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장. 이름 없는 고성에서 (22/25)

22장. 이름 없는 고성에서

시간은 소리도 없이 빠르게 흘러갔다.

17년 후, 어느 가을이었다.

록샌 4세가 제국의 수도를 남서부에 있는 어느 도시로 옮기겠다고 했을 때, 가신들이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던 것은 펠로데 대공이 찬성했기 때문이었다.

선대공의 지시에 따라 북동부의 제후들이 열심히 견제에 나섰지만, 이미 제국은 북서부에서 완전히 세력을 잡은 이방 민족들을 쫓아낼 수는 없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가문이 입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수도를 옮기기로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거래가 있었다. 그녀는 원래의 수도를 펠로데 대공령으로 하사했다.

지금의 펠로데 가문은 거의 황가나 다름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마티아스 펠로데 대공은 권력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제도를 흡수해 펠로데를 안정화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는 군주였다.

동부의 대국 스칼라이가 남쪽과 서쪽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북동부의 제후들이 펄린 백작을 중심으로 권력자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지금, 그는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힘을 유지해 중북부를 완벽하게 규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록샌 4세는 아버지처럼 신중한 성격에 치밀한 군주였다. 그래서 섭정인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남서쪽으로 내려가 어머니의 가문과 선제의 형제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지지 기반을 착실히 다지기로 했다.

그랬기 때문에 두 사람은 부모들이 그랬듯 갈등을 빚지는 않았다.

그렇게 소위 제국은 남제국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를 두고 사람들은 작은 평화의 시대라고 불렀다.

* * *

“여자, 라고요? 아버지께서?”

올해로 32세, 그날의 업무를 막 마무리하고 안채로 들어온 마티아스 펠로데 대공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바로 아내가 꺼낸 이야기 때문이었다.

“난 그냥 그저 그런 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럼- 이야기가 사실이었단 말입니까?”

“네. 저도 직접 확인한 일이에요. 사실 감히 제가 아버님의 개인적인 생활에 대해서 입을 댈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마티아스. 당신은 그분의 아드님이잖아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마치 조금은 나무라듯 목소리를 굳히며 바라보는 시선에,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아내인 샬로메 반타블랙슨은 스칼라이의 공주였다. 말수도 적고,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전형적인 스칼라이 여인이었지만, 안채에서 절대 잡음이 나오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신중한 성격이라 쉬이 이런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

마티아스는 다시금 대화의 주제에 집중했다.

“그거, 참 놀랄 일이군요. 아버지가, 여자를 들이셨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않았다.

선대 대공께서 돌아가신 지도 어언 17년이 흘렀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가 왜 그렇게 빨리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선대의 가신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아직도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추측만 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막내를 낳으면서 얻은 산욕이 깊어 치유가 불가했거나, 혹은 불치의 병에 걸려 돌아가신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듯, 장례식에 참석지 않으셨다.

당시 집안에서는 그런 행동을 두고 가루에서 먼지가 되도록 질타했고 지금까지도 비난하고 있었지만,

물론 당시 길리어드에게 있었던 일은 소수의 가신을 제외하고는 마르첼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도 대체 어째서 그러셨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티아스는 아버지란 사람을 생각해 보면 도저히 그런 질타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조금은 지나칠 만큼.

무릇 사람이 어떤 사람을 너무도 사랑하고 그 상실감을 견뎌내지 못하게 된다면, 차라리 부정하고 도망치고 싶어지는 법이었다. 아무리 강인하고 절제력이 대단한 아버지라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은 있을 테니까..

심지어 아버지는 아직도 어머니를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간간이 하고 계셨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냥 넘기겠지만,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아노르인에게는 단지 그것이 말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티아스는 늘 걱정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 버릴까 말이다. 혹여 자신이 모르는 새, 변사체로 발견되지는 않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아버지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은 아닐 테지만.

그런데. 그런 아버지께서 여자를 들였다니.

섭섭하지만, 기쁜 소식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랍니까?”

“그 성에 심부름을 갔다 온 하인들의 말로는, 머리가 하얀 아노르인이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아노르인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요. 혹시 마티아스, 당신은 알고 계시는가요?”

“글쎄요, 잘은 모르겠군요. 하지만 짐작은 됩니다. 아마 엔우드 출신일 거요.”

“엔우드라면, 남부의 엔우드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그 가문은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집안과도, 반타블랙슨 가문과도 친척이죠. 당신도 알다시피, 내 할머니도 그렇고 스칼라이 선선왕의 국서께서도 그 가문의 사람이었잖아요?”

그제야 샬로메는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마티아스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마티아스는 털썩 소파에 앉아 크라바트를 풀고 하인이 가져다준 찻잔을 집었다.

그래도 아버지에게 연인이라니, 역시 신경은 쓰였다. 물론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이제야 한숨을 좀 돌리고 휴식을 취하고 계셨으니까.

자신이 공작의 업무를 정식으로 수행하기 시작한 건 5년 전의 일이다.

