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8)

2.

황혼의 대륙.

근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전쟁 때문에 세상은 갈기갈기 찢어진 황무지였다. 풀이 죽은 대지는 해골과 썩은 살점으로 뒤덮였고 물고기가 살지 않는 강엔 핏물이 흘렀다.

희망의 불씨가 모조리 타 버린 후에 평화의 개념을 상실한 인간 사이에서 남다른 존재가 나타났다.

카론 유스키아 라테시온.

젊은 정복자는 전쟁터에 나선 지 오 년 만에 대제국을 일구었다.

긴 전쟁 막바지까지 버틴 저항 세력을 거침없이 처단한 직후, 황제는 온전히 제 발아래 떨어진 땅을 굽어보았다.

희망이 증발한 후 들끓는 절망마저 불태우는 자.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쟁의 귀재이며 동시에 피에 굶주린 정복자였다. 커다란 정복의 불길을 일으킨 그는 사방에서 난립하는 작은 불씨를 모조리 삼켜 버렸다. 그와 그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시커먼 재뿐이었다.

강력한 정복자의 출현은 군웅이 가진 항거 의지를 아예 꺾어 버렸다. 그에게 감히 도전치 못한 자들은 명줄을 보전하기 위해 북으로, 북으로 달아났다. 전선은 서서히 평원을 지나 북쪽 산맥 아래까지 올라갔다. 그사이 버려진 잿더미 위로 비가 내리고 새싹이 돋았다.

일찍이 저항을 포기하고 지배자의 손아귀에 들어간 땅은 도리어 전쟁의 불화에서 멀어졌다. 무기를 쥔 자들이 다시 농기구를 들었다. 핏물이 얼룩진 땅을 뒤엎어 일구고 강바닥의 오물을 씻어 냈다. 대평원은 다시 풍요를 꿈꾸며 생산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온 대륙을 발아래 둔 압도적인 정복자에게도 골치 아픈 놈들은 아직 남아 있었다.

파사 일족.

반항 세력 중에서도 파사 일족은 그간 크고 작은 전투를 합산하여 수십 차례 패퇴를 반복했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목숨을 다해 덤벼드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지긋지긋한 새끼들.’

이번 출정에서 카론은 끝까지 어리석은 반항 의지를 버리지 못하는 일부 세력을 북쪽 산맥 중턱까지 몰아냈다.

북쪽 산맥은 험준하고 궂었다. 숲에는 맹수가 즐비하고 구릉은 바위투성이라 먹을거리가 없었다. 그곳에선 살아남기 급급해 세력을 다시 키우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라곤 여기지 않았다.

절멸시켰다고 여기면 어디선가 쥐새끼처럼 튀어나오곤 했다. 이번에도 눈에 띄는 놈들은 다 죽여 버렸으나 어딘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질긴 명줄을 이어 가고 있을 터였다.

파사라 불리는 족속은 혈족이 아니었다. 끈질긴 명줄보다 기이한 습성으로 더욱 유명한 그들은 특수한 종교를 따르는 쓰레기 모임이었다.

파사 일족이 믿는 종교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신전의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대신 마술을 믿는 이교로, 가끔 이상한 술수를 쓰기도 했다. 그들은 얼음 위에서 불꽃을 피우거나 혹은 밤하늘에 태양을 불러내곤 했다.

당연히 평범한 사람들은 파사 일족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카론이 그들을 혐오하는 이유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지독히 개인적인 원한이었다.

‘쥐새끼들을 완전히 쓸어버리려면 역시 근본부터 부숴 버려야 해.’

속으로 이를 갈면서, 카론은 눈앞에 펼쳐진 넓은 구릉 지대를 바라보았다.

북쪽 대륙 발치에서 중앙 직전까지 이르는 거대한 초원은, 풀로 뒤덮인 겉모습과 달리 나무가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다. 땅을 조금만 파도 딱딱한 바위가 나와 나무가 깊은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 덕에 풀만 무성했다.

이 황무지를 파사 일족은 목숨을 다해 염원했다. 그들은 황무지 아래, 고대 마도 제국의 수도이자 그들의 성지인 거대한 도시가 잠들어 있다고 믿었다.

“개소리.”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구릉 지대에 드문드문 드러난 바위엔 특이한 문양의 조각이 있었다. 또는 석조 건물의 폐허가 흔히 굴러다니기도 한다. 당연히 고대 문명의 흔적이었다.

옛 문명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파사 일족처럼 마법을 자유자재로 썼던 마도 제국이 있다고 믿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마법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그러거나 말거나 마도 제국을 마치 신처럼 섬기는 파사 일족은 황무지를 성역으로 여겼고 계속해서 카론을 귀찮게 했다. 믿음의 근거를 아예 박살 내지 않는 한 소모전은 계속될 터.

“여길 파헤쳐서 대규모 목장이라도 세워야겠군. 그토록 경외하는 성지가 각종 똥으로 뒤덮이면 망할 파사 새끼들도 정신을 차리겠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어차피 풀만 자라는 땅이니까요.”

바로 뒤를 따르던 부관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한다.”

“네.”

아서는 황제의 명을 따르고자 기수를 돌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뒤따르던 기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동안 카론은 넓은 황무지를 굽어보며 어디부터 짓밟아 버릴까 궁리했다.

‘아무래도 중심에 있는 저 터가 좋겠지. 저기에 돼지우리를 만들어야겠어.’

흰 돌로 잘 다진 터에 부서진 거대한 기둥이 뒹구는, 신전으로 추정되는 터를 보며 입술을 비틀었다.

그때였다.

우우웅.

별빛이 쏟아지는 맑은 하늘에서 은은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전혀 징조도 없는 이변에 카론의 군마가 흥분하여 앞발을 쳐들었다.

히히힝! 푸르릉!

“워워. 진정해.”

놀란 놈의 두툼한 목을 쓰다듬어 진정시키면서 카론은 예리한 눈길로 사방을 살폈다. 일견 마법처럼 보이는 현상은 파사 놈들의 이상한 술수와 관련 깊었다.

‘근처에 파사 놈이 있나?’

워낙 은밀히 움직이며 이상한 짓거리를 많이 하는 종족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두더지처럼 땅굴을 파고 도사릴 수도 있는 것들이었다.

스릉.

검을 빼든 카론은 사방을 예의주시했다. 말하지 않아도 야영 준비를 하던 기병들 또한 모조리 말에 올라타 창과 검을 고쳐 쥐었다.

“폐하.”

“쉿.”

급히 다가온 아서의 입을 다물린 후 카론은 귀를 기울였다. 웅웅 대는 울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쏴아아아.

뒤이어 거친 바람이 한차례 몰아쳤다.

펄럭.

어깨에 두른 망토가 휘날리면서 피 냄새가 진동했다. 망토에는 카론이 직접 베어 버린 파사 일족의 혈흔이 가득했다.

“어디에 숨은 거지?”

흔들리는 풀밭을 주시하는 찰나 갑자기 하늘에서 섬광이 뻗었다. 빛의 창은 카론이 바라보고 있던 신전 터 중앙에 꽂혔다.

“이럇!”

배를 얻어맞은 군마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폐하!”

부관 아서의 말도 훌륭한 준마였으나, 황제 카론이 아끼는 군마의 속도를 따라오긴 어려웠다.

누구보다도 빠르게 질주한 카론이 신전 터에 도착할 무렵 빛의 기둥은 사라졌다. 기둥이 있던 자리에 파사 일족의 잔당이 있으리라 예상했건만, 막상 폐허에서 발견한 건 영판 다른 것이었다.

“여자?”

밤에도 구별될 만큼 하얀 돌바닥 위에 웬 가녀린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전혀 보지 못한 복식의 치렁치렁한 옷에 별빛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자는 손에 반짝반짝 빛나는 뭔가를 품고 있었다.

‘저것이 사술의 근원인가? 함정이라도 너무 무방비한데.’

주변을 경계하며 잠시 기다렸다. 카론을 꾀어내어 암습하는 함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기다렸음에도 어떤 기척이 없었다.

‘좀 더 허술하게 보여야 모습을 드러낼 건가.’

눈을 가늘게 뜬 그는 군마를 몰아 가까이 다가갔다. 말에서 내리는 대신 허리를 굽혀 검으로 쓰러진 여자를 툭 찔렀다.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저건, 도대체 뭐지?”

일부러 들으라고 혼잣말을 뱉으면서 카론은 말에서 내렸다. 검을 바짝 쥔 채로 여자에게 다가갔다.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는 동안에도 별다른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다. 밤에도 등불처럼 빛나는 기이한 꽃을 제외하고.

쓰러진 여자의 가녀린 어깨 위로 하얀 목이 드러났다. 한 손으로도 충분히 잡힐 만큼 가는 목이 살짝 떨렸다.

“살아 있군.”

검 끝을 여자에게 겨누었다. 여자 자체가 암살자일 확률도 있었다. 아니면 기이한 사술을 부리려다 실패했을지도. 파사 일족을 상대할 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경계해야 했다.

카론은 냉엄하게 명령했다.

“일어나.”

“으응.”

작은 이마를 찡그리던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속눈썹이 가득한 눈꺼풀을 몇 번 깜빡였다. 곁에 있는 황금색 꽃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진주처럼 맑은 피부와 함께 반짝였다. 이국적인 복장만큼이나 이국적인 용모였다.

카론을 올려다본 여자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 제가 더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별빛을 머금은 밤하늘처럼 신비로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스르륵 흘러내렸다. 행동은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 모르는 사람 같았다.

인적이 없는 폐허에 홀로 나타난 여자와 기이한 꽃. 분명히 함정인데. 여자의 반응은 지나칠 정도로 순수했다.

“아.”

다시금 이쪽을 본 여자가 놀란 듯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특이한 얼굴을 가진 여자는 눈을 크게 뜨고 카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었다.

그때 카론은 마음을 굳혔다.

저 신비한 여자를 당장 죽이는 대신 잡아가기로.

* * *

“폐하! 갑자기 그렇게 달려가시면 저는 어떻게 하고요?”

뒤늦게 도착한 아서가 아직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검을 뺀 그는 카론의 앞으로 나서면서 여자를 경계했다.

“위험합니다. 파사 일족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요.”

“무슨 짓을 할 거면 거북이보다 느린 네가 도착하기 전에 벌써 했겠지.”

카론은 시야를 가리는 부관의 팔을 검으로 툭툭 쳤다. 뒤로 꺼지라는 싸늘한 눈빛을 마주한 아서는 얌전히 옆으로 물러났다. 불만이 있는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은 건 모른 척했다. 일일이 지적하기 귀찮았다.

두 사람을 마주한 여자는 벌떡 일어섰다. 황망한 태도로 주변을 연신 둘러본 여자가 다시 카론을 응시했다. 밤하늘처럼 까만 눈에는 공포와 당혹이 서려 있었다.

“음…… 어.”

도톰한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푼 여자가 뭐라 말을 하려 했다.

“네 이름은?”

“음?”

“이름을 물었다.”

미모만큼 머리가 따라 주지 않는지, 여자는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었다. 호기심보다는 슬슬 짜증과 귀찮음이 커지려는 참이었다.

카론의 눈빛에 움찔 떤 여자는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심호흡을 두 번 하더니 약간 흐트러진 옷을 탈탈 털고 헝클어진 머리를 바로 했다.

길고 품이 넓어 하늘거리는 소매를 털어 두 손을 모았다. 양손에는 신비한 황금 꽃을 공손히 올려 잡았다. 무릎을 굽히는 대신 다소곳하게 고개와 허리를 숙여 절했다.

고개를 든 여자는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하지만, 한결 의연한 태도였다. 작고 도톰한 입술을 열어 낭랑한 목소리를 내었다.

“♬♪♩♬, ♪♩♬♪♩♬.”

이상한 소리였다. 대륙 곳곳을 정복하느라 안 다녀 본 곳이 없는데 어디에도 저런 소리를 내는 언어는 없었다. 노래처럼 높낮이가 길게 빠지는 발음이 무척 듣기 좋았다.

“어디 말이죠?”

“그건 부관인 네가 내게 대답해야지.”

“저도 처음 듣는 언어입니다.”

대화를 들은 여자는 다시 한번 지저귀는 새처럼 뭐라고 했다.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말이 통하지 않은 걸 깨달았는지 여자는 난감한 듯이 황금 꽃을 내보였다. 대신 꽃이 말을 할 것처럼.

“저 꽃에서 독무 같은 게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럼 네가 가까이 가 보든가.”

나불나불하던 부관이 즉시 입을 다물었다.

카론은 약아빠진 그를 향해 비웃음을 던진 후 한 걸음 다가갔다. 거리를 좁히자마자 여자는 반보 물러났다. 휘청거리는 얇은 몸은 무력과 거리가 멀었다.

은은한 미소를 잃지 않은 대신 그녀는 다시 황금 꽃을 내밀었다. 그것을 자세히 보고 싶어 홱 낚아챘다.

“아!”

소맷자락 사이로 삐져나온 가녀린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카론과 황금 꽃을 번갈아 보는 하얀 얼굴에 난처함이 번졌다. 카론은 그녀를 곁눈질하며 황금 꽃을 관찰했다.

놀랍게도 금이 아니었다. 아니, 금속도 아니었다. 팔랑거리는 잎사귀의 감촉은 여느 꽃과 같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빛이 나다니. 기이했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눈이 시릴 만큼 강하게 발광하는 잎맥이 보였다.

“야광 식물은 이렇게 밝지 않은데.”

어디서 난 건지 물어보고 싶지만, 여자는 카론의 말을 전혀 이해한 눈치가 아니었다. 그저 꽃을 빤히 바라보며 곤란한 듯 입술을 말았다.

“아까 보았던 빛은 이 꽃에서 나온 것인가?”

“♬♪♪♩♬.”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면서 여자는 두 손을 뻗었다. 분명히 꽃을 원했다.

“♬♪♪♩♬.”

같은 발음이 반복되었다. 손을 뻗은 기세가 돌려 달라는 뜻 같았다.

“돌려주실 겁니까?”

쓸모없는 수다쟁이 주제에 눈치만 빠른 아서가 물었다.

“이상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 빼앗아 두는 편이…….”

“이상한 짓거리도 제 손에 있어야 하겠지? 혹여 기이한 술수를 벌이더라도 네놈을 방패로 쓰면 되니까 괜찮아.”

카론이 내민 꽃을 여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두 손을 모아 공손히 받아 들었다. 제 물건을 돌려받을 뿐인데도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는 모습이 예쁘고 순진해 보였다.

저것이 의도한 속임수라면…… 대단한 연기 실력을 가진 희대의 사기꾼이었다. 파사 일족일까? 섣불리 판단하기 힘들었다.

“♪♩♬.”

꽃을 받아 든 여자가 뭐라고 다시 말하였고 젊은 황제는 싸늘한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널 제도로 이송하겠다. 네 처분은 차후에 결정하도록 하지.”

알아들을 리 없는 여자의 작은 입술이 떨어지더니 뭐라고 오물거렸다. 작은 새의 지저귐 같기도 하고 이국의 노래 같기도 한 말소리가 꽤나 듣기 좋았다. 그러나 여기서 계속 서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카론은 여자의 허리춤을 확 끌어안았다.

“으악.”

여자가 기겁하며 발버둥을 쳤다. 작고 가녀린 몸으로 반항해 봐야 간지럽기만 했다.

“여자의 정체는 제도에 있는 늙다리 떠버리들에게 물어보지.”

