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
살리라 마음을 먹으니 거짓말처럼 구역질이 사라졌다. 고운 채소죽과 작은 빵 두어 덩이로는 한참 모자랐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어도 허기가 쉬이 가시지 않아 물로 주린 배를 채웠다.
반상을 살피는 궁녀가 바닥까지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낯이 뜨거워졌다. 그때 배에서는 천둥소리가 났다.
꼬르르륵.
궁녀는 그에도 놀란 듯 눈을 껌뻑였다. 말이 통하지 않기에 분홍이는 손짓, 발짓으로 제 뜻을 전했다. 배를 문지르며 빈 그릇을 가리켰다. 두 손으로 공중에 제법 실한 보따리를 그리기도 했다.
[좀 더 주시오. 배가 고프오.]
“으음…… 으음.”
그간 눈짓으로 전한 가락이 있어 간단한 몸짓은 쉬이 통했다. 바로 알아들은 궁녀는 목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푸짐한 상이 들어왔다. 궁녀가 자리를 뜨기도 전에 분홍이는 냉큼 의자에 앉아 짧고 뚱뚱한 오랑캐 숟가락을 들었다.
걸신들린 사람처럼 허겁지겁 먹는 행위는 천하고 못 배운 습성임을 알면서도 도무지 허기를 감당할 수 없어 수저를 빠르게 놀렸다.
합…… 꿀꺽…… 함…… 우물우물.
좀 전에 적은 양이라도 음식을 먹었어도 삼 일 굶은 사람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오랑캐 죽을 삼켰다. 미음처럼 곱게 간 죽에는 아주 작은 채소 조각과 고기 알갱이가 그득 들었다. 따끈한 갈색 꽃빵도 유달리 고소했다. 화권을 쭉 찢어 떠먹고 남은 죽에 찍어 꿀꺽꿀꺽 삼켰다. 못 배운 종놈처럼 화권으로 죽 그릇을 닦아 냈다. 마지막 한 조각을 입에 홀랑 털어 넣으려다가 궁녀의 시선을 의식했다.
궁녀의 눈이 크게 벌어져 있었다. 부끄러웠으나, 지금껏 온갖 부끄러운 짓은 다 보여 준 데다가 앞으로 그이의 도움을 더 많이 받을 일이 있으니 일부러라도 아무렇지 않은 듯 뻔뻔하게 굴었다. 궁녀를 보고 살포시 웃으면서 화권에 묻은 죽을 가리켰다.
[이런 고기를 더 주지 않으려오?]
작은 고기 조각을 두어 개 가리키자 눈치 빠른 궁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나섰다. 잠시 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고기가 통으로 들어왔다. 겉에 무엇을 발랐는지 몰라도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이젠 제법 익숙한 오랑캐식 생나물을 곁들인 닭고기가 제 앞에 놓이자, 눈이 반쯤 돌았다.
쭈욱.
잘 익은 다리를 잡고 한 번에 비틀어 뜯어냈다.
“하압.”
입을 크게 벌리고 거지처럼 우악스럽게 뜯어먹었다. 오랑캐식 닭찜이 이렇게 맛있는 줄 미처 몰랐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기름기도 좔좔 흘렀다. 곁들인 채소도 함께 우적우적 씹어 삼키느라, 궁녀가 자리를 비운지도 몰랐다.
그렌은 시녀의 보고가 믿기지 않았다.
“뭐라고? 닭 다리를 뜯어 먹어?”
그렌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시녀에게 되물었다.
“네. 고기 수프와 버터 롤도 원래 먹던 양보다 더 드셨습니다.”
“무슨…….”
고기를 먹지 않으려고 들어서 허브 수프에 닭고기를 아주 작게 갈아서 넣었다. 빵은 가장 순한 버터 롤만 입에 댔고, 그 외에는 생과일과 견과류만 조금 먹던 게 다였다. 채식 동물에 가까운 요정이 갑자기 각종 허브와 기름을 발라 구운 닭을 그 자리에서 해치웠다니. 거짓말 같았다.
그렌은 시녀와 함께 서궁으로 갔다.
테이블 위에는 형체가 무너진 닭고기 잔해와 뼈가 있었다. 수프 그릇도 바닥을 시원하게 드러냈다. 방의 주인인 요정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고는 볼록 솟은 윗배를 슬금슬금 쓰다듬고 있었다. 완전히 닦아 내지 못한 고기 기름 묻은 입가가 반들거렸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허.”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인기척을 그제야 느낀 요정이 그렌을 봤다. 평소엔 불안과 화가 깃든 냉랭한 시선으로 잠시 노려보다 홱 돌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배가 부른 요정은 영 딴판이었다. 그는 그렌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
노래 같은 고운 선율이 윤기 도는 입술 사이로 튀어나왔다. 요정은 제가 입고 있는 드레스를 가리켰다가 두 팔로 상체를 감싸고 오들오들 떠는 흉내를 냈다.
“드레스가? 추워서…… 아, 더 두꺼운 옷이 필요하군요.”
바닥을 돌면서 아주 큰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시늉을 했다. 뒤이어 작은 원을 그려서 그릇을 표현하더니 뭔가 몸에 부었다.
“아, 목욕 준비. 알겠습니다.”
