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28)

3.

삼 일이 지났다.

파발로 떠버리 학자 놈들의 편지가 도착했으나 내용은 시시했다.

[고대 유적에서 비슷한 문자를 발견했다. 그러나 구체적 증거는 오리무중이다.]

카론이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동어 반복 외에 다른 정보는 전무 했다. 그러나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하지 않았다.

학자라는 것들은 무능한 주제에 입이 얼마나 싼지, 아서가 특별한 작전을 펼치지 않아도 놈들의 입을 통해 황제가 특별한 요정을 얻었다는 소문이 제국 각지에 퍼졌다.

“옷과 꽃을 도로 가져오라고 해. 아서, 네가 직접 황무지 폐허로 가서 알아봐. 필요하다면 파사 놈들의 경전을 훔쳐서라도.”

아서에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요인 감금용으로 사용하는 서궁은 원래 많은 사람이 오갔으나 카론이 등극한 이후로 쥐새끼 한 마리 없이 휑했다. 그는 냉혹한 황제였고 가두느니 목을 자르는 편이었다. 그래서 당장 서궁에 있는 놈은 그자가 전부였다.

“멋대로 죽으려 들다니, 어림없지.”

놈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그렌의 보고를 곱씹으며 카론은 비웃음을 흘렸다. 어설픈 솜씨 덕에 애꿎은 나무만 상했다. 굳은 각오는 상당하되, 한결같이 어설펐다.

“누가요? 설마 요정이요?”

눈치 없기로는 황궁 제일인 아서가 흥미로운지, 기어이 뚫린 입을 놀렸다. 카론은 가차 없는 눈길로 그를 훑었다.

“놈의 정체를 알아보라고 명령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여기 있나?”

“안 그래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챙길 문서가 엄청 많군요.”

아서는 툴툴대면서 보란 듯이 재가한 문서 꾸러미를 척척 쌓았다. 빨강머리 백작은 그렌과는 다른 의미로 카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서는 카론이 처음으로 가진 친우 비스름한 존재였으나 그것이 이유는 아니었다. 그의 방자함은 아내 베로니카에게 기인했다.

대륙 최강의 기사, 베로니카 V. 엘러 백작 부인.

그녀가 있는 한, 아서를 사소한 이유로 해칠 수 없었다. 심각하게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그걸 아서도 알고 카론도 알았다.

“그러니까 미리미리 조금씩 해서 주시라니까. 이렇게 몰아서 하면 서로 피곤하지 않습니까.”

“오만함의 죄를 물어 손가락 하나를 꺾어 버린다 해도 베로니카가 항의하진 않겠지.”

“아니…… 뭘 또 그렇게…… 나갑니다. 나가요.”

부관을 쫓아낸 후에 카론은 잠시 굳은 몸을 풀었다. 목을 꺾을 때마다 뚝뚝 뼈마디가 부딪쳤다.

전 같았으면 급한 일만 처리하고 바로 다른 출정을 준비했다. 쉬지 않고 헛된 망상을 꿈꾸는 놈들에게 호된 맛을 보이곤 했다. 그게 성미에도 맞았다.

그런데 이번엔 양상이 좀 달랐다. 파사 놈들이 잠잠했다.

놈들은 남은 세력을 거의 소실했기에 반격할 힘을 모으는 중이었다. 전에는 고대 마도 제국의 유산을 빌미로 기이한 묘술을 부리는 놈들에게 넘어가는 멍청이가 많았다.

토벌대를 보내서 주요 거점 세력을 격파하고도 모자라, 친히 출정하여 토벌을 거듭했음에도 파사는 금방 세력을 회복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은 시간이 꽤 걸리는 느낌이었다.

“역시 ‘그’ 소문 때문인가.”

악명 높은 황제 카론이 마도 제국의 현신인 요정을 얻었다는 소문.

떠버리 학자들이 흘린 단편적인 정보뿐만이 아니라, 개선식 때 요정을 맨눈으로 본 제도민이 앞다투어 소문을 보태면서 삽시간에 대단한 전설이 탄생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 꽃이 영원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요정을 가진 황제 또한 가공할 힘을 손에 넣었고 신의 사자인 요정의 가호를 받는 황제는 불로불사의 힘까지 얻었다고 말이다.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진지하게 믿는 멍청이가 있나 싶지만, 평민 대부분은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실소가 흘렀다.

“우스워도 딱히 나쁠 건 없지.”

괴상한 소문 덕분에 신생 라테시온 제국에 대한 경외심이 커졌다. 우스운 일이지만 무력보다 단순한 착각이 제국의 위세를 불렸다.

“흠.”

저도 모르게 손이 목으로 갔다. 벌써 살이 붙었는지 때때로 가려웠다. 얇은 거즈를 더듬자 상처의 요철이 느껴졌다. 서궁의 그 ‘놈’을 떠올리자 불쾌감이 물씬 올라왔다. 그래도 분노를 터트릴 정도는 아니었다. 상당한 쓸모가 증명되자 놀랍게도 방자함이 그렇게 고깝지는 않게 되었다.

도리어 지금 생각해 보니, 바락바락 대드는 성미가 퍽 그럴싸했다.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단련된 기사인 제 목에 생채기를 낼 만큼, 놈은 민첩했다. 웬만한 어중이떠중이는 손을 대기 힘들단 얘기였다. 그렇기에 더욱 길들이는 맛이 있을 터.

“길들이기 까다로워도 가시가 있는 편이 낫군.”

흡족하며 놈의 효과를 극대화할 방법을 모색하는 찰나였다.

황혼이 질 무렵 정예 기사단을 통해 상자 하나가 도착했다. 손가락이 아까웠던 부관 아서가 재빨리 처리한 덕이었다. 안에는 학자들이 연구한답시고 가져갔던 그놈의 옷과 꽃이 들어있었다. 그걸 자세히 살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옷감은 얇고 부드러웠다. 전쟁으로 인해 대륙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많은 인간을 만났으나 이런 복식은 처음이었다. 떠버리 놈들도 모른다면 정말로 다른 세상의 물건이라 해도 무방했다.

발광하는 꽃 또한, 여전히 싱싱했으며 번쩍임도 그대로였다. 밤에는 웬만한 등불보다 밝았다. 이 신기한 꽃이 놈에게 신비함을 더했다.

‘도대체 이건 정체가 뭐야? 어디에서 온 거지?’

카론은 빛을 내는 꽃을 매만졌다. 아무리 곱씹어도 실제 대륙에서 사용되는 옷이나 자라는 다양한 꽃 중에 비슷한 것을 본 일이 없다. 현재 대륙에서 통용되는 문자와 전혀 다른, 고대 마도 제국과 흡사한 문자를 사용한다는 점이 아무래도 걸렸다.

“고대 마도 제국과 관련이 정말로 있다면?”

놈의 처분을 선뜻 결심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멸망 직후, 오랜 시간에 걸쳐 소실된 마도 제국의 지식과 문물이 가끔 발견될 때가 있었다. 지금은 재료조차 파악할 수 없는 대단히 단단한 금속이 출토되거나, 혹은 상식을 뛰어넘는 대단한 기술의 흔적이 발견되는 일도 있었다. 특히 의약품에 관련된 고문서가 출토되면 의학에 획기적인 신기원이 열렸다. 고대 마도 제국에 집착하는 파사 일족이 특히 독과 정신 질환을 일으키는 괴상한 마약에 능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놈이 정말로 마도 제국과 관련이 있다면? 적어도 마도 제국의 문자라도 자유자재로 해독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대단한 쓸모가 있을 터.

그렇기에 놈을 잘 길들일 필요는 확실히 있었다. 두꺼운 몸에서 폭발하는 괴력과 질풍 같은 다리를 가졌으나 그만큼 사납기 짝이 없었던 제 군마처럼 제 말만 듣게 길들일 필요가.

그때 놈을 여자로 알지만 않았더라도 건드리는 일 없이 당근을 주었을 텐데.

“지금도 늦진 않았지.”

카론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구를 지키던 시종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서궁에 간다.”

“미리 언질을 주어 준비를 시킬까요?”

“아니, 됐어. 저 상자를 가지고 따라와.”

서궁으로 가는 길은 복잡했다. 복도와 통로가 미로같이 사방으로 뻗어서 처음 발을 들이는 사람은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곤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던 카론은 누구보다 구조에 빠삭했다. 그만큼 서궁을 혐오했다.

혐오가 공포를 불러오진 않는다. 적어도 황제가 된 지금은. 카론은 익숙한 길을 거침없이 가로질렀다.

서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마녀의 방은 권력을 잡은 즉시 폐쇄했다. 아예 허물어 버리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야 해서 문에 철 막대를 대고 못을 박아 버렸다.

거길 제외하곤 서궁은 어쨌든 신분이 높은 죄인을 가두기 위해 만든, 딴에는 ‘궁’이라 불리는 장소이니만큼 죄인을 위한 장소치곤 괜찮았다. 그렇기에 놈은 상당히 안락한 방을 사용하고 있으리라.

놈의 거처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던 병사가 고개를 숙였다. 걸어놓았던 자물쇠를 푼 그는 뒤로 물러났다. 카론은 직접 문을 열었다.

생각했던 대로 정원이 딸린, 사람이 살 수 있는 괜찮은 방이었다. 그런데 그런 은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놈은 등을 돌린 채로 침상 구석에 누워 있었다. 얇은 드레스를 걸친 몸이 전보다 확연히 가늘었다.

방구석에는 딱딱한 빵과 표면이 마른 수프 그릇이 있었다. 나무 스푼엔 얼룩이 없었으며, 나무로 깎은 잔에 물도 가득했다. 손을 전혀 대지 않았단 뜻이었다.

물끄러미 돌아보자 어느새 서궁을 담당하는 시녀가 나타났다.

“식사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렌 경에게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꾸중을 들을까 봐서 겁에 질린 어투였다.

“삼 일 정도 굶는다고 안 죽어.”

감옥에서 입맛이 왕성히 도는 놈이 오히려 위험했다. 그건 탈출을 감행하는 자의 태도였다. 목매는 시늉을 하다가 무위로 돌아가서 실망한 요정 놈이 이번엔 아사를 택했다. 황제 암살 시도라는 대죄를 묻지도 않고 살려 주었건만.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 쓸모가 남아 죽는 건 허락할 수 없다. 그러나 두들겨 패면 더욱 기를 쓰고 뒈지려고 할 거다. 잠깐 고민하며 그렌의 말을 떠올린 카론은 성큼성큼 다가가 침상 기둥을 툭툭 찼다.

“일어나.”

명령에도 불구하고 놈은 여전히 돌아누운 채였다. 곧바로 손이 나가려 손가락이 움찔했다. 카론은 깡마른 손목을 잡아 놈을 강제로 일으켰다. 한 줌 굵기의 목이 뒤로 휘어지면서 검은 폭포수 같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윤기가 죽어 꼭 시체 머리 같았다.

잠든 건지, 죽은 건지 구별이 힘든 놈의 파리한 얼굴은 퍼석퍼석했다. 입술도 말라 허옇게 일었다. 광대는 멍이 죽으면서 누렇게 떴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모양새였다.

“고작 며칠 굶은 걸로, 쯧.”

혀를 차면서 카론은 놈의 뺨을 툭툭 쳤다. 먼지가 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옆으로 길게 이어진 눈꼬리가 일그러지더니 이내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초점이 맞지 않는 듯, 작은 콧등을 찡그리면서 앞을 응시하던 놈의 눈이 서서히 크게 벌어졌다. 동시에 껍질이 일어난 거친 입술도 벌어졌다.

“흡!”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나다 놈은 뒤통수와 머리를 동시에 벽에 처박았다. 상당히 큰 소리가 났으나 아픔보다는 카론에 대한 두려움이 큰 듯 침상 저쪽으로 허겁지겁 기어갔다. 옷자락이 구겨질 때마다 작대기 같은 팔다리가 드러났다.

“더 굶었다간 금방 뒈지겠군.”

카론은 미간을 구겼다.

이쪽을 바라보는 놈은 놀라서 벌어졌던 입술을 도로 꽉 다물렸다. 입꼬리가 두려움으로 경련했다. 동시에 생기가 마른 안면엔 혐오감이 떠올랐다.

“식사는 제때 해야지.”

손가락으로 식은 수프를 가리켰다. 놈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시뻘건 눈으로 카론만 노려봤다.

“먹으라고.”

재차 명령했음에도 상대는 마른 턱을 치켜들면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제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듣고서 거부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망할.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

어느새 그렌이 나타났다. 별일 아니라고 했는데도 시녀가 그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그렌은 카론의 어깨너머로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넌지시 눈빛을 던졌다.

눈치를 주지 않아도 애초에 카론은 주먹을 휘두를 생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요정이든 아니든 존재 자체로 이용 가치가 있는 놈이기에 겉모습으로나마 신비해 보여야 했다. 얻어맞고 멍이 든 얼굴은 곤란했다. 조금 더 참아 보기로 했다.

“상자를 가져와.”

아까부터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다가와 상자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카론의 얼굴을 밝혔다.

무엇인지 알아본 요정이 우뚝 굳었다. 꽃을 들어 보이자 침상 뒤에서 나와 앞으로 두어 발짝 다가왔다.

“먹어.”

꽃을 흔들면서 음식을 가리켰다. 꽃과 음식을 번갈아 보던 놈이 갈등에 빠졌다. 거부감을 깃든 눈동자가 카론을 노려봤다.

“그래?”

분명 귀히 여기는 것 같았는데, 꽃을 가지기보단 죽겠다는 뜻이기에 꽃을 도로 내려놓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고집을 피울지 모르는 일이었다. 때리진 못하니 확보한 물건을 눈앞에서 없애 버리면서 길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가치 없어 보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나비 날개 같은 옷을 집어 들었다.

놈이 다시 손과 팔을 움찔했다. 꽃만큼은 아니라도 옷도 소중하게 여기는 듯했다. 누구든 연고 없는 곳에서는 제 근원을 증명하는 소유물에 집착하게 마련이었다.

원망의 눈초리가 날아들었다. 간지럽지도 않았다. 놈은 더는 가까이 오지 않은 채 엉거주춤 서 있을 뿐이었다. 음식을 먹을 기미는 없었다.

“그런다면 할 수 없지.”

카론은 옷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찌익.