그전까지는 아버지가 대공의 섭정이자 황제의 섭정으로 온갖 일을 도맡아 했었다.

부친은 자제력이 대단했다.

어머니의 사후, 스칼라이에서는 곧바로 고국으로 돌아와 재가하라는 제안을 하였지만, 그는 가문에 남는 길을 선택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아버지라도 혼자서 아이를 넷이나 기른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과 여동생을 비롯하여 갓 태어난 막내와 강제로 떠맡게 된 그놈의 거인족 여자애까지.

아버지는 그 때문에 더욱 고생하셔야 했다. 어머니의 생전에는 감히 수도에 발을 들이지조차 못했던 남서부의 극성맞은 거인 귀족들이, 그분의 사후에는 아버지의 국적을 문제로 들먹이며 시시콜콜 어린 황제를 못살게 들볶으려 했던 것이다.

그들로부터 황제를 지켜 주었던 사람은 아버지였다. 유약한 어린 황제가 욕심 많은 삼촌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아버지는 그녀가 군주의 능력을 갖출 수 있게끔 엄격히 교육했다. 그야말로 스칼라이식 교육 방법으로 말이다.

겁쟁이였던 록샌 4세는 지금은 이곳을 떠나 남서부로 향했지만, 그래도 그곳의 귀족들에게 휘둘리거나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노고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과는 앙숙이었지만, 아버지의 말만은 존중했다.

심지어 아버지는 대공가 섭정의 집무에 들 때도 어머니의 자리를 비워 놓고 그 옆에 앉아 언제까지나 자신의 직위와 본분을 잊지 않았다.

스칼라이에서 오히려 자국 왕가를 우습게 여긴다고 항의를 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사실상 제국과 펠로데를 동시에 통치하는 일이라 아버지는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놀아줄 때를 제외하면 거의 쉴 수가 없었다. 업무가 과중해서 종종 병을 앓으셨을 정도였다.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마티아스는 아내에게 말했다.

“뭐, 그분도 이제는 좀 본인의 삶을 사셔야 하니까요.”

“그래요. 그거야 제가 입을 댈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아버님께서 계속 북쪽 안채를 비우고 계시니 걱정되니까 그렇죠. 그 정도 되는 분이 하필이면 그런 오래된 성에서 머무르시다니. 가문의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고요. 혹시 제가 불편해서 그러시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마티아스, 당신이 바쁘다는 건 알겠지만, 시간을 내서라도 함께 찾아가 봐요. 제가 듣기엔 가신들이 찾아가 설득해도 만나주질 않으신다는데, 당신의 말이라면 들어주실 테니까.”

“알겠어요. 마침 주말에 시간도 있으니까, 그렇게 합시다.”

마티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의 걱정이 이해되었다. 아버지의 현재 공식적인 직위는 펠로데의 기사단장이었다.

하지만 벌써 몇 개월 전부터는 휴가를 내고 계셨는데, 기사들의 사이에서 아버지가 단장의 직위를 내려놓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순한 휴가라면 모르지만, 마티아스는 그런 소문이 마음에 걸렸다.

이 집안에서 아버지의 위치를 생각해 볼 때,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 * *

미스트리스 삼림의 동쪽, 이름 없는 고성은 그 이름만큼 몇 개월째 인기척 없이 고요했다. 애초에 펠로데 가문의 별장으로 사용되는 장소라 일반인들의 출입이 거의 통제되는 곳이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관리하는 하인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은 특별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 뒤로 뜨거운 햇살이 떨어지고 있었다.

고성의 안뜰, 길리어드는 두꺼운 도끼를 들고 있었다. 약간 색이 바랜 셔츠와 사냥꾼들이 입는 가죽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장작을 나무 밑동에 올려놓고 툭 하고 내리치는 얼굴이 몹시 무표정하고 적막했다.

정돈되지 않아 부스스한 머리카락과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는 낯빛, 그 점을 제외한다면 큰 키와 거대한 체구, 튼튼한 육체는 과거와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과거보다도 한층 섬세한 선을 그리고 있어,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움직임만큼은 마치 힘이 빠진 사람처럼 매우 지쳐 보였다.

한때 누군가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은근하게 바라보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정신적 갈등과 육체의 고통에 찌들어 있는 듯, 초췌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펠로데 대공과 제국의 황제를 길러낸 대륙 유일무이의 권력자라고 보기에는 사뭇 무리가 있었다.

그는 쪼개진 장작의 끄트머리를 잡고 근처의 모닥불에 던져 놓은 후, 다른 장작을 하나 더 집었다.

다시 도끼를 잡을 무렵,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성문 밖으로 한 청년이 말을 끌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굵직한 말안장 뒤로 사슴 한 마리가 얹혀 있었다.

길리어드는 묵묵히 장작을 쪼개며 입술을 열었다.

“어서 오렴. 사냥은 어땠지?”