요정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만큼, 그렌은 사소한 요구 사항은 모조리 들어주고 싶었다. 사람 간의 관계는 일방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는 일이 아니지만, 카론은 정서적 유대에 있어서 매우 까다로운 권력자였다. 정서적 결핍도 상당하거니와, 거칠고 날카로운 구석도 너무 많아서 자칫 하다가는 큰 부작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에 비해 요정은 애정 속에서 자란 티가 났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아도 첫날 보았던 부드러운 미소며, 의연하면서도 당당한 자세며.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날카로운 적의가 아닌 호의로서 상대를 대했다. 그걸 완전히 망친 건 카론이었지만.
‘요정이 발광하며 자학할 때만 해도 영 가망이 없는 줄 알았는데.’
카론의 거친 손길에 학대받은 요정이 결국 미쳐 버리는, 누가 봐도 명백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카론이 머무르고 간 흔적을 시녀가 닦을 때도 그저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옷이 더러워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갑자기 식욕이 넘치고 몸을 돌볼 마음이 생겼을까.
처음 변화를 맞았을 땐, 마냥 긍정적으로 여기진 않았다. 갑자기 명랑해지며 주변을 깨끗이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은 사람이 삶의 사소한 즐거움을 즐긴 직후에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때때로 있다. 요정도 그렇지 않을까?
의심은 곧 사라졌다. 며칠이 지나도 요정의 밝은 태도는 여전했고, 식사에 대한 의지도 강했으며, 목욕하고 깨끗하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는 잠도 매우 잘 잤다.
밤낮없이 멍하게 앉아 있던 사람이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몸을 단장하며 낮으로는 정원으로 나가서 가벼운 산책도 곧잘 했다. 전처럼 잠만 자는 게 아니라 정원을 열심히 돌면서 움직였다. 하얀 얼굴에 장밋빛 생기가 돌았다.
“환영할 일이야.”
인내심이란 체력에서 솟는 법이었다. 요정의 기분과 건강이 나아지는 만큼 상황이 반전될 가능성이 커졌다.
용건이 끝나지 않았는지 머뭇거리는 시녀가 더욱 충격적인 얘기를 꺼냈다.
“정원 산책을 한다고 말씀을 드렸지요. 그때 두 번 폐하께서 요정님을 잠시 보고 가셨습니다. 만지기도 하셨는데, 요정님을 깨우진 않았습니다. 요정님은 모르십니다.”
“폐하께서?”
설명만 들어서는 몸을 겹친 사이엔 흔히 있을 법한 행위였다. 놀란 이유는 행위자가 남다르다는 데 있었다.
‘그’ 카론 라테시온이? 요정을 깨우지 않고 자상하게 쓰다듬었다고? 원래 성미로는 요정을 서궁 밖으로 데려온 자가 누구냐고 싸늘한 노여움을 발산해도 모자랐다.
“믿을 수 없군.”
“제가 똑똑히 봤습니다. 두 번.”
“너를 못 믿는다는 뜻이 아니야. 폐하께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그건…… 저도 처음 봤을 땐 환각인 줄 알았습니다.”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카론을 괜히 자극할 수도 있었다.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면 자신이 끼어들어서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폐하께서 없는 일이라고 하셨으니, 지금처럼 계속 없는 일이어야 해.”
“네.”
카론에겐 말을 꺼내지 못하더라도, 요정에겐 접근을 조금 달리해 볼 일이었다. 그렌은 꾀를 내었다.
“이건 폐하께서 보내신 과일입니다.”
탐스러운 제철 과일이 담긴 바구니를 가져다주면서 그렌은 요정이 알아듣든 말든 그렇게 말했다. 물론 카론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궁의 물건은 모조리 황제 카론의 것. 일부가 그렌의 손을통해 요정에게 전해져도 근본적으로는 황제가 하사한 것이었다.
향긋한 살구와 복숭아가 담긴 바구니를 기쁜 기색으로 받아 든 요정은 놀랍게도 그렌의 말을 따라 했다.
“훼…… 아…… 훼에? 음?”
“폐하. 폐. 하.”
“훼아.”
두 번 듣고 요정은 단어를 거의 비슷하게 흉내 냈다. 순간 경이감에 휩싸인 그렌은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말을 배울 의지가 있다는 건 정말로 좋은 징조였다.
“그렌. 그. 렌.”
저를 가리키며 이름을 반복하자 요정은 금방 “구…… 엔. 구엔.”이라면서 따라 했다. 놀라서 입을 떡 벌리는 사이, 웃을 따름인 요정은 바구니를 들며 단어를 반복했다.
“훼아. ♬♫♬.”
“네. 페하께서 주신 과일입니다.”
“훼아.”
바구니를 보며 손가락으로 복숭아와 살구를 가리키며 다시 훼아라고 말했다. 요정은 폐하가 과일을 뜻하는 줄 잘못 알아들었다. 오류는 즉시 수정했다.
“아. 그건 살구입니다. 살구. 복숭아.”
“사구. 보수아. 사구. 보수아.”
“영리하시군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것을 폐하께 전해야 하는데. 그렌은 막 돌아서려다가 중요한 걸 깜빡 잊은 걸 깨달았다. 자신을 가리키며 이름을 반복하고, 살구와 복숭아를 가리키며 발음을 또박또박 반복한 다음, 손가락으로 요정을 가리켰다.
“음?”
바구니를 내려놓은 후,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른 요정의 태도에서 제 이름을 묻는 의도를 알아챘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요정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분명히 이름이 있을 텐데. 재차 시도해도 요정은 끝끝내 제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단번에 호의를 얻을 순 없지.”
요정은 스스로 바뀌었다. 정확한 원인은 오리무중이나, 굳이 따지자면 카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속이 편하다고 보는 편이 타당했다. 요정이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 내면적인 이유도 정확하게 알 도리는 없었다. 적어도 굳이 몰아세워 답을 얻으려는 행위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건 확실했다.
