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황후 아가르타
1.
대제국의 황후가 되어서도 분홍이의 일상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오전 중으로는 올리아를 만나 검진을 받고 마그네와 함께 말 공부를 하며 지냈다. 오후에는 그렌이 찾아와 라테시온 세상에 대해 가르쳤다. 그림책을 보며 마그네와 더듬더듬 대화도 하고 황궁 내 다른 방을 구경하기도 했다.
늦은 오후는 대부분 카론과 함께 보냈다. 차를 마시며 그날 배운 말과 나라에 대한 지식을 점검하면서 정원을 거닐었다. 배가 너무 불러 밖으로 나가기 힘들어지자 산책은 궁 안 구경으로 바뀌었다.
신국의 황궁을 제대로 본 적은 없으나, 몸가짐 공부를 하던 외궁은 더러 둘러보곤 했다. 신국은 그림은 대부분 방 안에 걸었고 그나마 길운과 화복을 비는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그에 비하면 여기 황궁은 각양각색의 사람 그림이 가득했다. 엄숙한 표정만은 한결같아서 종종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얇실한 눈매에 비열한 눈빛을 가진 이의 초상화 앞에서 카론이 멈췄다.
“이건 옛날 왕국 시절에 유명했던 왕이야. 사치와 향락을 넘어서 피를 즐긴 놈이라 결국 조카가 반역을 일으켰지. 처형당했어.”
분홍이는 그림 속 인물과 카론의 공통점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입이 비슷하군요.”
“누가, 내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라서 그렇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조상’이야. 그리고 난 이 자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중간에 왕조가 바뀌었거든. 혈통상 무관해.”
카론은 무감한 태도로 빠르게 설명을 덧붙였는데 이상하게 변명하는 느낌이었다. 피를 즐기는 놈이 아니라는 듯이.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억지로 펴며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카론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난 사치와 향락을 즐기지 않아. 황궁이 화려한 이유는 다른 자들이 권했기 때문이야. 궁이 멋져야 제국의 위엄이 산다나? 불필요한 연회 같은 건 일절 열지 않고 보석이나 옷에도 낭비하지 않아.”
“그럽니까?”
놈이 하는 말은 죄다 거짓말이었다. 물론 카론이 입은 옷은 좋은 천이어도 특별한 장식이 없이 수수했다. 대신에 분홍이가 입은 드레스는 화려한 레이스와 진주가 주렁주렁 달리고도 모자라 단추마다 알 굵은 보석이 박혀 있다. 멋대로 들인 황후가 걸친 묵직한 옷을 보고도 사치와 향락을 즐기지 않는다는 뻔한 거짓말이 나오는지.
더불어 피를 즐기지 않는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피를 즐기지 않는 놈이 제 덩치의 반도 안 되는 저를 그렇게 모질게 때렸나? 아니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제 손바닥을 칼로 대뜸 찌른 건 어쩌고.
독심술이라도 익혔는지 놈은 또 빤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불복하지 않는 놈들 외에는 건드리지 않아. 실제로 내게 빠르게 항복한 영주와 그의 영지는 대부분 풍요롭게 살아. 세금을 많이 감면했어.”
그러니까 분홍이는 반항을 했기에 두들겨 팼다는 얘기였다. 웃기지도 않았다. 자신은 영문 없이 공격을 받았으니 살려고 달려들었을 뿐이다. 뭐든 다른 탓으로 돌리는 놈과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시선을 돌렸다. 발걸음을 옮기자 카론이 지치지도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예외는 있어. 승복하든 아니든 무조건 밟아 버리고 싶은 놈들이 있지.”
그게 요정인가요? 라고 묻고 싶었다. 이 아이도 반은 요정인데 울며 떼를 쓰면 밟아 버릴 건가요? 라고 묻고 싶었다. 아직은 속내를 드러내기에 너무나도 일렀다. 적어도 복중 태아가 무사히 태어나고, 이 꼴 보기 싫은 놈이 비명횡사하여도 제 아이가 황위에 오를 거란 보장이 생기기 전까지는. 하고픈 말은 꼭 다물고 살 터다. 둥근 보름달처럼 부푼 배에 손을 얹었다.
“파사 일족.”
카론이 꺼낸 건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파사 일족?”
“지독한 이교도들이야. 이교도는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이지. 단순한 이교도라면 관심을 두지 않아. 그들이 누구를 믿고 따르든 중요하지 않거든. 그러나 파사 놈들은 예외야. 그들의 숭배 대상은 고대 마도 제국이라는, 신도 아닌 괴상한 존재지. 그들은 기이한 일을 벌여서 사람을 현혹해. 음, 쉽게 말하자면 속인단 소리야.”
“고대 마도 제국은?”
“지금은 없어진 나라야.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마법을 썼다고 하지. 마법은…… 이상한 일을 해내는 걸 말해. 신의 뜻과 관계없는 이상한 일들. 비가 거꾸로 내리거나 사막에 꽃이 피거나.”
“아.”
별안간 심장이 뛰었다. 이상한 일을 벌이는 기이한 존재라니. 어떤 기이함일까? 저를 이곳으로 보낸 그 기이함과도 상통할까? 혹여 금은화와 백룡에 대해서도 알지 않을까? 만에 하나 신국의 존재를 알고 그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렌에게 이 세상에 대해 배울 때 신국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당시에 깃들었던 무거운 절망이 한결 가벼워졌다. 괴상한 마도 제국을 신봉하는 파사 일족은 신국에 대해 아는 자가 있을지 궁금했다. 할 수 있다면 만나보고 싶었다. 묘한 존재가 있다는 자체만으로 죽었던 희망이 봄날 새순처럼 돋아났다.
잔인한 작자는 초장부터 분홍이의 작은 희망을 짓밟았다.
“하지만 마도 제국은 망했어. 마법 따위도 없지. 문명이 대단히 발달했던 모양인데 지금은 완전히 소실되었어. 남은 거라곤 시답잖은 속임수뿐이지. 그런데도 파사 일족은 사사건건 내 앞길을 방해해. 실제로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지. 그럴 때마다 철저한 보복을 선사했는데도 도무지 멈출 줄 몰라. 지겨운 벌레 놈들. 게다가 내가 제일 역겨워하는 인물이 바로 파사 출신이기도 해.”
“누구?”
“나를 낳은 여자.”
덤덤한 대답이 가져온 충격은 묵직했다. 분홍이는 그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리사랑이 지나쳐 안하무인으로 자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하물며 친모가 개종자조차 치를 떠는 악인이라니. 파사 일족과는 또 무슨 관계이기에 아직도 증오가 생생할까.
찝찌름한 속내를 다스리면서 분홍이는 카론을 짐짓 타박했다.
“어머니입니다. 그렇게 부르면 나쁩니다.”
“미친 여자였고 모두가 마녀라고 불렀어. 마녀를 어머니로 여기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아.”
서늘한 분노를 담은 음성에는 흥분의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대신 돌덩이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하루아침에 생긴 증오가 아니며 앞으로도 쉬이 가실 것 같지도 않다. 어떤 일이 있었기에 낳아준 모친에 대한 원한이 이다지도 깊은가? 의문이 들었으나 금방 지워버렸다. 개종자의 원한 따위, 마음 쓸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분홍이의 본심을 전혀 알 길이 없는 카론은 마녀 얘기를 계속했다.
“마녀는 나를 끔찍이도 혐오했어. 어쩌면 내가 마녀를 혐오하는 이상으로. 그렇다면 왜 굳이 죽이지 않았을까. 낙태하거나 연약한 아이였을 때 손쉽게 처리하면 쉬울 텐데.”
미운 아이를 살려 두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정쟁에서 우위를 점할 적통이어서 나중에 복수의 도구로 삼거나. 그것이 아니면 너무나도 미운 나머지 곁에 두고 분풀이로 삼거나. 혹은 겁간으로 생긴 자식이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거나.
“뒈져서 다행이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은 여자지만 혹시나 만날 수 있다면 왜 살렸냐고 묻고 싶기는 해.”
카론은 미간을 찡그리며 마치 남의 일처럼 궁리했다.
“강간으로 생긴 자식이 좋진 않겠지. 그래도 10년간 억지로 살려두면서까지 괴롭히고 싶을 정도인가? 하다못해 갓 태어났을 때 젖만 먹이지 않았어도 금방 굶어 뒈졌을 텐데 굳이 살려서…… 하여간 지독한 마녀였어.”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 얼음물을 전신에 확 끼얹은 기분이었다. 이 무참하고 악질적인 황제 놈이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라니. 마녀라고 불리는 친모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를 마냥 기꺼워하기란 어려울 터였다.
‘내 처지와 비슷하지 않은가.’
손이 절로 배에 올라갔다. 저도 아이가 생긴 줄 알았을 때 배를 두드리며 원망했다. 개놈의 씨앗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곡기를 끊고 죽으려고도 했다.
나를 이토록 미워할 거면서 왜 낳았나요?
아직 얼굴도 모르는 아이가 저를 향해 원망 섞인 물음을 던지는 착각이 일었다.
“마녀, 지금은?”
마녀의 끝이 궁금했다. 마녀를 겁간한 친부도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황궁에서 사는 동안 마녀나 황제의 아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마녀? 뒈졌어. 서궁에서 끔찍한 몰골로.”
“아.”
서궁에서 끔찍한 몰골로 죽었다. 이제 서궁을 나온 지 오래되었건만. 어쩐지 등줄기에 한기가 서렸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버지? 누구? 아, 마녀를 강간해서 나를 낳게 한 작자 말인가.”
답하는 카론의 낯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흉물스러울 만큼 새파란 도깨비 눈에 잔인한 즐거움이 스쳤다. 카론은 손을 들었다. 분홍이의 시선이 절로 그 손으로 향했다.
“죽였지. 이 손으로 직접. 다리 근육을 조금씩 잘라 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서 밟으니까 죽여 달라고 애원을 하더군. 놈의 앞에서 놈이 애지중지하는 자식 놈들의 사지를 잘라 죽인 후에 직접 목을 쳤다.”
말이 빨라 뭐라 하는지 정확한 뜻을 다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조와 태도에서 아주 잔인하게 죽였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하게 알아들었다.
“폐…… 하?”
복수의 수단입니까? 황제를, 내 친부를 이 손으로 조르면 됩니까?
장성한 아이가 검을 드는 광경이 눈에 선했다. 제 눈앞에서 아비를 도륙하여 그 피를 뒤집어쓰는 광경 또한 생생했다. 살이 떨리고 뼈가 시렸다.
이것을 원하셨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러라고 나를 나았으니까요.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내 편 하나를 간절히 원한 이유가 그것이 아니라고 진정 말할 수 있는가. 아이를 아비에게서 떨어뜨려 키우려던 이유가 제 원한을 온전히 전하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시선을 맞춘 카론이 굳은 표정을 풀었다. 팔을 뻗어 우두커니 선 분홍이를 감싸며 자연스럽게 머리에 입술을 얹었다.
“페…… 하?”
“걱정할 것 없어.”
손바닥 뒤집듯이 잔인한 냉기를 감춘 카론은 딴에는 자상한 투로 분홍이를 달랬다.
“혹시 내게 흐르는 마녀의 피가 아이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그렌과 올리아가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야. 그들은 썩은 마녀의 시신과 오물 속에서 죽어 가던 나도 이렇게 살렸으니 말이야. 더군다나 너는 마녀가 아니지 않나.”
“그…… 그게 아니라.”
