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낯선 세상
1.
천하를 호령하는 대제국 ‘신(新)’의 재상 명판승이 애지중지하는 늦둥이 막내 서자. 동시에 점점 혈맥을 잃어 가는 음양인 중 양인보다 갑절은 희귀한 음인.
권세와 부를 자랑하는 재상 가문에서 태어난 채운은 제 발로 땅을 디뎌 본 일이 없었다. 귀한 음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첩실의 자식 주제에 분수에 넘치는 천운을 타고나서 어떤 시기와 괄시를 겪지 않고 자란 이유는 바로 애정이 넘치는 가풍을 이끈 정실부인, 큰엄마 덕분이었다.
배포가 크신 큰엄마는 어린 첩인 엄마를 아우로 여기며 살갑게 대했다. 친모 또한 정실인 큰엄마를 대단히 존경하고 따랐다. 그렇기에 두 엄마가 함께 있어도 가정은 화목했다.
큰엄마는 옛적 황가의 혈통을 이어받은, 지체 높은 명문가 출신으로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맏이 명도운은 건장한 양인 아들로 무척 총명하고 기개도 남달랐다. 성격도 시원하면서도 진중하여 뭇 또래가 저절로 따랐으며, 행실이 발라 웃어른께도 총애를 받았다. 약관의 나이에 어려운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부모의 큰 자랑거리기도 했다.
뒤이어 태어난 둘째 명강운, 셋째 명여운 모두 양인이었다.
그중 여운이 여자 양인이었다. 여자 양인은 드물다는 남자 음인보다 훨씬 희귀한 태생이었다. 여자 양인은 대대로 큰 인물이라 하여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라는 옛말도 내려왔다. 한낱 소인 무리가 핏줄을 핑계로 대인의 길을 막지 말라고도 했다. 옛말을 증명하듯, 여운은 어린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금은 북방을 호령하는 장수로 이름을 떨쳤다.
평인이 아닌 음양인은 옛적 하늘에서 내려온 하늘 사람의 혈통이라는 증거였다. 한 대에 한 명 나도 큰 복인데 정실은 양인 셋을 줄줄이 낳고, 뒤늦게 들인 첩실마저 귀하디귀한 음인을 낳는 바람에 명가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넘쳐났다.
자녀가 크기 무섭게 다복한 명가의 자식 운을 조금이라도 얻을까 싶어 여러 명문에서 앞다투어 혼담을 넣으려고도 했다.
아무리 음인이라도 첩실이 낳은 배다른 아이를 달갑게 받아들이는 정실은 많지 않았다. 서자를 친자만큼 귀하게 기를 수 있는 연유에는 집안 후계가 든든한 점도 분명히 있으나, 그보다는 큰엄마의 너그러운 아량이 더욱 큰 몫을 했다.
어려운 확률을 뚫고 양인 남매를 셋이나 낳았고, 그중 둘이 벌써 입신(立身)하였기에 가만히 있어도 큰엄마의 위세는 날로 커졌다. 그렇기에 음인으로 태어난 서자를 맏손주 보듯이 귀여워하는 거라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밖에서 어떤 소문이 돌든, 집안 사정을 아는 친지나 하인은 큰엄마의 배포가 워낙 광대하여 친자가 별 볼 일 없이 태어났어도 귀한 막내를 기꺼이 예뻐할 거라 했다.
“우리 분홍이. 큰엄마한테 오렴.”
큰엄마를 자청하고 막내 채운을 분홍이라 부르며 아주 예뻐했다. 뺨, 귓불, 발꿈치, 팔꿈치. 거기다 정강이까지 분홍 빛깔이라 전에 없이 곱다며 붙인 아명이었다.
별당에 들 때마다 맛있는 간식을 양껏 가져오기에 어린 시절부터 큰엄마가 무척 반가웠다. 다정한 눈매와 너른 품도 좋았다.
“크으어마.”
뒤뚱뒤뚱 아장걸음을 옮길 때마다 큰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활짝 편 팔 안에 폭 안기면 얼싸안고 볼을 비비기도 했다. 그러면 분홍이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자지러졌다.
“우리 분홍이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지?”
늦둥이는 눈엣가시는커녕 눈에 쏙 넣어도 안 아플 사랑둥이였다. 양인들만 득시글하여 경직되고 뻣뻣한 집안에 굴러들어온 양지 햇살이었다.
