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황제를 상징하는 붉은 망토와 백색 제복 대신 솔기가 다소 닳은 검은 가죽옷과 여기저기 작은 구멍이 난 망토를 걸쳤다. 무릎까지 오는 부츠도 광이 없고 길이 잘 든 놈으로 바꿨다.
검 손잡이에 무두질이 잘 된 가죽을 둘둘 감았기에 황제라는 표식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무리의 형태나 태도로 인해 카론이 우두머리로 보일 뿐이었다. 기사단장이라 칭하면서 무리 몇을 이끌고 건달 행세를 하는 젊은 귀족이 많으므로 그들 중 하나로 오해받기 쉬웠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랬다.
따르던 정예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매서운 눈길과 길이 잘든 몸짓을 제외하곤 행색은 지극히 평범한 용병처럼 보였다.
요정의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되도록 다른 놈에게 맡기고 싶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빨리 처리하고 돌아오는 방법이 현재로써는 최선이었다.
카론은 얼굴을 때리는 축축한 새벽바람을 가르며 질주했다.
목적지는 사르프.
사르프는 제도인 라테시나에서 마차로 하루 반, 질주로 반나절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으로 라테시나로 향하는 강과 다른 강의 지류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마침 북쪽에서 내려오는 길도 끼고 있어 대평원에서 제도로 통하는 관문이자 교역의 중심지였다.
사르프를 중심으로 상단이 발달했다. 상업이 발달한 만큼 대륙 각지에서 많은 인파와 물건이 쏠렸고, 그들을 노리는 좀도둑과 사기꾼도 기승이었다.
라테시나에 직접 손을 뻗지만 않으면 적당히 봐주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더욱 음지로 숨어들면 곤란했다. 인간의 도가니와 같은 이곳은 파사 일족이 곰팡이처럼 숨어들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근원을 박살 내기 전까지는 몰래 설치한 덫에 걸리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요정 전설과 황무지의 신전 폐허에 관해 은밀히 알아보기 위해 믿을 만한 고고학자와 기사 하나를 짝을 지어 사르프로 침투시킨 일이 있었다. 그들은 수집가로 변장하여 도굴꾼을 상대하는 고미술 상인에게 접근하였다.
자잘한 거래를 하면서 신뢰를 쌓은 후에 상인에게 ‘고대 마도 제국’ 관련 유물 구매 의사를 슬쩍 비쳤더니, 상인은 사르프 근교에 있는 낡은 수도원 지하에서 벌어지는 불법 경매 행사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
“영원히 빛나는 마도구가 나온다고 합니다.”
어제 아침 전달받은 소식이 카론을 직접 나서게 했다.
영원히 빛나는 마도구가 요정의 꽃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확인하고 있다면 그것을 당장 수거하여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요정이 아니더라도 고대 마도구를 유통하는 일은 불법이다.
‘요정이 이미 이쪽으로 건너왔다. 어떤 방법인지 몰라도 한번 일어난 일은 두 번 일어날 수도 있어.’
굳이 요정의 성미를 건드리면서까지 정혼자의 정보를 캐낸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혹여 벌써 들어오지 않았을까? 의심도 들었다.
‘훗, 얼마든지 넘어오시지.’
이미 요정은 제 아내이며 곧 아이도 태어난다. 라테시온에 적응한 요정을 흔들어 놓을 위험 요소는 요정이 알기 전에 미리 파괴하고 묻어 버릴 셈이었다.
만에 하나 옛 정혼자라는 놈이 나타나도 결정은 변하지 않는다. 약간 더 귀찮아질 뿐.
색출하여 죽인다.
요정이 모르게.
그뿐이다.
카론은 그 경매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셈이었다. 카론은 파사 일족을 분간하는 능력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또 요정이 폐허에서 발견된 과정을 카론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자도 없다. 그렇기에 요정 전설이든, 파사 일족이든 자신이 직접 확인하는 편이 빨랐다.
이른 오전에 사르프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고고학자 일행을 만났다. 그들은 대상단이 묵어가는 커다란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각양각색의 여행객이 식당과 술집을 겸하는 넓은 1층에 무수히 많았다. 카론 일행은 커다란 키를 제외하고는 상단을 따라다니는 용병단과 특별히 구별하기 어려웠다.
고고학자인 루벤이 카론을 알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각은?”
“오늘 밤 자정입니다. 장소는 정기 예배를 보지 않는 사원이고요. 늙은 수도사 셋이 사는데 운영비가 부족해서 장소를 대여한 것이 이제는 불법 경매장이 되었다는군요.”
보고를 받은 후 루벤을 다른 기사와 함께 경매장 인근을 둘러보며 동선을 파악하게 시켰다. 그러는 동안 카론은 따로 파사 일족의 동태에 관한 톰슨의 보고를 들었다.
“너무 잠잠해서 이상합니다. 비밀 포교 조직이 싹 사라졌습니다.”
파사 일족이 벌레 같은 생명력을 이어 가는 비결이 바로 포교였다.
생활이 궁핍하거나 사회적 좌절을 겪은 자들에게 접근하여 처음에는 잘해 주면서 신뢰를 쌓은 다음 나중에는 슬그머니 파사 일족의 비밀 집회에 불러낸다. 거기서 세상의 모든 것이 잘못되었으며, 그것을 깨닫는 참된 지성을 지닌 자는 고대 마도 제국의 후예라고 세뇌당한다. 종국에는 잠자는 마도 제국이 땅에서 솟아 하늘로 부상하며 파사 일족을 데리고 신세계로 간다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전적으로 믿게 된다. 그러면 훌륭한 파사 일족의 일원으로 재탄생이다.
파사 일족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불만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다 끌어모은 대조직이었으며, 카론이 세를 일으켜 제국을 세울 당시에는 왕궁에도 손을 뻗쳤다. 목숨을 구제하기 위해 마녀를 스스로 잡아다가 바쳤다. 멍청한 마녀는 강간을 당하고 원치 않는 사생아를 낳은 후 비참하게 죽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을 버린 파사 일족을 찬양했다.
파사 일족에 대한 무한한 혐오감은 바로 거기서 출발했다. 그들은 카론 탄생의 단서를 제공했으며 끔찍한 과거의 원흉이었다.
혼자일 때는 제 목숨만 걱정하면 되었다. 라테시온 제국의 미래 또한 그렇게 걱정되는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뒈진 후에야 어떻게 되든 말든 알 바 아니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현재로선 전혀 아니었다. 적어도 요정과 아이가 행복하게 살다 자연사할 만큼은 평온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더불어 요정은 피를 싫어한다. 반은 요정의 피를 가진 아이 또한 그럴 확률이 높다. 아이를 위해서는 이미 칼에 피를 묻힌 카론이 나서서 정리해야 할 것이 많다.
‘마녀의 피는 내 대에서 끊는다.’
늘 염두에 두었던 다짐을 다시 새겼다.
“포교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 작업이 있었나?”
“아니요. 사르프는 폐하께서 자율을 보장해 주셨기에 크게 건드리지 않았고, 지금도 그 기조는 변함이 없습니다. 외부적 요인은 아닙니다.”
톰슨은 말을 계속 이었다.
“북부 활동도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마지막 토벌이 근 일 년 되었습니다. 활동을 회복하기에 충분한 데도 오히려 조용해서 이상하던 참입니다.”
“북부에 보낸 첩자의 보고서는 제때 보내고 있지?”
“네. 엘러 경의 말씀에 따르면 정기적으로 정확하게 도착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늘 같습니다. 특별한 낌새가 없다. 파사 일족의 자취를 찾기 힘들다.”
영 찜찜했다.
“혹시 마지막 토벌에서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고 와해된 것이 아닐까요?”
“아니. 그때도 일파의 수장을 잡지 못했다. 그놈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돌아와.”
파사의 수장은 아직도 정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나이도, 성별도 하물며 이름도 몰랐다. 파사 일족 내에서도 ‘일족의 수장’으로만 칭하고 최측근이 아니고선 그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은밀한 만큼 신중하고 신중한 만큼 쉽게 물러설 놈도 아니었다.
수장 놈에 대해 알지는 못하지만, 절명의 순간마다 악운에 가까운 판단으로 카론을 살려 주었던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뭔가 내부적인 변화가 있을 거야. 그게 뭔지 모르는 것이 문제지. 이번 경매장에서도 놈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흠, 좀 더 불을 피워 보는 것이 좋겠군. 사르프 시장에게 따로 연락해서 수감된 사형수를 파사 일당이라 천명하고 공개 처형하라고 시키고 그때 처형장에 그놈들이 나타나는지 두고 보지.”
“알겠습니다.”
“또 북부 산맥에 침투시킨 자와 접선해서 그가 무사한지 눈으로 확인해. 사지가 멀쩡하면 정신이 멀쩡한지도.”
“포섭…… 되었을까요?”
“아니. 정말 파사 일족이 특별한 낌새가 없는 게 아니라면 벌써 죽었을 확률이 높아. 유령 놈이 편지를 보낸 게 아니라면 파사 놈들이겠지.”
“그럼 저희 연락 체계가 뚫렸다는?”
“그럴 가능성을 확인하란 얘기다. 톰슨, 코넬을 데리고 가.”
“네.”
명을 받은 기사 둘이 바로 출발했다.
루벤과 경매장 주변을 둘러보고 돌아온 기사 중 하나는 카론이 친필로 작성하고 서명한 후, 지니고 있던 황제 인장을 찍은 칙서를 가지고 사르프 시장 공관으로 향했다.
