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마지막 화룡의 심장(1)
찬바람에 떠밀린 듯 어느덧 나뭇잎의 끄트머리가 옅은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햇볕이 조금씩 짧아지고 벽난로에 들이붓던 한빙석의 수도 점점 줄어들 즈음, 드디어 가을이 왔다.
아스틴의 몸도 무거워져 갔다.
그녀는 이제야 잉태(孕胎)라는 단어의 무게를 좀 더 절절하게 깨달아가고 있었다.
무얼 먹어도 아이는 그 이상으로 쭉쭉 힘을 빨아갔다. 그래서인지 전신에 힘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머리까지 피가 돌지 않아 자주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더 큰 일은 일정에 맞춰 아침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다들 첫 번째 임신은 원래 그런 거라며 조심하고 충분히 휴식하면 된다고 했지만, 아스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룰 수가 없는 처지였다. 달리 책임을 질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가문의 주인이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그러니 억지로 몸을 이끌고 업무를 수행했는데, 침실에 들어와서야 겨우 한숨을 쉬며 힘든 것을 조금 토로했던 것이다.
몇몇 가신들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걱정했다. 업무에 해이해진 것을 염려하는 게 아니라, 혹시 모를 사태가 일어날까 긴장했던 것이다.
아노르인이 육체적인 우수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산부에게 따르는 기본적인 위험조차 비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13㎏에 가까운 커다란 물주머니를 배에 붙이고 터지지 않게끔 안고 살아야 하는 일은 누가 봐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추수 감사제를 앞두고 있을 무렵이 되었다.
홱홱 사정없이 밀을 수확하며 지나가는 큰 낫을 따라 벌판이 비고, 거뭇거뭇한 철새 무리가 하늘을 오갔다. 그에 따르듯 달빛도 둥그렇게 차오르며 창 안을 꽈악 채웠다.
그 무렵, 황실에서 보낸 사자가 그녀를 찾아왔다.
매년 그즈음에 맞춰 가을 무도회랍시고 성대한 ‘정찬회’를 열던 황제가 올해에는 각 제후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핑계였다.
요즘 황제는 몹시 분주했다.
그는 샨시르의 폐허를 밀어내고 그곳을 제국령으로 선포한 다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번 가을에는 니네베 일가가 다스리고 있는 남서쪽의 휴양지에서 보내겠다고 선언했는데, 그렇다고 제후들에 대한 경계를 멈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대충 선물로 대리한 것이었다.
선물.
흔히 황제의 하사품은 그게 무엇이든 막론하고 황공한 것이었겠지만, 그해 아스틴에게만큼은 아니었다.
“아스틴, 내가 너무 늦게 온 것은 아니겠지요.”
아스틴은 그렇게 토머스 켄티를 마주했다.
사실 제후와 같은 입장에서 선물을 받아야 할 그가 직접 황제의 심부름을 하러 올 이유는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아스틴은 그가 가져온 선물이 분명히 평범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은 예상했다.
애초에 당대 아노르인 군주들의 잉태는 아주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던 만큼 황가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그녀는 하인이 자신에게 내민 물건을 쳐다보았다. 푸른색 다이아몬드가 알알이 박혀 있는 작은 궤에 금사 은사를 한 올 한 올 교차하여 만든 배냇저고리와 아다만트로 만들어 낸 단검이 들어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귀한 선물이었지만,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것을 선물이랍시고 보낸 것인지.
이것들은 고대 아노르인 제국의 황제가 자신의 손자들에게 하사했다는 예물로 황가의 보고에서 보관하고 있는 성물이었다.
이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면 그 자체로도 황실에 불경한 일이었다.
만일 언젠가 그녀가 황실의 보고에 들렀던 적이 없었다면, 실수하고 말았을 테다.
아스틴은 궤를 닿고는 도로 내밀었다.
“…켄티, 난 사치품을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주제를 모르지는 않아요.”
“아스트리데, 내가 뭐 하러 직접 이걸 들고 왔겠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받아요. 폐하께서 직접 생각하시고 보내신 거니까.”
“너무 감사하긴 하지만, 배냇저고리도, 단검도 이미 준비되어 있어요. 나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말이에요. 그보다 폐하께서 우리들의 풍습을 알고 계셨다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죠. 그게 아니라면, 혹시 당신이 알려 드린 건가요?”
좀처럼 수법에 걸려들지 않는 모습에 켄티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아스틴은 그 적잖지 않게 언짢아하고 있는 속마음을 짐작했다.
아무튼, 가뜩이나 힘이 드는 시기에 이런 식의 시험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뭐 원래 그런 사람이긴 했지만 예상되는 일은 있었다.
성소에서의 사건 이후, 그녀는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오겠다는 초유의 선언을 했다.
제국에서는 그녀의 임신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친분이 있는 제후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서명을 올리기도 했고 황제를 찾아가 공작의 결정을 재고해 달라 청하기도 했다.
펠로데 가문이 수천 년에 걸쳐 제국을 지켜왔고, 지금의 황제를 옹립한 것도 사실상 그녀의 공이었으니 본인이 그 자리를 포기한다고 해서 그것을 용납하는 것은 개국공신을 쳐내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라며 말이다.
하지만 황제는 아스틴의 청을 수락해 버렸다.
오래전, 그녀에게 섭정의 자리를 없애고 싶다고 말했던 그때처럼, 섭정이라는 직위 자체마저 없애 버렸는데 그것은 황실에 그녀가 돌아올 자리를 남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이후 나라가 뒤집히는 듯한 혼란이 일었지만, 아스틴은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에게 부러 건강 문제를 예로 들어 사태를 키우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황제 역시 그녀의 말을 예로 들어 가신과 제후들에게 더는 언급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비등한 권력을 가지고 있던 당사자 두 사람이 그렇게 결정을 내어 버리니, 나머지 사람들은 불만을 토로하다가도 결국은 입술을 다물어야 했던 것이다.
상황이 혼란스러웠던 만큼 불똥이 어디에서 어떻게 튈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론은 황제의 결정을 좀 더 비판했다.
특히 펠로데를 따르던 중북부의 제후들 사이에서는 그간 황제가 그녀와 가족을 무리하게 억압하여 공작을 몰아세웠다는 불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황제는 그러한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펠로데 가에 값비싼 하사품을 내렸던 것이다.
하지만 아스틴이 꾸준히 그것을 돌려보내면서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그럴수록 황실에서 보내는 물건도 호화로워졌는데, 이제는 황가의 보고에서 꺼낸 물건까지 등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재상의 손까지 빌렸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은 대단한 특혜였다.
물론, 그녀는 이 수작의 의미를 짐작했기 때문에 얌전히 받아 줄 생각은 없었다.
“켄티, 그만 돌아가요. 추수 감사제가 코앞인데, 여기서 지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고집하고는. 당신에게 이것을 전달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소.”
“그럼, 여기 두고 돌아가요. 나는 따로 사람을 보내서 이것을 돌려드릴 테니까.”
“…아스트리데, 너무 그렇게 빼는 것도 예가 아니오. 그리고 이왕 그 자리를 내려놓았다면, 끝까지 잡음은 나오지 않게끔 해야 할 거 아닌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조용히 되물었다.
“누가 보면 내가 그 자리를 내려놓았다고 해서, 당신이 그 자리를 차지한 줄 알겠군.”
“지금 발끈하는 건가? 아무튼- 감정적인 사람이라니까. 아스틴, 기분은 나쁘겠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 하겠소. 그리고 애초에 폐하의 의심을 사게끔 행동한 건 당신이잖아. 대의를 저버리고 먼저 그릇된 선택을 한 사람은 당신이야.”
그녀는 코웃음을 쳤다.
“켄티, 왜 속 좁게 폐하와 저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거지요? 폐하께서는 저를 의심하실 분이 아니에요. 우리는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지낸 사이인데, 아직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면 그거야말로 영광스러운 일이겠지요. 게다가 이 나라 제후들의 전부가 펠로데 가를 충신으로 알고 있는데, 폐하께서 저를 오해하시게 된다면, 죄를 물어야 하는 건 모략을 일삼는 일부 반동분자들이겠죠. 켄티, 부디 당신은 그런 자들의 명단에 오르지 말아요. 폐하께서는 그들을 가장 먼저 처단하실 테니까.”
“……당신은 어째 시간이 지날수록 오만해지는 것 같군.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될 거요.”
“그전에 명단에 오른 이름들이 색출될 거예요. 아무튼 잘 가요. 난 좀 쉬어야겠어요. 임산부는, 좋은 것만 듣고 봐야 하거든.”
그녀는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동시에 시종 무관들이 문을 열어젖혔다.
그 모습에 켄티가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아스틴은 이 정도로 했는데도 그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쫓아낼 생각이었다.
황제가 뭐라고 하든지 말이다.
켄티가 궤를 품에 안더니 결국 등을 돌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에야, 시리스가 툴툴거렸다.
“참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저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그런 짓을 해 놓고, 어디라고 여길 찾아오는지 말입니다.”
“나름대로 재상이라는 거지.”
두 사람은 이미 지난번 사건이 재상의 머릿속에서 나왔을 거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부하들을 이용하기 좋아하는 황제는 괜히 언짢은 상황을 연출하여 비위를 맞추려는 자들을 이용했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있는 인물 중에서 이런 제안을 할 만한 사람은 바로 재상밖에 없었다. 재상은 충신의 ‘흉내’는 낼 줄 아는 신하였으니까.
문제는 그가 어떻게 ‘철화’의 존재를 알아내고 이용했는지다. 그건 참 의문이었다. 아스틴 자신조차 전혀 알아낼 수가 없는 정보였는데 말이다.
길리어드는 그들에 대해서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결국 에리크와 듀랜트, 그리고 서머울프를 다그쳐야 했다.
듀랜트와 에리크는 끝끝내 입술을 다물었으나, 의외로 서머울프에게서 뜻밖의 사실을 들을 수가 있었다.
‘ 국왕이?’
‘ 그렇습니다. 몇 년 전 있었던 왕자님 암살사건의 배후에 그가 관련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설리번 로렌스가 과거 남편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녀도 들어 알고 있었다.
아스틴은 즉시 마르첼에게 명령해 스칼라이에 있는 폭스테일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끔 했다.
제국의 사절이 스칼라이를 방문하는 것은 딱히 문제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사태의 진상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재상에게 철화를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설리번 로렌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에리크가 왜 자신에게 철화에 관한 이야기를 고스란히 털어놓았는지 맞아떨어졌다. 아무리 자신의 앞이라 하더라도, 모른다면 숨길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미 에리크는 사태를 눈치채고 있었을 테다. 모르고 있었더라도, 어쨌든 연관이 없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그러니 수월히 정보를 털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재상의 관점에서 주인을 잃고 맴도는 스칼라이의 암살자들은 가지고 놀기 좋은 인형이었을 테다.
결국 이것은 그녀의 생각대로 자신이 아니라 길리어드에 대한 경고인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부부 사이에 의심의 씨앗을 심어 갈라놓으려는 일종의 모략이었다.
즉 철화가 한때 길리어드를 따랐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흘려 부러 남편을 의심하게끔 하려는 얄팍한 수작인 것이다.
아스틴은 코웃음이 나왔다. 신분 낮은 정부(情夫)들도 그런 진부한 계략은 펼치지 않을 테니까. 빤한 수준에 침을 뱉고 싶었을 정도였다.
문제는 남편이었다. 이번 사건의 결과 그는 철화라는 자들을 완전히 처단해 버린 모양이었다.
이해는 되었다. 한때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부하였던 사람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다면 용납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문제였다. 길리어드가 성을 떠났던 그날 밤, 아스틴은 시종무관들을 붙여 상황을 살펴 보게 했다.