우습게도 명가의 자녀 넷 중에서도 혼담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이는 혼기가 찬 맏이가 아니라, 이제 걸음마를 하는 분홍이었다. 혈통이 짙은 명문가마다 양인이 더러 있는데 음인은 씨가 말라 수가 한참 모자라는 탓이었다.
명가에 아주 곱고 건강한 음인이 태어나 사랑받으며 자란다는 소식은 황궁에도 들어갔다.
“명 재상. 그대 집에 귀한 아이가 태어났다지? 내 듣기로는 아명이 분홍이라 하던데.”
장성한 태자가 정무를 보던 명판승을 찾아와서는 실없는 소리를 꺼냈다. 공손히 손을 모아 절을 올린 판승은 정무가 바쁜 중에 태자가 왜 이러나 싶었다. 서른을 넘은 태자는 흥이 많으나 그렇다고 경망스러운 성품은 또 아니었다.
“근자에 태어난 음인이 아주 드물어. 실상 그 댁 막내가 유일하지. 그래서 말인데 분홍이를 내 아들 배필 삼으면 어떻겠나?”
“예?”
판승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자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분홍이와 같은 나이임에도 평범한 어른 하나는 너끈히 쓰러트리는 장사(壯士)로 소문이 자자했다.
어린 나이에 가문끼리 혼사를 결정하는 일이 더러 있으나 그건 황가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방계 황족이라도 놀랄 판에 더군다나 현 황제의 유일한 종손인 태손의 배필이라니.
“아직 걸음도 잘 못 걷는 아기이옵니다.”
“걸음이야 곧 뗄 것이지 않나. 우리 태손도 아직 걸음이 서툴러. 분홍이 그렇게 예쁘다지?”
“아이의 얼굴은 자라면서 열두 번도 더 바뀝니다. 어릴 때 예쁘더라도 커서 못난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못난이가 되어도 귀한 음인이지 않나? 그리고 재상이야 평범하지만, 둘째 부인이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여 황궁까지 들렸네만.”
“아니 그게. 아무리 그래도 서자인데 어찌 태손 마마를 모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황상이신 아바마마께서 허락하면 될 일이고. 대대로 천것이 황상의 총애를 입어 황후까지 올라간 적도 있는데 서자라고 대수인가.”
“늦은 나이에 본 자식이라 하도 오냐오냐했더니 아직도 똥오줌을 제대로 못 가릴 만큼 아둔하고 고집이 세며 안하무인이라 엄중한 황궁에선 버티지 못합니다.”
판승이 작정하고 귀한 자식 흉을 보며 안 된다고 발뺌하자 태자는 샐쭉 웃으며 자리를 떴다. 품에 두고 곱게 키워서 다 자라걸랑 성품 좋고 모난 데 없는, 적당한 가문의 자식과 혼사시킨 후에 명가 앞마당에 예쁜 집을 지어서 소꿉 살이 시킬 생각인데 태손이 웬 말인가.
차라리 먼 고장으로 보낼지언정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든 황궁으로는 못 보낸다. 서자 출신이니 응당 첩실일 테고 하필 아비가 재상이라 받지 않아도 될 경계와 시기를 한 몸에 받을 텐데. 모질고 힘든 삶을 어찌 여리고 고운 분홍이에게 시킬까.
‘아무렴. 암투가 횡행하는 황궁만은 절대로 아니 된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일이 기어이 일어났다. 달포도 지나지 않아 황제가 직접 명판승을 불렀다. 그러면서 첩실도 아니고 정부인, 즉 태손비로 진지하게 거론했다. 아무리 음인이어도 서자가 태손의 정부인이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화들짝 놀란 명판승은 태손 마마께서 아직은 어려 앞으로 더 좋은 배필이 태어날 수도 있으니 벌써 그런 얘기를 꺼내어 나중에 곤란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심이 좋지 않겠느냐고 완곡하면서도 간곡하게 거절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저귀를 떼기도 전에 분홍이를 황궁으로 홀랑 잡아갈 태세였다.
거절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쉬이 고집을 꺾지 않고 수시로 혼담을 넣었다. 만인지상의 뜻을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법에 어긋나므로 결국 명판승이 물러섰다.
그렇게 분홍이는 본명도 채 모르는 나이에 태손비로 낙점되었다.
* * *
세월이 흘러 성년의 때가 지나자마자 황가에서는 사람을 보내 분홍이를 외궁인 은현궁으로 불러들였다. 정식으로 성혼을 올리기 전에 황궁의 예법을 익히라는 안배였다.
