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8)

4.

인기척이 분홍이를 깨웠다.

정신이 또렷해지지 않고 잠에 겨워 어렴풋한 감만 들었다.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 같았고 뜨끈한 눈가는 움찔대기도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뭔가 시원하고 부드러운 것이 전신을 훑었다.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물수건이려니 했다.

수군거리는 말씨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오랑캐 말이었다. 물먹은 목화솜처럼 축축 늘어지는 사지를 물수건으로 닦아 내는 손길도 두 어머니의 것과는 전연 달랐다. 곱고 사뿐하되 정성 어린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붕 뜨다가 도로 내려왔을 땐, 내내 배기던 바닥이 폭신하게 바뀌었다. 집을 떠난 이후로 처음 느끼는 안락함이었다. 햇볕에 바싹 말린 푸근한 광목 이불을 덮었으면 좋으련만.

입을 달싹거릴 힘도 없거니와, 여전히 오랑캐에게 말을 전달할 방법도 딱히 모르겠다. 그저 주는 대로 받을밖에.

찰랑찰랑 물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조금씩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두꺼운 담요를 덮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담요는 묘하게 익숙했다.

‘아, 원래 내가 쓰던 것이로구나.’

옷 한 벌에 꽃 하나, 신발 한 짝 외에 가져온 것이 없는데. 희한하게 그 담요는 필경 제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다. 담요 속에서 나른한 몸이 슬금슬금 똬리를 틀었다. 차가운 물수건이 지나갈 때마다 살갗 위로 쭈뼛쭈뼛 돋았던 솜털이 힘을 빼고 수그러들었다.

‘좋구나.’

영문 모를 평안이 내면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 불안과 불만이 도사리던 자리였다. 따사로운 햇볕이 잘 드는 집, 제 방도 아닌데 어찌 이렇게 안락하고 포근할까.

서늘하고 적막한 유폐 궁이 따뜻하고 고요한 방으로 바뀌었다. 늘 시리던 손끝과 발끝엔 온기가 감돌았다. 깨끗한 피부 위로 느긋한 숨이 점점 더 느려졌다.

이대로 한잠 더 자도 좋으리라. 딱딱하던 뼈마디가 노곤해지고, 두려움에 떨던 살점이 엿가락처럼 쭉 늘어질 때까지. 냉기에 바스러지던 혼백이 갓 찐 떡처럼 윤기가 흐를 때까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누가 가져온 것인지 모를 안락에 젖은 분홍이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똑. 똑. 똑.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졌다. 싱그럽지만, 쉬지 않고 이어지는 물소리는 결국 곤한 잠을 방해했다.

“으응.”

잠을 푹 자고 났더니…… 심신이 너무 나른해서 쉬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희끄무레한 시선엔 빛무리만 번졌다. 돌덩이 같은 눈꺼풀을 두어 번 껌뻑였다. 손등을 슬며시 눈가로 가져다 댔다. 척 느끼기에도 제법 뜨거웠다.

‘눈이 부었어.’

금붕어처럼 퉁퉁 부은 살을 잘못 만지면 손독이 오르곤 했다. 그럴 때면 달은 뺨을 가라앉히기 위해 큰엄마나 엄마가 곱게 빻은 생녹두를 명주에 싸서 올려 주곤 했다.

“흐으응.”

그런 김에 고소한 녹두전도 해 주셨는데.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배가 꼬르륵 울었다. 그것을 신호로 갑자기 식욕이 샘솟았다. 뭐라도 입에 넣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흐응.”

듣는 이도 없는데 괜히 투정을 부리며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자 덮고 있던 것이 어깨에서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보다는 화끈거리는 뺨을 문지르려다가 번뜩 손을 내렸다.

“나쁜 손…… 나쁜…… 손.”

어린 시절 엄마가 손독 오르지 못하게 손을 꼭 잡으면서 하던 말을 멍하게 따라 했다. 눈두덩만큼 목도 잔뜩 부어서 말할 때 좀 따가웠다.

한구석에는 늘 물이 담긴 나무 잔이 있었다. 흐릿한 시야에도 익숙한 형태가 보였다. 그쪽을 향해 느른하게 퍼진 다리를 뻗었다. 돌바닥에 맨발이 닿자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한숨 길게 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무릎이 완전히 풀려 허벅다리가 빠르게 장딴지와 만났다.

“아……!”

아주 넘어진 건 아니지만 바보처럼 침상 아래 바로 쪼그려 앉고 말았다. 그 덕에 엉덩이가 훤히 벌어졌다.

뻐끔.

커다란 잉어 입이 쩍 벌어지는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격렬한 쓰라림이 치밀었다.

“아윽!”

뜨거운 눈살을 확 구기면서 침상에 매달렸다. 놀란 바람에 다리가 제멋대로 퍼뜩 움직였고, 덩달아 무릎까지 돌바닥에 쿵 찧었다.

“윽!”

사방에서 시커먼 별이 팍팍 튀었다. 아찔한 고통이 숨을 턱 막았다. 이를 꽉 깨물면서 손으론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쥐어틀었다. 찌푸린 눈도 못 견디게 따가웠다. 턱턱 막히는 숨을 억지로 고르느라 빗장뼈가 크게 움직였다.

벼락 맞은 듯이 내달린 아픔은 무릎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가랑이, 정확하게는 더 안쪽 깊은 곳에서 시작되었다. 가랑이에서 한 뼘 위, 배꼽에서 살짝 아래 어딘가가 불에 덴 듯했다. 쓰라림도, 욱신거림도 딱히 아니면서 그것을 모조리 합한 것보다 백배는 아팠다. 누군가 손으로 내장을 쥐어짜는 느낌이었다.

“으윽.”

금방 식은땀이 났다. 목마른 생각은 벌써 사라졌다. 제 처지가 갑자기 홍수처럼 떠밀려 왔다. 버석거리는 목구멍이 질겁하여 크게 꿀떡였다.

아연실색과 함께 하복부에 저릿한 통증이 다시 들이닥쳤다.

“으윽.”

창자가 배배 꼬이는 아픔을 끙끙대는 찰나, 깊은 곳에서 뭔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뚝뚝.

바닥을 짚은 무릎 사이로 투명한 점액이 떨어졌다. 뜨거운 점액은 허벅다리를 타고 흘러 양 무릎 아래로 고여 금방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안엔 알 끈 비슷한 희멀건 덩어리와 작은 꽃술같이 얇고 붉은 핏줄이 뒤섞였다.

등줄기에 얼음 칼이 들어왔다. 그것은 금방 등뼈를 도려내고 빗장뼈를 부수어 폐에 푹 박혔다.

“허…… 어.”

춥지도 않은데 입에서 하얀 연기가 나왔다. 두툼하게 부푼 눈꺼풀이 한계까지 벌어져 쓰라렸다. 그러나 명치 밑 위장이 뒤틀리는 고통만은 못했다.

“우욱!”

바로 헛구역질이 튀어나왔다. 눈앞에 검은 별이 다시 튀었다.

“욱! 욱!”

제대로 먹은 것이 없는데 게워낼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위장이 죽겠다고 뒤틀렸다. 뒤이어 얼음 칼에 뚫린 허파가 숨을 못 쉬겠다고 고래고래 날뛰었다.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느라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자 깜빡 잊었던 기억이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더…… 더…… 제발…… 더 품어 줘…… 내게…… 줘.”

벌벌 떨리는 두 손이 저절로 배 위로 올라갔다. 은은한 열감이 꼭꼭 뭉쳐져 있는 곳은 늘 그렇듯이 판판했다. 그러나 이젠 완전히 달랐다.

갑자기 발정이 찾아왔다. 그러면 아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감히 놈을 찾았다. 찾아서…… 애원했다.

안아 달라고.

아기가 생기도록.

더…… 더 안아 달라고.

한계를 모르고 뒤집힌 눈알에 서늘한 바람이 닿았다. 침상에 매달렸던 두 손이 슬그머니 풀리더니 이내 양 머리채 속으로 파고들었다. 마른 입술이 벌어지고…… 성마른 혀가 바들바들 떨렸다.

머리채를 휘어잡은 손마디가 하얗게 변하는 순간, 놀란 허파가 벌렁거렸다. 그리곤 힘껏 쪼그라들어 속에 든 바람을 내질렀다.

“으…… 으아…… 아…… 아아악!”

* * *

요정이 광기를 보인다는 보고에 그렌은 서둘러 서궁으로 향했다. 요정 담당의 시녀가 그렌을 발견하고 황급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비명은 좀 전에 잦아들었습니다. 아마 기력이 떨어진 것 같습니다.”

“뭔가 먹었나?”

“부드럽게 간 고기 수프를 반 그릇 먹였습니다.”

“먹은 게 아니라 먹였나?”

“……예.”

시녀는 송구한 듯 시선을 피했다. 탓을 할 순 없었다.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는 상대에게 뭔가를 먹인 자체가 외려 대단했다.

그렌이 도착하자 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알아서 문을 열었다. 활짝 열렸는데도 그렌과 다른 두 사람은 요정이 달아날 걱정을 하지 않았다. 요정은 사지가 침상에 결박된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박했는데도 침상 위에는 몸부림친 흔적이 역력했다. 딱딱한 나무 침대를 부드러운 일반 침대로 바꾸길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전신이 피멍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얇은 민소매 드레스를 걸친 요정은 죽은 듯 얌전했다. 사지에 연결된 가죽 줄의 여유가 허락하는 한 몸을 웅크린 자세였다. 깨어 있을 때는 수없이 쥐어뜯고 물어뜯어서 너덜너덜한 황제의 재킷을, 기절하듯 잠이 들었을 때만은 꼭 안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서궁에서 요정은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상황에 대한 분노가 있었지만, 대체로 얌전하고 이성적이었다. 갑자기 왜 자해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강제로 입힌 드레스에 가려진 뱃가죽은 피멍이 들어 시커멓게 죽었다. 아래로 설핏 핏기까지 비쳤을 때, 그렌은 요정을 침대에 묶고 배엔 가죽으로 만든 판을 덧댔다. 그러자 배를 치는 일은 현저히 줄었지만, 가끔 손목 끈을 끊은 요정은 포기하지 않고 제 배를 긁으며 내려치곤 했다.

며칠 발광이 이어지는 동안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했을뿐더러 강제로 먹여도 토했다.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기력이 금방 떨어졌다. 그로 인해 자해는 줄었지만, 걱정은 더욱 커졌다.

생김새와 행동거지는 인간이어도 요정이라 명명된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째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그렌은 몰랐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요정에 관해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아무도 없었다.

요정의 발작은 영혼의 상처에 기인했다. 살아온 경험으로 그것은 장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 원인 제공자가 친애하는 황제 카론이라는 점이다.

그 점이 사태의 해결을 훨씬 어렵게 만들었다. 하필 황궁 내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한, 전권에 비견되는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그렌이 함부로 추궁할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대로 진정하면 좋겠지만 어려울 것 같고.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방 안을 지켜보며 골똘히 생각하던 찰나, 침대 아래에 놓인 천 뭉치를 발견했다. 요정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걸 집어 들었다.

“이건.”

카론이 보란 듯이 찢어 버린 요정의 옷이었다. 요정은 누더기가 된 옷을 소중하게 접어 침대 아래 숨겨 놓았다.