휴식을 취하고 가벼운 식사를 마치고 나자 벌써 밤이었다.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던 카론은 경매가 무르익을 시각에 루벤과 함께 나섰다. 불법 장물을 구경할 생각에 부풀었던 기대가 꺼져서 그런지 불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루벤도 따라나섰다. 입구 근처에 이르러 기사들은 경매장 입구마다 매복했고, 카론은 루벤과 함께 입구로 갔다.
“저…… 저도 들어가는 건가요?”
“닥쳐.”
화색을 감추지 못한 루벤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낡은 철문이 가로막은 입구에 이르자 수도복을 뒤집어쓴 노인네가 둘을 맞았다.
“신의 은총이 있기를. 야간 기도회에 오셨습니까?”
“그렇다.”
“표식을.”
카론이 입장권 두 장을 내밀자 노인은 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철문을 여는 자는 곰과 비등한 덩치에 흉악한 인상을 한 남자 둘이었다. 각자 무식한 날붙이를 들고 있었다.
“무기는 여기 놓고 들어간다.”
루벤은 카론의 눈치를 보면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한 놈이 루벤을 수색하는 사이 카론은 검만 뽑아 놈에게 넘겼다. 손잡이를 가죽으로 가려서 황제 인장은 보이지 않으나, 워낙 명검이라 카론의 신분을 파악할지도 몰랐다. 눈치를 봐서 놈들을 때려눕히고 바로 습격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철컹.
카론이 황제로 등극하는 데에 지대하게 공헌한 명검은 다른 쓰레기 날붙이들과 함께 썩은 나무통에 꽂혔다. 검을 알아볼 줄 모르는 무식한 놈이 몸을 더듬어 수색하는 동안 카론은 개자식을 바로 죽여 버릴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멍청한 개자식은 카론이 허리춤에 꽂아둔 단검도 찾아내질 못했다.
“다음.”
일단 통과는 했으나 기분은 시궁창에 빠진 듯했다. 미간에 팬 주름을 보고 루벤이 기겁했다.
“폐…… 아니, 주인님. 지…… 진정하시고 일단…… 경매장부터…… 예?”
황제의 눈치를 보는 건지 혹은 경매장에 못 들어갈까 봐서 무지렁이 놈의 눈치를 보는 건지.
“오늘 여기까지 어려운 걸음 하신 이유를 떠올려 주세요.”
루벤은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서슬이 퍼런 안광이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
“좋아.”
카론은 바로 수도원으로 향했다. 그 뒤를 루벤이 식은땀을 훔치며 따랐다.
수도원 내부는 전부 후드를 뒤집어쓴 음흉한 작자들 천국이었다. 카론보다 일찍 들어온 자들이 낡은 수도원 의자를 빼곡하게 채웠다.
전반부는 별로 흥미 없는 평범한 유물이 나왔다. 그러나 새벽이 무르익었을 때 시작한 후반부는 조금 달랐다.
“이 도자기는 고대 마도 제국 전성기에 제작된 물건으로 특별한 약품을 담았다고 추정됩니다. 강하게 밀봉되어 있어서 천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도 안에 액체가…….”
“만 골드.”
“만 5천.”
도자기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참가자들이 우수수 손을 올렸다. 도자기 자체가 흥미 대상은 아니었다. 안에 남아 있다는 무언지 모를 액체 때문이었다. 썩은 술일 수도 있고, 그냥 물일 수도 있다. 혹은 특이한 약물일 수도. 여기에 있는 놈들은 세 번째를 노리고 거금을 낭비했다.
“안 사십니까?”
맨 뒤 가장자리에 선 카론을 보며 루벤이 슬쩍 떠보았다.
“쓰레기를 왜?”
“아니…… 특수한 약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저런 도자기 병에서 발견된 약품 때문에 의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기도 하고 그 김에 도자기 연구도 좀 하고…….”
“필요성이 입증되면 누가 샀는지 알아봐서 아서 엘러에게 얘기해. 알아서 압수할 거다. 전부 제국법상 불법이니.”
“아, 그렇군요.”
맞아 황제였지 참. 장물에 돈을 낼 필요가 없었어. 이러면서 루벤이 제 이마를 살살 긁었다.
다른 놈들은 눈에 불을 켜고 하나라도 더 확보하려고 기를 쓰는 판이었지만, 카론에게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게 정말로 나오나?”
“상인 말로는 나온다고 했습니다. 건너 건너 아는 사람이 이번에 놀라운 마도구를 출점한다고 은근히 귀띔했어요.”
기가 막혀서 카론은 눈만 내려 루벤을 노려봤다. 루벤은 뭘 잘못한 줄도 모르고 눈만 살살 굴렸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무슨 물건인지도 모르고 출점자가 누군지도 모른단 얘긴가?”
“……아니, 뭐.”
“이 빌어먹을 버러지 새끼가.”
순간 욕이 튀어나왔다. 카론은 저도 모르게 루벤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이 내게 받은 명령이 뭐지?”
“커…… 여…… 영원히 빛나는 도구……에 관해 알아…… 보라…… 억.”
“그랬다. 그 때문에 중요한 시기에 황궁을 비우고 더러운 수도원까지 왔어. 그런데 명확한 정보가 아니야?”
“아니…… 그게.”
다른 손을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단검을 꺼내서 쓸모없는 혓바닥을 잘라 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카론!”
“……?”
“폐…… 하!”
“아가르타?”
마치 마법 같았다.
먼 황궁에 있는 요정의 음성이 거짓말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카론은 단검을 쥔 채 주변을 둘러봐야 했다.
“뭐지? 방금 나를 부른 것 같았는데.”
“커억…… 폐…… 하. 살려 주세…….”
버둥거리는 루벤을 밀치듯 놓았다. 기분이 이상하게 찜찜했다. 황궁을 떠날 때 느꼈던 기이한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아가르타에게 무슨 일이 있나?’
근거 없는 뜬소문 때문에 여기에서 시간을 버릴 수 없다. 막 입구로 향하는데 카론의 손에 루벤이 죽느냐 마느냐 하는 사소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계속 이어졌던 경매는 절정에 이르렀다.
“드디어 오늘의 최고 상품을 소개합니다.”
밖에서 입장객을 수색하던 덩치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덮개를 씌운 수레 하나를 끌고 와서는 양가에 섰다. 무식한 날붙이를 위협하듯 어깨에 척 걸쳤다. 열렬히 경매에 참여하던 놈들 외에 조용히 지켜보던 놈들까지 일제히 웅성대기 시작했다.
“조용, 조용!”
경매를 이끌던 놈은 낙찰을 알리던 나무 인장을 땅땅 치면서 주변을 조용히 만들었다.
“이것으로 말씀드리면 고대 마도 제국의 유물 중에서도 극히 드물다는, 북부 황무지 신전 터에서 직접! 발굴해 온! 아직도 작동하는! 살아 있는 마도구입니다. 작동 방법을 연구할 기회는 낙찰자에게 우선 돌아갑니다!”
“허억.”
숨을 들이마신 루벤이 카론을 보며 속삭였다.
“저겁니다. 저거.”
“닥쳐.”
살아 있는 마도구.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제국법에 따르면 그것을 취급한 자는 중죄인이며 그 존재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도 죄인이었다. 여기 있는 놈들은 전부 감옥행이다. 물론 저 경매자 놈과 출품자는 사형.
“나가서 기사를 불러와. 들어오면서 내 검도 가져오라 해.”
루벤은 부리나케 밖으로 튀어 나갔다. 카론 또한 뒤를 의식하며 밖으로 향할 때였다.
경매사가 수레 덮개를 확 열었다. 순간 경매에 참여한 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그것은 둥근 금속 원판이었다. 황금 동전을 대형 접시 크기로 크게 확대한 듯한 모양새에 고대 마도 제국의 유물임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번쩍이는 광택이 흘렀다.
‘가짜군.’
아무리 그래도 유물이 저렇게 멀쩡한 게 말이 되지 않았다. 흥미가 뚝 떨어졌다.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재질은 황금! 이라고 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황금이 아닙니다. 왜냐? 녹지 않거든요. 그랬다면 익명에 부친 소유자가 벌써 녹여서 팔았을 겁니다. 이 자리에 나오지도 못했을 귀한 유물입니다. 그러나 황금처럼 광택이 변하지 않습니다. 어떤 독이나 산을 부어도 광택이 사라지지 않아요.”
경매사의 손짓에 덩치 중 하나가 작은 병을 꺼내 황금판 위에 부었다. 매끄럽게 떨어지는 투명한 물줄기는 수레에 닿자마자 ‘치이이익’ 하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보시다시피 강한 염산에도 견딥니다. 황금 이상의 강도와 순수성을 가진 물건! 영원히 변치 않는 황금빛! 게다가 중간에 새겨진 화려한 꽃문양을 보십시오.”
카론은 제 귀를 의심했다.
“영원히 변치 않는 황금에 새겨진 꽃?”
시선이 절로 황금판으로 갔다. 그 중심에 새겨진 꽃은 커다란 꽃잎이 겹겹이 새겨져 얼핏 활짝 핀 장미 같기도 하고 작약 같기도 했다. 은은한 황금색 광택은 요정의 꽃보다는 못해도 문양이 어딜 봐도 그 꽃이었다. 머리가 싸늘하게 식고 반대로 심장은 쿵쿵 뛰었다.
“위대하신 영웅 황제께서도 암암리에 그렇게 찾고 계시는 그 물건! 그것을 가질 기회는 지금뿐! 특별히 염가 십만 골드에서 시작합니다.”
“십오만!”
