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장. 백단나무 숲
다음 날 새벽, 그들 부자는 일찍 일어나 남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떠나기 직전 시리스가 다시 찾아왔다.
“부군, 조심히 가십시오.”
“그래. 고맙네.”
여전히 무언가를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에 길리어드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부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역시 전사인 길리어드에게 마법사들의 존재는 아직도 꺼림칙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사에 바빴고, 시리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자신에게 위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저 넘기기로 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그때부터 무언가가 조금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었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성의 꼭대기에 올라 미스트리스 숲과 억새 평원을 한참 바라보았다.
몇 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중북부 지역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회상에 잠긴 채 한참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를 애써 떨쳐버리려는 듯 고개를 몇 번 젓고는 완전히 등을 돌렸다.
걱정할 것은 없었다. 단장의 직위도 적당한 이에게 넘겼고, 마티아스는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다. 몇 년만 지나면 펠로데는 물론이고 제국 정도는 든든히 지킬 수 있는 강인한 대공이 될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새삼 마음먹은 일이 있었다.
그는 흘끗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는 마차에 실으려고 내놓은 궤를 열어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건 조심해서 옮겨. 안에 부서지기 쉬운 게 있거든.”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궤의 뚜껑을 닫았다. 길리어드는 그 모습을 엄격하게 바라보다가 이만 마부석에 올랐다.
새삼 아들인 테오도르를 좀더 교육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실 길리어드는 테오도르를 말도 못 하게 껴 안고 키웠다. 마티아스와 테레사가 되레 자신들이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그건 이미 창창한 앞날이 정해진 형제들에 비해 괜히 눈치를 보고 자랄까 걱정해서였는데, 그래서 이렇게 철이 없어진 걸지도 몰랐다.
그래서 길리어드는 몇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아들을 독립시키기 위해서 정서적인 방식이든 물질적인 방식이든 채워 주어야 할 것을 채워 줄 생각이었다.
아무튼, 자식놈들 때문에 마음 놓고 죽을 수도 없다니.
그는 낳은 게 죄라는 말의 의미를 이런 식으로 깨닫게 될 줄은 참말로 몰랐다.
그렇게 태양이 서서히 하늘의 중심으로 향할 무렵, 그들도 성을 떠났다.
두 사람은 루셰드 강을 따라 내려갔다.
마지막으로 필리시온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그간 길리어드는 거의 필리시온에 들른 적이 없다.
사실 아내의 장례식이 치러진 지도 몇 년이 지나서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녀의 죽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렵고 아팠으니까.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아내의 관은 평화로우면서도 사뭇 쓸쓸했다. 길리어드는 조심스레 무성한 꽃들을 꺾어 연못으로 흘려보내고는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자주 오지 못해서. 그래도- 조금만 기다려줘요.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아무리 열심히 지껄여 봐도 아내는 답이 없다.
그건 당연한 일인데, 어째서 이렇게 가슴이 아플까. 무어라 입술을 실룩이던 그는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잘못하면 끝끝내 추한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길리어드는 등을 돌렸다.
시선의 끄트머리에 바우키스가 서 있었다.
노파는 아직도 정정했다. 아무튼, 아노르인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몇 마디의 짤막한 위로를 나누었다.
바우키스는 몇 마디의 위로를 해 준 후, 길리어드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어 주었다.
“조심히 가게. 그리고, 건강해야 해. 그 애도 바라는 일일 테니까.”
“고맙습니다.”
길리어드는 더는 필리시온을 바라보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그들은 루셰드 강을 지나 구 샨시르의 잔재를 거쳐 갔다.
백색 산맥으로 향하는 골짜기를 지나, 남쪽으로 뻗어 있는 키르서스 산맥에 다다를 무렵, 필레몬이 보낸 길잡이 정찰대들과 만날 수 있었다.
엔우드 가문이 통치하는 요새 도시는 깊은 산 속에 숨어 있어 보통의 여행자들이 찾는 데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래서 길잡이들을 따라야 했다.
그들은 태양이 저물기 전에 간단한 요기를 마치고 말을 달렸다. 당시 밤의 여행은 위험했지만, 곧바로 키르서스를 넘었다.
