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장. 그렇게 다시 둥지를 틀었다. (25/25)

25장. 그렇게 다시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오래전에 그랬듯이 서로를 바라보고 누웠다.

문득 아스틴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은 오래전에 죽었고, 이건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건 그토록 자신이 바랐던 꿈이 아닐까.

새삼 자신을 보고 웃고 있는 길리어드의 얼굴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스틴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행복하고 감사하고 즐거웠다.

물끄러미 마주하고 있던 길리어드가 입술을 조금 내밀더니 말했다.

“이번만 용서해 주겠소. 다음엔 용서 같은 거 안 해. 나도 똑같이 할 거야.”

아스틴은 고개를 숙여서는 살며시 길리어드의 귓가를 물었다가 놓았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길리어드, 시간이 허락하는 한 당신과 함께 있을게요. 그리고 날 아직도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난 사실, 당신이 나를 그렇게까지 기다릴 거라고 믿지는 않았는데.”

길리어드가 대답 대신 천천히 입술을 맞추어 왔다. 이윽고 침대의 장막을 쳤다.

주변이 햇살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셔츠를 벗은 후 아스틴의 원피스를 풀어 내렸다.

길고 탄탄한 팔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조금은 강하고 부드럽게.

이윽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과 뺨, 코에 닿았다.

참 달콤하고 익숙한 입술이었다.

“길리어드…….”

아스틴의 부름에 길리어드가 입술을 열었다. 무어라고 하려다가 다시금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입술은 턱 끝에서 천천히 맴돌다 쇄골과 가슴과 유두로 이어졌다.

슬며시 깨무는 입맞춤에 아스틴은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그녀는 길리어드의 몸을 껴안고는 천천히 귓가를 혀로 핥아 내렸다. 조심스레 귓바퀴를 핥다가 깨물었다. 그 행동에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길리어드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윽고 천천히 다리를 벌리고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맞추었다.

한때는 그에게 자신의 허벅지 아래 고개를 숙이면 안 된다고 했던 때가 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이곳에선 그들은 한 사람이고 한 남자였고 한 여자였고 부부였으니까.

실컷 그녀의 다리 사이에 입술을 맞추며 핥아 내리던 길리어드가 천천히 허리를 넣더니 풀썩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박았다.

잠시 당혹해하던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손을 잡으며 다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

그 무렵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길리어드가 중얼거리듯 말을 토해 냈다.

“-내가 미친놈이 된 것 같아.”

“왜요?”

“…다들 그렇게 생각할걸. 당신이 정말 살아 있는 건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

아스틴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좀 더 확실히 실험해 봐요.”

은근하면서도 색기 가득한 목소리가 길리어드의 귀를 울렸다.

그렇게 격렬한 허리의 움직임이 시작되었고, 아스틴은 몸을 파르르 떨면서 역동적이고 거칠기 짝이 없는 움직임을 느꼈다.

나지막하고 단조로운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긋하고 부드럽고 천천히 시작되어 그녀의 배 속을 아주 뜨겁고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그렇게 부지런히 이어지던 거친 움직임의 끝에, 내부에 파고들고 있던 기둥이 꿈틀꿈틀 움직였다.

그녀는 다리 사이로 주륵 흘러내리는 액질의 느낌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길리어드는 사정을 마무리하고도 그녀를 껴안고 있었다.

무언가에 얼어버린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모습에, 아스틴은 이번에는 자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허리를 슬며시 밀어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지금은 그라는 존재를 소유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17년이다. 17년.

그들의 인생이 500년을 살아간다고 해서 1년의 세월이 하찮은 것은 아니었다.

100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4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듯이.

17년. 자신을 이렇게까지 사랑하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건 분명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스틴은 슬며시 그의 입술에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길리어드, 우린 아직, 부부죠? 난 더는 대공이 아니지만-”

“당연한 거 아닌가. 당신은 뭐라고 해도 내 아내야.”

아스틴은 쪽 그의 이마에 한번 입술을 맞추며 살며시 그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두툼한 근육을 쓸어 넘기듯 매만지다가, 손가락으로 살며시 유두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움직임에 길리어드의 굵은 눈썹이 조금씩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유두와 장골의 가운데 부분이 딱딱해지더니 다리 사이가 다시금 우람하게 일어났다.

