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마지막 화룡의 심장(2)
한껏 영글어 가던 달이 서서히 저물고 구름에 가리며 주변에 어둠이 내렸다.
마찬가지로 가을도 음울하게 물들었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렸다.
부케는 결코 쉬지도 먹지도, 물을 마시려고 하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주인이 졸음을 견디지 못해 반쯤 의식을 놓았을 때도 달렸다. 그렇게 그들은 드라스터를 지나 샨시르의 폐허가 있는 영역을 에둘러 백색 산맥의 초입부에 다다랐다.
부케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흙벽을 거침없이 올라갔다. 평범한 말은 결코 흉내 내지 못할 움직임이었다.
길리어드가 굳이 기사들을 끌고 오지 않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촌각을 다투는 만큼 따르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버리고 가야 했다. 그는 이번 일 만큼은, 부하들을 일일이 돌봐 줄 자신이 없었다.
바에스트 산은 꼭대기에 성소가 있다는 말이 무색할 만큼 사방이 험악한 마물들의 서식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마물의 급수도 올라갔다.
보통의 마물보다도 강한 변종들이 사정없이 그를 공격해 왔다. 그는 거침없이 마물들을 베고 또 베어 넘겼다.
하지만 그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매섭게 전신을 잠식하는 한기였다.
화염석을 몇 개나 천에 감싸 몸속에 둘렀지만, 손가락 마디와 발끝을 에는 추위는 좀처럼 이겨 낼 수가 없었다.
혹독한 추위와 동통의 괴로움에, 불길한 기억이 그를 스쳐 갔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 슬하의 모든 자식을 잃어버린 모왕은, 더 비극적인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당신의 몸이 더 이상은 잉태를 견뎌 내기 어려울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고대의 금기에 손을 대었다.
스칼라이에는 고대의 군주가 남긴 비문이 있다. 소위 말하는 잔향의 조각으로, 드래곤을 죽이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기록해 놓은 비전(祕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화룡의 심장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아비는 모왕과 아이를 위해 화룡을 죽이러 떠나야 했다.
당시 대륙에는 화룡이 두 마리 있었다. 한 마리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성소의 수티하였지만 다른 한 마리는 스칼라이의 남쪽 계곡, 깊은 곳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해 스칼라이의 백성으로 조용히 지냈다고 전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심장을 내어놓을 화룡은 없었다.
끝끝내 싸움을 거부하며 도망치는 그를 아버지는 잔혹하게 추적했다.
결국은 용이 사랑하던 사람들까지 인질로 잡아 협박해서 끌어내었던 것이다.
맹렬한 전투의 결과 심장을 손에 넣었지만, 동시에 저주도 받았던 것이다.
너희들의 사랑은 그 결실까지도 저주받을 것이다.
그 저주 때문일까, 아버지는 심장은 손에 넣었지만, 몸의 반절이 불에 타 흉측하게 녹아 버리고 말았다.
지독하게 혐오감을 주는 모습에 모왕은 어째서인지 그분에게 거리를 두었다.
그건 길리어드가 태어나고 난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비틀림이 왕가에 비극을 가져왔다. 국서는 그녀의 사랑과 애정을 되찾기 위해 무리한 전장에 나섰던 것이다.
‘원정을 마무리하고 당신의 발아래 적들의 목을 바치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사랑은 바라지 않으니. 나를 다시 한 번만, 돌아 봐 주십시오.’
그게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길리어드는 아직도 기억한다. 모왕이 아버지를 냉혹하게 전쟁터로 내몰면서 했었던 그때의 말을, 그리고 그것을 가슴 아파하면서도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하던 모습을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해가 돌아왔을 때, 모왕은 커튼을 드리운 침전 안에서 흐느끼면서도, 끝끝내 한번 그것을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을 어떻게 무리하면서까지 전장으로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가망이 없다며 다른 이들이 모두 만류하는 전장에 단지 모왕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나갈 수가 있는 것인지.
어쨌든 길리어드는 이후 자신을 바라보는 모왕의 눈동자에서 죄책감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것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사랑하는 길리어드. 너는, 네 아버지를 빼다 박았어.’
왜인지 모를 씁쓸함에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거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 팔자까지는 닮을 필요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파리한 표정과 둥근 배가 눈앞에 어렸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싫다고 해도 해야만 하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게 스칼라이인이니까.
백색 산맥의 능선을 두 개 정도 지났을 무렵에야 그는 바에스트 산으로 이어지는 절벽의 아래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부케를 놓아 줘야 했다. 산의 경사가 이제 거의 90도에 가까운 데다 빙벽이었기에 그가 올라가기에 무리가 있었을 터였다.
그는 부케에게 속삭였다.
“이튿날 저녁까지도 내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펠로데로 돌아가라.”
잠시 망설이던 부케는 흘끗 빙벽을 올려다보더니 귀를 까닥여 승낙의 표시를 했다.
길리어드는 혹여 그가 혼자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될까 봐 마구를 풀어 주려 했지만 부케는 머리를 흔들어 그것을 거부했다.
주인이 있다는 표식을 잃고 싶지 않았던 터다.