겨울이 이어지던 때와는 달리 남부의 숲은 온통 기묘한 모양의 활엽수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키르서스 산의 중턱을 지났다.
한때 길리어드가 직접 끄집어내어 목을 쳤던 카인더스트의 사체는 이제 썩어 거대한 터널을 이루고 있었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내려갈 무렵이었다.
야트막한 산들이 굽이굽이 마치 뱀의 기다란 허리처럼 능선을 형성하고 있는 장소가 나타났다.
기묘하게도, 길목의 곳곳에 마을이 있었다.
사실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도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한 규모였는데, 대부분이 상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능선을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산도적과 마물들이 들끓는 숲이 나타난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마을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쉼터였다.
용병들도 없이 밤중 필드를 넘겠다는 말에 상인들이 하나같이 걱정했지만, 길리어드는 고작 산도적 따위 때문에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서 짐을 풀고 싶었다.
그들은 그렇게 숲으로 향했다.
도적들이 나타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에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이 있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오랜만에 칼을 꺼냈다. 길잡이와 아들에게 잠시 기다리라 세워 두고 근처의 산채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죽이고 박살 내고 불을 지르고 태우고 갈아서 아주 처참한 꼴을 내주었다.
그렇게 본보기를 보여 주자 소문이 돌았는지 나머지의 길은 아주 평온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한참 지났을 무렵이었다. 표면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는 거대한 석산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하늘을 찌를 듯 거대한 석산의 가운데로 은백색 폭포수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폭포 안쪽으로 나 있는 터널을 지나자 테오도르가 와, 감탄을 토해 냈다.
마치 지면에서 솟아오른 듯, 갑자기 거대한 도시의 전경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엔우드의 요새 도시, ‘에스메랄다’에 도착했다.
도시는 전반적으로 하얀 설산을 깎아 만든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도시의 끄트머리로 이어져 있는 커다란 길의 좌우로 은백색 꽃을 피우는 백색 나무들이 줄지어서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한 백색 석벽의 건물들이 햇빛을 받자 희미한 연녹색으로 빛났다.
어디선가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 * *
그의 저택은 에스메랄다의 남쪽, 해안가를 내려다보는 산등성이에 마련되었다.
원로 필레몬이 다스리는 영역의 근처였는데, 바로 아래에 백단나무 숲과 달의 바다로 이어지는 해변이 있어 경치가 아주 좋았다.
딱, 환자가 요양하기에 적합한 저택이었다.
길리어드는 며칠간 저택에서 짐을 정리했다.
하인들이 미리 저택을 깨끗이 정돈해 두었지만, 그래도 개인적인 물건들은 그가 직접 정리 했다.
며칠째 테오도르는 자신의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건지 궁금했으면서도 그는 다 큰 아들놈 신경 쓸 필요가 뭐가 있겠나 싶었다.
그렇게 정리를 끝내고 난 후, 그는 드디어 도시를 둘러볼 수 있었다.
요새 도시 에스메랄다는 도시 전체가 고대 아노르인들이 남긴 유적이었다. 펠로데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석벽 자체를 깎아 만들어 파괴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를 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는 대륙 사람들에게 있어 성역으로 지정되고 있었는데, 반대로 엔우드의 사람들도 대륙의 어떤 분쟁에도 참견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바퀴 도시를 돌아본 후 그는 마침내, 백단나무 숲으로 향했다.
백단나무는 몸체의 전신이 하얗게 빛난다.
나무의 색깔 자체가 마치 빛의 기둥처럼 하얀 색깔이었다. 이파리는 금색이었고 꽃은 푸른빛을 띠었는데, 작은 것은 60미터, 큰 것은 100미터에 달하는 거목이었다.
그런 나무 수천 그루가 해안가 인근에 광활하게 모여 있었다. 밤이면 나무들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낮이면 태양 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빛을 냈다.
그렇듯 대지 전체를 눈부시게 빛내는 모습에 어째서인지 자연의 웅장함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숲을 둘러보며 천천히 가로질렀다.
사각사각 은색 나뭇잎을 밟으며 걷다 보니 스산하게 바람 부는 소리에 기분이 좋다가도 멀리서 철썩이는 해안가에 소리의 어째서인지 마음이 설레고는 했다.
