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8/28)

6.

파편을 휘둘렀던 방으로 돌아왔다. 새삼 염통이 쿵 떨어졌다. 냉궁에 비하면 화려한 장식이 귀인을 위한 방임을 알고는 있으나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영 싫었다. 싫기는 냉궁도 매한가지지만.

침상 기둥에 머리를 처박았던 일이 떠올라 괜히 목이 움츠러들었다.

반년간 통짜로 된 소복 하나만 주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영 불편한 속곳도 같이 주었다. 불편해하니 이번에는 속곳으로 여러 가지를 들고 와서 펼쳐 보였다. 고향에서 입던 것과 비슷한 걸 몇 개 고르니 상선이 그를 집어 궁녀에게 주었다. 같은 걸 만들어 올 모양이었다.

속곳을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간 사람과 함께 고르는 일은 민망했다. 뻘건 얼굴을 차가운 손바닥으로 누르면서 태연함을 가장하려 애썼다. 역시 이곳은 남녀의 구별은 있되, 음양의 구별이 없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개종자도 제 배를 보고 대경실색했을 터.

아이를 무사히 낳기 위해서는 내밀한 판단과 행동 대신 뻔뻔하게 내보이고 꼭 필요한 것은 당당하게 요구함이 옳다. 이곳 의원도 음인의 회임과 출산에 익숙지 않을 테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누구든 청해야 한다.

음식도 반상이 아니라 탁자 위에 제대로 차려졌다. 번쩍번쩍하는 화려한 접시며 그릇 위에 고운 화권과 익힌 채소, 이국식 죽, 부드럽게 익힌 고기와 함께 과채즙과 깨끗한 물도 주었다.

물잔이 전과 달리 투명한 유리였다. 영롱한 빛이 예쁜 잔을 가리키며 상선을 불렀다.

[이보게, 구엔]

아직 어설픈 발음이건만 상선은 곧잘 듣고 다가왔다. 분홍이는 물잔을 들어 조금 마시고 표면을 정확하게 가리켰다. 이국어로 물을 뭐라 하는지 궁금했다.

상선이 가르쳐 준 대로 소리 내어 따라 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빵, 수프, 포크, 나이프, 크리스털. 샐러드. 실버 웨어. 테이블. 드레스.

한창 말을 배우는 차에 밖에서 궁인이 나타나 구엔을 불러갔다. 더 궁금한 것은 늘 같이 있던 궁녀가 알려 주었다.

스테이크. 치킨. 터키. 버터. 카펫. 체어. 윈도우. 커튼 등등.

식사 후에도 말 배우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분홍이는 문득 아주 중요한 것을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손가락이 절로 궁녀에게 향했다.

늘 자신을 돌봐 주었던 궁녀의 손이 제 가슴에 올려졌다.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하기에 분홍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그네.”

“마그네.”

“마그네.”

“마그네.”

듣고 따라 하기를 두 번 반복했다. 마그네는 감격한 듯 눈을 접어 웃었다. 그러면서 손바닥을 펴 분홍이를 가리켰다. 순간 분홍이라 답하려 하다가 멈췄다.

이미 고향과 부모님 품을 떠난 몸.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으나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어 개종자의 씨를 품었다. 스스로 분홍이라 여기지만 사랑과 정성으로 키워 주시며 붙인 이름을 이국인에게 함부로 발설하기 꺼려졌다.

묵묵한 미소로 답했다. 개종자의 종복임에도 마그네는 분홍이를 위하여 더 캐묻지 않았다. 그 점은 구엔과 비슷했다.

아린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사이 마그네가 이상한 손짓을 시작했다. 허공을 가리키더니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홱홱 젓다가 진저리치며 물러서는 거였다. 짧게 한마디 했는데 거리끼고 좋지 않은 걸 내젓는 표현이었다.

“시러?”

따라 했더니 마그네가 방긋 웃었다. 이번에는 허공을 짚고 한껏 부푼 마음을 그리더니 와락 안고 몸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함박웃음에 어깨를 움츠리기까지 하니 누가 봐도 좋다는 뜻이었다.

“조아.”

물건 이름보다 더 유용한 표현이었는데 왜 물어볼 생각을 못 했을까.

“시어. 조아. 시러. 조아.”

얼굴을 찌푸렸다가 폈다가 하며 배운 말을 반복했다. 저절로 얼굴이 펴졌다. 좋은 말을 배운 분홍이는 마그네를 가리켰다.

“마그네, 조아.”

웃음을 짓던 마그네의 얼굴이 굳었다.

“조아. 마그네.”

한 번 더 말하자 이번엔 마그네의 눈썹이 곱게 모였다. 낮은 산을 그리는 눈썹 아래 선한 눈이 초롱초롱하였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편 마그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마그네, ⋙∐∀, 조아.”

중간 말은 수시로 듣던 거였다. 귀를 쫑긋 세우며 따라 했다.

“우오조온? 유오전. 아! 요오전.”

마그네가 분홍이를 가리키며 하는 말. 요오전. 이국인이 저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요오전, 조아, 마그네.”

문장이 어설펐는지 마그네가 순서를 바꿔 주었다.

“요오전, 마그네, 조아.”

마그네가 칭찬하며 박수쳤다. 배운 말을 까먹지 않기 위해 분홍이는 바로 다른 말을 해 보았다.

“요오전, 빵, 조아. 요오전, 버터, 시러. 요오전, 포크, 시러. 요오전, 새러드, 조아.”

이후에는 마그네가 ‘나’라는 말을 알려 주었다. 말을 배우니 기뻐서 하고픈 말을 아무렇게나 했다.

“나, 포크 시러. 나, 베드 시러. 나, 헤아 시러!”

방을 돌아다니면서 신나게 떠들었다. 신이 나서 개종자의 종복에게 해선 안 될 말까지 해 버렸다. 뒤늦게 마그네를 돌아보았다. 기겁하며 안 된다고 할 줄 알았는데 마그네는 그저 안타까워 보였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며 손을 배에 얹었다. 묻지 않아도 마그네가 아기를 어찌 부르는지 가르쳤다.

사물과 사람의 이름 외에 배운 말은 좋다와 싫다뿐. 마그네는 그저 조용히 지켜볼 뿐인데 분홍이는 속에 든 말을 끄집어내고 말았다.

“나, 아기 조아. 나, 아기 시러. 아기 조아…… 시러.”

웃음이 순순히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떨리고 눈가도 일그러졌다. 좋은데 싫다. 싫은데…… 좋아하기로 굳은 마음을 먹었다.

후에 마그네가 말 공부에 쓰라고 이국식 지필묵을 가져왔다. 이국 공책과 세필, 먹물을 어떻게 부르는지도 알려 주었다.

맨 종이가 아니라 이미 가죽을 덧대 책으로 묶은 백지 묶음인 노트. 먹을 미리 갈아 작은 유리병에 넣어 둔 잉크. 얇은 대에 뾰족한 철심을 달아 잉크에 찍어 쓰는 펜. 혼을 담기에는 부족한 필기도구였다. 오로지 편함만 추구한 도구였고 그래서 무언가 적기에 거리낌이 적었다.

낯선 이국의 종이는 거칠하여 뾰족한 펜 끝이 쉽게 긁혔다. 학문에 쓰는 글보다는 정음이 쓰기 더 쉬웠다. 더구나 이국 말소리를 기록하려면 정음이 더 낫기도 했다.

말을 배우기 전 이국 풍습을 먼저 알라고 아이가 보는 화첩을 가져온 상선 아래 있는 만큼 마그네는 굳이 이국 글씨까지 한 번에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분홍이가 쓰는 글씨를 신기하게 관찰했다.

분홍이가 이름을 쓴 다음 한 글자씩 콕콕 찍었다.

“마. 그. 네.”

그러자 마그네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제 손바닥에 위에 정음으로 쓴 제 이름을 덧그렸다. 기쁜 듯이 가슴에 간직하겠다고 가슴에 손바닥을 대었다.

고향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 주어 무척 고마웠다. 이런 정감 어린 작은 행동을 얼마나 바랐는지.

마그네가 테이블을 치우는 사이 분홍이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열심히 배운 말을 기록했다. 문이 열리고 식기를 담은 작은 수레가 덜컹덜컹 나갔다.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부터 그늘이 지더니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Ẩỻỻ∀. ∑∃⋂ẻẞẨỾ?”

개종자였다.

다가오는 줄 전혀 몰랐기에 화들짝 놀라 튀었다. 엉덩이를 제자리에서 털썩댔을 뿐 아니라 쥐고 있던 펜이 엇나가 노트 위아래로 선이 쭉 났다.

* * *

뒤를 돌아보는 요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얼른 일어선 그는 허리를 테이블에 대고 상체를 뒤로 쭉 뺐다. 품 가까이에 선 요정은 사이가 좁아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기겁하든지 말든지. 카론은 요정이 쓰던 노트를 집어 들었다. 이상한 문양이 자잘하게 이어졌다.

팔랑팔랑.

두어 장 넘겨봤다. 쓰인 건 첫 페이지 문양이 다였다.

“이게 뭐지?”

손가락으로 문양 하나를 가리켰다. 어차피 대답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반응을 관찰하고 이상한 의도가 엿보이면 앞으로 필기도구를 주지 말라고 할 심산이었다.

요정이 어물어물하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카아페드.”

“음?”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지? 아니 요정이 지금 카펫이라고 했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요정은 문양 제일 위를 가리키더니 입을 열었다.

“마그네. 구엔. 빵. 수프. 포크. 나이프. 크리스터. 새러드. 시버 웨어. 테에브을. 물. 아기.”

깜찍하게도 말을 배우는 중이었다. 기묘한 문양은 요정 문자 같은데 처음 요정을 떠버리들에게 선보였을 때 바닥에 그렸던 문자보다는 훨씬 간략했다.

“요정식 약식 문자인가. 그런데 마그네?”

“예, 폐하.”

