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혹독한 겨울이 온다 (15/25)

15장. 혹독한 겨울이 온다

폭풍우는 새벽에 그쳤지만, 비는 아침에도 간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아스틴은 일찍 집무실로 향했다. 오늘은 휴일이었지만, 요즘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일할 때가 많았다.

빗물에 축축이 젖어 있는 비틀린 나뭇잎 하나가 창가에 붙었다가 바람에 흩날려갔다.

끝물에 다다른 가을의 세상이 흔히 그렇듯,모든 것이 메마르고 있었다. 게다가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날씨가 마치 초겨울로 접어든 것 같았다. 된서리가 빗물에 섞여 내리고 있었다.

그날은 복도를 청소하기 위해 하녀들이 부산 떠는소리가 조금은 예민하게 들렸다.

어째서인지, 창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기사단의 모습도 다소 황량하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책상에 앉은 아스틴은 눈앞에 놓인 몇 개의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올드배로우에서 발견했던 푸른 겨우살이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녀는 다시금 푸르스름하게 물든 가지의 표면을 만져 보았다. 한기가 조금 더 짙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냉기를 뿜는 식물이라니.

일단 아스틴은 그것을 옆으로 젖혀 두었다. 시리스가 며칠간 지방 시찰을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해결을 보류해야 했다. 우선 가지의 몇 개를 그의 방으로 보내놓았으니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든 조사를 할 수 있을 테다.

아스틴은 이윽고 가지 옆에 놓여 있는 두 개의 편지를 내려다 보았다.

황가에서 보내온 교서와, 펄린 백작이 보내온 밀서였다.

황제는 그녀를 다시 섭정이자 최고 자문관으로 삼고 황궁으로 불러들이겠다는 교서를 내렸다. 물론 그 이유는 보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바로 펄린이 전해 준 밀서 덕택이었다.

북대륙의 이방 민족들이 수천대의 전함을 끌고 북서쪽 해안가에 정박했다는 내용이었다.

전쟁이, 또다시 코앞에 온 것이다.

이런 상황에 섭정이라, 아스틴은 앞날이 예상되었다. 그녀는 흘끗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남대륙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날따라 펠로데의 모습이 맹수들에게 둘러싸인 초식동물처럼 느껴졌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 * *

펠로데에서 남서쪽, 제국의 수도와 비스듬하게 맞닿아 있는 야트막한 평원 지대에 거대한 포도나무 농장이 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 자라는 포도는 늦가을에 수확하게 되어 있었다. 껍질이 백색에 금빛이 흐르는 과실이었으며 그것을 와인으로 만들면 금색 술이 되었다.

지하의 암반 사이를 흐르는 특별한 마력의 지맥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농장의 모양이 요정의 날개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요정 미주였다.

그날 공작은 농장 시찰에 나섰다.

평소라면 성에서 형식적으로 보고를 받고 끝날 일이었지만, 부부가 방문했던 이유가 있었다. 아스틴은 도착하자마자 관리인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마주해야 했다.

“작년과 재작년까지 수확은 그럭저럭이었습니다만, 올해만큼 상황이 갑자기 나빠진 건 또 처음입니다. 이 상황으로 봐서는 내년에도 비슷해질 것 같고요.”

“상황이 늘 좋을 수는 없는 법이지.”

그녀는 뒷짐을 진 채 드넓은 포도나무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규칙적으로 서 있는 회백색 기둥들의 표면이 얼어붙은 듯 메말라 있었다. 황량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남서쪽에서 불어오는 마른 가을바람이었다. 문득 그녀는 올드배로우 숲을 잠식하고 있는 푸른 겨우살이들이 떠올랐지만, 그것과는 관련이 없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그녀는 직원들을 격려하며 노고에 대한 상여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물론 상태가 계속된다면 관리인에게 책임을 묻고 묘목의 수종 교체도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신중해야 했다.

농장의 입구, 파란색 백합들이 마치 실타래처럼 엮이어 지붕을 형성하고 있는 정자가 있었다. 가을의 끄트머리에 잠깐 개화했다가 겨울의 초입부에 저무는 수종으로 푸르스름한 꽃잎들이 팔랑팔랑 옅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길리어드는 기둥에 기대어 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는데 슬쩍 눈을 감으며 미소를 짓는 모습이 어째서인지 회상에 감싸인 듯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아스틴은 조용히 다가가 놀라게 해 줄까 하다가 언짢게 하지는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부터 꺼낼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그런 장난을 칠 상황도 아니었다.

굳이 그녀가 남편을 데리고 농장을 시찰 나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문득 오늘따라 저런 옆모습조차도 참 이기적으로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우선 들고 있던 와인병과 술잔을 근처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아, 끝났나 보군.”