긴장이 극에 달하자 갑자기 귀가 뻥 뚫리고 카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속속들이 들어왔다.
‘썩은 마녀의 시신과 오물 속에서 죽어 가?’
이상하게도 눈가가 떨렸다. 마녀는 그냥 죽은 것이 아닌가? 증오하던 생모의 시신이 썩어 가는 걸 보았다고? 고작 열 살 난 아이가? 확인할 길이 없어도, 만약 거짓 없는 사실이라면 그와 같이 10년을 살아온 아이가 멀쩡한 어른이 될 리가 없을 터. 이 오랑캐 놈의 끝없는 잔악무도함에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이는 너를 닮았을 거다. 너는 마녀의 그림자도 몰아내는 강한 힘을 가졌으니 말이야. 반드시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하고.”
“허어.”
허탈함이 밀려왔다. 갖은 고초를 간신히 뒤로하고 이제 천운으로 받아들이고자 힘겹게 결심하였다. 오랑캐 씨를 품고서도 내 편을 하나 만들어 보자, 살면 어떻게든 살아지니 나중을 기약하자며 썩어 가는 속을 달래고 또 달랬다.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한지. 역사에 천하의 극악무도한 폐주(廢主)로 남아야 마땅할 놈이 어둡고 불쌍한 과거가 있음을 왜 제가 알아야 하는가. 아니 이 악랄한 놈은 배 속의 제 아이를 진실로 아끼지 않으면 저처럼 잔인하고 못되어 친모의 시신을 조롱하고 친부의 창자를 끄집어내어 희롱하는 놈을 낳을 거라 협박하는 건가!
도리어 분이 치받혔다.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 불쌍하기는커녕 내리사랑에 치여 천덕꾸러기에 천지 분간 못 하는, 막돼먹은 짐승이었으면 차라리 나으리라 싶을 만큼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할 수 있는 마지막 복수 방법마저 이렇게 뿌리 뽑고 싶은 건가. 아니, 절대로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다. 사악한 도깨비 놈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겠다. 놈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겠다. 그저 듣지 않은 것으로 치겠다.
부모의 악행을 일절 떨칠 수는 없을지언정 사람은 자라면서 스스로 돌아보고 성장해야 한다. 게다가 그렌과 올리아라는 좋은 양부모가 있는데도 이런 습성을 버리지 못함은 순전히 본인 탓이었다. 강간으로 생긴 자식을 낳은 심정은 생각지 않고 저를 왜 살렸냐고 묻는 짓거리라니.
치졸한 행태에 치가 떨렸다. 억울함이 지나쳐서 눈가도 뜨거워졌다. 시근거리는 숨을 알아차린 카론은 어리석게도 저를 가엽게 여긴 줄 착각하였다.
“다 지난 일이야.”
“페하…… 이런…… 싫습니다.”
“그래. 다시는 하지 않겠다.”
여리고 고운 심성을 가진 이를 달래듯 카론은 분홍이의 등과 팔을 쓸었다. 제 속에 들끓는 원망과 원통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답답함에 울분이 배가 되었다.
제가 힘겨운 삶을 살았다 하여 타인을 핍박할 이유가 있는가? 높은 황위에 올랐으면 도리어 자신처럼 불쌍하게 자라는 인간이 없도록 자상하게 돌보아도 모자랄 것을. 어찌 똑같이 굴어?
동시에 카론 유스키아라는 작자의 성품이 왜 이렇게 비뚤어지고 천박하고 못났는지 이해가 갔다.
‘겁간당한 모친이 아니라 네놈의 아비가 문제인 것이다. 네놈에게 똑같은 더럽고 천한 성질머리를 물려준 네놈의 아비가!’
모친을 겁간하고 죽어서도 시신을 방치한 악덕한 친부 아래 천한 짐승처럼 자랐으니…… 손바닥을 칼로 찌르는 건 기억할 가치도 없는 일이고 덤비는 저를 벽에 처박고 겁간한 일은 두 번 안 하면 그저 넘어갈 일인 것이다.
짐승 중에서도 가장 질이 좋지 않은 짐승이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맛을 알고, 정도 받아 본 놈이 줄줄 안다. 어미의 정을 제대로 겪어 본 일이 없고 친부는 친아들에게 잔인하게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놈이었다. 뒤늦게 양부의 정을 받고도 이런 냉혹하고 혐오스러운 습성을 유지하니. 장차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정을 줄 수나 있을까?
제 유일한 핏줄이니 딴에는 아낀다고 하더라도 혹여 아이가 뜻을 거스르면 바로 손을 들어 뺨을 후려치거나 혹은 나쁜 버릇을 고친다며 꾸짖다가 크게 경을 칠 수도 있다. 당시 아이와 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하물며 해악을 끼칠 방법도 없었던 분홍이에게 칼을 든 꼴을 보면 능히 그럴 수 있었다.
임신하여 슬며시 다정다감을 흉내 내는 일도 저는 크게 잘못한 일이 없다고 여겨서 그럴 테지. 아니 더 할 수도 있다. 좀 때리고 수시로 겁간하여도 오물과 시신 속에서 죽게 두진 않았으니 제법 잘 대해 줬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평생을 사는 건 둘째치고 이 자의 곁에서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가 있을까? 어떻게든 무리해서 폐비가 되어야 하나?
‘아니…… 폐비가 되면…… 이번에는 정말로 피죽도 못 얻어 먹일 수도 있다. 나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내 새끼는 그리 못한다.’
이런저런 걱정이 휘몰아쳤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불러 몸이 부치기에 숨도 금세 가빴다. 곧 갖은 그림으로 장식한 천장이 갑자기 팽 돌았다.
“아가르타.”
휘청하자 제멋대로 부군을 칭하는 짐승 놈이 피로 얼룩진 손으로 부축했다.
황제가 황후를 부축하여 들어오는 걸 본 마그네가 빠르게 냉차를 내왔다. 쌉싸름한 차를 조금 마신 후 분홍이는 긴 숨을 내쉬었다. 발이 아파 신을 벗고자 했다. 배가 불러 손이 닿지 않아서 끙끙거리자, 카론이 대신 빡빡한 신을 벗겨주었다. 살 것 같았다.
“발이 많이 부었어. 원래 그런 건가?”
“임부는 원래 손발이 수시로 붓는다고 올리아 님이 그러셨어요.”
신을 정리하던 마그네가 대답했다.
산책이 끝났는데도 한가하기 짝이 없는 놈은 자리를 계속 지켰다. 그만 나가 주었으면 좋겠지만. 분홍이가 아무리 낯을 굳혀도 마그네만 신경을 쓸 뿐, 놈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되레 분홍이 곁에 앉아 발을 붙잡았다.
“어?”
뭐 하나 싶었더니 부은 발을 제 무릎에 올려놓고 꾹 잡았다 놓기를 반복했다. 발가락을 한 번에 잡아 뒤로 살짝 꺾기도 했다. 뜬금없는 행동에 놀라는 것도 잠시.
“하아.”
발이 시원하여 절로 한숨이 샜다. 다른 발도 붙잡아 큰 손으로 야무지게 주무르는 동안 분홍이는 마그네가 가져온 큰 등받이를 끌어안고 긴장을 조금씩 풀었다.
“편안한가?”
발을 주무르며 슬쩍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씩이나 되는 놈이 남의 발이나 주무르고 있다니.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똑 주인을 섬기는 마당 머슴이나 매양 한 가지였다.
‘무람이 없어도 너무 없다 싶었더니…… 그 이유도 이제 알 것 같구나.’
그리 천하게 자랐으니. 귀인으로서 마땅히 익혀야 할 바른 몸가짐도, 황위에 오른 천자로서 갖추어야 할 위엄과 체통을 배운 바가 없었다. 아래 사람이 궁인들과 비교해서도 달리 유달리 사납고 거칠며, 천한 습속을 기이하게 여겼더니 그럴 만도 했다. 개놈의 자식이라고 불렀더니 진짜 개놈의 자식일 줄이야.
황후의 운명을 어렵사리 받아들였더니 또 첩첩산중이다. 개놈을 데리고 엄숙한 황궁에 들어앉은 제 앞날에 먹구름이 낀 것도 모자라 아주 폭풍이 몰아쳤다. 발이 시원한 동시에 속에는 불이 났다. 너무 답답하여 한숨을 푹푹 쉬자 카론은 이내 올리아를 불렀다.
올리아가 올 때까지도 카론은 분홍이의 발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그네야 그렇다 쳐도 바깥사람인 올리아 보기 심히 민망하였다. 그만두라고 눈치를 보내도 카론이 계속 열중하기에 일부러 그의 손을 물리쳤다.
“왜?”
“왜라니요? 진찰을 해야 하니 황후 폐하의 발은 그만 놓아주세요.”
카론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올리아가 했다. 얼굴이 홧홧해진 분홍이는 발을 스르륵 잡아당겨 옷자락 속으로 숨겼다.
“많이 피로하신가요? 발목이 불편하십니까?”
“조금. 발, 괜찮습니다. 나는 여기가 아픕니다.”
가슴을 대고 말했다. 사실은 울화병이지만 설명할 기력도 없었다. 올리아는 청진기를 가슴에 댔다.
“소화가 안 될 시기지요. 또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찹니다.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올리아는 넌지시 카론을 곁눈질했다. 아무리 저를 기른 사람이라도 신분이 다를진대 황제라는 양반이 그저 가만히 있었다. 막돼먹은 오랑캐 습성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퍼졌다. 그래서 황제 놈이 대낮에 몸종이나 할 짓을 태연하게 하지 않나. 아무리 총애를 받아도 의원에 불과한 자가 황상을 빤히 쳐다보질 않나. 황상 아래로 위계질서가 엉망이었다.
황후의 권위는 황제의 권위 다음이다. 황제가 이렇게 무람이 없으니 황후가 위계를 바로잡으려고 하면 황제도 나무라지 않은 것으로 괜히 설치는 꼴로 보일 터.
골치가 더 아팠다.
혼례를 올리지 않았으면 몰라도 이미 황후가 되었다. 별 탈이 없을 시에 차대 황제의 모후가 될 자로서 이런 무례와 무식을 쉬이 보아 넘길 수 없었다. 다만 혼례를 올리자마자 배움도 없이 권세를 휘두르면 도리어 반발을 사므로 찬찬히 바로잡아야 했다. 특히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함이 옳았다.
분홍이는 일단 흐트러진 자세부터 바로 했다. 어깨를 펴고 머리를 꼿꼿이 든 다음 웃는 것도 아니 웃는 것도 아닌 엷은 무표정과 함께 입을 열었다.
“올리아.”
끝이 똑 떨어지면서 낭랑하게. 그러면서도 너무 냉엄하지 않게. 제가 태손의 정비가 되었을 시에 가져야 할 몸가짐을 떠올렸다.
태도와 어투가 바뀌자 올리아는 짐짓 당황한 듯 보였다. 표정을 살짝 굳히며 분홍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예, 폐하.”
“폐하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첫 번째입니다.”
황제와 첫 아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올리아는 바보가 아니므로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리라 여겼다.
“나는 다릅니다. 그래서 올리아에게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고…….”
올리아가 말을 잇는 찰나 분홍이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내 말이 먼저입니다.”
“……네?…… 네.”
의원의 안색에 당혹감이 더욱 번졌다. 카론을 흘끔 보기도 했지만, 맞은편에 곱지 못한 자세로 앉은 그는 흥미진진한 듯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신국 사람, 요정에게는 남자, 여자 있습니다. 그리고 [음인], [양인]도 있습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그리고 남자 [음인]입니다. [음인]은 여기가 여자입니다.”