주인만큼이나 연약한 옷감은 별다른 힘을 주지 않아도 쉽게 찢어졌다.

“아!”

요정 놈의 안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앙상한 손이 공중에 떠올랐고 발도 앞을 내디뎠다.

찌익. 찌이익.

얇은 만큼 옷감을 풍성하게 사용한 이국의 옷은 카론의 손에서 걸레짝이 되었다. 그걸 뭉쳐서 바닥에 던졌다.

“흡.”

벌벌 떨면서도 눈초리만은 매섭던 놈은 무너지듯 바닥에 엎드려 옷을 끌어당겼다. 허옇게 마른 눈가가 어느새 붉어졌다. 눈시울이 차오르는 걸 보고 카론은 다른 옷을 집어 들었다. 하도 겹쳐 입은 덕에 찢을 거리는 많았다. 색깔이 한층 옅은 옷은 매우 부드러웠다. 이런 건 손가락만으로도 찢을 수 있었다.

“아!”

카론이 집은 옷을 본 놈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뼈마디가 드러난 손은 이미 찢어진 옷을 보물처럼 부여잡았다.

“♬♫♩♬.”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뱉으면서 놈이 애원했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경련하는 뺨에 기어이 물기가 흘렀다.

“싫어?”

“♫♩♬. ♫♩♬.”

“그럼 먹어.”

카론은 음식을 흘끔 봤다. 그를 따라 요정 놈의 시선도 음식으로 향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요정은 걸레짝을 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등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투둑.

실밥이 뜯기는 소리가 났다. 다급하게 고개를 든 놈은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도록 고개를 젓더니 아까 도망갈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음식을 향해 쓰러지듯 다가갔다.

달그락.

나무 스푼을 든 놈은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그러면서 카론을 봤다. 정확하게는 카론의 손에 들린 옷을 봤다. 한 입으로 만족하지 않음을 눈치챈 놈은 수프를 허겁지겁 비웠다. 뒤이어 마른 빵에 손을 댔고 그것을 생쥐처럼 양 볼에 가득 욱여넣었다.

“욱. 욱.”

물까지 벌컥벌컥 마신 놈은 답답한지 가슴을 쿵쿵 쳤다. 그리곤 카론에게 다가와 애원하듯 두 손을 모았다. 카론은 옷을 찢는 대신에 도로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뚜껑을 닫았다.

시종이 상자를 가지고 사라지자, 놈은 허망한 듯이 카론을 봤다.

“앞으로 밥을 잘 먹으면 부상으로 보여 주지.”

당연하게도 꽃을 돌려줄 생각 따윈 없었다. 저 옷자락이 놈에게 그렇게 대단히 중요하다면 보여 주는 것으로도 감지덕지해야 마땅했다.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확신하기 어려웠으나 그래도 상관없었다. 또 식사를 거부하면 그때는 또 옷을 찢으면 그만이었다. 남은 옷은 아직 많았다.

넋이 나간 놈을 그대로 두고 방을 나온 카론은 경비 기사가 문을 잠그는 사이 그렌을 향해 웃었다.

“이번엔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해결했어.”

“……그렇군요.”

“다음에도 굶으면 옷을 찢어. 몇 개나 있으니 길들일 만큼은 충분해.”

“아마…… 앞으로는 식사를 거르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때리지 않고 길들이기에 성공한 탓에 기분이 좋아진 카론은 흡족해하며 서궁을 나섰다.

그를 배웅한 그렌은 다시 요정의 방으로 갔다. 문을 다시 열까 묻는 경비병을 향해 그럴 필요 없다며 손을 저었다. 대신 문 가까이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흑…… 흐으으윽. 흑.”

서러운 흐느낌이 들렸다. 상처받은 마음이 앓는 소리였다. 작은 흐느낌은 때때로 이국의 말과 함께 계속 이어졌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한탄과 저주가 뒤섞였음은 분명했다.

때로는 소중한 것을 위협하는 협박이 더욱 잔인한 학대임을 카론은 아직 몰랐다. 그는 그런 소중한 존재를 가져 본 일이 없었으니까. 인간으로서 크나큰 결여였다.

소중한 것이 없던 황제가 갑자기 잡아 온 요정에 대단한 흥미를 보인 만큼 집착이 있을 줄 알았다. 저 요정을 계기로 소중함을 배우길 바랐는데.

‘정말 불가능한 일인가.’

그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허으윽.”

새삼 터진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분홍이는 머리가 멍해질 때까지 서럽게 통곡했다.

입고 있던 옷은 자애롭지만 근엄하신 아버님이 일부러 구해 오신 귀한 옷감으로 엄마와 큰엄마가 정성스레 지어 준 새 옷이었다. 죽음마저 마음을 먹었음에도, 그것이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기는 광경은 상상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마치 부모님의 사랑이 제게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너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여기에 버려진 것이다. 운명을 관장하는 하늘님이 개종자로 화해 꾸짖는 듯하여 일순간 정신이 혼미했다.

“악귀…… 놈아…… 그 옷은 건드리지…… 마…… 망가뜨리지 마라…….”

외치려 했으나 기운 없는 혓바닥은 제대로 발설치 못했다. 냉랭한 개종자의 안면은 전혀 변함이 없었고 그놈이 시키는 대로 음식을 삼키지 않으면 남은 옷 또한 걸레짝이 될 것 같았다.

아득한 이역만리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부모님이 주신 사랑의 증거가 사라진다. 아니 될 일이었다. 분홍이는 악귀의 뜻에 따라 음식을 먹었지만 갑자기 욱여넣어 위장이 거부했고 놈이 떠나자 기어이 앞마당 구석에 게워냈다. 이국 음식이 위액과 섞여 불쾌한 냄새가 진동했다. 버석버석 말라 가면서도 차디찬 짠물이 쉬지 않고 흘렀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을 품자 꾹꾹 억눌렀던 죄송함과 그리움, 서러움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흐허허어어엉. 어어어엉.”

목 놓아 울었다. 기운이 허락한다면 땅을 쳤을 터였다. 그럴 힘이 없기에 분홍이는 그저 고꾸라져 설움을 토했다.

‘엄마, 큰엄마. 보고 싶어요. 아버님. 어디에 계시나요? 형님, 누님. 여긴 어딜까요? 분홍이는 너무 무섭습니다. 너무…… 너무…… 무섭습니다…….’

천한 오랑캐의 노리개가 되어, 명가의 절개를 지킬 힘이 없어 제대로 죽지도 못했다. 이 죄는 어떤 것으로도 씻을 수 없었다.

‘죄송해요. 죄송…… 흐으윽.’

내내 용서를 구하며 울던 분홍이는, 눈물을 쏟아 내다 지쳐 정신을 깜빡 놓았다.

얼마나 지났는지 누군가 다시 몸을 흔들었다. 가물거리는 정신이 간신히 든 순간, 분홍이는 눈을 번뜩 떴다. 그리곤 바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개종자 놈이 또 귀한 옷을 더는 찢지 못하도록.

“안 돼!”

“으앗!”

달그락. 달그락.

애석한지 혹은 다행인지 상대는 다리 없는 상을 든 궁녀였다. 그이는 당황하여 분홍이의 손을 떨쳤다. 그리곤 새 음식을 담은 상을 내려놓았다.

궁녀는 듣기 싫은 오랑캐 말을 늘어놓으면서 분홍이가 내내 품고 있던 찢어진 옷과 음식을 번갈아 가리켰다. 몸을 떨며 두려운 듯이 먼 어딘가를 지시하기도 했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아마 주인인 개종자 놈이 무슨 짓을 할 거라는 의미 같았다.

“먹기 싫…… 읍.”

당장 치우라는 호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마른 입술을 비집고 나가기 전에 억지로 눌렀다.

큰엄마가 수를 놓은 옷은 이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저 음식을 거부하면 쳐 죽일 개종자 놈이 이번에는 엄마가 손수 지은 내의를 찢어 버릴 터.

이후에는 낭군도 손대지 못할 속의를 무참한 손길로 뜯어 버릴 테고 그 후에는 사랑하는 누님이 사 주신 비단신 반쪽을 태워 버릴지도 모른다. 본데없고 인정머리 없는 더러운 오랑캐 놈이라면 능히 그럴 것이었다.

턱에 힘을 주고 이를 앙다물었다. 영양이 부실해 어금니 부근이 쿡쿡 쑤셨다. 들고 있던 누더기를 침상 위에 곱게 놓은 후 분홍이는 궁녀가 가져온 상에 다가갔다.

지친 몸을 추슬러 바른 자세로 앉은 분홍이는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비릿한 젖내가 나는 미음을 한술 떠서 억지로 입에 넣었다. 그러자 내내 심각하던 궁녀가 반색했다.

전혀 입에 맞지 않는 오랑캐 미음과 퍼석퍼석한 밀가루 덩어리를 다 먹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렸다. 딱딱한 견과는 씹다가 약해진 이가 나갈 것 같아 남겼다. 마지막으로 찝찝한 입을 물로 헹구었다.

“으, 이놈의 오랑캐 천지는 물마저 오랑캐 내가 진동하는구나.”

알아듣지도 못하는 궁녀를 향해 한마디 쏘아 주었다. 비겁한 언행에도 궁녀는 제 할 일이 끝나 기쁜지 씩 웃어 주었다. 아랫것을 핍박하는 제 행동보다 미운 마음이 울컥 들었다. 오랑캐 세상에 온 뒤로 마음이 퍽 강퍅해졌다.

그 후로도 때를 맞춰 궁녀가 음식을 가져왔고 분홍이는 보는 앞에서 꾸역꾸역 먹었다. 궁녀가 빈 소반을 들고 사라지면 금방 반은 게워냈다. 남긴 견과류는 작은 그릇에 모아 두었다.

꾸역꾸역 먹어서 이력이 났는지 게워내는 양이 점차 줄었다. 그러나 원래 음식 같지 않은 걸 먹어서 그런지 모발은 윤기가 줄었고. 피부는 버석거렸다.

옷은 한 벌. 아무리 유폐 중이라도 몸에서 냄새가 나는 건 싫었다. 손짓과 발짓으로 궁녀에게 부탁해 물과 천을 얻었다. 찬 물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남은 물로는 입은 옷을 빨았다.

비누 없이 빨래한 단벌의 옷을 방 안에 널고 비비 꼬아 목을 매는 데에 사용했던 거친 이불을 맨몸에 둘둘 감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을 부적처럼 품에 안고 떨었다.

‘어머니…… 엄마…….’

늦은 밤에 분홍이는 잠을 못 이루었다.

과연 돌아갈 수는 있을까? 영영 이대로 오랑캐의 유폐궁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지진 않을까? 이미 수모와 치욕에 절어, 꼴 보기 싫은 몸이 죽어 자빠지는 것이야 응당 바라는 바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건 불안했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집에 기별이라도 해야 할 텐데.

불안함을 떨치기 위해 대충 마른 옷을 도로 걸치고 나무 걸상에 앉았다. 마음이 어지러워 다른 생각을 해 보려 했다. 그러자 시선이 저절로 창밖을 향했다.

앞마당에는 가끔 새가 날아들었다. 가지가 찢어진 볼품없는 나무는 아무래도 돌능금 같았다. 낮으로 알량한 볕이 드는 곳에는 들풀과 꽃이 웃자랐다.

고요하고 외로운 방에서 할 일도 마땅히 없으므로 분홍이는 자주 창문을 넘어 마당으로 나갔다.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가 부러웠다. 색과 모양이 조금 다르지만, 똑 멧새처럼 통통하니 귀여웠다.

“나도 날개가 있으면 좋으련만. 저 새처럼 언제든 담을 넘어 고향으로 날아갈 텐데.”

어딘가에 있을 고향을 향해 날개 뼈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날고 또 날아갈 텐데. 지칠 때까지 날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분홍이가 돌아왔노라고 지저귈 텐데.

파닥파닥 날아다니는 작은 새를 보다가 분홍이는 문득 누더기가 된 옷자락을 떠올렸다. 급히 방으로 돌아와 침상 가운데 곱게 놓은 옷자락을 집어 들었다.

실과 바늘만 구할 수 있다면 손끝이 갈라질 때까지 열심히 기워 고쳤으련만. 그러지도 못해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다. 소중한 누더기에 손을 대기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기에 아픈 마음을 추스르고 손에 힘을 주었다.

“죄송해요.”

찌이익.

이미 다 떨어진 모퉁이를 조금 뜯어내는데도 보이지 않는 바늘이 염통을 쿡쿡 찔렀다. 눈을 질끈 감고 간신히 힘을 주었다. 손바닥 크기의 조각을 소중히 쥐고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마른 눈물이 고운 비단을 적셨다.

찢어 낸 천과 함께 분홍이는 견과류가 담긴 그릇도 들고 새가 앉은 나무에 조심조심 다가갔다.

작은 새는 부리로 통통하게 부푼 깃을 열심히 단장하고 있었다. 손에 부순 견과류를 올렸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새가 이내 고소한 열매 냄새를 맡고 삐륵삐륵 울었다.

“이거 먹으렴. 해치지 않는단다.”

하나 콕 찍어서 먹고 달아났던 새가 다시 다가와 또 콕콕 열매 조각을 찍어 먹었다. 계속 손을 펴고 있자 경계가 풀어졌는지 손바닥에 냉큼 올라타고 본격적으로 부리를 쪼았다.

“옳지, 옳지.”

분홍이는 검지 끝으로 새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먹는데 정신이 팔린 새는 개의치 않았다. 다른 손으로 열매를 더 부수어 손바닥에 올렸다. 후에 두 마리가 더 손에 앉았다. 손바닥에 놓은 열매가 금방 사라졌다.

열매 그릇을 들어 주자 놈들은 냉큼 그릇 위에 올라탔다.

“천천히 먹어.”

새들의 머리통과 날개깃을 쓰다듬으며 안심시킨 다음, 분홍이는 뜯어온 옷감을 얇은 끈처럼 꼬아 새 다리에 조심스레 묶었다. 부리를 쪼아 풀지 못하도록 두 번 동여매기를 세 번. 이후 실컷 먹은 새들은 다시 높은 담벼락 넘어 포르륵 사라졌다.

저 작은 새가 어디까지 날아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누군가 분홍이를, 명 가문을, 하다못해 황국을 아는 자가 있어 저 옷감을 알아볼 수도 있었다.