내달이 되면 분홍이는 태손과 부부가 될 터였다. 싱숭생숭한 채로 날을 꼽아 기다리다가도 때로는 무서워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기도 했다.
혼삿날까지 나쁜 것, 못난 것, 더러운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하는데. 어쩌다가 다른 이도 아닌 부군이 될 자에게 야밤에 쫓기는 일이 생겼는지.
“헉…헉!”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렀다. 누님이 사다 준 새 비단신 한 짝이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거친 땅을 달린 덕에 버선은 벌써 찢어졌다. 발바닥에 차가운 맨땅이 닿기 무섭게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아얏.”
풀썩.
어두운 밤길에 꼭꼭 숨은 돌부리에 기어이 발톱을 찧었다. 넘어지며 땅에 쓸린 무릎이 몹시 쓰라렸다. 발톱에 손을 대자 미지근한 피가 묻어났다. 아픔에 찡그린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퍽 쏟아지려는 찰나 뒤에서 무시무시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찾았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높은 궁궐 담벼락 위로 머리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휘영청 밝은 달처럼 불길한 붉은 눈빛을 한 남자는 이쪽을 발견하고 짐승 같은 이를 드러냈다.
“명채운.”
아명이 아닌 본명이 들리자 염통이 툭 떨어졌다.
분홍이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저벅저벅.
크고 짙은 그림자가 금방 다가왔다.
발톱의 아픔도 잊고 다시 벌떡 일어났다.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중에도 이번에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손에 든 것으로 발치를 비추었다.
등불보다 가볍고 등불보다 더 빛나는 그것은 다름 아닌 화려한 겹꽃이었다. 손가락 굵기의 줄기가 잘린 지 퍽 오래되어서도 시들지도 않고 도리어 더 생생하게 꽃잎을 나부끼는 신비한 꽃.
황제가 황궁 깊은 비원에서만 기른다는 선계의 꽃인 금은화(禁隱華)를 본 적도 처음이거니와 그것을 제가 가지고 달아날 줄도 몰랐다.
“기다리시오!”
쫓는 자는 다름 아닌 분홍이의 정혼자이자 황제의 유일한 손자인 태손 이승원이었다. 원래 체구와 체력이 좋기로 자자한 황가의 직계 자손이며 그 황족 중에서도 내에서도 가장 양기가 세다는 평을 들어온 만큼 체구와 기세가 대단했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채 정혼자로 살아온 지 십여 년. 상대에 대한 호기심이 있기는 둘 다 마찬가지였다. 어르신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러 온 혼약자를 발견하고 난처하면서도 한편으로 괜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승원이 황제가 소유한 가장 귀한 보물인 금은화를 내밀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러시면 안 된다고 거절할까 혹은 이대로 밀어냈다가 나중에 괜히 미움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다 분홍이는 못내 내미는 꽃을 받아 들었다.
번쩍거리는 신비한 꽃을 받아들면서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살짝 들었다. 황태손의 용모가 몹시 궁금했다. 훤칠한 미남자로 명성이 자자한 만큼 잘생겼을까.
슬쩍 고개를 들고 서로 눈빛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듣던 만큼 대단한 미남자는 아니었다. 다소 실망할 찰나 호랑이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만큼 우락부락한 몸체와 다르게 순하고 점잖은 낯빛을 한 황태손은 저만큼이나 수줍은 듯 제 정혼자를 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은근한 웃음에 분홍이는 몹시 부끄러워 혼났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간 많이 보고 싶었노라고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던 황태손이 갑자기 숨이 막힌 듯 헉헉 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발정이 난 짐승같이 돌변했다. 공포가 엄습했다.
아무리 혼약한 사이라지만 황가에는 엄격한 법도가 있었다. 어르신들 몰래 둘이서 정분이라도 나면?
고작 며칠을 참지 못하고 엉덩이 뿔이 난 망아지처럼 태손과 배를 맞춘 음탕한 자식으로 인해 재상이신 아버님은 황제 폐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실 터였다. 가문의 큰 망신이었다.
이러시면 아니 된다고 하려는 찰나 거대한 상대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려 했다. 황태손을 힘껏 밀치고 도망쳤다.
그 뒤로 이 꼴이 되어 버렸다.
“어딜 그렇게 가는 거요?”