“이십만 골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우선 저것을 확보해야 한다. 카론은 단검을 고쳐 들었다. 그리곤 신속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수라장에 가까운 경매꾼들 사이를 헤치고 가는 동안, 덩치 중 하나가 카론을 발견했다. 무식한 쪽은 아니었다. 놈은 옆에 동료의 어깨를 툭툭 치며 카론 쪽으로 턱짓했다. 두 놈은 무식한 날붙이를 고쳐 들며 경계했다.
“자자! 진정하십시오! 이십만 골드까지 나왔습니다. 이십만 골드. 그 이상은 없습니까?”
“백만.”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중간까지 다가온 카론을 본 경매사가 진의를 의심하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배…… 백만. 백만 나왔습니다! 백만!”
“백일만!”
“백십만!”
“이백만.”
카론이 두 배를 높이자 경매사가 다시 제 귀를 의심하듯 카론을 다시 봤다.
“이백만? 진심입니까?”
“물론.”
“처음 오신 분 같은데.”
숫자가 너무 높아서 그런지 경매사가 제동을 걸었다.
“혹시 귀하의 소속을 여쭤봐도 됩니까? 아, 오해하지 마십시오. 귀하의 개인 신분이나 혹은 사용 용도를 따지진 않습니다. 그저 대금 지불이 가능한지만 확인케 해 주면 됩니다.”
“그래? 그러면 이건 어떤가?”
경매사가 있는 연단에 가까이 다가간 카론은 지니고 있던 작은 가죽 주머니를 던졌다. 양손으로 허둥지둥 주머니를 받아 든 경매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백만 골드라기에는 주머니가 너무 작고 조촐하기 때문이었다.
“이건 고작 이십 골드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은데.”
놈의 말이 갑자기 짧아졌다.
“촉감이 보석 같지도 않고.”
“안을 보고 얘기하지.”
믿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경매사는 주머니를 끌렀다. 그러는 사이 카론은 점점 수레에 다가갔다. 단검을 쥔 손을 등 뒤, 망토로 가리고 있어 어딜 봐도 수상한 태도였다. 덩치 둘이 카론을 의식하면서 한 발짝 앞섰다.
“뭐야, 역시 골드잖아. 고작 이십 골드도 안 되는 돈으로 이백만 골드라고 뻥을 치…… 히이이익!”
갑자기 경매사 놈이 발작하며 자지러졌다. 그 바람에 동전이 사방에 흩어졌다.
“황제의 금화다!”
“허어억!”
“근위 기사단이야!”
경매꾼들이 모조리 발작하며 입구를 향해 달렸다. 그와 동시에 카론은 단검을 날렸다. 그것은 덩치 중 멍청이 놈의 목 아래 정확하게 꽂혔다.
“컥!”
제대로 저항도 해 보지 못한 놈이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뒤이어 다른 놈이 달려들었다.
“드아아아!”
투박한 몸짓을 가볍게 피하며 카론은 놈의 다리를 걸었다.
우당탕!
경매꾼이 앉아 있던 의자에 처박힌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죽은 놈의 무식한 날붙이를 집어 들었다. 황금판을 챙기는 경매사 놈에게 다가갔다.
“아…… 아…… 하필이면!”
경매사가 오들오들 떨면서 뒷걸음쳤다.
“암암리에 그렇게 찾고 있음을 알았으면 오늘 나타나는 것도 예상했어야지. 그걸 넘겨라. 그러면 고통 없이 깔끔하게 보내 주지.”
카론이 경고하자 놈은 덫에 갇힌 쥐새끼처럼 다리를 떨었다.
“으아악!”
뒤에서 덩치가 다시 달려들었다.
덩치만큼 힘이 상당했다. 하지만 제대로 단련한 검술이 아니라 투박하여 허점이 많았다. 체중을 실은 공격을 간단히 막고, 힘겨루기만 하는 덩치의 빈 배를 발로 걷어찼다.
쿠당탕!
덩치 놈이 뒤로 자빠졌다. 바로 숨통을 끊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황금판 확보가 먼저였다. 뒤를 돌아보자 경매사 놈이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경매사 전용 출입구로 보이는 뒷문으로 향하는데 덩치 놈이 쉬지 않고 달려들었다. 귀찮더라도 숨통을 끊어야만 했다.
놈을 처리한 후에 다른 놈의 목에 꽂힌 단검을 수거하여 빠르게 경매사 놈을 쫓았다. 작은 토굴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었고 그 끝에서 놈의 기척이 느껴졌다.
빠르게 쫓아갔다. 토굴의 끝은 수도원 다른 쪽 입구로 연결되었다. 막 밤하늘을 찾아냈다고 생각하는 순간 철창이 덜컥 닫혔다.
“헤헷!”
쥐새끼 같은 놈은 카론의 앞에서 철창을 잠갔다. 쇠사슬과 자물쇠를 본 카론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자 놈은 보란 듯이 열쇠를 저 멀리 어딘가로 던졌다.
“그럼 안녕!”
히죽 웃은 놈은 황금판을 안고 후다닥 달아났다.
“빌어먹을.”
단검으로는 쇠사슬을 끊기 역부족이었다. 철창 경첩도 너무 튼튼했다.
하는 수 없이 뒤로 빠져 경매장으로 돌아갔다.
“페하!”
루벤과 기사단이 카론을 보며 반색했다.
“사르프 시경비대가 경매꾼들을 체포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무사하십니까?”
“저쪽 뒷문으로 경매사가 달아났다. 도주로는 지금 철창에 막혔다. 놈은 꽃이 새겨진 황금판을 가지고 있어. 동전 모양에 크기는 대형 접시만 하다. 그걸 반드시 수거해 와. 경매사의 생사는 무관하다.”
“예!”
기사 하나가 카론의 검을 내밀었다. 그것을 검집에 꽂은 후에 바로 밖으로 향했다. 말을 타고 쫓는 편이 나았다.
기사가 데려온 군마에 훌쩍 오른 카론이 경매사가 달아난 방향을 향해 막 달리려던 무렵이었다.
“뿌우우우!”
긴급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렸다. 오랜 전쟁의 기억을 가진 신체가 반사적으로 출발을 멈추었다. 수도원 밖에서부터 흰 제복에 붉은 깃발을 올린 근위 기사 하나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폐…… 하!”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놈과 놈의 말은 더운 김을 미친 듯이 몰아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화…… 환궁하십…… 시오…… 황…… 후…… 폐하께서…… 지금…….”
“황후가?”
“출…… 산 중이…… 십…… 허억.”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카론은 군마의 배를 거세게 걷어찼다.
“히이잉!”
앞발로 공중을 휘저은 군마는 쏜살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기사 둘이 급하게 쫓았다.
황궁을 떠날 때부터 느낌이 영 이상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기이한 불안감에 좀 전 요정이 저를 부르는 환청까지. 출산이 예상보다 빨라서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불안감이 카론을 채찍질했다.
‘아가르타!’
이미 황금판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요정의 안위가 염려스러웠다. 영문 모를 불안이 그저 기우이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해가 뜨기 전 카론은 황궁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제도경비기사단은 때에 맞춰 문을 열었다. 황궁의 정문도 이미 열려 있었다. 사르프에서 황궁 중앙정원까지 쉬지 않고 달린 군마는 반쯤 넘어지듯 궁 입구에 멈췄다.
히이잉!
흥분이 지나친 놈이 앞말을 들썩이는 동시에 카론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렌이 나타나 빠르게 벗어 던지는 장갑을 받아 들었다. 말을 달리는 동안 카론의 숨도 매우 거칠어져 있었다. 거센 맞바람과 승마의 진동을 견딘 몸도 자잘하게 떨렸다. 하지만 카론은 지친 기색 없이 빠르게 정궁 안으로 진입했다.
“요정은?”
“황후 폐하께서 조금 전 아기님을 낳으셨습니다. 건강한 황자님이십니다.”
“그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에 급히 계단을 오르던 카론은 잠시 멈추어 그렌을 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가슴에 뭉글뭉글한 덩어리가 생겼다. 희열과 기쁨, 그리고 이상하게도 명치가 조금 아렸다.
건강한 황자.
내 아들.
평범한 단어가 마치 마법의 언어처럼 은은하게 진동하여 심장 부근을 아프게 했다. 숨을 고르면서 아찔한 시야가 다시 돌아왔다. 아들이며 건강하다고 하니 그보다 더 급한 궁금증이 떠올랐다.
“요정은?”
“골든 피오니에 계십니다만…… 폐하!”
도착하자마자 말을 달리느라 뒤집어쓴 흙먼지를 제대로 씻어내지도 않고 바로 골든 피오니로 성큼성큼 향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지금…….”
“무슨 문제가 있나?”
“산통이 너무 길었습니다. 황후 폐하의 체력이…….”
뒷말이 교묘하게 사그라졌다. 평소 그렌의 어투를 잘 알기에 그것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님을 직감했다. 전신에서 핏기가 몰려나갔다. 일시적으로 시야가 시커멓게 꺼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걸음을 멈춘 싸늘한 음성으로 다시 캐물었다. 그렌은 음울하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눈을 뜨지 못하십니다.”
경악성을 내지를 여유도 없었다. 그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골든 피오니로 들이닥쳤다.
쾅!
“아가르타!”
막 침실에서 나오던 올리아가 깜짝 놀랐다.
“폐하!”
응접실 한구석에서 하얀 천 뭉치를 소중히 들고 있던 마그네도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으아아앙!”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아기님. 괜찮아요. 아버님이십니다. 아버님이세요.”
마그네가 품에 안은 아이를 어르고 다독였다. 순간 그쪽을 돌아볼 뻔했다. 그러나 카론은 우렁차게 우는 아들보단 눈을 뜨지 못하는 요정이 먼저였다.