그러면서 배를 가리키자 올리아는 급하게 공책을 꺼내 기록을 시작했다. 분홍이는 제가 알고 있는 음인에 관한 지식과 미리 배웠던 출산과 산후조리에 관한 얘기를 짧은 말로 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요정이라고 다 자웅동체는 아니란 말씀이군요.”
“[음인], [양인] 적습니다. 여자 [양인]과 남자 [음인]은 아주 적습니다. 내 나이는 나뿐입니다.”
“너뿐이라고?”
조용히 듣고 있던 카론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분홍이는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라테시온의 흔한 풍습대로 긴 다리를 포갠 그는 잠시 골몰했다.
“거기에도 왕이 있나?”
“황제 있습니다.”
황제라는 말에 파란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황제가 있다는 말은 위아래로 신분이 나뉜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전에 처음 참석했던 연회에서 그랬던 것처럼 분홍이는 손을 들어 올렸다.
“황제, 황제 가족, 귀족, 평민, 그 아래. 이렇게 있습니다. 사실은 더 많습니다.”
“너는 어디에 속했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분홍이는 두 번째 높이로 손을 들었다.
“내 아버지. 황제 다음입니다.”
“흠. 역시 귀족이었군. 황제 다음인데 황족은 아닌 것 같으니 공작인가? 대공?”
그렇게 보였다는 듯이 카론은 분홍이를 머리끝부터 발치까지 훑었다.
“이곳에 와선 황후가 되었으니 잘되었군.”
가당찮은 말에 분홍이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외쳤다.
“아닙니다.”
올리아가 조금 놀랐다. 카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천한 오랑캐 주제에. 나를 겁간한 주제에. 어디 잘 되었다고.’
부아가 치밀었다. 이를 꽉 깨물었다가 살짝 푼 분홍이는 역정을 내지 않고 차분히 답하려 애썼다.
“나는 황제와 결혼합니다.”
“결혼한 사람. 시제가 잘못되었다. 나와 결혼했잖아.”
“아니요. 올바릅니다.”
뭐?”
딱 잘라 아니라고 하자 카론의 낯짝에서 엷은 미소가 싹 사라졌다. 도깨비 눈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원치도 않은 도깨비 황후 자리를 덜렁 주면 누가 좋아할 줄 알고?
“신국에서. 나는 황제와 결혼합니다.”
“정확하게 무슨 의미지?”
기세에 지지 않기 위해 분홍이는 눈을 똑바로 뜨고 또랑또랑하게 대답했다.
“나는 황제의 아들의 아들과 결혼합니다. 신국 있으면 벌써 결혼합니다.”
저를 바라보는 황제 카론의 눈빛이 심상찮았다. 어느덧 사라졌던 미소가 그의 딱딱한 입매에 슬며시 떠올랐다.
기쁨이나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극한 불쾌감과 오만한 투기였다.
“차차대 황제와 결혼할 사이란 말이군.”
사실을 되짚는 목소리에서 귀기가 흘렀다. 카론은 제가 들은 바가 정확한지 일말의 오해는 없는지 재확인했다. 이제 황후가 된 요정은 의연한 태도로 긍정했다.
“네.”
“정확하게 결혼할 사이란 말이지. 마치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폐하, 황후 폐하는 아직 언어에 익숙지 않으셔서.”
“닥쳐, 올리아.”
뱉는 목소리는 평온하되 듣는 자의 안색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만약 당장 그 황제도 못 되는 자식의 자식이라는 놈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거지?”
“내 잘못입니다. 결혼 못 합니다. 미안하다고 합니다.”
“아하. 그놈이 괜찮다고 한다면?”
“기쁩니다.”
주변 기온이 갑자기 떨어졌다. 올리아는 입을 다문 채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의원 올리아.”
“네, 황후 폐하.”
분홍이의 부름에 올리아가 답했다.
“올리아는 이만 나갑니다.”
놀란 듯이 그는 카론을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이는 황제이니 황제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올리아는 황제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황후의 말을 따라야 하는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이곳에서는 그만큼 황후의 명이 가벼운가.
“라테시온 황후는 올리아에게 가볍습니까?”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나갑니다. 그리고 그렌을 부릅니다.”
“네, 폐하.”
올리아는 가방을 챙겨 나갔다. 마그네도 어느 순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황제와 둘만 남은 방에서 분홍이는 가만히 앉아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아가르타.”
“기다립니다.”
요정의 딱딱한 대답에 카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산책할 때만 해도 요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발을 주무르는 것도 좀 부끄러워할 뿐 별로 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냉랭하게 구는지 알기 어려웠다.
이미 카론의 아이를 가지고 결혼까지 한 마당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정 나라에 두고 온 약혼자 놈이 그리워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황후 자리를 거머쥐었으니 목적을 이루었다는 건가?
서궁에서 가졌던 마지막 정사(情事)가 떠올랐다. 올리아가 진단하여 내린 임신 날짜를 따지면 그 시기와 맞아떨어졌다. 내내 닿는 것도 끔찍하다는 듯이 진저리를 치던 요정이 그날만큼은 달랐다. 혼자서 수음하다 들킨 것으로 모자라 카론을 유혹했다. 그날의 정사는 카론이 지금껏 겪었던 전투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전투와 맞먹을 만큼 체력 소비가 심했다. 요정에게 너무 빠진 나머지 서궁에 발길을 끊기도 했다.
작정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다. 혹은 아이를 가지려고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른다. 아직 후계자가 없는 독신 황제인 카론에게 임신은 효율적인 협상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미 시도했던 자도 있었다. 물론 어설픈 야망을 감당하지 못하고 뒈졌지만.
요정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아이를 가졌고 황후가 되었다. 말도 못 하고 세상에 관한 지식도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어설픔을 가지고서 성공하다니.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기가 막혔다. 혹은 무지함을 가장하여 방심을 유도한 걸지도.
카론의 계산은 별로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황후가 되자마자 본색을 드러내는 건가?”
조소와 흥미가 듬뿍 담긴 질문엔 미미한 분노도 실려 있었다.
“본색이란?”
“숨겨 둔 진짜 모습이다.”
설명을 들은 요정은 실소했다.
“황후로 만든 사람, 폐하입니다.”
“내가 그러도록 의도한 것은 아니고?”
핵심을 단숨에 찌르자 황후는 새까만 눈에 힘을 주었다. 냉랭한 눈빛이 제법 날카로웠다. 황후의 전신에서 불쾌감이 물씬 풍겼다. 불쾌감이라.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하긴. 일부러 작정했다면 약혼 연회에서 그렇게 펑펑 울면서 못 하겠다고 하지 않았을 터다. 역시나 우연의 일치가 분명했다. 그렌의 보고에 따르면 요정은 카론이 황제인지도 채 알지 못했다. 또한 정부(情婦)가 없는지도 모르고 자기가 정부가 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말을 할 줄 알게 되어서 뒤늦은 항의라도 하겠다고?”
둘 뿐이라 할 수 있는, 유치하고 치졸한 반격이었다. 요정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저 고요한 눈빛을 지었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카론은 꾸중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러지 않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아니었으면 당장 연금을 했을 거야. 아, 연금은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명령이지.”
딴에는 경고였는데, 요정은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배가 이렇게 큽니다. 폐하의 아이입니다. 연금? 폐하의 얼굴이 더러워집니다.”
“내 얼굴이 더러워져?”
“나쁘다고 사람들이 폐하 얘기를 합니다.”
“아아. 체면이 깎인다는 뜻이로군.”
어린아이 수준의 단어를 가지고도 아주 멋지게 반격을 한다. 요정은 생각보다 훨씬 영리했다.
“예, 체면이요.”
“감히 그런 소릴 황제의 면전에서 하는 자가 있을까?”
이번에는 뭐라고 대답할까. 기대하며 입꼬리를 올리자 요정이 다시 한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앞에서는 폐하에게 인사합니다. 뒤에서는 바보 취급합니다.”
바로 반박할 말이 없어서 눈가만 씰룩거렸다. 그런 놈들을 모조리 다 잡아들여서 목을 베겠다고 하면, 요정은 분명히 몰래 욕하는 자들을 어떻게 다 잡아들이냐고 물을 것이다.
“황제를 우습게 보는 자들 때문에 내가 뜻을 꺾어야 한단 말인가?”
“따르는 사람 없다? 황제가 아닙니다. 황제가 아닌 사람, 뜻은 쓰레기입니다. 똥입니다.”
이번에도 입이 턱 막혔다. 맞는 말이다. 다 죽이면 따르는 자가 결국 없어진다. 그렇다면 핏물이 흐르는 버려진 땅의 주인일 뿐. 황제라 부를 수 없다. 그렇다고 쓰레기나 똥이라고 하다니. 실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기에 배웠을 테지만, 요정의 입에서 나오리라 기대치 못한 단어였다. 떨떠름한 채로 패배를 인정했다.
“황후 연금은 보류하도록 하지. 아, 보류는…….”
“압니다. 미룹니다.”
“말이 정말로 많이 늘었어. 말싸움으로 나를 이겨 먹다니.”
순순한 감탄에 요정은 설핏 웃었다. 아주 가소롭다는 웃음이었다.
“저는 배웠습니다. 책을 많이 읽습니다. 올바른 황후가 됩니다. 황제를 돕습니다.”
“정치와 제왕학을 배웠군. 지배하는 방법 말이야.”
“나라, 바르게 만드는 방법, 배웠습니다. 나라 사람을 보살핍니다. 바보, 가르칩니다.”
요정은 나라와 사람을 동시에 아울렀다.
“요정의 나라는 지배의 개념이 땅보다는 사람에게 있나.”
“지배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하고 따르게 하는 것.”
“지배 아닙니다. 가르칩니다.”
요정은 지배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나라 사람은 마음? 보살펴야 합니다. 아무리 낮은 사람, 마음으로 봐야 합니다.”
“천민까지 성의껏 보살피라? 요정국은 그런 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나? 여긴 칼과 빵이면 충분해.”
“그러면 나라가 죽습니다. 늘 무섭습니다. 늘 배가 고픕니다. 그런 나라에서 나의 아기는 살지 못합니다.”
“아이 얘길 꺼내다니 비겁해.”
비겁하다는 비난에 요정은 다시 엷게 웃었다. 조소에 가까웠으나 제 앞에서 웃음을 짓는 일이 적었으므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요정이 상상 이상으로 영리하고 또한 이런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생각지도 못한 정혼자 얘기에 관해서는 전혀 다른 기분이지만.
“그래서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거지?”
“나는 황후입니다. 황후로 삽니다.”
“이미 그러고 있어.”
“아닙니다. 황후는 황제를 도우며 궁을 만듭니다. 저는 황궁을 만들지 못합니다. 그렌이 궁을 이끕니다. 그러니 바른 황후가 아닙니다.”
만든다는 건 아무래도 관리한다는 얘기 같았다.
“흠, 황궁에 대한 권한을 달라? 그래서 그렌을 부른 건가.”
“네. 바른 황후가 됩니다.”
“야망가인 줄 미처 몰랐어.”
“야망가?”
“욕심이 많다는 뜻이야.”
“욕심,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폐하와 같이 삽니다.”
자신과 사니 욕심을 내야 한다는 말에 카론은 쿡쿡 웃었다. 아주 깜찍했다.
“한마디도 지지 않아.”
“그래서 싫습니까? 나는 서궁에 갑니다.”