동시에 아스틴은 그의 귓가를 살며시 깨물고는 기둥을 자신의 다리 사이로 집어넣었다.

그는 아찔해졌다.

완전히 갇히고 말았다. 그녀라는 존재에게. 그것은 지독한 감옥이 따로 없었다.

문제는, 그 감옥이 싫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그는 영원히 그녀에게 사로잡히고 싶었다.

그것이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은 아니라 해도, 지금 순간만큼은.

* * *

아스틴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그로부터도 몇 년 뒤의 일이다. 그즈음에는 펠로데에 있는 몇몇 가신들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뜨거운 여름, 마티아스가 직접 그녀를 만나러 왔지만, 아스틴은 그를 끌어안고 다독여 주는 것 말고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스칼라이에게 있는 딸에게도 그저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묻기만 했을 뿐이었다.

이후에도 그녀는 되도록 펠로데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미 펠로데는 자신의 품을 떠난 곳이었다.

어차피 돌아가면 자문을 해 달라는 이유로 시시콜콜한 잡일에 시달려야 할 테니 대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로 한 것이었다.

그녀는 아들이 업무에 완전히 적응하여 영지를 다스리는데 모자라는 게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렇게 아스틴은 자신의 평화를 찾아갔다. 어떻게 보면, 그런 자유와 평화는 그녀에게는 참 처음 가져 보는 것이었다.


 

황금빛 물결처럼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쿨쿨 자고 있던 아스틴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에 그제야 일어났다.

새벽 사냥에 나갔던 길리어드가 돌아올 무렵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올리며 콘솔 옆에 놓인 거울을 쳐다보았다.

다른 모든 부분은 예전과 마찬가지였지만, 어째서인지 하얗게 변해 버린 머리카락만큼은 원래의 되돌릴 수 없었다. 새로 자라는 머리카락도 검은색이었던 것이라,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녀는 무직한 몸을 일으켜 대충 옷을 갈아입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정원에 나섰을 때, 길리어드가 어느새 마구간 앞으로 부케를 데려가고 있었다.

부케가 구유에서 물을 마시는 동안, 길리어드는 근처에 있는 펌프에서 물을 퍼 올리고 등목을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아스틴은 대신 바가지를 들고 등에 물을 부어 주었는데, 살며시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길리어드가 일어나더니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스레 입술을 맞추는 행동에 아스틴도 그의 입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물론, 그렇게 혈기 넘치는 애정 행각이 두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노르인의 기준으로 100세도 살지 않은 그들은, 아직 한참 혈기 왕성할 때였으니까.

길리어드의 입맞춤이 목으로 이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아스틴은 느껴지는 시선에 희미하게 흘리고 있던 웃음을 가라앉히고는 고개를 돌렸다.

테오도르가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다.

동시에 길리어드의 얼굴도 굳었다.

아스틴은 두 사람에게서 우선은 한 발자국 떨어졌다.

그리고 테오도르를 흘끗 쳐다보았다.

길리어드로부터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다. 그녀도 그의 고민을 이해했다.

아이가 자신의 목표를 찾지 못해 아버지를 과하게 따라다니고 있는 건 다소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테오도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던 만큼 섣불리 입을 댈 수가 없는 처지였다.

더더욱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부모로서의 역할을 해 준 것이 별로 없었으니, 마음이 보다 미안했다.

그렇다고 길리어드에게 쉽게 말할 수도 없었다. 낳은 정으로 인한 본능의 끌림만큼이나 기른 정이 가지는 고뇌와 걱정은 쉽게 입을 댈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아스틴은 길리어드가 테오도르를 가르치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느 새삼 두 사람을 가만히 비교해 보았다. 테오도르는 보면 볼수록 길리어드와 참 닮았다.

시원하게 넓은 이마와 청람색 눈동자, 스칼라이인 특유의 날렵하면서도 뚜렷한 이목구비와 거대한 체구. 아무래도 자신의 막내아들은, 영락없이 청년 시절의 길리어드였다.

두 사람은 요즘 어떤 문제로 다투고 있었다.

듀랜트에게서 듣기로는 그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테오도르가 아버지에게 반항했던 것이다.