탁 트인 장소라면 벌써 잡히고도 남았다. 그러나 여기는 높고 낮은 담벼락이 어지러이 흩어진 외궁이었다. 몇 대에 걸쳐 복잡하게 증축한 궁인지라 요리조리 방향을 틀어 가며 달아날 수 있었으나, 그것도 발을 다치기 전의 얘기였다.
점점 궁지에 몰렸다. 뒤늦게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았다. 하늘이 무심하게도 주변엔 생쥐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넋 놓고 도망치는 사이 외궁에서도 가장 외지고 구석진 곳으로 와 버린 터였다.
“해치지 않아. 그저…… 그저 내 사람이 되기만 하면…….”
무서운 목소리가 더욱 가까이서 들렸다. 더는 달아날 곳도 없었다. 당황하여 주변에 숨을 곳을 찾았다. 가까운 곳에 아주 낡은 문이 보였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사람이!’
누군가 있음이 틀림없다. 도움을 청해야 했다. 아픈 발로 쩔뚝이며 다가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문은 척 보기에도 수백 년은 더 되어 보였다. 위에는 알아보기 힘든 필치로 쓰인 긴 종이가 가위 모양으로 붙어 있었다. 금지를 뜻하는 봉인이었다.
‘비역? 사당?’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보다 더욱 경외로운 곳으로 통하는 외궁이기에 순간 망설였다.
“왜 피하는지 모르겠어. 어차피 혼약한 사이인데. 좀 전에는 꽃도 받아 주었으면서…… 섭섭하오.”
외통수로 몰아 버렸음을 깨달은 상대는 숨을 고르며 느긋이 다가왔다.
무시무시한 술래잡기에 짙은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찍!
봉인을 훼손한 뒤 두 손으로 문을 활짝 밀었다.
쏴아아아아아!
난데없는 돌풍이 몰아쳤다. 문이 활짝 열리고 안에서 환한 빛이 쏟아졌다. 풀어 헤친 긴 머리카락이 옷자락과 함께 사납게 펄럭였다.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훅.
돌풍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바람에 시린 눈을 깜빡였다. 사당도 촛불도 없었다. 대신 붉은 달빛에 풀이 아무렇게나 자란 작은 마당이 드러났다.
‘분명 불빛을 보았는데.’
기이한 일이었다. 무릎보다 높게 자란 풀은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 흔들렸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지체하지 않고 풀숲 사이로 몸을 던졌다.
찌륵찌륵.
풀을 헤칠 때마다 풀벌레들이 놀라 달아났다. 작은 마당에는 몸을 숨길 곳이 없었다. 당혹감도 잠시, 풀밭 중앙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길게 자란 풀 더미를 헤치자 구덩이가 보였다. 마치 벽을 세우지 않은 우물처럼 동그란 구덩이 저 안쪽에서 빛이 솟았다.
반짝반짝.
무슨 이유에서인지 손에 들린 금은화도 마치 심장처럼 맥동했다. 뭔가 신비한 힘이라도 발휘할 듯 보였다.
‘신비한 힘을 발휘하는 신선화라 하였으니. 네가 무슨 힘이 있다면…… 제발…… 나를 도와 다오.’
두 손으로 꽃자루를 꼭 잡은 후 얼른 풀숲에 몸을 숨겼다.
황태손은 벌써 낡은 문을 넘고 있었다.
“숨어도 소용이 없어. 금은화의 빛이 나를 이끌거든.”
밤에 번쩍번쩍 빛나는 꽃을 들고 다니니 당연했다. 그러나 정혼자에게 받은 첫 정표를 아무렇게나 버릴 순 없지 않겠는가. 그것이 황가의 귀한 보물이라면 더더욱.
‘제발 누가. 누가 태손 마마를 말려 주었으면.’
스산한 바람과 우거진 수풀 사이에 누군가 불쑥 솟아나는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우람한 양인의 기세에 놀란 풀벌레가 요란스럽게 달아났다.
‘차라리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로 사라질 수 있다면.’
숨을 죽이고 눈을 질끈 감았다. 바람이 무색하게도 황가의 꽃은 마치 고함치듯 더 밝게 빛났다. 마치 태손을 부르는 듯했다.
“찾았다.”
두어 걸음을 두고 선 태손 이승원이 이쪽을 굽어봤다. 붉은 달을 등지고 선 그의 눈은 마귀처럼 붉게 물들었다.
“이리 오시오.”
자상한 음성과 손길이 간담이 서늘했다.
“내, 너무 거칠게 대하진 않으리다.”