침대에 다가가며 급하게 망토와 재킷을 벗었다. 더러운 흙먼지를 끼얹은 채로 요정을 만질 수는 없었다. 침대 가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누워 있는 사람을 불렀다.
“아가르타?”
검은 머리카락이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았다. 마치…… 시체 같았다. 도톰하게 올린 시트 위에 놓인 흰 손을 잡았다. 반나절 이상 말을 달린 제 체온이 너무 올라서인지, 요정의 손은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한 손으로 손을 조심스럽게 압박했다가 풀면서 다른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한 손으로 넉넉하게 가리는 이마는 제법 따뜻했으나 식은땀으로 인해 축축했다.
“내가 왔다. 눈을 떠 봐.”
눈을 뜨지 못한다는 얘기가 요정을 계속 부르게 만들었다. 잠시라도 그가 눈을 뜨면 뭔가 희망이 보일 것 같았다. 계속 손을 주무르고 팔을 쓸었다. 이마와 뺨을 다독이며 수차례 이름을 불렀다.
올리아는 핏물이 가득한 시트를 걷어 내고 요정의 다리를 세워 뭔가 처지를 시작했다. 약물로 적신 붕대가 여러 개 다리 사이로 사라졌다.
“으으…….”
고통스러운지 요정이 신음했다. 동시에 흰 미간이 일그러졌다. 뒤이어 검은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리더니 이윽고 눈꺼풀이 슬쩍 올라갔다.
“페…….”
카론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숨을 뱉으며 엷게 미소 지었다.
“난 여기에 있다. 아가르타.”
“……아…… 기…….”
“아기는 무사하다. 아들이라는군. 보지 못했지만 우는 목소리를 들으니 기운찬 녀석이야.”
“아…….”
“말을 하지 말고 이만 자라. 너는 아프다. 아플 땐 자야 해.”
이미 두툼하게 덮은 이불 위로 더 많은 이불을 올렸다. 그런데도 손발은 점점 차가워졌다.
“화로를 들여. 벽난로를 피워라.”
뒤이어 마그네가 들어와 화로를 준비했다. 그 위에 놋쇠 물 주전자도 놓았다. 금방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후 폐하께서 이…… 이렇게 하시길 좋아하셨습니다.”
“아기는?”
“목욕시키고 황후 폐하께서 준비하신 아기 침대에 눕혀 두었습니다. 잠시 후 첫 수유를 할 때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지금 데리고 올까요?”
카론은 요정을 봤다. 요정은 반쯤 감긴 눈으로 입을 달싹였다.
“소…… 바알…… 다…… 서엇?”
“네. 손가락도 발가락도 전부 다섯 개입니다. 귀도 예쁘고 이마도 반듯하고 전신이 안 예쁜 곳이 없습니다. 아직 눈 색은 모릅니다만, 머리카락은 까만색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황후 폐하를 닮았습니다.”
요정의 말을 용케 알아들은 마그네가 얼른 대답했다. 그에 요정은 만족한 듯 파리한 입술 가를 힘겹게 끌어올렸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움직여 카론을 보았다.
“아…… 이…… 르음…….”
“이름?”
눈을 깜빡였다 뜬 요정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목소리가 너무 작자 제대로 들리지 않아 카론은 귀를 입술 앞에 대어야 했다.
“오…… 오…… 은.”
“온?”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말미를 올리자 다시 눈을 깜빡인 요정은 희미하게 웃었다.
“사…… 랑하…… 세…… 요. 온…… 이…… 사랑…….”
“당연하다. 누구보다 아낄 것이다. 그러니 괜한 말 하지 말고 네 몸부터 돌보아. 넌 지금 아이 걱정을 할 때가 아니다. 우선 잠부터 자야 해.”
여전히 숨을 쉬고 있는데도 마치 당장 죽을 사람 같아 심장이 철렁했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시시각각 창백해져 갔다. 올리아가 처치한 지혈제가 효과가 있는지 간신히 피는 멎었다.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 기력을 보하는 영양제도 한 병 몽땅 마시게 했다.
차도가 없었다. 요정의 숨은 옅어지고 손발은 식어 갔다. 뜨거운 물주머니를 침대에 집어넣고 어떻게든 버티기만을 바랐다. 그래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식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어.”
누군가의 죽음이 이렇게 두렵긴 처음이었다. 얼른 죽으라고 수없이 되뇌었던 마녀의 시신 앞에서도 어떤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제게 금발을 물려준 아바라는 작자는 직접 목을 베고 일그러진 얼굴을 성벽에 내걸었다. 처음 보는 낯짝의 혈육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에도 어떤 슬픔이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마음을 주었다고 믿었던 여자와 친우가 배신한 순간에도 분노는 느낄지언정 괴롭거나 슬프진 않았다. 두려움을 느낀 일은 더더욱 없었다. 절명의 순간에도 악운이 통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이대로 뒈지는군 이라는 단순한 감상이 전부였다.
“두려움이란 이런 건가?”
머리털이 쭈뼛 서면서 목 아래 서늘한 칼날이 들어오며, 폐가 쪼그라드는 이런 감각은 평생 느낄 일이 전무 했다. 검은 죽음의 바닥이 보이지 않는 아가리 속으로 떨어지는 초라한 인간의 입장이 되어 본 일은 처음이란 얘기였다.
요정이 죽어 간다.
카론 유스키아의 사랑스러운 요정이.
현실을 맞닥뜨리자 알몸으로 얼음물 속에 던져진 듯 전신이 덜덜 떨렸다. 말초의 감각이 무뎌졌다. 머릿속은 곤죽이 된 듯 혼란의 폭풍이 몰아쳤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귀가 먹먹했다. 느낄 수 있는 건 요정의 차디찬 손뿐이며 들리는 건 점점 잦아져 가는 숨소리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는 숨을 쉬는 것도 두려웠다. 제 호흡으로 인해 요정이 마실 공기가 없어질까 봐서.
“제…… 발…… 죽지 마라.”
처음으로 하는 애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미 손을 쓸 일이 없는 올리아도, 아이를 봐야 하는 마그네도, 그렌도 자리를 비웠다. 골든 피오니에는 카론과 생명력이 사라져 가는 요정뿐이었다.
미약한 숨소리가 들릴 만큼 어두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식어 가는 손을 쥐고 내내 애원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창가가 희미하게 빛나면서 길쭉한 인영이 나타났다. 애초에 눈코입이 없는 인영은 팔다리만 보일 뿐 손발의 형태도 불분명했다.
“누구냐?”
황금색 오라로 휩싸인 몸의 형태는 어딘지 익숙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파사 놈의 사술인가? 황궁에까지 손을 뻗다니. 오늘은 날을 매우 잘못 잡았어. 네놈들…… 뼈까지 부숴 돼지에게 먹일 테다.”
어금니가 으득 갈렸다. 카론은 반사적으로 손을 등 뒤로 뻗었다. 단검을 쥐는데 황금색 인영이 팔을 들었다. 그리곤 문 쪽을 가리켰다.
꽃…… 잎을 먹여…… 꽃잎을.
“뭐? 꽃?”
영원…… 한 생명을 가진 꽃잎 한 장을…….
“네 말을 믿을 것 같나?”
……카론…… 꽃…… 잎을.
이름까지 부르는 기분 나쁜 인영을 향해 기어이 단도를 던졌다. 인영을 통과한 단도는 창으로 바로 날아가 커튼을 찢고 유리를 깼다.
“……!”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론은 인영이 있던 쪽을 응시했다. 커튼은 멀쩡했고 유리창도 깨지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등 뒤로 뻗자 애용하는 단검 자루가 만져졌다.
“꿈인가?”
꿈이기엔 너무 생생했다. 내용도 기이했다. 미간을 찡그리며 요정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보다 훨씬 창백했고 숨은 귀를 코 가까이 대어서야 아주 미약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지혈을 했고 약도 먹였다. 그 이상은 요정의 체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제 피라도 먹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래봤자 무용지물이었다.
“어차피 죽어 간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기괴한 유령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요정이 가져온 황금색 꽃. 그 꽃은 지금도 찬란하게 빛나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 꽃이었다.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있을 법도 했다.
집무실로 뛰어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꽃은 여전히 찬란하게 빛났다. 꽃을 낚아채자마자 골든 피오니로 돌아갔다. 반쯤 뛰면서 가장자리 꽃잎을 뜯어냈다. 상당히 질겨서 힘을 제법 주어야 했다.
우지직.
실크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꽃잎이 뜯겼다.
골든 피오니로 돌아오자마자 카론은 요정의 입을 열고 꽃잎을 넣었다. 정신을 잃은 요정은 그저 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무슨 멍청한 짓인가.
“빌어먹을.”
잎을 가져와 질겅질겅 씹었다. 평소엔 향기가 나지 않은 꽃이었는데 막상 씹자 입 안에 향수를 퍼부은 듯 진한 향이 번졌다. 쓴물도 살짝 느껴졌다. 귀한 즙을 제가 삼키지 않도록 노력하며 카론은 침대로 올라가 요정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입을 벌리고 씹은 꽃잎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마른 혀를 빨아 목구멍으로 제대로 넘기도록 애를 썼다. 잠시 쿨럭거리던 요정은 다행스럽게도 꽃잎을 무사히 삼켰다.
기대에 찬 눈으로 요정의 안색을 살폈다. 계속 감긴 눈을 보면서 카론은 고작 꽃잎 하나 먹였다고 마법처럼 살아날 것을 기대했음을 깨달았다. 마법이며 마녀며, 주술이며 항상 혐오하고 부정했던 자신이. 근거도 없는 꿈인지 환영인지 모를 것에 기대서 꽃을 씹어서 먹이다니.