아스틴은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듀랜트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간의 테오도르는 만일 길리어드가 불꽃 사이를 걸어 들어가라고 한다면 말없이 따를 그런 아들이었다면서 말이다.

사건은 테오도르가 아버지의 짐을 정리하다 발견한 어떤 물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바로, 화룡의 알이었다.

그것은 길리어드가 언젠가 남부 출신의 상인에게서 사들인 물건이라고 했다.

어느 사냥꾼 무리가 지하 깊숙한 곳에서 깊이 파묻혀 있던 용의 알 무더기를 발견했고, 그중에서 아직 살아 있는 알을 상인들에게 판매한 것이다.

길리어드는 그것을 사들여서는 부화시키지 않고 소유하고 있었는데, 펠로데를 떠나올 때 아버지의 짐에서 알을 발견한 테오도르가 그것에 관심을 보였던지 알을 가지고 가서 부화시켜 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허튼소리 하지 마라. 테오도르.’

‘그럼 아버지는 왜 이 알을 가지고 계시는 건데요?’

길리어드는 이유를 말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너한테 주려고 했던 건 아니야. 당장 돌려놔.’

알을 당장 내놓으라는 길리어드의 명령에도 테오도르는 그것을 숨긴 채 듣지를 않았다.

나중에는 어디에서 잃어버린 것 같다며 모르쇠로 대꾸했는데, 알고 보니 집안의 창고에서 알을 부화시키려 준비하고 있었다.

부화를 위한 도구와 지식을 얻기 위해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엔우드를 떠나 먼 제국의 수도까지 다녀왔는데, 그 때문에 길리어드는 결국 폭발한 것이다.

한술 더 떠 테오도르는 드래곤 라이더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해 왔다.

그 말이 폭발한 불꽃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그렇게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아스틴은 두 사람의 입장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당대 용족을 다루거나 조련하는 직업군은 귀족들의 영역이 아니었다.

심지어 용사냥꾼을 선조로 두고 있는 아노르인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용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짐승이었고, 하늘에서는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을 시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그런 일들은 매우 위험한 직업에 속했다. 그래서 기수나 조련사와 같은 직업은 언제까지나 하층민들이나 기술자들의 영역으로 치부되었다.

게다가 길리어드는 아들이 드래곤과 어울린다는 사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스칼라이인인 남편은 용이라면 기본적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아노르인 자체가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특히 그의 과거를 생각해 보면, 좋아할 수가 없는 존재일 테다.

문제는 테오도르가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사실 다툼에서 테오도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결코 아버지를 이길 수가 없었다.

결국 잔뜩 겁에 질린 테오도르는 용의 알을 안고는 눈시울을 붉힌 채 저택 밖으로 뛰쳐나갔던 것이다.

그 때문에 아스틴은 아들을 찾으러 종일 저택 주변을 돌아다녀야 했다.

그렇게 테오도르를 발견한 장소는 정원 뒤쪽에 있는 창고였다. 예의 발소리도 없이 나타난 아스틴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어, 어머니.”

“왜 여기 숨어 있니.”

아들은 입술을 우물거릴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며 그녀를 창고의 구석으로 안내했다.

구석에 놓인 튼튼한 철제 상자에, 지푸라기가 깔려 있었고 전신이 하얀 비늘로 뒤덮인 드래곤이 겁에 질린 채 아스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비늘이 굳지 않아 연약한 내피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길리어드의 말대로 살짝 찔리기만 해도 치명상을 입는 상태였다.

쭈그려 앉은 채 물끄러미 용을 내려다보던 아스틴은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그래, 이 녀석을 데리고 뭘 하려고?”

“날 수 있을 정도로 자라면, 이 녀석과 함께 북대륙으로 여행을 가고 싶어요.”

“북대륙?”

“네, 어머니, 7시대의 아노르인 군주들은 드래곤을 완전히 다스릴 줄 알았대요. 어떤 사람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왔고요.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고 있지만, 전 이 녀석을 데리고 여행을 가고 싶어요.”

아스틴은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아이들이란, 언제나 내키지 않는 방식으로 독립을 하곤 한다.

물론, 독립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의미였지만.

그녀는 새삼 낯설면서도, 씁쓸해졌다.

