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장. 마구간에서의 은밀한 시간 (14/25)

14장. 마구간에서의 은밀한 시간

달이 휘영청 흐드러지게 떠 있는 늦가을의 밤이었다.

어느덧 자정에 가까운 시간, 아스틴은 조그만 손이 머리를 움켜쥐는 느낌에 피곤한 눈꺼풀을 게슴츠레 떠올렸다.

처음에는 날카롭게 신경을 세우고 경계를 하다가도 이윽고 침대 아래에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둥그렇고 작은 눈동자를 바라보자 경계를 누그러뜨리고는 둥글둥글한 미소를 지었다.

연녹색 눈동자를 지닌 사내아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티아스 펠로데. 1년 전에 태어난 그녀의 첫 번째 아이였다.

그 소동을 겪고 낳은 아이였다. 이름은 스칼라이 6대 이전 국왕을 따라 지었는데, 그 거친 스칼라이에서도 생전 전쟁 한번 겪지 않고 평온히 살았던 국왕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별명이 ‘평화왕’이었다.

아스틴은 빤히 마티아스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뺨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그러다가 홱 등을 돌렸는데, 마티아스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더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 어머님….”

침대로 올라오게 해 달라는 손짓이었다.

짧은 다리로 버둥거리며 어째서 그렇게도 열심인지. 하지만 후계자가 마음대로 공작의 침대에 올라와서는 안 되었다.

유모를 불러 아이를 안 보고 뭐 하느냐고 탓할 수도 있었지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커스를 품에 안았다.

나름대로 지쳤던 모양인지 입술을 오물거리던 마커스는 폭 아스틴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침상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아…아버님은요?”

아스틴은 침상의 반대쪽을 쳐다보았다.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요즘 길리어드는 밤중에 자주 자리를 비웠다. 자다 잠시 깨어나 보면 사라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녀는 대체 밤마다 어딜 가는 건지 궁금했다.

잠시 자리를 비우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남편은 그렇게 나섰다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물론 아스틴은 별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육아와 기사단의 일을 병행해야 해서 요즘 그가 바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니, 밤을 틈탄 못다 한 일들을 할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우선은 마티아스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 * *

다음날의 아침, 그녀는 품 안이 허전한 느낌에 침대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들어온 길리어드가 마티아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문득 아스틴은 깨워서 대체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렇게 아침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마티아스가 태어난 후, 그들 부부는 홀로 나가는 일이 드물었다.

아무래도 마티아스가 어렸기 때문에 정숙한 식사를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얀 피부에 풍만한 체구의 유모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허리를 짚으며 마티아스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뚱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대체, 언제 침대에서 도망치신 거예요? 내가 누차! 아기 침대에서 주무셔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바르도 부인, 그러니까 조심해 주세요.”

“바네사, 나도 밤에는 잠을 자야 하니까 그렇죠.”

유모인 테르나 바르도는 시리스 바르도의 아내였다.

대륙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마법사들의 도시, 탈리유에서 마법사들의 전당을 경영하고 있었다.

시리스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결혼했던 터라 벌써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다.

당시 주로 유모가 되는 건 친인척 중에서도 가문의 주인인 여자들이었는데, 테르나는 펠로데 가와는 먼 인척으로, 네 살배기 아이를 기르고 있었기 때문에 유모의 조건에 적합했다. 또한 당시 아노르인 출신 마법사 유모에게서 자란다는 것은 영광인 일이었다.

그녀는 막내인 클라리스를 데리고 영지를 떠나 펠로데에서 잠시 머무르기로 한 것이었다.

화가 난 테르나의 표정에, 마티아스가 입술을 삐죽하게 내밀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테르나는 옅게 한숨을 쉬고는 아이를 안아 젖을 먹였다.

그러면서 흘끗 아스틴의 얼굴을 살폈다. 어째서인지 그날따라 공작의 안색은 조금 어두웠다. 잠시 걱정스레 그 모습을 쳐다보던 그녀는 마티아스에게 다시금 엄격히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튼, 마티아스 공자님. 다음에 또 이러시면 화낼 거예요. 어머님은 밤에 푹 주무시고 낮엔 집무를 보셔야 하는데, 아드님이신 분이 도와주진 못할망정 이렇게 고생을 시키면 되나요.”

마티아스는 듣는 둥 마는 둥 테르나의 젖을 빨기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뚱한 모습이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무렵 길리어드가 나타났다.

아버지를 보자마자 마티아스는 테르나의 젖을 입에서 놓고는 손을 뻗었다.

“아, 아버님-”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길리어드는 덥석 아이를 안았다.

“그래 이놈아, 몇 살인데 잠자리를 가려.”

사뭇 진지하게 말하면서도 마티아스의 엉덩이를 토닥였는데, 테르나의 목소리를 들었던 터다.

아스틴은 다정히 등을 쓸어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티아스를 기르는 건 오로지 길리어드의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훈련과 교육, 기타 모든 것이 길리어드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

그건 결혼 전에 이미 합의한 내용이었다.