“이거다.”

전에도 식음을 전폐하던 요정이 옷 때문에 억지로 음식을 욱여넣었다. 그만큼 소중히 여겼다. 이걸 잘 수선해서 건네면 자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진 요정을 진정시키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되리라.

요정의 옷을 수선할 만큼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시녀를 부른 그렌은 그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이 일에 관해서는 절대 함구해야 한다. 특히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불행한 일이 벌어질 거야.”

“알겠습니다. 그렌 경.”

다짐을 받고 옷을 꺼냈다. 폭이 넓은 소매가 너덜거렸다. 옆구리 쪽에 큰 구멍도 났다.

“수선할 수 있겠나?”

“처음 보는 천입니다. 실크 같은데. 이렇게 얇고 반투명한 실크는 처음이군요. 사실상 일종의 레이스 같은데요. 평직 레이스로 옷을 만들다니…… 정말 요정님 옷 같아요.”

시녀는 경탄하며 옷을 구석구석 살폈다.

“불가능한가?”

“음, 흔적 없이 수선은 불가능합니다. 비슷한 실도, 천도 없으니까요. 자국이 좀 남아도 좋다면 레이스 바늘로 어떻게든 될 것 같습니다.”

“약간의 자국은 괜찮다. 누더기 상태보다야 낫겠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부탁하지.”

이후로 삼 일을 거의 자지 않고 꼬박 수선에 매달린 시녀는, 나흘째 아침 옷을 도로 들고 왔다.

얼핏 보기에 옷은 멀쩡했다. 찢어진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비슷한 실로 찢어진 부분을 가닥가닥 엮어서 겉면에서는 수선 자국이 드러나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조금 달라진 걸 알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기대 이상이군.”

“밑단은 일부분이 아예 떨어져 나갔습니다. 어긋난 부분을 잘라서 길이를 줄였습니다. 그리고 남은 천으로는 리본을 만들었습니다.”

만족스러운 결과에 그렌은 그녀를 칭찬하고 바로 요정에게 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요 며칠 사이 급격히 마른 요정은 침대 맡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며, 팔, 다리 등등. 전신의 관절이 완전히 풀려 생기가 없었다. 최근 자해를 동반한 발작이 잦아든 이유도 생기 부족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요정은 삶을 거부함으로써 자살을 감행했다.

“흠.”

그렌은 요정의 곁에 서서 잠시 헛기침을 했다.

역시나 요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상자를 열어 옷을 꺼냈다. 살짝 털어 자락이 아래로 떨어지게 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아니 효과가 있다면 요정은 얼마나 순수한 성품을 가진 건가. 그런 자에게 지독한 폭력과 성적 학대를 두루두루 선사한 황제의 충실한 종복인 자신이 훔친 소유물을 선심 쓰듯 건넬 자격이 있는가.

카론과 달리, 내면에 자리 잡은 양심과 도덕심이 그렌을 괴롭혔다.

“요정님.”

요정의 눈앞에 옷을 내밀었다. 봄철 꽃잎 같은 옅은 분홍색 옷이 시야에 들어오자, 무저갱 같은 요정의 눈동자에 작은 빛이 들어왔다.

“아…….”

엷은 날숨에 미미한 탄성이 깃들었다. 깊게 그늘진 눈매가 천천히 깜빡였다. 제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로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이. 한 번. 두 번. 눈을 감았다 뜬 요정은 삐딱하게 기울어진 목을 제대로 가누었다. 그리곤 고통이 깃든 시선을 들어 그렌을 봤다.

“아.”

슬픈 탄식이었다. 옷을 향해 움찔거리던 손가락도 다시 힘을 잃었다. 미약한 변화가 전하는 절망감이 너무 깊어, 그렌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아니요. 다시 빼앗아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요정님, 당신의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다가갔다. 로브처럼 펼쳐지는 옷자락으로 드레스 자락 밖으로 나온 요정의 푸석한 종아리를 덮었다. 그러자 허옇게 뜬 입술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느릿느릿 다가왔다. 옷감이 얇아서 가벼운 데도 요정은 힘겹게 그것을 끌어당겼다.

“우움.”

미간에 얕은 주름이 생기고 눈가를 찡그렸다. 입술도 앙다물었다. 이윽고 옷을 품으로 끌어당긴 요정은 보드라운 천에 제 뺨을 비볐다.

“그리고 이것을.”

자투리 천으로 만든 리본을 보여 주자 요정은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을 들어 리본을 가져갔다.

검은 밤하늘 같은 눈동자에 안도와 기쁨이 슬쩍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옷을 매만지던 요정이 그것을 다시 내밀었다.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고개를 저으며 그렌은 오히려 상자를 요정의 곁에 놓았다. 그러자 요정은 다시금 그렌을 쳐다봤다. 상자, 옷, 리본을 번갈아 가리키며 요정에게 미는 손동작을 취했다. 그러자 허옇게 말라 뜬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꺼멓게 꺼진 눈가도 파들파들 떨렸다. 그렌은 요정이 안심하고 울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었다.

문을 닫기 직전, 요정은 옷과 리본을 한껏 끌어안으면서 마른 등을 떨었다. 저 아름답고 애처로운 분이 더는 상처받는 일이 없기를. 그건 다만 그렌만의 바람은 아니었다.

“요정님이 생기를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담당 시녀가 눈가를 훔쳤다. 그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시종 또한 드러난 동정심을 지우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진중한 시종과 시녀가 말도 통하지 않는 요정에게 빠져들어서 놀랍지만, 한편으로 무척 자연스럽기도 했다.

심각한 인간 혐오 주제에 첫눈에 요정에 흠뻑 빠져들어 냉큼 잡아 온 것으로도 모자라 성별도 가리지 않고 달려든 누구도 있지 않은가.

황제가 정체 모를 여자를 데려왔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그것도 직접 안아 올 줄은 전혀 몰랐지.’

그날, 낯선 이를 거리낌 없이 만지는 카론의 모습을 보고 받은 충격이 너무나도 커서 아직도 생생했다. 타인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가 남을 직접 만진다고? 그것도 정체 모를 낯선 여자를?

사람 만지기가 싫은 나머지 자연스러운 성적 충동을 단순한 폭력으로 풀어내던 그 카론 유스키아가?

인간 혐오가 심한 카론이 요정을 대뜸 제 잠자리 상대로 낙점한 것도 충격이었다.

나중에 남자로 밝혀지긴 했으나, 요정을 대하는 카론의 태도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강한 흥미와 집착을 보였다. 그게 그렌을 당황케 했다. 아무리 중요한 쓸모가 있다지만. 카론에게 상처를 입히고도 끔찍한 죽음을 맞지 않은 첫 번째 존재였다.

갑자기 서궁에 가둬 서서히 말려 죽이려나 싶었더니 수시로 찾아서 동침하질 않나. 푹 빠진 티가 나는데 또 갑자기 요정에 관한 언급을 일절 금지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저주 인형을 발견하는 즉시 요정을 때려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정치적 이용 가치가 크다고 해도 요정을 향해 발휘하는 놀라운 인내심을 설명하긴 역부족이었다.

“성적 흥미를 느낀 대상이라 특별한 걸까.”

카론은 침실 상대를 정하는데 매우 신중했다. 암살 시도 때문에 그렇기도 했고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성장 과정으로 인해 남녀 불문하고 살을 부대끼는 걸 혐오했다.

딱 한 명.

카론의 성적 흥미를 끈 여자가 있긴 했으나, 최악의 방식으로 배신했다. 카론이 가장 신뢰하는 두 명의 부관 중 아서를 제외한 다른 한 명과 놀아난 것이다.

아끼던 여자는 카론이 직접 목을 벴다. 부관 또한 사형이 거론되었으나 자작에 이르는 귀족에 개국 공신으로 대단한 공로를 세웠다는 귀족원의 만류로 사형은 면하고 대신 평기사로 좌천했다.

타인과의 평범한 애정 관계를 망치는 데에 지극한 영향을 미친 그 사건으로 인해 카론의 인간 불신과 혐오는 더욱 커졌다. 그런 쪽으로 상대를 두지 않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무정한 황제는 무정한 정치를 할 것이고, 무정한 정치는 결국 무정한 세상을 만든다. 당장은 별다른 문제가 없지만, 장기적으로는 무척 우려스러웠다. 게다가 그렌은 황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카론이 사랑을 알길 원했다.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충실한 애정을 겪지 못해 심각하게 결여된 인간을 그대로 두고 보는 건, 전직 성직자였던 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비참하게 죽은 유스키아를 위해서라도. 그 애의 자식에겐 제대로 된 사랑을 가르치고 싶어요.”

아내 올리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렌도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의외의 방식으로 느닷없이 출현한 요정은 그렌의 기대를 훨씬 능가했다. 하지만 당장 카론이 해댄 짓을 보면 별로 가망이 없어 보였다. 폭력을 줄이고 대신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도록 유도했는데, 결국 폭력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았다. 카론을 상대하느라 요정은 나날이 비쩍 말라갔다. 어느 정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할 시점이었다.

의외로 카론이 먼저 발길을 끊겠다 선언했다. 관련 보고조차 듣지 않겠다 했다. 어떻게 보면 절제 못한 자신을 다잡는 방법이거나 요정에게 너무나 빠져 버린 데 대한 경계일 수도 있지만, 그만큼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서가 백방으로 요정의 출신과 정체를 알아보는 중이다. 성과는 미미했다. 요정이 나타난 유적을 샅샅이 뒤져도 별다른 연결 고리가 발견되진 않았다.

‘정말로 요정이라서 어떤 숨은 의도 없이 나타난 거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카론을 마구 흔드는 폭풍인 요정이 전 여자처럼 그를 뼈아프게 배신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이젠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도 없다. 그렌은 묵직한 한숨을 토했다.

적어도 무엇 때문에, 왜 이곳에 온 건지 정도는 확인하고 싶었다. 혹여 뭔가 염려할 이유라도 있다면 카론이 알기 전에 제가 먼저 아는 것이 중요했다. 요정 본인을 위해서도 안전한 길이었다.

“요정과…… 말이 통한다면?”

그렌은 요정의 상태가 좋아지는 즉시 말을 가르쳐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기 위해서 많이 안정될 때까진 자극을 주지 않고 조용히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천만다행이게도 넋을 놓았던 요정이 고친 옷을 보고 반응했다.

실망 속에서도 희망이 생겼다. 카론이 발을 끊은 지금, 꼭꼭 닫힌 요정의 마음을 열 기회였다.

“영영 늦지 않은 거면 좋으련만.”

자애를 모르는 황제를 위해서.

그리고 그의 관심을 끈 대가로 지독한 고초를 당한 요정을 위해서라도.

* * *

스스로가 역겨워 몸부림치며 사지를 쥐어뜯자 곧 궁인들이 와서 뜯어말리다가 종국에는 침상에 결박했다. 분홍이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발광했다.

어찌 이럴 수가. 어찌. 개종자에게 다리를 한껏 벌리고 놈을 맞이하기 위해 애썼던 스스로의 모습이 생생했다. 귀한 분의 정인으로 맞이했어야 했던 첫 희락기를 그리 보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비통한 울음에 해가 뜨고 달이 졌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시간이 흐르자, 상선이 다가왔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으나 초점 없는 시야에 비치는 것이 있었다. 봄철 꽃잎 같은 옅은 분홍색의 옷.