이윽고 길리어드는 어깨에 짊어진 커다란 가방에서 두 개의 단검을 끄집어냈다.
까마득한 빙벽을 오르기 위해서는 손과 발로만은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단검은 빙벽에 깊숙이 박혔다.
그렇게 그는 빙벽을 올랐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살을 에다 못해 뼛속까지도 말려 버릴 듯한 추위가 계속되었다.
어느덧 추위로 인해 손바닥이 찢어지고 마디가 얼어 붉게 물들 무렵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탁 트이더니 마치 고원처럼 드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어느 도시의 폐허에 서 있었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건물의 벽들이 비스듬한 모양으로 눈과 얼음에 파묻혀 있었다.
건물의 구조로 보아 마치 오래된 유적 같았지만, 잡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최근까지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택의 잔해가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 사이로 시체가 구르고 있었는데 어떤 것은 머리의 반절이 기묘하게 뜯겨 있었으며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사지가 박살 난 것도 있었다.
잠시간 그것을 살피던 길리어드는 섬찟한 느낌을 받았다. 기묘하게도, 그들 중 대부분이 아노르인이었기 때문이다.
바짝 긴장한 채 그는 걸음을 옮겼다. 도시의 가운데로 나 있는 길은 산의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덧 바에스트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멀찍이, 마치 분화구처럼 보이는 거대한 구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성소는 바로 그 앞에 있었는데, 대체 이런 꼭대기에 어떻게 건설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거대한 석문이 아치 형태로 몇 개의 층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살피던 그는 그즈음에야 발걸음을 멈추고 등에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사실 조금 전부터 하늘에서 빤히 자신의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던 터다.
용은 사지가 봉인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의 걱정이 사실이었다면. 어떤 이유로 인해 용이 풀려났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확실한 답이 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모왕께 화룡의 심장을 먹여 그분의 생명력을 늘렸지만, 그것이 아스틴에게도 적용될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 고민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어쨌든 확실한 사실은, 화룡의 심장만큼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물질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아주 딱딱하고 단단한 바위 같은 것이 발에 채였다. 그가 건드린 것이 아니라 지면이 움직였여 그의 다리를 지나간 것이었다.
다시금 느껴지는 시선에 그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떠올렸을 때, 안개 같은 구름 사이로 두 개의 달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손님이 오셨군. 어쩌지? 대접할 게 마땅히 없는데.
그것은 거칠지만 매우 매끄럽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길리어드는 천천히 등에 멘 짐에 손을 얹었다.
용이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더니 찬바람을 일으키듯 고개를 몇 번 젓다가 자욱한 구름을 걷고 그의 앞에 머리를 내밀었다.
이윽고, 거대한 체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룡 수티하.
알째로 매장된 그녀는 오랫동안 땅속에서 지내다 8시대가 시작되었을 때 지상으로 올라와 무수히 많은 나라를 불태웠다.
연합군에 의해 성소로 끌려와 전신이 봉인되기 전에는 살아 있는 재앙이라고 불렸다.
용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대부분은 두 가지 이유로 여기에 들르지. 나한테 볼일이 있거나, 성소의 유물을 탐내거나 말이야. 하지만 성소엔 유물이 없으니 바라지도 마. 널따란 밥솥 하나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형편없는 장소거든.”
마치 대화가 오랜만이라는 듯, 그녀는 길고 두꺼운 목을 좌우로 까닥이고는 킬킬거렸다.
목 근처에서, 차르르 무언가가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한눈에 봐도 매우 복잡하게 만들어진 사슬이었다.
일반적으로 사슬이라는 것이 고리와 고리를 엮어 만든 것이었다면, 그건 사슬과 사슬을 엮고 또 그 사슬과 사슬을 엮어 든 모양을 하고 있었다.
고리 하나마다 마법으로 된 진언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푸른빛을 띠며 빛났다.
“아내를 구하러 왔소.”
“아, 설마 이 도시에서 지내던 놈들을 말한다면 유감이군. 내가 그놈들의 절반은 먹어 버렸거든. 나머지 절반은- 태워 버렸고.”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그래, 뭘 원하는 거야, 빨리 말해. 나는 성격이 급하단 말이야.”
“당신 심장.”
용은 놀라지도 않고 앞발을 주욱 내밀었다.
그리고 그제야 물끄러미 길리어드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머리카락, 눈동자의 색깔, 이목구비, 신장, 체구 등을 말이다.
사실 그녀의 눈에서 길리어드는 딱히 특별한 것이 없는 아노르인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사실 5천 년을 넘게 살다 보면 기억이란 것을 딱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법이다.
어떤 기억은 혼동되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사라졌다가 다시 떠오르기도 하고 갑자기 뚜렷해지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기억은 아니었다.
사실 용들은 자신들의 기억을 다른 개체에게 전송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종족의 특성이었다.
그것은 어떤 늙은 용의 기억이었다.
자칭 평화주의를 외치며 인간 여자를 사랑하고 지키려다 스칼라이의 국서에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한심한 늙은이의 기억이었다.
이윽고 드래곤은 길리어드의 눈앞에 증오와 비슷한 경멸을 보였다.