“방금요. 우리 여기까지 왔으니, 한잔할까요?”

그녀는 찰랑이는 크리스털 잔에 술을 따랐다. 관리인이 올해 갓 출하한 미주라며 주었던 술이었다.

그가 술잔을 들어올리자, 아스틴은 살짝 잔을 기울여 건배를 나눴다.

포도나무의 작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저장고에서 갓 나온 술의 맛은 부드럽고 달콤 쌉싸름했다. 그것만으로도 잠시 안도가 될 만큼.

“저, 여보. 당신 말이에요. 스칼라이에 잠시 가 있는 게 어떻겠어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길리어드가 표정을 굳히더니 아스틴을 바로 마주했다. 조금은 당혹한 얼굴이었다.

“며칠 전에 이야기를 들었어요. 스칼라이에서 온 기사들 말이에요. 게다가 나는 당신이 스칼라이를 걱정하고 있는 거 알아요.”

길리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걱정이야 할 수 있지. 하지만,”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부러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당신의 여동생인데 걱정되는 건 당연하죠. 게다가, 결혼하고 나서 그 나라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없었잖아요? 이참에 좀 가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길리어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신…내가 그 나라를 방문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건가.”

“왜 모르겠어요. 다만, 나는 요즘 걱정 되는게 있어서 그래요. 사실 얼마 전 귀족 의회에서- 이방 민족에 대항해 북서쪽을 토벌하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다름 아니라 황제의 입에서 말이에요. 반대고 자시고 귀족들은 지금 황제의 눈치를 보고 있죠. 황가는 사실상 남서쪽 영토의 세력권을 거의 흡수했기 때문에 그의 비위를 거스를 사람이 없는 상황이니까요. 나는 지금 그게 굉장히 신경 쓰여요. 어쩌면 황제가, 또다시 당신을 이 전쟁에 끌어들일지도 모르니까. 사실, 난 아직도 철렁해요. 3년 전, 그때 그 전쟁 말이에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길리어드가 다소 분개한 어투로 말했다.

“아스틴, 당신은 나를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나도 알고 있소. 황제가 당신을 다시 섭정으로 불러들이겠다고 했다는 거 말이야. 그자는 당신을 이용해서 뭔가를 할 생각이야. 당장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이 성을 비우란 말인가?”

“그러니 하는 말이에요. 지금 폐하께서는 1년 전의 그분과는 달라요. 그리고 나는 섭정도 아니고 일개 공작이라는 신분의 귀족이고. 그때처럼 마음대로 당신을 전쟁에서 빼내 줄 수가 없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특히 황제는 그 일을 기억하고 있으니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게끔 수를 쓸 거예요. 전… 당신을 전쟁터에 보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잠시 당신의 모국으로 가 있으라는 거예요. 이번만큼은 제 말을 들어요. 스칼라이로 가서, 이번 일이 무마된다면 그때 돌아오세요.”

길리어드는 말없이 입술을 다물고 있었다.

말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스틴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황제는 펠로데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명분을 만들테니까. 그러니 그녀는 이전에 모국인 스칼라이로 그를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제후들에게는 다소 눈치가 보이는 행동을 테지만, 눈치 빠르고 야망 있는 황제가 그것을 두고 그녀를 꼬집을 이유가 없었다. 괜히 스칼라이를 적대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길리어드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 * *

그날의 오후, 안채로 들어온 부부는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길리어드는 마티아스와 놀아 주어야 했다. 그들이 성을 비우는 동안 마티아스는 아버지를 울며불며 찾았던 것이다.

실컷 아버지의 품안에서 놀던 마티아스가 지쳐 하품을 시작할 무렵에야, 그는 뺨을 살며시 간지럽히고 입술을 맞춰 준 후, 품에 안아 아기방으로 보냈는데 그리고 나서야 근처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아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감정의 상태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자신이 지금 화가 나 있는지, 아니면 그녀의 말을 결국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한심해서 무력감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심 마음에 걸리는 일은 있었다.

현재 스칼라이의 상황이었다.

그는 모국에 간섭하지는 않으려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귀를 닫을 수는 없었다.

지금 스칼라이는 드래곤으로 인해 골치를 앓고 있었다. 바로 동쪽 사막의 지배자인 라티프로부터.

용들은 원래 각자의 영역을 철저히 수호하고 있다. 그래서 수티하가 남대륙의 바에스트 산에 똬리를 틀고 있는 한, 라티프는 섣불리 서쪽을 침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수티하를 자신이 죽인 것이다. 그것은, 라티프에게는 기회였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길리어드는 스칼라이의 문제를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 나라의 왕은 동생이었다. 어엿한 군주가 된 그녀는 강단 있게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그는 프리실라가 보내온 편지를 떠올려 보았다. 그저 단순한 안부였을 뿐, 용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적혀 있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실 아내 쪽이 더 중요했다. 펠로데를 위해서라도 동생의 일은 뒤로 미루어야 했다.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아스틴은 신문을 접어 테이블에 내려놓고는 그러한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길리어드는 다소 화가 난 표정이었다. 고집 센 사람을 설득하는 것에 평소라면 시간을 들이겠지만, 지금은 약간의 강압이 필요할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그냥 도망쳐 있으라는 게 아니에요. 길리어드…그곳에서 당신이 꼭 해 줘야 할 일이에요.”