“이송대를 꾸릴까요?”

“아니. 나 혼자 충분하다.”

“아까부터 대단히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시는데 그러다가 제명에 못 죽…… 알겠습니다.”

카론의 시선을 받은 아서는 냉큼 말을 바꾸었다. 무례하게도 말에 먼저 오르기도 했다.

“그럼 거북이같이 느린 저는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밤이슬이 내리기 전에 야영 천막을 다 치지 못할 테니까요.”

냉엄한 황제에게 혹독한 꼴을 당할까 봐서 두려웠는지 아서가 부리나케 달아났다.

이후 카론도 제 군마를 향해 다가갔다. 단단히 붙든 여자가 자꾸 소리를 치면서 버둥댔다. 질질 끌기도 번거로워서 아이처럼 번쩍 안아 들었다.

“앗.”

일일이 놀라는 작은 몸은 예상보다 더 가벼웠다. 두툼한 팔뚝에 얹은 말랑한 엉덩이가 얇은 천 아래에서 씰룩댔다. 얌전히 안길 뜻이 없어 보였다. 늘 그렇듯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철썩.

“헉!”

카론의 손에 엉덩이를 얻어맞은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한 건지 미처 깨닫지 못한 작은 동물처럼 입도 빠끔 벌렸다. 키를 보아 성인이 분명한데 아기처럼 무구하기 짝이 없어 절로 코웃음이 났다.

“반항하면 더 맞을 거다.”

하얀 얼굴이 빨개지다가 갑자기 파랗게 질렸다. 입을 뻐끔거릴 뿐 말은 잇지 못했다.

여자는 더는 반항하지 않았다. 대신에 카론의 품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두 팔로 질긴 망토로 감싼 어깨를 짚고 뻣뻣하게 버텼다. 한사코 고개를 돌리면서.

군마에 짐짝처럼 얹어 광활한 초원을 달려 야영지에 돌아갈 때까지 여자는 침묵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황금 꽃을 놓칠세라 꼭 쥘 뿐이었다. 아둔함과는 거리가 먼 대신 꽤 고집쟁이였다.

* * *

황제의 귀환으로 제도는 떠들썩했다. 꽃가루가 사방에서 휘날렸다. 개선하는 기병에게선 용맹함과 절도, 그리고 당당한 뿌듯함이 묻어났다. 붉은 곱슬머리를 휘날리는 부관 아서 엘러는 마중 나온 제도의 군중에게 화답하듯 손을 흔들었다.

“황제 폐하 만세!”

“라테시온 만세!”

환대에 손짓으로 응답하는 다른 자와는 달리, 제도민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황제는 그저 묵묵히 앞을 보고 움직일 뿐이었다. 그의 사나운 군마가 즐거워 연신 투레질을 해도 황제는 우레와 같은 함성에 특별히 화답하는 일이 없었다. 냉랭한 성품으로 유명한 황제로선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이기에 군중의 이목을 사로잡은 대상은 따로 있었다.

“저게 누구지?”

“몰라.”

황제의 품에 웬 여자가 하나 안겨 있었다. 부드러운 빛깔에 하늘하늘한 꽃잎 같은 옷을 입은 그녀의 얼굴은 진주처럼 하얬다. 검은 보석으로 자아낸 듯 까만 머리카락은 매끄러운 광택이 흘렀고 군마가 움직일 때마다 팔랑팔랑 날리면서 빛을 흩뿌렸다. 묵직하여 거의 흔들리지 않는 황제의 붉은 망토와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전리품인가?”

“처음 보는 이국인이야.”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앞을 바라보는 하얀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머리카락만큼이나 검은 눈동자는 이따금 주변으로 향했다. 굴곡이 강한 보통 사람과 달리 이목구비가 섬세한 붓으로 그린 듯 여렸다.

“사람은 맞아?”

“살아있는 도자기 인형 같은데.”

황제가 데려온 신비한 미모를 가진 여인에 관한 수군거림이 더욱 커졌다. 늘 그랬듯이 황제는 그들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대로 황궁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폐하.”

시종장 그렌이 카론을 맞았다. 그의 뒤로 많은 시종과 시녀가 거대한 황궁의 주인을 맞기 위해 사열했다.

“별일 없나?”

“예.”

미리 소식을 전달받은 그렌은 카론이 데려온 여자에 대해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물끄러미 시선을 두었을 뿐이었다.

카론은 여자를 단단히 붙들고 화려한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미리 지시를 받은 시종이 재빠르게 움직여 한 방의 문을 열었다. 카론이 들어가자 그들은 무거운 커튼을 걷어 방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탁.

그제야 카론은 여자를 놓아주었다.

질질 끌려온 그녀는 겨우 불안한 듯 제 발로 디디고 서서 방을 빙 둘러보았다. 시종의 움직임도 두려운 눈으로 관찰했다.

황무지에서 황도로 오는 내내 여자는 어떻게든 카론에게서 떨어지려고 들었다. 같은 말을 타면서도 불편하지도 않은지 내내 몸에 힘을 주고 버텼다. 밤에 천막에서도 쥐새끼처럼 구석에 콕 박혀서 오들오들 떨었다. 그러니 놓아주면 당연히 달아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는 그렌과 시종들을 쭉 둘러본 후 카론에게 바싹 붙었다. 처음 보는 사람보다는 자신을 잡아 온 카론을 더 신뢰하는 듯한 태도였다.

저주받을 살인마로 불리는 황제 카론을 그렇게 여길 수 있는 건 두 부류뿐이다. 멍청하거나 미치거나.

“꼭 집고양이 같군.”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여자는 카론을 응시했다. 눈빛이 맑고 총명했다. 얇은 옷감으로 감싼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도 새로운 환경에 난동을 피우기보다 일단 주변을 탐색하는 영민함이 있었다. 얌전한 행동거지가 백치나 미치광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륙 정황과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오지 출신인가.’

의문은 내일 학자와 신학자들이 답할 것이다.

“떠버리들이 이 자의 정체를 알아볼 때까지 잘 지켜.”

“예. 폐하.”

카론이 몸을 돌렸다. 여자는 휘청거리며 뒤를 따랐다. 거리가 빠르게 멀어지자 급기야 손을 뻗어 카론의 망토를 잡았다.

“허.”

카론은 놀라움을 금치 못해 무심코 탄성까지 뱉었다. 뒤를 돌아보자 까만 눈동자 한 쌍이 간절하게 저를 보고 있었다. 무엇이 불안한지 망토를 잡은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처음이었다.

피로 물든 제 붉은 망토를 누군가 잡은 것이.

황제 카론이 멈칫하는 순간, 시종장은 체통을 잃고 자리에서 펄떡 뛸 뻔했다. 그만큼 많이 놀랐다. 불필요한 죽음이 발생하기 전에 그는 얼른 망토를 잡은 여자의 손을 떼어 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무구한 나머지 실수를 저지른 여자를 대신하여 그렌이 사과했다. 사실 카론이 크게 노한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황당했을 뿐.

그렌에게 가로막힌 여자는 불안한 눈빛으로 카론에게 뭐라고 지저귀었다. 황금 꽃을 보이면서 빠른 말투로 뭔가 절실하게 호소했다. 낯선 외모 때문인지 마치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어린 동물 같았다. 그 때문일까. 원래 자신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어쩐지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론은 여자의 턱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자 빠르게 움직이던 작은 입술이 금방 얼어붙었다. 동그랗게 뜬 눈이 놀란 토끼 같았다.

“곧 다시 만날 테니 얌전히 있어.”

대륙 공용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도닥이는 분위기는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두 번째는 얌전히 그렌의 안내에 따랐다.

“고집쟁이지만 멍청하진 않아. 마음에 들어.”

카론은 여자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수다쟁이 빨간 머리가 보았다면 요란한 혓바닥을 가만히 두지 않았을, 부드러운 미소였다.

* * *

“아암.”

“요 예쁜 것.”

큰엄마 무릎을 차지한 분홍이는 큰엄마가 직접 뜯어 입에 넣어 주는 달콤한 정과를 받아먹고 있었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별당 마당에서 누군가 큰엄마를 불렀다. 낭랑하면서도 남자다운 음성은 필시 맏아들이었다. 분홍이를 안은 채로 큰엄마는 별당 들창을 열었다.

“벌써 왔느냐?”

“예. 오늘은 상관 나리께서 일찍 퇴청하라 하셨습니다.”

“허아! 허아아!”

형을 발견한 분홍이 짧은 두 팔을 내밀면서 바둥거렸다. 어린 막둥이를 본 도운의 표정이 금세 풀어졌다.

“우리 분홍이. 형님 보고 싶었어?”

“아아앙!”

분홍이는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도운이 냉큼 창가로 달려와 어머니의 품에서 분홍이를 쏙 빼 갔다.

“아이쿠, 인석아. 형님 관복도 안 벗었다.”

통통한 손으로 관모를 만지는 분홍이를 보며 큰엄마가 짐짓 꾸짖었으나 음성에는 탓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엄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명채운.”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분홍이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약간 울상을 지으며 모친을 돌아봤다.

“큰어머니를 발로 차는 법이 어디 있느냐? 그리고 형님이 퇴청하여 돌아오셨으면 절을 올려야지 어디서 어리광을…….”

“두게. 아직 아이지 않은가.”

“형님. 어린 나이에도 제 분수와 주제를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 버릇없이 큰형님의 관모를.”

“괜찮습니다. 작은어머니. 아버님 상투도 잡고 흔드는 귀한 손인데 제 관모가 대수겠습니까?”

도운이 웃었다. 위안이었건만 친엄마의 표정은 더욱 흐려졌다. 분홍이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내려 달라는 뜻이었다. 도운이 순순히 놓아주자 형님 품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들창 아래 있는 툇마루에 선 분홍이는 갑자기 푹 주저앉아 머리를 마루에 콩 박았다.

“혀니. 아녕.”

“아이쿠. 우리 아우님이야말로 오늘 안녕하셨습니까?”

도운이 허리를 숙여 맞절했다.

분홍이 벌떡 일어나서 모친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그리곤 다시 당당하게 형님을 향해 두 팔을 폈다.

“옳지, 옳지. 우리 분홍이 영특하구나!”

도운은 껄껄 웃으며 분홍이를 다시 안아 올렸다. 큰엄마가 신나서 손뼉을 쳤다. 엄마는 낮은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헉!”

눈을 번쩍 떴다. 노곤함과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갖은 이국 장식으로 치장한 방은 매우 넓었다. 부드러운 깔개가 빼곡하게 깔렸음에도 온돌이 없어 냉골이었다. 이부자리가 있었으나 분홍이는 처음부터 그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을 붙였다.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있을 수야!”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욱신거리는 발을 매만졌다.

“아야.”

다친 발가락이 곪아서 몹시 욱신거렸다. 상처를 닦고 고약을 발라야 했다. 말이 안 통하는데 당장 그런 호사는 누리기는 어려웠다.

‘범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어.’

무수히 되뇌면서 두려움을 억눌렀다. 정신이 들자 낯선 세상에서 낯선 외양의 사람을 만난 일이 저절로 떠올랐다.

강렬한 빛에 휩싸인 뒤, 눈을 떠 보니 난생처음 보는 곳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말을 건 커다랗고 무서운 외모의 사내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국인이었다. 덩치가 황국에서 제일가는 태손 이승원과 비슷했다. 하지만 어진 인상의 태손과 달리 이국인은 눈매가 송곳처럼 날카롭고 코가 벼린 듯 높아 인상이 무척 사나웠다. 얇실한 입술에선 냉혹함이 묻어났다.

‘온통 피비린내가 났어.’

처음에는 여느 장수들이 그러듯이 단순히 붉은 비단 장포를 걸친 줄 알았다. 유달리 두꺼운 장포의 펄럭임이 묵직하다고 여기는 순간, 코끝을 스치는 피비린내에 놀랐다. 장포는 피로 젖어 있었다.

금은화처럼 황금색으로 빛나는 모발을 지닌 그자는 부상의 흔적 없이, 발끝까지 힘차게 움직였다. 그 뜻인즉슨, 장포를 적신 피가 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것이란 얘기였다. 필시 거친 야만인이었다. 혹은 피에 미친 광인일지도 몰랐다.

‘그런 자를 천인으로 착각하다니. 어디 오랑캐인 줄도 모르고.’

분홍이는 처음 보는 기이한 복식을 한 이국인과 낯선 환경. 어리둥절함도 잠시 처지를 빠르게 파악했다. 빛을 쏟아내는 비원의 우물 위로 둥실둥실 떠올랐으니. 별천지 어딘가로 떨어진 듯했다.

어느 별천지라도 제 신분을 먼저 밝히고 도움을 청하는 것이 도리였다. 하지만…….

‘말도 통하지 않을 줄이야. 아니 이국 사람은 이국 말을 쓰겠지만…….’

낭패였다. 소통이 되지 않기에 황국의 상징인 금은화를 내밀었다. 신비한 힘을 간직한 꽃을 별천지 사람이 알아보리라 여겼다. 하지만 피비린내를 풍기는 상대는 금은화를 알아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났다.

황국 재상의 막내로 장차 황국 태손의 비가 될 귀한 몸이었다. 느닷없이 사라졌으니 지금쯤 난리가 났을 터였다.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온 도성이 술렁일 것이 눈에 훤했다.

‘황제 폐하께서 태손 마마를 크게 꾸짖으실까?’

손도 채 잡아 보지 못한 부군이 고역을 치를 수도 있음도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태손이지만, 허락 없이 황제의 물건인 금은화에 손을 댔다. 분홍이는 비원의 봉인도 뜯어 버렸다.

‘벌을 받은 게야.’

한숨이 흘렀다. 금은화는 아직도 싱싱했다. 신비한 신선의 꽃이 엉덩이에 뿔이 난 태손과 분홍이를 아주 크게 벌한 게 분명했다.

“고이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국인은 분홍이를 함부로 대했다. 따라오라 표시하면 눈치껏 따라갈 터인데, 태손을 위해 아껴온 귀한 몸을 함부로 만지는 것도 모자라 볼기짝을 두들겼다.

입이 있으나 말을 잃었다.

갓 성년이 된 몸과 마음은 순수했다. 태어나서 여태껏 한 번도 회초리를 맞아 본 일이 없거니와 맞아도 하필 둔부를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이국인은 수치란 것을 모르는 듯했다. 더한 꼴을 당하기 전에 발버둥 치지 않고 얌전히 있는 편히 더 나음을 직감했다.

다행히 이국의 사내는 더는 난폭하게 굴지 않았다. 단지 분홍이를 말에 실어 천막이 가득한 진지로 데려갔다.

처음 천막을 보곤 유랑 생활을 하는 서쪽 오랑캐 무리인 줄 알았다. 대장군으로서 천하를 누비는 누님에게 가끔 들은 바로, 서쪽 오랑캐는 무장하고 돌아다니며 상단을 습격하는 마적이었다. 마침 말을 타고 검을 패용하고 있기에 영락없이 그런 줄로만 알았다.

서쪽 오랑캐 중에서 신국 말을 하는 사람을 찾아 제 신분을 밝히기를 바랐다. 황상께서 다스리는 신국은 대국이니 그 말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은 있을 터. 그때까지 대장인 노란 머리의 사내를 거스르지 않고자, 얌전히 시키는 대로 했다. 군사를 움직이는 내내 사내는 분홍이를 가까이 두면서 조용히 관찰했다.

