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9/28)

7.

날이 점점 식었다. 밤으론 벽에 난 작은 철문을 열고 그 안에 화톳불을 피웠다. 따뜻한 공기가 한쪽에만 몰려 방 전체에 훈기가 돌지 않았다.

탁자 근처에는 도기로 만든 제법 큰 화로를 두 개 두었는데 그러자 목과 코가 금방 말랐다. 분홍이는 마그네에게 필요한 것을 일렀다.

“주전자를요?”

“물과 큰 주전자와 쇠로 된 접시. 원해.”

마그네는 쇠로 된 접시 대신 화로에 걸칠 수 있는 쇠망을 가져왔다. 쇠망을 걸치고 물을 담은 주전자를 올렸다. 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한결 숨쉬기가 편해졌다.

“차를 마시기 편하겠어요.”

차 얘기에 반가움을 표시하자 마그네는 허브라고 부르는 이국식 약초를 가져왔다. 몇은 맛이 영 이상하고 몇은 맛이 그윽하였다. 꽃잎이 든 것도 있어 눈으로 보기도 좋았다.

향긋한 허브의 향내를 맡으며 쌀쌀한 기운을 몰아내는 찰나 등골이 갑자기 선연했다. 고개를 번쩍 들고 문 쪽을 노려봤다.

“왜 그러시죠?”

“쉿.”

마그네를 조용히 시키며 귀를 기울였다. 한참 귀를 기울인 후에야 그것이 개종자가 아니라 지나가는 누군가의 기척임을 알았다. 기척이 완전히 잦아든 후에야 분홍이는 벌렁거리는 심장께를 조용히 부여잡았다.

마당을 거닐다가 개종자의 후안무치에 분통을 터트리다 못해 악을 쓴 날 이후로 반갑지 않은 방문이 뚝 끊겼다.

처음에는 드디어 조용히 지낼 수 있겠구나 싶어 내심 안도했으나, 놈이 나타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어디서 어떻게 불쑥 나타나 행패를 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이 커졌다.

지금에는 문득문득 들리는 기척에도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심장이 크게 뛰었고 전신에 솜털이 쭈뼛 돋았다. 가끔은 너무 놀란 바람에 배가 당기기도 했다.

복통이 다시 심해 표정을 찡그리면 마그네가 올리아를 부르려 들었다. 분홍이는 혹시라도 놈의 귀에 소식이 들어갈까 봐서 복통이 있어도 애써 표정을 가렸다.

얼른 저와 얼자에 대한 관심을 끊기를 날마다 애가 끓는 심정으로 빌었다. 축첩질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어쩜 이놈의 삭막한 궁은 냉랭한 궁인만 오갈 뿐이었다. 흥취에 궁인이라도 취하는 방편도 있는데 애석하게 연회 한번 제대로 열질 않는다.

‘왕후가 있으면 눈치가 보여서라도 나를 찾지는 않을 텐데.’

이국어에 능통하면 가장 먼저 출신도, 근본도 명확하지 않은 저에게 관심을 두기 전에 제대로 된 정실을 맞이하여 왕통을 이어야 한다고 곱게 타일러라도 볼 텐데. 그 김에 저와 아이를 잊어주면 고마울 터다.

요원한 바람을 꿈꾸는 사이 이번에는 누군가 기척을 내었다. 두 번 놀랄 기력은 없어 불안한 눈빛만 문을 향했다.

들어온 사람은 그렌이었다. 수시로 놀라는 염통이 제 속도를 찾아가기 전에 그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했다.

“요정님,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개종자가 드디어 저를 부른다. 좋은 의도일 리 만무했다.

분홍이는 절로 후들거리는 몸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기왕 맞을 매는 빨리 맞고 치우자는 생각으로 제 발로 문을 향하는데 그렌은 고개를 저었다.

“준비를.”

그러면서 그렌이 밖으로 기별했다. 궁인 여럿이 각자 상자를 하나씩 들고 와 바닥과 탁자에 놓고 사라졌다.

“마그네. 부탁하지.”

익히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마그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그네, 무엇?”

“대연회이옵니다. 폐하께서 요정님을 위해 대연회를 여셨습니다.”

“대연회?”

상자 뚜껑을 열어 속에 든 것을 꺼내던 마그네가 손짓과 발짓을 동원하여 설명했다. 처음엔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상자에서 고운 옷과 패물이 나오는 걸 보고 큰 잔치가 열렸음을 알았다.

“아…….”

크게 안도하여 저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마그네가 급히 다가와 의자에 제대로 앉도록 부축했다. 분홍이는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으세요? 올리아 님을 부를까요?”

“아니. 괜찮아.”

심호흡을 거듭 몰아쉬자 내달리던 가슴이 점차 진정했다. 분홍이는 손등으로 엷은 땀을 닦으며 설핏 웃었다.

연회라면 궁인뿐 아니라 많은 귀인도 참석할 터. 비록 이국의 귀인 앞에 나서는 것이 적잖이 긴장되지만, 아무리 개종자라도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선 배가 완연히 부른 임부를 상대로 치욕을 선사하거니 손찌검하진 않으리라.

더군다나 연회 시에는 분명히 곱게 치장한 무희와 궁인이 많을 것이다. 개종자가 취기가 올라 욕정이 동하면 그들 중 하나와 동침할지도 모른다.

‘설마 임부와 하려 들지는 않겠지.’

개종자가 연회 중에 마음에 드는 이를 발견하고 혹여 첩을 들이는 운이 따를 수도 있다. 그에 생각이 미치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하는 단장이라 그런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리를 빗어 반으로 묶고 금에 유리로 꾸민 머리꽂이를 하나 했다.

새로 받은 옷은 평소에 보던 이국식과는 약간 달랐다. 위에는 붙고 자락은 크게 퍼지는 형태는 흔한 이국식인데 옷깃은 고향 옷처럼 겹쳐 여몄다. 속 끈을 매고 가슴 끈을 조였다. 처음부터 어깨에 걸쳐 입는 장포를 걸치니 몸매는 적당히 가리면서 배도 편안했다.

막상 다 입고 나자 옷이 보기보다 무거웠다. 거울에 비추어 보니 깨알 같은 유리구슬이 옷 전체에서 번쩍거렸다. 얼마나 많이 달았으면 움직일 때마다 차르륵 차르륵 소리까지 났다.

“아름다우세요.”

옷을 입느라 흐트러진 머리끝을 빗던 마그네가 웃었다. 자락이 무겁다 보니 부푼 배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약간 민망하여 한 손으로 늘어진 장포 자락을 끌어당겼다.

마침 궁인이 마중 왔다. 모국의 황궁은 많은 전과 각을 따로 두었다. 지체 높은 귀인들은 가마를 타고 마당을 지나곤 했다.

이국의 왕궁은 달랐다. 큰 본궁을 중심으로 건물에서 건물로 이어졌다. 본궁 높이도 상당하거니와 넓이가 넓어 여기에 산 지 좀 되었는데도 지내는 방과 밖으로 나가는 길을 제외하곤 알지 못했다.

대연회라고 하더니 연회장이 따로 있는지 처음 보는 곳으로 들어섰다. 원래 사용하던 길은 사람 셋이 비켜서지 않고 걸을 너비였다. 그런데 이번에 들어선 곳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거니와 규모도 웅장하여 사람 여덟이 나란히 서도 자리가 빌 정도였다.

처음 듣는 이국의 현 선율 위로 깔리는 웅성거림은 소수의 것이 아니었다.

‘수십? 혹은 백?’

갑자기 가슴이 떨렸다. 이국인을 한 번에 그만큼 본 적이 없었다. 제 차림이 이상하진 않는지, 배를 좀 가릴 순 없는지. 개종자가 별난 짓으로 저를 놀라게 하지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저녁이 깊었는데 사방은 빛으로 가득했다. 거대한 문에는 화려한 금박 조각이 달려 있었다. 갑자기 내부가 조용해지면서 긴장이 감돌았다.

문을 지키던 궁인이 문을 열자 대뜸 안이 보이는 대신에 붉은 휘장이 시야를 반쯤 가렸다. 세모진 휘장 아래로 황금색 빛이 쏟아졌다.

거기서 금색 장식을 단 붉은 옷을 단정히 차려입은 그렌을 만났다. 불안 중에 적잖이 안심하여 표정을 푸는 찰나 그가 휘장 밖으로 나가더니 외쳤다.

“아가르타 전하 듭시옵니다!”

붉은 휘장이 걷어졌다. 숨죽인 긴장의 파도가 분홍이를 덮쳤다.

연회장 내부가 드러났다. 바로 보이는 건 온통 빛으로 가득한 천장이었다. 유리구슬을 얼마나 겹쳐 달았는지 등불 빛이 태양을 머금은 물빛처럼 번쩍였다.

선 자리는 밑이 아니라 위였다. 대단히 넓은 거대한 공간에 색색 옷에 색색의 안구와 특이한 모색을 가진 이국인이…… 백은 넘었다. 이백? 삼백?

휘영청 밝은 빛 아래 금은보화를 마음껏 사용하여 치장한 이국인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분홍이를 올려다봤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대연회라고 하더니 정말로 대단한 잔치였다. 번쩍거리는 보석과 비단을 휘감은 내객들은 멀리서 보기에도 단순한 궁인이 아니었다. 분명히 귀인일 터. 그것도 웅장한 궁의 주인을 직접 모시는 지체 높은 귀인.

‘구…… 궁인이 더 많을 거라 여겼는데.’

많은 인기척에 군무를 추는 다수의 무희와 악사를 예상했다. 오로지 귀인들로만 드넓은 회장이 차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불현듯 깨달았다. 이건 보통 연회가 아니었다. 무슨 의미가 있어도 백 번은 더 있는 자리였다. 갑자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요정님?”