옆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카론이 마지막 기회라고 경고했던 서궁의 시녀였다.

“네 이름인가. 특이하군.”

“원래는 마거릿인데 요정님께선 마그네라고 하십니다.”

원래 이름이 뭔지 중요치 않다. 요정이 마그네라고 부르면 마그네인 것이다.

“흠. 네가 말을 가르쳤나?”

“원래 그렌 님이 가르치셨고 자리를 비우신 중에는 제가 질문에 대답하고 있습니다.”

구엔의 의미도 알았다. 주변에 있는 필수적인 물품부터 시작하여 말을 배우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질책할 이유도 없고 오히려 필요한 자원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다 쓰라고 하고 싶었다. 다만 마그네나 구엔 따위보다 훨씬 중요한 단어가 빠졌다.

“내 이름을 어떻게 가르쳤지?”

“아…… 저…… 그게…… 아직 폐하의 존함은 모르십니다.”

조심스러운 대답에 눈가가 실룩댔다. 시녀나 ‘너’로 부르면 충분할 제 이름은 알리면서 가장 중요한 황제의 이름을 빼먹었다? 날카로운 시선에 마그네의 몸이 바짝 굳었다.

호된 질책을 던지려는 찰나 요정이 노트에 손을 얹었다.

“헤아.”

냉랭하게 굳은 시선이 요정에 향했다. 다소 자신감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기운 빠지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헤아…… 요오전…… 아기.”

폐하. 요정. 아기. 어설픈 발음이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 저를 가리키며 ‘헤아’ 라고 부르는 요정 덕에 시녀에게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쳤다.

“발음이 어설퍼.”

유치하고 무해해서 옅은 짜증이 슬며시 풀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귀여웠다.

생활에 꼭 필요한 표현과 함께 앞으로 요정이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었다. 카론은 노트를 도로 펼치고 요정의 손에 들린 펜대를 잡았다. 손가락이 닿자 요정은 금방 손을 뺐다. 시선을 사선으로 내렸을 뿐, 도망가진 않았다. 태평한 습성을 카론 앞에서도 점점 드러냈다. 바람직했다.

펜을 잡은 카론은 강하고 날렵한 필체로 이름 두 개를 썼다.

카론 유스키아 라테시온.

아가르타 라테시온.

둘 다 당장 외워야 할 지극한 당위성이 있으며 동시에 조만간 쓸 일이 있다.

황제의 아이를 가진 요정이 제 이름을 모르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또 결혼식에선 서약서에 본인이 직접, 공개적으로 서명해야 한다.

“철자까지 외워. 둘 다.”

카론의 시선은 여전히 요정에게 향했다. 요정은 시녀의 눈치를 보며 내민 노트와 펜을 받아 들었다. 떨리는 밤하늘색 눈동자가 다시 내려가기에 검지로 요정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나중에 직접 확인하겠다.”

“……헤아.”

의미가 통하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두려움이 깃든 눈동자가 유순하게 깔렸으므로 카론은 흡족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집무실로 돌아온 카론은 지시 사항을 빠르게 휘갈겼다. 황제의 친서 전달을 맡은 시종은 연신 집무실 안팎을 오갔다.

요정을 황후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제국 건국 선언 이후로 처음으로 맞이하는 대형 행사인 만큼 각지에서 영주를 초대하며, 제도 귀족도 다수 참석한다.

혹시 몰래 스며들 불순 종자를 가려야 해서 모든 건 황궁의 주도로 철저하게 확인하는 편이 좋다. 즉, 카론이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동시에 신이 황제와 요정 황후에게 내리는 축복을 증명하기 위해 대신관을 불러 결혼식을 집전하게도 해야 했다.

“요정 황후라.”

알고는 있되 구체적으로 연상한 적이 없는 단어를 곱씹었다. 제법 마음에 들었다.

대신관 중 어느 놈이 좋을까. 대신전도 개보수하고, 하객들의 자리 순서 정하기부터 그들이 사용할 숙소와 시종들도 철저히 확인해야 한다.

사용할 예복 제작과 음식 준비와 식장의 단장은 그렌에게, 하객 명단과 그들의 배경 조사, 대신관 선정 등은 아서에게 맡겼다.

카론은 황궁 호위 체계 변경을 추진했다. 예전에 모든 호위가 카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현재는 중요한 호위 대상이 둘이다. 변경의 필요성이 컸다.

원칙상 황제를 철저히 지켜야 하나 카론은 검술 실력이 뛰어난 기사이고 다른 하나인 요정은 무력한 임신부다. 당연히 요정 보호에 무게를 실어야 했다.

신분을 확실한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근위 기사단 중에서도 실력이 뛰어나며 동시에 입이 무거운 자가 적당했다. 논리적인 결정인데도 선뜻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가 호된 배신을 당했다. 어리석은 짓을 두 번 반복할 순 없다.

당장 요정의 곁에 두어도 괜찮을 사람부터 가렸다.

우선 둘, 그렌과 아서. 그렌은 전직 수도사 출신이며 이미 아내 올리아가 있다. 카론이 겪어 본바 그는 아내를 배신할 사람이 아니다. 아서는 본인보다는 베로니카를 믿는다. 아서가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는 순간 검을 들고 잡으러 올 테니. 단지 그들은 요정의 경호까지 맡기엔 이미 할 일이 많았다.

대륙 최강 기사인 베로니카를 호위 때문에 황궁까지 불러들이긴 무리다. 그렇다면 요정의 호위 기사에 알맞은 인물이 딱 하나 남는다.

카론 유스키아.

황궁 동태에 가장 익숙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 요정을 상대한 경험이 많으며 무엇보다 요정과 밤을 같이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자신이야말로 적임자였다. 더불어 호위 기사는 외출 시 반드시 동행해야 하나 공교롭게도 요정은 제 허락 없이 황궁을 떠날 수 없다. 여러모로 완벽했다.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종이에 구체적인 지시 사항을 썼다. 접어서 봉투에 넣은 후 봉인하자마자 시종이 돌아왔다.

“골든 피오니의 마그네라는 시녀에게 전달하도록.”

골든 피오니라는 말에 봉투를 받아 들던 시종이 살짝 멈칫했다. 그 외에는 큰 내색이 없었다.

골든 피오니. 금색 피오니 무늬로 꾸민 화려하고 큰 방으로 황제의 침전과 가까웠다. 황궁이 왕궁이던 시절부터 많은 왕비가 사용했다. 황궁으로 증축할 당시 내부 수리를 완벽하게 다시 했을 때도 골든 피오니의 위상은 지켜졌다. 독신인 황제가 황후를 맞으면 그 방을 쓸 거라 여겼다.

초대 라테시온 황제 카론이 세를 일으킨 이후로 그곳은 늘 비어 있었고 누군가 들어간 적이 없다. 그런 곳에 시녀가 있다는 말은 골든 피오니를 사용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일 터.

황후의 방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군지 황제는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시종은 입을 꾹 다문 채 골든 피오니로 향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따른 지시 사항을 내리느라 카론은 늦게까지 집무실을 지켰다. 급한 연락은 보낸 후 여유를 두고 전달해도 되는 사항만 남았을 때는 이미 한밤이었다.

낮부터 많은 일이 있었기에 다소 피곤한 몸을 이끌고 향한 곳은 제 침실이 아닌 골든 피오니였다. 호위도 호위이거니와 요정의 동태를 한시도 빠짐없이 지켜볼 필요성을 따져, 앞으로 되도록 골든 피오니에서 눈을 붙일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아까 마그네에게 지시를 내렸다.

“얌전히 있을지 모르겠군.”

낮에 보았을 때는 얌전했다. 그러나 요정은 눈을 떼는 족족 사고를 쳤다. 이번도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다. 무엇보다 갑자기 방을 옮겼으니.

뒤늦게라도 울며불며 난리를 피웠을까? 아니면 정원에 있던 것처럼 천하태평일까.

자못 궁금했다.

긴 보폭으로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황제의 딱딱하게 내려앉은 입술에 은근한 미소가 걸렸다.

* * *

개종자가 나가고 난 뒤에 마그네의 표정이 심각했다. 분홍이가 뭔가 해도 그냥 지켜보기만 하더니 이후로는 개종자가 노트에 쓴 이국 글씨를 가리키며 반복해서 쓰는 흉내를 냈다. 알고 보니 이건 개종자의 성명이며 그 아래는 분홍이를 칭하는 다른 말이었다.

개종자가 그러라고 시켰냐는 뜻에서 “헤아?” 라고 물었더니 마그네가 뭐라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도 가만히 두질 않는구나. 징그러운 놈.”

개종자는 개종자로 충분하거늘. 심지어 분홍이는 놈의 이름 옆에 정음으로 ‘개. 종. 자.’라고 썼다. 본데없고 인정머리 없는, 무례하고 거친 망나니라고도 덧붙였다. 쓰고 나니 지켜보는 그놈의 눈이 두려워 찢어 버리려고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고향 말은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이거다. 분홍이는 노트에 하고픈 말은 쓰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이 노트가 아니라 다른 노트가 필요했다. 마그네에게 어설픈 말과 손짓으로 노트를 하나 더 얻었다.

새 노트는 서궁에서 가져온 옷상자에 고이 숨겨 놓았다. 나중에 홀로 있을 때 있었던 일을 소상히 기록하리라.

개종자가 언제 다시 들이닥쳐서 제 하찮은 이름을 써 보라고 할지 모르기에 분홍이는 저녁 내내 꼬부랑글씨를 따라 그렸다. 중간에 마그네가 틀린 부분을 고쳐 주었고 그에 따라 새로 연습했다.

마그네가 다소 서둘렀기에 당장 글씨 검사를 하러 올 줄 알았는데, 놈은 밤이 늦도록 소식이 없었다. 안 와서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얼른 보여 주고 긴장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늦은 밤 사위가 고요해졌다. 마그네는 커튼을 닫고 창문을 단속했다. 구석구석마다 밝혔던 등을 끄고 문 앞과 침상 바로 옆에만 작은 등을 가져다 놓았다. 작은 서궁에서는 하지 않던 일이었다.

