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2) (7/28)

카론은 무의식적으로 뒤통수를 확인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석궁이 한 세 발 정도 퍽퍽 박히지 않았을까? 놀랍게도 머리는 멀쩡했다. 아찔한 충격은 아무래도 요정, 정확하게는 요정의 배 때문인 것 같다.

“이게…… 무…… 슨?”

손가락 사이로 탄식 같은 한 마디를 뱉었다. 요정은 옷과 배를 부여잡고는 재빠르게 지저귀었다. 성질을 내며 삐룩삐룩 대는 나쁜 버릇을 고쳐야 했건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세상에…… 맙소사.

배가, 배가 불렀다. 살이 찐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기엔 아까 만졌던 등과 손이 여전히 말랐다. 햇빛 아래 드러났던 유두도 옅은 분홍빛보다 약간 더 짙어졌다.

배 속에 뭔가 들었다. 뭐가 들었을지 본능이 즉각적으로 외쳤으나, 이성이 가로막았다.

“아가르타…… 넌 여자가 아니잖아.”

본능이 요정이 보였던 기이한 모습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혼자 수음하다 발각되었을 때. 요정은 몸이 달아서 들러붙었고 그 상태가 무려 사흘간 지속했다. 탈진하여 기절한 요정을 상대로 마지막 절정을 뿜어내던 느낌이…… 지금 생각하니 조금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옷을 벗겨서 분한지 요정은 물기 어린 눈을 뾰족하게 세우곤 야단이었다. 멍하게 바라보자 요정은 같잖게 씩씩대면서 바닥을 훑었다. 작은 나뭇가지를 집어서 든 요정이 카론의 소매를 덥석 잡았다. 먼저 잡은 요정도 놀랍지만 가냘픈 힘에 끌려가는 자신이 더욱 놀라웠다.

풀밭이 아닌 흙바닥을 찾은 요정은 바닥에 대고 무언가 그렸다. 큰 동그라미 안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아래 네 갈래 가지를 그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카론이 부정하며 고개를 젓자, 요정은 큰 동그라미 위로 머리통과 사지를 그렸다. 그것도 모자라 그림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손은 이윽고 배에 닿았다.

“아.”

의미는 명확했다. 요정은…… 어설픈 모양새지만 분명 음경과 음낭이 달린 남자였던 요정이…… 임신했다. 첫 충격이 가시고 나자 숨을 고르기도 전에 두 번째 충격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요정의 배 속에 든 아이는, 분명히 제 아이였다.

누구도 아닌, 카론 유스키아 라테시온의 아이.

화를 내면서도 요정은 물기 어린 눈으로 계속 지저귀었다. 귀가 따갑도록 삐룩삐룩 거리는 모양새가 꼭 탓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함부로 대한 데 관해 사과를 요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카론은 고개를 숙일 이유도, 사과할 이유도 없다. 대신에 임신한 남자 요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맨손을 대려니 뭔가 그래선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이대로 걸리자니 혹여나 뭔가 잘못될까 봐서 걱정스러웠다.

걱정! 걱정이라니!

연타로 내려치는 충격에 카론은 정말로 시야가 아찔했다. 일단 어딘가로 가서 차분히 상황을 따져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요정을 데리고 가서…….

“조용히.”

속으론 황당과 당황의 폭풍이 몰아쳤으나 겉으로는 침착을 유지했다. 다만 약간 성급한 손길로 제 재킷을 벗어 까만 머리 위에 폭 씌웠다.

“어?”

한창 역정을 내던 요정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체구 차이가 커서 그런지 재킷이 코트처럼 허벅지까지 흘렀다. 망토 같은 깃을 여미고 소매를 이용해 둘둘 감았다.

“지나친 빛은 위험해.”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이는지 자신도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그런 말이 멋대로 입을 튀어 나갔다.