“내가 좀 오래 살아 봐서 아는데,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은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게 자비를 베푸는 길이다. 아등바등 노력한다고 해서 과연 상대가 고마워할까?”
“…참견이 심하군.”
“차라리 아내를 따라가라. 너희 아노르인은 어차피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잖아. 죽음의 세계에서 영원히 함께하는 거지. 그게 더 쉽고 편한 일 아닌가?”
“나는 그저, 그녀가 태양 아래를 걷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
“……꼬마가 멋쟁이 흉내를 내는군. 어쩌면 내 심장을 주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어.”
대화를 이어 가면서 수티하는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을 하나하나씩 맞추어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는 날카로운 두 발을 길리어드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것을 따라 햇살이 완연히 떠오르며 그녀의 거대한 전신이 분명히 드러났다.
하얗게 물들어 있는 허리와 굵은 뒷다리, 그리고 비늘에 촘촘히 채워져 있는 날카로운 날개와 산채의 반절은 휘감고 있는 듯한 날카로운 꼬리가, 비극적일 정도로 강인해 보였다.
“그런데 말이야, 어떤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남쪽에 살던 늙은 내 친척의 이야기야. 그자도 인간에게 사로잡혀서는 심장을 뽑히고 죽었다던데, 문제는 심장을 가져간 인간의 최후야, 토끼 사냥을 끝낸 사냥개인 양 아내에게 그대로 버려져서는 전쟁터로 쫓겨났다지? 참, 병신 같은 일도 다 있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보면, 사랑이란 참 잔혹한 거지, 안 그래?”
길리어드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를 무렵이었다.
그 순간 용이 꼬리를 휘둘렀다.
그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빼내어 던졌다.
하얗고 날카로운 창이 붉은 눈을 향해 곧바로 날아갔다. 그것은 눈을 파고들어 두개골을 꿰뚫고 반대편의 석벽에 박혔다.
그러나 용은 그저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오리할콘으로 만든 장창. 요즘도 그런 귀한 걸 이렇게 무식하게 쓸 줄 아는 놈이 있나? 게다가 스칼라이의 문양… 이제 확실하군. 역시- 네가 그놈의 자식인 모양이지? 불쌍하기도 해라. 제 아비와 똑같은 운명이라니! 그럼 어디 와 봐라. 대신, 확실히 나를 죽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난 반드시 이 사슬을 끊고 네 그 잘난 계집년이 지키고 있는 펠로데를 불태워 버릴 테니까! 지상에서 씨앗 하나 자라지 않게끔!”
이윽고 용은 가슴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거대한 불꽃을 토해냈다.
화염이 마치 거대한 폭풍처럼 주변을 잠식했다. 그리고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처럼 퍼져나가 주변의 모든 것을 일시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산채의 절반을 뒤덮는 브레스에 유적 근처의 시가지가 모두 휩싸였다.
그 모습이, 마치 바에스트 산이 분화한 것처럼 보였다.
강력한 화염으로 뒤따르는 연기와 잿가루가 자욱이 물들였다. 화염이 조금씩 가실 무렵에야, 수티하는 꼬리를 저어 연기를 걷어 냈다.
그런데 검은 잿가루와 연기의 사이로,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그 아노르인이었다.
그는 머리카락 하나 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옷은 훌러덩 타 버렸지만, 몸은 그야말로 어디 하나 탄 구석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수티하의 한쪽 눈이 날카롭게 물들었다.
“…드래곤본.”
* * *
화룡은 까마득하던 과거를 떠올린다.
아노르인의 등장.
한낱 용의 가축에 불과하던 인간이 비로소 대륙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당시 아노르인에게 가장 위협적인 용은 화룡이었다. 단순히 불꽃도 문제였지만, 불이 지닌 속성을 이용해서 부리는 갖은 마법으로 인한 피해는 쉽게 복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꽃의 위험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연구 끝에 그들은 화룡의 특성에 대해 주목했다.
용이 불꽃을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었던 건 엄청난 내성과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힘은, 심장에 있는 핵에서 시작되었다.
아노르인 군주들은 바로 그 힘을 원했다.
그렇게 증오하고 두려워하던 힘을 말이다.
하지만 한낱 인간이 그렇게 거대한 에너지를 다스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수많은 실험이 자행된 결과 태어난 존재들이 바로 용인이다.
용인.
드래곤본(Dragonborn).
화룡 수 마리에 버금가는 강력한 신체를 지니며, 무엇보다도 그 어떤 불꽃으로도 죽일 수 없는 자. 그렇기에 용들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종족.
물론 수티하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도 기억한다.
용인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위험한 용 사냥이 선행되어야 했고, 또한 그들을 잉태하는 모체가 희생되어야 했다.
이미 인간으로선 상당한 힘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허락되지 않은 힘을 탐하는 어리석음이라니.
인간은 그랬기 때문에 천박한 가축이었다.
문제는 그런 금술이 용들과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이어졌다는 것이다.
용들을 몰아내고 대륙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 아노르인들은 이번에는 자신들의 우열을 가리기 위해 그것을 이용했다.
용들을 가축으로 부렸고, 군주들은 더욱 강한 아노르인을 생산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무리한 잉태를 강요했다.