딱히 해치려는 낌새는 없었기에 건네주는 육포와 물을 감사히 받았다. 육포는 이가 나갈 만큼 딱딱했고 물에서는 비린내가 났다. 그래도 출정 중에 귀한 군량미를 나누는 배려가 고마웠다. 입에 거의 대지 않았음에도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럴 때마다 사내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싸늘한 청금안이 내내 따라붙었다. 너무나도 무서웠으나, 분홍이는 되도록 의연히 있으려 애를 썼다.

어딘가 사내의 마땅한 근거지가 있을 터. 거기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출병한 군사인 사내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얌전히 따랐다.

‘아무리 오지라도 이 정도 군사가 주둔하는 성채에 신국 사람이 하나쯤은 있겠지.’

그러나 오늘 낮에 으리으리한 성채를 보자마자 순진한 바람은 근본부터 흔들렸다.

돌로 지은 거대한 성은 마적(馬賊)이 점령한 오지의 성채가 아니라 어딜 봐도 궁궐이었다. 대국 신(新) 나라의 황궁에 비견되는 막대한 규모의 궁궐. 뾰족한 탑과 층층이 쌓은 누각은 하늘이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끝을 보려 고개를 뒤로 꺾다가 대장의 가슴에 정수리를 박을 뻔했다.

‘허어. 보통 오랑캐 무리가 아니구나.’

더러운 행색을 한 이국인을 향해 환호하는 거대한 인파와 하인들. 황금과 각종 보옥으로 치장한 실내. 비단을 덧바른 빗살문 대신에 유리를 끼운 창문.

막대한 위세와 부, 궁궐의 여러 사람이 이국인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미루어 보아 이국인은 단순한 오랑캐 우두머리가 아니라 적어도 군왕이었다. 당장 보이는 기세로는 신국에 계신 폐하께도 절대로 뒤지지 않았다.

‘서쪽에 이렇게 큰 대국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성혼을 앞두고 황궁의 법도를 익히느라 외부 소식을 듣지 못했다. 누님을 만나지 못하면 머나먼 이국의 소식은 더더욱 알기 힘들었다.

더욱이 우두머리 하는 짓이 똑 못 배운 종자라, 이토록 지체 높은 자라 전혀 여기지 않았던 분홍이는 크게 당혹했다. 정말로 큰일이 난 듯하여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장차 태손비가 될 명가의 자손이 비루한 처신을 할 수는 없는 법.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쓸며 숨을 고른 다음, 제가 할 일을 떠올렸다.

‘이미 이국에 당도했으니 어쩔 수 없다. 지금으로선 내가 바로 황국의 사신이요, 신국을 전하는 얼굴이라. 절대로 허투루 보이면 안 된다.’

분홍이는 곧장 제 몸가짐을 돌아보았다. 빠른 눈길로 옷에 묻은 엷은 먼지를 털고 구김을 폈다. 손끝으로 귀밑머리를 곱게 넘긴 다음, 어깨를 바로 하고 고개는 꼿꼿이 세웠다. 눈을 똑바로 뜨면서도 너무 노려보지 않도록 조금 힘을 뺐다.

밝은 노랑머리에 냉랭한 파란 눈을 가진 색목인이 대국의 군왕이라면 그에 맞은 법도를 따라야 했다. 당장 이국의 예법을 모두 알지는 못하나, 존중하는 자세로 자신의 몸가짐부터 바로 하고 차분히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것이 맞았다.

‘명가의 자손으로 배워 온 충효와 예의를 떠올려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해야지.’

이국인은 분홍이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휑 가 버리려고 했다. 고작 며칠이지만 낯을 온전히 대한 사람이 그뿐이라 저도 모르게 의지했던 모양이었다. 놀라서 피 묻은 장포를 덥석 잡고 시키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쪽은 다급한 중에도 예를 다하는데, 저쪽은 무례하게도 분홍이의 턱을 만졌다. 너무 놀라 염통이 툭 떨어졌다. 뭐라 주절거리는 우두머리의 목소리는 갈라진 대금처럼 낮고 거칠었다. 더는 사정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황국 말을 하는 사람이 정녕 없는 것인가.”

대체 자신을 어쩌려는지. 말이 통하질 않아 답답함이 컸다. 언어도 언어지만, 속히 돌아가려면 말이나 마차 같은 이동 수단을 구해야 하는데.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말을 구할 방도는 대국의 군왕이 내보이는 자비와 도움일 터. 우선 이국인의 뜻을 따르는 편이 이득이라 조심하고 있건만, 냉랭한 퍼런 눈은 어딜 봐도 자비와는 거리가 멀었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우두머리를 마주할 때마다 괜히 의기소침해졌다. 짧게 겪었을 뿐이지만, 그는 난폭하고 추잡스러운 손길을 우악스럽게 휘두르는 잡배였다. 낯선 사람을 어깨에 둘러메질 않나, 궁둥이를 두들기질 않나. 생각만 해도 낯 뜨거웠다.

“못 배운 오랑캐 놈.”

손으로 달은 얼굴을 부채질하다 보니 절로 한탄이 흘렀다.

“큰일이구나.”

꼬르륵.

배에서 신호가 났다. 목도 말랐다. 이곳으로 오기 전 천막에서 빨간 머리 오랑캐가 삶은 고깃덩이와 거무죽죽한 채소죽을 주었는데 고약한 냄새가 나서 입에 대지 못했다. 물주머니에서도 곰팡내가 나서 반 모금도 못 마셨다.

휘황찬란한 방에서는 위세를 과시하는 천박함이 줄줄 흘렀다. 냉골과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도 불편했지만, 가장 언짢은 것은 방 정중앙에 떡 하니 놓인 침상이었다.

격벽을 세우지 않은 침상은 요란한 색의 금침을 덮었다. 문제는 색깔이 아니었다. 어떻게 된 습속인지 막대한 침대 위에는 크고 작은 베개가 도합 6개나 되었다.

‘서…… 설마…… 여…… 여섯이 같이……?’

이…… 이…… 추잡하기 짝이 없는 오랑캐 놈들 같으니!

처음에는 제가 잘못 본 줄 알았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다시 차근차근 베개를 세었다. 몇 번을 세어도 여섯 개가 맞았다.

“으아아!”

후다닥 뒤로 물러난 분홍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아픈 발을 동동 구르다가 다시금 침상을 흘끗 본 분홍이는 이번엔 새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무리 색욕에 물든 암군이라도 한 번에 여섯 상대를 들이진 않을 거야. 설마…… 푸…… 풍습이 다른 거겠지!”

아니 덩치와 기세로 보아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못 배운 족속은 하는 짓거리도 짐승 같으니.

‘그럼 혹여…… 내가 오랑캐의 노리개로?’

소름이 쭉 돋았다. 벌떡 일어서서는 초조하게 서성였다. 발가락의 통증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멍청하게 있다가 혹여 제가 음인임이 들통나면? 아무리 제가 신국인이라고 해도 귀한 음인을 그냥 놓아줄 리 없었다.

음인에게서 본 자식은 다재다능하고 영민할 뿐 아니라 대대손손 무병장수한다는 속설이 널리 퍼졌다. 실상 속설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했다. 황가와 권세가들이 앞다투어 음인을 들이려고 혈안이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저를 대뜸 잡아 온 것도 혹여 음인인 걸 바로 알아봤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보쌈하듯 잡아서는 궁둥이를 두들기곤, 좀 전엔 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턱을 잡고는 저를 빤히 보며 입맛을 다신 게야!

“이러고 있으면 안 돼.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고 보신할 궁리를 해야지.”

이대로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할 순 없었다.

“뭐라도 해야…… 아!”

똑똑.

누가 문을 두들겼다.

분홍이는 화들짝 놀라 얼어붙었다. 답을 하기 전에 문이 열리고 아까 보았던 회색 머리의 노인이 들어왔다. 이국 말을 하며 고개를 까딱 숙이는 태도가 절도 있었다. 높은 벼슬에 있는 자 같았다.

그의 뒤로 젊은 남녀가 금색 바퀴가 달린 작은 수레를 밀고 들어왔다. 신기한 수레 위에는 은색 뚜껑이 서너 개 있었는데 그걸 열자 납작한 쟁반에 담긴 것이 드러났다. 생김새는 특이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음식 냄새가 났다.

‘황궁에서 일하며 음식을 가져오는 자니 저들은 내관, 궁녀이고 그럼 저자는 내관을 다스리는 상선인가.’

상선의 지시에 따라 내관이 음식을 창 아래 있는 육중하고 화려한 탁자 위에 놓았다. 주둥이가 얇고 긴 주전자를 기울여 교묘한 대와 받침을 단 유리잔을 채웠다. 옅은 노란빛이 도는 술이었다.

은색이 번쩍이는 식기도 여러 개 놓였다. 역시나 익숙한 수저는 뵈지 않고 웬 단도와 작은 세 가닥 창이 양쪽에 자리 잡았다. 손잡이가 달린 작은 사발에 붉은 액체도 따랐다. 더운 김 사이로 제법 그윽한 향기가 났는데 이국의 차인 듯싶었다.

상선이 분홍이를 보며 자리를 권했다. 그는 자수 놓은 덮개로 치장한 묵직한 좌상을 손수 빼주었다.

꼬르륵.

뱃고동이 크게 울렸다. 수치심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분명히 들었을 텐데 상선은 모르는 척했다. 잠시 머뭇거리자 상선은 작은 칼과 세 가닥 창을 들어 음식을 썰었다. 우두머리와는 달리 배려가 있는 자였다.

가운데 접시에는 간장에 조린 떡갈비 같은 덩어리가 있었는데 그걸 썰자 옆에 벌건 살이 드러났다. 덜 익은 생고기였다.

“웃.”

분홍이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뒷걸음질 쳤다.

고기를 안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통 먹더라도 온갖 약재료를 다 넣어서 푹 고아 만든 부드러운 편육을 좋아했다. 육류나 생선은 찌거나 삶아서 냄새를 빼고 부드럽게 만든 걸 맑은 장에 찍어 먹는 게 제일 좋았다.

이국의 음식은 하나같이 냄새가 강렬하고 느끼하고 비릿한 냄새가 나서 못 견디겠다. 게다가 뻘건 핏물이 줄줄 흐르는 고기라니.

“그런 생고기는 먹지 못하오. 삶은 채소나 감자, 옥수수 같은 작물을 좀 주시겠소?”

반사적으로 건넨 청이지만,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이해 못 하는 상선을 향해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디나 궁에서 일하는 자는 눈치가 빨랐다. 상선은 금방 생고기를 물리고 다른 걸 들여왔다. 비린내 나는 생선찜, 봉황처럼 큰 새고기 등. 보기만 해도 식욕이 달아나는 음식이 오간 끝에 그나마 먹을 만한 것을 찾았다.

시큼한 향이 나는 노란 과실즙에 무슨 종인지 모를 견과, 퍼석거리는 이국 사과였다.

“고맙소. 이건 맛있게 먹을 수 있겠소.”

어딜 봐도 맛있기 어려운 음식이나 성의껏 대접하는 상선의 정성이 고마웠다. 분홍이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처럼 간단한 의사도 소통이 원활치 않은데. 어찌 도움을 받을지 점점 막막했다.

* * *

“사과와 아몬드만 먹어?”

“예. 고기와 생선은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 물과 주스를 조금 마셨습니다.”

저녁 늦게 카론을 찾은 그렌은 황무지에서 잡아 온 여자에 대해 상세하게 전했다.

“곤충인가.”

“곤충보다는…… 새가 더 적절한 듯합니다.”

카론은 대꾸하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나절 쉬자 몸이 부쩍 가벼웠다.

“떠버리들은 도착했나?”

“제2 알현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렌은 카론을 위해 문을 열었다.

비교적 작은 제2 알현실에는 박사라 자칭하는 대현자와 학자들이 기다렸다. 개중에는 신전에서 나온 신학자와 성직자도 있었다. 그들은 가벼운 입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내내 떠들다가 카론이 등장하자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대가리에 든 알량한 지식으로 사람을 현혹하는 자를 카론은 떠버리라 부르며 혐오했다. 저들의 뱀 같은 혓바닥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었던가.

고통을 직접 사주한 자들은 일찌감치 들개의 먹이가 되었다. 눈앞에 있는 자들은 그저 같은 직업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혐오감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전능하신 라테시온 폐하를 봬옵니다.”

전능이라는 수식어에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학자 중 하나는 개에게 뒤꿈치를 물린 것처럼 펄떡 뛰었다. 좀 더 노쇠한 이들은 황제의 가벼운 셔츠와 실내용 재킷 차림을 발견하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을 들지 않아서 대단히 안도한 듯했다.

‘버러지 같은 놈들.’

때때로 울화가 치밀면 맨손으로도 저 새끼들의 면상을 으깨고 산채로 혀를 뜯어 버릴 수도 있다. 실제 두어 번 시도도 했다. 그렇기에 놈들은 카론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눈치를 보았다.

‘저놈들이 나를 꺼리는 마음이 클까, 아니면 내가 저놈들을 역겨워하는 마음이 클까?’

면상도 대하기 싫은 벌레가 괜히 입을 떼기 전에 카론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이번 출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특이한 자를 발견했다.”

신호를 받은 그렌이 벽처럼 보이는 작은 문을 열었다. 시종과 함께 여자가 들어왔다. 조금 쉬었는지 한결 안정된 모습이었다.

사락사락.

반투명한 옷감 여러 겹을 겹쳐 지은 특이한 복장은 발끝까지 치렁하게 늘어져 걸을 때마다 꽃잎처럼 나부꼈다. 특별한 장식이 없이 풀어 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얼굴이 보였다. 아까 불안한 듯 곁에 붙던 때와는 달리 눈빛이 의연했다.

“빛나는 꽃?”

“발광 식물인가?”

여자가 들고 있는 꽃을 본 놈들이 금방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카론을 의식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인내심을 베풀 마음이 전혀 없는 카론은 그들에게 답을 종용했다.

“뭐라도 지껄여 봐.”

“이런 복식은 처음 봅니다. 겹옷을 입는 민족을 알긴 하지만, 저렇게 얇은 천은…….”

“이교도 중에 저런 용모를 가진 이는 아직 없었습니다.”

학자들이 앞다투어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대단히 실망스럽군. 제국에서 최고의 학식을 뽐내는 그대들이 내놓은 대답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야.”

심드렁한 반응에 학자들이 눈을 내리깔았다.

“북쪽 황무지 폐허를 지나는 중에 밤인데 큰 섬광을 보았지. 거기서 저 여자를 발견했다. 게다가 어제저녁부터 저 꽃은 시들지도 않고 빛난다. 자, 이제 판단을 달리해 보도록.”

“북쪽 평원이라면 고대 마도 도시 유적인데.”

이번엔 신학자가 나섰다. 신관과 함께 여자를 요모조모 뜯어본 그들은 파사 일족 얘기를 꺼냈다. 거기서 인내심이 고갈되었다. 카론은 허리 뒤에 꽂아 재킷으로 가려 두었던 단도를 꺼내어 가장 먼저 파사 일족을 거론한 놈의 귀를 잘랐다.

“아악!”

피가 줄줄 흐르는 뺨을 거머쥔 자는 딴에는 대현자라고 으스대는 놈이었다. 카론은 바닥에 떨어진 놈의 귀를 밟아 짓이겼다. 다른 자들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피를 흘리는 자는 곧 시종에 의해 끌려나갔다.

