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17장. 반역자 (17/25)

17장. 반역자

한편, 아스틴은 거뭇한 먼지가 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석에 있는 격자형의 창살 밖에서 희미하게 달빛이 새어 나왔다.

뽀얀 먼지가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새삼 그제야 창문의 중요성이 느껴졌다. 해가 넘어가고 난 뒤, 비좁은 감옥이 암흑에 휩싸이면 그녀는 누군가가 목을 움켜쥐는 듯한 답답함에 숨이 막히고는 했다. 그나마 창문을 통해 은은히 들어오는 달빛이 위안을 주었던 것이다.

아스틴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탁한 색감의 가구들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북서부에서의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자 황제는 친히 오베론을 보내어 그녀를 수도로 데리고 오게 했다.

수상쩍기 그지없는 마중에, 어쩌면 그를 따라가겠다고 했던 것은 무리수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결과가 결국 이것이었다.

그녀는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황실의 서쪽에 있는 검은 탑 꼭대기에 감금되었다.

흔히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고위 귀족이나 정치범들의 감옥은 따로 마련해 놓는 법이다.

검은 탑은 바로 그런 용도로 쓰이는 장소였다.

물론 이러한 처사는 나라의 섭정이자 적들과의 교섭을 원활하게 마무리하고 온 사절에게 어울리는 대접은 아니었다.

아스틴은 황제의 전언을 떠올려 보았다.


 

흔히 명군이란, 나라를 위해서라면 가장 선한 것들조차도 의심하는 법이지. 그러니, 그대의 충성심을 한 번 더 확인해 보고자 한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러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래, 역시 그놈의 명분 때문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설령 그것이 비굴하게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래야 최악의 경우 반역자가 되더라도 제후들의 반발을 사지는 않을 테니까.

다행히 강제 신문이나 고문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서류를 보고는 한참을 고뇌해야 했다.

이혼장.

물론 한 번쯤은, 황제가 이런 방식을 취할 거라고 예상했다.

이오넬은 남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남편뿐만이 아니라 스칼라이 전체를 경계하는 것이다. 특히 스칼라이가 남부에서 황가를 막아서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그 과정에 바로 자신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었을 테다.

결과적으로 그는 어떻게 해서든 남편과의 법적인 관계를 끊어 버리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부부라고 한들 제국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간단히 생활에서부터 공적인 일까지도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대제후의 가정사는 멋대로 할 수는 없는 만큼,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충성심’이라니, 아스틴은 그 뻔한 수작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한편으로는 허탈하기도 했다.

어쩌면 황제는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계획해 왔을지도 모른다. 제국 재판소가 그의 손아귀에 넘어간 게 몇 개월 전의 일이니까.

문제는 딱히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물론 이혼이라는 것이 별문제는 아니었다. 자신이나 남편이 죽는 것도 아니고, 법은 법이고, 현실은 또 현실이니까. 우선은 자신이 석방되어야 하는 것이 먼저였으므로 서명 한 번만 해 주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남편에게 큰 상처가 될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아팠다.

애초에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섭정의 자리를 내려놓았던가.

그간에도 마음만 먹었다면 황제에게 압박을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순전히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편과 아들을 괜한 위험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새삼 자신이 가련해졌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자신이 충분히 쓸 만한 가신이라고 생각했다. 펄린이나 오베론처럼 그를 위해서 대신 ‘싸워 줄’ 수는 없어도, 정치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닌 만큼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황제를 그 자리에 앉혔다고 말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결국은 이 꼴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내 남자까지 잃어버리다니, 그레이스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새삼 두려움이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물론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황제는 어차피 자신을 해칠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무사히 펠로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남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그래도 달리 방법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충성심은 끝끝내 그릇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후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으니까.

아스틴은 이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너무 고분고분했던 행동이 문제였다. 되레 황제의 의심을 사고 만 것이다.

이오넬은 그녀뿐만 아니라 길리어드가 서류를 받아들이고 성에서 완전히 퇴거해 스칼라이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그녀를 석방하지 않겠다고 말해 왔다. 결국, 목적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아스틴은 그런 문제는 자신이 이곳을 빠져나가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간절히 바랐다. 길리어드가 뜻을 깨닫고 이혼장을 받아 주기를.

그가 섣불리 황실의 무도함을 손가락질하며 군을 이끌고 제도를 침범한다면 황제에게는 그만큼이나 좋은 명분도 없었다.

그때는 나라의 섭정을 스칼라이로부터 지킨다는 명목으로 펠로데를 공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무렵,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잘난 척을 해 대더니, 끝은 나와 다른 게 없군.”

창살의 맞은편, 익숙한 인영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토머스 켄티였다.

아스틴의 예상대로, 천도를 주장한 사람은 바로 재상이었다.

황제는 공작이 이방 민족과의 교섭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나라의 안녕을 해하고 혼란을 부추기려고 했다는 혐의로 재상을 감옥에 투옥했다.

“불쌍하게도.”

혼잣말을 하는 것 같지만, 노골적으로 자신을 비웃는 말투였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상황에, 아스틴은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우선은 참았다.

어차피 서로 감옥에 갇혀 있는데 감정 낭비를 해서 뭐 하자는 건가. 그리고 할 거면 대상을 정확히 해야 했다. 황제에게 욕을 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멍청한 대가리를 탓하든지.