“보시다시피, 실한 놈으로 잡았어요.”

청년이 사슴을 내리며 말했다.

그가 마구간으로 말을 가져가는 동안 길리어드는 묵묵히 사슴을 해체했다.

어느새 청년이 다가와 그것을 도왔다.


 

길리어드는 요즘 이름 없는 고성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는 딱히 기간을 계산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몇 개월은 되지 않았나 싶었다.

어쨌든 합법적인 휴가를 쓴 거였기 때문에 문제될 일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부재 기간이 길어지자 온갖 소문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가장 흔한 소문은 마티아스가 그를 홀대해서 자신이 기분이 상해 성을 떠났다는 말이었다.

길리어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마음대로 퍼져 나갈 만큼 성은 평화로웠으니까.

자신을 대신해서 업무를 보고 있는 듀랜트가 아들을 위해서라도 신경을 좀 쓰는 게 어떻겠냐는 연락을 보내왔지만, 길리어드는 되레 방임했다.

오히려 이제야 한숨이 놓였다.

아들은 자신의 역할에 매우 충실하여 좀처럼 실수하는 법이 없는 군주가 되었다. 그러니 아버지인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조언한답시고 끼어들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젊은 대공비는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이었다. 애초부터 그는 며느리에게 잔소리따위는 할 생각도 없었지만, 겨우 안심하고 안채를 물려줄 수 있었다.

사실 그즈음에는, 안채에서 완전히 빠져 주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이다.

젊은 신혼부부가 사랑을 꽃피워야 할 공간에, 시아버지가 자리하고 있으면 그것만큼 눈치가 보이는 일도 없을 테니까.

사실 그래서 안채를 나와 있는 거였다.

사슴 고기가 다 구워질 무렵, 성안에서 하얀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타나 그들에게 물었다.

“빨리도 잡아 왔군.”

그녀는 바로 성소의 수호자인 엔우드의 필레몬이었다.

필레몬 타르갈 엔우드.

엔우드 가를 다스리는 12명의 원로 중 하나이자, 성소를 수호해 온 가문의 주인.

오래전 화룡으로부터 가족을 잃은 후 그녀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물들어 버렸는데, 사람들은 그래서 그녀를 백색 기사라고 불렀다.

성소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길리어드를 데리고 떠났던, 바로 그 기사였다.

“다 구웠으면 들어오게. 스튜는 다 끓었으니.”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다 되어갑니다.”

길리어드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묵묵히 사슴 고기를 요리했다.

마르첼이 그렇게 형편없다고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지금 그의 솜씨는 나쁘지 않았다.

필레몬이 이미 점심 준비를 마무리해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구워진 사슴 고기를 접시에 올려놓고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다소 정적인 침묵이 이어졌다.

필레몬에게 있어 이러한 식사는 다소 소탈하다 못해 처참해 보였다.

지금 길리어드가 지닌 대륙에서의 입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사실 펠로데의 선대공 부군이라면 관련된 모든 것이 성역화될 정도로 엄청난 권력자라,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 무렵 맞은편의 청년과 시선이 마주했다.

청년의 얼굴에 순간 긴장하는 시선이 맴돌았다. 의외라는 듯 그 모습을 마주하던 청년이 입술을 열었다.

“저, 필레몬 경, 더 드시겠습니까?”

“아니.”

청년은 까만 스웨터에 조금은 헐렁한 가죽바지를 입고 있었다. 체구는 길리어드와 딱히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눈매만큼은 좀 더 날카로웠다.

이름은 테오도르라고 하는데 길리어드와 아스틴의 세 번째 아들이었다.

아스틴은 어째서인지 테오도르를 낳은 그해에 자신의 장례식을 치렀던 것이다.

어느덧 식사를 마무리한 청년은 잠시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듯하다가 포크를 내려놓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길리어드는 묵묵히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벽난로 근처에서 연초를 피우며, 필레몬이 말했다.

“확실히 아버지를 많이 닮았군.”

“저도 종종 놀라곤 합니다. 제 어린 시절을 그대로 빼다 박았어요. 아마 아내가 살아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건너들은 이야기론 자네가 저 아일 어렵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사실 아니겠지. 공작은 저 애 때문에 그렇게 가 버린게 아니니까.”

“설마요.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너무 아꼈던 게 문제겠죠. 성인이 된 지도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아이들은 때가 되면 독립하는 법이야. 너무 안달 내지 말게.”

“그래야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군요. 괜히 아내에게 미안해져서요.”

“그놈의 아내 소리. 그것도 병이야.”

필레몬이 질린다는 듯 말했다.

길리어드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이 틀린 것이 없었으니까. 확실히 그는 점점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으로 인해 평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는 그로 인한 불안이 부쩍 심해졌다.

그럴수록 필레몬은 꾸준히 그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길리어드도 의아했다. 엔우드의 백색 기사가 왜 자신을 찾아오는 것인지.