“누구라도 표식을 알아본다면…… 부모님께 불효자식이 아직 살아 있다고 전해 주길.”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새들이 화답하듯 울었다. 분홍이는 그들이 날아간 방향을 하염없이 보고 또 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성혼식을 올릴 때였다.

넋을 놓으라고 빌었던 것이 뒤늦게 힘을 발했는지, 혹은 오늘따라 이상하게 휘영청 밝은 달이 꼭 그분이 오신 신묘한 날과 같아서 그런지. 괜히 정혼자 생각이 났다.

‘태손 마마께선 무사하시겠지. 혹여…… 나를 찾고 계실까?’

눈앞에서 제가 사라졌으니, 정혼자인 태손 이승원도 그다지 평탄하진 않을 터였다. 성혼 전에 그저 얼굴 한번 보겠다고 찾아왔을 뿐인데.

‘무서워도……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어.’

태손을 진즉에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았을지도. 이제 와선 깊이 후회해도 한참 늦었다.

분홍이는 세상 어딘지도 모르는 이역만리에서 개종자 놈에게 치욕을 당하고 유폐되었다. 이런 몸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다시 태손을 모시기는 어려울 터.

‘돌아갈 수나 있을까.’

간절함에 슬며시 허무가 끼어들었다. 모래알같이 부스러지는 마음을 끌어모으는 일도 슬슬 버거웠다. 다른, 정신을 쏟을 거리가 필요했다.

휑한 방 안에서 홀로 할 수 있는 일은 드물었다. 작은 마당에 비루먹으나마 나무와 풀이 자라서 다행이었다. 누더기로나마 소중한 옷자락이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짓이 하고 싶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아무렴 어때.’

정원으로 나간 분홍이는 흩어진 나뭇가지를 끌어모아 풀과 누더기를 엮어 인형을 두 개 만들었다. 허리를 단단히 묶은 커다란 인형은 태손이라 이름 지었다. 머리에 풀꽃을 단 작은 인형은 채운이라 이름 지었다. 작은놈 밑을 바닥에 콩콩 찧으며 말했다.

“태손 마마. 달이 떴사옵니다.”

한마디 하자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이가 꽉 찬 성년에 이 무슨 어린애 짓인가. 속으로 웃음이 퍽 났다. 마른 입술이 슬며시 호를 그렸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떠올린 미소였다.

* * *

캉! 챙! 카캉!

“헉!”

멈추지 않는 파상 공세에 흙먼지 묻은 갑옷을 걸친 기사가 뒤로 물러났다. 장검을 버겁게 휘두르며 방어하던 그는 결국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캉!

기사는 정수리에서 떨어지는 검을 왼팔에 낀 방패로 간신히 막았다. 옆으로 굴러서 피하기 전에 연이은 공격이 날아들었다.

“컥! 억!”

허를 찔린 기사는 급소를 내어주고 말았다. 잘 벼려진 상대의 검은 갑옷 이음새를 빠르게 잘랐다. 갑옷을 묶은 가죽끈이 잘리자 철판은 금방 헐거워졌다. 그러자 다양한 급소가 훤히 드러났다.

이미 패배한 기사는 두려움 섞인 눈빛으로 태양을 등진 상대를 올려다봤다. 졌다는 얘기는 해도 소용없었다. 대신 날아드는 검을 그대로 맞았다.

쾅! 쾅!

검날 대신에 검신이 그대로 방망이처럼 떨어졌다. 튼튼했던 갑옷은 순식간에 누더기가 되었다.

“느려.”

콰앙!

바람을 일으키며 다가온 검은 기사의 배를 강타했다. 갑주를 걸친 몸이 살짝 떴다가 바닥에 와장창 떨어졌다. 맞은 자는 기절했다.

거리를 두고 대기하던 다른 기사 둘이 서둘러 다가와 혼절한 부상자를 질질 끌어냈다. 의사와 그 제자가 서둘러 갑옷을 벗기고 상처를 돌보는 사이, 장정 하나를 작살 낸 남자는 검날을 유심히 봤다. 심지어 그는 다른 기사와 달리 갑주도 입지 않았다. 움직이기 쉬운 복장에 길이 잘 든 가죽 장갑이 다였다.

“벌써 날이 나갔어.”

던져진 검이 한 남자의 발치에 아슬아슬하게 박혔다. 병장기 제조를 담당하는 남자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건…… 최고로 단단한 강철로 만든…….”

“반나절도 휘두르지 않았다. 이따위 쓰레기를 강철이라고 부르나?”

얼른 일어난 병기 제조자는 억울함을 차마 토로하지 못했다.

그가 자랑하는 명검을 쓰레기라 부른 이는 다름 아닌 라테시온 황제 카론 유스키아였다. 그는 단순히 권력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실력을 보유한 검사이기도 했다.

반나절 사이, 아니 사실 반나절도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은 동안 검을 시험한다는 명목하에 두꺼운 강철 갑옷을 입은 최정예 기사 여덟을 기절시켰다. 아무리 명검이라도 그렇게 많이 휘두르면 망가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병기 제조자는 당연한 이치에 관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황제는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검이 쓰레기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그를 고깃덩이로 다질 기세였으니까.

“그렇게 몽둥이처럼 휘두르는데 날이 멀쩡하겠습니까?”

억울한 이를 대신하여 나선 사람은 붉은 머리 기사였다. 황제의 직속 부관 아서 엘러 백작으로,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인물로 알려졌다. 병기 제조자는 그를 구세주처럼 감격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네가 한번 휘둘러보지.”

카론은 새 검을 꺼내 그에게 던졌다. 아서는 명치를 노리듯 직선으로 날아온 검을 옆으로 피하면서 손잡이를 정확하게 낚아챘다.

“이번엔 절 죽이시려고요? 오늘 할 일이 많은데.”

객관적인 실력은 카론이 아서보다 한 수 위였다. 하지만 아서는 아서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련을 함께해 온 만큼 카론의 약점과 강점을 비롯한 버릇과 즐겨 쓰는 기술에 빠삭했다. 쉽게 제압할 상대는 아니란 소리였다.

“요즘 몸이 무거워진 것 같던데. 그러다간 언젠가 뒈진다.”

“누구 덕분에 검보다는 펜을 들 일이 많아져서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평소에는 기름을 바른 뱀처럼 요리조리 핑계 대면서 빠져나가는 아서가 웬일로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았다. 최근 사무실에 틀어박혀 일을 많이 하더니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요즘 몸이 좀 둔해졌던데. 첫 공격은 양보하도록 하지.”

놀리듯 선심 쓰자 아서가 빙글 웃었다.

“약속하신 겁니다. 황위 찬탈하기에 날이 참 좋군요.”

“건방진 놈.”

카론이 느긋한 자세로 섰다. 아서가 슬금슬금 움직이며 기회를 엿보았다.

대단한 규모를 자랑하는 황궁에는 키 큰 수목과 빽빽한 관목으로 꾸며진 대단위 정원이 많았다. 그중에 한 곳을 개조하여 만든 수련장 또한 주변에 잎사귀가 우거진 나무가 줄줄 이어졌다.

삐르륵. 삐륵.

황궁 나무를 제집으로 삼은 작은 새가 날개를 파닥이며 지저귀었다. 카론과 아서는 동시에 그 새를 의식했다. 작은 부리로 통통하게 부푼 가슴 깃털을 고르던 새가 쫑쫑 거리다가 포르륵 날아올랐다.

삐르륵.

새가 수련장을 가로지르는 순간.

탓!

아서가 달려들었다. 정말로 황위 찬탈의 역심을 품었는지 황제의 급소를 노리고 달려든 불손한 검이 카론이 휘두른 검에 맞았다.

쾅!

첫 공격이라기엔 과한 공격과 방어 덕에 맞부딪힌 두 검이 웅웅 울었다.

“억.”

아서는 손목과 팔에 울리는 저릿저릿함에 미간을 찡그렸다.

“봐준다면서요! 봐주는 분이 부관의 팔을 자르려 해요?”

“시끄러워.”

“팔 부러질 것 같습니다.”

아서가 투덜거리든 말든 카론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그는 카론은 수련장을 휘휘 날아다니는 새를 유심히 보더니, 들고 있던 검을 단검처럼 날렸다.

묵직한 장검인데도 가볍게 날아간 검은, 나는 새를 치고 멀리 떨어진 땅에 박혔다.

“삐이이익!”

파다닥. 파다닥.

날개가 달린 새가 바닥에 떨어져 얼마 안 되는 피를 흘리며 몸부림치다 이내 축 늘어졌다.

“아니 멀쩡한 새는 왜…….”

아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카론은 제가 잡은 새를 유심히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너.”

내내 지켜보던 병기 제작자가 화들짝 놀랐다.

“네, 폐하.”

“새로 개조한 석궁도 가져왔지? 내놔.”

“예? 예예.”

병기 제작자는 무기가 있는 함을 뒤졌다. 갑주용으로 주로 사용하는 무거운 석궁을 개조한 새 석궁은 가벼우면서도 다섯 발 연사가 가능했다.

“사용법은 기존과 크게 차이 없습니다.”

석궁을 이리저리 돌려본 카론은 석궁을 견착하고 가장자리에 선 큰 나무 중심을 겨냥했다.

슉. 슉. 슈슉.

그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짧고 빠른 석궁 살이 번개처럼 날아갔다.

새가 연이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란 새 떼가 표르르륵 날아올랐다. 그것을 계속 지켜보면서 카론은 빈 석궁을 제작자에게 내밀었다.

“재장전.”

재빠르게 장전을 끝내자 다시 석궁을 날렸다. 수련장 곳곳으로 흩어진 새를 노렸다. 가까운 곳에 내려앉은 손쉬운 새도 아니고, 그렇다고 실력과 석궁의 성능을 시험할 멀리 빠르게 날아다니는 새도 아닌 알 수 없는 새를 노렸다. 가벼워도 강한 석궁이기에 손바닥만 한 작은 새는 맞은 즉시 죽었다.

“떨어진 활과 새를 가져와.”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금방 움직였다.

도합 13마리.

석궁의 힘을 견디지 못한 작은 사체는 대부분 으깨졌다. 아무리 미물이라지만 창자와 간장이 덜렁거리는 13마리를 보자 아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앞으로 수련 전에 새를 쫓을까요?”

“아니. 멍청아. 새 다리를 봐.”

그제야 새 사체의 작은 다리를 유심히 본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작은 새 다리에는 천 조각이 묶여 있었다. 투명에 가까운 옅은 천이기에 멀리서는 잘 보이지도 않는 표식을 카론은 단번에 알아보고 모조리 잡아냈다.

“어디서 본 옷감이지 않나?”

“……그렇군요.”

대제국 라테시온의 힘이 닿는 범위 내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도 생산하지도, 입지도 않는 이국의 옷감. 그것을 입는 이는 서궁에 사는 요정뿐이었다.

카론은 죽은 새를 응시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상쾌한 기분이 일순간에 더러워지는 느낌이 퍽 재미있었다.

“얌전히 찌그러져 있는 줄 알았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 깜찍한 일을 벌이는군.”

카론은 모아 온 화살 끝을 한 번에 잡아들었다. 움직일 때마다 활에 꿰인 새의 작은 날개가 힘없이 움직였다. 마치 요정 놈의 몸짓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뒤를 정리해.”

볼 일이 생긴 황제는 빠른 걸음으로 수련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검은 쓰레기야. 다시 만들어. 하지만 석궁은 제법이군. 총 2백 기, 활은 2만 개.”

“예. 폐하.”

아서가 뒤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검에 대한 평가로 인해 죽상을 하던 병기 제작자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는 흥이 돋아 얼른 주변을 정리했다. 주문량을 채우려면 몇 달은 꼬박 일해야 했다.

“거기, 자네.”

아서의 부름에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그렌 경에게 가서 폐하께서 서궁으로 향했다고 말씀드려. 발생하면 미리 알려 달라던 ‘그런 일’이 생겼다고 말이야.”

“네.”

명을 받자마자 기사는 빠르게 달렸다. 황제와 요정 일은 그렌이 알아서 할 터였다. 대신 아서는 기대에 차서 제게 다가오는 병기 제작자를 향해 빙긋 웃었다.

* * *

바른 볕이 드는 한낮이었다. 내내 그늘져 서늘한 방에 따뜻한 빛이 드는 짧은 시간이었다.

어느덧 이곳에 온 지 어언 달포를 헤아렸다.

분홍이는 날마다 새에게 모이를 주며 누더기 조각을 다리에 묶어 날렸다. 그러나 날아가는 새는 있되, 소식을 물고 날아오는 새는 없었다. 서글픈 일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새를 기다리며 분홍이는 최근 인형 놀이에 푹 빠졌다. 유치한 인형 놀이를 흉볼 사람은 이곳에 없다. 혼잣말도 전혀 하지 않으면 마른 이국의 공기에 익사할 것 같기에 분홍이는 여섯 살 난 아이처럼 장난에 빠져들었다.

“소첩은 어둠이 무섭사옵니다.”

분홍이는 태손 인형을 콩콩 움직였다.

“이리 오시오 부인. 내, 손을 잡아 드리지요.”

인형끼리 손을 부딪치자 분홍이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원을 거닐었다. 태손 인형을 꾹 쥐니 정혼자의 손길이 제 손바닥에 닿은 듯했다.

분홍이는 잘게 떨다가 태손 인형을 제 인형에게서 뗐다.

“왜 그러시오? 내가 싫소?”

얼기설기 엮은 인형이 어쩐지 시무룩하여 항의하는 듯 보였다. 커다란 어깨가 아래로 툭 떨어뜨리던, 그날의 태손이 눈에 보였다.

“저는…….”

놀자고 시작한 인형 놀이인데. 괜히 말끝이 흐려졌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작고 나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태손…… 마마의 승은을 입을 처지가 못…… 되옵니다.”

다시는 정혼자의 귀한 손을 잡을 수 없을 터였다. 몸 성히 돌아간다고 해도 말이었다.

그날, 무서워하지 말고 내미는 손을 잡을 것을. 소첩 또한 태손 마마가 뵙고 싶었다고 말을 할 것을. 기꺼운 말 한마디 하지 못한 그것이 못내 후회되었다.