이젠 협박을 할 줄도 안다. 본래 보통 성미는 아니라고 알았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못 죽일 순진무구한 얼굴로 저를 죽이겠다고 그릇을 깨어 잠복하지 않았던가. 발작하듯 흥분하여 달려든 적도 있었다.
“아니.”
일단은 요정이 어떻게 할지 궁금했다. 사실 황궁 운영은 카론의 관심 밖이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그에 따라 뭔가 조정이 필요하긴 했다. 그것을 황후인 요정이 알아서 해 준다면 고마울 따름이었다.
어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반은 요정이다. 요정을 닮기를 바란 만큼 요정처럼 자웅동체로 태어나면 키우는 방법도 다를 터.
비록 요정의 방식이긴 하지만, 보여 주는 모습으로 판단하건대 요정은 훌륭한 부모가 될 가능성이 컸다. 적어도 카론 자신보다는 더 훌륭한 부모가.
똑똑.
“들어와.”
그렌이 정중한 태도로 들어섰다. 그는 카론에게 고개를 숙인 다음 잊지 않고 요정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부르셨습니까?”
“그렌. 앞으로 황궁 일은 내가 압니다. 전부 나에게 말합니다.”
대답하기 전 그렌은 눈짓으로 카론을 살폈다. 따르라는 뜻에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우선 궁인의 이름 책, 황궁 그림이 봅니다. 내일 아침에 봅니다.”
“내일 아침에 명부와 도면을 준비하겠습니다.”
“바른 책상과 의자도 필요합니다. 작은 것이 좋습니다. 마그네의 의자도.”
“네.”
“이제 가도 됩니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노련한 시종장답게 그렌의 안색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오래 봐 온 카론은 정중히 물러가는 뒷모습에서 당혹감을 감지했다.
“앞으로 폐하도 황궁 일은 내게 말합니다.”
“나도?”
“황후가 황궁의 대장입니다. 폐하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단히 엄격하군. 요정국에서 정말로 그렇게 배웠나?”
요정국 풍습을 핑계로 자신을 조종하려는 의도는 아닐까 잠시 의심했다. 요정은 단호하게 긍정했다.
“황제는 나라를, 황후는 황궁을. 내가 황궁을 조용히 만듭니다. 아이도 내가 열심히 키웁니다.”
“내부 생활을 확실히 관리할 테니 간섭을 하지 말라는 거군. 좋아. 원한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이상한 일을 벌이거나 위험한 짓을 하면 그땐 전권을 다시 그렌에게 넘길 거다.”
“그러지 않습니다.”
요정은 당당하게 나왔다. 이상하게도 풍습도 문물도 하물며 말도 다 익히지 못했다. 그런 요정이 복잡한 황궁을 제대로 운영하리라는 신비한 믿음이 생겼다. 당당한 태도와 단호한 말 때문인가. 아니 그보다는 위압감이었다.
마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스스로 황제가 된 카론은 태생부터 고귀한 존재를 부정했다. 제 손으로 직접 목을 자른 왕족과 귀족의 최후는 늘 시끄럽고 추악했다. 위압감은커녕 우아한 슬픔도 본 일이 드물었다. 그렇기에 못난 왕이 스스로 금칠하는, 우스꽝스러운 과장으로 치부했다.
‘전신에서 풍기는 고귀한 위압감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하는군.’
남자치곤 여린 몸에 배가 불러서는, 어느 곳에서도 무력 우위를 느낄 수 없다. 권력과 재력도 카론의 승인하에 지금 넘겨받았다. 그런데도 요정에게서는 무시할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기대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직후 요정은 마그네와 함께 언어 학습을 시작했다. 말을 배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으나, 당장 다른 일이 생겼다. 집무실로 돌아간 카론은 아서를 호출했다.
“북부에 보낸 첩자 지금도 계속 활동 중인가?”
“네.”
“최근 연락이 왔나?”
“정기적으로 오지만 그간 계속 보고 드린 대로 아직 특별한 징후는 없다고 합니다.”
“흠.”
정무용 책상 의자에 앉은 카론은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아무런 징후가 없다고. 정말로 없는 걸까. 혹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첩자의 눈을 속일 만큼 은밀하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전에 황후의 옷과 꽃을 연구했던 떠버리 중 입이 무겁고 몸이 건강한 자를 선정해서 북부로 파견해. 그에게는 유적지 일대를 다 샅샅이 뒤지라고 하고. 특히 황후를 발견했던 신전 폐허를 중심으로 말이야. 필요하다면 발굴비도 지원해. 또 첩자를 북부 전체에 뿌려. 특히 산맥으로 침투해 파사 일족의 동태를 확실하게 알아봐.”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아서의 물음에 카론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 황후, 아가르타가 요정족 차차대 황제의 정혼자였다는군.”
“예?”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 자존심이 세고 고집이 있다고 말이야. 지금 생각하면 태연함이 순진함의 발로가 아니라 큰 배포에서 나온 것 같아.”
“허어.”
“방금 내게 눈을 똑바로 뜨고 황후가 되었으니 황궁을 다스릴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제왕학과 정치도 배웠어. 사람을 부리는 방식은 나보다도 엄격해.”
“어? 예?”
“예상보다 훨씬 대단해, 내 요정은.”
카론은 짐짓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우리식으로 설명하면 공작가의 자제야. 남자이면서 수태를 할 수 있는…… 잉인? 어쨌든 자웅동체는 그쪽에서도 극히 드물어서 현재는 아가르타가 유일해. 자세하기 얘기하진 않지만 어린 시절부터 제왕학과 정치를 배운 걸 보면 그쪽에도 굉장히 뛰어난 인재라는 거지. 남자이면서 여자라 다른 사람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기운이 있어. 밤하늘 같은 흑발과 흑안에선 고귀한 위엄이 흐르기도 하도. 이보다 훌륭한 황후는 없을 거야. 이곳에도…… 그리고 요정국에서도 말이지.”
요정 황후의 대단함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즐거움이 깃든 어투가 다소 평온했다. 황후에 대한 언급을 지극히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그게 맞기는 한데.’
라테시온의 초대 황제는 출생의 비화와 역경을 뚫고 우뚝 선 정복자여서 가문의 비호 아래 편안하게 살아온 일반 귀족을 하찮게 여기거나 혹은 경멸했다. 그런데 황후에 관해서는 극찬을 당연한 듯이 늘어놓다니. 아서는 다소 의문이 들었지만, 현명하게 입을 닥쳤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을 놓친 놈은 얼마나 애통할까?”
“그럼 북부 탐색은…….”
곰곰이 생각하던 아서가 고개를 번뜩 들었다.
“요정족이 황후 폐하를 돌려받길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
“설마 반년이 훨씬 지났고. 황후 폐하도 이곳에 온 과정을 잘 아시지 못하는 만큼 그쪽에서도 잘 모를 텐데요. 끈질기게 찾으려 할까요?”
“물론.”
“왜요?”
그에 카론은 덤덤하게 말했다.
“나라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 * *
먼 장래에 황후 자리에 오르리라 여겼기에, 무수한 사람을 다스릴 중한 자리기에, 경전과 명언을 많이 읽어 지식을 넓히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주로 집 안에서 서책을 읽고 어른 말씀을 새겨들으며 공부하였으나, 적절한 날짜를 정하여 황도를 둘러보고 견문도 넓혔다. 대부분은 누님이 함께 다녔다.
“상인과 흥정을 할 때는 너무 관심 있는 척하면 안 된다. 몹시 필요해도 무관심한 척해야지 좋은 값에 산다. 이쪽이 몸이 단 것을 눈치채면 바가지를 쓰게 마련이야.”
“그러다가 다른 사람이 먼저 사 가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 다른 걸 사면 되지 않느냐?”
“세상에 꼭 한 개만 있는 물건도 있잖아요.”
“세상에 꼭 한 개만 있는 건 시장에 나오지 않아. 그런 귀한 걸 누가 장바닥에서 파느냐?”
“그럼요?”
“몰래 숨겨 놓고 부자에게 조용히 물어본단다.”
분홍이가 머리를 끄덕이자, 여운은 금세 또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몰래 가져온다고 해서 전부 하나뿐인 것도 또한 아니지. 누군가 그런 물건을 가져오면 그것이 정말로 진귀한 것인지 은밀히 또 알아봐야 하지. 그럴 때도 흥미가 많은 척하면 안 된다. 그럼 얼른 다른 놈에게 팔러 가거든. 그렇다고 너무 무관심한 척도 하면 안 돼.”
“어려워요.”
“흥정은 어려운 일이야. 그러니 오래 거래하여 좋은 상인을 하나 마련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앞으로 너는 황궁의 살림을 책임져야 하니 대상을 상대할 터인데 그들은 또 배포가 달라. 하지만 저잣거리 장사치의 습성을 모르면 협상자의 습성을 파악하기도 힘들어.”
“배울 것이 너무 많아요. 제가 과연 자격이 있는 걸까요?”
“자격이 있다마다. 너는 넘쳐서 문제야! 못 믿을 건 불한당 놈들이지!”
양육에 관한 지식은 큰어머니가 도맡았다. 실제로 양인 셋을 아주 훌륭히 장성시킨 삶의 큰 스승이셨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찌해야 한다고?”
“숨을 쉬는지, 울음을 바로 우는지 확인한 후에 항문 속을 만져 음양을 따진 후에 물에 씻고 강보에 싸서 첫 수유를 하옵니다.”
“아이는 순수 그 자체이다. 탯줄은 산파가 끊어도 아이의 음양 확인만은 낳은 어머니에 해당하는 생아비가 직접 하여야 한다. 그것은 아비에게도 맡길 수 없다. 혹여 정신을 잃으면 나중에 정신이 든 후에 하면 된다. 몸이 허약하여 아이의 음양을 확인하지도 못한다면 큰일이다. 황손으로 태어나서 음양도 가리지 못한 모지리가 되고 만다. 아이가 제 본신을 바로 알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머니나 생아비가 필요한 법. 늘 몸을 갈고 닦아야 마땅했다. 누구보다도 제 건강이 가장 우선이다. 또한 나라 살림은 집안 살림과 덩치가 다르지만, 근본은 똑같다. 아무리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도 곱게 대해야 한다.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핍박하고 괄시해서는 안 된다. 용모로 차별해서도 안 된다. 아무리 아둔한 자라도 적재 적시가 있는 법이니, 유심히 관찰하여 제 일을 찾아줌이 마땅하다. 또한, 의논치 않은 일까지도 시시때때로 토를 다는 자는 되도록 멀리 두어야 한다. 그는 상전을 우습게 아는 것이다.”
이어지는 큰어머니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윗전의 위엄을 갖추되 항상 자애롭게 아랫사람을 돌보아라. 꾸짖기 전에 연유를 물어보고 연유가 합당하거든 크게 나무라지 마라. 대신에 실수가 잦은 자는 크고 중한 일 대신에 작고 하찮은 일을 맡겨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에 되새겼다. 큰엄마는 집안 하인뿐 아니라 도성 내 많은 평민과 심지어 다른 가문의 부인들께도 크게 존경받는 현숙한 분이셨다.
“큰마님 같은 훌륭한 분이 직접 너를 가르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본인을 돌아보고 겸손의 미덕을 갖추는 예의는 엄마에게 배웠다.
비록 서자임에도 어르신의 귀여움을 받아 적자처럼 잘 대우 받았을 뿐 아니라, 그 덕에 아주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분수에 넘침을 항상 되새기며 오만을 멀리하고 교만을 내치라는 가르침을 수시로 받았다. 제가 손가락질을 받으면 곧 아버님과 큰마님이 손가락질받는 일이니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일렀다.