절로 쓴웃음이 났다. 그래도 절박함은 진심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마법의 실존을 간절히 바랄 만큼. 요정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언젠가 요정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종종 했다.
아름답고 늠름한 요정의 본 모습을 아는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요정이 옛 정혼자를 아직도 마음속에 담아 둔다는 걸 알았을 때. 요정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걸 알았을 때.
요정이 원하는 걸 다 들어주면 될 줄 알았다.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단은 단서부터 모조리 없애면 될 줄 알았다. 둘의 아이가 있으니 머무를 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떠나려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가르타.”
침대 곁을 뒹구는 꽃의 찬란한 빛을 받자 창백한 얼굴에 한결 생기가 돌았다. 비록 착시에 지나지 않겠지만.
“눈을 떠.”
응답이 돌아오지 않는 이름을.
“아가르타.”
……부르고 또 불렀다.
* * *
사방이 어두웠다. 위도 아래도 없는, 끝도 알 수 없는 무서운 어둠 속을 분홍이는 혼자 헤맸다.
엄마! 큰엄마! 아버지! 누님! 형님!
목이 터지라고 외쳤다. 어둠은 메아리도 없이 목소리를 석둑석둑 잘라먹었다. 큰엄마가 지어 준 고운 연홍색 옷을 펄럭이며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렸다.
엄마! 큰엄마! 엄마!
멀리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누군가가 저를 부르고 있었다. 묵음으로나마 한껏 외치는 분홍이와 달리 걱정이 깃든 다정한 음성은 꺼질 듯 작게 저를 불렀다.
귀도 먹먹하여 뭐라 부르는지 분간이 힘들었다. 엄마처럼 똑 떨어지는 명채운인지, 혹은 아버지, 큰엄마처럼 한껏 자애로운 우리 분홍이인지. 혹은 형님, 누님처럼 귀여워 죽겠다는 예쁜 내 아우인지.
투명한 파문이 어둠을 흔들고 연한 빛이 두려움에 떠는 분홍이를 향해 손짓했다.
누구야? 엄마? 큰엄마?
아버지, 형님, 누님 돌아가며 외쳤으나 딱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다급한 몸짓은 물속에 빠진 사람처럼 무거웠다. 날리는 머리카락도, 옷자락도 수초처럼 느릿느릿 흔들렸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불빛을 잃어버릴까 덜컥 두려웠다. 눈물을 알알이 흩뿌리면서 빛을 향해 안간힘을 썼다. 영 소용없는 몸부림은 아니었는지 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만큼 저를 부르는 목소리도 또렷해졌다.
낮게 울리는 음성은 긁히듯 거칠었다. 아버지의 것도, 두 분 형님의 것도 아니었다.
태손 마마? 태손 마마?! 저를 데리러 오셨나요? 여기까지 저를 찾아오셨나요?
반가운 눈물을 흘리며 냅다 달렸다. 기를 쓰자 빛은 점점 가까워져 오고 빛은 느닷없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뒤로 물러나고 세찬 빛의 폭풍에 전신이 화하게 달아오를 무렵.
아가르타.
반가움에 힘차게 뛰던 염통이 갑자기 얼어붙었다. 허우적대던 손발도 멈췄다.
아가르타.
아니야. 난 아가르타 아니야. 난 분홍이야. 명채운이라고!
아가르타.
저리 가! 저리 가! 싫어! 너 같은 거 싫어!
손을 휘적이며 마다했다. 그러나 빛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부르는 개종자의 음성은 더욱 커졌다. 빛의 폭풍은 이내 용오름으로 변하여 하늘로 치솟았다.
아가르타.
싫어!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아가…… 르…… 으아아앙.
개종자의 음성이 갑자기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소름이 쭉 끼쳤다. 허우적대던 사지를 멈추고 빛의 중심을 보았다. 맹렬하게 몰아치던 빛이 금방 또 사그라지고 있었다.
아아아아앙.
귀를 때리면 우는 목소리. 염통을 찌르며 폐부를 쥐어짜는, 애처로운 울음소리.
누구? 누구?
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앙!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손이 갔다. 잡아먹을 듯이 쇄도하던 빛 덩어리가 이번에는 갑자기 멀어졌다. 아기 울음소리도 멀어져갔다.
아…… 안 돼. 울리지 마. 울리지…… 마아!
가슴이 아팠다. 얼른 가서 얼러 주어야 하는데. 귀한 아인데. 죽고 싶을 순간마다 기쁨과 행복으로 살게 해 준 아이인데.
내 아기야! 울리지 마아!
손을 뻗으며 이번에는 빛을 향해 버둥버둥 몸부림을 쳤다.
내 아기 데려가지 마. 내 아기!
다급함에 목놓아 불렀다.
카론!
빛에서부터 긴 팔이 불쑥 뻗었다. 우악스러운 손은 한껏 뻗은 채 닿지 못한 분홍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빛 속으로 쑥 잡아당겼다.
“헛……!”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반쯤 밀어 올리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아으…….”
“아가르타!”
곁에 있던 빛의 덩어리가 설렁 움직이며 저를 불렀다. 아련한 진동이 아니라 생생한 목소리였다.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흐린 시야에 보인 것은 카론의 금발이었다. 어디선가 빛을 받아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밝은 금발이 유난히 빛이 났다.
“아…… 으.”
“드디어 정신이 들었군.”
대단히 안심한 듯이 그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힘없는 분홍이의 손을 들어 뺨에 댔다. 딱딱한 뺨이 어쩐 일로 축축했다. 다른 이도 아닌 개종자가 울 리야 만무하니 제 손에 식은땀이 난 게 분명했다.
“눈을 떠서 다행이야.”
거칠고 딱딱한 음성은 다소 지친 듯했다. 언제 온 걸까. 정신을 잃었을 때 왔나? 전혀 기억이 없었다. 아마도 금방 온 듯했다. 윗옷만 벗었을 뿐 더러운 외출복 그대로였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희미한 피 냄새도 났다.
사람을 죽였으면 소금으로 목욕을 하고 들어오라고 했건만. 잡힌 손을 슬쩍 뺐다. 아까부터 아이 울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기…… 울어.”
“마그네가 돌보고 있다.”
“아기…… 줘.”
“아들이야.”
“아기.”
“지금은 안 돼. 넌 죽을 뻔했어. 쉬어야 해.”
“아기.”
점점 음성이 또렷해졌다. 분홍이는 카론을 보며 아기를 계속 요구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그네가 아이를 안고 침실로 들어왔다. 빽빽 울어대는 빨간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그는 분홍이가 눈을 뜬 것을 보고 감격을 금치 못했다.
“폐하.”
울먹거리는 마그네는 카론이 뭐라고 하기 전에 아기를 안고 침대 반대편으로 왔다. 이불을 들어 분홍이 품에 아기를 안겨주었다. 아기를 보느라 힘겹게 몸을 돌렸다. 자연히 카론을 등지게 되었다.
빨간 얼굴로 우렁차게 울던 아기는 분홍이의 품에 안기자 놀랍게도 금방 울음을 그쳤다. 눈물이 새는 실눈을 움찔거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전신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픈 상황에서도 제법 웃음이 났다.
“예쁩니다. 내 아기. 예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엄마도 자신을 낳았을 때 이랬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저 살아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아기의 머리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분홍이는 아기를 베개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후에 베넷 이불을 풀었다. 손발이 멀쩡한지 혹은 어디 하나 모자란 곳은 없는지. 아무래도 제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분홍이가 사전에 지시하여 리자가 고운 면으로 지은 배냇저고리는 아이에게 아직 약간 컸다. 소매를 헤쳐 양쪽 손가락 다섯 개를 확인하고 이후에 발가락도 다섯 개씩 일일이 세었다. 어디 멍도 없고 다리나 팔이 구부러진 곳도 없다. 기저귀를 살짝 내렸다.
“풋.”
작은 고추와 탐스럽게 달린 작은 방울을 보고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애구나.”
“아까 정신이 드셨을 때 말씀을 드렸는데…… 기억이 나지 않으신가요?”
“언제?”
“아.”
마그네는 그러면서 뒤에서 이쪽을 지켜보는 남자를 슬쩍 봤다. 정신을 잃은 황후의 곁을 내내 지켰던 그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이제는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요정의 등을 응시했다.
“아, 폐하. 황제 폐하께서도 아직 아기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셨습니다.”
“흐음.”
분홍이는 그 말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곁눈에 카론의 그림자가 슬쩍 걸렸으나 몸이 아파 이내 도로 아기만 봤다.
자기가 자는 동안 아기도 보지 않고 무엇을 했단 말인가. 제 새끼가 어떤 모양새로 태어났는지 궁금하지도 않다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에게 신경을 쓰느니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눈에 넣고 싶었다.
작은 배를 토닥이면서 감격하다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얼마나 곤하게 잤을까. 잠든 줄도 몰랐다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움직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으읏.”
멍석말이를 당하면 이렇게 아플까. 사정없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픈 상황에서도 아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기.”
퉁퉁 부어 들러붙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렸다. 제 곁에 얌전히 놓여 있는 작은 뭉치를 보고서야 안도했다.
“아아앙.”
아기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입을 연신 오물거리는 걸 보니 배가 고픈 것 같았다. 곁에 앉아 있던 마그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마그…… 네.”