에스메랄다의 남쪽에 있는 바다는 아노르인들 사이에서 달의 바다라고 불렀다.
오래전 1시대, 모든 아노르인들은 저 바다를 통해서 이 대륙으로 왔다고 전해졌다. 많은 탐험가가 바다의 끝을 구경하기 위해 떠났는데,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그저 달빛만이 비추는 쓸쓸한 에메랄드색 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달의 바다라고 불렀다.
삐이, 어디선가 조용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검독수리의 울음이었다.
문득 그는 언젠가 아내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것은 어머니가 해 준 말이라고 했다. 백단나무 주변으로는 검독수리가 많이 살고 있다. 남부 지역의 검독수리들은 겨울이 되면 백단나무 숲에서 번식한다.
나무의 꼭대기에 둥지를 트는데,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비로소 둥지가 완성되고, 나무가 꽃을 피울 때가 되는 시기라고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때쯤이면 친구들과 함께 꽃을 따러 갔다고 했다. 그 잎을 말려 차로 마시고는 했다는데, 평생 그 맛을 잊지 못했다고 전했다.
어째서일까, 묵묵히 걷던 그는 자꾸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길리어드는 근처에 있던 백단나무의 기둥에 등을 기댄 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쓸데없이 푸르러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참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어느덧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다.
안락한 홀의 벽난로에서는 커다란 솥이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있었고 상 가득 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의 끄트머리, 듀랜트가 벽난로가 있는 방향을 향해 연초를 물고 있었다. 길리어드의 부탁에 따라 그의 이삿짐들을 싣고 먼저 도착했던 것이다. 흘끗 길리어드를 올려다본 듀랜트가 고개를 까닥여 왔다.
“이제 오셨습니까. 그래, 이 도시는 어떠신지요?”
“그럭저럭, 평화로운 곳이군.”
듀랜트가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모쪼록, 이제 좀 편하게 쉬십시오. 전하께서는 그럴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어째서인지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길리어드는 한참 듀랜트를 쳐다보았다. 자신과는 달리 듀랜트는 몇 년 전부터 조금씩 노화의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 언젠가는 이 녀석과도 이별해야 하겠지. 그것은 참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길리어드는 새삼 마음 한구석이 무직해졌다.
* * *
다음 날 그는 등나무 바구니를 들고 부케를 몰았다. 이제 중년기에 접어드는 부케는 요즘은 부러 느릿하게 걸었다.
길리어드는 재촉할 수 있었지만, 부러 그것을 내버려 두었다. 녀석도 때로는 여유를 가지고 싶을 때가 있을 테니까.
그는 백단나무의 꽃을 따서 차를 끓일 생각이었다. 차 맛을 그렇게 따지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내의 이야기가 정말일지 궁금해졌다.
문득 그녀를 생각하자 다시금 가슴의 어딘가가 꼬여왔지만, 그는 그런 감정을 어느정도 체념하기로 했다. 아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로 했다. 언젠가는 끝이 날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날에는 그냥 한참 울어 버리자고.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몸도 통증이라는 놈에 어느정도의 내성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사람의 상처라는 것은, 그래, 결국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
그는 부케에서 내려, 근처에 있던 나무의 가지에 손을 뻗었다.
파란색 이파리 하나를 뜯어낼 무렵이었다. 멀리,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섞여, 희미한 노래가 들려왔다.
기사 티머시의 아내가 잠이 들었네
무슨 잠이 그리도 깊은지
아침이 와도, 다음 날 아침이 와도
그다음, 다음 날 아침이 와도 눈을 뜨지 않았지
참 귀에 익은 노래였다. 하지만 적어도 남부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노래였다.
문득, 길리어드는 동향의 사람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자신처럼 스칼라이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이 저주를 걸었다.’
누군가가 용을 잡아 오라 했다네
그래서 티머시는 길을 떠났지
기다리라는 말만 남긴 채
이런 곳에서 스칼라이인을 만나다니, 우연치고는 참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무심코 걸음을 옮겼다.
멀리 은색으로 빛나는 해변가, 아득할 정도로 거대한 연녹색 바다가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파도가 그를 향해 손짓했다.