“아…….”

엷은 날숨에 미미한 탄성이 깃들었다. 깊게 그늘진 눈매가 천천히 깜빡였다. 제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로 그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이. 한 번. 두 번. 눈을 감았다 뜬 분홍이는 삐딱하게 기울어진 목을 제대로 가누었다. 그리곤 고통이 깃든 시선을 들어 상선을 봤다. 옷을 향해 손이 절로 나갔지만, 쉬이 쥘 수도 없었다.

“ḚẔ∐∀.”

뭐라 중얼거린 그가 침대에 다가와 옷자락을 다리에 덮어 주었다. 만져도 된다는 뜻이겠지. 분홍이는 힘겨운 손놀림으로 그것을 슬쩍 끌어당겼다. 이윽고 품에 안고 보드라운 천에 뺨을 비볐다. 있는 힘껏 내음을 맡은 뒤 상선에게 옷자락을 내밀었다.

“!⋙∐ỻỻ∀Ṭ.”

고개를 저은 상선이 오히려 상자를 분홍이의 곁에 놓아주었다. 알 수 없는 말과 손동작에 입술이 떨렸다.

“내가…….”

“∀⁋∭⁅.”

“내가 가져도 되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다시 부여잡자 상선이 고개를 끄떡이고 물러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옷이 다 젖을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못한 분홍이는 한참 동안 옷을 끌어안고 집 생각에 잠겼다.

“후우우…… 흐음.”

오랑캐 솜씨는 실로 나쁘지 않았다. 티가 영 나지 않는 건 아니어도 겉보기엔 멀쩡했다. 조각을 찢어 멧새 다리에 달아 준 덕에 모자란 부분을 삭둑 잘라 단을 줄이고, 남은 것으로는 고운 댕기를 만들었다.

댕기.

분홍색 댕기는 누님을 떠올리게 했다.

걸걸한 장부인 여운 누님은 무예가 뛰어나서 일찌감치 검술, 기마술을 비롯한 각종 무예를 익혔고 무과에 단번에 장원 급제했다. 영민한 문관으로서 앞날이 창창한 맏형님과 쌍을 이루어, 명가의 위상을 드높이는 무(武)의 귀재였다.

장수로서 멀리 훈련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눈에 들어와 냉큼 사 왔노라고. 아직 어깨밖에 오지 않은 동생의 머리를 어설픈 솜씨로 쫑쫑 땋아 댕기를 매어 주었다.

“이쁘다. 내 동생.”

“고맙습니다. 누님.”

“누님이라고 부르지 말랬잖아.”

“누야.”

누야라고 부르면 누님은 너무나도 기뻐했다. 쪼그리고 앉아 분홍이의 뺨에 제 뺨을 비비곤 했다. 그리곤 누야란 말이 듣고 싶어 과자며, 고운 비단신이며. 누님은 매번 제 것만 몰래 사 와 안겼다.

“너는 불쌍한 오라비들은 뵈지도 않냐?”

“양인 따위에게 사 줄 거 없수다. 거, 우리 분홍이 탈라. 햇빛 가리게 이쪽으로 좀 서쇼.”

“저…… 저 방자한 녀석!”

“같은 양인끼리 징글맞게 이러지 맙시다, 예? 오라버니들도 분홍이만 챙기잖소.”

도운, 강운 두 형님에게는 무척 냉정한 누이인 여운 누님은 분홍이에게만은 너무나도 자상한 누야였다.

“누…… 야.”

눈시울이 뜨거웠다. 마른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전신의 기력이 다해 눈물 한 방울 짓기도 힘겨웠다.

누님이 자신을 얼마나 찾아다닐까. 세 부모님, 두 형님 또한 걱정이 태산이겠으나. 누님은 그 이상이었다. 여자 양인이라 경외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우뚝 나아가는 외로운 대장군은 제 동생에게 특히 정을 많이 주었다. 아끼던 동생이 없어졌으니, 불같은 성정을 참지 못하고 행방을 알아보다가 혹여 태손 마마에게 달려들 수도 있었다.

‘부디 상심이 크지 않으셨으면…….’

가망 없는 바람을 곱씹으며 댕기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 * *

늘 보던 궁녀가 음식이 든 소반을 들고 왔다.

혹여 옷을 빼앗을까 봐서 분홍이는 댕기와 옷을 등 뒤로 끌어당겼다.

“⋙∐∀Ṭ”

오랑캐 말인데도 어쩐지 어조가 낮고 부드러웠다. 궁녀는 소반을 분홍이 손에 닿은 거리에 조심스럽게 올려 둔 후에 싱긋 웃었다. 비웃음이나 냉소와는 다른 순한 미소였다. 놀라서 빨라졌던 맥박이 천천히 제 속도를 찾았다.

소반엔 부드러운 화권과 뭉근하게 끓인 고기 채소죽이 있었다. 궁녀가 음식을 권했다.

입맛이 크게 돌지는 않았으나, 음식을 계속 거부하기에는 옷이 마음에 걸렸다. 개종자 놈이 소중한 옷을 쫙쫙 찢으며 뭐라도 먹으라고 윽박질렀으니. 곱게 수선한 옷이 또 갈기갈기 찢어지는 건 싫었다.

억지로라도 한 수저 떴다. 전에 먹던 것보다 훨씬 연하고 맛이 순해 넘길 만했다. 위가 워낙 쪼그라든 터라 한 번에 많이 먹기는 도저히 무리였다. 그래도 작은 화권 하나를 죽 반 그릇과 함께 비우자, 궁녀는 기쁜 듯이 물잔을 내밀었다.

가져온 물에서 은은한 차향이 올라왔다. 오랑캐 놈들은 붉은색 차를 마셨는데 그걸 약간 탄 듯했다.

오늘따라 궁인들이 자신을 대하는 표정과 태도가 너그러웠다. 그들의 우두머리를 생각하면 모진 욕을 퍼부어도 모자라건만. 때때로 나타나는 상선 영감과 담당 궁녀는 그래도 분홍이를 위하고자 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아마 개종자가 발길을 뚝 끊은 일과 상통할 터.

“고맙…… 소.”

물잔을 내려놓고 감사를 표했다. 궁녀는 알아들은 듯이 빙긋이 웃고는 여기저기 정리한 후 소반을 들고 다시 나갔다. 끝에 곁눈으로 분홍이를 슬쩍 흘겨보는 눈에 걱정이 엿보였다.

아아.

그때 알았다. 개종자가 관심을 끊어 궁인들이 이젠 제 편한 대로 분홍이를 대할 수 있음을. 그들은 그저 악독한 상전의 뜻에 따르느라 분홍이에게 모질었던 것뿐이었다.

이대로 영영 개종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괴로움에 울부짖은 일은 더는 없을지도. 두 번 다시 누리지 못하리라 여겼던 작은 평안을 찾을지도.

그 이후 분홍이는 궁녀가 들고 오는 소반을 마다하지 않았다.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었고 마실 수 있을 만큼 마셨다. 궁녀는 이내 분홍이의 팔과 다리에 묶은 끈을 조심스레 풀어 주었다. 상선도 없는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므로, 상전의 허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Ṭ”

궁녀의 애쓴 마음을 배신하기 싫어, 자해는 그만두었다. 대신에 방을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풀이 웃자란 마당을 내다보며 볕을 쬐었다.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지났다. 궁녀는 때때로 따뜻한 깔개를 가져와 바닥을 덮었다. 몸이 식을까 오랑캐식 장포를 가져와 어깨에 걸쳐 주기도 했다. 맨발을 보더니 도톰한 천으로 만든 부드러운 신도 가져왔다.

가장 달가운 것은 작은 화병에 꽂은 꽃과 잎사귀였다.

화려한 겹꽃이 부용 같기도 하고 목단 같기도 했다. 작으나 옹골찬 꽃송이를 볼 때면 저절로 표정이 풀렸다. 제가 자라던 별당 마당에는 구석마다 영산홍, 능소화, 봉숭아, 붓꽃. 가을에는 큼직한 국화가, 겨울에는 빨간 동백꽃이 쉬지 않고 제 모습을 뽐냈다.

“흐음.”

꽃에서는 햇볕 냄새가 났다. 벌과 꽃등에가 날아들어 우르르 무리 지어 피는 색색의 채송화를 건드리는 따사로운 봄날이 떠올랐다. 그러면 냉궁의 차가움도 멀어졌다.

“∐∀, ⁋∀Ṭẞ?”

궁녀가 뭐라 물었다. 말은 모르지만, 손길이 꽃을 향하기에 분홍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합니다. 큰어머니께선 온 집 안에 꽃피우는 걸 좋아하셨지요. 그래서 마당 구석마다 예쁜 꽃망울이 넘쳤습니다.”

궁녀 또한 말을 알아듣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이하게도 뭔가 통하는 기분이었다. 뜻이 통하다니. 평생을 다정다감 속에서 살았건만, 지금은 그게 아득한 옛날 같아 알몸도 내보인 궁녀와도 사소한 마음을 나누는 일도 몹시 어색했다. 괜히 멋쩍어서 웃음이 스르륵 잦아들었다.

궁녀가 갑자기 돌아서 나갔다. 그녀가 멀어지자 갑자기 가슴이 서늘했다. 혼자 있는 게 싫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저도 모르게 입구로 향했다. 다행히 궁녀는 멀리 간 건 아니고 밖에 있는 다른 궁인과 뭔가 낮게 말을 나누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만 내밀었다.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지만, 아니 했더라도 알아들은 일이 없지만.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여긴 무려 냉궁이 아니던가. 냉궁 밖으로 발가락 하나라도 내었다가 큰 경을 칠 일이었다. 자신도 그렇거니와, 애먼 궁녀도 큰 벌을 받을 터.

궁인은 약간 곤란한 듯 분홍이를 살폈다. 궁녀는 뭐라고 재차 속삭이더니 도로 이쪽으로 다가와 분홍이 곁에 섰다. 그리곤 손을 밖으로 뻗었다.

“네?”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궁녀가 가리킨 방향은 밖으로 향하는 통로였다. 크게 뜬 눈으로 궁녀를 보고 궁인도 살폈다. 궁인은 미간을 찡그렸으나 이내 끙 앓는 소리를 하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묵인한다는 뜻이었다.

“⋙∐∀.”

궁녀가 저를 살짝 재촉했다. 다급한 표정이 얼른 가자는 듯했다.

“이…… 이래도 되나?”

물었으나,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한 발을 내디뎠다. 조용한 복도에는 여전히 셋뿐이었다. 상선도 없고, 개종자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 이국의 왕궁 밖으로 영영 나가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냉궁은 벗어날 수 있다.

신선한 충격과 감격에 심장이 버거웠다. 분홍이는 다시금 발을 내디뎠다.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서늘하고 무서운 방이 뒤로 멀어졌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뺨이 경련하고 입술이 떨렸다. 무릎이 풀려 휘청거리자, 궁녀가 바로 잡아 주었다.

“후웃.”

절로 웃음이 샜다. 빙긋 웃으면서 궁녀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향했다. 억겁 같은 시간이 인고하고 나니 차가운 냉궁을 나갈 일이 생겼다. 역시 살고 볼 일이다.