애꿎은 자신을 저와 동급으로 취급하다니.

물론 그 기분이야 이해했다.

지금 그는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다면 바닥을 기는 작은 거미에게라도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일 테니까.

한편으로는 생각을 좀 더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황제는 이참에 본보기를 보일 생각일 테다. 아노르인들에게 말이다.

이오넬은 혼혈에 불과했지만, 그래서 더욱 거인족의 핏줄에 집착했다. 거인족 황후를 맞이하고, 황후에게 위세있는 거인족 남편들을 들이게끔 한 것이 괜한 이유가 아니었다.

그리고 늘 아노르인들이 그저 신성하다는 이유만으로 고위직을 차지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켄티야 그렇다 쳐도, 자신의 경우는 달랐으니까.

그녀의 집안은 오랫동안 황실에 충성해 왔다. 물론 그건, 일종의 ‘투자’의 개념이었지만. 어쨌든 그건 충성이었다.

그러니 이런 모욕과, 수치는 불합리한 일이었다. 그녀는 가족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이 한심스러웠다.

그 무렵, 켄티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렇지 않나? 아스트리데. 당신은 늘 키우는 개에게도 급이 있다는 것처럼 행동해 왔지만… 내 말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줄을 차고 있어도 개는 개라는 거지.”

“사형이 확정된 모양이군. 혓바닥에 채워야 할 자물쇠가 헐거워져 있으니 말이야.”

켄티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이 순간에도 담담하게 대답하는 아스틴의 태도가 약이 올랐던 터다.

그도 알았다. 황제는 결코 그녀를 고문하지도, 사형하지도 않을 것이다.

공작은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난 몇 년간 찬찬히 제 권력을 쌓아 올리며 황제와 대립해왔다. 대륙의 동부와 북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귀족 의회를 설득시키고 남쪽으로 마수를 뻗었다.

그런 인간이 고작 이런 얄팍한 함정 하나 빠져나가지 못할 리가 없다. 아마 준비를 다 해놓았을 테다.

이미 제 남편과 아들을 스칼라이에 사절로 보냈다는 건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종의 피난을 보낸 것일 테지만, 반대로 하자면 동맹 강화를 위한 사절로 보냈을 테다. 게다가 만일 그녀의 신변에 조금의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펠로데는 망설임 없이 황가와 전쟁을 벌일 것이다. 그러니 황제도 아직은 그런 위험은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전쟁은, 언제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니까.

결국 버려지는 사냥개는 자신이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충심을 다해서 황제를 섬기겠다는 기개는 버린 지 오래다. 허탈감조차 가시면서, 이제는 두려움만이 남았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끝끝내 자신의 행동이 합리적이었다 합리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약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였다. 그것은 하필이면 이런 때 곁에 있는 사람이 아스틴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두려울 게 없네. 어쨌든 그건, 폐하께서 생각하고 계시던 일이었으니까. 나는 그걸 대신 꺼내 드린 것뿐이고. 그건 당신은 결코 하지 못했던 일이지. 안 그래?”

아스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그 말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지금 나름대로 자신이 꽤 충신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녀에게 있어 충신이란 역시 공에 대해 응당한 대가를 받는 사람이니까.

만일의 경우 주군을 제재할 힘이 있으면서도 성의를 다해 모시는 신하였다.

하지만 켄티가 그랬던가? 적어도 아니었다.

그녀의 생각에 켄티는 황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적어도 자신은, 비록 이런 꼴이 되어 있지만, 황제의 충신이었다.

자신이, 지금의 황제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보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어째서인지 입술이 비틀려 올라갔다.

왜일까, 이렇게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켄티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괜한 과거가 떠올랐다. 그래, 황태자를 따라 귀양을 떠났을 때의 일이었다.

지옥같던 북서쪽 제후들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오던 그때가.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던 이오넬 페르디카스의 모습이.

그녀는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켄티에게 한마디 하려다가도, 그녀는 억지로 자제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털썩 낡은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앞으로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누구와는 달리 그녀는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난 다음의 일을 고민해야 하니까.

그렇게 사흘간 그녀는 토머스 켄티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가 결국은 형리들에 의해 사형장으로 끌려 나갈 때도 말이다.

“멍청한 놈.”

어느덧 혼자가 된 채로, 아스틴은 마지못해 그런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바람의 밀도가 차갑게 가라앉고,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토머스 켄티의 목이 황궁의 성벽에 걸렸다.

그의 사지는 잘려 각 지역의 제후에게 보내졌다.

죄목은 단순했다. 제국을 혼란에 빠트렸다는 이유였다.

제후들은 그 죽음을 비정하게 느낄지언정 누구 하나 황제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켄티의 주장은 그들에게 귀찮은 골치로 여겨졌고, 황제는 그것을 해결해 주었으니까.

그렇게 제국은 잠시 작은 평화를 되찾았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중부의 제후들은 펠로데 공작의 감금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매우 불안하게 여겼다.

공작은 황제의 요구대로 남편과 이혼하고 그를 성에서 추방까지 시켰음에도, 풀려나지 못했다.