평소보다 고운 차림을 한 마그네가 뒤에서 살짝 불렀다. 그렌도 저를 빤히 봤다.

수백 명이 자아내는 고요한 웅성거림이 점점 사위를 장악했다. 주눅이 들면서 덜컥 겁이 났다. 멀리서도 손발이 떨리는데 가까이에서 저들을 마주할 생각에 숨 턱턱 막혔다.

“실…… 싫어.”

도망치고 싶었다. 지금 당장. 실제로 한 발 뒤로 주춤했다. 그때였다.

“아가르타?”

빛으로 가득한 아래쪽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굽어진 계단으로 이어져 있기에 몸을 숙여야 바로 보이는 위치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왜 나오지 않지?”

깊게 울리는 목소리에선 노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분홍이는 날카로운 칼이 제 목 아래 닿은 듯이 굳었다.

발걸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이윽고 금색 머리가 아래에서 불쑥 솟았다. 평소에도 거한이라고 여겼으나 빛을 등지고 있는 개종자는 유달리 더 커 보였다.

몸에 착 달라붙은 흰색 예복 위에 금과 보석을 주렁주렁 달아 움직일 때마다 번쩍거렸다. 금사로 복잡한 매듭을 지어 장식한 어깨 아래로 피처럼 붉은 장포가 흔들렸다.

펄럭이는 대신 갑주처럼 딱 맞게 두른 소매 끝동은 금사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거기에서 돋아난, 하얀 가죽 장갑을 낀 크고 긴 손이 분홍이에게로 다가왔다. 시선이 대리석으로 깎은 듯한 팔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모국의 남자들이 장발을 기르는 것과 달리 이국의 남자는 머리를 짧게 잘랐다. 개종자도 마찬가지였는데 평소에는 가닥가닥 흐르던 금색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겨 이마가 훤했다. 빛이 뒤에서 비쳐 상대적으로 그림자가 진 콧대는 어찌나 높은지 옅게 빛났다.

깊은 안와에 자리 잡은 청옥색 눈이 저를 향했다.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노여움이 가득할 줄 알았건만. 파란 도깨비 눈은 평온했다. 도리어 즐거움도 엿보였다.

순간 더 떨어질 곳도 없는 심장이 다시 쿵 떨어졌다. 뒤로 물러서던 발이 우뚝 굳었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가 있나?”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의아한 듯 눈을 살짝 찡그린 개종자가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긴 한숨이 났다. 한껏 쪼그라들었던 염통이 슬며시 퍼지면서 대신 바짝 얼어붙었던 폐가 느른해졌다. 아찔한 머리를 가누면서 분홍이는 두 팔을 뻗어 개종자에게 다가갔다.

턱.

떨리는 손이 절로 두꺼운 예복을 거머쥐었다. 어지러움이 물러가는 사이 이마는 판판한 가슴에 내려놓았다. 길게 날숨을 내쉬는 사이 보석 장식이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무슨?”

다소 당혹스러운 음성이 정수리 위에서 들렸다.

“페아.”

“왜 그러지?”

굳건한 팔이 등과 허리를 단단히 붙들었다. 개종자가 만든 깊은 그늘 속에서 분홍이는 눈을 감고 가쁜 숨을 골랐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건가? 아니면 갑작스러운 연회에 놀라서?”

얼핏 알아들었다. 실제로 그러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연회를 가득 채운 이국인에 대한 느닷없는 공포심에 숨이 막힐 찰나 나타난 익숙한 얼굴이 이상하게도 반가웠으며, 특히나 개종자가 예상보다 평온해 보여서 크게 안도했다.

연회라고 했으나 이렇게 큰 자리인 줄은 전연 몰랐다. 전신을 휘감은 두려움과 긴장감으로만 따지면 거대한 들짐승 떼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개중에 갖은 고진과 오욕을 선사하였으나 그래도 다른 짐승으로부터 저를 지켜 줄 놈이 나타나자 희한하게도 마음이 놓였다.

실제로 개종자는 모진 주먹질을 하고 머리채를 잡던 손으로 가늘게 떠는 등을 쓸어 주었다.

“괜찮아.”

윽박지르던 음성이 부드럽게 저를 달랬다.

낯선 세상의 기세에 겁을 먹은 제가 기댈 곳이 개종자밖에 없음이 너무나도 원통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마그네는 궁녀에 지나지 않아 귀인들에 맞설 수 없을 테고 그건 상선인 그렌도 마찬가지였다.

곱게 달래는 놈의 품이 지긋지긋하고 메스꺼워야 하는데. 이 순간만큼은 안락했다.

숨을 거듭 고르고 나자 어지러움도 가시고 아찔한 시야도 또렷하게 돌아왔다. 보드라운 가죽 장갑이 턱에 닿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지?”

고개를 한껏 숙인 개종자가 분홍이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눈알 속에 정답이 적혀 있는 듯이 유심히 지켜보는 동안 얼굴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렇게 숙일 거면 턱을 잡아 들어 올리지 않아도 될 텐데. 지금 보니 버릇 같았다.

“나, 괜찮아. 이제.”

“정말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연회가 벌어진 마당에 군왕이 저를 맞으러 직접 여기까지 올라왔다. 혼절이 아닌 다음에야 못 나가겠다 해 봤자 개종자의 체면만 크게 깎을 일이었다.

실생활을 속속들이 수발들며 무거운 입을 닫고 있는 궁인들 앞에서야 한껏 맞서며 때로 달려들어 주먹질을 가해도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수한 귀빈들이 자리한 곳에서는 불가했다.

아무리 개종자라도 군왕이다. 군왕의 체면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크게 중요했다. 아무리 그가 원망스럽고 미워도 군왕으로서의 체면은 사소하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네 장래 부군은 장차 황위에 오를 귀인이야. 혹여 사소한 허물을 보거나 섭섭한 일이 있어도 절대로 신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표시를 내어서는 안 된다. 상궁이나 상선이 있는 자리에서도 안 돼. 할 말이 있거든 단둘이 있을 때 귓속말로만 해야 한다. 그것이 만백성을 다스리는 천자에 대한 예와 도리다.”

아버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비록 개종자는 천자의 덕을 갖추지 못했으나, 위세만큼은 못 하지 않았다. 혹여 대연회 중에 개종자가 저를 못된 말과 몸짓으로 희롱한다고 해도 숨을 죽이고 꾹 참을 것이다.

부모님에 하사받은 배움의 실천이며, 동시에 제 배 속에 든 아이를 위한 인내기도 했다.

“그럼 내려가지.”

“네, 폐하.”

내민 개종자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귀빈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잡기는 여전히 부끄러우나, 이국의 풍습이라 생각하며 꾹 참았다.

우악스럽게 끌거나 끌려가는 일 없이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개종자는 수시로 분홍이의 발치를 살피며 넘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다른 자들 앞에서만 하던 멀쩡한 사람 행세는 이제 분홍이에게도 해당했다.

‘겁에 질려 떨어서 그런가. 당장 치욕을 당하는 일은 없겠구나.’

안도감이 들려는 찰나 계단을 다 내려왔다. 비록 개종자 앞에서는 수시로 역정도 내고 시선도 팩 돌렸으나, 낯선 이국인들 앞에서는 주눅 든 죄인처럼 굴기 싫었다.

입궁을 준비하던 시절 머리와 어깨에 사발을 놓고 걷는 연습을 수없이 했더랬다. 문득 그 생각이 나서 어깨를 펴고 고개를 바로 들었다. 불룩 솟은 배가 어깨에 걸친 장포 밖으로 드러났다.

“위대하신 라테시온 황제 카론 유스키아 폐하와 약혼자 아가르타 전하이시옵니다!”

“오.”

호기심 어린 무수한 시선이 전신을 훑었다. 떨림이 커져 저도 모르게 개종자의 손을 꽉 잡았다.

“훗.”

낮은 웃음과 함께 저를 훑는 개종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이 마치 휘장이라도 되는 양, 타인의 시선이 가져온 떨림을 물리쳐 주었다.

‘마음이 많이 약해졌나…… 어쩜 개종자 놈에게 의지하다니.’

슬며시 눈을 들어 놈을 보았다. 긍지와 자랑스러움이 흘러넘치는 도깨비 눈이 저를 보다가 이내 정면을 응시했다.

“폐하.”

“폐하.”

능라 비단도 울고 갈 화려한 옷감으로 치장한 귀인들이 고개를 살짝 떨구면서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러자 금색 실로 수를 놓은 붉은 카펫이 드러났다.

카펫 끝에는 서너 단을 높인 상석이 있었다. 상석에는 금색으로 칠한 화려한 의자 두 개가 있었다. 개종자가 향하는 곳은 거기였다.

분홍이의 손을 잡고 가는 개종자의 걸음엔 굳건한 확신이 가득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금색 머리를 비롯한 전신을 더욱 빛나게 했다. 비록 성정은 감히 눈 뜨고 보아 주지 못할망정…… 거죽만큼은 훤칠했다.

훤하고 당당하며, 모든 이들이 저를 위해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그는 군왕이었다.

지체 높은 귀인들이 썰물처럼 갈라져 만든 길을 둘이서 지났다. 이국의 예법은 좀 이상한 것이, 일인자인 군왕이 품계도 없는 첩실에 불과한 분홍이를 먼저 의자에 앉히려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보는 그렌의 눈치를 살폈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서 제가 먼저 앉는 데도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했다.

명성 높은 대재상의 아들이며 음인으로서 귀한 대접을 받았으나 이국에선 아니었다. 냉혹하게 언급하면 아이를 가졌어도 냉궁 출신의 성노에 불과했다.