“네, 폐하.”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조처할지 이미 많은 설명을 했기에 마그네는 얼른 푹신한 베개를 가져와 분홍이 등에 받쳤다. 엉덩이에 무게가 쏠리면서 저절로 죽는소리가 나왔지만 분홍이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좀 더 작은 베개는 아이 밑에 받친 마그네는 분홍이가 소매 한쪽을 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음인이라도 남자이기에 여자처럼 젖이 펑펑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저 초유 아주 조금이 다였다. 그래도 최대한 먹이는 것이 좋다고, 큰엄마와 엄마가 강조했다. 기력은 없어도 초유는 조금 나왔다.
“내 아기, 예쁩니까?”
“네, 누가 봐도 천사처럼 예쁜 아기님이에요.”
분홍이와 마그네는 아기의 얼굴을 보며 서로 감격했다. 갓난쟁이는 젖을 빨다가 금세 잠들었다. 새근새근 자는 빨간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너무 사랑스러워서 눈가가 시큰하고 명치 언저리가 욱신댔다.
“작아요. 너무 작습니다.”
“황자님이시니 앞으로 늠름하게 자라시겠지요?”
“아.”
순간 까맣게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남녀 성별만 확인했지 음양을 확인하지 않았다.
“마그네, 더운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오세요.”
“네.”
흔치 않은 남자 음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니 음인일 가능성이 아무래도 좀 있었다. 큰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분홍이는 새끼손가락을 입에 넣어 침을 묻혔다. 그것을 조심스럽게 아기의 여린 항문에 넣어 보았다.
‘이쯤인가?’
기분이 이상한지 잠든 아이가 작은 얼굴을 찡그렸다. 손가락 한 마디를 넣고 배 쪽 내벽을 문질렀다. 그러자 아이는 뭐가 그리 싫은지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괜찮아.”
매끈하고 어떤 틈도 없었다.
“양인이구나.”
설핏 웃는 순간 짙은 그림자가 분홍이를 훌쩍 덮었다.
“무슨 짓이야!”
성난 고함이 벼락처럼 내려쳤다. 오래 잠들었다가 깼는데도 그가 아직 있는 줄 몰랐다.
카론은 기겁한 분홍이의 손목을 억센 손길에 확 낚아챘다. 그 바람에 놀란 아이는 경기를 일으킨 것처럼 빽빽 울기 시작했다.
“아.”
무슨 영문으로 화를 내는지 몰라도 자지러지게 울다가 베개에서 데구르르 굴러서 흐른 아기를 안아 올리는 게 먼저였다. 잡힌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카론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치르며 분홍이를 거세게 밀쳤다.
“윽!”
비록 베개가 등을 받쳐 주긴 했으나 산통이 가시지 않은 몸으로는 온몸이 바스러지는 듯이 아팠다. 눈앞이 팽팽 돌아도 분홍이는 아기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러나 카론이 먼저였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거친 손길로 베넷 이불을 수습한 그는 분홍이의 손이 닿기도 전에 아이를 안아 올렸다. 그리곤 분홍이를 향해 윽박질렀다.
“미쳤어?”
화를 내는 일은 종종 있었다.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고 서늘한 목소리로 분홍이를 겁박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나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네가…… 어떻게…….”
혐오감을 만연히 드러내고 미친 사람을 보는 듯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슨?”
“어떻게 이렇게 작은 아기에게 어…… 어떻게 그런 더…… 더러운 짓을.”
정신이 혼미한 분홍이는 영문도 모르는 채 카론이 아이를 채가는 광경을 봐야 했다. 더운 수건을 들고 오던 마그네는 어리둥절하여 카론을 지켜볼 뿐이었다.
한 박자 늦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이 되었다. 개종자가 아이를 빼앗아 갔다. 분홍이가 자신을 죽이고 또 죽여 기른 소중한 아이를. 천하의 사악하고 추악한 악귀가 아기를 빼앗아 간다. 매번 빼앗아 간다. 꽃도, 옷도, 새도. 이젠 아기마저도.
흐린 눈물이 앞을 가렸다. 차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짙은 어둠 속에 잠겨 헤매던 꿈처럼, 사방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사지가 부러진 짐승처럼 침대를 기어 카론을 쫓았다. 곧 반대편에 닿았고 기던 손이 공중을 헛짚었다. 절망에 찬 오열이 터졌다.
[허윽……!]
“폐하!”
[언제까지, 어디까지 빼앗을 테냐…… 이 천한 악귀 놈아…… 내게서 무엇까지 빼앗아갈 거냔 말이다. 언제까지…… 더는, 더는 빼앗기지 않을 거다…… 더는.]
마그네가 수건을 버리고 침대 아래로 고꾸라지는 분홍이를 부축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으나 그보다는 악랄한 놈에 대한 원한이 먼저였다.
[더는 못 빼앗아 간다! 이 더럽고 천한 놈아!]
아기까지는 못 빼앗긴다. 아기까지는. 더는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함이 부서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쳐 죽일 놈아!]
분홍이는 절규하며 밖으로 뛰어갔다. 동시에 다리 사이에서 뜨뜻한 것이 주르륵 흘렀지만, 그런 건 지금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내 아기!]
처절한 비명을 들은 카론이 멈췄다. 아이는 더욱 놀라서 자지러졌다.
“으아아아앙!”
한달음에 달려가 놈에게서 아이를 빼앗았다. 눈에 불똥이 튀었다.
[개만도 못한 놈아! 어미에게서 애를 뺏어? 네가 사람이냐? 사람이야? 나가 죽어라, 이놈! 거기서 영영 죽지 왜 돌아왔느냐!]
“마그네! 황후를 붙잡아!”
놀란 마그네가 달려와 미친 듯이 발광하는 분홍이를 얼싸안았다. 그걸 기회 삼아 놈은 다시 아이를 빼앗으려 들었다. 아이를 단단히 안은 팔을 풀 수가 없어 이를 세워 놈의 팔뚝을 물었다.
“큭!”
산통에 이미 흔들리던 이 뿌리에서 핏물이 배어났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 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카론이 억지로 팔을 빼자 흰 셔츠 위로 옅은 피가 비쳤다.
[네놈에게 빼앗기느니 같이 죽고 말겠다! 내놔라! 내가 낳았으니 내가 거두겠다! 이 천하고 천한! 더러운 개종자 놈아!]
“아가르타!”
이번엔 놈도 화가 났는지 청안에 귀기가 흘렀다. 아이를 안고 도망가려는 분홍이의 두 팔이 단단히 잡혔다. 발버둥을 쳤다. 맨발이 놈의 무릎을 퍽퍽 쳤으나 이내 빗나갔다. 그사이 바닥에는 영문 모를 액이 뚝뚝 떨어졌다.
“황후 폐하! 피가!”
고개를 숙인 건 분홍이가 아니라 놈이었다. 무엇을 보았는지 파란 악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팔을 단단히 잡은 손아귀가 스르륵 풀렸다. 그 김에 분홍이는 방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중간에 다리가 꺾일 뻔했으나 죽을 동, 살 동한 의지로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문을 잠가! 누구도 못 들어온다! 황제도 안 돼! 아니 황제는 절대로 안 돼!”
외침을 들은 마그네는 황급히 문을 잠갔다. 직후 문고리가 돌아가더니 밖에서 쿵쿵 문짝을 두들겼다.
“아가르타! 열어!”
놈이었다. 마그네가 사색이 되어 분홍이를 봤다.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도 모자라 분홍이는 침실로 도망갔다. 마그네 또한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스스로 잠갔다. 아이를 안은 채로 침대 반대편으로 돌아가 몸을 웅크렸다.
“으아아아앙!”
[괜찮다. 우리 아기. 괜찮아. 아무도 널 데려가지 못한다.]
우는 아기를 달래면서 납작한 젖을 물렸다. 놀란 아기는 숨넘어가게 울더니 차츰 울음을 그치면서 젖을 물었다. 납작한 가슴에서는 젖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테지만, 같이 죽기 전에 그래도 낳은 새끼에게 젖꼭지를 한 번은 물리고 싶었다.
젖꼭지를 오물오물 빠는 빨간 얼굴엔 온통 서러운 울음이 번졌다.
[내 새끼.]
젖을 물리면서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솜털 머리가 유달리 뜨거웠다.
[열이 나나?]
작은 손도 뜨거웠다. 내장이 덜컹 주저앉았다. 빼앗기느니 차라리 같이 죽자고 막무가내로 빼앗아 오긴 했지만, 막상 아이가 열이 난다 싶으니 무서워서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열이…….]
아이가 죽는다 생각하니 무서워서 숨이 턱턱 막혔다. 눈앞도 아찔했다. 당장 올리아를 불러야 한다. 죽을 때 죽더라도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작은 내 아기를 살려야 한다. 일단 살려야…….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서려던 순간 시야가 까맣게 흐렸다. 저도 모르게 철퍼덕 앉았다. 바닥이 이상하게 축축했다.
[오…… 리…… 마…….]
올리아와 마그네를 부르던 음성은 끝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세상이 꺼멓게 꺼져 버렸다.
* * *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눈은 보이지 않고 귀만 들렸다. 먹먹하여 분간할 수 없지만, 올리아와 마그네임을 알 수 있었다.
황후…… 피…… 위험…… 아기는…….
다른 말보다 아기는 누가 데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당장 마그네가 데리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개종자가 기어이 데리고 갔나?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폐부가 미어졌다.
‘내 아기…… 내 아기.’
달도 덜 채우고 나온 가여운 아이를…… 놈이 데려갔다. 분명히 분홍이가 직접 키우겠다고 확답을 받았다. 그래서 내심 안도했는데…… 달큼한 태도와 손짓은 그저 임부를 안심시키는 수단에 불과했다. 언젠가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긴 했어도 낳자마자 그날 바로 데려갈 줄은 몰랐다.