당연히, 다소 지나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자신이라면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잔소리를 하기에도 애매하고, 이러면 안 된다 가르치기에도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스틴은 요즘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우그러들었다.
물론 길리어드 역시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 일 때문에 가문의 가신들에게 의심을 사거나 일가에서 구설에 오르는 일은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되레 자신이 데리고 있는 부하들에게 두려움을 사고 있었으니 말이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기사들의 훈련 소리에 아스틴은 짧게 고개를 흔들며 시리스를 바라보았다.
“일단 아까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봐. 대체 마르첼이 무슨 말을 했다는 거야? 그이와 싸웠다고?”
그 말에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들은 켄티가 방문하기 전까지만도 부군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평소라면 집무 중에 사적인 대화를 꺼내지는 않는 시리스가 걱정스레 시작했던 것이 발단이었다.
엊저녁 마르첼과 길리어드가 한바탕 다투었다는 이야기였는데, 그건 있을 수도 없었거니와 가뜩이나 복잡한 아스틴의 마음속에 불을 지피는 일이었다.
시리스가 예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사실 이건 기사들끼리의 소문이라서 저도 정확히 드릴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만…. 전하께서 철화에 관한 이야기를 함구하셨다는 것에 마르첼이 꽤 화가 난 모양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작님께서 누워 계시는데 함부로 자리를 이탈한 것에도 문제가 있다고 여겼고 말입니다.”
아스틴은 이해가 되었다. 사실 그 점에 대해서는 그녀도 길리어드를 보호해 주기가 어려웠다.
마르첼은 수석 시종무관으로 성 전체에 대한 치안과 관리 감독도 겸하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 수사권도 가지고 있었는데, 당연히 이번 일의 전말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적이 명확한 상황에서 괜히 혼란이 일어날까봐 이번 일을 무마했던 것이다. 그러니 깐깐하고 엄격한 마르첼에게는 더욱 수상쩍게 생각되었을 테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안 그래도 나는 말하기 껄끄러웠는데, 마르첼이 해 줘서 다행이야. 그래서 그것 때문에 싸웠단 말이야?”
“저도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릅니다만, 마침 퇴근하시던 녹스턴 경이 발견하셨다고 하더군요. 한 번만 더 싸우면 둘 다 기사단 마구간 청소를 시키겠다고 하셨다던데, 물론 저도 들었던 이야기라서 정확한 건 아닙니다.”
풋,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마구간 청소라니, 그거 진짜 볼만하겠네. 아무튼, 의외네. 그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하지만 뭐, ‘작은 다툼’이야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시리스가 마찬가지로 조금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마르첼 경이 무례를 저지르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공작께서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기사들 사이에 부군에 대해서 안 좋은 이야기가 퍼져 나오고 있거든요. 아마 그게 걱정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일종의 잔소리였는데, 부군께는 또 달리 들리셨겠죠.”
“나도 들었어. 뭐였더라, 그이 몸에 불이 붙었는데 멀쩡했다며? 하지만 그게 어때서? 가뜩이나 불 때문에 다들 민감한 시기에 방염복을 입으셨겠지. 아닌가? 당연한 거잖아.”
“만일 그런 거라면 다행입니다만, 어떤 이들은 그렇게 만은 받아들이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부군이 혹시 좋지 않은 주술이라든가 마법 같은 것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다녔다더군요.”
아스틴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참, 걱정도 지랄이다. 아니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기사들 따위가 영주의 가족을 함부로 말하고 다녔던 거야? 이거, 기강에 문제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이런 몸이라 좀 쉬고 있다고 해서-”
시리스가 다급히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게- 사실은 그런 소문의 발원지가 ‘그날’ 함께 있었던 스칼라이 출신 기사들이라, 아시다시피 부군께서는 그들을 꽤 아끼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별 제재를 두지 않고 계십니다. 그 점이 마르첼이 보기에는 충분히 편파적인-”
열심히 제 생각을 말하던 시리스는 순간 심드렁한 아스틴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런 말은 그가 함부로 할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최고 가신이라지만 기사단의 이야기는 조심해야 했다.
펠로데 기사단은 펠로데 내에서도 일종의 폐쇄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기관이었다.
게다가 수장이 다름 아닌 가문의 위엄 있는 원로인 녹스턴이었다. 그렇듯 책임자가 따로 정해져 있는 상황에 최고 가신인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면 괜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게….”
자신답지 않은 처사에 시리스가 무마하기 위해 당혹해하고 있을 사이, 빤히 그 모습을 쳐다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틴은 문득 갑자기 복부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젠 정말 쉬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이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사소한 소문에 영주가 시시콜콜 관여하면 불씨를 키우는 거나 다름없는 일이야. 그리고 가뜩이나 부군과 나는 요즘 서로 조심하고 있는데, 괜한 소문에 휘둘릴 필요는 없겠지. 그나저나… 프리실라 공주는 언제쯤 도착한다고 했어?”
시리스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추수 감사제에 맞추어 도착한다고 했으니, 닷새는 걸리겠군요.”
“그래. 성대하게 대접하자고.”
* * *
달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퉁퉁하게 살이 찐 고기들이 강과 호수의 수면으로 튀어 오르고, 성안 곳곳에서는 갓 구운 빵과 소시지를 튀기는 냄새가 유난히도 물씬 풍겨 나왔다.
거리에 나서는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이집 저집을 다니며 갓 구운 과자와 디저트를 얻으러 다니는 시기.
바로 추수 감사제 기간이었다.
그해 아스틴은 평소보다도 유난할 정도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명목은 자신의 잉태와 함께 제국의 번영을 축하하기 위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섭정 자리에서 내려온 지금, 최근 펠로데에 있었던 좋지 않은 일들에 대한 소문을 수습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참에 위세를 시험해 보고 싶었다. 자신이 섭정의 자리를 내려놓았다고 해서, 과연 등까지 돌리는 어리석은 제후들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했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몇몇 정말로 사정이 있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그녀가 초대한 제후들은 전부 연회에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온 것이다.
그렇게 연회를 사흘 앞두었을 무렵, 펠로데를 향한 끝도 없이 긴 행렬이 이어졌다.
어린 하인이나 종자들에게는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호화로운 마차들이 성문 앞으로 들어섰다.
절정은 연회를 하루 앞둔 아침에 일어났다.
차체 전부를 흑단과 백옥 장식으로 꾸며 놓은 거대한 팔두 마차가 수십 개의 마차를 앞뒤로 대동하고 그보다 더 많은 기수를 거느린 채로 나타났다.
이미 성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귀족들에게 질릴 대로 질린 상급 하인들마저도 입을 쩍 벌리며 감탄을 토해냈을 정도였다.
바로, 스칼라이의 현 제 1공주인, 계승자(繼承者)의 행렬이었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리더니 두꺼운 모피로 몸을 감싸고 있는 사내가 내려섰다.
한쪽 눈에 가죽으로 만든 안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슬며시 주변을 경계하듯 살피다 이윽고 정중하게 비켜섰다.
그 뒤로 한 소녀가 내려섰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땋아 올리고, 하얀 관을 쓰고 짙은 감청색의 성장을 입고 있었는데, 얼어붙을 듯 차가워 보이는 하늘색의 눈동자에서 마주하는 사람을 위압하는 고혹적인 이지(理智)가 느껴졌다.
아스틴은 직접 홀의 계단 아래로 내려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프리실라 공주.”
“환영해 줘서 고맙소. 펠로데 공작.”
프리실라가 짤막하게 묵례했다.
아스틴은 직접 그녀를 홀로 안내했다. 이웃 나라의 계승자를 환대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제국의 평안과 함께 나라 간의 평화를 위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다.
물론, 스칼라이 미래 국왕과의 돈독한 관계를 손에 넣고자 하는 목적이 먼저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계승자 또한 그녀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3년 전, 공작이 길리어드와의 결혼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국 내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휩쓸려 살해당하거나 감금되었을지도 모른다.
모순되게도 지금 그녀가 왕위 계승자로서 안온하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아스틴이었던 것이다.
설리번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도 딸을 마음대로 다루지 못했던 이유가 그것에 있었다.
잠시간 성의 내부를 둘러보던 프리실라가 입술을 열었다.
“펠로데는, 예전에 보았을 때보다도 더 화려해진 것 같군요.”
“내 집처럼 있다 가세요.”
아스틴은 부드럽게 대답했다.
* * *
그 무렵, 부군의 집무실은 고요했다.
“전하,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정말 안 가 보실 겁니까?”
듀랜트가 몇 번이나 프리실라의 도착을 알렸지만, 길리어드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전신에서 스며 나오는 기백이 그날따라 평소보다도 더 진중하고 혹독했다.
그 무렵,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르첼이었다. 그의 모습에 허공을 향하고 있던 길리어드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게 두 사내는 잠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덤덤한 마르첼의 표정에 길리어드의 시선이 조금씩 굳었다. 그러자 마르첼이 그날따라 평소보다도 더욱 정중히 묵례했다. 지나치게 공손한 태도라 약간 얄미워 보일 정도였다.
그는 천천히 길리어드의 앞으로 다가온 책상 위로 작은 나무 상자를 내밀었다.
단검이 들어 있었는데, 공들여 세공한 티가 나는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특별히 신경을 썼습니다만, 부군의 마음에 드셔야 할 텐데요.”
그것은 마르첼이 공작의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단검이었다. 펠로데 가의 풍습에 따라, 길리어드로부터 받은 검을 녹여 그가 직접 만든 수제품이었다.
말없이 쳐다보는 길리어드의 시선은 평소와는 다르게 필요 이상으로 날카로웠다.
그 모습에 듀랜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엊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부군,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단검 말입니다. 거의 완성되었습니다만. 언제 한번 보시겠습니까?’
간단한 결재를 위해 부군의 집무실을 들른 마르첼이 문득 그런 질문을 해 온 것이었다.
‘뭐 하러 나한테까지, 자네 실력이야 안 봐도 뻔해. 잘 만들었겠지.’
‘그래도 기왕이면 부군께서 한번 보시고 평가해주시죠. 안목이 있으시니, 제대로 검사를 받아야 제 마음도 편할 것 같거든요. 조만간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참, 그런데- 배냇저고리는요?’
길리어드가 구석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켰다.
슬며시 바구니 안을 쳐다본 마르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배냇저고리는 온데간데없고 식탁보처럼 보이는 물건이 놓여 있었던 탓이다.
‘아이 옷이라지만, 쉽지 않더군.’
‘그렇겠지요. 별거 아닌 듯해도 나름대로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일이니까. 그러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공방에 맡기시지요? 시기가 좀 늦어지긴 했지만, 어떻게 찾아보면 최고급 재단사에게 맡길 수 있을 겁니다. 하명하신다면, 제가 집사에게 전달해 두겠습니다.’
‘고맙긴 하지만, 난 내가 만들어 준 걸 입히고 싶네.’
‘아, 그러지 마시고 그냥 맡기십시오. 그래도 첫 번째로 태어나는 자손이 아닙니까? 이왕 입히는 거 좀 좋은 걸로 입히는 게 좋지요.’
그때까지만도 길리어드의 심기는 평온했다. 꼼꼼하고 배려심 깊은 마르첼이 신경 써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제도(帝都)에서도 그럴듯한 배냇저고리를 주문하려면, 최소한 몇 개월은 걸립니다. 괜한 시간 낭비는 안 하는 게 낫습니다. 대체, 요즘 사내들이 누가 직접 바느질을 한다고요.’
‘내 아버지는 하셨어. 그런데 자네 보기에, 내 바느질이 그렇게 엉망인가?’