훗날 시리스로부터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다름 아닌 아내의 부탁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떠나고 난 후, 남편을 정신적으로 지탱해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염려했다고 했다.

한없이 어른스럽고 강인하기 그지없던 남편의 정신이 그렇게 불안하게 무너지며 아파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럴 때는 억지로라도 다독여 주고 지탱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치 부모처럼.

원래라면 녹스턴이 제격이었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바우키스는 필리시온을 지켜야 하는 지금, 그녀는 그에게 객관적으로 믿을 만한 어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선택한 사람이 필레몬이었다.

엔우드 가문은 길리어드도, 아스틴도 친척의 연을 맺고 있었다. 원래는 친척 중에서 한 명을 정하려고 했지만, 원로급이나 되는 필레몬 경이 그 일을 맡아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필레몬이 처음 길리어드를 보았을 때, 그의 아버지인 필리포스의 이름을 불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길리어드는 그녀에게 있어 먼 조카였다.

비단 가족이라는 점을 떠나서, 필레몬은 부부의 일에 책임감을 느꼈다.

사실 필레몬은 아스틴 펠로데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희생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끝끝내 자신의 가족을,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지킨 것이다. 필레몬은 그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적당히 하게. 살 사람은 살아야지.”

필레몬이 다소 엄격하게 말했다.

길리어드는 필레몬의 날카로운 시선을 이해했다.

그녀가 당했던 일에 비하면, 그리고 지금껏 자신이 저지른 일에 비하면, 자신의 상처 같은 것은 참 사소한 일이었다.

화룡 수티하는 칼리파 샨시르의 도움을 받아 봉인의 일부를 풀어내고 난 후, 성소 아래의 도시로 내려가 그녀의 남편과 아들, 손자와 손녀들까지 모두 가혹하게 고문해서 죽였다고 했다. 심지어는 손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잘라내면서 할머니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고 하는데, 지독하게도 필레몬은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을 찾아내는 순간, 용은 완전히 풀려나버렸을 테니 말이다.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은 충격으로 희게 물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필레몬은 그에게 강해지라고 말하고 있는 거였다.

길리어드도 자신이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견뎌내야 하는 일이었다.

소실의 아픔이란, 다소 진부할 정도로 흔한 일이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럭저럭 견뎌 내고 살아가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는 아버지이자 부군으로서 더욱 진중하게, 성숙하게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어 버리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슬금슬금 그의 목을 졸라 왔다.

자꾸만 아내와 마지막이 떠올랐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을 조금 더 편하게 보내 주지 못했던 자신이, 끝끝내 함께 있어 주지 않았던 자신의 행동이 그는 너무도 후회되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때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금 밀려 나오는 슬픔을 묵묵히 참아 넘기면서 물었다.

“그건 그렇고 필레몬,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래. 난 대체 자네가 왜 이 땅을 벗어나 우리들의 도시로 오겠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만일 와서 지내겠다면 당연히 환영하겠네. 그런데 이유가 뭔가.”

“아내가, 백단나무 숲에 꼭 가 달라고 하더군요.”

필레몬이 의외라는 듯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 선대 대공이 그랬단 말인가?”

“예. 사실 죽기 전에 같이 가 보자고 약속했는데- 아내가 그렇게 떠나는 바람에. 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저라도 가 보려고 합니다. 이제는 시간이 좀 생겼고, 저도 당분간은 제국이나 스칼라이와는 관련 없는 곳에서 쉬어야겠습니다.”

“원, 몇 살이나 살았다고. 자넨 아노르인으로 치자면 아직 어린애야. 일단은- 알겠네. 그러면 올 때가 되면 연락하게나. 마중을 보낼 테니까.”

“고맙습니다. 아무튼, 아들 애가 저를 쉽게 놓아주어야 할 텐데요.”


 

필레몬은 그날 오후에 떠났다.

기사는 바람 같은 존재였다. 연락도 없이 불쑥 나타났다가, 또 휙 떠나 버리고는 했다.

길리어드는 성문 앞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에야 돌아섰다.

그래도, 배울 곳이 많은 군주였다. 매번 나타날 때마다 그가 상처를 견뎌 내야 하는 이유를 아프도록 철저히 가르쳐 주고 떠났으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성으로 돌아온 그는 식탁 뒤쪽에 있던 나무 콘솔에서 나무 상자와 가죽 장부를 꺼내었다.

마침 성을 떠날 때 가지고 온 돈이 서서히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무릇 장기 휴가란 예산을 잘 세워야 하는 법이다.

그는 나무상자에서 돈주머니를 꺼내고 내용물을 기록과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맞지 않았다. 이게 대체 몇 번인지. 길리어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테오도르!”

아노르인인 만큼 귀가 밝은 아들은 그의 부름에 금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자식, 너 또 여기서 돈 꺼내 갔냐.”

“그게-”

“말을 하고 가져가야지. 이게 네 돈이야?”

“미안해요. 그게, 아버지.”

