다. 폐하가 지었습니다.”

덧옷을 입었는데도 공연한 추위가 내장까지 스며들었다. 구슬처럼 무심하게 빛나는 도깨비 눈을 노려보는 것도 신물이나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러니 앞으로 계속 아가르타, 그렇게 부릅니다.”

더는 같이 있기 싫어 분홍이는 놈이 뭐라 하든 말든 얼른 침전으로 돌아왔다. 묵묵히 뒤를 따르던 놈은 분홍이가 침전으로 들어가자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이후로 놈이 요정 이름을 들먹이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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