‘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객관적으로 대체, 이것의 어디가 배냇저고리입니까? 식탁보로도 안 쓰겠습니다.’
다소 직설적인 어투에 근처에 있던 듀랜트가 무심코 푸- 웃음을 터트렸다.
길리어드의 심기가 울컥 솟아오른 것이 그때부터였다. 가뜩이나 생각처럼 안 되어 머리가 아픈데 이따위 잔소리를 할 게 뭐란 말인가.
물론 길리어드는 마르첼의 시선에서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완벽한 아버지라는 평을 받고 있었으니까.
기사단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펠로데의 지방에서 소영주로서 도시를 다스리고 있는 아내를 대신해 세 아이를 기르고 있었다. 공작의 수석 시종 무관인 만큼 좀처럼 자리를 비울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유모를 고르는 일부터 의, 식, 주와 교사를 구하고 학교를 보내는 일까지 혼자서 도맡았다.
아이들도 하나같이 잘 커서 주변의 부러움을 샀는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히 이런 식으로 오만을 떠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금화를 처들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지.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내가,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이 직접 만들어 입히는 배냇저고리야. 그따위 레이스가 달리거나 알록달록한 수가 놓인 것들과 가치가 같을 것 같나? 난, 내 아이에게 직접 만들어 입힐 거야. 비록 그게 식탁보처럼 보인다고 해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제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전 부군을 생각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지금이야 만들어 입히는 게 낫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나중에 보시면 후회하시게 된단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무례이긴 합니다만, 명색이 펠로데의 후계자가 아닙니까?’
길리어드가 다소 거칠게 대답했다.
‘자네의 말뜻은 알겠네만 그만하지. 그런데 새삼 궁금해졌군. 대체 얼마나 대단한 단검을 만들었길래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는지 말이야. 어디 나한테 한번 가져와 봐. 자네 말대로 나는 만드는 재주는 엉망이라도, 안목은 높으니까. 제대로 검사해 주겠네.’
어디 흠 잡힐 곳 하나 있어 봐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으름장을 놓고 있을 무렵, 마침 기사단의 일로 할 말이 있다며 집무실에 들른 녹스턴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말았던 것이다.
길리어드는 내심 억울했지만, 새삼 이 장소의 폐쇄성을 떠올려야 했다.
기사단 내에서 일어난 일은, 기사단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 이것이 어제 사건의 전말이었다.
어쨌든 길리어드는 원래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살펴보며 단검의 모양을 꼼꼼히 살폈다. 평소라면 굳이 문제로 걸고 넘어가지 않을 부분이라도 꼬집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르첼이 만든 단검은 얄밉게도 정말 흠 하나 잡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길리어드는 다시금 무언가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이 이상 흠을 잡으려 했다간 되레 체면만 구길 거라는 생각에 그는 이만 단검을 돌려주어야 했다.
“…잘 만들었군.”
“뭘요, 그런데 배냇저고리는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마르첼이 덤덤히 입술을 열었다.
물론 진심으로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길리어드의 한쪽 뺨이 다시금 실룩였는데, 마르첼은 부러 침묵을 지키며 반응을 살폈다.
그는 언젠가 공작으로부터 부군이 점잖은 것처럼 보여도 은근히 고집쟁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애초부터 그럴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다. 게다가 왕자에다 늦둥이라니. 공작이야 자신의 남편이니 좋게 생각해 주는 것이겠지만 반타블랙슨 가문이 아노르인들 사이에서 지니는 대단한 입지를 보면, 그는 결혼 전부터도 대강 성격을 짐작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왕자는 참 자잘한 단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물론, 너무도 거대한 장점이 그러한 단점들을 모두 가려 버린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무튼, 마르첼은 부군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그간엔 사람이 점잖아서 인성을 좋게 평가하고 딱히 입을 대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철화의 사건과 요즘 기사단에서 맴돌고 있다는 소문도, 사실상 행정의 총책임자인 공작이 무마하려는 의사를 보이고 있으니 내키지는 않지만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첫 번째로 태어나는 펠로데의 귀한 후계자에게 저놈의 거적때기 같은 배냇저고리를 입히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그는 스칼라이인이 아니라 이러한 풍습을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게 생각할 거라고 여겼다. 나중에 후회할 일은, 않는게 좋았다.
그렇게 어제의 팽팽한 분위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즈음이면 듀랜트가 중재에 나서겠지만 듀랜트는 마르첼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길리어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을 뿐이다.
그때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길리어드가 거칠게 대화를 끝냈다.
“어떻게든 내가 마무리할 거야. 자네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데, 누가 보면, 자네 아이인 줄 알겠군.”
“저의 첫 조카입니다. 펠로데의 첫 후계자이고요.”
그즈음에는 마르첼의 목소리도 조금은 삐죽해졌다.
“그래, 좋아. 그럼 아내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내가 만든 배냇저고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한다면 자네 말대로 하도록 하겠네.”
“아니, 그런 걸 공작님께 물어보실 필요가 뭐 있습니까. 아버지는 부군인데요. 그리고 부군의 나라인 스칼라이의 풍습이고요. 본인 스스로 결정하시면 되는 일이지요.”
“아내에게도 권리가 있어. 그녀의 아이니까. 그러니 물어본다는 건데 뭐가 잘못됐나?”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사실 제가 뭐라고 입을 대겠습니까.”
마르첼은 이만하자 싶어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마치 아이와 다투다 지친 어른이었다.
은근히 무시하는 행동에 길리어드가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을 토로했다.
덜컥 문이 열리며 익숙한 인영이 들어온 것이 그 무렵의 일이었다.
어째서인지 녹스턴 경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르첼은 상황을 파악했다. 그의 아버지는 단지 검술 실력만 뛰어나서 기사단장의 직위를 단 사람이 아니었다.
지켜보겠다는 경고가 단순히 경고로 끝나지는 않는 분이다.
아마 어제의 모습을 보고, 주변의 기사들에게 지켜보고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테다.
그는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사태는 늦은 후였다.
녹스턴이 심드렁하게 입술을 열었다.
“이거야, 원. 이 늙은이의 귀에도 들릴 만큼 시끄러우니. 여기 귀 달린 자들은 다 들었겠어. 그래, 자네들 모두 시간이 남아 도는 모양이지? 하는 수 없지, 마구간 청소나 좀 하게.”
* * *
두 사람이 사이좋게 마사를 청소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아스틴도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의 오후, 그녀가 잠시 안채에 들었을 무렵이었다. 마침 길리어드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표정이 몹시 뚱했다. 아스틴은 그 속마음이 이해되었지만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었다.
내심 재미있어 웃음이 자꾸 나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토라져 있는 사람을 한 번 더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표정은 마르첼도 마찬가지였다. 길리어드야 사람이 점잖아서 속으로 꾹 참고 견디는 성격이라면 마르첼은 본성이 날카로운 사람이라 사소한 곳에서 화를 표출하고 다녔다.
해서 평소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기사들의 복장이나 가신들의 걸음걸이를 두고 트집을 잡았다.
물론 아스틴은 그가 자신에게는 화를 내지 않았으므로 그것 또한 모르는 척 해 주었다.
아무튼 둘 다 한두 살 먹은 것도 아니고 금방 풀릴 테지만, 그래도 마구간 청소라니.
녹스턴 경께서도 참 너무하지.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에 싱글거리던 그녀는 뜨끔 뱃속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가도, 부러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본격적인 추수 감사제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홀이 화려한 연회장으로 바뀌었다.
비단 연회장뿐만이 아니라 성 전체가 축제의 열기로 그득했다.
연회장은 아주 넓었지만, 그 수요를 버티질 못할 정도로 많은 손님이 도착했던 것이다.
초대하지 않은 자들도 섞이어 있었다. 원칙적으로는 그런 이들이 홀에 들어올 수는 없었지만, 펠로데는 그렇게 융통성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아스틴은 황금색 술잔을 높이 들어 올리며 축배를 외쳤다.
“제국의 평화를 위해!”
똑똑 떨어지는 목소리가 다소 위압적이었다.
오늘 그녀는 고불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에 향유와 유약을 발라 매끄럽게 틀어 올리고 화려한 머리 장식을 얹었다. 부군이 선물해 준 아르타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부푼 배를 가리기 위해 풍덩 하면서도 화려한 수가 놓인 붉은 드레스를 입고 색조가 짙은 눈 화장을 하고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그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고혹적이었다.
“제국의 평화를 위해!”
제후들이 경건하고도 격렬하게 외쳤다.
그들의 얼굴에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축배사가 끝나자마자 술과 음식이 쏟아져 나왔고, 이윽고 황제의 정찬회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연회가 시작되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틈타 그녀는 천천히 연회장을 다니며 제후들의 모습을 살폈다.
근처에 있던 젊은 제후 두 명이 무어라 속닥이고 있었는데, 대강 올해는 펠로데를 선택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의미의 대화였다.
그들이 깔끔하게 술잔을 비우자 하인이 나타나 잔이 넘치기 직전까지 그것을 채워 주었다.
아스틴은 시선을 돌렸다. 혹여 누구 불만을 가진 이가 없을까 살피고 있을 즈음, 황금빛으로 칠해진 굵은 술통이 그득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최고 상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길리어드가 직접 술통을 따더니 축사를 하며 가신들에게 술잔을 하나씩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도 두어 잔 마시더니 자신의 잔에 다시 한가득 채워 마르첼의 앞에 내밀었다.
그날따라 길리어드는 유난히 멀쑥한 차림에 머리도 완벽하게 잘 빗어 넘긴 모습이었다.
표정이 몹시 무뚝뚝했는데 그래서일까, 아스틴은 남편이 얄미울 정도로 쌀쌀맞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마르첼이 저런 장소에서 부군이 건네는 술을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굳이 거절해도 상관은 없지만, 자존심이라는 게 있었으니 말이다.
밑바닥까지 깨끗하게 비운 후, 그가 술잔을 다시 채워 내밀었다.
눈썹을 찌푸리고 있던 길리어드가 입술을 실룩이더니 잔을 잡았다. 그러더니 꿀꺽꿀꺽 그것을 받아 마신다. 그리고는 또다시 채워 내밀었다.
마르첼의 뺨이 실룩거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시다시피 내일은, 새벽부터 좀 ‘바쁠’ 텐데요. 기사단의 마사는 상당히 넓지 않습니까. 일찍 시작해도 오후에 끝날 겁니다.”
“ 핑계를 대다니. 그렇게 안 봤는데, 주량이 약한 모양이군.”
그렇게 옥신각신 서로에게 한 잔이라도 더 마시게 하려는 내기 시합이 벌어졌다.
사실 정찬회와는 달리 추수 감사제의 연회란 조금은 자유로운 편이라, 딱히 품위 없는 모습은 아니었다.
아스틴은 그만 시선을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아무튼, 저러다 아침이면 풀어질 테다. 어차피 마사의 청소는, 피할수도 없고 두 사람이서 함께 해야지만 끝날 테니까.
사실 연회장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술 냄새와 음식 냄새, 짙은 향유와 향수, 가죽 냄새와 같은 갖가지 향기들이 지금의 그녀에게는 상당히 참기 힘든 고역이었다.
부러 연회를 화려하게 열고 치장을 하여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으니 이쯤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문제는 되지 않을 테다.
그 무렵, 프리실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근처에 있는 발코니에 기대어 무언가를 신기한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커다랗고 둥그런 유리구슬이었다. 구슬 안으로 이파리 하나까지도 황금으로 만든 버드나무가 마치 바람에 흩날리듯 간간이 날리며 이파리를 흩뿌리고 있었다. 떨어져 나온 이파리는 조그만 새가 되어 유리구슬 안을 한 바퀴 돌아서는 버드나무의 반대쪽으로 흡수되며 다시금 이파리를 피워 냈는데, 그 아래로 은색 공작 두 마리가 거닐고 있었다.