“아무튼… 내가 달라면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대체 이게 몇 번째냐, 어?”

“그게-”

“마지막 경고다. 한 번만 더 이따위 짓거리를 하면, 듀랜트에게 너를 성으로 끌고 가서 지하 감옥에 처박아 놓으라고 할 거야, 알겠어?”

신경질이 섞여 있는 차가운 어투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굳었다.

“죄송합니다.”

“나가 봐. 가서 채소밭에 풀이나 좀 뽑아. 자두나무 근처에 잡초가 많이 자랐던데.”

길리어드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테오도르는 조금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아들이 돌아서고 난 후에야 길리어드는 그런 아들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다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 * *

테오도르 펠로데는 입술을 삐죽이며 정원으로 나갔다.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마치 자신이 쫓겨난 것 같았다.

해명조차 들으려고 하지 않는 아버지의 차가움에 자신의 처지가 불쌍해졌다.

그는 새삼 이곳까지 따라온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아버지가 장기 휴가를 쓰고 성을 떠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듀랜트를 비롯해 몇몇 측근 가신들은 당연히 따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사코 만류하고 혼자서 떠나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한가로이 여행을 다니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하지마는 아버지 정도 되는 분이 하인 하나 없이 떠난다는 말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장작을 패거나 요리를 하거나 잡다한 수발을 들어드릴 생각으로 따라나섰던 것이다.

그는 정원의 채소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함께 가꾼 것이었다.

끄트머리에 커다란 자두나무가 서 있었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심으신 거라고 했다.

밑동 근처에 억세 보이는 잡초들이 마치 시위하듯이 주변을 둘러싸고 자라나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것들을 홱홱 뽑았다.

화풀이하듯 한참 뜯어 놓고는 쾅쾅 발로 밟아 다시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 실컷 바닥을 찍어 대고 있을 무렵이었다.

어디서 삐이 하고 새가 우는 소리가 났다.

자두나무의 높다란 가지 끝에 조그만 나뭇가지들을 촘촘히도 엮어 만든 둥지가 있었다.

검독수리의 둥지였다. 끄트머리에 털이 복슬복슬한 새끼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사실 이 성은 거의 절벽 위에 지어진 곳이라, 검독수리들이 둥지를 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필이면 저 위에 둥지를 틀었을까.

그리고 대체 부모는 어디 갔는지, 삐요삐요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가지에 날개가 걸려 울고 있는 모습에 테오도르는 망설이다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들고 둥지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내려놓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검독수리 어미와 아비가 어느새 자두나무의 양쪽 가지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경계하는 날카로운 눈빛에 테오도르는 부러 몇 발자국 뒷걸음쳤다가 모르는 척 등을 돌려 황급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도둑질을 하려다가 들킨 것 같았다.

자신이 왜 도망쳐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억울했지만, 그래도 그는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새끼 검독수리는 그날 목숨을 건졌으니까.

그렇게 조금은 시무룩하게 문을 닫았을 무렵이었다.

아버지는 홀의 한켠에 있는 낡은 주방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한동안 눈치를 보던 테오도르는 주방의 벽난로 근처로 가 주전자를 얹고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아버지가 차를 드실 시간이었다.

엊그제 아래 도시에서 사 온 과자와 케이크를 같이 드려야겠다. 이걸 드시면 조금이라도 화를 푸시겠지.

그 무렵이었다. 멀찍이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옆으로 나 있는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서 눈부신 가을 햇살이 밀려 들어왔다. 그 너머로, 펠로데의 깃발을 매단 마차가 달려오고 있었다.

* * *

예상치 못한 큰아들의 방문에 길리어드는 내심 매우 성가시다고 생각했다.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게다가 기사들이 자신의 이런 생활 방식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입을 댈 거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심란했다.

그래도 사랑하는 아들이 이렇게 직접 만나러 왔는데 돌아가라 할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은 성찬이었다. 마티아스가 데려온 하인들이 직접 차린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나눌 말이 참 많았다.

성에서 있었던 일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마티아스의 모습은 한때 어머니의 손을 잡고 조잘거리던 그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이윽고 밤이 좀 깊어지자, 테오도르와 샬로메가 먼저 일어났다.

마티아스는 작은 위스키잔을 내려놓고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벽난로 앞에 앉은 채 덤덤히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참 낯설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결국 입술을 열었다.

“아버지, 언제까지 여기 계실 겁니까? 다들 걱정하고 있습니다.”

길리어드는 한숨을 쉬었다. 질문의 의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자신에 대해서 도는 염문이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체 그들이 말하는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필레몬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대단한 무례였다. 그분은 다름 아닌 아내의 부탁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것이니까.

내심 화가 치밀었다가도 그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들도 이제 어른이다. 게다가 대공이라는 입지를 지닌 만큼 그렇게 화를 낼 수는 없는 것이다.

길리어드는 어째서인지 때가 되었다 싶은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술을 열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지금 말하는 게 낫겠지. 마티아스, 나는 이제 기사단의 단장직을 내려놓을 생각이다.”