설마 황제가 공작도 처형시키려는 걸까, 그렇게 된다면 나라의 절반이 들고일어날 텐데, 그들은 황제의 생각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펠로데는 주인의 부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물론 펠로데의 가신들은 공작을 구하기 위해 수도를 침범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병력을 성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마치 주인의 귀환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 * *

멀리 복도의 문이 탕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창살 밖에서 말간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스틴은 미간을 찌푸렸다. 옥지기가 걸어오고 있었다. 추스르고 있던 가슴이 다시금 천천히 뛰어올랐다.

감옥 문이 거친 쇳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거칠게 바닥을 울리는 신발의 굽소리와 함께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아스틴은 옅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바로 그레이스 펄린 백작이었다. 물끄러미 아스틴을 쳐다보던 그녀가 옥지기에게 나가라는 손짓을 하자, 머뭇거리다가 황급히 돌아섰다.

그리고 그레이스는 문간에 기댄 채 아스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째서일까, 아스틴은 오늘따라 그놈의 칼날 같은 단발이 짙은 회색 눈동자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레이스가 짧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꼴좋네. 거봐.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

“나도 원해서 이 꼴로 있는 건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늦었어?”

“너를 그저 만나겠다는 것만으로도 폐하께 갖은 ‘아양’을 떨어야 했거든. 내 참,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무슨 의심이 그렇게 많은지, 섭섭해서 눈물이 다 났다고.”

그레이스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가죽 가방 속에서 두꺼운 모포와 간단한 음식을 꺼내었다.

아스틴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레이스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은 캔티가 사형당하기 직전에 알았다.

애초에 그것이 그들이 맺었던 약속이었다.

그녀는 우선 모포를 둘렀다. 두꺼운 양털이 몸을 감싸자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동안은 창살 밖에서 솔솔 들어오는 한기에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빵과 포도주를 먹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퍼지는 고소한 향기에 텁텁하기 그지없던 감옥의 냄새가 어느 정도 희석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빵을 씹으면서, 그녀는 펠로데로 돌아갔을 때 맛볼 수프와 돼지고기를 상상했다. 바네사에게 최고급 햄으로 파이를 구워 달라고 해야지. 다섯 개는 먹어 치울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전부를 먹어 치우고 나서야 펄린에게 물었다.

“그것 보다, 그 사람은 잘 지내고 있어?”

“네 부군이야, 잘 지내시지. 그것보다 지금은 네 걱정이나 해.”

“어차피 지금은 우리 둘 다 눈치 싸움이야. 황제도 오래는 못 견디겠지. 이 이상 압박하면 그때부터는 바로 전쟁이야. 그러면 제후들이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납세와 공납도 미루고 줄을 서기 시작할 텐데. 황제가 그런 상황을 좋아할 것 같아?”

“태평한 소리 하고 있네. 지금 황제께서 널 풀어 주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야. 바로 부군의 행방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지. 다름 아니라 네가 그를 우리 집구석에 숨겨 놓고 있으니 여전히 의심을 멈출 수가 없는 거야. 너를 해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나를 적으로 돌리는 것도 무모한 일이니 그냥 협박하고 있는 거지.”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라이에 있던 길리어드는 이혼장을 쓰자마자 아들을 데리고 펄린 백작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펄린이 그를 받아들인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아스틴과의 약속도 약속이었거니와 가문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다는 명분으로 온 사람을 받아 주는 게 문제 될 일이 아니었던 터다.

그저 친구의 남편이자, 남편의 친구를 대접해 주는 게 무슨 죄란 말인가? 그레이스 펄린은 그 정도로 황제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나약한 제후가 아니었다.

아스틴은 다시금 입술을 열었다.

“절대, 그가 군대를 끌고 수도의 성문을 넘는 일은 없어야 해.”

“그럴 일은 절대 없어. 어쨌든, 이런 상황엔 비공식적으로 도망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오늘 밤, 자정 즈음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 황궁의 동문 쪽에서 세 번 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망설이지 말고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그레이스가 소매 속에서 붉은 유리병을 내밀었다.

“이걸 쓰면 문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을 거다. 다시 말하지만, 꼭대기로 올라가. 동문 쪽에서 세 번 문이 울릴 때, 겁먹지 말고 뛰어내려. 제발. 겁먹지 말고.”

“이 원수를 어떻게 갚아야 하지?”

“말했잖아. 이번만 도와주는 거라고. 이다음부터 일어날 일에, 내 가문은 더는 간섭하지 않을 거야. 네가 황제와 전쟁을 하든 칼춤을 추든 난 일절 신경 안 써. 알겠어?”

“배신이나 하지 마라.”

“그게 네가 할 말이야?”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말없이 이어지는 침묵의 끝에, 그레이스가 피식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까닥이고는 감옥 밖으로 나갔다.


 

그날, 검은 탑의 감시는 매우 철저했다.

보통의 경우 제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거대한 체구의 거인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딱히 긴장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누군가가 찾아올 거라는 사실을 짐작이라도 하는 듯 자신들이 들고 있는 커다란 검을 달빛에 비추어 보고는 했다.

하지만 그날 탑의 주변에는 기묘하게도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평소 옥지기들을 위한 비품을 실어 나르던 상인들의 마차조차 도착하지 않았다.

바람만이 쌀쌀맞게 불어왔다.

그것은 마치 검은 탑을 썰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은색 철선을 그리며 휙휙 날아들었다.

어느덧 달이 하늘의 중심에 다다랐을 무렵이었다.