왼팔을 중점적으로 이용해 훌쩍 안아 올렸다. 양팔을 사용할 수도 있으나 유사시를 대비하여 오른팔이 자유로운 쪽이 좋다. 왼쪽 팔뚝에 걸터앉은 자세의 요정은 상체를 숙여 어깨에 고개를 댔다. 협조적으로 나와서 다행이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정원이 아니라 아무도 손대지 못할 곳에 넣어 놔야 한다. 당장 생각나는 장소는 하나뿐이었다.

서궁.

성큼성큼 걸어가자 시녀가 황급히 뒤를 따랐다.

황제가 나타나자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바짝 긴장했다. 그놈에겐 요정이 정원으로 들락거리는 일을 제때 보고하지 않은 태만을 추궁해야 마땅했다. 당장 미천한 것들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꾸짖을 사람이 있다.

침대 위에 요정을 내려놓은 카론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당장 그렌을 불러와.”

시종이 부리나케 튀어갔다. 그사이 침상인 줄 알았는지 요정이 버둥거렸다. 시녀가 반사적으로 요정에게 손을 대려고 했다. 버둥대는 마른 다리에 손을 얹은 카론이 건방진 시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헉.”

파랗게 질린 시녀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기척을 느낀 요정도 바로 잠잠해졌다. 그저 숨소리만 색색 났다.

방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 곁에 세우고 앉았다. 인내심이 금방 증발했다. 줄곧 배워 왔던 일반 상식으로는 혼란스러운 사태에 대한 파악이 쉽지 않았다.

“폐하.”

그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구석에 서서 벌벌 떠는 시녀와 화려한 황제의 정복으로 둘둘 말린 채 침대에 놓여 있는 요정, 그리고 셔츠와 조끼 차림인 카론을 재빠르게 훑었다.

“어바인 그렌, 내가 전에 그대에게 내렸던 명령을 기억하나?”

“예. 요정을 살피되, 죽을 지경이 아니면 보고하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죽을 지경이 아니라서 지금까지 숨겼군.”

“무슨 말씀이신지.”

아직도 시치미를 떼는 그를 노려봤다. 카론이 벌떡 일어서자 의자가 휘청거렸다. 말린 재킷 아래로 삐져나온 하얀 다리가 화들짝 경련했다.

제가 감은 소매를 풀었다. 옷을 헤치자 머리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요정이 놀란 눈을 굴렸다. 드레스를 걷어 올리려다 멈췄다. 대신 드레스 허리춤을 뒤로 잡아당겨 배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볼록한 둔덕이 가리켰다.

“이것에 대해 보고할 생각이 전혀 없었단 말이지.”

“아니 배가 왜? 안에 혹이 들었…… 너, 가서 의사를 불러와.”

“닥쳐.”

카론이 외치자 그렌도, 시녀도 얼어붙었다.

“언제까지 날 기만할 셈인가.”

그렌을 향해 분노를 드러냈다. 그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병이 든 줄 몰랐습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거시기에 그저 정신적 문제로 여겼는데.”

“병이 아니야!”

이번엔 요정까지 화들짝 튀었다. 침대 반대편으로 슬슬 기어가는 놈의 팔을 확 잡아 일으켜 세웠다. 제 옆에 세운 후 카론은 그렌이 똑똑히 보도록 다시 드레스 허리를 뒤로 잡아당겼다. 아까보다 훨씬 배가 잘 드러났다.

“솟아오른 배를 만지면서 중얼대는 행동에 관해 떠오르는 게 정말로 그것밖에 없나?”

“병이 아니라면…… 임신한 여자에겐 자연스러운 행동입니다. 그러나 요정님은 남자 아닙니까?”

“남자 이전에 요정이지. 출신도 모르고 이상한 힘을 발휘하는 요정.”

카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챈 그렌이 설마설마하며 고개를 저었다.

“유달리 잠도 많이 주무시고 그 전엔 구토증도 심했으나…… 몸이 허약한 사람이 위장이 약해지는 경우가 많아서…… 설마 아무리 그래도 남자이신데.”

“본인이 말해야겠군.”