자신이 준 선물이었다.
그녀는 프리실라를 포함해 특별히 상석에 초대한 제후들에게는 방문을 감사하는 의미에서 값비싼 선물을 주었다. 물론 잡음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보다 급은 낮지만, 결코 불만이 나오지는 않을 수준의 선물을 주었고 말이다.
홀린 듯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표정에 아스틴은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
“그게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죠? 다행이네요.”
“아무럼요. 내 나라 스칼라이 세공 장인들의 실력은 나쁘지 않지만, 이렇게 마음 써준 선물을 받은건 오랜만이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제가 신경 써 드려야지요.”
그 말에 프리실라가 미소를 짓더니 하인을 불렀다. 그리고 유리구슬을 가지고 가라 명하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펠로데는 여전히 평화롭군요. 다시 말하지만 초대해 주어서 고맙소. 올해는 추수 감사절을 이렇게 조용히 지낼 수 있으니까. 마음이 편하거든.”
“뭔가 걱정거리가 있으신 모양이죠?”
그 말에 프리실라의 시선이 흘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간이었지만 길리어드의 자리를 바라본 것이다.
그녀도 상석에 초대되었던 터라 바로 근처에서 길리어드를 볼 수 있었지만, 남매는 형식적인 인사를 제외하고는 연회장에서도 전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 모습을 보며 역시 사이가 좋지 않은 거라 수군거렸지만 아스틴은 그래야 할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흔히 이런 연회에서는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일수록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는 법이다.
섭섭한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공주는 이윽고 미소를 짓더니 아스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남부는- 아, 미안해요. 이런 이야기는 연회 중에는 안 하는 게 좋은 거겠죠?”
“뭐, 저한테는 괜찮아요. 남부에서 골치 아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건 사실이니까요.”
프리실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께서도 아시겠지만, 나는 스칼라이의 남부에서 몇 개월간 복무하고 있었소.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바에스트 산의 동쪽 아래로부터 마물들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그 장소는 다들 알고 있지만 수많은 용종(龍種)과 마물들의 산지죠. 어떻게든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안심은 할 수 없더군요. 특히, 요즘은 용이 봉인에서 풀려난게 아니냐는 소문도 들려오고.”
인간이 용들의 위험에서 벗어난 지도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대륙의 동쪽은 용종의 침략을 입는 경우가 빈번했다.
스칼라이는 동쪽 사막을 지배하는 용 라티프와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마물과 와이번 집단들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었다.
물론 제국이라고 해서 용의 위협에서 안전했던 것은 아니었다.
백색 산맥의 남쪽, 키르서스 산맥의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용들의 아버지 카인더스트나 바에스트 성소에 묶여있는 최후의 화룡(靈龍) 수티하는 대륙인이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는 공포의 상징이었으며 인간 세계에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자들이었다.
물론 카인더스트는, 땅속 깊은 곳으로 숨어들어 잠에 들었고 수티하는 사지와 목이 묶이어 봉인되었다니 실질적인 위험은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용들이 떴다 하면 우선은 땅을 버리고 도망쳐서 목숨을 건져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한 재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아노르인 가문들이 신성하게 여겨졌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태생적인 용사냥꾼이니까.
수심이 깊어 보이는 모습에 아스틴은 목소리를 낮추어 다정하게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오늘은 즐기셔야죠.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는 말아요.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옥좌에 앉으신 후에는 싫더라도 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길 테니까.”
그 말에 프리실라가 미소를 지었다. 펠로데 공작에게 모종의 푸근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엄연히 이웃하는 국가의 수장이자 경쟁자였지만 그 전에 자신의 집안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있는 가족이었다. 단지 경계를 해야만 하는 상대는 아닌 것이다.
미소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던 프리실라는 문득 아스틴의 안색을 살피고는 되물었다.
“참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 안색이 안 좋아 보여요. 좀 앉거나 휴식하시는게 좋을 듯 한데.”
“안 그래도 들어가 볼 생각이었어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그러면- 부디 즐거운 시간 되세요. 프리실라.”
바로 그 무렵 연회장에서 음유시인과 악사들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청아하게 홀을 울리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손뼉을 쳐댔다.
프리실라가 그만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아스틴도 천천히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사방이 춤과 음악으로 요란했다, 사람들도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 외에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자신이 조용히 사라진다고 해서 수상쩍게 생각하느 사람은 없을 테다.
* * *
침실에 도착한 아스틴은 침대에 누워 목을 쭉 뻗었다.
화려한 드레스가 그날따라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온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울 정도로 피로했다.
그녀는 반쯤 옆으로 돌아누워 배를 쓰다듬었다. 맞은편에 걸린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일까, 표정이 싸늘하고 차갑게 식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시체처럼.
그 순간 뜨끔 배 속에서 무언가 불을 지피는 듯한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동안 배를 쓰다듬었다. 배는 어느새 제법 부풀어 올랐다. 물론, 아직 태동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아이가 자라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몸속에서 무언가가 자란다는 것은, 약간은 불쾌하고 낯설기도 하면서도, 묘한 포근함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말없이 배를 쓰다듬고 있을 찰나, 천천히 눈꺼풀이 감기더니 조금씩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화장도 지우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지만, 이불을 끌어 올려 배에 덮었다.
그 무렵 찰칵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인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길리어드였다. 말없이 바라보는 모습에 아스틴은 부러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눈을 감고만 있었다.
이윽고 침대의 한쪽이 묵직하게 흔들리더니 거대한 체구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아스틴은 눈썹 한쪽을 슬며시 비틀었다. 주량이야 구멍 난 항아리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취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술 냄새가 흥건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가 살며시 배에 손을 얹었다. 군살이 박혀 거칠하면서도 부드러운 굴곡의 느낌이 장골에서부터 서서히 좌우로 올라와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어쩌면 자신의 손보다도 익숙한 손길이었다.
그래도 아스틴은 잠이 든 것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무렵, 그의 손이 스치는 곳을 따라 배 속에서 빙그르르 무언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느껴졌다.
태동이었다.
길리어드가 그녀의 치마 위로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뭐라 속삭였다.
“이런, 두막아. 얌전히 있어. 어머니가 깨신다.”
‘두막’은 길리어드가 태아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그는 아이가 미스트리스 숲에 있던 그 숲지기의 오두막에서 생겼다고 추측했다. 해서 처음에는 오두막이라 부르다가 요즘에는 줄여서 두막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아스틴은 후계자의 별명치고는 참 곰살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망설이던 길리어드가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춘다. 그러자 아이가 배 속에서 조금 더 움직였다.
그녀는 결국 눈을 뜨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참내, 지금 장난하는 거예요?”
“그냥, 아이가 뭐 하고 있나 궁금해서. 한번 봐요. 이젠 이름을 불러 주니까 움직이기도 하는데. 봐요, 아스틴. 두막아.”
길리어드가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다시금 움직였다.
벌써 사이좋아 보이는 모습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스틴은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력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세상에 자신을 빼놓고 둘이서 교감을 하다니. 아이는 그녀가 쓰다듬었을 때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길리어드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주었다.
길리어드가 입술을 열었다.
“일찍 들어가겠다는 말이야 들었지만… 그래도 지쳐 보여서 따라왔어. 정말 괜찮은 건가?”
시선에 걱정이 가득했다.
괜스레 밀려드는 안쓰러운 마음에 아스틴은 고개를 흔들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길리어드가 망설이다가 천천히 머리를 기울여 그녀의 목에 이마를 기댔다.
“아스틴…….”
“괜찮을 거예요,”
아스틴은 그의 손을 잡고 살며시 쓸었다.
그를 다독여 주기 위해서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불안을 가라앉히려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 무렵, 배 속이 또 한 번 뜨끔거렸다.
그것이 평소와 같이 통증으로만 끝나는 일이었다면 견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움찔하며 허리를 떨었을 때 느껴지는 강렬한 흡입력, 그녀는 몸속의 모든 조직이 그곳을 향해 모여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분명 일반적인 일은 아니었다.
아스틴은 조금은 경악스레 배를 바라보고 있었다. 뱃속은 또다시 잠잠해졌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는 불안한 가슴을 한번 더 쓸어내렸다.
* * *
다음 날, 여러 제후가 그녀에게 접견을 청해 왔다.
이런 대규모 행사가 열리는 시기에는 흔한 일이었다. 사방에 첩자가 깔려 있는 시기, 이목이 다른 곳에 쓸려 있으니 방문 목적이 수상쩍게 보일 일이 없었던 터다.
그중에는 프리실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스틴은 부러 사소한 접견을 두 개 정도 진행한 후에야 프리실라를 마주했다.
프리실라는 차갑고 진중해 보이는 얼굴로 아스틴을 마주했다.
마치 아이처럼 즐거워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표정이었다.
다소 힘을 주고 있는 하늘색 눈동자에는 약간의 광기와 살기가 맴돌고 있었는데, 그건 고의가 아니라 천성적인 인상이었다.
외눈의 사내가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헥터 칼릭스 경으로 한때 설리번의 명을 받아 길리어드를 데리러 왔던 이언 칼릭스의 형이었다.
창가에 기대어 있던 아스틴은 천천히 책상에 앉았다.
“자, 이야기해 볼까요.”
그 말에 프리실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술을 열었다.
“제국이 샨시르를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래서요?”
“사실 바에스트 산의 서쪽령에 대한 통치권은 우리가 언급해 봤자 의미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어요. 황제는 그곳에 도시를 짓고 있다고 하던데, 그 자리에 잔류하던 마물들이 그곳에서 동쪽과 북쪽으로 밀려나고 있다더군. 그럼 내 나라의 남부가 위험해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이야기겠죠.”
아스틴은 십분 스칼라이의 상황을 이해했다.
오랜 내전으로 쇠약해져 가던 스칼라이는 태자 시절 길리어드의 섭정으로 인해 내란 자체는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외침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마물의 침입. 그 중에서도 용종(龍種)은 인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두뇌가 뛰어나다. 인간과 생존 환경을 공유하고 있지만, 결코 인간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스틴도 묵과할 수는 없었다. 스칼라이를 돕지 않는다면 그다음은 제국의 차례가 될 것이 뻔한 일이다.
가뜩이나 인간들끼리 아등바등 다투고 있는 상황에 그런 문제까지 겹친다면 인력과 물자 낭비가 상당할 터였다.
하지만 그냥 도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그녀는 본론을 꺼내 놓았다.
“프리실라. 랑기에에선 조만간 내전이 일어날지도 몰라요.”
“내전…?”
“당신들도 알다시피 지금 황제 폐하께서는 남서쪽을 거의 수중에 넣으셨고, 저는 이렇게 섭정의 자리에서 내려와 제후로서 본분을 다하고 있죠. 보기엔 평화롭기 그지없어도, 사실 이미 자잘한 균열은 회복되지 않을 정도예요. 분명히 그분은 전쟁을 바라고 있으실 테고… 저는 그 사태가 아마 우리 중북부 지역 제후들이 전멸하기 전까지는 계속되리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황가는 이미 샨시르의 서쪽은 거의 차지했으니, 이제 키르서스 산맥을 넘어 백색 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조금씩 영역을 넓힐 거예요. 그러니 당신들이 책임지고 바에스트의 동쪽으로 뻗어나가는 그들을 막아 준다면, 나도 당신들의 상황을 외면하지는 않겠어요.”
프리실라는 망설였다.