창이 없는 감옥 같은 복도를 지나자 곧 밝은 공간이 나왔다. 한쪽은 아름드리 기둥이 줄줄이 이어졌고 다른 쪽은 벽면이 이어진 통로였다.

“놀랍구나. 돌로 큰 궁을 짓다니.”

제 옷을 기운 솜씨도 그렇거니와, 눈에 걸리는 기둥과 벽면마다 조각과 그림이 훌륭했다. 완전히 오랑캐로만 알았지만, 큰 나라를 이룬 만큼 문명도 출중했다. 다만 그림 속 남자도 여자도 얇은 옷에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어 민망하기도 했다.

벽에 걸린 요란한 채색의 도화도 마찬가지로, 오랑캐식 옷을 꼼꼼히 입힌 그림도 있는데 때로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풍만한 여인이 긴 의자에 늘어져 있는 모습도 있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호화찬란하건만, 군자로서의 덕은 없구나.”

새삼 이 궁의 주인이 누구인지 실감했다. 본데없고, 인정 없으며, 무식하고 냉혹한…… 색마 따위가 상전으로 앉아 있으니. 훌륭한 궁인들이 숨을 죽일밖에.

기분 좋은 날에 혐오스러운 놈을 떠올리기 싫어 고개를 떨쳤다. 못마땅한 도화를 보는 대신 꽃과 나무가 우거진 밝은 마당으로 시선이 향했다. 궁녀와 함께 마당으로 내려갔다.

싱그러운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 예쁘게 반짝였다. 색색의 꽃에는 고향에서 본 것과 똑같은 줄무늬 꿀벌이 윙윙 날아다녔다. 작고 하얀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도 있었다. 멀리 하늘은 파랗고, 하얀 구름은 잔잔히 흘렀다.

황금빛 따사로운 손길을 내미는 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푸석하게 식은 살갗에 은은한 열기가 돌았다.

“머나먼 이국이라도 햇빛만은 고향과 똑같구나.”

빛과 풀과 꽃 사이에서 풋풋한 흙 향내를 맡으면서 고향에서 쬐었던 볕을 한껏 음미하였다. 평안과 고요가 외로운 몸을 포근히 감쌌다.

첫 나들이 이후로 궁녀와 분홍이는 자주 밖으로 나돌아다녔다. 뜰은 내궁 가까이에 있는 외진 곳이라 두어 차례 나가는 동안 한 사람도 마주친 일이 없었다.

후에는 점점 대담해져 조금 먼 곳에 있는 마당까지 갔다. 나와 있는 시간도 제법 길어져 가끔은 신을 벗고 맨발로 풀을 밟다가 지쳐 나무 아래서 잠시 잠을 청하기도 했다.

나무 아래 얇은 천을 펴고 그 위에 앉아 햇빛과 그늘을 번갈아 쬐었다. 나들이를 시작한 이후로 분홍이는 잠이 부쩍 많아졌다. 몸을 움직여서 그런가 했다.

궁녀가 새참을 가지러 간 사이, 분홍이는 신을 벗고 팔을 베개 삼아 누워 꼬박꼬박 졸았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있는 마당 바로 지척에 군자의 덕을 갖추지 못한 궁의 주인이 나타났음을.

* * *

서궁에 발을 끊은 후 카론은 계속 문서에만 매달렸다. 마지막 정벌 후 한동안 요정에게 정신이 팔린 터라 밀린 일이 많았다. 그 덕에 오랜만에 군마를 돌볼 여유가 생겼다. 주인을 알아본 군마 또한 답답한지 연신 푸르릉거리며 앞발을 굴렀다.

“멀리 가진 못해.”

마음껏 질주하고 싶어도 황제 노릇 때문에 그럴 여건이 안 되었다. 대신 불만에 찬 군마를 달래기 위해 황궁 정원 정도는 돌아도 될 것 같았다. 두꺼운 징을 박은 군마 발굽 덕에 정원사가 공들인 완벽한 정원이 망가지든 말든, 어차피 카론이 알 바는 아니었다.

다닥다닥 탓.

가볍게 경보로 걷던 군마는 제 앞을 가로막는 낮은 관목이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다. 커다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사납고 거친 군마를 그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는 카론의 노련한 기마술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라테시온의 황궁은 옛 왕궁을 포함한 여러 궁을 연결한 구조였다. 황제 전용 거주 구역뿐 아니라 그렌이나 아서와 같은 황제를 보필하는 자들의 집무 구역, 친위대를 겸하는 기사단과 기마대의 숙소와 훈련장, 시종과 시녀를 비롯한 일꾼들의 거처로 쓰이는 크고 작은 건물이 이어졌다. 벽이나 낮은 관목으로 구획을 구별하고 또 회랑과 복도가 얼기설기 얽혔다.

현 황제 카론이 삭막한 폐쇄 공간을 매우 혐오했기에 건물마다 창문이 많았으며 남는 공간은 모두 정원으로 가꾸었다. 장애물 뛰어넘기를 즐기는 군마와 함께 크고 작은 회랑과 정원을 맘껏 달릴 수 있었다.

환한 햇살 아래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말을 달렸다. 군마의 체온이 올라가고 카론의 이마에도 작은 땀방울이 맺힐 무렵엔 정궁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작은 정원이었다. 가까이 서궁의 오래된 첨탑이 보였다.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즐거움이 사그라지기 전에 기수를 돌리려 했다. 그때였다.

부스럭.

바로 옆, 성인 허리께까지 오는 관목 울타리 뒤편에서 인기척이 났다. 순식간에 등골이 뻣뻣해졌다. 군마도 숨을 죽이며 눈알을 굴렸다.

조용한 낌새가 정원사나 휴식 중인 시종은 아니었다. 기사는 여기에 있을 리 없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가 황궁에 들어왔다면 확인 후 제거해야 한다.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관목 아래 누군가 숨어 있다면, 그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쪽이 불리했다. 말을 살짝 밀어 멀어지게 한 다음, 몸을 숙였다. 등 뒤에 꽂아 놓은 단도를 빼든 카론은 관목 울타리 곁을 신속하게 걸어 지나갈 틈새를 찾았다.

‘누구지? 암살자?’

울타리는 지척에서 끊겼다. 그 앞에 아름드리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햇빛을 바로 받는 나무 아래 짙은 그늘이 졌다. 기둥에 몸을 가리며 전방을 확인했다.

카론이 있던 그늘진 쪽과 달리 햇살이 희게 내리쬐는 반대편 풀밭 위에 도톰한 깔개가 있었고 그 위에 밝은 색깔 치맛자락이 늘어졌다. 옷자락 밖으로 부드러운 실내화를 신은 발 두 개가 나왔다.

하얗게 빛나는 발등에는 파리한 핏줄이 비쳤다. 그 위로 고운 피부로 감싼 매끈한 발목이 이어졌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유려한 실루엣을 가진 허리 위로 미끄러진 맨 팔과 단정한 어깨, 그리고 경동맥이 도드라진 목이 이어지고, 아리따운 얼굴이 보였다.

옅은 복숭아색 뺨과 진주색 이마 가장자리로 까맣게 반짝이는 솜털이 나 있는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요정이었다.

“허.”

긴장이 탁 풀렸다. 카론은 단도를 도로 집어넣으면서 주변을 돌아왔다. 아무도 없었다.

“누가 여기까지 데리고 나온 거지? 그렌인가?”

아무리 죽기 직전이 아니면 보고를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멋대로 서궁 밖으로 데리고 나와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요정을 함부로 데리고 나와 제 눈에 띄게 만든 시종장을 불러 화를 내기 전에, 일단 놈을 치우는 게 먼저였다.

기척을 전혀 숨기지도 않고 놈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요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또 이상한 고집을 부릴 건가 싶어 미간이 구겨질 때쯤.

“흐으으음.”

요정이 뒤척이며 낮은 숨을 길게 쉬었다. 여자와 달리 드레스가 푹 가라앉은 가슴께가 살짝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늘어진 팔과 달리 다른 쪽은 접어서 머리에 대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잔잔한 바람이 이마의 솜털을 살랑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쭉 뻗은 코 옆으로 풍성한 속눈썹 한 쌍이 가지런하게 났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날숨이 규칙적으로 샜다.

“하.”

이번엔 터진 작은 탄성은 대단히 어이없어서였다. 황궁이 비교적 안전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적으로 마음을 놓은 곳은 아니었다. 사방이 뻥 뚫린 외진 정원은 홀로 무방비하게 낮잠 잘 곳이 못 되었다. 불순한 마음을 품은 시종이나, 불량한 기사 따위가 몰래 잡아가도 아무도 모를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요정은 제게 잡힌 상태가 아니던가. 태평스럽게 낮잠을 즐길 게 아니라 도망치다가 발각되는 편이 자연스럽다.

“도대체 어떻게 자랐기에…… 이렇게 순진한 건지.”

태어난 순간부터 삶이 곧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던 카론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무척 어이없고, 한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귀엽기도 했다.

귀여움은 별로 익숙한 감각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보고 겪을 일이 전혀 없었으며 만약 배운다고 해도 그간 삶을 되짚어 보건대 귀여움을 모르는 편이 생존에 유리했다.

요정은 카론에게 신기한 감각과 감정을 선사했다. 무해하고 순수해서, 그래서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제 경계심을 지우고 너그러운 태도를 끌어낸다.

사랑받는 존재란 이런 것인가. 어딘가에 있을 요정의 부모는 제 자식을 사랑으로 키웠는가. 위협과 불안이 아닌 호의와 평안에 싸여 무탈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카론과 달리 요정은 벌떡 일어나 독이 묻은 단도를 목에 대지 않는다. 대신 낮은 숨을 쉬며 잠을 청할 뿐이다.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기척에 놀란 풀벌레 두어 마리가 밖으로 튀었다. 그래도 요정은 그대로였다.

서궁의 습한 그림자 속에서 푸석푸석하고 파리하게 죽어 가던 안색도 약간 돌아왔다. 볕을 받은 부분이 발그레했다.

“햇볕 때문인가.”

그런가 하면 카론이 만든 그늘 속에서도 요정은 반짝거렸다. 오죽 빛이 났으면 하얀 나비가 팔랑거리며 다가와 요정의 귓바퀴 위에 앉았다. 그래도 간지럽지 않은지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노라니 어쩐지 손을 대고 싶어졌다.

슬며시 내밀던 손을 움찔 멈췄다. 군마의 고삐를 쥐기 쉽게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장갑을 벗은 후 검지 마디로 요정의 턱 언저리를 슬쩍 스쳤다.

“으응.”

나비가 예민한 귀를 간지럽혀도 가만히 있던 그가 카론의 손에는 옅은 뒤척임으로 반응했다. 반사적으로 숨을 멈췄다. 풍성한 검은 속눈썹이 정결한 눈썹과 함께 옴짝거리는 내내 카론은 석상처럼 굳었다. 이윽고 뒤척임이 잠잠해지고 요정은 다시 고요한 낮잠의 세계로 빠졌다.

“후우.”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각하면 황당했다. 이까짓 요정이 뭐라고. 잠을 깨울까 조심하다니.