치미는 설움이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었다.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울음을 삼켰다. 울컥 올라오는 뜨거운 덩어리를 연신 삼키는 사이, 힘을 잃은 손이 기어이 인형을 놓쳤다. 픽 쓰러지는 인형처럼 분홍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드리운 그늘에 굵은 소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짙은 색으로 물들어 가는 흙을 보자 짠물이 울컥 더 올라왔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벽으로 둘러싸인 유폐궁은 귀뚜라미조차 숨을 죽이는 고요한 세상이었다. 누구도 찾지 않아 숨죽인 흐느낌조차도 파도처럼 울리는 곳에선, 단단한 뒤축을 단 오랑캐 신발이 돌바닥을 딛는 발걸음 소리는 천둥이나 매한가지였다.

“……누구?”

평소 냉궁을 드나드는 궁녀의 발걸음과는 전혀 다른 무게였다. 태산 같은 걸음의 소유자가 누군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등에 소름부터 쭉 돋았다.

벌컥.

몸을 다 일으키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뒤이어 길고 크고 짙은 그림자가 방에 들어섰다. 불을 켜 놓지 않아 어둑한 방에서도 그림자의 존재감은 무척 컸다. 분홍이는 그를 알아보고 하얗게 질려 얼어붙었다.

‘저…… 저놈이 백주 대낮에 왜?’

당혹감도 잠시, 정신이 번쩍 든 분홍이는 들고 있던 인형을 숨길 장소를 알아보았다. 평소 침상 아래에 넣어 두었으나 방에는 놈이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대신 앞마당을 둘러보다 웃자란 풀을 발견했다.

그는 허겁지겁 그 밑에 인형 둘을 숨겼다. 연분홍색 옷감이 눈에 띄기에 갈퀴처럼 손가락을 세워 마른 풀을 득득 긁어 그 위에 뿌리고 풀잎도 되는대로 뜯어 인형이 보이지 않도록 덮었다.

따가운 시선이 등을 쿡쿡 찔렀다. 벌떡 일어서서 몸을 돌리자 어느새 앞마당 가운데로 나온 놈이 차가운 얼굴로 분홍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종자 놈은 평소와는 차림이 달랐다. 더럽지는 않으나 손때가 제법 묻어 보이는 옷은 꼭 누님이 무예를 수련할 때 입는 무복 같았다. 오랑캐식 두꺼운 장갑도 꼈다. 한 손에는 뭔가 막대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웬 마른 나무꼬챙이를 꺾어 왔나 싶었는데.

툭.

앞으로 내던져진 그것을 보고 분홍이는 눈을 번쩍 떴다.

“윽!”

손을 들어 비명이 터지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렸다. 잠시 보았을 뿐인데 내장이 얼기설기 엮인 불쌍한 새의 모습이 계속 어른거렸다. 죽은 새 다리엔 제가 단 천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오랑캐 놈이 뭐라고 짖었다. 천 조각을 보고 일부러 잡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한들 귀여운 새를 저리도 잔인하게 찢어 버리다니. 불쌍한 짐승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지옥에서도 욕먹을 악귀 놈.’

쌍욕이 입 안에 맴돌았다. 기운을 모아 놈에게 퍼부어 주려는데 갑자기 서늘한 그림자가 졌다. 눈을 뜨자 놈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염통이 바짝 얼어붙었다.

막상 개놈을 앞두자 혀 또한 굳어 버렸다. 웬만한 양인을 능가하는 오랑캐 놈이 제게 저항하는 자에게 얼마만큼의 힘으로 어떤 잔혹한 짓을 하는지, 분홍이는 이미 여러 차례 겪었다.

피투성이 새를 던져 놓은 놈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독사 같은 눈을 깔아 분홍이를 훑어봤다. 서늘한 시선이 손끝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양손을 등 뒤로 숨겼다. 그게 개종자의 신경을 거슬렸는지, 놈은 거친 장갑을 낀 손으로 분홍이의 손을 우악스레 잡아 비틀었다.

“앗.”

아픔보다 무서움에 더욱 살이 떨렸다. 눈이 저절로 커지고 숨이 가빠왔다.

숨기려 했으나 매서운 눈동자가 손끝에 묻은 흙을 발견했다. 개 놈 눈깔에 의심이 깃들었다.

분홍이의 팔을 닭 모가지처럼 비틀어 쥔 놈은 앞마당을 둘러봤다.

“아…… 안 돼.”

통하지 않는 말로 반항하였으나, 놈을 막을 재간은 없었다. 개종자는 인형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살 떨리는 공포가 엄습했다. 놓으라고 팔을 허우적대고 두 다리를 뻣뻣하게 버텼으나, 썩은 지푸라기처럼 바로 꺾였다. 개종자의 힘에 질질 끌려 결국 인형을 묻은 구석까지 갔다.

* * *

낮 동안 뭘 하나 싶었더니. 얼기설기 꼬아 반쯤 올린 머리엔 웬 꽃들이 잔뜩 꽂혀 있었다. 우습게도 어울리긴 했다. 비틀린 입술 사이에서 비웃음이 샜다.

“사내놈 주제에. 정말 요정이 된 줄 아는 건가. 요정이라 불러 줄까?”

두려운 눈길로 바라보던 놈은 뒤이어 겁먹은 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가소로운 행동에 가학심이 매캐한 연기처럼 피어 올렸다.

발로 뭔가 파묻은 자리를 쓸었다. 그러자 얼기설기 만든 형상 같은 게 나타났다. 어설프지만 무엇인지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인형?”

두 개 모두 사람을 본뜬 인형이었다. 나뭇가지와 천 조각을 엮어서 만든 기분 나쁜 인형은, 일부 미친놈들이 카론을 향해 들어 올리며 보란 듯이 불을 붙이던 저주 인형과 똑같았다.

큰 놈은 어딜 봐도 카론 자신이었고 다른 놈은 이마에 달린 작은 꽃으로 보아 미친 요정 본인 같았다. 자살을 거듭 시도했던 놈이니, 둘 다 땅에 묻은 것은 본인을 희생하여 카론까지 지옥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로 보였다.

“그럼 저 새도 무슨 저주술과 관련된 건가. 단순한 구조 신호라고 생각했던 내가 더 순진했군. 그런데 어쩌지? 대륙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마녀의 질기고 질긴 저주에도 죽지 않고 살았는데.”

카론은 발로 인형을 짓밟았다. 마른 가지는 금방 부러졌고 천은 찢겨 흙과 뒤섞였다.

“♪♩♬♬!”

미친 요정 놈이 갑자기 눈에 뒤집고 달려들었다. 소리 높여 우는 목소리가 꼭 석궁에 맞은 새의 단말마 같았다. 실제로 새 발톱처럼 흙이 껴 시커먼 손톱으로 카론의 목과 얼굴을 할퀴려고 안간힘을 썼다.

“어딜.”

“♪♩♬♬! ♪♩♬♬!”

악다구니를 쓰는 요정 놈이 왁왁 소리를 질렀다. 비명 같은 음률이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소리와 비슷했다. 뒷덜미 솜털이 쭈뼛 섰다. 카론은 악귀에 쓰인 사람처럼 구는 놈을 단단히 제압했다.

“시끄러워!”

성질 같아서는 뼈마디가 어긋날 정도로 강하게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그러나 성질대로 다 했다가는 제대로 써먹기도 전에 금방 뒈져 버릴 거라고 그렌과 아서가 계속 잔소리를 해댔기에, 딴에는 힘을 조절했다.

마른 지푸라기 같은 몸이 잘못 부딪혀 목뼈라도 나가면 곤란했다. 적당한 선을 가늠하기 힘들기에 아예 손을 안 대고 싶었다. 그래서 밥을 거부했을 때도 놈의 사지 대신에 옷가지를 찢었다.

당장은 찢을 옷이 없었다. 대신에 전보다 확실하게 가벼워진 몸을 방으로 끌고 가서 나무 침대로 밀었다.

“악!”

슬쩍 밀었을 뿐인데도 놈은 마치 강하게 후려 맞은 것처럼 침대 위로 나뒹굴었다. 깔개도 있었는데 뼈가 아픈지 숙인 채로 끙끙 앓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겐 일절 보인 적 없는 대단한 너그러움을 베푸는데도 이 미친 요정은 카론을 자꾸 시험에 들게 했다.

구타도 없고 밥도 제때 넣어서 먹는 걸 확인했는데도,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놈은 예전보다 훨씬 말라 이젠 척 보기에도 비리비리했다. 그런 중에도 눈에는 불을 켜고 카론을 노려봤다.

목숨보다 위대한 자존심을 보아, 분명히 높은 신분 출신이었다. 적어도 왕족이나 그에 상응하는 대귀족. 요정 놈들에게도 그런 게 있다면 말이었다.

“네 처지를 알 때도 되었는데.”

설령 왕족이라도 저주술을 쓴 것은 용납 불가능이었다. 기분이 몹시 나쁜 차원을 떠나 망할 마녀를 연상시켰다. 앞으로도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상응하는 벌을 받아 마땅했다.

무력을 삼가기로 마음먹었으므로 할 수 있는 일은 놈의 옷이나 꽃을 불태워 버리는 것, 혹은 전처럼 강제로 다리를 벌리게 하는 것이었다. 개수가 정해진 물건을 망가뜨리기보다는 좀 때리고 패도 곧 회복하는 후자의 방법이 경제적이었다.

“저 저주 인형은 무엇이지? 무엇을 빌었나?”

카론은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그쳤다. 요정이 뭐라고 대꾸했지만, 침상에 무너진 후로 놈의 악다구니는 한결 연약했다. 긴 달리기라도 한 듯이 숨도 색색 몰아쉬었다. 체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는 신호였다.

침대 아래로 늘어진 놈의 발목을 잡았다. 놈이 놀라서 고개를 홱 돌렸다. 뒤이어 두 발목을 잡아 침대 위에 고정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한 놈은 다시 악다구니를 썼다. 저도 모르게 카론의 손이 올라갔다.

“헉.”

공중에 뜬 손을 본 놈이 파르륵 떨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드디어 몸부림이 잦아들었다.

“그래. 가만히 있어. 그러면 조금은 더 수월하게 버틸 거다.”

카론은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놈의 뺨을 살짝 스쳤다.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한 놈의 검은 눈이 공포로 젖어 들었다. 흙 묻은 손이 거친 침대보를 구겨 잡았다.

커다란 드레스 속 가냘픈 몸이 바들바들 떨었다.

“♬♪! ♬♪!”

겁을 먹은 놈은 곧 입술을 앙다물더니 다시 눈에 힘을 주었다. 하찮은 주먹을 기어이 들어 카론의 가슴팍을 때리려고 시늉도 했다. 지긋지긋한 고집쟁이였다.

마른 만큼 힘은 몹시 약해 간지럽지도 않았다. 이런 놈에게 당해서 목에 흉터를 남기다니. 이제 생각하니 놈이 약삭빠른 게 아니라 자신이 멍청했다.

두 팔이 잡히자 이젠 되는 대로 발길질을 해대는 상대를 향해 다시 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정말 맞고 싶어?”

요정은 우뚝 굳어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까만 눈에서는 공포가 흘렀다. 다른 때, 다른 상황이라면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 질긴 성격에 좋은 점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카론의 분노만 돋울 뿐이었다.

“그래. 얌전하게 있으면 맞지 않아.”

이윽고 상황을 깨달은 요정은 묵묵히 수그러들었다. 아주 바보가 되진 않은 듯했다.

카론은 여린 몸을 마음껏 더듬었다. 반항하지 않는다면 굳이 폭력을 쓸 필요는 없었다. 드레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원피스를 가슴께까지 끌어 올리고 다리를 열었다.

“폐하!”

부르지도 않은 잔소리쟁이가 나타났다.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리자 가볍게 숨을 몰아쉬는 시종장의 모습이 보였다.

“방해할 생각이면 꺼져. 혼낼 일이 있으니까 말이야.”

“방해할 생각 없습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는 작은 은제 갑을 내밀었다. 화려한 꽃과 과실이 양각된 통은 주로 약통으로 쓰는 물건이었다. 얇은 뚜껑을 돌려 열자 안엔 옅은 노란색 연고가 가득했다. 이 상황을 예상했단 뜻이었다.

“이것을 사용하십시오. 불필요한 상처를 예방하고 고통을 줄여 줄 겁니다.”

“벌은 따끔하게 아파야지.”

입술을 비틀어 웃자, 그렌이 심각해졌다.

“폐하.”

“알았으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그렌의 허락 따윈 필요치 않다. 단지 제 뜻을 적극적으로 따르면서도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단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딱히 없었다.

작은 침상에 누운 요정은 울 것 같이 얼굴을 찡그렸다. 눈물을 억지로 참는 모습이었다. 이런 얼굴에 이런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쓸모없게 사내라니.

아까움에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연고를 듬뿍 찍었다. 달짝지근한 향으로 미루어 보아 꿀과 각종 약액을 섞은 것 같았다. 그걸 본 놈이 다시 몸부림을 쳤다.

“그런다고 네 처지가 변하진 않는다. 얌전히 다리를 벌린다면 적어도 덜 맞겠지.”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었지만, 적어도 위협은 제대로 느꼈는지 놈이 다시 몸을 굳혔다. 하얗게 질린 뺨이 파들파들 떨었다. 제 위를 점한 카론을 한사코 외면하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네까짓 것이 황제를 거부할 자격이 있나?’

일부러 놈의 입술을 탐했다. 혀를 내어 단단하게 맞물린 입술을 핥자 놈이 흠칫 놀랐다. 마른 입술의 첫 느낌은 거슬거슬했다. 하지만 곧 타액에 젖어 부드러워졌다. 혀끝으로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데도 내내 싫은 듯 입을 단단히 닫고 있는 행색이 그렇지 않아도 없는 참을성을 더욱 앗아 갔다.

바로 이를 세웠다. 살짝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어 뜯자, 놈은 참지 못하고 입술을 터트렸다.

“앗.”

동시에 카론을 노려보던 놈이 다시 고개를 팩 돌렸다.

“건방지게.”

놈은 묘하게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제대로 기능이나 할까 싶은 어쭙잖은 물건이나마 달고 있는 사내놈 주제에, 정복욕을 불 지피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괜한 고집은…… 재미있으라고 부리는 건가?”