낯설기 그지없는 일이었지만, 역시, 그렇다고 이해하지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알에서 깨어난 용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아 테오도르의 몸집보다 열 배는 넘게 성장했다.

그렇게 되자 길리어드는 녀석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마구간 옆에 매어 놓으라 했던 것이다.

녀석의 존재는 에스메랄다 전체의 화젯거리였다.

사람들은 특히 테오도르를 아버지처럼 생각하고 따르는 드래곤의 모습에 더욱 놀랐다.

그렇게 어느 날, 그들 모자가 거대한 솔과 세척용 양잿물로 용의 비늘에 낀 이끼와 먼지를 닦아 주고 있을 무렵이었다.

마치 딱딱한 바위를 닦는 듯한 느낌이라, 아스틴은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몇 차례 닦아야 했다.

그런데, 길리어드는 아까부터 마구간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말없이 그 모습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못마땅하니 투덜거리고만 있는 모습에 아스틴은 결국 입술을 열었다.

“좀 도와주지 그래요?”

“뭐 예쁜 게 있다고.”

사나운 길리어드의 시선에 드래곤이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용인의 존재란 해츨링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이윽고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아버지의 앞으로 향했다.

“아버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아스틴은 드래곤과 함께 두 남자의 다툼을 바라보았다.

드래곤과 여행을 떠나겠다는 말에 길리어드는 마치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역시, 그게 그가 원하는 ‘독립’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테오도르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애타는 표정으로 자신은 괜찮을 거라 아버지를 설득하는 모습이 완전히 독립하려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다툼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는 했지만 그렇게 테오도르의 독립은 확정되고 말았다.

물론 길리어드는 당장 승낙은 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저택의 모든 사람에게 드래곤 라이딩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고 다녔는데 그것은 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가 이해하게 된 것은 몇 개월 후의 일이었다. 수많은 설전과 눈물과 고함과 아스틴의 중재 끝에, 그들은 결국 엔우드를 벗어나 대형 공방이 있는 큰 도시로 나가 드래곤을 위한 안장을 맞추고, 라이딩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문 라이더를 찾기로 했다.

그렇게, 부부는 아들의 독립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 * *

이듬해 가을, 하늘이 유난히 새파랗고 바람이 불지 않는 어느 쾌청한 아침이었다.

그날은, 드디어 테오도르가 엔우드를 떠나는 날이었다.

그즈음 드래곤은 무려 20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체구로 자라났다.

아직 해츨링의 상태를 벗어나지는 못했는데, 아스틴은 아마 테오도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언제까지나 해츨링의 모습일 거라고 생각했다. 용들의 수명은 1만 년이 넘고, 해츨링 시기만 500년에 달하니까.

녀석이 성체가 될 때쯤에는, 아마 테오도르가 죽은 후겠지. 여전히 걱정되는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아스틴은 아들을 믿기로 했다.

그들은 백단나무 숲을 지나 해안가를 따라 북쪽에 있는 높다란 절벽으로 올라갔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던 아스틴은 마지막으로 안을 열어 내부를 확인해 보았다.

다 큰 녀석의 짐을 굳이 챙겨 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제 와 걱정이 되었다.

“굳이 이런 말은 잔소리 같아서 하기 싫은데, 비상약이랑 지도, 나침반은 있지?”

“네.”

“비상 귀환 스크롤은?”

“챙겼어요.”

테오도르가 주머니에서 귀환 스크롤을 빼내어 흔들어 보였다. 아스틴은 마지막으로 테오도르의 차림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이마에 입술을 맞추어 주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드래곤의 안장 위에서 뛰어내렸다. 텐트며 잡다한 물건들이 실린 커다란 트렁크를 실어 준 것이다.

부자는 잠시간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길리어드가 아들을 꽉 안아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편지를 보내라.”

“네, 가장 먼저 도착하는 도시에서 편지를 보낼게요.”

이윽고 테오도르가 돌아섰다. 잠시 드래곤을 올려다보던 그는 이윽고 익숙하게 안장 위로 올라갔다.

그르렁거리는 듯한 숨을 내쉬며 드래곤이 날개를 펼쳤다.

잠시만 있어, 테오도르가 그렇게 말하며 드래곤의 목덜미를 쓸어 주고는 크게 외쳤다.