“작은 발걸음 하나 디딜 때도 아버님, 큰어머님, 형님 누님을 생각하며 조심히 디뎌라. 성혼 후에는 가벼운 재채기를 해도 부군이 제때 곁을 덥혀 주지 않았다 흉을 볼 것이다. 그러니 속상한 일이 있어도 겉으로는 내보이지 마라.”
갖은 우여곡절 끝에 가르침을 어떻게든 펼칠 날이 왔다.
며칠 시간을 들여 그렌이 가져온 명부와 도면을 찬찬히 훑었다. 옆에서 읽는 걸 도와주는 마그네가 분홍이의 눈치를 계속 봤다.
“왜 그러나요?”
“아닙니다.”
“황후의 얼굴을 계속 보면 안 됩니다. 황후는 황제의 것입니다.”
“네, 폐하.”
명부를 보며 마그네에게 부르는 대로 받아쓰게 했다.
옷을 만드는 자, 음식을 만드는 자, 그리고 의원 올리아를 오후에 만나기로 하고 이후에는 도면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한 걸음씩 움직이며 제가 있는 방을 중심으로 사방을 살펴보았다.
당장 아이가 태어나면 제 방에서 키우겠지만, 앞으로 아이가 지낼 방을 지금부터 천천히 선정하여 방을 알맞게 꾸며야 했다. 자칫 큰일일 수도 있기에 미리 방을 봐 두고 싶었다.
때에 맞춰 중참을 먹고 나자 마그네가 시킨 대로 시녀 둘과 올리아를 불러왔다.
“폐하.”
올리아가 공손히 절을 하였다.
“의원 올리아.”
고개를 같이 숙이는 일 없이 이름을 불러 환대했다. 다른 시녀 둘 또한 올리아를 따라 했는데, 옷을 만드는 자는 창백한 낯에 마른 사람으로 이름이 리자였다. 다른 시녀들과 달리 소매와 옷깃에 눈에 띄지 않게 멋을 부린 자수가 있었다.
음식을 만드는 자는 냄새부터 달랐다. 뚱뚱하기보다는 풍채가 좋은 중년 부인으로 이름이 앤지였다. 작은 눈에는 총기가 있었고 입술은 수다스러웠다.
“나는 황후 아가르타입니다.”
“예, 폐하.”
“곧 황제 폐하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리자, 아이가 쓸 옷감을 가져옵니다. 옷, 베개, 이불. 침대 옷감입니다. 기저귀 옷감도. 내일 오전에 봅니다.”
“예.”
리자가 나간 후 올리아와 앤지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나는 요정입니다. 우유가 많이 없습니다. 아이는 죽과 다른 우유를 먹습니다. 올리아, 아이 음식을 함께 생각합니다. 후에 앤지에게 가르쳐 줍니다.”
“네, 폐하.”
“아이는 많이 아픕니다. 아이 음식과 약은 다릅니다. 라테시온에서는 어떤 약과 어떤 음식을 먹는지 나는 모릅니다. 지금 모두 알고 싶습니다.”
올리아가 잠시 생각하더니 되물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증상과 그에 맞는 약을 미리 확인하신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렇습니다.”
“유모는 들이실 생각이 없으신가요? 유모는 젖을 주는 여자입니다.”
유모라는 낱말은 몰랐어도 그 개념까지 모르진 않았다. 고려한 바가 있으나 이국인을 유모로 덜컥 들이기는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자신과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을 텐데 아이의 상태는 직접 확인하는 편이 낫다.
“유모는 나중에. 우선 내가 기릅니다. 앤지, 작은 아기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져오세요. 전부.”
“예, 폐하.”
올리아와 앤지까지 물러간 후 마그네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분홍이를 또 빤히 봤다.
“마그네. 내 얼굴을 보아선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황급히 숙였던 마그네는 손을 꼼지락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알던 요정님이 아니신 것 같아서.”
“전에는 내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이 나입니다.”
“알겠습니다. 폐하.”
“마그네.”
마그네가 공손한 태도로 다가왔다.
“마그네는 나를 도와서 아기를 키웁니다. 황제 폐하보다 나를 도와주세요.”
“황제 폐하보다요?”
“네. 그렌은 폐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그네는 내 사람입니다. 아닙니까?”
“이미 그랬습니다. 저는 황후 폐하만의 종복입니다.”
“마그네는 황제 폐하 몰래 나를 도왔습니다. 그에 나는 마그네를 가장 아낍니다. 이제 마그네는 제일 높은 시녀입니다. 내가 그렇게 합니다.”
라테시온의 관례상 황후를 지척에서 모실 수 있는 자는 귀족뿐이었다. 평민 중에서도 궁인을 뽑는 신국과는 다른 풍습이었다.
애석하게도 마그네는 귀족이 아니었다. 시녀장은커녕 황후 직속 시녀의 자격도 없었다. 실제로 그렌은 새로이 등극한 황후를 모시기 위한 귀족 명단을 추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분홍이는 마그네 외에 다른 자를 제 곁에 둘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정치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는 자들을 곁에 두는 것은 무척 위험했다. 특히나 황제의 총애를 전적으로 신임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랬다. 이곳에서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자는 마그네뿐이었다.
똑똑한 마그네는 분홍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분홍이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결연한 음성이 이어졌다.
“감사합니다. 폐하. 말씀으로도 저는 너무나도 기쁩니다.”
마그네는 감격한 듯 울먹였다. 말에 그치지 않고 분홍이는 그렌을 불러 마그네를 황후 직속 시녀로 삼았음을 통보했다. 지위는 시녀장으로, 그렌 바로 아래였다. 대우도, 봉급도 월등히 나아졌다.
평민으로서 시녀장에 오른 파격적 인사는 요정 황후라는 특이성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사람을 여럿 쓰려면 아무래도 개인적으로 쓸 재물이 필요하다. 많은 재물은 사람을 부르고, 모인 사람은 다시 재물을 가져온다. 분홍이가 단단한 옹벽을 쌓기 위해선 사람과 재력을 함께 쥐어야 했다. 인물과 재물, 이 둘이 합쳐져 권력이 될 것이다.
재력을 키우려면 가진 권한을 십분 활용하여 장부부터 손에 쥐어야 했다. 카론은 이미 분홍이에게 황궁의 전권을 일임했다. 그 때문에 그렌은 장부를 가져오란 말에도 거역 없이 순순히 따랐다.
향기 좋은 라벤더 차를 마시면서 그렌에게 받은 황궁 운영 장부를 봤다. 사실 아무리 황후라도 황궁의 금전 출납까지 직접 손을 댈 순 없다. 그것은 황제가 신임하는 신하가 따로 챙기는 일이었다. 그런데 신국에서 그렇게 했다고 우기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장부는 아주 민감하여 아무리 신임하는 마그네라도 그대로 보여 주긴 어려웠다. 품목과 숫자로 이루어져 있기에 직접 보면서 모르는 글자만 따로 적어서 마그네에게 물어보았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가장 안전한 방법을 취했다. 마그네의 도움으로도 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으면 그렌에게 설명을 요구하면 된다.
장부와 씨름하고 있을 때였다.
벌컥.
기척 없이 들이닥칠 사람은 하나뿐이었다.
“권한을 요구한 지 며칠이 되었다고 벌써 황궁을 발칵 뒤집었더군. 평민 시녀장이라니.”
“기다렸습니다.”
카론의 등장은 다소 늦은 감이 있었다. 장부를 요구하고 나서야 납시다니. 황궁 운영을 맡기고도 의지만 있다면 그는 일일이 참견도 가능했다. 뱉은 말을 철저히 시키는 신의가 있으리라고 전혀 기대치 않았다. 하나를 보면 열 가지를 아는 법.
참견을 삼가는 것은 정말로 분홍이를 믿어서가 아니라 황후로서 어떻게 하는지 잠자코 지켜보는 중이 분명했다.
카론은 맞은편 빈자리에 앉았다. 마그네는 카론에게도 똑같이 라벤더 티를 내놓았다.
“넌 나가.”
“폐하?”
카론의 명령에 마그네는 분홍이를 보며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마그네는 고개를 숙인 후에 물러났다. 그걸 본 카론이 살짝 벌어진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벌써 황후만 따르는 심복이 되었군.”
“당연합니다.”
“내 황후가 나보다 다른 사람과 더 가까이 지내는 건 내키지 않는데.”
“폐하에게도 그렌이 있습니다. 아서, 올리아도 있습니다. 나는 마그네뿐입니다.”
“다 쫓아내면 너도 마그네를 쫓아낼 텐가?”
“그럼 누가 청소하고 누가 음식을 만듭니까? 나는 아기 있어서 못 합니다. 폐하가 합니까? 저는 깨끗한 방과 맛있는 음식 좋습니다. 아기도 그럴 겁니다.”
“이번에도 내가 졌군.”
패배를 시인한 사람치곤 카론은 즐거워 보였다. 파란 도깨비 눈은 예전보다 냉기가 확실히 약했다. 우습게도 따뜻하게도 느껴졌다. 그래서 더 괘씸하였다. 이렇게 할 줄 알면서 왜 저를 괴롭혔나.
임신에 돌변하였으니 아이를 낳은 후에 또다시 돌변할 수도 있다. 인간의 천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다감한 부군 흉내를 내도 언제 또 칼과 주먹을 휘두를지 모를 일.
그것이 저에게만 향하면 몰라도 아이에게 향하는 순간을 생각하면 산채로 찢어 죽여도 시원찮았다. 억지 황후의 권력이라도 최대한 이용하여 단단한 방패를 쌓아야 했다.
견고한 결심을 모르는 작자는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향긋한 차에는 관심이 일절 없어 차가 서서히 식었다. 보고 있는 장부에 관해 특별히 언급하지도 않고 마그네 얘기만 꺼내는 게 이상했다.
하고픈 말이 있으면 얼른 하라고 입을 열려는 무렵, 낮은 음성이 먼저 울렸다.
“그놈은 어땠나? 네게 잘해 줬나?”
“누구 말입니까?”
“네 옛 약혼자.”
갑자기 태손 마마 얘기는 왜? 거기다가 옛 약혼자에 놈이라 낮잡아 칭하여 기분이 퍽 상했다.
“네. 무척 잘해 주셨습니다.”
잠시 본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뜻하지 않은 술래잡기를 하는 바람에 인상이 조금 흐렸다. 적어도 음성은 처음부터 다감하였다. 때리지도 않고 겁간도 안 했다. 조금 놀라게 하였으나 이내 태도를 누그러트리고 달래 주지 않았나. 태손 마마는 훌륭하신 귀인이었다. 누구랑 달리.
“흠, 그래서 둘이…… 잤나?”
“……그분은 폐하가 아니십니다.”
천박한 물음에 어투가 저절로 날카로워졌다. 제 행실은 반성하지 않고 도리어 겁간당해 목숨마저 끊으려고 했던 배필의 순결 여부가 먼저 알고 싶다니…… 정말로 천성이 비뚤어진 자였다.
“안 했군.”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는 묻지 말라 잘랐는데도 카론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눈매를 슬며시 접으며 밉살스러운 혓바닥을 놀렸다.