가죽 장갑을 낀 채로 손가락 두 개를 작고 여린 입구에 찔러 넣었다. 전에 피에 적셔 처박았던 성기에 비하면 한참 얇은 두께인데도 요정 놈은 벅찬지 밭은 숨을 들이켰다. 깊은 곳까지 단숨에 들어가 내벽을 휘저었다. 손가락을 교차시키며 입구를 타원형으로 늘렸다.

“앗.”

어떤 감각을 느꼈는지 놈은 허리를 띄웠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놈은 가는 목도 뒤로 꺾었다. 작고 흰 가마가 난 정수리가 바닥 가까이 닿으며 덩달아 풍성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동그란 엉덩이가 탄탄하게 수축하면서 카론의 손가락을 조였다.

“흐윽.”

좁아지는 입구에 억지로 손가락을 더 넣었다. 검지와 중지, 약지까지 처넣은 다음 내벽을 꾹꾹 눌렀다. 놈은 고통스럽게 신음하며 다시 사지를 버둥거렸다. 잔뜩 구부러진 발끝이 공중을 휘젓다 카론의 아랫배를 쳤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성난 성기가 자극을 받아 금방이라도 폭발할 지경이었다.

급하게 손가락을 빼냈다. 그런데 놈의 입구가 너무 조인 나머지, 장갑이 입구에 끼고 말았다.

“으윽.”

손가락이 빠져나간 장갑은 금세 쪼그라들었다. 가죽을 문 입구는 다물리지 못하고 얕은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대단히 선정적인 장면이었다.

“미치게 하는군.”

성욕, 그리고 하찮은 반항으로 인해 이성이 흔들린 카론은 성난 맹수처럼 낮게 으르렁댔다.

입술을 여러 차례 빼앗기고도 놈은 지치지 않았다. 조개처럼 다시 다무는 고집이 아래 구멍에서도 발휘될지 자못 궁금했다. 놈을 제압하면서 한 손으로 발기한 물건을 꺼냈다. 굵은 기둥이 꺼떡거렸다. 시선은 먼 곳을 향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챈 놈의 가슴이 빠르게 팽창했다가 수축하기를 반복했다.

카론은 입꼬리를 비틀면서 구멍에 낀 장갑을 거칠게 빼냈다.

“앗!”

끈끈한 연고에 젖은 장갑이 내벽에 붙는 바람에 구멍 쪽으로 쏠렸다. 그 덕에 주름이 아까보다 도톰하고 붉어졌다. 마치 놈의 입술 같았다.

“후.”

더는 참을 이유가 없었다. 카론은 미끈한 선액을 토하는 귀두를 입구에 댔다. 생각보다 훨씬 뜨거웠다. 장갑 낀 손으로 풀어놓은 입구의 저항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체중을 실어 천천히 밀어 넣었다.

“흐으읍.”

놈이 다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뻣뻣한 다리가 카론의 허리께 언저리에서 퍼덕였다. 전신에 힘을 주고 바들바들 떠는 놈은 고개를 간헐적으로 저었다. 침입하는 카론을 밀어내기엔 두꺼운 성기의 부피가 버거웠고 가만히 두기엔 꿰뚫리는 감각이 몸서리쳐지는 듯, 어쩔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크윽.”

마냥 놈을 비웃기엔, 카론도 만만찮은 감각에 숨이 가빠왔다. 전에는 꼭지가 돌아서 마구잡이로 강간했기에 뜨거운 조임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때보단 차분한 덕분인가, 혹은 그렌이 가져온 연고 때문인가. 어쩌면 두 번째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다른 방식으로 길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른 방식은 생각지도 않았다. 이런 뜨거운 조임을 본능적으로 예상한 걸지도 몰랐다.

허리를 슬며시 움직이자, 놈은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매끄럽게 경련하는 몸은 대단한 만족감을 선사했다. 동시에 작은 새 같은 울음은 고막을 즐겁게 했다. 그러자 분노도 슬슬 사그라졌다.

찰박찰박.

하얀 엉덩이 살이 단단한 허벅지에 부딪혀 물결쳤다. 보드라운 살갗이 금세 울긋불긋해졌다. 가슴뼈 아래까지 옷이 올라간 덕에 깊게 쳐올릴 때마다 좁은 속을 휘젓는 굵은 기둥의 존재가 판판한 배 위로 살짝 드러났다.

“하윽.”

놈이 신음을 억누르면서 목을 꺾을 때마다 풍성한 흑발 사이사이로 작은 흰 꽃잎들이 흩어졌다.

“빌어먹을.”

정말 빌어먹을 심정이었다. 과연 놈은 요정이었다. 요사스러운 정령. 남자를 홀리는 사악한 아름다움을 가진 존재.

꽂힌 성기를 잔뜩 조이는 놈은 은은한 살냄새를 풍겼다. 동그랗고 하얀 이마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꽃이 머금은 꿀처럼 그 땀조차 향긋했다. 제 성기에 달라붙는 살점에 힘이 들어갔다. 음경과 동시에 카론의 흐트러진 이성을 한껏 쥐어짰다.

“크…… 윽.”

갑자기 눈가가 검게 흐려졌다.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거센 군마를 힘으로 제압할 때도 이만큼 이를 꽉 깨물진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뜀박질을 했고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쾌감에서 비롯한 열기는 이내 전신을 후끈하게 데웠다. 아무리 유순한 모양새여도 음경과 음낭이 덜렁거리는 사내놈의 구멍에 성기를 꽂아 넣고 마구잡이로 흔들면서 느끼리라 예상하지 못한 수준이었다. 때때로 팔랑거리는 몸이 자잘한 자극을 더했다.

“으윽.”

뜨거운 내벽으로 이어진 깊숙한 곳에 자신을 새겨 넣을 자리를 만드는 동안 놈은 잘게 몸부림쳤다. 싫은 듯이 고개와 허리를 뒤틀다가도 카론이 깊게 파고들면 입술을 터트리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그럴 때마다 성기를 문 입구가 잔뜩 움츠러들어 물건을 잘라먹을 기세였다.

“으…… 아…… 응!”

놈이 고통스럽게 신음을 뱉었다. 하지만 갈라지는 얇은 음성은 달콤한 교성이나 매한가지였다. 피부가 얇아 속에 든 식도와 힘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목이 잘게 떨었다. 촉촉하게 물들어 가는 하얀 살의 맛이 궁금했다. 혀끝을 내어 치명적인 혈관이 지나는 자리를 훑었다. 혓바닥 아래에서 작은 맥박이 팔딱팔딱 뛰었다.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귀엽다는 생각을 떠올린 자체에 약간 놀랐다. 귀엽다는 표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어느 때에 쓰는 지도. 작은 동물이나 아기, 대체로 무해하고 약간은 모자란 듯이 행동하는 상대를 향해 쓰는 표현. 알고는 있지만 스스로 써 본 일도 없고 귀여움을 실감해 본 일은 더더욱 없다. 그런데 요정 놈을 보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 그거라니.

“귀엽다라…….”

속으로 할 말을 굳이 겉으로 뱉었다. 그래봤자 놈은 알아듣지 못할 테고, 알아듣는다고 해도 제 은밀한 구멍을 활짝 열고 들어가는 카론의 물건 부피에 적응하느라 남의 말을 들을 여유가 없어 보였다.

희게 질린 놈의 얼굴은 발진이 오른 듯 울긋불긋하게 변했다. 밑에서 피어오르는 쾌감에 조금씩 무너져 가는 증거였다. 동시에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이 굵은 남근의 뿌리를 꽉 깨물었다.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주제에 오물오물 씹으려고 들었다.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귀가 화끈거리면서 청각이 둔해졌다. 핏대가 너무 올랐다는 표시였다.

당장이라도 이 망할 구멍이 깜찍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벌을 받는 주제에 기뻐하다니…… 천박한 놈.”

욕을 하는 입가가 어쩐지 위로 휘어졌다.

퍽퍽퍽.

“으아…… 앗!…… 으응! 하앙! 앗!”

빠르고 사납게 내리꽂는 행위에 놈은 사지를 버둥거리며 떨었다. 치켜뜬 까만 눈동자가 뒤로 슬며시 넘어갔다. 한껏 벌어진 입 안에 혓바닥이 놈의 등뼈만큼이나 바들바들 떨었다. 작은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강하게 움켜쥐고 허리를 쳐올리는 반대 방향으로 내리꽂았다. 풍성한 검은 머리카락이 마구 흔들렸다.

마찰열이 카론의 음경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런데도 요망한 구멍은 잔뜩 부풀었을 뿐 찢어지거나 피를 흘리지 않았다. 도리어 부풀어 오른 만큼 카론의 성기에 철썩 달라붙었다. 마치 녹은 사탕 같았다.

“역시…… 남자에게…… 후우…… 다리 벌리려고 태어난 몸이야. 사내놈 주제에 말이지.”

어딜 봐도 강간이었다. 아무리 카론이라도 그걸 모르진 않았다. 그런데 놈이 불가피하나마 희락을 선사하는 점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하체를 강하게 내려치다가 쑥 빼었다가 다시 깊게 쑤셔 박았다.

“하응!”

여린 뺨에 깃든 홍조가 한층 붉어졌다. 관자놀이까지 번진 붉은 기운은 놈의 귓바퀴까지 닿았다. 오밀조밀하게 굴곡진 귓바퀴는 과실주를 덧입힌 크림색이었다. 혀를 내어 구석구석을 핥았다. 놀란 듯 고개를 홱 돌린 놈이 경악이 서린 눈으로 카론을 봤다.

“♬♪♬♪?”

뭐라고 삐룩삐룩 우는 놈의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 안에 흥분한 남자가 비쳤다. 흐트러진 짧은 금발 아래 잘 익은 보리 색깔로 그을린 이마에 몇 가닥 주름이 가 있었다. 섹스의 흥분이 만든 자국이었다. 평소 냉랭하고 무감했던 파란 눈은 즐거움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카론은 그런 제 모습이 흥미로웠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요정 놈은 카론을 미친놈처럼 보았다. 귀가 예민한 듯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일부러 귓바퀴를 씹고 귓불을 빨았다. 흠칫 떨리는 어깨가 솟아 카론의 턱을 살짝 쳤다. 달콤한 살내음에 취해 날숨이 거칠어졌다. 그러자 놈이 덩달아 거친 헛바람을 내뱉었다.

“흐읏, 흐.”

“가만히.”

더러운 침대보를 휘어잡은 마른 손이 몸짓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활짝 펴졌다. 매끈하게 뻗은 정강이가 카론의 허리 근육을 마구 치더니 이내 접혔다. 네 가닥 힘줄이 도드라진 마른 발이 카론의 굵은 허벅지 위에 안착하려다가 길을 잃었다. 허리에 감으면 될 것을. 놈은 지독히도 고집을 부렸다. 마른 피부 위에 이를 세우면서 카론은 천천히 놈을 길들였다.

퍽. 퍽. 퍽.

기세를 더해 퍽퍽 쳐올리자 놈은 부들거리는 손으로 카론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힘도 없는 주제에.

“♬♪…… ♬♪.”

딴에는 뭐라고 날 선 비난을 던졌으나 행위에 몰두하는 카론에겐 전혀 들리지 않았다. 늘씬한 허리처럼 가는 손목을 마구 꺾어 휘적거리던 놈의 손끝이 카론의 손목 언저리를 긁었다. 붉은 자국이 죽죽 그였으나, 그게 다였다. 화끈한 통증도 가하지 못한 하찮은 반항은 카론을 더욱 불태우기만 했다.

철퍽. 철퍽. 철퍽.

“앗! 으읏!”

한층 몸짓이 거세졌다. 놈은 더는 신음을 참지 못했다. 빠끔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앙증맞은 흰 이와 작은 혀가 보였다. 입술을 포개어 요정 놈이 입 안에 숨긴 꿀을 빨아 먹는 동안, 양 허벅지에 걸쳐진 흰 다리가 공중에서 나긋나긋 흔들렸다.

겉으로는 유순하고 여렸다. 날붙이를 들고 황제를 습격할 배짱과 몰래 인형을 만들어 저주하는 음습한 면모가 이 순진한 얼굴 아래 있는지 감히 누가 상상이나 할까.

“순하기만 해서는 재미없지, 안 그래?”

싫다면서 도리질 치는 놈의 얼굴을 억지로 붙잡아 다시 입을 맞추었다. 혀를 깨물려는 깜찍한 시도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한번 실패한 방법은 빠르게 포기할 줄 아는 결단력도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신비로운 용모며, 다소 신경질적인 고집이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구멍까지. 최대한 느긋하게 즐기고 싶을 만큼. 황무지에서 빛나는 꽃을 들고 나타난 요정은 신이 자신에게 선사한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달콤한 혓바닥을 빨면서 내심 아쉽다고 생각했다. 이런 놈을 더는 즐기지 못하고 목을 쳐야 한다니.

제국에서는 저주 행위와 관련된 인형 제작은 중죄였다. 실상 기분 나쁜 주술 행위는 거의 극형에 처해 지지만. 특히나 황제를 저주하기 위해 인형을 만든 행위는 대죄인 반역까지 겹쳐, 재판이라는 요식 행위도 생략해도 무방했다.

그전에 요정 놈에게 제국민이 가지는 재판받을 권리가 있는지에 관해서도 의견이 분분할 터. 법부 담당관과 재판관이 따로 있으나, 최종 결정권은 어디까지나 황제 카론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발견 즉시, 즉결 처형해도 무방했다.

예전에 저주 인형을 만든 놈이 있었다. 산 채로 토막을 낸 몸은 들에 뿌려 벌레가 파먹게 하고 가장 나중에 친 목은 성 밖에 걸었다. 관련된 인물은 모조리 잡아들여 교수대에 올렸다. 주술에 엄격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는 파사 일족과 대립하는 제국의 정치적 입장이 다분히 반영된 극형이었다.

저주 인형은 마녀를 연상시켰다. 어린 시절 서궁에 갇혀 있을 때 유스키아의 마녀가 제 피로 물든 헝겊과 머리카락을 엮어 저주 인형을 만들었다. 인형을 때리고 짓밟기도 여러 차례, 이후에는 오줌을 누고 똥을 지리고 결국엔 사지를 잘근잘근 끊어 부수곤 했다. 주로 제 배로 낳은 괴물인 카론과 그 아비를 저주하는 용도였다.