그렌은 더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어쨌든 변화는 환영할 일이었다. 건강하고 밝아진 요정은 카론을 마주하는 방식에 있어서 전과 다른 태도를 보일 수도 있었다. 물론 요정보다는 카론의 태도가 심각한 문제지만.
‘아무래도 조금은 유한 방식이지 않을까.’
정원에 몰래 외출한 걸 조용히 넘어갔다니. 다행히 카론의 태도 또한 긍정적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이렇게 가다가 언젠가는 평범하게 대하는 날이 올 수도 있었다.
그렌은 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는 요정을 최선을 다해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동시에 카론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자 했던 순간의 판단을 유보했다.
소통의 의지를 꺾는 데 있어서 대단한 재능을 보유한 카론이 알아봤자 부정적 영향만 미칠 터였다. 더불어 요정이 살아만 있다면 그 외 어떤 얘기도 듣지 않겠다고 명령했다.
‘없는 일이라고 했다니, 없는 일로 해드려야지.’
무엇보다 요정이 긍정적 태도를 즐길 수 있도록 여유가 절실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귀중한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수 없다. 그동안 요정이 비틀린 첫 만남과 이어진 학대의 어두운 상처와 그림자를 어느 정도 덜 수 있기를…… 그렌은 진심으로 바랐다.
* * *
오전 내내 집무실에서 보고 문서를 검토하던 중 전에 지시했던 북쪽 황무지 개척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카론은 자연스럽게 서궁의 요정이 떠올랐다.
“아가르타.”
정사 중에 막 떠올린 이름이지만 곱씹을수록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아가르타는 동화에 나오는 환상적인 지하 왕국의 명칭이었다. 중성적이면서 발음이 썩 듣기 좋았다. 땅 속에 파묻힌 고대 마도 왕국 터에서 발견한 요정이니 의미도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졌다.
제 훌륭한 작명 실력에 입꼬리를 올리는 찰나, 방해꾼이 끼어들었다.
“폐하?”
집무실 당번 시종 놈이 황제의 허락도 없이 감히 먼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고 시종 놈을 지그시 봤다. 살의까진 아니었다. 그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용감한 새끼의 면상이 궁금했다.
“죄…… 죄송합니다.”
시종 놈은 바짝 얼어붙어서는 은색 쟁반을 방패처럼 바짝 들어 올렸다. 빈 쟁반은 황제의 재가를 독촉하는 아서 놈의 표시였다.
“꺼져.”
지배자의 심기가 매우 불편함을 눈치챈 시종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부리나케 사라졌다.
보통 확인한 문서는 정오가 되기 전에 십수 개를 보내곤 했는데. 지금은 전달용 쟁반에 놓을 종이가 채 다섯 개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섯 개째는 지금 읽는 중이었다.
특별히 깊게 고려해야 할 내용도 아니었다. 그저 늘 나가는 유지비용에 관한 짧은 보고였다. 척 보기에 숫자도 정확했다. 그런데 문서 가장자리에는 동그랗게 번진 까만 펜 자국이 여러 개였다.
“쳇.”
달그락.
내동댕이치려던 펜은 아직 카론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작은 물건이 부딪히는 소리는 어디서 난단 말인가. 고개를 뒤로 돌리자 언제 나타난 건지 그렌이 차를 내리고 있었다.
“차가 식겠습니다. 어서 드시지요.”
“언제 들어왔지? 허락한 기억이 없는데.”
“원래 차를 마시던 시각에 도착했습니다. 차를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열중하시느라 못 들으셨나 봅니다.”
하.
그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그가 그럴 이유도 없고.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즉, 카론은 정신을 딴 곳에 완전히 파느라 누군가 등 뒤에 나타난 것도 모르고 있었단 얘기였다. 그가 믿을 수 있는 양부 겸 시종장이 아니었으면 벌써 칼을 맞아도 백번은 맞았다.
일할 자세는 아니므로 책상에서 일어나 차탁으로 이동했다.
“시종 교육을 다시 해.”
“어느 시종 말씀이십니까?”
“아까 그 자식.”
“아까 그 자식이라면…… 폐하 앞에서 빈 쟁반을 들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는 동안 목이 가라앉도록 헛기침을 한, 그 시종 말씀입니까?”
한 시간이라는 말에 미간이 크게 패었다. 조롱하듯 살짝 고개를 비튼 그렌이 차와 곁들일 작은 빵을 내놓았다. 황제를 기른 남자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영역에까지 눈치가 너무 빨랐다.
“폐하께서 그렇게 깊게 골몰하시는 큰일이 무엇인지 여쭈어도 될까요?”
“안 돼.”
관련 주제를 노련한 시종장에게 꺼내 봤자 손해였다. 특히나 그가 서궁에 두고 온 재킷에 관해 일절 말을 꺼내지 않을 때는. 더욱이 정원에서 요정을 두 번 만난 걸 그렌이 모를 리 없었다. 시녀가 분명히 알렸을 것이다. 개인 서재에서 무단으로 빼 간 그림책을 카론이 본 것도 들었을 터. 그런데도 시종장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뗐다.
다만 황제 폐하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겠다는 묵묵한 태도가 어쩐지 시위로 보였다. 아니꼽고 불편하지만, 한 번 뱉은 말을 어길 순 없었다. 무엇보다 요정을 만난 사실을, 그렌을 상대로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요정 얘기를 타인에게 하는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이상한 비유긴 해도 카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검과 군마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내맡기는 기분과 비슷했다. 요정을 실질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그렌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요정과 있었던 일은 되도록 황제가 아닌 개인의 영역으로 남기고 싶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손짓하자 그렌이 차를 준비했다.