“왜? 혹시 아직도 신경 쓰여?”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했다. 의도치 않은 사고로 장래 배필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세상에 떨어졌는데 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있나. 더불어 귀하고 어진 분이었고 정혼 기간도 길어서 상심이 많을 게 분명했다. 제 잘못도 아닌 일로 정혼자를 잃어버린 죄책감이 얼마나 크겠는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네 가지 마음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국의 황제는 그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흉한 천성을 드러내기만 했다.
“신경이 쓰인다고…….”
카론은 탐탁잖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네가 그러니 나도 신경이 쓰이는군.”
“폐하께서 신경 왜? 무엇이 있습니까?”
좋게 웃어놓고 금방 또 서늘한 낯짝을 드러낸 카론의 도깨비 눈에 사악한 총기가 감돌았다.
“그놈이 내게 달려들면 곤란하지 않나.”
“태손 마마가? 폐하를? 왜요?”
“으음. 타이손 마아라. 영 이상한 이름이야.”
순간 분홍이는 입을 딱 다물었다. 실수했다. 존함은 아닐지라도 귀한 분의 존칭을 저 인간 같지 않은 작자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여기로 건너온 방법이 불분명했고, 돌아갈 방법도 마찬가지였다. 백룡과 같은 흰 기운이 어떤 식으로 발휘되는지, 아니 그것이 정말로 세상을 오고 가는 길을 알려 주는 건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에 카론이 무슨 짓을 하든 태손 마마에게 해를 끼칠 수 없다.
합당한 얘기인데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얇은 비늘이 폐부를 슬며시 저미는 것 같았다.
낭패한 기색이 눈에 들어왔는지 카론은 풋, 헛웃음을 지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너와 아이는 무사할 거다.”
“그러길 바랍니다.”
“당연히 내 곁에서 말이지.”
시퍼런 안광이 뱀처럼 빛났다. 유달리 긴 사지가 스르륵 움직였다. 긴 다리는 늘 그랬듯이 삐딱하게 포개었고 팔은 의자 팔걸이에 걸쳤다. 분명히 긴장을 푸는 태도인데 이상하게도 불길함이 스며서 심장이 쿵덕쿵덕 뛰었다. 꼭 배부른 맹수 앞의 토끼 신세 같았다.
“계…… 계속 있을 겁니까?”
“음. 오늘은 이대로 여기서 쉬고 싶군. 내일부터 당분간 너를 못 볼 테니까.”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출타한다는 얘긴가.
“내일부터 당분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할 문제가 발생했어. 황도에서 그렇게 먼 곳은 아니야. 사흘 정도 걸린다.”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길 내심 바랐으나, 그렇게 오래 멀리 가기를 원치는 않았다. 카론이 기꺼워서가 아니었다. 아직 날짜가 영 넘진 않았어도 충분히 배가 풀어 언제 몸을 풀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기였다. 이런 중한 때에 아이의 친부이자, 부군이 자리를 비우다니.
“나쁜 일입니까?”
“아직 몰라.”
파란 눈이 분홍이를 직시했다. 황궁에는 벽안을 가진 사람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카론만큼 짙은 푸른색은 아니었다.
신국에 있을 때 아주 먼 사막국에서 난다던 청금석을 큰엄마가 보여 준 일이 있었다. 부친의 공을 세워 황상께서 하사하신 것으로 큰엄마는 그것을 머리꽂이로 만들지 혹은 노리개로 만들지 고민했다. 새파란 돌이 얼마나 곱던지. 하늘보다 더 파랗고 쪽빛보다 더 시렸다. 아주 예쁜 보석이었다.
청금석과 같은 안구를 가진 자가 있을 줄은 여기에 오고 나서야 알았다. 애석하게도 그는 고운 눈빛에 어울리는 성품을 갖추지 못했다.
“……사람을 죽입니까?”
그를 증명하듯 긴 입술이 엷은 호를 그렸다. 초승달보다는 그믐달 같은 웃음이었다.
“그것도 확답하기 어렵군.”
귀한 자식이 태어나기 전에 피를 볼 생각이 만만한 자라니. 무도하기가 끝이 없었다.
“피를 보거든…… 황궁에 들어오기 전에 소금으로 목욕, 세 번 씻고 오십시오.”
“왜?”
“피 묻은 손, 저와 아이를 만지지 마세요. 나쁜 일입니다.”
“주술 같은 건가? 주술 쪽은 아주 기분이 나쁜데.”
“주술이 아닙니다. 신국에서 자주 합니다. 소금은 몸에 묻은 나쁜 기운을 없앱니다.”
“성수 세례 대신인가. 어차피 목욕할 테니 소금을 사용하도록 하지.”
끝까지 피를 보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딴에는 신경 쓴 배려도 본인을 물리는 방식은 아니다.
마음이 삭막하여 덜어 낼 줄을 모른다. 끊임없이 파괴하고 착취할지언정 한 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으며 한 톨 걷어 내지 않는다. 자신에게 한 짓을 보면 다른 자들에게도 얼마나 잔혹할지 눈에 선했다.
피를 보지 않을 방법이 있으면 응당 그것을 취해야 하는데, 잔혹한 황제는 피부터 보려 들었다. 사람에 대한 당연한 측은함이 없다. 그것이 이자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였다.
“피, 없으면 좋습니다. 피를 보는 힘은 나중의, 나중의, 가장 나중의 수단입니다.”
“내 뜻에 반하는 자까지 포용하란 말인가? 반역도를?”
“라테시온 황제 폐하는 늘 피가 필요합니까? 훌륭한 왕은 피 없이 사람을 다스립니다. 그쪽이 더 강합니다.”
거기서 말을 멈춰야 했다. 덕이 부족한 군왕을 꾸짖을 때는 말을 잘 골라야 마땅하다. 경애 없이 올리는 말씀은 군왕의 체면을 건드려 화를 부르게 마련이었다. ‘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오랑캐의 우두머리에게는 더욱 세심하게 가르쳐야만 했다.
애석하게도 분홍이는 말을 고르지 못할 만큼 분통이 터졌고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자에게 경애심이 전무했다.
“폐하는 피를 좋아합니다. [악귀]와 무엇이 다릅니까? [악귀]란 몹쓸 [귀신]으로…… [귀신]은 이상한 술수를 쓰는…… 죽은 자입니다.”
우연히 모국어가 튀어 나갔다. 말을 배울 때 상대가 으레 그러듯이 분홍이도 자연스럽게 낱말을 풀었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하게 듣던 카론의 안색이 점점 굳더니 이내 정말로 ‘악귀’같이 변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 정말로 위험한 귀신처럼.
“사술을 쓰는 악령이라…… 마녀의 사생아에게 딱 어울리는 찬사로군.”
마녀도, 사생아도 꺼내지 않았다. 전에 카론이 말한 바는 정말로 진심이었다. 그는 사술이나 마녀를 정말로 싫어했다. 아니 싫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는 포악무도했다.
“바른 황후의 대접을 해 주고 들은 말이 사술을 쓰는 악령이라니. 그 악령의 자식을 밴 너는 그럼 뭐지? 악령의 창부인가? 아, 창부란 몸을 팔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지.”
잘못 퍼부은 말은 더한 오물이 되어 돌아왔다.
창부! 짧은 단어 하나가 거친 파도와 같이 들이닥쳐 분홍이의 이성을 쓸어갔다.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저 호로 종자에게 어떤 마음도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갈기갈기 찢어진 심장이 다시 고름이 찬 피를 퍽 쏟았다.
“어…… 어떻게…… 그…… 그런!”
눈에 열기가 오르고 광대가 씰룩거렸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관자놀이가 뻐근했다. 뒷골도 홧홧 달아올랐다. 목이 뻣뻣하여 시야가 핑 돌았다.
[이 치졸하고 사악한 악귀 놈이! 어찌 저런 말을! 네가 아무리 황제라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다! 네가 나를 그렇게 만들어 놓고 나를 창부라 비난하느냐? 네놈이? 감히? 이…… 이…… 구더기만도 못한 놈아!]
“알아들을 수 없는 요정어로 저주를 퍼부어 봤자 내겐 안 통하는데 어쩌지?”
천천히 일어선 카론은 입꼬리를 픽 올렸다. 저렇게 얄미운 웃음을 지을 때 할 수 있으면 입을 찢어 주고 싶었다. 내려다봄이 기분 나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려 했으나, 무거운 배는 쉬이 허락지 않았다. 다소 느린 기세에 낮은 신음까지 더하여 섰더니, 카론이라 이르는 버러지 놈이 몸이 닿을 거리까지 당도했다.
“헛.”
단단한 배에 부푼 배가 닿아서 저도 모르게 휘청했다. 놈이 허공을 젓는 팔을 꽉 붙잡았고 의자도 푹신하여 크게 엉덩방아를 찧지는 않았다. 열불이 터져 고개를 번쩍 드는 찰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턱을 잡은 놈은 분에 차 꽉 깨문 입술 주변을 유심히 살피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얇은 조소를 머금은 입술이 분기에 찬 뺨을 스치더니 곧 귀가에 이르렀다.
“타이손이라는 놈은 피가 무서워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멍청이였나 보군.”
“그…… 그분을 함부로 부르지…….”
“흐음. 그렇다면 실망인데 말이지. 적어도 죽일 때 어느 정도 보람은 있어야 하잖아.”
너무 분통이 터진 나머지 먼 신국 땅에 계시는 그분에게 해악을 끼칠 방도가 없음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저 극악무도하고 더러운 어태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버러지처럼 단칼에 죽어 나자빠지면…… 재미없는데 말이지.”
[그 더러운 입 다물라!]
심신의 건강을 위해 무예는 조금 배웠으나 진검을 쓰는 무사에 비해 몸짓이 현저히 떨어지기에 놈의 뺨을 때릴 능력이 없는 데도 기어이 손이 날아갔다. 언제가 그렇듯 놈이 손목을 낚아채리라 내심 알고 있었다.
턱.
제대로 맞은 건 아니었다. 손날이 놈의 거만한 광대와 턱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작은 연홍색 자국이 났다.
제가 더욱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반쯤 든 손을 어찌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들고 있는 찰나 카론이 슬며시 조소했다.
“바른 황후는 황제의 뺨도 때리나 보지?”
“그…… 그야…….”
“그것도 옛 정혼자를 비호하려고.”
“…….”
여태껏 몸을 숙인 사내는 싸느랗게 웃었다. 시퍼런 안광이 전신을 훑는데 꼭 뱀이 맨살 위를 스멀스멀 기는 느낌이었다. 소름이 쭉 돋았다.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거지?”
“그야…….”
포악하여 눈에 넣기도 싫을 만큼 역겨운 개놈의 자식이라 여긴다. 실토하는 대신 침만 꿀꺽 삼켰다.
“……황제 폐하지요.”
무슨 말을 해도 불리했다. 황제의 용안에 손상을 입히는 것은 폐비가 되어도 모자랄 중죄. 복중 태아와 함께 당장 냉궁으로 쫓겨나거나 더 나아가 옥에 갇혀도 유구무언이었다.
울화병이 생겨서 그런가. 최근 인내심이 적어졌다. 꾹꾹 참으면 될 일을. 또 일을 치고 말았다. 이래서야 천명을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이 우스웠다.
두방망이질 치는 심부를 쓸어내렸다. 날뛰는 숨틀을 진정시키고 깔았던 시선을 다시 의연하게 들었다. 일을 그르친 이상 각오를 다져야 할 터. 그래도 아이만은 살리고 싶다.
“나만 나쁩니다. 아이는 안 나쁩니다. 나만 벌, 받습니다.”