그들의 피눈물과 희생으로 강한 전사들이 태어날수록 많은 아노르인들이 죽어갔다.
그렇게 용인으로 태어난 자들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그들이 아이를 가졌거나 배우자가 아이를 가지는 과정의 일이다.
힘은 고스란히 배우자의 몸속을 흐르다 아이에게로 전해졌는데, 모체가 태아의 힘을 견디지 못해 정기를 모두 빨리고 숨지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노르인의 성비는 서서히 바뀌어서, 필연적으로 전쟁이 발발했다.
그것이 고대 아노르인들이 멸망한 이유였다.
해서 아노르인들에게 더 이상 용의 심장을 먹는 일은 금지되었다. 동시에 용인을 만드는 일도 금지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의 아노르인들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아노르인 역사의 수치이자 비극이었으니까. 물론 스칼라이에서도 용인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었다.
그랬기에 왕실에서는 길리어드가 용인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겼다.
스칼라이는 그것을 일종의 저주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증오하고 혐오하는 용의 힘을 가진 군주라니.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왕실이 곧 금기를 어기고 비술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사실 용인에 대한 기록 자체가 없으니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으나, 그렇게 되면 왕가의 체면은 떨어지고 가뜩이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가중될지 몰랐다.
용인이라니.
수티하는 자신의 불꽃이 먹히지 않으리라는 것을 바로 간파했다.
공포와 동시에 격정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가 전신의 비늘을 세웠다. 동시에 꼬리가 여러 개로 나뉘며 강철과도 같은 가시가 길리어드의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거대한 앞발이 바닥을 내리쳤는데, 와르르 지면이 무너지며 산사태를 일으켰다.
“나는 그 늙은이와는 달라. 멍청하게 죽지는 않는다.”
산사태와 함께 주변이 눈길로 가득해지자 수티하는 하늘을 향해 거친 브레스를 토해 냈다.
불꽃이 전체 대기에 열기를 머금으며 눈사태와 맞물려 자욱한 안개를 형성했다.
용이 다시금 브레스를 토해 내려던 무렵이었다.
휙,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하얀 유리병이 날아들었다.
‘빙하의 생령…!’
입에서 화염 대신 거친 냉기가 쏟아져 내렸다.
그 틈을 타 콱 하는 소리와 함께 꼬리가 무언가에 잘려 나갔다.
싸움은 그때부터 하루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다.
수티하는 과거 길리어드가 상대했던 북대륙의 스톰 와이번과 같은 하급 용족이 아니었다.
해츨링도 아니고, 성체 드래곤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리 그라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해서 그가 선택한 방법은 오래전부터 스칼라이에 전수되는 용사냥의 비책이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이기도 했다.
국서는 화룡을 죽이기 위해 비늘의 틈에 수 개의 창을 박아 넣은 뒤 피를 흘리게 하여 출혈사 시키는 방법을 썼다.
간단해 보이지만 위험한 사냥 방법이었다. 비늘의 틈이 매우 빡빡해 좀처럼 보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렇다고 드래곤이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는 오리하르콘의 장창을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 조금씩 박아 넣으며 서서히 출혈을 일으켰다.
각 창에는 미세한 미스릴로 만든 와이어가 걸려 있었는데 그것이 날개에 걸리자 수티하는 무심코 몸을 비틀며 날개가 촥 찢어졌다.
물론 길리어드도 무사하지는 않았다.
화염으로 인한 안개와 증기에서는 벗어났지만, 빙하의 생령이 토해낸 냉기가 그의 몸도 침식했다.
강철과 같은 꼬리는 한쪽 어깨에 파고들자마자 뼈를 부러뜨렸고 잠시 긴장을 놓던 사이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배를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싸움이 끝난 건 지표면이 핏빛 강을 이룰 정도가 되어서였다.
수티하는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른 채, 천천히 고개를 처박았다.
그 순간 앞발로 가리고 있던 부드러운 뱃가죽이 길리어드의 눈에 들어왔다.
길리어드는 바닥에 박아 둔 짐의 안쪽에서 커다란 검을 꺼내었다.
그것은 2년 전 그가 북쪽 대륙의 스톰 와이번을 일도양단할 때 썼던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였다.
뱃가죽을 가르는 검날에 따라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윽고 어디선가 신음과도 같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신음처럼도 들렸고 노랫소리처럼 들리는,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순간 거대한 드래곤의 육체에서 하얀 무언가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드디어- 끝났군. 이런 식의 자유는, 원치 않았는데.
용의 목소리였다.
길리어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뱃가죽을 가르고 또 가르고 들어갔다.
몸이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심장을 찾는 데는 그로부터 반나절이 더 걸렸다.
거대한 몸뚱이 속을 헤엄치듯 헤매던 그는 이윽고 길게 갈라진 내장의 심장을 발견했다.
심장을 잘라 내자 핏덩어리가 콸콸 흘러나왔다.
굵게 뻗어 나오는 동맥의 안에서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생명의 불씨였다. 그것은 손바닥 안에 감싸 쥘 수 있을 만큼 자그마했다. 그는 겨우 안도하며 핵을 뽑아내어서는 주머니에 단단히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서야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냉기와 화염과 자욱한 안개가 범벅되어 보통의 신체라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환경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길리어드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핏속에 온몸을 담그고 있었다.