“파사 일족은 너 따위보다 더 잘 알아. 수없이 목을 베었으니 말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말해.”

차가운 명령에 놈들은 굳은 채 눈치만 보았다. 그때 눈치를 보던 여자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 ♪♩♬♪♩♬.”

학자들을 향해 노래 같은 말을 하면서 꽃을 들어 보였다. 카론을 처음 봤을 때 한 행동과 비슷했다. 자기소개 같았다.

“기이한…말입니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멍청한 놈들이 카론의 눈치를 보면서 멍청한 소리를 하는 사이 답답했는지 여자는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무엇을 그렸다. 카펫이 쓸리면서 한 번도 없는 문양이 드러났다.

“이건?”

신학자가 갑자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곤 여자가 그린 문양을 자세히 관찰했다.

“뭔가?”

“완전히 같진 않지만, 쓰는 방식이 고대 문자 같습니다. 복잡한 구성도 그와 비슷합니다.”

“고대 문자?”

카론이 다가가자 여자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떠버리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응시하며 시선을 흘끔 내려 바닥을 보았다.

밑줄을 기준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일반 문자와 달리 보이지 않는 네모를 기준으로 위에서 아래로 그려진 문양은 제법 낯익었다. 황무지에 널린 폐허 일부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들지 않는 꽃은 없습니다. 뭔가 특별한 약품 처리를 했을 겁니다. 아마 고도의…… 지금은 소실된 지식이 필요하겠지요.”

“그러고 보니 고대 마도인 중에는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체구가 작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유적에서 발견된 온전한 조각을 보면 복식도 이처럼 길고 치렁했습니다.”

“그럼 지금 이 여자가 수천 년도 전에 멸망한 고대 왕국 사람이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도 한참은 없는 얘기였다. 저들이 말하고도 이상했는지 놈들은 금방 또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지금껏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이 여자는 잠도 자고 음식도 먹는다. 평범한 인간의 체온을 가지고 있지.”

카론은 여자의 손을 잡아채 손바닥을 단도로 가볍게 찔렀다.

“악!”

높은 비명이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큰 상처는 아니고 피가 좀 났을 뿐인데도 여자는 온 얼굴을 찡그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찔린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카론의 힘을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작은 실랑이 덕에 단도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더 솟았다. 하얀 손바닥에서 넘친 붉은 피가 여자의 손목을 타고 주르륵 흘렀다.

“보시다시피 인간과 같은 색깔의 피가 흐르는군. 자, 이젠 무슨 말을 할 텐가?”

피가 뚝뚝 흐르는 손바닥을 내보이며 카론을 입술을 비틀었다.

“감히 파사 일족을 운운하는 것도 봐주었다. 그런데 네놈들은 정도를 몰라. 고대인이라니? 개소리 작작 하라지. 이 여자는 인간이야.”

여자만큼이나 파랗게 질린 놈들은 입을 꾹 다문 채 답을 하지 못했다. 더는 시간 낭비였다.

“한 달의 시간을 주겠다.”

“폐하, 여…… 연구를 하려면…… 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챈 카론은 그 자리에서 여자의 옷을 붙잡았다.

“으악!”

옷을 벗기려 하자 손바닥이 찔릴 때보다 더 큰 비명을 지은 여자는 온몸으로 거부하며 발버둥 쳤다. 고대 마도 제국 얘기만 나오면 저절로 파사 일족이 연상되고, 그건 카론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여자의 사소한 반항도 너그러이 봐줄 수 없을 만큼.

“귀찮게.”

철썩.

뺨을 후려치자 그제야 얼어붙은 여자를 카론은 그렌에게 밀쳤다.

“옷과 꽃을 넘겨줘.”

“예, 폐하.”

그렌은 겉옷만을 벗겼다. 꽃대를 잡았을 때는 여자의 반항이 극에 달했다. 황제의 소유를 함부로 상하게 할 수 없는 그렌은 난처한 듯 카론을 보았다. 그 때문에 카론이 직접 여자의 머리카락을 휘어잡고 뺨을 더 후려쳐야 했다.

여자의 입술이 찢기고 코에서 피가 흘렀다. 서너 대 맞았을 뿐인데 기절한 여자를 그렌에게 넘겼다. 용모가 특이할 뿐 타격감은 흔한 인간이었다.

연구감을 얻은 자들이 서둘러 알현실을 벗어났다.

“정체가 무엇이든 진귀한 생김새를 가졌으니 어디에 쓸모가 있겠지. 피를 닦고 치료해.”

카론은 여자를 그렌에게 맡기고 알현실을 나왔다.

한 달 말미를 주었으나 별다른 기대는 없었다. 지식으로 으스대는 놈들도 여자의 출신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다. 아마 여자 본인도 자신이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그곳에 나타났는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에 놀란 토끼 눈으로 연신 주변을 둘러봤을 터.

“파사 놈들의 근본을 흔들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

고대 유적의 폐허에서 나타난 기이한 꽃을 든 이국의 여자를 잘 이용한다면? 파사 일족이 가진 괴상한 믿음, 저들이 고대 마도 제국의 후손이며 황무지 아래 그들의 사라진 도시가 있다는 믿음의 근거를 흔들 수 있다.

후손이라 자칭하지만, 혈족보다는 종파로서의 성격이 강한 놈들을 근본적으로 와해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집무실로 간 카론은 혐오스러운 기억을 심어 준 자를 떠올렸다.

자신을 낳은, 빌어먹을 마녀.

전 국왕과 그 혈육을 비롯한 썩은 오물들, 그리고 배신의 아픔을 아로새긴 빌어먹을 개새끼들은 모두 마녀의 저주가 가져온 결과였다.

그 마녀의 뿌리는 다름 아닌 파사 일족이었다. 그렇기에 버러지와 다름없는 놈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단순히 육신을 도륙 내고 피를 흩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들은 깊은 절망과 허무를 알아야 했다. 무력함으로 인해 차마 삶을 희망하지 못하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짐승처럼 악다구니를 써야 했던, 끔찍한 지옥을 경험해야 마땅했다.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복수를 위한 안성맞춤의 도구가 운명처럼 나타났다. 카론은 여자를 생각하며 입매를 비틀었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는 아까 밥을 먹었던 방이었다. 천박한 침상에 누웠기에 벌떡 일어나 아래로 내려왔다. 거칠게 디딘 발이 아파 고꾸라지며 저도 모르게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악.”

이번엔 손을 품에 부여잡았다. 웅크리고 끙끙 앓았다. 골이 딩딩 울렸다. 얻어맞은 뺨이 화끈거리고 입술 언저리가 쓰라렸다.

상선이 다가와 뭐라 말을 걸었다. 금색 칠을 한 상자를 내려놓았는데 뚜껑을 열자 색색 유리병이 보였다. 그중 짙은 색깔 유리병을 꺼낸 상선은 하얀 천을 내어 그 위에 병을 기울였다. 톡 쏘는 냄새가 고약과 비슷했다.

싯누런 액이 묻은 천을 보이며 상선이 칼에 찔린 손을 가리켰다. 사람이 다쳤음에도 차분한 태도가 냉정했다. 마치 하루 이틀 겪은 일이 아닌 투였다.

“너희 우두머리는 못 배운 개다. 어찌 연유도 없이 사람을 해한단 말인가!”

호통을 쳐도 알아들을 일이 없는 상선은 재차 손을 달라 표했다. 울분이 쌓여 절로 치가 떨렸다. 아무리 짚어 보아도 제가 잘못한 점이 없었다. 공손하게 시키는 대로 했거늘. 예를 갖추고 이국인의 뜻을 따라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이국인은 역시 오랑캐였다. 하는 짓이 못 배워먹은 야만족이었다.

분홍이는 눈에 불을 켜고 상선을 노려봤다. 아랫것에게 화를 내고 치료를 거부할까 잠시 고려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었다. 무턱대고 칼질을 해대는 무식하고 참담한 성정을 가진 폭군과 그에 익숙한 종복을 보아 제 몸만 더 상할 가능성이 더 컸다.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신체 보전이 우선이다.’

울화를 달랜 분홍이는 천천히 다친 손을 내밀었다. 상선은 그 위에 약 묻은 천을 덮었다.

“욱.”

절로 신음이 흘렀다. 겉을 닦은 상선은 다른 백포를 내어 약을 듬뿍 적힌 후에 다시 상처를 꾹 눌렀다. 약이 섞인 피가 천에 묻어났다. 아픔을 참느라 이를 꽉 깨물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마지막으로 작은 천에 약을 적셔 댄 다음 긴 천으로 손을 둘둘 만 상선은 약함을 닫고 물러나려 했다. 분홍이는 그를 붙잡았다.

“돌봐 주는 김에 발도 좀 봐주시오.”

그제부터 열감이 가시질 않는 발을 내밀었다. 고름과 피가 엉겨 붙은 버선을 벗었다.

곪은 발가락을 본 상선이 심각한 낯빛을 지었다. 못 알아들을 말을 두어 마디 했는데 투가 꼭 왜 미리 알리지 않았냐 탓하는 듯 들렸다.

다른 천과 약을 낸 그는 고름을 짜고 다친 발가락에 약을 발라 천으로 감았다. 칼에 찔린 손바닥을 치료하는 만큼 아팠다. 쓰린 약을 덧바를 때는 눈앞이 아찔했다. 꾹 다문 입매를 통과하지 못한 신음은 목구멍 속에만 맴돌았다.

괜히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는 동안 상선은 약함을 들고 나갔다. 홀로 숨을 돌릴 수 있을까 했는데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내관과 궁녀가 우르르 들어왔다.

내관들은 웬 여물통보다 큰 하얀 도기 그릇을 들고 왔는데 사방에 꼭 개구리 소반과 같은 다리가 달려 있었다. 저마다 큰 주전자를 들고 온 궁녀들은 도기 그릇 안에 더운물을 가득 부었다. 곁에 기이한 모양의 솔과 천, 마지막으로 이국 옷가지가 놓였다.

그들이 하는 손짓과 발짓을 유심히 보아하니, 다름 아닌 목간 준비였다. 뜻한 바는 아니었으나, 역정이 나고 아픈 중에도 따뜻한 물은 참으로 반가웠다.

미닫이처럼 옆으로 당기는 신기한 발을 쳐서 훤한 창을 가린 내관이 밖으로 나갔다. 상선은 나가는 대신 뒤로 물러나 등을 돌렸다. 반대로 궁녀들은 분홍이에게로 다가왔다. 여인을 가까이하는 것을 보니, 이국인들은 저를 여인으로 여기는 듯했다.

분홍이는 일어서서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이상을 감지한 상선이 돌아보았다. 분홍이는 멀쩡한 손으로 목간통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상선, 궁녀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혼자 씻겠소.”

통하든 않든 말도 했다. 상선은 잠시 분홍이를 바라보더니 궁녀에게 뭐라 했다. 고개를 숙인 궁녀들이 총총 밖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제 뜻이 통했다.

그러나 궁녀가 사라진 후에 분홍이는 여전히 자리에 서 있는 상선을 지긋하게 응시했다. 조용한 공방이 오간 후에 결국 상선이 물러섰다. 밖으로 나간 그는 영 혼자 둘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문을 덜 닫은 대신 등으로 틈을 가렸다. 아주 혼자 하길 원했으나 보는 눈을 치운 것으로 만족했다.

‘근본 없는 개놈이 다스리는 오랑캐 나라이니 어쩔 수 없지.’

분홍이는 조심스레 옷을 벗었다. 겉옷을 이미 빼앗긴 후라 허리띠를 두어 개 끄르자 금방 맨몸이 드러났다. 다리속곳을 벗을 때에는 문 쪽을 흘끔 보았다. 상선의 등이 보였다.

알몸이 된 분홍이는 조심스럽게 목간통에 멀쩡한 발을 넣었다. 뭘 섞었는지 목욕물이 향긋했다. 온기도 딱 적당했다.

“하아.”

상처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몸을 담그자 절로 한숨이 터졌다. 고작 하루, 이틀 사이에 태산을 맨발로 넘은 듯이 피로했다.

손과 발이 성치 않아 평소처럼 씻기 어려웠다. 그나마 준비된 천을 적셔 손이 닿는 데까지 구석구석 닦았다. 머리도 감고 싶었으나 지금에서는 사치였다. 적신 천으로 몸을 닦듯 머리카락을 닦고 또 닦았다.

느긋한 목간을 즐긴 상황이 아니므로 물이 식기 전에 분홍이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불편한 손발을 요령껏 놀려 몸을 닦고 제 옷에 손을 대려는 찰나, 상선이 헛기침했다.

멈칫하였다가 하는 수 없이 놈들이 준비한 옷을 집었다. 풍덩한 옷은 두껍지만 홑겹이었다. 아이 옷처럼 아래위가 붙어 있어 우습게도 만세 자세로 위에서부터 입었다. 천이 두꺼워 몸은 제대로 가렸으나 휑한 치마 안에 속곳이 없어 아랫도리가 영 어색했다.

상선이 다시 헛기침했다. 곧 들어오겠다는 표시로 여긴 분홍이는 얼른 다리속곳만을 집어 품에 넣었다.

역시나 우르르 몰려들어 온 내관과 궁녀는 목간통을 내가면서 분홍이가 벗은 두 겹 내의도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 누구에게 전해질지 알기에 수치스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눈치껏 다리속곳을 챙겨서 다행이었다.

내관은 두꺼운 발을 다시 걷고 고운 문양으로 짠 엷은 발만 남겨 두었다. 물이 담긴 주전자와 작은 사발을 들인 후에 상선을 비롯한 모두가 사라졌다.

“흐음.”

혼자 남은 분홍이는 느릿느릿 창가로 갔다. 이국의 정원이 보였다. 관목을 싹둑싹둑 잘라 원뿔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무엇 하나 자유로이 두지 않는 주인의 성미가 그대로 드러났다.

“무엇 하나 탐탁한 것이 없다.”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참을 길이 없었다. 허나 흥분하여 함부로 처신할 수는 없는 법. 냉정히 처지를 다시 되짚었다.

오랑캐 놈은 아랫것 앞에서 체면 차림도 없이 손찌검과 칼부림에 익숙한 난폭한 개놈이다. 동정심과 자기 절제 또한 없다. 난폭한 짐승 종자에게 붙들린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연유는 낯선 음인에 대한 호기심이 일으킨, 하찮은 변덕일 가능성이 컸다.

‘거기다가 용모가 달가워서 더 그러하겠지.’

분홍이는 제 얼굴이 단정하고 신체가 유려함을 익히 알았다. 부모님의 은공으로 귀한 음인으로 태어났기에 늘 심신을 갈고 닦았다. 그것이 효도하는 길이었다.

기대치 않은 목간이 달가웠으나 단순히 붙잡아 놓을 요량이라면 목간을 시켜 줄 리가 만무했다. 깃든 의도가 빤했다. 특히나 개종자는 덩치가 크고 성정이 사나웠다.

필시 양인일 터. 그래서 음인인 저를 기민하게 알아보지 않았을까?

문득 큰어머니의 가르침이 머릿속을 스쳤다.

“채운이 듣거라. 양인들은 성욕의 화신이다. 혹시라도 누가 너를 욕보이려고 하거든 겁먹지 말고 당당히 가문과 성명을 밝히고 아버님과 형님의 이름도 밝혀라. 그래도 함부로 하거든 뭐든 손에 잡히는 날붙이로 그놈의 앞쪽 목 뿌리, 겨드랑이, 혹은 정강이 뒤에 있는 연한 살을 확 찔러 버려라. 태손이라도 바른 날이 아니면 예외가 없느니라!”