후에는 얇고 고운 옷을 가져왔다. 부들부들한 것은 비치지는 않았으나 곧잘 들러붙어 몸매가 드러났다. 마그네와 구엔을 비롯하여 개종자도 이런 민망한 차림은 하지 않으면서 저에게만 이런 걸 주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얌전히 있으면 아이를 해하지는 않겠지. 수태를 알고서도 패악을 부리지 않고 되레 좋은 방을 주었으니.’

아무래도 개종자가 이국의 군왕이다 보니 아이를 원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아이를 얻을 때까지는 패악을 덜 부릴 터.

탈 없이 아이를 낳는 날까지 개종자를 수시로 상대해야 했다. 배 속 태아를 위해서 낮에 마당에서 그랬던 것처럼 개종자를 상대로 호통을 쳐야 할 일이 분명히 더 있을 거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사소한 일은 그냥 넘기고 기운을 보하는 편이 낫다. 반년간 휑하게 두었던 궁둥이를 가릴 속곳도 얻었으니 겉옷은 주는 대로 입기로 했다.

피가 터진 채로 겁간을 당했던, 역겨운 침상에도 거침없이 올라갔다. 원혼이 되어 고향 땅으로 갈 마음도 먹었었는데 하늘이 살라고 점지하신 태아를 지키기 위해 뭔들 못 하랴. 오물 같은 치욕을 삼키고 오물 같은 혐오를 감내하여 죽을 각오로 살 것이다.

개종자가 들이닥칠 문을 노려보며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미 밤이 늦었다. 개종자를 더 기다려 보고자 했으나 눈이 껌뻑껌뻑 감겼다. 오늘 하루 많은 일이 있어서 놀란 나머지 오후 내내 달아났던 수마가 슬그머니 분홍이를 덮쳤다.

‘오늘은 그놈이 안 오려나.’

불쑥 나타나는 놈은 불쑥 사라지기도 했다. 낮에 여러 차례 대면하였으니 나중에 오겠거니 짐작했다.

베개 여섯에 푹 둘러싸였다. 많은 베개 수는 지체 높은 귀인의 상징임을 이제 알았기에 별로 싫지 않았다. 도리어 푸근했다. 베개 개수의 의미를 알고 나자 마음가짐도 바뀌었다. 역시 이국을 알고 배움이 중했다.

고향 풍습에 맞지 않아도 여기서 살아내려면 여기 풍습을 잘 알아야 했다. 또 내일은 방에 있는 물건 모두의 이름을 배우리라 다짐하며 분홍이는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겼다.

마그네는 잠을 자는 대신 문 앞에 놓인 작은 탁자에 앉았다. 왜 나가지 않는지 궁금하였다.

‘개…… 종자가 지켜…… 보라…… 시…… 켰…….’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커다란 침상이 출렁였다. 잠결에도 간담이 서늘하여 눈을 번뜩 떴다. 고개를 휙 돌려보니 웬 시커먼 그림자가 침상으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심장이 뚝 떨어졌다.

[상선! 마그…… 읍!]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큰 손이 텁 막았다. 귓가에 거친 음성이 뭐라 속삭였다.

개종자였다.

야밤에 은밀하게 들어올 줄은 몰랐다. 냉궁에서는 이런 적이 없었다. 쿵쿵 발걸음이 울리거나 자물쇠를 여는 기척이 크게 나서 거의 뜬 눈으로 놈을 맞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폐가 벌렁벌렁했다. 숨을 몰아쉬며 손으로 배를 쓸었다. 아까 잠들 때만 해도 침상 옆 작은 탁자에 등이 있었는데. 시선을 돌려보니 침상에 달려 있는지도 몰랐던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개종자가 음흉한 그림자를 덧쓰고 있어 영락없이 야습 나온 거대한 밤 짐승이었다.

“아가르타.”

특별히 개종자만이 저를 그렇게 부른다. 소리는 제법 운치 있으나 기분은 운치 근처도 가지 못했다. 아이에 관해서는 할 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분홍이는 놈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는 임부를 놀라게 하면 안 돼.]

“아가르타.”

[알겠느냐, 이 본데없는 개종자야.]

밤으로도 퍼런빛이 죽지 않는 도깨비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이윽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개종자의 얼굴 윤곽이 보였다. 늘 노기에 찬 안면이 오늘따라 다채롭게 변했다. 아까는 전에 없이 아연실색하더니 지금은 달곰하니 풀어졌다.

“아가르타.”

[왜, 개종자야.]

제멋대로 지은 이름을 부르기에 분홍이도 마음껏 제멋대로 지은 이름으로 답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니 어투가 나긋하기만 하면 내용이 무엇이든 놈은 무심했다. 되레 형형한 눈가를 기분 좋게 접었다.

‘진작 이렇게 할걸.’

무엇 하러 놈과 맞붙었을까. 완력과 권력이 차이가 있으니 살살 달래여 원하는 바를 취하면 그만인데.

개종자가 고칠 재간이 없는 종자이거니와 겁간이나마 배를 맞추고 갖은 고욕이 지나간 후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긴 해도…… 어쨌든 진작 이러지 못해서 원통했다.

큰 손이 이불을 들었다. 담 넘는 구렁이처럼 등허리에서부터 슬며시 들어와서는 배에 닿았다. 뭐라 속삭이는 음성이 귓가에 바로 울렸다. 워낙 고요한 밤이라 말을 할 때 입술과 혀가 붙었다 떨어지는 기척까지 생생했다.

태아를 노리는 밤 짐승이 마치 얼마나 익었나? 얼마나 더 키워야 하나? 크기를 가늠하는 듯해서 절로 등골이 오싹했다.

‘설마…… 아이를 가져가려고?’

여느 짐승과 마찬가지로 낳은 후에는 어미가 밤낮으로 돌봐야 사는 것이 사람이다. 설마 아무리 개종자가 인두겁을 쓴 짐승이라도 어쨌거나 제 어미가 낳아서 정성으로 길렀으니 살아 있는 게 아닌가.

안하무인인 놈의 성정은 내리사랑이 지나쳐서 생긴 것이 분명했다. 어미의 애끓는 정성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런 놈이 제게서 아이를 빼앗아 갈까? 아니 내리사랑이 지나쳐서 제 손으로 직접 키우려고?

갖은 생각이 몰아치는 사이에 개종자는 슬금슬금 몸까지 뉘었다. 거한의 무게에 등 쪽 침상이 깊이 가라앉으면서 분홍이도 덩달아 그쪽으로 쏠렸다.

겹겹이 입은 두꺼운 옷을 훌훌 벗었는지 등에 돌 같은 가슴팍이 닿았다. 긴 머리카락이 등을 가려 그나마 덜 닿아 다행이라 여기는 찰나 놈이 머리채를 잡아 위로 가지런히 올렸다.

놀란 가슴이 진정하기도 전에 두꺼운 팔이 허리를 감쌌다. 하는 행실이 꼭 같이 자려는 것 같았다.

[개…… 개종자야, 왜 눕느냐? 그만 네 소굴로 돌아가지.]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얇은 내의만 입어서 더욱 민망한 중에 놈은 수치도 모르고 몸을 밀착했다.

[태아는 잘 있을 거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라. 잠시만이라도 나를 혼자 두어 다오.]

말을 알아들어도 제 원을 들어줄 놈이 아니건만. 저도 모르게 애원했다.

“쉿.”

역시나 제멋대로 분홍이의 입을 막긴 했는데. 어쩐 일인지 놈은 노기를 보이는 대신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 대했다.

아니 수태를 했다고 이렇게 사람이 바뀔 수가 있나?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웬 곰살맞은 짓이냐. 네가 감히 가당키라도 하느냐? 역정을 내고 싶어도 놈이 또 홱 돌아서 손찌검을 할까 두려운 마음이 컸다.

‘이노옴…… 네놈이 어떤 무참한 짓을 벌이고 죄 없는 나를 어떻게 핍박하고 학대하였는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거늘. 어찌 이렇게 낯짝이 두꺼우냐.’

치를 떨었으나 태아의 안전을 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속으로만 호통쳤다. 그래서인지 꾹꾹 눌렀던 서글픔과 억울함에 절로 열이 났다.

하긴 이미 버린 몸인데 개종자가 지분거리면 또 어떠하랴.

괜히 놈의 성질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저녁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아이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갖은 수를 써야 한다. 손쉬운 길로는 놈의 비위를 맞추어 총애를 받는 방법이 있건만. 그러기엔 냉궁에서 겪은 무참함이 남긴 상처가 생생했다.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배를 쓰다듬던 왕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둔부와 허벅다리를 어루만졌다. 수치스러운 행각에 혐오감이 물씬 들었다. 임부를 희롱하는 상스러운 심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절로 분기가 차올라 곁눈으로 놈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놈의 퍼런 눈길이 한층 서늘해졌다. 그러면 그렇지. 네놈의 막돼먹은 성질머리가 금방 바뀌겠느냐. 콧방귀를 속으로 몰래 뀌었다. 제게 들러붙은 손이 언제 잔혹한 흉기로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분기와 억울함, 치욕이 속에 휘몰아쳤다. 몸서리치는 접촉이 빨리 끝나길 빌었는데. 놈은 이상하게도 자꾸 지분거렸다. 특히나 허벅다리를 더듬는 더러운 손길이 지독했다.

혹여 양인이 정말 맞기는 한 걸까? 양인은 무릇 제 새끼를 밴 음인을 귀하게 돌보는데…… 설마?

[네놈 새끼인 줄은 아느냐?]

고개만 번쩍 들어 뒤로 돌렸다. 그래도 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놈의 얼굴이 시야 가득 쏟아졌다. 고개를 뒤로 젖히려던 것이 도리어 턱을 내미는 형국이 되었다.

쿵.