그는 아이의 양육을 철저히 자신이 도맡고 싶다고 단호하게 말했는데, 그것이 전통적인 스칼라이의 육아이자 교육 방식이라고 했다. 아스틴은 그가 자신의 집안으로 장가오는 만큼 부부가 함께 육아하는 제국식의 방식을 선택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길리어드는 그 부분에서는 좀처럼 의견을 좁혀 주지 않았다.

스칼라이에서 육아는 전적으로 남편들의 몫이었다. 의무가 아니라 권리였는데, 그랬기 때문에 스칼라이 아이 중에서 가장 비참하다고 불리는 계층은 아버지가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었다.

스칼라이에서는 어머니에게서 빨리 독립하지 못하고, 아버지와의 교감과, 아버지에게서 훈련받지 못하고 자란 인간은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런 정서가 팽배했던 탓이다.

그렇다 보니 스칼라이의 남자들은 자신의 아이가 어머니의 다리 사이로 나오는 순간부터 자신이 만든 배냇저고리에 감싸서 직접 유모와 하인, 시동들을 구하고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훈련시키는 일을 전부 도맡았던 것이다.

마티아스도 마찬가지였다. 길리어드가 육아 계획을 어찌나 철저하게 짜 두었던지, 아스틴은 아들이 조금 불쌍해졌을 정도였다.

아스틴이 생각하기에 그런 스칼라이의 풍습은 일종의 편협한 고정관념이었지만, 그녀는 제 나라를 떠나 장가와야 하는 남편의 마음을 헤아렸다. 펠로데로서는 꽤나 파격적인 결정이었지만, 후계자를 양육하는데 스칼라이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이윽고 마티아스의 입술에 입을 맞추어준 길리어드가 테르나에게 아이를 넘겨주고는, 이만 기사단으로 나가려는 듯 문을 열었다.

아스틴은 그 틈을 타서 물었다.

“저 길리어드…요즘 밤에 자주 자리를 비우던데,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산책을 좀 하고 있소. 어째서인지 잠이 잘 안 오거든.”

밤 산책이라. 역시 그렇겠지. 아스틴은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바라보던 길리어드가 살며시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추었다.

“그럼, 저녁에 봐요.”

* * *

그날의 휴식 시간, 아스틴은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며칠째 비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어두웠다.

오전, 펄린 백작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요즘은 부쩍 북대륙 이방 민족의 침입이 잦아졌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아스틴은 자신이 걱정하던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이제 북서쪽을 거의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는 그들은 심심찮게 동쪽이나 남쪽으로 위세를 넓히고 있었다.

그거야 3년 전 전쟁이 터졌을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에 답변을 고민했다.

사실 1년 전 그 사건 이후로 그녀에게는 한 가지 더 고민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다름 아니라 용에 대한 문제였다.

길리어드가 화룡 수티하를 죽인 이후, 사실상 대륙에는 용들의 ‘군주’라 할 수 있는 존재가 사라졌다.

그래서 많은 용종이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굴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칼라이의 동쪽에 있는 사막지대를 다스리고 있는 라티프는 본격적으로 스칼라이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샨시르의 동쪽, 키르서스 산맥으로 모여드는 마물들의 수가 늘어났는데 몇몇 폭스테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마 잠든 용 카인더스트가 깨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에게 성소에서 있었던 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샨시르의 군주, 칼리파 샨시르는 화룡의 간계에 넘어가 자신의 도시를 전부 불태운 거였다.

신성한 불꽃을 훔치려 하다 실패하자 용의 감언이설에 놀아났다고 하는데, 괴이한 상상력이 아스틴은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런 것이 쉽게 만들어질 리가 없으니까.

성소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은 대륙의 지맥 전체에 마력을 공급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거인족의 기술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런 불꽃을 창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특별한 힘이 있다면 몰라도.

아무튼 그녀가 왜 그 불꽃을 탐냈는지 알 수는 없었다. 하나 짐작이 가는건,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유언이었다.

혹한.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단어였다.

그런 와중에 북대륙 이방 민족의 침입까지. 아스틴은 어째서인지 이런 사건들이 하나의 일에서 비롯된다는 느낌을 자꾸만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틴은 머릿속에 아련하게만 맴도는 그것을 우선은 접어놓았다.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었다.

“공작, 듀랜트 윈터너입니다.”

“아, 들어오게.”

조심스레 문이 열리더니 듀랜트가 그녀를 향해 묵례했다.

아스틴은 듀랜트의 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평소의 부스스하던 모습이 사뭇 깔끔해 보였다. 아마 자신의 호출로 인해 신경 쓴 것이 틀림없었다.

“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 묻고 싶은 게 있거든. 거기 앉게.”

사실 그들이 이렇게 서로 마주하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아스틴은 예의 오늘 아침, 약간은 어두워 보이던 길리어드의 안색을 떠올렸다.

사실 요즘 길리어드는 내내 걱정이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처음 아스틴은 육아도 육아였지만 기사단의 일도 힘들 테니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되도록 밤에 말을 걸거나 장난을 쳐서 피로하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전의 일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한 무리의 스칼라이 기사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놓고 자신들이 스칼라이의 기사단이라는 사실을 밝힌다는 말은 길리어드에게 공식적으로 전할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길리어드의 기분은 그때부터 별로 좋지 않은 듯했다.