“무슨 일을 시키려고.”

길리어드가 마지못해 물었다.

“저는 당분간 바쁠 거예요. 그리고 펠로데는 군주가 없을 때를 대비하지 못하는 영지가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죠. 남부는 드라스터의 거대 성벽이 방어하고 있을 테니 안심할 수 있지만, 문제는 역시 당신의 나라예요. 우리는 화친을 맺었지만 당장 내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그걸 깊게 신뢰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 당신이 가 있어 달라는 거예요.”

그 말은 일종의 사절 역할을 맡아 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길리어드는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내를 이곳에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다음의 일들이 예상되었다.

섭정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황제가 아이도 아닌 상황에, 나라의 어머니와 같은 자리를 부여하겠다는 말은, 즉 그것이었다.

필경 황제는 아내를 북서부로 보낼 것이다.

전쟁이든 교섭이든 어려운 일을 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아내의 말대로 펠로데는 군주가 부재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아내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다.

프리실라는 즉위하고 난 후,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내와 계약했던 대로 남쪽의 황가를 견제해 주고 있었다.

아스틴은 그런 선의에 좀 더 확고한 보답을 하면서 은근히 황제를 압박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아직 중북부와 동부에서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말이다.

길리어드는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열었다.

“…사실 당신의 말대로, 걱정은 돼요. 그놈의 드래곤도 문제지만, 진짜 걱정되는 건 다름 아니라 그자의 행동이야.”

“전(前)국왕 말인가요.”

“그래요. 나는 프리실라가 보낸 기사들로부터 그 애의 편지를 받았소. 그 애는 편지에서 용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쓰지 않았어요. 하지만 기사들은 달랐지. 나한테 라티프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들을 하소연 하는데, 나더러 어쩌라는 건지. 듣자마자 그자가 시킨 짓이라고 생각했소. 그자는… 늘 나를 더러 아버지와 똑같다고 하면서 나를 싫어했지. 그런 주제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원하는 대로 부려 먹었었으니까.”

아스틴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럼…그분이 국왕을 이용해 당신을 끌어들이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건가요?”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만 내가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어요. 사실, 내가 수티하를 죽이지만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상심하는 길리어드의 모습에 아스틴은 미소를 지었다. 그 고뇌를 이해하고 있다.

사실 어떤 남편이라도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아내를 두고 나라를 떠나고 싶지는 않은 법이었다. 그리고, 아내도 마찬가지다. 비록 전쟁을 앞두고 있더라도, 남편에게 사랑하는 땅을 두고 도망치라고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만약에 대비해 조심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없는 법이다.

“길리어드, 나를 지켜 주세요. 그리고, 내가 당신을, 펠로데를 지킬 수 있도록.”


 

아스틴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나의 펠로데는 당신을 지켜 줄 거예요. 그게 당신의 나라와 약속한 일이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돌아오실 수 있을 거예요.”

길리어드는 마지못해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우선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아스틴이 입술을 열었다.

“ 참, 그리고 이제 에리크를 데려가세요.”

“-에리크를?”

길리어드의 표정이 옅게 굳었다.

* * *

다음날, 스칼라이로 향하는 사절단이 꾸려졌다.

아스틴은 국경까지 그를 직접 배웅했다. 말없이 행렬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곁에 있던 시리스의 얼굴은 좀처럼 그렇지 않았다.

“각하, 차라리 부군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보내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그 나라의 상황을 알고 계실 텐데요.”

“…시리스. 만일 내가 그를 다른 곳으로 피난 보낸다면, 황제에게 무슨 변명을 해야 하나. 그가 가만히 둘 것 같아? 이건 그때 오르킬리아스의 사건과는 달라. 지금 황제는 나한테 충분히 능멸에 대한 죄를 물을 수가 있는 사람이야.”

“하긴,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에리크까지 돌려주다니, 로렌스 가를 믿으시는 겁니까?”

“본인이 알 거야. 나는 그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제재할 방법 정도는 마련해 두었으니까.”

시리스는 그 말을 어느정도는 납득했다.

지난 2년간 아스틴은 에리크 로렌스를 정중히 대우했다.