“어머니, 아버지. 고마웠어요.”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묵묵히 등을 돌리더니 곧바로 하늘을 날아가 버렸다.

두 사람은 아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모습은 조금씩 줄어들었다가 이내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후에도 아스틴은 바라보고 있었다.

괜스레 이제 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째서일까. 사실 저 아이와 함께 한 건 몇 년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씁쓰레한 마음을 다독이며 돌아섰다. 길리어드가 묵묵히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담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살며시 손을 잡았다.

아무튼 정 많은 사람 같으니, 안 그럴 수가 없겠지만 그녀는 그가 느끼고 있을 복잡하기 그지없는 감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녀는 문득 드는 생각에 물었다.

“그런데 길리어드, 걔가 정말 편지를 보낼까요?”

“글쎄, 그래도 매주 보내라고 했으니 적어도 반년에 한 통은 받을 수 있겠지.”

이윽고 그들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절벽을 내려갔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그 고요에서 아스틴은, 금방이라도 자신들이 걷고 있는 절벽이 무너져 내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자신들만의 세상에 남은 느낌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절벽 아래로 길게 펼쳐진 해안가를 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는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습이 마치 수면 위로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파도 거품처럼 아슬아슬해 보였다. 일렁이는 파도가 그녀의 신발을 적셨다가 빠져나갔다.

그 무렵,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길리어드가 잠시 몸을 숙이더니 그녀에게 바닷물을 튀기듯 장난을 쳤다.

아스틴은 눈살을 찌푸렸는데 그 순간 큰 파도가 철썩이더니 두 사람의 몸을 철썩 휘감았다.

그들은 파도에 휩싸이고 말았다.

쫄딱 젖은 모습에 아스틴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길리어드가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익숙한 온기가 그들을 조금씩 달구어 갔다. 동시에, 사랑도 더 진하고 따뜻해졌다.

* * *

두 사람이 엔우드를 떠난 것은 그로부터도 몇 년이 더 흘러서의 일이다.

그들은 펠로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성에 자리를 잡았다.

매주 아스틴에게는 자문을 원하는 편지들이 쏟아졌다. 그녀는 대부분의 편지는 무시했지만, 자신의 조언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는 펜과 종이를 아끼지 않았다.

그날도 스칼라이의 딸아이에게 보낼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멀리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시내로 물건을 사러 나간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녀는 편지를 밀랍으로 봉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홀에서 유모가 아이를 재우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문을 나섰다.

정원의 입구, 아스틴은 근처에 심어진 커다란 자두나무 옆에 서서 조용히 작은 성문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다그닥다그닥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성문을 통과하는 남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을 보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 아스틴은 마주하듯 싱긋 미소를 지었다.

“길리어드, 그거 사 왔어요?"

그 말에 길리어드가 주머니에서 책을 꺼냈다. 푸른 표지에 휘황찬란한 금색 글씨로 자양화가 아로새겨진 책이었다.

“신간이야.”

“구했군요. 다행이다, 나 먼저 보면 안 돼요? 부탁이에요.”

“그건 곤란한데. 첫 장만 봤는데, 내가 빨리 읽고 싶어졌거든.”

“어쩜, 그걸 사 달라고 한 사람은 나였잖아요. 이러기예요?”

“그러면 수고비를 줘요. 그러면, 생각해 볼 테니까.”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조심스레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이제 됐어요?”

“두 배로 줘야지. 아닌가.”

길리어드가 팔에 조금 힘을 주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스틴은 그에 맞추어 천천히 몸을 기울여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삐죽하니 내미는 입술에 마찬가지로 입술을 실룩이던 아스틴은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리며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머금었다.

주변이 고요하게 내리 앉았다. 그렇듯 평화로운 적막 사이로, 까마득히 높다란 하늘에서 검독수리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암컷이 수컷을 부르는 소리였다.

휙, 불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옷소매가 흩날렸다. 마치 날개처럼. 아스틴은 조금 더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런 손짓에 따라 길리어드 또한 조금 더 다정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모습이 마치 둥지 속에서 서로를 보듬고 있는 두 마리의 검독수리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완연한 둥지를 틀었다.

무너지지 않을, 단단하고 튼튼한 둥지를.


 

<검은 날개는 고요히 둥지를 튼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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