쏟아지는 피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굳었던 몸에 조금은 혈색이 돌았다.
지금 그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출혈과 통증으로 인한 피로가 그를 급격하게 잠식해 왔다.
그는 무의식 속에서도 시리스가 주었던 스크롤을 떠올렸다.
화염에 타 버리지 않도록 미리 근처에 숨겨 놓았는데, 피가 흘러나오며 만들어진 강으로 인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자욱한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소리를 질렀다.
마치 늑대의 울음처럼 느껴지는 포효였다.
길리어드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려온 장소를 올려다보았다.
멀찍이서 타오르는 새벽, 노을을 타고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거인이었다. 적어도 키가 10m는 될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근처에 꽂아둔 대검을 잡은 길리어드는 상대를 향해 겨누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허리를 지탱하는 어딘가의 근육이 끊어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용이 긁고 지나간 상처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장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무렵, 비틀거리는 그를 누군가가 부축했다.
“필리포스?”
낯선 목소리가 낯익은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길리어드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길리어드는 거대한 오두막의 침상에 누워 있었다.
끄트머리가 까마득해 보일 정도로 거대한 침상이었다. 아마 거인족의 침대 같았다.
다급히 내려오려던 길리어드에게 침상의 크기만큼이나 굵직한 목소리가 경고했다.
“움직이지 마시오. 그러다 죽어.”
길리어드는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두막은 마치 동굴을 파서 지은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벽난로 앞, 거인은 썩은 나무 밑동을 대충 잘라 만든 듯한 의자에 앉아 낡은 부지깽이로 장작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는 제국의 거인 귀족들과는 다르게 거대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마치 늑대처럼 거칠어 보이는 거인족이었다.
길리어드가 알기로는, 남부의 거인이다.
딱히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관자놀이와 목 뒤쪽으로 털이 수북이 자라나 있었다.
그 무렵 오두막을 가리고 있던 장막이 펄럭이더니 하얀 머리카락의 여자가 들어왔다.
“깨어났군.”
그녀는 길리어드의 모습을 보고는 천천히 다가와 그의 배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고는 간단한 처치를 해 주었다.
그리고는 근처의 식탁에서 나무 쟁반을 가져왔는데, 스튜와 오래되어 보이는 빵이 놓여 있었다.
길리어드는 지금 그런 것을 입에 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도 문제였지만 옆에 있는 거인족 사내가 그를 신경 쓰이게 했다.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무렵, 야수처럼 생긴 거인족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성소의 불꽃이 꺼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용을 죽이다니. 참 용감하군.”
툴툴거리는 듯한 목소리에 아노르인이 위엄 있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울페이. 자네도 알잖나. 그 용은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는 걸. 그 용 때문에 유적지에서 지내던 내 부하들과 자네의 고향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단 말이야.”
거인은 더욱 툴툴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리어드가 되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지?”
“저쪽은 샨시르의 울페이. 나는 엔우드의 필레몬, 성소의 수호자이지. 그런데 자네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놈의 용을 죽인 건가?”
“ 나는-”
길리어드는 잠시 망설이다 짤막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들과 태평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쳐다보았다. 가슴과 배가 화상과 동상으로 인해 흉측한 몰골로 일그러져 있었다. 곱게 봐 주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그는 안도했다.
그나마 이 정도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무튼, 돌아가야 했다.
그는 용과 싸우기 직전 코트와 짐을 숨겨 놓았던 곳을 떠올렸다. 귀환 스크롤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왔다. 반은 기고 반은 다리를 저는 모양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백발의 여자가 물었다.
“뭐 하는 건가?”
“짐을 찾으러 가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우선은 누워 있어. 지금 자네는, 적어도 3개월은 누워 있어야 하는 상태야.”
“…빨리 돌아가야 됩니다.”
거인이 볼멘 목소리로 툴툴거리며 말했다.
“소용없는 짓이라니까. 어차피 자네는 적어도 한 달은 바에스트 산을 내려가지도 못할 거야. 대체 그 빙벽을 어떻게 올라온 건지도 모르겠지만, 산사태가 일어나서 우리가 사용하던 길도 완전히 막혀 버렸다고.”
거친 목소리에도 길리어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무렵,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필레몬이 천천히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고 부축을 해 주었다.
“자, 내 어깨에 기대게.”
“필레몬, 어리석은 짓 하지 마. 그러다 저 젊은이가 죽어.”
“말린다고 들을 기세가 아닌 것 같으니 그렇지.”
필레몬이 대답했다.
길리어드는 그제야 자신의 팔을 붙잡고 있던 여자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기묘하게도 그녀의 머리카락은 백색에 가까
웠고 입술은 창백한 푸른색이었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 소름 끼치는 기묘한 분위기를 발산했다.
무엇 하나 아노르인의 특징이 없었는데도 그녀가 아노르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어째서일까. 그러한 시선을 느꼈는지 필레몬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지. 하지만 원하는 걸 찾지 못한다면 포기하고 침대에 누워. 나는 더는 도와주지 않을 거야. 죽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 유연하게 행동하게나.”