요정 놈이 만든 인형은 그에 비해 훨씬 깜찍한 모양이었으나, 소름 끼치기는 매한가지였다. 저주 인형을 만든 놈을 당장 패 죽이지 않은 자체가 놀라웠다. 그렌이나 아서가 알면 충격을 받을 터. 또 요정 놈에게 단단히 홀렸다고 우려할 가능성도 컸다.

“내가…… 너그럽긴 하군.”

그만큼 놈의 맛은 중독적이었다.

혼자서 아등바등 몸부림을 치지만, 뒷배도, 특별한 세력도 없는 무력한 존재. 서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애를 쓰면서 서서히 미쳐 가는 존재. 패악에 이르지도 못하는 행태는 훨씬 얌전해도 어쩐지 유스키아의 마녀를 연상시켰다.

마녀는 금발에 푸른 눈에 생김새도 요정 놈과는 영 딴판이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카론, 자신에 가까웠다. 그러나 광기 어린 패악을 부린 직후 언뜻 정신이 돌아왔을 때 마녀가 지었던 순진한 눈빛만은 요정과 비슷했다. 빛을 담고 일렁이는 깊은 눈동자.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슬며시 미소 짓곤 했다.

유스키아의 마녀는 죽은 지금도 혐오스럽다. 다시 만날 일이 생긴다면 미소 짓는 낯짝에 가래침을 뱉고 오물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쉬이 죽여 버리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 알 수 없는 심정은 요정 놈에게도 해당하는 듯했다.

“아…… 으.”

제 아래서 몸부림치는 마른 몸을 굽어보았다. 미친 마녀보다는 아직 요정에 가까운 놈. 사내라서 끔찍한 핏덩이를 낳지 않을 놈. 황제가 된 카론에게 손톱을 세울망정, 잔인한 고통을 선사하진 못할 놈. 손쉬운 장난감 같은 놈.

하늘에서 뚝 떨어진 놈을 멋대로 맛본다고 해서 대단한 골칫거리가 될 리도 없고, 심하게 때리지 않으면 잔소리를 하는 놈도 딱히 없었다. 그렇다면 좀 더 너그럽게 봐주며 천천히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깟 인형, 유스키아의 마녀나 처형당한 놈이 만든 것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같은 것을.

화를 내며 때려 죽여 봐야 이미 뒈져 자빠진 마녀나 파사 놈에게 부들부들 떠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황제씩이나 되어서 고작 저주 인형에 발작하는 꼴사나운 행태도 관둘 때가 되었다. 그저 자신만 못 본 척하면 그만이다. 그보다는 꿀과 설탕으로 빚은 것 같은 놈을 좀 더 즐기는 편이 좋지.

카론은 제 아래서 헐떡이는 놈을 단단히 구속했다.

“죽이지 않은 걸 고맙게 생각해라.”

상대는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몸짓은 알아들었다. 요정은 눈을 찡그리며 입술을 말아 씹었다. 어설픈 반항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다.

냉혹한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아직도 만족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제 남근을 놈의 게걸스러운 구멍에 퍽퍽 처박았다. 고통에 일그러진 요정의 표정과 달리 좋다고 들러붙는 천박한 내벽을 만끽하면서.

* * *

황제의 잦은 서궁 출입에 관한 소문이 전 황궁에 돌았다. 서궁에 요정이 감금된 사실은 별로 비밀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멍청이처럼 실실 웃고 다니면서 사람 사귀길 좋아하는 아서 엘러가 모르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어제도 서궁이 후끈했다지요?”

석궁 구매 문서를 확인하던 카론은 눈만 치켜떴다.

“요정을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실 줄 몰랐습니다. 여색에 취미가 크게 없으셔서 걱정했는데. 남색이 취향이시라면 처음부터 말씀하시지요. 제가 알아서 모셨을 텐데요. 고지식한 그렌과는 차원이 다른 뭐 그런 걸 준비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황제가 남색가면 후사는 누가 낳지요?”

수다쟁이 놈이 뚫린 입을 함부로 놀렸다. 듣기 거슬렸으나 윽박질러 봤자 도리어 과민 반응한다고 너스레를 떨 놈이었다. 베로니카의 뒷배를 믿고 나대는 놈에겐 무시가 제일이었다.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어디가 구체적으로 나쁘지 않습니까? 베로니카도 궁금해합니다.”

“구매 조건 말이야, 입만 산 멍청아.”

특별히 문제점을 찾지 못한 카론은 구매 문서를 놈을 향해 던졌다. 질문을 묵살당한 아서는 요령 좋게 문서를 탁 잡으며 씩 웃었다. 그리곤 경망스러운 입을 또 놀리려 들었다. 이런 일에 아서가 입을 열어서 제대로 된 말을 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부부 사이에 발생하는,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일화를 줄줄이 늘어놓으며 귀찮게 할 게 뻔했다.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얼굴에 문신이 생기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지?”

카론은 손에 든 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미소도 함께 던졌다. 수다쟁이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검 제작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그리고 북쪽 황무지 개간을 준비하도록. 나무가 자라지 않는 땅이라도 밀과 보리는 자라겠지.”

“예, 폐하.”

다음 지시를 받은 아서는 카론의 심기가 더욱 나빠지기 전에 얼른 사라졌다. 약삭빠른 쥐새끼 같았다. 카론에 비해 정도가 달라도 종류에 있어서 썩 다르지 않은 성장 배경을 가진, 그 베로니카를 녹여낸 놈이었다. 귀찮지만 시의적절한 질문으로 주변을 환기하고, 굳은 분위기를 풀 줄 알았다. 이번에 뱉고 간 질문도 생각해 볼 가치가 약간은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나쁘지 않으냐라.”

이미 카론의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은 주제였다. 순진한 눈이 유스키아의 마녀를 떠올리게 하는 건 알았다. 죽일 마음 먹기가 쉽지 않은 건 알지만, 그게 이렇게 자주 몸을 겹칠 이유가 되는 걸까?

만약 그 이유가 전부라면, 아직도 마녀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에 질질 끌려간단 소리였다. 더불어 근친상간을 떠올리게 해 매우 불쾌했다. 저절로 입매가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다른 이유가 더 있어야 했다.

눈이 비슷하다고 깨달은 것은 서궁에 처박은 이후에나 떠올렸다. 자신은 놈을 본 직후에 이미 놈을 향한 욕구를 느꼈다. 신분이 불명확한 수상한 자를 제 말에 직접 태우고 제 천막에서 재우기까지 했다. 이미 파격적인 대우였다. 여자라고 여기던 때였다.

어쩌다 보니 욕구를 자극한 요정 놈이 마녀와 비슷한 눈빛을 가진 사내놈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마녀의 영향도 아니고 남색도 아니었다. 그걸 깨닫자 약간 안심했다. 불쾌감을 떨치고 나자 놈을 향해 느끼는 욕구의 정체가 다시 오리무중으로 빠졌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가지고 싶었던 이유가 도대체 뭘까.’

예전에 가까이 두었던 자는 육감적이고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전엔 제 취향이 그렇다고 여겼다. 하지만 요정 놈은 그에서 한참 멀었다. 가슴도 납작했고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싫어했다. 정치적 쓸모가 있다고 해도, 제가 성질을 죽여 가며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저주 인형 사건도 묻었다. 너무 너그러운 처사였다. 감히 황제에게 반항하는 놈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해답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고, 고민은 깊어져 갔다.

* * *

오랜 유린 끝에 혼절했다 깨어났을 때는 혼자였다.

분홍이는 울지도 않은 채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싸늘한 방을 가로질러 안뜰로 향했다. 개종자가 짓밟은 인형이 여전히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제 손으로 인형을 수습하여 나무 아래로 가져갔다. 맨손으로 땅을 팠다. 딱딱하게 굳은 흙과 거친 자갈에 손톱에 갈려 나갔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려 가며 한 뼘 정도 판 구덩이에 큰 인형을 고이 넣었다. 그 곁에 작은 인형을 눕히려다가 끝끝내 그러지 못했다. 땀을 눈물처럼 흘리며 파낸 흙을 덮었다.

작은 인형은 일일이 사지를 뜯어 마당 구석에 흩뿌렸다. 그것이 어울리는 결말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높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자유로운 구름은 회색 돌벽에 갇힌 분홍이를 향해 그늘 손 한 번 뻗지 않고 무심하게 스쳤다. 이젠 새도 날아들지 않는다.

그저 인형 놀이를 했을 뿐인데.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개종자는 인형을 흙발로 짓밟았다. 제 인형이 망가지는 거야 그렇다 하지만, 태손 마마의 인형이 망가지는 건 가슴이 찢어졌다. 아무것도 못 하게 패악을 부리는 놈의 악독함에 분홍이는 울음도 삼켰다. 멍하니 새파란 하늘만 보았다.

그 후로 개종자가 종종 찾아와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인형을 잃은 분홍이는 혼잣말이 부쩍 줄었다. 자신이 조그만 소리라도 내면 개종자가 불쑥 나타나 달려들 것 같은 두려움이 컸다. 고향에 계신 고운 님에게 개종자의 악질이 닿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젠 그분을 소리 내어 부르는 기쁨도 차마 누리지 못했다.

가장 무서운 일은 겁간에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는 점이었다.

긍지 높은 정오의 태양이 꾸짖듯 따가운 빛살을 정수리에 내리꽂았다. 이대로 바짝 말라 죽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맞으면 정신이 몽롱해졌다. 쭉정이뿐이 남지 않은 혼백이 훌훌 달아올라 아지랑이처럼 모조리 증발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축축한 밤이 너무 빨리 찾아왔다.

낮으로는 돌판처럼 달아오르던 마당이 밤으로는 서리 맞은 듯 서늘하여 뼈마디가 시렸다.

분홍이는 낮에 앉았던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시린 달빛을 쐬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었다. 냉기는 흩어지는 정신을 꼭꼭 붙잡아 다시 쟁였다.

울던 아기도 고이 잠들 고요한 밤은 무정하게도 분홍이에게는 안식과 평안을 주진 않았다. 멀리서 나는, 무엇일지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두드리면 저도 모르게 감은 눈꺼풀을 움찔하였다.

냉궁을 찾는 이는 개종자 외에 실상 아무도 없었다. 이제껏 애써 말을 걸어 주던 궁녀와 상선은 말을 걸지 않을뿐더러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마저도 볼일을 보고 나면 분홍이 뭐라 말하든 대꾸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개종자가 인형 일로 크게 화를 낸 탓이었다. 상전이 그리 역정을 내는 데 어느 아랫사람이 감히 기라도 펼까.

잔잔한 유폐궁의 공기는 분홍이의 폐부로 슬며시 스며들어, 종기처럼 습한 불안을 키웠다. 기이하게도 불안은 두려움이 아닌 외로움을 닮았다.

오랑캐 우두머리가 가한 또 다른 형벌은 다름 아닌 고독이었다.

궁녀는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상선은 그저 있는 바위였다. 살에 닿는 건 피비린내 나는 짐승의 손길뿐. 수시로 들락거리는 그놈마저 없는 날이면 온전히 홀로 열기와 냉기로 점철된, 적막한 시간을 인내해야 했다.

아무리 견과를 들고 기다려도 먹어 줄 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았다. 인형을 묻은 직후 들이닥친 궁인이 구석구석 풀을 모두 베어냈다. 훤히 드러난 흙 위를 뛰어다니며 밤으로 열심히 노래 부르던 귀뚜라미는 곧 죽어서 개미에게 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맥없는 손으로 가슴께를 툭툭 쳤다.

“허윽…… 허윽.”

원한에 사무친 자가 혼(魂)을 토하듯, 서러움에 사무친 자가 백(魄)을 토하듯, 밭은 숨을 연거푸 뱉었다. 기침병처럼 쿨럭거리다 이내 식은 뺨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짓무른 눈시울이 쓰렸다.

“윽…… 으윽…… 우욱.”

파들파들 떨리는 손끝이 눈가에 닿았다. 뜨거운 꺼풀이 달달 떨리더니 이내 짠 눈물 한 점을 떨구었다.

‘정말로…… 미쳐 가는구나. 이젠…… 홀로 있기 싫다니.’

연민에 젖은 죄인을 꾸짖듯, 멀리 천둥이 울렸다.

쿠르르르릉.

눈물 젖은 쓰린 뺨 위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스쳤다. 묵직하고 축축한 공기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몸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툭. 투둑.

첫발부터 굵은 놈이 떨어졌다. 이마와 콧등을 툭툭 두드리던 비는 이내 어깨와 손목도 적셨다.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쩍쩍 갈라지는 피부를 적시는 물기가 반가웠다.

분명히 찬물인데, 이상하게 춥지 않았다. 낮으로 너무 많은 빛을 쐬어서 열감이 남아 있었던 것일까. 도리어 시원하게 느껴지다니. 반대로 속에는 천불이 난 듯,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거죽 안과 밖이 온도가 달라서 기분이 영 이상했다. 오늘따라 불안감과 쓸쓸함이 배가 되었다. 슬슬 감각마저 흐려지는 듯했다.

“아으으…… 후웃…… 흐윽.”

웃음도 울음도 아닌 소리를 토했다. 가슴을 들썩이는 사이 등이 굽었고 빗물이 등뼈에 난 골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등뼈를 따라 선득한 감각이 내달렸다.

주르륵.

차가운 물이 체온에 데워졌는지 가랑이로 흐를 때는 제법 뜨끈했다. 앞마당에서 내도록 울고 있던 분홍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놀려 작은 마당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발바닥에 묻은 젖은 흙을 무의식적으로 툴툴 털어 낼 때 다시 한번 뜨거운 물이 허벅지 안쪽을 적셨다.

뭔가 이상했다. 슬슬 열이 오르는 머릿속에서 문득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아…… 아닐…….”

허겁지겁 젖은 옷자락을 걷어 올렸다. 사방이 어두워서 다리 사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손등으로 빗물에 젖은 눈가를 문지르고 다시 다리 사이를 보았다.

빗물과 뒤섞인 뭔가가 허벅지를 지나 오금을 적셨다. 작은 달팽이처럼 종아리를 슬금슬금 더듬는 물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었다. 미끈거렸다.

순간 목 뒤가 뻣뻣해졌다.

“아닐…… 거야…… 아닐…….”

황망히 그것을 도로 훑어 올렸다.