“ 요즘 부군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일이라면,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 그냥 나는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듀랜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 마음 쓰이는 일은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저에게, 국왕 전하를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즉위식 이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으셨으니까요. 최근에 스칼라이에서 국왕 전하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걸 읽으시고는 조금 향수를 느끼게 되신 모양입니다.”

“그렇군, 그런 거야 충분히 이해가 되지. 그런데 자네, 요즘 새벽마다 부군께서 어딜 가시는지 알고 있나?”

“글쎄요, 요즘 왕자님은 그런 시간에까지 저를 데리고 다니지는 않으시니까요. 하지만 만일 새벽에 자리를 비우신다면, 아마 마사에 가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마사?”

“예. 공자께서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휴식 시간마다 마사에 직접 들러 부케와 아끼는 말들을 돌보시고 관리하셨는데, 지금은 그런 시간이 통 없으시거든요. 아시다시피 전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좋아하시잖습니까.”

아스틴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아스틴이 침실로 돌아왔을 때, 길리어드는 창가에 앉아 마티아스를 끌어안고 있었다. 흥얼흥얼 자장가를 읊조리며 등을 쓸어 주는 모습이 그날따라 조금은 지쳐 보였다.

잔잔하고 나지막한 자장가가 들려왔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언제나 요람 속에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랑스러운 자장가를 불러 주며

아이들이 잠드는 것을 바라본단다.

사랑하는 아가, 수데의 은총을 꿈꾸기를


 

눈꺼풀을 일그러뜨리며 반쯤 눈을 감는 마티아스의 모습에 아스틴은 고요히 숨을 죽였다.

아마 그들 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을 테다.

그런데 눈을 완전히 감았던 마티아스가 갑자기 길리어드의 셔츠 깃을 잡더니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리고는 동그랗게 치켜든 채 길리어드를 똑바로 쳐다보았는데, 길리어드는 끄응, 깊게 한숨을 쉬고는 곧바로 아기방에 있을 테르나에게로 향했다.

“이놈아, 자야지. 그래야 아버지도 잘 거 아니냐.”

투덜거리는 소리에 아스틴은 옅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아들이지만 참 말썽꾸러기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터다.

마침 집사인 바네사가 잠옷을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단단히 묶어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고 등에 묶인 드레스의 끈을 풀어 주면서, 그녀가 구변 좋게 입술을 열었다.

“어머, 공작님. 이 어깨 뭉친 것 좀 봐요. 안 아프세요?”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뭐,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바네사가 천천히 어깨를 주물러 주기 시작했다.

덤덤히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아스틴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바네사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있잖아, 요즘 부군께서 좀 이상하지 않아?”

“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분명히 뭔가가 있어. 바네사, 안채에서 뭐 사라지거나 그런 건 없나? 아니면 부군의 행동이 평소와 달라졌다거나-”

“딱히 기억나는 일은 없습니다만. 참, 요즘 부군께서는 종종 하인들에게 일러 밤중 서재에 술을 가져다 놓으라고 하시는 모양입니다.”

“...서재라고?”

“네.”

그 무렵 길리어드가 침실로 돌아왔다.

아스틴은 우선은 평소대로 침대로 올라갔다. 이윽고 바네사가 등불을 끄고는 침실의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요즘 길리어드는 침대에 누우면 곧바로 죽은 듯 잠을 청했다. 아스틴은 그 규칙적이면서도 투박한 숨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렇게 침실이 완전히 적막에 물들고, 주변의 공기도 고요해졌을 무렵이었다.

스륵 이불이 열리더니 무언가가 움직이는 모습에 아스틴은 그래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길리어드가 침상에서 내려서고 난 후에야 눈을 떴다.

그리고 그가 침실을 나선 이후에야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서서는 소파에 걸쳐 있던 까만 숄을 덮어쓰고 뒤를 따랐다.

그녀는 발소리를 죽여 뒤를 밟았다.

대체 어디를 가는 걸까. 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걷다가도, 옆으로 나 있는 작은 복도로 빠지는 걸 보니 분명히 서재로 가는 건 절대 아니었다.

안채에서 나가 북쪽이라, 확실히 그는 듀랜트의 말대로 자신의 개인 마사로 향하고 있었다.

흔히 그가 수집한 명마들이 지내는 곳으로 성안의 사람들은 그곳을 보고 말들의 궁전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만큼 길리어드가 아끼는 곳이었다.

아스틴은 그가 마구간 안으로 확실히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안으로 따라갔다. 좌우로 늘어선 질 좋은 오크나무 울타리 안으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고 몸집이 튼실한 말들이 늘어서 있었다.

평소에는 마사 뒤쪽에 있는 널따란 목장에서 지내지만 밤에는 이렇게 마사로 들어와 휴식을 취했다. 아스틴은 조심스레 그 앞을 지나갔다.