한편으로 깨지 않아서 괜찮기도 했다. 눈을 뜨면 또 빽빽 고음을 내지르거나, 새침한 눈빛으로 하찮은 반항을 시도하여 짜증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니.

혹은 더더욱 기분 나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더러운 짐승을 보는 듯한 겁먹은 시선 같은.

그에 비하면 태평한 모습이 나았다. 생기 있는 무구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처음 요정을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날 폐허에서 요정은 순진하고 호의 넘치는 태도로 카론을 향해 빙긋이 웃었다. 밤하늘의 별을 한껏 박은 듯한 눈을 반짝이며.

밤 하늘색 눈동자가 태양 아래서는 어떤 빛깔로 반짝일까. 내심 궁금했으나 지금은 참기로 했다. 흐드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빛에 조금 약한 카론의 푸른 눈을 충분히 괴롭히고 있었다.

모든 색을 모으면 검은색이 된다. 미지의 신이 모든 색을 섞어 요정을 빚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흑발 위에서 자잘한 모래알처럼 튀는 햇빛이 무지개가 무색할 만큼 다채롭게 빛나진 않을 테니.

검은 보석으로 만든 실이 돋아난 작은 머리통에 손을 댔다. 의외로 서늘했다. 매끈한 감촉이 거친 손바닥을 달랬다. 손마디를 굽혀 손등으로도 쓸어 보다가 한 줌을 거머쥐었다.

귓바퀴에 앉아 있던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갔다.

사르륵.

손가락 사이로 보드랍게 빠져나간 머리카락이 요정의 뺨 위에 내려앉았다. 검지로 조심스럽게 뺨을 그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아가르타.”

낯선 이름을 불렀다. 요정이 반쯤 미쳐 감겨들던 그 날. 요정이라는 막연한 표현보다는 지극히 사적인 호칭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떠올린 이름인데 아직 머릿속에 남은 모양이었다.

“아가르타.”

두 번 불러도 요정은 인형처럼 반응이 없는데, 이상하게도 제 귀에 열이 올랐다. 아무래도 이름이 연상시키는 상황이 그렇다 보니. 덩달아 입꼬리도 이상하게 비틀렸다.

날아간 나비가 동료를 이끌고 왔다. 서너 마리가 주변을 팔랑팔랑 날아다니다 기어이 흩어진 머리카락에 내려앉았다. 하얀 날개를 깜빡깜빡하는 광경을 보았다. 하찮은 나비도 멋대로 만질 수 있는 요정을, 하물며 그 소유주인 제가 만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카론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고개를 가까이 대자 옅은 숨결이 느껴졌다. 눈앞엔 다소 창백한 피부에 휩싸인 광대가 가득했다. 가장 튀어나온 부분에 발진처럼 붉은 기가 비쳤다.

조용하게 잠든 모습을 가만히 보노라니 아까 들었던 의문이 되살아났다.

도대체 요정은 왜 이렇게 태평한 거지? 가두고 때리고 몸이 부서지도록 거칠게 범했는데. 그런 일을 당하고도 이렇게 무방비하게 낮잠을 잘 수 있는 건가.

황궁은 카론의 영역이며, 언제 어디서든 제가 나타날 수 있음을 분명히 알 텐데. 이런 느긋한 태도는 저 작은 몸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걸까.

제가 가한 갖은 채찍질이 무색했다. 희게 질리고 마른 몸에는 분명히 고초의 흔적이 남았는데. 요정은 저를 길들이겠다고 날뛴 카론을 아주 우아한 방식으로 엿 먹였다.

뺨을 후려쳐 느긋한 평안을 산산조각 내면 어떨까. 충격과 공포에 어우러진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며 벌벌 떨겠지. 상상만으로도 뒤틀린 만족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동시에 몹시 불쾌하기도 했다. 저를 꺼리는 태도가 기분 좋을 리 없으니.

손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는 광대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뺨은 예상보다 차가웠다. 기억 속에서는 꽤 뜨거웠던 것 같은데.

더운 숨과 아찔한 신음으로 점철된 상황과 고요한 정원에서 낮잠을 즐기는 상황이 달라서 그런 것일까. 혹은 붉은 기가 도는 단정한 입술은 조금 더 따뜻할지도.

시선이 입술로 떨어졌다. 흰 턱과 어우러진 단정한 입술을 보자 손으로 우악스럽게 부여잡아 벌리고 싶었다. 살짝 벌어진 입 안에 든 혀를 산채로 씹으면 경악이 서린 채로 열을 올리겠지.

얇은 옷을 찢어 버리고 태평하게 늘어뜨린 다리를 벌리고, 풀벌레가 달아나도록 거칠게 범하면서 너는 내 소유물이라고. 숨을 쉬는 것조차 라테시온의 황제 카론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재차 확인시키고 싶은 난폭한 욕정도 치솟았다.

요정의 잠을 굳이 깨우고 싶지 않겠다는 마음과 거칠게 유린하고 싶은 충동이 뒤엉켜 기분이 영 이상했다. 단호한 처우 대신 유보적인 제 태도 또한 어색했다.

“이런 건 진짜…… 성미에 안 맞아.”

일단 깨울까? 혹은 이대로 자리를 뜰까 고민하는 사이. 뒤에서 인기척이 나타났다.

즉시 몸을 세우고 단도를 빼 들었다. 카론이 들어온 쪽과 반대편으로 난 정원 입구에 시녀가 있었다.

“너는.”

“폐…… 폐하.”

새파랗게 질린 시녀는 손에 든 바구니를 내려놓고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요…… 요정님은…… 그러니까.”

벌벌 떨면서 설명하려고 애쓰는 꼴이, 아무래도 요정이 여기서 자는 이유가 저 시녀 같았다. 주제넘은 짓을 벌인 데 대한 엄격히 문책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면 요정이 깬다. 카론은 현재 요정을 당분간 보지 않겠으며, 그에 관한 보고도 일절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자는 걸 건드리는 꼴을 시녀가 보았다. 시녀를 죽여서 함구령을 내리는 처사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다소 지나쳤다. 자다가 피를 맞은 요정이 발작할 터.

카론은 벌벌 떠는 시녀를 향해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것은 곧 제 입술 앞에 세워졌다.

“넌 나를 본 적이 없다.”

“예? 아, 예.”

시녀는 바로 알아듣고 머리를 조아렸다.

카론은 시선을 내려 요정을 물끄러미 봤다. 미간에 주름이 생기고 눈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보아 금방 깰 것 같았다.

바로 뒤돌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관목 울타리를 넘어가자 근처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던 말이 다가왔다. 콧김을 뿜으려는 놈을 콧잔등을 쓰다듬으며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조용히 말 위에 올라타자마자 하얀 나비 몇 마리가 팔랑팔랑 날아올랐다. 요정의 머리카락에 앉았던 놈들이었다. 요정이 깬 이상 가까이에 있으면 반드시 들킨다. 멍청한 짓을 더 하기 전에 카론은 묵묵히 자리를 떴다.

‘미쳤군.’

돌아오면서 카론은 제 상태를 냉정하고 엄격하게 판단했다. 당분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요정을 발견한 즉시 자리를 뜨거나, 그대로 요정을 깨워 두 번 다시 서궁 밖으로 못 나오게 해야 한다.

잘 알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하다가 시녀가 정원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몰라 모습을 들켰다.

이런 제 상태를 정의할 표현이 부족했다. 그래서 흔한 단어를 되뇔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미쳤다고.

* * *

잠에서 깨어난 분홍이는 시녀를 보자마자 물었다.

“자는 동안 내 머리를 쓰다듬었나요?”

꿈결에 분명 누군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이 따뜻하고 다정하여 마치 고향 집 별채 마루에서 잠을 잔 듯했다. 그럴 때면 큰엄마, 엄마, 형님, 누님. 가끔은 일찍 퇴궐하신 아버님이 들르셔서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이곳에 그런 다정한 사람이 있다면 필시 눈앞의 궁녀일 터.

“고마워요. 덕분에 기분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고마움에 빙그레 웃어 보였다. 궁녀는 약간 난처한 듯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필시 몰래 쓰다듬으려다 들켜서 그러리라. 분홍이는 그렇게 여겼다.

해를 받으며 좋은 꿈을 꾸고 단잠을 자서인가. 마음이 한결 평온했다. 그러나 햇볕으로 제법 모은 기운은 밤으로 냉궁에 들어오자마자 또 금방 식었다. 두툼한 이불을 덮어도 영 소용이 없어 그럴 때는 제 옷을 꺼내어 품고 잤다. 손에 댕기를 꼭 쥐고서.

다음 날도 오전 반상을 물리고 마당 나들이를 나갈 채비를 했다. 긴 장포를 덮고 늘 쓰던 깔개를 고이 접어서 들었다.

오늘따라 궁녀가 어쩐지 우물쭈물했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가 영 좋지 못했다.

“오늘은…… 아니 되오?”

밤낮으로 바뀌는 것이 궁궐 사정이라. 그리 들었다. 낮으로 별일 없다고 일찍 퇴궐하신 아버님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야밤에 황급히 입궁하시곤 했다.

아무래도 벼락 맞을 개놈이 뭔 소리를 했나 보다.

“하는 수 없지요.”

장포의 끈을 풀고 깔개는 탁자 위에 도로 놓았다. 갑자기 축 처지는 어깨가 무거웠다. 마당 문 앞에 있는 나무 의자에 대신 앉았다. 마당에 나가면 인형 무덤 자리를 찾을 것 같아 쉬이 나가지 못했다. 대신에 파릇한 이파리를 흩날리는 나무를 봤다. 그러자 찢어진 가지와 새가 떠올랐다.

시선을 두기 애매해 시선을 방 안으로 도로 거두었다. 두꺼운 깔개를 깔고 침상에 두꺼운 이불을 소복이 쌓아도 이상하게 휑한 방 안은 온통 개놈의 그림자였다.

“흐음.”

그저 발치만 보며 한숨지었다. 궁녀가 구해다 준 신이 이제 제법 길이 들었다.

사소할지라도 기댈랑은 접어두고 바랄지라도 위안일랑은 떠나보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서히 곪아 가는 속이 저를 미치광이로 만들 게다. 서늘하고, 무심하게. 그렇게 지내야 하는데.

“내 작은 바람은 언제나 그자로 인해 무산되는구나.”

어제 낮잠을 청한 자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댔다. 따사로운 볕을 맞으며 고이 잠드니 꼭 고향 마당에 누운 것 같아 기분이 퍽 좋았다. 머리를 쓰다듬던 궁녀의 손길도.

제게 잘 대해 주는 이를 곤란케 하고 싶지 않았다. 개종자는 성격이 사납고 괴팍하여 사소한 일로 크게 경을 칠 놈이었다. 실망감을 애써 삭였다. 지금껏 방 안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뭐 하루쯤이야.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사흘이 되었다. 나흘째 아침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일어났다.

“고뿔이 들었나 보오.”

걱정스레 저를 쳐다보는 궁녀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뜨거운 고기죽을 간신히 반 그릇 비웠다. 반상을 내가던 궁녀가 우뚝 멈췄다.

달그락.

반상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그이가 곱게 접어놓은 깔개를 집어 들었다. 침상 발치에 걸쳐 놓은 장포와 신도 챙겼다. 뭐라 뭐라 전하는 어투엔 걱정이 가득했다.