하필이면…… 턱이 놈의 주둥이를 찧었다. 뜻하지 않은 참사에 얼마나 놀랐는지 눈이 벌어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그와 반대로 간이 모래알만큼 오그라들었다.

도깨비 눈에 불길이 확 치솟았다. 뒤이어 느긋이 누워 있던 놈이 광대한 상체를 들었다.

“흣.”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손찌검이 떨어질까 봐서 전신을 굳히고 오들오들 떨었다.

실제로 커다란 손이 움직이는 기척이 났다.

머리? 얼굴? 설마 배는 아니겠지?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분홍이는 전신을 옹송그려 배를 감싸면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을 되뇌었다.

“헤아…… 헤아…… 나…… 요오전…… 아기…… 조아…… 헤아.”

그악스러운 손이 턱에 닿았다. 얼굴인가. 차라리 얼굴이 낫다. 머리를 맞으면 너무나도 비참하지만 그래도 배보다는…… 낫다. 놈이 때릴 곳을 가늠하는지 턱을 들었다. 눈을 꼭 감고 제발 한 대로 끝나길 빌었다.

“후우.”

놈이 느린 한숨을 쉬었다. 커튼이 쳐져 어두운 침상 위로 더 깊은 어둠이 졌다. 이윽고 턱에 닿은 것은 불이 번쩍 튀는 손찌검 아닌 뜨거운 숨결이었다.

……으응?

* * *

요정과 몸을 겹치지 않은 지 벌써 반년 가까이 되었다. 시간이 정염을 사라지게 할 줄 알았고, 실제로 거의 성공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입술이 조금 부딪힌 것만으로도 욕망의 불길이 확 번졌다.

카론은 잘게 떠는 턱을 슬쩍 깨물었다가 곧장 입술을 더욱 깊이 겹쳤다.

쪽. 초옵. 춥.

오랜만에 맛보는 요정의 입술은 여전히 달콤했다. 아니 전보다 더 달아졌다.

“흐…… 응.”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내어주던 요정이 낮은 비음을 흘렸다. 사타구니가 뻐근해졌다.

임신한 요정과 당장 그럴 수 없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적어도 믿을 만한 의사가 믿을 만한 얘기를 늘어놓기 전까지는, 키스와 애무가 카론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실크로 감싼 부드러운 살결을 쓸었다. 전에는 아둔한 모양의 드레스만 하나 걸쳐서 옷자락 아래는 바로 맨살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귀엽게도 속옷이 있었다.

엉덩이에 착 달라붙은 레이스가 손가락에 걸렸다. 금방 벗겨 버리든 찢어 버리든 할 수 있지만 그러는 대신 레이스 언저리를 지분거렸다.

“흐읏.”

눈을 감은 요정의 숨결이 다소 짙어졌다. 입술을 떼자 젖은 한숨이 포옥 샜다. 반쯤 뜬 눈이 카론의 기색을 불안하게 살폈다. 어느새 단단한 어깨를 짚은 흰 손에 슬쩍 힘이 들어갔다. 손은 어깨를 슬며시 밀었는데 거부의 느낌은 아니었다.

“임신한 사람을 상대로 세울 만큼 급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

사실은 급했다. 그것도 매우. 하지만 참을 수 있고 참아야 했다. 요정이 겉보기와 달리 고집스럽고 성질을 부릴 줄도 아는 데다가 어디로 튈지 모르니…… 건강하게 아이를 낳을 때까진 몰아붙이는 대신 되도록 자상하게 대하는 편이 좋았다.

키스로 인해 살짝 부푼 입술을 잘근 씹었다.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다리를 더듬던 손을 위로 뻗었다. 낮은 둔덕을 이룬 복부를 천천히 마사지하다가 갈빗대를 건드렸다. 부드러운 윗배가 훅 꺼졌다가 도로 솟아올랐다. 팔딱거리는 명치를 도닥이면서 더욱 위로 올라갔다. 매끈한 살점 위로 돋아난 도톰한 유실이 손가락 틈에 걸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점을 건드리자 요정이 고개를 틀었다.

“흣.”

“아가르타.”

“……헤아…… 시러.”

자신을 거역하는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기는커녕 도리어 즐거움만 배가 되었다.

‘싫다는 말이 이렇게 기꺼울 일인가.’

어쩌다가 이런 걸 줍게 되었지? 정말로 신기한 우연이었다. 물렁해서 재미없지도 않고, 포악하여 짜증만 유발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고집이 있고 때로는 귀여운 짓을 할 줄도 안다.

요정이 낳은 제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조금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상상했다.

제 모습과 완전히 같지는 않으리라. 머리카락은 아무래도 흑발이겠고…… 안구도 아마 그럴 것이다. 여자애일까, 남자애일까. 어느 쪽이든 마녀를, 그리고 마녀와 상당히 비슷한 자신보다는 요정을 닮는 쪽이 나을 터.

미칠 것 같지만 여기서 요정을 건드리는 인간 말종 짓은 참았다. 그래서야 제가 직접 목을 벤 쓰레기 일족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거기다 이 방은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하고 전투에서 적을 제압하듯 요정을 두들겨 팼던 곳이었다. 요정도 모르진 않을 터. 굳이 나쁜 기억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

요정은, 마녀와 카론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고생했다. 그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마녀도 원래는 멀쩡한 사람이었다가 서궁에 감금을 당한 이후로 마녀로 돌변했다. 서궁, 감금, 난폭한 관계, 임신. 일부러 작정한 바는 아니었어도, 많은 조건이 겹친 이상 요정도 마녀처럼 변할지 모른다. 혹여 아이도 자신처럼 저주받은 채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

절대로 원하는 바가 아니다. 제 유년기를 떠올리면 생각만 해도 역겹고 혐오스러워 치가 떨린다.

‘저주는 반드시 내 대에서 끊는다.’

그러기 위해선 불쑥불쑥 치솟는 난폭함을 죽이고 욕망을 조절해야만 한다. 적어도 성욕은 요정과 아이의 안전이 보장된 후에나 해소 가능했다.

“쉬…… 불안해할 필요 없어.”

품에서 바들거리는 요정의 몸을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의도가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대신 매끈한 머리카락이 흐르는 뒤통수를 끌어당겨 제 목 아래 두었다.

작은 날숨이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요정은 긴장한 듯 늘씬한 몸을 뒤척였다.

“아가르타. 잠들어도 괜찮아. 아무도 널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마녀의 저주받은 사생아조차도 말이지.”

낯간지러운 소리가 요정 앞에서는 쉽게 나왔다. 이 연약한 존재는 잠잠했던 욕정을 불러일으키고 딱딱한 긴장을 와해시키고 곧 평생 취해 본 일이 없는 다감한 태도를 끌어낸다.

요정의 신비한 힘은 은은하면서도 강력하게 카론을 바꾸고 있었다. 가장 의외는 특별히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헤아.”

헤아라 부른 요정은 뒤이어 요정어로 뭐라고 속닥였다. 캐즈은자? 캐에저어자? 뭔지 모르겠지만. 느낌상 자신을 부르는 칭호 같았다.

무슨 뜻일까? 요정은 자신을 무엇으로 부르고 있을까? 기사? 황제? 군주? 아니면 악마일지도. 그간 벌벌 떨던 모습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좋은 뜻보다는 나쁜 뜻일 확률이 높긴 했다.

그만 쉬라고 했으나 궁금함이 앞섰다. 목 언저리에 묻었던 얼굴 아래 검지를 대고 살짝 들어 올렸다.

“캐저어어자가 무슨 뜻이지?”

고개가 스르륵 뒤로 젖혀지면서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찡그린 이마에 은은한 윤기가 돌았다. 뺨이 은근히 달아올랐고 애원하던 입술은 살짝 벌어진 채 깊은숨을 내쉬었다.

요정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다음에 물어보지.”

손등으로 뺨을 가볍게 쓸어내린 후 다시 요정을 감쌌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동침의 밤은 점점 깊어졌다. 피로가 쌓였으나 카론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신기함과 기묘함, 뿌듯함과 어색함이 뒤섞였다. 전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썩 좋았다. 타인의 존재를 달갑게 여길 날이 올 줄은 정말로 몰랐다.

매끈한 정수리에 코를 박고 살내를 맡았다. 나른하게 늘어진 팔의 굴곡을 살살 만지다가 등을 감쌌다. 요정의 강력한 마력이 점점 카론도 수마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건 마치…… 꿈 같군.’

완전히 잠이 빠져들기 직전 카론의 단상은 거기에서 머물렀다.

요정이 자신에게 보여 주는 달콤한 꿈.

언젠간 누군가 빼앗아 갈지도 모르는 꿈.

* * *

간밤에 저를 지분거리던 개종자의 손길을 곱씹으며 못 배워도 너무 못 배웠다 씩씩대고 있는 찰나, 아주 쾌활한 사람이 들이닥쳤다.

“안녕하세요, 요정님.”

다소 풍채가 좋은 이국 여성은 상선과 비슷한 연배였다. 마그네와 다른 시녀들보다 조금 더 어두운 빛깔의 드레스를 입었는데, 웃음이 워낙 밝아 번쩍번쩍 빛이 났다.

“저는 올리아 헤이스턴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요정님을 돌볼 의사 겸 산파지요.”

자기를 오리아라고 소개하고 뒤에 뭐라고 설명을 덧붙였으나 제대로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그저 그렌과 마그네만 봤다. 개종자는 오지 않았다. 잠시라도 편히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오리아는 신기하고 두꺼운 가죽 가방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가방을 열자 그 안에선 신기한 도구가 나왔다. 갈색 작은 병도 여럿이고 바늘처럼 보이는 긴 침에는 작은 유리관이 달려 있기도 했다. 막대 사발과 막대도 보였고 무엇보다 쓴 약초 냄새가 진동했다. 반갑게도 의원이었다.

[이리 와 주어서 참으로 고맙소.]