길리어드는 마치 환영이라도 본 사람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역시, 해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이었다. 근처에 있던 바위 옆, 세차게 철썩이는 연녹색 파도 사이로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큰 키에 홀쭉한 체형, 은백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허리 끝까지 찰랑이는 아노르인이었다. 그녀는 무심히 바다를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길리어드는 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목소리의 주인공이 자신이 아는 사람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저도 모르게 다가가던 길리어드는 순간 드는 생각에 등나무 바구니를 잡은 손에 꾹 힘을 주며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었다.
이윽고 여자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그가 서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다가왔다.
길리어드는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의 그리움에 사무처 미쳐버렸거나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스틴이 이 장소에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녀는 푸르스름한 물빛이 감도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채로, 길고 긴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의 앞을 지나갔다.
백색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발아래에서 부서져 내렸다.
길리어드는 심장이 멎어 버릴 듯 주변이 먹먹해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아스틴이 살아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에 살아 있다면,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런 부질없는 생각은 더는 하지 않기로 다짐했으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한발 한발, 움직이지 않는 발자국을 떼어 내 억지로 걸음을 돌렸다.
그 무렵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 부신 햇살과 함께 백단나무 숲 전체가 녹녹히 젖었다.
* * *
저택에 도착한 길리어드는 떨리는 손으로 푹 젖어 있는 등나무 바구니를 홀의 탁자 위에 얹어 놓고는 침실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었다.
하인이 부산을 떨며 세수할 물과 수건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는 그것을 눈앞에 두고도 침대에 앉아 한동안 충격에 빠져 있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는 침대 옆 콘솔의 서랍을 열고 양피지 조각과 깃펜을 들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바라보다가 내려놓았는데 이런 이야기를 아들이라든가 시리스, 혹은 마르첼이 듣게 된다면 자신이 드디어 돌아 버렸다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동안 맹렬하게 빈 양피지를 쳐다보고 있던 그는 결국 그것을 도로 콘솔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도 갑작스레 밀려드는 감정에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어 침대에 쓰러지듯 털썩 누워 버렸다.
침대 옆 반쯤 열린 자줏빛 벨벳 커튼 사이로 맑은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소나기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둔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웃는 모습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새삼 아내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그녀와는 오래전에 헤어졌지만, 아직도 오늘 아침에 만난 사람처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다란 까만 머리카락, 약간은 창백하지만 하얀 얼굴, 사람의 내면을 부드럽게 응시하는 듯한 연녹색 눈동자. 오뚝한 코, 입술, 하얀 어깨, 손가락의 끝, 허리, 엉덩이, 허벅지, 다리, 그리고 발끝까지, 어느샌가 자신도 모를 말을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던 그는 문득 머릿속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말없이 입술을 깨물고는 시선을 허공으로만 던지고 있었다.
그 무렵, 하인이 카모밀레 차를 가지고 왔다.
입술이 자꾸만 바짝바짝 마른다는 생각에 그는 그것을 마시면서도 도무지 무슨 맛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 봤자, 아무리 부정해 봤자 아내가 죽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는 또 한 번 망연한 기분을 느꼈다.
머릿속은 아니라고,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었지만, 새록새록 떠오르는 아내의 기억에 대한 조각들이 그녀의 죽음을 또다시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었다.
근 이십 년 동안 이렇게 혼란스러운 감정이 있었던가. 꼼짝달싹도 못 하게끔 밧줄에 묶인 느낌이었다.
그건 마치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다.
그래, 환상이야. 그렇겠지. 길리어드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닮은 아노르인 여성을 아내로 착각하는 일이야 흔한 경우였다.
지난 수년간 그래 왔듯이.
그는 천천히 침대에 누웠다.
어째서인지 몸이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자신의 왼쪽 가슴을 쓰다듬어 보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오르고 있었다. 문득 그는, 그토록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죄책감과 후회의 사이에서 편해지고 싶었어졌다.
어쩌면, 이렇게 눈을 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다.
그럴 테다.
그는 감감히 밀려드는 어둠에 자신을 맡겼다.
어째서일까, 아내의 손가락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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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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