제국을 상대해서 남동쪽 지역을 막으라니,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만큼 적이 늘어나는 게 좋은 건 아니었다.
아스틴이 부드럽게 입술을 열었다.
“그렇다고 당장 대비하라는 말은 아니에요. 나도 천천히 남쪽으로 지반을 넓히면서 압박을 할 생각이니까. 어쨌든, 당신도 황가가 어떻게 나올지는 예상을 할 수 있을 텐데요? 프리실라, 지금 당장이야 상대해야 할 적이 늘어난다는 게 꺼려지겠지만, 이 문제를 내버려 둔다면 몇 개월 뒤에는 스칼라이 남쪽 국경의 모양을 걱정해야 할 거예요. 뭐가 더 큰 문제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공작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황실은 당연히 스칼라이가 현재 남쪽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거였다. 그를 파고들어 온다면 그녀로서는 어차피 맞서야 했다. 마물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랑기에 황실군이, 그놈의 거인 병사들이 국경의 저변을 정복하는 것을 한번 허락해 버리면 아주 성가셔졌다.
하지만 내전이라.
프리실라는 그 단어만큼은 도저히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흘려들을 수는 없었다.
사실 그녀는 공작과 좀 더 견고한 관계를 쌓아야 했다. 한 나라의 계승자이면서 굳이 이까지 찾아온 것도 그런 이유다.
물론 스칼라이는 지금도 펠로데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그건 나라 간의 문제이고, 프리실라는 공작이 다름 아닌 ‘자신’에게 우호적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공작은 자신의 오빠를 부군으로 두고 있고, 또… 지금의 국왕인 아버지와도 교류하고 있었다. 얼마 전, 자신의 스승이자 시종 무관이었던 에리크가 지금 이 가문의 가신이 되었으니 말이다. 다름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서.
자신을 섬기던 이를 마음대로 빼앗아 가 펠로데로 보내는 것에 그녀가 얼마나 분노하고 슬퍼했던가. 누구도 존경하는 스승이자 충성스러운 시종 무관이, 다른 군주의 소실이나 다름없는 처지로 끌려가는 상황을 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 본인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었을 지라도 말이다. 또한 그녀도 계속 로렌스 가를 감싸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프리실라는 아스틴의 제안을 수락했다.
“받아들이죠. 다만, 전 이게 ‘우리 사이’의 분명한 계약이었으면 좋겠어요.”
“공식적인 계약은 당신이 즉위하면 하기로 하죠. 뭐, 우린 둘 다 약속을 어길 사람들은 아니니까. 믿어도 되겠죠? 그러면- 이야기는 일단 이쯤에서 마무리하고, 프리실라. 여기까지 왔는데, 왜 그이를 한번 만나시지 않는 거죠?”
프리실라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쳐 갔다.
“-오빠는 잘 지내고 계시는가요?”
“어제 연회장에서 한번 물어보시지.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기에, 제가 다 눈치가 보였어요.”
프리실라는 잠시 미간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다 마지못해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오빠가 펠로데로 떠나시기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제부턴 나는 계승자이니 자신에게도 그처럼 대하셔야 한다고 말이에요. 사실 내가 공작의 허락도 없이 부군을 찾는 건,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지, 섣불리 말을 걸 수가 없었어요. 그분은 저에겐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라. 괜히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소.”
“뭐 그렇게까지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야. 사실 난, 걱정이 돼서 그래요. 스칼라이에서 남편이 이곳에서 딱히 행복하게 지내지는 않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오는 것 같아서요.”
“얼마 전 왕께서 사절을 보냈다는 말은 들었소. 참, 그분의 극성에 내가 민망할 지경이더군. 하지만, 그 부분만큼은 걱정하지 마세요.”
“ 하지만 저는 아내이니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어요.”
“ 공작, 나는 부부가 극복해야 할 문제를 정치적인 것으로 끌고 가는 것만큼 비열한 짓은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사실…오빠의 경우엔, 무리도 아니지. 아직도 본국의 백성들에게 신으로 추앙받는 분이라, 그분에 대해선 사소한 소문이라도 금방 지나치게 빨리 퍼지니까. 하지만 공작도 이해해야 해요. 사실 그분이 태자로 계실 때에는 동쪽의 라티프도 눈치를 보았고, 감히 왕좌를 노리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으니까…. 그분은, 명실상부 나라 최고의 전사셨지. 그리고 우리나라는, 문화상으로도 그런 사람을 추앙하고.”
강한 사람을 추앙한다.
그 말을 듣자 아스틴은 문득 요즘 성내에 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여러 가지 이야기로 와전되고 있었지만, 공통되는 내용은 하나였다.
자신들의 주군이 어쩌면 힘을 얻기 위해서 사악한 주술에 손을 대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애초에 그저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스틴은 남편 본인으로부터 해명을 듣고 싶기는 했다.
그러나 길리어드는 시종일관 묵묵하게 입술을 다물고 있었고, 아스틴이 생각하기에도 그런 건 아주 개인적인 상처를 건드릴지도 모르니 직접 말해 주기 전까지는 젖혀 두고 있을 생각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프리실라에게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공주 본인조차도 형제의 입지를 인정하는 지금, 그런 말은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잘 지냈으면서 굳이 소문 같은 것을 조사하겠다는 건 부부간에 괜한 시빗거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스틴은 다정하게 말했다.
“프리실라, 그이를 만나러 가세요. 아마, 지금 기사단에 있을 거예요. 안 그래도 어젯밤 제가 남편과 이야기를 해 봤는데, 그이는 아무래도 스칼라이의 국왕이 될 분인데 자신이 함부로 만나서 대화를 청하는 건 무례한 일이라고 생각하더군요. 하지만 뭐, 그렇다고 두 분이 남매라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동생이 오빠를 찾아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프리실라가 그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러면, 한번 찾아보겠소.”
“하인에게 안내를 명해 둘게요. 그럼 프리실라, 좋은 선택 고마웠어요.”
프리실라는 망설임 없이 등을 보였다. 옆에 서 있던 헥터 칼릭스가 짧게 묵례하더니 그녀를 따라갔다.
잠시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스틴은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곁에 서 있던 시리스에게 물었다.
“어때, 괜찮은 것 같아?”
“공주야 원래 냉정하고 신중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전형적인 나라의 계승자지요.”
“아니,”
“…헥터 칼릭스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스틴은 폭스테일이 전해준 말들을 떠올려다.
헥터 칼릭스 경은 길리어드로부터 직접 공주를 지도하며 동시에 보필할 것을 명령받았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로렌스 가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대신 무시할 수 없는 남부 지방의 토호 군벌로 세간에는 그의 집안에서 차기 국서가 선출될 거라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설리번 로렌스는 그녀에게 로렌스 집안의 남자를 부군으로 들이라 명했다는데, 프리실라는 시기를 핑계로 그 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로 그즈음 설리번이 에리크를 자신에게로 보냈으니, 아스틴은 그 미세한 균열을 예상할 수 있었다.
흔한 갈등인지, 그게 아니라면 의도적인 행동인지.
하지만 어쨌든, 속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젊은 왕을 좌지우지하려는 자들은 어디에든 있는 법이지.”
“글쎄요,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겠군요. 저자가 곁을 지키고 있는 한, 로렌스 가도 입지가 서서히 줄어들 겁니다. 각하께서도, 칼릭스 집안의 위세는 아시잖습니까. 의외네요, 아무리 그래도 로렌스 가를 아끼리라 생각했는데.”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속이란 알 수 없는 법이야. 아무튼, 시리스. 에리크 그 자는, 잘 지내나?”
“ 그럭저럭요. 말씀하신 대로 편히 지내게는 해 주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성안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들은 생기는 법이지요.”
“ 아직은 일러. 조금만 더, 기다리게.”
* * *
그날 길리어드를 만나러 가는 프리실라의 발걸음은 조금, 발랄했다.
계승자라기보다는 순진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사실 그녀에게 길리어드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설리번은 늘 그녀에게 오빠를 조심하라며 철저한 경쟁자라는 의식을 심어 주었지만, 프리실라는 좀처럼 그렇게 여길 수가 없었다.
그녀를 애지중지하며 길러 준 사람은 설리번이었으나, 부정을 채워 준 사람은 언제까지나 길리어드였으니까.
젊은 나이에 신으로 추앙되던 오빠는, 의외로 그녀를 마주할 때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튼튼하고 강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존재 자체가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말을 태워 수도를 둘러보게끔 해 주고, 목말도 앉혀 주고. 궁중의 귀족들이 자신을 쉬이 여겨 수치를 받을 때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어 주었으며, 제 분을 못 이겨 울고 있을 때는 부러 장난을 쳐서 달래 주기도 했다.
물론 지금이야 그렇게 쉬이 지낼 수는 없는 사이였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었다.
그날, 길리어드는 펠로데 기사단의 마사에 있었다.
“아무튼 단장님은… 우리가 한두 살 먹은 아이도 아니고. 이런 벌까지 주실 필요가-”
마르첼이 투덜거렸다. 녹스턴은 이참에 무슨 결심을 했던 것인지 정말로 마르첼까지 마사로 불러들여 청소를 하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거대한 마구간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한동안 심드렁히 표정을 굳히고 있던 마르첼이 마방의 걸쇠를 풀더니 말들에게 채찍을 휘둘러 근처의 울타리로 내보냈다.
하지만 길리어드는 그저 팔짱을 낀 채 근처의 기둥에 기대어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청람색 눈동자가 다소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심 억울했다. 아니 이게 무슨 망신인가. 이건 불공평했다. 마르첼이라면 몰라도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녹스턴 경에게 한마디 할 것을. 새삼 자신의 성격이 너무 물러진 게 아닌가 싶다가도, 그는 내색하지 않고 마구간을 쳐다보았다.
문득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그는 근처에 있던 건초 상자에 털썩 앉아 연초 파이프를 물었다.
대놓고 농땡이를 피우는 모습에 마르첼이 불만스레 입술을 실룩였지만, 여기에 녹스턴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히 길리어드를 보고 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러, 묵묵히 혼자 청소하던 마르첼이 결국 참다 못해 길리어드에게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녹스턴이 나타났다.
그는 근처의 울타리에 기대어 두 사람을 감시하듯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길리어드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건초를 정리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이윽고 녹스턴은 길리어드가 앉았던 상자에 앉아 그가 피우다 내려놓은 연초 파이프를 집고는 부리 부분을 소매로 쓱쓱 문지르더니 그대로 물었다.
짙은 회색 연기를 뱉으며, 그가 잔소리를 시작했다.
“우리들 아노르인은, 수명이 길긴 하지만 그렇다고 시간이 ‘늦게’ 흘러가는 건 아니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들 모두, 철은 빨리 들어야 해. 그래야 인생의 즐거움도 빨리 배울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래 가지고야 내가 단장직을 내려놓을 수 있겠나.”
뻐끔뻐끔 연기를 날리며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직접 감독을 했는데 길리어드는 묵묵히 따르면서도 자꾸만 입술이 실룩거렸다.
내심 당장이라도 아내에게 자신이 불합리한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중요한 건 역시 기사단의 폐쇄성이었다.
아무튼 체면도 말이 아니었지만 진정 마음이 무거웠던 건 역시 그놈의 배냇저고리였다.
아내에게는 그토록 걱정하지 말라고 했건만, 신경이 쓰였다.
어제 집사로부터 그녀가 황제의 하사품을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길리어드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니 마르첼의 말대로 지금이라도 제국의 뛰어난 공방에 맡기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마음에 걸렸다.
“오빠, 나예요.”
프리실라가 찾아온 것은 그렇게 청소가 거의 끝났을 무렵이었다.