달그락.
찻잔을 든 카론은 의자가 감당하지 못한 긴 다리를 포갰다. 차탁 반대편에는 짝을 맞춘 의자가 하나 있었다. 늘 비어 있는 의자가 새삼 거슬렸다.
제게는 좀 낮다 싶은 높이지만, 놈에게는 조금 높아 보였다. 엉덩이를 얕게 걸치면 두 발이 아래에 닿겠지만, 등받이 쿠션을 빼고 깊게 앉으면 발끝만 간신히 닿을 수도 있었다.
면전에 제가 앉아 있어도 태평하게 굴까?
정원에서 만난 소감에 빌자면, 연분홍색 반투명 옷감 아래로 하얀 발가락이나 살랑살랑 흔들 놈이었다. 섬세하게 세공한 은수저로 차에 넣은 설탕을 녹이며.
광경을 상상하니 제법 노여우면서도 또 귀엽기도 한…… 거기에 생각이 이른 카론은 들고 있던 찻잔을 사납게 내려놓았다.
짤그랑!
깨질 듯 덜그럭거리는 찻잔에서 차가 넘쳐 잔 받침을 적셨다.
“젠장.”
“폐하?”
주전자 주둥이를 닦는 하얀 수건으로 흘러넘친 차를 닦던 그렌이 한층 의아한 듯이 카론을 주시했다. 하지만 카론은 금방 다른 상념에 빠져 대답할 수 없었다.
오전 나절은 놈을 떠올리느라 귀한 시간을 허비했다. 황당함이 가시기도 전에 놈이 차탁에 같이 앉아 차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카론은 제 성미가 비범함을 익히 알았다. 그런 성미대로만 제국을 다스리다가는 오래가지 못함도 알았다. 제국의 몰락은 카론 자신의 파멸과 잇닿아 있다.
균형을 생각해 그렌과 아서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렌은 제 딱딱한 사생활을 돌보며, 아서는 제국이 안정적으로 지속하도록 도왔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사태 발생 시에, 모든 적을 일시에 섬멸할 베로니카도 있다.
현재 카론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그 세 사람조차 카론의 앞자리를 점하진 못했다. 카론이 차를 마실 때 그렌은 시중을 들어야 하며, 아서는 제 명을 수행하기 위해 앉을 틈이 없었고 베로니카는 제 주인을 지키기 위해 경계를 섰다.
그런데 요정을 왜?
서궁으로 향하려는 관심을 애써 억눌렀다. 삼 개월이나 노력했는데. 잠시 방심하자마자 또 이 모양이었다.
그때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그날, 매우 이상한 상태였던 그날. 역시 더러운 술수를 부린 건가. 기묘하고 음란한 주술로 남자를 세뇌하여 이성을 잠식하는 뭐 그런……. 그래서 아직도 영향을 받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평생 누군가에게 강렬한 욕구를 느낀 적이 없는 제가 이렇게 될 리 만무했다.
요정의 힘은 예상보다 강력했으며, 카론은 부지불식간에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깨달음이 늦었다. 몇 달 전부터 모른 척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말이 안 통해서 정말 다행이군.’
진심이었다. 뭐라고 속삭여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망정이지 그 뜨거운 정사 중에 요정 놈이 무언가를 졸랐다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었다.
카론이 요정 생각에 골몰할 때, 차를 준비한 시종장이 가만히 시립하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할 말이 있나?”
“일전에 관련 보고를 하지 말 것을 명 하셨으나…….”
본론이 나오기 전에 카론은 눈에 힘을 주었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재앙은 늘 한꺼번에 들이닥친다.
“그놈이 죽었나? 아니면 죽을 지경에 처했나?”
“아닙니다. 아직 목숨엔 지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됐어. 다른 보고는 일체 필요 없다.”
여태껏 요정을 떠올리고 있었기에 카론은 탐탁지 않은 열망을 완전히 없애버리고자 더 강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어바인 그렌.”
본명을 부르자 그렌은 멈칫했다. 예의를 지키는 가운데서도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사라지고 딱딱하고 시종장답게 엄숙한 자세를 취했다. 카론은 삐딱하게 기울인 고개를 괴었다. 시선만을 상대 쪽으로 들었다.
“짐승에 지나지 않았던 나에게 인내와 이성을 가르친 그대의 수고에 감사한다. 앞으로도 그대의 조언이 유용할 테지. 그렇기에 사소한 참견은 봐주고 있다.”
“예, 폐하.”
“하지만.”
삐딱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들면서 꼰 다리를 풀었다. 당장 일어서서 상대의 목숨을 거둬갈 수 있도록.
“이미 결정을 내린 사항에 관한 주제넘은 참견까지 봐준다는 얘기는 아니다.”
“죄송합니다. 너그러움에 취해 제 위치를 깜빡 잊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렌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꾸지람을 들은 시종과는 다른 침착함이 있어도 이마에 솟아오른 식은땀까진 숨기지 못했다.
“그대를 잃지 않게 협조하길 바란다.”
“네.”
“그리고 서궁에 관한 명령은 내가 다시 거론하기 전까지 철저하게 지키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나가 봐.”
그렌은 다시 한번 고개를 정중히 숙인 뒤에 집무실을 나갔다. 온전히 혼자 남은 카론은 천천히 차를 즐겼다.