거친 소리와 함께, 검은탑의 앞으로 한 대의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가 나타난 건 문제 될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에서 내린 사내의 존재였다.

전신을 칠흑 같은 갑옷으로 감싼 사내는 거인 병사들과 옥지기들의 방어에도 불구하고 탑으로 진입하는 문 앞에서 난장을 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일종의 무차별 공격이었는데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날카롭고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거인들의 가슴을 가르고 다리를 잘랐다.

칼날이 지날 때마다 비릿한 피 냄새가 피어올랐다.

압도적인 강함에 거인 기사들은 마치 무너지는 석탑처럼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단단한 바닥에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균열이 일었다.

그 사건은 즉시 황궁에 알려졌다.

마침 그날 궁에는 오베론 경이 대기 중에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검은 탑을 휘젓고 있다는 기사의 이야기는 당연히 그의 심기를 불쾌하게 했다. 기사의 정체가 짐작되었던 탓이다.

이유는 예상이 되었다만, 그는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위험했다. 그가 화룡 수티하를 죽였다는 소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리 봉인되어 있었다지만 한 명의 인간이 화룡과 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듣고도 믿지 않았다.

거인들은 모든 남편이 가정에 대한 강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 사실 한 여자를 공유한다는 것은 그 이전에 남편들끼리 친형제 이상의 신뢰와 의리가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였다.

혹은, 그에 비등한 이권이 거래되었거나.

그러니 그가 형제와 아내를 지키기 위해 탑으로 향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오베론은 그렇게 흑기사를 마주했다.

두 사람은 마치 야수처럼 들러붙었다.

거인 오베론은 당대 남대륙 거인 귀족들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작은 거인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이자, 제국 최고의 무장이었다.

거칠게 뒤엉키던 그들은 동시에 탑 아래 성벽으로 처박혔다.

귀를 찢는 파열음의 끝에, 두꺼운 표면에 굵은 금이 갔다. 그리고 성벽이 절반으로 갈라지더니 와르르 무너졌다.

병사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그런 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만일 저기서 오베론 경이 쓰러진다면 사실상 그들은 검은 탑을 내어 줄 수밖에 없게 된다.

수도의 남쪽에 있을 제국 기사단에게 소식이 전해졌겠지만, 그들이 도착하는 데는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터였다.

대체 검은 기사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튼, 황군이 도착하기 전에 오베론 경이 기수를 막아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성벽을 박살 내고 지면을 파괴하며 수도의 모든 사람을 불안에 떨게 할 정도로 천지를 뒤흔드는 싸움의 끝에, 조금씩 승패가 갈리기 시작했다.

밀리기 시작한 쪽은 바로 흑기사였다. 하지만 흑기사는 밀리면서도 어째서인지 웃음을 흘렸다. 묘한 반응에도 오베론은 동요하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그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이윽고 지친 흑기사가 도망치려는 듯 발걸음을 물리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동쪽 성문 근처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정확히 세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주변에 고요가 찾아왔다.

누군가가,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 * *

울림이 멎자 아스틴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리고는 흘끗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갑자기 얼굴을 때리는 거친 바람에 그녀는 휘감고 있던 모포를 단단히 여며야 했다.

까마득한 높이에 잠시 현기증이 났다. 아래로 밀려든 구름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다.

마치 자신이 거인이 된 느낌이었다. 발아래 있는 것들이 마치 아주 작고 귀여운 모형처럼 보였다. 평소라면 흥미롭게 생각했겠지만, 지금만큼은 긴장이 되어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검은 탑에서 궁성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탑과 마주 보고 있는 서문을 통과하거나, 반대쪽으로 나 있는 동문, 즉 황궁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통과하거나.

오늘 탑에서 벌어지는 아수라장으로 인해 동문은 비교적 조용했다. 아마도 병사들이 검은 탑이 있는 궁의 서쪽으로 차출된 것이겠지. 혹은, 황제의 침전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스틴은 다시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레이스가 말한 대로 세 번의 울림이 있었지만, 그 이후가 너무도 조용했다. 마치 무덤처럼 고요한 적막에 그녀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그 무렵 아래쪽에서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병사들이 자신의 탈출을 알아챈 것이다.

그녀가 돌아섰을 때, 이미 덩치 큰 몇 명의 옥지기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스틴은 눈을 감은 채로 그대로 동쪽을 향해 뛰어내렸다.

운이 나쁘게도, 그날은 바람이 더 거세게 불었다. 그녀는 떨어지면서도 그것에 휩쓸려 반쯤 옆으로 꺾이려는 허리를 간신히 비틀어 몸을 웅크려야 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사실은 추락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바닥을 앞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몸이 약간 흔들리더니, 익숙한 팔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스틴은 와락 그의 목을 껴안았다.

“여보!”

“아무튼- 내가 뭐랬소.”

길리어드의 청람색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은 화가 난 듯하면서도, 잔뜩 걱정하고 있었다는 듯 꼼꼼하게 살피는 눈빛이었다.

길리어드는 그녀를 부드럽게 바닥에 내려주고는 기다리고 있던 마르첼과 기사들에게 손짓해 마차로 데려가게 했다.

그러나 그는 따라오지 않았다. 천천히 돌아서서 무직하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 아스틴은 그를 붙잡았다.

“길리어드, 당신은요?”

“도와줘야 할 사람이 있어. 먼저 돌아가요.”