아이에게 처음부터 대단한 정이 피어날 리 없다. 어머니들이 갓 태어난 막내를 본 것 같이 기쁘고 감격스러우냐 물으면 쉬이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저 내 피를 반은 이은 아이가 기어이 태어났구나. 여기에 반쪽이나마 신국 사람이 하나 더 있구나. 그런 막연한 안도감이 다였다.
온 세상이 저를 이해치 못하고 날을 세우는 판국에 미약한 안도감을 주는 작은 핏덩이에 대한 간절함만은 진심이었다. 여기에 신국 명가의 자손이 살았음을 기록할 존재였다. 기이한 요정 아가르타 라테시온이 아니라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신국 사람 명채운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 아기를 빼앗겼다. 간절한 염원이 제 손을 허무하게 빠져나갔다.
‘적자로 무사히 태어났으니 이제 요정의 소용은 다 했단 건가.’
마음이 얼어붙은 지독한 악귀에게 무슨 희망을 걸었던 건지.
쓰린 눈물만이 흘렀다. 감고 있어도 욱신욱신 아픈 눈가를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마그네와 올리아의 음성은 멀리서 들렸다. 누가 곁에 있는 걸까.
마른 손끝에 무른 살이 스쳐 따가웠다. 저도 모르게 옅게 신음하며 고개를 돌렸다. 낮은 숨소리가 퍼졌다. 걱정이 가득한, 썩 아픈 숨소리였다.
‘누구?’
그렌은 행동거지가 단정하여 마그네도 없는 침실에 들어올 자가 아니었다. 그 외에는 생각나는 사람이 없었다.
인기척이 나더니 물에 적신 면포가 뺨에 닿았다. 시원하되, 차가울 정도는 아니었다. 열로 달아오른 얼굴을 식혀 기분이 좋았다. 수건은 눈가와 콧대를 쓸고 이내 뺨과 목을 닦았다.
뜨거운 눈물이 계속 새는 만큼 물수건이 계속 눈가를 톡톡 찍었다. 이렇게 기력을 낭비하여 봤자 개종자만 좋아할 일이었다.
거기다 모르는 자가 저를 돌보는 일도 썩 달갑지 않았다. 자칫 누군지도 모르는 손에 기대고 싶어질 수도 있다. 아기를 돌려받기 전까지는 사소한 허물도 멀리해야 했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다정한 손길을 외면했다.
길고 가는 숨을 푹 쉰 자의 기척이 이내 멀어져 갔다. 저벅저벅 울리는 발걸음이 유달리 컸다. 익숙한 기척의 주인을 깨닫자마자 식은땀에 젖은 머리털이 바짝 섰다.
‘이 악독한 자야. 아기를 데려가고 혼절한 내 안색이나 살피러 온 게냐? 산통이 채 가시지 않은 황후에게서 아이를 빼앗아 가고 뒤늦게 물수건을 두들기면서 다정한 부군 흉내나 내느냐. 이 천하의 막돼먹은 개종자 놈아. 내 절대로, 네 뜻대로 순순히 따르진 않을 테다.’
몸이 아픈 중에도 이가 빠득빠득 갈렸다.
역정을 내는 일도 기력 소모가 심하여 분홍이는 다시 혼절했다. 간간이 눈을 뜨거나 정신이 들 때는 아기를 데려간 개종자를 저주했다. 아기를 보기 전까지는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아기…… 데려와.”
“폐하의 건강이 우선입니다. 아기님은 무사하십니다.”
개종자가 그렇게 아기를 원했으니 응당 무사할 터다. 하지만 이건 개종자와 저 사이의 기 싸움이었다. 아기는 반드시 제 손으로 키울 거다. 번듯한 신국 명가의 자손으로. 기필코.
“아기가 없는데 어떻게 음식이 넘어가?”
수프 그릇을 여러 차례 엎었다. 침대 밖으로 쫓아가려고도 했다. 그럴 때마다 올리아와 마그네가 번번이 가로막았다. 나중에는 응접실에 남자 시종도 대기했다.
기력이 조금 생겼을 때 분홍이는 아기를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마그네가 몇 차례나 고하러 가도 돌아오는 반응은 불가였다. 아이를 데려오라고 난동을 부리는 분홍이를 말리며 마그네가 흐느꼈다.
“폐하, 진정하세요. 건강하셔야 아기님을 보시지요. 이러다가 정말로 카론 폐하께서 화가 나셔서…….”
“그래. 칼! 때려! 서궁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제 몸을 찌르는 시늉에 때리는 시늉을 하며 죄 없는 마그네를 향해 역정을 부릴 때였다.
“찌르거나 때리지 않는다. 서궁에 가두지도 않는다.”
언제 나타났는지 카론이 얼굴을 내밀었다. 분홍이는 성치 않은 몸으로 마그네를 밀치고 그에게 다가갔다. 땀에 젖은 잠옷이 마른 어깨 위로 흘러내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악을 품고 카론을 향해 모질게 외쳤다.
“때려요. 찔러요. 대신에 아기 줘요.”
거친 말투여도 정말로 진심이었다. 부귀영화 없이는 살아도 희망 없이는 못 산다. 그만큼 분홍이는 아기가 절실했다.
제 말을 증명하기 위해 놈의 손을 들어 뺨에 대기도 했다. 원하는 바가 있으면 때리고 찌르던 놈이 가만히 있자 더욱 초조해졌다. 이게 아닌가? 하다가 얼른 다른 걸 떠올렸다.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아기 원해요. 나…… 나 가져요. 대신에 아기만 나 줘요.”
“아픈 사람 상대로 그럴 만큼 개자식은 아니야. 옷 입어. 감기 걸려.”
금색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는 손을 뻗어 분홍이의 옷깃을 추슬렀다. 몸도 싫어? 그럼 뭘 주어야 한단 말인가? 당혹감이 서린 채로 물었다.
“뭐…… 뭐를? 내가 어떻게 해요?”
“네게 원하는 거 없어. 그러니까 진정해.”
“거짓말!”
거짓된 다정을 집어치우라는 말을 다 하지 못해 거짓말만 외쳤다. 제 몸에 손이 닿는 것도 진저리가 나 황제의 손을 마구 쳤다. 바른 황제가 아닌 놈의 신체야 함부로 하든 말든 이었다.
“거짓말 싫어! 아기는 내 거야! 하나밖에 없어. 내 거야!”
“담요.”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카론은 마그네를 향해 명했다. 즉각 담요를 가져와 훤히 드러난 어깨를 덮는 행동에 분홍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너도 내 거야. 마그네. 너는 내 거야! 황제 말 듣지 마!”
“죄송합니다, 폐하. 제발…… 진정하세요.”
악을 쓰자 마그네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마그네에게 화내지 마라. 충성스러운 심복은 네 걱정을 해서 그래.”
“내 말을 안 듣는 사람, 싫어!”
마그네를 향해 악을 쓰다가 카론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다 너 때문에…… 전부 너 때문이야! 그러니까 내 아기 줘. 줘!”
얼기설기 뭉친 주먹으로 놈의 가슴을 때렸다. 맨발로 정강이도 찼다. 힘이 빠진 나머지 단단한 몸에 제풀에 밀려 쓰러졌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서 놈의 옷자락을 잡고 흔들었다.
“진정해, 아가르타.”
“싫어! 아기 내놔!”
갈라지는 음성으로 악을 쓰자 우악스러운 손이 양팔을 꽉 붙잡았다. 카론이 저를 품에서 떼어 내는 바람에 짚으로 만든 인형처럼 휘청했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런 식으로라면 평생 아이를 만나지 못할 거다.”
“……!”
“평생은 죽을 때까지야. 죽을 때까지 평생. 무슨 말인지 알아?”
콰르릉.
보이지 않은 벼락이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펴…… 엉…… 생?”
온기라곤 하나도 없는 딱딱한 음성이 재차 무서운 말을 다시금 뱉었다.
“그래. 평생.”
심장이 덜컥 멈췄다.
“아…… 안 돼. 평…… 아…… 안 돼.”
바짝 얼어붙은 채로 흐느꼈다.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제발…… 폐하…… 평생…… 은 안…… 돼…… 요.”
죽을힘으로 살았더니 차라리 죽으란다. 분홍이는 그 자리에서 허물어졌다.
카론은 물먹은 솜 같은 몸을 추슬렀다. 그 와중에도 요정은 얇은 꼬챙이 같은 손가락을 세워 가슴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제…… 발.”
“일단 진정해.”
“폐…… 하…….”
밤 하늘빛 눈동자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솜털 머리가 축축한 이마에 들러붙었다. 화를 내며 난동 부린 사이 붉게 달아올랐던 뺨이 빠른 속도로 흰색으로 돌아갔다. 잠시 후면 파리한 푸른빛이 올라올 것 같았다.
“……카론…… 카…… 론…….”
평소에 잘 부르지도 않던 이름을 읊조리던 요정은 서럽게 흐느꼈다. 가슴에 기댄 몸이 점점 흘러내렸다. 카론은 두 팔을 뻗어 그를 훌쩍 안아 올렸다. 그러자 요정은 굵은 목과 너른 어깨가 이어지는 부근에 얼굴을 묻었다.
별로 힘이 들 것도 없는데, 카론은 이상하게도 숨이 막혔다. 눈물과 땀에 젖은 몸이 식기 전에 침대에 얌전히 올렸다. 몸을 떼자 요정이 안간힘을 쓰며 달라붙었다.
“제…… 발…… 평…… 생은…….”
“우선 네 몸부터 챙겨. 이렇게 상한 몸으로 아이를 돌보다가 더 아프면 어떻게 하나? 레온에게는 건강한 엄마가 필요해.”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얼굴에 얼핏 놀라움이 스쳤다.