대단하신 왕족, 귀족 나리는 포크보다 무거운 걸 들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카론과는 거리가 먼 얘기였다.
알량한 핏줄만을 믿고 게으른 삶을 살다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 돼지들과 달리, 카론은 찻잔이 비면 스스로 채웠고, 곁들이는 음식도 직접 집어 먹었다. 술을 마실 때도 이와 비슷했다. 곁을 모조리 물린 후에 스스로 잔을 채우곤 했다.
카론은 사소한 소일을 즐기는 편이었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일일이 시중을 들고 받을 여유도 없거니와, 소일은 직접 하는 동안엔 스스로가 평범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다른 자들은 이 시간을 가까운 누군가와 함께 보낸다. 아서는 베로니카와. 대부분 홀아비로 오해하지만 그렌에게도 올리아라는 아내가 있다. 따지고 보면 제게도 한때 이런 사소한 시간을 나누는 존재가 있었으나…… 그 여자는 결국 목이 잘려 성 밖에 내걸렸다.
처음으로 믿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한 일로 여러 사람을 갈아치웠다. 매우 아까운 수하도 동시에 잃었다. 그 사건에 관해서 만큼은 참견쟁이 그렌과 수다쟁이 아서조차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요정 놈까지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잃을 필욘 없지.”
잃고 싶지 않으면 지나친 관심은 끊는 편이 나았다.
가끔 산책 중에 자는 모습을 보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때도 욕정보다는 싱거운 평화로움에 젖어 있으니.
이런 식으로 시간이 지나면 제 속에서 들끓는 정염은 서서히 가라앉을 것이다. 시간이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었다.
카론은 다시 업무에 몰두하려 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믿었건만. 이래저래 떠오른 요정에 관한 상념은 차 한잔 마시는 여유로 지우기엔 너무 끈덕졌다.
“빌어먹을.”
이렇게 뇌 속이 어지러울 때는 억지로 집중해도 그릇된 판단을 내리기 쉬웠다. 집어치우는 편이 나았다. 그때 문서를 거의 처리하지 못해 휑하게 빈 쟁반이 눈에 들어왔다. 던지려던 펜대를 다시 꾹 잡았다.
답답한 제복을 입고 책상에 앉아 종잇조각에 쩔쩔매는 자신이 이유 없이 한심했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망할.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
왜 제국을 세웠을까?
처음부터 원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억압하는 적을 죽이고, 쳐부수고, 멸절시켰더니 어느 순간 황제가 되었다.
황제라는 직함을 건 이후로도 암살 가능성은 여전히 도사렸으나, 적어도 서궁에서 살 때처럼 당장 죽을 걱정을 하진 않았다. 막상 누려 보니 막대한 권력은 꽤 편리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은 간단한 명령 하나로 쓸어버릴 수도 있다.
다만 그에 따르는 귀찮음이 예상을 뛰어넘었다. 드넓은 제국을 일일이 돌아다닐 수 없으니,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무수한 사람을 써야 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보냈고 그 덕에 문서가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툭.
보내야 할 답장 중 마지막을 끝내자마자 펜을 집어 던졌다. 거칠게 접어 봉투에 봉인한 편지는 시종을 통해 대기하는 파발 기사에게 전달되었다.
뚜둑. 뚜둑.
목을 꺾자 뼈마디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머리도 무거웠다.
지루한 문서를 읽고 정치적 판단을 해야 하는 일도 귀찮았으나 그보다는 의자에 엉덩이를 계속 대고 있는 자체가 고역이었다.
‘전엔 어떻게 시간을 보냈지?’
이렇게까지 무료함을 느낀 적이 처음이기에, 카론은 과거엔 어떠했는지 되짚었다. 제국 확장과 안정을 위해 전장을 뛰어다녔다.
곁에 두었던 대륙 지도에 절로 시선이 갔다. 어디 두들겨 팰 놈이 없을까. 북쪽 산맥 중턱까지 몰아낸 파사 일족을 제외하곤 사방엔 전부 납작 엎드린 피정복자들뿐이었다.
마지막 출정 직후에는 어떠했는가. 돌아온 다음 휴식을 취하고…… 빌어먹게도 단상이 또 달갑지 않은 쪽으로 흘렀다.
“서궁.”
서궁의 요정은 이용 가치를 따지기 전에 너무 성가셨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카론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신기한 재주를 가졌다.
“……차라리 서궁의 그놈이 여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카론을 성가시게 하는 또 다른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카론의 검 아래 무릎을 꿇은 후 왕에서 대공으로 각하된 놈들을 비롯하여 라테시온 제국 휘하 영주와 귀족들이 소위 전상서라는 걸 보내왔다. 화려한 금박의 문서는 구구절절한 수식어 덕분에 대단히 길었으나, 핵심은 하나였다.
「황후를 맞아 후대를 생산하십시오.」
현 라테시온 제국 내 황족은 카론 단 하나였다. 혈육은 있었으나, 제국을 세우면서 직접 처단해 스스로 천애 고아가 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카론 개인으로서는 홀가분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제국의 기둥을 자처하는 놈들에겐 우려스러운 결정이었다.
계속 암살 위협을 받는 황제가 출정하기를 서슴지 않으며, 그마저도 후방이 아니라 선봉에 서는 걸 즐겼다. 카론이 비명횡사할 경우, 제국은 갈기갈기 찢어질 테고. 대륙은 다시 전쟁의 불길에 휩싸인다. 이제 정복전도 얼추 끝났고, 안정화의 시기에 접어들었으니 후계자를 생산하라 성화였다.