“괜찮은데…… 그 개놈이…… 윗전이 뭐라 꾸중할 터인데.”

“⋙∐∀.”

궁녀는 침상에 누운 분홍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몸이 무겁지만, 나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궁녀의 안위가 걱정하면서도 발에 신을 끼웠다. 그만큼 나가고 싶었다.

마당은 전과 똑같았다. 햇빛이 한가득 들었고 곱게 친 나무 울타리 모퉁이엔 작은 꽃이 흐드러졌다. 하얀 나비가 팔랑거렸고, 풀벌레가 찌르륵거렸다.

깔개를 펴고 자리를 잡았다. 따사로운 볕을 쬐니 시린 뼈마디가 노곤하게 풀렸다. 궁녀 또한 제 깔개를 들고 와 옆에 폈다. 약간 긴장한 듯 사방을 살피는 모습이 꼭 새끼를 지키는 어미 고양이 같았다.

파르륵.

살랑살랑 이는 바람을 나무를 흔들었다. 자잘한 이파리의 떨림이 꼭 자장가 같았다. 희한하게도 요즘 잠이 퍽 늘었다. 멀리 마당 나들이를 하여 그런가. 혹은 고초로 기름이 쏙 빠진 몸이 다시 살찌느라 그런가.

“흐으음.”

어쨌거나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릴 재간이 분홍이에게는 없었다. 모로 누우며 팔을 베자 죄인처럼 풀어 헤친 머리가 좌르륵 펴졌다.

“흐으음.”

다시 한번 깊은숨을 쉰 후 분홍이는 잠을 청했다.

애석하게도 오늘은 궁녀가 머리를 쓰다듬진 않았다. 하지만 기분 좋은 볕을 쬐었으므로 속이 제법 따뜻했다. 오후가 되어 냉궁에 돌아가는 채비를 하자 다시 시무룩해졌다. 아이처럼 일희일비하는 일은 좋지 않건만. 심신이 피로하니 자제심도 줄었다. 하기야 개종자가 다스리는 이국에서 자제심을 발휘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마는.

계절이 깊어 서늘한 밤이 빨리 찾아왔다. 방을 밝혀도 깨강정을 내어 먹으며 도란도란 말을 나눌 동기가 없는데, 궁녀는 굳이 오랑캐식 등을 들고 왔다.

유리 항아리에 넣은 등은 호롱보다 밝았다. 초가 보이지 않는데 어찌 작용하는 건지 궁금했다. 심지는 있는데…… 아래서 기름이 솟아오르는가?

시린 눈을 비벼 가며 등을 보는 찰나, 상선이 나타났다. 늘 그렇듯이 짙은 색에 몸에 달라붙는 두꺼운 옷을 곱게 차려입은 상선은 누런 종이로 싼 꾸러미 하나를 내놓았다.

뭔가 하고 눈짓을 했다. 빙긋이 웃은 상선이 꾸러미를 풀자 얇고 큰 종이 뭉텅이가 나왔다. 앞뒤로 색을 칠한 두꺼운 판을 댄 종이는 손가락 한 마디 두께만큼 묶었는데. 바른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넘겼다.

서책이었다.

“아.”

상선은 묵묵히 서책을 들어 분홍이 앞에 펼쳤다. 등불 쪽으로 비추자 알록달록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오색, 아니 무지개보다 훨씬 다채로운 색깔로 구석구석 칠한 그림은 나들이에서 보았던 흉악한 그림과는 전연 달랐다. 이국 옷에 노랗고 밝은 머리를 한 작은 사람이 있고 우스운 표정을 지은 기이한 동물이 이어졌다. 어설픈 모양새에 아기 색동옷 같은 색을 칠한 꽃과 집, 나무도 있었다.

“⋙∐∀. ∑∃ẞẨỾ.”

상선이 뭐라 하면서 서책 더미를 모두 들어 분홍이에게 내밀었다. 그에 생각 없이 두 팔을 내밀자 서책은 고스란히 분홍이에게 넘겨졌다. 보기와 달리 서책은 묵직했다. 버틸 힘이 없어 무릎에 올리자, 한 권이 아래로 떨어졌다.

털썩.

“귀…… 귀한 것을.”

상선은 아무렇지 않게 툭툭 털어 그걸 무릎 위에 얹어 주었다. 그리곤 등을 괜스레 만졌다. 불을 비춰 보라는 뜻이었다.

한 권 들어 조심스럽게 딱딱한 표지를 넘겨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림이 화려하여 눈이 돌아갔다. 곳곳에 재미있는 구석이 많았다. 자세히 보기 전에 두어 장 더 넘겨 살폈다.

글씨로 보이는 건 없거나, 있어도 아주 조금이었다. 아무래도 화첩 같았다. 어른보다는 아이가 보는 귀여운 화첩. 말을 모르는 저는 이국의 문자는 아예 모르거니와 복잡한 그림이 나와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과연 상선은 의중이 깊었다. 궁녀도 그렇거니와, 마음을 써 준 상선이 고마웠다.

“고맙소. 잘 보겠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상선은 빙그레 웃으며 살짝 맞절했다.

이국에도 정이 깊거나 예의 바른 사람이 있었다. 풍습이 다를 뿐 전부 본데없는 오랑캐 놈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예외는 한 놈뿐이었다. 그자를 본 지 꽤 되었다. 이제 저에게 흥이 떨어졌는가. 그렇다면 반가운 일이다. 앞으로도 영영 보고 싶지 않다.

이대로 잊힌 채로 조용히 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일이 없다. 문득 섬뜩한 불길함이 가슴을 얼렸다.

“아니야. 아무것도 바라면 안 된다. 바라건 무엇이든 그자가 빼앗을 것이야.”

상선이 주고 간 서책을 품에 꼭 안으며 분홍이는 진저리쳤다. 숨을 거듭 쉬어 등에 돋은 시린 소름을 애써 떨쳤다.

“흐읍…… 흐으읍.”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자. 그저 목전의 일만 떠올리는 거야.

심호흡을 거듭하면서 서책을 탁자 위에 올렸다. 등불을 매만지고 가장 위에 있는 서책부터 폈다. 정신을 모아 다채롭고 신비한 이국의 화첩에 쏟았다.

신비한 생김새의 집과 사람, 물품을 하나하나가 신기했다. 이국 사람은 고향인 신국과 비슷하면서도 달랐고, 다르면서 같았다.

아궁이 생김새는 고향과 비슷했는데 그것이 방 밖에 있지 않고 방 안에 있었다. 똑같이 도기를 쓰는데 은은한 백자나 청자 대신 모양과 무늬가 제멋대로 화려했다.

윗옷과 아래옷을 나눠 입는데, 윗옷이 짧고 아래옷은 길었다. 속바지를 겉으로 내어 있으며 대신에 두루마기를 무릎까지 내렸다. 가죽신은 발목까지 오는 것과 무릎까지 오는 것 두 가지다.

소, 돼지, 닭이 있되, 닭 외에 시커멓고 큰 새를 길러 먹는다. 꿩은 아니었다. 염소와 양도 있었다.

날붙이는 외날인 도보다는 쌍날인 검이었고, 대부분 허리에 달고 다녔다. 궁은 작고 복잡했는데, 팔목에 달았다. 번쩍거리는 이상한 갑주를 걸친다.

여럿이 앉는 큰 상을 차린 그림도 이었다. 꽃으로 중앙을 장식한 상 위에는 유리잔과 접시가 가득했다. 아직도 사용하기 어려운 식기도 있었다.

침상 그림도 나왔다. 침상에는 아이가 하나씩이었고 둘이 같이 누운 건 아이 부모였다. 침상은 늘 펼쳐 놓는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는 침상을 정리한다. 이부자리를 아예 개어 놓는 것이 아니라 이불을 잘 펴고 베개를 한쪽에 세웠다. 베개는 보통 두 개, 부유한 자는 더 많다.

“아.”

전에 베개 여섯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씁쓸한 웃음이 터졌다. 개종자를 이겨 보겠다고 잔을 깨 파편도 들었더랬다. 저보다 배는 더 나갈 것 같은 거한을 상대로.

“훗.”

헛웃음이 났다. 그때 저는 겁도 없고 생생했는데. 한편으로 시린 한탄도 들었다.

그날…… 무턱대고 못 배운 오랑캐라 여기지 말고 뭐든 꾹 참고 얌전히 개종자가 하자는 대로 얌전히 했으면 고초를 덜 겪었을까?

곧이어 분홍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한들 처지는 비슷했을 것이다. 낯선 땅에 뚝 떨어져 죽을 만큼 드는 무서움도 참고 제 성명, 출신을 밝히고 고이 대했다. 서로 언어를 몰라도 지금 상선과 궁녀와 말 한마디 없이 통하니, 의지와 호의만 있다면 충분히 통했을 터.

이국의 개종자에게는 어진 도량이 없었다. 피눈물 나는 고진을 불러온 근본 원인은 제가 아닌, 바로 그에게 있었다.

밤낮으로 화첩을 보았다. 상선이 뭐라 말을 걸며 다른 화첩도 곧잘 가져왔다. 상선은 그림을 가리키며 무슨 말을 걸려고도 했다. 소통하자는 뜻인데, 애써 주는 성의는 고마우나 애석하게도 분홍이에게는 일일이 답할 기운이 없었다.

겉으로는 좀 나아졌어도 아직 속에 자리 잡은 응어리가 단단했다. 이국인인 상선과 궁녀와 정답게 말을 나눌 심정이 아니었다. 한번 처진 후로는 살짝 올리는 데도 힘이 드는 입매를 파들파들 떨며 억지로 미소했다. 직후 시선을 떨어뜨리면 상선은 더는 방해치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중참을 먹고는 궁녀와 함께 곧잘 마당으로 나갔다. 좋은 꿈을 꾸었던 자리가 좋아 거기로 다시 가고 싶으나 궁녀는 고개를 저어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무슨 뜻이 있겠거니. 마음에 들지 않아도 저어할 이유가 없다.

볕이 잘 드는 풀밭에 깔개를 깔고 이번에는 챙겨 온 화첩을 폈다. 밝은 햇살 아래 봤더니 색깔이 더욱 신비했다. 이국인은 그림을 참 재미있게 그렸다.

기기묘묘한 그림을 보고 또 봤다. 고개가 아프도록 보고 나니 금방 노곤해졌다. 낮잠을 청하자 어느 틈에 베개를 가져온 궁녀가 머리를 받쳐 주었다. 슬며시 표정을 풀어 감사를 표하며 눈을 감았다.

* * *

군마와 정원을 달리는 즐거움에 끼어드는, 원치 않는 훼방이 싫어 카론은 일부러 남쪽으로 향했다. 군마와 함께 충분히 장애물 뛰어넘기를 실컷 즐긴 건 좋았는데. 낮은 담장을 뛰어넘어 작은 정원으로 들어가자마자 화들짝 놀란 시녀를 발견했다.

황궁에서 일하는 수백 명의 시녀 중 카론이 얼굴을 기억하는 소수 중 하나였다. 요정을 감시하는 서궁의 시녀.

“또 넌가.”