“비…… 빗물일 거야. 아무렴…… 빗물이지.”

오랑캐 옷을 벗어 둘둘 말아 다리 사이를 벅벅 닦았다. 전신을 닦고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도 모조리 문질렀다. 몸 구석구석을 닦고 나자 찝찝한 물기가 사라졌다.

“그럼…… 그렇지…… 흐으.”

떨리는 입가에 불안한 웃음이 떠올랐다. 차가운 손으로 놀라서 벌렁거리는 가슴을 짚었다. 갑자기 오한이 들었다. 옷이 더러워졌으므로 침상 이불로 몸을 덮고 싶었다.

구긴 옷에 발바닥을 요리조리 닦고 막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주르륵.

가랑이 사이에서 뜨뜻한 액이 울컥 샜다. 맑은 액은 얼어붙은 오금을 지나 종아리를 타고 발꿈치까지 흘렀다. 뒤이어 다른 물줄기가 발목 힘줄을 타고 복숭아뼈를 적셨다.

“아……!”

흐릿한 눈길로 흠뻑 젖은 가랑이를 멍하니 봤다. 그것은 발정기에 흐르는 음액이었다.

아니라도 부정해 봐도 소용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신에 열이 바짝 올랐다. 감기 기운까지 더해졌는지, 열 기운이 사나워 정신이 몽롱했다. 침상에 누워 달아오른 알몸을 뒤틀었다.

“흐윽.”

절로 신음성이 났다. 다리를 꽉 조여 닫으며 음액을 막아 보려고 했다.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성년이 되었지만, 아직 몸은 미숙하다 여겼다. 아직 첫 꿀도 흘리지 않은 몸을 개종자 놈이 지독하게 겁간했다. 여린 음문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흘릴 때 개종자 놈은 달군 쇠공이 같은 물건으로 덜 여문 배를 마음껏 휘저었다. 내내 내장이 불타듯 아팠기에 틀림없이 내장이 망가진 줄로 생각했다. 그래서 겁간이 거듭되어도 이에 관련한 걱정은 치워 두었다.

‘이럴…… 수는 없다…… 하늘이 무심해도…… 이럴 수는…….’

쓸쓸한 적막에 사무쳐 있다가 빗줄기나마 저를 찾아서 달갑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반갑지 않은 손님이 들이닥칠 줄이야.

꿈틀거리는 사이, 가랑이 속 음문은 저절로 움찔거리며 맑은 물을 토했다. 황망하고 원망 어린 심경과 달리 이미 사내를 아는 음문은 연신 허망한 입을 쩝쩝 다셨다.

황국이었다면 열기를 다스리기 위해 탕약이라도 달여 먹었으련만. 여기에 그런 게 있을 리 만무했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말이 안 통하는 오랑캐 종복에게 어떻게 전할 방도도 딱히 없었다.

‘며칠…… 이나 갈 텐가……?’

탕약 말고 절절 끓는 열을 다스릴 방법은 양인과의 올바른 결합이었다. 음과 양이 만나 둥지 같은 신방을 차리고 애틋한 정으로 한껏 보듬으면 열기는 슬며시 가라앉는다. 그런 후엔 대체로 어여쁜 결실도 찾아들곤 한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누가 저를 애틋하게 보듬는단 말인가. 구실을 핑계로 비슷한 짓거리를 할 놈은 악독한 개종자 놈뿐이었다. 그놈을 생각하면 차라리 열기에 바싹 타 죽는 편이 나았다.

“아니 된…… 다…… 그…… 흐응…… 놈만은…… 아니…… 흣! 아!”

원망하여 떠올렸을 뿐인데. 놈의 그림자가 드리운 몸은 분홍이의 애타는 심정을 단숨에 배신했다.

굵고 단단한 몽둥이가 깊게 들어와 사납게 휘젓는 감각을 떠올린 신체는 더러운 쾌락을 요구했다. 둔부의 골이 바짝 패고 달뜬 허리가 들썩였다.

“아흑…… 으윽!”

거친 이불을 틀어잡던 손은 기어이 가랑이로 향했다. 양인의 흉물에 비견하기는 어려워도 사내의 몸이기에 응당 달린 음경이 바짝 성을 내었다. 거기에 손가락이 닿자, 등뼈가 저릿저릿했다.

“흑! 앗!”

뒤꿈치로 침상을 차대면서 음경을 문질렀다. 밑에 조롱조롱 달린 음낭이 움찔거렸다.

한번 피어오른 열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불길로 바뀌었다. 가마솥에서 삶아지는 것처럼 피가 절절 끓고 살이 오그라들었다.

“흐으윽!”

골이 녹아 이성이 흐려졌다. 심신은 더는 발정을 마다하지 못했다. 천박하게 다리를 벌리고 엉덩이를 공중에 띄웠다. 한 손으로는 음경을, 다른 손으로는 음문을 매만졌다.

“아윽! 흐윽! 앗!”

아무리 문지르고 쑤셔도 저 깊은 어딘가에서 피어오르는 정염을 다스리긴 부족했다. 길고 굵고 단단하며 사납기 그지없는 것이 필요했다.

아찔한 정신 속에서 떠오르는 건, 냉랭한 눈빛을 한 오랑캐 종자뿐이었다.

“제…… 제발…… 아으…… 흐.”

이젠 누구라도 무관했다. 더럽고 천박하고 본데없는 개종자 놈이 와서 자신을 어떻게 해 줬으면 하는 불결한 마음이 들었다. 희미하게 남은 이성은 혹여 그놈의 아이가 들어설까 봐서 오늘만은 아니 된다는 주장을 펼치다가 금방 사그라졌다.

솨쏴. 쏴. 후두둑.

밖에선 사나운 비가 계속 내려 분홍이의 달뜬 신음을 잠식했다. 밖에 선 궁인이 더운 숨결을 들을 사이도 없을 터. 어차피 분홍이의 의사를 물어볼 이도, 들어줄 이도 이곳엔 없다. 여태껏 그래 왔듯, 인고의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며칠 들리지 않던 무거운 발걸음이 천둥처럼 울렸다.

빗소리도 죽이지 못한 사나운 짐승이 다가오는 기척에 몸이 파드득 뛰었다. 두려움과 반가움. 미움과 달가움. 원망과 안도가 동시에 들어 정신이 아찔했다.

덜컥. 문이 열렸다. 밤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가 분홍이 위로 드리웠다. 흐린 눈으로 거대한 사내의 형체를 가늠하며 사지를 뒤틀었다.

“흐으윽.”

천박한 몸이 기대를 주체하지 못하고 음액을 울컥 쏟았다. 뚝뚝 떨어지는 맑은 액이 이불을 적셨다.

놈이 뭐라고 했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말이지만. 오늘따라 유달리 더 낮고 거친 음성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하윽…… 앗!”

끈적한 열기에 기름 한 바가지가 더해졌다.

평소에는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다리부터 열고 봤던 놈이 오늘따라 침상 곁에 우뚝 서 있기만 했다.

정신은 이미 산개하고 수치심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었다.

“빠…… 빨리…… 으응!”

분홍이는 놈을 보며 애원했다.

놈이 두 발짝 다가오는 사이 염통이 덜컹거렸다. 폐부가 날개처럼 퍼덕였고 또한 전신이 저릿저릿했다.

침상에 바짝 붙어 서고도 소금 맞은 미꾸라지처럼 꿈틀거리는 자신을 가만히 보고 선 놈에게 원망이 물씬 들었다.

정욕에 물들어 부끄러움도 잊은 제가 우스운가? 욕정에 잠겨 다리를 먼저 벌린 제가 새삼 우스운가? 저를 무참히 짓밟아 이 지경으로 만든 놈이!

새삼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 이…… 개…… 만도 못…… 한…… 오랑캐…… 놈의……!”

놈을 손가락질하며 욕을 퍼부으려고 했으나, 희한하게 말을 맺기 어려웠다. 주체하기 힘든 욕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몸을 수없이 겹쳐 발정이 온 사이인데도 놈의 성명을 몰랐다. 오랑캐 우두머리, 개종자로 생각하였을 뿐. 놈을 콕 찍어 부를 방도가 묘연했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이름도 모르는 놈에게 안아 달라 조르는 꼴이라니.

“개…… 놈아! 이 개종자 놈아!”

부를 말은 그뿐이었다. 분홍이는 다리를 벌린 채로 윗몸을 일으켜 놈을 타박했다.

“네놈이 이리 만들었다! 네놈이…… 네놈이!”

저놈이 자신을 이리 만들었다. 놈은 자신을 수치도 모르는 저 같은 종자로 만들었다.

분홍이는 억울함과 괴로움에 주먹을 쥐어 가까이 선 놈의 허리춤을 때렸다. 오랜 유폐 생활로 비실비실한 몸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명치를 때릴 것을 힘이 빠져 놈의 바윗덩이 같은 배를 치고 이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아름드리 금강송처럼 쭉 뻗은 오랑캐 놈의 허벅지에 이마를 기대며 헐떡였다.

“천한 창놈이 되니…… 정나미가 떨어졌어?…… 약 먹은…… 수캐처럼 날뛰던 놈이 왜…… 아무 짓도 하지…… 앗!”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우악스러운 손길이 분홍이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고개가 휙 꺾이면서 침상에 바로 처박혔다. 어질어질한 시야 사이로 짙은 그림자가 훅 끼쳤다.

놈이 뭐라고 지껄였다. 더운, 아니 절절 끓는 뜨거운 입김이 목덜미에 닿았다. 묵직한 체중이 몸 위에 실렸다. 옆구리 맨살을 더듬는 커다란 손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숫제 인두 같았다.

살갗이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아…….”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뒤늦게 두려움에 휩싸였다.

“∑…… ∀∐ỻṬ!”

놈이 뭐라고 외쳤는데 어감이 심상찮았다. 섬뜩한 나머지 열감마저 잠시 움츠러들었다.

번쩍!

밖에서 번개가 내리꽂혔다. 찰나의 불빛에 놈의 도깨비불 같은 파란 눈이 번뜩 빛났다.

콰르릉!

“아아!”

공포에 온몸이 바싹 얼어붙었다. 서슬 퍼런 이를 드러낸 놈은 갈고리 같은 손으로 분홍이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이대로라면 산 채로 갈기갈기 물어 뜯길지도 몰랐다.

“아!”

뒤늦게 두 발을 마구잡이로 버둥거렸다. 발정도 잊었다. 살아야겠다는 원초적 생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ỻṬ…….”

낮게 읊조리는 맹수의 속삭임이 귓전에서 울려 퍼졌다. 산군(山君)같은 무시무시한 울림이 고막을 파고드는 순간, 그만 정신이 아찔하였다. 포효에 사로잡혀 스스로 먹이가 되고자 산군 앞에 엎드리는 작은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 수밖에 없었다.

철컥.

놈이 허리의 쇠 장식을 풀었다. 곧이어 놈의 눈빛만큼이나 흉악한 물건이 드러났다. 꺼떡거리는 기둥은 평소보다 훨씬 성나 있었다.

‘주…… 죽는다…… 이대로는…… 정말로…… 죽는……!’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놈이 버둥거리는 두 다리를 확 잡아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반사적으로 두 손을 모아 가랑이를 가렸다. 도깨비불 같은 퍼런 눈빛이 저를 쏘아볼 때 분홍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안……!”

시뻘건 몽둥이 선단이 음문에 닿았다. 어찌나 뜨거운지 살이 지져지는 느낌이었다. 두 눈을 흡 뜨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살려고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심사였으나, 소용 있을 리 만무했다.

쯔업. 쯔윽.

평소에는 들리지 않는 마찰음이 크게 울렸다. 가슴께가 벌렁거리면서 동시에 귀가 활활 타올랐다. 몸서리쳐지는 감각에 몸이 환희하는 것이 못내 수치스러워 어깨를 움츠렸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저절로 바르작거리는 다리를 어찌할 수 없어 버둥거리자, 개종자가 그것을 번쩍 들어 제 어깨에 걸쳤다.

쯔으윽.

꾹 눌러오는 통에 두꺼운 기둥이 음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져서 허벅지 뒤가 아팠고 동시에 활짝 벌어진 엉덩이가 버거웠다.

번쩍…… 크르르릉.

밖에서 연거푸 번개와 천둥이 울렸다. 아래를 보지 않으려 해도 허리가 둥글게 말려 올라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들이친 번갯불에 교접 자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난잡한 광경에 정신이 어찔했다.

“아…… 아.”

그러나 분홍이를 휩쓸어 간 물결은 황망함과 수치심이 아니었다. 드디어 바라던 것이 들어왔다는 만족감과 저릿저릿한 희열이었다. 난삽한 구멍은 빠르게 흩어지는 수오지심을 파쇄하고는 오랑캐의 남근에 달라붙었다.

아.

이젠 영영 돌이킬 수 없다.

* * *

“읏.”

계속 흘린 액에 촉촉이 젖은 대둔근은 개종자의 아랫배와 다리가 연결되는 부위에 꼭 들어찼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바위 같은 허벅다리를 설겅설겅 베어 만든 것 같은 굵은 남근이 우뚝 솟았는데, 대부분이 분홍이의 음문 안으로 사라졌다. 제 아담한 음경은 꽃술처럼 바짝 성을 내며 달랑달랑 흔들렸다. 엉덩이에 닿은 뜨거운 살덩이는 아무래도 개종자의 씨주머니 같았다.

상스럽고 난잡한 광경에 차마 볼 수 없어 홉뜬 눈을 억지로 닫았다. 그러자 배 속에 들어찬 거대한 부피가 더 생생했다.

평소에도 버거웠던 것인데. 오늘은 정말로 내장이 터져 나갈지도 몰랐다.

“∀…… ⁋∐‡Ṭ…….”

개종자가 뭐라고 낮게 읊조렸다. 저처럼 비를 맞은 것도 아니면서 놈의 이마가 촉촉이 젖었다. 땀이 솟은 이마가 곧 분홍이의 광대 언저리에 닿았다.

“∀…… ⁋∐‡Ṭ…….”

같은 말이 읊조려졌다. 칼로 푹푹 찌르듯이 딱딱하고 사나운 언어에 습기와 정염이 가득했다. 혹여 정말로 양인이기라도 한가? 문득 든 생각에 분홍이는 새삼 염통이 철렁했다.