몇몇 아직 잠들지 않은 말들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녀는 가장 안쪽의 마방에서 누이와 함께 오붓이 잠들어 있는 부케를 발견고는 모서리를 돌았다. 길리어드는 그 근처에 있는 마지기의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대체 이 밤중에 말들이 건초를 먹는 것도 아니고 구유나 바닥 청소 같은 것은 하인이 하게 되어있는데, 대체 왜 밤중에 여기에 드나드는 걸까. 그것도 말들에게 볼일이 있는게 아니라 마지기의 방으로 들어오다니.

그녀는 살며시 허리를 숙여 열쇠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크나무 통을 잘라 만든 선반 위, 매끄러운 검은색 화염석 랜턴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남편의 커다란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정면의 벽에 놓인 안락한 오크 책상에 기대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붉은색의 견직물을 발견한 그녀는 그러면 그렇지! 싶어 조용히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 양반이 정말.

“여보.”

익숙한 목소리에 흠칫 등이 떨리더니 길리어드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윽고 신음을 삼키는 듯 짤막한 비명이 들려왔다.

화닥닥 뭔가를 숨기는 모습에 아스틴은 재빨리 그가 숨기려던 자신의 드레스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드레스를 살폈다. 역시, 예상대로 흥건하게 묻어 있는 하얀 액질들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길리어드를 올려다보았다.

2년 전에는 서로 민망해서 모르는 척하고 자리를 피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세상에, 그녀는 집안의 주인인 자신이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것은 대범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되도록 피하려고 했지만, 이럴 때만큼은, 수확 철 보리타작하듯 그를 구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른여섯 살이나 먹은 남자가 마구간에서 자위를 하다니.

그런데 그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길리어드도 도망치지는 않았다.

한 손으로는 허리를 짚고 다른 손으로는 눈을 가린 채, 그는 그저 입술만 실룩이며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당신은…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이 내가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침실부터 따라왔어요. 그리고, 당신이나 나나 보통 사람들이에요? 아무리 내가 당신처럼 강한 무장은 아니라지만, 발소리 안 내는 법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아무튼 참, 말들이 웃겠어요. 차라리 서재가 낫지, 여기서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길리어드의 귓불이 조금은 붉게 물들었다.

“그게 마티아스 녀석이 자꾸 밤에 나를 찾아온단 말이야. 서재의 문을 잠가 놓고 모르는 척하고 있어도 밖에서 날 부르며 우니까. 당신은 그때 자고 있었으니 모르겠지.”

“어휴, 아무리 그래도-”

그녀는 다시금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가만 보니 이것도 이주쯤 전에 그가 직접 제도의 부티크에서 맞춰 온 것이었다.

이쯤이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아니, 취향인 걸까?

눈썹을 찌푸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모습에 길리어드가 재차 말했다.

“아, 아무튼, 그저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줘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왜 또 내 드레스냔 말이에요.”

그건 할 말이 없었는지, 말없이 입술만 실룩이고 있던 길리어드가 틈을 보더니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아스틴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 이거 놔요. 아스틴.”

“못 놔요. 어딜 또 가서 이러려고. 안 들어와요?”

부부는 한동안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거칠게 묻는 아스틴과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길리어드. 뒤죽박죽 혼란스러운 상황의 끝에 남은 건 이상하게도 기묘해지는 분위기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스틴은 바지가 반쯤 풀어져 있는 남편의 모습을, 길리어드는 까만 머리카락을 반쯤 풀어 내린 채 속이 비쳐 보이는 잠옷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는 분위기에, 아무튼 이런 상황에 느낄 기분이 아닌데, 아스틴은 그의 손목을 놓으며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마찬가지로 길리어드도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는 양, 다시 눈을 가렸다.

입술 속에서 정체불명의 신음을 흘리던 그가 결국 털어놓았다.

“…나는, 당신이 무리하는 게 싫어.”

“네?”

“마티아스를 낳을 때 그 고생을 했잖아. 어떻게든 몸을 쉬어야지. 난…그렇게까지 욕망에 미친 놈이 아니야. 참을 수 있어.”

어이구 말은, 퍽이나 그렇겠다. 아스틴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면서 조용히 물었다.

“아무튼, 그래도 그렇지. 섭섭해요. 우린 부부잖아요?”

“그러니까 그렇지. 사랑하니까. 그러면 욕정같은건 참을 수 있어야 하는 거잖소.”

길리어드가 대답했다.

아스틴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는 되면서도 용납은 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드레스만 손에 든 채로 마구간을 빠져나왔다.

* * *

묘한 밤이 지나고, 다음날의 아침, 아스틴은 침실에서 신문을 보며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날 길리어드는 자리에 없었다. 마침 오늘은 대규모의 훈련이 있었기 때문에, 새벽부터 기사단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자, 마티아스- 아침 먹어야지?”

테르나가 마티아스를 품에 안으며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마티아스가 고개를 흔들더니 아래로 내려와서는 아스틴의 치마를 잡아당겼다.

안아 달라며 손을 뻗는 모습에 아스틴은 하는 수 없이 아이의 허리를 붙잡고는 자신의 허벅지에 앉혔다.

그런데 마티아스가 그녀의 가슴에 손을 대더니 조물조물 만지다 폭 옷 위로 얼굴을 묻는다.

“아휴, 공자님. 이리 오세요. 정말 어머님께 무슨 무례예요.”