비록 음양인은 모를 테지만 사람의 생김새는 비슷하니 내장 구성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 개종자만 덜 배웠을 뿐 이국의 문명은 크게 발달하였으니 의술도 마찬가지로 훌륭하리라 짐작했다. 안심했기에 절로 웃음이 났다.

“나, 요오전, 오리아, 좋아.”

기쁨으로 맞이하자 오리아 또한 방긋 웃었다. 가방에서 기이한 물건을 꺼냈는데 말랑하고 긴 관이 두 개 나 있는 중심에 동그란 동전이 하나 붙었다. 관 끝을 귀에 끼운 오리아는 동전을 쥐고 다가왔다.

“우선 요정님과 아이가 건강한지 알아볼까요?”

마그네가 의자를 뺐다. 시키는 대로 순순히 앉았다. 그러자 오리아가 동전을 배, 가슴, 등에도 차례차례 댔다. 이국식 진맥이었다. 우스꽝스러운 기구를 찬 오리아가 하도 진지한지라 저도 덩달아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으나, 어쩐지 장난 같고 간지러웠다.

등과 배를 중심으로 한참 진맥을 하던 오리아가 이윽고 귀에 낀 것을 뺐다. 직후에는 양 엄지로 분홍이 눈 밑을 까집고 진지하게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 심장 소리가 잘 들립니다. 산모 아니 산부인가? 어쨌든 요정님도 건강하고 배 속 태아에 아직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아아. 정말로 다행입니다.”

마그네가 뛸 듯이 기뻐했다. 구엔의 표정도 풀렸다. 눈치껏 오리아가 좋은 얘기를 한 것을 눈치챘다. 가방에 진맥 기구를 도로 집어넣은 오리아는 곧 병 두 개를 꺼냈다. 이리저리 설명했다.

분홍이가 받아 들긴 했으나 오리아가 하는 말을 기억한 사람은 마그네였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작은 노트를 꺼내 뭐라고 받아 적었다.

“큰 병은 없어 보이나 많이 말랐어요. 부드러운 음식을 중심으로 양껏 드시고 잠을 충분히 자야 합니다. 혈색이 좋지 않아요. 붉은 고기를 많이 드십시오.”

오리아가 말하는 족족 마그네가 빠르게 필기했다.

“당분간 편안히 지내시도록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합니다. 임신 과정이 보통 여자와 같다는 가정하에 아직 안정기에 접어들기 전이에요.”

가방을 닫은 오리아가 갑자기 몸을 문 쪽으로 돌렸다.

“제 말씀 잘 들으셨지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오리아를 따라서 시선을 옮겼다. 언제 나타났는지 개종자가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서 있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팔짱을 단단히 꼈다.

“헛.”

저절로 어깨가 움츠려지고 손발의 열기가 달아났다. 개종자가 나타나면 저절로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속이 살짝 울렁거리기도 했다.

얻어맞을 두려움이 큰데 저놈은 그를 능가하는 분통이 터지도록 갖은 협잡에 더러운 짓은 골라서 하니…… 저놈이 나타나면 잠시도 안도할 수가 없다.

“모두 나가.”

짧은 명령에 마그네와 그렌이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달리 올리아는 가방을 들고 느긋하게 방문을 나섰다.

“폐하는 제가 나중에 따로 뵙겠으나, 미리 말씀드리자면 요정님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나가라 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쓸 방부터 정해야겠어요. 요정님 방 근처가 좋을 것 같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정할게요.”

올리아는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하고 나가 버렸다. 개종자의 안면이 급격히 굳었다. 아니 일그러졌다. 분홍이는 얼어붙은 공기에 숨을 죽었다.

카론은 의원의 무례에 대해 딱히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지적하지 못했다.

‘하필이면 올리아라니.’

무력으로는 평범한 여성보다 못한 그녀는 카론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극소수의 인간 중 하나였다. 아니 유일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마녀와 어린 시절부터 알던 올리아는 그렌의 아내였다. 죽은 마녀의 썩은 시신 옆에서 시체 독이 올라 죽어 가던 사생아에게 제일 먼저 손을 내밀었으며 카론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유스키아라는 중간 이름을 굳이 강요해 가며.

의학에도, 약초학에도 조예가 깊고 카론이 제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을 때 전담 치료한 사람이니 가장 적합하면서도, 한편으로 상당한 부담이었다.

다른 의사라도 의학적 견해는 진지하게 고려하겠으나 치료 방식이나 진단 방식에 있어서 최종적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 당연했다. 요정은 제 소유이며 요정이 가진 아이도 제 아이였다. 하지만 올리아를 상대로는 제 결정권의 무게가 약해진다. 때로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황제의 권위를 따지기 전에 제 것에 대한 결정권이 남에게 있는 건 별로였다. 불쾌했다.

불쾌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준비가 이루어지는 즉시, 요정은 라테시온의 황후가 될 예정이다. 황후, 즉 황제의 아내이며 이 경우 황제는 카론 자신이다. 결과적으로 제 아내가 된다는 얘긴데.

“왜 다른 사람과 더 친근하게 지내는 거지?”

얼핏 들으면 대단한 유치한 발화였다. 그러나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했다.

그렌과 올리아는 수도사와 수녀 시절에도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나 파계하고 결혼한 후에는 정말로 둘도 없는 사이였다. 그렌은 진지한 결정은 모두 올리아와 상의했으며, 올리아도 고민이 있으면 그렌과 가장 먼저 의논했다.

가까이 있는 다른 부부인 아서와 베로니카도 사정은 비슷했다. 비록 그렌과 올리아처럼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관계는 아니라도 무슨 일이 있을 때 무조건 상대의 편을 들고 봤다. 그게 옳든, 아니든 둘은 무조건 함께 헤쳐 나간다는 식이었다.

다른 가정의 부부가 어떤 식으로 서로를 배신하고 속이고 속는지는 알 바가 아니다. 적어도 카론이 가까이에서 보고 들은, 이상적으로 여기는 부부 사이는 믿고 의지하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결혼 후 자신과 요정도 그렇게 되어야 마땅했다.

물론 요정은 요정이고 말도 쉬이 통하지 않거니와 서로에 대해 모르는 점이 산더미 같아 쉽지 않은 길이지만.

사정을 아는 사람은 비참하게 죽으리라 점쳤던 카론이 이렇게 장성하여 황제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러니 요정과의 앞날도 모르는 일이다.

“네 배에 든 건 나의 아이고, 너 또한 내 약혼자다.”

알아듣든 아니든 명확하게 밝혔다. 그렇다고 한들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요정을 상대로 진지한 얘기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신에 개인적인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 좋았다. 가장 기본적인 신상부터 천천히 알아가면서 말이었다.

요정은 다소 굳은 표정을 지었다가 시선을 사선으로 내렸다. 눈을 피하는 건 부부 사이에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카론은 의자에 앉아 있는 요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고개를 들어. 항상 나를 봐.”

누군가 자신을 직시할 자격이 있다면 그건 황후뿐이다. 손으로 상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까만 밤하늘빛 눈동자가 슬쩍 자신을 향했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아가르타.”

조용히 타이르자 눈동자가 천천히 자신을 향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뭔가 통하자 기분이 묘했다.

“내 이름은?”

“……?”

“내 이름을 말해 봐.”

“……헤아?”

질문을 이해하기보다는 그저 영문을 몰라 저를 부르는 것에 가까웠다.

“폐하가 아니다.”

“어음…… 으음.”

“어제 노트에 적어 줬잖아. 연습하지 않았나?”

잠시 골몰하던 요정이 노트라는 말에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카아로 유우키아 라테에숀…… 헤아?”

발음은 여전히 어설프지만 정확하게 기억했다. 입술이 슬며시 호를 그렸다.

“카론이면 충분해. 카론.”

“카아로?”

“그래, 난 카론이다. 넌?”

손가락으로 이마를 콕 찍자 요정은 미간을 찡그렸다. 금색이 번진 까만 잉크 같은 눈에 불만이 서렸다가 금방 사라졌다.

“요오전, 아갈타 라테에숀.”

“맞아. 넌 아가르타 라테시온이다.”

앉은 요정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저항 없이 일어선 그를 노트와 펜이 있는 탁자로 이끌었다. 공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써 봐.”

카론의 눈치를 거듭 살피던 그는 공책을 폈다. 펜을 들고 잉크 뚜껑을 열어 두어 번 찍는 모습이, 고작 하루 만에 펜대가 제법 익숙해 보였다. 배울 의지가 있는 건 좋은 징조다.

삐뚤삐뚤한 글씨는 쓰기보다는 그리기에 가까웠다. 그래도 알아보는 데에는 지장이 전혀 없었다. 말도 모르는 요정이 하룻밤 사이에 익힌 글씨치고는 안정감이 있었다.

“이만하면 결혼 서약서에 쓸 수 있겠군.”

임신 사실을 안 이후로 요정은 전에 없이 흡족하게 행동했다.

이렇게 얌전하게만 군다면 태어난 아이 근처에 요정을 두어도 괜찮을 수도 있다.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지만. 현재로선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

‘개종자 놈이 왜 자꾸 나를 보며 웃는 것일까. 되도록 빨리 가 버렸으면 좋겠는데.’

분홍이는 불편함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느라 기가 다 빠졌다.

개종자는 도대체 저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 반, 뭐라 하든 듣기 싫은 마음 반이었다. 이럴 때는 말이 통하지 않아 시도할 방도가 없는 점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방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서성이며 이것저것 살피는 개종자를 두려운 시선으로 지켜봤다. 괜한 트집을 잡아 마그네에게 경을 칠까 걱정되기도 하고 갑자기 옷을 벗기려 들까 봐서 한기가 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종자의 행동에 익숙해지기는커녕 불안은 점점 쌓이기만 했다. 졸리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또록또록한 정신은 개종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에 넣었다. 긴장이 지나쳤는지 식은땀이 조금 흐르고 옷자락을 꾹 여며 쥔 손과 어깨가 절로 떨렸다.