당연히 제국의 안녕만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이면에는 제 사람을 황후로 심어서, 곁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카론에게 어떤 식으로는 영향을 미치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렇기에 카론은 더더욱 대륙어도 구사하지 못하는, 뒷배가 없는 아름다운 여성. 카론의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존재가 쓸모없는 남자라서 아까웠다.
혀를 찬 카론은 그렌을 다시 불렀다.
“아까 하려던 말이 뭐지?”
그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요즘 상태가 이상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혼잣말을 자꾸 합니다.”
“혼자 있으니 혼잣말을 하겠지.”
좁은 공간에 갇힌 놈들에겐 혼잣말은 흔한 증상이었다.
“요정어라서 무슨 말인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봐도 혼잣말은 아닙니다. 자주 웃으면서 누군가에게 계속 말을 겁니다.”
“마녀처럼 이상한 주술이라도 사용한단 건가?”
서궁. 마녀. 주술. 카론이 혐오하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눈매가 날카로워지자 그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부정한 행위와는 거리가 멉니다. 직접 보셔야 아실 텐데…… 음, 굳이 설명하자면. 저를 미쳤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뜸 들이지 말고 바로 말해.”
필요한 말만 하는 그렌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설이 길었다.
“요정이 고기를 싫어하시는 걸 아십니까?”
“과일과 견과류만 먹는다고 했잖아.”
“네. 그런 분이 몇 달 전부터 고기류를 가리지 않고 다 먹어 치우십니다. 생기가 돌았지요. 행동도 좀 밝아지시고 낮으로는 정원에서 산책도 하십니다.”
“이제 고기 맛을 알았나 보지. 그래서? 다 뒈져 가던 놈이 멀쩡히 살아서 이상하단 말이야?”
“그게 다가 아닙니다. 음,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겁니다.”
“배?”
“네. 마치 임신한 사람처럼…….”
“임신?”
카론은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다. 그만큼 어처구니없는 개소리였다. 그렌도 아는지 “실언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남자야. 달릴 게 달려 있어. 내 눈, 내 손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수 없이. 이건 위험하다 자각할 만큼 집요하게.
“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요정이 이상합니다.”
“괴상한 행동으로 관심을 끌려는 술수일지도 모르지.”
“제 이목을 끌고 있으니 효과가 있는 듯합니다.”
끝까지 잘못 알았다고 물러서지 않는 태도로 보아, 그렌의 판단엔 요정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초원에 살법한 요정을 서궁에 가둬 놔서 그런가? 그러기엔 황제의 뜻을 과대 해석한 시종장과 시녀가 떠받들어 주지 않았나?”
조소를 지으며 떠보는데도 그렌의 진지한 태도는 그대로였다. 직접 확인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미쳤다니…… 아직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는데.”
“폐하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눈살을 찌푸린 카론은 톡톡,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그렌은 쓸데없는 것에 열을 올리는 타입이 아니기에, 그가 이상하다면 들여다볼 가치는 충분했다.
그뿐이었다.
요정은 서궁에 가까운 정원에 있었다. 이쪽으로 등을 돌리고 있기에 요정을 마주 보던 시녀가 먼저 카론을 눈치챘다.
노느라 바쁜 요정은 깔개 위에 앉아서는 뭐라고 중얼중얼하면서 꽃을 엮어다 머리에 썼다. 얼마나 혼잣말에 열중하는지 카론이 정원에 거의 다가설 무렵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걷던 발에 나뭇가지 하나가 밟혀 뚝 부러졌다. 그제야 인기척을 눈치챈 요정이 뒤를 돌아봤다. 풀어진 표정을 지었던 그가 카론을 발견한 직후 두 눈이 크게 벌어지더니 이내 바짝 얼어붙었다.
“아.”
엉거주춤 일어선 놈이 사지를 벌벌 떨었다. 까만 눈동자가 갑자기 흐려졌다. 조소가 흘렀다. 어떻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나.
저렇게 후들거리는 다리로 제대로 설 수 있나? 싶은 찰나, 등허리를 거의 덮은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요정이 허겁지겁 달아났다. 작은 정원은 카론이 들어선 입구를 제외하곤 빽빽하게 우거진 관목 울타리를 둘렀다.
일전에 카론이 들어왔던 작은 틈이 있으나, 당황한 요정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구석에 선 나무 기둥 아래 몸을 가렸다. 아무리 굵은 나무라도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가리긴 어려웠다. 저것도 숨은 거라고.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기둥을 짚고 선 요정이 두려운 눈으로 이쪽을 훔쳐봤다.
“완전히 태평한 게 아니었어. 적어도 나를 무서워는 하는군.”
황제는 마땅히 두려움 섞인 존중의 대상이었다. 요정에게는 두려움은 있되, 존중은…… 딱히 없었다. 신경에 거슬렸다. 시녀보다 더 못한 대접처럼 느껴졌다.
“길은 들어도 주인 구별은 아직 덜 되었어.”
카론은 천천히 제 소유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는 갈 곳이 없는지 뒤를 몇 번이나 돌아본 요정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카론을 향해 고개를 점점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나무를 방패막이 삼아 어깨를 움츠렸다. 별로 미친 것 같진 않은데.
“아가르타.”
도망갈 구석이 없는 작은 짐승을 궁지로 더욱 몰 필요는 없다. 어쨌거나 이상 행동을 보이는 요정이 울며 발작하면 성가시기만 하다.
그보다는 살살 꾀어내는 편이 좋았다. 카론은 손을 내밀었다. 입꼬리도 살짝 올렸다.