단호한 목소리가 말리더라도 듣지 않겠다는 투였다. 망설이던 아스틴은 결국 먼저 마차에 올랐다.

* * *

그즈음, 오베론은 흑기사를 쓰러뜨린 채 그의 가슴을 짓밟고 있었다. 마무리를 위해 천천히 칼을 들어 올리던 그는 끝을 내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토록 강한 자가 있었던가, 그래서 처음에는 펠로데의 공작 부군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거슬리는 기억이 그를 붙들었다.

오늘의 아침, 펄린이 황궁을 방문했던 것이다.

만일 펄린이 자신의 부군을 데려왔다면?

루카스 펄린에 대해서는 그도 알고 있다.

과거 어느 정찬회에서, 그는 황제에게 모욕을 당하고 이후 눈앞에서 술잔을 바닥에 던져 깨어 버리고 황제에게 등을 돌렸다.

이후에는 고의적으로 수도를 방문하지 않았는데, 문득 그는 불안했다.

하지만, 그건 과한 추측이었다.

펄린 백작이 그것을 용납했을 것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후폭풍을 각오해야 할 테니까. 펄린 백작은 북부에서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평민을 가문에 들여 제 고귀한 피를 더럽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런 자가 어째서? 얼핏 드는 불길한 예감에 그는 허벅지에 매달린 벨트에서 단검을 꺼내 흑기사의 투구를 향해 던졌다.

눈 주변을 보호하는 장식이 날아가며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윽고, 루카스 펄린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듯 입술을 열었다.

“-결국 들켰네. 아무튼, 대단하다니까.”

“무슨 짓이냐. 펄린이 드디어 미쳐 버리기라도 한 거냐?”

“그저, ‘우리’는 ‘우리’의 복수를 하는 거다.”

“복수? 그렇다고 감히 황제께 칼날을 들이밀겠다는 거냐?”

“폐하가 아니라 당신에게 하려는 거야. 야, 이 새끼야. 우리 귀한 아들한테 그따위 짓거리를 해놓고, 우리가 그냥 참고 넘어갈 줄 알았냐?”

“그건-”

순간, 그의 등을 세게 내려치는 칼날이 있었다. 이어 나타난 길리어드의 모습에 오베론이 당황하던 찰나 루카스가 마침내 투구를 벗어 던지고는 어딘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때마침 마차가 나타나더니 그를 싣고는 도망쳐 버렸는데, 쫓으려는 오베론을 길리어드가 막아섰다.

서슬 퍼런 칼날이 오베론의 가슴에 겨누어졌다. 오베론은 맨손으로 그것을 붙잡고 밀어내며 이를 지그시 물었다.

“…네놈이었군. 이 일을 계획한 게.”

“아니면, 누구였을 것 같나?”

“그러길래 작작 나댔어야지! 지저분한 야수놈이.”

마주한 칼날들이 불꽃을 튀기며 튕겨져 나갔다. 칼이 부서지자마자 길리어드가 등에 꽂고 있던 창을 들더니 오베론의 어깨를 찔렀다.

갑주가 파스스 부서지며 뜯겨나갔다. 이미 루카스와의 전투에서 갑주가 손상된 상황이었던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오베론은 한 손으로 어깨의 갑주를 완전히 뜯어내 바닥에 던졌다.

굵직한 어깨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수치심과 분노로 인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문득 자신이 떠나올 때 황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적당히 맞아 주고 그만 물러나라던 말이. 하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눈앞의 이 짐승이 오늘 이곳에서 자신을 살려 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건 사실로 그랬다. 길리어드는 만일 이곳에서 자신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설령 펠로데에 문제가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오베론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으리라고 마음먹고 있었다. 무릇, 그런 게 스칼라이인이니까.

다시금 마주한 칼날에서 폭풍 같은 파동이 몰아쳐 바닥에 깔린 타일들을 모조리 날려 보냈다.

주변이 적막에 물들며 고요가 찾아왔다.

마주하고 있는 칼날 너머, 오베론은 길리어드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인 양, 광기를 내재한 서슬 푸른 눈동자가 담담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스칼라이 인은, 복수의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오베론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이 갓 펠로데의 부군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오넬이 자신에게 그와 목숨을 걸고 싸우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물론 그때는 이 사내와 맞붙을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의 놈은 겁쟁이에 불과했으니까.

황제는 그를 두고 어쩌면 제국에 탐을 내고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유약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스칼라이에서도 왕위를 ‘뺏기고’ 쫓겨난 거겠지. 그런 식으로 희생당하는 왕자들은 그가 알기에도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오늘 오베론은 생각을 바꾸었다.

이놈은- 위험하다.

언젠가는, 제국에 위험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미리, 손을 써야 했다. 어쩌면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날 검은 탑의 주변 공기는 황궁의 다른 장소보다도 검붉게 물들었다.

대기가 거세게 떨렸다. 바람은 아니었고, 칼날들이 스치면서 일으키는 돌풍과 파열음으로 인해 공간이 떨리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사정없이 부딪히던 칼날은 무수한 불똥을 튀기며 서서히 한계를 맞이했고, 서로의 몸을 감싸고 있던 갑옷 또한 균열이 갔다.