그걸 본 개종자가 혀를 쯧쯧 차더니 대뜸 또 제 덧옷을 벗었다. 머리 위로 이불처럼 씌우더니 밖에 있을 마그네를 불렀다. 놈의 체취가 듬뿍 스며든 옷을 당장 집어 던지고 싶으나, 그걸 쓰고 있으면 도깨비 눈을 피해 표정을 편히 풀 수 있었다.

마그네가 바삐 오가는 기척이 들리더니 이내 작은 화로가 들어왔다.

[추워서 떤 게 아니라 네놈의 별난 행동이 역겨워서 떤 게다.]

고운 말씨로 욕을 했다. 그에 눈을 마주친 개종자는 흔쾌한 웃음을 지었다.

등신 같은 놈.

* * *

올리아는 하루에 한 번 진맥하러 왔다. 지금껏 나쁜 표정을 지은 일은 없었다. 배가 불러올수록 분홍이는 올리아가 좋다며 웃을 때 크게 안도했다.

좋은 방에 좋은 음식과 따뜻한 옷. 말 공부며 의원의 진맥까지. 분홍이가 바라던 것이 하나씩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영 불안했다.

개종자라도 사람 형상을 한 이상 제 아이를 보함이 당연했다. 좋은 처우는 모두 건강한 아이를 순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계속 찜찜한 것이, 뭔가 자신이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당장 닥친 일만 생각하자. 장래를 떠올리지 말자.’

불안과 영문 모를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분홍이는 그렇게 되뇌었다.

밤마다 실컷 지분거리는 개종자가 낮으로도 가끔 불쑥 나타나 정신을 빼놓을 때 말고는 주로 말을 배우며 시간을 보냈다. 첫 공책은 금방 다 썼고 새로 받은 공책도 벌써 반을 썼다.

말을 배우고 이국 글씨 연습을 하고 가끔 이유 없이 나타나 진저리치게 만드는 개종자를 상대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오늘은 날씨가 좋습니다, 요정님.”

제법 쌀쌀해진 바깥을 산책했다. 냉궁보다 훨씬 크고 여러 방이 딸렸으나 안에만 있어서 답답했던 것이다. 나가자 할 때마다 마그네는 개종자를 대며 고개를 저었다.

답답함을 달래는 방법은 큰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것이 다였다. 계단을 올라와 들어온 방이라 풍경이 아래로 펼쳐졌다. 자연스러운 조화를 우선하는 고향 신국의 정경과 달리 이국은 칼로 잰 듯 반듯한 길을 내고 나무를 줄을 맞춰 심었다. 그 덕에 시야는 탁 트여 멀리까지 보였다.

노랗고 하얀 돌을 깐 길 중간에는 물이 뿜어져 나오는 조각이 있고 둘레로 걷기 좋은 길이 나 있었다. 한참 끝에는 대문이 보였는데 그 너머 멀리 크고 작은 집들도 있었다.

‘이곳에 올 적에 대로를 지났지. 이국 사람이 많았는데.’

이국은 무척 큰 것 같으니 어딘가 신국을 아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포기하고 아이를 기르며 살기로 마음먹었으면서도 막상 먼 하늘을 보니 미약한 희망을 도무지 버릴 수 없었다. 살기는 여기서 살아도 고향 소식만이라도 한 줄 듣고 싶었다.

새의 다리에 옷감을 묶어 날려 보내는 일도 무위로 돌아갔으니, 이제 어떻게 밖으로 소식을 알아봐야 할지 막막했다.

허한 마음을 잡고 밖을 내다보자 마그네가 따뜻한 차를 가져왔다. 진한 향이 나는 붉은 차는 고향에서 마시던 차와 영 달라서 입에 맞지 않았다. 임신한 후로는 다른 차를 내왔는데 달달한 향이 썩 괜찮았다.

“애플티입니다.”

마그네는 처음 접하는 것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나, 애플티 좋아요.”

항시 말을 배우기를 우선하다 보니 짧은 기간 안에 제법 그럴싸하게 말을 하게 되었다. 짧은 말은 어느 정도 알아듣기도 했다.

마그네는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자기 몫의 차를 들었다. 원래는 가만히 지켜보며 시중만 들었는데 분홍이가 같이 들자고 청했다. 같이 차를 마시면서 마그네는 때때로 분홍이가 떠올리는 새로운 단어에 대한 설명을 경청하고 최대한 똑바로 알려 주려 애썼다. 마그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쓸쓸한 시간을 어찌 견뎠을지. 따뜻한 찻잔으로 괜히 시린 손끝을 녹였다.

비바람이라도 몰아치지 않으면 창밖 풍경은 늘 비슷했다. 가끔 궁인이 오가는 일을 빼면 그림 같았다. 하늘색만 시시각각 바뀔 뿐.

오늘은 웬일로 사람이 나타났다. 두 명에 커다란 말도 한 마리 있었다. 사람과 말, 모두 분홍이가 익히 아는 모습이었다.

“폐하께서 또 승마를 즐기셨나 봅니다.”

“승마?”

“말을 타는 것이요. 이렇게.”

찻잔을 놓은 마그네가 고삐를 쥐고 채찍을 휘두르는 흉내를 냈다. 무슨 뜻인 줄 깨달은 분홍이는 속으로 승마를 두 번 곱씹었다.

승마하러 나간 개종자는 우람한 군마를 타는 대신 고삐를 쥐고 걸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올리아였다.

성품이 좋은 의원 올리아는 반가우나 개종자는 모습만으로도 절로 메스꺼운 불안을 몰고 왔다.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보려고 해도 늘 같은 풍경만 보다 보니 절로 눈이 갔다.

분홍이보다 키가 작아 한참 내려다보아야 하는 올리아를 내려다보는 개종자는 조소를 짓거나 희롱하지 않았다. 태도가 멀끔하고 시선이 단정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분홍이에게까지 진지함이 전해졌다.

‘다른 사람에게는 잘도 인간 행세를 하는구나.’

허투루 황제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니라는 양 저러는 모습에 절로 배알이 뒤틀렸다.

되짚어 보니 개종자가 상선이나 궁인들에게 특별히 잔혹하게 구는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다. 매서운 눈길로 험악하게 목청을 올리더라도 함부로 손찌검하거나 세간을 박살 낸 적이 없었다.

‘흉악하고 미천한 습성은 내게만 드러내는 모양이구나.’

절로 분하고 원통했다.

자신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기로서니 그렇게 모질게 핍박한단 말인가. 날붙이를 들고 덤빈 적이 있긴 해도…… 그럼 순순히 겁탈을 당해야 했단 소리인가.

‘천하의 막돼먹은…… 벼락 맞을…… 염라대왕도 마다할…… 똥통에 빠져 죽을…… 짐승만도 못한…… 개종자 놈.’

아는 욕이란 욕은 다 주워섬겼다. 이런 악심을 품는 일도 처음이었다. 비록 태아와 함께 살아보고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작심하였으나 풀리지 못하고 속에 들어앉은 응어리는 날이 가면 갈수록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어느새 손이 아랫배로 갔다. 심성이 뒤틀린 때마다 배를 쓸곤 했다. 근래에 생긴 버릇이었다.

‘너는…… 네 못난 아비처럼 되지 말아라.’

자고로 씨도둑은 못 한다 했다. 태아가 저놈의 흉측한 습성을 조금이라도 멀리하여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온 정신을 태교에 쏟아야 했다. 옳은 것만 보고 바른 것만 들으며 의로운 생각만 해도 모자랄 것을.

작은 평온이라도 얻으려 할 때마다 개종자가 불쑥 나타나 심성을 어지럽히니 영 쉽지 않았다.

제 속내를 알아챈 마그네가 바람이 차다며 창을 닫았다. 뒤이어 부랴부랴 다른 소일거리를 가져왔다.

글씨가 제법 있는 서책, 혹은 유리로 만든 구슬 따위를 들고 왔다. 서책은 아이용이라 내용이 영 유치했다. 유리구슬은 예뻐도 어린아이 장난감에 불과했다. 이국의 풍습과 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어도 아직은 말을 다 깨치지 못했으니 한계가 있어 답답했다.

어디에도 선뜻 손을 못 대고 있는 사이 밖에서 기척이 크게 울렸다. 절로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다른 궁인은 모두 허락을 청한 후에 마그네의 대답을 듣고 들어왔다. 허락을 청하기도 전에 문을 당당히 열고 들어오는 자는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아가르타.”

멋대로 저를 그리 부른 작자는 서책과 구슬을 보더니 살짝 코웃음을 쳤다. 조롱까지는 아니라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하여 절로 귀에 열이 올랐다.

‘고향에서는 학문도 깊게 배웠는데…… 감히 추잡스러운 놈이 괄시하다니.’

반드시 말을 완전히 깨우쳐 네놈의 오만한 코를 단단히 눌러 주리라. 속으로 다짐하며 놈을 노려봤다. 맞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움과 더러운 짓거리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이 있어도 이젠 제법 눈에 힘을 줄 수 있게 되었다. 태아를 위해 힘을 내는 사이 놈을 향한 악도 덩달아 커졌다.

“괜찮으면 같이 산책하러 가지.”

노기를 담아 노려보는데도 놈은 바늘에 찔린 척도 없이 무심했다. 그저 도깨비 눈으로 분홍이를 똑바로 응시하며 즐거운 듯 마그네에게 손짓했다.

마그네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결국은 개종자의 종복이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코트라고 부르는 이국식 두루마기를 내어왔다. 얇은 비단신 대신에 바닥이 탄탄하고 속이 폭신한 가죽신으로 갈아 신자 개종자는 앞서서 분홍이를 이끌었다.

싫어도 가자는 걸 싫다 하기 어려웠다. 속에 천불이 절절 끓어도 오랜만의 나들이를 마다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단둘이서 나가는가 싶어 뒤를 슬쩍 돌아보자 벌써 코트를 챙겨 입은 마그네가 서너 발짝 뒤를 따랐다. 그나마 조금 안심되었다.