“이리로, 아가르타.”
요정은 내민 손의 의미를 알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려움을 안은 밤하늘빛 눈동자 안에 놀라움이 번졌다. 하지만 곧 의심도 끼어들었다. 경계와 혼란, 망설임 속에서 요정은 카론의 얼굴과 손을 번갈아 보았다.
카론의 얄팍한 인내심은 요정의 앞에서는 훌륭히 발휘되곤 했다. 그러함에도 일부러 올린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갈 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대단한 결심을 한 듯 표정을 굳힌 요정이 나무 둥치에서 조심스럽게 한 발짝 나왔다.
하얀 손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 * *
아직 누구도 아이에 대해 알지 못했다. 늘 가까이 있는 상선과 궁녀조차 마찬가지였다. 사실은 분홍이가 음인인 줄 아는지도 확실치 않다.
기실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내 들여다봤던 화첩에는 남녀 구별만 있을 뿐 별개로 음양의 구별이 나오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어도 그랬다가 괜히 음인임이 발각될까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복중에 태아가 들었기에 분홍이는 너무너무 두려웠다. 입고 있는 옷은 워낙 품이 커서 아직 살짝 부푼 배를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배가 더 나오면 당연히 알아볼 터.
혹여 음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임신인 줄 모른다손 쳐도, 배가 부푸니 병들었다고 이상한 약을 먹일 수도 있다.
아이와 살기로 했으니 그런 일은 피하고 싶다. 막상 아이를 낳을 때는 도움도 필요하고 아이를 먹일 음식과, 입힐 옷도 필요했다. 기저귀는 어찌하나. 언젠가는 밝혀야 할 일이긴 했다.
차일피일 미룬 건 그것이 혹여 개종자의 귀에 들어가서 뭔가 큰일이 터질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불안한 장래를 떠올리면 한시도 편하지 않아 일부러 목전만 봤다.
전혀 원치 않은 날에 이국으로 뚝 떨어진 바와 같이 전혀 원치 않은 날에 개종자가 불쑥 나타났다. 백주대낮이어도 시퍼런 도깨비 눈을 보아서 몸이 성한 날이 없었으므로 분홍이는 혼비백산하여 냅다 달아났다. 애석하게도 마당 구석에 불과하였지만.
분홍이는 개종자가 무서웠다. 그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였다.
내내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왜 나타났나? 혹시 아이를 가진 걸 알았나? 혹여 지우게 시키지 않을까. 저도 처음에는 싫다고, 떨어지라고 미워했던 아이지만 막상 빼앗긴다고 하니 그건 또 싫었다.
멀뚱히 선 나무는 언제고 저를 지켜 주지 못한다. 사방을 나무로 메워도 개종자는 도끼를 들어 단숨에 거목을 베어내고 분홍이를 끄집어낼 작자였다.
놈은 짐짓 점잖은 자세로 걸어왔다. 승냥이처럼 비열한 웃음도 지었다. 내민 손은 어딜 봐도 흉계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솔직한 심정은 그에 침이라도 뱉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를 가진 몸으로 홀로 살 수도 없거니와 조금만 뜻을 거슬러도 금방 손찌검을 하는 개종자가 우두머리거늘. 상선과 궁녀도 개종자 앞에서는 무력했다.
몸의 보전을 생각하여 저 무서운 손을 잡아야 하는데…… 어쩐지 손이 쉬이 나가질 않았다. 저 손을 잡았다가 그대로 잡혀 나가 태를 망가뜨릴 만큼 겁탈을 당하고 아이를 잃지는 않을까.
망설임이 길어지자 개종자의 안색이 점점 굳었다. 이미 해답은 정해졌다. 뜻에 반하는 자를, 저 악독한 작자는 너그러이 대하지 않는다.
더 늦기 전에 억지로 손을 내밀었다. 승냥이의 아가리 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기분이었으나, 살려면 도리가 없다.
벌벌 떨리는 손을 간신히 뻗자 역시나 놈은 분홍이의 손을 덥석 잡고 난폭하게 끌어당겼다.
“앗!”
손목과 어깨가 빠질 뻔한 것도 아프지만, 무엇보다 넘어져 배에 충격이 갈까 식겁했다.
불안과 달리 부지불식간에 놈의 품에 쏙 들어가 버렸다. 아연실색이 질겁으로 바뀌는 찰나, 튼튼한 팔이 등을 단단히 붙들었다. 꽉 조이기에 숨이 가쁘거니와, 배가 눌릴까 봐서 걱정이었다.
놈의 들개 같은 성미를 건드릴까 봐서 숨을 죽이면서도 두 손으로 바윗덩이 같은 가슴을 밀어냈다. 그러자 놈이 보란 듯이 팔에 힘을 주었다.
절로 미간이 좁아지고 입술이 떨렸다. 보고 싶지 않으나 억지로 눈을 들어 개종자를 올려다봤다.
[노…… 놓아주시오. 배가 눌리면 안 되는데…….]
두려움과 불안, 서러움이 목구멍에 뜨거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눈가도 자르르 경련했다. 흐느낄 겨를이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재차 애원했다.
[제발…… 놓아주시오. 달아나지 않겠소.]
그러자 개종자 놈이 뭐라 속삭였다. 낮게 긁히는 목소리는 동굴처럼 깊게 울려 등의 솜털이 바짝 섰다. 어투는 사납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 무서웠다.
하늘에 해가 떠 있는 훤한 낮인데 놈은 옷 위로 손을 움직였다. 어깨며 등골이며 허리께며. 더듬는 손이 추잡했다.