철화의 사건이 있고 난 뒤엔 에리크를 안채에서 내어 보냈고, 얼마 후에는 성 밖에 집을 마련해 주어 보통의 귀족처럼 편히 살게 해 주었던 것이다.

무관의 일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고, 집안 형제들을 불러들여 선물과 연회를 베풀게 했으며 종종 스칼라이도 다녀오게 했다.

게다가 명색이 시침 시종 무관이었던 만큼 펠로데 본가에 행사가 열리면 참석하게도 해 주었는데, 설리번 로렌스는 그것을 자신의 눈치를 봐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시리스는 그것이 그녀가 로렌스 가문을 조금씩 포섭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에리크 본인 또한 그러한 역할을 맡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명예를 지키면서 무사히 모국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단 하나, 아버지를 대신해 집안에서의 입지를 차지하는 것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아무튼, 상황이 좋게 풀려야 할 텐데요.”

시리스는 지금의 판단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일단 자신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스틴, 지난번에 보내신 겨우살이 말입니다.”

“그래, 알아낸 거라도 있나?”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느낌이 좋지는 않습니다. 좀 더 확실히 조사하고 싶은게 있는데, 혹시 제가 황실 기록 보관소에 들어갈 수 있게끔 해 주시겠습니까?”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 주지. 하지만 정체는 숨기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공작님, 정말 북서부의 문제-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우선은, 지켜봐야겠지.”

“아무튼, 정말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 * *

이틀 후, 황제는 아스틴을 황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녀가 섭정으로 복귀한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당시 황궁에는 이미 북쪽의 이방 민족이 20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침범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날의 홀은 평소보다도 더욱 거대하고 화려해 보였다. 사방에 피어오르고 있는 금제의 난로에서 뜨거운 화염석이 지글지글 끓어오르며 마치 태양처럼 빛을 내고 있었던 탓일 테다.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는 황제는 그야말로 거대한 권세를 가진 지배자였다. 그녀가 섭정과 자문관의 직위를 내려놓고 있는 동안, 그는 남서부와 구 샨시르의 영토의 대부분을 규합하고 그 지역에 있던 세력들을 휘하에 받아들였다. 사실상 그녀를 제외한 제후들은 황명을 거절할 수 없어 쩔쩔 매는 수준에 있었던 것이다. 

아스틴은 어깨를 감싸고 있는 까만색 숄을 슬며시 붙잡고는 단단히 여몄다. 오늘 그녀는 몸에 딱 달라붙는 검푸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섭정 시절 흔히 입던 옷으로 자신의 겸손함과 황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색이었다.

“ 이리 오게.”

섭정이 된 그녀에게는 옥좌 바로 아래쪽 계단까지 갈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수많은 가신이 그녀에게서 스무 걸음 정도 물러나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고개를 들라는 손짓에 아스틴은 정중하게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휴가가 참 길었지? 몸에 살이 좀 붙은 걸 보니, 건강은 되찾은 모양이군.”

아스틴은 말없이 한번 더 고개를 숙였다.

옆에 서 있던 마법사 서기관이 깃펜을 툭툭 지팡이로 두드리더니 무언가를 서걱서걱 써 내려갔다. 그날따라 펜촉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이건 참 익숙한 광경이었다. 어째서일까, 그녀는 속으로 실소가 나왔다.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던 황제가 손을 들어 가신들을 모두 물렸다. 기묘하게도 그중에는 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윽고 홀이 텅 비자, 황제는 천천히 옥좌 아래로 내려왔다.

두 사람은 홀에서 내궁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정원을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팽팽하기 그지없는 적막의 끝에, 이오넬이 입술을 열었다.

“얼마 전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 지금 이대로는 제국이 온건하게 발전하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말이야. 참, 자네는 현명하니까 내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 거라고 생각하네.”

“영광이죠. 폐하를 위해서라면 성심껏 저의 지혜를 꺼내어보겠습니다.”

“골치가 아파. 남쪽이 이제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는데, 한숨 좀 돌리려고 하면 북쪽에서 사고가 터지니까 말이야. 겁쟁이들이 제도를 떠나 남부의 도시들로 숨고 있어. 참, 신기하지? 무슨 지랄을 하더라도 세상은 바뀌질 않으니.”

“그렇겠지요. 사람들이란 좀처럼 나쁜 기억은 쉽게 잊지 못하니까요.”

“내 말이. 그래서 처음에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네. 자네와 같은 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자들을 끝장내 버리고 대륙을 위협에서 구하자고 말이지. 문제는…한번 치른 전쟁을 다시 치러 봤자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든다는 거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가 그 전쟁을 치러서 얻은 게 뭐가 있나? 오히려 북동부의 제후들만 실컷 고생했지. 지금도 고생하고 있고 말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해서 나의 실무진들이 해결책이랍시고 내놓는데, 뭐 하나 신뢰가 가야 말이지. 아스트리데. 들어 보게나. 첫 번째 방안은 수도를 남부로 옮기는 거야.”