임신 후로 받은 좋은 대우도 어쨌거나 왕의 자손을 임신하였으니 기본적인 의식주를 챙기는 정도로 여겼다. 비록 화려하고 과한 방을 받긴 했으나 궁에 온 첫날에 내어준 방이기도 해서 보통 그런 방을 다 쓰는 줄 알았다. 군왕이 마중을 나오질 않나, 동석에 앉질 않나.

‘얼자 하나에 이렇게 우대하나? 이국의 풍습은 이해하기 어렵구나.’

내심 걱정하는 사이 한 남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백발이 성성하고 지팡이를 짚은 그는 상석 아래에 서서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하슈타인 공작 슬람이 카론 폐하와 아가르타 전하를 봬옵니다.”

놀랍게도 귀인의 절은 개종자만을 위함이 아니었다. 분명 아가르타라는 제 호칭도 들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노인을 시작으로 귀인들이 하나 혹은 둘씩 돌아가며 절했다.

“카론 폐하, 아가르타 전하.”

개중에는 전에 보았던 붉은 머리를 가진 개종자의 수하와 검은 머리칼을 가진 매서운 인상의 부인도 있었다.

뭐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 이건…… 그냥 연회가 아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이것은 연회를 빙자한…….

후궁 봉작례였다.

* * *

후궁 봉작례라니! 기겁을 넘어서서 기절초풍할 얘기였다.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외우게 한 이름 끝에 같은 말이 있더니! 이런 뜻이었구나!’

후궁 봉작은 원하는 바가 절대로 아니었다. 정궁도 없이 후궁에 봉작되면 앞으로 조용한 뒷방 생활은 아예 불가능하다. 아이를 낳으면 얼자가 아니라 서자가 된다.

서자는 적통은 아닐지언정 유사시 옥좌에 앉을 자격이 있다. 그 말인즉, 서자를 낳은 분홍이는 이국 왕정의 정중앙에 던져진다는 얘기였다.

앞으로 영영 개종자의 얼굴을 맞대며 서자의 생모로 언제 정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지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지 않다. 개종자의 아내가 되고 싶지 않다.

“페…… 페아?”

조용히 있으려던 결심을 잊고 개종자를 불렀다. 절을 올리는 귀인을 볼 때보다 훨씬 온아한 시선이 저를 향했다.

“왜 그러지?”

“이거…… 아니야, 이거 안 돼.”

사색인 낯을 다급히 저었다. 그러자 놈의 푸른 눈에 걱정과 의아함이 서렸다.

“몸이 안 좋은가? 올리아를 부를까?”

“페아. 아니…… 아기 괜찮아. 그러니까…… 이거 안 돼.”

마음이 급하다 보니 저절로 절하려고 줄을 선 귀인들에게 무례한 손짓을 하게 되었다. 막 차례가 되어 앞으로 나서던 남녀 한 쌍이 우뚝 굳었다.

“저…… 저희가 무슨 무…… 무례를 저질렀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용서를…… 폐하, 전하.”

분홍이보다 더 허옇게 질린 둘이 황급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면서 개종자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야.”

결백한 자들이 괜한 고초를 겪을 두려움에 분홍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없는 잘못을 빌던 자들이 아예 바닥에 엎드렸다. 뒤이어 다른 귀인들도 슬며시 물러서더니 몸을 낮추었다. 다들 어리둥절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당장 연회장을 빠져나가고 싶은데 그랬다가 개종자가 저들에게 포악한 성미를 드러낼지도 몰랐다. 눈빛으로는 이미 두어 명의 목을 조르는 중이었다.

그렌이 걱정스럽게 돌아왔다. 왜 그러는지 궁금하다는 시선이 분홍이에게 쏠렸다. 어느새 일어선 개종자 또한 저를 바라보았다.

“허억…… 헉!”

계단 위에서 느꼈던 불안증이 다시 도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개종자의 소매를 잡았다.

“페아…… 페아.”

벌어진 눈으로 개종자를 바라보며 미약하게 애원했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졸도하고 싶었다. 개종자는 계단에서 그러했듯이 두 팔로 떠는 몸을 감쌌다.

“흠. 인사를 잠시 미루도록 하지.”

퍽 다정한 어조였으나 속에는 단단한 심지가 있었다. 꼭 부드러운 가죽을 두른 칼 같았다. 크게 역정을 낼 가능성도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개종자에게 반쯤 기대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앉았던 상석 뒤로 휘장이 쳐진 통로가 있고 그 안에는 제법 안락한 방이 나왔다. 가장 가까이 있는 긴 의자에 분홍이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어느새 나타난 마그네가 푹신한 등받이를 받쳐 주었다.

개종자가 돌아보자 뒤따르던 그렌은 휘장을 내려 바깥과 차단했다. 묵직한 휘장이 두 겹이나 내려졌는데도 밖에서 웅성거림이 크게 들렸다. 그에 분홍이는 차가운 손을 비비며 개종자의 눈치만 봤다.

“요정님.”

언제 준비했는지 마그네가 차가운 물잔을 내밀었다. 병자처럼 도움을 받아 두 모금 마신 후에 거친 숨을 거듭 몰아쉬었다.

놀랍게도 개종자는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장갑도 벗어 맨손으로 차갑게 식은 손을 주물렀다. 그 모습에 분홍이의 눈은 더욱 커졌다. 느닷없는 후궁 봉작은 그저 변덕이 아니었다.

“연회 참석은 무리였나?”

“페…… 아. 아니야.”

자유로운 손으로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분홍이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짧은 이국의 말이 폭풍처럼 휘몰아쳤으나 도대체 뭐를 어떻게 나열해야 제대로 뜻을 전할지 도통 혼란스러웠다.

“음?”

개종자는 전에 없는 너그러운 태도로 기다렸다. 왜 그러냐고 윽박지르지도 않고 멋대로 짐작해 마뜩잖은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다. 시간을 들여 손만 주물렀다.

이런 다정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드디어 알았다. 개종자는 저를 진정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대연회를 베풀고 만인을 모아 절을 하게 시켰다. 그러니 품계도 상당히 높게 쳤음이 분명했다.

‘이토록 아이가 반가운가.’

개종자의 난폭하고 거친 성품도 성품이거니와 그런 자가 군왕으로 있는 대국의 비빈이라니. 신국에서 태손비로 점쳐졌을 때와는 또 달랐다.

어느 곳이나 황궁은 심계와 술수가 난무하는 복마전이었다. 자신은 말도 채 다 익히지 못했을뿐더러 하물며 이국의 예법과 용인(用人)법에 대해서는 갓난아이만도 못했다. 누가 바른 예법과 상황에 맞는 현명한 대처를 가르칠 사람도 있으면 다행이지만, 여기서 저는 천애 고아 신세였다. 가만히 있어도, 가만히 있지 않아도 어려운 자리에 앉기에는 저를 받쳐 줄 가문은커녕, 믿고 의지할 친우조차 없다.

부군이라도 성하면 또 모를 일이었으나, 하필이면 저를 가장 핍박한 개종자다. 포악한 개종자의 후궁으로 평생을 얼굴 마주하며 살 자신이 도무지 없었다. 아이를 낳고 어떻게든 관심에서 멀어져 보려 했건만.

하물며 첫 후궁이라니…… 그도 첫손을 낳는 후궁이라니!

도저히 자신 없고 하물며 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초를 치려니 두렵고 무서웠다. 개종자는 저를 크게 치하하여 높은 품계를 봉작하려는데 눈앞에서 못 하겠다 거절하면 얼마나 화를 낼까.

동시에 아이를 가졌다고 돌변한 태도도 괘씸했다. 이렇게 거짓으로나마 다정할 줄 알면서 일부러 그렇게 미친개처럼 수시로 살점을 물어뜯고 뼈를 으스러뜨리려 했다니. 그래서 눈앞의 부드러움이 더욱 치가 떨렸다. 이런 이중적인 위선자 곁에서는 한시라도 더 빨리 벗어나야 숨이라도 제대로 쉴 터.

“페아.”

“왜 그러지?”

개종자는 걱정스러운 듯이 손을 뻗어 눈가를 다정히 문질렀다. 그러니까 더더욱 두려웠다.

심정과 달리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짧은 이국말로는 놈의 뜻을 꺾기는커녕 화만 더 돋울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이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시키는 대로 하기에는 억울함에 사무쳐 이대로 까무러칠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물만 글썽였다.

혹여 오늘에 이르러 기껏 인간다운 대우를 받는데 다시 냉랭한 태도로 돌아서서 역정을 내고 손찌검을 할까?

입술과 심장이 동시에 떨렸다. 놈은 내내 분홍이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런 일도 아니라고 할까. 아니 기왕 이렇게 된 거 싫은 내색이라도 한번 해 볼까.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결심했다.

이대로 영원히 쥐 죽은 듯이 살 수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 손찌검이 두려워 지레 비굴하게 굽히는 태도는 서자인 저를 지체 높은 대(大) 명가의 자손으로 고이 길러 준 부모님에 대한 기만이었다. 개종자 놈이 뭐라고 하든 할 말은 해야겠다.

“페아…… 나와 아기.”

“그래. 너와 아기.”

“머…… 멀리 살아.”

“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듯 개종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면서 말을 이었다.

“둘이서…… 살아. 페아는 다른 사람.”

“무슨 소리야?”

금색 눈썹이 슬며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파란 안구에 의구심이 서렸다.

“나, 아기랑 살아. 페아는…….”

“나는?”

“아…… 니…… 야.”

헉.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신 사람은 마그네였다. 그렌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말을 하기 전과 자세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데도 어쩐지 너른 어깨에서 냉기가 솟았다. 꾹 다운 입에선 노기가 은은히 흘렀고 부드럽게 주무르던 손이 뚝 멈췄다. 남다른 체구에 기세가 원체 날카로운 자여서 조금만 역정을 내도 삽시간에 서리 폭풍이 불어닥쳤다.