“예? 아버지. 그럼 그 자린 누가 지킨단 말입니까?”

“네가 알아서 정해야지. 그래도- 후보는 내가 추천을 해 주마. 그게 관례니까. 프레데릭 경이나, 마르첼이 나쁘지는 않겠지.”

아내가 죽은 후 마르첼은 아내가 다스리고 있는 펠로데의 북부 소도시로 떠났다.

바쁜 모양인지 펠로데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는데, 얼굴을 못 본 지도 2년이 넘었다.

그래도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편지를 보내왔는데 길리어드는 몇 개월 전에도 단장직을 놓고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마르첼의 경우는 어쩌면 자신보다 더 그 자리에 적합할지 모른다. 명분이나, 입지나.

“그럼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여행을 좀 다녀야지. 그리고 펠로데를 떠나서 살 생각이야.”

“그러면 스칼라이로 가시려고요?”

“아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당분간 엔우드의 사람들과 지낼 생각이다.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아니 제 말은- 단순히 여행을 가시는 거야 몰라도 그건 아니죠. 설마, 펠로데를 아예 떠나시겠다는 겁니까?”

“이제 나도 좀 쉬어야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 펠로데는 아버지의 땅입니다. 그런데 왜-”

길리어드는 다정한 눈빛으로 마티아스를 쳐다보았다.

“마티아스. 그곳은 내 땅이 아니야. 네 어머니가 너에게 물려준 땅이지.”

아들은 명석하니 자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 것이다. 해서 그는 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았다.

마티아스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농담으로 꺼낼 만큼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했다.


 

길리어드가 펠로데로 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3개월 뒤, 한창 겨울바람이 부는 어느 아침의 일이었다.

자신이 지내던 북쪽의 별채를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짐 대부분은 이미 듀랜트에게 명령하여 엔우드에 구매해 둔 저택으로 보냈지만, 그가 아끼는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들은 자신이 직접 챙겨야 했다.

테오도르가 그것을 도와주었다.

커다란 가방 세 개를 복도로 내려놓은 후, 테오도르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더 할 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가만히 아들을 쳐다보던 길리어드는 눈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라. 할 말이 있어.”

그 말에 테오도르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주춤주춤 의자에 앉았다.

“설마 너, 나를 따라올 생각이냐?”

그 말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길리어드는 미간을 굳혔다.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참으로 할 말이 많았지만, 우선은 내색하지 않고는 조용하고 다정스럽게 아들을 얼렀다.

“테오도르, 내 생각엔 너도 이제 나를 떠나기에는 충분한 나이가 되었어. 펠로데에 남아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봐도 좋고, 아니면 스칼라이나 제국으로 가서 그럴듯한 자리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원한다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괜찮아요. 저는,”

테오도르가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얘가 왜 이러는 걸까.

길리어드는 밀려드는 답답함을 억지로 가라앉히며 다정하게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 화를 내면 되레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터다.

사실 그는 마티아스가 공작으로서의 업무에도 능숙해지면 곧바로 펠로데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굳이 단장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건 바로 막내인 테오도르 때문이었다.

열일곱이나 되었으면 독립해서 멀쩡하게 어른 구실을 해야 하는 놈이, 그런데도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는 건 참, 집안 망신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완력을 써서 억지로 떨어뜨려 놓고 갈 수도 없었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따로 지켜 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마티아스가 테오도르를 돌보아 주겠지만 그 녀석은 이제 자신의 가족이 있었다. 이제 제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할 놈에게 어린 동생을 돌봐야 한다는 짐까지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만큼 테오도르를 애틋하게 살펴 줄 리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다고 스칼라이에 있을 테레사에게 부탁할 수도 없었다. 한창 신임받는 가신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아이에게 짐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선생이나 유모나 시종 무관들에게 맡겨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테오도르, 생각해 보렴. 너는-”

그런데 테오도르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되레 토라진 듯 입술을 실룩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길리어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대체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인 걸까. 아마 좀 깊은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았다.

* * *

길리어드가 펠로데를 떠난다는 사실은 그렇게 확정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단장직을 내려놓는 건 그렇다 하더라도 펠로데를 떠나겠다는 말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신과 친척들이 나서서 대공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 보라고 다그쳤지만, 마티아스도 방법이 없었다.

사실 그도 여간 섭섭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젠가 듀랜트로부터 그분의 어린 시절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다정하게 안아 주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춰 주며 독려해 주던 부모님과 함께 보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는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 분을 위해서 자유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티아스는 단호하게 더는 그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지 말 것을 명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불안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은 그저 펠로데의 선대 공작 부군이 아니라 무패를 상징하는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한때 녹스턴이 단장직을 섣불리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처럼 사람들은 사실 길리어드가 단장의 직위를 내려놓으면 과연 마티아스 가 혼자서 버텨낼 수 있을지 불안해했던 것이다.