“…고맙소. 그런데, 아까 그- 거인족 사내가 했던 말, 성소의 불꽃이 꺼지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일단은, 지켜보아야 할 일이야.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것보다도, 우선 조심해서 걷게.”
두 사람은 그렇게 오두막에서 내려섰다.
오두막은 성소가 있는 장소의 뒤쪽에 숨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쌩쌩 칼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는데, 그들은 근처의 빙벽 뒤에 숨어 잠시 바람이 그칠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바람이 잠시 그쳤을 때야 겨우 용의 사체가 있는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주변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시야가 혼란스러울 정도로 새빨간 핏빛이었다.
용의 사체에서 계속해 새어 나온 피가 빙벽에 스며들면서 그러한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바닥에는 아직도 피가 고여 여기저기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피가 아직 식지 않아 여기저기 증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곤 바닥이 어느새 딱딱히 얼어붙어 길리어드는 자신의 짐을 어디에서 찾아내야 하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는 주변을 한참 수색했다. 허리와 배가 끊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용의 앞발 근처에서 짐의 잔해를 발견했다.
그는 절뚝절뚝 급히 다가가 발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용의 앞발이 워낙 단단히 얼어붙었던 터라 쉽지 않았다.
그 무렵 필레몬이 근처에 뒹굴고 있던 잘려 나간 꼬리를 들더니 세차게 바닥을 내리찍어 아래를 파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길리어드도 다른 꼬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땅을 파 내려갔다.
그들은 5m의 구덩이를 낸 끝에 얼어붙은 용의 앞발 아래서 짐의 잔해를 찾을 수 있었다.
길리어드는 잔해와 옷가지 속에서 겨우 시리스가 준 스크롤을 찾아냈다.
그는 안도하며 잔해를 쓸어 모아 챙겼다.
그리고는 스크롤을 펼쳤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그래도 필레몬에게 감사는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맙소. 이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필레몬은 어느새 파이프를 꺼내더니 연초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그럴 필요는 없어. 신세를 진 건 우리니까.”
“무슨 말입니까?”
그녀는 연초의 연기를 뿜어내고는 손가락을 들어 이제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유적의 잔해를 가리켰다.
“수티하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몸에 묶인 사슬을 풀려고 발버둥 쳤네. 최근엔, 그래 샨시르의 군주와 결탁하여 모종의 마법을 알려 주는 대신 사슬의 일부를 끊어 내는 방법까지 알아냈지.”
“ 마법이라고요?”
“ 그래, 샨시르의 군주는 처음에는 성소에서 피어오르는 신성한 불꽃을 탈취하려고 했네. 하지만 실패했고, 용은 대신 그녀에게 불꽃을 창조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지.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 그 도시가 멸망했죠.”
“ 수티하가 제대로 된 마법을 알려주지 않았거든. 쉽게 말하면, 농락한 거지. 결국 저주받은 불꽃으로 인해 애꿎은 시민들만 목숨을 잃었지. 그리고- 나는 유적 지대에서 지내던 가족들을 모두 잃었어. 그 용은 교활하게도 우두머리인 내가 나타날 때까지 한 명 한 명 고문하고 잡아먹더군. 제 목에 걸린 마지막 사슬은, 내가 있어야지만 풀 수 있었거든. 나는 어떻게든 산을 내려가서 상황을 알리고 싶었지만, 용이 우리가 사용하는 남쪽의 길을 막고 있어 쉽지가 않았어. 그런데 자네가 나타난 거야. 그러니, 고맙지. 나 대신 가족의 복수를 해 줬으니까.”
“ 아까 그 거인 사내는, 왜 제게-”
“ 그자는 샨시르 군주의 남편 중 하나인데, 샨시르가 그 꼴이 나고서는 이 근처에 동굴을 파고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 그렇게 툴툴하게 굴었어도 자네를 구해 온 사람은 그자야. 아마 고맙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길리어드는 그제야 아까 자신의 귀를 울리던 함성이 탄성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필레몬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싸움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었어. 그럴 만한 무기도 기력도, 부족했으니까. 아무튼 그놈의 용이 목줄까지 끊고 도망치는 걸 내버려 뒀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르지. 그런데… 자네는 대체 이름이 뭐지? 이런 상황에 굳이 이름 같은 건 알아봤자 상관없겠지만-”
“반타블랙슨,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이오.”
“반타블랙슨? 그러면 스칼라이의 왕족인가? 내 친척 중에서 그 나라의 국서가 된 사람이 있었는데. 자넨 그와 닮았어. 어째 무기도 싸우는 방식도 비슷하다고 생각했지.”
“지금은 펠로데의 공작 부군입니다. 아무튼 고맙소.”
필레몬이 이만 가 보라며 살짝 묵례했다.
그 말에 길리어드는 우선 스크롤에 붙어 있던 봉인지를 찢어 내었다.
스크롤은 그의 손바닥에서 파스스 푸른 불꽃의 무리를 뿜어내며 사라져 갔다.
이윽고 그의 몸 주변을 둥글게 감싸는 원형의 공간이 생겨나더니, 순식간에 그를 빨아들였다.