“남부로… 말입니까?”

“그래. 천도한 이후에, 수도에 황군을 배치해 싸우자는 건데, 난 판단이 제대로 안 서. 고작 그런 놈들 피하느라고 수천 년간 제국을 지켜 온 이곳을 옮겨? 이건 뭐 쥐새끼 무서워서 고양이가 도망치는 꼴이니.”

이마를 짚으면서 황제는 옅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는 2년 전에 하나 깨달은 게 있어. 나를 섬긴다는 작자들이,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 말이야. 하나같이 자신의 병사들을 빼돌리려고 기를 쓰는데, 그것만 봐서도 새삼 이 나라가 얼마나 불완전한 상태인지 파악할 수 있었거든. 물론, 그건 모두 군주인 내 탓이 크지만. 내가 그들에게 그렇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말이니까. 그렇지?”

“설마요,”

고개를 흔드는 아스틴의 모습에 이오넬은 미소를 지었다.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싫더라도 해야 할 일은 해야지. 제안 하나 할까, 아스트리데. 난 자네가 사절이 되어서 그놈들과 협상을 하고 와 줬으면 좋겠어. 전쟁은 지금이 아니라 먼 훗날의 후손들에게 맡겨 놓자고 말이야. 만족할 만한 대답을 받아오게. 그렇다면, 나도 자네에게 응당한 선물을 주지.”

이윽고 내궁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서서, 황제는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틴은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는 않았지만 침묵의 의미는 알았다.

오래 서로를 알아 온 사람들에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있다. 

황제가 내궁으로 들어가고 난 후에야 아스틴은 천천히 몸을 돌려 궁을 빠져나갔다.

물러 나오는 모습은 매우 느릿했으나 홀을 지나 긴 회랑으로 나왔을 때부터는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다.

어느새 출입구의 계단에 다다랐을 때,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마르첼이 다급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주변을 살피던 아스틴이 입술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바로 북서쪽으로 떠나야 해.”

“지금 바로 말입니까?”

“지체할 시간이 없어. 펠로데를 들르지는 않을 테지만, 자네는 사람을 보내서 녹스턴 경에게 기사단과 일반 병사들의 병력을 서쪽과 북쪽에 배치하라고 전해. 특히, 올드배로우의 북쪽을 막아야 해.”

“알레칸드로 지역 근처로 말입니까?”

“ 그래.”

“ 알겠습니다.”

그 무렵 한 무리의 가신들이 옆을 지나갔다.

대부분 남서부 출신의 거인 귀족으로 그녀에게 우호적인지 않은 자들이었다.

다들 그녀를 보고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떤 이는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스틴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그 무렵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재상인 토머스 켄티였다.

자신을 바라보며 슬몃 미소짓는 모습을 보자, 그녀는 황제가 말한 실무진이 누구였을지 짐작이 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명신은 살아서 이름을 남기지는 못하지만, 죽어서는 이름을 남길 수 있다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소름이 돋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죽음까지 바쳐야지만 충성을 인정받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근거가 있다고 해도 공평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아스틴에게 재상은, 재상과 같은 이들은 그렇듯 참 단순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황제의 옆에서 그의 의도에 따르며 그의 마음에 드는, 원하는 말만을 내뱉는 단순한 신하, 그의 말 한마디면 고개를 조아리고 심지어는 그것이 황가를 위해서, 제국을 위해서 최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맹목적인 충성심의 희생양. 아스틴은 그가 마치 실이 달려있지 않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얼굴의 모양이 사라지고 커다란 목각인형이 걸어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지가 보이지 않는 줄에 휘어감겨 제멋대로 휘둘리는, 비참한 인형의 모습이.

그녀는 팽팽히 입술을 다물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 재상의 문제는 나중의 일이다. 자신의 일부터 마무리 짓자고 생각했다. 조금 더 신중히, 그러면서도 빠르게 움직일수록, 미래도 달라지는 법이다.

그녀는 높다란 계단을 내려갔다. 어느새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빤히 자신을 쳐다보는 아스틴의 시선에 마르첼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얼마 후, 황실의 사절을 태운 마차는 바람 같은 속력을 내며 북서쪽으로 달렸다.

물론 아스틴이 그 마차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

아스틴은 황제가 분명히 그 마차가 회담장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수를 쓸 거라 생각했다. 애초에 지금의 명령은 결과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아스틴은 그의 심중을 떠올려 보았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남서쪽의 정리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중부와 북부의 제후들을 평정하겠다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표적이 되는 사람이 바로 그 대표인 자신인 셈이다. 그러니 어쩌면 살아와도 문제가 될 테고, 실패한다고 해도 문제가 될 테다.

