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낯선 이국의 달은 서슬 퍼런 파란색이었다.
엄습하는 냉기는 다만 돌바닥에서부터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무치는 외로움에 꽝꽝 얼어붙은 심부에서 시작되었다. 멍든 무릎을 그러모으고 곱은 손가락을 억지로 펴 문질러도 쉬이 온기를 찾을 수 없는 이유였다.
사방이 단단한 절벽이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고요한 냉궁은 유일하게 살아있는 것에게 얼른 죽으라고 싸늘하게 종용했다.
“흑.”
눈가가 말라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연약하게 흐느낄 뿐이었다.
“우리 어여쁜 분홍이.”
눈을 감으면 다정한 눈길과 부드러운 부름이 떠오른다. 이어 자상하게 토닥이는 손길과 하늘까지 훌쩍 안아 드는 단단한 팔의 기억이 시린 가슴을 더 시리게 했다.
“우리 아가. 오늘은 아버지랑 놀까?”
묵묵하고 엄하신 아버지는 어린 막내에게만은 유달리 자상하셨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계시면서도 무릎을 간신히 넘는 분홍이에게만은 수시로 무릎을 꿇고 눈을 낮추셨다. 버릇없이 두 팔을 쩍 벌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함빡 웃으시며 분홍이를 번쩍 안으셨다. 아버지에게 안겨 뒤를 돌아보면 큰엄마와 엄마가 웃으시곤 꽃 같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따라오셨다. 하하호호 웃음이 번지는 고향은 어디 즈음에 있을꼬?
애달픈 기억을 되살리기 무섭게 서리 낀 북풍이 몰아닥쳤다. 느닷없이 나타난 흰 천룡을 타고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다시 푹 꺼진 자리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도깨비 세상이었다.
놀란 가슴에 이국의 공기가 차고 빙글빙글 도는 하늘에선 서리 같은 별이 뚝뚝 떨어질 때.
그가 나타났다.
밤을 물리치는 빛나는 태양을 투구처럼 쓰고, 혈향을 뿌리면서 나타난 자.
묵직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철컥철컥 쇳소리가 나고 널찍한 어깨에 붉은 피를 망토처럼 두른 자.
물먹은 별이 숨을 죽이고 살랑이던 바람이 기겁하며 물러날 때, 분홍이는 저를 노려보는 맹수를 마주했다.
깎아지른 콧날에 작두 같은 턱. 딱딱하게 다물린 입매는 마치 저승사자 같았다. 아니, 아니. 저승사자가 아니었다. 그가 뿜은 기운은 고작 사자(使者)가 아니라 사자(獅子)였다. 원래는 희었을 거라 생각되는 짙은 옷과 창백한 낯은 백호 같기도 했다.
투명한 청색 눈이 분홍이를 훑는 순간, 분홍이는 나찰과 악귀를 다스리는 북부의 왕을 떠올렸다. 무엇의 우두머리인지 몰라도 틀림없는 우두머리였다.
밤 그늘도 가라지 못한 새파란 청옥 한 쌍이 서서히 다가왔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눈을 멍하게 바라보던 분홍이는 그것이 순수한 청옥이 아니라 금쪽이 알알이 박힌, 청금석임을 알았다. 귀한 보석 자위에는 혼백을 빼앗긴 인간이 들어있었다.
이다지도 늠름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가. 필경 하늘에 계신 상제(上帝)를 모시는 천인이 틀림없었다. 혹은 상제의 핏줄일지도. 한낱 인간으로서 용안을 뵙는 것도 송구한, 그런 귀한 분임이 분명했다.
달달 떨리는 무릎을 세워 그에게 예를 표하고 저를 밝혔다. 그리고 제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금은화를 내밀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천인이 입꼬리를 말았다.
아.
내장이 쑥 꺼졌다가 다시 치솟았다. 자잘한 소름이 돋다가 이내 뺨에 열꽃이 피었다. 심부가 괜히 쿵쿵 요란하게 울렸다. 천인은 손을 뻗어 금은화 꽃대를 잡았다. 손이 스쳤다. 웅덩이에 빠진 수레바퀴처럼 심장이 덜컥거렸다.
쿵쿵.
천인의 입꼬리가 점점 말리더니 이내 맹호의 엄니 같은 흰 이가 드러났다. 갑자기 사위가 얼어붙었다. 동시에 천인에게서 맹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벌써 한참 전 일이었다.
어쩌다 이국의 냉궁에 갇히게 되었을까. 분명히 행복했는데. 분명히 웃었는데.
무릎에 마른 뺨을 비비면서 잠들어 보려고 해도 사방에서 몰아치는 냉기는 분홍이를 매섭게 깨웠다.
어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무섭고 싫은 일을 내내 기억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