몸도 땀에 젖고 흙투성이가 되었던 터라 증기탕에라도 들어가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을 들이미는 동생의 모습에 그는 잠시 멈칫했다.
사실 그는 프리실라의 무사한 모습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안심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서 젊은 후계자가 부담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접촉하는 것조차 꺼렸다.
게다가 아내가 부담을 느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들은 역시 남매였다.
그 무렵 공주를 데려온 하인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그만 물러나 보겠다며 등을 돌렸다.
아마, 아내가 보낸 모양이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프리실라.”
길리어드는 뒷짐을 진 채, 예의 덤덤하지만 다정한 눈으로 프리실라를 내려다보았다.
딸이나 다름없는 동생은, 그새 머리 크기 하나만큼 더 자랐지만 그래도 그의 눈에는 아직 어린아이로 보였다.
아노르인들은 유년기와 성인기 여성의 체격이라든가 실루엣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그런 점에서 아직 프리실라는 영락없이 소녀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왕과 같다고 볼 수는 없지만, 조그만 얼굴에 제법 매서운 눈매가 영락없이 어머니를 닮았다.
두 사람은 이윽고 마구간의 마사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긴 길리어드의 보폭을 따라 걷기 위해서 프리실라는 아직도 조금은, 잰걸음으로 따라야 했다.
이러한 만남은 그들에게는 다소 익숙했다.
스칼라이의 왕궁에 있을 때도, 프리실라가 길리어드를 가장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곳은 다름 아니라 마구간이었다.
말들을 아꼈던 길리어드는 아끼는 명마들이 머무는 자신의 개인 마사라면 직접 청소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으니 말이다. 어떤 때는, 종일 그곳에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
그 무렵, 뒷짐을 진 채 걷던 길리어드가 멈추어 서더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말이 없니, 프리실라?”
“오빠야말로… 나를 그렇게 오랜만에 보셨을 텐데, 왜 아무 말도 안 하세요?”
“나는 네 건강한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거든. 사실 난 네가 나를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저도, 잘 지내시는 듯하여 굳이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만. 공작이 한번 보러 가라고 하더군요.”
그 모습에 길리어드는 조용히 물었다.
“프리실라, 네가 보기엔 내가 아직도 스칼라이의 위대하신 전신이냐?”
“그건-.”
“난 이제 그저 펠로데에 장가간 가문 밖의 사람이야.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위엄을 갖추렴.”
프리실라는 조금 입술을 비죽였다.
그 말은 사실이었지만, 내심 불만이었다.
길리어드 반타블랙슨은 위대한 전사이자. 전신이었다.
그런데 그는 왜 이렇게까지 자신의 존재를 낮추려는 하는 것일까.
계승자로서 제 1공주가 된 자신에게 폐가 되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겠지만, 그래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아무리 나라를 떠났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스칼라이의 왕족이었다. 스칼라이에서는 왕족들에게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오빠는 내 형제예요. 형제일수록, 말은 조심해야 하는 법이지요. 저도 곧 성년이니까요.”
길리어드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여기를 선택했고, 너는 그 자리를 선택했어. 이유가 뭐든 간에 결과는 바뀌지 않아. 군주가 될 사람은, 너다. 그러니 위엄을 갖추고 편하게 해라.”
“ 하는 수 없지요. 사실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잘 지내고 계시지요?”
“그래, 보다시피.”
“얼마 전에, ‘철화’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길리어드는 순간 멈칫했다.
“누구한테?”
“아버지께요.”
프리실라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의 정치적인 일에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말하고 싶은 일은 있었던 것이다. 내키지 않지만, 그녀의 형제였으니까.
“그 일로 아버진 그것 보라며 되레 오빠를 경계하라고 하시더군요. 위선적인 놈이라느니,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다느니…”
“재미있군,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변하질 않는지. 프리실라, 나는 네가 아버지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새겨듣거라. 충고와 오지랖은 비슷하지만 질은 아주 다른 말이니까.”
“감히 아버지를 이해해 달라고 말하지 않겠어요. 그럴 자격도 없죠.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설리번를 대하는 남매의 태도는 확실히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그 문제로 한번 갈등한 적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프리실라는 길리어드의 앞에서 설리번을 옹호하거나 편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며, 그들 남매는 어느새 기사단의 입구에까지 다다랐다.
성채의 입구에 예의 선선 공작이 세웠던 공작 부군의 동상이 엄청난 위용을 발휘하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15m는 넘는 거대한 동상이었다.
길리어드는 그 내부를 채우고 있는 아다만트를 떠올려 보면 대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심, 이런 동상을 선사 받을 정도로 사랑받은 선조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함께 올려보고 있던 프리실라가 말을 이었다. 걱정이 스며있는 목소리였다.
“스칼라이는- 아직도 약간은 혼란스러워요. 궁성에서는 무엇 하나도 정확한 게 없고, 누구 하나 쉽게 믿을수도 없지요. 하지만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말씀대로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그보다도, 조심하세요. 나는…사실 걱정이에요. 나라를 위해서였다는 건 알고 있지만, 오빠가 제국인의 생활이라니. 모왕께서 살아 계셨다면, 그런 결혼을 주도한 사람들을 갈아버렸을 겁니다.”
길리어드는 묵묵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저 어리기만 하던 동생이 이런 말도 할 줄 알게 되었다니. 제법이라고 생각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그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없었다.
그런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내가 그렇게 널 걱정시켰니?”
“오빠는 아니라고 하셔도. 역시 아직은 나의, 내 스칼라이가 추앙하는 신이니까요.”
신.
길리어드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됐다. 귀 간지럽게. 차라리 그냥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하렴.”
프리실라는 말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그저 올려다보기만 했다.
사랑스러울 정도로 기특한 미소였다.
길리어드는 한마디 더 하려고 했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장가간 오빠 걱정하는 누이라니, 차기 국왕치고는 너무 다정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있던 고민들을 잠시간 던져 버릴 수 있었다.
프리실라의 행동에서 느꼈다기보다는, 그녀가 가져온 잠시간의 평화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만큼은 기사들의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는 자신에 대한 소문도, 좀처럼 마음 가는 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배냇저고리에 대한 걱정도 덜 수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새삼 프리실라가 자신에게 찾아온 작은 신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날 길리어드는 억울하던 감정도 잊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안채를 향했다.
* * *
연회의 분위기는 그렇듯 감사제 내내 이어졌다.
떠들썩한 음악소리가 성 곳곳에서 울리고, 제후들에서부터 고된 하인들까지,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그랬기 때문에 더욱 조용하게 느껴지는 장소가 있었다. 바로 펠로데의 서고였다.
“거기, 이리 좀 와 보게.”
며칠 후, 어느 거대한 책장의 아래서 물끄러미 꼭대기를 쳐다보고 있던 아스틴은 지나가던 하인을 불러세웠다.
찾아야 하는 책이 하필이면 너무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다.
“부르셨습니까?”
아스틴은 정중히 묵례하는 사내의 모습을 보고는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에리크였다.
서고는 영주의 개인 소유이긴 하지만, 아스틴은 성안의 가신과 기사들에게는 그곳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러니 에리크가 그곳에 있는 건 별반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스틴은 잠시 망설였다. 그제야 어제 아침, 시리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철화의 사건 이후, 길리어드는 에리크가 안채를 벗어나게 된 걸 꽤 못마땅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를 불러내어 서고에 있는 방 한 칸을 주고 서고에 있는 모든 책을 필사하는 업무를 맡겼다고 하는데 누가 봐도 그건 정해 준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는 의미였다.
오래전부터 활자 산업이 발달했고, 그나마도 마법이 있었기 때문에 필사란 그저 시간 많은 귀족의 취미에 불과했다.
하지만 취미도 지나치면 노동이 되는 법이다. 게다가 모든 책이라니, 사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소리였는데 아스틴은 에리크가 안타깝긴 했지만 지나친 처사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우선은 지켜보고 있었다.
가두어 굶기거나 돼지우리에서 살게 하고 심심하면 구타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일을 시키는걸 뭐라고 할 수도 없다. 그건 참 길리어드다운 심술이었으니까.
그녀는 상황을 전혀 모르는 척 입술을 열었다.
“요즘 여기서 자주 보이던데, 책을 좋아하나 보군?”
“…그렇습니다. 베푸신 아량에 따라 시간이 좀 남아, 필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필사라… 태평하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취미지.”
에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화한 모습이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왕자는 오늘은 당장 열 권이나 되는 책을 필사하여 자신에게 검사받으라는 명을 내렸다.
열 권이라니. 물론 철화에 관한 이야기를 공작에게 꺼낼 때, 그는 분명 제재를 받을 거라고는 짐작했다.
그 인간이야 원래 독종이라는 거야 알고 있으니 이 정도라면 감지덕지한 일이었겠지만, 아무튼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삼시 세끼를 대서고의 좁다란 방에서 해결해야 했다.
천성적으로 글을 좋아했던 지라 맡은 임무에 역겨움은 느끼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무도 없는 방에서 필사를 하고 있을 때면 자신의 팔자가 가련하게 여겨지고는 했다.
그는 일단 아스틴의 명령에 따랐다. 높다란 책장을 가리키는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까마득한 사다리에 올라서는 두꺼운 양장본의 책을 꺼내어 주었다.
흘끗, 책의 표지를 쳐다보던 그는 문득 드는 생각에 입술을 열었다.
“자연이 우리에게 고뇌와 절망을 부여하는데 그저 순리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야 한다면,”
“-우리가 대지를 피로 적시는 것도 그 순리이니 대지가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이 책의 200페이지에 적힌 말이지.”
“자연론에 대한 반박. 8시대에 몰락한 아노르인 왕조의 군주가 썼던 책이죠. 사현주의자들의 철학서도 읽으십니까?”
“가끔. 사람이란 실패한 논리를 돌아봐야 할 때가 있거든.”
아스틴은 대충 그렇게 대답하고는 책을 한 팔에 껴안았다.
에리크는 물끄러미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도 그날 공작의 안색은 평소보다도 더욱 나빠 보였다. 뭔가가 초조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런 상태로 집무를 보다니. 그는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물었다.
“…각하 이런 말씀은 무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안색이 무척 안 좋으십니다.”
“아, 사실 조금 걱정은 들어. 하지만 이거야 당연한 일이니까.”
“그래도 의원을 만나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만.”
“안 그래도 조만간 한번 불러 봐야겠어. 그나저나, 말해 보게. 자네는 살 만한가?”
이런 질문도 벌써 몇 번째일까. 형식적인 질문에 에리크는 조금은 지루함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다정하게 대답했다.
“불만은 없습니다. 그저 잘 돌봐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형식적인 듯한 대답에 아스틴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말해 주다니 고맙긴 하다만. 속마음은 안 그럴 텐데?”
“ 각하.”
“ 그렇게 체념한 듯 지내지 말게. 나는 자네가 본의 아니게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내가 잘 아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라면 자유를 주고 싶지만… 에리크. 나는 몸이 두 개인 사람이 아니야.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어. 그때까진 참게나.”
에리크는 그 말에 고개를 숙였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께 수데의 은총이 있기를.”
아스틴은 그만 등을 돌렸다. 조금 뒤뚱거리며 걸음을 옮겼는데, 에리크는 새삼, 그런 공작의 모습에서 왜인지 봄바람을 몰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인상 자체는 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어째서일까 찬 것들을 녹여 버리는 따뜻한 바람이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고고한 향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파르라니 보이는 안색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마치, 공작이 반짝이는 저녁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순간 무언가가 본능을 조금씩 흔들었다.
하지만 에리크는 얼른 그런 마음을 깨끗이 접어 구석으로 던져 놓았다.
그 순간,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주라니오?’