어느 낡은 마차의 안에서, 아스틴은 영지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그녀의 지시대로 녹스턴 경은 펠로데의 군대를 북쪽과 서쪽으로 배치했다. 수도가 있는 방향이었고 다른 쪽은 북부의 올드배로우 숲이었다. 그녀는 안심했다. 만일 자신에게 위해가 될 때 즉시 군대를 움직일 방법을 강구할 수 있었으니까.

그날 마차에서, 그녀는 부하들과 함께 허름한 노인으로 변장했다.

그리고 북서쪽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제국도를 둘러 일부러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그곳은 처형한 시체를 버리는 지역이었다. 시체와 마물, 도적들이 즐비했고, 제국의 병사들은커녕 일반인조차 잘 다니지 않았다.

낡은 마차는 조심스레 달렸다.

그러나 수도를 벗어날 즈음에는 미친 듯이 속도를 높였다.

그녀는 최대한 황실의 입김이 닿아 있는 검문소는 피해갔다. 지나더라도 정체를 알리지 않고 뇌물을 주어 넘겼던 것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펄린을 만나고 가야 해.”

“백작이 이미 알고 있을까요?”

“북부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려 준 사람이 백작이야. 모르는 게 이상하지. 아마, 내가 자신을 만나러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야.”

“그러면 뭔가를 원하는 거겠군요.”

“문제는 지금 내가 ‘일단은’ 내 밀 수 있는 패가 별로 없다는 거야. 내키지는 않지만 조금 협박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우정을- 실험해 봐야겠군.”

“크게 믿지는 마십시오.”

마르첼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하루하고 이틀을 달렸을 즈음이었다. 길조차 거의 나 있지 않은 빽빽한 숲길의 끝으로 거대한 해안가를 끼고 있는 도시가 나타났다.

고약한 냄새에 아스틴은 미간을 찌푸렸다. 멀리 보이는 갈색 성벽의 주변, 수많은 시체가 나무로 만든 책형대에 꽂혀 있었는데, 도적이나 빈민, 로미나들로 보였다.

펄린의 영지에 도착한 것이다.

자연스레 느껴지는 냉혹하고 거친 기운에도 아스틴은 덤덤히 그것을 마주하고 있었다.

흔히 중부나 남부의 사람들에게 북부 귀족들은 무식하고 미개한 자들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아스틴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문화가 다른 거였다. 굳이 말하자면, 이 지역의 사람들은 북대륙인들과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했다.

투박하고 거칠고 잔정이 없지만, 그만큼 강하고 냉정하며, 사리 판단이 뛰어나고 단합력이 뛰어났다. 그랬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어서 와, 아스틴.”

펄린 백작은 야트막한 홀의 끄트머리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 앉아 연초를 피우고 있었다.

노파로 변장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선이 고운 눈썹이 찌푸려졌다. 이윽고 백작은 물고 있던 장죽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보아하니, 성찬 같은 건 즐길 여유가 없을 것 같군.”

“……그래. 골치 아픈 일을 맡았거든.”

백작은 당연히 이번 사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거였다. 자신의 영지와 인접한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 테다.

아스틴은 하지만 펄린이 적어도 자신을 막아서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펠로데의 기병대 일부는 지금 올드배로우의 북서부를 지키고 있다. 바로 펄린의 영지를 향해서 말이다. 만에 하나, 불상사가 생길 일에 대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과의 교섭에 실패하면 북쪽에서부터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어차피 백작도 그런 상황은 좋아하지 않을 거였다.

장죽을 내려놓으며, 그레이스가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교섭을 할 건데?”

“원하는 걸 줄 행각이야.”

“그놈들이 원하는 게 무언지 어떻게 알고?”

아스틴은 말없이 마르첼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가 가지고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청금빛 사슬이 걸려 있는 둥근 원판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2년 전, 길리어드가 이방 민족의 우두머리와 스톰 와이번을 쓰러뜨리고 가져온 전리품이었다. 왕의 애뮬릿으로, 이방민의 혼이라 불리는 증표였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레이스가 비소를 보였다.

“그놈들을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니야? 오히려 싫어할걸.”

“나도 좋아하라고 주는 게 아니야. 대화의 방식을 좀 ‘부드럽게’ 하기 위해서지. 아무튼, 지금은 너하고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는데.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두르도록 해.”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서. 우선- 친구로서 충고 하나 할지. 너, 그놈들과의 교섭에 성공해서 돌아간다고 해도, 그냥 쉽게는 끝나지 않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지난 2년동안 황제는 준비를 마쳤거든.”

“…그걸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알아. 그러니까 남편이랑 아들을 미리 스칼라이로 보냈겠지. 황제는 그럼 이후의 대책을 준비해 놓았을 텐데. ‘만일’에 대비해서 내가 좀 도와주지. 어때?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읊어나 봐.”