시녀 바로 옆에 요정이 누웠다. 모로 누운 허리에 걸친 팔이 호흡에 따라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아주 본격적인 자세였다. 깔개며 베개며. 하루 이틀 나온 솜씨가 아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제 눈에 띈 것을 그냥 넘어갈 순 없다. 말에 탄 채로 가까이 다가갔다. 시녀는 일어날지 아니면 요정의 곁을 지켜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결국엔 무릎을 접어 땅에 붙이고 반쯤 일어선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누가 외출을 허락했지?”

“그…… 그게.”

“그렌인가?”

시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공손히 잡은 손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독단 행동이었다.

“이젠 같잖은 것까지 날뛰는군.”

말에서 뛰어내렸다. 거대한 군마가 지척에서 푸르릉대든 말든, 황제가 나타나든 말든 태평스러운 요정과 함께 있다 보니 시녀 또한 야금야금 간덩이를 부풀린 듯했다.

“요정의 힘이 아주 대단해, 그렇지 않나? 그러니 내 허락도 없이 황궁을 멋대로 돌아다니지.”

“죄…… 죄송합니다. 폐하.”

“가끔 궁금해. 하찮은 벌레들이 죄송할 짓을 왜 하여 나를 귀찮게 하는지.”

새파랗게 질린 시녀를 어떻게 처리할까? 잠깐 생각하는 사이, 발치에 뭔가 걸렸다.

“음?”

책이었다. 얇은 양피 장정에 안에는 고급 물감으로 칠한 아주 고가의 그림책으로 표지가 익숙했다.

허리를 숙여 책을 집어 들었다. 파르륵 넘겨보자 예상한 그림이 순서대로 지나갔다. 익숙한 것이 당연했다. 이건 카론이 서궁에서 나온 직후 사용했던 그림책이었다.

긴 다리를 접어 자세를 낮춘 카론은 잠시 책을 매만졌다. 돌과 벽. 습기와 먼지. 피와 멍. 마녀와 악마 같은 전왕 일가만 아는 어수룩한 맹수 카론을 위해 그렌과 그 아내인 올리아가 직접 구매한 것으로, 원래는 카론의 개인 서재에 꽂혀 있었다.

“이걸 누가 가져왔지?”

시녀에게 물었으나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의 개인 서재에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자의적 판단으로 책을 빼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 시종장 어바인 그렌뿐이다.

“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녀의 불안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죽지 않게만 하라고 했더니. 아예 떠받들어 모시는군. 요정이라고 부르니 정말로 요정으로 생각되나? 이건 정체 모를 이국 남자일 뿐이다.”

시녀는 멋대로 데리고 나오고 그렌은 카론의 물건을 멋대로 가져다줬다. 두 사람은 평소 카론에게 가까이 있던 자들로 정신력이 강하고 냉정했다. 그렇기에 믿고 맡긴 건데.

시선이 요정에 머물렀다. 제법 큰 소리가 났는데도 기절한 듯 깊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무심할 만큼 천하태평이었다. 고래 힘줄같이 단단한 신경에 감탄을 금하기 어려웠다.

“정말 대단해.”

다시 자세를 낮춰 놈의 머리를 잡았다. 조금만 힘을 주면 간단히 부서뜨릴 수 있다. 이 안에 든 건 보통 뇌수와는 필경 다를 것이다. 혹여 사람을 홀리는 힘을 지닌 보석이 우르르 쏟아질 수도.

얼어붙은 시녀를 무시하고 머리통을 슬슬 쓰다듬었다. 그러자 요정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흐으음.”

무구한 아이처럼 옅은 한숨을 뱉더니 기막히게도 카론의 손 쪽으로 이마를 가까이 댔다. 아연함에 카론은 잠시 멍해졌다.

이젠 코웃음도 안 나왔다. 머리통을 비비던 손을 뗐다. 들고 있던 책은 시녀에게 툭 던졌다. 이런 걸 상대해 봐야 저만 더 우스워질 뿐. 차라리 무시하는 쪽이 나았다.

* * *

가물가물한 정신이 사르륵 흩어지려는 찰나, 분홍이는 궁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하고 아기 같은 바람을 가졌다. 손짓으로 청해도 좋을 텐데. 그러기엔 이미 누운 몸이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쑥스러운 바람을 표하는 대신 그대로 잠에 빠졌다.

잠결에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궁녀의 손길이라기엔 기척이 견고하고 무척 컸다. 필시 궁녀는 아니었다.

‘누가?’

슬며시 불안감이 커졌다. 눈을 뜨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 반, 이대로 자는 척하며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 반이었다. 어차피 궁녀가 가까이 있으니.

놀라서 달리던 심장이 천천히 느려졌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군지 모를 이의 손길은 너무 다정하고 달콤했다. 고개를 그쪽으로 돌려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궁녀가 아니라면 누굴까…… 상선인가? 바쁠 터인데.’

시린 외로움을 달래 주는 손길은 고향에 있는 아버님과 누님의 손길 같았다. 혹은 두 분 형님 같기도 했다. 양인의 억센 손이 저를 깨울까 봐서 슬며시 힘을 던 느낌이 똑 그랬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만지는 손길에 가슴에 맺힌 서러움이 한 겹 녹아내렸다. 눈꺼풀이 떨리고 절로 눈물이 샜다. 새삼 눈물이라니. 제가 외롭기는 너무나도 외로운 듯했다.

눈물을 발견했는지, 손길이 이내 이마를 거쳐 눈가로 왔다. 매끈하고 곱기보다는 거칠고 단단한 손가락이 눈 밑을 훔쳤다. 따뜻하고 다감하여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못해도 좋았다…… 그랬는데…….

돌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속 저 아래서부터 왈칵 올라온 신물이 목구멍으로 솟구치는 찰나, 분홍이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웩!”

쓴 물을 한 줌 뱉었다. 흐릿한 눈을 껌뻑이며 황망한 사이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우욱!”

“⋙∐∀!”

깜짝 놀란 궁녀가 벌떡 일어섰다. 그이는 분명 앞쪽에 있었다. 곁에 있던 누군가가 급히 떠나가는 기척이 났다. 구역질로 인해 눈앞에 빨갛고 파란 불이 튀어 누군지 채 보지 못했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무정한 발길이 야속했다.

“저기…… 가지 마…… 웩!”

누군지 얼굴이라도 보여 주시오. 우리 큰형님을 닮았나, 작은형님을 닮았나. 그도 아니면 누님을 닮았나.

구역질을 삼키며 궁녀를 떨치고 급하게 수풀을 헤치고 나간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커다란 말발굽이 수풀을 파헤친 자국만 군데군데 있었다.

“웩!”

신물을 토했다. 상선과 궁녀가 번갈아 곁을 지켰다. 웬 흰옷을 입은 노부인도 들어와선 분홍이를 살폈다. 이상한 탕약 같은 걸 줬는데 냄새만 맡아도 역해서 입을 단단히 닫고 절대로 열지 않았다.

물도 비렸다. 음식은 방에 들이는 것도 싫다.

위장이 빨래처럼 비비 꼬이다 못해 하늘이 빙빙 돌았다. 평안을 찾는가 싶었더니, 이젠 죽을병에 걸렸는가.

이부자리가 더 두툼해지고 벽에는 걸개가 걸렸다. 고운 양털로 만든 신도 주었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고 따뜻한 난로를 쬐어도 분홍이의 가슴에 깃든 얼음덩이는 좀처럼 녹는 법이 없었다. 무기력에 파묻혀 옅게 호흡하다 이대로 죽고 싶었다.

“우욱!”

퍼뜩 몸을 일으켰다. 울컥 올라오는 신물을 침상 옆에 놓인 동이에 뱉었다. 위액이 목구멍을 바짝 태웠으나 맹물도 역하고 비려 속을 달래지 못했다.

분홍이는 혼절을 거듭했다. 눈을 뜰 때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환청도 들렸다.

분홍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엄마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누님인 것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콕 박힌 단단한 심지가 꼭 큰엄마인 것 같기도 하다.

“간밤에 커다란 꽃을 가마 삼은 귀한 이국의 귀인을 보았네. 수십 수만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리고 그 옆에는 금빛을 두른 군왕이 있었어. 필시 황후의 꿈일세. 아무래도 내가 자네 태몽을 대신 꾼 듯해. 복중 아기는 음인이 틀림없어.”

앳된 처녀인 엄마가 나타나 봉긋한 배를 두 팔로 곱게 감쌌다. 곁에는 큰엄마가 있었다. 두 분을 본 분홍이는 두 팔을 뻗으며 달려가려 했다. 이상하게도 달려도 달려도, 숨이 턱까지 차도록 달려도 엄마와 큰엄마는 아득히 멀어지기만 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에 갈래요.’

쓰린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명채운, 울지 말아라.”

“우리 분홍이, 큰일을 치르는데…… 큰엄마가 곁에 없어서 어쩌누.”

“분홍아, 아버지다. 어디든지 마음을 굳게 먹으면 두려울 일이 없느니라. 명심하거라.”

세 부모님이 번갈아 가며 꿈에 나왔다가 사라졌다.

‘나도 데리고 가 줘요. 엄마! 아버지! 큰엄마!’

목이 터지라고 부르는 데도 소리가 나질 않았다. 대신 밑이 훅 꺼지더니 깊은 우물로 빠졌다. 아득한 정인의 음성이 저를 부르는 순간, 깊은 어둠 속에서 황금색 빛이 뻗어 나와 분홍이를 붙잡았다. 뜨겁고 단단한 황금 밧줄이 발목에 휘감겼다. 아래로…… 아래로…… 끝이 없는 아래로 끌어당겼다.

꺼진 밑은 곧 휘영청 밝은 달이 뜬 하늘이었다. 별바다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라앉는 동안 흰 용이 솟아나 분홍이를 꽃잎처럼 밀어 올렸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은화가 하늘에서 끝없이 떨어지더니, 이윽고 아래로 휘이익 떨어졌다.

‘허어어억…… 헉!’

땅에 처박는가 싶더니 단단한 두 팔이 저를 낚아챘다. 훤칠한 이가 굳건한 팔로 저를 꼭 감싸더니 이내 자상한 손길로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아아아.”

흉몽인지 길몽인지 모를 꿈이 긴 날숨으로 자아냈다. 눈을 뜨니 꺼먼 냉궁의 천장이 보였다. 마당 문틈으로 푸릇한 빛이 샜다. 새벽이었다.

슬며시 일어났다. 뺨에 손을 대자 축축한 눈물이 묻어났다. 눈가가 짓물러 쓰라렸다. 꿈꾸는 내내 운 모양이었다.

기이한 꿈을 곱씹었다. 어쩐지 부모님을 뵌 것 같기도 하고 떠올리기도 죄송스러운 태손 마마를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정체 모를 이가 저를 다정히 감싸 준 것 같기도 하고. 영 헷갈리고 가물거려도 이상하게 한 가지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손이 저절로 배로 갔다. 벌어진 턱이 덜덜 떨렸다. 전신의 모골이 송연했다.

“아…… 아니야…… 그럴 리 없다…… 이래서는 아니 되는 거야.”

분홍이는 번쩍 일어서서 우왕좌왕했다.

“이…… 이를 어쩐다? 이를…… 아! 유…… 율무가 있어야 한다. 율무로 떨어뜨리면 된다!”