밖으로 나가는 동안 형형색색으로 꾸민 이국식 궁궐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으나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다른 쪽에 눈길을 주려고만 하면 개종자가 기민하게 시선을 그쪽으로 던졌다.

사소한 트집도 잡히기 싫어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개종자는 공연히 분홍이의 팔을 잡으며 굳이 제 곁에 세웠다. 일부러 발걸음을 더 늦추기도 했다.

‘장대 같은 다리를 가지고서 갑자기 왜 이러는 게야.’

빨리 한 바퀴 휘휘 돌고 빨리 들어오고 싶었는데. 개종자는 저를 괴롭히려고 태어나기라도 했는지 온갖 사소한 일까지 사사건건 방해했다.

붉은 천을 깐 돌계단을 맞이했을 때는 어처구니없게도 손도 내밀었다.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모지리 취급인가 하여 놈을 빤히 봤다. 양손을 밑으로 내려 길게 늘어진 코트 자락을 살짝 잡고 한 발짝 내디디려는데 놈이 목청을 깔았다.

“아가르타. 손을.”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장갑도 끼지 않았다. 손을 잡을 이유가 무언지 생각해 봐도 떠오른 것이 없었다. 괜히 다정한 척하는 낯짝이 참으로 뻔뻔하여 침이라도 뱉고 싶었으나…… 그리하였다가 놈의 성질에 떠밀려 긴 계단을 데굴데굴 구르는 참변이 발생할 수도 있다. 태아를 지키려면 치미는 역겨움도 참을 도리밖엔 없었다.

아랫것이다. 아랫것이다. 머슴 같은 아랫것의 손이다.

속으로 그리 생각하면 군데군데 딱딱하게 굳은살 박인 거친 손에 제 손을 얹었다.

정수리에 떨어지는 능글맞은 눈빛이 싫었다. 다음부터는 챙이 넓은 모자라도 하나 구해다 써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계단을 다 내려왔다. 당연히 손을 놓을 줄 알았는데 개종자가 어째 아귀에 힘을 주기만 했다.

“가자.”

아니 손을 왜 잡나? 아무리 배를 맞추고 애까지 만든 사이라도 공공연히 친분을 과시할 사이는 아니었다. 제게는 천하의 몹쓸 망나니에 불과하나 개종자는 일국의 군왕인 터.

거대한 궁 창가에 서면 누구나 볼 수 있는 탁 트인 곳에서 냉궁에서 갓 나온 죄인과 손을 잡고 거닐다니. 군왕의 체면을 도대체 무엇이라 여기는지 궁금하였다.

보아도, 보아도 불가해한 놈의 낯짝을 빤히 응시하자 놈이 싱긋 웃었다.

“아이를 가지더니 고집이 많이 꺾였어. 상냥하게 대한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속속들이 알아듣지 못해도 느낌만으로도 영 이상한 말을 줄줄 늘어놓더니 놈이 팔로 분홍이의 허리를 휘감았다. 다른 손으론 턱을 잡더니 이내 입을 쪽 맞추었다.

충격으로 인해 홉뜬 눈알에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으앗!”

젖 먹던 힘이 번쩍 솟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개종자를 힘껏 밀어 버리곤 부리나케 궁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수시로 저를 겁간하고 욕보인 망나니가! 이 돌로 쳐 죽일 놈이! 사방이 열린 곳에서 이…… 입을 맞추다니!

아이를 위해 갖은 고초를 없던 일로 묻어 두려 했는데 어찌 끝도 없이 몰염치할 수가 있는가. 물경 사람으로 태어나 낯짝을 들고 있다면 이럴 순 없는 노릇이다.

이건 개종자가 아니라 지금은 생김새도 가물거리는 태손 마마께서 하시어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코트 소매로 입을 벅벅 닦았다. 너무 질겁한 나머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아가르타!”

망나니 주제에 다리만 훌쩍 긴 놈이 성큼성큼 쫓아와 기어이 팔에 손을 걸었다. 홱 잡아 돌리는 통에 풍성한 옷자락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갑자기 왜 그러지?”

짐작에 이러는 연유를 묻는 놈의 안광에 한기가 샜다. 정말로 이유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저를 밀쳐낸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 추궁하는 투였다.

“페아…… 시러.”

시큰거리는 눈가를 일그러뜨리면서 제 속내를 솔직히 털었다. 억센 손으로 따귀를 때리려면 얼마든지 때리라는 심정이었다. 그만큼 접문이 치욕스러웠다.

빛을 받으면 싯누런 금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놈의 눈썹 또한 일그러졌다. 노기가 서린 눈매가 분홍이를 따갑게 노려봤다. 잡힌 팔을 떨치려고 이리저리 비틀었으나 놈은 아귀에 점점 더 힘을 주었다.

그간 가슴을 서늘하게 했던 불안의 정체를 알았다. 감히… 개종자 놈이… 가암히 제 정인 흉내를 내려 들었다. 어디서 그런 버러지만도 못한 발상이 떠올랐는지. 그간 아이를 생각하여 꾹꾹 참았던 역겨움이 일시에 폭발했다.

“시러, 시러어. 페아, 시러!”

몸부림을 쳤다. 어깨가 빠질 듯이 관절을 비틀어 잡힌 팔을 내뱉더니 놈은 곧이어 다른 팔을 잡았다. 발길질도 하고 싶었으나 옷자락 때문에 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경기하는 아이처럼 발광했다.

“시러! 시러어어! 페아 시러어어어!”

모자란 오랑캐 말로는 제 서러움과 울분을 다 토할 수 없었다. 짠물을 머금은 눈을 똑바로 뜨며 격분했다.

[이 나쁜 놈아! 네가 감히 거짓된 다정을 꾸며내려 드느냐? 네 고약한 악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거늘! 어디 감히! 후안무치도 정도가 있다! 이 벼락 맞을 개종자야!]

악을 쓰며 놈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눈이 한번 돌아가니 아이고 뭐고 다 소용없었다.

[오물 덩어리에 빠진 몸으로나마 살아보려고 피눈물을 삼키며 애를 쓰는 마당에 감히 네놈이 어찌 그럼 참담한 욕심을 품는단 말이냐! 네 주제를 알아라! 네가 강제로 겁간하고 원치도 않은 씨앗을 뿌려도! 천 번, 만 번 그리해도 어딜 정인 흉내를 내! 죽었다가 깨어나도 네놈은 내 정인은 되지 못한다! 차라리 이대로 죽고 말지! 어딜 감히! 가당치도 않은 꿈을 꿔어어!]

거의 비명에 가까운 발악이었다. 핏발을 세우며 갖은 욕설을 퍼부어도 성에 차지 않아 이번에는 주먹질을 마구 해댔다.

[개종자 놈아! 죽어라! 죽어!]

이를 꽉 깨물고 놈의 가슴팍을 후려 팼다. 꿈쩍도 하지 않아 숫제 돌덩어리 같았다. 그래도 손목이 시큰거리도록 패려니 놈이 도로 손목을 낚아챘다.

“아가르타!”

[누가 아갈타냐! 누가! 나는 신국 재상 명판승의 넷째 아들 명채운이니라! 네놈이 감히 나를 무어라고 불러! 닥쳐라, 이놈!]

발광하자 개종자 놈의 안색이 점점 냉랭해지고 눈길이 험악해졌다. 이성을 잃은 분홍이는 그것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아 미친 사람처럼 발광했다.

손목을 잡은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피가 막혔는지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못해 뼈가 부러지려 들었다. 시퍼런 도깨비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마그네.”

서늘하게 가라앉은 놈의 음성에 귀기가 서렸다.

마그네가 황급히 다가와 팔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는 분홍이를 붙들었다.

[놔라! 놔!]

“요정님.”

다급한 음성으로 요정을 말리면서 마그네는 억지로 둘 사이를 떼어놓았다. 두세 걸음 뒤로 떠밀리자 잡힐 팔이 팽팽해졌다. 마그네는 카론을 돌아봤다.

“폐하.”

손을 놓아야 요정을 방으로 데려갈 텐데. 황제의 안색은 돌처럼 딱딱했고 눈빛은 칼을 머금은 듯 살기가 넘쳤다. 저절로 간담이 오그라들었다.

황제가 임신한 요정을 때리면 어떻게 하나? 제가 몸을 던져 막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눈을 질끈 감는 찰나 요정이 뒤로 휘청했다.

“요정님!”

발광하던 요정의 안색이 눈처럼 하얬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리면서 뒤로 넘어가는 요정을 황급하게 잡으려 했다. 그러나 강하게 밀치는 힘에 마그네는 옆으로 떠밀려 넘어졌다. 아픔보다 요정이 넘어질 것이 더욱 걱정되어 고개를 홱 돌릴 때 커다란 인영이 저를 막아섰다.

“……!”

어느새 황제가 쓰러지는 요정을 받쳐 들었다. 냉랭한 눈빛엔 어느새 사색이 더해졌다. 떨리는 손이 창백한 뺨에 닿았다.

“아가르타.”

* * *

임신에 관한 책을 다시 훑던 올리아는 노크도 없이 들이닥친 마그네 덕에 막 머금은 차를 뿜을 뻔했다. 무례를 꾸짖으려다가 하얗게 질린 상대의 안색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억…… 헉! 요정님이…… 쓰러지…… 셨…… 헉!”

얼마나 다급하게 달려왔는지 마그네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올리아는 즉시 왕진 가방을 들고 뛰쳐나갔다. 반쯤 뒷면서 “무슨 일이 있었죠?”라고 물었다.

“폐하와 함께 산책 중에…… 크게 발작하시며…….”

카론과 요정. 그리고 발작. 올리아는 어떤지 듣지 않아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부디 요정도, 아이에게도 별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걱정하며 마그네가 가리키는 대로 요정이 머무는 방으로 들이닥쳤다.

정문을 열자마자 카론이 두 팔로 안아 든 요정을 응접실 소파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광경을 발견했다. 당장 달려가 발치에 앉아 가방을 열었다.