어금니를 사리문 분홍이는 얼른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언제 개종자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법. 손발에 아픔까지 더하자 절로 치가 떨렸다.

“가만히 당할쏘냐.”

상선이 가져온 주전자와 사발이 보였다.

“저거다.”

분홍이는 사발을 잡았다. 그걸 옷자락으로 둘둘 만 뒤에 의자 발치에 대고 깨트렸다. 파편을 헤쳐 개중 가장 날카로운 놈으로 골라잡고 나머지는 침상 아래에 숨겼다.

부디 이것이 쓰일 일이 없길 바랄 뿐이었다.

* * *

“떠버리들이 그분을 요정이라고 했다면서요?”

“그걸 믿나?”

아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와 먼지를 씻어 내고 단정한 옷을 입은 그는 아이가 둘인 유부남처럼 보이지 않았다.

“제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지요. 황제가 고대 신전에서 요정을 데려왔다고 벌써 온 제도에 소문났습니다. 대단한 신의 계시라는 착각과 함께요.”

“그래?”

카론이 흘끔 시선을 던졌다.

“아니라고 입단속 할까요?”

“아니. 그냥 둬.”

“으음. 나쁜 내용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내용을 좀 수정하지. 고대 마도 제국이 모시는 신의 요정이…… 수천 년이 지나 진정한 제왕을 알아보고 나타났다고 말이지.”

“멀쩡한 정신으로 자화자찬하기 부끄럽지 않습니까?”

카론의 싸늘한 시선을 받은 아서는 입을 다물었다.

“사사건건 시건방지게 구는 부관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 봐.”

“수십 차례 말씀드렸다시피 폐하의 곁에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부관은 저뿐이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고약한 성격을 다 감내할 수 있는 죽마고우 또한 저뿐입니다.”

“그게 단가?”

냉정한 반응에 아서는 당황하며 덧붙였다.

“저를 죽이면 그렌과 베로니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렌은 폐하의 실질적인 양육자이며 베로니카는 폐하보다 강한 검사니까요. 그러니까 저를 죽이면 폐하는 아주…… 아주 귀찮아지실 겁니다.”

“흠. 맞는 말이군.”

그렌은 황제의 스승이자 실질적 양육자였다. 한때 아서의 검술 스승이기도 했다. 베로니카는 죽은 블라드 전 후작의 딸로 제국 제일의 검사였다. 동시에 엘러 백작 부인, 즉 아서의 아내였다.

겉으로는 일개 시종장, 흔한 귀부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국 안팎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들을 들먹이고 나서야 황제는 아서를 향한 매서운 눈초리를 거두었다.

물론 반은 장난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반이 아무래도 진심 같았기에 아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카론이 마음을 바꾸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단순한 미끼로만 사용하실 계획입니까?”

“다른 용도도 생각 중이다.”

물어볼 가치도 없는,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요정은 아름다웠다. 정체는 불분명했지만 어딜 봐도 뒷배가 없으며 순진무구해 보였다.

황제 카론은 인간에게 있어서 대단히 까다로운 성미로 아무나 침실에 들이지 않았다.

인간 불신이 극도에 달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정치적 역량이 아예 없어서 아무리 몸을 겹쳐도 무지렁이처럼 꿈틀대지도 않을, 무력한 자를 선호했다. 따지는 것이 너무 많아 사실상 문턱을 넘은 인간이 감히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고 강인한 여자에 관해서 매우 안 좋은 사건이 발생한 이후로 특별한 상대가 없었다.

‘뒷배도 없고 체력도 없는, 꽃 같은 여자는 우리 별난 폐하를 견딜 것 같지 않은데 말이지.’

물론 아서의 의사는 전혀 중요치 않다.

여자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말똥보다 못하게 여기던 카론이 오랜만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후대를 생산할 사명이 있는 황제가 가랑이 물건을 묵히고만 있으면 매우 곤란했다. 더불어 정복지에서 발견한 것을 취하는 일은 황제의 당연한 권리였다. 하지만 한 가지가 걸렸다.

“성별 확인이 중요합니다. 벗겨 봐야 알 정도로 모호하던데요.”

“어딜 봐서 모호해? 당연히 여자지.”

“가슴이 납작하던데요.”

“요정은 알을 낳거든. 그래서 젖가슴이 필요 없지.”

“어처구니없지만 그럭저럭 말은 되네요.”

앞뒤 없는 농담에 탄복한 아서가 물러간 후, 카론은 여자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렌의 보고에 따르면 여자는 목욕 후에 쥐 죽은 듯 얌전하다고 했다. 대륙의 지배자인 라테시온 황제를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예고 없이 가한 무력이 가져오는 공포에 젖어 기가 죽어 있을 터.

“슬슬 달래 볼 차례인가.”

본디 종잡을 수 없는 미친놈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무력은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에게 가장 효과적인 대응 방식이기도 했다. 얌전하게 군다면 상냥하게 대할 심산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창가에 선 여자가 보였다. 하얀 실내용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카론을 발견하자마자 뻣뻣하게 굳었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 공포가 번졌다.

예상대로였다. 냉혹한 입매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여자를 보자마자 카론은 제도민 사이에 그런 소문이 번진 이유를 수긍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굴곡 없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은은한 불빛 아래 선 여자는 정말로 요정, 그 자체였다.

“이리로.”

카론은 그녀가 말귀를 알아듣든 아니든 명령조를 유지했다. 어투에서 느껴지는 느낌과 가볍게 내민 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리할 의무는 저 여자에게 있었다. 빠르게 눈치를 키우지 않으면 혼쭐이 날 것을 깨달았겠지.

영리했던 첫인상대로 여자는 금방 카론의 뜻을 파악했다. 두려워서 머뭇거리면서도 조금씩 다가왔다.

눈처럼 하얀 얼굴. 드러난 가는 목덜미에 깨끗한 어깨. 실크 드레스 아래 있는 가슴은 아서 말대로 좋게 봐줘도 대리석 바닥에 붙은 작은 얼룩 수준이지만. 만지면 부서질 듯 연약한 아름다움이 여자가 아니면 뭐겠나.

“발을 다쳤다지?”

카론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자 맨발이 드러났다. 작은 발과 가는 발목은 옅은 분홍빛이 도는 진주색이었다. 아마도 피부가 원래 그런 것 같았다.

붕대를 감은 발에 손을 대자 여자는 흠칫 놀라며 뒤로 발을 뺐다. 카론은 도망가는 발을 잡아 세운 무릎 위에 올렸다. 드레스가 흔들리며 종아리가 드러났다.

“헛.”

여자는 붕 뜬 치맛자락을 황급히 눌렀다. 아까 칼에 맞은 손도 붕대를 감았다.

다친 발은 전장이 익숙한 제게는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다. 그러나 굳은살 하나 없이 고운 피부를 가진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플 텐데도 여자는 제도까지 오는 내내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제 처지를 안 것이다.

“보기보다 참을성 있어.”

점점 마음에 들었다. 만족감을 드러내며 손을 미끄러뜨려 발을 매만졌다. 들은 대로 뼈가 다친 건 아니었다.

“읏.”

세게 누르자 아픈지 여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성숙함과 미숙함이 묘하게 어우러진 요정은 가슴을 크게 부풀리며 헐떡였다. 공포에 악문 아랫입술이 앙증맞은 윗니 밑으로 사라졌다.

“두려워할 것 없다.”

몸을 일으킨 카론은 요정의 하얀 턱을 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풍만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여자치곤 키가 제법 크니 어린애는 아니겠고. 지금 현 상황이 무언지 모르지도 않겠지?”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사실 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든 모르든 관심 없었다. 그저 멋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장난감을 얻은 즐거움이 입 밖으로 나왔을 뿐.

고통을 인내하는 양순한 성격에 뭐라 지껄여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짜증 날 일도 없다. 그래도 앞으로의 쓸모도 고려해서 적당히 할 심산이었다. 빈약해 빠진 몸을 다른 놈 대하듯 다룬다면 단숨에 망가질 것이 뻔했다.

카론은 작은 머리통을 두 손에 가두었다. 여자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풍성한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얼마나 깨물었는지 입술이 살짝 부풀었다.

“얌전하게 굴면 때리지 않는다.”

여자의 이마와 머리카락 경계 부분에 코를 대었다. 황궁에서 흔히 사용하는 은방울꽃 향수와 함께 은은한 살냄새가 났다. 그 외엔 체취가 딱히 느껴지지 않아 썩 마음에 들었다.

“흐음.”

자연스럽게 미간에 닿은 입술을 관자놀이께로 미끄러트렸다. 손이 목을 타고 어깨를 잡았다. 검으로 인해 딱딱한 굳은살로 뒤덮인 손바닥이 매끄러운 살갗에 닿자 요정은 헐떡이며 바르작댔다. 작은 새의 하찮은 날갯짓처럼 간지러웠다.

연신 깨문 입술은 타액에 젖어 도톰했다. 여태껏 파악한 바로는 혀를 깨물 만큼 대단한 성깔의 소유자는 아닌 듯 보였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카론은 손으로 요정의 하악 관절 언저리 뺨을 꾹 눌렀다. 무의미한 저항을 잠시 하던 요정은 이내 입을 벌렸다. 곧 작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혀에 닿았다. 달콤한 과일 향기와 고소한 아몬드 향기가 동시에 났다.

성적 접촉은 늘 불쾌감을 동반했다. 신체적 불만족과 정복욕에 떠밀리지 않는다면 굳이 여자를 찾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여자의 느낌은 달랐다. 역겨움보다는 달가움이 조금 더 컸다.

‘정말 요정이라도 되나.’

속으로 의심하며 고개를 돌렸다. 다소 여유를 잃고 입술을 다시 맞물렸다. 탄력적인 입술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특별한 약액으로 입술을 헹구었나? 자신도 약액을 쓰는데, 원래 이렇게 달진 않았다.

“으음.”

옅은 신음에 카론은 실눈을 떴다. 시야 가득 곡선 진 흰 얼굴이 들어왔다.

숨이 찬 듯 요정이 말간 미간을 찡그렸다. 목과 턱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버티던 여자의 호흡이 금세 거칠어져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중앙은 솟고 끝은 내려앉은 눈썹이 움찔거렸다. 표정이 미묘해서 싫은 건지 혹은 안타까운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봐줄 생각은 없으므로 카론은 여자를 더욱 끌어당겨 혀를 입속으로 깊게 밀어 넣었다. 입속 매끄러운 살점이 경련했다. 동시에 카론의 가슴을 누르는 두 손이 자극받은 미모사처럼 오므라들었다.

“읍.”

여자는 제 혀가 카론과 닿을 때마다 일일이 움찔거렸다. 절대로 닿아서는 안 되는 뭔가에 닿은 듯이 튀는 행세가 아무래도 정사 경험이 모자라게 여겨졌다. 혹은 긴장으로 인해 몸이 과도하게 굳었거나.

어느 쪽이든 기분 좋은 관계를 하기 위해선 너그럽게 달랠 필요가 있었다. 귀찮지만, 진귀한 외모를 가진 예쁜 여자였으므로 작은 수고를 들이기로 했다.

‘하는 수 없지.’

허벅지 가까이에 닿은 여자의 매끄러운 다리 사이에 한 손을 넣었다. 드레스 한 장만 달랑 걸치고 있으므로 가랑이를 찾긴 쉬웠다.

요정이라도 인간처럼 붉은 피가 흐르니 달릴 것도 달릴 만한 곳에 있으리라. 아니 두 다리가 달린 생물의 구멍은 대체로 그 사이에 있다.

“♬♪♬♪…… ♪!”

품에 안긴 요정이 아까보다 훨씬 강하게 반응했다. 발작하듯 입을 벙끗 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기어이 고개를 팩 돌렸다.

“♬♪♬!”

타액에 젖어 반짝이는 입술을 떨면서 뭐라고 외쳤다. 밤하늘처럼 깊은 눈동자엔 경악이 서렸다. 손으로 주먹을 말아 카론의 가슴을 두드리기도 했다.

“♬♪♬!”

여자는 몇 번이고 같은 소리를 내었는데, 상당히 높은 고조에 빠른 박자로 보아 좋은 뜻은 아니었다. 여자는 죽을힘을 다해 카론을 밀어냈다. 딴에는 기를 바짝 세우고 항의하는 사나운 눈길과 더불어, 처음부터 귀여움을 받으려고 태어난 듯 나긋하고 부드러운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발버둥 치는 모습이 꼭 화난 들고양이 같았다.

손톱을 제대로 세웠다면 얼굴을 할퀴는 정도는 가능했겠지만. 그러기엔 체격 차가 너무 났다. 말랑한 맨발바닥으로 부츠를 신은 카론의 발끝을 야무지게 밟기도 했다. 귀여운 무게감에 피식 웃음이 났을 뿐이었다.

“원래 얌전한 편을 선호하지만. 넌 성질을 부리는 쪽도 나쁘지 않아.”

눈꼬리를 바짝 올리면서 뭐라 지껄이려는 여자의 입을 똑같이 입술을 이용하여 도로 막았다. 다른 팔로 허리를 꽉 잡아 제 몸에 밀착하자 발버둥이 심해졌다. 그래도 매끄러운 비늘을 가진 작은 물고기의 파닥거림에 지나지 않았다. 품에 안고 있기에 즐거움만 더했다.

올무에 걸린 새처럼 퍼덕거리는 몸을 억누르고 기어코 다리 사이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가슴은 납작한 주제에 가랑이만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어이가 없어 살점을 더듬는데 예상치 못한 형체가 느껴졌다.

“음?”

여자의 다리 사이에 말캉거리는 뭔가가 달려 있었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이 상황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물건 같은 것이.

아까 아서가 제기한 의문이 머리에 스쳤다.

“설마?”

카론은 치맛자락을 확 걷어붙였다. 그리고 발견했다. 요정에게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을.

“허?”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생각이 멈췄다. 요정을 잡은 손아귀에 힘도 빠졌다. 그때 상대가 팔을 빠르게 들어 올렸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뺐으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얇은 팔이 공중을 가르는 동시에 목이 화끈거렸다.

“어?”

뭔가 주르륵 흘렀다. 목에 손을 대보니 피였다. 묻어난 양으로 보아 치명적 상처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노를 일으키기엔 충분했다.

“♬♪♬♪!”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여자, 아니, 놈이 달려들었다. 방심은 한 번뿐이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어설픈 습격을 피했다. 놈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악!”

목이 꺾인 놈이 보지도 않고 손을 마구 휘저었다.

퍽.

손으로 날을 세워 날붙이 쪽을 후려쳤다.

쨍그랑.

대리석에 떨어진 날붙이는 조각조각 부서졌다.

“도자기 파편이로군.”

그제야 주전자만 놓인 탁자가 눈에 들어왔다. 황궁에 있는 걸 가지고 만든 무기이니 독약이 묻진 않았으리라.

당장 목숨에 지장이 없음을 확인한 카론은 잠시 억눌렀던 분노를 터트렸다. 방심하다 당한 기습도 기습이지만, 사내놈에게 입을 맞춘 것에 대한 당혹감이 더욱 컸다. 고양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신 오물통에서 빠진 기분이었다.

“감히…… 네놈이…… 각오는 되었겠지?”