문으로 다가가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보오! 상선! 율무를 주시오. 율무와 그…… 비상이 있소? 아니면 어떤 독초라도 좋소! 뭐라도 좀 주시오!”

난동을 피우자 궁녀가 들어왔다.

“생율무를 주시오! 당장! 그게 없으면 독초면 아무거라도 좋소.”

율무가 뭔지 모르는 궁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율무를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어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뛰어내릴까? 아니면 언덕에서라도 데굴데굴 구를까?

이곳은 냉궁 안이었다. 지붕에 올라갈 방법도 모르고 언덕도 없다. 너무 다급하여 경황이 없으니 떠오르는 건 하나뿐이었다.

퍽!

주먹을 쥐어 아랫배를 모질게 내려쳤다. 내장이 쿵 내려앉는 고통이 번졌다. 이를 꽉 깨물고 연거푸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ᚻIJ∀!”

질겁한 궁녀가 고함치며 달려들었다. 팔목을 잡으려 했으나, 분홍이의 기세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궁녀의 손가락이 손목을 죽죽 그었다. 소매가 잡아당겨지고 팔에 생채기가 나도 분홍이는 주먹질을 멈추지 않았다.

퍽! 퍽!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배를 치자 이번엔 궁녀가 두 팔로 분홍이를 와락 안았다. 씩씩거리며 발버둥 쳤다.

“놔! 놓으라고!”

주먹을 휘둘러 봐야 궁녀의 등을 때릴 뿐이었다. 기력이 다하기 전에 얼른 수를 써야 하기에 분홍이는 기를 쓰고 제 옆구리를 쳤다.

“ᚻIJ∀! ᚻIJ∀!”

궁녀가 다시 소리치자 이번엔 문을 지키는 궁인이 들어왔다. 마당 나들이를 나갈 때마다 말쑥한 표정으로 묵례를 하던 그의 얼굴이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궁녀가 뭐라 더 소리치자 궁인이 다가와 분홍이의 손목을 잡았다. 그는 힘이 궁녀보다 훨씬 셌다. 손목이 붙들리자 도무지 떨칠 수 없었다.

“놓아라! 이놈들아! 놓아!”

전신을 떨며 자지러지는 분홍이를 둘이 달려들어 제압했다. 궁녀는 가슴께를 꽉 껴안았고 궁인은 팔을 단단히 잡아 옆구리에 붙였다. 거칠게 발길질해도 애꿎은 궁녀만 다쳤다.

“놓으라고…… 흐으으윽.”

기어이 분루가 떨어졌다. 입이 일그러지고 오열이 터졌다. 고개를 떨구지 못해 뒤로 젖히고 엉엉 울었다. 짜내고 또 짜내어 이젠 바짝 마른 줄 알았던 눈물샘이 홍수 맞은 연못처럼 흘러넘쳤다.

“으어어어엉.”

목 놓아 엉엉 우느라 몸에 힘이 빠졌다. 손목을 꽉 붙들었던 궁인이 슬그머니 아귀를 놓았다. 궁녀 또한 팔에 힘을 풀었다. 둘이 떨어지자 분홍이는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어흐으으…… 어흑.”

서럽게 울분을 토했다. 눈물이 온 얼굴을 흠뻑 적혔다.

“⋙∐∀.”

궁녀가 분루에 젖은 얼굴을 감쌌다. 뭐라고 낮게 속삭이는 어투엔 슬픔과 걱정이 가득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궁인 또한 표정이 어두웠다. 똑 제가 우는 것이 가여운 듯이…… 그리 지켜보자 설움이 더욱 북받쳤다.

차가운 냉궁에서 작은 정이나마 건네는 이들이 자해를 막았다. 연유조차 모를 텐데. 하혈하고 애를 떨쳐 봐야 애꿎은 이들만 저를 살리느라 고생할 터였다. 제가 무슨 짓을 하든, 저를 이리 만든 개종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힘껏 울었더니 기력이 금세 빠졌다. 때마침 궁녀가 무너진 몸을 부축하여 침상으로 데려갔다. 차가운 이불 위에 쓰러진 분홍이는 숨죽여 울었다.

보다 못한 궁녀는 상자를 열어 분홍이의 옷을 꺼내어 덮어 주었다. 조금 떨리는 손으로 머리도 쓸었다. 허나 분홍이가 우는 이유를 모르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조용히 지켜보던 이들은 이윽고 물러갔다. 나가면서 문을 완전히 닫지 않았다. 혹여 또 무슨 일이 있을까 궁인은 때때로 문틈을 살폈다.

시간이 걸려 울음은 아주 천천히 그쳤다. 죽고 싶을 만큼 억울하고 참담한 심정이 나아져서가 아니라 그저 더는 울 힘이 없었다. 대신 멍하게 침상에 앉아 허공을 봤다. 안 그러려고 해도 저절로 지난 일이 떠올랐다.

양인과 보내는 열락기에 관해 배운 바와 조금 달랐다. 열락기의 합궁에선 양인은 음경을 부풀려 매듭을 짓는다고 들었다. 개종자는 그러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방심했다. 하지만 불같은 성정에 거친 기세를 가진 거한이 양인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양인과 열락기를 보냈으니 응당 씨가 들었을 텐데. 꾸벅꾸벅 졸고 신물을 웩웩 토하면서도 왜 몰랐을까. 알고 만져 보니 아랫배가 어쩐지 단단했다. 제가 바보여도, 너무 어리석은 바보였다.

“허어.”

헛바람이 터졌다.

“이제…… 어찌할꼬…… 나는…… 어찌…… 될…… 꼬.”

긴 해가 점점 짧아지고 이젠 밤이 더 길어졌다. 그만큼 푸른 새벽은 깊고 깊었다.

자신은 이국 머나먼 땅에서 온 자이고 이 나라에 어떤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냥 천한 성노였다. 아무리 군왕이 수시로 찾았던 첩실이라도 이미 버려진 몸.

첩지 하나 없이 냉궁에 버려진 성노가 낳은 얼자의 운명은 빤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이떠중이 취급이었다. 그렇기에 보통은 불운한 삶을 살았다. 가끔 좋은 아버지를 만나서 정실 자식과 다름없는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한계가 뚜렷했다.

온 집안의 사랑을 받은 제가 특이한 경우였다. 아무리 서자로 태어나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 행복한 아이였더라도 분홍이는 그렇게 세상을 모르진 않았다.

“네놈은 태어나도 기뻐하는 이가 하나 없다.”

툭하면 손을 올리고 겁박하며 사납게 날뛰는 개종자의 씨라면 태어나면서부터 못난 심사를 부릴 놈이고 제 아비를 거슬러 한 대 맞고는 바로 황천으로 가겠지. 하물며 저는…… 사랑으로 감싸 줄 어미가 될 자신이 도무지 없다.

“서자 주제에 너무 과분한 사랑을 받아서 주제도 모르고 감히 태손 마마께 시집가려 들어서 하늘이 노하신 걸까.”

그래서 오랑캐 놈에게 보내어 꾸짖는가? 하는 공연한 생각도 들었다. 아니 공연한 상상이 아닐지도 몰랐다.

주제넘은 놈이 감히 태손 마마의 손길까지 뿌리쳤으니. 황가를 보우하시는 하늘이 노하신 게 당연했다. 태손비가 되어 황손을 생산하겠다는 오만불손한 마음을 품었다가 결국 개종자의 씨를 가졌다.

“이젠 돌아갈 일도 영영 없겠구나. 죽어서도 고향 땅을 밟을 일은 없을 거야.”

이제 바스러질 마음도 없었다. 배 속에 제 그릇된 열망의 결과를 품으니 ‘그저 그렇구나. 응당 잘못하였으니 받는 벌이겠거니.’ 하는 체념과 수긍이 다였다.

하루하루를 그저 죽지 못해 살았다.

볕을 쐬러 가는 대신 내내 썩은 보릿자루처럼 침상에 쿡 처박혀 있었다. 자해를 가한 소식을 들은 건지 상선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수시로 들락였다. 궁녀는 눈치를 보면서도 평소와 같이 이부자리를 살폈다.

여전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입맛도 뚝 떨어졌다. 위장을 완전히 비우자 구역질도 덜 났다. 궁녀가 가져다준 뜨끈한 차도 속을 다스리는데 한몫했다.

옅은 차는 구수한 향내가 났다. 찬 바람 불 때 마시곤 했던 곡차와 맛이 비슷했다. 심신을 누그러뜨리고 나니 솟구치던 울화가 잦아들었다.

이미 든 것을 죽여 봤자 제 몸만 상한다. 낳더라도 몸은 똑같이 상하지만.

냉철히 따져 보면 발정이 나서 천박하게 다리를 벌리고 개종자를 제 안으로 들인 장본인이 바로 분홍이였다. 평소에는 먼저 달려들던 놈이 그날만은 어쩐지 빼지 않았던가.

그러니 배 속의 아이는 제가 만들고자 한 아이였다.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는 개종자는 제 원망 섞인 애원에 응했을 뿐.

“내가…… 미워할 자격이…… 없구나.”

이미 많은 죄를 지었다. 살자고 제 속에 든 생명을 죽이는 죄까지 더해서 무엇 하랴.

하물며 아비를 닮은 못난 도깨비 아이가 저를 쫓아다니며 괴롭힌다 한들 짐승 같은 아비보다야 나을 거다. 아비를 닮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여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명가의 특색을 지니기라도 한다면?

“흐음.”

원하든 원치 않든 제 배에서 자라니 어딘가 한구석은 저를 닮은 구석이 있을 거다. 머리가 까맣든, 눈이 총총하든, 혹은 이마가 반듯하든.

그러고 보니 저는 언뜻 보면 엄마를 무척 닮았으나 귀 모양 하나는 아버지를 닮았다. 콧망울은 두 분 형님과 비슷했으며 입은 누님과 똑같았다. 혹여 배 속의 불청객도 같은 곳을 가지고 있을지 누가 알까.

아버지의 귀. 형님의 코. 누님의 입매. 엄마가 물려주신 반듯한 이마와 사납지 않은 광대. 그리고 큰엄마가 곱게 길러 주신 까만 머리.

뭔가 하나는 가지고 태어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무친 외로움으로 벌벌 떠는 밤에 닮은 곳을 어루만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툭 불거진 못난 아이라도 그렇게 싫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구도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엄마가 가르쳐 준 고향 말을 함께 속삭여 줄 아이가 있다면…… 이 모를 세상에 내가 다녀간 흔적이 남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니 마른 눈가가 떨렸다. 짜내고 짜내어 더는 흘릴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금 또르르 흘렀다.

무릎을 세워 다리를 끌어모았다. 얼룩덜룩한 멍 자국이 번진 배를 감싸면서 처음으로 증오와 서러움이 아닌, 애틋함이 깃든 눈물을 흘렸다.

“그래…… 이것이 하늘이 정한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렇게라도 살라고, 그러라고 하늘이 점지하신 아이다. 분명히 그럴 게다.

흐린 눈으로 제 배를 보며 입매를 바들바들 떨었다. 웃고 싶은데 어쩐지 흐느낌이 샜다. 속에 깃든 차가운 응어리가 더는 내장을 썩히지 못하도록 체념을 씌우는, 애달프고 모진 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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