테르나가 억지로 마티아스를 떼어 내고는 가두듯 품에 안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등을 쓸어 주더니 다시금 자신의 젖을 물리려고 했는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젖을 거부하던 마티아스가 결국은 젖꼭지를 물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흘끗 아스틴을 훑어본 테르나가 물었다.

“공작님. 그런데 아직도 젖이 마르지 않으신 거예요?”

아스틴은 그제야 가슴 부분을 확인했다.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유분이 묻어나와 있었다. “…그렇네요. 이제 좀 빨리 말라야 할 텐데.”

아노르인 아이들은 건강할 경우에는 1시간, 늦어도 3시간에 한 번씩은 배가 고프다고 울고 보챘는데 그마저도 한 번 먹일 때마다 30분은 걸렸다.

하지만 당시 바쁜 군주들은 모유를 먹일 시간도 없었거니와 종일 아이를 데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수유란 젖만 물린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굳이 자신의 젖이 아니라도 더 양질의 젖을 줄 수 있는 유모도 많았고, 일도 해야 하는 만큼 젖이 불거나 통증이 느껴지면 업무에 방해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해야 할 일이 많으면 젖의 질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고정 관념이 당시에는 존재했다. 그러니 양질의 젖을 줄 수 있는 유모를 고용하는 건 귀족 뿐만이 아니라 평민 계층에게도 흔한 일이었다.

어쨌든 예상했던 대로라면 그녀는 지금쯤 젖줄이 말라야 했다. 하지만 좀처럼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이런 식으로 그건 보채는 마티아스에게 가끔가다 젖을 먹여 주었기 때문일 테다.

아이는 다행히 심하게 젖을 가리지는 않았지만, 굳이 자신을 찾아와 지금처럼 아양을 부리며 젖을 달라고 하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배가 고파서 그러는게 아니라, 자신의 가슴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스틴은 측은한 마음에서 자신의 젖을 물리고는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빨리 말라야 할 젖줄이 되레 트이면서 옷에 종종 흔적을 남겼다. 게다가 어깨도 한층 더 뻐근했다. 원래도 가슴의 무게 때문에 뻐근함을 느꼈지만 요즘은 한층 더 무거웠다.

게다가 자꾸만 어젯밤 길리어드의 모습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누군가는 그런 행동을 보고 병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게 아노르인 남자들인 셈이다. 게다가 그랬던 만큼 자제력도 강하여 자신의 몸을 신성하게 생각하고 절제했으니 문제가 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아내의 드레스로 해소하다니.

사실 요 몇 개월간은 관계가 없다시피 해서 아스틴은 그럴 거라고 의심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그대로 행동할 줄은 몰랐다.

괜히 입술이 삐죽해졌다. 아이를 보느라 지쳐서 생각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피로한 게 아니었구나.

그녀는 우선 테르나에게 물었다.

“테르나, 젖을 말리는 방법을 혹시 알고 있나요? 의사들이 약을 처방해 주긴 했는데, 좀처럼 효과가 없어서.”

“그럼 하녀들에게 좀 주물러서 짜내라고 하세요. 그냥 무거워진 상태로 놔두면 어깨만 결려요. 아니면, 부군께 부탁하던가요.”

“-그래야겠네.”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뻐근한 어깨를 펴듯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든 생각에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쏟아질 것처럼 묵직해 보였는데, 내심 걱정이 되었다.

오늘은 마르첼과 함께 올드배로우를 정찰해야 했던 것이다.

* * *

그날 아스틴은 십여 명의 시종 무관들을 대동한 채 올드배로우로 향했다.

말을 몰고 서쪽 성벽을 지날 무렵, 어딘가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아마 오늘은 성의 서쪽에 있는 황무지에서 대규모의 훈련이 있을 터였다. 단장을 비롯해 부군까지 전부 참석하는 대형 훈련일 거였다.

자신이 참석해야 할 정도의 공식 행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훈련이 쉬운 것은 아닐 테다.

그녀는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의 상태를 보았을 때 저들의 심한 고생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조만간 격려의 연회를 마련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건 그렇고. 아스틴은 자신의 업무에 집중했다.

“마르첼, 대체 무슨 말이야 그게. 북쪽 숲에서 이상한 식물이 자라난다니?”

“직접 보시는게 더 이해가 쉬우실 겁니다. 저도 처음 보는 일이거든요.”

“…일단은, 가 보자고.”

오늘의 정찰은, 며칠 전 그녀가 마르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원인이었다.

처음 그 현상을 발견한 사람은 목청을 찾던 채집가들이었다고 했다. 그들이 숲지기에게 보고했고, 이후에는 다수의 나무꾼들이, 그리고 사냥꾼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서 마르첼의 귀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숲이 푸른 식물로 뒤덮이고 있다.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에 의해 일부 식물의 군집이 보일 수는 있어도 숲 전체가 영향을 받는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아스틴은 부러 말을 재촉했다.