“지금 올드배로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어?”

“그래, 혹시 ‘그게’ 뭔지 알아?”

“몰라. 하지만 알레칸드로의 북부에 사는 북대륙 출신 거인족 노인 몇 명이 그런 말을 했다더군. 머지 않아 큰 추위가 올 거라고 말이야. 어디서는 성소의 불꽃이 죽어간다는 말도 나오고. 나도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지. 그딴 어려운 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이딴 혼란스러운 상황에 너희가 황가와 전쟁을 하든 말든, 우리와 북부 지역은 그것에서 빼 달라는 말이야.”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틀었다.

“이제 와 손을 떼겠다? 칼을 오래 숨겨 놓으면, 녹슨다고. 말한 사람은 너잖아.”

그레이스가 장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것도 상황마다 다른 거지. 2년 전에 내가 경고하지 않았었나? 미리미리 손을 써야 한다고. 차라리 너는 샨시르가 무너졌을 때 곧바로 그자의 목을 쳐야 했어. 그런데 넌 그놈의 무사안일주의로 섭정의 직위를 내려놓더니 사실상 2년간 손을 놓고 있었지. 그놈이 이렇게까지 압박할 수 있게끔 만든 건 너야.”

아스틴은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 나도 가족은 챙겨야지.”

“ 누군 가족이 없나? 태평하게 아내와 엄마 노릇을 하는 건 네 자유지만, 우린 하소연을 할 정도로 편한 사람들이 아니야. 아무튼, 이런 상황에 황제가 견제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그리고 우린 예전 전쟁에서 충분히 피해를 봤고, 지금도 대가를 치르고 있지. 게다가 어차피 승자는 너 아니면 황제 둘 중 한 사람이 될 텐데, 집안싸움에 우리까지 가세해서 들들 볶여야 하나?”

아스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펄린의 주장은 간단했다. 자신들은 더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참 반박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괜히 그녀를 자극하는 것도 현명한 일은 아니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틴은 결국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은 군주였다.

보통이 아닌 성격이었음에도 친구였던 이유는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감정이 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좋아, 일단 도움을 받고 생각해 볼게.”

“잘 생각했어. 그럼 일단은 그놈의 ‘평화적인’ 교섭부터 하러 가라고. 그런데 설마- 그 꼴로 가려는 거야?”

“설마, 옷 정도는 빌려줄 수 있지?”

아스틴은 백작의 영지에서 겨우 제국을 대표하는 사절다운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그레이스는 부군인 루카스에게 지시해 자신의 기사들과 함께 그녀를 호위하라고 명령했다.

* * *

그렇게 아스틴은 펄린 가문의 호위를 받았다.

그녀는 펄린이 다스리는 해안가의 도로를 따라 북서부에 있던 회담장에 도착했다.

횡량한 황무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때 북서부 제후들이 세운 거대한 도시와 마을들로 북적했던 장소였지만, 제 황폐화되어 수풀만 무성한 황무지가 되었다.

황위쟁탈전의 결과 승리한 황제가 그 보복을 위해 지역 전체를 초토화했기 때문이다.

아스틴에게는 아무리 보아도 정이 안 생기는 지역이었다.

한때 그녀가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자, 동생들이 죽어간 장소였으니까.

회담장은 황무지의 끄트머리에 있는 해안가에 마련되어 있었다. 뒤쪽으로 절벽을 내려다보고 있는 삭막하고 서늘한 장소였다.

절벽의 아래로 아스틴은 무수한 드레이크 전함을 내려다보았다.

이방민들의 선박이었다.

문득, 4년 전의 혼란스러운 기억이 떠올랐다.

“하루 늦으셨군요.”

마치 곰 같은 체구에 고수머리를 땋은 사절이 그녀를 반겼다.

등에서부터 이마와 양쪽 뺨에 푸른색 염료로 문양을 새기고 있었는데, 붉은 곰의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아스틴은 우선 사과를 했다.

“도중에 마차를 바꾸어 타야 했거든요. 기다려 주셔서 고맙소.”


 

사절은 직설적으로 제안했다.

“우리가 바라는 건 공식적인 토지의 문서요.”

“…여긴 엄연히 제국의 땅이오만.”

“하지만 지금 이곳에 집을 짓고 사는 자들은 우리들의 가족이지. 어차피 우리들이 정복한 것이나 다름없고, 제국에서는 관심조차 없이 버려 놓은 곳이 아닌가? 문서를 넘긴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드리겠소.”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어떤 시대에는, 땅보다도 차라리 황금이나 마석을 가지는 게 좋을 때가 있소. 차라리 그걸 가져가시지.”