“얼마나 되었지?”

다급한 목소리로 대뜸 반말이 나왔으나 카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했다.

“쓰러지자마자 바로 방으로 옮겼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당장 코트부터 벗겨.”

귀를 입과 코 근처에 댔는데 다행히 숨은 제대로 쉬고 있었다. 청진기를 꺼내 귀에 걸면서 질문과 지시를 동시에 내렸다.

“산책 중에 갑자기 화를 내다가 제풀에 쓰러졌다.”

카론이 손을 대려 하기에 올리아는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막았다. 시선을 빠르게 올리자 낭패한 기색의 카론은 손으로 입과 턱을 쓸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사이 마그네가 가까이 다가와 코트 단추를 풀었다.

“손매 단추, 허리띠. 몸을 조이고 있는 건 가리지 말고 다 풀어.”

“네, 올리아 님.”

옷깃을 먼저 푼 올리아는 청진기를 요정의 가슴 깊숙이 넣었다. 심장 소리를 들은 후에는 바로 배에 대어 태아 상태를 살폈다. 눈을 열어 안구를 자세히 들여다본 후에는 손, 그리고 막 마그네가 구두를 벗긴 발을 주물렀다.

다시 가슴과 배에 청진기를 대어본 후에는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이걸 따뜻한 물에 타 와요. 깨끗한 거즈, 찜질용 물주머니도 준비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잠옷도.”

“네!”

마그네가 제 코트도 못 벗고 지시에 따라 밖으로 뛰어갔다. 직급이 낮은 시종에게 필요한 것을 빠르게 지시한 다음 그녀는 옷을 보관하는 방으로 가 부드럽고 도톰한 잠옷을 꺼냈다.

“상태가 어때? 심각한가?”

카론의 질문에 올리아는 대답 대신 다른 소리를 했다.

“침대로 옮겨야겠어.”

지시가 떨어지는 즉시 카론은 소파 아래 무릎을 굽혀 앉았다. 올리아가 시키는 대로 요정의 고개가 뒤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어깨로 받치면서 한 팔로 상체를 단단히 잡았다. 다른 팔을 두 무릎 아래 걸고 천천히 일어섰다.

올리아가 침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침대로 옮겼다. 소파에 놓을 때보다 더욱 조심스럽게 내려놓자 올리아가 두툼한 베개를 두 개 겹쳐 요정의 다리를 받쳤다.

그때 마그네가 잠옷을 가지고 왔다. 응접실로 나가 다른 시종이 들고 온 거즈와 따뜻한 물 주전자, 물주머니를 받아 든 올리아는 요정을 지켜보는 카론을 향해 냉랭하게 명령했다.

“방해되니까 나가 있어.”

“내 요정이야. 무엇을 하든 내 눈앞에서 해.”

올리아는 말없이 침실 문을 가리켰다. 동그란 개암색 눈은 푸른색 안광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올리아 님, 옷을 지금 바로 갈아입힐까요?”

“잠깐만 기다려요. 방해꾼이 나가면 같이 갈아입히도록 하지요.”

대답하면서도 올리아는 계속 카론만 봤다. 그가 나가기 전엔 꿈쩍도 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남다른 체격과 황제라는 권력을 보유한 카론은 키가 작은 중년 여성의 결정을 무시할 수 있다. 단지 그렇게 하면 올리아는 협조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테고 요정의 치료는 그만큼 늦어진다.

어쩔 도리가 없다.

“젠장.”

낮은 욕설과 함께 카론은 침실 밖을 나갔다. 문가에서 지켜보려고 했는데 올리아는 문을 탁 닫아 버렸다.

문까지 닫을 필요가 있느냐고 항의하려다가 다시 참았다. 환자 앞에서 올리아는 철저한 의사였고, 만약 문을 닫아 침실을 격리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장은 지시를 따를 수밖에.

“빌어먹을.”

방금 요정이 누워 있었던 소파에 몸을 던졌다.

털썩.

소파가 감당하지 못하는 긴 다리를 꼬아 겹친 카론은 턱을 괴었다. 검지와 중지로 입술을 슬며시 문지르면서 닫힌 침실 문을 노려봤다.

요정의 주인이자 장차 배우자이며 요정이 가진 아이의 아버지기도 한 카론을 치료 과정에서 배제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만약 이유가 타당하지 못한 경우 올리아를 요정에게서 떼어놓을 의사도 있었다.

개인적인 신뢰성은 다소 떨어져도 의학 지식은 훨씬 뛰어난 의사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올리아가 무슨 소릴 해도, 그렌이 뛰어와서 어떻게 상황을 무마시키려 해도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한참 뒤 마그네가 나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으나 그녀는 카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바삐 걸어가면서 코트를 벗은 그녀는 밖에서 두꺼운 담요를 가지고 다시 침실로 갔다. 올리아는 일부러 노크를 들은 후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

살짝 열린 틈으로 침대가 보였다. 얇은 침대 커튼을 내려서 요정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질 않았고 대신 침대 위에 힘없이 늘어진 팔만 보였다.

문을 닫기 전 올리아는 엄격한 시선으로 카론을 봤다. 고개를 살짝 젓기까지 했다. 문은 도로 닫혔고 카론은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문을 노려봤다. 턱을 괴던 손은 어느새 소파 손잡이를 톡톡 치고 있었다.

초조함과 짜증, 궁금증이 뒤엉켜 더는 못 참겠다 싶을 무렵 카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침실 문이 잠겼으면 발로 차 부술 심산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달깍.

타이밍 좋게 다시 문이 열렸다. 이번에는 마그네가 아닌 올리아가 나왔다.

“요정은?”

“지금은 안정되었어요. 정신도 들었고요.”

정신이 들었다는 말에 바로 침실로 향하는 카론을 올리아가 손을 들어 막아섰다.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실신한 겁니다. 안정이 필요해요.”

“안정이 필요하다고 해도 내가 곁에 가지 못할 이유가 뭐지?”

“카론.”

폐하라는 경칭이 빠졌다. 아까는 급한 상황이라 반말도 그냥 넘어갔으나 이 이상 무례는 봐주기 힘들었다. 눈에 불을 켜고 올리아를 노려봤다.

“……폐하.”

마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것처럼 올리아는 바로 경칭을 붙였다.

“안정을 취해야 하기에 특별히 폐하로부터 격리하는 겁니다.”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명확한 이유를 말해 봐. 설명이 성에 차지 않을 경우, 황제 모욕죄로 감옥에 하루 정도 가두겠다.”

분노와 짜증으로 갈라지는 음성을 듣고도 올리아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산책 중에 이유 없이 발작했다고 했죠. 제가 봐서는 이유가 없는 게 아니라 우리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서 이유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만.”

순간 카론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누구보다 요정을 가까이했으며 깊고 은밀한 곳까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며칠 보지도 못해 놓고 요정을 아는 체하는 꼴이라니. 나보다 요정을 잘 아는 사람은 없어.”

그에 올리아는 풋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올리아 헤이스턴. 네가 감히…….”

“산책 중에!”

심지어 그녀는 카론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일어난 일은 마그네에게 자세히 들었습니다. 같이 걷다가 폐하께서 입맞춤한 직후에 달아났고, 그걸 폐하가 잡는 순간 발작했다고 하더군요.”

“잘 아는군. 산책 중에 갑자기 발작했단 말이야. 소리치고 난동을 피울 이유가 전혀 없었어.”

“정말 없다고 생각해요?”

빙빙 돌려서 되묻는 행태가 짜증 났다. 주먹을 꾹 쥐면서 넌 당장 일주일 감옥행이라고 선언하려는 찰나, 올리아가 짧게 한숨 쉬었다.

“……요정이 발작한 건 폐하 때문입니다.”

듣던 중 완벽한 개소리였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코웃음도 제대로 안 나왔다.

“요정이 발작한 이유가 다름 아닌 나 때문이라고?”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랬다면 밤에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지 않았겠지.”

그러면서 카론은 검지로 목 칼라를 살짝 끌어 내렸다. 요정이 만든 흉터가 아직 희미하게 남았다.

“싫은 건 싫다고 하는 성격이야. 정말로 내가 싫었다면 어제 곁에서 잠든 내 목을 흉기로 찔렀겠지. 요정은 그러지 않았어.”

입술이 저절로 비틀렸다. 올리아의 표정은 특별히 변함이 없었다.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당분간 폐하께서는 요정님을 보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권고가 아니라 의사로서의 처방이에요. 요정은 심하게 충격을 받았어요. 무턱대고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한번 기절하면 그때는 정말로 위험해요.”

“뭐가?”

“유산할지도 모릅니다.”

“유산?”

올리아는 예상치 못한 말을 줄줄 늘어놨다.

유산이라니.

카론은 처음으로 섬뜩한 불길함을 느꼈다.

올리아는 더는 용건이 없다는 듯이 가방을 들었다. 그녀는 유산 언급이 가져온 충격에 가볍게 굳은 카론을 외면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

“산책 전만 해도 괜찮았어.”

뒤늦은 항변을, 올리아는 가차 없이 잘라 버렸다.

“겉으로 멀쩡히 살아 있다고 해서 속까지 멀쩡하다고는 할 수 없죠. 요정은 굉장히 무리하고 있어요.”

무리하고 있다고?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카론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유야 말씀드리지 않아도 폐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요.”

의사의 태도는 덤덤해서 더욱 냉정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어디서 개수작이냐고 멱살을 잡고도 남았다. 그러나 올리아는…… 카론에게 이런 식으로 허튼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골든 피오니의 응접실엔 카론만 남았다. 가끔 마그네가 침실과 밖을 오가면서 눈치를 살폈으나 카론은 내내 무시했다.

이윽고 긴 사색 끝에 카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역시… 그랬군.”

모든 일엔 응당 절차가 필요한 법이건만, 그 사실을 망각했다. 요정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할지도.

벌떡 일어난 그는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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