날씨가 날씨였던 만큼 빨리 순찰을 마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올드배로우에 도착했다. 그날따라 날씨 때문에 숲은 매우 어두웠는데, 일행은 당장은 그 이상한 식물의 군집이라는 것을 목격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말에서 내려 안쪽으로 들어가 몇 사람씩 나누어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얼마 가지 않아 마르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발견했습니다.”

100여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마르첼이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스틴은 그가 가리키고 있는 나뭇가지를 쳐다보았다.

나뭇가지의 끄트머리가 푸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별개의 식물이 아니라 가지의 색깔 자체가 그렇게 물든 것이었다.

그녀는 무심코 가지 일부를 꺾어서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빛깔에서 희미하게 한기가 느껴졌다. 마르첼이 물었다.

“대체, 이게 뭘까요?”

“글쎄, 나도 잘은 모르겠어, 겨우살이 같은데?”

“시리스에게 물어보는게 좋겠군요..”

”그래, 아마도 시리스라면-마르첼! 조심해!”

마르첼의 뒤쪽에 있던 덤불 사이에서 마치 거대한 늑대처럼 붉은 눈의 야수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스틴은 등에 메고 있던 기다란 도끼 창을 꺼냈다.

거대한 체구가 덤불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이윽고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목으로 날아왔다. 아스틴은 그것을 피해 사정없이 팔을 도끼로 내리찍었다. 수차례 찍어 팔을 잘라버린 다음에는 머리였다. 놈은 안면을 가격당해 한쪽 눈알이 반쪽이 되고 뇌수의 일부가 흐르는데도 발광을 멈추지 않았다.

컹컹, 사냥개들이 울부짖는 소리에 흩어져 있던 시중 무관들이 다급히 모여들었다. 그들 모두가 긴 도끼와 창칼로 무장 중이었다. 주변이 제법 어두웠기 때문에 몇몇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아스틴은 야수가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도끼질을 멈추지 않았다. 놈을 완전히 끝장내고 나서야 시선을 돌렸는데, 그 무렵 멀리서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근처의 덤불 사이에서, 줄줄이 비슷한 야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째서인지, 그날은 한층 더 흉포했다.

쉽게 도망칠 수 없는 상황, 그녀는 본의 아니게 사냥을 시작해야 했다.

그렇게, 야수들의 피가 올드배로우의 어딘가를 붉고 붉게 물들였다.

* * *

거무스름하던 하늘이 폭포수와 같은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날 펠로데의 기사들은 모두 심하게 고생했다.

간단히 몸을 풀기 위해 시작한 마상전에 이어 대형 마물을 연합하는 공격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패를 나누어 모의 전쟁 훈련을 시작하기 전,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폭우로 인해 바닥이 진흙탕이었기 때문에 난이도가 배로 올라갔다.

길리어드는 가뜩이나 땀과 흙투성이가 되었던 몸이 쫄딱 젖어 성으로 돌아왔다.

하인들이 목욕하실 준비를 해 두었다며 우선 탕에 들어가시라 청했지만, 그는 젖은 갑옷을 채 벗지도 않고 문간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오전, 아내가 올드배로우로 정찰을 갔다는 말을 들었다.

벌써 시간이 밤 아홉 시였는데, 이쯤이면 돌아올 때도 되었건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야 바뀔 수 있었지만, 날씨가 걱정이었다.

몇 발자국 앞도 보이지 않는 폭우에 번개와 천둥까지, 바깥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내심 걱정이 되었던 터라 그는 성문 앞까지 마중이라도 나가야 하나 싶었지만, 부군으로서의 업무에 집중해야 했다.

늦가을의 폭풍우란 생소한 일이었다.

그는 하인들을 소집했다. 비바람으로 인해 피해가 생기지 않게끔 홀의 문과 성내에 있는 모든 문을 닫고 방비를 철저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어린아이와 노인, 병자들의 상태를 살피라고 조심을 시켰다.

이럴 때는 꼭 사람이 다치는 일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아스틴이 돌아온 것은 열 시가 넘어서의 일이었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하인들이 다급히 홀의 문을 닫았지만, 그 살짝 열린 틈 사이에서도 와장창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바람이 밀려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홀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르첼이 신발을 벗더니 물기를 빼내며 나지막하게 욕을 했다.

“어휴- 날씨 하고는. 꼭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이렇게 된다니까요?”

“그러게, 누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은 기세야. 자넨 오늘은 안채에 오지 말고 쉬어. 어깨는 괜찮아?”

마르첼은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면서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두꺼운 재킷 밖으로 핏물이 스며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야수라니… 공작님이 아니었다면 전 목이 날아갔을 겁니다.”

“아무튼 그만했으니 다행이지. 다친 사람은 없었지?”

“…저를 빼고는요.”

“ 푹 쉬게, 마르첼.”

마르첼이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간 후에야 아스틴도 그만 안채로 들어갔다.

안채의 모퉁이를 돌 무렵이었다.

때마침 복도를 걸어오던 길리어드와 마주했는데, 흙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닌 기색이 역력했다. 시선을 마주하자 길리어드가 안심한 듯 환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제 들어왔군. 걱정하고 있었소, 왜 이렇게 늦었어요?”

“숲에서 사고가 좀 있었거든요. 게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는데, 아무튼,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요. 지금은 좀 쉬어야겠어요.”