“그런 거야 우리한테도 많소. 우리한테 필요한 건 땅이야.”

“대체 이런 땅을 가져서 뭐 하려고? 사방이 불쏘시개로 가득한데. 당신들은 충분히 자기들이 강하다고 자신하겠지만, 그건 아직 제국의 위력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기 때문이오. 지금은 제국이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건 금방 해결될 거요. 혼란이 사그라들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총력을 다할 테니까. 그때가 되면 당신들의 본토도 위험해 질 텐데. 괜찮겠소? 고작 남대륙에서 손바닥 한 뼘도 안 되는 땅을 지키자고 제국을 상대하려고 하는 게 말이야.”

“소유하고 나면 엄연히 달라지는 문제요. 그때부터는 우리가 평화와 자유를 논할 수 있을 테니까.”

“평화라-저렇게 전쟁 준비를 하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자유를 논한다는 건 어폐가 있는 말이지. 그렇지 않소?”

아스틴은 조금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사절은 물끄러미 바다를 쳐다보고 있다가 입술을 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조건은?”

“금 180톤과 마석 20만 데니크와 교환하지.”

“교섭에 응하지 않겠다면?”

“자네는 내 목을 베고 나라로 돌려보내게. 그 전에 천천히 북서쪽으로 진군하고 있는 우리 가문의 기사들을 상대할 각오는 해야 할 거야. 여긴 피투성이가 될 테고, 그 다음에 남는 건… 거대한 불꽃뿐일 테지.”

사절에게서 못마땅한 표정이 스쳐 갔다.

잠시 초조하던 얼굴이 체념하는 그것으로 변해 갔다. 

아스틴은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이방인들은 계산에 빨랐다. 과거 제국과의 전쟁에서 입었던 피해를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들을 두고 야만인이라고 손가락질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도 냉철하고 무서울 정도로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이 자들이었다. 애초에 침략자가 야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아스틴은 그즈음 가지고 온 나무함에서 죽은 왕의 애뮬릿을 꺼내었다.

“이건, 우리 집안이 전리품으로 가지고 있으려 했지만- 이번엔 돌려주겠네. 자네들에게는 소중한 물건일 테니까.”

하지만 사절은 감명은커녕 불쾌한 듯 그것을 집더니 말없이 멀리 절벽 아래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다소 심드렁하게 입술을 열었다.

“하찮은 패배의 증거 따위, 쓰레기만도 못한 물건이지. 좋아. 그렇게 하겠소. 다만 그것들을 일시금으로 지급해야 할 거야. 새로운 왕은 성미가 급하거든.”

“급하기도 해라, 하지만 평화는 천천히 쌓아가는 거야. 제국도 자네들의 신의를 보아야 하니까. 제안한 물자는 10년에 나눠 보내질 걸세.”

“…참, ‘제국’이 너무 치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신중한’ 거라고 해 주게. 우린 지금부터 동지잖아?”

그렇게 가느다란 평화가 형성되었다.

계약서가 작성되고 서명이 끝나자, 사절이 흘끗 아스틴의 얼굴을 살피더니 약간은 시무룩하게 입술을 열었다.

“ 보아하니 남대륙에도 파란 겨우살이가 돋아났다고 하더군. 당신들도 알고 있는 사실인가?”

“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러자 사절은 부러 으스스한 미소를 지었다. 믿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 그런 현상이 일어나면 꼭 긴 겨울이 오지. 북대륙의 끝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약해 빠진 남대륙인들이 그걸 잘 견딜 수있을지는 모르겠군. 모쪼록, 긴 겨울 잘 보내도록 하시오.”

회담은 그렇게 끝났다.

아스틴은 그들이 타고 온 전함이 완전히 북쪽으로 사라지고 난 후에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어째서일까, 교섭은 무리없이 끝났지만 결과가 좋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히 흔들리는 하얀 파도를 쳐다보고 있었다.

멀리 동쪽에서 귀를 찢는 소음이 들려온 게 그 무렵의 일이다.

동쪽 하늘이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올드배로우의 동쪽, 미스트리스 삼림과 맞닿아 있는 지역이었다. 그 색이 얼마나 짙었는지 까마득히 먼 이곳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구름은 살아있는 짐승 같기도 하고 어떤 마법으로 인한 저주 같기도 했다.

이윽고,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아스틴은 길리어드를 떠올렸다.

그는 지금쯤 스칼라이에 도착했을 것이다. 모쪼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일단 그녀는 자신부터라도 한시라도 먼저 펠로데로 돌아가자고 생각했다.

루카스 펄린이 가져온 마차에 오르려던 무렵이었다. 거친 뿔피리 소리와 함께 수백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아스틴은 검붉은색의 말 위에 올라 있는 오만한 사내의 표정을 마주했다.

바로, 오베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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