* * *
길리어드가 도착한 건 그가 떠난 지 나흘째가 되는 밤의 일이었다.
그즈음 펠로데의 사람들은 모두 긴장의 극에 다다라 있었다.
물론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시리스가 공작 부처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 엄금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상급 하인들은 예외였다.
펠로데의 집사, 바네사 엘스턴은 걱정스레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공작의 신체는 쓰러진 이후부터 눈에 띌 정도로 급격히 말라갔다.
배를 제외한 늑골과 상완 그리고 허벅지가 말라 앙상한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몸을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히는 하녀들이 시중을 들다 경악하여 기절할 정도였다.
집사는 침착하게 아스틴의 머리카락을 빗기고 그것을 묶어 주려고 했다.
그런데 빗이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했다.
풍성했던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혀 나왔다.
집사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그것을 내려놓고는 차분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듬어 한쪽 어깨로 내려 주었다.
그 무렵, 아스틴이 간신히 눈꺼풀을 떠올렸다.
“…물.”
그녀가 목 넘김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네사는 면 수건에 물을 한껏 적셔 그녀의 입술에 물려 주었다.
아스틴은 그것을 있는 힘껏 빨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침착했다. 전신에 생기라고는 하나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연녹색 눈동자에서만큼은 이상하게 생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우선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가신과 기사단에 있을지도 모르는 변동 사항을 점검했으며 어떻게 해서든 황가의 사람들이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했다.
다행히도 지금 황제는 남쪽에 있었다. 그리고 감사제의 연회를 성대하게 치렀으니, 그것으로 우선은 안심이었다.
하지만, 결국 성소로 떠났다는 남편의 걱정에 그녀는 편하게 눈조차 감을 수가 없었다.
이틀 전, 부케가 홀로 펠로데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몸짓으로 길리어드가 성소를 향해 올라갔으며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했다. 하지만 아스틴은 그가 정녕 성소로 올라갔다는 사실이 그렇게까지 절망적일 수가 없었다. 내심은 그저 도중에 돌아오기를 바랐던 터다.
어째서 남편들은 아내의 말을 그렇게도 안 듣는 건지. 자신이 이 꼴이 된 상황에 그까지 위험해진다면 중북부 제후들의 연합과 남동부, 북동부에서부터 스칼라이까지 모두에게 위험한 일이 될지도 몰랐다.
기사단은 녹스턴 경이 책임지고 담당하겠지만 정말 만일의 경우 그녀는 황제가 사실을 알아차리고 수를 쓰기 전에 자신이 다음 공작을 명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공작이라는 직위가 황가의 가신이었던 만큼 황제가 나라를 위해 일가의 계승 문제에 손을 대겠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정치적인 문제다. 그런 것들은 큰 문제가 안 되었다.
그것을 다 떠나서,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아스틴은 밀려드는 걱정으로 인해 토가 나올 정도였다. 가슴이 금방이라도 멈추어 버릴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인이 다급히 문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부군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 *
길리어드는 성문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아침 문 앞을 청소하던 어린 하인들이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한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길에서 노숙하던 거지가 얼어 죽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부군의 얼굴을 알고 있던 아이가 놀라 성문 병사들을 부르러 갔고, 그 말에 우르르 몰려간 병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모습을 살폈다.
길리어드의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몸 전체에 동상을 입지 않은 곳이 없었다. 가슴과 등에는 날카로운 것에 수차례 베인 흔적이 있었고, 배에서는 내장 일부가 조금씩 튀어나와 기묘한 액질을 흘리고 있었다.
다들 그가 죽은 줄 알았다.
겁에 질린 병사들이 그저 두런두런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 즈음, 수비대장이 나서더니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부군…이십니까?”
순간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한기에 대장은 몹시 놀랐다. 자신의 손끝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는 즉시 본성에 사실을 알렸다.
길리어드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것도 그 무렵이었다.
“…좀, 춥군.”
짤막한 말과 함께, 길리어드는 질끈 허리춤에 동여매어 놓은 무언가를 떨구듯 내려놓고는 그대로 엎어졌다.
만신창이가 된 그를 구하기 위해 성안의 모든 의사와 치료술사들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길고 긴 시간의 수술 끝에, 그는 안채로 옮겨졌다.
사실 용에 의해 입은 상처는 무엇으로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길리어드의 몸은 조금씩 소생되는 기적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3개월이나 지나서야 침상에서 내려와 평소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소위 공작이 쾌차한 것보다도 더 큰 기적이었다. 사람이 화룡과 1대 1로 맞서 살아남았다는 것도 기적적인 일이었지만 이런 상처에서 소생한 것도 대단한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화룡을 쓰러뜨리고 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 대륙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되자 펠로데의 누구도, 스칼라이 출신의 어떤 기사도 그의 태생이나 힘의 정체에 대해서 불손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한편, 길리어드가 가져온 용의 심장 속에 있던 불꽃에서 약을 추출하는 일은 시리스가 맡았다.