이대로는 정말로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

“아…… 아니…… 아앗!”

뒤늦게 아니 된다고 도리질을 치려다가 끝맺지 못했다. 저를 올라탄 놈이 허리춤을 툭 추켜올렸다.

찰팍.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등뼈에 날 선 벼락이 내려쳤다.

“아아윽!”

고개를 젖히며 한껏 소리를 질렀다. 입술을 깨물거나 숨을 죽인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도 않았다. 저릿저릿한 환희에 머리털이 쭈뼛했다.

찰팍. 찰팍.

딱딱한 허벅다리가 둔부를 치기 시작했다. 음문을 한계까지 연 기둥이 내벽을 긁으며 속을 파고들었다. 뜬 눈앞에 불똥이 튀고 입 속 혀가 바짝바짝 말랐다.

평소의 겁간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데…… 전연 달랐다. 사내를 맞이한 내벽은 기쁜 듯이 기둥에 들러붙었다. 경박한 음문이 드나드는 개종자의 흉흉한 몽둥이를 꼭 껴안았다.

“크윽.”

꽉 깨문 짐승의 이사이로 낮은 신음이 흘렀다. 분홍이의 시야가 흐리멍덩하게 가라앉는 동안, 놈의 도깨비 눈은 지옥문을 지키는 비사문천처럼 변했다. 푸른 안구가 내뿜는 기세에 속절없이 끌려갔다.

철퍽! 철퍽! 철퍽!

“앗! 으응! 학!”

움직임은 빠르고 깊었다. 한번 내리꽂힐 때마다 일일이 교성을 내지르지 않고서는 견디기 힘들었다. 분홍이의 손목을 잡아 침상을 짚은 놈의 손이 미끄러졌다. 손목이 자유로워지자 이불만 잡고 있을 순 없었다. 허공을 휘젓다가 곧 단단한 디딤돌을 발견했다. 저를 겁간하는…… 아니 제가 겁간해 달라고 먼저 빌었던 사내의 딱딱한 팔이었다. 놈의 두꺼운 소매를 쥐어틀었다. 다른 손으로는 이쪽으로 한껏 기울어진 어깨를 잡았다.

“∀…… ⁋∐‡Ṭ.”

계속 같은 말을 하였다. 음조가 보통 듣던 오랑캐 말보다 훨씬 고왔다.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할 법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데 정신을 팔 때가 아니었다.

놈의 움직임이 점차 거세졌다. 철퍽철퍽 살이 부딪히는 음란한 정사 소리가 쏴쏴 내리꽂히는 빗소리보다 크게 울려 퍼졌다.

“아응…… 아앗…… 헉…… 윽!”

환락에 빠져 고개를 홱홱 꺾으며 몸서리쳤다. 그럴 때마다 놈은 분홍이를 놓칠세라 단단히 부여잡았다. 어느새 입술이 스치며 더운 숨이 뒤섞였다.

추웁.

난잡한 아래 사정만큼이나 두 개의 혀가 불순하게 얽혔다. 뜨거운 살이 저를 파고들었다. 그 때문인지 분홍이는 더욱 갈증을 느꼈다.

“흐음.”

두 팔을 들어 놈의 목을 감쌌다. 눈을 꼭 감고 입술과 혀를 놈에게 비볐다. 그러자 사나운 움직임이 잠시 멈칫했다.

“허억…… 헉.”

열기에 흐려진 시야를 가득 채운 놈의 형체가 잠시 멈췄다. 숨을 고르는가. 그사이 분홍이 또한 접문으로 벅차오른 숨을 고르고자 했다.

“하아…… 아앗!”

낮은 숨을 뱉기도 잠시, 끝은 요란한 교성이 되어 버렸다.

쉬지 않고 들이닥치는 거친 남근에 정신이 혼미했다. 놈의 팔뚝을 쥐어뜯으며 아주 벌어진 다리를 조금이라도 닫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

놈이 사나운 어투로 뭐라고 뱉었다. 욕설 같았다. 그리곤 버둥거리는 분홍이의 다리를 어깨에 단단히 걸쳤다. 꾹 내리는 힘이 심상치 않아, 분홍이를 아주 반쪽으로 접어 버릴 기세였다.

제 무릎이 벌렁거리는 가슴과 어깨쯤까지 내려왔다. 허벅지가 배와 옆구리를 압박했다. 그 덕에 음문으로 드나드는 굵은 남근의 움직임이 훨씬 생생했다.

“아앗…… 앙!”

“큭.”

숨이 가쁜 나머지 교성에 비음이 섞였다. 저를 탄 놈의 기세가 더욱 광폭해졌다. 엉덩이와 다리가 저렸다.

“아응…… 앗…… 하으…… 아!”

내장을 아주 곤죽으로 찧을 기세로 달려드는 거한을 상대하는 일이 버겁고 괴로웠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놈이 저를 패 죽일 듯 파고들 때마다, 굵직한 남근이 제 음문을 비틀어 열 때마다, 딱딱한 허벅다리가 둔부를 턱턱 칠 때마다, 그래서 제 성난 음경의 끝이 배꼽 밑을 꼭꼭 찌를 때마다…….

혼백이 하얗게 작렬하는…… 아찔한 환희가 분홍이를 휘감았다.

* * *

정신을 차려 보니 어영부영 사흘이 지났다. 카론은 멍한 머리를 가누며 어이없음을 느꼈다.

웬 때아닌 장마인지. 줄기차게 쏟아붓던 빗줄기가 어느덧 가늘어졌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 사이로 축축한 바람이 불었다. 제대로 된 걸개도 하나 없는 삭막한 방에 냉기가 가득했지만, 카론은 추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놈은 발가벗은 채 혼자 수음하다 발각되었다. 당황이 황당으로 바뀌었고, 약간의 혐오스러움이 피어오를 무렵 놈이 스스로 카론에게 달라붙었다. 조금, 아니 많이 놀랐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파악할 수 없어 잠시 멈칫했다. 평소에는 몸과 마음은 하나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팩 돌리고 신음을 꾹꾹 누르던 놈이 순식간에 요부가 되어 버렸다.

무슨 수작이냐 싶어 잠시 지켜보았다. 야살스러운 유혹을 감행하면서도 분이 치미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소리치던 꼴이 꽤 우스웠다. 아무래도 사내놈 주제에 남자의 맛을 알아 버린 듯 보였다. 그건 카론 자신도 별로 다를 바가 없었지만.

요정에 대한 제 흥미에 의문을 가지면서도 서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막진 못했다. 위험하다고, 이성이 강하게 경고하는데도 요정의 음란한 술수에 휘말렸다. 아니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후우우.”

정말로 정신이 아찔했다. 이런 정사는 처음이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어두운 천장에 갖가지 색깔의 환영이 번졌다. 조금만 더 하다간 정말로 정신을 놓을 뻔했다.

온몸이 미친 대장장이의 화로처럼 불타올랐다. 이성의 고리로 붙들어 매고자 했던 본능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본능에 충실한 신체는 저보다 더 뜨거운 나신을 옭아매었다. 시야가 흐릿할 만큼 아찔했다.

‘위험한 놈.’

이대로 조금만 더 지체했다가는 이대로 서궁에서 잠들 것만 같았다. 저놈을 부둥켜안고서.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상태가 영 이상한 놈의 곁에서 더는 있을 수가 없었다. 카론은 비척비척 일어섰다.

어질거리는 몸을 간신히 가누었다. 상체를 드는데도 놈에게선 어떤 기척도 나지 않았다. 뺨을 툭툭 쳤다. 고개가 슬쩍 흔들릴 뿐, 별 반응이 없었다.

“기절했나?”

코 밑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미약한 숨결이 느껴졌다. 설마 아무리 연약하기로서니, 잠자리가 좀 격하다고 남자 놈이 쉽게 뒈지진 않으리라.

난잡한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알몸이 아무렇게나 퍼져 있었다. 시종이 들어와 돌보겠지만, 밖은 아직 부슬비가 내렸고 들끓는 관계가 끝난 방은 빠르게 식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가 독감에 걸릴 것 같았다.

정사로 인한 피로는 죽을병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궁에서 걸리는 독감은 뒈질 병으로 발전하기 쉬웠다. 실제 십 년을 서궁에서 살았던 마녀가 별것 아닌 감기로 뒈지는 꼴을 봤다. 거기다 침대 시트는 온갖 오물에 뒤범벅이 된 채 말이 아니었다. 놈의 옷은 축축하고 더러웠다.

“할 수 없지.”

카론은 입었던 재킷을 도로 벗었다. 안감을 덧대 두툼한 그것은 주인의 열기를 흡수하여 벌써 푸근했다. 그걸로 놈의 알몸을 덮었다. 체구 차이 때문에 담요처럼 넉넉했다.

밑으로 툭 떨어진 가는 팔을 들어 재킷 안으로 넣으려다가 멈췄다. 벌써 분에 넘치는 친절을 베풀었다. 거기까지 할 필욘 없었다. 더불어 미친 요부처럼 들러붙던 모습이 겹치면서 찜찜한 뒷맛을 남겼다.

얌전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어쨌든 요정은 아양을 떠는 법을 익혔고, 오랫동안 쌓아 두었던 성욕 또한 말끔히 해소했다. 일단 서궁을 찾은 목적은 다 이루었다. 아니 너무 이루어서 탈이었다.

“사흘이라니.”

제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어쩐지 손끝이 약간 떨렸다. 머리만큼 다리도 무거웠다. 잠도 자지 않고 이틀 내내 전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때도 이렇게까지 피로하진 않았다. 저 요정 놈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카론은 뜨거웠던 열기가 빠르게 식어 가는 방을 잠시 둘러본 후에 나왔다. 뒤는 시종이 알아서 하리라. 제가 내렸던 명령을 상기하며, 서궁을 떠났다.

정궁에 도착하자, 그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무가 늦게까지 이어지는 밤이면 차와 간단한 음식을 들고 오곤 했다. 빈 집무실 앞에 선 그는 카론을 꽤 오래 기다린 듯싶었다.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알…… 아.”

사흘이나 요정과 뒹굴었으니. 그렌이 우려를 표할 만했으나 딱히 덧붙일 말도 없거니와 피로로 인해 머리가 둔하고 몸은 찝찝했다. 잔소리보다는 다른 게 필요했다. 속내를 읽을 줄 아는 그렌이 욕실을 가리켰다.

“씻으실 목욕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했습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욕실에 들어선 카론은 목욕 준비를 끝낸 시종을 모조리 내보냈다. 카론의 전용 욕실은 창문이 단단히 잠겨 있고 커튼이 쳐졌다. 문은 두 개였다. 하나는 보통 사용하는 출입구이고 다른 하나는 욕실 안에서만 열리는 비상 탈출용이었다. 그 문은 복잡한 통로를 통해 다른 방으로 이어졌다. 수건과 옷, 그리고 애용하는 검이 가까운 탁자 위에 가지런히 준비되었다. 시중드는 자는 없었다.

완전히 벗은 카론의 몸은 무수한 흉터로 얼룩져 있었다. 전쟁에서 얻은 칼자국도 있지만, 대부분은 물을 먹인 가죽 채찍의 흔적이었다. 수없이 덧씌워진 흉터는 몸이 부쩍 자라면서 조금은 흐려졌으나, 워낙 덧난 자국이 많아 완전히 가리긴 어려웠다. 보이기 싫은 과거의 잔해였다. 그래서 목욕은 늘 혼자 했다.

뜨끈한 욕조에 몸을 담근 후 다리를 쭉 폈다. 요정 놈을 상대로 격한 운동을 했더니 근육이 뭉치긴 했다. 물을 떠 얼굴에 끼얹었다. 땀이 씻겨가면서 흥분의 여파 또한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이성이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았다.

‘길들이려다가 반대로 길들여질 뻔하다니.’

놈과의 정사가 달가운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빠져드는 건 계산 밖이었다. 본격적인 유혹하자마자 완전히 이성을 반쯤 잃었다. 우위에 있는 줄 알았는데…… 놈이 작정하자마자 순식간에 휘말린 제 꼴이 완전히 우스웠다.

특별한 목적이 없이 서궁을 찾는 행위도 문제였다. 황제라는 막중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앉아 놓고는 얄팍한 욕정에 굴복해 의무를 팽개쳤다. 사흘 전 서궁을 찾을 시점에도 카론의 승인을 기다리는 문서와 보고서가 산더미였다. 자리를 비운 사흘간 양이 세 배는 불어났다.

돌이켜보면 문제는 이번만이 아니었다. 요정을 잡아 온 후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문득문득 요정을 떠올렸고 종종 성욕을 느꼈다. 처음에는 가볍게 즐기는 해소에 불과했으나 어느 틈에 점점 빠져들고 말았다. 종국에는 정무 처리에 심각한 지장을 주고도 모자라, 그렌이 우려를 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요정에게 잘 대해 주라고 잔소리하던 깐깐한 시종장이 말이다.

‘당분간 거리를 두어야겠어.’

놈에 대한 제 관심을 강제로 누를 필요가 있었다. 놈을 외부에 등장시켜 유용하게 사용할 때까지만이라도.

목욕을 마친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응접실에 들어서자 눈치 빠른 그렌이 음료와 가벼운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 매우 시장했으므로 카론은 바로 테이블에 앉았다. 그렌은 마시기 좋게 적당히 식힌 차를 유리잔에 따르면서 입을 달싹거렸다.

“굳이 잔소리하지 않아도 알아.”

“그러십니까?”

“당분간 서궁 출입을 삼가겠다. 그놈이 멀쩡히 살아만 있다면 괜찮으니 동태 보고도 할 필요 없어.”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그렌은 평소처럼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옅은 호를 그리는 입매에서 안도감이 비쳤다.

단순히 일상에 지장을 받은 것으로 끝나서 어쩌면 다행이었다. 만약 기이한 제 욕정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요정이 겉으로는 표시 나지 않는 기이한 주술을 동원하여 작정하고 유혹한 것이라면? 너그럽게 대해야겠다고 결심하기 무섭게 요정이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마치 기회를 노린 듯한 절묘한 변화였다. 그렇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제 욕정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발길을 딱 끊는 게 좋다. 그게 아니라면 무결해도 모자랄 황제에게 뜻밖의 약점이 생길 수도 있었다.

요정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약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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