서늘한 청안을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지만, 꿋꿋이 고개를 들었다. 한번 뱉은 말을 물릴 수도 없거니와, 기왕 꺼냈으니 제 뜻은 끝까지 펴야 했다. 중간에 움츠러들면 처음부터 포기하느니만 못했다. 마침 눈물이 어려 초점이 맞지 않아 개종자는 사라지고 금홍색을 걸친 군왕만 어른거렸다.

“너와 아기는 멀리서 살고…… 나는 아니다? 그러니까 나와는 살지 않겠다는 말인가.”

덤덤한 어투에서 다정함이 증발했다. 노기도 조용히 사라졌다. 그저 식은 돌처럼 딱딱해서 더욱 섬뜩했다.

“왜지?”

묻는다고 해서 네놈의 못난 꼴이 보기 싫어서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순순히 답할 순 없었다. 그보다는 마땅한 도리를 따지는 것이 더 빠를 터였다.

“나, 요정. 페아는 페아.”

분홍이는 높은 곳에 손을 올리고 “페아.”, 낮은 곳에 손을 내리고 “요정.”이라고 설명했다.

“나와 페아, 자리 달라.”

맺혔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제발 제 뜻을 알아듣기를 바라건만, 쉬이 전해진 것 같지 않았다. 개종자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서 얼음장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거두어 다시 설명했다. 이번에는 마그네와 저를 가리켰다. 신분의 차이임을 명확히 설명코자 했다.

“마그네와 나, 가까워. 같아. 페아와 나, 멀어. 달라.”

손바닥으로 젖은 뺨을 쓱 문지른 다음에 더 이었다.

“나, 그렌, 오리아, 마그네. 같아. 페아, 달라. 페아 여기.”

다시 손을 높이 들었다.

차갑게 식은 눈이 천천히 휘어졌다. 매서운 선을 그리던 입술 또한 슬그머니 호를 그렸다. 냉혹한 기운을 누그러뜨린 개종자는 낮게 웃었다. 이래선 안 된다고 고개를 재차 젓자, 그는 잡았던 손을 도로 문지르기만 했다.

“신분 차라…… 내게 그것보다 무의미한 것이 또 있을까?”

모르는 단어가 있어 말귀를 다 알아듣지 못했다. 놈의 짙은 미소에선 제 뜻을 받아 줄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손을 문지르며 타이르는 어투에서도 느껴졌다. 절망감이 크게 번졌다. 맺혔던 눈물이 결국 툭 흘러내렸다. 그러자 곧은 검지가 눈 밑을 훑었다.

“네 뜻은 알겠어. 그러나 들어줄 수 없다.”

“페…… 아?”

“나는 내 아이를, 그리고 너를 무관심 속에 방치하지 않을 거야. 너는 앞으로 내가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를 똑같이 누릴 것이며, 우리의 아이 또한 마찬가지야. 만약 신분 차이를 문제로 반대하는 녀석이 있으면 당장 목을 베어 버리겠어.”

“무슨…….”

“약혼자로서 공공연하게 행동하면서 공식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으니 불안한 것이 당연했겠지. 그 점은 내가 생각이 짧았다. 앞으로 그대를 가벼이 취급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너도 투정은 그만두도록 해.”

상냥한 어투엔 칼이 숨어 있었다. 온전히 알아듣진 못했으나, 놈이 자신의 행동을 단단히 오해했던 것만은 분명했다. 개종자가 저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이며 아이와 함께 언제나 제 시야 안에 두겠다는 결심만은 분홍이에게도 명확하게 전해졌다.

한없는 절망에 묵묵히 눈물만 흘렸다.

“쉬이…… 내 말을 잘 들으면 아무도 널 해치지 않는다. 결혼식 준비가 싫어도 해야 해. 내가 그러길 바라니까. 알겠어, 아가르타?”

카론은 등을 쓸어 주며 숙인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제 싫다고 뺄 기운도 없었다. 개종자는 영원히 저를 놓아주지 않을 거였다. 싫다고 반기를 들어도 절대로…… 절대로.

“이런……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자, 아가르타 대답은?”

일어선 그는 턱을 잡고 자기를 바라보게 했다. 분홍이는 두려움과 절망에 가득 찬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어른거리는 눈물 속에서 개종자는 두 번 더 이국식 이름을 불렀다.

부드럽게 어투로 속박하고 상냥한 손길로 학대했다. 사방이 꽉 막혔다. 마그네도, 그렌도, 올리아도. 분홍이를 돕지 못했다. 숨 막히는 강요에 결국 죽어 가는 듯이 답했다.

“……네.”

“착하구나.”

카론은 웃으면서 바르르 떠는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 * *

중단되었던 후궁 봉작례는 다시 이어졌다. 무수한 귀인들의 절을 받으며 분홍이는 옅은 눈물을 지었다. 군왕의 위세를 떨치는 개종자는 분홍이의 손을 꽉 잡은 채 은은한 미소만 지었다. 봉작례가 끝난 직후 황제는 자리에 머물며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분홍이는 임부임을 들어 빨리 들어가 쉴 수 있도록 배려받았다. 애초에 제 의사는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봉작례에 억지로 끌고 나온 자체가 지독한 벌이라 이것을 배려라 할 수 없음에도 너무나도 지쳤기에 잠시나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죽은 듯이 잠자는 사이 밤새 누군가 제 곁을 잠시 머물렀다가 뜬 느낌을 받았다. 잠결이라 꿈인지 생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정한 손길로 이마를 살짝 쓸었다가 보드라운 입술로 도장을 꾹 찍었다. 후에는 잠자리를 토닥여 주고 조용히 나갔다.

‘엄마나 큰엄마인가?’

머나먼 고향 땅에 계신 두 분을 먼저 떠올렸다가 이내 서글프게 웃었다. 두 어머니가 어찌 여기까지 오겠는가. 하지만 지친 중에 아침까지 곤한 잠을 푹 잘 수 있도록 도닥이는 손길은 두 분이 아니고선 불가능했다.

‘꿈이겠지.’

꿈에서라도 두 분의 손길을 느껴서 너무나도 기뻤다. 한참을 이불을 끌어안고 침상을 뒹굴다가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까지 연회가 이어졌습니다.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였으니까요. 폐하께서는 축하주를 권하는 귀족들을 일일이 상대하면서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고 합니다. 아마 오전 내내 주무신다고 하니 아가르타 전하께서도 오전에 느긋하게 쉬실 수 있어요.”

마그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아침부터 생글생글했다. 그리고 갑자기 분홍이를 요정님이 아닌 아가르타 전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공작 작위를 내리셨습니다. 장차 황후에 오르실 분이니 당연하지요. 앞으로 결혼 전까지는 아가르타 전하라고 불리시게 될 겁니다. 결혼하시면 아가르타 폐하가 되시고요.”

뭔가 호칭이 복잡했다. 필경 신분에 따른 경칭 같았다.

“저나와 페아는 많이 달라?”

“예. 다릅니다. 전하는 여기, 폐하는 여기.”

분홍이가 개종자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그네는 전하에서는 손을 턱까지, 폐하는 닿을 수 있는 한 높은 곳까지 올렸다. 아주 성대한 봉작례와 마그네의 설명을 합쳐 볼 때 아무래도 제가 귀빈 정도는 된 것 같았다.

‘망했구나.’

조용한 여생은 이미 영영 떠나갔다. 침통하여 눈을 꼭 감고 말았다. 아무리 아이를 가져 기쁘기로서니 천애 고아를 대뜸 귀빈 자리에 올리다니. 이렇게 무식하고 경망스러운 작자가 다 있나 싶었다. 천불이 치솟아 가슴을 움켜쥐며 낮은 숨을 토해 내자 마그네가 몸이 아픈가 싶어 호들갑을 떨었다.

오전에 내내 침상에 누워 열불을 삭이는 중에 그렌이 찾아들었다.

“아가르타 전하께 제국의 구성과 기본적인 작위 및 주요 영지에 관해 자세히 설명하라는 폐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무릎 아래가 없는 깍쟁이 같은 모양새의 큰 병풍이 들어오고 그 위에 지도와 다른 종이가 하나 붙었다. 지도를 보며 신국과 비슷한 나라가 있는지 혹은 신국이 아닌 다른 나라 중에 귓등으로라도 들은 나라가 있는지 샅샅이 살폈으나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었다.

짙은 실망감을 소화하는 동안, 그렌은 옆에 있는 이국 말 종이를 가리켰다.

“이것은 신분 제도입니다. 폐하에서부터 평민까지입니다. 평민은 보통 사람입니다.”

“제가 평민입니다. 아가르타 전하.”

마그네가 옆에서 도왔다.

“저는 원래 평민이었으나 지금은 귀족 계급입니다. 폐하께서 작위를 주셨습니다. 전하처럼 말입니다.”

그렌이 자기 위치를 설명했다. 뒤이어 그렌은 원래 있던 귀족과 새로 생긴 귀족, 그리고 평민을 설명했다. 황궁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과 그 외에 제국 각지에서 사는 사람 간에도 차이가 있다고 했다.

어제 봉작례에서 본 귀인들은 단순히 지체 높은 귀족일 뿐 아니라 각자 봉지나 영지를 가진 군주였다. 그중에는 군사를 따로 거느리는 군주도 있었는데 그들은 대공이라고 불렀다. 영토 규모로 보나 거느리는 병사로 보나 군주 중에서도 으뜸인 왕으로 봐야 했다. 그러니까 그들의 절을 받는 개종자는, 아니 개종자라 하기에도 두려운 이는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그런 막돼먹고 무식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똥 같은 작자가 황제라니.]