카론은 요정의 등을 떠밀었다. 그렌과 카론을 번갈아 본 요정은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더니 이내 두 팔을 뻗어 배를 감쌌다. 고개를 숙이더니 카론과 저를 번갈아 가리킨 후 침대를 가리켰다. 이후 손을 배에 얹었다.

“하…… 예?”

정말로 몰랐는지 그렌이 경악했다.

“사실…… 입니까?”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 그렌은 요정을 향해 물었고,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악이 서린 시종장의 표정엔 일말의 거짓이 없었다.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 카론에게 요정이 이상하다고 만나 보라 종용한 이유는 진짜로 행동이 기이했기 때문일 터.

“하하.”

실소가 터졌다. 다른 상황이면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아니 모르는 무능력을 크게 질책하고 상응하는 처벌을 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정이라는 변수가 판단과 행동에 이상 작용을 일으켰다.

“아무도 몰랐단 말이지. 배가 이렇게 부풀 때까지.”

“그야…… 남자라서.”

“하하하.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군.”

의자에 털썩 앉자 요정은 우물쭈물하더니 따라서 침대 가장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사태가 심각한 줄 알았는지 계속해서 카론의 눈치를 살폈다.

“이건 도대체 뭘까.”

“남자가 임신하다니…… 요정족은 자웅 동체인 걸까요?”

“암수 구별이 없다니 말이 돼? 지렁이도 아니고.”

“지렁이보다는 달팽이가 나을 것 같습니다. 그편이 귀여운 외모에 더 잘 어울리니까요.”

심각한 상황에 실없는 농담을 던진 그렌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이번만은 제가 지나쳤음을 알았는지 그렌은 일부러 헛기침을 두 차례 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

주고받는 대화를 알아듣지 못하는 요정은 카론과 그렌을 번갈아 응시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움찔거렸다. 아까는 바락바락 기를 세우며 주인을 향해 호통치더니 그렌 앞에서는 갑자기 어리숙한 척하는 태도가 대단히 영악했다.

이런 식으로 노련한 시종장과 무뚝뚝한 시녀를 녹인 거였나. 하지만 거기까지. 카론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을 거다.

“요정의 변화에 대해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네놈에겐 더는 요정에 관한 전적인 관리를 일임하지 않겠다.”

“예, 죄송합니다. 다른 이를 구해 보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럼?”

“요정을 정궁으로 옮겨. 전에 썼던 방으로.”

“알겠습니다.”

카론은 요정을 곁눈질하며 뭐가 더 필요한지 떠올렸다. 아무래도 임신 상태를 지켜볼 누군가가 있어야 하는데. 자웅 동체인 요정은 어느 쪽이지? 달팽이에 가까우니.

“수의사가 달팽이도 진료하나?”

“……융통성 있는 인간 의사로 좋을 듯합니다.”

그렌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찾아봐. 물론 내가 사전 확인하겠다.”

제멋대로 돌아가는 뇌가 뱉은 황당한 개소리 때문에 카론은 본능적으로 그렌의 시선을 피했다. 요정을 보기도 어색했다. 그러다 보니 시선이 자연히 방 한쪽으로 향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손을 비비고 있는 시녀가 심히 불쾌했다. 당장 눈앞에서 치워 버리라고 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요정에 관해서는 모든 걸 기밀에 부친다.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지. 너, 무슨 의미인 줄 알겠나?”

“예.”

“넌 운이 매우 좋군. 벌써 세 번째야.”

시녀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네 번째는 없는 걸 본인이 더 잘 알 터.

일단 당장 필요한 조처는 되었고, 근본적인 원인을 알아볼 차례였다.

아서 엘러. 그 무쓸모한 개자식이 요정에 관해서 도대체 뭘 알아보고 있는 건지 털어 볼 때가 되었다.

“아서를 당장 불러들여.”

명령한 후 카론은 요정을 돌아봤다. 그렌과 시녀에게 지시가 떨어진 걸 아는 그는 카론의 시선이 제게로 향하자, 시녀처럼 벌떡 일어서서 손을 모았다.