“요정국의 황제는…… 황후와 은밀한 대화를 나누다 말랑한 손에 좀 맞았다고 아이의 목숨을 운운할 만큼 냉혹한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거짓말이었다. 신국의 천자는 만인지상의 존재. 실수라도 감히 옥체에 손을 대는 일은 목숨으로 갚아야 하는 대역죄였다. 그것은 덕과 자애로 만백성을 이끄는 황상에 대한 바른 예의였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황후가 황상을 함부로 한다면 누가 황상을 우러러보며 따르겠는가.
“그런가 보군.”
“올바른 황제는 황후라도 죄를 지으면 용서하지 않…….”
차분히 움직이던 입술에 단단한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을 똑바로 뜨니 청금색 안구가 한가득 들어왔다.
“애석하게도 나는…….”
느긋한 태도는 지극히 오연했다.
“……올바른 황제가 아니거든.”
바르지 않은, 그릇된 황제 카론은 뻔뻔하게도 만삭의 임부를 희롱하려 들었다. 손이 긴 옷자락 밑으로 대뜸 들어왔다. 기겁하여 허벅지를 쓰다듬는 나쁜 손을 밀어내려 했다. 부른 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바…… 른 황제는 대낮부터 황후를…… 흣!”
“이미 올바르지 않은 황제인데 뭐 어때.”
설마 진심은 아니겠거니 하면서도 진저리를 쳤다. 방금 그렇게 싸늘하게 굴던 작자가 갑자기 이러니 너무 당혹스러웠다.
욕정을 거구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아 놓기라도 하나? 오늘은 자리 한번 펴보겠다 싶으면 그저 쌓아 놓았던 욕정만 끌어내면 되나? 하물며 짐승도 배부른 처를 상대로 껄떡 대진 않을 텐데. 인간의 형상을 해도 짐승 이하라 그런 것도 조절이 안 되나?
경악성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훗.”
코웃음이 들렸다. 그러면서 허벅지를 파고들던 손이 슬그머니 나갔다. 하얗게 질렸다가 금세 또 빨갛게 변하려는 얼굴을 간신히 들었다.
쪽.
못난 입으로 못난 짓을 한 작자가 눈을 접어 웃었다.
“올바르지 않은 황제라도 좋은 남편은 되고 싶은데 말이지.”
그러면서 놀란 분홍이 곁에 앉아서는 퍽이나 다정스레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 앞에서 다른 놈 편을 들지 마.”
“이 나라에 없는 사람입니다.”
“라테시온에 없어도 있어도 상관없어. 네 안에 들어 있는 게 문제니까.”
“제 안에는 폐하의 씨앗뿐입니다.”
몰래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못된 손이 또 턱을 들어 올렸다.
“이런 귀여운 모습도 내 앞에서가 아니면 안 돼.”
뭐가 어떻게 귀엽다는 건지. 입매가 절로 찌푸려졌다. 무슨 대꾸를 하기 전에 입술에 뜨거운 혀가 닿았다.
“저를 황후로 대해 주세요.”
“그러고 있잖아.”
“아니에요. 폐하는…….”
울분을 억누르며 지척에 있는 청금색 눈을 노려봤다. 턱에 단단히 힘을 주면서 추잡한 혀가 아무리 입술을 들썩여도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둘밖에 없는데? 황후라도 부부잖아.”
“폐하는 나를…… 창부로 여기니까요.”
더러운 낱말을 직접 뱉어야 했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 뭉툭한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끓어오르는 울분이 목구멍을 못 넘도록 꾹꾹 누르느라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한동안 시선을 마주하던 카론은 이윽고 옅게 한숨을 뱉었다.
“창부라는 말은 취소하지.”
순순히 말을 물릴 줄은 몰랐다. 예상을 빗나간 반응에 맥이 약간 풀렸다.
“대신 내 황후가 다른 놈을 두둔한 잘못의 대가도 받아 내야겠어.”
그럼 그렇지. 한 수 무르자마자 바로 선수를 둔다. 끊임없이 삼키고 잡아먹기만 하고 덜어낼 줄 모르는 강퍅한 인간.
큰 손이 요령 좋게 뺨 중간을 눌렀다. 턱이 벌어지며 입이 열렸다. 순식간에 침범한 매끈한 살덩이는 원래 거기에 있어야 하는 듯이 분홍이의 입 안을 휘저었다.
치아와 입천장이 닿는 부분을 간지럽히다가 분홍이의 혀를 끌어당기곤 했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매끈한 촉감과 뜨거운 열감에는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혓바닥을 비비다가 사시 옆으로 쏙 들어와 혀뿌리 살을 간지럽혔다. 그러더니 숨을 삼킬 듯 강하게 빨아당겼다. 맞붙은 살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젖은 소리 덕에 뺨과 귀가 홧홧해졌다.
“흐흥.”
코로만 호흡을 견디기 힘들었다. 눈썹이 일그러졌다. 손으로는 카론의 두툼한 몸통 언저리를 붙잡았다.
한참 혀를 얽은 후에 천천히 떨어진 카론은 타액에 젖은 입술을 닦아 내듯 부드럽게 훔쳤다. 긴 입맞춤이 끝나자 남은 건 영 못마땅한 분위기뿐이었다.
“이 키스로 벌을 대신하는 건 어때? 아니면 정말로 너와 아이를 내쳐야 하나?”
“…….”
차라리 똑같이 뺨을 맞는 편이 속이 시원할 것이다. 흉악한 놈이 정인처럼 굴 때마다 마치 구정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전신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분간이 어려웠다. 머리는 차가웠고 등은 뜨거웠고 손발은 얼음장 같으며 뺨은 또 열이 올랐다.
“얼굴이 빨갛군. 이만 쉬는 게 좋겠어.”
쉴 테니 나가라는 말은 했으나 카론은 듣지 못한 척했다. 분홍이 대신 마그네를 부르고 일찍 취침에 들 거니 준비하라고 시켰다. 마그네는 분홍이의 안색이 좋지 않아 무척 걱정했다.
“폐하의 말씀대로 일찍 쉬고 싶어요.”
“예, 황후 폐하.”
마그네는 조용히 환복을 도왔다. 분홍이가 병풍 뒤에서 옷을 갈아입는 사이 위대하신 황제 폐하께서는 손수 옷을 갈아입는 용단을 선보였다.
하나가 미우니 직접 옷을 갈아입는 일조차 황상이라는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천박한 짓으로 보였다. 청금석 눈은 무정한 망나니 같았고 누런 황금색 터럭은 꼭 샛노란 고리대금업자 같았다. 학처럼 길고 느긋하게 움직이는 팔다리는 노름판에서 구르는 빚쟁이 한량 같기도 했다.
하필이면 노린재 같은 저 작자에게는 분홍이의 곁을 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연한 듯이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엄지로 가까운 살결을 조용히 쓸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생각이 깊었다.
가벼운 석찬을 들고 나서도 놈은 분홍이만 지긋이 바라보았다. 잠시 창밖을 보며 쉴 때, 아직 덜 본 장부를 꼼꼼히 읽을 때, 시선이 너무나도 신경 쓰여 뒤를 돌아보았을 때도 카론은 저를 응시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합니다.”
“할 말? 없는데.”
“그러면 왜 나를 계속 보지요?”
“그저 내 요정을 보고 있을 뿐이야.”
“사람은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을 오래 보지는 않습니다.”
“정말 특별한 이유가 없어. 이유가 꼭 필요하나.”
“이유가 없다면 보지 마세요. 계속 보면…… 싫습니다.”
“굳이 듣고 싶다면 하나 있긴 해.”
“뭔가요?”
파란 눈이 가늘게 휘어지며 눈웃음을 쳤다. 저 낯짝으로 미루어 보아 가당찮은 개소리가 분명했다. 카론이 나가지 않으면 자신이 나가겠다고 할 참이었다. 막 장부를 덮으려는데 낮은 음성이 이어졌다.
“내 요정을 보고 있으면 쌓인 피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거든.”
어안이 벙벙했다.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내일부터 사흘간 보지 못할 텐데 지금 눈에 새기고 싶어. 안 되나?”
“아…… 아니 될 것은 아닌데…….”
“황제인 나는 현재 휴식이 필요하다. 올바른 황후께서는 황제를 돕겠지. 공교롭게도 나의 휴식 방법은 요정 감상이야. 되었나?”
“…….”
이번 언쟁의 승자가 명백해졌다. 분홍이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애꿎은 장부만 뒤적였다. 그러는 사이 카론은 긴 소파에 느긋하게 누워 분홍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시선이 유달리 끈끈했다. 물리치고 싶어도 명분이 없으니. 아예 보면서 놀겠다 선언한 만큼 다른 방으로 옮기면 따라올 태세였다. 집요한 시선을 물리치려면 빨리 불을 끄고 자는 방법뿐이었다.
잠시 후 피곤을 이유 삼아 얼른 침실로 갔다. 침상에 오르자마자 카론이 따라와 뒤를 점했다.
“흐음.”
낮게 목 울리며 다가온 그는 자연스럽게 분홍이를 끌어안았다. 등이 놈의 가슴팍에 딱 맞아떨어졌다. 피하려 해도 엉덩이서부터 허벅지까지 틀에 끼운 듯 딱 맞춰 버리니 꼼짝하기가 어려웠다. 굵은 팔이 겨드랑이 아래로 들어와 가슴을 지나쳤다. 앞에 접어 포갠 분홍이의 손을 하나 슬그머니 잡더니 엄지로 손목 언저리를 슬금슬금 문질렀다.
때때로 귀와 뒷덜미가 이어지는 부근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머리숱을 헤치는 건 아무래도 높은 코 같았다. 허벅다리 뒤에 닿은 딱딱한 근육이 가끔 움찔거렸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고요 속에 숨소리만 이어졌다. 잠이 들기까지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자연히 단상이 이어졌다.
‘갑자기 웬일이지.’
갑자기 태손 마마 얘기를 캐물은 연유도 궁금하고 조석으로 분홍이와 태아가 무사한지 확인하던 작자가 굳이 자리를 비우는 것도 이상했다. 되짚어보니 퍽 심란해졌다.
‘무슨 일인지 물으면 답을 할까?’
입을 달싹거리다가 도로 다물었다. 공연히 말을 시켰다가 태손 마마, 나아가 부모님을 욕되게 할까 봐서 우려스러웠다. 어차피 돌아갈 기약이 없는 고향의 기억을 좋게 간직해도 모자랐다. 그저 흉악한 도깨비의 체온으로 시린 몸을 덥히며 오지 않는 잠을 청할 뿐이었다.
* * *
깜빡 잠들었다가 몸이 불편하여 눈을 떴다. 침대 휘장 밖으로 푸른 새벽 기운이 들이닥쳤다.
공연히 스산한 기분이 들어 몸을 웅크렸다. 잠자리가 이상하게 찼다. 고개를 슬며시 돌려보니 뒷자리가 비었다. 언제 나간 줄 알지 못했다.
침대 밖으로 나오자 냉기가 엄습했다. 항상 준비해 두는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창가에 섰다.
저 아래 흰 대리석 길 위로 말을 달리는 무리가 보였다. 그 가운에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있었다. 누구보다 크고 누구보다 빛나는 금발을 가진 남자. 멀리서 보아도 어찌나 오연하고 당당한지 마치 새벽을 물리치는 태양 같았다.
사흘이면 온다더니 동행도 조촐하여 따르는 기마병은 여남은 명이었다. 시린 눈가가 굳었다. 푸른 새벽 기운을 헤치며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갔다.
“이대로 가서는 영영…… 윽.”