오랑캐 중에서도 오랑캐 우두머리에게 걸려서 참으로 재수 없다 했더니 아주 황제랍신다. 정신이 아찔했다. 황제란 본디 어질고 지혜로워야 하지 않은가. 어디 저런 상스럽고 흉포한 놈이 황제 자리에 앉아 있다니.

[이 세상을 관장하는 상제 놈은 아주 별난 놈이로다. 어찌 중한 천자에 저런 놈을…… 아주 망조가 들어도 단단히 들었구나. 이런 쇠락할 나라에서 자식을 낳아 키우라니. 저놈의 목이 떨어지면 나도, 배 속에 든 그놈 새끼도 동시에 죽게 되잖아. 하늘이 무심해도 어찌 이리 무심할꼬. 더러운 꼴을 피하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나를 썩은 똥통 밀어 넣어도 유분수지.]

“전하?”

신국말로 욕설을 퍼붓자 그렌과 마그네가 눈만 깜빡였다.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후에 그렌이 이어서 설명했다.

“황제와 황후는 폐하입니다. 대공은 전하입니다. 이후로는 각하입니다.”

황제와 황후가 뭔지는 알았다. 대공도 뭔지 알았다. 그런데 중간이 텅 비었다.

“여기, 여기 중간. 더 있습니까?”

“아, 황자, 황녀는 전하입니다.”

황자와 황녀가 뭔지도 잘 알았다. 일단 귀비가 되었으니 다른 후궁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처신을 할 텐데 그렌이 자꾸 넘어가려 들었다. 일부러 말귀를 돌리는 것 같아 더욱 잡고 물어졌다.

“나, 여깁니다. 압니다. 페아의 사람입니다.”

개종자 놈의 사람이라니. 스스로 칭하면서도 역겨워도 애석하게 말이 짧아 그 이상 표현할 능력이 없었다. 이런저런 손짓, 발짓을 동원하여 후궁에 대해서 어떻게 칭하는지 알고자 노력했다.

일부러 그러는지 혹은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지 한참 못 알아듣는 그렌이 답답하여 마그네를 향해서도 물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마그네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무례를 용서하신다면 제가 말씀드려도 될까요?”

“마그네, 말합니다.”

그렌도 답답한지 마그네의 말을 기다렸다.

“아가르타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건 아마 정부(情夫)가 아닐까요? 폐하의 사람이라 하시니 부부나 연인 같은데 황후나 자기는 아니라고 하시면 아무래도 그게 아닐까 싶어요.”

“아.”

그제야 알았다는 듯이 그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그네가 제대로 알아차린 건지 아직 확신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분홍이를 향해 그렌이 말했다.

“폐하와 가까운 여자, 그런데 황후는 아닌?”

“맞습니다. 다른 사람.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렌이 빙그레 웃었다. 마그네도 곁에서 재미있다는 듯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없다?”

“네, 없습니다. 정부는 없습니다. 오로지 황후뿐입니다. 폐하는 절대로 황후 외에 다른 사람을 곁에 두지 않을 겁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후궁이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저는 무엇인가.

“나는? 나는 ‘전부’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가르타 전하는 약혼자입니다.”

그렌은 황후 옆 빈 곳을 가리키며 아가르타라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황후로 연결했다.

“곧 황후가 되십니다.”

“네, 전하는 황후가 되십니다.”

[……뭐라?]

분홍이는 입을 떡 벌렸다. 옹졸한 오랑캐 놈이 다스리는 나라가 소국이 아니라 제국이라는 사실이 가져온 충격을 채 다스리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다시 몰려왔다.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화…… 화우…… 나? 화우?”

“예. 그렇습니다.”

황후라니. 황후라니? 분홍이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분홍이를 벌벌 떨게 했던 연회 또한 단순한 후궁 봉작례가 아니었다. 정식 혼례를 올리기 전 황후 책봉 알리고 미래 황후을 소개하는 문안례였다. 그렇기에 화려하고 성대하게 열었던 거다.

헛웃음도 짓지 못했다. 멍하게 허공을 봤다. 큰엄마가 꾸었다던 제 태몽은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금색으로 빛나는 군왕의 배필이 되는 꿈.

귀인이 되는 꿈.

[큰엄마.]

분홍이는 보이지도 않는 먼 하늘을 향해 물었다.

[그 꿈은 어떻게 끝났나요? 저는…… 어찌 되나요?]

물어도, 물어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 *

기가 차서 울지도 못하는 분홍이 대신 하늘이 울어 주기라도 하는지 약혼 발표를 위한 피로연 다음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축축한 빗줄기가 연일 이어졌다.

사방에 낮은 운무가 깔렸다. 평소 잘 보이던 정원 맞은편이 흐린 땅 구름 속으로 사라지자 지저귀던 새들도 사라지고 찌르륵 울던 풀벌레도 자취를 감추었다. 습한 기운이 냉기를 머금고 2층 침전까지 엄습했다. 짙은 비구름 덕에 방 안이 어둑어둑했다.

“벽난로를 피웠습니다.”

마그네가 창가에 선 분홍이를 불렀다. 벽에 철로 만들어진 작은 문이 있어 평소에 무엇에 사용하는 건지 의문을 가졌다. 드디어 열린 문 안에는 두꺼운 장작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시린 어깨에 덧옷을 둘러 준 다감한 궁인이 긴 불쏘시개로 뒤적거렸다. 손길에 따라 피어오른 불씨는 위로 사라졌다. 굴뚝이 있는 모양이었다.

뜨끈한 기운이 잘 닿을 거리에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몸을 웅크리고 앉아 노랗고 빨간 불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시린 돌벽에 기대 벌벌 떨던 죄인이 말도 안 통하는 이국에서 대성도 하였지. 비 기운에 고뿔이 들까 봐서 방 안에 불을 피우는 호사를 누리다니. 꿈인가 생신가.’

뭇 역사가 증명하듯, 황제의 후궁들은 어떻게든 황손을 가져서 출세하고 언제가 황후라는 지고한 자리에 오르고자 했다. 한낱 서자가 태손비로 낙점되어 하늘이 노하셨는가 했더니, 이곳 하늘은 또 다른지 성노를 황후에 올리려 든다. 천상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다시 천상으로 올라오니 정신이 다 혼미했다.

황후. 황후. 이국의 황후. 황후라는 단어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쁨은 온 데, 간 데가 없고 무거운 한숨만 났다.

‘뒤웅박 팔자가 따로 없구나.’

한숨이 절로 났다. 소망과 달리 분홍이는 그저 오랑캐 놈의 씨받이에 불과했다. 씨가 귀한지 황후 자리에까지 올리면서 호들갑을 떠니 황궁 밖으로 자유로이 오가는 바람은 고향을 향한 기약만큼 허무했다.

“이 아이가 그렇게 중할 줄이야.”

분홍이도 복중 태아를 계기 삼아서 참담한 마음을 바꾸었다. 그러나 황제가 갑자기 이렇게 귀하게 여기는 일은 참으로 의아했다. 넓은 제국에 황후의 자질을 갖춘 자가 없지는 않을 텐데. 말도 안 통하는 외지인을 덜컥 황후에 앉히다니. 아무래도 이상했다.

혹여 씨가 영 부실한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음기가 극에 달하는 열락기가 아니면 수태가 아니 되는 건가? 이곳에는 음인이 없다. 자연히 제가 고자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선천적 고자든, 나중에 물건을 자른 환관이든. 물건이 시원찮은 놈들은 대게가 변태에 취향이 고약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난폭한 걸지도 모른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입매를 뒤틀면서 놈에 대한 혐오감에 떨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렇다면 오랑캐의 씨를 받아 수태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얘긴데. 황제의 자손이 전부 내 배를 타고 난다면?’

장성한 황자와 황녀가 저를 든든히 막아서는 모습이 떠올랐다. 폭력적이고 냉혹한 황제를 향해 목숨을 걸고 낳아 준 생아비를 핍박하지 말라며 대들 걸 상상하니 절로 전율이 일었다.

‘그래. 믿을 건 내 배로 낳은 자식뿐이다. 비록 오랑캐 놈의 피가 섞였더라도. 아니 그놈의 피가 섞인 귀한 황손이니 더욱 힘이 될 터.’

군자의 복수는 언제 해도 늦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니 자신도 견디고 견딜 테다. 언젠가 올 그날까지 숨을 죽이고 놈이 다리를 벌리라고 한다면 눈을 질끈 감고 기꺼이 벌리리라. 그리하여 든든한 자식을 거느리고 개종자에게 맞설 날을 기약하리라.

날로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분홍이는 슬며시 눈을 접었다.

* * *

오전에 올리아가 요정을 진찰하는 동안 카론은 옆에서 지켜봤다. 청진기로 등과 배를 짚고 안색을 살핀 후에 마치 상을 주듯 이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며 선언했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먹구름으로 인해 사위가 어두컴컴한 것을 핑계 삼아 저녁이 되기도 전에 골든 피오니의 문을 잠갔다. 벽난로의 훈기가 도는 응접실 소파에서 요정의 옷을 벗겼다.

두툼한 쿠션에 기댄 요정은 얼굴을 빨갛게 붉혔으나 카론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손으로 눈을 가리며 바르작대기만 했다. 이상하게도 고분고분했다.

“드디어 마음을 바꿨나?”

퍽 마음에 들었다. 오후 낮잠을 위해 입은 얇은 잠옷을 어깨부터 끌어 내렸다.

“팔을.”