기가 막혀서 아직도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가르쳐야 하는데. 잠시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대단한 사고를 친 요정을 어찌해야 할까. 시원한 해답이 요원했다.

“넌…… 앞으로 구토 금지다. 그리고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수면 상태를 유지해.”

“음?”

알아들을 리 없는 요정이 그렌과 시녀를 번갈아 봤다. 분위기가 숙연했다. 카론은 방금 제가 한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명령인지 금방 깨달았다. 골이 지끈지끈 아팠다.

헝클어진 머릿속 정리가 우선이었다. 물론 아서 엘러의 무능력을 질타하면서. 혹은 검으로 놈의 굼뜬 엉덩이를 석둑 잘라 버리는 것도 괜찮을 수 있다.

흉악한 상상을 하며 카론은 정궁으로 향했다. 머리가 심히 복잡했다.

* * *

일단 남자인 요정이 수태했다. 그 아이는 매우 높은 확률로 제 아이다. 아니 제 아이가 맞다. 믿었던 시종장은 요정이 이상하다고만 여겼지 임신 사실을 제때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 수시로 살펴보기 위해 정궁에 데려다 놨다.

카론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서 신경질적으로 턱과 이마를 문질렀다.

‘남자인데, 아니 남자로 보였지만 사실은 남자가 아닌 건가. 역시 자웅 동체라는 게 맞겠지. 이게 무슨.’

요정은 상식을 지극히 초월했다. 피와 살을 비롯한 겉은 보통 인간과 똑같은데 내면이 아주 달랐다. 생각해 보면 용모도 남달랐으며 언어도, 행동거지도 좀 다른 면이 있었다. 그냥 머나먼 오지 출신으로 대륙 일반적인 행동 양식에 무지하다고 쉽게 생각했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어.”

그게 문제였다. 외모만 보고 너무 쉽게 판단하고 너무 쉽게 넘겼다. 하는 짓이 순진무구하여 요정이라고 불렀으나, 지금 보니 정말로 ‘요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고대 마도 제국의 전설이 잠든 폐허에서 밤에 빛의 기둥과 함께 나타난 데다가 스스로 반짝이는 꽃까지 들고 있었다. 기묘한 출현이니만큼 요정일 수 있고 남자면서 임신을 할 법도 했다.

“그게 말이 되나!”

괴상한 논리의 연쇄가 참을성을 앗아 갔다. 벌떡 일어서려다가 저도 모르게 구둣발로 책상 서랍을 찼다.

쿵.

서랍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샜다. 그 안에 넣어 둔 상자의 뚜껑이 살짝 들린 모양이었다. 카론은 서랍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마자 눈부신 황금빛이 쏟아졌다.

기이한 발광 꽃은 반년이 지난 지금도 시들지 않고 생생했다. 찬란한 황금빛도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밝아졌다. 그 밑에는 요정이 입고 있던 옷이 있었다. 옷감은 나비 날개와 같이 부드러웠다.

꺾어도 시들지 않고 도리어 더 밝은 빛을 뿌리는 황금색 꽃을 보면서 카론은 억지로 인정해야 했다. 요정은 외모가 조금 남다른, 평범한 이국의 인간이 아니다. 정말로 미지의 어딘가에서 나타난 요정이었다.

“흐음.”

나타난 방식도 상식을 아득히 초월했다. 무지한 떠버리들이 설명 못 하는 신비한 자연 현상이라고만 여겼으나 마법으로 보는 것이 맞을 터.

마녀의 저주도 모자라 요정의 출현이라니. 파사 일족을 와해시킬 수단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정말로 신비한 존재라는 건 예상 밖이었다.

“젠장.”

마녀도, 파사 일족도, 마도 제국도. 다 빌어먹을 놈들의 미친 말장난으로 치부했다.