이를 벅벅 간 카론은 놈의 드레스를 마구 찢어 버렸다.

“사내새끼 주제에.”

옷을 찢어 버리자 남성임이 여실히 드러났다. 하얗고 부드러운 선이 흘렀으나 확실히 여자는 아니었다. 어설픈 물건은 남자임을 증명했다.

“감히 날 속인 것도 모자라 시해하려 들어?”

황무지에서 만난 순간부터 여자 행세를 한 대담한 놈이었다. 손을 내밀면 귀부인처럼 손을 얹고 말 앞에 태우면 옆으로 돌아서 앉던 놈이었다.

적당히 아껴서 앞으로 써먹겠다는 생각은 즉시 한구석으로 처박아 버렸다. 당장은 활활 타오르는 노여움 해소가 먼저였다.

목을 휘어잡고 꺾어 버리려 했으나 놈이 쏘아보며 뭐라 외쳤다. 뾰족하게 세운 눈에 깃든 비웃음은 저를 죽여 보라는 듯했다. 순간 쉽게 끝장낼 마음이 사라졌다.

“이 개자식이.”

카론은 놈을 질질 끌고 침대로 향했다.

“아악!”

머리카락이 잡혔기에 반항을 제대로 하지 못한 놈은 천개를 떠받히는 굵은 기둥에 정수리를 정통으로 처박았다.

쿵.

머리를 침대 기둥에 박은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져 움찔거렸다. 그사이 카론은 침대 곁 보조 탁자에 있는 은쟁반을 훑었다. 역시나 향유 병이 있었다.

남자를 안는 취미는 없었다. 하지만 놈은 애초에 이런 상황을 감내한 것이 아닌가. 이 망할 개자식에게, 제 놈이 시도한 방식으로 본때를 보여 줄 터였다. 그러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충분히 알겠지.

힘도 없는 버러지가 제 앞에서 주제넘은 자존심을 부리는 모습이 꼴같잖았다. 시건방지게 또렷한 눈깔을 부옇게 뜨게 만들리라.

“두 번 다시 개짓거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머리를 부딪쳐 아찔한지 멍한 눈으로 눈가를 바르르 떠는 놈의 머리채를 도로 잡아 침대로 끌어 올렸다. 어설픈 놈의 몸을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모든 건 오로지 자신의 편안함 때문이었다.

발버둥 치는 놈의 발목을 틀어쥐고 다리를 활짝 벌리자 하얀 몸에 어울리는 연홍색 구멍이 보였다. 조신한 모양새가 배설기관보다는 성기에 어울렸다.

“여자 행세를 했으니 이 정도는 예상했겠지?”

병 안에 든 향유를 놈의 가랑이 사이에 반쯤 부었다. 차가운 기름에 허연 다리가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카론은 부들대는 다리를 제압하고 제 허리춤을 풀었다. 격노로 단단해진 성기가 공중에서 꺼떡거렸다.

극심한 분노가 폭발할 듯한 발기로 이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은 서기도 전에 상대의 목을 쳐서 해소하곤 했다. 그렇기에 분노한 채로 성관계를 하는 일도 지극히 드물었다. 삽입은 아예 처음이었다. 그래도 멈출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핏줄이 불거진 성기를 놈의 아래에 가져다 댔다. 향유를 듬뿍 끼얹은 구멍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으으.”

신음하면서도 놈은 카론을 노려봤다. 검은 눈동자엔 혐오가 깃들었다.

“♬♪! ♬♪!”

뭐라고 소리치는 놈의 입가에 피 섞인 타액이 흘렀다. 정확한 의미는 몰라도 저주 섞인 욕임은 분명했다. 아름다운 음률을 가진 언어는 카론의 분노를 더욱 솟구치게 했다. 싸늘하게 웃으며 성기를 밀어붙였다.

“♬♪!”

“하.”

구멍이 하도 작아 두꺼운 귀두가 쉽게 들어갈 기색이 아니었다. 카론은 허리를 비틀며 틈을 벌렸고 구멍이 약간 열리자마자 바로 처박았다.

“아…윽!”

놈이 눈을 뒤집으며 벌벌 떨었다. 그러면서 발버둥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강하게 밀어붙여도 좁은 구멍은 침입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겨우 벌어진 곳으로 선단만을 밀어 넣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뻐근해지는, 좁은 몸이었다.

그때 놈이 혀를 깨물었다. 카론은 망설이지 않고 손등으로 놈의 뺨을 후려졌다.

퍽!

이제껏 요정을 길들일 땐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것도 적당히 힘을 덜었다. 여자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컷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쉽게 죽게 둘 수야 없지.”

구겨 잡은 드레스 자락을 놈의 입에 쑤셔 넣었다. 놈이 악을 썼으나 더는 혀를 깨물 수 없으리라.

카론은 비웃음을 머금고 허리를 툭 쳐올렸다. 귀두를 문 입구는 벌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그만큼 성기에 가해지는 압박이 상당했다. 그 속은 얼마나 좁고 뜨거울까. 놈을 향한 혐오감에서 비롯된 가학심에 야릇한 기대가 덧씌워졌다.

옴짝달싹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구멍이었지만 결국은 사람 구멍이었다. 갑옷을 두른 것도, 검날로 무장한 것도 아닌, 여린 살에 불과한 구멍을 향해 성기를 자비 없이 진입시켰다. 늘 그렇듯, 무능력한 상대가 카론의 분노 어린 침공을 버틸 재간이 있을 턱이 만무했다.

투둑.

기어코 구멍 입구의 연한 살이 찢어졌다.

“으읍!”

마치 폐부를 찔린 듯이 놀란 놈은 경악했다. 비명은 재갈을 문 입을 뚫지 못했다.

놈은 전신을 뻣뻣하게 굳혔다. 일그러진 눈가와 식은땀이 솟는 창백한 이마엔 경련이 일었다. 놈이 느끼는 고통이 상당함을 알았다. 사내 주제에 이렇게 말랑한 신체로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아픔일 터.

“곱게 뒈지는 편이 더 나았을 텐데. 안됐군.”

조소를 던지며 조금 움직이자 성기를 문 입구가 더욱 붉어졌다. 뜨끈한 액체가 향유와 섞였다. 놈의 사지를 억누르고 거칠게 움직이는 동안, 놈의 몸부림에 드레스 자락이 말렸다.

입에 문 천이 빠지자 놈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아아아악!”

“큭.”

“아악! 아악!”

놈의 비명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높았다. 꼭지가 돌아 버린 카론은 주먹을 연신 휘둘렀다.

“시끄러워.”

퍽!

“건방진 새끼가 이제 와서 나약하게.”

퍽! 퍽!

몇 대 갈기지도 않았는데 놈은 금방 기절했다. 하지만 분노가 가시려면 멀었다. 카론은 차가운 눈으로 시체처럼 늘어진 몸을 노려보며 제 성질이 가라앉을 때까지 마음껏 유린했다. 어느새 흥건히 흐른 피가 드레스를 붉게 물들였다.

기분이 몹시 좋지 못했다.

* * *

처음 분홍이 노린 것은 이국인의 눈이었다. 옷 위로도 더럽게 들러붙는 천한 눈짓을 두 번 다시 못 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오랑캐 놈이 예상보다 빨리 피했다. 가까스로 목을 긋긴 했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실패였다. 화가 난 개종자는 마음껏 날뛰었다.

전신을 흠씬 두들겨 팬 것으로도 모자라 개종자 놈은 기어이 더러운 짓을 벌였다. 꽃잎처럼 여리여리한 옷을 단숨에 찢어발긴 놈은 분홍이를 침상에 내리꽂았다.

“커윽.”

열린 다리 사이로 뭉툭한 몽둥이가 닿았다. 개종자 하는 행색으로 봐서는 양물이 분명했다.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 개만도 못한! 천벌이…… 하늘이…… 무섭지 않으냐!”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못 배운 무식한 놈은 분홍이의 호통에 씩 웃으며 양물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누구에게도 출입을 허락한 적이 없는 입구가 빠듯하게 벌어졌다.

역겨움보다 황당함이, 혐오감보다 다급함이 커졌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덩어리가 기어이 비집고 들어오려 했다. 이대로는 개종자 놈에게 치욕을 당하리라. 급한 심경에 심장이 터지려 했다. 이리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외궁 우물에 빠져 죽는 편이 나았으리라.

제 몸은 저 하나의 것이 아니었다. 고이 간직한 이유에는 부모, 가문, 그리고 황국에 대한 충심이 들어 있었다. 귀한 보물을 이리 허망하게 망칠 순 없다. 근본도 모르는 종자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차라리 제 손으로 부수리라.

분홍이는 혀를 내어 씹었다. 도톰한 살에 앞니가 박혀 핏물이 터졌을 때 손찌검이 날아들었다. 고개가 휙휙 꺾이도록 얼굴을 후려친 놈은 핏물이 흥건한 분홍이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옷자락을 쑤셔 넣었다.

양 손목이 놈에게 잡혀 할 수 있는 짓은 몸부림뿐이었다.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투툭!

불결하고 천한 놈의 구접스러운 물건이 기어이 음문을 찢었다. 뒤이어 추잡스러운 기둥이 쑥 밀고 들어왔다. 마치 기름 바른 말뚝 위에 앉은 채 정수리엔 정을 쾅쾅 박는 기분이었다. 끔찍한 형벌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악!’

두 눈이 찢어지도록 벌어졌다. 눈알에 서늘한 바람이 스치는 동안 충격을 담은 벼락이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내리쳤다.

파과의 고통은 애틋한 낭군이 곰살맞은 손길로 어여쁘게 안아 주어도 눈물이 퍽 쏟아진다 들었다. 그것을 분홍이는 무참한 가운데 겪어야 했다.

지옥의 화톳불 위에 산채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지옥의 불은 근골이 아니라 혼백을 불살랐다. 피가 터지도록 얻어맞는 동안 도리어 형형하게 생기를 발하던 혼백이 금방 탄내를 풍겼다. 추악한 형리는 분홍이의 내면 구석구석 찔러댔다.

정신이 까마득해지면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힘이 들고 괴로울 때도 몸을 축내지 말고 항상 잘 먹고 잘 자려고 노력해라. 건강하면 어떻게든 살아진다. 살아야 빛을 보는 법. 너는 누구보다 귀한 자손으로 태어나 귀한 자리에 오를 귀한 몸이다. 항상 너를 귀애하여라.”

짐짓 엄한 투로 가르치면서도 큰엄마는 금세 손을 뻗어 분홍이의 손을 잡고 ‘이 고운 손등에 짠물이 깃들면 안 되는데.’ 하며 괜히 서러워했다.

“항상 공경하고 겸손해라. 지아비가 모자라도 무턱대고 화를 내지 말고 좋게 말로 다스려라. 황족이라는 족속은 원래 오만방자…… 태생이 거만…… 아니, 원체 지체 높으셔서 턱 아래 사람이 있는 걸 모르는 아둔한…….”

“모지리 달래듯 곱게 달래란 말씀이시지요?”

“그렇다. 만인지상은 널리 보는 만큼 세세하게 볼 줄 모르고 대국을 염두 하는 만큼 평범한 인간 세상을 모르느니라. 그러니 결국 모지리와 한 끗 차이야. 말로 못 알아듣거든 소박하고 그래도 못 알아듣거든 몰래 손찌검해라. 보이는 곳은 빼고.”

“그랬다가 제가 도리어 맞으면 어떡하나요?”

“아주 죽겠다고 큰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뒹굴어라. 밖에 있던 상궁과 내관이 뛰어 들어올 거다. 그러면 그놈 체면이 깎이지 네 체면이 깎이겠느냐? 그러다가 폐비가 되어 사가에 내쳐지면 더 좋고.”

“폐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나요?”

“그럼.”

그 말에 곁에서 가르침을 보고 있던 엄마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벙끗거리다가 큰엄마가 분홍이를 얼싸안고 하는 말에 한숨만 푹 쉬었다.

“어쨌든 누구라도 너를 괄시하거든 얼른 편지해라. 대감을 비롯하여 네 형과 누이가 황궁 앞에 몰려가서 시위할 테니 말이다.”

“예.”

“아주 사소한 일도 소상히 일러야 한다. 아니면 이 큰엄마는 상사병 나서 앓아누워요.”

“네에.”

분홍이도 큰엄마를 꼭 붙잡고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비장한 두 사람을 본 엄마만 한숨이 깊어 갔다.

날 때부터 그리 가르치셨다. 아끼고 사랑하며 다정을 다해 고이고이 기르셨다. 이 귀한 몸을, 더러운 개종자 놈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황태손과 부모님을 뵐 낯이 없었다.

제 몸은 저 하나의 것이 아니었다. 고이 간직한 이유에는 부모, 가문, 그리고 황국에 대한 충심이 들어 있었다. 귀한 보물을 이리 허망하게 망칠 순 없다.

근본도 모르는 종자에게 빼앗기느니 차라리…… 차라리 제 손으로 부수려 했으나 그도 가로막혔다.

젖 먹던 힘을 모아 악을 썼다. 할 짓이 그뿐이었다.

“아아아악!”

재갈처럼 물린 옷자락이 빠지고 나서는 목구멍이 터지라고 악을 썼다. 매양 돌아온 것은 매서운 손찌검이었다. 한 대 맞을 때마다 골이 흔들렸다.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할 수 있는 반항을 모두 했으나 두들겨 패는데 당할 장사가 있나. 죽음도 불사했건만…… 그조차 성공치 못했다.

차라리 더 맞아 혼절이라도 했으면.

낭자하게 찢어진 아래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평소 있는 줄은 알았으나 평생 느껴 본 일이 없는 내장이 활활 불탔다. 달군 부지깽이로 음문을 들쑤시면 이와 같을까.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아랫도리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엄마…… 큰엄마. 이제는 어찌할까요?’

황국이 아닌, 가문이 없는, 혈육이 닿을 수 없는 낯선 곳에선 분홍이의 알량한 기백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무력함이 절절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이렇게 허무하게…….

“큭.”

사납게 움직이는 악독한 개종자 놈의 성기는 여린 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 내장을 들쑤시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성년이 되었어도 설익은 음인의 연약한 기관이 견딜 만한 행위가 아니었다. 앞으로 영영 아이를 품지 못할지도 몰랐다.

‘그래, 으깨어 버려라. 아주 가루로…… 만들어라. 더러운 네놈의 씨를 품기보다는…… 차라리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겠다.’

아래에서 번진 불길이 폐부로 번졌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허옇게 불탔다. 몸과 마음이 찢어지는 모진 혹독함에 파묻혀 저항할 힘도 상실했다. 분홍이는 그가 무엇을 하든 내버려 두었다. 다만 눈을 감고 한시라도 빨리 끝나길 바라며 인내할 뿐이었다.

‘재가 되어라. 재가 되어라. 정신을 놓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빈껍데기가 되어라.’

서러운 눈을 꼭 감았다. 들썩이는 몸뚱이가 제 것이 아니길 바랐다. 제 마음대로 죽지 못한다면 이대로 사리 분간을 못 하는 등신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지옥 같은 현실 또한 사라질 테니.

‘이대로 넋을 놓자. 분홍아, 넋을 놓자. 모자란 김에 아주 모지리가 되자.’

이대로 넋을 놓아 광인이 되면 혈육에 대한 그리움도, 정혼자에 대한 미안함도, 개종자를 향한 끔찍함도 사라지리라. 서러움이 물기를 만들어 내기도 전에 뜨거운 증기로 화해 전신을 태웠다.