돌아오지 말라는 끝맺음 대신 탄성이 터졌다. 갑자기 아랫배가 창에 꽂힌 듯 크게 아팠다. 창자를 생으로 비틀어 빼는 듯한 아픔에 배를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으읏…… 윽.”
다리가 비틀거렸다. 시야도 꺼멓게 꺼졌다가 다시 살아나길 반복했다.
덜컹.
창문을 짚은 손이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지며 무릎이 접혔다.
“아윽!”
식은땀이 이마를 적혔다. 정신이 아찔하여 누구라도 부르고 싶은데 목구멍이 콱 막혀서 제대로 소리가 안 나왔다. 그저 창가에 주저앉은 채 끙끙 앓고만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장을 뒤틀던 고통이 사라졌다. 산 채로 배가 뜯기는 줄 알았는데…… 허투루 오는 산통 같았다.
“허억…… 헉…… 쉬이 나올 녀석이…… 아니로구나.”
아직도 찌르르르한 고통의 여운이 남은 배 아래를 단단히 받쳤다. 숨을 고르면서 힘 빠진 다리로 어떻게든 침대로 다가가 누웠다.
워낙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한 아이라 태동도 크게 느껴 본 일이 없었다. 올리아가 청진기로 심장 소리를 유심히 들어 괜찮다고 하기에 사산이 아니라 안심했다.
“헛진통이 시작되었으니…… 곧 만나겠구나.”
배를 쓸면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달을 꼭 채우고 나오라고 점잖게 타일렀다. 화답하듯 아이가 움직였다. 제대로 느낀 태동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무척 놀라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당신 아이가…… 아.”
휑한 방에는 저뿐이었다. 아니 있다고 한들, 개종자를 붙잡고 네 아이가 건강하니 기뻐하라 할 것도 아니고. 경이로움에 벌어졌던 입이 천천히 다물어졌다. 쓰고 짜고 무거운 가슴을 짚은 채 분홍이는 태동이 잦아들 때까지 홀로 배를 쓰다듬었다.
개종자가 출타하고 나니 갑자기 주변이 휑했다.
‘고약한 놈이 없어서 후련해야 하거늘. 왜 이렇게 사위가 조용한가.’
황제가 황궁을 비웠으니 황후가 이제 주인이었다. 제가 황궁을 지키는 동안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더욱 신경 써야 마땅했다.
분홍이는 부지런히 의관을 정제하고 밖으로 나갔다. 몸이 무거워도 굳이 나선 이유는 궁 안팎을 둘러보며 황제의 부재를 느끼지 못하게 함이었다.
“황후 폐하.”
마주치는 궁인마다 무릎을 살짝 굽히거나 고개를 숙여 절을 올렸다. 분홍이는 그들에게 눈짓만으로 기별했다.
제일 먼저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림부터 치웠다. 황제의 무병장수와 황가의 번영을 비는 좋은 그림을 걸어 놔도 모자랄 판에 말로가 끔찍한 패주의 초상이라니. 게다가 카론의 조상도 아니니 걸어 둘 이유가 없다.
“사람을 시켜 이 그림, 이 그림은 치우세요. 이것도.”
“예, 폐하.”
한 번에 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기 싫어서 분홍이는 주로 마그네와 둘이서만 다녔다. 필요할 때는 올리아나 그렌이 동행하기도 했다. 실내 복도였기에 평소처럼 마그네뿐이었는데, 그는 분홍이가 지시하는 것을 작은 노트에 빠르게 적었다.
“이 외에도 황궁에 걸려 있는 초상화 중에 황제 폐하와 피가 이어지지 않은 자, 죄를 지어 쫓겨난 자의 그림은 전부 치웁니다.”
“네.”
“빈자리는 활짝 핀 꽃, 열매가 달린 나무, 새끼를 많이 낳아 열심히 돌보는 짐승, 또는 웃는 아이 그림이 좋습니다.”
“예.”
벽에 걸린 검과 도끼 장식도 다 치우게 했다. 어찌 저런 흉악한 물건을 버젓이 걸어 놓을 생각을 했을까. 혹여 궁인 중에 불손한 마음을 품은 자가 있으면 바로 흉기가 되는 것을. 측은지심이 말라 사람을 믿지 않는 황제치곤 너무 무방비했다.
빈자리를 그림으로 채우고 싶으나 당장 내린 초상화 자리에 달 그림도 모자랐다. 라테시온은 벽을 예쁜 접시로 장식하는 풍습이 있으므로 일부러 깨지지 않는 은으로 만든 접시를 달게 했다.
자손 번창을 비는 뜻에서 포도송이와 덩굴이 화려하게 양각된 은접시를 특별히 지정하였다.
“잘 익은 과일과 새끼가 많은 동물은 많은 아이를 뜻합니다. 이 넓은 황궁에 황족이 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많이 생기도록 좋은 그림을 걸어야 합니다.”
“황제 폐하의 총애가 깊으니 곧 셋, 넷이 되실 겁니다.”
그림을 고르는 방법을 설명하자 마그네는 덕담으로 답했다. 문득 기분이 이상했다.
“셋, 넷? 뭐가요?”
“그야…….”
멍한 눈길로 마그네를 보다가 제가 무슨 말을 한지 깨닫고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이 무슨 민망한 짓이란 말인가.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황족이 너무 적으니 후예가 번창하라는 뜻에서 자연스럽게 다복의 상징을 골랐다. 멍청하게도. 그건 제가 황제의 아이를 많이 낳겠다는 뜻과 통했다. 아니 그렇게만 들리는 게 당연했다. 당장 황제에게 배우자는 저뿐이니. 황가의 번영은 곧 자신의 부지런한 임신과 해산이었다. 그리고 황제와의 난폭한 정사도.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너무 민망한 나머지 어쩐지 말이 떨렸다.
“그…… 그림은 강물에 큰 물고기도 괜찮습니다. 잘 흐르는 일상을 뜻합니다. 물고기 그림은 오래오래 삽니다.”
잉어는 장수를 뜻하며 동시에 다복의 상징이건만. 그 얘긴 하지 않았다.
뒤로는 자손 번창 얘기를 쏙 뺐다. 그러나 마그네의 노트에는 이미 과일과 짐승 그림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있었고, 그것은 열의가 가득한 신임 시녀장인 마그네를 통해 아래 궁인들에게 빠르게 전달되었다.
“풍경화와 정물화를 눈에 띄는 곳에 걸었습니다. 그림의 수가 부족한데 어떻게 할까요?”
“새 그릇을 살 비용으로 그림을 삽니다.”
그렌을 불러 정한 바를 알렸다. 그릇 예산을 삭감한다는 얘기에 그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폐하께선 아기님이 태어나시면 성대한 연회를 열고자 하십니다. 아기님 탄생 기념으로 그릇을 새로 만들어 참석하는 귀빈에게 선물하려 했습니다만.”
“아기가 태어나면 100일간 궁을 닫습니다. 바깥에 사는 사람은 아무도 궁에 못 들어옵니다.”
“네?”
꽤 갑작스러운 얘기인지 그렌이 살짝 놀랐다. 그렌에게 지시하여 마련한 집무 책상에 앉은 분홍이는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작고 약합니다. 병에 잘 걸립니다. 병은 밖에서 옵니다. 100일이 될 때까지 부모 외엔 아이를 만지지 않습니다. 단, 보모인 마그네와 의원인 올리아는 괜찮습니다.”
그렌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아기를 축하하는 연회는 태어난 지 1년 되는 날 합니다. 아이를 기르는 사람은 나니, 황제 폐하께서도 내 뜻을 아실 겁니다.”
“예, 폐하.”
황제 또한 자신의 뜻을 꺾지 못한다는 확언에 그렌은 고개를 숙였다.
요정의 첫인상과 현 모습의 차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폭력과 강간에 상처 입고 죽으려 했던, 절망한 요정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신에 제 뜻이 곧 황제의 뜻이라고 말하는, 우아하면서 고귀한 지배자가 나타났다.
요정을 변하게 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카론의 무한한 총애인가, 혹은 아이를 보호하겠다는 강한 모성인가. 자못 궁금하지만,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는 물음이었다.
“미술상을 불러 이미 완성된 그림을 구매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으시면, 화가를 불러 장식할 방의 모습을 구경시킨 후 맞는 그림을 주문해도 됩니다.”
“미술상은 그림 파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나중에 보겠습니다. 대신 리자를 불러 바느질 그림 만들 겁니다. 그림은 꽃, 새, 나비, 벌이 좋습니다.”
그렌이 물러간 후 잠시 쉬려는데 리자가 만나기를 청했다.
“무슨 일인가요?”
“폐하. 저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리자의 옷 여기저기는 실밥과 보풀이 묻어 있었다. 바늘로 자주 긁은 머리는 까치집이었다. 마른 얼굴은 전보다 푸석하였고 손에는 미처 빼지 못한 골무가 끼어 있었다. 리자는 제 손가락 골무를 황급히 빼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말해 보세요.”
“저…… 아기님의 이불과 옷을 다 만들지 못해서…… 자수를 놓을 시간이…… 저…… 잠을 줄이고 있습니다만…… 저어…… 아무래도 혼자서는 자수까지는…… 시키시면 합니다…… 그런데…….”
수줍은 듯이 돌려 돌려 말하는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도울 사람이 필요합니까?”
“예!”
마른 얼굴에 화색이 폈다. 어차피 일감이 너무 많다 여겼다.
“마그네. 궁인 중에 바느질 솜씨가 좋은 사람을 세 명 뽑습니다. 바느질 솜씨가 좋더라도 성격이 드센 사람, 목소리가 큰 사람은 뺍니다. 솜씨가 조금 모자라도 성격이 유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을 먼저 뽑습니다. 마그네가 여섯 고르면 후에 리자가 세 명 고릅니다.”
“네. 폐하.”
“제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마그네 님에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 사람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리자는 기쁜 듯이 꾸벅 절을 하고 얼른 돌아갔다. 마그네는 지시 사항을 따르기 위해 막 수첩을 정리하여 일어섰다.
“그런데 폐하.”
“왜요?”
“바느질 솜씨보다 어째서 성격이 먼저입니까? 일을 빨리 마치려면 바느질을 잘하는 사람이 좋지 않습니까?”
그에 분홍이는 엷게 웃었다.
“바느질 대장은 리자입니다. 리자는 조용하고 부지런합니다. 성격이 나쁘면 대장을 함부로 여깁니다. 리자는 싸움에 질 겁니다. 궁인은 전부 똑똑하니 바느질은 배우면 곧 익힙니다. 성격은 바꾸기 어렵습니다.”
“아, 역시 깊은 혜안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분홍이는 리자의 봉급을 올려 주고 가지고 싶은 실과 천은 웬만하면 모두 사 주라는 지시까지 덧붙였다. 마그네는 리자를 위한 황후의 선물을 수첩에 곱게 적고 가벼운 걸음으로 나갔다.
오후에는 천천히 차를 마시며 고요를 만끽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칠 놈이 없으니 마음이 너무 편했다. 게으름을 피우면서 장부 여남은 장을 보는 사이 마그네가 저녁 세숫물 준비를 알렸다.
“으응.”
폭신한 내실화에 발을 넣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유달리 조용하여 고향에 계신 부친을 닮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했던 아이는 유감스럽게도 그러지 않은 듯했다.
툭.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마치 오줌을 싼 듯 다리 사이가 축축했다.
“아.”
젖은 내실화를 중심으로 물웅덩이가 천천히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