그녀는 곧바로 탕으로 향했다.

하인들이 이미 탕 한가득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물에 젖은 옷을 벗었다.

코트를 벗어 놓고 빗물이 묻은 셔츠를 벗어 던지는데 등 뒤가 사뭇 뜨끈했다.

길리어드가 상반신을 벗고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치를 보듯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답답하게 나오면 그녀라고 해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상반신을 쳐다보았다. 전투의 상흔으로 인해 생긴 흉터가 뚜렷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성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세월의 무게가 남편에게는 탈피의 과정으로 적용되는 것인지, 한층 더 단련된 몸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스틴은 은근히 달아올랐다. 하지만 문득, 나는 절제할 수 있다며 진중하게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그녀는 천천히 옷을 완전히 벗고는 몸을 씻어 내렸다.

길리어드가 천천히 옆으로 다가오더니 살며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향유를 묻히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목욕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스틴, 등 닦아 줄까?”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건 자신이 먼저 물어보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윽고 등 뒤에서 뜨뜻한 느낌이 났다.

길리어드가 나무 바가지에 온수를 퍼 담아 살며시 붓고는, 해면에 향유와 유액을 묻히고 등을 닦아 내리기 시작했다.

그가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어깨가 굳었어.”

아스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어제의 사건이 신경 쓰였다. 괜히 달아오르는 느낌이 마음 한구석을 무직하게 했다.

하지만,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니, 그건 달리 말하자면 관계를 맺고 싶지 않다는 말인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방법이 없지 않은가.

등을 문지르던 길리어드가 해면을 내려놓더니 천천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강도가 조금씩 높아질 무렵, 그녀는 천천히 어깨를 빼내었다.

“괜찮아요. 그저 근육이 좀 뭉쳤나 봐요. 하녀들에게 좀 주무르라고 말해야겠어요. 안 그래도 요즘 가슴이 묵직해서, 어깨가 결렸거든요.”

“안 그래도 아까, 테르나가 그러더군. 당신 몸이 아파 보이니까. 가슴 좀 주물러 주라고.”

“그런 말도 했어요? 사실 그렇긴 해요. 아직 젖줄이 마르지 않아서, 가슴이 무겁기도 하고, 좀 아프더군요. 그래서 어깨가 좀 더 뻐근하게 느껴져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생각에 잠겨 있다 물었다.

“그러면, 해 줄까?”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사실, 그의 손이 신뢰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 많은 하녀들이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확실했다.

그때 길리어드가 말없이 가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부드럽게 쥐고는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물기로 촉촉한 손이 가슴을 스치자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해 줄게요, 그렇게 하고 싶소.”

아스틴은 얼굴이 붉어졌다.

대체 그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면 생각을 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조금 전 자신을 애절하게 쳐다보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어젯밤의 그 당혹해하던 모습도 말이다.

“혹시, 아프거나 불쾌하다면 말해요.”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스틴은 이럴 때만큼은 좀 냉정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서는 아무래도, 그렇게 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럼, 살살 아프지 않게 해 줘요.”

그녀는 목을 뒤로 젖히며 길리어드의 쇄골에 몸을 기대었다.

길리어드의 손이 조금 더 앞으로 밀려왔다.

손바닥의 느낌은 역시, 거칠고 단단했다.

천천히 감싸듯 주무르던 손길이 어느덧 그녀의 왼쪽 아랫부분을 건드렸다.

심장을 슬며시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에 그녀는 무심코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멈칫하더니 손을 멈추었다. 아스틴은 슬며시 고개를 돌리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촉촉이 물에 젖어 헝클어진 듯한 머리카락 사이로 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다는 듯,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표정이 그날따라 참 퇴폐적이었다.

어제 마구간에서의 일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말없이 일어서서는 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역시, 그만하는 게 낫겠어요.”

“왜.”

아스틴은 대답 없이 탕에 들어가 앉았다.

몇 분이 더 지나서였을까, 몸을 꼼꼼히 씻어 내린 길리어드가 따라 오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그녀의 얼굴을 향해 은근히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아파서 그래? 아니면… 혹시 불쾌하게 느껴졌소?”

허공을 바라보던 아스틴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심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평소에 거울을 한번 보고 사느냐고 말이다.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길리어드, 미안하지만 당신 허벅지에 앉아도 될까요?”

대답 없는 모습을 그녀는 우선 허락으로 보았다.

그리고 한참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한참 마주하고 있던 끝에야, 그녀는 물었다.

“길리어드 반타블랙슨. 당신이 지금 어떻게 불리는지 알고 계세요?”

“…펠로데의 공작 부군이지. 아니면 뭐겠소?”

아스틴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흔들며 되물었다.

“몇몇 남자 기사들이 당신을 보고 간혹 그런 말을 해요. 사내놈들도 울릴 사람이라고 말이에요.”

“취향이 특이한 놈들인 모양이지. 그런데 감히 누구한테. 색출해서 벌을 줄까?”

“그런 말이 아니라… 여보, 내가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이란 자극을 받으면, 반응을 하게 되어있는 생물이라고요.”