여태껏 마녀의 저주라 부르던 것도 진짜 저주가 아니라 끔찍한 학대와 폭력을 달리 칭하는 방식에 불과했다. 황제가 강간과 학대로 인해 미친 여자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문을 당한 끝에 인격 파탄자가 되었다는 진실은 제국을 다스리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취한 조처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원하기에 요정을 처음 황궁에 데려왔을 때 직접 손을 그어 피를 보이고 인간에 불과함을 증명했다. 떠버리들이 아무리 사라진 마도 제국이 어쩌고 해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짜라니.

더불어 요정과 마법을 인정하면 마녀도 인정해야 한다.

‘유스키아의 마녀’

카론을 낳은 장본인은 마녀로 불리며 끔찍한 몰골로 죽어 갔다. 그녀가 이상한 짓거리를 조금 하긴 했다. 마녀라고 부르는 건 저주의 방식이지 정말로 ‘마녀’라 여겨서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되면 정말로 파사 일족이 주장하던 대로 그녀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다면? 그래서 전 왕이 잡아 와서 힘을 이용하려고 갖은 더러운 짓거리와 고문을 가한 거라면? 만에 하나 정말로 마녀라면?

그 말은 카론 자신에게 마녀의 피가 흐른다는 뜻이다.

“개 같은!”

쌍욕이 튀어나왔다. 벌떡 일어서서 책상을 걷어차고 의자를 집어 던졌다.

쿠당탕!

묵직한 의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상상만 해도 역겨웠다.

오물을 덜어 카론에게 먹이던 그 여자. 더러운 손톱으로 전신을 그어 지랄맞은 병에 걸리게 했던 여자. 이빨로 살점을 물어뜯었던 여자. 자기 대신 겁간하라며 어린 카론을 전 왕에게 내밀던 그 여자.

용납할 수 없다. 자신은 인간이다.

카론 라테시온은 어바인 그렌과 올리아 헤이스턴이 양육한, 인간이다.

“난 인간이야.”

“당연한 사실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던가요?”

카론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온 아서가 나뒹구는 의자를 발견하곤 들어오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아서 엘러.”

“예. 폐하.”

음산한 부름에 바짝 얼어붙은 아서가 문 안으로 성큼 들어오며 정자세를 취했다.

“요정에 관해 알아보라고 한 지가 언젠데 보고는 아직인가?”

서슬 퍼런 추궁을 예상했는지, 약삭빠른 놈이 혓바닥을 재빠르게 놀렸다.

“이미 예상하셨다시피 마도 제국의 유물과 유산에 관해서는 이미 알려진 사실을 낱낱이 검토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습니다. 더 많은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폐허를 발굴 조사해야 합니다.”

“안 돼.”

카론은 단칼에 그었다. 전 같았으면 그런 쓸모없는 짓에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낭비보다는 마녀에 관한 진실이 드러나면 곤란했다.

마술과 사술, 저주술에 관한 제국의 즉결 심판과 극형 선고에 관한 입지가 좁아진다. 더불어 혐오스러운 개인사에 괜한 살을 덧붙이고 싶지도 않다.

“그러실 것 같아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최근 서궁과 요정에 관해서 듣고 싶어 하지 않으신 것 같아 보고가 늦었습니다만. 갑자기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보고를 삼가라는 명령은 그렌에게 내린 거지 네게 내린 게 아니다.”

“그렌과 저는 일심동체니까요.”

이 새끼는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던지는 데 일가견이 있다. 짜증이 솟구쳤으나 아서를 상대로 화내기도 아까웠다.

“그렇다면 너도 모르는 게 당연하군.”

“뭐를 말입니까?”

“요정이 임신했다.”

“예?”

아서가 웃는 낯으로 반문했다.

“제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들은 그대로야. 요정이 임신했다. 서궁에 둘 수 없어 정궁으로 옮겼어.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

“아…… 어…… 어어…… 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일이 괴성을 짖어대지 않아도 이미 머리가 아프니 닥쳐.”