시키는 대로 요정은 소매에서 얌전히 팔을 뺐다. 붉은 열기는 목과 어깨에도 빠르게 번졌다. 아직 하얀 가슴에는 복숭아색 유실 두 개가 탐스럽게 돋았다.

춥.

“헛!”

요정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싫은지 상체를 뒤로 밀어내면서 몸을 위로 올리는 바람에 오히려 카론이 유두를 더 잘 빨 수 있게 되었다.

“아윽.”

추웁. 촉.

땀을 흘려도 암내 따위는 하나도 나지 않고 오로지 단 살 내음만 났다. 작은 돌기를 앞니로 씹다가 이내 입술을 모아 빨았다. 유륜까지 금방 빨개졌다. 돋아 오른 살점을 다시 씹다가 통통한 덩어리를 입에 넣어 혀로 입천장에 밀어붙였다.

“흐앗! 앗!”

귀만큼이나 유두도 예민한 몸은 카론의 혀가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렸다. 그저 요정의 살점을 맛보고 있을 뿐인데도 쾌락을 관장하는 영역이 기쁨에 날뛰었다. 고양감이 온몸이 붕 뜨는 느낌이었다.

기분이 좋았다. 아니 단순하게 기분이 좋다고 표현할 감각이 아니었다. 구름 위를 걷는 듯 황홀했다. 허무한 바다에서 부유하다가 단단한 대지를 디디는 감각이 이러할까. 멍청한 수다쟁이처럼 생명에 대한 찬탄이 터질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즐거움이 카론을 덮쳤다.

“아아.”

정사를 거듭하면 보통 짙어지게 마련인 유두는 도톰하게 솟아오른 지금도 여전히 옅은 분홍빛이었다. 심지어 항문도 그랬다. 살짝 붉은 빛이 도는 분홍색이었다. 배설기관이 아닌 것처럼. 셀 수 없이 문질러지는 동안 살짝 부푼 주름은 늘 꽉 다물렸다.

입구는 촉촉하게 젖어 어떤 도움도 필요 없이 유연하게 벌어졌다. 마지막 정사에서도 그런 기미가 보이긴 했다. 이 야한 몸이 제 아이를 품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꼭지가 돌기에 충분했다.

숨이 차서 헐떡이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저항을 멈춘 요정은 유달리 색정적이었다.

“뒤로.”

몸을 돌려 소파 등받이에 매달린 요정이 숨을 고르는 동안 카론은 크게 부풀어 꺼떡거리는 제 욕망을 끄집어냈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쑤셔 박고 싶지만 그래선 곤란했다.

선액으로 번들거리는 귀두를 입구에 대고 살짝 문질렀다.

“흣.”

하얀 엉덩이가 움찔 경련했다. 폭발할 것 같은 욕망을 억누르느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천천히 내부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헉…… 큭!”

“흐으…… 으응…… 응…… 흐…….”

요정의 아찔한 교성이 이어졌다. 전과 달리 싫다는 말은 없었다. 너무 순순하게 나와서 기분이 이상했다.

“아…… 안 돼. 페아. 깊…… 아!”

너무 깊다고 빼 달라는 말에 이미 큰 성기가 한층 더 기세를 올렸다. 소파를 부여잡은 고운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으읏.”

벌꿀에 적신 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몸을 쉬이 놓을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욕설이 튀어나왔다. 천천히 빼었다가 집어넣었다.

“아앙…… 앗!”

까만 머리카락이 휘청였다. 요정이 목을 뒤로 꺾는 바람에 정수리가 카론의 턱에 닿았다.

온통 어두운 방에서도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생생히 보였다. 제 딱딱한 광대와 달리 보드라운 살결로 뒤덮인 유려한 광대는 기분 좋을 만큼 뜨끈했다. 얼굴을 대자 놈이 옅게 한숨 쉬었다. 살짝 고개를 움직여 뺨을 비비기도 했다.

사소한 호의의 표현에 명치가 철렁했다. 무엇이 사나운 들고양이 같은 요정을 순한 양으로 바꾸었을까. 황후라는 지위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요정의 저항을 없애기 위해 황후 자리를 주었는데 정말로 그렇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뭔가 못마땅한데…… 딱히 뭐가 못마땅한지 알 수 없었다. 한껏 고조되었던 기분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오랜만에 달콤한 몸을 만끽하는 신체의 흥분은 점점 커졌다.

“아…… 앗…… 읏.”

뒤에서부터 들이닥치는 카론이 버거운지 요정은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버티다가 이내 팔꿈치에 힘을 잃고 상체를 소파 등받이에 기댔다. 바닥에 내려진 한쪽 발끝이 카펫을 차며 파들파들 떨었다.

임신한 후로 건강을 최우선으로 한 요정의 몸은 전과 달리 살이 제법 올랐다. 늘 한계까지 벌어졌다가 다물리는 허벅지는 탄력이 붙었고 엉덩이도 통통했다. 행위에 겨워 붉어진 뺨과 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나긋하게 휘어지는 등허리 덕에 사타구니가 한층 묵직해졌다.

“아…… 앗! 폐아…… 아기…… 아기…… 아안…….”

“크…… 후…… 흡.”

빠드득.

어금니가 저절로 갈렸다. 조금 전 느꼈던 묘한 감정은 이미 사라졌다. 카론은 욕망에 잠식되다 못해 반쯤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태아가 위험하다며 손을 내젓는 요정의 간절한 외침을 무시할 순 없었다. 억지로 속도를 늦추었다. 깊게 찌르지도 않았다.

둘 다 호흡이 잔뜩 흐트러졌다. 놈의 교성이 점점 고조될 때마다 카론의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핏대가 오른 음경이 끈끈하게 들러붙은 살점을 두드렸다. 뜨겁게 조이는 내부의 열기가 삽시간에 정수리까지 올랐다.

쯕…… 츄륵.

살이 부딪히는 음란한 파열음 사이로 젖은 살이 비벼지는 마찰음도 섞였다. 안을 때마다 더 나긋해지고 촉촉해져서 향유도 필요 없었다.

짐짓 도리질 치는 고개와 달리 저를 달갑게 맞이하는 구멍이 좋았다. 거부하지 않는 음란한 입구가 카론을 더 깊은 곳으로 유혹했다. 열기 오른 눈가가 일그러졌다. 카론은 부푼 배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잠시도 놓치기 싫었다.

“앗! 아!”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밀린 커튼처럼 흔들렸다. 매끄럽고 시원한 감촉이 카론의 상완근을 간지럽혔다.

점점 치달은 행위는 곧 절정에 올랐다.

“큭.”

급한 욕정을 풀어낸 카론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요정 또한 전력 질주를 한 사람처럼 헐떡였다.

“하악…… 하악…… 하악.”

식은땀이 달콤한 꿀 같았다.

쯔윽.

아직도 힘이 남은 성기를 빼냈다. 애석하게도 두 번은 불가능했다. 순전히 요정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열 번도 더 했다.

“흐으…… 으응.”

요정은 흐느끼듯 옅게 신음했다. 몸을 떼자 다리가 풀렸는지 등받이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렸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 전에 몸을 떠받들었다. 얇은 실크 잠옷이 허리께에 들러붙어 내려가질 않았다. 동그란 엉덩이와 허벅지가 드러났다. 한 손에 한 짝씩 잡히고도 넉넉하게 남는 작은 엉덩이 사이로 허옇고 끈끈한 흔적이 흘렀다.

지친 요정을 안아 들었다. 배가 불러 제법 묵직했지만, 가뿐하게 들어 침대에 얌전히 올렸다.

“하악. 하악.”

덜 격한 대신에 진득했던 정사가 끝나자마자 요정은 완전히 기절했다. 카론은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정사의 흔적을 손수 닦았다. 요정의 몸을 누구에게도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내뱉는 숨결까지 제 것으로 삼고 싶었다.

“페아…… 이거 아니야.”

약혼 피로연에서 겁에 질린 요정이 떠올랐다. 울상을 지으며 둘의 신분 차이 때문에 이럴 수 없다고, 말을 잘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든 카론의 뜻을 바꾸려고 애를 쓰던 그날의 모습을 곱씹으면 가슴에 서늘한 칼이 스며들었다.

아이와 둘이서만 멀리서 살겠다고 얘기했을 때 확실히 알았다. 요정은 아이를 제게서 떨어뜨려 키우길 원했다. 그런 건 떠올리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 카론의 강한 의지를 깨달은 요정은 저항하는 대신 얌전히 몸을 열었다. 반가운 일이어야 하는데.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계속 뒷덜미에 맴돌았다.

부푼 배에 손을 얹었다. 곤히 잠든 요정을 깨우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살며시 쓰다듬었다. 유려한 눈썹이 움찔하더니 요정이 뒤척였다. 나비 날개를 잘라 붙인 것 같은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떠졌다.

“……페…… 아.”

“더 자.”

몸이 식어 열이라도 오를까 봐서 카론은 구겨진 시트를 펴 요정을 덮었다. 제가 할 수 있으리라고 전혀 상상하지 못한 영역의 보살핌이었다. 무표정한 요정은 그저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돌려 다시 잠을 청했다.

한 번 깨닫고 나니 여러 가지가 보였다. 요정은 아이를 원한다.

때때로 싫어하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제 뜻을 꺾고 카론이 원하는 대로 따를 것이다. 말을 배우고 난 후에 카론이 물으면 원하는 대로 답할 것이다. 카론이 몸을 원하면 몸을 내줄 것이다. 지금처럼.

더불어 요정은 카론이 찾아야만 만날 수 있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지금도 요정의 입에서 제 이름이 먼저 나온 적이 없었다. 점점 자리를 잡아 가는 발음으로 하물며 ‘페아.’ 라며 먼저 찾은 적은 전무였다.