젊은 현자로 칭송받는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도 잊히지 않는 특별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9시대의 마법사들은 와이번이나 드레이크와 같은 하급 용종이라면 몰라도 드래곤의 사체나 내장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능숙하지 않았다. 문헌도 희귀했거니와 드래곤의 수 자체가 적었으니 그것을 실험할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뛰어난 마법사였다.
* * *
창밖 쏟아지는 햇살에 눈이 따가웠다.
어느 늦가을의 아침, 눈을 뜬 길리어드는 흘끗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아스틴이 반쯤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침대에 잠들어 있었다. 내내 자신을 간호하다 지쳐 잠든 모양이었다.
햇살이 그녀의 하얀 얼굴 위로 눈부시게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깊이 잠들어 있는 하얗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회복한 것은 거의 두달 전쯤, 그러니까 그가 귀환하고 한달의 지나서의 일이었다.
집사가 그에게 공작께서 쾌차하셨다는 말을 해 온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아스틴이 자신에게로 찾아왔다.
길리어드는 침상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씩 웃어 보이는 것은 할 수 있었다.
‘ 당신처럼 말 안듣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새겨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아스틴의 건강한 뺨이 참 보기 좋다고만 생각했다.
아프기도 하고 출혈도 좀처럼 멈추지 않아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그녀의, 우는 것도 같고 웃는 것도 같은 얼굴을 보자 기운이 났다.
그건 아내에게서 쉽게 볼 수 없는, 순수한 걱정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표현이었으니까.
아무튼 그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사랑하고도, 사랑을 못 받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았다. 적어도 자신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는 잠든 모습을 그냥 둘까 하다가, 새삼 드는 걱정에 입술을 열었다.
“ 아스틴,”
그때 아스틴이 눈을 떠올렸다.
“ 왜 그래요, 길리어드?”“ 자러 가요. 나는 괜찮으니까.”
잠시 내려다보던 아스틴이 고개를 흔들었다.
“ 지금은 곁에 있게 해 줘요.”
“ 그래도 몸이 따뜻해야지.”
길리어드가 조금은 눈꼬리를 내리며 아스틴을 훑어내렸다. 걱정하고 있는 애절한 모습에, 아스틴의 하얀 얼굴에 걱정과 동시에 옅은 홍조가 흘렀다.
아스틴은 길리어드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까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등받이에 기대어 앉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가 천천히 팔을 뻗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새삼 조금은 말없이 그의 얼굴과 목과, 가슴과 팔을 바라보았다.
사실 남편에게서 이런 모습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의 사랑이, 애정이 위대하다는 것을 모르는 나이가 아니었지만, 눈앞에서 목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는 특히 자신들처럼 정략결혼으로 연을 맺은 부부에게 있어서 이것은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해서 미소짓는 길리어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그녀는 그의 마음이 도무지 한낱 의무로만 행하는 그런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래. 이 사람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거였다. 어쩌면, 위험할 정도로.
“ 이리 와요. 아스틴. 그럼 내가 안아줄게요.”
“ 네? 그래도,”
“ 자꾸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무사한 것만으로 만족해요. 당신이-내게 줄 수 있는 행복을 잃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 생명은 당신 건데, 당연히 당신을 위해서 써야지. 아닌가?”
“ 길리어드,”
아스틴은 그의 목을 두 팔로 안았다.
“ 고마워요-”
그녀는 목이 메어왔다.
지금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 그저 그의 목을 꼭 안아주는 것 뿐이었다.
그날 이후, 아스틴은 길리어드를 완전히 사랑하게 되었다.
길리어드는 이제 그저 펠로데의 공작 부군이 아니었다. 그는 완전히 아스틴의 남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운이 되었다.
다음 해의 어느 화창한 봄, 그들 부부는 첫 자손을 보았다.
예쁜 아들이었다. 어찌나 고왔는지 아이가 비단 보에 싸여 나왔을 때부터 길리어드는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이런 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스틴을 처음 보았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깊고 진한 감동의 끝에, 그는 저도 모르게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아이의 짙은 녹색 눈동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져, 아스틴의 색깔과 똑같이 변해갔다.
아이는 그래도 확실히 아스틴을 더 정확히 알아보았고, 무의식적으로 아스틴을 찾았지만
아이를 품에 안아주고, 사랑해주고 기르게 된 사람은 길리어드였다.
아이는 벌써부터 아버지가 지닌 강인함에 끌린 것인지, 그것이 아니면 다정하고 안락한 품에 끌렸는지 유모의 젖을 빨다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있어 빽빽 울 때에도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찾았다.
길리어드가 안채로 들어올 때가 되면 하녀들은 아이를 안고 있다가 슬며시 침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도련님, 아버님께 가 보세요.’
그렇게 말하며 문 안으로 들여보내면 길리어드는 까만 머리카락에 연녹색 눈동자를 한 사내아이가 뒤뚱뒤뚱 아이들 특유의 걸음걸이로 열심히 다가오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아버지를 본 아이는 조그만 팔을 열심히 뻗어올리면서 안아달라 그를 향해 손짓해 왔다. 길리어드는 그것이 참으로 귀여웠고, 아이가 울기라도 할 세라 덥석 안아 품에 꼭 안아 주었다. 아들은 콕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 길리어드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