‘그놈에게는 분명히 뭔가가 있어. 추악한 저주가. 그러니 어미도 그렇게 잡아먹고, 아비까지 그렇게 만들었지. 그러니 공작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선왕께서는 끝끝내 알려 주지 않으셨으니까. 하지만 그게 용들과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이야. 나는 그놈이 끝끝내 우리 스칼라이에 재앙을 불러올까 두려워.’
‘용…이요? 도무지 저는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이제 펠로데로 가신 분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제부터 공작이 그분을 보호할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공작은 설령 그런 이야기 따위에 휩쓸려서 배우자를 원망하거나 업신여길 정도로 얄팍한 사람이 아닙니다.’
‘공작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주변의 생각은 다르지. 그리고 녀석은, 그 땅에서는 한낱 부군의 입장일 뿐이다. 군주의 남편이란 말이야. 아무튼 언젠가는, 그놈이 감추려고 하는 그 추악한 무언가가, 언젠가는 반드시 발목을 잡게 될 거다. 그때가 너에게는 기회가 될 거야.’
에리크는 정작 그 비밀이라는 놈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저히 신뢰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게 무엇이라고 해도, 에리크는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공작의 지금 행보를 보면, 왕자가 겪을 곤란이 자신에게 기회가 된다고 해도, 좀처럼 호기로 다가오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아비의 그늘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으니까.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새삼 다시 한번 공작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 * *
밤중 아스틴은 귀에 거슬리는 헉헉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마치 깊고 깊은 호수 아래에 빠져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 마치 굵은 리라의 현이 터지면서 나는 그런 소리였다.
다름 아니라 그 소리는 자신에게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몽을 꾼 것 같았다. 꿈속에서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무언가를 마주하고 있었다.
손바닥 근처가 뜨거웠다. 마치 산 채로 불 속에 집어넣어져 손끝부터 천천히 타오르는 그런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칠어진 호흡을 한동안 가라앉히던 그녀는 다시 눈을 감은 채 꿈속의 기억을 되살려 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침대에 내려와서는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따뜻한 장작과 화염석이 뒤섞인 채 훈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글지글 타오르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딱히 아늑하거나 포근한 느낌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건 이상하게도 배 속은 뜨거운데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손을 뻗어 그 열기를 쬐어 보려고 해도 식어 버린 몸의 온기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덜덜 몸이 떨려 왔다. 아스틴은 옆에 놓여 있던 담요를 덮고 벽난로를 향해 몸을 기울였지만, 마찬가지였다.
“아스틴?”
그 무렵 길리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자신을 찾고 있었다.
그는 밤새 자신을 끌어안고는 괜찮을 거라고, 조금만 견디면 나아질 거라고 속삭여 주었던 거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악몽 속에서도 억지로 잠을 잘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스틴은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건 힘이 하나도 없는 파리한 시선이었다.
그렇게 그들 두 사람은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 * *
그날 아스틴은 업무를 몽땅 비우고 의사들을 불러들였다.
특히 시리스가 함께 찾아왔는데 치료술사와 의사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갖은 검사를 진행했다. 맥을 진단해 보고 분비물도 직접 냄새를 맡아 보고 특별한 시약을 묻힌 시험지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답은 한결같았다.
딱히 문제 될 일은 없으니 다만 무리한 일을 하지 말라는 거였다.
산모의 기력이 약하면 그런 통증이 느껴질 수도 있다고 말이다.
아스틴은 그제야 안심해서 미소를 지었다.
그냥 걱정이겠지, 아무 일도 아닐 거야.
그녀는 마음을 달래면서 부러 기분이 좋아지는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추수 감사제를 치르는 동안 그녀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영주들의 서약서를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드라스터와 주변 도시를 잇는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스칼라이에 새로운 왕이 즉위한다면, 이제는 그들과 좀 더 견고한 동맹을 맺을 수 있을 거였다.
황제처럼 남부를 손에 넣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을 향해 칼을 겨누지는 못할 것이다.
억지로라도 좋은 일을 떠올리자고 마음먹고 있는 가운데, 길리어드의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고고하던 얼굴이 그날따라 한층 지쳐 보인다. 어째서인지 그가 자신보다도 더욱 불안해 보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서 텁, 제 배에 손을 얹으며 중얼거렸다.
“두막아, 우리가 이렇게 고생이다.”
그날은 집무실로 나가지 않고 종일 안채에서 쉬었다.
길리어드도 듀랜트에게 업무를 잠시 맡겨 놓고 곁에 앉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도중, 길리어드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자신의 서재로 가더니 두꺼운 책을 가지고 왔다.
표지가 화려한 용 가죽으로 장식된 고서였다.
책장 마다 인쇄된 것이 아닌 한 자 한자 성심껏 필사된 글들이 쓰여 있었는데, 그것은 반타블랙슨 가문 사람들의 이름과 간략한 업적이 적힌 가계도였다.
“아스틴, 혹시 싶어 말이지만, 우리 아이 이름말이야. 어떻게 지었으면 좋겠소.”
아노르인들은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선조들의 이름 중에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같은 가계에 비슷한 인물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아스틴의 이름도 두 번째 공작의 부인 이름을 물려받아 쓴 것이었고, 길리어드 또한 5대 이전 스칼라이 국왕의 이름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는 군주의 가문에서 내려오는 이름을 물려받게 되어있었는데, 아스틴은 이번만큼은 자신의 아이가 반타블랙슨 가에서 내려오는 이름을 물려받기를 바랐다.
반타블랙슨 가는 이 대륙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노르인 왕가였다. 유일한 왕족이었던 만큼 자신의 아이가 왕족 가문의 이름을 이어받는다는 건 큰 의미가 있었다.
사실 그녀는 길리어드가 아이에게 왕가의 이름을 허락해 주는 것이 참 고마웠다.
하지만, 그건 길리어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자신이 왕족이라고 하더라도 가문의 주인이 후계자에게 배우자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름을 붙여 주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계도를 살피면서도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열었다.
“정말 우리 가계에서 내려오는 이름을 써도 괜찮겠소? 난 그저, 걱정이 돼서, 당신이 그렇게까지 날 생각해 주진 않아도 좋은데.”
“부담되신다면, 우리 집안의 가칙대로 하죠.”
아이의 탄생이 두 국가의 축복도 되는 만큼 아스틴은 그 점을 고려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길리어드가 달리 생각한다면 그의 뜻대로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길리어드. 당신한텐 형제분들이 많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래. 내가 13남 12녀의 스물네 번째야.”
“어머, 많기도 해라.”
“많기야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쪼개어서 나누어 보자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지. 게다가 난 그분들 얼굴도 잘 몰라요. 내가 태어날 무렵 모두 돌아가셨거든. 모왕께서는 날 낳으셨을 때는, 주변에선 거의 노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다들 나를 귀하게 생각했소.”
아스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길리어드의 목을 껴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물다섯이라니. 왕과 국서의 사이가 아주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선왕께서 당신의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그 말에 길리어드의 안색이 조금 굳었다.
잔잔하게 가라앉는 눈빛에 아스틴은 의아해하면서도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들은 서로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별로 없다. 이럴 때를 제외하면, 굳이 꺼낼 만한 상황이 없었으니까.
어째서인지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꺼리는 듯한 모습에, 그녀는 그만 말을 돌리기로 했다.
“제 아버지는 말이에요. 당신도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성미가 상당히 강하셔서, 어머니가 꽤 고생하셨죠.”
“그런 것 치고는 당신은 안 그런 것 같은데. 집사에게 들었어. 당신은 아버님과 성격이 비슷하다고 말이야.”
“의외네요. 나보고 거칠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그, 그런 말이 아니야.”
“됐어요, 이미 늦었으니까. 그런데 여보, 배냇저고리는 어떻게 되었어요?”
길리어드의 입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아스틴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말없이 테이블 한쪽에 놓인 바구니를 바라보는 모습에, 그녀는 살며시 그것을 들고 열어보았다.
마치 식탁보처럼 생긴 배냇저고리가 담겨 있었는데 그녀도 마르첼에게 들어 상황은 알고 있었다.
길리어드가 입술을 비죽거리더니 말했다.
“굳이 칭찬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래도 내가 끝낼 거야.”
“알겠어요. 알겠어.”
아스틴은 마지못해 끄덕였다. 그러면서 도톰한 면사 위로 수 놓인 작은 검독수리의 문양을 살며시 쓸어 보았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검독수리의 날개가 기이한 모양으로 꺾이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흘끗, 창문을 쳐다보았는데, 격자의 창이 기묘한 모양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갑자기 발끝이 짜릿하더니 지면이 심하게 흔들리며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길리어드가 무어라 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귓가가 윙윙 울리며 억양이 커졌다가 낮아졌다. 아스틴은 다시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몸이 천근만근 점점 무거워졌다.
그 이상을 감지한 길리어드가 천천히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스틴, 그만 눕도록 해요.”
그리고는 허리끈을 풀어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었다.
하지만 아스틴은 자리에 누워서도 머리를 짚었다. 오심이 치밀어 오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갑자기 주변이 하얗게 타오르더니 눈동자가 제멋대로 위쪽을 향해 데구르르 뒹굴었다.
* * *
아스틴은 그로부터 사흘이 더 지나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가장 처음 마주한 것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시리스의 모습이었다.
“일어나셨군요.”
안도의 하면서도 걱정이 가득한 시리스의 모습에서 아스틴은 곧바로 눈치를 챘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조차도 지나치다고 여겨질 정도로 담담하게 물었다.
“…상황이 안 좋은 모양이지?”
“정확하게 결정된 건 아닙니다.”
“그래, 뭐라도 좋으니 말해 봐- 내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흔히 아노르인 여성들은 아이에게 자신의 생명력을 나누어 준다고 말하죠. 그런데 초산의 경우는 그 아이가 필요로 하는 힘이 모체의 신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데 필요한 힘보다 더 커지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는 모체가 버티지 못해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데.”
“가장 바람직한 방안은 수술해서 태아를 꺼내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요. 그렇게 되면 공작님의 생명은 보장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시리스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그녀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정신이 먹먹해 자신이 싫어질 정도로 감정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어딘가로 떠나 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짤막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리스를 내보냈다.
무어라 입술을 열다 닫기를 몇 번, 시리스는 말없이 묵례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이럴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스틴은 문이 닫히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째서인지 길리어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 아마 그도 충격을 받았을 테다.
가뜩이나 힘든 상황에 그녀는 길리어드가 슬퍼하는 모습까지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울지 말고 차분히 생각하자.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그녀는 가슴을 다독였다. 분명 울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손바닥이 축축하게 느껴졌다.
* * *
그날따라 하늘이 참 푸르렀다. 하지만 성안은 그을음이 묻은 것처럼 어둑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길리어드는 안채의 서재에서 담담히 생각에 잠기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아스틴과 마찬가지로 창백했다. 굳어 버린 모습이 마치 생기를 다 빨려 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듀랜트가 간단한 식사와 차를 가지고 왔다.
근처의 테이블에 내려놓긴 했지만, 그는 말없이 왕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며칠째 왕자는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공작이 사실상 부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지금, 다들 그에게 정신을 바로잡고 있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그는 두문불출 기사단이나 공작의 집무 대행을 맡지도 않고 공작의 옆에 붙어 있었다.
다들 그가 너무도 큰 충격에 빠져 상심해서 넋을 놓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듀랜트가 보기에는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길리어드는 내내, 마치, 잘 기억나지 않는 머릿속의 무언가를 헤집고 있는 사람처럼 창밖을 골똘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듀랜트는 이쯤이면 아무리 그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싶어 입술을 열었다.