부서진 서문 성벽의 잔해가 열풍에 휩싸여 갈려 나갔다. 옥지기들은 우선 대피했다. 여파가 검은 탑까지 미쳐, 금방이라도 주변의 지면이 무너질 것만 같았던 터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황궁에서는 유례없이 큰 사건으로 기록될 터였다.

그 싸움의 여파는 당연히 황궁을 넘어 수도 전체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황궁에서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줄 알았지만, 가까이서 보는 이들은 그저 혼이 빠진 듯 넋을 놓고 있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이후 오베론을 도와주러 합류한 황군과 황실 기사단의 단원들까지도 그랬다.

그것은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싸움’이었다. 칼날이 부러지고 갑옷이 박살 났는데도 그들은 기계처럼 전투를 멈추지 않았다.

짐승처럼 서로를 물어뜯고 팔다리를 박살 내고 급소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뒤엉켰다.

그 과정에 휩쓸린 검은 탑은 결국 무너지며 황궁 전체를 폭발음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구경꾼들은 감히 끼어들지도 못하고 부서진 탑의 잔해가 있는 곳에서 임시 벽을 치고 자연재해와 같은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2중, 3중으로 두껍게 에두르고 있는 안쪽에서도 짓밟고 깨부수고 박살 내는 소리는 무섭도록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날의 하늘은 맑고 선명했다. 달빛이 그들의 모습을 분명히 지켜보고 있어, 그 자리에 존재하던 모든 사람들이 빼도 박도 못할 증인이 되었다.

그날의 전투는 검은 탑이 완전히 무너지고 근처에 있던 성벽들이 모두 초토화되고 그도 모자라 황제의 거처가 있는 중앙 탑의 일부까지 손상을 받아 금이 가고 나서야 끝이 났다.

누구도 그 점잖던 공작 부군이 그런 식으로 난장을 피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펠로데 공작 유수 사건으로부터 검은 탑의 굴욕으로 이어지는 그 사건은, 이후 랑기에 황실 역사상 최악의 수치로 기록되었다.

어느덧 새벽이 올 무렵이었다.

기나긴 폭발이 갑자기 뚝 멈추더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그제야 바깥으로 나와 상황을 살폈다.

이윽고 그들은 산산조각난 검은 탑의 잔해에서, 오베론을 발견했다. 그는 안면이 반쯤 날아간 채, 한쪽 어깨가 피떡이 되어 박살난 모습으로, 팔다리가 기이하게 꺾인 채 기다란 창칼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공작 부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오베론의 죽음에 황제는 곧바로 황족을 죽인 죄를 묻겠다는 선언을 했다.

동시에 그는 허락도 없이 탑에서 도망친 아스틴에게도 똑같은 죄를 묻겠다고 공표했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황제가 바라던 일이었다.


 

반역자에게 용서란 없다.


 

“웃기고 있군.”

아스틴은 자신에게로 보내온 선전포고문을 사절들이 보는 앞에서 찢었다.

사절들의 목은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그렇게 14년에 달하는 기나긴 겨울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기간이나 규모에도 불구하고 훗날 제국의 역사 어디에도 남지 않았던 비공식적인 내전이었다.

무릇 기록이라는 것은 승자의 의지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는 일이라지만, 하필이면 그 전쟁에 겨울 내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다.

* * *

검은 탑의 잔해로부터 북쪽, 이미 오래전에 폐허가 되어 버린 듯한 낡은 건물이 있었다. 황실의 고문서 보관소로 분명 관리인의 손길이 닿고 있었지만, 반만년이 넘는 세월 때문인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나마 사방에서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등나무가 건물을 지탱해 주었는데, 넝쿨 전체가 건물을 휘감고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륙의 현자들에게만은 예외였다. 그래서 이곳의 관리인들은 평소에는 일하는 것도 없으면서 나라의 녹을 축낸다는 핀잔을 받고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들은 현자들을 접할 수 있다며 자랑스럽게 여겼다.

싸움이 일어나던 날로부터 사흘 후, 늙은 현자가 보관소의 지하에서 뿌리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관리인들은 그자의 정체에 대해 머나먼 남부 마법사의 도시에서 여행을 온 현자인 것 같다며 존경하다가도, 한편으로는 북대륙에서 보내온 첩자일지도 모른다며 경계를 했다.

그러나 누구도 현자가 종종 베푸는 금화에는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금화가 황명까지 거스를 힘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황제는 펠로데 공작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난 이후, 제국 수도를 비롯한 황가 영역에 존재하는 모든 친 펠로데 인사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첫 번째로 시작된 일이 바로 폭스테일들의 색출이었다.

일반적으로 폭스테일은 서로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황제는 수상해 보이는 자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였다.

하필이면 풍채 좋은 노인도 그 대상에 포함되었다.

사실 평소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고문서 보관소에 며칠이나 틀어박혀 있는 건 누가 봐도 수상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노인이 주는 금화에 넘어가 경계를 안일하게 했던 경비와 관리자들도 그 칙령이 선포된 이후부터는 노인을 주시했다.

시리스 바르도가 그 변화를 눈치챈 것은 검은 탑이 무너지고 이레가 지난 아침이었다.

평소라면 금화 한 닢이라도 얻어 보려 인사를 청하던 관리인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안광을 빛내며 자신을 훑어 내리는 모습에 그는 업무를 서둘러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내키지 않았지만, 고문서를 훔치기로 했다.