기괴한 신음을 억지로 삼킨 아서는 굳은 낯짝을 두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요정, 요정 했더니 정말로 요정인가요? 아님 달팽이인가?”

그렌과 일심동체라더니. 단어 선택은 비슷했다. 아직 충격을 다 소화하지 못한 아서가 흔들리는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생소한 일이지만…….”

충격을 소화하고 곰곰이 따져 보니 손해 볼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여자라서 애라도 낳으면 좋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나. 남자라서 쓸모가 덜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면 도리어 신비함을 더해서 좋은 선전이 될 수 있다.

“이대로 살려 두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임신한 여, 아니 남자도 아니고. 요정을 죽일 필요는 없…… 아, 예.”

혼자 지껄이던 아서가 입을 다물었다.

“원래 계획을 다시 검토하겠다.”

“선전물로 이용하겠다는 계획 말씀인가요?”

눈치가 영 없지는 않아서 아서는 바로 알아들었다.

“원래 입던 옷과 비슷한 예복을 입히고 이 꽃을 쥐여서 대대적인 선을 보이는 것이 좋겠어. 바탕이 괜찮으니 적절하게 꾸며서 임신한 배가 드러나 보이게 해서 말이야.”

“신이 위대하신 라테시온 황제 폐하께 내려보낸 천사처럼 말이지요.”

조롱기가 섞인 어구에 카론이 입꼬리를 올렸다. 마녀의 저주받은 사생아가 위대하신 황제 폐하가 되어 신에게 요정을 선물 받다니. 코웃음이 절로 났다.

“그래.”

“그렇다면 장소는 대신전으로 하지요.”

제도 동쪽에 있는 대신전은 존재하는지도 확실치 않은 신에게 닿겠다는 허황된 희망에 따라 입구부터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거대한 대리석 계단을 시작으로 하늘로 솟은 첨탑이 무수했다. 전부 흰 대리석이기에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요정의 신비한 용모를 돋보이게 하는 데 적합했다.

“적절한 구실만 있으면 되겠군요.”

“이미 훌륭한 구실이 있지 않나?”

말씨름하기도 귀찮아 싸늘하게 웃었다. 아서 놈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식이다.”

“……누구의?”

이런 개소리에도 일일이 반응을 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밥버러지 하나를 제거해야 하나? 갈등하다가 상대하는 자체가 귀찮아졌다.

“나와 요정.”

“옛?”

멍청한 놈이 왜 이렇게 자주 놀라는지.

“요정의 배 속에 아이가 들었다. 누구 애인가?”

“그, 그야 요정과 애가 생길 만한 이런저런 일을 한 사람은 폐하뿐이니 폐하의 아이겠지요.”

“그렇다면 장차 라테시온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를 사생아로 두자고?”

사생아.

어쨌거나 제 피를 물려받은 아이다. 사생아에서 사생아로 이어지게 둘 수 없다. 마녀가 카론에게 가한 불길한 영향은 할 수 있는 한 철저하게 끊어 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요정과 결혼이 뭐가 문제인가. 아서가 또 멍청한 소리를 했다.

“남자인데요?”

“남자가 임신도 하는 마당에 남자와 결혼이 왜 놀랍나?”

카론은 멍청한 부관의 어깨를 지긋이 잡았다.

“무엇보다 내 아래 사생아는 용납할 수 없다.”

입을 떡 벌리고 눈을 깜빡거리던 아서가 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더니만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결혼하셔야죠.”

“그에 관한 진행과 일련 장애물 처리는 네놈이 알아서 하도록. 이번에는 하루에 한 번씩 보고해.”

“아…… 알겠습니다.”

놀람이 가시고 죽상을 지은 아서가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황후를 들이라고 주제넘게 난리인 놈들이 있다. 황제의 결혼을 통보받은 놈들이 무슨 표정을 어떻게 지을지 자못 궁금했다. 하지만 귀찮은 일을 직접 할 필요는 없다.

카론은 그러기 위해서 살려 둔 부관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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