역시나 겁탈할 생각이다. 방도 아닌 마당에서 하물며 지켜보는 궁녀가 있는데도.
몸에 힘을 주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제발…… 이러지 마시오…… 제발.]
애걸복걸하며 놈을 더욱 밀어냈다. 허나 더러운 손질은 쉬지 않았고, 겨드랑이와 가슴뼈를 지나 기어이 배에 닿았다.
“힉!”
중한 것이 든 복부에 손이 닿는 순간, 어디서 힘이 나왔는지 분홍이는 기어이 개종자를 떨쳤다. 두 팔로 제 배를 감싸곤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안 돼! 이 아이는 안 돼!]
사색이 되어 저도 모르게 놈에게 호통쳤다. 냉랭하게 굳어 가는 놈의 안색을 본 다음에야 분홍이는 일을 그르쳤다는 걸 알았다. 전신이 떨렸다. 제대로 펴지지 않는 무릎에 치맛자락 안에서 서로 부딪쳤다.
“그…… 어…… 누가…….”
멀찍이서 지켜보던 궁녀가 허옇게 질렸다. 다가오지 못하고 우뚝 굳는 모습에 분홍이는 절망했다. 개종자를 막아설 사람이 없다.
금색 눈썹이 딱딱하게 변했다. 새파란 도깨비 눈은 그야말로 서슬이 퍼랬다.
우악스러운 손길이 다가오기 무섭게 분홍이는 놈에게 도로 끌려갔다. 손목을 잡은 채로 개종자는 다른 손으로 치마를 휙 걷어 올렸다. 다 틀렸다.
정신을 어질어질하게 만든 건 햇빛이 제 허벅다리 사이를 비추는 수치만이 아니었다. 슬며시 솟은 배를 보인 절망감이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파란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치마를 걷은 손이 이내 배에 닿았다. 산 채로 뱃가죽을 찢고 아기집을 꺼낼지도 모른다는, 참혹한 상상이 분홍이를 혼절 직전으로 몰고 갔다.
[제…… 제발…….]
벌벌 떨리는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샜다. 안 될 줄 알면서도 험상스러운 손을 밀어내려 애썼다.
개종자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어설픈 손짓이나마 방해가 되었는지 기어이 힘을 써 분홍이를 밀쳤다.
“윽.”
바닥에 쓰러졌다. 폭신한 풀밭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급하게 배를 더듬으며 잠시 안도할 찰나, 험궂은 손이 치맛자락을 잡더니 아래에서 위로 훌렁 벗겨 냈다.
“으악!”
딱히 속곳을 받은 기억이 없어 분홍이는 내내 한 겹만 입었다. 품이 넉넉한 한 벌 치마를 벗기면 바로 나신이었다.
“으윽.”
반사적으로 쪼그렸다. 접은 다리로 국부를 가리고 팔로 그 위를 감쌌다. 벌건 대낮에 알몸이라니. 그야말로 기절초풍이었다. 질겁해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어쩌려고 이러는가. 정말로 이 밖에서?
턱이 딱딱 부딪혔다. 정수리에 날 선 시선이 박히는데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
“으악.”
뒤로 휘청하며 궁둥이에 풀이 닿았다. 그러나 엉덩방아를 찧지는 않았다. 대신 어느 틈에 단단히 틀어 잡힌 양 손목이 공중으로 번쩍 치켜 들렸다. 덩달아 쪼그린 몸이 펴지면서 마치 푸줏간 고기처럼 덜렁거렸다.
“흐으으.”
치욕스럽거니와 당혹감, 격렬한 두려움과 역겨움이 몰아쳤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침이라도 뱉어 주려 눈을 번쩍 떴다. 무식하고 그악스러운 놈의 낯짝에 침을 뱉고, 잘못하는 욕이라도 되는대로 퍼부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놈의 면상을 보자 분홍이는 욕지거리를 잊어버렸다.
시퍼런 도깨비 눈이 커다랬다. 비열하게 뒤틀리던 입술도 멍하게 벌어졌다. 제 배를 바라보는 개종자의 표정은 그야말로 낮도깨비를 본 사람 같았다.
“아…… 어?”
멍청한 탄사는 분홍이가 아닌 개종자의 목구멍에서 나왔다. 대경실색한 모습에 새삼 당황했다.
벌건 낮에 사람을 덜렁 벗겨 수치를 주는 망나니 주제에 배 속 아이가 그렇게 놀랄 일인가? 갑자기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수치심이 극에 달해서 발버둥 쳤다. 놈의 손아귀가 스르륵 풀렸다.
털썩.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분홍이는 얼른 옷을 뒤집어썼다. 배와 다리를 가리게 치마를 탈탈 턴 다음에야 겉으로 나온 솔기를 발견했다. 다시 뒤집어 입을 생각은 없었다. 대신에 치마를 단단히 당겨 개종자가 또 들추지 못하게 했다.
놈의 경악에 억울함과 서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부아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소리 높여 꾸짖었다.
[네놈이 만든 아이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하물며 어디 대낮에! 아무리 못 배운 짐승이라도 멋대로 씨를 내릴 만큼 웃자랐으면 똥오줌은 못 가리더라도 밤낮과 안팎은 좀 가리거라!]
씩씩대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중에도 놈의 시선은 분홍이의 배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저를 잡았던 그악스러운 손이 서서히 올라가 벌어진 입을 가렸다. 다른 손으론 이마를 훑었다가 머리 뒤로 넘어갔다.
개종자의 푸른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2권에서 계속됩니다.>
금은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