기록 보관소에 있는 모든 물건은 황제의 소유였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는 엄중한 불법이었지만, 당장 주군인 공작이 반역자로 낙인찍힌 판국에 그런 걸 따질 때인가 싶었다.

그렇게 그가 보관소를 떠나고 난 직후의 일이다.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날 보관소의 주변에서 발견한 사람은 그럭저럭 깨끗한 로브를 걸친 채 재색 가방을 메고 거리를 지나는 호리호리한 금발의 젊은 남자뿐이었다.

물론 병사들 사이에는 마법사 출신의 조사관도 있었지만, 시리스는 현자였다. 그들의 사이에서 몰래 빠져나오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물론 약간의 행운도 작용했다.

그리고 그날의 오후, 한 조각의 양피지를 들고 공작의 집무실을 찾은 시리스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아스틴은 이런 상황에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몹시 안심했지만, 시름 가득한 얼굴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사실은 눈치를 챘다.

“좋은 상황은 아닌 듯합니다.”

아스틴은 조각을 읽어내려갔다.


 

……8시대 2130년, 가을, 시작은 어느 숲지기의 보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잡초에서, 어린나무, 고목, 100m에 달하는 거목에까지. 한번 피어난 겨우살이들은 작물 전체로 퍼져나가 일대를 메마르게 했다. 그렇게 잠식된 식물은 어떤 열매도 맺지 않고 싹을 틔워 내지도 않았다.

…… 혹한이 벌써 47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제 이 땅에 살아 있는 것들은 거의 없다. 사방이 메마르고 수풀은 찾아볼 수 없이 황량하기만 하다.


 

“8시대 어느 군주가 남긴 기록입니다. 오래전 기록이라 한참 찾았어야 했지요. 푸른색 겨우살이가 피기 시작한 해에는 항상 긴 겨울이 왔다는군요. 물론, 오래전의 기록이라 사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만.”

홍수, 가뭄, 지진.

그러한 재앙이야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혹한이라. 그런 재해는 처음 듣는 일이었다.

아스틴은 곰곰이 최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마물들의 증가.

샨시르의 멸망.

북대륙인들의 침공. 화룡과 성소의 불꽃.

새삼 이방 민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정보들이 마치 일직선을 그리는 별들의 행렬처럼 머릿속에서 짜 맞춰졌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담담히 입술을 열었다.

“우선은, 화염석 채굴량을 줄이도록 해.”

* * *

시리스와의 이야기를 끝낸 후, 아스틴은 곧바로 안채로 들어갔다.

침실은 조용했다. 길리어드는 커다란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호흡이 몹시 약했다.

살아 있기는 한 것인지, 자세를 추스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평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자세로 쓰러져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니, 2년 전 화룡을 죽이고 왔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오베론과의 전투 후 성 며칠간 침대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이미 스칼라이에서 라티프와 한 차례 전투를 치렀다는 말은 이미 듀랜트에게서 들었다. 그때도 어쩌면 무리를 받은 것 같다고 들었는데, 채 회복하지도 않고 오베론과 맞붙었으니 어쩌면 신체적인 무리가 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아스틴은 집무를 보아야 할 일이 없다면 밤낮으로 그를 간호했다.

펄린 백작 부군이 도와주긴 했지만 애초에 오베론은 용보다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은 상대였을 테다.

사실 그녀는 남편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륙 최고의 전사가 오베론이라고 생각했다. 결코 드래곤에 밀리지 않는 전사란 말이다.

거인족은 덩치만큼이나 걸출한 무장들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하필이면 작은 거인족인 그가 최고의 무장으로 뽑히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관자놀이 부근을 쓸어내리다 침대 옆 콘솔 위에 놓인 약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셔츠를 풀어 왼쪽 어깨 부분을 열었다. 어깨에서 쇄골과 심장이 있는 흉근의 아래까지, 무언가가 거칠게 물어뜯고 지나간 듯한 자국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아스틴은 말없이 고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시리스의 말에 의하면 거인들에게 입은 상처는 용들이 낸 상처와 비슷해서, 보통의 방법으로는 회복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세 시간마다 마법약을 꼼꼼히 발라 주어야 했는데, 그녀는 바쁘더라도 직접 안채로 와서 자식이 직접 발라 주었다.

문득 하필이면 굳이 오베론을 죽일 필요가 있었냐던 시리스의 물음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스틴은 어쩌면 예상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편은, 그래 호구는 아니니까.

가령 2년 전 정찬회에서 귀족들의 비웃음을 샀을 때도 그랬지만, 오베론의 전투마에게 어깨를 다쳤을 때도, 남편은 그저 후일을 기약했을 뿐이지 그것에 대응할 능력이 없어 그저 부들부들 떨기만 하고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스칼라이인 특유의 성격답게, 아마 복수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은근한 집착과 고집에, 아스틴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 물론, 속은 시원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도대체 짐승들도 아니고 물어뜯은 이유는 무엇인 걸까.

기사들의 백병전이야 원래가 한껏 흥분한 투견들과 같았지만, 그래도 정말 짐승들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지 않으냔 말이다.

그 무렵 매끈한 입술에서 마치 상처 입은 늑대가 내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길리어드가 옆으로 돌아눕더니 힘없이 눈을 떠올렸다. 아스틴은 다급히 그를 마주했다.