몇몇 인물들은 길리어드에게 직접 찾아가 펠로데에 남아 달라는 요청을 올렸지만, 길리어드는 이미 끝난 이야기라며 손을 저을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갑론을박 사건의 파문이 커졌는데, 그것을 정리해 준 사람은 전 단장의 아들인 마르첼이었다.

그가 길리어드로부터 단장의 자리를 인계받자, 불만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해의 끝에 다다르기까지 길리어드는 이름 없는 고성에서 머물렀다.

종종 성 아래 도시로 내려가 싸구려 태번에서 물을 탄 포도주를 진탕 마시고 취하거나, 기사 시합을 관전하고 구 제도(帝都)의 명품 거리로 가서 값비싼 사치품들을 사들이거나 도박판에 나가 게임을 하기도 했다.

그건 평소 상처(喪妻)한 부군답게 근검절약을 실천하며 절제하고 살던 모습과는 다른 행동이었다.

곁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던 테오도르는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언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 말없이 곁을 모셨을 뿐이다.

당연히 테오도르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생전 길리어드가 아스틴으로부터 받았던 부탁이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밤, 고요한 적막의 사이로 귀를 기울여 보면, 그는 아직도 아내의 숨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함께 나누었던 말들이 떠오르고는 했다. 만일 자신에게 시간이 남는다면, 하고 싶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하나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평생 아내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었다. 그렇게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식으로 죄인이 되고야 만 것이다.

그래서 무얼 하더라도 즐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이런 것은, 전부 아내와 함께해야지만 의미를 찾을 수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담담히 아내가 떠나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필리시온으로 가기 전, 아내는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는데, 그에게 그것이 웃음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운 연녹색으로 빛나는 눈동자가, 그저 잘 있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 함께 있어 준 시간에 대한 감사였을 테다.

그는 자꾸만 일그러지는 입술을 억지로 다물었다.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빨리 가 버렸을까, 아니 왜 자신은 떠나는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해 주지 못했던 걸까. 끝까지 함께 있어 주어야 했는데. 조금만 더 다정하게 보내 줄 걸, 잘 살아가겠다고 대답해 줄 걸.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그립고 후회가 되지는 않았을 테다.

그는 자꾸만 일그러지려는 입술을 억지로 팽팽하게 굳혀야 했다.

* * *

다음 해의 봄을 앞두고, 길리어드는 이름 없는 고성에서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엔우드로 떠날 준비였다. 그 도시에서 지내는 시간이 몇 년이 될지 몇십 년이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한번 마음을 정하니 좀처럼 돌리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펠로데에 완전히 관심을 끊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티아스는 훌륭한 대공이었지만,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는 완벽하지 못했고 사실 그가 보기에는 아내만큼 철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나서 아들의 기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언제까지나 관심을 끊어 버리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다름 아니라, 그곳은 아내가, 그리고 자신이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곳이었으니까. 펠로데는 그에게 있어서 자신의 고향이자 모국이었다.

그렇게 어느덧 이사를 앞두고 일주일이 남은 시점이었다. 반가운 손님이 그를 찾아왔다.

시리스 바르도였다.

길리어드가 단장의 자리를 내려놓기도 5년쯤 전, 시리스는 고문의 자리를 내려놓고 남부의 아내가 다스리는 마법사들의 도시로 떠났다.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펠로데를 섬겨 왔던 주축 두 사람이 빠져나가자 사람들은 펠로데에 혼란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시리스는 그 점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잡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두었다.

두 사람은 활짝 웃으며 힘껏 악수를 나눴다.

“부군,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자네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길리어드는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그의 미소는 더는 그리움이나 슬픔에 찌들어 있지는 않았다. 순수하고 고요해 보였다.

시리스는 남부로 내려간 이후에는 1년에 한두 번 정도 그를 찾아왔는데 길리어드는 다른 모든 이들과의 만남은 피했으면서도, 시리스만큼은 편안하게 마주했다. 그가 마르첼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듯이 말이다.

마침 그들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다.

갓 구운 빵과 자두가 올라왔고, 테오도르가 스튜를 떠서 상을 차렸다.

테이블에 앉아 그릇을 받던 시리스는 창밖으로 우뚝 서 있는 자두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군가를 회상하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끝으로, 미소가 어렸다.

“저건 부군께서 심으신 겁니까?”

“몇 년 전에. 나와 아들이 자주 관리해 주고 있지.”

자두나무 꼭대기에 까만 날개를 한 검독수리 한 쌍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길리어드가 그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놈들을 놔두는 건 밤울새 때문이야. 그 녀석들이 얼마나 시끄러운지, 이 근처가 녀석들의 서식지라는 건 알고 있지만,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처음에 저놈들이 나타났을 때는 조금 시끄러웠는데, 나중에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지더군.”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이군요.”

“자네는 어떻게 지내나?”