요정은 카론이 서궁에서 살라고 하면 서궁에서 살 거고, 골든 피오니에서 살라고 하면 골든 피오니에서 살 것이다. 서궁의 죄인으로 살아도, 골든 피오니의 황후로 살아도 요정은 상관하지 않는다.

카론이 주는 고통은 괴로움이어도 카론이 선사하는 선물이 기쁨은 아니었다. 타인에 보여 주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카론에게만은 짓지 않는다. 웃으라고 시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만약 웃음이 필요하면 웃으라고 명하면 되는 일이고 주인을 반기길 원하면 반기라고 지시하면 그만이다.

결과적으로 카론은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이제 요정은 전적으로 카론에게 기대며 카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처음부터 말을 잘 듣길 원해서 당근과 채찍을 들었다. 한 치 어긋남 없이 훌륭한 결과였다.

* * *

고분고분해져서 퍽 기뻐했던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아니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수시로 몸을 겹치면서 의심은 더욱 커졌다.

“아으…앗.”

언제 찾아와 몸을 탐해도 요정은 순순히 다리를 열었다. 격렬하게 저항하던 모습이 아예 사라졌다. 그러자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는 점이 도리어 의아했다.

“아가르타.”

하물며 정사 중에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보려면 카론이 직접 턱을 들어 시선을 맞추어야 했다. 때때로 혐오감이 맑은 눈에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그 외에는 살아 있는 인형 같았다.

‘빌어먹을.’

기분이 영 별로였다. 저를 무심히 대하는 요정을 볼 때면 때때로 울화가 치밀었다. 제 말을 전혀 거역하지 않는 요정의 태도 어디가 어떻게 불만인지는 카론 본인도 오리무중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라던 일이 아니었나? 요정은 정치적으로도 유용하며 심지어 후계자 문제까지 해결했다. 아름답고 야해서 몸을 겹치기도 기꺼웠다. 자신이 요정에게 기대하던 바를 다 이루었다. 그렇기에 이런 이상한 느낌을 받을 이유가 없다.

부정적인 감정의 정체는 여태껏 미지의 영역이었다.

올리아나 그렌에게 물어보면 쉽게 해소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요정에 관한 일을 이젠 그들에게 의논하고 싶지 않다. 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오로지 둘 사이의 일로 남겨 두기로 결정 내린 지 오래였다. 당연했다. 요정의 모든 것은 자신의 것이므로. 요정이 뱉은 말 한마디, 작은 한숨, 떨리는 숨결을 비롯하여 제게 불러일으키는 의문의 감정까지도. 모조리 요정에 관한 모든 것은 카론만이 소유할 수 있다.

연이은 정사로 피로한지, 혹은 부풀어 오는 배 때문인지 요정은 약간의 여유만 있어도 곤히 잠들곤 했다. 늘어진 몸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뜨끈한 살결이 닿자 절로 긴장이 풀렸다. 돌아서 자는 몸을 일부러 제 쪽으로 돌렸다. 정사 내내 빨고 깨무는 바람에 도톰하게 부푼 입술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작은 틈 사이로 달콤한 숨결이 샜다.

손을 들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최상급 대리석처럼 뽀얀 이마에 저절로 입술이 갔다. 자는 모습을 볼 때면 언제나 머릿결을 쓰다듬고 이마와 뺨에 입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카론에 비하면 한참 가녀린 몸이 차게 식을까 봐서 신경 써서 시트를 끌어당겨 덮었다. 잠결에 꿈지럭대던 요정은 어느새 카론의 팔을 베고는 품에 이마를 콕 들이댔다. 조약돌 같은 이마의 무게감이 무척 달가웠다.

오늘도 요정과 아이는 건강하고 무사한 모습으로 품 안에 있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다. 정확히 카론 유스키아가 정한 순리대로.

그런데 왜, 어째서 기분이 엿 같을까.

* * *

혼삿날은 예상보다 더 빨리 왔다. 모르는 사이에 준비가 진행되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분홍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 복식을 걸쳤다. 머리는 복잡하게 올려 묶어 꽃과 진주로 장식했고 화려한 무늬가 얽힌 연한 면포를 썼다. 길게 늘어진 옷은 연회에서 입은 옷과 같이 신국식 여밈에 라테시온식 자락을 합친 형태였다. 옷자락이 하도 길어 저 뒤까지 끌렸다.

긴 거울에 비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진주와 꽃, 각종 장식과 자수가 가득한 화려한 복식은 전체가 하얘서 꼭 혼령이 입는 소복 같았다. 오늘따라 핏기도 유난히 없었다.

[영락없이 귀신 몰골이로구나.]

“예?”

모국어를 모르는 마그네가 면포를 정리하며 반문했다. 분홍이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어제저녁부터 식욕이 뚝 떨어져서 견과도 먹지 못했다. 미음처럼 연하게 끓인 고깃국을 조금 마신 게 다였다. 배가 부풀어 속이 부대낀다며 마다하였으나 사실은 마음이 무거워서였다.

아무리 장래를 두고 보자 했으나 막상 혼례날이 다가오니 너무 혐오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개종자의 황후가 되어 평생 낯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아주 끔찍했다. 새신부의 얼굴이 흐려지자 마그네가 잔뜩 얼어붙어 눈치를 보았다. 쉬이 화를 낼 수 없어 속이 더욱 답답했다.

준비를 끝내고 궁의 정문을 나서자 온통 금칠한 요란한 마차가 보였다. 마차 앞에는 깃털 장식을 단 백마 무려 여덟 마리가 대기했다. 피처럼 붉은 코트를 입고 검은색 모자를 쓴 궁인이 줄을 선 가운데, 검은 제복에 붉은 망토를 걸친 선홍색 장수 하나가 나섰다. 처음 라테시온에 왔을 때 만났으며, 전에 연회에서도 보았던 장수였다. 아니 여기선 기사라고 하든가. 경망스러운 표정과 달리 넓은 영지를 가진 군주였다.

“아가르타 황후 폐하를 대신전까지 모시는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은 아서 엘러라고 합니다.”

“아서 엘러.”

누군가 자기를 소개하였을 때 이름을 되부르는 라테시온식 예법을 익혔다. 그에 맞추자 아서 엘러는 흐뭇하게 웃으며 절했다.

마그네는 마차에 같이 올랐다. 원래는 황궁의 어르신이나 지체 높은 귀족이 동행하여야 했다. 그러나 황궁의 어르신은 어쩐 일인지 전연 존재하지 않았다. 적당한 귀족은 분홍이가 마다했다. 실상 부군인 개종자도 낯선 이를 들이는 것이 썩 내키는 기색이 아니었으므로 익숙한 마그네가 동행하기로 했다.

면포를 뒤집어쓰고 있기도 하고 동시에 목을 죄는 듯한 긴장감에 주변 풍경도 보지 못했다. 얼마 후 마차가 멈추고 분홍이는 정말로 깎아지른 듯이 높은 거대한 성채 앞에 섰다.

온통 하얀 돌과 금칠로 지어진 성채는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긴 깃발을 셀 수 없이 많이 내걸었다.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모를 꽃잎이 눈처럼 날렸다.

활짝 열린 입구 옆으로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기사들이 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사열했다.

붉은 천이 깔린 계단 밑에 서서 분홍이는 숨이 가빠왔다. 한창 태동을 부릴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아까부터 잠잠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거운 몸에 치렁치렁한 옷까지 입고 있으니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손을.”

제 발로 올라가고 싶으나 계단은 너무 많았고 배는 그만큼 무거웠다. 아서 엘러와 마그네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오르는 사이 어디선가 나타난 궁인 넷이 늘어진 옷자락을 들고 뒤따랐다.

입구에 다가서자 오만한 거탑의 내부가 보였다. 수백에 이르는 사람들이 긴 의자에 빽빽하게 앉아 있다가 분홍이가 들어오자 동시에 일어섰다. 조용히 움직임에도 기척이 얼마나 크던지.

면포 덕에 시야가 흐릿한데도 날아드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거북스러운 일을 빨리 끝내고 돌아가 쉬고 싶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어디서 아주 높은 목소리의 노래가 들렸다.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 부르는 노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에 높낮이가 어지럽게 떨어다가 고조를 유지했다. 장엄한 가창은 마치 경건하기가 지나쳐 혼백의 흐느낌 같았다.

의자 사이로 난 긴 붉은 길을 걸어 앞으로 갔다. 단상 위에 서 있던 개종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아가르타.”

평소에 백색을 즐겨 입던 그는 오늘은 어쩐 일로 온통 검은색 옷에 황금색 장식을 달고 있었다. 어깨에 얹은 장포는 여전히 붉은색이었으나 가장자리를 따라 흰 모피가 달렸다.

이제 당연한 듯이 내민 손 위에 제 손을 올리는 순간 분홍이는 그만 조소하고 말았다.

시커먼 저승귀 같은 개종자에게 소복을 입고 시집을 가는 넋 없는 자라니. 어쩜 이다지도 어울릴까.

그 미소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상대도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옆에선 개종자가 이끌고 때때로 낯선 이들이 시키는 대로 무릎을 꿇었다가, 손을 어떤 탁자 위에 올렸다가, 웬 붉은 술을 조금 마셨다가, 그리고 풍채 좋은 노인네가 뭐라고 계속 부르는 창도 아니고 시조 가락도 아닌, 기이한 음률을 지닌 노래를 들었다.

뒤이어 이마에 물을 맞고 한참 뒤에 앉아 있다가 완전히 지친 채로 다시 일어서서 개종자와 마주 섰다. 내내 곁에서 있던 아서가 술 장식이 달린 방석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위에 노란 금가락지 두 개가 있었다.