입술 사이에서 쉬어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스틴, 마티아스는?”

“옆방에서 테르나가 돌보고 있어요.”

며칠 전, 펄린 백작가에서 머무르고 있던 테르나와 마티아스가 돌아왔다.

그 말에 안심한 듯 길리어드가 한숨을 내쉬더니 입술을 삐죽이고는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아스틴은 다급히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여보, 왜 그래요.”

“이게 뭐야.”

“…네?”

“……내 꼴이 뭐냔 말이오, 이게.”

잔뜩 상심한 표정에 아스틴은 고개를 조금 치켜든 채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 무렵 바네사가 물약과 사탕 과자를 들고 왔다.

“그러게, 뭐 하러 오베론을 상대했어요. 펄린 백작 부군이 그 정도로 시간을 끌어 줬으면, 도망쳤으면 되잖아요.”

그 말에 길리어드는 한동안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비로소 끙, 몸을 일으키더니 이마를 짚고 있다가 이불 속에서 신문을 꺼내 들었다.

“어디서 났어요, 그거?”

분명히 신문 같은 건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가져다준 걸까. 듀랜트가 틀림없었다.

아스틴은 그것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길리어드는 그녀의 손을 피해 1면을 쳐다보았다.

말없이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와 동시에 동공도 심하게 떨렸다.


 

그날 전투의 광경을 목격한 황궁의 경비병들은 오베론 경을 두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두려움 없이 황궁을 지키기 위해 맞섰다고 전한다.

황실의 공식 대변인에게서 나온 말에 따르면 황제께서는 이번 사건을 감히 황실을 위협하고 섭정을 납치해 국가적 혼란을 일으키려는 무지한 짐승의 극악무도한 범죄 행위라고 규탄하셨으며 그런 의미에서 펠로데를 무단 점령하고 있는……


 

“그……쓰레기 같은 놈!”

길리어드가 신문을 냅다 던지며 욕지거리를 했다.

“개자식 같으니, 짐승같은게 누군데, 핏줄부터가 잔악한 놈들이-”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스틴은 약이 든 잔을 내밀었다.

“우선 약부터 먹어요.”

약을 마시고 나서도 길리어드는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모습에 아스틴은 이만 설탕 과자를 입술에 물려 주었다.

“참아요. 길리어드.”

“참으라고? 그것도 정도가 있지. 아스틴 당신은, 정말 괜찮은 거요? 그자는 제국법까지 제멋대로 손을 대면서 우리를 갈라놓았단 말이야. 나는 천하의 쌍놈이 되고 마티아스는 살인마의 자식이 되었어요. 그래도 참으란 말인가?”

“흥분하지 말고 냉정해져야 한다고 말했던 사람은 당신이었잖아요. 그리고, 스칼라이는 속인주의를 따르잖아요. 스칼라이법에 의하면, 우리는 아직 결혼 관계에 있는 상황일 텐데요?”

“하지만 여긴 ‘제국’이잖소. 여기서는…”

“여기는 ‘펠로데’예요. 그리고 나를 포함한 여기의 누구도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빼앗긴 건 반드시, 다시 찾아올 거예요. 누구도 당신을 나한테서 빼앗아 갈 수 없으니까.”

“그래도-”

길리어드가 무어라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깊게 한숨을 쉬고는 제 가슴을 쳐다보았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더니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스틴은 다시금 연고를 움푹 퍼서는 그의 가슴에 발랐다. 손길이 지나는 곳마다 반들반들 윤이 났다.

“전쟁을 치를 거예요.”

담담한 목소리에 그제야 길리어드가 진정하더니 입술을 열었다.

“안 그럴 수도 있잖소.”

“그렇게 할 거예요. 길리어드, 당신도 알고 있었겠지만- 이건 몇 년 전부터 예정된 일이에요. 그래서, 미안하지만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지금처럼 지내야 해요. 하지만, 난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설마, 날 위해서 이러는 건가?”

“우릴 위해서예요. 당신하고 나를 따로 분리하지 말아요.”

“하지만, 마티아스는 어떻게 해야 하지?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거나, 당신이…”

“하지만 제국법이 인정하지 않고는 달리 우리 관계를 회복할 방법이 없어요. 게다가 지금 재판소는 황제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죠.”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건가?”

“길리어드. 아무튼 나는 당신이 걱정이에요. 제발 빨리 나아요.”

아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길리어드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길리어드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파리한 입술에도 입을 맞추어 주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입술을 비비며 오랫동안 호흡을 나누었다. 색욕에서 기인하는 것과는 다른 애틋한 감정이 두 사람의 사이를 맴돌았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곧 집무실로 돌아가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아쉬웠는지 길리어드가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붙잡았다가도 놓고는 후, 숨을 내쉰다.

아스틴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방금 마신 약차의 쌉싸름함이 느껴졌다. 왜인지 가슴이 뜨끈해져서 그녀는 정말로 나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누워요. 좀 있다가 다시 올게요. 신문은 이리 주고요.”

그 말에 길리어드가 마지못해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 확실히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모습이었다. 아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길리어드를 내려다보았다.

어쩜, 제법 쇠락해 보이는 것이, 입술을 부르는 모습이었다. 아스틴은 허리를 굽혀 그의 이마에 한 번 더 입술을 맞추어 주고는 침실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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