정말로 그럴 심산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더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어차피 달포 후엔 정식 부부가 될 터인데 며칠 앞당긴다고 큰일이야 있겠소? 너무 애태우지 마시오.”
“그래도 황가의 법도가…….”
“할바마마든, 아바마마든. 내가 감당하겠소. 그대는 걱정하지 마시오.”
“그렇지만.”
“아니 벌써 부군을 박대한단 말이오?”
짐짓 탓하는 말에 울상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상황이 이미 이렇게 된 것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혹시 내가 싫소? 마음에 들지 않아?”
십수 년을 한 사람의 배필로 자랐다. 호기심이나 기대, 혹은 설렘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갑자기 달려든 기세가 무서워서 그렇지 태손이 싫은 건 절대로 아니었다. 거리끼다니. 감히 제가 태손을? 천부당만부당했다. 단지 상황이 상황인지라, 좋다 순순히 말할 처지 또한 아니었다.
“…….”
즉답하지 못하자 많이 서운했는지 태손의 기가 살짝 누그러들었다. 시무룩한 모습에 날 선 두려움이 덩달아 슬쩍 누그러졌다. 가슴이 찡 울렸다. 오래 그리던 정혼자를 만나 들뜬 나머지 난폭해진 젊은 양인이 살짝 귀여워도 보였다.
큰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양인들은 본래 제 것이라 여기면 자제력을 상실한다고 하였다. 하물며 양인으로서 기세가 황국 제일로 꼽힌다는 태손 이승원이니.
“아…… 아니옵니다.”
“그럼 내 손을 잡아 주시오. 팔 떨어지겠소.”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의구심이 들었으나, 구박받은 강아지 같은 눈빛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었다. 부군 될 귀인께서 이토록 애원하는데 계속 안 된다고 하기도 힘겨웠다. 거칠게 대하지 않으리라는 이야기를 믿고 싶었다.
벌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빈손을 내밀었다. 묘한 떨림과 불안을 품에 안은 분홍이의 손이 천천히 상대의 손에 닿으려 했다. 동시에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인 발이 하필이면 다친 발이었다.
“아얏!”
고통에 균형이 흐트러졌다. 그러면서 담이 없는 깊은 우물 쪽으로 몸이 크게 휘청였다.
“어?”
넘어지려는 정혼자를 본 태손이 놀라 손을 뻗었다. 분홍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몸이 더 빨리 기울어졌다.
“태…… 태손 마마!”
“명채운!”
둘의 손끝이 아슬아슬 스쳤다.
갑자기 금은화가 태양처럼 빛을 뿜으면서, 우물 안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우우우웅. 긴 용트림에 분홍이는 떨어지는 중에도 모골이 송연해지며 어깨를 움츠렸다.
‘사, 살려…….’
파확.
까마득한 우물 밑바닥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기운이 치솟았다. 온통 흰빛으로 이루어진 용이었다. 작은 우물에서 나왔다고 믿기지 않는 우람한 몸통을 뽐내는 용은 속이 비어 허우적대는 분홍이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하늘로…… 하늘로, 맹렬한 기세로 승천했다.
“이게 무슨! 명채운! 채운아!”
“태손 마마!”
새하얀 빛의 기둥이 전신을 하늘 끝까지 밀어 올릴 기세였다. 눈부신 광채에 시야도 흐려져 태손의 거구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혼비백산하여 사지를 휘저었다. 그러나 몸은 점점 위로만 떠올랐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살려 주세요! 태손 마마! 마마!”
“채운아! 분홍아!”
“아앗! 아버지! 어머니!”
“분홍아! 네가 보이지 않는다. 분홍아!”
“마마아!”
“분홍아아!”
급한 나머지 아명을 부르짖는 정혼자의 고함이 점점 멀어졌다. 저도 목 놓아 상대를 부르는데 어쩐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목숨줄처럼 쥔 꽃의 나비 같은 이파리가 아우성쳤다.
제가 정인을 밀어내서 이렇게 된 것일까. 감히 황태손을 피해 도망간 덕에 그래서 황제의 꽃이 벌을 주는 것일까.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눈시울이 젖고 이내 눈물이 퐁퐁 솟아났다. 작은 물방울은 아래로 떨어지긴커녕 위로 치솟았다. 분홍이의 몸과 함께.
마마! 태손 마마아아!
목이 터지라고 절규하건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윽고 모든 것이 새하얀 빛 사이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