목에 피딱지가 말라붙은 개종자는 아직도 화가 잔뜩 나서 한때 순결했던 몸뚱이를 마구 때리고 겁탈했다. 하는 짓거리가 똑 미친놈이었다. 저런 강포한 놈이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이라니.

얼마나 지났을까.

억겁 같은 불화에 정신이 가물거릴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저지른 대로 느닷없이 멈춘 개종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찢어진 아래에서 양물이 빠져나갔다. 주르륵 액체가 흘러내리고 뒤이어 휑한 바람이 들었다. 절로 몸서리가 났다.

흐윽.

눈앞이 아찔했다. 전신이 비명을 질렀다. 관절은 칼로 후빈 듯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 차라리 죽이길 바랐다. 개종자 놈은 악독하기 그지없어 분홍이의 바람대로 쉬이 명줄을 끊을 기세가 아니었다. 대신 사나운 기세로 밖으로 나간 개종자는 듣기 싫은 목청을 높여 고함쳤다.

‘기왕 칠 것이면…… 귀를 때렸으면…….’

그랬다면 고막이 터져 저놈의 듣기 싫은 목소리도 듣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눈이 멀었다면, 저 개종자 놈을 다시는 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끔찍이도 아픈 몸은 손 하나 깜짝하기 힘들었다.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뒤늦은 분루가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으흑…… 윽…….”

분홍이는 몸을 웅크린 채 울었다. 눈물을 삼키려 했으나 흐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갈기갈기 찢어진 건 다만 음문이 아니었다. 피눈물이 흐르는 곳은 누구도 범하지 못하리라 여겼던 제 자긍심이었다.

“으흐…… 으흐읍.”

개종자 놈은 다리 사이에 달린 흉악한 살덩이로 분홍이를 완전히 도륙 냈다. 혼이 찢어지고 백이 흩어졌다. 비참함에 파묻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지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흐린 눈으로 오랑캐의 천장을 바라보며 푸줏간 고기처럼 널어진 저를 느꼈다.

방을 나간 개종자 놈은 다시 오지 않았다. 계속 얼씬대던 상선도 모습을 감추었다. 대신에 냉담한 얼굴을 한 궁녀 둘이 들어왔다. 그들은 대야와 천을 들고 왔다. 눈만 반 틈 뜨고 있는 분홍이의 몸을 쭉 훑어본 궁녀가 천을 대야에 담갔다. 곧 물수건이 팔에 닿았다.

“흡.”

물수건은 온기 하나 없이 냉랭했다. 내내 타오르던 살갗이 감당하기엔 너무 찼다. 숫제 얼음물 같았다. 남은 혼백이 비명을 질렀다.

“으어…… 흐윽.”

비참함이 과해 저절로 숨이 멎는 일이 있을까. 짓무른 눈가에 쓰린 눈물을 떨구며 눈을 감았다. 악독한 지옥의 형리 같은 오랑캐 놈들을 더는 보기 싫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차단되고 모든 것이 꿈으로 화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개종자의 종복은 분홍이에게 찰나의 위안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의 손길에는 일말의 동정심이 없었다. 차가운 물수건은 더러운 오물을 훔치는 걸레처럼 분홍이의 사지를 휩쓸었다.

“으으으.”

절로 신음성이 터졌다. 냉기로 인해 전신이 저릿저릿했다. 어릿어릿함이 심하여 감았던 눈을 아니 뜰 수 없었다. 물수건이 사포나 매양 한 가지였다. 살갗이 벌겋게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곧이어 허벅지 안에도 물수건이 닿았다. 뭔가를 발견했는지 가까이 선 둘에게서 낮은 탄성이 터졌다. 물수건질도 깜빡 멈췄다. 오랑캐 말로 귀엣말을 뭐라 속닥이기도 했다. 왜 그런지 뒤늦게 깨달은 분홍이는 정신이 아찔한 중에도 심한 모멸감에 빠졌다.

“으읏.”

남에게 치부를 보여 주기 싫은 마음과 한시라도 개종자의 흔적을 닦아 내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분홍이가 어찌 생각하든, 내색할 기운이 전무했다.

물수건은 점점 안으로 들어왔다. 궁녀는 무력하게 늘어진 다리를 잡아들고 깊은 곳도 닦았다. 형용하기 힘든 따가움과 아릿함이 퍼졌다. 고신을 참느라 낯에 다시 열꽃이 피었다. 사지를 꼼짝할 힘이 있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 분홍이는 다 터진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아까 씹은 혀가 욱신거렸다. 이젠 눈물도 말라 버렸다. 흐느낄 힘도 다해 그저 뜨거운 숨만 간헐적으로 토했다. 당장 죽고 싶었다. 정말로 당장…… 당장 흙을 덮고 싶었다.

찰방찰방.

시커멓게 꺼졌다가 아지랑이처럼 허옇게 번지는 시야에 물수건을 빠는 궁녀가 보였다. 처음에는 흰색이었던 물수건이 어느새 핏기를 머금어 빨갰다.

두 사람이 한 번 닦아 모자랐는지, 다시 물수건이 몸이 닿았다. 이번에는 반쯤 걸친 옷도 벗겼다. 까마득한 수치심 위로 물수건의 냉기가 겹쳐졌다.

으득.

뼈가 시린 냉기와 함께 타 버린 혼백의 재가 날리는 비참함을 견디느라 이를 꽉 물었다.

진저리가 났다.

맷돌에 갈아 버린 듯이 맥이 탁 빠진 사지가 말을 들었으면 어디 더러운 손을 대느냐고 악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고개를 잠시 흔드는 일이 다였다.

“으으으…… 흡.”

새삼 경악할 광경은 피 수건에 끈끈하게 묻어나오는 오물이었다. 개종자 놈이 저지른 흔적이었다. 차마 보기 싫어 눈을 감아 버렸다.

물수건질을 끝낸 종놈들이 늘어진 분홍이를 억지로 일으켰다. 푹신한 침상에 앉았는데도 엉덩이에 말뚝이 불쑥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악!”

지독한 고통에 비명이 터지고 허리가 절로 앞으로 꺾였다. 숙인 상체로 피가 쏠렸다. 얻어맞은 뺨이 화끈거렸다. 정수리엔 보이지 않는 정이 아직도 쾅쾅 내리쳤다.

궁녀 둘이 팔을 잡아 강제로 일으켰다. 그들이 거친 무명옷을 씌우는 사이 후들거리는 허벅다리 안쪽으로 뜨거운 물이 주르륵 흘렀다. 붉은 점이 두 발 사이로 번졌다.

“이…… 천벌 받을…… 오랑캐 놈들…….”

기운이 모자라 호통이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저를 죄인처럼 이송하려는 개종자의 종복 또한 역겨웠다. 분홍이는 반쯤 씹은 혀를 억지로 놀렸다.

“놔라…… 내…… 게 손대지…… 마라.”

팔을 쳐 냈다. 개종놈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불쌍하게 여겨지느니 악독한 죄인이 나았다. 거친 숨을 몰아내며 머리를 꼿꼿이 들었다. 핏물이 깃든 입술을 꾹 물었다. 처박은 정수리가 북처럼 둥둥 울렸다. 어질어질한 시야를 억지로 헤치고 발을 놀렸다.

“흐읍! 흡!”

전신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가랑이는 칼로 후벼 판 듯 뜨거운 불길이 번졌다. 당장이라도 까무러쳐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개종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선 한 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

턱이 아프도록 어금니를 사리문 분홍이는 기어이 혼자 걸었다. 궁녀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이내 앞장섰다.

그들을 따라가는 길은 또 다른 억겁이었다.

시야가 까맣게 가라앉아 수시로 멈춰 숨을 골라야 했다. 그때마다 궁녀가 혀를 차며 손을 대었으나 산산조각이 난 몸으로 억지로 진저리를 쳤다. 그때마다 허벅지에 엉겨 붙은 피딱지가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백 번을…… 쓰러져도…… 내 발로…… 걸어가겠다.”

한참 걸어간 후에 분홍이는 천박하게 꾸민 큰 방 대신에 훨씬 작고 수수한 방에 당도했다.

딱딱한 나무 걸상과 더러운 깔개가 깔린 바닥. 작고 허름한 침상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은 당연히 냉골이었다.

창밖은 작은 마당이었다. 방의 구석에는 그리로 통하는 작은 문이 달렸다.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지 오래되어 휑한 마당은 까마득한 돌벽을 두르고 있었다.

‘옥을 예상했거늘. 유폐인가.’

우두머리 시해를 시도한 형벌치고는 가벼웠다. 좀 전에 개종자에게 당한 짓이 전부가 아니란 얘기였다. 무엇을 어찌하려는지는 몰라도 살려 두고 지독한 짓을 이어 갈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갈기갈기 찢어 죽일 놈. 내가…… 가만히 있을 것…… 같으냐?’

분기가 치솟았다. 찢어지는 몸을 추스르며 눈을 감고 뱃속을 태우는 불을 다스리려 할 때였다.

철컥철컥.

묵직한 쇳소리가 났다. 확인치 않아도 밖에서 자물쇠를 걸어 잠근 걸 알았다. 창이 없는 문이라 안에서 뭔 짓을 해도 모를 터였다.

어차피 기별 없이 별세상으로 온 처지였다. 제가 없어진 후 부모 형제의 억장이 무너지고 애간장이 녹고 있음이 이역만리에서도 훤히 보였다. 자신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분홍이는…….’

또 눈물이 차올랐다. 흘리지도 못하고 꾹꾹 눌러 삼켰다. 그리도 사랑으로 아껴 준 한 몸조차 지키지 못한 제가 무슨 낯짝으로 부모 형제를 부르나.

이미 불효막심한 놈이 되었다. 돌아갈 길이 생기더라도 육신을 온전히 보전하여 오랑캐 땅을 벗어나긴 이미 글렀다. 그렇다면 더한 굴욕과 수치를 당하기 전에 육신의 굴레를 벗고 싶었다. 혼백이라도 훌훌 날아 부모 곁으로 가길 바란다면…… 분수에 넘치는 일일까.

딱딱한 나무 침상을 덮은 거친 천이 보였다. 비틀거리며 다가간 분홍이는 메마른 천을 벗겨 내었다. 사지에 힘이 빠져 얇은 천 조각 하나 빼내는데도 무진장 힘이 들었다.

“허…… 윽…… 헉.”

식은땀을 훔치며 거친 숨을 골랐다. 악귀 같은 개 종자 놈은 더한 굴욕과 수치를 주겠노라고 자신을 여기에 가두었다. 그러나 분홍이는 순순히 당할 마음이 없었다.

“아니…… 된…… 다…… 더…… 는 아니 된…… 우욱.”

그는 터지려는 오열을 억누르며 입을 꽉 닫았다. 빗장뼈가 들썩이며 등까지 욱신댔다. 손마디가 희게 질리도록 틀어잡은 천에 투두둑, 물 자국이 났다.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더는 막지 못하고 분홍이는 울며 천을 찢어 내었다.

길게 찢은 천을 배배 꼬아 대충 줄처럼 되었을 때 한쪽을 목에 감았다. 묶는데 차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내가 왜…… 왜…… 우으…… 흐윽.”

목을 매는 내내 서러움이 복받쳤다. 죽음이 무섭거니와 억울해서 분통이 터졌다. 개종자 놈만 아니었다면…… 스스로 목을 달 일도 없을 텐데. 어찌 개종자 놈은 그런 수모를 주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몬단 말인가.

“으어어엉…… 어어엉.”

울분에 차서 결국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서러움과 두려움을 퍼내고 또 퍼내도 가슴에 고인 피눈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도리어 숨만 더 막혔고, 이곳에서 어떤 식으로든 달아나고픈 생각만 커졌다.

“엄마…… 아…… 아빠아…… 부…… 농이…… 지베…… 가알…… 꺼야아…… 으엉.”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다른 쪽이 풀리지 않도록 잡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집에 가야 하는데…… 집에 가야 하는데……. 높은 곳에서 훌쩍 뛰어내려 우리 집으로 가야 하는데.

휑한 마당에 우뚝 선 나무가 보였다. 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이파리가 얇고 시들시들했다. 그래도 분홍이보다 훌쩍 큰 곳에 제법 굵은 가지가 났다. 휘청이며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눈물에 젖은 손으로 거친 둥치를 쓸면서 빌었다. 나무야, 나무야. 나를 집으로 보내다오.

“허억. 허억. 허억.”

아찔한 정신을 간신히 그러모아 윗가지를 향해 줄을 던졌다. 펄럭이며 꼬임이 반쯤 펴진 천이 굵은 가지에 걸렸다. 끝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목줄이 팽팽해졌다. 무섭고 괴로워서 당장 혼절할 것 같았다. 손끝이 파랗게 질렸다. 이도 딱딱 부딪혔다. 그래도 이대로 정신을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몸을 억지로 가누면서 가지에 걸친 줄 한쪽을 잡아 다른 굵은 가지에 묶었다. 다른 쪽은 제 목에 감았다. 비록 발이 땅에 닿았으나 이대로 오금에 힘을 풀고 주저앉으면 목을 맬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앞으로 쭉 뺐다. 저절로 줄을 잡은 손을 억지로 아래로 내렸다. 마지막에 그분이 떠올랐다. 얼굴을 붉히며 귀한 꽃을 전하던 정혼자.

‘다음 생에서 만나요.’

속으로 인사를 남기면서 분홍이는 사지를 놓았다.

삐걱.

사람 하나를 매단 나무가 흔들렸다. 목을 조르는 힘에 시야가 금방 꺼멓게 꺼졌다. 손이 사방을 헤집었다. 죽음을 앞둔 몸이 저절로 살려고 버둥거렸다. 허나 진즉 풀린 다리가 제 말을 듣지 않았다.

삐걱삐걱.

팽팽한 천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컥. 컥.”

숨이 막히기도 잠시. 허공을 헤집던 양팔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짓밟힌 벌레처럼 바르작거리던 양다리도 잠잠해졌다. 허연 천에 걸친 모가지가 천천히 흔들렸다.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처음에는 세상을 등진 몸을 배웅하듯이 살랑살랑 불던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사방에 우뚝 선 담에 어디 구멍이라도 난 듯, 갑자기 돌풍이 몰아쳤다.

파르륵. 파르르륵.

비루먹은 나무에 붙은 여남은 이파리가 온통 난리였다. 마른 땅의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파르륵.

반쯤 풀린 천이 바람을 맞아 펄럭였다. 밑으로 잡아당기는 무게를 팽팽하게 지탱하던 천은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삐걱삐걱.

굵은 가지는 질겨서 부러질 기세가 아니었다. 대신 기둥과 가지가 닿은 부분의 껍데기가 찍 찢어지려 했다. 가지는 그대로여도 아래로 휘청 내려간 힘을 가지 뿌리가 버티질 못했다.

찍…… 툭…… 우지끈!

기어이 가지가 훌렁 찢어졌다. 땅 위에서 무릎 높이만큼 떠 있던 엉덩이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쿵!

충격이 분홍이를 덮쳤다. 숨이 넘어가던 분홍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꺾으며 거친 숨을 들이마셨다.

“커억!”

목을 부여잡으며 위장을 토할 듯 구역질했다. 핏물 섞인 타액이 주르륵 흘렀다.

“허억! 커억!”