그 말에 길리어드의 눈썹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아스틴은 그가 이번에도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냥 탕에서 나가 잠이나 자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답답한 사람이었던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길리어드가 눈동자를 가느다랗게 찌푸리더니 그제야 입술을 열었다.

“…그러면 말을 해 주던가.”

“네?”

“당신은 그런 말 안 해 주잖아.”

커다란 팔이 그녀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는 조금은 심술이 배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보면 심장이 두근거린다거나, 오늘 밤을 함께 보내고 싶다거나. 눈이 아름답다거나, 코가 조각 같다거나, 턱선이 멋있다거나, 시선이… 색스럽다거나. 그런 말… 안 해 주잖소.”

새삼 아스틴은 이 남자만큼 자신을 이리저리 잘 휘두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귀한 부군의 말을 들어줘야지. 아스틴은 살며시 그의 목에 팔을 걸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길리어드 반타블랙슨. 당신은 매력적인 사람이에요.”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해 줄 수는 없는 거요?”

어휴,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며 입술을 열었다.

“당신 눈빛은, 1만 년 동안 지하에 잠들어 있던 청금석 같아요. 코는, 조각가가 부러 깎아도 이렇게는 못 만들겠어요. 입술은 수리의 부리처럼 날렵해서 사랑스럽고요. 그리고- 어휴 여보, 아직도 모자라는가요?”

기분 좋게 듣고 있던 길리어드가 킥, 숨을 들이켜더니 숨이 넘어갈 듯 웃기 시작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아스틴은 그제야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마구간에 갈 거면, 나도 좀 데려가요. 혼자 가지 말고요.”

“오늘은 아니야. 비도 오는데, 말들도 조용히 쉬어야지.”

고개를 흔드는 모습에 아스틴은 입술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져서는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이끌리는 자신의 모습이 그녀는 도저히 마뜩지가 않았다. 완전히 희롱당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천천히 그에게 밀착시키고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꼬리에 힘을 풀고 지그시 바라보았는데, 그건 바로 길리어드가 평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따라 한 행동이었다.

그러한 시선을 마주하자, 길리어드는 순간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색스러운 모습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은근해졌다.

사실 그는 아내를 육체적으로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다. 요즘은 아내가 할 일도 늘어났고, 시기상 고민 해야 할 일도 많을 테니까. 

하지만 조금씩 밀려드는 강렬한 소유욕에 자신을 자제하기가 어려워졌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아스틴은 슬며시 수면 아래로 손을 넣고 그의 기둥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조금씩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길리어드의 심장도 쿵쿵 거칠게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몇 번 헛기침하던 길리어드가 결국은 허벅지를 은근히 세우면서 먼저 입술을 부딪쳐왔다.

거칠한 손바닥이 그녀의 가슴을 한 번 더 움켜쥐었다. 부드럽게 문지르더니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는 도톰하고 불그스레한 유두를 입술에 살그머니 깨물었다.

탕의 열기인지, 그게 아니면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뜨끈하게 자극하는 느낌이 아스틴의 혈관 내부를 솟구치게 했다.

잠시간 유두를 자극하던 입술이 이윽고 가슴의 이곳저곳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아스틴은 꼬리뼈에서부터 아랫배가 팽팽하게 긴장하는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그녀는 천천히 그의 어깨를 짚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는 다리 사이로 부풀어 있는 기둥을 집어 넣었다.

“으음…”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가며 굵다란 그것이 주는 느낌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손을 뻗어 탄탄한 가슴을 더듬었다.

내부를 팽팽하게 자극하는 이물감에 아스틴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젖은 속눈썹이 몇 올 엉킨 채로 살며시 떨렸다.

그럴수록 그녀는 조금 더 거칠게 길리어드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흉근을 자극하는 손짓에 길리어드의 숨결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아스틴의 내부는 부드럽고도 빡빡했다. 살며시 끌어안 듯 조이는 내부의 느낌이 아주 따뜻해서, 저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이윽고 그녀가 은근히 허벅지에 힘을 주었을 때, 그는 혼미할 정도로의 흥분을 받았던 것이다.

길리어드는 아스틴의 가슴에서 입술을 떼어내고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스틴이 천천히 자신에게로 고개를 숙여왔다. 도톰하고 촉촉한 입술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살며시 머금었다.

그들은 다시금 입을 맞추고 입술을 오랫동안 비비며 혀를 얽어갔다.

단순한 성욕과는 달리 다정한 포옹에서 시작되는 관계가 그토록 짜릿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먼저 입술을 떼어낸 사람은 길리어드였다. 어느새 아스틴이 허리를 빼내고 있었다.

문득 다시 타오르는 감정에 그는 아스틴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조심스레 탕의 등받이 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다리를 붙잡으며 조금은 옅게 한숨을 쉬었다.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탕의 열기가 몸을 더욱 끓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저 참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윽고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틴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들은 그렇게 한참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길리어드의 허리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강렬한 몸짓이 이어질 때마다 철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욕물이 휩쓸려 탕 밖으로 넘쳐흘렀다. 그날 아스틴은, 몸을 스치는 물의 느낌이 그렇게 뜨겁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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