“왕자님, 이제 공작님이 깨어나셨다고 합니다만- 그만 뭐라도 드시고,”
그 무렵 길리어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서재를 가로질러 구석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평소 그가 애용하는 무기를 보관하는 방이었다.
사면의 벽에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무기들은 전부가 1급 명장들이 만든 최상품이었다. 그가 하나하나 이름을 지어 주며 직접 모은 것들로, 그는 벽의 어딘가로 향하더니 커다란 가죽 가방을 들고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옆으로 따라붙은 듀랜트에게 길리어드가 입술을 열었다.
“아내의 상태는 어떤가.”
“이제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어딜 가시려고요.”
“……사냥.”
길리어드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듀랜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물론, 이해는 되었다. 길리어드는 조만간 전통적 풍습을 위한 사냥에 나서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마땅한 이야기란 말인가.
듀랜트가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길리어드는 가방을 벽의 한쪽 귀퉁이에 기대어 놓고는 녹회색 철제 상자에서 갑옷을 꺼내었다.
미스릴을 실처럼 가느다랗게 정련하여 한 올 한 올 꼬아 만든 것으로 마치 스웨터처럼 가벼웠지만 거대한 할버드로 내리쳐도 상처 하나 낼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한 물건이었다.
그는 그 위로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방염복을 걸쳐 입고 까만색의 코트를 껴입었는데, 듀랜트는 길리어드가 출전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완벽한 무장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탈의를 마친 길리어드가 가방을 꽉 쥐고는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 맨 채 천천히 서재를 벗어났다.
때마침 마르첼이 안채의 복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스틴이 깨어났다는 말에 그녀를 찾아왔던 것이다.
그가 미간을 옅게 찌푸렸다.
“부군, 어딜 가십니까?”
“사냥을 다녀오겠네.”
“예?”
듀랜트와 마찬가지로 마르첼도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내에게는 화룡의 심장이 필요해.”
그때 길리어드가 묵묵히 입술을 열었다.
화룡. 지상의 모든 드래곤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 그들의 심장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의 결정체였다.
마르첼은 당연히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 화룡의 심장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물론 그는 일단은 부군의 마음을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차분히 되물었다.
“……그러면 이렇게 가실 게 아니라 기사단이 움직여야 할 일입니다. 게다가 화룡이라니, 설마 성소에 봉인된 수티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길리어드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에 듀랜트도 마르첼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수티하는 대륙 최후의 화룡이다.
바에스트 숲 꼭대기, 성소에 봉인된 매우 강력한 용이었다.
게다가 바에스트 산이 어디인가. 온갖 마물들과 기이한 날씨와 현상들이 뒤엉켜 혼돈 그 자체인 장소였다.
혼자서 그 산에 올라가겠다는 건 자살을 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마르첼은 짤막하게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잠시 다녀올 거야. 그리고 자네도 있고 바르도 경이 있지 않나. 영지의 운영은 잠시 그대들에게 맡기지.”
길리어드의 말은 합리적이고 틀린 것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랬기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고요한 광기에 마르첼도 듀랜트도 섬뜩함을 느꼈다.
마르첼은 다시금 그를 설득했다.
“…그렇다고 해도. 심장을 먹는다고 해서 공작님의 상황이 좋아지실 거라는 확증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신성한 아노르인에게 용의 심장을 먹인다니. 저주받을 일입니다! 아무튼 정신 차리십시오! 듀랜트, 뭐 하는 건가, 부군을 말리지 않고? 자네도 한번 생각해 봐. 이게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그에 머뭇머뭇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듀랜트가 입술을 실룩이다 마르첼의 옆으로 다가가 길리어드를 마주하고 섰다.
“제 생각에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 용을 잡으려면 그만한 준비를 하셔야지요. 아무리 전하라고 하셔도, 혼자서 바에스트 산을 올라가는 것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성소에 봉인된 용을 죽이시겠다니요. 파장이 엄청날 겁니다.”
날카로운 질문에 길리어드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가슴 속에 차오르는 무언가를 한껏 가라앉히려는 듯, 이윽고 그가 되레 힘없는 목소리로 입술을 열었다.
“-날 말릴 생각은 하지 말게. 시간이 없어.”
그 말에 마르첼이 듀랜트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떻게서든 막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어쩌면 몸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네들 뭐 하는 거야!”
위엄 있는 목소리에 세 사람은 얼어붙었다.
마침 공작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침실을 방문한 녹스턴이 그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그날따라 잘 벼려 낸 칼날보다도 날카로워 보였다.
그 목소리에 마르첼과 듀랜트가 우선 길리어드를 붙잡고 있던 팔을 풀었지만, 길리어드는 그래도 진정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녹스턴이 옅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군, 진정하고 우선 침실로 가 보시게.”
* * *
길리어드는 침실 안으로 들어선 이후에도 한참 문가에 선 채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장막 아래, 아내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시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실제로 아스틴은 지금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어째서인지, 매분, 아니 매초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한마디를 하는 데도 평소와는 달리 힘이 없어, 입술에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길리어드. 당신인가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길리어드는 마치 이끌린 듯 아스틴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겨우 눈꺼풀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를 잔뜩 두려워하고 있는 얼굴이 그날따라 새삼 참 안쓰러웠다.
“얼굴이 홀쭉하군.”
“…당신만 할까요.”
사실 지금 불쌍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참 그놈의 마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녀는 이 순간, 자신보다도 더 아프게 보이는 그의 표정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미소를 지었다.
길리어드는 그것을 따라 해 보려는 듯 웃으려고 하면서도 끝끝내 눈웃음까지는 따라 하지 못했다.
“내 곁에 있어 줘요.”
“당연히 그래야지. 항상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내 말은, 가지 말라는 거예요.”
바깥에서의 소동은 이미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길리어드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이 순간에도 제 능력을 발휘한 귀가 참 특별하게 느껴졌다.
역시 토끼가 따로 없다니까. 그는 속으로 슬픔을 삼켰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조심스레 입술을 열었다.
“이런 거 물을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아스틴, 당신은… 내가 원망스럽지도 않았나? 결혼하기 전에 당신도 나에 대한 소문은 알고 있었잖소. 그러면 나를 한 번 정도는 불길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여보, 사람들이 퍼뜨리는 소문 중에선 정상적인 게 없어요. 그리고 그런 걸 무서워하면, 이 자리를 지킬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저한테도 아마 특별한 소문이 돌고 있을 텐데, 나를 두려워했나요? 당신이?”
길리어드는 고개를 흔들었다.
태연하고 꿋꿋한 그녀의 목소리에 어째서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째서일까,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에서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아니지, 나는 늘 당신이 너무 사랑스러웠어. 매분, 매초, 지금도.”
아스틴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평생 남편을 울리는 일은 없게끔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 같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남편을 결국 말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그녀는 허락할 수가 없었다.
“가지 말아요. 만일 내가 어떻게 된다면, 당신이 이 집안을 이끌어 나가야 해요. 친척 아이 중에서 양자를 들이고, 그 아이를 후계자로 삼아서요.”
“그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세상엔, 나밖에 할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지.”
대체 왜 이렇게 자신하는 걸까. 그녀는 걱정스레 길리어드를 올려다보았다.
고독한 청람색 눈동자가 어째서인지 비정할 정도로 차갑게 보였다.
생기도 빛도 잃고 무언가를 담담히 체념하고 있는 무장의 얼굴. 전쟁을 각오한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더는 그를 말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답 없이 눈을 감는 모습에 길리어드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살며시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특유의 향과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아내는 한 영지를 다스리는 군주씩이나 되면서도 남편이 이토록 머리카락을 마음대로 만지는데 제재를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허락도 없이 꼬거나 묶는 것만은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뭐랄까, 거기엔 그녀 특유의 알 수 없는 고집이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지배력, 그것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느꼈던, 일종의 특별한 감정과도 관계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아스틴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씻지 않아 때에 찌든 얼굴과 빨지 않고 오래된 가죽옷에서 느껴지는 군내, 그런데다가 목덜미에 화살이 박혀 있는 사슴을 매고 있는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사냥에 성공한 늑대였다.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점심을 드시지 않으시겠어요?’ 하고 명랑하게 물으면서 다가오는 모습에 그는 모순되게도 당근을 문 채로 나를 쫓아오시라 귀를 까닥이고 있는 작고 하얗고 예쁜 토끼를 떠올렸다.
그건 알고는 있지만 느껴 본 적은 없던 감정이었다.
그 마음의 정체가 어이없게도 사랑이라는 간단한 답으로 드러나고 말았을 때, 그는 갑자기 속이 텅 비면서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 들어올 수는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되자 높다란 왕좌도 그토록 자랑스럽다고 생각해 왔던 드넓은 국토와 강인한 백성들마저도 더는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는 그런 것들에 탐욕을 느끼지는 않았었지만, 객관적인 가치까지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이성이 흐려진다는 사실은 참 무서운 일이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위대한 왕좌와 펠로데의 부군 자리. 물론 고민은 딱히 되지 않았다.
그래서 펠로데로 왔다. 나라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
그러한 선택이 이러한 상황을 불러왔다. 물론, 과거에도 앞으로도 후회하지는 않을 거였다. 그는 행복했다. 아내를 위해 죽음을 각오할 수 있어서 말이다.
그는 이만 머리카락을 놓았다. 그리고는 한쪽으로 가지런히 해서 내린 후, 다시금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마지막 인사를 고하듯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그가 밖으로 나섰을 때, 어째서인지 복도는 조용했다.
안채를 벗어나 자신의 마구간으로 향하려던 무렵이었다. 세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듀랜트는 이미 부케를 끌고 있었는데, 말 투구를 씌우고 안장을 바꾼 모습이었다.
흔히 부케가 전투를 치를 때의 모습이었다.
듀랜트가 다소 걱정스레 물었다.
“…그래서, 정말 혼자 가실 겁니까?”
“그래. 자네는 내가 가면 서머울프와 함께 내가 지도하던 기사들을 맡아줘야 해. 내가 부재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문제가 되는 일이 없도록.”
“-알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마르첼이 입술을 열었다.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불만보다는 걱정으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가 길리어드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지금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얇고 기다란 유리병이었다. 유리병의 안쪽에서 희미하게 푸른색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것은 빙하의 생령으로 화룡들의 강력한 화마를 억제하기 위해 사로잡아 길들인 얼음의 생령이었다.
펠로데 또한 원래 용잡이 일가에서 시작했던 만큼 드래곤 사냥을 위한 도구 정도는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잠시간 서로를 쳐다보았다. 며칠 전과는 달리, 그들의 시선에는 묘한 동료애가 서려 있었다. 길리어드가 나직이 입술을 열었다.
“만일 일이 좋지 않게 끝난다면, 내 자리를 대행하는 건 자네야.”
“그렇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마르첼이 단언했다. 그 무렵, 시리스가 길리어드의 앞에 거대한 자루를 내밀었다.
“치료제는 있는 대로 담았습니다만. 부군, 용에게 입은 상처는 어떤 것으로도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 알고 계시지요?”
“그래.”
“모쪼록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이건 소환 스크롤입니다. 만일의 경우, 펠로데로 돌아오실 수 있을 겁니다. 주의해서 사용하십시오.”
길리어드는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그것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로, 겉에 덕지덕지 수많은 고대어가 새겨진 부적이 붙어 있었다.
당시 스크롤은 매우 실력이 뛰어난 소수의 마법사만 만들 수 있었고, 제작하는 데 오랜 기간이 걸렸다.
그래서 아무리 현자급의 마법사인 시리스라고 해도 줄 수 있는 스크롤은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길리어드에게는 때마침 딱 필요했던 물건이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부케에 올랐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성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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