“레…… 레온?”
벌써 창백해진 낯에 경이로움이 떠올랐다.
요정의 표정이 너무 순식간에 바뀌었다.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예전에 이렇게 수시로 낯빛이 바뀌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유스키아의 마녀라고. 그녀가 광기에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때때로 이처럼 표정이 휙휙 바뀌면서 격한 감정을 온몸으로 발산하곤 했다.
서늘하게 식어 가는 카론의 기분을 알지 못한 채 요정은 아이의 이름에만 집중했다.
“온이? 아기 이름? 어…… 어떻게……?”
떨리는 눈빛을 미루어 보아 ‘온’이라고 이름 지은 연유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억까지 이상해졌군.’
너무 늦는 바람에 출산하는 과정은 직접 보지 못했다. 그러나 산통이 얼마나 끔찍했을지는 미루어 짐작 갔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요정이 파편이나마 기억을 잃었고, 동시에 감정을 제어하지 못했다. 차마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행각도 서슴없이 벌이는 모습은…… 산통의 끔찍함 외에는 설명하지 못했다.
매달려 젖은 얼굴을 문지르는 요정은 몸도 몸이겠지만, 그 이상으로 괴로워했다. 정신적 충격이 그만큼 큰가. 인간 남자인 이상 카론은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고통이기에 도리어 몹시 신경 쓰였다.
“온이…… 내 온이…… 보고 싶어요.”
“몸이 나으면. 얼마든지 레온을 볼 수 있다.”
“다 나았어요.”
“아니. 음식도 먹지 않고 제대로 자지도 않잖아. 핏기도 없어. 이건 나은 게 아니야. 네가 괜찮다고 해도 올리아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는 안 돼.”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짙은 실망감이 어렸다. 검은 속눈썹이 물에 젖은 나비처럼 힘겹게 오르내렸다. 맑은 물방울이 차가운 뺨 위로 도르르 굴렀다.
흐느낌을 참던 요정은 이내 체념한 듯이 카론을 잡았던 손을 스르륵 내렸다. 당장 녹아 없어질 것처럼 흐릿한 눈빛으로 물었다.
“……약…… 속이지요?”
“그래, 약속한다.”
“정…… 말?”
황후에 오른 후로 요정은 우아하면서도 반듯하게 지냈다. 황제인 카론을 상대로 말싸움을 수시로 이겨 먹으며 원하는 바를 하나씩 쟁취했다. 그만큼 말도 곧잘 하고 태도에도 당당함이 있었다.
지금의 상태는 일면 서궁에서와 비슷하기도 했지만, 카론이 보기에는 조금 달랐다. 그 시절엔 그래도 악을 쓰면서 노려보고, 안 통하는 요정 말로 카론을 꾸짖기도 했다. 무너지더라도 벌떡 일어서서 다시 달려드는 것이 고집스러운 요정이었다.
당당하게 황궁의 전권을 요구하던 늠름한 황후는 어디로 사라지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는 여린 요정만이 남았다. 작은 날숨에도 눈물이 도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 카론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부드럽고 상냥한 음성을 자아냈다.
“결혼한 후로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적 있나?”
입가를 바들바들 떨던 요정은 고개를 설핏 저었다. 옅은 웃음까지 머금었다. 억지로 지어내는 기색이 역력하여 오히려 미간이 일그러졌다. 카론의 안색을 지나치게 의식하던 요정이 흠칫 놀랐다.
“……내 아기 꼭 줘요.”
“걱정하지 마라. 마그네와 올리아가 잘 돌보고 있다. 네가 지정한 사람 외엔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해. 내가 지켜보고 있어.”
“으…… 응.”
못내 믿음이 가지 않는지 몸을 일으키는 카론의 검지를 잡고는 놓지를 못했다.
“레온에겐 올바른 부모가 필요하다. 나는 여러모로 어려우니 그 역할을 네가 해야 해. 네가 건강해야 레온도 건강하게 큰다.”
“나…… 필요해요? 폐하?”
“물론이다. 직접 낳은 아이를 네가 키우지 않으면 누가 키우나?”
“으응.”
그렇게까지 확답을 들려주자 그제야 요정은 이미 젖은 손으로 축축한 뺨을 슬며시 닦았다. 검지를 놓은 후에 침대에 바르게 앉는 걸 본 마그네가 얼른 베개를 정리하고 구겨진 이불을 펴 녹초가 된 몸을 덮어 주었다.
“수프를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요정은 계속 카론을 응시했다. 고작 이불을 한 장 덮고는 제 몸을 보살피노라고 강조했다.
“따뜻합니다. 수프를 먹으면 더 기운 납니다.”
“알아. 하지만 올리아가 됐다고 할 때까지야.”
“내…… 내일 올리아가 괜찮다고 하면 온이 봅니까?”
말투가 조금 돌아왔다. 약속 때문인가. 카론은 엷게 웃었다.
“물론.”
“알겠습니다. 폐하, 꼭 약속 지킵니다.”
“기대하지.”
계속 약속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는데도, 요정은 못내 손을 놓지 못했다. 이윽고 마그네가 수프를 가지고 오자 카론에게 보란 듯이 수프를 떠먹었다.
한 그릇 다 비우고 올리아가 처방한 물약을 마셨다. 자야 하는 걸 알면서도 요정은 껌뻑이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했다. 카론은 그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켰다.
요정이 잠든 후 카론은 약간 지친 상태로 제 방으로 돌아왔다.
“폐하.”
방에는 올리아가 있었다. 약간 세워 안은 황자의 작은 등을 토닥이더니 살며시 요람에 놓았다. 가까이 다가가는 동안 올리아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아기의 조그마한 팔과 다리를 정리하여 천으로 돌돌 말았다.
“그렇게 꽉 싸매는 이유가 있나?”
“배 속에서 금방 나왔으니까요. 엄마의 배 속은 원래 좁은 공간입니다. 팔다리를 주체하지 못해서 울거나 상하는 경우가 많으니, 풀어놓는 것보단 감싸는 것이 좋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군.”
카론은 요람 난간을 잡았다. 살아 있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작은 아기가 연신 꼬물거렸다.
“요정은 잠들었다. 건강해지면 아이를 보여 주겠다고 했더니 애써 진정하더군.”
막 주변을 정리하던 올리아가 멈칫했다.
“저…… 폐하.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뭘?”
“왜 황자 전하를 따로 떼어놓으신 겁니까? 황후 폐하께서 친히 기르실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비록 편찮으시다고 해도 전염병도 아니니…… 어쩌면 황후 폐하의 쾌차를 위해서라도 황후 폐하께서 황자 전하를 돌보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재고의 여지가 전혀 없는 얘기였다.
“요정이 이지를 잃었다. 건강을 찾는 동시에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안 돼.”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시긴 하지만 도리어 아기님이 곁에 없어서 생긴 불안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기님을 보여 주면 금방 안정을 찾으실 텐데요.”
“아니 아가르타의 건강 회복이 우선이다.”
딱딱한 어투로 단칼에 그어 버리자 올리아는 걱정스러운 한편 의아한 기색을 감추질 못했다.
“도대체 왜…….”
“황후에 관한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영영 안 보여 주겠다는 것도 아니야. 건강해지면, 그래서 결혼 직후에 그랬던 것처럼 영리하고 당찬 태도를 되찾으면 황자와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만날 수 있는 건가요? 주된 양육은…….”
“올리아.”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름을 부르자 올리아는 열던 입을 닫았다.
“황자를 요정에게 맡기길 원한다면 묻지도 않은 조언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주치의로서 요정의 건강 회복에 집중하는 편이 빠를 거다.”
“예, 폐하.”
올리아가 나간 후에 카론은 황자가 누워 있는 요람을 흔들면서 생각에 잠겼다.
아이를 안고 침실로 도망간 요정은 실신한 채로 발견되었다. 당장 죽을 것 같은 그를 살리기 위해 꽃잎 한 장을 더 뜯어 먹였다. 시체 같은 안색이 금방 파리한 수준으로 돌아오는 것을 본 올리아가 황금꽃의 효과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으나 카론은 함구했다.
미친 게 아닌 이상 꿈에서 본 환영이 알려 주었다고 할 수야 없었다. 환영의 정체는 카론도 전혀 알지 못했다. 신비한 꽃이 카론을 부른 것인지, 아니면 남모르게 그를 수호하는 이계의 정령이 도움을 준건지. 어쨌든 꽃에 대단한 회복 효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갓 태어난 아이만을 두고 요정은 죽었을 거다.
“요정이 죽는다라.”
후계자가 건강하게 태어났다. 냉정하게 따지면 당장 요정이 죽어도 크게 지장은 없다. 카론이 직접 기르면 그만이었다. 그러지 못할 사정이 생겨도 마그네가 있고 그렌과 올리아도 있다.
그런데 요정의 죽음을 상상하기만 해도 왜 이렇게 명치가 서늘할까. 꼭 얼음으로 만든 단도가 심장 근육을 저미는 듯했다.
요정이 아이를 다루는 방식을 용납할 수 없다. 절대로. 카론이 살아 있는 한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요정을 서궁에 도로 가두고 아예 모른 척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살려만 둔다면 나중에 아이가 자란 후에 만나게 해도 된다. 하지만 아이를 돌려 달라고 애원하는 요정이 걸렸다.
“내 아기…… 주세요.”
그의 애처로운 눈물이 카론을 흔들었다.
정말로 요정에게 마력이 있나. 의문을 가져 봤자 늦었다. 그에게 푹 빠져 이젠 헤어 나올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