개종자가 그중 작은 것을 집어 약지에 끼웠다. 수수한 가락지로 여겼으나 막상 끼고 보니 투명한 돌이 번쩍번쩍 빛났다. 금강석이었다.

멍하니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려니 아서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개종자는 어느새 한 손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그가 했던 대로 남은 반지를 집어 들어 약지에 끼우려 했다.

땡그르르르.

손을 떨다가 그만 반지를 놓치고 말았다. 당황도 잠시, 구르는 반지를 아서가 얼른 주워서 다시 내밀었다. 내내 지루함에 가라앉았던 맥박이 갑자기 빨라졌다.

“진정해.”

개종자가 속삭였다. 순간 사람들이 일제히 웃었다. 그들은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분홍이는 떨면서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잠시 뒤에 식을 관장하던 노인이 뭐라고 외쳤다. 그러나 귀가 멍해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개종자는 썼던 면사의 끝을 들어 올렸다. 늘 그랬듯 단단한 검지가 턱 아래 들어왔다. 깊은 그늘이 진 순간, 분홍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에 따뜻한 살점이 살짝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입을 맞추는 일은 여전히 정떨어졌다. 둘 사이가 뭐라고 그렇게 애틋한 척을 한단 말인가. 기만적인 다정에 치가 절로 떨렸다. 그래도 분홍이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이 다였다.

흐뭇한 웃음을 짓던 노인이 화려한 무늬로 장식된 문서를 꺼냈다. 노인의 수발을 들던 다른 자가 도톰한 방석 위에 하얀 깃이 달린 펜을 얹어 내밀었다.

금색 잉크, 은색 잉크로 잔뜩 멋을 부린 문자가 빽빽한 아래, 개종자는 제 이름을 썼다.

카론 유스키아 라테시온.

분홍이가 알고 있는 필체이면서 익히 아는 글자였다. 뒤이어 개종자는 분홍이에게 펜을 내밀었다.

‘이것을 위해 연습한 것이구나.’

그때부터 이미 혼사를 계획하였나. 바로 임신을 알린 날에.

‘차라리 알리지 말 걸 그랬어.’

뒤늦은 후회가 막심했다. 분홍이는 펜을 문서에 대고 자신의 이름 같지도 않은 것을 쓰려고 하는데 도무지 손목이 움직이질 않았다. 펜 끝에서 잉크가 떨어져 문서에 검은 점이 생기고 말았다.

“흠흠.”

노인이 근엄하게 목을 가다듬었다.

“아가르타?”

이름을 쓰면 황후가 된다. 이국의 글귀를 잘 몰라도 눈치는 있었다.

혼례를 치름에 있어서 제 의사는 하나도 없었다. 아가르타 라테시온이라는 이국식 이름을 평생 제 이름으로 여길 마음도 전무했다.

펜을 들어 이름을 쓰는 행위는 마음이 동해야 하지 않나? 진의가 없는 명록은 그저 의미 없는 낙서였다. 이 하찮은 낙서가 평생 자신을 옭아맬 오랏줄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당장 종이를 찢고 달아날까? 이 혼례는 그저 핍박받은 불쌍한 제가 코뚜레를 낀 소처럼 질질 끌려왔을 뿐임을 많은 사람 앞에 밝힐까?

위풍당당하게 신랑입네, 황제입네 하는 개종자의 얼굴에 지독한 똥물을 끼얹게 되리라. 언뜻 떠올리니 통쾌감에 전율했다.

이제 곧 원치 않은 부군이 될 자 또한 나지막하게 강요했다.

“아가르타, 이름을 써야지.”

개종자 놈이 제 이름 옆을 가리켰다.

“철자가 생각나지 않나?”

큰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하얀 손을 감쌌다. 그리곤 천천히 이국의 철자를 썼다.

“페…… 아.”

어금니를 사려 물며 손을 빼려고 했다. 개종자는 낯짝 하나 변함이 없이 손을 움직였다. 몸에 가려 무슨 일인지 자세히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약간 웅성거리고 말았으나, 선 채로 광경을 지켜보던 노인은 당황한 듯 주름진 눈을 껌뻑였다.

펜대를 놓고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자 냉랭한 입술이 관자놀이에 닿았다. 머리를 덮은 얇은 면포를 뚫고 서늘한 기운이 전해졌다.

“우리 애를…… 사생아로 만들 셈이야?”

사생아.

축첩 제도가 없는 이국에선 서자와 얼자도 없었다. 다만 사생아가 있을 뿐인데, 아비가 없는 후레자식이었다.

아무리 개종자가 끔찍하고 혐오스러워도 삶을 붙잡게 해 준 귀한 아이를 그리 키울 순 없다. 분홍이는 질끈 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내…… 가…… 씁니다.”

꾸욱.

깃펜 끝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각이 무딘 손으로 천천히 펜대를 움직였다. 개종자가 사뭇 미소를 지었다. 혼례를 이끌던 노인은 안도하여 큰 숨을 내쉬었다.

아가르타 라테시온.

이윽고 펜을 놓자 앞줄에 앉아 있던 높은 귀족이 우르르 나왔다. 노인네는 종이를 들고 그들 쪽으로 갔다. 순서대로 펜을 잡은 이들은 똑같이 이름을 적었다. 마지막으로 노인네가 서명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로써 카론 유스키아 황제 폐하와 아가르타 황후 폐하의 성혼을 알립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드넓은 식장을 채운 하객들이 모조리 일어서며 선창을 따랐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혼례가 끝난 후 축하를 위해 다가온 아서의 말로는 뒤이은 행사가 많다고 했다. 그러나 묵직한 배를 감당해야 하는 분홍이는 이제 부군이 된 개종자의 옷깃을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정하게도 개종자는 분홍이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저에게 기댈 수 있게 했다.

“우린 피곤하니 먼저 쉬도록 하지.”

“폐하께서도요?”

대연회를 능가하는 큰 혼례연은 가장 중한 황제 부처 없이 진행될 판이었다. 아서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분홍이를 봤다. 혼자 쉬려 했는데.

황후가 되리라는 얘기를 들은 직후부터 분홍이는 기를 쓰고 말을 익혔다. 아무리 개종자의 강압에 못 이겨 앉은 자리여도 황후씩이나 되어서 어리숙하게 보이기 싫었다. 그러기엔 명가의 핏줄이 물려준 자긍심과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또 앞으로 적자로 태어날 자식을 위함도 있었다. 하필 황제의 적자로서 태어날 텐데, 아무리 요정으로 여겨지더라도 어미가 말을 잘할 줄 모르면 아이를 제대로 보호할 수 없고 또한 제가 모르는 사이 괄시를 당할 수도 있었다.

오랑캐 세상에 태어날 유일한 분홍이 편을 반쪽짜리 천덕꾸러기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왕 적자로 태어날 거, 온전한 군왕으로 키워 만천하에 명가의 위세를 떨쳐 보겠다는 야심도 아주 조금은 있었다. 어쨌거나 배 속 아이가 위세를 떨쳐야 저를 낳아 준 분홍이의 억울함을 알고 하다못해 역겨운 황제 놈에게 역정이라도 대신 내어 주지 않겠는가.

장래를 위해서 현시점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황제의 발목을 잡는 모지리 요정으로 보이기는 싫어 황제에게 먼저 연회를 권했다. 더불어 홀로 쉬고 싶었다.

“폐아는 저기 가세요.”

“임신한 황후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지. 그것도 결혼 직후에.”

“저는 혼자 괜찮습니다.”

“내가 안 괜찮아.”

한 번 정한 것은 결코 번복하는 일이 없는 개종자는 끝끝내 아서를 홀로 연회에 보냈다. 그리곤 분홍이가 타고 온 마차에 같이 올랐다. 그 덕에 마그네는 다른 마차를 타야 했다.

개종자는 임신한 분홍이를 상석에 앉히고는 본인은 당연한 듯이 거꾸로 가야 하는 말석에 앉았다. 만인지상의 황제인데 어쩜 이리 무람없을까. 가끔은 경이로웠다.

개종자는 즐거운 듯 농을 던지면서 분홍이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수시로 입을 맞추는 일에 이제 이력이 났다. 사람이 없을 때는 분홍이도 더는 역정 내지 않기로 했다. 겉으로도 그리고 속으로도. 이런 오물 같은 작자에게 일일이 기운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깎아내고 버리고 태웠던 가슴 속에 얼마 남지 않는 정은 오로지 아이만을 위해 남겨 두었다.

다정한 부군 흉내를 내는 개종자를 슬며시 봤다. 눈빛에서 무엇을 읽었는지 개종자가 문득 엉뚱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요정어로 캐저언자가 무슨 뜻이지?”

“캐저언자?”

“캐저어은자? 캐즈온자? 그런 말로 나를 불렀잖아.”

내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걸 또 어떻게 기억하고 콕 찍어 물어보나. 하여간 수시로 얄밉기 짝이 없었다. 분홍이는 시선을 돌렸다.

“그냥…… 이름입니다.”

“이름? 요정어식 내 이름인가?”

욕설이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지 않나.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무심한 척하니 개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전자. 어감이 나쁘진 않군.”

퍽이나 그렇겠소. 속으로 조소하였다. 그러면서도 앞으로는 개종자를 개종자라 더는 입 밖으로 부르지 않을 심산이었다.

욕으로 부를 걸 어떻게든 알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거니와, 어쨌거나 아이의 친부였다. 속으로는 갖은 욕설을 퍼부어도 겉으로는 존중해야 마땅했다.

아이를 개놈의 새끼로 만들 순 없으니.

“카론.”

연습 삼아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내어 보았다. 이름에 그는 즐거운 듯이 시선을 맞추었다.

황제와 황후를 태운 금색 마차는 돌이 깔린 대로를 지나 평생을 보낼 황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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