“이제 좀 숨통이 트였습니다. 물론, 아직도 바쁘긴 합니다. 사실 여기나 거기나 제가 할 일이 많으니,”

“테르나가 고생이 많겠군.”

“아무렴요, 저야 가끔 이렇게 여행이라도 다닐 수 있지만, 아내는 계속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래도 요즘엔 애들도 다 자라서 각자 벌이를 하고, 전쟁을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마음은 편합니다.”

“그녀에겐 신세를 졌어. 안부 꼭 전해 주게.”

“-안 그래도 유모 일 하느라 수명이 줄어든 것 같다며 투덜거리긴 합니다. 참, 남부로 내려오신다면 마법사의 도시 탈리유에 꼭 들르세요. 아내가 잘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시간이 나면, 요즘은 이사 때문에 바쁘거든,”

“이사라, 들었습니다. 정말 엔우드 가문의 사람들과 지내실 생각입니까?”

“그래.”

길리어드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에 시리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잠시 머뭇거렸다.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십니까.”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길리어드는 그것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다.

사실 그는 시리스가 아마 단장직을 내려놓은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뭔가 거창한 연설을 하러 온 것이라 예상했다.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

“참, 오늘 여기서 자고 갈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아래 도시의 태번에 방을 잡아뒀거든요-”

“알겠네. 그럼 데려다주지. 이 근처에는 요즘 마물이 없지만, 그래도 모르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시리스가 성에서 떠난 것은 그날 저녁의 일이었다.

밤길이 어두웠기 때문에 길리어드는 직접 마차를 몰아 시리스를 아래 도시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 성문 앞에서 무언가가 서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테오도르였다. 누구를 기다리는 듯 서성서성 움직이는 모습에 길리어드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 가벼웠던 마음이 다시금 무거워졌다.

테오도르가 우물쭈물 입술을 열었다.

“저, 비가 올 것 같아 걱정되어서요.”

“됐다, 이만 들어가자.”

테오도르는 말없이 길리어드의 마차를 대신 끌어 주었다. 조금은 억울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길리어드는 말없이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느껴지는 것이 있었던 터다.


 

그날 잠들기 전, 길리어드는 책 한 권을 빼 들고 창가에 놓인 탁자에 앉았다. 무심코 책을 폈는데, 따닥거리는 소리에 벽난로를 흘끗 쳐다보았다. 화염석 몇 개가 불길에 쪼개어지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슬쩍 젓고는 근처의 양철통에서 화염석을 꺼내어 난로 안으로 던졌다.

불꽃을 보면 어째서인지 아직도 머리의 어딘가가 뜨끈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의식의 어딘가가 희미하게 옅어지며 아찔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래전 성소에서 있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그놈의 바람만 아니었더라도.

그리고 다시금 아내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미안하고 아픈 마음보다 이제는 그녀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게 되었다.

아스틴은 아마 저승에 있을 것이다. 육체도 생명력도 잃어버린 채, 순수한 정신체로만 남아. 그건 어떤 느낌일까.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자신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사람이 죽고 나면 모든 기억을 잃게 된다는데, 길리어드는 정말로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나 겁이 났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아는 아내를 영영 만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불안과 걱정과 슬픔으로 온갖 고뇌를 하다 보면 결국 끝에 다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만 아내를, 따라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만하면, 자신도 그럭저럭 훌륭하게 부군의 의무를 마무리했으니까.

그 순간, 달칵 침실의 문이 열리더니 테오도르가 나타났다. 작은 차반에 찻잔과 꿀이 담긴 그릇을 들고 있었다.

“아버지, 차 드세요.”

“……고맙구나.”

아무것도 아니라며 슬쩍 고개를 흔드는 모습에 길리어드는 내심 기특했다. 새삼 어떻게든 독립을 시켜 보려 부러 모질게 대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내키지 않으면서도 해야 하는 질문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그는 오랜만에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찻잔을 꺼내어 한 잔을 타서 테이블의 맞은편에 내려놓았다.

“테오도르, 예전에 내가 물어봤던 질문이 있지. 지금 한번 더 물어보마. 만일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이 꼭 한 가지밖에 없다면, 넌 뭘 하고 싶지?”

그 질문에 테오도르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난, 잔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야. 그냥 묻고 싶은 거다. 뭔가- 너도 하고 싶은 게 있을 거 아니냐. 예를 들자면 마티아스는 뭐 자신이 대공이 되는 걸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생각했고. 네 누나인 테레사는 반타블랙슨 가문의 일원으로 살고 싶다며 스칼라이로 떠났지. 물론, 그 둘이야 어렸을 때부터 거의 미래가 정해진 녀석들이었다만, 난 너만큼은 그 애들처럼 의무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했으면 한다.”

테오도르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더니 조금 기죽은 듯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아버지, 그냥- 가시는 데 저도 꼭 데려가 주세요.”

“할 말이 그게 전부냐?”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어드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대체 무슨 생각일까. 정말 내가 낳은 자식이었지만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 보렴. 내일은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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