한참 헛구역질한 후에 점멸하는 시야 속으로 손을 더듬었다. 천에 감긴 가지가 만져졌다. 가지는 멀쩡했다. 대신 나무에 붙은 밑쪽이 쭉 찢어졌다.

둔한 손끝에 축축한 나무 속살이 만져졌다. 썩은 가지도 아니었다. 멀쩡한 가지가 꺾인 것이었다.

“이…… 무슨…….”

쓰라린 목을 비집고 허탈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미 깨문 혀를 다시 깨물 힘도 사라졌다. 허억, 헉. 숨을 몰아쉰 분홍이는 개처럼 엎드려 부들부들 떨었다. 차마 목에 맨 천을 풀어낼 기운도 없었다.

“으윽.”

설움과 함께 구역질이 올라왔다. 흐느낌과 뒤섞인 헛구역질을 하느라 위장이 울렁였다. 절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이윽고 구역질이 가시자 이번엔 절로 헛웃음이 났다. 웃다가…… 웃다가 나중엔 헛바람이 들어 헛기침이 연거푸 뱉었다.

제멋대로 바람이 불더니 멀쩡한 가지가 꺾여?

비장하게 목을 매었거늘. 무위로 돌아갔다. 하늘이 무심해도 이렇게 무심할 줄이야. 제 각오가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이리 죽으면 안 된다는 얘기인가. 눈에 선명한 부모님이, 명가의 이름을 더럽힌 자신을 무어라 할지 마음이 쓰렸다.

쿨럭쿨럭.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피와 함께 타액이 흘렀다. 웃음이 더욱 커졌다.

“쿡쿡…… 쿨럭쿨럭…… 쿡…… 크…… 흐으…… 흐으윽.”

헛기침과 웃음은 이내 뒤섞여 기이한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눈가를 적시더니 이내 콧등을 타고 아래로 주르륵 흘렀다.

“흐윽…… 흐으으윽.”

꾹꾹 눌러왔던 오열이 터졌다. 서러움과 무서움이 휘몰아쳤다. 몸을 웅크리고 길 잃은 아기처럼 목 놓아 울었다.

“엄마…… 어…… 마아…….”

참았던 눈물은 폭포수가 되어 풀밭을 적셨다.

죽음을 각오할 만큼 지치고 아프지 않았다면, 그래서 정신을 금방 놓아 버리지 않았다면…… 눈물이 작은 방을 채워 혼백을 고향으로 보내 주었을 텐데.

서러운 눈물로 녹아내리는 일마저 허락받지 못했다.

* * *

물수건으로 목에 난 상처의 마른 피딱지를 닦는 사이, 카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게 분을 풀었음에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빌어먹을 놈을 어떻게 할까 골몰했다.

으득.

아무리 불시에 당한 기습이라고는 하나 그런 허술한 공격에 급소를 다쳤다. 찻잔 파편에 불과했는데. 술수는 허무맹랑해도 놈의 손끝은 제법 야무졌다. 공격한 순간에 가진 대단한 기백과 각오가 아니라면 방심했더라도 당하진 않았을 터. 암살 훈련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면, 그냥 타고난 독종일 가능성이 컸다.

딴에는 알량한 대의를 가지고 카론에게 원한을 품은 놈들 즉, 파사 일족이 대체로 그랬다. 발견한 장소도 파사 일족과 관련이 깊은 황무지. 정말로 그런 쪽으로 관계가 있을까?

‘감히!’

황제의 격노를 느낀 다른 시종들은 움찔했다. 그러나 상처를 보던 그렌은 도리어 무표정을 깨고 걱정스러운 낯빛을 했다.

“깊지 않아도 거친 날에 당한 상처라 넓게 벌어졌습니다. 꿰매야 합니다.”

“그럼 꿰매.”

시종이 소독한 바늘과 실을 준비하는 사이 그렌은 상의를 벗은 카론의 어깨 위에 하얀 천을 접어 올렸다. 소독약을 상처에 부었다.

쓰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어 ‘지옥의 갈고리’라는 별명을 가진 약인데도 카론은 별다른 반응 없이 침묵했다. 관자놀이가 딱딱하게 굳은 것은 아파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였다.

투둑. 투둑.

마취도 없이 벌어진 상처를 잡고 한 땀 한 땀 꿰맬 때도 카론의 반응은 그대로였다. 여덟 땀 정도 꿰맨 후, 그렌은 다시 상처를 소독하고 고약을 바른 후에 거즈를 대고 붕대를 감으려 했다.

“붕대는 됐어.”

“염증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 입감도 안 되는 개새끼를 건드렸다가 목을 당했다고 온 황궁에 떠들고 다니라고?”

퉁명스러운 반문이 돌아왔다. 여전히 노기에 물든 음성이었다. 그나마 그렌이니 대꾸라도 한 것이다.

황궁에서 일하는 시종 대부분은 벙어리처럼 굴었다. 황제의 심기가 매우 불편할 때 괜히 입을 열었다가 큰 화를 당하는 자가 더러 있었기 때문이었다. 흥분할 때마다 수위를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황제를 모시는 자로서 숨죽여 눈치 보는 일은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황제의 노기가 황궁을 뒤흔들 때도 의사 전달은 해야 했다. 피를 마시는 황제 카론에게 벌레와 별 차이가 없는 일반 시종이 감히 입을 열 수는 없으므로 주로 그렌이 도맡았다. 그것은 친부모에게 버림과 학대를 받은 카론을 직접 기른 자로서 가지는 권리이자 의무였다.

“그렇다면 붕대 대신 풀로 거즈를 고정하지요.”

그렌은 붕대를 포기한 대신 천을 잘라 깨끗한 풀을 바르고 익숙한 솜씨로 거즈를 고정했다. 아예 안 보이게 할 재주는 없지만 셔츠 칼라를 세우면 상처 대부분이 가려졌다.

아주 탐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 집어치우라 할 마음도 없었다. 그렌은 카론만의 특이성과 일반 관습의 균형을 잘 잡았다. 그의 말을 들어서 손해를 본 기억이 없다.

카론이 셔츠를 입는 사이 그렌은 약상자를 정리하여 시종에게 넘겼다. 시종이 빠르게 사라지고 둘이 남았을 때 카론은 제 심경을 터놓았다.

“꽃인 줄 알았더니 망할 독초였어.”

“함부로 대하니 그렇지요.”

뒷짐을 진 그렌의 눈빛은 충심 어린 시종장이 아니라, 애정 어린 타박을 하는 양부에 더 가까웠다.

“전신이 상처더군요. 작고 여린 몸이 견디기 힘들 겁니다.”

“덤비기에 제압한 거지. 자업자득이야.”

“그것 말고요.”

그렌은 손바닥을 내보였다. 조용한 눈빛만으로 다짜고짜 단검으로 손바닥을 찌른 일에 관해 카론을 꾸짖었다.

“피를 조금 낸 것뿐이잖아. 뼈와 근육은 건드리지 않았어.”

“유순하고 예의가 바른 그분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겁니다. 뒤이어 얼굴도 때렸으니까요.”

“어디가 유순하고 예의 바른지 모르겠군. 얌전히 옷을 벗었으면 맞을 일도 없었어.”

카론은 자신이 한 잘못은 전혀 없다는 투였다. 그렌은 엄숙한 낯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분이 무슨 연유로 말도 통하지 않는 세상의 황무지에 나타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기 황궁에 오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요. 폐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낯선 만큼 그분에게도 이곳이 낯설겠지요.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생김새도 다른 세상에 뚝 떨어져서 굉장히 불안할 텐데도 성의껏 소통해 보려 하셨습니다.”

“성의 어린 자가 이런 상처를 내나?”

“다른 상황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지요.”

그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카론은 어렴풋이 알았다. 그럼에도 명확하게 듣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천천히 알아갔으면 그분이 그랬을까요?”

“그거야말로 네 추측 아닌가? 황제를 시해하려 했어. 얌전한 태도는 그것을 위한 위장일 수도 있지.”

카론이 반론을 제기하자 그렌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찌를 듯한 질책의 시선 끝에 이윽고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단지 폐하의 호기심과 필요성 때문에 데려온 분을 그렇게 윽박지르고 손찌검을 하는 태도는…… 제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그 말에 카론은 고개를 홱 돌려 그렌을 노려봤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에서 금방이라도 칼날이 튀어나와 중년 시종장의 심장을 찌를 기세였다.

“다시 말해 봐.”

“단지 원치 않은 가운데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갖은 핍박과 학대 속에서 자아를 잃어 가던 불쌍한…….”

“감히 네가!”

노성이 터지며 담담하게 이어지던 말이 끊어졌다.

빠드득.

카론이 그렌을 노려보며 어금니를 갈았다. 미간에 주름이 패고 목에 핏대가 섰다. 금방 덧댄 거즈 위에 핏기가 비쳤다. 황제는 꾹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쾅!

거센 발길질이 방금 사용한 의자에 날아들었다. 최고급 목재를 통으로 조각해 만든 묵직한 의자가 넘어지더니 벽까지 날아가 장식장에 처박혔다. 장식장 위에 놓인 거대한 화병이 휘청대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뒤이어 채찍 같은 손날이 날아들었다.

아침에 새로 물을 갈아 꽃을 꽂은 화병은 대단히 무거웠다. 화가 난 카론은 그것을 마치 속이 빈 나뭇가지처럼 쉽게 날려 버렸다.

퍽! 퍽석!

붕 날아간 도자기가 바닥에 떨어져 사방에 파편을 흩날렸다. 복잡한 문양의 카펫이 물과 꽃으로 엉망이 되었다.

의자를 처박고 화병을 박살 내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카론은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댔다. 어느새 눈에 핏발이 섰다. 더 때려 부술 게 없나 여기저기 서성이던 카론은 이내 몸을 홱 돌렸다. 분노로 떨리는 입술을 사납게 비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감히 그 빌어먹을 버러지를 내게 빗대?”

격노와 혐오에 물든 카론의 안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시종장 그렌은 황제의 격노를 담담하게 맞섰다. 세상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직 어바인 그렌에게만 허락된 행위였다.

“그렇게 되지 말라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멋대로 뒈진 마녀와 내 손으로 죽여 버린 국왕 패거리와 같은 짓거리를 했다는 거잖아!”

“냉정하게 생각하면…… 같은 짓이 맞지 않습니까?”

“달라! 다르다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건만,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질수록 카론은 그렌에게서 멀어졌다. 노여운 중에도 그렌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이성이었다.

“무엇이, 어떻게요?”

불같이 화를 내는 황제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그렌은 아까와 똑같은 태도와 어투로 반문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한 발짝 다가섰다.

줄어든 거리가 불편한지 카론이 더욱 거리를 벌렸다. 그는 그렌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숨을 골랐다.

“후욱.”

거친 황소 같던 숨이 점차 흥분한 들개만큼 낮아지더니 이내 평상시 수준으로 돌아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가에 이는 경련을 풀기 위해 손바닥으로 잠시 눈을 문지르기도 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힌 카론은 창가로 가서 문을 벌컥 열었다.

시원한 찬바람에 열기를 완전히 식히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동안 그렌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카론이 긴 손가락을 흐트러진 머리에 찔러 넣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군.”

치민 흥분에 잠식되었던 이성을 찾은 카론은 순순히 인정했다.

“네 말이 맞아. 차이가 없다.”

말을 보태는 대신에 그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론은 불우한 어린 시절로 인해 참을성이 부족했으며 흥분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상처 입은 짐승 같던 그에게 평범한 인간의 심리를 가르치느라 그렌은 부단히 애를 썼다.

근 십오 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증오와 폭력, 흥분밖에 모르는 작은 짐승에게 냉정과 논리를 가르치기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참견했다.

“사람을 이유 없이 때리지 마십시오.”

“칼로 찌르면 누구나 아픕니다.”

“무력은 최선이 아닌, 최후의 수단입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막 옹알이를 할 무렵, 부모를 통해 학습하는 기본이었다. 한때 수도사의 길을 걸었기에 자식이 없는 그렌으로서는 때로 어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도 많았다. 시행착오도 무수히 겪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현재 이십 대 중반인 카론은 겉보기엔 멀쩡한 인간 같았다. 가끔 드러나는 비인간성은 황제의 권위와 위엄으로 치부되었다. 그것이 심각한 정서적 결여의 흔적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그렌이 가르치고자 노력했던 많은 것 중에 카론이 가장 잘 이해한 부분은 아무래도 논리적 판단 과정이었다. 유용성과 편리성을 잘 따져 적절하게 제 본성을 드러내거나 감추기에 점점 능해졌다.

물론 증오하는 파사 일족을 대할 때는 본능적 폭력을 쉽게 드러내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그마저도 이성적 판단을 우선해 즉각적 폭발을 억누르는 편이었다.

이번 사건은 카론이 전혀 새로운 존재를 대할 때도 폭력적인 방법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성향임을 알려 주었다. 이성적 판단은 어디까지나 익숙한 대상을 상대로 한정이었다. 전혀 새로운 존재에 대해서는 무지한 아이처럼 폭력부터 휘두르고 보았다.

그렌은 이를 머릿속에 잘 새겨 두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두어 대 때리지 않았는데 피를 흘리고 기절했어.”

“그만큼 약하다는 뜻입니다. 조심스럽게 대하십시오.”

“그보다 더 조심스럽게라니. 어떻게 하란 말이야?”

“그건 폐하께서 궁리하셔야지요.”

“여자도 아닌데 왜 그래야 하지?”

덧붙은 질문에 그렌이 답했다.

“여자가 아니라도 폐하에 비해서는 약하니까요. 단련된 기사가 아니라면 아무리 남자라도 폐하의 무력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사실 두 대나 정통으로 맞고도 버텼다는 점에서 상당히 맷집이 좋은 편입니다. 일반인을 대하는 방법을 익히십시오. 몸을 취하시는 것도, 말리지는 않습니다만 폐하의 성미대로 하셨다가는 폐하의 소유물이 허락도 없이 갑자기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파사 일족 절멸에 이용하기 곤란하겠지요.”

“남자를…… 하긴. 성별은 관계가 없군.”

카론에게서 흥분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냉엄한 논리력이 자리를 잡았다. 그는 그렌을 바라보면 입꼬리를 올렸다.

“앞으로 그자의 신상은 네게 일임하겠다.”

“알겠습니다. 폐하.”

“피곤하니 쉬겠다. 나가 봐.”

절도 있는 자세로 절을 한 그렌은 뒤돌아섰다. 문을 닫으며 살짝 돌아보자 카론은 쓰러지지 않은 의자에 앉아 뭔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흐음.”

낮게 한숨을 내쉰 그렌은 손으로 이마를 쓸어내렸다. 긴장하거나 두려움을 느껴서가 아니었다. 다만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카론에 대한 걱정이 컸다.

제국은 이제 기틀을 갖추었다. 무력으로 짓밟기보다는 내부를 다독일 때였다. 냉정한 판단과 더불어 핍박받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꼭 필요했다.

‘흘러넘칠 필요는 없지. 아주 조금. 누구라도 좋으니 아주 조금이라도 폐하께 자애를 가르칠 수 있다면.’

일전에 그럴 만한 사람이 있었으나 배신과 함께 끔찍한 결말로 이어졌다. 이후로 카론에게 애정을 가르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남자라서 아깝게 되었어.”

기왕이면 요정이 여자였다면 좋았을 텐데. 거기다 기세가 대단하여 황제를 감히 공격하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긍정적 호기심을 보이는가 싶었더니…… 그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나마 단칼에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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